[사장슌] 폐허의 증언

2020. 5. 10. 22:17 from 03/2

 

금빛 눈이 담아내는 세상은 아득히 멀다. 이 세상엔 없는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맹금의 이름을 가진 청년은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기로 한 듯, 높은 곳에 올라가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무얼 보고 있냐는 질문이 날아들 때마다 청년은 침묵했지만, 청년을 전사로 부리는 사내는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이 어디인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죽어버린 땅. 이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을, 이국의 도시. 청년은 폐허에서 왔다. 평화로운 도시는 침략군이 밀려들면서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고 했다. 이름을 이야기해봐야 아는 사람이라곤 사내뿐인 고향을 청년은 홀로 품고 있다.

기억으로만 남은 고향을 보는 청년에게, 사내는 소리 없이 다가섰다. 가만히 두면 몇 시간이고 미동도 없이 허공에만 시선을 둘 것이다. 고향을 생각하는 것까지 막을 생각은 없으나, 청년이 언제까지나 표류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또 하늘을 보고 있군, 쿠로사키. 슬그머니 말을 걸자, 청년의 시선이 바로 사내에게로 향했다.

지휘관께서 무슨 일로.”

심드렁한 목소리에 사내는 웃었다.

바람이 찬데 들어갈까.”

괜찮은데.”

네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아무래도.”

옆에 앉아서 말해.”

잠깐 끌어온 시선은 다시 하늘로 향한다. 자신에게 익숙한 폐허만을, 여기선 결코 닿을 수 없는 장소만을 그리는 것이다. 청년은 이곳 사람에게 지독하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희망을 찾아 고향을 떠난 지 제법 되었는데도, 여러 사람과 얽혔는데도 이국에서 만난 이들은 전부 타인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의 시간은 과거에 머물러, 현재의 것이라곤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스물도 되지 않은 나이에 모든 것을 잃은 청년이니, 그 지독한 경계를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사내라면 더욱 자격이 없다. 청년의 황폐함은 전쟁의 유산이고, 전쟁은 사내의 아비가 낳은 가장 끔찍한 자식이었으니. 사내는 제 성씨를 흘릴 때마다 청년의 눈에 걸리는 혐오를 안다. 아비를 적대하기에 사내는 청년의 지휘관이지만, 사내의 몸에 흐르는 피는 청년에겐 악마의 흔적이었다.

……과거의 이야기를, 할까.”

그럼에도 사내는 청년 곁에 앉아 부러 과거를 들먹인다. 그가 집중하는 것은 오로지 죽은 시간뿐임을 알기에. 과거에 붙들려갈 것만 같던 청년은 그제야 사내에게 제대로 관심을 보인다.

과거?”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는, 살아온 배경을 공유하는 거지. 내가 왜 아카바 레오를 적대하게 되었는지는 이전에 말해준 적 있을 터다. 그때 넌 네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레지스탕스 때의 이야기는, 어때?”

이제 와서 이야기 값을 받겠단 건가.”

싫다면 하지 않아도 돼.”

잠깐 관심을 끌기 위해 흘린 이야기였을 뿐이다. 마음을 닫아건 청년이 타자, 그것도 침략자의 아들에게 가장 괴로운 시간에 대해 털어놓을 이유란 없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사내가 이번에도 청년의 세계에 들어설 수 없을 거라고 체념한 때, 청년의 입술이 열렸다.

하트랜드는.”

그것은 청년이 홀로 삼키고 있던 고향의 이름이었다. 폐허만큼이나 텁텁한 목소리로, 청년은 느릿하게 말을 잇는다.

잿빛이야.”

눈꺼풀이 느리게 닫힌다. 청년은 이제 하늘을 보지 않는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시선을 두고서 보이지 않는 고향을 그리는 대신, 눈을 감고 기억에 잠기는 것이다. 잿빛이야. 청년은 그 말을 반복했다. 나는 중심지에 서 있어. 폭약 냄새가 나. 눈앞이 흐린데, 하트랜드에서 가장 높이 솟았던 탑이 보여서 위치만 대강 알겠어. 그 탑도 윗부분이 날아가서 이젠 절반쯤만 남았지만. 숨이 막히는데 걸음은 옮겨야 해. 발에 무언가 밟혀도 내려다보지 않아. 아마도 사람의 몸일 거야. 저번에, 이웃집 아저씨를 본 기억이 머리를 스쳐.

기묘하게도 청년의 말은 현재형이다. 과거를 이야기하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 과거에서 표류하고 있는 듯 군다. 폭격이 지나가면, 시신이 많아. 제대로 된 시신은 운이 좋은 거야. 아저씨를 바로 알아봤던 건 머리가 보였기 때문이거든. 조각난 팔과 다리가 굴러다녀도 누구의 것인지도 몰라. 내가 밟는 게 무엇인지 보고 싶지 않아. 여자애의 시신을 보면 미쳐버릴 것 같아. 내려다보지 마, 쿠로사키. 사내가 끼어들었다. 청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정면을 보고 걷는데, 눈앞이 온통 잿빛이야. 그래서 윗부분이 날아간 탑에, 제일 위쪽에 놓였던 구조물이 무슨 색이었는지를 생각해. 하트랜드란 이름에 맞게 하트 모양의 구조물이 있었는데, 무슨 색이었더라. 빨간색? 그래, 빨간색이었을지도 몰라. 나는 빨간색의 하트가 붙어있었던 탑 쪽으로 걸어가. 사내는 청년의 닫힌 눈꺼풀을 본다. 얼굴에는 묘한 표정이 걸려있어, 꼭 꿈을 꾸는 것만 같다. 눈을 감고 몽롱하게 쏟아내는 말도 회상을 흘리는 것이라기보다 최면의 부산물처럼 느껴진다. 과거의 기억이 그의 무의식까지 깊게 파고든 탓이리라.

그는 왜 그 시간에 홀려있을까.

의문의 답을, 사내는 이미 알고 있다. 청년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은 지옥에서 벗어났고, 주변엔 함께 저항군으로 싸웠던 동지 대신 정예병 동료들이 있으나 침략자는 아직 그의 고향을 휩쓸고 있다. 고향에 대한 그의 기억도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갇힌 시간을 끝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탈자로서의 책임이다. 청년의 기억에 남은 것보다도 처참한 폐허로 돌아가, 침략자를 몰아내기 전까지. 전쟁에 삶이 묶인 청년의 시간은 흐를 수 없다.

사내는 청년의 입술을 닫고 싶어졌다. 혹은 자신의 귀를 막아, 청년이 담아내는 과거를 외면하고 싶어졌다. 그럼에도 사내가 얌전한 청자로 남아있기로 한 건, 청년을 과거로 떨어트린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론 스스로를 병기처럼 취급하고 타인에게도 그렇게 비친 청년이 그나마 인간으로 느껴질 때가 지금이어서, 이기도 했다.

사내가 침묵하자, 청년은 텁텁한 목소리를 계속 흘렸다. 걸음을 옮겨. 총의 무게에 조금 안심해. 어쨌든 그건 아카데미아 놈들이나 내 쪽이나, 어느 쪽이든 숨을 끊어줄 수 있잖아. 내 쪽?’ 한 번쯤은 관자놀이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겨보는 걸 상상하는데……, 목적지야. 아카데미아 놈들이 점령했던 곳. 이런 곳은 놈들이 남기고 간 게 있을까 기대하게 되거든.

이런 곳이라면, 어쩌면. 청년이 침을 삼킨다. 뻔히 아는 과거 속에서도 청년은 명백히 긴장하고 있다. 무엇을 찾지, 쿠로사키? 포로. 포로라면, 네 동지들인가? 입술은 열려있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약간의 침묵 끝에 청년은 뜻 모를 말을 흘린다. 처리했어. 루리 또래네. 누가? 아카데미아 놈이지. 하나 숨어있었어. 쏘고 보니 루리 또래야. 짜증나게. 기분 나빠서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포로를 찾으러 왔는데, 전부 쓰러져 있군. 여자애가 있어. 여자애의 시신을 보면 미칠 것 같은데. 속이 울렁거려. 하필 검은 머리카락이야. 시신을 뒤집고 싶지 않아. 이 애는. 청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돼, 쿠로사키.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의 청년이 무엇을 찾는지, 사내는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청년의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것. 전장에서 잃고 아직도 찾지 못한,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를 존재. 그건 네가 찾는 사람이 아냐. 달래려 꺼낸 말을 들었을까. 긴장으로 거칠어진 청년의 숨소리가 차차 안정을 찾았다. 위험하다 싶으면 청년을 현실로 끌어올 참으로 사내가 속으로 60을 세었을 때.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청년은 말을 이었다. , 귀걸이를 안 했군. 머리도 짧아. 루리가 아니구나.

사내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청년이 이 세상에 섞여들지 못하는 건 누구도 그의 심연을 이해할 수 없어서이기도 하다고. 다른 전사들 앞에선 청년의 이해자인 척 굴긴 하지만, 사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청년에게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고 그의 삶에 조금 더 관여할 뿐. 청년이 눈과 귀에 담은 세계를, 사내는 제대로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청년의 폐허는 너무도 처참하다.

그런 세계를 이해하려 파고들다 보면 청년의 과거를, 가둬둔 시간을 터트려 그를 과거에 익사시킬지도 모른다. 하지 못하는 일에 도전하기보다는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이 낫다. 성공만을 겪어온 사내는 타인의 심연에 뛰어들어줄 수는 없지만, 빛을 비춰줄 수는 있다. 루리가, 아니구나. 젖어든 목소리로 반복하는 청년에게, 사내는 슬그머니 말을 건다. 이제 바깥으로 나와야지, 쿠로사키. 동생이 죽지 않았단 걸 확인했잖아.

바깥으로…….”

그래. 원군이 오기로 했으니 기지로 돌아가는 거야.”

누가 레지스탕스를 위해 싸워줘?”

불신 섞인 목소리에 사내는 간결하게 답한다.

랜서즈.”

아카데미아를 막고 전쟁을 끝내기로, 약속했잖아.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건, 사내가 흘린 이름이 바로 그가 결성한 정예병의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정예병을 이끌고 아비에 맞선다는 것은, 아비가 키워낸 침략군을 쓰러트린다는 것. 세상에서 전쟁을 몰아내고, 청년 같은 이들에게 평화를 돌려주겠다는 것. 사내와 그의 전사들이 언젠가 청년의 고향으로 향하는 건 이미 결정된 일이다. 그곳에서 외롭게 싸우는 저항군은, 랜서즈와 힘을 합치게 될 것이다.

랜서즈. 단어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청년은 사내의 말을 따라했다. 과거만을 바라보던 남자는 현재의 이름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만족해 사내는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래, 랜서즈. 곧 하트랜드로 진입할 거야. 레지스탕스를 도울 거고. , 쿠로사키. 지금쯤은 기지로 가고 있겠지.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아?

그때, 닫혀있던 눈꺼풀이 열렸다. 청년의 금빛 눈은 사내를 담아내더니, 이내 씁쓸한 감정을 비추었다. 단정한 얼굴에도 미지근한 웃음이 걸린다. 그것은 기쁨이나 설렘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어린아이의 얕은 수를 못 본 체 해주는 어른의 포장에 가까웠다.

걸려들 뻔했군.”

의미를 모르겠어, 쿠로사키.”

덕분에 그쪽이 무엇을 꿈꾸는지는 알게 되었지만. 지휘관께선 의외로 순진한데.”

내가 꿈에 빠져있다고 생각하나?”

허튼 생각 하지 마. 그쪽의 역할은 헛된 희망을 불어넣는 게 아니라, 전사들을 제대로 지휘해 승리하는 거니까.”

현실을 일깨워주는 목소리는 차가웠다. 사내는 저와 비슷한 나이의 청년에게서, 불행이 쌓은 냉정함을 읽는다. 청년이 아무 일도 없었던 체 일어나 짐을 챙기는 것을 보면서도 사내는 멍하니 자리에 묶여있었다.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상대가 자신의 수를 뻔히 눈치챘다는 것에 순간 힘이 쭉 빠진 탓이다. 청년은 본디 황폐한 인간이었으나 사내는 실패가 낯선 사람이었으므로. 지휘관에게서 돌아선 청년은 먼저 자리를 뜨면서 무심하게 말을 흘렸다.

오늘은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야겠어. 그러면 아카바 레이지의꿈에서 깨기 전에 잠들 수 있겠지.”

?”

속아주는 건 이번뿐이야. 난 다른 놈들처럼 희망에 매여 살 수 없으니까.”

의미심장한 말에, 사내는 청년이 눈을 뜨기 직전 본 풍경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현재진행형의 과거에, 사내가 속삭인 현재의 빛이 잠깐 끼어든 것이 분명했다. 아직 청년이 동지로 인정하지 않은 정예병이 그의 시야에 들어오고, 어쩌면 세상의 잿빛을 걷어주었을지도 모른다. 꿈에서 깨기 전에 잠들겠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청년은 적어도 하룻밤 동안엔 사내가 그려낸 꿈에 빠져있을 수 있으리라. 흩어지지 않게 꽉 틀어쥐고, 그대로 의식을 꺼트려, 잠깐은 희망에 취하는 것이다. 사내는 빠르게 떠나는 청년에게 무어라 답하는 대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청년의 폐허는 타인이 끌어안기엔 너무도 깊었으나, 청년이란 인간 자체를 삼키진 못했다. 전장에 뛰어들며 스스로를 병기로 취급해온 청년이 때로는 희망에 속아주고 때로는 인간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그 증거. 청년이 사내를 떠나지 않는 이상, 사내는 언젠가 청년의 전쟁을 끝내게 된다. 전쟁과 함께 탄생한 청년의 폐허는 종전과 함께 조금씩 사그라지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사내는 먼 하늘에 시선을 얹었다. 청년이 폐허를 그리던 곳에, 사내는 화려한 미래도시의 풍경을 그려본다. 사내가 자신의 전사에게 돌려주기로 약속한, 과거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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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

[유토슌] 숨바꼭질

2020. 5. 9. 17:31 from 03/2

 

폐허가 된 도시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까지나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뼈대만 남은 건물, 군데군데 폭격의 흔적이 선명한 잔해 더미. 보통은 그 앙상한 풍경이 생존자의 흔적을 바로 노출시키리라 생각하겠지만, 잔해인 체 섞여들기만 하면 그만큼 안전한 은신처도 없었다. 적에게 포착되는 것보다는 찢기고 갈라진 건물이 무너져 인간을 덮치는 일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기지로 돌아오기 전 폐건물을 군데군데 훑곤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무너진 곳마다 다니는 건 너의 습관이다. 위험할지도 모른단 말을 한 번도 제대로 듣지 않는 너는 지독하리만큼 폐허를 뒤지곤 한다. 너는 언제나 술래였고, 네가 찾는 이는 지옥이 된 도시 어디에도 없다. 알고 있으면서도, 어쩌면 알고 있기에 너는 필사적이다. 언젠가는 그 끔찍한 숨바꼭질이 끝날 거라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실종된 누이를 찾아내는 것으로. 혹은, 아마도 적에게 넘어갔을 누이를 구해오는 것으로.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너는 숨바꼭질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시해서, 혹은 시간을 들여 사람을 찾는게 싫어서가 아니었다. 숨바꼭질이라는 놀이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평소의 네 모습은 사소한 일에 두려움을 품기는커녕 불길에 먼저 뛰어드는 사람이었으니, 만일 주변에 그 이야기를 흘렸어도 아무도 믿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누이가 증언했다면 믿을 수밖에 없다. 침략군이 밀려들기 몇 개월 전, 너의 누이는 오빠의 비밀을 가볍게 흘렸다.

[있잖아, 사실 오빠는 숨바꼭질을 무서워해.]

[무서워한다고?]

[안 믿긴다는 눈치네. 진짜야.]

생각하니 새삼 우스운 듯, 너의 누이는 오빠를 닮은 얼굴에 웃음을 걸쳤다.

[내가 열 살 때였던가, 열한 살이었던가. 오빠랑 숨바꼭질을 한 적이 있었어. 그 전까지 숨바꼭질을 하면 다들 날 너무 쉽게 찾아내서, 그 날은 술래를 골려먹고 싶어졌지. 옷장에 들어갔고, 몇 시간씩이나 버틴 끝에 잠이 들었어.]

[……슌이 찾았어?]

[물론. 난리가 났었지만. 나를 안고 나온 오빠는 울진 않았는데, 그렇게 겁먹은 얼굴은 처음이었어. 화를 내는 대신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하더라고. 없어지면 안 돼. 루리. 숨더라도 없어지면 안 돼. 내가 찾을 수 있는 곳까지만 가는 거야.]

남매의 세계엔 오래도록 둘뿐이었다. 어려서부터 너는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 동생의 보호자여야만 했다. 놀이라 해도, 그때 이미 열서너 살의 나이었어도, 그 날의 일은 너에게 큰 공포로 남았을 것이 뻔했다. 그 후론 숨바꼭질 얘기는 쉽게 꺼낼 수 없었어. 오빠가 바로 그때처럼 겁먹은 얼굴이 되기에. 오빠는 그 날 이후로 잔소리가 많아진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너의 누이는 옛 이야기를 마쳤다.

숨바꼭질이 놀이가 되려면 몇 가지 약속이 필요하다. 술래는 참여자를 모두 찾아내야 하고, 나머지 참여자는 술래가 찾을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술래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버리면, 더 이상 놀이일 수 없다. 너의 삶은 누이가 이 도시에서 완전히 증발한 후 끝나지 않는 숨바꼭질로 바뀌었다. 그것은 놀이인 적 없었던, 고통스러운 벌이다. 너의 노력만으로 헤어나지 못하는 비극이다. 광인처럼 잔해를 뒤지며 누이의 흔적을 찾아도,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절망뿐.

그것을 알기에 언젠가부터 너의 시야에서 자주 사라지게 되었다. 네가 돌아올 때쯤이면 슬그머니 숨어서, 너에게 또 다른 숨바꼭질을 시키는 것이다. 그 아래엔 얄팍한 욕망이 깔려있으나 네게 고백할 일은 없을 것이다.

누이를 찾는 네 모습이 술래에 가깝다고 생각한 어느 날, 이전에 들었던 너의 공포가 머리를 스쳤다. 돌아오지 않는 동료가 있으면 몇 시간을 들여서라도 찾아오던 네 모습도 눈앞에 그려졌다. 희한하게도 그 순간 너의 강박이 마음에 들었다. 네가 찾아내는 대상에 묘한 질투마저 생겼다. 생존자들 중 가장 강한 축에 들었던 네가, 유일하게 약해지는 때가 바로 술래가 될 때라는 점 때문인지.

시야에서 사라지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반드시 찾게 된다. 상대가 정말로 위험한 곳을 헤매는 것인지 일부러 몸을 숨긴 것인지는 너의 고려 사항이 아니다. 너는 언제나 술래였고, 네가 찾게 되는 사람 중 하나는 벌써 몇 번이고 고의로 너를 불안에 떨어트리고 있다. 물론, 너는 그 심술궂은 참여자를 끝까지 찾아낼 것이다. 몇 번이고 저를 애태우는 것에 원망 한 번 품지 않고서, 찾아내었다는 것에 들뜰 것이 뻔하다.

숨바꼭질의 법칙을 지켜주었으니까.

무너질 것만 같은 벽에 기대, 귀만 열어두고 있다. 보통 사람보다 거칠고 급한 너의 발소리가 귓속을 파고드는 순간만을 기다리며. 너는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까. 얼굴에 드리운 두려움은 얼마나 짙을까. 네 약함을 상상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평소의 네가, 꺾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기에 더욱. 무장한 적을 섬멸하고 모두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너는 아군의 부재에 아이만큼 약해진다. 유일무이한 친우를 찾아야 할 때는 거의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상상했을 때 너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숨바꼭질의 끝이 보이자, ‘나 여기에 있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네 습성을 알기에 품는 심술이다. 그러나 너에게 보다 큰 감격을 안겨주고 싶어, 침묵을 지킨다. 과연 오래지 않아 너는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금빛 눈에 기쁨이 어린다.

찾았잖아. 유토.”

네 목소리가 안도감으로 부드러워지는 걸 느낄 때, 야릇한 희열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온다.

미안. 기지에 돌아가려다 잠깐…….”

오래 찾아다녔어? 순진한 체 눈을 굴리며 묻는다. 숨바꼭질을 꽤 오래 끌었지만, 네가 투정을 부릴 리 없다는 걸 안다. 유일무이한 친우라면 상대의 패턴쯤 속속들이 아는 게 당연하다. 너는 안도감에 취해 상대의 속내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아니, 괜찮아.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됐어. 예상대로 너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제법 걱정해주는구나.”

당연하지. 아카데미아 놈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언제나 네게 돌아갔잖아.”

나는 사라지지 않아. 덧붙인 말에 네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걸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위험하니까, 정탐할 때 아니면 무조건 기지에 있어.”

너도 위험하면서. 같은 말을 삼키고서 고개를 끄덕인다. 어린아이를 대하듯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피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야만 너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네가 보호할 수 있는 것만을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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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

[데니스+여슌] 말라붙은 독

2020. 3. 31. 22:58 from 03/1

 

여자는 쓰러진 청년에게 올라타 그 목을 양손으로 감쌌다. 청년은 체념한 듯 아무런 저항도 없었지만 여자는 그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상대의 목숨을 쥐고 있다는 것만 선명히 느낄 뿐이다. 이럴 때 그녀는 상대의 숨을 끊어버리는 온갖 방법을 상상한다. 유감스럽게도, 어느 것도 짜릿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 청년은 죽음으로도 그녀의 삶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 손 안에 쥔 목숨을 끊어버리지 않는 것은 그래서였다.

청년이 저항하거나 목숨을 구걸하기라도 했으면 약간은 보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청년은 저렇게 쉽게 포기하고 만다. 삶도, 용서를 구하는 것도. 안 해? 제단에 놓인 제물처럼 죽음을 기다리던 청년이 물었다. 여자는 그 괴상한 물음에, 목을 감싸던 손가락을 살짝 떼어내는 것으로 답한다.

나를 무대에서 끌어내릴 때까진 독기에 차 있었는데.”

시시해졌네, 쿠로사키도. 싱글거리며 덧붙이는 말은 이제 여자를 흔들지도 못한다. 그녀는 청년의 나긋한 공격에 이미 무뎌졌으므로.

큰 목적은 이뤘잖아. 너를 망가뜨리는 것.”

여자는 무심하게 받아친다. 그녀의 손에 청년은 추락했다. 그 후 청년은 모든 의욕을 잃고 그녀의 은신처였던 이곳에 틀어박힐 뿐. 청년을 완벽하게 무력하게 만든 것만은 삶에서 몇 없는 성공이었다.

그런데도 우리의 관계는 끝이 안 났네.”

처음부터 어긋나서 끊어지기도 힘든 모양이야.”

이렇게 오래도록 어긋날 거였다면 쿠로사키 쪽 사람들은 모르는 게 나았지.”

청년의 말에 여자는 웃었다. 그런 말을 청년이 먼저 입에 올릴 줄은 몰랐다. 그와 얽히지 않은 세계를 얼마나 상상했는지. 청년이 고향에 침투하지 않은 세계, 동생이 그의 수작에 휘말리지 않은 세계, 최소한 그와 마주치지 않은 세계를 바랐다. 청년이 없었다고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와 얽히지 않았다면 이렇게 쟁그라운 것만 남진 않았으리라. 타다 만 증오와 얄팍한 냉소, 고칠 수 없는 관계까지.

모든 것의 시작은 청년이었는데, 어긋난 관계에 투정을 부리는 것도 청년이었다. 청년의 대단찮은 비겁성을 새삼 떠올린 여자는 그를 비꼰다.

하트랜드를 떠나기 전에 나까지 처리했으면 깔끔했을 텐데. 네 알량한 양심으론 무리였을까.”

나는 하트랜드에서 최소한의 역할만을 하고 싶었지.”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악역이고 싶었던 거야.”

스스로를 가여워하는 사람의 죄악감이란 얼마나 얄팍한지. 악행에 소극적이었다는 말은 피해자 앞에서 얼마나 기만적인지. 훤히 아는 여자는 청년에게 별로 자비롭지 않다. 그를 비난하는 대신 그의 속내를 짚는 것이다. 지나가는 듯이, 웃으며.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루리 양을 닮았어. 정말, 다른 부분은 하나도 안 닮았는데.”

과연 청년은 동요했다. 사라진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여자를 흔들고 싶은 것이다. 그녀가 잃은 동생을 들먹여서. 자신의 죄이자 그녀의 가장 깊은 절망을 파헤쳐서.

청년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그녀의 감정이 거의 말라붙었다는 것이었다. 청년 때문에 황폐해진 나머지 그녀는 감정을 소모하는 법을 잊었다. 한때 그를 향해 타올랐던 증오도 분노도 퇴색되고 말았다.

그래서, 어때?”

여자는 분노로 그의 목을 조르는 대신 물었다. 물기 없는 목소리로.

나는 루리처럼 너에게 괴로운 존재야?

뒷말이 머리를 쟁쟁 울린다. 언젠가부터 도발조차 먹히지 않는 그녀는, 도리어 청년에게 침투하는 독이 된다. 청년은 그녀 때문에 무너지고, 쓰러지고, 일어서지 못한다. 날름거리는 혀가 독사의 그것 같다고 생각하며 청년은 입을 뗀다.

. 그래. 너는 내 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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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조] 생일은 모두 함께

2017. 3. 10. 16:33 from 03/2

 

진열된 케이크를 신중하게 살핀다. 온갖 색의 크림에 장식까지 얹은 케이크에 둘러싸인 청년은 그 중 가장 괜찮아 보이는 것을 고르려 가게 안을 몇 번이나 맴돈다. 긴 고민의 끝에 청년이 점원에게 가리킨 것은 가장 화려하고 큼직한 케이크였다. 처치 곤란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잠시 머리를 스쳤으나, 청년은 자신의 선택을 바꾸는 일은 없었다. 가까운 사람의 생일을 위한 케이크였다. 조금 무리해도 좋았다.

초는 몇 개 드릴까요?”

점원은 케이크를 포장하며 물었다. 청년은 케이크를 받을 이가 몇 살인지 헤아리다 그만두었다.

. 초는 괜찮아요.”

어차피 초를 꽂을 일은 없었으므로, 청년은 초 없이 포장된 케이크만 받아 나왔다. 오늘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남매의 생일. 며칠 전부터 청년은 오늘을 위해 시간을 비워두고, 남매를 위해 무엇을 준비할 것인지 고민했다. 일 년 중 하루. 12월 말의 어느 날. 소중한 사람의 생일은 몇 년을 챙기는 사이 청년에게도 특별한 날이 되었다. 한 사람의 생일만이어도 특별할 텐데, 두 사람의 생일이었다. 청년에겐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날이다.

예전부터 그와 함께했던 남매는 꼭 같은 날 생일을 챙겼다. 쌍둥이도 아닌데 왜 같은 날이냐고 물으면, 그 중 하나가 비슷한 날짜니까하고 대답하곤 했다.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성탄절을 며칠 앞둔 날. 그것이 남매가 둘의 생일로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 날이면, 그때는 소년의 나이였던 청년은 남매와 함께 온종일 놀러다니며 세 사람만의 날을 즐겼다. 저녁쯤 되면 남매는 미리 준비한 케이크를 가져와 생일을 기념했다.

다만 남매는 케이크에 초를 꽂지는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케이크에 누구의 나이에 맞게 초를 꽂아야 하는지 답을 내긴 어려웠을 것이다. 나이를 합산해서 꽂을까 생각하기도 했거든. 근데 그러면 우리, 나이 너무 많은 것 같잖아. 동생이 장난스레 말하면 오빠가 거든다. 13에다 16 하면 29 우리 아직 성인도 아니라고? 세 사람은 깔깔댔고, 더 이상 초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 없이 케이크를 잘라 나눠먹었다.

그들이 한꺼번에 생일을 챙겨야 했던 이유를, 청년은 나이가 들면서 눈치채게 되었다. 두 사람의 생일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로 생일을 챙겨주고 싶어도 정확한 날짜를 알지 못하는 처지에서 두 사람은 어떻게 생일을 기념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 결과가, 같이 챙기는 것. 기억에 없는 생일을 마음대로 만들어 챙기는 것이 된 셈이다. 태어났음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날짜가 언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진짜 생일이 언제인지 따위는, 남매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으리라. 물론 비밀을 알아챈 청년에게도 남매의 생일은 이 날 뿐이었다.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생일 케이크를 챙긴 청년이 향한 곳은 남매의 집이 아니라 자신의 집이었다. 남매의 집은, 이제 남아있지 않다. 근처에 가더라도 남매를 만날 수는 없다. 아니, 어디에서도 그들을 만날 수 없다. 생일을 기념하는 것은 그 혼자뿐. 청년은 상자에서 케이크를 조심스레 꺼내고는, 근처에 포장한 선물을 놓았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이지만 직접 전할 길은 없다. 지난 수 년, 청년이 챙긴 남매의 생일은 꼭 이런 식이었다. 주인공은 없고, 준비하는 사람만이 있는 생일.

남매는 이 세상에 없다. 그는 언젠가부터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생일을 챙기고 있다.

살아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청년은 그것이 언제나 괴롭다. 그들은 분명 존재했지만 세상에선 없는 사람이 되어있다.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청년밖에 없고, 때문에 이 상황에 괴로워하는 것도 그 하나밖에 없다. 살아오면서 가장 소중했던 사람들은 그의 머릿속에서만 실재한다.

수 년 전, 세상이 파멸했다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사라졌다. 아마 두 사람은 평화의 제물로 쓰였을 것이다. 그들이었던 것이 세상에 고루 흩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들과는 만날 수 없다. 평화를 찾은 세상에서 모두 함께하고 싶다는 세 사람의 소망은 결국 반만 이루어졌다. 혼자 돌아온 청년은 한동안 광인처럼 남매를 찾아 헤맸지만, 남매가 있었단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과 맞닥뜨릴 뿐이었다.

그 해가 넘어가기 직전에야 청년은 포기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어딘가에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12월 말이었고 성탄절을 앞두고 있었다. 휴일이 가까워져 들뜬 사람들 사이에서 청년은 문득 기억해냈다. 언젠가부터 매년 그 즈음이 되면 챙기던 날을. 두 사람의 생일을. 청년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케이크를 사고, 누구도 뜯지 못할 선물을 준비했다.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남매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청년은 여전히 생일을 챙기고 있었다. 매년 두 사람을 위해 산 선물은 포장된 채로 서랍 속에 얌전히 잠들어있다. 올해의 생일도, 청년은 주인공 대신 혼자 준비했다. 결국 자기위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꼬박꼬박 생일을 챙기는 것은, 그렇게라도 붙잡고 있고 싶어서였다. 자신만이 기억하는 사람들을. 아직도 어딘가 먼 곳에라도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챙기는 것으로.

생일 축하해. 루리. .”

청년은 혼자만의 공간에서 말했다. 답해줄 이 없는 말은 쉽게 흩어졌다.

루리는 법적으로 성인이 된 것을, 슌은 그보다 세 살을 더 먹은 것을 축하해.”

그렇게 말해도, 기억 속의 남매는 나이가 들지 않는다. 여전히 동생은 마지막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열네 살 소녀 같고, 오빠는 열일곱 소년 같다. 청년만이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었다. 청년은 자주 자신과 함께 나이를 먹은 두 사람을 상상해보려 하지만 언제나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고 포기하고 만다. 앞으로 청년이 더 나이가 들어도 남매는 영원히 그때의 모습으로 정지해 있을 것이다.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란 그럴 수밖에 없다.

건조한 축하를 마친 청년은 제 몫의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혀가 마비될 것 같은 단맛에도 그는 중독되기라도 한 듯 뱃속에 케이크를 계속 쏟아부었다. 그것만이 남매가 존재했던 생일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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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슌ts] 무기의 체온

2016. 11. 6. 11:49 from 03/2

 

  여자는 가볍게 추락했다. 날아든 공격을 가느다란 몸이 버티지 못해 날려간 지 오래지 않아서. 끔찍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닿은 몸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동료들이 달려들어 그녀를 잡아 일으켰고, 여자는 일어나자마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을 깜빡였다. 추락의 여파로 몸에는 긁히고 쓸린 자국이 가득했으나 가장 심각한 것은 무참하게 찢긴 배였다. 상태를 점검하려 여자에게 시선을 돌린 사내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내부를 드러낸 여자의 뱃속에는 그가 아는 인간의 장기 대신 기계 장치가 그득했다. 여자는 경악하는 동료들을 무시하고 열린 배를 엉성하게 여몄다.

  “봉합하는 게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군.”

  살갗이 찢어진 곳에서는 붉은 피 대신 오일을 닮은 것이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여자가 미처 지켜내지 못해 흘린 부품들도 바닥을 나뒹군다. 괴상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다.

  “쿠로사키?”

  여자를 부르는 사내의 목소리가 드물게 떨리고 있었다. 지독하게 비현실적인 풍경 속 여자만이 평온했다. 제 몸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여자는 망가진 기계를 살피듯 덤덤하다.

  “성가시게 됐네.”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여자는 배를 감싸지 않은 손으로 다시 무기를 집어 들었다. 그 상황에서조차 중단된 싸움을 마저 끝내려는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봐?”

  여자는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금빛 눈을 둥그렇게 뜨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런 몸으론 싸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다음 순간, 눈이 떠졌다. 사내는 꿈에서 깨어났다. 깨어나고도 한동안 꿈의 잔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사내는 자신이 있는 곳이 전장이 아닌 제 방이라는 것을 깨닫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곁에는 잠든 여자가 보인다. 그는 손을 뻗어 여자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손을 통해 전해지는 것은 맥박. 심장이 뛰고 있다. 숨을 쉬고 있다. 살갗 아래에는 따뜻한 피가 흐르고, 몸 내부에는 장기가 들어차 있을 것이다. 그녀라고 다른 사람과 다를 리 없다. 뻔히 알면서도 굳이 맥을 확인한 것은 꺼림칙한 꿈 때문이다.

  여자는 어려서부터 전쟁에 휩쓸린 사람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무장은 지옥 같은 전장에서 그녀를 지켜주었으나, 그녀는 그 대가로 많은 것을 버려야만 했다. 타인을 해한다는 것에 대한 주저함과 사람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경계와 적개심을 장착한 여자는 이미 평범한 사람으로부터 너무 멀어져 있었다. 누군가는 여자를 두고 병기가 된 인간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그녀를 전쟁이 낳은 괴물이라고 불렀다. 적을 베기 위해 자신을 무기처럼 사용해온 사람이라, 여자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그러한 말들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사내 역시 단단히 무장한 여자를 두고 싸우기 위한 기계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꿈에 투영된 것일까. 사내는 자신의 행동을 우스워하면서도 여자의 손목을 놓진 않았다.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은 따뜻한 체온을 더 느끼고 싶었다. 여자에 대한 자신의 무의식을 수정하고 싶었다. 사내의 시선은 그녀의 창백한 손목에 꽂혀있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거야?”

  갑자기 날아든 목소리에 사내는 반사적으로 손목을 놓았다. 언제 깬 것인지 여자가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몰래 파헤칠 것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천천히 몸을 일으킨 여자는 나른한 웃음을 걸친다. 이럴 때서야 여자는 살아있는 병기 따위의 이름을 벗고 그 나이대의 여자로 보인다. 전장에서 벗어나 풀어진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사내뿐이었다. 지금 비치는 것도 여자가 이곳에서 벗어나 전사로 돌아가는 순간 흩어질, 한순간의 느슨함에 불과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무슨?”

  “네가 살아 숨 쉬는지, 맥이 뛰는지 같은 것.”

  “당연한 것을 왜 굳이 확인해? 그렇지 않다면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인데?”

  여자는 깔깔댔다. 사내도 실없이 웃으며 제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 기계 같은 사람이니 뭐니 하는 말에 당신도 전염됐나?”

  사내의 시선이 여자의 몸에 새겨진 흉터로 향했다. 그녀의 몸에는, 전장에서 새겨졌을 것이 분명한 흉터가 이곳저곳에 남아있었다. 살아남는 과정에 생긴 흔적이므로 여자는 굳이 흉터를 숨기려 들지 않았다. 영광의 상처라고 자랑스레 내보이지도 않았다. 그 모든 것은 그저 여자가 걸어온 길을 상징하는 증거에 불과했다.

  “꿈을 꿨다.”

  사내는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전장에서 부상당해 안을 드러내게 된 네 몸에 기계 장치가 그득한 꿈을.”

  “그래서 내가 진짜 기계로 된 인간인지 확인하고 싶었나? 배를 가르진 못하니 맥을 짚어서?”

  사내가 답하려는 때, 여자는 침대 옆 테이블의 유리잔을 깼다. 다음 순간 여자는 유리 파편을 쥐더니 자신의 팔을 그었다. 흰 팔을 타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여자는 놀란 사내의 손을 잡고 자신에게로 가져와 피가 흐르는 상처에 얹었다.

  “나는 상처가 나면 피가 흐르고, 그 피는 따뜻하고, 이 순간에도 심장은 뛰고 있어. 당신과 똑같이.”

  그제야 여자가 스스로 상처를 낸 이유를 알아챈 사내는 여자에게서 손을 빼냈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피가 계속 흐르는 것이 마음에 걸려, 사내는 여자의 상처 부위를 조심스럽게 천으로 싸맸다.

  “그렇게 확인시켜줄 필요는 없었는데.”

  “고작 꿈 따위에 휘둘려서 깨자마자 맥을 확인하는 사람인데?”

  이미 들킨 것이 있으므로 사내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내에게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이 날아들었다.

  “사실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몸을 기계로 채우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군.”

  “치료보다는 수리하는 게 쉬울 거 아냐?”

  여자의 명랑한 목소리에, 사내는 여자가 걸어온 길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시작되어 지금도 끝나지 않은 전쟁은 그녀의 삶을 완전히 잠식하고 말았다. 삶의 목표마저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전쟁을 끝내는 것이 되어버린 여자였다.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여자 역시 자신을 싸움을 위한 병기로 취급하게 되었다 해도 놀라울 것은 없었다. 그녀는 그런 자신에게 연민을 던지지 않는다. 안타까워하는 건 언제나 타인이었다.

  “사람의 몸은 약해서 쉽게 부서져. 치료는 오래 걸릴뿐더러, 치료를 마친다 해서 정상적으로 기능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고. 전장에서 부상이란 게 얼마나 발목을 잡는지.”

  “그래서, 차라리 기계로 몸을 채운다면 빠르게 수리해 다시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효율을 생각한다면 그 편이 훨씬 낫겠지.”

  “결국 싸우기 위함이군. 그렇다면, 전쟁을 끝낸다면 그런 생각을 할 이유도 사라지겠지.”

  전쟁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한 그녀는 언제나 단단히 무장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사용할 것이다. 그 과정에 그녀는 스스로 사용하기 좋은 무기가 된다. 사내가 전쟁을 끝내는 것을 가정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다만 그 가정 뒤에는 자못 오만한 결심이 깔려있었다. 반드시 전쟁을 끝내 그 고통스러운 처지로부터도, 스스로를 병기 취급하는 사고방식으로부터도 해방시키겠노라고. 그것까지 읽어낸 것인지, 여자는 아이를 보듯 웃더니 사내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와 안았다.

  “알고 있다면 어서 활약해봐, 지휘관님.”

  자신을 안고 있는 여자는, 분명 언젠가는 인간의 모습을 쓴 병기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그렇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다. 사내는 여자의 체온을 느끼며 그렇게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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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루리] 멀미 (To. 새지님)

2016. 10. 16. 01:17 from 03/2

 

  쓰러진 적은 빛에 휩싸이더니 카드로 모습을 바꾸었다. 굳이 집어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그 한 장의 카드 속에 패자가 겁먹은 얼굴로 갇혀있으리란 것은 분명했다. 그 끔찍한 처분은 패자라면 당연히 맞이하는 종말.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풍경이지만 전장에서는 흔한 사건이었다. 적을 쓰러트린 소년은 바닥에 나뒹구는 카드를 본 순간 속이 메슥거려 손으로 급히 입을 막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무엇이든 토해내고 싶었다. 몸을 숙여 몇 번 헛구역질을 했지만, 당연히 바닥에 쏟아지는 것은 없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소년은 결국 포기하고 걸음을 옮겼다.

  평지에 있는데도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는 것은 습관적인 증상이다. 적을 쓰러트려 전투불능으로 만들 때마다 소년은 구역질을 했다. 처음에는 쉽게 풀리지 않는 울렁거림이 답답해 손가락을 집어넣어 먹은 것을 전부 토해내기도 했다. 기껏 먹은 것을 게워내고서야 소년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소년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심리적인 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전쟁에 내몰려 적을 쓰러트려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머리가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살해에 가까운 행위에 대한 꺼림칙함이 구역감으로 표출된 것. 그것이 소년을 괴롭히는 증상의 정체였다.

  그 구역감에 속아 전부 게워내더라도 해방감은 그때뿐이다. 어차피 다시 적을 쓰러트리게 되면 또다시 구역감에 사로잡힐 것이 뻔했다. 만일 소년을 그 불쾌한 증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줄 근본적인 대책이 있다면 소년이 전장에서 벗어나는 것이리라. 더 이상 타인을 해하지 않게 된다면 심리적인 거부반응도 사라질 테니. 생각이 거기까지 뻗었을 때 소년은 전장에서 도망치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한순간이었다. 그는 전장을 떠날 수 없었다. 아니, 떠나서는 안 되었다.

  기껏해야 십대 중반 즈음의 소년이 전쟁에 동원된다는 것은 그만큼 싸울 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방패가 되어줄 어른들은 이미 쓰러진 지 오래. 그나마 남은 사람들이라도 지키려, 소년 또래의 아이들은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하고 전장으로 나가 적을 쓰러트려야만 했다. 절망적인 전장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한 법. 자신이 빠지면 지킬 수 있는 사람을 잃게 된다. 또한 전장에서 계속 싸워갈 동지들에게 더 큰 부담을 지우게 된다. 자신의 무게를 알기에 소년은 고통스러워도 전장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소년은 걸음을 옮기며 쓰게 웃었다.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곳에서 운 좋게 지금까지 버텼다. 그동안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지키기 위해 쓰러트린 적도 여럿이었다. 타인을 해할 수밖에 없는 전사의 처지에 익숙해졌는데도, 머리는 여전히 거부반응을 보인다. 약해지지 않으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불편함을 외면하려 해도 머리는 정직하게 꺼림칙함을 외친다. 머리도 닳아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여전히 자신을 괴롭히는 구역감이 소년은 원망스러웠다.

  어차피 전장을 누빌 거라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편이 좋았다. 전장에서 그들을 구하는 것은 승리지 일말의 양심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 멈칫하다 보면 마음이 약해지고 만다. 냉정하게 적을 처리해야 하는 전장에서 그런 것은 치명적이다. 소년은 천성이 상냥했던 자들마저 전장에 서며 상냥함을 잘라내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 굳이 약한 면을 잘라내려 하지 않아도 전쟁을 거치며 자연히 냉혹함으로 무장하게 되기도 했다. 소년의 친우도 이미 단단히 무장해, 수많은 적을 망설임 없이 쓰러트리고 있었다. 그의 따스한 옛 모습은, 이제 소년만이 기억하는 과거가 되었다.

  기지로 돌아오면서 소년은 친우와 마주쳤다. 과거 사랑하는 이들에게 다정하게 웃어주었던 단정한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웃음을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전쟁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웃음을 잃었으므로. 다만 그것은 절망스러운 세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빠르게 사태를 파악하고, 철저히 무장해서이기도 했다. 덕분에 전쟁이란 극한의 재앙에 그는 이미 완벽히 적응한 채였다. 그런 친우의 곁에 설 때면 소년은 자신의 나약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소년이라고 하루아침에 소중한 사람들을 앗아간 적에 증오를 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친우처럼 냉정해지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기엔 소년은 아직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지금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건 전투뿐이라 해도, 전투가 아닌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 믿고 싶었다. 잔학한 침략자를 인간이 아닌 괴물로 취급해 거침없이 해치우고, 모두를 구하는 길은 싸움뿐이라 생각하는 친우와는 다를 수밖에.

  친우는 기지에 도착할 때까지 적의 전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돌아와서 적의 공격에 대한 대비책을 의논할 때는 앞장서 의견을 내기도 했다. 소년은 새삼 그가 얼마나 전쟁에 자신을 맞춰왔는가 실감했다. 나는 언제쯤이면 저렇게 단단해질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저렇듯 앞서서 이끄는 위치가 될 수 있을까. 소년은 친우의 열띤 얼굴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회의가 끝나고 잠깐 기지를 빠져나온 소년의 눈에 문득 불에 그슬린 적의 무기가 들어왔다. 아마 아군이 거세게 몰아붙여 쓰러트린 자의 것이리라. 순간 소년은 자신이 쓰러트린 적을 떠올렸고, 금방이라도 속이 울렁거릴 것 같아 도망치듯 구석으로 향했다. 소년은 사람들의 시선이 쉽게 닿지 않는 곳에서 몸을 숙인 채 쉬었다.

  “무슨 일이야, 유토?”

  자신을 부르는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소년은 고개를 들었고, 낯익은 붉은 눈과 마주쳤다. 친우의 동생인 동시에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기도 한 소녀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소년의 핏기 없는 얼굴에 놀란 소녀는 소년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어디 아프기라도?”

  “아니. 아무것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태껏 그를 괴롭혀온 증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소년은 하필 소녀 앞에서 다시 치민 구역감에 고개를 숙이고 구역질을 해야 했다.

  “속이 안 좋아? 상태가 나쁘면 오늘 맡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쉬는 게 좋을 텐데.”

  “괜찮아.”

  “안색이 나쁜데.”

  “그냥, 심리적인 증상이야.”

  소녀의 걱정을 가라앉히려면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년은 약한 모습을, 가능한 보이고 싶지 않았던 상대에게 보이고 말았다. 그것이 부끄러워 소년은 고개를 돌려 소녀의 시선을 피했다.

  “뭐 때문인데?”

  그러나 소녀는 그것으로 물러서지 않았다.

  “제대로 말해줘, 유토.”

  “카드화를, 하면.”

  “, 계속 얘기해.”

  “그러면 구역질이 나. 처음에는 정말로 속이 뒤집힌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아직도 마음을 강하게 먹지 못해서, 카드화를 할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거였어.”

  막상 입을 떼자 말은 술술 흘러나왔다. 털어놓을 상대를 지금까지 기다려왔던 것처럼.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소녀를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제 이야기를 듣고 있을지 확인하기 두려웠다. 소년의 울퉁불퉁한 손이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미안, 약한 말을 했지. 다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싸우는데 아직까지 부끄럽게도.”

  “부끄러운 게 아니야.”

  소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껄끄러운 것을 껄끄럽다고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하지만 나는 약한 내 모습이 싫어.”

  “약하다는 단어는 자신이 할 일을 외면하는 자에게 붙이는 단어야. 유토는, 유토가 해야 할 일을 충분히 하고 있잖아.”

  “이렇게 흔들려도, 싸우기만 하면 괜찮아? 슌은 레지스탕스의 이름에 맞게 흔들리는 일 없이 싸우고 있는데, 앞장서서 아카데미아를 쓰러트리고 있는데, 나는 언제나.”

  “오빠는 오빠고 유토는 유토야. 유토까지 오빠처럼 싸울 이유는 없어.”

  소녀의 손가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소년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소년은 비로소 소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것은 실망도 슬픔도 아니라, 자애로운 웃음이었다.

  “우리의 싸움은, ‘필요한 것이지 정의가 아니잖아.”

  소녀는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세상을 짓밟는 침략자에 맞서 싸우는 것은 지금의 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항하지 않는다면 당장 쓰러질 수밖에 없으므로. 그러나 그 과정에 타인을 해하는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 소년을 괴롭히는 껄끄러움의 근원은 바로 그런 생각이었다.

  “있잖아, 유토. 나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언제나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 누군가를 다치게 해야 해. 유토는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에 괴로운 거야.”

  “루리.”

  “그걸 잊게 되면 우리도 언젠가는 아카데미아 같은 괴물이 될지도 몰라.”

  소녀는 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이더니, 가만히 소년을 끌어안았다. 그 좁은 품이, 소년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넓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유토는 지금 잘 하고 있는 거야. 나도 유토처럼, 싸움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상냥한 목소리에 소년은 눈을 감았다. 걸핏하면 자신을 괴롭히던 것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소녀는 언제나, 그가 가장 괴로워하는 것을 마법처럼 없애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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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청년은 화끈거리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보니, 뜨거운 것에 덴 것이 확실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쥐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잔의 절반쯤 채웠던 차는 겨우 몇 모금을 남기고 고스란히 그의 손과 바닥을 적셨다. 잠깐 긴장을 놓고 차를 마시려 했는데 손에 힘이 빠지면서 차를 쏟은 것 같았다. 그마저도 쏟은 것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감각이 둔해져 있었다. 화끈거리는 손을 옷소매로 감싸자, 맞은편에 앉은 이가 상황을 파악하고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러게, 조심하지 그랬어.”

나긋한 목소리에도 청년은 입을 꾹 다문 채 손을 닦을 뿐이다. 주의력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지던 참에 날아든 목소리가 곱게 들릴 리 없었다.

“LDS에 온 후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며? 너무 지쳐있었던 거 아냐?”

누가 말했지?”

말이 끝나자마자 청년이 으르렁댔다. 청년은 자신에 대한 타인의 말에 언제나 날카롭게 반응하곤 했다. 아마도 그것은 극도의 경계로 무장할 수밖에 없는 청년의 처지에서 온 습관이리라. 그것을 알기에, 상대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물어뜯을 듯 노려보는 청년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카바 레이지? 아니면 사카키 유우야?”

마음대로 상상하라고.”

쓸데없는 말을.”

청년은 손수건을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아무튼, 그런 말이 나왔다는 건 다들 걱정하고 있다는 뜻 아니겠어?”

전투에는 이상 없어.”

네 실력을 의심하는 자야 없겠지만 그렇게 자꾸 피로가 누적되다 보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거든. 갑자기 쓰러지게 된다거나 위기상황에서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곤란하잖아?”

더 이상의 간섭은…….”

간섭만 할 생각은 없어. 원한다면, 도와줄 생각도 있는데.”

청년은 상대를 흘깃 바라보았다. 냉랭하게 잘라내도 자꾸 다가오는 것을 보면 거절해도 소용없을 것이 분명했다. 귀찮은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적당히 받아주는 척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좋아.”

무슨 말이 흘러나올지도 모르면서 청년은 얼른 답했다. 자꾸만 벽을 허물고 자신에게 파고들려 하는 상대가 그는 언제나 불편했다. 상대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청년은 가능한 빨리 끊어내고 자리를 뜰 작정이었다. 호의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보이자, 상대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쿠로사키, 왜 사람들이 환술에 당한다고 생각해?”

생각한 적 없다.”

그럼 지금 생각해. 왜 이성으로 무장한 사람들마저 환술에 무력하게 당하고 마는지. 어떻게 지금까지 내가 성공할 수 있었는지.”

푸른 눈이 웃었다. 그 여유로운 웃음에, 청년은 그를 따라다니는 이름을 새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환혹. 환혹의 데니스. 그의 환술에 걸려든 사람들은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눈으로 환술사가 바라는 모든 것을 토해냈다. 예외는 없었다. 누구든 그에게 자신의 내면을 내보이고 그의 포로가 되어야만 했다.

사람의 약점을 파고드는 네놈의 교활함 때문이겠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겠네. 크게 벗어나진 않았어.”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청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곁에서 몇 번 지켜본 결과로 알 수 있다. 저것은 환술을 시작한다는 것을 알리는 그만의 신호.

무슨 생각이냐.”

사람은 행복한 때로 도피하려 하는 습성이 있어. 그건 살아가는 데 위안이 되기도 하고, 극한의 고통을 외면하고 쉴 수 있는 요람이 되기도 하지. 환술은, 바로 그 지점을 건드려. 사람을 느슨하게 만든 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파헤쳐 보여주지. 그건 누구에게나 유혹적이야.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사람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환상에 발을 담그는 거야.”

환술사는 설명을 늘어놓으면서도 시선은 쭉 청년에게 두고 있었다. 워낙 경계가 깊은 인간이라, 보통의 타깃보다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조금도 틈을 주지 않고 응시하며 그는 청년을 차차 무의식으로 떨어트린다. 언제나 형형히 빛나던 금빛 눈이 시간이 지날수록 탁해지는 것을 그는 알아챈다. 언제나 무장을 풀지 않던 자를 조금씩 함락시키고 있다는 것에 그는 희열마저 느끼고 있었다. , 어서 보여줘. 쿠로사키.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은 너의 내면을.

그러면 그는 그 속을 헤엄치며 청년이 사랑했던 시절을 환상으로라도 돌려줄 생각이었다. 청년이 무장하지 않고 살았을 때, 타인을 경계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했을 때. 지금의 청년의 모습을 보면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평온했던 나날을. 그 시절을 다시 마주한다면 눈앞의 청년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건 자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일 것이다.

세상에선 인간의 그런 습성을 나약한 것으로 꾸짖기도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하거든. 행복했던 시절은 사람에게 돌파구가 돼. 돌파구가 없는 인간이 절망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겠어? 결국 그건 스스로를 방어하는 방패인 셈이지.”

마침내 청년이 지금껏 말한 적 없는 과거가 환술사의 눈앞에 단편적으로 펼쳐졌다. 화사한 색으로 물든 도시의 풍경, 사람들의 웃음소리, 누이의 손을 잡고 산책하는 청년의 모습. 그러나 어쩐지 그 이상 파고들기는 쉽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환술사는 드물게 조바심을 냈다. 조금만 더 파고들면 타깃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으로 타깃을 흔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쿠로사키, 문을 열어줘. 환술사는 나긋하게 속삭였다.

어서 문을 열고 나를 들여보내. 내가 너를 만날 수 있도록.

그때 청년의 눈이 본래의 색을 찾았다. 환술사가 대처하기도 전에, 그는 환술사의 오른손목을 움켜쥐었다.

수작은 집어치워.”

아쉬워라, 깨버렸네.”

기분 나쁜 놈. 내 과거를 볼 생각이었지.”

안심하라고, 쿠로사키. 네 무의식이 이겨서 거의 보지 못했으니까.”

청년은 한참이나 의심 가득한 눈으로 환술사를 바라보다 그가 더 이상 자신을 공략할 생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손목을 놓아주었다.

뭐가 도와주겠단 거야. 나를 훔쳐볼 생각이나 하고서.”

도와주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는데? 중간에 깨지만 않았어도 가능했을 거야.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을 찾아내 네가 그 기억 속에서 편히 잠들 수 있도록 할 계획이었다고.”

물론 행복했던 때의 기억을 파헤쳐 그것을 약점으로 쥐고 그를 휘어잡을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청년은 그에게 다소 위험한 존재였으니까. 그런 점에서, 도중에 실패하고 만 것은 아쉬웠다.

내게 그런 건 돌파구가 되지 못해. 더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그 속에 비치는 건, 전부 잃은 것들이니까.”

전쟁이 닥치며, 청년이 살던 세상은 폐허가 되었다. 사랑하는 것도 전부 죽었다. 남은 것은 몸뚱이 뿐이다.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전쟁을 끝내기 위해 살아야 하는 청년이었다. 영영 되돌릴 수 없을 과거를 헤집는 것은 그에게 후회와 고통만을 남길 뿐.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네, 미안.”

그러니 알량한 수작은 그만둬. 네놈에겐 아무것도 보여주고 싶지 않고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으니까.”

말을 마친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술사를 두고 떠났다. 낡은 코트로 감싼 가는 몸이 환술사의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홀로 남은 환술사는 아직까지도 욱신거리는 손목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자국이 선명했다.

역시 어려운 사람이네.”

조금만 건드리면 무너질 듯 위태로운 인간인데, 교묘하게 파고들어도 무너뜨리기 쉽지 않다. 어떻게 하면 저 인간에게 균열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를 부술 수 있을까. 그것은 환술사에게도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도 안심해, 쿠로사키. 다음에는 제대로 할 테니까.”

제대로 무너뜨려서, 너라는 위험요소를 없애고 자유로이 움직여야지. 환술사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번졌다. 너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거야. 그렇게 되면 너도 무거운 책임을 내려놓고 안식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너의 죽은 동료들처럼.

무시무시한 생각을 감춘 채 환술사는 자신의 찻잔을 들었다. 식어빠진 차의 씁쓸함이 입 안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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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내는 누구에게도 악의가 없었지만 상냥하지는 못했다.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헤아린다고 감싸는 인간은 못 되었다. 이번의 일도 그의 그런 특성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사용하는 전사의 동료가 쓰러진 것을 인지하고 그 유품을 입수해 연구하기까지 했으면서 일부러 그 사실을 비밀에 부친 것이다. 쓰러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면 동료에게 종말을 전하고 유품을 넘겨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자신의 전사가 싸움 중에 혹 동요할까 싶어 끝까지 숨기고 말았다. 결국 모든 것이 끝나고서야 슬며시 진상을 알린 사내였다.

  그는 영민한 인간이었고 순간순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사라진 동료를 애타게 찾았을 이를 달래는 것보다 눈앞의 일을 말끔히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빠르게 판단했으리라. 그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지 않았기에 여자는, 쓰러진 자의 동료는 그에게 라고 묻지 않았다. 대신 여자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공백을 견딜 수 없을 때 자주 하는 행위였다. 무릎을 안은 손가락은 가늘고 뼈가 도드라졌다. 잎을 떨군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

  사내는 막 동료의 마지막에 대해 듣게 된 여자가 입을 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아무리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 내린 결정이었다 해도, 여자가 슬퍼할 수 있을 날을 박탈한 것은 분명했으므로. 원망을 던지든 저주를 퍼붓든 사내는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려 했다. 여자에게는 그럴 자격 정도는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채 한 가닥 희망이라도 건지기 위해 먼 세계로 숨어들어서까지 싸우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함께 온 동료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너무 늦게 알고 만 것이다. 사내가 고의로 정보를 차단한 탓에. 그동안 기댈 곳 없는 타지에서 그녀가 얼마나 마음을 앓았을지, 사내는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러나 여자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시선을 아래에 두고 깍지 낀 손에 자꾸만 힘을 실을 뿐이었다. 최대한 움츠린 채 홀로 슬픔을 삭이고 있는 것처럼.

  “덱은 어디에 있어?”

  한참이나 지나서 흘러나온 것은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설명이 생략되어 있긴 하지만 사내는 굳이 더 묻지 않고도 여자가 의도한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동료의 무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녀가 구할 수 없었던, 그래서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자의 것.

  “이전까진 당신이 마음대로 했으니, 걸릴 게 사라진 지금은 내 멋대로 해도 되겠지.”

  여자가 찾는 것은 연구 자료로 사용할 것도 아니었고, 자신이 소유할 것도 아니었다. 그것쯤은 그녀에게 돌려주어도 될 것이다. 사내는 사라진 자가 남긴 것을 내밀었다. 그러자 여자는 고개를 들더니 사내가 쥔 것을 받아들어 귀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레 쓸었다. 그제야 사내는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울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눈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다.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친구의 유품을 쓰다듬다가 가슴께로 가져왔을 뿐이다.

  “고마워. 이것으로 됐어.”

  여자는 물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으로 전부 털어낸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뿐인 동료의 마지막을 그렇게 쉽게 삭일 수 있을 리 없다. 다만 여자는 동료와의 끈을 계속 붙들고 있게 되었다. 동료가 사용하던, 그의 사상까지 담겨있던 무기를 손에 넣음으로써.

  “간직할 생각인가.”

  “돌려줄 거야.”

  쓰러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사내보다 여자가 더 잘 알 것이다. 지금까지 주변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을 수없이 지켜봤을 여자이니까. 쓰러진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주변인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갈 뿐, 자라지도 늙지도 않는 정체된 존재가 된다. 그런데도 여자는 동료가 돌아올 것을 전제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음을 다잡기 위한 자기위안일 뿐일까, 아니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버리지 않은 한 가닥 희망일까.

  “유토에게?”

  “그래. 그러니 그때까지는 잘 보관하고 있어야지.”

  “좋아.”

  속에서 치미는 말을 누르는 것은 그녀의 희망을 믿어서가 아니다. 차마 그것까지 짓밟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냉정하게 현실을 말하는 사내라 해도 그녀의 처절한 희망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쓰러진 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죽음을 확인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거의 0에 가까울 확률이긴 하나 언젠가 거짓말처럼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었다. 여자는 그 가능성을 끌어안고 버티는 것이다.

  그 엷은 희망이야말로 그녀가 쓰러지지 않게 해줄 마지막 선.

  “나에게 할 말은 없나, 쿠로사키?”

  “무슨 말을 듣고 싶어?”

  “무슨 말이든 좋아. 할 말이 있다면 지금 해둬.”

  “없어. 아무것도.”

  즉답이었다. 원망이든 혐오든, 여자는 이미 전부 비워내고 온 듯했다. 감정을 태울 기력도 남지 않은 것일까. 여자의 창백한 얼굴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사내는 고통스레 숨을 삼켰다.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대충 알 것 같지만.”

  여자는 웃으며 동료의 유품을 코트 속에 숨겼다.

  “이미 너무 늦었잖아, 아카바 레이지.”

  그녀가 마음껏 슬퍼할 기회까지 앗아간 것은 그 자신이었기에, 사내는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정보가 차단되었던 동안, 여자는 사라진 동료를 기다리던 끝에 모든 것을 놓아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겨울의 나무가 마른 잎을 떨구듯.

  “이번 일로 확실히 느꼈어. 당신,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받기 쉬운 타입이네. 그러다 원망을 사고.”

  “내가 자초한 것이기도 하지.”

  “원망을 끌어안는 게 괴롭지 않다면 멋대로 해. 하지만 당신 정도라면 오해받지 않도록 할 수 있을 텐데.”

  “걱정해준 것은 고맙지만 괜찮아.”

  최선의 결과를 위해 고통이 따르는 선택을 하고, 그로 인해 짓밟힌 사람들에게 지독하게 비정한 인간으로 오해받는 것은 사내에겐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자신의 진의를 오해해 비난을 퍼붓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그들이 슬픔을 덜 수 있다면 사내로서도 조금은 홀가분할 것이다. 용무가 끝났다고 판단한 것인지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사내에게서 돌아섰다. 그녀가 몇 걸음 걸었을 때 사내는 불쑥 말을 던졌다.

  “너도 나를 오해해도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양쪽 다 마음의 짐을 가벼이 할 수 있었을 텐데.

  여자는 잠깐 걸음을 멈췄지만, 사내를 돌아보는 일 없이 곧 다시 걸었다. 언제라도 꺾일 듯 앙상한 몸이 이내 사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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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

[슌] 죽은 말

2016. 8. 18. 21:49 from 03/2

 

  언젠가부터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귓속을 파고드는 소리는, 비명과 울음소리다. 제대로 터져 나오지도 못한 채, 막에 가로막힌 듯 먹먹하게 막힌 소리.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비롯했는지 청년은 안다. 청년은 손에 쥔 카드를 내려다본다. 겁에 질린 얼굴의 사람이 그려진 카드가, 손 안에만 몇 장이었다. 소리의 출처는 바로 그곳. 패자가 갇혀버린 카드였다. 청년과의 싸움에서 패해 한갓 종잇조각으로 변한 자들이 걸핏하면 카드 속에서 외치는 것이다. 꺼내달라고. 살려달라고. 차가운 세상이 무섭다는 울음 섞인 소리도 있었다.

  갇힌 자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말로 그들이 호소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러나 청년은 한순간 카드를 훑을 뿐 이내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만다. 좀 더 시선을 두었다간 먹히고 말 것이다. 쓰러트린 자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의 증거에. 무력한 종잇조각이 된 자들이 소리를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머리를 치는 울음은 전부 환청일 뿐이다.

  환청이 시작된 건 언제부터였던가. 청년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미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기에 그랬다. 그가 선 곳은 전장이었고 전장에선 수많은 싸움이 일어나며, 그 끝에는 패자가 남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청년의 세상은 무장한 군사 하나 없는 평화로운 세상. 갑자기 밀려든 침략자에 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 지옥에서 청년은 수많은 동료를 잃었다. 패자가 된 동료들은 한순간에 종잇조각으로 변해 바닥에 흩어졌다. 비현실적이라 더욱 끔찍한 죽음이었다. 눈앞에서 아는 자들이 카드로 변하는데, 살아남기 위해 두고 도망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비극이었다.

  그래서일까. 처음에는 쓰러진 동료들의 울음이 달라붙었다. 살려줘, . 여기서 꺼내줘. 적에게 쫓겨 도망치는 내내 그 가여운 울음이 발목을 휘감았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동료들의 말은 원망이 되었다. 왜 너만 살아남았어? 왜 우리를 구해주지 않았어? 그럴 때면 청년은 돌려줄 말이 없어 입술만 깨물었다. 살아남은 것도 죄스러운 일이라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홀로 살아남은 것은 비겁한 일이었다며 눈물을 쏟고 스스로 쓰러져야 하는가. 그렇게 동료들의 울음을 잠재울 수 있었다면 마음은 편해지련만 청년은 그럴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서 살아남아야 했다. 되찾을 것이 있어서 끝까지 버텨야만 했다. 그래서 청년은 동료들의 원망을 흘려버렸다. 다만 그들 대신, 끊어져버린 그들의 삶을 짊어지고 살아남으려 했다. 그 결과가 도망치지 않고 적에게 맞서기로 한 결심이었다. 쫓기기만 하던 먹잇감은, 살아남고자 하는 열망으로 무장해 덤벼들었다. 적과 같은 무기를 든 채,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상대했다. 그래서 그저 운 좋게 살아남았을 뿐이었던 청년도 결국 적군을 쓰러트릴 수 있게 되었다.

  적은 패배하는 순간, 청년의 동료가 그러했듯 영혼이 봉인당해 종잇조각으로 나뒹굴었다. 처음 적을 쓰러트려 카드가 된 적을 집어 들었을 때 가증스럽게도 그것이 울었다. 무서워. 살려줘. 꺼내줘. 동료들이 그러했듯이. 그때부터 그를 괴롭히는 것에, 적의 목소리도 추가되었다. 나아가는 이상 싸움은 멈출 수 없으므로 청년은 언제나 패자의 울음에 시달려야 했다. 쓰러진 동료는 그마저 쓰러지길 바랐고 쓰러트린 자들은 공포에 짓눌려 울었다. 들려서는 안 될 소리로 가득한 세상은 언제나 어지러웠다. 구하기도 어려운 식량으로 겨우 배를 채우곤 지독한 환청 때문에 보람도 없이 게워내기도 했다.

  왜 패자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가.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적을 쓰러트리는 것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던가. 혹은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남은 것에 대한 가책인가. 청년은 입매를 비튼다. 아니, 가책 같은 것은 오래 전에 버렸다. 그런 것을 안아서야 전장에선 버틸 수 없으므로. 전쟁에서 명분과 정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지배자뿐. 청년 같은 일개 전사는 가책도 윤리도 버리고 그저 눈앞의 싸움에만 매달려야 했다. 그런 삶을 충실하게 이어온 청년이었다. 어쩌면 환청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싸움을 거듭할수록 그가 지쳐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너무 많은 싸움에서 너무 많이 닳았다.

  가책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한들, 싸움 자체가 남기는 타격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수없는 싸움을 거친 인간이 황폐해지지 않을 수는 없다. 그 후유증으로 환청에 시달리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끝까지 안고 갈 수밖에 없으리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혹은 자신이 쓰러져 자신을 괴롭히는 패자들과 같은 종말을 맞을 때까지. 청년은 이미 체념하고 있었다.

  이번에 쓰러트린 것은 누이 또래의 앳된 소년들이었다. 전장에서 기다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쟁이란 어떤 무게를 가지는지도 모르는 채 교관이 주입시킨 것만 믿고 전장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어린 것이어도 적은 적이었으므로, 청년은 적을 쓰러트린 것에 후회는 남기지 않는다. 다만 잠시도 쉬지 않고 머리를 치는 소리가 견디기 힘들다. 먼저 무기를 들고 덤벼든 주제에, 그 전에 수많은 또래 아이들을 쓰러트렸을 주제에 무엇이 그리도 억울한 것인지. 청년은 얼굴을 찌푸리며 쓰러진 적을 아무렇게나 흩어버리고 걸어갔으나, 아무리 걸어도 쓰러트린 것들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걱정 마. 나중에는 나도 그곳에 들 거다.

  청년은 불쑥 중얼거렸다. 물을 머금은 적 없는 모래처럼 지독하게 건조한 목소리로. 돌아보지는 않았으나, 그의 말이 향한 곳은 이미 바람에 휩쓸렸을지도 모를 패자들이었다.

  모든 것을 구하고, 전부 되찾고, 내가 필요 없게 되는 날에는 너희와 같은 길을 택할 테니까.

  그러니, 그때까지만 울음을 그쳐. 청년은 쓰러진 이들을 달래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자신의 종말까지 미리 결정짓고서. 그것이 닿은 것인지, 패자의 목소리가 한순간이나마 잦아들었다. 들려선 안 될 울음이 지나간 곳에 남은 것은 폐허에 어울리는 죽음 같은 고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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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

[데니스+슌] 광대

2016. 7. 6. 23:23 from 03/2

 

  무대를 채우는 열기는 질식할 듯 무겁다. 관객의 열망과 기대와 악의가 한데 엉켜 무대에 오를 이를 내리누르는 것이다. 관객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저 열기가 괴물이 되어 아가리를 벌리고 이빨로 갈기갈기 찢을지도 모른다. 무대에 서는 이라면 한 번쯤은 마주하는 두려움이다. 무대 아래의 관객은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만족스러우면 환호했지만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으면 단숨에 그들을 끌어내렸다. 관객은 그런 횡포조차 용납되는 정복자였고 무대에 오르는 이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해야 할 광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족스럽지 않으면 죽인다. 흥미가 사라지면 폐기한다. 그렇게 영영 사라진 자도 벌써 여럿이었다. 날이 갈수록 악랄해지는 관객의 횡포는 순간순간 광대들의 목을 죄여들고 있었다. 잔뜩 얼어붙어 무대에 오르고 한순간도 관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광대를 볼 때마다 관객들은 낄낄거렸다. 정복자의 위치란 그렇게 편리한 것. 목숨을 빌미로 한 인간을 오롯이 지배한다는 것은 그들을 희열로 물들였다.

  그러나 무대에 오르는 광대 중 단 하나만은 관객에게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긴장하는 것은 오히려 관객이었다. 그는 언제나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무대를 펼쳤고 관객은 이미 그의 무대에 단단히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채 스물도 되지 않은 청년은 관객이 광대를 무대에 올린 이래로 가장 오래도록 버텨온 광대였고 그만큼 관객이 열광하는 자이기도 했다. 관객이란 변덕스러워 언제 누구를 버릴지 모를 족속이었으나 청년에게는 관대했다.

  사실 청년은 진즉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정복자에 대항해 끝까지 싸운, 멸망한 국가의 패잔병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복자를 막기 위해 나선 저항군은 끝내 정복자를 이기지 못했다. 전쟁이 끝날 때쯤 살아남은 것은 청년을 포함해도 몇 되지 않았다. 처형은 처음부터 결정된 처분이었지만 정복자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자신들에게 대항한 불손한 것들의 죽음은 보다 처참해야 했다.

  정복자가 낸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패잔병을 무대 위에 올리고 그들이 키워낸 전사를 올려 결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쓰러질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결투를. 전장을 누빈 저항군이라 해도 대개 부상으로 몸이 성치 않은 상황. 거기다 급하게 조직되어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어려서부터 훈련받은 전사들을 이길 리 없었다. 결국 그들이 준비한 것은 무늬만 결투였다. 무대 위에서 전사의 손으로 그들을 처형해 죽음조차 한갓 볼거리로 만드는 것이 본심이었다.

  청년도 당연히 그 불행한 희생자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역시 먼저 쓰러져간 동지들처럼, 무대 위에서 쓰러졌어야 했다. 뜻밖에도, 최초의 무대에서 그는 살아남았다. 날아든 공격으로 부상을 입긴 했으나 쓰러진 건 그가 아니라 정복자들이 키워낸 전사였다. 충격에 휩싸인 관객을 뒤로 하고 청년은 무대에서 내려갔고, 그날의 승리로 목숨을 며칠 연장하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정복자는 그를 다시 무대에 올렸다. 전보다 강력한 전사를 그의 상대로 세우며. 그럼에도 그는 살아남았다.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그는 승자가 되었다. 어느새 그의 무대는 처형을 가장한 것이 아니라, 진짜 결투로 변해있었다.

  명목상으로는 결투를 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복자는 그를 거듭 무대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진득하게 버티는 패잔병이 하루라도 빨리 쓰러지길 바라며. 정복자의 바람도 무색하게 청년은 무대에 오를 때마다 희생자를 쌓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단순히 운이 좋아 살아남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려서부터 훈련받은 전사를 상대할 수 있을 실력에 끝까지 적을 물어뜯는 투지마저 가졌음이 틀림없었다. 처음에는 청년이 무대에 오르면 야유를 퍼붓고 그가 이길 때마다 당혹스러워하던 관객들은 서서히 그의 전투에 매료되었다. 생존을 위한 그의 투쟁에 언젠가부터 관객은 환호하게 되었다.

  물론 관객이 그의 투쟁을 높이 평가해 그에게 환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관객이 그에게 부여한 역할은 처형을 앞둔 죄수도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전사도 아닌, 광대. 누가 보아도 불리한 상황에서 악귀처럼 싸워 적을 쓰러트리는 것은 관객을 흥분시키기 충분했다. 자신들을 즐겁게 해주는 패잔병에게 관객은 광대의 이름을 붙이고, 관대하게도 자주 무대에 세워주었다. 무대에 선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이 연장된다는 것. 청년은 정복자가 멸망시킨 나라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청년은 천천히 무대에 올랐다. 시선은 정면에 고정했으나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자신에게 달라붙는 것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열기는 숨이 막히고 시선은 진득하다. 무대 아래 관객의 것이다. 그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수많은 무대에서 살아남은 청년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기대가 되어 자신을 덮치고 있는지, 기대가 어긋나는 순간 자신이 어떻게 될지도. 관객이란 맹수와 같다. 다만 배부른 맹수일 뿐이다. 식사를 할 필요가 없어 한가로이 먹잇감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 흥이 깨지면 심심풀이로 사냥한다. 먹잇감으로서 사냥당하지 않으려면 저들이 끝까지 시선을 뗄 수 없게 할 수밖에.

  전사에서 광대로 바뀐 것에 청년은 별 감흥이 없었다. 자신의 투쟁이 볼거리가 되고 관객을 사로잡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된 처지에 절망하지도 않는다. 살아남아야만 했다. 적 앞에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으로 거둘 것이 있을 때나 의미 있는 일이다. 자신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지금 죽어서야, 그 전에 쓰러진 동지들에게 죄를 짓는 일. 어떻게든 살아남아 언젠가 적을 흔들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의 길이리라. 살아남을 기회를 잡은 것에 오히려 청년은 안도했다.

  무대는 그에게 새로운 전장이었다. 사납게 덤벼드는 적과 사냥감처럼 불리한 위치에 선 자신이 있다. 다른 것이라면 수많은 눈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뿐. 그는 적의 묵직한 공격을 교묘하게 봉쇄하고 자신의 열세를 이용해 상황을 반전시킨다. 그렇게 승기를 잡아 적을 쓰러트리는 것이 그의 방식. 다만 관객이 지루해하지 않게 전개는 조금씩 바꾸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관객이 열광하는 극적인 무대를 꾸미던 청년의 시선이 문득 객석에서 멈추었다. 관객의 반응에는 민감해도 평소 굳이 관객과 시선을 맞추진 않던 그였다. 이번에도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다 우연히 시선이 아래로 향한 것뿐이었다. 시선이 머문 것은 찰나였지만 청년은 보았다. 자신이 잊을 리 없는 자의 얼굴을. 그는 팔짱을 낀 채 청년의 무대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것은.

  과거 한 광대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청년의 고향에 나타나 거리 공연을 펼쳤다. 모두가 열광하는 화려한 무대였다. 그가 나타나 사람들을 사로잡고 세상에 섞여든 지 오래지 않아 도시엔 전쟁이 닥쳤다. 전쟁통에도 광대는 몇 번 얼굴을 비추었으나 청년의 누이와 함께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그로부터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 청년이 알게 된 것은 그가 적이 보낸 첩자였으며 처음부터 자신의 누이를 노리고 접근했다는 것. 화려한 공연도 누이의 호의를 산 모든 것도 전부, 정체를 숨기기 위한 위장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청년이 객석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과거의 광대였다. 다만 공연에 어울리는 화려한 복장은 간부의 제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광대의 역할도 끝나버린 모양이었다. 과거의 광대가, 광대로 변한 전사를 보는 셈이었다. 그 아이러니함에 청년은 웃었다. 하필 그의 얼굴에 한순간 떠올랐던 것은 그리움.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게 된 광대가, 무대 위의 광대를 보고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 것이리라.

  과거 이곳에서 첩자를 필요로 했던 것은 병사를 보내 타국을 복속시키기 전 손에 넣어야 할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국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어 목표물을 입수하기 위해서는 주민이 의심을 사지 않을 존재가 필요했다. 첩자에게 광대의 역할을 맡긴 것은 아마 그래서이리라. 화려한 무대를 펼쳐 호의를 사면, 낯선 이라 해도 쉽게 받아들일 테니까. 덕분에 광대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목표물을 상부로 넘길 수 있었다.

  필요에 의해 맡게 된 역할이었지만, 그는 광대로서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에 무척 만족했다. 무대 위에서 빛나는 자신도, 관객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도 좋았다. 관객의 함성에 공손하게 인사하며, 가능한 오래 광대로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종료되며 상부에선 더 이상 첩자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그간의 공을 인정받은 그는 합당한 지위를 얻었으나 다시는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전쟁이 두 사람의 처지를 바꿔버린 것이다. 승자는 자신이 사랑하던 광대의 역할을 버리고 무대에서 내려가고 패자는 살아남기 위해 광대가 되는 것으로.

  광대를 알아본 청년은 일부러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둘의 시선이 한순간 엉켰고 청년은 냉소를 던지고 돌아섰다. 사랑하는 누이의 미래를 짓밟은 자에게 비참함을 안겨주겠다 다짐하고서. 청년은 광대가 자신의 역할을 사랑했음을, 아직도 무대를 열망하고 있음을 안다. 그렇다면 그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은 분명했다.

  다음부터 펼쳐진 것은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무대였다. 그의 무대에 익숙해진 이들조차 숨을 죽이고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일부러 적에게 약점을 노출해, 결투를 끝내기 직전까지 적에게 아슬아슬하게 쫓겼다. 그러다 결말을 내고 싶어졌을 때 단숨에 판을 뒤집고 악귀처럼 달려들었다. 적이 승리의 확신을 품고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던 때였다. 숨겨두었던 함정은 적을 옥죄고 패배는 생각조차 않았던 적은 한순간에 쓰러졌다. 청년은 자신의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 모를 피를 뒤집어쓰고 승리를 즐겼다.

  환호가 쏟아졌다. 사람들의 얼굴은 흥분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열기는 부풀어 터질 듯하다. 그가 선사한 열기 때문일까. 갑자기 어딘가에서 청년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한 번 흘러나온 이름은 빠르게 전염되어, 어느새 모두가 그 이름을 외쳤다. 관객에게서 자신을 찾는 외침을 이끌어내는 것, 그것은 한때 광대였던 자가 즐겼던 것 모두가 홀린 것처럼 자신을 찾자, 청년은 객석으로 시선을 돌려 과거의 광대를 보았다. 그의 푸른 눈에 드리워진 것은 부러움과 체념이 섞인 복잡한 감정.

  청년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단 한 사람만이 알아본 웃음은, 승자의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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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