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조] 아이들을 위하여

2016. 5. 5. 21:03 from 03/2

 

  전쟁이 스치고 간 자리에 아이는 남지 않았다. 아이란 이름의 약한 존재는 침략자의 발길에 짓밟혀 빠르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운 좋게 살아남은 것들은 아이의 일면을 버리고 서툴게나마 어른을 모방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무력한 존재일수록 잘 알았다. 칭얼대는 것도 용서받을 어린 것들이 스스로 울음을 그쳤다. 꿈꾸는 것이 많은 아이들이 꿈을 몰아내고 생존방법을 고민했다. 보호받아야 할 것들이 전장으로 전진했다. 그런 곳에, 아이가 남아있을 리 없었다.

  청년도 그렇게 이른 나이에 아이이길 포기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겁에 질려 울음소리도 내지 못했고, 다음에는 살고 싶어서 무기를 들었고, 그 다음에는 남은 것들이라도 지키고 싶어서 싸웠다. 싸우고, 또 싸우다 돌아보니 어느새 아이였던 자신은 없었다. 청년은 자신이 스스로 그 어린 것의 목을 졸라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참혹한 전장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라고.

  전쟁에 휩쓸린 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청년은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그렇게 긴 세월도 아니었을 터인데 체감한 세월은 너무도 길어, 아득하기만 했다. 그만큼 고통스러운 날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른들이 쓰러진 자리에 남은 아이들은 그동안 비정상적으로 성숙해 또래 아이보다 몇 배는 더 성숙한 채였다. 아니. 그것을 성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른 나이에 괴상하게도 늙어버렸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희망을 찾아 향한 낯선 도시에서 그를 제 나이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상도, 행동도 전부 전쟁에 찌들어 한참이나 비틀려 있었으므로.

  아이로서의 삶을 너무 일찍 포기하고 너무 일찍 나이 들고 만 것을 청년은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살아남은 대가로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그 모든 걸 감수함으로써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면 오히려 기쁠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런 길을 걸어야 했던 것이 자신뿐만이 아니었단 것이었다. 누이도, 오래도록 함께해온 친우도 그랬다. 자신이 방패가 되어 그들만은 아이로 남아있도록 했다면 좋았을 것을. 청년은 완벽한 방패가 될 수 없었고, 그가 지키고 싶었던 이들도 숨죽이고 있기보다는 모든 것을 감당하고서라도 싸우는 쪽을 택했다. 청년은 소중한 이들이 점점 자신을 닮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청년에게 그들은 언제까지나 아이였다. 지켜주고 싶고 지켜야만 할 아이. 저 또한 세상에서는 아이에 불과함에도 청년은 의무처럼 둘을 감싸왔다. 그들이 더 이상 닳지 않도록 한시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는 것이 그의 소망. 힘겨운 싸움을 놓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싸움의 끝에 청년은 희망의 끈을 잡을 수 있었다. 그것만 끝까지 놓지 않으면 두 사람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희망만큼 헛된 것은 없어, 어느새 두 사람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만이 전장에 외롭게 남겨졌을 뿐. 상실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처지임에도 두 사람의 상실은 너무도 커 자꾸만 그를 뒤흔들었다. 싸움은 날이 갈수록 아슬아슬해졌고 청년은 몇 번이나 위기를 넘겨야만 했다. 지켜야 할 자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은 싸움은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으나 전쟁을 끝내겠다는 소망은 유효해서 청년은 싸움을 그치지 못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싸움의 끝에 적은 퇴각했고 이제 청년은 다음 싸움에 나설 때까지 쉴 수 있게 되었다. 일시적인 평화인 것인가. 청년의 금빛 눈이 창밖에 향했다. 다음의 싸움을 대비하기 위해 힘을 비축하는 시간을 가진다는 지휘관의 뜻에는 납득했으나, 경계를 늦춘 적 없는 이에게 휴식이란 어색한 것이었다. 청년은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데도 초조해졌고 쉬는 때도 무장을 해제하지 못했다.

  “쉬라고 내준 시간인데, 통 쉬질 못하는군.”

  날아든 목소리에 청년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지휘관이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익숙하지가 않아서.”

  “무엇이? 적을 완전히 쓸어내지 못했는데 한가로이 쉬는 것이? 아니면 긴장을 푸는 것이?”

  지휘관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담담했으나 그 말에 담긴 것은 전부 청년의 속내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었다. 청년은 아마 저와 비슷한 나이일 지휘관을 노려보았다.

  “이곳은 하트랜드가 아니다, 쿠로사키.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 아니라 평화로운 세상이지. 싸움이 끝났는데도 그렇게까지 너를 몰아세우는 건 고문에 가깝지 않나?”

  그랬다. 청년이 도망치듯 향한 곳은 폐허가 된 고향과는 정반대로 평화로운 곳이었다. 한때는 그의 고향도 그러했을 터인데, 전쟁에 찌든 청년은 평화로운 세상을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화사한 풍경에 섞여들기는커녕 홀로 잔뜩 무장한 이질적인 존재로 남은 청년이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지독하게 자신을 몰아세워가며. 전장에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혹은 혼자 안전한 세상에 몸을 피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지휘관은 자신의 전사가 언제까지고 그렇게 날을 세우고 있길 바라지 않았다. 그런 자들의 결말이 대개 어떠한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생각을 돌릴 수가 없다. 하트랜드에서, 아카데미아에게서. 내가 어디에 있건 간에 내가 봐야 할 것은 그것뿐이야.”

  “그래서 조금도 쉬지 않을 생각인가? 그러다 정작 싸워야 할 때 제대로 싸우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지?”

  청년은 무어라 받아치려 했으나 상대가 더 빨랐다.

  “바깥에라도 나가보도록 해. 오늘 같은 날이라면 전쟁 같은 건 생각도 하기 어려울 테니.”

  “무슨 뜻이지?”

  “날을 헤아리지도 않는 건가. 나가보면 알게 될 거다.”

  지휘관은 뜻 모를 말과 함께 그를 내보냈고 청년은 어쩔 수 없이 바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황량한 세상에 익숙해진 그에겐 지나치게 화사해, 언제나 눈이 부시는 도시로. 오래도록 평화가 깨진 적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환하게 빛났다. 거리를 지날 때마다 청년은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얼굴과 마주했다. 포근한 웃음이 걸리는 그 밝은 얼굴은 고향에선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라, 청년은 문득 질투까지 치밀었다.

  평소에도 거리엔 사람이 많은 편이었지만 그 날은 유독 그랬다. 게다가 평일인데도 가족 단위로 나온 이들이 많았다.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들뜬 얼굴로 거리를 걷는 풍경은 동화 속 한 장면처럼 평온했다. 축제 같군. 북적이는 거리를 홀로 걸으며 청년은 생각했다. 그가 화사한 풍경을 하나하나 새기고 있을 때였다. 한 아이가 부모로 보이는 부부에게 가게의 물건을 가리키며 사달라고 조르자, 부부는 아이와 함께 가게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너를 위한 날인데.

  그제야 청년은 깨달았다. 오늘은 아이를 위한 날이라는 것을. 싸워 살아남는 것으로도 바빠 언젠가부터 날짜를 헤아리지도 않게 되었다. 자신을 위한 날조차 잊고 지내는 통에 휴일을 생각했을 리가 없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흘러, 그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를 위한 날이 돌아온 것이다. 전쟁을 거치며 아이라고 불리기엔 몸도 정신도 나이 든 청년이었지만, 챙겨주고 싶은 아이는 있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아이이길 포기해버린 아이들. 그가 사랑하는 두 사람.

  만약 내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조금 더 똑똑했더라면, 조금 더 능숙했더라면. 그래서 두 사람을 어떻게든 지켰더라면.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가정에 청년은 자주 괴로워했다. 그랬다면 두 사람은 자신을 닮지 않게 되었을까. 아이로 남아있게 되었을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라지만 청년은 차마 떨쳐낼 수 없었다. 그들은 조금도 다치지 않고 전쟁에 휩쓸리기 전 모습 그대로 남아주었으면 했기에.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들이 전쟁에 더 찌들기 전에 전쟁을 끝내는 것뿐.

  청년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다행히, 기억하던 대로 돈이 있었다. 연고자 없는 이방인인 그에게 지휘관이 내어준 것이었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말이지. 젊은 지휘관의 차분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청년은 가게로 들어섰다. 휴일을 맞아 온갖 선물로 가득한 내부를 훑으며 청년은 누이를 생각했고 친우를 생각했다. 지켜내지 못해, 이제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게 된 이들을. 한참이나 고민하다 고른 것은 결국 두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전할 길도 없는 주제에 괜한 미련으로.

  포장해드릴까요?

  점원의 말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곱게 포장된 선물이 그의 손에 놓였다. 가게를 나서고도 청년은 자신이 쥔 선물을 멍하니 내려다보다 돌아갈 곳에 가까워져서야 겨우 품에 넣었다. 언젠가, 두 사람을 되찾게 되는 날에 꼭 그들에게 이 선물을 안기리라. 늦게라도, 그들의 빼앗긴 어린 날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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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