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 들어서자마자 발견한 것은 다발째로 화병에 꽂은 프리지아였다. 화사한 색채의 꽃잎이며 은은한 향기가 바로 감각을 자극한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없었던 꽃이, 그것도 잘 포장된 다발이 화병에 꽂혀있는 이유라면 하나. 누군가가 선물한 것이다. 아버지는 꽃을 선물한다는 센스는 없는 사람이다. 가끔 소꿉친구가 꽃을 내밀긴 하나, 프리지아를 고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게 소거하다 보면 꽃을 준비한 사람은 한 명으로 좁혀진다. 화병이 놓인 테이블에 마침 그 사람을 짐작할 단서가 자리하고 있었다. 꽃을 배달할 때 꽃집에서 끼워주는 메시지 카드였다.

 

  『 히이라기 유즈에게.

  대회 수상을 축하하며.

 

  흘려 쓴 글씨의 주인은 뻔했다. 사실 프리지아 꽃다발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며, 다발의 크기며 메시지의 내용까지 매번 거의 비슷비슷했다. 삐뚤빼뚤한 필체도 마찬가지. 그동안 한 번도 보낸 이의 이름이 없었던 것은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리라. 아는 이가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꽃을 보내줄 정도로 섬세한 그 사람, 너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기조차 싫어했으니.

  눈앞에 네 모습이 그려진다. 창백한 얼굴과 표정 없는 얼굴. 낡은 코트를 단단히 여민 채 상대를 냉랭하게 내려다보던 청년. 혹은 전장에서 닳아버린 소년병. 너는 폐허가 된 도시에서 왔다. 네 고향에서 일어난 전쟁은 세계를 덮을 뻔했으나, 용감하게 나선 정예병이 결국 싸움을 끝냈다. 살아남기 위해 무장했던 너는 그렇게, 전쟁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지금 네가 평화 속에서 살며, 내킬 때마다 꽃을 보낼 수 있는 것도 그 덕분.

  “, 유즈. 그 꽃 이번에도 배달 왔더라고. 뭐라고 했지? 프리지아?”

  고개를 숙여 꽃향기를 맡을 때, 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또 그 사람이네.”

  “그 사람이 누군데?”

  “비밀.”

  “열렬한 팬이 생긴 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다시 방문을 닫았다. 아버지에게 너를 소개하기란 쉽지 않다. 낯선 남자여서가 아니라, 먼 이국에서 온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네가 어떤 인간이며 당신 딸과는 어떤 관계인지 이해시키려면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일 복잡한 게 그 아이의 이야기였다. 너의 누이. 아마도 네가, 껄끄러운 여자애에게 자주 꽃을 보내게 만든 이유이기도 한 사람.

  희망을 찾아 고향을 떠나왔다는 너는 전쟁이 끝나고도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잠깐 머무를 예정이었던 이 도시에 아직도 남아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누이가 이제는 없기 때문이다. 고향에 가면 분명 너를 따뜻하게 맞아주겠지만, 네 누이의 빈자리 또한 크게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네 누이는 전쟁의 끝에 희생되어서, 종전 후엔 사실상 그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다. 네 앞에서 그 이름을 꺼내는 순간 네가 또다시 절망에 떨어질 게 뻔하니까.

  거울 앞에 서자, 언젠가 네 친우에게서 들은 말이 머리를 울린다. 루리는 내 동료 슌의 여동생이야. 너는 루리를 정말 닮았어. 너는 이국의 여자아이에게서, 사라진 동생을 본다. 그 껄끄러운 타인이 자랄 때마다, 사라진 시점에 멈춘 누이의 성장까지 상상하게 될 것이다. 네가 누이를 닮은 이에게 꽃을 보내면서 정작 그 앞에 직접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누이의 부재가, 동생을 상기시키는 존재가 아직은 너에게 큰 고통을 안기기 때문이다.

  만일 네 누이와 닮지 않았다면, 완전한 타인이었다면. 네가 꾸준히 꽃다발을 준비할 일이 있었을까. 생각할 때마다 속이 텁텁해진다. 메시지 카드를 쓸 때 너는 한두 번쯤은 히이라기 유즈라는 이름 대신, 네게 훨씬 익숙한 이름을 쓰는 것을 상상했을 것이다. 쿠로사키 루리, 네 누이의 이름. 두세 번은 무대에 선 네 동생을 그려보았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의 상을 흩었을지도 모른다. 네 머릿속에 어떤 상상이 휘몰아쳤건, 마지막에 네가 맞닥뜨린 감정은 언제나 같았으리라.

  씁쓸함. 그리움. 그리고 옅은 절망.

  프로 듀얼리스트 자격을 취득하고부터, 대회에 나설 때마다 너에게 초대권을 보냈다. 시간 나면 한 번쯤 와줬으면 해. 매번 건넨 말에도 너는 한 번도 객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선명한 거절에 조금 슬퍼질 때쯤이면 꼭 프리지아 꽃다발이 배달되었다. 첫 번째 꽃다발과 함께 온 카드에는 바로 그 다음부턴 삭제된 문장이 하나 들어있었다.

  『직접 대회를 보러 가지 못한 것은 미안해.

  그런 말을 쓸 사람은 너밖에 없었으므로, 꽃을 보낸 이가 너라는 걸 그때부터 대강 알아챈 것이다. 그 이후로도 프리지아 꽃다발은, 그때와 같은 필체의 카드와 함께 배달되었다.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네가 객석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마다 하나씩.

  직접 대회를 보러 가지 못한 것은 미안해. 라니. 정말로 미안하다면 모습을 보여주면 되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이 관계에 어쩔 수 없이 쌓인 껄끄러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객석에 나타나주었으면. 무대를 보는 순간 동생이 떠올라 괴로울 것 같았다면, 꽃도 보내지 않는 것이 나았으리라. 이렇게 뻔한 행동을 계속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관계는 여전히 어색하고, 너는 동생을 닮은 이를 아직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한다.

  서로를 아예 모른 체 하고 살아갈 것이 아니라면, 상황을 바꿔야만 한다. 네 누이는 과거가 되었지만 너는 현재를 살아가기에 타인을 제대로 응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네가 아예 만나주지 않는 것을. 포장도 다 벗기지 않은 꽃다발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네가 어디서 지내는지는 알고 있다. 한두 다리만 건너면 너를 부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네가 응해줄 리 없을 뿐.

  너무 많은 것을 잃어 황폐해진 너는 홀로 살아가기 힘들 거라는 주변의 판단으로, 이 도시에서 그나마 너를 잘 아는 사람에게 맡겨져 있다. 전쟁이 한창일 때, 이곳에서 정예병을 결성하여 너를 포함한 전사들을 지휘했던 남자. 세계적인 대기업의 사장이기도 한 그 남자는 너를 회사에 두고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네가 가끔 회사의 일을 돕는다고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다.

  회사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너를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시작된 생각에 이내 걱정이 다닥다닥 붙었다. 외부인은 들어가는 것부터 난관이라는데, 가능할까?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서 들어간다고 해도 거의 틀어박혀 있을 너를 찾는 게 가능할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진 때였다. 갑자기 통신기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방 안에 놓인 통신기를 집어 들었더니 화면에 메시지가 떠 있었다.

  「유즈, 오늘 오후에 시간 있어?

  예전, 대회에서 대결한 걸 계기로 친구가 된 아이의 메시지였다. 시간 되면 OOO 건물 근처에서 만났으면 해서. 이번에 너랑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눈으로 메시지를 읽었을 뿐인데 그 애의 명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반가운 연락에 답장을 보내려다, 문득 메시지를 보내온 친구에 대한 사소한 사실을 떠올려냈다. 그 애는 네가 머무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학원에 다니고 있다 어쩌면 너와의 연결고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좋아. 오늘 만나. 친구에게 답장을 하면서 너를 떠올렸다. 우선은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메웠다.

  약속장소에 향했더니 친구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의 손에 이끌려 거리를 걷고 미리 점찍어둔 가게로 향하는 내내 즐거웠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까지 겹쳐 한참이나 재잘거리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변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눈길을 끈 것은 먹음직스러운 파이와 조각케이크였다. 한참이나 고민하여 몇 개를 골라온 친구는, 수확물을 자랑스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여기, 사와타리가 자주 가던 곳이라던데. 한 번 왔더니 괜찮은 것 같아서 널 데려왔지.”

  큼직하게 자른 케이크를 건네며, 친구는 설명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들뜬 기색이 선명하게 비쳤다.

  “LDS는 커서 그런가, 소문이 잘 퍼진다니  까.”

  “그러고 보면 마스미랑 사와타리 말곤 LDS 소속인 사람들이랑은 한참이나 안 만났네. 다들 잘 지낼까.” 

  “누구 소식이 궁금한데?”

  과연 친구는 바로 반응해주었다. 근황이 궁금한 사람이라곤 하나뿐이다. 언젠가부터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없었던 사람. 사장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이방인. 미리 생각해둔 대로 네 이야기를 슬쩍 꺼내보기로 했다.

  “마스미는 요즘 쿠로사키 만나?”

  “. 가끔 마주치긴 하지. 인사하면 받아주긴 하는데, 그뿐이야.”

  너무 과묵하다니까. 친구는 깔깔 웃으며 파이를 집었다.

  “그런데 쿠로사키는 왜?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았어?”

  “예전에 몸이 안 좋았다고 들은 것 같아서.”

  “이건 LDS에서 떠도는 얘긴데 말이야, 사실 이번에 쿠로사키가 엑시즈 코스 강사가 될 뻔했대. 구체적으로 말이 나왔는데 수락을 안 했다는 것 같더라고. 그 말은 뭐겠어. 잘 지내고 있단 거지.”

  “무엇 때문인진 몰라도 강사는 안 된 거네. 그럼 지금은 무슨 일 해?”

  “글쎄, 듀얼 분석이라던가? 사장을 조금 도와주긴 하나 봐. 실력이 좋으니 프로로 나갈 줄 알았더니 자격만 취득하곤 아예 방향을 틀어버린 것 같아.”

  “듀얼 분석이라면 경기를 많이 보고 다니겠지? 대회 열릴 때면 찾아갈 거고.”

  “그렇지. 저번 주에 스타디움에도 갔던 것 같고, 저번 달엔 또 다른 곳의 대회에 갔다고 들은 것 같아.”

  전부터 짐작하기야 했지만, 친구의 말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너는 지금까지 특별한 사정으로 객석에 나타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상대가 보내오는 초대권을 매번 외면하고서, 일부러 대회를 보러 가지 않은 것이다. 서운함이나 실망보다 역시하는 생각이 앞섰다. 확인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앞으로 너에게 접근할 기회를 찾아 하나씩 풀어가면 된다. 소년병 시절의 너는 불신과 경계가 강해 파고들 틈이 없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여유는 생겼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때 친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유즈는 대회 자주 출전하잖아? 쿠로사키랑 우연히 마주친 적 없어?”

  “, 마이아미로 돌아오고는 한 번도 쿠로사키랑 만난 적이 없어.”

  네가 부러 만남을 피하고 있다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타인에게 설명하기 힘든 것에 대해선 덮어두면 된다. 물론 그에는 너에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다행히 친구는 답하기 전까지의 짧은 침묵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참 보기 힘든 사람이라니까. 나도 가끔은 MCS 이전에 어떻게 쿠로사키랑 친했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해.”

  “그러게. 마스미랑 쿠로사키는 프라이드가 강한 것 외엔 별로 닮은 점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야.”

  “둘 다 LDS에서 엘리트였으니까. 그런 점에서 맞았던 거 아니겠어.”

  자신만만한 말에 웃음이 나왔다. 친구의 이런 당당한 면이 언제나 마음에 들었다.

  너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너에 대해 더 물을 것이 없었기에 자연히 화제를 다른 것으로 바꾸게 되었다. 다음부터는 사소한 대화가 쭉 이어졌다. 학교생활 고민이라거나, 요즘 한창 인기를 끄는 선수에 대한 생각이라거나. 몇 년 지기의 변화라거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주고받았다. 날이 어두워진 것 같아 시계를 보니, 약속장소에서 본 지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있지, 유즈. 쿠로사키가 신경 쓰인다면, LDS 견학 올래?”

  다음번에 또 만나기로 하고 가게를 나설 때, 친구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견학?”

  “LDS는 견학생에 친절해. 쿠로사키는 일단 LDS 소속이니까 운 좋으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더라도 음. 적당히 핑계 대서 불러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유즈, 네가 필요하다면 말이야. 친구의 붉은 눈이 반짝였다. 언제나 의욕적인 친구가 마침 남을 도울 일을 찾아 들뜬 모양이었다.

  “나 때문에 일이 커지는 건 아니지?”

  “아니. 사실 나도 쿠로사키를 만나고 싶어서 그래. 분명 친했었는데 이렇게나 서먹해진 건 찜찜하다고.”

  “그렇다면야 나쁠 것 없지.”

  기쁨을 숨기지 않고 답했다. 친구의 말대로만 된다면 자연스레 네 앞에 설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는다 해도 네 삶에 한 번 끼어들 수 있으니 거절할 이유 없는 제안이었다. 너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게 2년 전이었던가, 3년 전이었던가. 기억조차 불분명할 정도로 오랜만에 너를 보게 된다. 그동안 너는 어떻게 자랐을까. 줄곧 피해왔던 사람, 동생과 닮은 껄끄러운 여자애를 만난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너와의 만남을 상상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두근거림과 긴장이 마구 뒤섞였다. 그러고 보면 너는, 언제나 양면적인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다.

 

* * *

 

  친구는 제법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네 이야기가 나온 그 다음날, 학원에 나가자마자 관계자에게 견학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친구가 호언한 대로,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그 소식을 친구가 바로 전해준 것은 물론이었다. 히이라기 유즈가 온다니까 좋아하던데. 이번 주도 괜찮다는데, 넌 어때? 통신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친구의 목소리는 승전이라도 거둔 양 의기양양했다. 이렇게나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는데. 일이 너무 잘 풀려 조금은 겁이 날 정도였다.

  「쿠로사키는, 어떤 것 같아?

  그러니까, 일정 말이야. 조심스레 덧붙였다. 친구라고 너에 대해 모든 걸 알지 못하겠지만, ‘관찰 대상의 근처에 있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쥘 수 있게 해준다. 어쩌면, 약간의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서 끓는 기대를 모를 친구는 간결한 답을 돌려주었다.

  「당분간은 회사에 붙어있을 것 같아. 요즘 부쩍 자주 보여.

  「그럼, 다음주에 갈까. 나 이번 주는 일정이 있어서.

  「좋아. 우선 다음주 중이라고 말해놓을게. 그렇게만 하면 아마 학원에서 적당한 날 잡아줄 거야.

  「고마워, 마스미. 다음주는 언제든 괜찮으니까, 답을 들으면 나한테 말해줘.

  통신을 끊자마자 관심은 화병, 정확히는 화병에 꽂힌 프리지아로 옮겨갔다. 벌써 몇 번째로 받은 꽃다발이었더라. 달가운 선물은 아니지만, 조심스럽게 다룬 덕에 지금까지 꽃다발이 일찍 시든 적은 없다. 이번 것도 계속 물을 갈아주면서 자주 관심을 두면 한동안 방의 한쪽을 화사하게 장식할 것이다 노란 꽃잎을 들여다보다 문득, 한 번도 품은 적 없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왜 하필 프리지아였을까.

  집 근처의 꽃집만 해도, 장미를 비롯해 온갖 꽃을 팔고 있다. 선물용 꽃다발을 찾는다면 보통은 크고 화려한 꽃을 추천할 것이고, 한 종류의 꽃만 엮기보다는 여러 종을 한데 섞어주는 경우가 대부분. 프리지아, 그것도 노란색 프리지아 한 종류만 엮는 것엔 무언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프리지아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것일까. 혹시나 하는 생각에 프리지아의 꽃말을 찾아보았지만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순 없었다.

  프리지아. 노란색의 프리지아 다발. 한 번 의식한 때부터 그 의미를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껄끄러운 상대에게 보내는 꽃이라면 더더욱 메시지를 담지 않았을까. 너에게 직접 듣는 이상 모를 것이기에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혼자선 답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아 주변 사람에게도 의미를 묻고 다녔다. 몇몇은 애인이 생긴 거냐며 깔깔거렸고 몇몇은 사실은 무서운 저주일지 모른다며 장난스레 받아쳤다. 온갖 답을 들었지만 그 중 진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유즈, 답은 알아냈어?”

  그렇게 소득 없이 며칠이 지났다. 소꿉친구의 집에 놀러가 함께 간식을 먹고 있을 때 소꿉친구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앞뒤 없이 흘러나온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 애는 바로 덧붙였다.

  “, 요즘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다니는 거 있다며. 프리지아인가 뭔가.”

  “그거, 너희들끼리의 암호 같은 거니?”

  불쑥 들려온 목소리는 귀에 익은 것이었다. 그 애의 어머니가 핫케이크를 가져다주시다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든 것이다. 어른이 듣고 있었다는 사실에, 장난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입을 다물고 시선을 외면하고 있으니, 그 애가 눈치 없이 말을 건넸다.

  “엄마는 알지도 모르니까 한 번 물어봐.”

  입을 떼고 싶지 않았는데, 그대로 모른 척 하고 싶었는데. 아주머니의 얼굴에 걸린 웃음이 너무도 상냥해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 프리지아 선물에 뭔가 숨겨진 의미가 있나요?”

  “? 누가 프리지아를 선물하기라도?”

  “유즈 벌써 몇 번째 프리지아 꽃다발 받았다던데.”

  “유우야는 끼어들지 마.”

  “선물한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너무 부끄럽겠지? 아줌마가 생각하기엔 그 사람, 유즈를 많이 아끼는 것 같은데? 어떤 꽃이건, 꽃을 선물한단 건 상대를 기쁘게 해주고 싶단 뜻이야.”

  정말로 그럴까. 희망적인 해석에 오히려 자신이 없어진다. 기억 속의 너는 언제나 비극에 지친 소년병의 모습이다. 타인을 기쁘게 하기는커녕 저를 덮친 불행에 익 사할 것 같은 사람. 그 자리에 버티고 선 것만으로도 힘겨워 보이는 자. 전쟁이 끝난 후, 정예병의 리더였던 사장이 너를 맡기까지. 너는 얼마간 옛 정예병 동료들에게 맡겨졌다고 한다. 지금, 옆자리에 앉은 소꿉친구부터 시작해 몇 명이 순번을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너를 돌봤었다. 가만히 두면 언젠가 뚝 기능정지할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단 것이 그 이유.

  그러나 그 멤버들이 1번부터 마지막 번호까지, 딱 한 바퀴째 돌았을 때 뭔가 문제가 터졌다고 한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의 사건을 계기로 너는 아예 사장의 관리대상이 되어야 했다. 적어도 그때까지 너는 안정이 되지 않은 것이다. 시간이 제법 흐른 일이긴 하나, 네가 그때의 불안정함과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긴 어렵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사라진 동생을 연상시키는 자를 위해 힘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네가 보내온 꽃다발도, 실은 선물이라기보다 의무적으로 보내는 물품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아마 아닐 거예요. 그 사람은…….”

  나를 보면서 조금도 행복하지 않을 텐데. 혀끝에 걸린 말을 겨우 삼켰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봤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언제나 친절한 아주머니라 해도 예외는 없다.

  “유즈. 사람의 감정이란 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냐.”

  아주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론 동조할 수 없었다. 복잡한 심리가 얼굴에 드러난 것일까. 아주머니가 동물을 돌보러 가신 때, 소꿉친구가 속삭였다. 아무래도 엄마 답은 성에 안 차는 모양이네. 아니라고 답했지만 그 애는 영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그럼 유즈. 나한테만 슬쩍 말해줘. 꽃 보내준 사람, 누구야?”

  “짚이는 사람은 있는데 확인은 안 해봐서 몰라.”

  “그러지 말고. 혹시 모르잖아. 누군지 알면 내가 그 사람 심리 짚어줄 수 있을지.”

  “유우야한텐 말 안 해.”

  그 애에게 말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개인적인 일을 꺼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고, 둘째는 그 애 역시 너와 묘하게 얽혀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애는 너에게 단순히 옛 동료로 요약되는 사람이 아니다. 전쟁 끝에 돌아올 수 없게 된 네 친우와 쌍둥이처럼 닮은 자이기도 했다.

  예전, 그 애가 너를 얼마간 돌봤던 것은 그 애 나름의 책임감과 너에 대한 부채감 때문일 것이다. 너에게, 친우의 부재를 채워줘야 한다는 생각. 상실감으로 괴로워할 너를 보호해야 한단 마음. 이제 와서 그 애 앞에 네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 애에게 불필요한 무게를 지워주게 된다. 아마, 지금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과 비슷한 생각에 사로잡힐 것이다. 쿠로사키의 마음을 좀 더 신경 써줘야 하는데. 같은. 지금껏 자신을 위해서건 너를 위해서건 충분히 노력해온 그 애가 또다시 많은 것을 짊어지길 바라지 않았으므로, 네 이야기는 숨기기로 한다.

  “정말로 말 안 해줄 거야?”

  “확실하지 않은 건 말하는 거 아냐.”

  딱 잘라 거절하자 그 애는 더는 묻지 않았다. 뾰로통한 얼굴을 못 본 체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 것보다, 유우야. 요즘도 하트랜드 사람들이랑 연락해?”

  하트랜드란 네 고향의 이름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폐허였다는 그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그 애를 통해 주민 몇몇의 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 그 애가 네 고향에 불시착하면서 그곳 사람들을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어, 작년까진 연락을 이어갔다고도 들었다. 굳이 네 고향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곳 사람에게만 들을 수 있는 게 있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네가 머무는 곳이었지 너를 아는 곳은 아니었다. 그나마 너를 아는 사람, 옛 정예병 동료라거나 너를 보호하는 사장까지도 전쟁 전의 너에 대해선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과거의 너, 소년병이 아니라 평범한 청년이었던 너를 아는 사람은 고향 주민들이 유일할 것이다. 그들에게 너에 대해 물으면 어쩌면 조금은 너를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너에게 접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벽을 허물고, 내면에 파고들 단서를 찾을지도 그런 희망을 안고 꺼낸 질문에 다행히 그 애는 긍정의 답을 돌려주었다.

  “. 꾸준히 연락하고 있지. , 전할 말이라도 있어?”

  “하트랜드에 대해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데, 연락처 가르쳐줄래?”

  “. 그러고 보니 전에 알렌한테 빌린 거 아직 안 돌려줬네. 내 디스크로 알렌 연락처 찾아서 먼저 통화할래? , 돌려줄 물건 찾고 있을게.”

  연결되면 내 얘기도 좀 해줘. 그 애는 바로 급하게 방을 나서며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처만 알아내 집에서 혼자 연락해볼 생각이었는데.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에 바로 그 애의 통신기를 집어 들었다. 다음은 번호부에서 그 애가 알려준 이름을 찾는 것이었다. 제일 위쪽에 뜨는 이름이라 어렵잖게 찾아냈다.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누르자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연락처가 바뀐 것일까 슬슬 걱정이 될 시점에, 명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유우야. 무슨 일이야?

  통신기 화면에 떠오른 것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소년이었다. 몇 년 전 우연히 얼굴을 본 적은 있는 소년이었지만 그로부터 시간이 지난 탓인지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당장 반응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소년은 상황을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떠들었다. 나 지금 바빠서 화상 연결했는데 괜찮겠지? , 뭐야. 유우야가 아냐? 뒤늦게 상대가 누군지 파악한 소년은 눈이 둥그레졌다. 어색한 웃음을 걸치며, 인사부터 건넸다.

  「안녕, 알렌. 난 히이라기 유즈. 예전에 본 적 있지? 유우야는 잠시 다른 데 갔어. 너한테 빌린 물건 찾아서 돌려줄 생각이래.

  「, 그거. 나도 잊고 있었는데! 알려줘서 고마워. 그거 전해주려 연락한 거야?

  「그것만은 아니고, 물어볼 게 있어서 유우야 디스크 빌렸지.

  「물어볼 거라는 게 뭔데? 내가 아는 거라면 다 답해줄게. 내가 모르는 거면 내 옆의 사야카가 답해줄 거야.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킨다. 역시, 이전에 얼굴만 보았던 소녀가 화면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 애에게서 몇 번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아이이기도 했다. 얼굴만 보았을 뿐 제대로 만난 적 없는 상대에게 두 사람은 친절했다. 네 이야기를 꺼내도 큰 거부감 없이 답해줄 것 같다. 그럼 어느 것부터 시작해야 할까.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뒤엉켰다. 하지만 이 순간 제일 알고 싶은 것을 고르라 하면 간단해진다.

  「있지. 쿠로사키, 그러니까 슌은 프리지아 좋아해?

  결국 가장 먼저 꺼낸 건 내내 신경 쓰였던 것에 대한 질문이었다. 네가 메시지 카드와 함께 보내주었던 프리지아 꽃다발. 일단 말을 던지긴 했으나 사실 기대는 없었다. 너를 아는 사람이라고 모든 걸 꿰고 있을 순 없을 테니.

  「슌은 꽃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 아마?

  소년은 자신이 없는 듯 옆에 선 소녀를 돌아보았다. 답은 소녀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 동생인 루리 때문에 자주 사긴 했었지만. 보통은 노란 프리지아를 골랐어. 루리가 노란색을 좋아했었다나.

  루리가 대회에서 우승한 날, 프리지아 꽃다발을 안겨줬던 게 기억나. 그때 루리가 얼마나 예뻤는데. 소녀의 말을 듣는 내내 지금껏 받았던 꽃다발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프리지아. 그것도 꼭 노란색. 카드에는 대회 수상을 축하하며라거나 대회 참가를 기념하여같은 문구가 적혀있었고.

  「그런데 그건 왜?

  소녀가 물어왔지만, 머리가 정지한 것처럼 무슨 말을 돌려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입은 억지로 열었지만 소리는 쉽게 나오지 않았고.

  「아니. 그냥, 쿠로, 아니 슌한테 꽃을 선물할까 해서.

  간신히 답했을 때 그 애가 돌아왔다. 왜 그래, 유즈? 표정이 안 좋은데.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어떻게 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꿉친구의 집에서 거의 도망치듯 나와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방에 들어가 화병을 보는 순간 설움이 북받쳤다. 보통은 노란 프리지아를 골랐어. 루리가 노란색을 좋아했었다나. 루리가 대회에서 우승한 날, 프리지아 꽃다발을 안겨줬던 게 기억나. 소녀의 말이 머리를 쟁쟁 울렸다. 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동생을 닮은 사람에게, 동생을 위한 선물을 보낸 것이라고.

  네가 얼마나 동생을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는데. 네가 동생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도 자주 생각했는데. 네가 꽃을 보내기 전 동생을 생각하는 것까지도 상상했으면서. 마음 한편에선 최악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네가 어떤 특별한 이유로 꽃을 보내주고 있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대체가 된다는 것은 너무 비참한 일이니까.

  그러나 이제 명확해졌다. 네가 어떤 생각으로 지금까지 카드를 써왔는지. 왜 매번 프리지아 꽃다발을 보냈는지. 뻔한 결론에 숨이 막히면서도, 한편으론 이렇게 미리 알게 되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이런 것을 너에게서 직접 듣게 되었다면 충격이 몇 배는 되었을 것이다. 네 앞에서 울음이 터져 도망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던 때, 테이블에 올려둔 통신기가 진동했다. 화면을 들여다보니 며칠 전 만난 친구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유즈. 저번에 이야기한 견학 말이야. 화요일 괜찮아?

  화요일이라면, 이틀 후. 머릿속에 뒤엉킨 생각을 정리하기엔 충분히 긴 시간이면서, 기다리기에도 그렇게 지루하지 않을 정도였다.

  「괜찮네.

  바로 답장을 보내주면서 화병을 힐끔거렸다. 볕이 드는 자리에 놓인 프리지아는 아직껏 화사했다. ‘선물의 의도를 안 순간부터 바로 치워버리고 싶어진 꽃이었지만, 이틀간만 남겨두기로 마음먹었다. 이틀 후, 너에게서 답을 듣고 오면 깨끗이 치울 것이다. 그동안 받았던 메시지 카드와 함께, 꽃잎 하나 남기지 않고.

 

* * *

 

  이틀은 거짓말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화요일, 학교를 마치자마자 매일 같이 하교하던 소꿉친구를 떼어놓고 네가 머무는 회사 건물로 향했다. 세계적인 대기업이란 명성에 걸맞게 웅장한 건물은 언제 봐도 익숙하지 않다. 살짝 긴장한 채, 회사로 발을 들였다. 입구에서부터 제복을 입은 경비원과 마주쳤지만 미리 준비한 방문증을 제출하자 어려움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견학하기로 한 곳은 회사 직속의 학원. 너는 회사에서도 학원 강의실 근처의 방에 머문다고 하니 운이 좋다면 힘들여 찾지 않아도 너와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내원을 따라 학원 건물을 구경하면서도 생각은 자꾸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자꾸만 울리는 통신기라거나, 지난 몇 년간 우연히 스쳐간 적도 없는 너라거나. LDS의 펜듈럼 코스는 가장 늦게 만들어진 코스지만 꽤 인기랍니다. 지난 MCS에서도 펜듈럼 코스의 학생이 우승을 거두었지요. 안내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통신기로 시선을 돌렸다. 통신기가 계속 진동하는 건 친구가 보내온 메시지 때문이었다. 친구는 비밀 프로젝트라도 수행하는 것처럼 들떠서, 메시지로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유즈. 근처에 쿠로사키 있는 것 같아.

  10분 전의 메시지였다.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다시 통신기가 울린다.

  「붙잡아둘게. 나중에 휴게실 쪽으로 와.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마침 너는 회사에 있었고, 친구의 시야에 들어왔으며, 친구에게 곧 붙들릴 것이다. 견학을 명목으로 회사에 찾아온 자가 너를 만나러 갈 때까지. 휴게실 근처에 묶여있는 것이다. 너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까. 오랜만에 만났으니 인사부터 꺼내야 할까. 그게 아니면, 예의상 안부를 묻는 것이 먼저일까. 어차피 목적은 뚜렷한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까. 너를 만날 순간만 기다리며 걸음을 옮겼다.

  “……해서, 원하신다면 사장님을 만나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견학이 끝날 즈음 날아든 말에 순간 멈칫했다. 말하는 사람이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신경이 다른 곳에 쏠려있어, 바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던 탓이다.

  “?”

  “. 히이라기 씨는 프로 듀얼리스트니까요. LDS에서는 수강생을 키워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랍니다. 미래를 열어갈 프로 듀얼리스트도 지원하고 있답니다. 사장님을 찾아간다면 많은 도움을 받을 겁니다.”

  다행히도 그리 중요한 말은 아니었다. 아마 견학생에게 건네는 멘트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음을 들키지 않은 데 만족하고서 적당히 받아치기로 했다.

  “감사한 일이네요. 오늘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아서,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만나야겠어요. 그래도 괜찮겠죠?”

  “물론입니다. 사장님은 언제나 히이라기 씨 같은 유망한 선수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만 기억해주세요.”

  정중하게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안내원에게 하나, 물을 것이 있었다. 그동안 방문한 적 없어 낯설기만 한 건물에서 꼭 찾아가야 할 장소.

  “휴게실이 어느 쪽이지요?”

  “여기서 왼쪽 방향으로 쭉 가시면 나올 겁니다. 안내가 필요하신가요?”

  “아뇨. 직접 찾도록 할게요.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견학이 끝났다. 바꿔 말하면 이제 회사고 학원이고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단 뜻. 안내원이 이야기해준 대로 걷다 보니 학생들이 여럿 모여있는 장소가 있었다. 아마도 저곳이 휴게실이리라. 확신을 품게 한 것은 저 앞에 선 친구의 모습이었다. 친구는 저보다 조금 더 큰 남자와 마주본 채 무어라 대화하고 있었다. 친구의 말 군데군데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그렇지, 쿠로사키? 내 기억엔……했는데, 쿠로사키가 생각하기엔 어때? 계속해서 너의 이름이 들리고 있다. 그곳에 네가 있다. 두근거림과 긴장으로 아찔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친구 쪽으로 걸었다.

  이제 네가 선 자리까지 열 걸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제 다섯 걸음.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세 걸음. 남은 걸음이 줄어들수록 친구와 마주 보고 선 남자의 모습도 선명해졌다. 오랜만에 본 너는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모자를 푹 눌러쓴 너는 코트로 온몸을 감싸던 예전과 달리 가벼운 점퍼를 입고 있었다. 몸이 앙상해진 만큼 자세가 구부정해졌고, 어깨를 살짝 넘던 머리카락은 제법 길러 느슨하게 묶어 내렸으며.

  “유즈, 여기야!”

  과거와 다르게 쉽게 도망쳤다.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자리를 뜨려는 너를, 빠른 걸음으로 쫓았다. 하나. 너와 거리를 좁혔다. . 뒤에서 네 팔을 잡았다. . 팔을 잡으며 너를 돌려세웠다. 그 과정에 모자가 벗겨지며 네 얼굴이 드러났다. 핏기 없는 피부와 흐리멍덩한 눈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긴 했지만, 얼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힘겹게 붙잡은 사람은, 분명히.

  “찾았다.”

  쿠로사키, . 네 이름을 겨우 토해냈다. 너는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LDS에 있었네.”

  “바쁘신 분이 무슨 용무인지 모르겠어.”

  “묻고 싶은 게 있을 뿐이야. 나는.”

  너를 만나기만 하면 쏟아져나올 줄 알았던 말이 막상 널 붙잡으니 입 안에서 말라붙었다. 무엇 때문일까. 네가 저를 붙잡은 손을 뿌리치지도 않을 정도로 무기력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에게 답을 듣기 두려워서일까. 이 만남이 그동안 이뤄지지 않았던 건 사실 네가 기회를 주지 않아서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양쪽 모두 상대를 들여다보기를 거부하며 돌아섰던 것일지도.

  “나는…….”

  망설이는 것을 느낀 것일까. 너는 손을 풀고 도망치는 대신, 신경질적으로 용건을 묻는 대신 부드럽게 속삭였다. 사람들 앞에서 얘기할 생각은 없겠지. 안 그래? 손위형제 같은 능숙한 태도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 최상층으로 가자.”

  도망치지 않을 테니 걱정 마. 머릿속을 읽은 듯한 말이었다. 답 대신 너를 붙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최상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서 너는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그곳은 사람이 많아. 나 같은 건 알아보지 못해도 프로 듀얼리스트 히이라기 유즈는 알아보겠지. 무슨 얘기든, 거기서 하면 왜곡될 거다. 분명히 청자를 두고 하는 이야기인데, 네가 정면만 보고 이야기해서인지 혼잣말처럼 느껴졌다. 문득 과거에도 너와는 몇 번 스쳐갔을 뿐 제대로 대화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제대로 반응해줘야 할 텐데, ‘평범한대화는 이 관계에서 너무나 낯설어서 입을 뗄 수 없었다. 대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에도 너를 붙잡고 있었다. 여기에 있다고, 계속 듣고 있다고. 전하기라도 하려는 양.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너를 따라 내린 때. 왜 네가 이곳을 골랐는지 바로 이해했다.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지금의 방문자 둘 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너는 상대가 안전하게 도착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갔다. 얼핏 보기에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곳, 좋아하지?”

  너를 붙잡은 손을 풀고서 물었다. 가장 먼저 꺼낸 질문이 그런 것이었다니. 스스로도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성큼성큼 난간으로 향한 너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진 짐작이 가?”

  “네가 말해주기 전까진 몰라.”

  “프리지아. 네가 보냈지?”

  너는 긍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 침묵이 의미하는 것은 뻔했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기에 특별히 놀랄 것도 없었다. 정말로 듣고 싶었던 것은 지금껏 꽃다발을 보내왔다는 인정이 아니라 왜 그러했는지, 이유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조차 빤했지만 네 입으로 듣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 하필 프리지아였어?”

  어쩌면 마지막까지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네게 다른 뜻이 있었던 거라고.

  “왜 프리지아여야만 했어? 다른 꽃도 많은데 왜 하필? 그리고 왜 노란색 프리지아만 골랐던 거야?”

  그러나 기대는 무참하게 깨지고 만다. 너는 답하기는커녕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의문을 하나하나 꺼내도 너의 시선은 저 아래에만 꽂혀있다. 도시의 풍경을 보기 위해서건 외면하기 위해서건 상대를 등진 채, 입도 떼지 않는다. 이것은 대화가 아니다. 같은 자리에서, 독백을 하고 있을 뿐.

  “도망치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건 내 말에 제대로 답해주겠단 거 아니었어?”

  대답해, 쿠로사키.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다섯 걸음이 남았을 때. 너는 침묵하고 있었다. 네 걸음. 너는 살짝 고개를 돌린다. 세 걸음을 남긴 때. 네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두 걸음. 네 입이 열렸고.

  “그건.”

  한 걸음. 너와의 거리가 한 걸음으로 좁혀졌을 때 네 말을 자르며 물었다.

  “루리가 노란 프리지아를 좋아했으니까?”

  그 말을 직접 꺼내는 것은 제법 비참했다. 결국 너에게 누이의 대체로 취급되었다고 스스로 의심하는 셈이니. 네 동생이 먼 이국에서나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면 차라리 나았다. 너에게 잠깐 그리움을 투영할 대상이 된 것이라고 위안할 수 있었다. 네 동생은 이미 환상처럼 사라진 사람이기에 모든 것이 몇 배로 비참해진다. 너는 존재하지 않는 동생을 살아있는 사람에게 투영하는 것이 되고, 지금 네 앞에 선 자는 망자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도, 동생을 잃은 네가 얼마나 무력해졌는지 알기에 드러나게 원망할 수도 없다.

  “나는.”

  “내 듀얼엔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으면서, 다 끝나고서야 루리에게 챙겨줬듯이 꽃다발을 보냈어. 그것도 루리의 취향에 맞춰서!”

  왜 한 번도 오지 않은 거야? 나를 보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듀얼 분석 때문에 다른 듀얼을 보고 다니기까지 했다면서 왜 내 듀얼은 봐주지 않았어? 네 머릿속의 나는 루리처럼 열네 살에 멈춰있어야 하니까? ‘루리 같은 애가 잘 살아가는 걸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거야? 말을 쏟아내는 내내 네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듣고 싶지 않아서. 편리하게 생각하고 적당히 외면하기 위해 지금까지 만남을 피했다. 서로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한참을 보냈다.

  “날 정면으로 봐줘.”

  그러니 지금이라도 상대를 응시하며 서로의 말을 듣고, 삐걱거리는 것들은 서로 맞춰가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된 대화이고 이해이며, 성숙한 인간의 태도임을 이제는 안다.

  “네가 먼저 내 삶에 뛰어들었잖아. 아무것도 모르던 내 삶을 뚫고 들어와서, 전쟁을 말하고 이차원의 존재를 알려주었잖아. 그랬으면 나를 제대로 바라봐야지. 내 삶에 그만큼의 파란을 일으켰으면…….”

  그래야 공평하잖아. 말을 맺었을 땐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너는 손을 뻗어 가만히 눈물을 닦아주었다. 보호자였던 시간이 길었던 너는, 힘겨워하는 사람 앞에서는 언제나 어른스러웠다. 너의 메마른 친절 때문인지, 속에 담아둔 것을 전부 쏟아내어서인지, 거칠어진 숨소리도 흘러넘칠 듯한 감정도 차차 잠잠해졌다. 침착하게 기다리던 너는, 눈물이 더 흐르지 않게 되었을 때 입을 뗐다.

  “네가 초대권을 보내주었을 때.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어.”

  담담하게 이야기할 때 네 시선은 청자에 향해 있었다. 드디어 독백이 아니라, 대화를 하려는 것이다.

  “무엇을?”

  “네 삶에 끼어드는 것 말이야. 무슨 자격으로 네 앞에 서야 하는 걸까? 친구였던 적도 동료였던 적도 없는데 어떤 사람으로 나타나야 하는 걸까? 네가 말한 대로, 난 처음부터 네 삶을 찢고 들어갔다. 그러니 더 조심스러웠어야 했던 거야. 무엇보다…….”

  망설이는 기색이 있었다. 그 다음에 흘러나올 이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지만 네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마구 쏟아지는 말을 네가 끝까지 들어주었던 것처럼. 과연 너는 약간의 침묵 끝에 짐작했던 이름을 토해냈다. 루리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우리는 마냥 깔끔할 수 없는 관계였지. 건조한 목소리에서, 그동안 너를 괴롭혔을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너는 회사에 머무는 동안 많은 것을 홀로 삭혔으리라. 타인 앞에서 실수로라도 쏟지 않을 수 있도록.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보다 그 덤덤함이 더 처참하게 느껴졌으나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잇는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루리를 의식하게 되는 일이 싫었다. 내가 루리 때문에 널 만난다 생각하고서 너 스스로 루리에게 매이게 되는 거 말이야. 그래서 한동안 너를 일부러 피했지. 그래도 너에게, 네 호의를 완전히 거절하는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 대회 때마다 꽃을 보내기 시작했고.”

  “네가 보낸 꽃이란 건 바로 알아차렸지만, 네가 보내오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기쁘지 않았어. 무슨 생각이건 속에 담아두기만 하면 상대는 알지 못해. 그러니.”

  말을 해주는 게 좋았단 거지? 너는 조심스레 물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동안 내내 마음에 담아두었던 의문을 다시 꺼냈다.

  “그럼 프리지아는?”

  “그건 확실히 내 잘못이야. 그냥 습관적으로, 제일 익숙한 꽃을 골랐던 것이거든. 그 전까진 루리에게만 꽃을 안겨줬었으니까, 프리지아가 먼저 눈에 들어왔지.”

  “쉬운, 답이네. 정말로 쉬운 답이었어. 난 사야카에게까지 답을 물었었는데.”

  “내가 한 번만 제대로 이야기했다면, 달랐을까.”

  “물론. 달랐겠지. 애초에 이렇게까지 마음을 썩히며 빙빙 돌아올 필요가 없었어. 네가 꽃을 보낼 때 난 꽃을 잘 몰라서 내 눈에 예쁜 것을 골랐어라고 한마디만 더 적어주었거나. 아니면 카드에 네 이름이라도 제대로 써주었다거나. 가장 쉬운 길은, 한 번이라도 내 경기를 보러 와주는 거였어. 그럼 난 널, 그렇게 의식하진 않았을 거라고.”

  그랬다면 오해도 없었다. 서로의 진심을 바로 받아들일 순 없었더라도 조금씩 상대를 인정하고 가까워질 수 있었으리라. 그동안 상대를 생각한다고 침묵한 것이 오히려 상대에게 마음의 짐과 상처를 남길 뻔했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이야기가 나온 게 다행이었다. 너는 도망치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상대의 말을 들어주었으며, 다소 늦은 시점이긴 했지만 속마음까지 털어놓았다. 이 관계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그동안 괜한 일로 마음을 쓰게 했군. 미안하게 됐어. 이렇게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직, 안 끝났어.”

  단순히 사과를 듣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어렵게 대화를 시도한 것도, 너에게서 솔직한 답을 들으려 노력한 것도 그 이상을 바라서였다. 일부러 너를 찾아오기 전까지, 너를 떠올리면 언제나 처음 만난 때, 열일곱 살 소년병의 모습으로만 그려졌다. 이미 전쟁에서 벗어난 것도 그때보다 나이가 든 것도 아는데도 머릿속 네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네가 지금의 모습, 스물에 가까운 청년의 모습으로 각인되기 위해서는 계속 마주치고, 부딪치고, 마주 서야 한다.

  “앞으로 내가 참가할 대회는 많아. 언제라도 좋으니 한 번, 보러 와줘.”

  이제 너는 눈앞에 선 사람에게서 동생을 닮은열네 살짜리 소녀가 아니라, 열여섯 살의 프로 듀얼리스트를 보아야 했다. 용기 내어 제안한 것은 그래서였으나, 너는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괜찮겠어? 자신 없는 목소리에서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분명, 너는 편한 상대가 아니다. 네 누이라는 기묘한 연결고리 때문에라도, 너에게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미 결심은 서 있었다. 그게 싫었다면 내가 지금까지 너한테 초대권을 보냈을 것 같아? 살짝 웃어주며 말하자 너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거부감은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뭐가 어려운 거야?”

  “네 문제가 아냐. 얼마 전에 사장과 상담을, 했거든. 최근 몸이 안 좋아져서 듀얼 분석 같은, 체력 소모가 큰 일은 곧 그만두기로 했어. 일부러 모른 체한 처음 두세 번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네 경기를 보지 않은 건 그 때문이기도 했지.”

  혹시라도 객석에서 몸에 문제가 생긴다면, 네 무대를 망칠 게 걱정되어서. 네 목소리는 지나치리만큼 덤덤했다. 문득 회사에 들어가기 직전 네가 얼마간 입원해 있었다던 소꿉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못 보던 새 안쓰러울 정도로 마른 몸과 나른해진 눈빛도 마음에 걸린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더 나빠진 것일까. 네 상태를 살피지 않은 게 조금 미안해져,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던 때. 네 입술이 먼저 열렸다.

  “그래도 하루. 가능하다면 하루쯤은. 네 무대를 보러 가도록 노력해볼게.”

  너무 늦게 되면 기회를 잃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때, 녹색을 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난간을 등지고 선 네 얼굴에 옅은 웃음이 걸린다. 이전의 너라면 위태로워 보였을 모습이 이번엔 조금도 불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비로소 머릿속의 네가, 쿠로사키 슌이 열일곱 살의 소년병에서 평범한 청년으로 바뀐다.

  아. 이제 되었다. 이제는 너를 떠올리면서 씁쓸함도 슬픔도, 부채감도 들지 않을 것이다.

  최상층의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안도감이었다.

 

* * *

 

  그 주의 마지막 날에는 두어 달 전부터 잡힌 일정이 있었다. 친분이 있는 선수가 주관하는 자선행사의 이벤트 경기에 나서는 것이었다. 공식전이 아니니만큼 승패에 대한 부담이 적은 데다 상대 또한 잘 아는 사람이라 큰 긴장 없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분명 이벤트 경기라고 설명해두었는데. 객석에 히이라기 유즈란 이름이 붙은 응원 팻말이 몇 개나 보였다. 소꿉친구와 아버지를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이 부러 찾아와준 것이다. 다들 유별이라니까. 가볍게 웃어버리고 경기를 시작하려던 때였다. 스타디움의 문이 닫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들어온 사람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녹색을 띤 머리카락에, 금빛 눈을 가진 남자. 낯익은 사람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만나고 온 사람. 그 전까지 대화를 피하다 겨우 오해를 풀었던 너. 가능하다면 하루쯤은 네 무대를 보러 가도록 노력해볼게. 네 메마른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그 날의 약속을 너는 지켰다. 상대가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이번 달 내의 일정 중에서도 가장 먼저 치러지는 경기를 보러 와준 것이다. 너를 발견하자마자 머리를 친 놀라움은 이내 기쁨으로, 다시 감사로 바뀌었다. 어렵게 찾아와준 사람을 위해서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이벤트 경기이지만 최선을 다해 대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일까. 승리를 거둔 때 객석에선 열렬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공손하게 인사하고 무대를 내려올 땐 너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만족으로 들뜬 채였다. 잔뜩 흥분한 아버지에게 안기고, 소꿉친구의 축하를 받은 후. 객석을 몇 번이고 살폈다. 너에게 제대로 인사하고 싶어서였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끝내 너를 찾지 못했다. 승부가 나기 직전까지도 네가 살짝 보였으니 경기를 끝까지 관람하긴 했겠지만 너에게서 직접 축하 인사를 듣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견학을 핑계로 너와 만나게 해준 친구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줄 것이 있으니 중앙공원으로 나와줄래? 몇 번이나 다시 읽어도 별다른 단서가 없어, 호기심을 안은 채 공원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는 만나자마자 불쑥,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거. 쿠로사키가 너한테 주고 싶어 했던 거래. 직접 줄 상황이 안 되어서 나한테 대신 전해달라고 한 거야.”

  뜻밖에 네 이름이 나와서 고개를 갸웃거렸더니 친구가 설명을 보탰다. 쿠로사키는 사장에게 부탁하고, 사장은 내가 너랑 친한 거 아니까 나한테 맡긴 거지. 시들기 전에 주려고 급하게 연락했어. 친구의 말을 듣는 내내 시선을 꽃다발에 두고 있었다. 네가 준비한 것이라고 듣고 보니, 하나 특별하게 느껴지는 점이 있었다.

  “……이번엔 장미네.”

  이번 꽃다발은 지금까지 받은 것과는 달리, 분홍색의 장미가 예쁘게 엮여 있었다는 것. 다른 사람이 아닌 네가 선택한 꽃이라면 이번에야말로 무언가 의미가 있을 터였다. 자세히 살피니 꽃을 묶은 자리에 작은 카드가 끼워져 있었다. 어쩌면 특별한 메시지를 담았을지도 모를 것.

  “‘이번엔?’”

  “아무것도 아냐. 장미를 받는 건 처음이어서.”

  카드를 살그머니 뽑아 주머니에 숨기며 둘러댔다. 친구는 더 묻는 대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있지, 쿠로사키 말이야, 네 듀얼 보러왔었어.”

  “. 알고 있어.”

  “네 듀얼 끝나자마자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겼대. 지금 입원중이라고 들었어.”

  “쓰러졌다고?”

  “최근 들어 몸이 나빠졌다더라고. 워낙 말이 없는 데다 원래 잘 돌아다니지 않는 편이니 그런 줄은 몰랐지.”

  네 창백한 얼굴이, 선이 가는 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몸이 좋지 않아서 하던 일을 그만두려 한다던 네 말도 머리를 쳤다. 경기를 보러 와주는 것만으로도 약속은 지킨 셈인데. 책임감이 강한 너는 마지막까지 객석을 떠나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이다. 몸의 이상신호를 느끼면서도 끝까지 버티다, 승부가 난 후에 무너졌으리라. 객석에 소란이 없었던 걸 보면 너는 승리를 확인하자마자 경기장을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승자가 스포트라이트를 오롯이 받을 수 있도록.

  “, 많이 안 좋은 것 같아?”

  “사장은 상세하게 이야기해주지 않았어. 안정을 취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만 했지.”

  언제든 문병 가도 된다던데. 어디인지 이야기해줄까? 친구의 말에 네가 입원한 병원과 병실 호수를 받아적었다. 면회가 가능하다면, 그렇게 상태가 나쁜 편은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친구와 헤어졌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방문을 닫아걸고 외투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는 것. 카드를 펼치자마자, 이제는 익숙한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다만 카드 자체가 작아서인지, 전할 말을 최대한 간결하게 쓰는 것이 네 습성인지, 단 두 문장만 적혀있었다.

 

  『 히이라기 유즈에게.

  너에게 가장 어울리는 꽃을.

 

  그동안의 서운함을 풀어내는 데는 그 두 문장으로 충분했다. 카드를 수첩에 끼워두고서, 바싹 마른 프리지아를 화병에서 꺼내 거실 벽에 걸었다. 다음은 기분 좋은 선물을 예쁘게 전시하는 일이었다. 탐스러운 장미 다발을 포장째로 화병에 꽂았다. 큼직한 분홍색 꽃송이가 투명한 화병에 잘 어울렸다. 과연 마지막에 어울리는 화사함이었다. 네 속내를 들여다볼 기회는 없었으나, 이번의 장미 다발이 너에게 받는 마지막 선물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 너는 꽃다발을 준비할 일이 없을 것이다. 상대와 제대로 이야기하는 법을 익힌 것은 물론 그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게 되었으니, 꽃으로 마음을 전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이번엔 너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는 것이 어떨까. 꽃집에서 한 송이 한 송이 다른 종류의 꽃을 골라 하나로 엮는 것이다. 조화라곤 찾아볼 수 없을 괴상한 꽃다발을 상상하고 웃었다. 그런 것이라면 분명, 병실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낼 너에게도 제법 재미를 줄 것이다.

  다음주에, 가능하다면 소꿉친구와 함께 네 문병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애는 너에게 친절하니 아마 이야기만 꺼내면 같이 가겠다고 나서리라. 꽃다발은 문병 당일에 준비한다 해도, 카드는 미리 써둘 수 있다. 오랜만에 장난을 칠 생각에 키들거리며 카드와 펜을 꺼냈다. 맹금의 이름을 가진 너를 위해 날개 장식이 붙은 카드를 고르고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메시지를 쓴다.

 

  『 쿠로사키 슌에게.

  그동안 속을 썩인 복수로, 눈을 뗄 수 없을 꽃다발을 준비했어.

  빨리 나아서 이걸 안고 퇴원하길 바라.

 

 

 

Posted by 현소야 :

 

 

  너를 만나기 전부터 너를 알고 있었다. 이름은 물론, 생김새와 취미, 생활습관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꿈꾸는지도. 타인이 얻기엔 다소 많은 정보를 일찍부터 꿰고 있었다. 너를 파헤치려 했던 결과는 아니었다. 너는 원래 관심 범위 밖에 있었으며, 상부가 표적으로 삼은 소녀와 우연히친밀한 사이였을 뿐이다. 소녀는 너를 퍽 좋아했는데, 애초에 그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뿐인 가족, 그것도 자신을 키워주다시피 한 손위형제. 그것만으로도 너는 소녀의 애정을 사기 충분했다.

  조금은, 질투가 날 정도로.

  소녀는 걸핏하면 네 이야기를 했다. 오빠는 프로 듀얼리스트가 되는 게 꿈이래요. 꿈으로만 남진 않을 거예요. 듀얼 학원끼리 붙으면 스페이드교 대표로 나선다니까요. 그 카이토의 라이벌로 취급될 정도니까.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 거겠죠. 그렇게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마다 소녀는 들뜬 얼굴이었다. , 저와 닮았냐고요? 글쎄요, 사람마다 다르게 얘기해서. 전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사진 보실래요?

  너를 알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표적>인 소녀와 친해지려면 너에 대해서 들어야만 했다. 소녀가 흘리는 일상의 대부분에 네가 끼어있었으므로. 상부의 명령은 간결했다. 이름만 몇 번 들어본 먼 도시로 향해, 그곳에 침투하여 표적을 찾아낸다. 다음엔 표적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은 후, 꾀어내 납치해라. 그 여자아이를 포획해갈 사람은 따로 준비해두었으니 유인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어렵지 않은 명령에서 그나마 가장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소녀의 마음을 사는 일이었다. 표적에게 친절한 사람으로 각인되어 믿음을 얻어야만 언젠가 소녀를 꾀어낼 수 있을 테니.

  [마술사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우리 남매, 닮은 것 같아요? 어느 날 소녀는 사진을 내밀며 물었다. 사진 속 소녀의 곁에는 그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그것이 처음으로 본 너였다. 소녀의 오빠, 표적의 곁을 지키는 성가신 존재. 소녀가 그렇게나 자주 들먹이던 오빠는 상상하던 모습보단 평범했다. 얼굴에 걸린 어색한 웃음이며, 잘 꾸민 소녀와 대조되는 수수한 옷차림에 고개를 갸웃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렇네요. 찬찬히 들여다보면 제법 닮았어요. 루리 양과는 이미지가 많이 다른 편이긴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리 닮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소녀의 기대에 어울려주고 싶어 적당히 답했다. 과연 소녀는 단정한 얼굴 가득 웃음을 걸쳤다.

  [남매니까요. 가족은 어떻게든 닮게 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많은 가족이 서로를 좋아하는 걸까요? 함께 살아가면서, 가족이란 이름으로 얽히면서 닮아가기 때문에?]

  루리 양은 오빠 얘기를 참 자주 해요, 알고 있나요? 남매간에 정이 깊은 모양이에요. 덧붙인 말에 소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궁금해지는데, 언젠가 소개해줄래요? 당신의 오빠.]

  그때 소녀는 웃는 낯으로 냉정한 답을 흘렸다. 아니요.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라고.

  너무 명백한 거절이라, 이유조차 물을 수 없었다. 너와 만나는 걸 소녀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었다. 바로 그 이유에서, 너는 얼마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소녀가 제법 애정을 품고 있는, 그럼에도 몇 번 만난 이방인에겐 소개하고 싶지 않은 사람. 소녀의 설명을 정리하자면 상냥한 동시에 제멋대로라는 사람. 분명 자랑스러워함에도 타인에게 깊이 알려주지 않으려는 자. 너를 대하는 소녀의 태도도, 너에 대한 설명도 뜯어볼수록 모순적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머리를 치는 의문이었다.

  너를 좀 더 깊이 알아보고 싶었으나,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첫째론 표적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얼굴을 많이 노출시켜선 안 된다는 상부의 지침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목적이 끝나면 도시를 떠나야 할 처지 때문이었다. 소녀가 살던 도시를 전쟁터로 만들고서, 소녀를 상부에 넘긴다는 목적까지 달성한 후. 소녀 때문에 침투했던 도시를 떠나며 문득 네 생각을 했다. 표적의 오빠, 정보는 많은데도 뚜렷한 이미지가 잡히지 않는 남자. 끝내 제대로 접근하지 못한 존재에 대한 아쉬움보다 쓸쓸한 감상이 앞섰다. 전쟁이 일어났으니 아마, 그 남자도 죽었겠지. 그게 아니라도 곧 죽겠지. 하고.

  뜻밖에도 너는 살아남았다. 이미 지옥이 된 고향을 떠난 덕분이었다. 또 다른 나라에 침투하여 첩자 노릇을 하던 때, 네가 갑자기 시야에 들어왔다. 주위로부터 두려움을 사는 이방인으로. 잔뜩 무장한 청년으로. 사람들은 네가 먼 곳에서 온 저항군이라고만 했다. 출신지라는 곳은 엑시즈, 하트랜드 그 나라 사람들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지명에 가슴이 뛰었다. 그곳은 네 고향의 이름. 모든 것이, 들어맞는다. 이름도, 외모도. 소녀와 친분을 쌓을 때 알게 된 것과 일치했다.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졌고 금빛 눈엔 경계가 짙게 깔려있었으나, 너는 소녀의 사진 속 오빠가 틀림없었다.

  사람들은 너의 이야기를 쉽게 흘렸다. 침략군이 고향을 짓밟았다거나, 누이가 적에게 납치되었다거나.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청년이 짊어지기엔 너무 음울한 이야기가, 그 무게만큼의 연민이 네가 가는 곳마다 따라붙었다. 네가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타인을 의식했다면 분명, 연민 이외에 진득한 시선도 느꼈을 테니까. 비극의 주인공에게 어울리지 않는 호기심과 괴상한 관심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잠깐 잊었던 관심은 너를 만난 순간 되살아났다. 어떻게든 핑계를 대 접근하려 했더니 마침 행운이 찾아왔다. 너를 만난 나라에서 <침략군>에 맞서기 위해 조직한 정예병에 너와 함께 들게 된 것이다. ‘동료로서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너는 어떨까. 네 누이가 흘린 설명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정예병으로 출격하기 직전, 네게 악수를 청했을 때 머리를 메우는 것은 그런 생각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랜서즈 동지니까, 잘 지내보자고. 쿠로사키.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더니, 너는 못마땅한 얼굴로 살짝 손을 내밀었다 곧 거두어갔다.

  [동지란 말은 그렇게 함부로 붙일 게 아냐.]

  냉랭한 말엔 타인에 대한 짙은 불신과 경계가 내비쳤다. 전쟁에 찢긴 네 마음을 얻긴 쉽지 않으리라 생각하기야 했지만 당시엔 네게 의심을 사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네 누이를 완벽히 속였다는 것, 그녀의 삶에 무해한 사람으로 남았단 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네 누이 앞에 선 때나 네 동료가 된 때나, 첩자 역을 수행하고 있단 점도 자신을 키웠다.

  네가 적으로 삼은 침략군, 너의 고향을 짓밟은 군대는 이쪽에겐 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지이자,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진짜 자리이기까지 했다. 애초에 너와 함께 정예병에 소속되려 노력했던 것도 첩자로서 모두를 속이기 위해서였으니. 상부에서 원하는 정보를 전부 캐내면, 첩자 역을 종료할 때가 되면 정예병에서 이탈하게 된다. 극이 끝난 때 배우가 무대에서 내려오듯. 동지인 체 했던 이들과 말끔하게 끊어진다. 정예병에 들어갈 때부터 정해놓은 결말이었다.

  언젠가 네가 이탈자의 정체를 눈치챌지도 모르지만 네 누이와의 일을 알아차릴 리 없다. 상부의 지침에 따라, 네 누이를 제외하곤 네 고향 사람들에게도 인상을 남기지 않았으니. 그럼 너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불공평한 관계가 아닌가. 한쪽은 통성명하기 전부터 상대를 알고 있는 데다 이미 상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다른 쪽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른다니. 언뜻 동등해 보일지 모르나 정보의 양도 상대에게 입힐 수 있는 타격의 정도도, 네가 몇 배는 불리했다.

  그러니 오만해졌던 것이다. 네가 전장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위험을 감지하는 데 특화되었다는 뜻인데. 직감으로든 예리한 관찰력으로든, 너는 얼마든 주변 사람마저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도.

  동료로서 네 곁에 서게 되었단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정예병에서 이탈하게 된 탓이었다. 정예병으로 출격하자마자 낯선 이국에서 뿔뿔이 흩어지게 된 바람에 너를 관찰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겨우 전원이 모였을 때도 네가 마음을 닫아걸고 있어 얻어낸 정보가 거의 없었다. 너의 동료였던 짧은 시간 동안, 너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이라곤 전쟁이 남긴 황폐함 정도. 이미 듣고 온 것이 있는데도, 너라는 인간은 함께할수록 선명해지기는커녕 흐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네 누이가 말해주지 않은, 전쟁 이후의 네가 너무 뚜렷했기 때문이리라.

  너에게서 전쟁을 걷어내면 무엇이 남을까. 원래의 너는 어떤 인간이었을까. 답 없는 의문은 언제나 야릇한 감상으로 끝났다. , 네 삶에 너무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말았구나. 조금 유감이네. 그 짤막한 감상에 죄책감이 깃들어 있었는지는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있었다 해도 의미는 없었으리라. 네게 드리운 그림자만큼, 이쪽도 똑같이 돌려받았으니까.

  계획보다 빠르게 정예병에서 이탈한 것은 너에게 패해 모든 것을 잃어서였다. 언젠가부터 의심 섞인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던 너는 둘이서 대결할 일이 생기자마자 적의 첩자라는 확신을 안고 덤벼들었다. 훈련받지 못한 저항군 따위 쉽게 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는 끈덕지게 버티는 것만이 아니라 첩자의 위장까지 벗겨버렸다. ‘아군앞에서, 타인의 손에 그동안 숨겨왔던 것이 공개되는 것. 진짜 소속과 속셈까지 단번에 들통나는 것. 첩자로선 최악의 결말이었다.

  용서 없이 몰아치는 너의 공격은 분노를 연료 삼아 점점 거세져만 갔다. 네 분노가 향하는 대상은 명백했다. ‘침략자가 보내온 첩자. 네 고향을 짓밟은 군대와 같은 부류의 인간. 정체를 안 것만으로도 공멸할 각오로 공격하는 너인데, 덮어둔 죄까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네 공격을 막아내다 든 생각이었다.

  누이의 이야기를 꺼내면 너는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무너질지도 모른다. 혹은 상당한 충격으로 흔들릴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너를 추락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 번도 너를 제대로 파악한 적 없는 타인으로서, 완전히 잘못 판단했지만. 경악은 짧았고, 너는 이내 냉정해져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공격 지시를 내리는 네 얼굴에 언뜻, 네 누이가 겹쳐지는 듯했다.

  . 그 애.

  그 순간, 내내 외면하고 있던 것이 머리를 스쳤다. 네 동생의 미래. 상부에 넘겨진 후, 열너댓 살짜리 소녀가 감당해야 할 것들.

  그 애, 프로페서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네 공격을 정통으로 맞고 바닥을 나뒹굴 때, 머리를 메운 감정은 울분도 분노도 아닌, 씁쓸함이었다. 그리고 너는, 비극을 깨지 못하겠구나. 굳이 상부에 묻지 않아도, 예언을 찾지 않아도 너희 남매의 미래는 뻔했다. 두 명 모두, 반드시 불행해진다. 소녀는 돌아오지 못하고 너는 누이를 되찾지 못할 테니까.

  너의 미래를 본 그 순간부터, 너에겐 도무지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네가 주먹을 휘둘러도 복수를 하겠다 덤벼들어도, 막을 길은 없었다. 아니, 저항할 의지조차 없었다. 네 모든 감정을 받아주어야 한다는 생각과, 처분당해도 좋다는 무력감에 휩쓸린 것이다. 그러나 네가 누이의 일을 알게 된 그 날부터 지금까지, 너는 한 번도 제대로 복수한 적이 없다. 그 날은 주위 사람들에게 가로막혔고, 그 다음부터는 번번이 엇갈렸다. 종전 후 겨우 너와 다시 마주쳤을 때. 너는 오래 앓은 사람처럼 망가져 있었다. 음울한 예언이 실행된 탓이다.

  전쟁은 정예병의 승리로 끝났다지만, 그뿐. 네 누이는 전쟁 끝에 흔적도 없이 흩어졌고, 네 나라를 덮쳤던 군대는 별다른 처벌 없이 세상에 섞여들었다. 소중한 사람을 죄 잃고 돌아온 너는 그 씁쓸한 현실에 침묵해야만 했다. 세상 사람들이 전쟁의 흔적을 하루라도 빨리 지우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종전 직후 한두 번 침략군 처벌을 주장했다던 너는, 세상 사람들의 외면과 압박 속에서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세상은 평화로워졌으나, 삶이 비극이 된 너는 조용히 말라갔다. 고향이 아닌 먼 이국에, 정예병 동료들을 만난 도시에 머물며.

  전쟁이 끝났음에도 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건 아마 잃은 것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혹은 너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너는 그곳에서 이방인이었기에, 네 과거를 모르는 이들에겐 그저 낯선 이로 비칠 뿐이었다. 정예병 동료들과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네가 돌봐줄 사람 없이 망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예병 멤버 중 하나, 그곳에서 나고 자란 소년이 어느 날 우연히 너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초췌해진 너를 집에서 억지로 끌어내지 않았다면. 너는 아무도 모르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쿠로사키를 이대로 둘 수 없어.]

  기운을 차려야 한다며 너를 억지로 병원에 입원시킨 소년이, 정예병 멤버들을 모아놓고 꺼낸 말이었다. 쿠로사키는 혼자 두면 자기를 조금도 돌보지 않아. 이대로라면 분명 병이 생기겠지. 그 애의 붉은 눈엔 두려움과 연민이 한데 깃들어 있었다. 최악의 결말을 상상하고, 덜컥 겁이 난 것이리라.

  [그러니 우리, 쿠로사키가 퇴원하면 돌아가면서 맡자. 우리가 데리고 있는 한, 쿠로사키는 안전할 거야.]

  [잠깐. 질문이 있는데, 유우야.]

  손을 들고 명랑하게 말을 건네자 그 애는 바로 반응했다. 뭔데, 데니스?

  [쿠로사키를 맡을 사람에 데니스 맥필드를 넣어도 괜찮겠어? 쿠로사키가 날 감당할 수 있을까?]

  [……어려운 질문인데.]

  그 애는 끝내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모두의 의견을 듣자며, 둘러앉은 동료들에게 기회를 넘길 뿐이었다. 모두의 얼굴에 껄끄러움이 걸려있었으나 논의는 싱겁게 끝났다. 의견을 낸 사람이 두세 명뿐이었던 탓이다. 나머지는 그들의 의견에 미적지근하게나마 동조했다. 그렇게 나온 결론은 데니스 맥필드 또한 쿠로사키 슌을 돕는 것’. 쿠로사키를 도우면서 용서받을 기회일지도 몰라. 근거인지 핑계일지 모를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네, 하면서.

  용서받을 생각은 없었다. 네가 누이의 일을 용서해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거니와, ‘죄가 씻기는 것따위 희망사항도 아니었다. 다만 용서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하나, 중요한 것을 떠올렸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네가 하지 못했던 것. 누이의 미래를 닫아버린 자에게 네가 돌려주어야 했던 것.

  [그럼, 유우야. 날 마지막 순서로 해줄래?]

  순서를 정할 때, 일부러 마지막 순번을 부탁했다. 동료들에겐 쿠로사키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서라 둘러댔지만, 실은 너를 위해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불순한 목적을 숨기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 날 모인 모두는 별 생각 없이 부탁을 들어주었다. 마지막 순서를 받고서, 슬쩍 웃음지었다. 1번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멤버가 자기 역할을 마쳐 한 바퀴 돌면 또다시 1번으로 돌아가기로 되어있었으나, 아마 두 바퀴째 도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옛 정예병 동료들이 너를 맡는 건 첫 바퀴에서 끝난다. 그래야만 했다.

  마지막 차례였기 때문에, 너를 맡을 날까지 여유 시간은 충분했다. 그동안 준비할 것은 둘. 첫째로는 너를 데리고 있을, 안락한 공간. 과거 정예병을 지휘했던 동시에, 네가 머무는 도시에서 대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 제법 괜찮은 집을 마련해주었다. 다음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진짜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재료. 불순한 목적에 걸맞은 물품이기에, 재료를 찾는 일은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다. 너는 물론이거니와, 동료들조차 알지 못하도록.

  모든 준비를 마친 때, 마침 앞 순서가 끝났다. 네 동생 또래의 소년 집에서 머물렀던 너는 다음 목적지가 어딘지 알면서도 말없이 짐을 챙겼다고 한다. 체념한 것인지, 아니면 별달리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느 쪽이건 네가 유지하던 평온이, 곧 깨지리란 생각이 들 뿐이었다.

  「괜찮겠어, 데니스?

  바로 전 순서였던 동료가, 너를 보내주기에 앞서 연락해왔다. 통신기로 흘러드는 목소리에 불안이 묻어있었다. 마지막 순서에서 문제가 터질지 모른다 생각한 것이리라. 동료들은 전부, 네가 어느 순간 자제력을 잃고 동생을 앗아간자에게 덤벼들 것을 걱정했다. 지금이야 닳아버리긴 했지만 본디 너는 날이 잘 드는 병기였고, 분노를 연료 삼아 적을 쓰러트리는 자였으니.

  「뭘 걱정하는진 알겠지만, 문제없어. 어차피 쿠로사키, 이제 힘도 없고.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해.

  끝까지 걱정 가득한 말에 건성으로 답하고 통신을 끊었다. 약속대로라면, 너는 이미 근처에 와 있다. 앞으로 10분 내, 약속장소인 중앙공원에 도착하리라. 시간을 확인하면서, 입가에 스멀스멀 번지는 웃음을 지우려 노력해야만 했다. 이렇게나 기대하고 있다는 걸 너에게 들켜선 안 된다. 그래서야 그동안 준비한 것이 물거품이 될 수도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시야에 불쑥 들어오는 형체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점퍼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왜 이 자는 소리도 없이 나타났는가. 그리고 왜 앞을 가로막았는가. 의문의 답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내려다보는 금빛 눈이 너무도 익숙하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 오늘 만나야 하는 자. 너라는 걸 알아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포식자를 만난 짐승처럼. . 쿠로사키. 몇 박자나 늦게 반응하자 너는 핼쑥한 얼굴에 빈 웃음을 걸쳤다.

  잘도 정신을 놓고 있었군. 겁도 없이.

  네 입술은 굳게 닫혀있는데 네 목소리가 머리를 울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악몽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환청이었다.

 

* * *

 

  ‘방문자가 가져온 짐가방은 고작 한 개였다. 연락을 끊고 홀로 지낼 때부터 네 살림이 단출했다지만 거기서 대부분을 긁어왔다는 짐도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도 너는 짐을 전부 풀지도 않았다. 어차피 곧 다음 순서가 될 텐데.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하며 너는 소파에 기대앉았다. 제대로 닫지도 않은 짐가방을 슬쩍 들여다보자 몇 안 되는 옷가지와, 이제는 의미 없는 물품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정예병으로 움직였을 때 지급받았던 물품이나, 아마도 네가 고향에서 가져왔을 몇 안 되는 유물 등.

  쓸모없는 것을 끌어안는 것이 이미 네 삶에 뿌리내린 습성임은 안다. 이를테면 네 목에 걸쳐진 스카프, 낡아빠진 붉은 천도 그러하다. 고향을 떠나기 전, ‘침략군에 맞서는 저항군이었던 네가 언제나 지니고 다니던 것. 저항군의 표식. 너는 정예병으로 움직일 때조차도 저항군의 표식을 목에 매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지옥에서 싸우는 이들과의 연결고리인 양. 자신이 끝까지 짊어져야 할 책임인 양. 언젠가 네가 그걸 스스로 풀어버리는 날이 온다면 그 날이야말로 네가 책무를 내려놓고, 평범한 청년으로 돌아갈 날이라 생각했는데.

  너는 아직껏 해방되지 않았다. 과거로부터도, 전쟁이란 재앙으로부터도. 저항군이 해체되면서 가치를 잃은 스카프를 아직도 지니고 다니는 건, 결국 네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너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고 삶은 여전히 폐허이기에 너는 아직도, 저항군 시절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봤자 누구도 너와 함께 싸워주지 않을 텐데도. 씁쓸한 현실을 새삼 확인한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너를 맡기로 한 진짜 이유였다. 누구도 모를, 제법 불손한 목적.

  그것만 이루면. 시선은 너의 목에, 정확히는 그 목을 감싼 스카프에 꽂힌다. 제대로 이루기만 하면, 앞으로 너는 저항군의 표식 따위 풀어내게 된다. 더는 과거에 매이지 않고, 현재를 살게 되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 필요한 건 하나. 너를 자극하는 것.

  “쿠로사키는 내가 마지막 순번이니, 조금만 버티면 1번인 유우야로 돌아갈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틀렸나?”

  “유감이지만, 쿠로사키. 다음번은 안 와.”

  “평생 책임져주려고? 대단한 희생정신이야.”

  빈정거리고는 있으나 네 목소리에선 독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말을 건넬 때마다 반사적으로 받아치면서도, 너의 시선은 이쪽으로 향하기는커녕 창밖에 걸쳐져 있고.

  “랜서즈는 네가 날 용서해주길 바라거든. 그게 잘 안 되면 다음번으로 넘어갈 일도 없겠지.”

  “그럼 답 안 나오는 사람과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하트랜드로 가지 그래. 거기서 실컷 네 무대나 펼쳐. 네 식대로라면 그게 진정으로 속죄할 길 아닌가?”

  “쿠로사키. 나는 말이야.”

 너에게 다가가, 바로 옆자리를 차지했다. 너의 시선은 그제야 이쪽으로 향한다. 그러나 아직 반응이 미지근하다. 네 눈에 깃든 감정은 고작 불쾌뿐이었으니. 이럴 때, 네 감정에 불을 붙일 수 있는 화제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너를 자극하기 위해선 계속 꺼낼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루리 양의 일을, 제대로 풀고 싶어. 물론 루리 양은,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오빠인 네가 남아있으니.”

  “……그 이름을 부를 용기가 있는 모양이지.”

  “언제까지나 묻어둘 순 없잖아?”

  이제 과거의 감정은 해결해야지. 심술궂게 덧붙인다. 너는 이 논리를 잘 알고 있다. 너에게 적을 용서하라고 말한 이들이 딱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어차피 전부 끝난 일이라고. 이미 세상이 용서해준 이들에게 울분과 적개심을 품어봤자 타인은 물론 자신마저 상하게 할 것이라고. 그러니 그런 나쁜감정은 털어버리고 현재를 살아야 한다고. 물론 그들은 네 발언권을 앗아갔을 뿐 한 가닥 위로조차도 건네지 않았다. 네 비극을 해결하려는 도움이 없었던 건 물론이었다.

  “어떻게?”

  “네가 나에게서 합당한 보상을 받는 거야.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누이도, 평범한 삶도. 네가 잃은 것은 되돌릴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식으로 감정을 해소할 수밖에. 네 삶을 파괴한 자에게서 그 죗값을 받아내는 게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이다. 마침, 죗값을 치를 자가 바로 네 눈앞에 있지 않은가. 무엇이든 지불할 자신이 되어있는 사람이.

  “너라는 인간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 네가 나에게 줄 게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 있지. 데니스 맥필드의 미래는 어때?”

  나는 신체 건강한 남자니까,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살 수 있어. 그 삶을 네게 전부 넘긴다면? 나긋하게 덧붙이고서 반응을 기다리기로 한다. 표면적인 의미야 평생 봉사하며 살겠다는 뜻이며, 네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지금부터 바로 실행할 수 있을 일이기도 했다. 물론, ‘무엇이든지불하겠다 각오하고서 꺼낸 제안이 겨우 그 정도의 의미만 품고 있을 리 없다. 뒤집어 본다면,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넘긴다는 것은, 목숨을 줄 수도 있다는 뜻. 잘 생각해, 쿠로사키. 복수란 말이야.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누르고 너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네가 가장 바라는 걸 줄 생각이라니까?

  기다림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너는 이내 입술을 열었고.

  “멍청한 놈. 그런 것 따위 관심 없다고.”

  약간의 동요도 비치지 않는 얼굴로 답했다.

  “넌 내 삶을 쥘 수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너 말이야. 그런 식으론 평생 날 못 이겨.”

  그렇게 매달릴수록 지고 들어간다니까. 그렇게 덧붙인 너는 지루해 못 견디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방으로 향하는 너의 뒷모습에 네 누이가, 폐허가 된 네 고향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그녀의 모습이 겹쳐진다. 너에게서 그녀를 보고,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너를 본다. 너희 남매는 이제, 하나의 악몽이 되었다. 너에게 목을 졸리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악몽. 견딜 수 없어, 너의 등에 말을 꽂았다.

  “지금껏, 내게 복수를 꿈꾼 적 없어?”

  “이제 네 진짜 속셈을 알겠군.”

  쥐고 있는 패를 전부 공개하는 것은 엔터테이너로서는 미숙한 행동이다. 매달릴수록 상대에게 밀리게 된다는 너의 말 또한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네 덤덤한 태도에 다급해져 먼저 속내를 흘리고 말았다. 네가 첩자의 가면을 벗긴 때부터, 너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솔직하게 말한 건 칭찬해주겠지만. 방에 들어가기 직전, 너는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난 네가 원하는 걸 그렇게 쉽게 줄 생각 없어.”

  “아직은 때가 아니란 거야?”

  “‘아직은?’”

  공허한 웃음소리가 귀를 때리더니,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너는 방으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 매정하게 닫힌 문을 열어봐야 네가 다시 말을 들어줄 리 없음은 뻔했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네 짐가방이라도 치우려다 의미 없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두 사람이 머물기에도 넓은 거실에 홀로 남겨지니 패배감이 더욱 짙게 느껴졌다. 너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네 삶을 망가뜨린 이에게 돌려줄 수 있을, 가장 쓰린 고통을.

  그 전까지 널 맡았던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들었던 말은 네가 지독하게 무기력해졌다는 이야기였다. 꿈에 젖은 사람처럼 멍하니 바깥만 바라보는 날이 대부분에, 행동이 둔해져 걸핏하면 손을 다쳤다는 것이다. 너답지 않은 극도의 무력함은 전부, 네가 스스로의 비극을 해결할 기회를 잃은 데서 시작된 문제였다.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적을 처단할 수 없고 그렇다고 울분을 쏟을 수도 없게 되었으니 삶에 의욕이 있을 리 없다. 우리에 갇힌 맹수가 공격성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

  그런 모습은 너를 걱정하는 동료들, 선량한 이들에게는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으리라. 한두 명은 그것이 네가 전쟁 피해자로서의 삶에서 서서히 벗어나,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에게 지은 죄가 있는 사람이라면, 무기력한 네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낳은 결과를 상기시키는 단서가 된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네 누이를 상부에 넘기지 않았다면. 그럼 네가 한창나이에 이토록 닳아버렸을까? 어디인지도 모를 먼 곳만 눈에 담으며, 저도 모를 상처를 몇 개씩이나 몸에 새길 일이 있었을까?

  너는 네 비극에 발언권을 잃은 대신, 자신의 삶을 망친 이들 앞에 망가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이 너를 발견한 때부터, 그 처참함에 질려 다시는 너를 잊지 못하게 되도록. 가책과 부채감으로 너에게 묶이도록. 조용한 시위였다. 동시에 효과적인 복수이기도 했다. 너와 함께 지내게 된 후로, 너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다칠 것을 걱정해 날카로운 물건을 죄다 치웠다. 그럼에도 피를 뚝뚝 흘리며 앉은 네 손을 몇 번이나 치료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네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온갖 공연을 준비하고, 네가 좋아할 것 같은 것은 무엇이든 찾아와 바쳤다.

  호의인지 애원인지 모를 노력에 너는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무료한 얼굴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신이 공물을 거두어가듯. 이번에 처음으로 얹은 감상도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이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알고 있어.”

  “정말로?”

  “내 뜻은 아직 달라지지 않았거든. 데니스 맥필드의 미래를, 남은 삶을 넘겨줄 마음이 있단 거야.”

  “그럼 이걸 답해주지 그래. 그렇게 해서 데니스 맥필드가 얻는 이득은 뭐지?”

  금빛 눈이 오랜만에 이쪽을 담았다. 드디어 제대로 상대해줄 마음이 생긴 양. 제법 날카로운 질문에 바로 답을 꺼내지 못하자 너는 무심하게 자신의 추측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나는 노력했다는 자기위안? 쿠로사키 루리를 향한 속죄? 그게 아니면, 나에게 한마디라도 좋은 말을 듣는 것? 흘리는 추측마다 냉소가 짙게 배어있었으나 그 중 무엇도 확실하게 부정할 수 없었다. 네가 나열한 모든 가능성이, 어느 정도는 그럼직했던 탓이다.

  어쩌면 자기합리화를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네 누이에게 공허한 속죄라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데니스 맥필드란 인간을 재평가해주길 바랐다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네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네게 읽히고 있단 생각이 들 뿐이었다.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는 결심조차, 사실은 얕은수에 불과했을지.

  “어때. 내가 맞혔나?”

  온갖 가능성을 늘어놓은 너는 여유롭게 묻는다. 여유로운 표정을 보면 이미 답을 알고서 묻는 것 같았으나, 반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글쎄. 어쩌면?”

  “이제 별로 숨기지도 않는군.”

  “넌 포장하는 걸 싫어하지 않았나?”

  “그럼 내 식대로 판단해도 상관없겠지. 네 욕망을 해석해볼까? 데니스 맥필드는 무결한 인간이 되고 싶은 거다. 누군가에게 가해자로 기억되며 평화를 누리는 것보단 가시관을 쓰고 성자처럼 쓰러지고 싶은 거야.”

  “누구 앞에 무결해지고 싶어 한단 거지? 세상 사람들? 아니면 엑시즈의 모든 주민?”

  “아직 너에게 가시관을 벗어도 된다고 말하지 않은 사람들.”

  누구인지는 듣지 않고도 뻔하다. 네 고향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직후, 일부 침략군을 용서해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죄를 씻은 이들 중에는 네 누이의 미래를 닫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네 누이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하여 신뢰를 쌓고, 결국은 상부에 그녀를 넘겨버린 사람. 네 눈앞에 앉아있는 사람. 너는 그를 용서하지 않은 유이한 인간이다.

  ‘유일한자가 아니라 유이한자인 이유는, 그가 네 누이에게서도 용서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분명 상냥한 사람이지만, 잘못된 행동에 대해선 누구보다 강하게 목소리를 낼 각오가 되어있었다. 저를 속였다는 건 혹 넘어가주더라도 고향 사람들을 전쟁에 내던진 것만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녀가 이미 단절된 사람이라는 점.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녀에겐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

  “맞아. 나는 너희 남매 앞에서 무결해지고 싶은 거야.”

  테이블에 올려둔 네 양손을 조심스레 끌어오며 말했다. 이전부터, 길쭉하게 뻗은 네 손가락을 볼 때면 병기를 쥐기엔 아까운 손이라 생각했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너는 그 손으로 악기를 쥐었을지도 모른다. 평생 악기를 익히지 않는다 해도 지금처럼 손에 상처가 그득하진 않았으리라. 정예병 시절에 이미 상처로 손이 울퉁불퉁했던 너는 전쟁이 끝나고는 부주의한행동으로 걸핏하면 손을 베여온다. 지금도 군데군데 밴드를 붙인 손가락이 처량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너는 이제 이 손으로 무언가 이룰 수 있다. 네가 수없이 꿈꿨을 바람직한결말을.

  “그러니까, 쿠로사키. 우리 쉽게 해결하자. 이 싸움은 네 말대로 내가 질 수밖에 없는 거였어.”

  갑자기 손을 붙들린 너는 손을 빼려 노력했지만, 힘이 부족해 실패했다. 덕분에 별다른 방해 없이 네 손을 목표 지점까지 끌어올 수 있었다. 네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 남자. 네 앞에 앉은 사람의 목에. 이제 너는 그 남자의 목을 양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네 의지는 조금도 없었지만, 상황만 따지고 보면 네게 나쁠 것이 없다. 지금 너는 증오하는 대상의 목을 감싸고 있고, 상대는 저항할 의지가 없다. 이대로 힘을 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끝난다.

  데니스 맥필드의 목을 졸라. 용서받지 않을 테니, 너는 복수를 해. 너무도 명백한 메시지에도 너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목을 감싼 손이 떨리는 것은 느낄 수 있었으나, 힘은 들어가지 않았다. 망설이는 것인지, 아예 거부할 생각인지. 알 길이 없기에 한 번 더 너를 떠밀기로 마음먹었다.

  “쉬운 먹잇감이야. 몇 분만 힘을 주면 돼.”

  그렇게 말할 때 어떤 표정으로 너를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네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던 걸 보면 아무래도 웃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꽤 진하게.

  “비겁한 새끼.”

  답은 냉정했다. 다음 순간 목 대신 뺨이 화끈거렸다. 왼뺨을 후려친 너는 주먹을 꽉 쥐더니 자리를 떴다.

  그 날, 잠들기 전까지 수시로 거울을 확인했지만 목덜미엔 손자국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네가 목을 감싸고 있었던 짧은 시간, 손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탓이다. 거기서 깨달았다. 너는 증오하는 이의 목을 조를 수 있을 상황에서,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는 것을.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얼마간 기다렸던 건 그저 상대의 행동을 살피기 위한 시간이었음을. 벌겋게 달아오른 뺨보다 더욱 쓰렸던 건 이번에도 너를 흔들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후로는 거의 자포자기한 채로 지냈던 것 같다. 무엇을 시도해도 널 움직일 수 없다는 체념이 무력감으로 번졌던 탓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매일 너를 돌봤고, 네 몸에 이유 모를 상처가 새겨질 때마다 꼼꼼하게 치료해주었다. 의미 없는 노력을 쏟지 않았을 뿐, 너와의 관계는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평화로웠다. 하루, 이틀, 사흘. 휴전 상태 같은 고요 속에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일주일, 보름. 항상 지퍼를 조금 열어둔 채였던 네 짐가방이, 어느 날 보니 닫혀있었다. 드디어 이곳에 적응한 것일까. 하는 생각은 갑자기 통신기가 울리며 끊겼다.

  「쿠로사키랑은 잘 지내고 있어?

  통신을 연결하자마자 흘러나온 건 명랑한 목소리. 너를 첫 순서로 맡았던 소년의 목소리였다.

  「그럭저럭.

  「다행이네. 사실 좀 걱정했는데, 별일 없었나 봐. 쿠로사키한테 연락하니 이제 자기가 또 짐을 쌀 때가 되었다더라고. 일주일 남았다던가? 다음 순서는 나니까, 나도 집을 깨끗하게 치워둬야지.

  거기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를 맡을 수 있을 기간은 겨우 일주일. 그 기간이 지나면, 너는 또다시 동료들에게 넘어간다. 다음 순서가 돌아오기까지 한참이나 걸리는 데다, 차례가 되어도 과연 네가 순순히 말을 들어줄지 의문이었다. 이곳에서 나가자마자 보호자’ 1번인 소년에게로 향해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털어놓는 네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지는 듯했다. 그 자식. 비겁한 짓을 하더라고. 나한테 용서받겠답시고 자기 목을 조르게 하려 했어. 그런 제정신 아닌 놈에게 날 또 맡길 생각은 없겠지?

  그러면 소년은 당장 겁을 먹고 순번을 조정하리라. 네가 아닌, 너에게 복수를 강요한 이를 걱정하여 다음번엔 영영 너를 보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너의 삶에서 완전히 잘려나가는 것이다. 평생 죗값을 치르지 못했단 가책에 시달리면서 네 비극을 곱씹을 수밖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조급해졌다. 다음 순서로 넘어가기 전에, 너를 붙들고 있을 동안에 일을 마쳐야 한다. 너에게서 무기력함이 옮은 탓에 한 번도 꺼내지 않고 있었으나, 애초 너를 맡기 전 미리 준비해둔 비장의 패가 있었다.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될 것. 너를 맡기로 한 진짜 목적을 이뤄줄, 비밀스러운 재료.

  그동안 숨겨둔 재료를, 쓸 때가 되었다. 통신을 끊자마자 방에 들어가 작은 상자를 찾아냈다. 자물쇠로 굳게 잠긴 상자를 열자, 자그마한 약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챙겨 거실로 나온 때, 마침 짐가방에 옷가지를 넣던 너와 마주쳤다.

  “일주일 후에, 넌 유우야에게 갈 거지?”

  “고집 피워봐야 소용없어. 약속은 약속이니까.”

  시선은 여전히 가방에 둔 채, 너는 건성으로 받아쳤다. 본래 비협조적인 사람인 것은 알지만, 이번의 네 모습엔 아예 말을 끊어내려는 냉랭함마저 엿보였다. 네 짐가방을 홱 빼돌리자 그제야 네 얼굴에 불쾌가 서렸다.

  “널 계속 데리고 있겠단 건 아닌데? 난 그냥, 끝나기 전에 우리 일까지 마무리했으면 할 뿐이야.”

  “일주일만 무시하면 되는데, 내가 네 뜻대로 움직여줄 것 같나?”

  “왜 저번에 나더러 비겁하다고 했는지 이제 알겠어.”

  너에게 복수하라고 말하는 주제에 네 손을 더럽히려 했어. 그래서지? 거의 매달리다시피 던진 말에도 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번엔, 정말로. 내가 전부 끌어안을게.”

  “무슨 속셈이냐.”

  “이걸 봐줄래?”

  약병을 꺼내어 흔들자 네 시선이 바로 그곳에 꽂혔다. 투명한 유리병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흰 가루가, 동료들 몰래 준비한 비장의 패. 이거, 예쁜 가루처럼 보이지만 사실 위험한 거야. 덧붙인 말에 재료의 정체를 알아챈 너는 약병을 빼앗아가려 했지만, 간발의 차로 지켜냈다.

  “안 돼. 이거, 내 차에 탈 거니까.”

  “……독을, 타겠단 건가?”

  “맞아. 효능은 확실해. 그러니까 안심하고, 당장 나가 어떤 사람이든 만나고 와. 네가 나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난 이걸 타 마실 거야.”

  네가 돌아올 때면 난 이미 쓰러져 있을 테고, 너는 알리바이가 입증되겠지. 흥분되어 흘린 말에 너는 나른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어 기억을 더듬으니, 네 누이가 자주 짓던 표정이었다. 그녀에게서 그 표정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바로 네 이야기를 했을 때. 오빠를 소개시켜줄래요? 란 말에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라 답하던 때, 네 누이는 딱 지금 너처럼 웃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녀의 말이 백번 옳았다. 우연히 만나버린 탓에 너와 질긴 악연으로 얽히게 되었으니. 그럼에도 하나 희망적인 게 있다면, 그 악연도 오늘 끝나리라는 사실. 모든 걸 내려놓겠다는 태도를 보여서일까. 제법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해서일까. 너는 이전과는 다르게, 불쾌를 내비치지 않았다. 잠깐만 앉아서 이야기해달라는 애원에, 순순히 맞은편에 앉아주기까지 했다. 이게 정말 독이라고? 약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자마자 냉큼 가져간 네가, 약병을 손가락으로 굴리며 던진 말이었다.

  “굳이 나에게 네 계획을 전부 알려주는 이유는? 독을 먹는 게 목적이었다면 아무 말 없이 혼자 실행해도 되었을 텐데?”

  “아니. 그래선 곤란해. 이유는 두 가지. 첫 번째 이유. 쿠로사키 슌은 데니스 맥필드를 증오한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잖아? 네 알리바이가 확인되지 않을 경우엔 바로 네가 의심받아. 그러니 전부 설명하고 네게 알리바이를 만들어줄 수밖에.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나한테 보여주고 싶은 거지. 데니스 맥필드는, 진심이었다고. 용서해주건 그렇지 않건 진심으로 죄를 갚고 싶었다고.”

  “부정하진 않을게.”

  너에게 처분을 맡기고픈 마음에, 무결해지고 싶은 욕망에 얄팍한 감정이 깃들어 있으리란 건 뻔한 사실이었다. 조잡한 바탕을 애써 외면해왔을 뿐. 그동안 두르던 포장도, 변명도.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해져 절로 얼굴에 웃음이 걸린다. 이제, 남은 것은 결말뿐.

  “기뻐해줄래, 쿠로사키?”

  너에게서 약병을 돌려받고서 물었다. 네 시선이 오롯이 이쪽을 담는 것을 느낀다.

  “……무엇을?”

  “나에게서 해방되는 거 말이야.”

  “너는, 만족하나?”

  “물론.”

  “그럼 내가 보는 앞에서, 준비를 마쳐둬. 바로 실행할 수 있도록. 그래야 네 진심을 믿을 수 있을 것 같거든.”

  “바라는 바야.”

  자리에서 일어나, 다기와 차를 가져왔다. 그 사이 약병을 열어둔 너는 두 개의 잔을 끌어와 한쪽에 가루를 쏟았다. 마실 사람은 한 사람인데 왜 잔을 두 개 챙기느냐 물으려다, 네가 꽤 즐거워 보이기에 마음을 접었다. 오랜만에, 너는 들떠있었다. 창백한 뺨이 상기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독을 탄 차라. 너답지 않게 재미있는 발상인데. 티팟에 차를 우리며 너는 중얼거렸다. 극적이기도 하고 말이야. 마음에 들어.

  “미리 차를 부어둬야겠어. 그래야 확실하니까.”

  “친절하네. 내가 제대로하도록 도와주는 거지? 날 믿지 않는 건 조금 유감이지만.”

  살짝 비꼰 말에도 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두 개의 잔에 차를 부었다. 다음은 티스푼으로, 독을 탄 쪽의 차를 마구 휘젓는 것. 독이 혹 제대로 퍼지지 않을 것을 걱정한 것일까. 평소답지 않은 철저한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아무래도 너는 이번 계획엔 제법 만족한 것 같다. 아무것도 타지 않은 차를 네 쪽으로 밀어두고서 인사를 건넸다.

  “그럼, 쿠로사키. 안녕이야. 마지막 억지를 들어줘서 고마워.”

  “, 그래. 너에겐 마지막 인사인가?”

  “이제 약속한 대로 나가야지. 내가 쓰러지는 모습을 못 보여주는 건 미안하지만, 아까 얘기한 대로 네가 의심받으면 곤란하니까. 이 동네 산책이라도 하고 와.”

  돌아오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거야. 주문처럼 흘린 말에 너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때문에 네 입술이 옴죽거리는 걸 빨리 파악하지 못했다.

  “……없을 텐데.”

  독이 담긴 찻잔을 이쪽으로 끌어온 때, 네가 흘린 말이었다.

  “?”

  “, 약속한 적이 없을 텐데.”

  다음 순간, 찻잔은 너에게 넘어가 있었다. 한때 전장을 누비던 전사에 걸맞게,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도 빨랐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너는 독이 든 차를 들이키고 있었다. 네 손에서 떨어진 찻잔이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부서질 때서야 겨우, 네 말 뜻을 이해했다. 돌이켜보면 너에게 계획을 줄줄 늘어놓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너는 그 뜻에 동조하겠다 말한 적이 없었다. 상대가 준비한 판을 멋대로 이용하려 했을 뿐.

  알아챈 시점엔 너무 늦었다. 테이블에 핏방울이 뿌려지는가 싶더니 네 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 순간 가장 고통스러웠던 사실은 네게 기습적으로 당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네 얼굴에 걸린 승리의 표정이었다.

  모든 것이 끝나기 직전, 너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 * *

 

  사장은 연락이 닿자마자 달려와주었다. 과거 정예병을 이끌었던 그 남자는 자신의 사람이었던 이들에겐 꽤 강한 책임감을 품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방황했던 너에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으리라. 너를 급히 병원으로 보낸 사장은,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테이블에 뿌려진 피와 산산이 부서진 잔. 식어빠진 차가 남은 티팟까지. 그 남자의 시선이 훑고 지나갔다. 물론 찾아낼 것은 없었으리라. 네가 어쩌다 쓰러졌는지는 물론, 이곳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까지. 사건의 진실에 대해선 동거인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니까.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네가 스스로 독이 든 차를 마셨다고? 그 원인이 네 앞에서 죽어주겠다는 정신 나간 선언이었다고? 패배감과 부끄러움이 한데 엉켜, 입을 뗄 수 없었다. 무엇이라도 털어놓는 순간 그 남자의 시선에 해부될 것만 같았다. 그렇군. 빤한 인간이었어. 그렇게 운을 떼며, 그동안 너밖에 몰랐을 얄팍한 면들을 짚어주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생명엔 지장이 없다고 하더군.”

  복잡한 마음을 누르고 바닥만 보고 있던 때, 사장이 건넨 말이었다. 조금 전까지 통신기로 무어라 연락을 하는 것 같더라니. 널 병원으로 옮긴 수하에게서 보고를 받은 모양이었다.

  “정말로?”

  “그가 삼켰다는 독극물, 치사량엔 못 미쳤다고 해.”

  그럴 리가 없는데. 튀어나올 뻔한 말을 겨우 삼켰다. 분명히, 충분한 양을 입수했다. 필요한 만큼 덜어 약병으로 옮긴 때 계산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면 네가 일부러 약간 덜어내고 차에 탄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알 길이 없을뿐더러 알 필요도 없다. 쓰린 실패를 굳이 파헤치고 싶지도 않으므로 길게 한숨만 내쉬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 무엇이 잘못되었건 너는 최악의 사태를 피했다는 것. 아마 일정 시간이 지나면 무사히 퇴원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이 있다. 쿠로사키 슌이 굳이 네 앞에서 독을 마신 이유는 뭐지? 짐작 가는 게 있나?”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더니 사장이 머릿속을 헤집고 말았다. 물론, 외면할 수는 없다. 이 도시에서 네 신분을 보증해주는 사람으로서, 한때 너를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그도 사건에 대해 알 권리가 있었으므로. 다만 그 질문에 답하기 전, 먼저 풀고 싶은 의문도 있었다.

  “……왜 그 자가 스스로 마셨을 거라 생각해?”

  “너무 넘겨짚었나?”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은 같이 있던 사람을 의심하잖아.”

  “네가 그를 해하려 했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어. 데니스 맥필드는 그럴 사람이 못 되지. 하지만 쿠로사키라면, 충분히.”

  그럴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모호한 말의 의미를 캐묻고 싶었으나, 그러다 사장에게 속내가 들킬까 두려워 마음을 접었다. 상대가 모든 걸 털어놓을 때까지 쥐고 흔드는 것이 너라면, 사장은 몇 안 되는 단서로 상대의 심리를 읽어내는 사람이었다.

  “이유를 물었지? 짐작 가는 건 하나뿐이야. 나를 고통받게 하고 싶어서일걸. 이런 일이 일어나면 내가 패닉에 빠질 걸 알았을 테니까.”

  보통 사람들이라면 질문을 몇 개 더 달겠지만 사장이라면 그쯤만 설명해도 대강 이해할 것이다. 과연 사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쿠로사키는 지독한 데가 있지만. 메마른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그 정도의 일도 아닐지 몰라. 넌 그에게 마음의 빚이 있으니 그 자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압박감을 느꼈겠지. 용서를 구하려 들었다거나. 그 자에게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거나.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면.”

  “내가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고?”

  “네게 잘못이 있단 이야기가 아냐. 네가 그에게 매달린 반작용이었을지도 모른단 뜻이지.”

  물론 결과적으론 그 자가 널 괴롭게 만든 게 되었지만. 따라붙은 말에 망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너는 독을 삼킬 때까지도 복수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저 상대의 계획을 틀어버리는 것이 목표였을 수도 있다. 다만 의도치 않았더라도 상대에겐 최고의 복수가 되었으리란 게 아이러니할 뿐이다. 네가 쓰러지는 순간, 그 전까지 느껴본 적 없었던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누이를 잃은 날부터 네 삶에 진득하게 깔렸을 감정을, 누이를 앗아간 이에게 돌려준 것이다. 그것도 상대가 사용하려던 방법 그대로, 네 목숨을 담보로 삼아서.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머리가 차가워졌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한 답을 얻은 것 같다.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사장에게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부탁할 게 있는데.”

  “말해.”

  “쿠로사키를 맡아줘. 아무래도 그 남자, 제대로 관리받아야 할 것 같으니까.”

  “돌보는 게 아니라 관리인가.”

  “쿠로사키에겐 그게 딱 맞아. 랜서즈는, 날 포함해 전부가 어쩔 수 없이 그 자를 감정적으로 대하게 되거든. 쿠로사키에게나 우리에게나 좋지 않은 일이야. 그쪽도 쿠로사키를 눈 닿는 곳에 두는 게 편하지 않아?”

  “쿠로사키가 회복하면 생각해보지. 그의 의견을 들어야 하니까.”

  옛 동료들끼리 너를 맡고 있단 점 때문인지, 사장은 평소보다 훨씬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 랜서즈끼리도 논의해봐야 할 거야. 지금까지 다들 쿠로사키를 맡아주었잖아. 그렇게 반응하긴 했으나, 사실 앞으로 네가 누구에게넘겨질지는 뻔히 짐작하고 있었다. 사장이 나선다고만 하면 정예병 동료들은 너를 그에게 넘겨줄 것이다. 너는 분명 연민의 대상이었지만, 그만큼 상대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존재였으므로.

  너도 상냥한동료들보단 사장에 기대고 싶어 할 것이다. 사장은 너의 울타리 이상이 되지 않을 사람이고, 너는 연민과 방관 중 고르라면 후자를 택할 인간이었으니. 특히나 지금 널 돌보는 사람들엔 너에게 자꾸만 껄끄러운 일을 들먹이는 자까지 끼어있지 않은가. 정예병 동료들에게 계속 보호받는다면, 너는 언젠가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런 것보다야 사장을 따라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사장은 자기 회사로 돌아갈 때까지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나,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너 대신 네 가방을 정리했다. 어차피 곧, 네가 회사에 들고 들어가야 할 짐이었다.

  네 짐을 챙기고, 네가 쓰러지며 엉망이 된 자리까지 정리하고 나니 넓은 집이 새삼 휑하게 느껴졌다. 두 명이 쓰기에도 지나치게 큰 집에 홀로 남겨진 것이다. 텅 비다시피 한 집을 둘러보며 떠오른 감정은 쓸쓸함보다는 패배감이었다. 사장이 마련해준 거처인 이곳은 네 안락한 삶을 위해 준비된 집이었는데. 네 보호자를 자처한 동거인의 목적도 네 복수를 완성시켜 네가 비극에서 벗어나게 돕는 것이었는데. 결국 네가 이곳을 떠나게 된 때까지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너에게 죗값을 치르겠다는 결심도, 네 앞에서 무결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망도. 너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사장의 호의까지도 전부 의미를 잃었다. 그 무엇도 회복되지 않은 자리에 쓰린 상처만 하나 더 생겼을 뿐이다. 퇴원하더라도 너는 이곳에 돌아올 필요가 없다. 네 짐은 미리 사장에 맡겨둘 것이고, 본래 사장의 소유였던 이 집은 주인에게 돌아갈 테니. 그걸 핑계로 가능한 빨리 집을 비우기로 한다. 사장은 얼마든 머물러도 좋다고 이야기했지만, 더 있어봐야 너의 부재에서 처참한 실패를 떠올리게 될 것이 뻔했다.

  마술 도구, 무대용 의상. ‘너를 위해준비했으나 지나고 보니 제대로 쓰이지도 않은 물품을 챙기며, 패인을 생각한다. 왜 이렇게까지 실패했을까.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기대를 안고 너를 만났다. 너에게 복수의 칼을 쥐여줄 수 있을 것이라거나. 네 비극을 깔끔하게 끊어줄 수 있을 거라거나. 능력 이상의 일을 꿈꾸며 네 구원자라도 될 듯 굴었다. 언젠가 네가 비꼬았듯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결과였다.

  아무래도 너에게 상처를 입힌 만큼, 네 삶을 쥐고 흔들 수 있다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너에게 바람직한 복수를 마련해주겠다는 오만은 복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결말을 맞았다. 패배는 쓰리지만 잃은 것은 없다. 어쩌면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고 보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너는 이전처럼데니스 맥필드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데니스 맥필드는 원래대로네 비극의 원흉으로 남을 뿐.

  너와 함께 지내는 동안, 너를 유일한 관객으로 삼느라 본업에 소홀했다. 엔터테이너로서 무대에 한 번도 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이 집을 떠나면 고향도, 2의 고향 같은 이 도시도 아닌 네 고향으로 향하려 한다. 아직 전쟁의 흔적이 다 걷히지 않은 그곳에서 모두를 위한 무대를 펼칠 것이다. 네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네 삶에 유일하게 기여할 길이 되리라.

 

 

* Side Y: https://hyeonsoyah.tistory.com/152

Posted by 현소야 :

 

 

  종말은 빛을 몰고 온다. 이곳이 전장이기에 가능한 아이러니다. 적을 쓰러트릴 때도, 적이 아군을 쓰러트릴 때도 빛이 일었다. 누가 승리하건 패자는 빛으로 허물어지는 게 이곳의 법칙. 지금 발밑에 쓰러진 적도 예외는 없다. 이번의 패자는 유독 앳된 얼굴이었다. 열너댓 살인가, 그보다 아래인가. 아직 세상 물정도 모를 어린 여자애란 것만이 확실하다. 이 자리에 혼자 서 있다는 것이 문득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너와 함께 있었다간 분명 네가 손을 떠는 것을 보았을 테니. 너는 딱 이 나이대의 여자애만 보면 불안에 빠지곤 했다.

  물론 네가 있었다 해도 결말은 같다. 너라고 적에게 자비로운 것은 아니었으니. 이곳에서 만나는 적은 전쟁놀이를 하는 아이가 아니라 침략군이다. 배틀용 디스크에 붙은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으로, 패자는 간편하게 처리된다. 잔해뿐인 땅에 빛이 내리쬐었다가 패자를 삼키고는 사그라진다. 빛이 걷힌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 돌아보지도 않는다. 돌아보는 순간 빤한 현실과 또다시 마주할 뿐이다.

  어느 날 고향을 덮친 침략군은 화사한 도시의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그렇게, 이곳 사람들의 세상은 뒤집혔다. 아이들이 뛰어놀아야 할 광장엔 이제 건물의 잔해가 그득하다. 공원이었던 자리에선 풀잎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오직 탄내만이, 탄약과 파괴의 냄새만이 코를 찌른다. 웃음소리에 익숙했던 귀는 비명을 담게 되었다. 찢어질 듯한 비명보다 더 섬뜩한 것은 그 뒤의 침묵이다. 오랜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존자는 모두 알았다.

  침략군은 자비가 없고 오로지 쓸어버리는 것에만 집중했으므로,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무엇도 남지 않았다. 산책을 나왔던 가족이 짓밟히는 일이 있었다. 적습에 놀라 도망치던 아이는 폭격에 휩쓸렸다. 운이 좋아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생존이란 행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진 누구도 몰랐다. 그렇기에 운에 기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오래지 않은 과거, 급하게 난민캠프를 꾸린 날, 너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의 소지품을 쥔 채 이야기했다. 이래서는 미래가 없어. 어떻게든 싸워야 해.

  그렇게 말하는 너의 얼굴엔 슬픔보다 분노가 비쳤다. 두려움보단 적개심이 보였다. 하루하루 삶을 무너뜨리는 침략군은, 너에게 도망쳐야 할 포식자가 아닌 없애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어떻게?]

  돌아올 말을 뻔히 짐작하고서 물었다. 너는 즉답했다.

  [무장해야지.]

  예상대로의 답변이었다. 동시에, 그 상황에서의 유일한 선택지이기도 했다. 살아남기 위해선 싸워야만 한다. 싸우기 위해선 무장해야 한다. 그리고 무장하기 위해서는.

  [아카데미아의 디스크, 내가 분석하지.]

  네 어깨를 치며 낮게 속삭였다. 너는 바로 그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군인은 없었다. 죄 없이 쓰러진 자들과 한 번도 무기를 잡아본 적 없는 이들뿐. 생존자가 무장하기 위해선 적의 무기를 제대로 알아야 했다. 군사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이 당장 무장할 길이란 적의 것을 두르는 것뿐이었으므로. 한 놈만 쓰러트리면 돼. 짧게 덧붙이고 돌아서자, 네 목소리가 등에 박혔다. 조심해. 너의 메마른 배려를 안고서, 바로 폐허로 걸어 들어갔다.

  너의 소망대로 되었다. 침략군은 대개 학생이었고 전공을 세우고 싶어 눈이 벌겠기에 그 중 어리숙한 쪽을 노리면 그만이었다. 침략군 하나를 외딴곳으로 유인한 후 맹렬하게 공격하자 오래지 않아 제압할 수 있었다. ‘사냥감에게 짓밟힌 패자는 겁에 질려 도망치려 했으나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느샌가 나타난 네가 패자를 힘으로 누른 덕분이었다. 패자의 왼팔에서 배틀용 디스크를 떼어내자마자 너는 구둣발로 놈을 지그시 밟았다.

  [이거, 어쩔까. 카이토.]

  다음 순간 네 입에서 흘러나온 건 섬뜩하리만큼 무심한 목소리였다. 패자는, 네 동생 또래로 보인 침략군은 너를 올려다보았다. 패자의 눈이 두려움으로 젖어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가 자신의 처분에 대해 묻고 있음을 바로 눈치챈 것이리라.

  [그게 중요한 일인가?]

  [아무래도 좋다면 내가 처리하고.]

  [난 가능한 빨리 분석해야 하니까 네게 맡기는 게 좋겠어.]

  [내게 맡긴다. .]

  그렇게 반응하는 사이에도 너의 시선은 적군에게 향해 있었다. 싸늘한 시선이 꼭 먹잇감을 서서히 죽이는 포식자 같았다. 너의 믿음직스러운 부분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적에게 용서가 없는 모습. 어떤 상황에서도 약해지지 않고 위험을 제거하려는 태도. 너에게 힘을 실어줄 생각으로, 한마디 건네기로 했다. 디스크를 챙겨 자리를 뜰 때, 부러 웃음을 꾸며내며 말했다. 우린 다른 녀석들처럼 착하진 않지, ? 너는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너는 늦게서야 돌아왔다. 피로한 얼굴의 너에게, 패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너는 너대로, 처리의 방식을 따로 보고하는 일 없이 필요한 말만 꺼냈다.

  [디스크의 분석, 어떻게 됐어?]

  탄약 냄새가 밴 코트를 벗으며 너는 물었다. 난민캠프의 아이들을 재우고서 <연구실>에 찾아온 너는, 얼굴에 표정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다.

  [대강은 알겠어. 바탕은 간단하니 우리 디스크에도 아카데미아의 기술을 이식할 수 있을 거야.]

  [적에게 리얼 데미지를 주는 기술? 아니면 카드화 기술?]

  [둘 다.]

  [기쁜 소식인데.]

  그러면 우리도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을 테니. 제 디스크를 들여다보며 말하는 너에게서 불안이나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에 선 사람이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너처럼 반응했을 리 없다. 네 상냥한 누이라거나, 전투에 투입될 때마다 괴로워하는 네 친우이기만 했어도 하지만 그건 우리도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다는 거잖아.란 말이 먼저 튀어나왔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반응해야 한다. 적을 상대하고 있다고 해도 타자를 해할 방법을 너무 쉽게 받아들여선 안 된다. 그러나 너는 주변의 아이들과는 달랐고.

  [당장은 무리야. 하지만 이식하게 된다면 우리에겐 큰 힘이 되겠지.]

  그 점이 네 장점이었다. 적어도 전장에서 너는 다수를 지킬 수 있는 존재였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언제든 적을 상대할 준비가 되어있었으니. 네가 복귀하기 전까지 난민캠프에 모인 생존자들은 모두 저항군을 결성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너도 연구실에 오기 전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을 것이다. 그래, 레지스탕스에게. 저항군의 이름을 먼저 들먹이는 데서 알 수 있었다.

  [처음엔 껄끄러워해도 언젠간 다들 필요성을 이해하게 될 거다. 레지스탕스가 된다는 건 자기를 방어하는 건 물론 상대도 습격해야 한다는 것.]

  [넌 이해가 빨라서 좋아.]

  [우리는 비슷한 부류니까.]

  네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비슷한이라는 말이 묘한 안도감을 주어, 마주 웃었던 기억이 있다.

  옳은 것과 필요한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쟁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너는 언제나 필요한 방식을 따랐고, 바로 그 부분이 네게서 마음에 드는 면이었다. 너를 볼 때면 지금 선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동시에, 너라는 동지가 있다는 것에 안심할 수 있었다.

  너는 분명히, 저항군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연구의 성과는 오래지 않아 나왔다. 저항군에게 방패이자 검이 될 <적의 기술>을 심어줄 수 있게 되었을 때 너의 삶에는 큰 불행이 닥쳤다. 너의 하나뿐인 가족, 누이가 사라진 것이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 누이가 흘린 소지품 하나를 찾아온 너는 동생이 적에게 납치당한 것이라 주장했다. 카드화되었다면 이런 걸 남겼을 리 없어. 루리가 흔적을 남겼단 건 포로가 되었단 거라고. 네가 큰 소리로 떠들 때, 동료들이 전부 네 눈을 피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그때는 물론이고,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까지도 포로는 발견된 적 없다. 무엇이든 쓸어버리는 침략군이 몇몇 사람만 납치해간다는 번거로운 일을 할 리도 없다. 너는 동생이 적에게 당했다는 최악의 결말을, 차마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네 누이의 친구가 결국 불편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뜨자, 너는 바로 적 앞에 뛰어들기라도 하려는 듯 디스크를 집어 들었다. 안 돼, . 너의 친우가 네 오른팔을 잡아 제지하려 했으나 너는 그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디스크를 왼팔에 장착하는 너에게서 이전 같은 침착함은 보이지 않았다. 금빛 눈은 광인처럼 번득였고 숨소리는 너무 가빴다.

  이대로라면, 망가진다 불안감으로 네 이름을 부르자 네가 갑자기 이쪽으로 와 팔을 덥석 잡았다. 신을 만나기라도 한 듯 들뜬 얼굴로. 떼어내고 싶었으나 힘이 지나치게 셌다. 어떻게 떨쳐내야 할까. 너를 어떻게 진정시키는 게 좋을까. 급류가 되어 몰아친 생각을 끊은 건 너였다. 너는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연구가 끝났다고 했지, 카이토?]

  [그래. 디스크를 개조할 수 있을…….]

  [뭘 지켜보고 있는 거야. 당장 개조해야지.]

  네 눈에 깃든 감정이 너무도 무거웠다. 뒤엉킨 감정 하나하나가 묵직하여 외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네 것부터? 저도 모르게 흘린 말에 너는 이미 왼팔의 디스크를 풀고 있었다.

  [물론. 우린 이미 이야기가 되었잖아, 카이토.]

  적의 기술을 장착한 디스크, ‘무장한 디스크’ 1호는 그렇게 너의 디스크가 되었다. 바꿔 말하면 적과 같은 방식으로 싸우기로 한 첫 번째 저항군이 너였다는 것. 너는 개조된 디스크를 받은 날부터 적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짓밟혀야 하는데 오래 버텨 성가신정도가 아니다. 적을 쓰러트려 한 장의 카드로 만드는 무시무시한 전사가 된 것이다. 너에게선 날이 갈수록 죽음의 냄새가 났다. 흙과 쇠의 냄새, 화약 냄새. 그 모든 게 뒤엉킨 체취는 네가 삼킨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침략군. 너의 고향을, 너의 동료를, 그리고 네 가족을 앗아간 적.

  생각해보면 그 냄새는 본래 침략군의 것이었다. 네 체취가 적군과 닮아가면서부터 동료들은 너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내용은 대개 비슷비슷했다. 저러다 힘을 잃으면 안 되는데. 슌은 너무 무모하게 싸우잖아. 아카데미아가 슌을 집중적으로 노리면 어떡하지? 같은 식이었다. 드러나게 동조할 것은 아니었으나 마냥 흘려들을 이야기도 아니었다. 누이의 실종을 기점으로 너는 정말로 급격하게 위태로워졌다. 너무 많은 싸움에 나서 너무 쉽게 자신을 내던지게 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누이를 지키지 못했단 죄책감을 덮을 길인 양.

  이제 너는 전쟁이란 불이 옮겨붙었다기보다 스스로 불덩이가 되어 적 앞에 뛰어드는 듯했다. 아무리 강한 전사라도, 그런 식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빠르게 닳아가, 언젠가 거짓말처럼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런 결말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카이토라면 슌을 이해할 수 있지?”

  시한폭탄 같은 너를 유독 걱정하는 사람이 있었다. 네 누이가 사라진 후로, 언제나 할 말이 가득한 얼굴로 너를 지켜보는 아이. 네 누이의 친구. 전투를 마치고 기지에 복귀하는 길에 그 애가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걸음을 멈췄다. 푸른 눈에 온갖 감정이 엉겨 있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상대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이토는 슌이랑 닮았으니까.”

  “그런 면이 있긴 하지.”

  우리는 비슷한 부류니까. 이전에 네가 흘렸던 말을 떠올리며 답했다.

  “아마 슌도 카이토의 말이라면 들을 거야. 그러니까.”

  “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해. 그럼 나도 제대로 전할 테니.”

  “돌아와달라고, 해줘. 같이 나서기로 한 유토를 뿌리치고 혼자 나가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아. 알잖아, 요즘 슌이…….”

  입은 열려있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속에 담아둔 말을 꺼내기 너무 힘겨운 것이리라.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짐작이 가거니와 그 애의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젖어있어서, 더 묻지 않기로 한다.

  “알겠어. 일단 슌을 찾고.”

  “우린 슌이 싸우는 걸 말리는 게 아냐. 다치지 않길 바랄 뿐이야. 그걸 꼭 말해줘.”

  “그래.”

  목적지가 바뀌었다. 기지로 가는 대신 너를 찾아 폐허를 헤매야만 한다. 잿빛으로 물든 도시, 잔해가 그득한 도시에서 몸을 숨기는 것이란 어렵지 않다. 동료와 다툼이 있었던 듯한 너라면 더욱 눈에 띄지 않으려 할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네가 갈 만한 곳을 하나씩 짚는다. 너는 뼈대만 남은 건물을 좋아했고, 윗부분이 날아간 탑과 기구가 죄다 파손된 유원지를 좋아했으며 의심 가는 장소를 찾아갈 때마다 허탕이었다. 네 모습은 물론이고, 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실패. 실패. 그리고 또 실패. 다리가 아파오고 숨이 거칠어졌으나 계속 걸음을 옮겼다. 너를 찾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다. 너를 기다리는 사람들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이었다. 너를 걱정하던 그 애는,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네 친우는 잠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너를 따르던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 것이 뻔하다. 원래의 너는 그렇게 여러 사람을 걱정시키지 않았는데.

  누이가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너는 <저항군> 사이에서 믿음직스러운 연장자였고, 어른의 빈자리를 채우는 사람이었으며 좋은 동료였다. 동시에 내면까지 강한 전사이기도 했다. 네가 어찌할 수 없었던 사건이, 그런 너를 망쳤다. 그동안 잘 버티고 있었던 너에게 균열을 내, 네가 무너지게 했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생각이 멎었다. 눈에 들어오는 형체가 익숙해서였다. 전쟁 전 다니던 학원 근처, 작은 공원에 네가 있었다. 잔뜩 부서진 벤치 대신 산처럼 쌓인 잔해 위에. 말을 걸까 하다 너무도 쓸쓸한 모습에 입을 닫았다. 맹금을 의미하는 이름에 어울리게 너는 평소에도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번엔 잔해 더미에 올라탄 탓에 배로 쓸쓸해 보였다. 무리를 잃고 홀로 남겨진 맹수처럼.

  “……유토?”

  기척을 느끼기는 했는지, 너는 친우의 이름을 흘린다. 돌아보지도 않고서.

  “유토가 아니라서 유감이군.”

  “, 카이토. 바쁘신 분이 웬일이야.”

  그제야 네가 돌아본다. 금빛 눈이 어쩐지 흐리멍덩하다. 이제는 익숙해진 네 체취, 죽음의 냄새에 희미하게 피 냄새가 섞여 나는 것이 수상쩍다. 다쳤어? 슬쩍 물었더니 너는 웃어버릴 뿐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 너는 답하기 싫은 것에 대해선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사야카가 걱정해. 어서 돌아가야지.”

  “진짜 걱정받아야 할 사람은 너 아닌가? 나는 너처럼 아카데미아에 수배당하진 않거든.”

  적군의 눈에 띄어 집중 경계 대상이 된 일을 두고, 너는 살짝 비꼰다.

  “너도 조금만 더 날뛰면 똑같은 처지가 될 텐데.”

  “그럴 일은 없을걸. 쿠로사키 슌은 카이토만큼 위협적이지 않아서.”

  위협적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덧붙이는 말이 먼지를 들이마신 듯 텁텁하다. 너는 역시, 스스로를 병기처럼 취급하고 있다. 적을 삼키는 것이 존재가치인, 날이 잘 드는 무기로. 생각이 거기까지 뻗자, 속에서 정체 모를 감정이 치민다. 네 멱살을 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편해? 널 포기하고 전쟁에 내던지기만 하면 그만이야?

  자기를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는 주제에.

  너는 자주 다쳐서 돌아왔고, 낫지도 않은 몸으로 또 적 앞에 뛰어들곤 했다. 그렇게 쉽게 불길에 뛰어들 거라면 균열 하나 생기지 않을 정도로 강해야 했다. 혹은 망가진 부분을 꾸준히 고쳐야 했다. 그게 아니면 최소한 강한 체라도 해야 했는데. 잔해 더미에 앉은 너는, 날개 다친 새처럼 위태로워 보일 뿐이다.

  이대로 두면, 안 된다. 너를 걱정하던 아이의 뜻대로 당장 기지에 데려가야만 한다. 내려올 기미가 없는 너를 붙잡으려 잔해 더미에 올라갔다. 꼭대기까지 한 걸음을 남겨두었을 때, 가만히 앉아있던 네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여긴 위험해. 내 손을 잡고 앉아. 그 손을 잡고 너를 끌어내리려다, 너와 말이나 섞을 생각으로 일단 네 곁에 앉았다. 그 잠깐 사이에도 네 자리에선 쇠붙이와 타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필 이런 곳에. 불만을 누르고 입을 떼려는데, 또다시 네가 선수를 쳤다.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말이야. 모든 게 작게 보이잖아. 지나가는 사람도, 부서진 건물도 전부. 그게 마음에 들더라고.”

  너답지 않게 한가한 말이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이에도 너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는 걸 보고 순간 기가 막혔다. 저를 걱정하는 동료들을 두고 이곳에서 풍경이나 감상하고 있었는지.

  “그래서 이런 곳에 올라가 있었나?”

  “그래. 여기 말고 높은 곳을 찾자면 다 부서진 건물인데 그런 곳은 위험하다고 유토가 자꾸 간섭이야.”

  “내가 올 때까지 풍경은 실컷 봤겠지. 그러니까 이제.”

  “잘 봐, 카이토. 이렇게 내려다보면, 이렇게 전부 조그맣게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으면. 우리가 겪는 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거든.”

  잠깐이나마 생각을 멈출 수 있단 말이야. 메마른 목소리에선 감정이 비치지 않는다. 퍽 쓸쓸한 말을 흘리고도 네 옆얼굴엔 뜻 모를 미소가 걸쳐져 있을 뿐. 지옥에서 버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알게 된다. 너처럼 웃는 이들이 보통 어떤 결말을 맞는지.

  “달라지는 건 없어. 내려가면 우린 또 전장에 내던져진다고.”

  그런 사람은 대개 오래 버티지 못한다. 황폐해진 채로 최대출력을 내다 버티지 못하고 꺾이는 것이다 그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미래다. 그러니 의식적으로라도 강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미 먼 곳에 꽂힌 네 시선을 이곳으로 끌어오기 위해서라도.

  “너한테서 피 냄새 나. 부상자는 감상에 젖을 여유 같은 거 없어. 약한 말은 접어두고 이제 그만 내려가지.”

  “미안, 다들 내가 다쳐오는 거 싫어하지.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이유가 있었어. 지금 당장 돌아갔다간 유토에게 한 소리 들을 것 같으니까 조금만 시간 끌다 가자.”

  평소와 다르게 지나치게 수다스럽다. 태평한 것이 아니라, 태평함을 가장하는 태도엔 분명히 의도가 있다. 너는 무언가를 감추고 싶은 것이다. 혹은 무언가를 잔뜩 털어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너에게조차 괴로운 것을. 어느 쪽이건 위태롭게 느껴져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너는 몽롱한 눈으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있잖아, 무슨 일이 있었냐면.

  “아카데미아 놈을 처리하고 돌아가는 길에 쓰러진 여자애를 봤어. 멀리서 언뜻 보기에, 검은 머리카락이 길게 흩어져 있었고 붉은색 천이 몸을 덮고 있더라고. 레지스탕스의 표식, 루리는 허리에 맸었잖아.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루리 목소리가 울리는 거야. 오빠. 왜 날 이렇게 차가운 곳에 내버려두고 있는 거야? 날 놓친 것으론 부족했어? 날 구하러 와야지, 오빠.”

  “……, 루리가 사라진 건.”

  네 탓이 아냐. 란 말을 건네는 것보다 네가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것이 더 빨랐다.

  “루리가 사라진 날, 그 주변을 몇 번 더 뒤졌어야 했는데. 못 했던 게 계속 마음에 걸리는 거야. 혹시 그때 내가 더 돌아보지 않아서 발견하지 못한 거라면? 그래서 루리가 저기, 쓰러져 있는 거라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그 여자애에게 가지 않을 수 없었어. 가야, 확인하잖아. 루리인지 아닌지.”

  그래서 너는, 쓰러진 자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동생이 부상을 입었거나, 최악의 경우 죽었을 가능성까지 생각하고서. 누이가 사라진 후 급격하게 망가진 네가 어떤 심정으로 <누이일지도 모를> 자에게 향했을지는 상상할 수도 없다. 다음에 이어질 것은 분명 묵직한 이야기일 텐데 너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말을 잇는다.

  “그 여자애와의 거리를 세 걸음 정도로 좁혔을 때, 난 그 애의 몸을 덮던 붉은색 천이 뭔지 알아차렸어. 사실 그만큼 가까워지기 전부터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 애는, 붉은색의 재킷을 입고 있었던 거야. 그건. 그러니까.”

  뻔하잖아. 네 말의 뜻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잿빛의 도시에서 붉은 재킷을 입고 다니는 무리는 정해져 있다. 침략군. 제복을 입은 전사.

  “아카데미아였군.”

  “놈들의 제복이란 걸 바로 알아챘지만, 꼼짝도 않고 엎드려 있는 그 여자애를 한 번 뒤집어봐야 할 것 같았어. 그 애, 루리처럼 머리가 정말 길었단 말이야.”

  “아니었지?”

  “눈이 회색이었으니까, 그래. 루리가 아니었어. . 아직은 신이 있구나.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감사 인사라도 건네고 싶어졌을 때, 공격이 날아들더라고. 숨어든 적군이 있었던 모양이야. 딴에 동료를 구하겠다고 내게 덤벼든 거겠지. 나답지 않게 경계를 늦추고 있었어서, 큰일 날 뻔했어.”

  이제 이해했겠지, 카이토. 오늘은 정말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너는 가벼운 웃음과 함께 이야기를 마쳤다. 그제야 네가 왜 고집스레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왜 시간을 끌며 이곳에 앉아있는지 확실히 알아차렸다. 너는 변명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한심하긴.”

  “요즘 많이 닳았나 봐.”

  그대로 기지에 돌아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너는 누가 봐도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으니까.

  사실은 말이야, 카이토. 너는 시선을 천천히, 이쪽으로 돌리며 속삭인다. 나를 찾아와준 게 유토가 아니라 너라서 다행이라 생각했어. 그 말에 숨겨진 뜻은 분명하다. ‘동류가 아니면너를 감당해줄 수 없으리란 체념. 어쩌면 네가 자꾸 혼자 다니려 했던 것도, 주변에 네 황폐함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단 소망에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옥은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료를 떼어놓고 다닐수록, 자신을 내던질수록. 배로 닳아버릴 뿐.

  “……예전엔 소원이 제법 뚜렷했는데 말이야. 요즘은 그냥 막연해. 전부, 끝나버리면 좋겠단 생각뿐이지.”

  그렇게 닳아버린 끝에, 너는 미래를 꿈꿀 수도 없게 되었다. 무기력한 소망이 말해주고 있다. 지금 너에게 건넬 수 있는 것이라곤 의미 없는 위로뿐.

  “언젠간 이 싸움도 끝날 거다. 아카데미아가 언제까지나 이곳을 휘젓고 다닐 순 없어.”

  “그러다 나도, 끝나버렸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도록. 메마른 목소리가 폐허를 울렸다.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모두, 너를 걱정하는 한편 마음 깊은 곳에선 언제나 강했던너를 믿고 있었다고. 그래서 너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라고. 모두의 미래에, 너는 있을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네가 버텨줄까. 그럴 거라 확신할 수 없어서 괴롭다. 차마 말을 덧댈 수 없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더니, 너는 어깨에 손을 올려주며 덧붙였다.

  “이런 이야기, 너라서 하는 거야. 유토에게라면 못 해.”

  “애들한텐 그런 모습 보이기 싫단 건가.”

  “아니. 순진한 애를 괴롭힐 수 없단 뜻이지. 넌 이런 걸, 그냥 듣고 흘려줄 것 같단 말이야.”

  믿음이라기보다 요구에 가까운 말이었다. 너는 여기서 고백한 모든 것을, 네가 흘릴 수밖에 없었던 황폐함을 모른 체 하길 바라는 것이다. 기지에서 너를 기다리는 이들이 네가 이토록 망가졌단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싸움은, 어떻게든 끝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몇 번이고 반복해온 약속을 흘린다. 저항군을 결성한 날부터, 흔들리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주문처럼 외던 말을.

  “카이토라면 믿을 수 있지.”

  “그러니까 넌.”

  “무리하지 마라, 라고 할 생각이었지? 뻔하지.”

  너는 핏기 없는 얼굴로 낄낄댄다. 그 정도의 말로 요약될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어쩌면 일부러 뒷말을 듣지 않기로 한 것인지.

  “걱정할 것 없어. 나는 곧 여기를 떠날지도 모르니까.”

  “어디로 가려고?”

  “아카데미아 수장의 본거지, 알 것 같거든. 거기서 뭐라도 약점을 찾는다면. 어쩌면 여기의 전쟁도 루리를 찾는 일도 조금은 수월하게 끌어갈 수 있을지도.”

  “어디인지는 끝까지 말 안 할 생각이군.”

  “차원을, 넘어갈지도 몰라. 유토에겐 비밀로 해줘. 쫓아오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도망치고 싶은 거라면 돌아오지 않아도 돼. , 지금 그 상태론 레지스탕스에 별로 보탬도 안 되니까.”

  심술궂게 이야기한 데는 이유가 있다. 개조한 디스크에는 먼 이국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는 기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기술로 네가 갈 수 있는 곳은, 적국을 제외하더라도 두 군데. 두 곳 모두 전쟁의 불똥이 튀지 않은 곳이라 하니, 네가 작정하고 숨어들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쟁을 잊고, 괴로운 삶에서도 벗어나서. 더는 망가지지 않고.

  그렇게라도 네가 살 길을 찾았으면 했는데. 너는 천천히 고개를 내젓는다. 안 돼. 애들의 방패는 되어줘야지. 라면서.

  “여기로 돌아와서, 애들을 구하면서 끝나야 해.”

  그래도 마지막엔 어른 행세를 하고 싶거든. 너는 폐허를 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선, 잔해 더미에서 풀쩍 뛰어내린다. 아슬아슬하게 착지한 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쪽을 돌아보며 웃는다. 뭐 해. 설마 뛰어내릴 자신 없는 건 아니겠지? 느슨한 도발에 반응하는 대신, 잔해의 언덕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부서진 벤치 곁에 선 너에게서 조금 전의 쓸쓸함은 찾아볼 수 없다. 감상을 빠르게 죽이는 게 네 특기였다.

  “이렇게 늦은 것에 대해선 어떤 핑계를 댈까.”

  공원을 나서며 너는 물었다. 의도가 분명한 질문이었다. 오늘 쏟아낸 이야기를 어떻게덮어놓을지를 묻는 것이다. 너는 이미 결론을 지어놓고 있었다. 네가 털어놓은 모든 걸, 모른 척 해줄 것이라고.

  “널 찾는 데 오래 걸렸다고 해야지.”

  꼴사나운 모습까지 전할 순 없으니까. 무심하게 덧붙이자 답 대신 가벼운 웃음소리가 귀를 때렸다. 한 번이라도 눈감아주기로 한 것에 만족했는지.

  “다쳐오지나 마. 다음번에 또 그런 식으로 굴면 애들 앞에서 낱낱이 얘기할 테니까.”

  “노력해볼게.”

  진심이라곤 눈곱만큼도 비치지 않는 목소리였다. 기지로 향하는 내내 네가 돌아보지 않은 것은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인 듯했지만, 그 얄팍한 비겁함을 탓하진 않았다. 앞장선 너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너무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늘만은, 덮어줄 것이다. 너의 가장 약한 부분을, 황폐함을, 전부 외면해달라는 뻔뻔한 요구를. 그것이 너와 비슷한 부류로서, 의도치 않게 너를 들여다본 사람으로서. 너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호의임을, 알고 있었다.

 

 

* Side D: https://hyeonsoyah.tistory.com/151

 

 
Posted by 현소야 :

* 2021년 2월에 발행한 쿠로사키 슌 중심 회지 <유물에 관하여> 웹공개

* 프롤로그격 스토리/1부/2부/3부로 나누어 업로드

 

  사사야마 사야카 양에게

  이전 장례에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부탁하신 대로 쿠로사키 슌의 유품을 정리하여 보내려다, 그의 장례 때 사야카 양이 「전쟁이 일어난 후론 슌이 어떻게 살았는지, 거의 알 수가 없었던 게 슬펐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떠올랐지요.
  그래서 사야카 양과도 친분이 있는 사카키 유우야 군의 도움을 받아, 쿠로사키 슌에 대한 기록을 만들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쿠로사키 슌을 기억하는 사람을 찾아 그에 대한 증언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 회사에서 그를 지켜보았던 자, 쿠로사키 슌의 레지스탕스 동료였던 사람. 그와 연이 있었던 이들까지. 그들이 이야기하는 쿠로사키 슌을 듣고 재구성하였습니다. 그렇게 만든 이 기록을, 유품과 함께 당신께 보냅니다.
  이것이 쿠로사키 슌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의 삶의 일부를 담아낸 자료로 당신에게 남길 바랍니다.

                                                                                                           아카바 레이지
  [ 차례 ]
  첫 번째 기록 : 레오 코퍼레이션 비서 OOOO
  두 번째 기록 : 전(前) 레지스탕스 카이토
  세 번째 기록 : 구 아카데미아 데니스 맥필드
  네 번째 기록 : 히이라기 유즈

 

 

 

 

 

  너의 장례는 생전 네가 둘렀던 음울함에 걸맞게 비 내리는 날에 치러졌다. 타지에서 맞은 죽음이라 조문객은 많지 않았다. 가족과 친우, 가장 가까웠던 이가 없어 더욱 조용한 장례였다. 너의 고향 친구는 몇몇 모습을 드러냈지만 눈물이 말라붙어 울지 못했다. 이곳 사람들은 너를 알지 못해 그들이 아는 불행만 위로했다. 너의 누이를 닮은 소녀와 친우를 닮은 소년만이 소리 없이 울었다.

  침략군이 밀려든 고향을, 희망을 찾겠다며 떠났던 너는 종전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트랜드에는 더 볼 일이 없어. 라는 말의 뜻이 이제 그곳엔 사랑하는 게 남지 않았어임을 모두가 알았다. 전쟁의 끝에 가족과 친우를 잃고 돌아온 너는 더는 폐허를 눈에 담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확실하게 정착할 곳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제법 날이 잘 드는 무기였던 너는 종전까지의 수개월 사이에 낡아버려서 갈 곳이 마땅찮았다. 무기로선 이가 빠진 칼이고 인간으로선 폐허가 된 너를 받아줄 사람은, 한때 너를 사용했던 사람뿐.

  수년 전의 너는 <사용자>를 따라, 그가 경영하는 회사에 들어섰다. 회사에 발을 디딘 때부터 쏟아진 시선을 너는 빠르게 느꼈으리라. 망가진 물건을 보는 듯 떨떠름한 눈길. 옅은 연민과, 그보다 훨씬 선명한 불안. 평범한 사람들에게 황폐한 소년병이란 시한폭탄과 같다. 잘못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져버릴, 주변까지 휩쓸지도 모를 위험한 자. 너는 사람들에게 무해함을 증명하는 대신 스스로를 가두는 것을 택했다. 안락한 회사는 너에게 거대한 우리가 된 것 같았다.

  인간에게 붙들린 맹수가 그러하듯 너는 끝내 우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대기업 본사에 걸맞은 큰 건물에서 너는 제한적인 영역만을 다녔다. ‘사장의 손님에게 제공된 방. 회사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될 최상층. 회사의 식당 등. 네 근처엔 사람들이 앉지 않았고 너를 찾는 사람은 <사용자>가 전부였다. 어느 날 네가 쓰러졌을 때도 너는 회사를 떠나는 대신 회사 산하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의 1인실이 너의 마지막 자리가 되었다. 입원한 후로 내내 창밖을 보던 너에게, 살아서 밖으로 나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례를 마치고 오래지 않아 너의 짐은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몇 년간 머물렀던 회사에 너는 고작 두 박스 정도의 짐밖에 두지 않았다. 그 단출한 살림에 너의 삶을 짐작할 단서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회사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너는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나마 너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 너의 사용자만이 초라한 유품을 넘겨받으며 물었다. 쿠로사키의 데이터, 자료실에 남아있겠지.

  젊은 사장의 눈에 너는 언제나 책임져야 할 존재로 보였던 것 같다. 시한폭탄이건 폐허가 된 인간이건, 언젠가 폭발하건 재가 되어버리건. 마지막까지 눈에 담고 관리해야 할 대상. 네가 처음 그의 전사가 되었을 때부터 상담을 명목으로 너의 관찰 기록을 남겨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으리라. 매년 네 모습이 담긴 영상이나 네 심정을 들을 수 있는 녹취 자료가 새로 자료실에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글쎄. 원하는 대로.”

  그러나 그 속에 너를 절망에서 구해낼 답은 없었던 모양이다. 사장은 매년 네 자료를 살폈지만 네가 말라 죽는 것을 막지 못했으니. 그래서일까, 사장의 목소리는 감상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건조했다. 보랏빛 눈에도 씁쓸함만 비칠 뿐이다. 그렇다면 네 너절한 기록을 어떻게 처리할지, 알아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파기하겠습니다.”

  회사의 사람도 아닌, 사장이 떠맡았을 뿐인 외부인의 자료라. 사장에게라면 모를까, 회사 입장에선 무가치한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상이 죽었다면 더더욱. 사장실에서 물러나 자료실로 향할 때 머릿속엔 가여운 소년병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네 삶의 마지막 몇 년을 가두었던, 거대한 우리에서.

  자료실에 들어가자마자 K행으로 향했다. 이방인인 너는 이름보다는 <쿠로사키>로 불리곤 했으므로. 예상대로 네 마지막 몇 년의 기록은 그곳에 있었다. 꺼내자마자 파기하려다 이것이 네 마지막 기록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멈칫했다. 이제 여기에 더 쌓을 것은 없다. 파기하는 순간 유품보다 확실한 흔적이 날아가고 만다. 단절된 사람인 네가 영영 흩어지고 만다 그러니 전부 날려버리기 전 한 번쯤은 들여다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사람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너를.

  영상 자료를 꺼내 재생하자 스크린 가득 네 모습이 담긴다. 사장이 차곡차곡 남긴 기록은 열일곱 살의 너에게서부터 시작한다. 전쟁이 끝나기 전, 네가 막 사장의 전사로 움직이던 시절. 첫 번째 상담에서 열일곱 살의 소년병은 화면을 노려보며 이야기한다. 스스로 고향을 떠나 사장의 품에 들어왔으면서 붙들린 짐승처럼 으르렁거린다.

  [나에게서 듣고 싶은 게 뭐야.]

  거친 목소리는 방어적으로 느껴진다. 카메라에 클로즈업되는 얼굴이 잔뜩 경직된 채여서인지. 수년 전엔 사납게만 느껴지던 모습이 시간이 지나 다시 보니 처량하다. 그 시기 너의 날카로운 태도가 생존을 위한 위협이었음을 깨닫는다.

  [네 목적이다. 쿠로사키.]

  너는 왜 여기에 왔지? ‘동생을 구하기 위해라는 최우선의 목표를 빼고 설명한다면? 맞은편에 앉은 사장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덤덤하여 되레 긴장감을 높인다. 열일곱의 너는 그의 얼굴 대신 입술을 보고 있다. 금방이라도 그가 앉은 테이블을 엎을 것처럼 날을 세우지만, 실은 그의 다음 말 한마디에 집중해야 하는 처지였다. 적의 정보를 쥔 것도, 너를 침략군으로부터 보호해줄 사람도, 너에게 함께 싸울 동료를 줄 수 있는 자도 사장이었으므로.

  [선택지를 주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아니면 적을 쓸어버리기 위해?]

  사장의 말에 너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겨우 전자라고 답한다. 신중하게 골랐을 답에 사장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걸치고.

  [좋아. 그럼 나에게 협조해줘야겠어.]

  [어떤 식으로?]

  [디스크를 내놓는 거다. 랜서즈로서 움직일 때 필요한 장치를 넣어주기 위해서야.]

  가능하겠지? 사장의 말에 너는 바로 왼팔을 감싼다. 왼팔에 장착된 배틀용 디스크가 열일곱 살의 너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이기 때문이리라. 명백한 협력자 앞에서도 쉽게 무기를 내놓지 못하는 것은 불신과 경계 탓이다. 너는 죽을 때까지 타자를 제대로 믿지 못했다.

  물론 영상에 담긴 것은 과거의 장면이므로, 그 상황에서 네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너는 결국 디스크를 풀어 사장에게 내밀 것이다. 사장은 너를 통제범위에 넣었다는 것에 만족하고, 너는 위험성이 삭제된 무기를 돌려받게 된다. 뻔한 결말을 볼 필요는 없었으므로 영상을 껐다. 열일곱 살의 너는 그렇게 눈앞에서 사라진다.

  다음으로 열어볼 것은 열여덟 살의 너였다. 종전 후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던 네가, 겨우 회사에 몸을 붙였던 시절. 전쟁은 너에게 짧은 미래만을 남기고 끝났다. 구해야 할 것을 전부 잃은 너는 회사의 보호를 받게 되고도 도통 방향을 잡지 못했다. 네 방황의 증거는 목덜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고향에서 침략군에 맞서 싸우던 때, 네가 저항군의 표식으로 목에 매었던 스카프는 열여덟 살 생일이 되기 직전에 겨우 사라졌다. 그마저도 사장의 손에 풀린 것이었다.

  한동안 볕을 보지 못했던 목은 유달리 희었는데, 너는 희디흰 목에 자꾸만 불그죽죽한 상처를 만들곤 했다. 과거의 책무, 저항군의 표식에서 해방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과연 열여덟 살의 너는 신경질적으로 목을 긁고 있다. 상처 난 자리를 또다시 긁어 살짝 피가 맺힌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사장의 얼굴엔 표정이 없지만 안경 너머 보랏빛 눈에는 불쾌가 비친다. 너와 비슷한 나이의 사장은 네 방황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오늘은 네 미래 계획에 대해 들으려 해.]

  그러니 자꾸만 네게 답을 들으려 했을 것이다. 앞으로의 삶이라거나, 도전하고 싶은 일이라거나. 네 관심사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을. 사장의 말에 답하는 대신, 너는 작게 중얼거린다. 질리지도 않고 묻는군.

  [LDS 강사 자리를 거절했다니 하는 말이다.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나? 아니면 다른 계획이 있어서 거절한 건가?]

  시선을 맞추지도 않는 너에게 사장은 묻는다. 너는 바닥을 보며 답한다.

  [엑시즈를 가르칠 사람은 많잖아.]

  [‘진짜 엑시즈를 가르칠 사람은 마이아미에서 너뿐인데도?]

  나는 네가 정착할 방법을 찾는 거다. 쿠로사키. 이 길은 네 원래 꿈에서 그렇게 먼 길도 아니고. 사장이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자 너는 겨우 고개를 든다. 금빛 눈은 사장을, 너의 방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를 담고.

  [그런 건 내가 자신이 없어.]

  이제 사람들 앞에 서는 것도 피곤하고. 너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독기 빠진 모습이 처연하다. 우리 속 짐승처럼 무력한 모습은 모두가 기억하던 소년병이 아니었다.

  방향을 찾지 못하던 너를 지나 다음 해의 너를 만난다. 열아홉 살이 된 해 너는 조용히 쓰러졌다. 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인지, 아니면 매일 말라가는 네가 안쓰러웠던 것인지. 그래도 입원 초에는 면회가 잦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네 누이를 닮은 소녀라거나, 너의 친우를 닮은 소년이라거나. 몇몇 사람들이 선물을 안고 너를 찾았다. 너와 함께 사장의 전사로 싸운 이들이 한꺼번에 병문안을 가기도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금세, 사람들의 관심은 걷혔다. 너는 병원을 나설 수 없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삶이 바빴으므로. 유일하게 꾸준히 병원을 찾은 이는 사장이었다. 책임으로 무장하고 불안에 눌린 채, 사장은 네 병실에 드나들었다. 네가 말라갈수록 더 집요하게. 너는 면회를 거부하진 않았지만 그를 반갑게 맞아주는 일도 없었다. 언제나 심드렁한 반응이었다는 사장의 말대로, 화면 속의 너는 건성으로 답하고 있다.

  괜찮아. 라고.

  무슨 질문에건, 어떤 걱정에건 너는 8할은 괜찮다고만 답한다. 사장의 질문을 자르고서,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그만 돌아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지?]

  사장의 목소리에, 열아홉 살의 너는 화면을 바라본다. 핼쑥한 얼굴과 생기 잃은 눈에서 네가 시들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앙상한 모습에 걸맞게 여린 목소리로 너는 답한다. 너희 세계에 망가진 사람은 필요 없어. 여기서 나는, 말하자면 깨진 조각 같은 거지. 잘못 쥐면 다치는 것.

  [나 같은 사람이 끼어들어봤자 평화에 금이 갈 뿐이야.]

  [랜서즈답지 않은 발언이군. 병상에 있다 보니 심리적으로도 약해진 건가?]

  [이제 와서 그 이름을 끌어오는 이유를 모르겠어. 랜서즈도, 그 리더인 너도. 전쟁이 끝난 날부터 제자리로돌아가는 게 맞았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랜서즈로서 세상을 지키는 데 기여한 네가, 그렇게 숨어들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만.]

  [하지만 사람들은 낡은 병기를 싫어하지.]

  [내가 어떻게든 너를 감당한다고 해도?]

  [……알고 있잖아, 리더.]

  낡은 호칭을 입에 올리며 너는 참으로 오랜만에 웃는다. 다만 웃음에 깃든 것은 희망도 기쁨도 아니었다. 아이를 달래는 어른 같은, 미지근한 연민이 비칠 뿐이다. 무엇을 알고 있다는 거지? 잘린 말에 매달리는 사장은 조금 괴로워 보인다. 그가 실패를 알게 된 것은 너와 함께 돌아온 때, 너의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얻은 날부터의 일.

  종전을 기점으로 사장과 너의 삶은 갈렸다. 젊은 사장이 연일 성공을 쌓을 때 그 또래인 너는 빠르게 무너져갔다. 야생의 포식자가 우리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듯. 방치된 무기가 빠르게 녹슬고 낡아가듯. 승리에 익숙한 사장이 그 씁쓸한 실패를 인정하고 싶었을 리 없다. 그는 어떻게든 너를 구해, ‘평화에의 적응을 이뤄내고 싶었을 텐데.

  [승산 없는 싸움이라는 걸.]

  리모컨엔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영상이 꺼졌다. 다시 틀지 않아도 뒷부분이 없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사장은 그 이상 네 이야기를 담지 않기로 한 것이다. 너를 바라보는 것이 처참했기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을 맛보았기에. 너는 스무 살 생일을 열흘 남기고 죽었다. 사장은 그 이른 종말을 들었을 때 결국 그런가라고 반응했을 뿐이었다. 아마 그도 알고 있었으리라. 자신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너에게 어떤 해답도 주지 못했다는 것을.

  네가 스무 살이 되지 못한 탓에, 매년 남겼던 너의 영상은 열아홉 살의 기록에서 멈췄다. 그나마 몇 개 남은 녹취 자료를 재생하려다, 지금까지 본 것과 별반 차이가 없으리란 생각에 손을 대지 않기로 한다. 네 기록을 원래대로 정리하고는 통신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사장에게 자료 처리에 대해 보고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는 무엇이든 말끔하게 매듭지으려는 사람이었으니.

  「쿠로사키의 기록 말입니다.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장은 바로 반응했다.

  「제대로 있던가?

  「관리를 잘못해서 훼손된 모양입니다. 확인해봤더니 제대로 재생되지도 않는군요.

  「유감이군.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치고는 동요가 없다. 사장도 네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 사장뿐만이 아닐 것이다. 회사의 누구도 그런 기록을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보람 없는 싸움 끝에 급격히 망가져 죽은 소년병이라. 연민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제대로 마주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넘쳐나는 자료 중 열 편도 되지 않는 기록을 누락시키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파기했다는 서류를 남겨놓으면 더더욱 쉽다. 관리 장부를 꺼내 <파기 목록> 페이지에 슥슥 휘갈긴다. K, 쿠로사키 슌 상담 자료, 전체 파기. 사유는 자료의 손상과 소장 이유 상실. 두어 문장을 남기는 것으로 너의 기록은 자료실의 관리에서 벗어난다.

  자료실에서 나설 때는 들어갈 때와는 달리, 손에 상자가 들려 있었다. 누군가의 자료를 챙겨 나온 것이었으나, 빼돌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청소하는 것에 가까운 행위였다. 상자에 든 것은 모두를 침울하게 할 자료였으니. 그런 음울한 유물이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다. 이미 수년 전에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곳. 이제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회사의 옛 휴게실. 빛이 들지 않는 휴게실에 들어가 상자를 내려놓으며 건조한 소망을 얹는다. 하루라도 빨리 네 기록에 먼지가 앉기를. 그것으로 네 불행한 삶이 조용히 잊히기를.

  물론 너의 안식을 위해 이번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자료도 잊으려 한다. 너절하고 씁쓸한 생애를, 앞으로 다시는 꺼내보지 않을 것이다.

 

 

* Side K: https://hyeonsoyah.tistory.com/150

 
Posted by 현소야 :

 

  연구자는 무거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가 만든 방주는 막 출항하려던 때였다. 신화에 기록된 방주처럼, 세상의 미래를 새로 쓰기 위해. 이번의 방주가 나아갈 곳은 홍수로 불어난 물이 아니라 하늘이었고, 동물 한 쌍씩이 아닌 인간만을 태워두었단 것만이 신화와 달랐다. 인간의 대표로서, 신세계를 기대하는 사람으로서. 연구자는 하늘 위로 방주를 보낼 그 순간만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늘 위에, 아니, 차원 위에. 과거 찬란했던 세계만큼 희망적인 신세계를 쌓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이자 인류의 희망.

  모두의 기대를 안은 채 방주는 가동음을 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날아올라 곧장 하늘로 향해야 했는데. 동력은 충분했는데. 이륙한 지 오래지 않아 방주는 땅으로 향했다. 곤두박질치는 방주에서, 연구자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 같단 생각에 사로잡혔다. <추락>은 너무나 빠르고,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며 목적지는 천상에서 저 바닥으로 바뀌지 않던가.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계획은 완벽했는데. 성공은 눈앞에 있었는데. 이런 결말은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에 통제장치를 마지막으로 조종하려던 때. 발악은 필요 없어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별에 손을 뻗어봤자니까요.

  아. ‘그녀의 말이다. 그를 인류의 희망으로 만들어준 동시에 그를 절망으로도 내몰았던 여자의 말. 지나치게 상냥한 목소리는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 그는 얌전히 눈앞의 결말을 받아들였다. 별에 손을 뻗어봤자, 인간은 별을 쥘 수 없다. 천상으로 향하려 해봐야 천상으로의 사다리는 인간의 죗값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의, 아니, 그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꿈속에서도 현실은 무거웠고.

  방주는 추락했다.

 

*

 

  침략전쟁은 세상을 온전히 삼키지 못하고 끝났다. 침략군에 맞서 결성한 정예병이, 끝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덕분이었다. 침략군이 패배했으나 전범에 대한 처분은 쉽게 결정이 나지 않았다. 한때 스스로 방주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던 연구자, 그 방주가 추락하는 꿈을 꾸었던 사내는 특히나 처분이 늦었다. 인류의 희망을 자처한 그 사내야말로 군대를 키워 침략전쟁을 일으킨 우두머리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거물은 어떤 처분을 내리든 파장이 크다. 전쟁의 흔적을 얼른 덮고 싶어 하는 세계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사내의 존재 자체가 전쟁의 얼룩이었고, 어쩌다 흘러나오는 그의 이름이 전쟁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트리거였다. 사람들은 공개석상에 그를 세워 제대로 된 처벌을 내리는 것보다, 그로 대표되는 전쟁의 흔적을 하루라도 빨리 덮길 바랐다. 그 덕에 거물 중의 거물, 침략군의 수장이었던 사내조차 건드려서는 안 될 폭탄처럼 조심스럽게 다뤄졌다. 물론 자유를 잃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악의 근원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세상이 받을 충격 때문인지, 사내는 전쟁 직후부터 어느 시설에 머물라는 지시를 받았다.

  언젠가 처분이 결정될 때까지, 조용히 갇혀 죄를 곱씹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곱씹고 있는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저지른 죄는 깎이지 않을 테고, 그의 군대가 짓밟은 땅이 기도로 회복되지도 않을 텐데. 맞아 죽지나 말라고 피신시킨 모양이지. 사내는 제 처지를 그렇게 판단했다. 그런 것 치곤 몸이 편해서, 꼭 요양이라도 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딱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를 침몰시킨 정예병의 수장, , 적의 우두머리가 자주 그를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사내는 그 남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부자가 패배한 침략군의 수장 대 승전군의 수장으로 마주한다는 것도 퍽 우스운 일이었다.

  아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뻔했다. 세상을 삼킬 뻔한 악의 근원이자, 자신에게 죄의 꼬리표를 붙여줄 뻔한 사내를 용서할 수 없어서이리라. 세상은 아직 사내를 처벌하지 않았으나, 사내 때문에 죄인의 아들이어야 했던 아들은 한시라도 빨리 아비를 재판장에 세우고 싶을 터였다. 목숨을 걸고 싸워 아비를 꺾은 대가로 제 결백을 입증하고 싶을 것 아닌가. 사내와 마주앉을 때마다 아들이 냉랭하게 아비를 바라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사내의 요구를 매번 묵살하는 것도.

  요구란, 너무나 간결한 것이었다. 사내가 아들의 손에 옥좌에서 끌어내려지던 순간부터 반복해 내뱉은 것. 제삼자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요구. 히미카를, 불러줘. 침략군을 키우느라 내팽개친 아내를, 사내는 아들에게 패한 순간부터 찾았다. 히미카를 불러줘, 네 어머니를. 제법 간절한 목소리에도 아들은 그의 요구를 외면했다. 어머니는 당신의 일에 나서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아들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제 어머니를 닮아있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일에 나서지 않아.]

  그것이야말로 사내에겐 아들의 손에 몰락한 것 이상으로 끔찍한 패배감을 안기는 문장이었다.

  아들이야 전쟁을 벌일 생각으로 어머니와 자신을 내팽개치고 사라진 아비를 증오할 수 있었다. 사내가 처자식을 두고 먼 이국으로 떠난 때, 아들은 어렸으니까. 한창 애정을 바랄 시기에 아비가 삶에서 잘려나갔고, 결국 자신을 죄인의 자식으로 만들기까지 했으니까. 정예병을 결성한 후 아비에 맞서러 온 아들이 그에게 과거의 일을 꺼낸 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다. 그 여자는, 그렇게 감정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다. 이탈한 <파트너>에 배반감을 느꼈을지는 몰라도, 기본적으로는 그를 냉정하게 추락시킬 수 있을 사람이었다.

  당연히, 사내는 세가 기운 것을 알아차린 때부터 자신을 몰락시킬 사람은 아들보단 아내이리라고 믿어왔다. 아비의 삶에 끼어들려 노력했던 아들이 아니라. 패전의 순간 사내가 아내를 찾은 것은 자신이 그려왔던 종말을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봐야 할 터였다. 히미카를 불러줘. 그 말은 그 사람이 내 삶을 결정짓게 해줘라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아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남편이 몰락하던 순간은 물론, 그 이후 반복된 남편의 요구에도.

  아들이 전해주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그 열여섯 살짜리는 아직 아비에게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어머니가 그 남자에게 신경 쓰는 게 싫어서. 아비의 요구를 중간에서 삼키고 모른 체 하고 있는 게 뻔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제는 마음껏 망가뜨려도 될 <패배자>를 아내가 가만히 두고 있을 리 없다. 처벌이 유보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사내는 아내를 떠올렸다. 아내가 자신을 끌어내리는 것을, 냉랭한 목소리로 그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을 상상했다. 히미카가, 해줘야 해. 그게 어울려.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뇐 말이었다. 아내가 긴 판결문을 읽는 꿈을 꾸고서, 현실이 아님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쯤 되면 사내가 단순히 아내에게 몰락할 수 있다 믿어왔다기보단, 아내에게 완전히 부서지길 바란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그럼 왜 저를 무너뜨리는 건 아내의 손길이길 바랐는가. 왜 심판자 역을 그녀에게 주려 했던가. 이유는 너무나 명확했다. 그를 정상에 올려놓은 것이 아내였고, 그에게 꿈을 꾸게 만든 게 아내였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먼 이국을 본거지로 삼아 전쟁을 꾀하기 전부터 세상을 뒤흔들 힘을 쥐고 있었다. 아들에게 동경의 대상이던 때만 해도, 사내는 대기업의 창업주였다. 그에 앞서서는 그야말로 혁명을 일으킬 기술을 쥔 연구자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휘장이야말로 아내가 사내에게 둘러준 것이었다. 아내를 만났기에 그는 대기업의 창업주였고, 아내의 손길 덕에 회사를 키워낸 획기적인 기술을 세상에 성공적으로 발표할 수 있었다. 아내가 없었다면? 그는 그저 그런 천재로, 빛을 보지 못한 기술자로 남았으리라. 어느 시대마다 한둘은 나오는 비운의 천재정도 되었을까.

  제 능력을 깨달았을 때 사내는 아무것도 쥔 것 없는 이방인이었다. 과거의 기억조차 온전치 않은. 때문에 기댈 것도 믿을 것도 없는. 그럼에도 머릿속에서 번득이는 기술을 세상에 발표하고 싶어서 어딘가의 지면을 빌려 제 연구를 드러냈던 것이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걸 본 사람이 그에게 연락해, 후원 의사를 밝히면서부터 그는 제대로 된 천재가 되었으니. 그때 만난 사람의 얼굴을 사내는 지금도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다. 자주색의 머리칼에 물빛 눈. 조각상처럼 기품 있는 인상.

  [히미카라고 불러요.]

  사내와 마주앉으며 저를 소개할 때 입가에 걸치던 웃음도.

  그 사람은 젊고 영민한 여자였는데, 사내가 쥐지 못한 모든 것을 안고 있었다. 얕게 보자면 연구비로 사용할 수 있을 막대한 재산부터, 좀 더 넓히자면 대단한 인맥과 미래를 보는 눈까지도. 그러니 그녀가 사내의 연구를 보자마자 후원자가 되겠다고 약속한 것과, ‘교제를 요구한 것도 미래에의 투자였던 셈이다. 다르게 말하면, 사내가 그녀의 선택을 받았다고 해야 할 터다. 그녀가 바라는 미래를 만들 사람으로.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결혼이라는 법적인 결합은, 몇 번을 곱씹어봐도 사내를 묶어두기 위한 장치였다. 그는 제 재능을 알아본 후원자에게 미래를 그릴 도구가 된 것이다. 그 사실은 사내에게 줄곧 묘한 자부심을 안겼다. 그는 그 뛰어난 사람에게 선택받았고, 능력을 입증해 보였다. 그녀의 선택이 옳았음을, 회사의 성공으로, 존경받는 연구자가 되는 것으로 확실하게 보였다. 신의 선택을 받은 사제가 된 기분이었다.

  거기까지만 머물렀다면, <아내>라는 이름을 쓴 <스카우터>의 선택에 감사하고 살기만 했다면. 그랬다면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의 삶만이 아니라 세상 곳곳의 미래가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다. 아내에게서 뛰쳐나오면서 그는 죄를 저지르기 시작했고, 끝내는 침략전쟁의 주범이 되었으니. 그가 짓밟은 나라의 민간인, 그의 손에 침략군이 된 어린 학생들, 그리고 아비를 마냥 동경하던 어린 아들까지. 그의 죄에 삶이 바뀌어버린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 사내는 자신에게 그런 힘을 쥐게 해준 이가 자신의 종말을 결정짓는 게 합당하다고 판단했다. 그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만든 자. 그에게 세상의 미래마저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을 심어준 사람. 그의 아내. 그를 세상에 끌어낸 사람이 그를 세상에서 격리하고 처벌하는 게 옳았다. 그것은 신이 타락한 인간을 처벌하는 방식과 같았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아비의 뜻을 전해줘야 하는데. 아내를 불러와줘야 하는데. 증오하는 아비를 심판할 자를 집에서 끌어내어, 세상의 죄인 앞에 세워야 하는데.

  그렇게 동화의 결말을 써야 하는데.

  아내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시설에 틀어박혀 지내던 어느 날. 사내는 과거의 일을 꿈으로 꾸었다. 침략전쟁의 막바지에 실행하려고 했던, 신세계로 방주를 이끌고 가려 했던 일이었다. 신세계를 가꿀 인재를 가득 채운 채 방주를 가동하던 그는 성공 직전에 처참한 실패를 맞닥뜨렸다. 가득한 연료로도 방주는 제대로 가동되지 않더니, 결국 그의 희망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정예병에게 포위당한 채 최후의 발악을 하려던 때. 아내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발악은 필요 없다는 말은 지나치게 상냥해서 사내는 눈을 떴고, 시설의 봉사자에게서 면회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 저를 찾아왔다는 말에 사내는 아무런 감흥 없이 면회실로 향했다. 상대야 뻔하다.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를 이용해먹을 인간도 아닌. 유효기간이 지난 감정을 다 쏟아내지 못해 아비를 찾는 아들일 게 분명했다. 아들을 만나도 해야 할 말은 이미 수없이 반복해온 요구뿐인데. 이번에야말로 아내를 꼭 불러달라고 말하겠다 다짐하고 면회실에 들어가 기다리던 때. 사내는 익숙한 향내를 맡았다. 점점 짙어지는 향내는, 그의 기억에 너무나 깊게 뿌리내린 사람의 향내였고. 혹시나 하는 마음을 꺼내보기도 전에, 향의 주인이 나타났다.

  “오랜만이네요, 아카바 레오.”

  귀에 익은 목소리는 사내가 짐작한 그 사람의 것. 그가 내내 찾아왔던 사람은, 아내는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우아하게 그 앞에 섰다.

 

*

 

  “그동안 계속 찾았다면서요.”

  맞은편에 앉은 아내는 부드러운 웃음을 띤 얼굴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사내는 투명한 막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상대가 아내라는 게 쉽게 믿기지 않았다. 얼마나 자주 불렀던가. 한편으로는 얼마나 자주 그렸던가. 애원에도 기원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사람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를 찾아오다니.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레이지가 전해주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아뇨. 말해줬어요. 내가 응하지 않았을 뿐이죠.”

  목소리에서는 자신을 팽개친 도구, 혹은 남편에 대한 분노는 묻어나오지 않았다. 기억에 남은 것과 똑같이 평온해 오히려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남편 앞에 앉은 것인지.

  “그럼 이번엔 왜 응했지요?”

  아내는 그에게 아내보다는 스카우터였고, 배우자보다는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아니, 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경영 전반을 맡는 것으로 그의 회사를 키워준 진짜 공신이었다. 거기에 결혼 이전에 후원자 대 후원 대상으로 만났던 시간 때문인지, 사내는 아내에게 절반쯤은 경어를 쓰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

  “아카바 레오의 처분에 관여할 수 있게 되어서요. 처분을 기다리느라 지루했죠?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난 이미 당신의 처분을 결정했거든요.”

  손뼉을 짝짝. 치는 아내에, 사내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아내의 저런 태도가 좋았다. 저렇게 감정적인 동요 없이 남편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확실한 종말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을 읽는다니까. 내가 당신에게 뭘 기대하고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뻔하니까요. 난 과거의 아카바 레오를 기억하니까. 그 남자는 동화를 좋아했지요. 그러니까, 바람직한 결말이 나는 이야기를요.”

  “그럼 들어봅시다. 당신이 가져온 처분. 이런 죄인에겐 어떤 처벌이 적합하지?”

  무엇이든 사내는 조용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침략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삼키려고 했던 사내에게,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던 사내에게 거부할 권리는 없다. 설령 있다 해도 행사할 생각은 없었다. ‘악마의 심판이라는 멋진 극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전쟁을 벌일 때까지만 해도 사내는 자신이 일으킨 일이 성전이라도 되는 줄 알았으나 돌아보니 결국은 추한 폭력의 극단일 뿐. 악인은 악인으로 퇴장하면 그만이었고 그 과정이 극적이라면 더 좋다. 아내의 말대로 그는 바람직한 결말의 이야기를 좋아했으니.

  사내가 제법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데도 아내는 물빛 눈으로 남편을, 끔찍한 죄인을 한동안 담을 뿐이었다. 보드라운 입술은 빠르게 열리지 않았다. 그럴 때 그녀의 눈길은 꼭, 표본을 보는 연구자 같았다. 이제 사내는 자신이 아내 앞에서 표본 정도의 가치나 가지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서두를 필요 없어요. 이 시간을 충분히 즐기는 게 좋을 거랍니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흘러나온 말은, 무가치한 존재를 향한 것이라고는 지나치게 자비로웠다. 눈앞의 상대가 한때는 남편이었기 때문에? 아니면 아들의 아비였기 때문에? 그게 아니면, 그녀가 선택했던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우스워서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난 두려워할 게 없어요. 최악의 처분이라 해봤자…….”

  “편리하게 생각하는 건 당신의 나쁜 버릇이죠. 당신이 가시관을 쓴 성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래서 죽음이라도 당장 짊어지고 편해질 줄 아는 모양인데. 그런 처분은 없어요. ‘내가허락하지 않고요.”

  “단호하군. 난 이제 당신에게 가치가 없는 존재인 건 맞지만.”

  “정말로 무엇이든 짊어질 자신이 있다면, 그렇게 의연한 체 하지 않아요. 아직도 뭔가, 헛된 희망을 품는 모양이네요.”

  아내의 긴 손가락이, 사내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은 투명막을 쓸었다. 그녀의 손이 닿은 부분 너머로 비치는 건 사내의 뺨. 막이 없었다면 그녀는 남편의 뺨을 쓸어주었을 것이다. 그 메마른 친절이야말로 사내에게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아내는 이제 확실하게, 그라는 남자를 포기했다고. 곧 죽을 동물을 쓸어주듯, 완전히 버릴 존재에게 의미 없는 친절을 보여줄 뿐이라고.

  “……여기에서 지내며, 당신이 내 목을 조르는 꿈을 꿨어. 히미카.”

  “꿈속의 나는 현실보다 열 배는 더 자비로웠군요. 당신의 일에 나서주기도 하고.”

  “목을 조르진 않아도 내 운명을 결정지으러 온 것 아닌가? 예지몽이었던 셈이지. 지금 날 보는 당신 눈길은 도살장에 끌려가기 직전의 가축을 보는 것 같아요.”

  “당신은 내 앞에서 희생 제물처럼 굴고요. 레오.”

  “그 모습이 역겹겠지. 그럼 내가 정신을 차리도록말해보지 그래요. 도대체 무슨 처분이길래 이 시간을 즐기라고 말하는지. 나에게 말해주는 걸 자꾸만 미루는지.”

  사내도 제 손가락을 막에 얹으며 물었다. 다음 순간 그의 손가락도 아내의 뺨이 있는 자리를 쓸었다. 단순히 아내를 흉내 낸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아내의 뺨을 쓸어보고 싶었는지는 그조차 알 길이 없다.

  “나는 별에 손을 뻗던 남자의 꿈을 꿨어요.”

  그럼에도 닫혀있던 아내의 입술은 한참이나 지나서 열렸다. 그녀의 말은 부부에게 너무나 익숙했던 비유를 담고 있어서, 사내는 말을 듣자마자 움찔했다.

  “내가 믿었던 어떤 남자의 꿈을요.”

  ‘그 남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아내가 천천히 흘리는 말에서, 낡은 비유에서 사내는 과거의 어느 순간을 떠올린다. 그들이 부부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묶어두기 전. 사내가 그저 순진한 연구자였던 시절. 그 순진한 연구자를 후원하기로 결심한 어느 여자가, 자신이 선택한 남자를 만나던 때. 그때 사내는 자신의 연구를 여자 앞에서 설명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열심히. 그러나 그 시점에 사내의 연구는 지원금도 지원 시설도 없어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사내는 말하자면, 설계도만 가지고 있는 상태였는데, 설계도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한참이고 설명하다가 사내는 스스로 힘이 빠지고 말았다. 미안해요, 히미카. 이런 이야기, 밖에서 하면 모두가 헛된 생각에서 벗어나라 하겠지요. 여자가 사내의 주장을 허황된 말로 치부하기도 전에, 사내는 지레 자신의 연구를 탓했다. 그동안 제가 쌓아왔던 것을 몽상의 결과물처럼 취급하고는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것으로 정말 내가 꿈꾸는 단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거의 눈물을 쏟는 것 이상으로 깊은 절망이 그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히미카. 당신이 판단해줘요. , 몽상가인가요?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면서 시간도 지원도 헛되이 쓰는 인간인가요? 그렇다고 말한다면.]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포기할게요. 말을 마치고는 여자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후원자에게 연구의 결말과 연구자로서의 삶을 지속할지 여부를 결정지어달라, 요구했던 것이다. 그때 여자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고.

  [당신은 날 과소평가하는군요. 난 몽상가와 별을 찾는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아요. 몽상가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꿈에 빠져드는 도피자죠. 하지만 세상엔, 언뜻 몽상가처럼 보여도 실제론 같은 것에 손을 뻗는 사람이 있답니다. 인간으로서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것을 추구하면서, 삶을 그에 바칠 수 있는 사람이요.]

  그때 여자의 목소리는 더없이 상냥해, 사내는 꼭 꿈결에 들은 것처럼 느껴졌다. 예언자의 음성을. 인간을 사자(使者)로 삼아 세상에 제 뜻을 펼치던 신의 목소리를.

  [레오, 별에 손을 뻗어요.]

  [추락할 텐데요?]

  [내가 천상으로의 사다리를 만들어줄게요. 당신은 그 사다리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돼요.]

  여자의 손은 연구자의 뺨을 쓸었고 그녀의 팔은 눈물이 흐를 뻔한 연구자의 얼굴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레오. 나를 믿어요. 사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달콤했던 문장이었다. 동시에 그의 꿈을 용인해준 문장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파트너가 되고, 부부가 되고, 아들의 부모가 되고

  “꿈에서 그 남자는 어땠죠?”

  그러다 결국, 사내의 이탈로 이렇게 건조한 사이가 되어 면회실에 함께 앉아있다. 죄인과 심판자로.

  “별의 존재를 의심하더군요. 자기가 올라탄 사다리를 내려다보며 지상의 반짝임을 돌아보고요. 난 그 사람이 계속 하늘을 보길 바랐어요. 별빛을 눈에 담으며, 계속 별을 사랑하길 바랐는데.”

  “그랬다면 결말은 하나뿐이었을 텐데.”

  사내는 그 남자의 결말을 안다. 별에 손을 뻗다가 함부로 지상을 돌아보고, 의미 없는 빛을 탐한 결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별에 손을 뻗은 남자는, 한때 아내가 선택한 남자였고 한때는 그의 아들의 아비였으니. 세상 사람들의 동경을 받았던 연구자이자, 세계적인 대기업의 창업주는 자신의 기술을 전쟁에 활용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의 세계를 열어줄 수 있었을 그의 힘은 절망만을 만들었다. 이제 와서 타락의 이유를 짚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어차피 그만이 아는 사욕이었고, 이뤄져선 안 될 추악한 마음이었다.

  이제 그가 기억해야 할 것은, 결말뿐.

  “, 사다리에서 발을 떼다 추락했어요. 꽤 높이 올라왔었으니 추락하는 속도도 빨랐겠죠.”

  “당신이 마련해준 사다리였는데.”

  “이젠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될 거랍니다. 내가 말했죠, 이 시간을 충분히 즐기는 게 좋을 거라고. 난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감상에 젖을 시간을 준 거예요.”

  “당신은 내 심판자지만, 내가 당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할 힘까진 쥐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나요?”

  미지근한 물음이었다. 그렇게 물으며 물빛 눈 가득 사내를 담아주는 아내는 꼭 어리석은 인간을 보는 신을 연상시켰다. . 저 사람이라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무기를 쥐고 있을 텐데. 저 사람의 선언이 허풍일 리 없는데. 사내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아내의 입술은 다시 열렸다.

  “처분은 간단해요. 당신의 기술로 망가뜨린 세계를 복구하게 하는 것이 기본. 다른 사람을 투입하려 했지만, 당신의 기술이 꼭 필요한 모양이더군요. 유감스럽게도.”

  “이것만일 리가 없을 거야. 무슨 조건이 붙었죠? 아니면, 그것 외에 어떤 처분이 더 있는 거지?”

  “, 조건이 하나 붙었어요. 이건 내가 추가한 조건이죠. 아카바 레오에게서, 그 자가 세상의 희망이었던 때의 기억은 전부 지우도록 한다. LDS의 기억조작 기술로. 세상에 그만큼의 해를 끼쳤다면, 그런 과거를 기억할 필요 없어요. 죄의 기억만 안고 살도록 하세요. 그게 당신을 평생 따라다닐 거랍니다. 아니면 전부 지우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안 돼. 예전의 기억을 지워버리면…….”

  “그래요, 당신의 삶에서 나와 레이지는 지워질 겁니다. 필요 없잖아요?”

  말을 마친 아내는 의자에서 일어나 면회실의 문 쪽으로 곧장 향했다. 이제는 더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앞으로 감상에 젖을 수 없게 되리란 이야기가, 아내를 돌아보는 것도 불가능하리란 이야기가 사내의 머리를 때렸다. 그녀가 면회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버리면, 이제 사내는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게 된다. 다시는.

  “제발, 히미카. 당신의 기억만은 남겨줘. 앞으로는 별을 계속 바라볼 테니……당신이란 별을 기억하도록, 제발.”

  다급한 말은 아내가 막 문을 열던 때 그녀의 등에 꽂혔다. 아내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당신의 별이었던 적이 없어요. 당신은 이제 지상의 죄밖에 볼 수 없게 되었고요. 아카바 레오, 과거의 내 판단이 틀렸어요. 결국 그 남자는, 몽상가가 되었군요. 그것도 모두를 해치려 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내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내의 심판자는, 그를 발굴해낸 스카우터는, 그의 능력을 인정했던 후원자는. 그렇게 그를 떠났다. 하필, 사내의 눈에 새겨진 아내의 마지막 모습은 뒷모습이었다. 그의 삶에서 퇴장하길 택한 아내는 다시는 그를 정면에서 봐주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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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

[유토+슌] 괴물의 그림자

2021. 12. 31. 23:25 from 02

 

  “잠들면 안 돼. . 잠들지 않기로 약속해.”

  “왜 내가 잠들 거라 생각해? 하트랜드의 하늘은 언제나 우중충하다지만 아직 밤이 되지 않았단 것쯤 나도 알아. 걱정도 많다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 눈꺼풀이 닫히고 있잖아. 잠들면 나도 루리도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여기에 없는 루리까지 끌어오는 걸 보니 내가 정말 걱정되는 모양이지. 루리가 여기 있었다면 자기 핑계 대지 말라고 먼저 말했을걸. 걱정, 안 해도 돼. 사실 조금 졸리긴 하지만 그뿐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졸린 게 문제야. 널 깨우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되는 거라고, . ,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상처가 꽤 깊어서 그렇지. 지금까지 무모한 일을 벌이던 널 업고, 둘러메고 온 것도 여러 번이지만 이렇게나 네 몸이 축 처진 때가 없었어. 이대로 의식을 잃으면 위험하니까, 내 말에 집중해. 절대 잠에 떨어지면 안 돼.”

  “……이것 봐, 겁이 많지. 지금까지 아카데미아 놈들에게 당한 사람들은 루리를 빼고 전부 카드화당했잖아. 루리조차 납치되었고. 부상을 입고 잘못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지혈도 마쳐놓고 뭘 겁내. 쿠로사키 슌이 지금까지 너에게 돌아오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피를 뒤집어쓰고도, 옷이 너덜너덜해져서도. 매일 돌아오지 않았나?”

  “그러니 네가 첫 번째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란 뜻일 텐데. 우리 레지스탕스에 제대로 된 치료가 가능한 사람이 아무도 없단 건 너도 알잖아. 지혈만으론 안심할 수 없어. 네 눈이 자꾸 감길 것 같단 말야. 그렇게 감겨서, 그대로 의식을 잃고 내가 깨울 수 없게 되어서…….”

  “평소엔 어른스럽게 굴어서 정신연령은 내 또래인 줄 알았더니. 순 겁쟁이였군, 유토도. 이해해. 아직 아카데미아 디스크 분석을 끝내지 못했는데 카드화당하는 이들은 늘어만 가지. 루리도 없지. ‘유일무이한 친우에게 심적으로 더 기대게 된단 거 아냐.”

  “몸 움직이지 마. 상처 벌어질지도 몰라. 지금 내 모습을 어떻게 생각해도 좋으니, . 잠들지 않기로 약속해. 아직까지 제대로 약속하지 않았어. 자꾸 제대로 된 답을 피하는 건 비겁한 태도 아닌가? 버틸 자신이 없는 거라면 말 빙빙 돌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힘들어서, 이대로 의식을 놓고 싶다고.”

  “알겠어. 알겠다고. 약속해, 잠들지 않기로.”

  “눈 감지 마. 방금도 눈이 반쯤 감겼어.”

  “난 이미 약속했지. 그럼 이제부터는 네 몫 아닌가? 네가 정말로 내가 잠들지 않길 바란다면, 의식을 잃지 않도록 하려 한다면……어떻게든 내가 정신을 유지하도록 도와줘야지. 물을 뿌려서건 부상 부위를 쑤셔서건. 네 힘으로 날 재우지 않고 있어봐. 유토. <네 목숨은 네게 맡긴다.>고 칠 테니까. 너는 그런 류의 대사를 좋아하지 않나?”

  “자리를 뜨면 눈을 감아버리겠지. 상처를 들쑤시면 또 피가 날 테고. 방법은 하나뿐일 거야. 네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의식을 놓지 않도록 끝없이 말을 걸기.”

  “웬일이야. 내가 아는 유토는 그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쩌겠어. 널 재울 수는 없으니 이야기를 쥐어짜내서라도 말을 걸어야지. 내가 말을 걸면, 그대로 듣고 있으면 안 돼. 어떻게든 답을 하는 거다, . 너도 노력하고 있단 걸 보여줘. 의식을 잃지 않으려, 버티려고 노력한단 걸 말이야.”

  “루리가 없어지고 나선 잔소리가 너무 늘었어. 형님처럼 굴긴.”

  “네 탓이기도 할 텐데. 네가 그렇게 아무렇게나 몸을 던지고 다니지 않았다면 나도 네 일에 간섭하지 않았어. 레지스탕스 쿠로사키 슌을 믿지만, 내 친우는 불사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알지. 넌 내일이 없는 것처럼 싸우고, 스스로를 너무 쉽게 내던지잖아. 이전에 말했듯이, 나는 너희 남매를 다 잃고 싶지 않아.”

  “잃지 않았어. 망할. 왜 또 약한 소리야? 루리는 납치당한 거지 잘못된 게 아니라니까! 아카데미아에 가서 루리를 찾기만 하면 되는데, 왜 잃기라도 한 것처럼 말해?”

  “상처 벌어지니까 움직이지 마. 흥분하지도 말고. 실언이었으니 조금 전 말은 잊어줘. 그래, 루리는 아직우리가 찾지 못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네가 더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아카데미아로 향하기 전에, 루리를 찾으러 가기 전에 네가 먼저 쓰러지면 안 된다고. 루리를 구하러 가는 길에 오빠인 네가 빠져서야 되겠어? 그러니까 제발…….”

  “……디스크 분석은 곧 끝나. 아카데미아의 카드화 기능에 대항할 길을 찾아내기 전까지, 우리는 버티지 않으면 안 돼. 그러니 가능한 모든 싸움에 뛰어들 수밖에.”

  “걸핏하면 널 미끼로 삼고 있으니 문제지. 네 무기인 RR은 일대다 특화의 덱이라지만 승기를 잡을 때까지 버티지 못한다면 집중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건 네 쪽…….”

  “루리가 이 자리에 없는 게 다행이군. 너도 루리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을 테니까.”

  “루리가 있었다면 오빠의 무모함을 먼저 지적했을 텐데?”

  “이런 소모적인 이야기, 그만하지 그래. 어차피 부상은 입었고, 다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으니.”

  “급하게 말을 돌리는 것 같아서 내키진 않지만, 그래. 지금 우리가 계속 말을 주고받는 목적은 서로를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지. 널 계속 깨워두기 위해서니까, 화제는 바꾸는 게 좋겠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지금 상황 따위 잊을 정도의 밝은 이야기? 네가 몰랐던 스페이드교의 소문? 그게 아니면.”

  “그동안 쿠로사키 슌이 유토에게 궁금했던 것은 어때.”

  “그런 게 있었어? 생각도 못 했는데.”

  “물론 있었지. 스페이드교에서 만났을 때부터 쭉 머리에 넣어두었던 의문 말이야.”

  “뭐였는지 말해봐. 남들 앞에선 말하고 싶지 않은, 대단한 비밀이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여기는 우리 둘밖에 없고, 기지로는 네가 좀 더 안정되었을 때 갈 생각이니까.”

  “내가 부상을 입었다고 평소답지 않게 친절한데? 기회를 놓치긴 싫으니 지금 물어야겠어. 내가 궁금했던 건 이거야. 왜 스페이드교에서 처음 만난 유토는, 바로 그 첫날부터 이미 나를 알고 있었던 체 쿠로사키 슌을 친근하게 대해주었을까?”

  “잠깐만, . 우리가 정말로 그날 처음 봤다고 생각해온 거야? 지금까지 그렇게 믿어왔어?”

  “뭐야, 그 반응은. 꼭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 우리는 그때 처음 만난 게 아냐. 그보다 몇 년은 더 전에 만났지. 난 옛 일이라 일부러 안 꺼내는 줄 알았는데, 아예 기억을 못 할 줄은.”

  “몇 년은 더 전이라고? 어릴 땐 루리를 돌보느라 거의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 날 닮은 사람을 본 게 아니고?”

  “쿠로사키 슌과 똑같이 생겼으면서, 똑같이 RR이란 덱을 쓰고, 나와의 나이 차이가 지금 너와 내 나이 차이와 같은 사람이 하트랜드에 또 있을 거라 생각해?”

  “이상한데. 난 전혀 기억이……날 재우지 않으려고 방금 만들어낸 이야기는 아니고?”

  “마음대로 생각해. 의심한다고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내 기억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어. 쿠로사키 슌을 처음으로 본 때. 물론 그때는 네 이름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좋아, 설명해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면 듣고 바로 흘려버릴 테니.”

  “스페이드교에서 마주친 첫날, 네가 내 드래곤에 관심을 보였던 거 기억해? 다크 리벨리온 엑시즈 드래곤을 보자마자 반가워했지. ‘너에게 제법 어울리는 드래곤이야라 말하면서. 몇 살 어렸을 때의 너도 그런 반응을 보였어. 그러니까…….”

  “듀얼리스트 세계에선 덱과 사용자가, 몬스터와 사용자가 파트너처럼 깊게 얽히는 게 보통 아닌가? 덱과 사용자가 닮아간다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지. 처음 본 때부터 너와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어.”

  “……말은 끝까지 들어줬으면 해. 물론 네가 말한 대로 듀얼리스트와 몬스터는 깊은 유대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지. 그래서 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 난 어릴 때 다크 리벨리온과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어. 기억이 시작된 때부터 가지고 있었으니, 듀얼리스트의 입장에선 특별한 카드인데도.”

  “이유는?”

  “지금 생각하면 상상력이 풍부했던 어린 날의 망상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때의 난 다크 리벨리온의 <그림자>를 보곤 했거든. 다크 리벨리온을 불러낼 때마다 그 몸체보다 더 큰 실루엣이 허공에비쳤어. 녀석의 어금니가, 내 듀얼상대의 몸을 정통으로 꿰뚫거나 발톱을 휘두르는 실루엣이 보였지. 지금에야 아카데미아라는 <병사>를 상대해야 한다지만, 그때는 기껏해야 내 또래의 꼬마들과 맞설 뿐이었는데도, 다크 리벨리온은 매번 내 상대를 삼킬 것처럼 굴었던 거야.”

  “녀석이 그렇게나 사나웠다고?”

  “내 드래곤이긴 하지만 냉정하게 봐서, 한 번도 사납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말해야겠군. 예전과 지금의 차이가 있다면 내가 자랄수록 다크 리벨리온이 덜 위협적으로 비친다는 것 정도일까. 발톱을 숨기고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삼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대로 말하면 어렸을 땐 다크 리벨리온이 사나운 면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는 거고. 아마 그 결과가, 내가 본 <그림자>였겠지. 내 드래곤의 난폭하고 공격적인 면에 대한, 어린 날의…….”

  “두려움의 투영?”

  “그럴지도. 하지만 중요한 건, . 내가 보았던 실루엣이 진짜냐 망상이냐가 아냐. 다크 리벨리온을 꺼낼 때마다, 누군가와 몬스터를 두고 듀얼을 할 때마다. 때로는 단순히 다크 리벨리온 카드를 든 때조차. 나와 듀얼로어울리려는 이들만 있으면 놈이 사납게 굴었다는 거지. <그림자>가 비칠 때면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같이 들리곤 했어. 실루엣을 보는 것도, 위협한답시고 내는 소리를 듣는 것도 나뿐이었던 것 같지만, 그때의 나는 어렸기 때문에 전부 감당하긴 어려웠고.”

  “그래서, 다크 리벨리온이 상대를 위협할 때마다 어떻게 반응했는데? 듀얼을 포기했나?”

  “어쩌면.”

  “모호한 답변이야. 제대로 말해주지 그래.”

  “처음엔 당혹스러웠던 것이 반복될수록 공포로 바뀌어갔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 지금도 봐, 열일곱 살인 너도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어른들이 그런 말을 믿어주기야 하겠어.”

  “제대로 맞서진 못했다는 뜻이군.”

  “유감스럽게도. 날이 갈수록 공포는 짙어졌으니까. 언젠가부턴 다크 리벨리온 소환 조건을 충족했는데도 소환하기가 쉽지 않았어.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지는 걸 느끼면서 겨우 소환해냈다가 효과를 쓰지도 못하고 듀얼에서 패하기도 했던가. ‘나의드래곤인 건 분명한데, 놓고 싶지도 않은 카드인데 사용자인 내가 오히려 다크 리벨리온에 먹히는 것만 같던 나날이었지. , 드디어 쿠로사키 슌이 등장할 차례야. 우리의 진짜첫 만남에 대해 들을 준비 됐어?”

  “내 배역은 뭐였지? 유토와 함께 다크 리벨리온에 겁을 먹는 친구인가?”

  “그랬다면 내가 그 후 몇 년이나 지나도록 너를 기억했겠어? 다크 리벨리온을 겁내는 아이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는데. 다크 리벨리온도 내가 저를 두려워한단 걸 알았는지 자꾸만 사나워져서, 너를 만나기 직전엔 결국 나와 듀얼을 하던 아이들조차 그 난폭한 모습에 겁을 먹고 도망치더라고. 그래서……그날엔, 너를 처음 만난 날엔 어디 창고 같은 곳의 구석에 혼자 틀어박혀 있었어. 다크 리벨리온을 꺼내둔 채로. 녀석의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혼자 있고 싶었던 때일 텐데 내가 눈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군.”

  “그러게. 정말이지, 그때도 넌 사람을 놀라게 했단 말이야. 문을 조심스레 여는 것도 아니고, 쳐들어가겠단 마음을 먹기라도 한 것처럼 벌컥 열었지. 가뜩이나 예민하던 때 예고도 없이 찾아든 손님이라. 달가울 리가 없었어. 누가 들어온 거야? 하는 짜증이 먼저 치밀었지. 그런데…….”

  “그런데?”

  “다크 리벨리온의 그림자. 그때까지 나를 괴롭혀온 그 실루엣이 불청객이 온 창고 입구 쪽으로 향하는 게 보이더군. 순간 숨이 막혔어. 그 전까지 다크 리벨리온이 날뛴 건 바깥에서였지만, 그때는 좁은 창고 안이었잖아. 거기다 불청객이 한 무리일 리도 없고. 이번에야말로 내 드래곤이 누군가를 덮칠 것만 같았어. 내가 혼자 숨어든 틈을 타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때. 안 돼. 위험해. 불청객에게, 희생자가 될지도 모를 이에게 경고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 거야.”

  “당연히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네 쪽으로 가까워졌을 테고.”

  “……발걸음 소리는 점점 커지기만 했어. 다크 리벨리온의 실루엣은 위협적으로 꿈틀거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때 난 나보다 서너 살쯤 많아 보이는 남자아이를 발견했지.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한 거야. 그제야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 말은 도망쳐가 아니었어. ‘왜 여기 온 거야?’였던가. 잔뜩 뾰족해져선 엉뚱한 말을 흘렸지.”

  “그때도 낯가림은 상당했던 모양이야.”

  “시끄러워.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우니까 굳이 말하지 말고 그냥 얌전히 들어. 당연히, 그 남자애는 눈을 둥그렇게 떴어. 무슨 엉뚱한 말이야, 갑자기? 란 말이 튀어나올 차례였지. 그런데 말야. 그 애가 꺼낸 첫마디는 그런 게 아니었어. 내 귀에 박힌 건 의문문이 아니라 감탄이었거든. 우와, 네 드래곤 정말 멋지다!이상하지 않아? 내 또래 애들은 물론, 나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이나 많은 애들도 겁먹고 도망치던 드래곤을, 그것도 잔뜩 난폭해진 상태의 드래곤을 그렇게 본다는 게.”

  “그때의 네 반응이 상상이 가는걸. 분명 멍청한 얼굴을 하고서…….”

  “웃지 마, . 그렇게 낄낄대면 상처 벌어진다고. 그 녀석은 위험해.라고 답하려던 때, 나는 그 애를 삼킬 듯했던 다크 리벨리온의 실루엣이 변하는 걸 봤어. 성격 급한 그 애가 다크 리벨리온에 손을 뻗었는데도. 다크 리벨리온의 어금니는 그 애 쪽으로 향하지 않았어. 발톱은 내렸고, 무시무시하게 커졌던 실루엣은 보통 크기로 돌아갔지. 보통의 드래곤처럼. 그 모습을 확인하자, 무엇 때문인지 다리에 힘이 풀렸어. 주저앉은 나를 보고, 그 애는 제 손을 잡고 일어나라는 듯 손을 내밀더라고. 뭐야, 저런 멋진 드래곤을 가지고 있으면서 바보같이 주저앉기나 하고. 명랑한 목소리였어. 우습게도 그때, 내 두려움이 아무것도 아니었단 생각이 들었지.”

  “듣고 보니 내 배역이 나름 괜찮은 배역이었던 것 같아. 단역은 아니고 조연쯤은 된 모양이네.”

  “그냥 조연이겠어? 그 시기의 나에겐 처음으로, 다크 리벨리온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해준 특별한 조연이었는데. 왜 다크 리벨리온이 날뛰는 걸 멈췄을까? 왜 내 공포의 투영이었을지도 모를 그림자가 그 애와 마주한 때는 얌전해진 걸까. 지금도 답은 모르겠지만, 그때가 내 삶에서 전환점이 된 것은 분명해. 그날 이후로 난 더는 다크 리벨리온의 실루엣에 시달리지 않았으니까.”

  “그날로 공포의 환상에서 벗어난 거겠지. 내가, 아니, 진짜 나인진 모르겠지만. 그 애가 너무 당당하게 다크 리벨리온에 접근해서 그만 겁을 줄 타이밍을 놓친 거 아닐까?”

  “글쎄. 그런 우스운 이유여도 좋고, 네가 내 드래곤과 상성이 맞았다는 비밀이 있어도 좋겠지. 듀얼학원에서 만나 너와 제대로 가까워지고는 네가 편한 사람이어서 그랬단 생각이 들지만. 이야기는 아직 남아있으니, ‘그날의첫 만남으로 돌아가자. 그 애의 손을 잡고 일어나자, 그래서, 저 드래곤 이름이 뭔데?그 애가 물었어.

  「다크 리벨리온 엑시즈 드래곤.」  나도 모르게 답했지. 내 손을 잡아주느라 바짝 가까이 온 그 애의 눈이 꼭, TV에서 본 맹금류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어. 그리고 그 애는…….

  「너랑 어울리는 드래곤이네.그렇게 말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해.”

  “스페이드교에서 만났을 때와 비슷한 말을 한 모양이지. .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긴 해. 다크 리벨리온만큼 너에게 어울리는 드래곤은 지금껏 본 적이 없으니.”

  “그러니 스페이드교에서 마주친 첫날, 내가 얼마나 반가웠겠어. ,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구나. 일부러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그런 생각까지 했더니.”

  “사실 지금이라고 기억이 나는 건 아냐. 그래도, 내 판단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만은 다행스럽게 느껴져. 그만큼 너도, 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뜻일 테니까.”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조금 서운하지만, 그래. 그때는 어렸고, 이제 우리 나이는 사소한 것을 잊지 않을 수 있는 나이니까 내 기억의 나머지를 다 끌어내서 이야기해줄게.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다크 리벨리온의 그림자에 시달린 이후론 오랜만에 한 점 불안도 없이 그 애에게 말했어. 네 덱도 궁금해. 덱을 가져왔다면 듀얼하지 않을래? 그 애는 말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덱케이스와 디스크를 꺼내더라고. 그때 그 애가 꺼낸 덱이 분명히, RR. 레이드 랩터즈였어. 어둠속성 비행야수족 카드로 구성된. 기계 새 카드.”

  “꼬마 유토의 감상이 궁금해. RR을 사용하던 그 애는 어때 보였지?”

  “감상? 간단했어. , 저 애도 자기랑 닮은 덱을 쓰는구나. 그리고 전술이 재미있구나. 친구가 되면 좋을 텐데. 그 정도. 그렇지만 그 애는 오래 머물지 않았어. 듀얼을 마치고는 집에 돌아가야 한다면서 미련 없이 입구로 향하더라고. 그러면서 엉뚱한 말을 하던데. 뭐였더라. 네 그림자, 드래곤 모양을 닮았어.였던가?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모를 말을 한 걸 보면 확실히 쿠로사키 슌이지, 그 애. 넌 요즘도 그러잖아.”

  “그 후로는 못 만났고?”

  “그래. 그땐 오랜만에 즐거운 듀얼을 한 여운 때문에 창고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한동안 혼자 남아있었는데, 그러지 않을 걸 그랬다고 그로부터 몇 달은 후회했어. 그때 본 아이, 이름도 모르고 사는 곳도 정확히 모르는데 근처에서 다시 마주치지 못했으니까. 시간이 좀 흘러서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라 생각하고 슬슬 잊어가려던 때. 듀얼학원 스페이드교에 등록했어. 다음 이야기는 예상이 가겠지. 스페이드교에서 우연히 만난 애가 딱 기억 속의 그 아이와 같았다는 것.”

  “그렇게 두 번째의첫 만남을 하고서 그때야말로 친해지게 되었다는 것. 맞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쩌면, 그래. 너와 만났을지도 몰라. 그래서 다크 리벨리온을 본 때 더 호의적이었을지도 모르지. RR과 다크 리벨리온의 합이 좋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지금 내가 궁금한 건 이거야. 꼬마 유토가 본 그 애는, 친구가 되고 싶었던 그 애는 지금도 너에게 친구로 남아있었으면 하는존재일까? 이 전장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존재일까?”

  “부상을 입더니 마음이 약해지기라도 한 모양이지. 물을 필요 없는 걸 묻는 걸 보면. 어릴 때의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내 드래곤의 난폭한 그림자를, 아니면 드래곤에 대한 내 두려움을 가라앉혔던 그 애는 지금도 내 방패가 되어주고 있지. 유일무이한 친우란 이름을 괜히 꺼냈을 리 없잖아. 그러니 슌. 너는 더더욱 오래 버텨야 해. 내가 버티는 만큼, 내 또래의 레지스탕스가 버티는 만큼. 너도 버텨줘야만 해. 이기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네가 남아있는 쪽이 안심이 돼.”

  “……어리광은. 곧 죽을 사람 보는 것처럼 말하는 것 봐. 그래도 하루쯤은 봐줄게. 어릴 땐 제 드래곤에도 겁을 먹었던 아이였다고 하니까.”

  “그렇게 놀리라고 알려준 게 아니라고. 기억력이 나빠서 나를 몇 년이나 잊고 있었던 주제에. 농담까지 하는 것을 보니 이젠 좀 정신이 든 것 같지만.”

  “그럼 이제 기지로 좀 옮겨주지 그래? 여기에 누워있는 것도 슬슬 지루하단 말이지. 지혈은 진즉 마쳤겠다, 상처는 더 벌어질 것 같지도 않고. 너랑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멀쩡해졌는데. 설마 아직도 겁을 먹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널 부축해서 가는 것도 괜찮겠지만, 조금 전에 기지 쪽으로 연락해뒀어. 혹시 도중에 아카데미아의 공격이 있을지도 모르니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와달라고 했지. 아마 곧 올걸? 강한 놈들이라 안심이야.”

  “애초에 직접 날 데려갈 생각도 없었군. 어째 시간을 너무 끌더라니.”

  “더 안전해졌다 생각하라고, . 널 옮기는 것이야 문제없지만, 부상을 입은 너에게 듀얼을 시키는 일이 일어나선 곤란하다고 판단한 거야. 우선은 몸을 일으키고 기다릴까?”

  “다음번엔 네 말에 속을 생각 없어. 몸을 못 움직일 정도의 부상만 아니면 단신으로 바로 기지로 갈 테니까, 이렇게 사람 귀찮게 만들지 마.”

  “아무래도 좋으니 다쳐 오지나 마. ‘귀찮아진원인은 내가 아니라 네 쪽에 있었으니까.”

  “꼬맹이 때도 이렇게 잔소리가 많았던가?”

  “예전 일처럼 기억에서 지워버리면 되지, 불평이 많아.”

  “이제는 다시 잊지 않아. 두 번이나 잊어버리면 그땐 용서받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 똑똑히 기억할 테니, 잔소리만 좀 줄여줘. 루리가 없으니 루리 몫까지 하는 것 같아.”

  “네 논리대로라면 루리를 되찾기만 해도 잔소리가 반으로 줄지 않겠어. 이대로 오래 버텨서, 아카데미아로 가는 거야.”

  “그리고 루리를 구해내, 다시 원래 우리로 돌아오는 것. 우리의 목적에 충실하잔 뜻이군. 그런 것쯤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아. 난 언제나 준비가 되어있으니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강하게 맞서기나 하라고.”

  “그래. 이제야 안심이야. 복귀 준비해, . 동료들이 왔으니 함께돌아가자. 내일을 위해서.”

Posted by 현소야 :

[사장슌ts] 계약은 신중하게

2021. 11. 30. 23:34 from 02

 

  치솟는 불길이 시야를 메운다. <마녀 처형>이라는 외침과 함께 퍼지기 시작한 불길은, 마녀가 숨어든 숲을 빠르게 태우고 있었다. 마녀를 없애려 지른 불은 마녀를 포함해, 그녀가 택한 종착점마저 잿더미로 만들고 마리라 마녀의 계약자는 마녀의 은신처까지 태우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냉소를 걸친다. 마녀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으나 인간은 마녀를 감당하지 못한다. 인간일 수 없는 존재를 경멸하고 두려워하여, 세상에서 잘라내려 할 뿐. 마녀가 벌였다고 알려진 대부분의 사건이 인간이 빚어낸 재앙이며, 마녀의 마법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신비일 뿐임을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마녀가 인간을 꼬드긴 일은 없다. 마녀의 힘을 탐한 소수의 인간이 마녀에게 접근해 계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다. 인간의 욕심이 마녀를 붙들어왔음은, 지금 병사에 포위된 마녀의 계약자도 자신의 경험으로 입증할 수 있다. 마녀가 뛰어들어간 숲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무장한 전사들을 이끄는 청년이 마녀의 계약자. 오래도록 계획해온 적진에의 침투를 앞둔 청년이 잠시 이곳에 멈춰, <처형>을 지켜보는 건 계약자에 대한 마지막 의리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제가 끌어들인 마녀에 대한.

  그는 마녀에 이끌렸으리라곤 누구도 상상 못 할, 잘 교육받은 도련님이었다. 명문가의 후계자로 태어났으니 평생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으련만, 세상을 위협하는 악인이 나타나자 도련님은 악에 맞서기를 택했다. 정예병을 결성하고 지휘관을 자처한 정의로운 청년, 어쩌면 영웅이 될지도 모를 자. 사람들은 그런 반듯한 인간이 마녀에 이끌렸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젊은 지휘관이 공공연하게 마녀를 데리고 다녔음에도. 마녀를 제 전사처럼 사용했음에도.

  마녀가 지휘관에게 묶이게 된 것도 그가 마녀에게 계약을 요구해서인데도.

  왜 불길하게 마녀를 데리고 다니느냐 물을 때마다 지휘관은 계약을 해버려서, 라고 건조하게 답했는데 사람들은 마녀의 계약자가 정예병의 일원이라 믿는 눈치였다. 지휘관이 마녀를 데려온 시점이 정예병 결성 직전이란 사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왼팔에 수상쩍은 표식이 있다는 것도. 피처럼 붉은 표식이, 마녀가 사용하는 무기마다 새겨진 심볼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도.

  지휘관에게 그 표식을 새겨준 계약자는 지금쯤 에게 둘러싸였으리라. 마녀는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의 외형을 지니고 인간의 육신을 빌린다. 불멸자라고도 볼 수 없다. 마녀가 숨어든 곳으로 향해봤자 지휘관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사람들의 두려움과 증오 탓에 공격당한 후 불길에 갇히는 마녀뿐이다. 지휘관은 눈앞에 그려지는 계약자의 상을 떨쳐내려 애썼다. 마녀가 표정 없는 얼굴로 칼을 맞는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그녀는 인간의 병기로 죽이기 힘들고, 인간의 증오로 망가지지 않으며. 불태워지더라도 마녀의 힘은 유효하고. 마녀의 계약자만이 아는 이야기를 지휘관은 속으로 읊는다. 정예병은 경비를 뚫고 적진에 침투하기 위해 마녀를 인간에게 던져주었다. 그것도 보통의 인간이 아닌, 마녀의 동족을 사냥해온 잔학한 병사에게 내주었으니 사실상 마녀를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지휘관의 선택이었고, 정예병이 택할 수밖에 없는 차악의 길이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경멸받는 패를 버리기.

  [이대로라면 아카데미아에 진입하기 어려워. 랜서즈는 고작 8명이다. 정면돌파가 불가능하니 수를 쓸 수밖에. 필요한 건, 미끼. 누군가가 아카데미아의 집중 타깃이 되어야 한다.]

  진입작전을 실행하기 전 마녀를 따로 부른 지휘관이 건넨 말이었다. 굳이 말을 덧대지 않아도 마녀와 그 계약자는 누가 미끼가 되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길로 지휘관을 떠난 마녀는 무기인 기계 새를 불러냈고, 오래지 않아 적진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쫓기기 시작했다. 침략군이 마녀를 없애려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지휘관과 그 계약자가 마녀를 미끼로 쓰기로 합의한 순간, 마녀는 이런 결말까지 생각했을까? 저를 사냥하려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불길에 휩싸이는 일까지?

그리고 마녀에게 미끼 역을 요구한 지휘관은 이런 것까지 각오했던가?

  “리더, 어서 아카데미아로 가야…….”

  무의미한 생각을 끊은 것은 동료의 목소리였다. 정예병의 희망인 소년은 지휘관을 붙잡다시피 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바로 머리가 차가워진 지휘관은 감상을 걷고 몸을 돌렸다. 마녀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알고 있다.”

  “쿠로사키는 괜찮은 거지?”

  마녀의 이름이 흘러나왔지만 지휘관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건 우리가 지금 신경 쓸 게 아냐.”

  대신 병사가 마녀를 노리는 한, 지휘관과 그가 이끄는 정예병은 적진에 쉽게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마녀를 향한 병사의 공격이 거셀수록, ‘처형이 오래 걸릴수록, 정예병은 안전해진다. 지휘관은 타고나길 영민했고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가장 좋은 길을 택할 줄 알았다. 지금 그가 향해야 할 곳은 마녀가 갇힌 숲이 아닌 적진이었다. 수년 전부터 끌어내리기로 마음먹었던 침략군의 수장을, 당장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계약자를 영영 잃게 되더라도.

  마녀가 마지막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한 덕에 정예병은 큰 방해 없이 적진에 침투할 수 있었다. 무장한 전사들이 침략군 간부를 처리하던 때 지휘관은 적진의 최중심부로 향했다. 침략군의 기지라지만 내부 구조는 이미 훤하게 알고 있어서였다. 그가 선발해낸 정예병에게는 처음 들어오는 곳이었으나 그에게는 이미 수년 전 곳곳을 누볐던 익숙한 장소였으니. 침략군의 수장도, 그 끔찍한 남자가 꾀하는 것도 지휘관에게는 너무도 선명했다. 그는 한때 그 남자를 아비라 불렀고, 그 남자의 야심을 아들로서 엿들었으며

  “지긋지긋하게 따라붙는구나.”

  지금은 저항군의 리더자격으로 침략군의 수장 앞에 섰다. 오랜만에 보는 아비는 부쩍 늙었고 그만큼 초라해 보였다. 세계를 삼키겠다는 야욕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카바의 죄는 아카바가 끊어야 할 테니까.”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너는 너무 감상적이야. 널 내 곁에 세우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지.”

  “그런 걸 바란 적도 없어. 당신과 얽히는 건 수치스럽거든.”

  “그래. 3년 전보단 단단해진 모양이야. 마녀를 버리고 왔더구나. 내가 키운 군사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주고서. 계약자와 함께하는 것보다 아비를 끌어내리는 게 더 끌리더냐? 그래서 너답지 않게 마녀를 미끼로 삼은 거냐?”

  “아카바 레오를 끌어내리려면 그 정도의 각오는 되어있어야지.”

  적진에 들어서기 전이라면 모를까, 일단 침투하기만 하면 그 주변 군사를 빠르게 정리할 수 있을 실력을 가진 이들이 바로 지휘관이 이끌던 전사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소란은 잦아들고, 간부를 인질 삼아 남은 군사를 무장 해제시킬 수 있으리라.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아. 아들은 아비에게 낮게 속삭였다.

  “당신이 가르쳐준 대로 자기 사람을 버리고, 영광을 포기하며 여기까지 왔다. 남은 건 아카바 레오를 처리하는 것뿐.”

  수년간 꿈꿔왔던 일이 이루어지기 직전. 지휘관의 머리를 스치는 것은 기쁨도 감격도 아닌 해방감이었다. 이제 악몽은 끝이야. 지휘관은 소리 없이 중얼거렸고,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다음 순간, 침략군은 패배를 선언했다.

 

*

 

  마녀는 사라진 나라에서 왔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크게 발전한 문명을 자랑했던 나라지만, 침략군이 밀려들면서 그대로 묘지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생명 하나 싹틀 수 없게 된 나라는 지도상에서 지워지고, 역사에서 찢겨나갔다. 마녀는 그 처참한 묘지의 생존자였다. 폐허 어딘가에 내 동료들이 남아있을지 모르니 생존자로선 유일하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겠지만, 살아남은 마녀는 나뿐이었지. 마녀의 계약자는, 언젠가 마녀가 머리칼을 빗으며 흘린 말을 기억한다.

  [왜 네가 최후의 마녀라고 확신하지?]

  [그야, 마녀는 만들어지는거니까. 내 주변 사람들은 마녀로 만들어지지 않았어.]

  [만들어졌다고?]

  [기계를 만들어내는 것과 다를 것 없는데. 재료 몇 개만 있으면 인간도 마녀로 만들 수 있지.]

  [그럼 너도 인간이었단 건가?]

  거기서 마녀는 입술을 닫았다. 부정도 긍정도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마 그 침묵은 긍정의 침묵이었던 것 같다. 전쟁을 끝내고 침략군의 기지에 남은 자료를 챙기던 지휘관은 그녀의 고향에선 단 한 명의 마녀도 없었다는 조사결과를 찾아냈다. 때때로 인간이 마녀로 각성하기도 한다는 전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설에서는 마녀로의 각성이 절망이나 분노 같은 강렬한 감정을 재료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마녀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하면 제법 의미심장한 설정이었다. 마녀는 무덤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왔고, 그녀의 고향을 무덤으로 만든 건 침략군이었으며, 그들이 마녀에게서 앗아간 가장 큰 보물은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었으니.

  먼 이국에 살던 마녀가 지휘관의 영역에 뛰어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침략군에 납치당한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마녀의 고향에 밀려든 침략군이 어느 날 부주의하게 수장의 아들이야기를 흘린 모양이었다. 마녀는 단숨에 국경을 넘어 지휘관이 살던 도시에 왔고, 그가 키우던 학생을 하나하나 습격하기 시작했다. 명백히 지휘관을 유인하기 위한 도발이었다. 그에 응해 <습격범>을 찾아 나섰을 때. 지휘관은 제 나이 또래로 보이는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의 왼쪽 손목엔 사라진 나라의 유물이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여자의 출신지와 목적을 대강 파악했다.

  [나를 찾은 목적은?]

  그럼에도 확신을 얻기 위해 묻자, 딱딱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프로페서, 아카바 레오에게서 동생을 되찾아오는 거다. 프로페서의 아들을 붙잡아두면 협상이 가능하겠지.]

  [단신으로?]

  [보통 사람이라면 안 되겠지만, 이쪽은 마녀야. 저주로 묶어두는 것쯤 가능해.]

  [마녀라.]

  그때까지만 해도 지휘관은, 아니, 정예병 결성을 계획하고 있던 청년은 자신만만했다. 마녀가 망국의 생존자라는 것에 아비의 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한편, 마녀란 신비를 쥐고 싶다는 욕심도 꿈틀거렸다. 청년은 마녀에게 무기를 들고 맞서는 대신, 그녀를 자신의 기지로 끌어들였다. 네 목적을 이룰 수 있게 해주지. 아카바 레오를 처리하고, 동생을 구하는 것 말이다.

  [굳이 네 뜻을 따라줘야 하는 이유는?]

  [네 힘으로도 아카데미아에 침투하는 것까진 가능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네 고향인 엑시즈까지 구하는 건 무리겠지. 나는 완전한 결말을 만들어줄 수 있어. 하트랜드에 남은 아카데미아를 몰아내고, 침략군을 벌하는 것까지 약속하겠단 거야.]

  호기롭게 던진 말을 마녀는 의외로 순순히 받아주었다. 그래. 너는 아카바니까. 한 번 믿어보도록 하지. 건조한 목소리를, 저를 따라오던 마녀의 모습을 청년은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마녀가 묵기로 한 객실에 찾아온 그가 마녀에게 손을 붙잡힌 것도. 바로 다음 순간 마녀가 불러낸 기계 새가 그를 포위한 것도.

  [그래서, 어떻게 증명할 생각이지? 아카바 레이지의 쓸모를?]

  여유롭게 날아든 말에, 청년은 직감했다. 마녀를 단순히 괜찮은 패로 확보해두는 게 아니라, 마녀를 도와주는 체 하는 게 아니라, 그녀와 확실하게 얽혀야 한다는 것을. 그녀가 그를 속박하고 그가 그녀를 속박하지 않는 한, 마녀를 제 곁에 두는 건 불가능하단 것을.

  [내가 너를 가장 위협적인 무기로 만들어줄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정예병을 결성할 계획이야. 네가 오기 전부터 구상해뒀지. 너와 함께 전사를 선발해 아카데미아에 침투시키는 게 내 목표. 네가 엑시즈의 전장에 있었다면 느꼈겠지만, 전투 상황에서는 단신보다는 동료와 함께인 게 낫고 앞뒤 없이 뛰어드는 것보단 지휘관이 있는 게 낫다.]

  [전장에 서지도 않아본 게 아는 체는.]

  [그렇지만 너의, 아니, ‘우리의적을 제대로 아는 건 내 쪽이지. 나와 함께하다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나를 어떻게 해도 좋아. 그러니, 나를 네게 묶어둬.]

  마녀의 족쇄가 있잖아. 계약 말이지. 언제나 판을 쥐고 있는 양 구는 건 청년의 특기였다. 제 목에 칼날이 들어오는 상황이라 해도. 그 뻔뻔한 여유가 우스웠는지, 마녀는 깔깔댔다. 계약해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한단 말이지?

  [좋아. 아카바의 자식을 풀어놓는 건 안심이 되지 않으니, 내게 묶어둬야겠어.]

  말이 끝나자마자 마녀는 청년의 왼쪽 소매를 걷고, 드러낸 팔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렸다. 마녀의 차가운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움찔했던 청년은 이내 자신의 왼쪽 팔에 흔적이 남은 것을 알아차렸다. 마녀의 기계 새에 하나같이 찍혀있던 심볼이었다. 그것도 붉은색. 피를 연상시키는 색채. 이게 계약의 증거인가? 물음을 건네자 바로 답이 돌아왔다.

  [속박의 표식이지. 원래는 먹잇감에 남기는 거야.]

  제법 거친 표현이었으나 청년은 여자가 취하는 포식자 같은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청년이 원하는 것은 유순한 수하가 아니라 위협적인 무기였으므로. 인간 이상의 힘을 지닌 존재를 자신을 담보하여 묶어둘 수 있다면 청년으로선 조금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그날 청년이 제 팔에 남은 표식을 만족스레 눈에 담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로는 청년의 뜻대로 되었다. 청년은 마녀의 힘을 빌려 우수한 전사를 선발했고, 그렇게 결성한 정예병에 마녀를 끼워 전투에 나섰다. 선별된 전사가 지휘관의 인도대로 인간의 싸움을 하면, 마녀는 그 뒤에서 괴물의 싸움을 벌였다. 마녀가 긴 손가락을 지휘하듯 움직이면 그녀의 무기인 기계 새가 일제히 움직였고, 이내 적의 모든 것을 무심하게 쓸어버리는 식이었다. 그럴 때 마녀는 신벌을 내리는 초월자 같기도 했고, 재앙을 품은 괴물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 절반쯤은 맞는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마녀는 욕망으로 타인을 짓밟는 침략군을 벌하듯쓸어버렸고, 마녀가 적군을 덮치는 방식은 언뜻 재앙을 연상시켰으니. 지휘관의 눈엔 마녀가 전자의 모습으로 각인되었지만 아마 적군이 기억하는 마녀는 완벽히 후자의 모습이었으리라. 그것도 마녀의 이름을 달고 다니는 자에, 그들이 짓밟고 온 나라의 생존자이기까지 했으니. 마녀는 침략군의 시각에선 단순히 <끔찍한 마녀>가 아니라 지옥에서 온 유령처럼 비쳤으리라. 그들이 죽이고 그들이 빚어낸, 악몽 같은 괴물.

  그래서일까. 침략군은 각자의 능력으로 무장한 인간의 전사보다 마법을 두른 마녀에게 훨씬 더 공격적으로 굴었다. 몇몇 어리석은 이들은 사악한 마녀를 없애겠다며 그녀에게 겁 없이 덤벼들기도 했다. 일부는 그녀가 망국 출신임을 두고 헌팅게임의 먹잇감이라며 경멸을 내비치기도 했는데, 누구도 마녀의 전의를 꺾지 못했다. 마녀는 제 모든 것을 앗아간 침략군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되레 저에게 쏟아지는 경멸과 두려움을 흡수하여 더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는 듯했다.

  그럼에도 지휘관은 때로 마녀를 걱정했는데 그녀가 꼭 내일이 없는 것처럼 싸우기에 그랬다. 마녀의 육신은 생각보다 쉽게 망가졌고 몸에 걸쳐지는 부상은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으며, 마녀는 자신을 미끼로 쓰는 것을 즐겼다. 몸을 조심하라 말해도 통 듣질 않아서, 부상을 안고 돌아온 마녀를 지휘관이 불러다 굳이 상처를 확인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너는 내게 중요한 무기다. 쿠로사키. 그러니 다쳐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마녀의 마른 등에 새겨진 상처를 훑으며 달랬던 기억이 있다.

  [무기로서 기능만 하면 상관없잖아?]

  [금이 가는 게 싫은 거라면?]

  [걱정할 것 없어, 리더.]

  금이 가는 건 그릇이고 마녀 자체는 아무리 내던져져도 흠집이 나질 않거든. 그러니까 눈앞의 실금 하나하나에 집중하지 말라고. 지휘관의 손길을 떨쳐낸 마녀는 마른 몸을 다시 싸매며 한마디 더 건넸다.

  [그릇이 깨져도 마녀를 묶어놓는 안전장치, 알려줄까?]

  안전장치만 제대로 남아있다면, 부서지더라도, 불태워지더라도 마녀는 유효해. 시라도 읊듯 말하는 마녀에게 지휘관이 답을 조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의 병기에 당하는 걸 두려워하지 마. 그릇은 쉽게 깨질 수밖에 없는 거니까. 안전장치만 있다면 어느 순간에든 마녀는 세상에 뿌리내릴 수 있어. 답을 말해준 마녀는 계약자를 안심시키고 싶은 것인지 안전장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그래, 불태워지더라도.

  그리고 정말 마녀는 불태워졌다 마녀를 감당하지 못하는 군사에게 미끼로 던져졌기 때문에. 지휘관은 아비를 끌어내린 후, 마녀가 마지막으로 향했던 숲에 들어갔다. 처참하게 탄 숲에 남은 것은 괴물의 육신이나 파편이 아닌, 마녀를 덮쳤던 병기뿐. 수 세기는 된 유물인 양 하나같이 녹이 슨 병기는, 마녀가 결국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신비였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정작 그 마녀는 불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유품 한 조각 남기지 못했지만.

  “주변을 다 수색했는데도 건진 게 없다고 해.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함께 들어온 동료, 정예병의 일원이었던 소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할 때도 지휘관은 무표정했다.

  “짐작하고 있었다.”

  “쿠로사키를, 보내지 않았다면…….”

  “승리도 없었겠지.”

  짤막한 답은, 상대의 감상을 끊어내려는 듯한 냉랭함마저 묻어있었다.

  “나는 쿠로사키 슌과의 약속을 지켰어. 어떤 식으로든 승리를 가져오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말해도 장본인은 여기에 없는걸.”

  “책임은 평생 안고 갈 생각이야. 쿠로사키의 고향, 엑시즈를 복구하는 것으로. 전쟁 피해를 내 선에서 최대한 보상하는 것으로. 그럼 전쟁을 끝낸 후 쿠로사키가 하려던 일까지 전부 맡는 것이 되겠지.”

  계약자의 몸을 부순 병기를 짓밟으며, 지휘관은 건조하게 덧붙였다.

  “마녀의 삶에 끼어들어 무기로까지 사용했으니, 평생은 바칠 자신이 있거든.”

 

*

 

  집무실을 찾아온 자는 달갑잖은 소식을 물고 왔다. 어느 고위 관료의 여식과의 혼담이었다. 이제 혼처를 찾을 나이가 되었지요. 아카바 씨를 각별히 아끼는 D 의원님의 이야기인데. 지휘관은, 아니, 이제 더는 전장에 나서지 않는 영웅은 미리 준비한 답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결혼은 생각지 않는다는 답이 바로 그것이었다. 적당한 핑계를 덧붙이며 혼담을 차단했음에도 상대방은 후사를 들먹이며 교제해보라고 떠민다.

  전쟁이 끝난 지 벌써 수년.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어낸 청년은 모두의 존경을 받으며 살고 있다. 통치자가 되기는 한사코 사양하였으나 거의 그에 준하는 권력을 쥐고서, 만만찮은 세력을 이끄는 청년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명문가의 후계자였고, 세상을 구했다는 명예까지 얻은 그를 제편으로 만들고 싶은 이가 많은 게 당연했다. 걸핏하면 혼담이 들어오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터다. 탐나는 젊은이를 제 가문으로 끌어들이기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 혼사였으니.

  그러나 영웅은 온갖 곳에서 들어오는 혼담에 한 번도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딱 봐도 좋은 조건의 혼담인데도 그러했다. 이제는 소식을 전하는 이조차 조금 난감해할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소극적이신 이유가 있나요? 이제 좋은 가문의 여식과 결합해 더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고 싶다거나 후계자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도 해봄 직한데. 우물쭈물 흘러나오는 말에 영웅은 부드러운 웃음을 걸쳤다.

  “아카바를 맡아줄 이라면 이미 있지 않습니까. 제 동생도 이제 제법 어른티가 나는 듯한데요.”

  “세상이 아카바에게 기대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

  “아카바 레이지의 재능을 후대에까지 물려주는 걸 바란다고요? 그런 말도 많이 듣긴 했지요. 저에겐 별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요. 세상이 기대를 걸어야 할 건 아카바 레이지가 아니라, 그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줄 원석들입니다. 후사를 남기는 것엔 관심이 없어요.”

  능숙한 말엔, 조금의 가능성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철저함이 엿보였다. 또 어느 가문과의 혼담을 물어왔던 상대방은 결국 별 소득 없이 영웅의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매정하네.

  혼담을 전하러 온 이가 자리를 뜨자마자, 나긋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청년은 어느새 제 책상에 걸터앉은 여자를 본다. 녹색을 띤 머리칼과 금빛 눈이 인상적인 여자는 그보다 몇 살쯤 어려 보인다. 한때는 그 또래로 보였던 여자인데, 어느 순간부터 세월의 격차가 생기고야 말았다. 여자의 시간은 그녀가 더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된, 수년 전에 멈춰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환상처럼 나타난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청년은 방문자의 말을 가볍게 받아쳤다.

  “마음에도 없는 혼담 따위 넘겨버리는 게 낫지.”

  「정말로 마음이 없어?

  “마녀의 계약자가 어떻게 새로운 상대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이상하네, 나는 계약자의 반려에 질투 같은 건 하지 않는데?

  혹시 질투해주길 바라는 건가?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귀를 때렸다. 청년은 소매를 걷어, 그만이 알고 있는 족쇄를 확인한다. 왼팔에 새겨진 표식. 마녀가 새긴 심볼이자, 마녀의 그릇이 깨졌음에도 지워지지 않고 남은 흔적.

  물론 마녀는 수년 전에 불태워졌다. 세상에 알려진 대로라면 그의 계약자이자 그가 탐했던 마녀는 바로 그날 영영 흩어졌을 테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있다. 계약자끼리만 공유한 비밀. 마녀의 그릇이 붕괴해도 마녀를 이 세상에 묶어둘 수 있는 안전장치의 존재. 마녀의 계약자가 계약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 한, 계약은 지속되고 그 시간만큼 마녀는 계약자의 곁에서 실재할 수 있다. 어떤 타격을 입더라도.

  보통 상황이라면 진작 사라졌어야 할 마녀가 청년 앞에서만은 모습을 드러내는 게 그 증거. 본디 붉은색이었던 계약의 증거는 마녀가 죽은때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지워지려던 표식을 계속 남아있게 한 건, 삶에 유령이 끼어드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계약을 유지해온 건 그답지 않은 변덕이다.

  “마녀의 육신이 깨져도 계약을 유지하기로 한 건 나. 그 선택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

  「지휘관님. 예전에 그쪽이 사카키 유우야에게 말한 대로, 아카바 레이지는 계약자로서 약속을 지켰어. 굳이 나에게 더 매여있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리고 계약을 유지한다고 해서 아카바 레이지가 새로운 파트너를 구하지 못할 이유도 없고. 청년만이 볼 수 있는 그의 계약자는 낮게 속삭인다. 우리는 계약자지 반려가 아니잖아?

  「질투해서 저주하는 일은 없어. 약속할게. 그러니까.

  “내 쪽이 질투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 청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자에게 바로 설명을 붙여주었다.

  “새로운 파트너가 생기는 것 말이야.”

  마녀가 반응하기까지는 10초가량의 시간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세상에선 끔찍한 괴물로 취급받았던, 결국 인간의 악의 속에 내던져졌던 마녀는 계약자의 말에 한참이나 깔깔댔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이라도 보는 양.

  「그래서 나를 놓아주지 않으려 계약을 유지하고 있다고?

  “계약은 속박이기도 하니까. 내게 족쇄를 채우는 것으로 얼마든 상대를 묶어둘 수 있단 말이지.”

  「좋아. 10년은 버텨봐.

  “그보다 더 걸 자신이 있다면?”

  「, 그래. 아카바의 사람은 독점욕이 강했던가. 계약 상대로 잘못 택했어.

  옅게 한숨을 내쉰 여자는 책상에서 내려오더니 계약자 앞에 선다. 자신의 사용자였고, 지휘관이었으며 파트너이기도 한 청년 앞에. 아직은 호기롭게 말할 수 있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감당하기 힘들 거야. 나는 너를 붙잡아두기 위해 계약을 유지하진 않을 테고.

  「질투하지 않겠단 얘기는,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야. 그러니 놓고 싶을 때 불러. 앞길 창창한 도련님을 놓아줄게.

  청년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마녀는 환상처럼 흩어졌다. 본디 세상에는없는 존재이니 어쩌면 당연한 퇴장일지도 모른다. 홀로 남은 청년은 마녀가 있었던 곳을 바라보다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그런 자유는 바라지 않아. 빠르게 흩어진 소리를, 보이지 않게 된 만큼 언제든 곁에 있게 된 마녀가 들었을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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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

[사장슌] 악령의 밤 일시동맹

2021. 10. 31. 15:11 from 02

 

  “바람이 심상찮아. 으스스한 게 할로윈답군.”

  「문을 제대로 잠가두랬잖아. 오늘밤은 악령의 밤이라고.

  “보다시피 제대로 잠가두었다만. 방문은 물론 창문까지도. 네가 날 찾아와서 다짜고짜 우리를 가둬버리는 바람에 난 LDS에서 준비한 할로윈 파티엔 참가하지도 못하게 됐어. 작년보다 화려하게 연 파티를 너 때문에 포기했으니, 그 대가로 너도 하나 알려줬으면 하는데. 왜 오늘 하루 이렇게까지 긴장했는지 말이지.”

  「나라고 아카바 레오의 자식과 방 한 칸에 갇혀있고 싶을 리가 있겠어? 하룻밤만 잘 넘기고 싶을 뿐이야. 설마 하룻밤도 못 참겠단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쿠로사키. 상대를 자기 뜻대로 휘두르고 싶다면 그 이유는 제대로 설명하는 게 예의다. 네가 LDS에 들어온 후로, 내가 어떤 듀얼에 널 내보내든 그래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것처럼. 정식으로 묻지. 쿠로사키 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아카바 레이지를 데리고, 할로윈 밤이 끝날 때까지 방에 틀어박혀 문을 꼭꼭 걸어잠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일시동맹이라고 생각해. 우리 둘 다, 악령에 시달리지 않도록 이 밤만 함께 있는 거라고. 문을 열어두는 건 악령이 들어오도록 판을 깔아주는 셈이니 닫아두라 한 것뿐인데.

  “악령, 악령, 악령……벌써 몇 번째나 악령 이야긴지 모르겠군. 할로윈에 악령이 찾아든단 말이야 많다만, 쿠로사키 슌이 그렇게 악령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던가? 폭격 속에서도 살아남은 레지스탕스인데? 아카데미아에게서 세계를 지키려 나선 랜서즈의 멤버이기도 한데도? 하트랜드의 할로윈은 무서운 날로 전해지기라도 했나?”

  「하트랜드라고 특별히 다를 건 없었어. 루리가 어릴 땐 지금 여기, 스탠더드의 아이들처럼 내가 직접 할로윈 분장을 시켜주기도 했지. 그때는 나도 어려서 센스가 없었으니 별로 무섭게 되지도 않았지만, 루리의 목적은 할로윈 분위기를 내어 사탕을 받아오는 거였으니까 문제는 없었고. 하트랜드 사람들은 애들을 좋아했으니 아이들이 문을 두드릴 때마다 사탕이며 초콜릿이며 잔뜩 안겨줬었지.

  “그런데도 이제 와서 악령의 밤이라 이야기하며 내 할로윈도 빼앗는다, . 여기, 스탠더드의 할로윈은 아이들이 즐겁게 사탕을 받아가는 날인데 말이야. LDS에서 할로윈 파티를 왜 열었겠어?”

  「그래서 레이라는 오늘 너한테 사탕을 받아갔나?

  “LDS에서는 오늘 학원의 학생과 강사는 물론, 방문자에게도 전부 사탕을 주기로 이야기됐다. 그러니 레이라도…….”

  「학원이 챙겨주는 거 말고. ‘네 동생이직접 너에게받았는지 묻는 거다. 그 애는 널 너무 어려워해서 이런 날에도 네 잘난 사장실 문 한 번 못 두드렸을까 걱정된다고.

  “사탕이라면 한 바구니 준비되어 있지만, 그래, 찾아오진 않았어. 미리 할로윈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좋았을까.”

  「바보 같긴. 레이라 같은 애한텐 그런 걸 받으러 와도 된다고 미리 허락을 해야지. 지시대로 움직이는 게 습관이 된 아이인 걸 알면서 그렇게 소극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다니.

  “레이라를 그렇게 신경 써주는 건 감사하다만, 쿠로사키. 네가 날 가둬버렸으니 오늘은 레이라에게 직접 사탕을 줄 순 없어. 내일이건 내년이건 다음 기회를 위해서라도 네 충고는 머리에 새겨두도록 하지. 그건 그렇고, 내 물음엔 아직 제대로 답해주지 않은 것 같은데. 너희 남매의 할로윈 이야기를 들으니 더 궁금해지거든. 하트랜드에서도 할로윈을 평범하게 즐겼다면, 왜 지금의 너는 할로윈에 악령이 찾아들 거라 굳게 믿고 있는 거지?”

  「간단해. 죽은 사람을 너무 많이 봤으니까. 하트랜드에는 죽음이 흔했다. 거리마다 건물마다 죽음이 그득했지. 하트랜드에 침략군, 아카데미아가 밀려든 후로 우리는 살면서 볼 죽음을 다 봐버린 것 같아. 그래서.

  “아카데미아에 희생당한 네 이웃이, 동료가 악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한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좀 서글프군. 죽어서까지 안식을 얻지 못하고 악령으로 떠도는 희생자들이라.”

  「한 움큼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과연 저승에서 편히 쉴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악령이 되는 건 생전의 울분과 한 때문이다?”

  「, 아카바의 도련님에겐 망상으로만 들리겠지만. 난 내 동료가, 이웃이, 아카데미아가 짓밟은 모든 사람들이 오늘 밤 찾아들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거든. 그러니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밤이 지날 때까지 방에만 있기로 하는 거다. 이제 설명은 되었겠지?

  “역시 서글프군.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네가 너무 많은 상실을 겪었다는 게. 한편으론 그렇기 때문에 또 의문이 들어. 너는 아카데미아에게 원한을 품은악령이 찾아올 거라 생각하면서 왜 아카데미아 수장의 아들인나랑 같이 숨은 거지?”

  「질문에 답이 있잖아. 아카데미아 수장의 아들이니까. 하트랜드를 지옥으로 만든 아카바 레오의 아들이 곁에 있다면 불운한 악령들도 다들 그쪽에 주목해서, 누구도 내게 관심을 갖지 않겠지.

  “아카바 레오의 아들인 나를 악령들에게 넘겨주고 싶은 게 아니고? 애초에 널 잘 알고 있을 고향 사람들이, 네게 원한이라곤 없을 희생자들이 널 노릴 것 같진 않은데.”

  「내가 잃은 사람들이 내게 해코지할까 불안해하는 게 아냐. 일단 나를 찾으면 다들 날 꼼짝도 않고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아 피하고 싶은 거지.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 대부분은 특별히 강하지도 않았어. 먼저 죽은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의 차이는 운이 따랐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뿐이었을지도 몰라. 아마 나도, 죽은 사람보단 운이 좋았을 거다. 딱 그 정도였겠지. ‘운이 나빠서아카데미아란 괴물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쩌다 살아남은나는 어떻게 비칠까? 아마도.

  “그자들이 왜 네가 살아남은 거냐고, 무언으로 물을 것 같나?”

  「그래, 빤히 쳐다보면서……내게서 자기들보다 더 버텨낸 이유를 찾을 거야. 그런 이유 따위 제대로 없는데도. 그자들보다 더 오래 버텼던 행운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도. 날 찾아온 망자를, 내가 아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도 내 생존의 가치를 따지게 될 것만 같아.

  “침략전쟁의 피해자에게 죄는 없다.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하트랜드의 민간인이 희생되어야 할 명분 따위 없었던 만큼 네가 살아남은 데 가책을 느낄 이유란 없어.”

  「아카바의 핏줄에게 위로를 받는다니, 우습군.

  “네 앞에선 언제나 아카바로 태어났단 원죄를 안고 있단 생각이 들어.”

  「정확히는 아카바 레오의아들이란 거지. 어쨌건 나는 네가 랜서즈를 결성하게 된 것도, 아카데미아를 적대하기로 한 것도 네 출신에서 비롯한 죄의식이라 생각했는데, 틀렸나?

  “부정은 못 하겠는걸. 나도 어느 정도는 불순한 동기로 움직이고 있다고 봐야지. 아카바의 죄를 씻고 싶다는 것.”

  「아무래도 좋아. 난 네가 정말로 아비를 끌어내리기만 한다면, 아비가 저지른 일을 제대로 막기만 한다면 네 뜻대로 움직여줄 거다.

  “마지막까지 함께 가주겠다고?”

  「, 이제 와서 껄끄럽나? 내가 네 목이라도 조를까 걱정되기라도? 아니면 아비의 죄를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

  “그럴 리가. 적의 아들인 내게 기꺼이 묶여주겠다는 네 마음이 대단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러니, 나도 하룻밤 정도는 네 고집대로 움직여줘야지. 일시동맹이라고 했나? 아카데미아에 맞서 협력하기로 한 우리 사이에 왜 굳이 일시동맹이란 말이 필요한진 모르겠지만, 이 밤은 문을 걸어잠그고 있을 테니 안심해.”

  「협력? 계약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내가 보기에 아카바 레이지는 사업가라 그런지 자꾸만 본인의 책임을 최소화하려 들거든. 내가 언제 자기를 배반할지 모른다 생각하는지, 아니면 껄끄러운 엑시즈 사람 따위 안고 가기 싫은 건지. LDS에 들일 때조차 계약을 하자고 이야기했지.

  “그때의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으니까. 계약이란 절차로 서로를 묶어둬야 했던 거야. 랜서즈를 결성한 지금은 용병과 고용주 같은 계약관계론 함께할 수 없어. 서로를 신뢰하며 협력자로 같이 나아갈 수밖에.”

  「혀는 잘 놀린단 말이야.

  “그래도 동맹이라는 말은 마음에 들어. 쿠로사키 슌이, 이 악령의 밤만은 나를 필요로 한단 말이지. 동맹이란 말까지 들먹이면서.”

  「내가 너를 이용한다고만은 볼 수 없어. 동맹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함께한단 것. 아카바 레오가 만들어낸 괴물이 이 세계엔 넘쳐나. 내 고향을 쓸어버리러 온 아카데미아 놈들 같은. 아카바 레오의 궤변에 머리가 지배돼 끔찍한 악행을 저지른 놈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겠어. 자기네를 받아줄 지옥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아카바의 본거지로 향하겠지.

  “그게 아카데미아가 아닌 여기, 마이아미라고?”

  「아카데미아는 다들 프로페서의 아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본거지가 어딘지도, 프로페서가 어디서 왔는지도. 경비가 삼엄한 아카데미아에 다시 들어가긴 힘들 테니 프로페서의 본거지라도 찾으려 하지 않겠어? 이렇게 평화로운 차원에, 할로윈을 맞아 다들 유령 분장을 할 시기라면 악령이 슬그머니 섞여들기도 쉽겠지.

  “아무리 내가 노력해봐야 아카바가 낳은 죄는 어찌할 수 없다는 건가. 아카바 레오는 처자식 따위 진즉 내팽개쳤는데 그자가 만들어낸 악령은 내게로 올 거라니, 불공평하군.”

  「신경 쓸 것 없어. 오늘밤 네 곁엔 레지스탕스가 있으니까. 내가 엑시즈 출신이란 걸 알아채면 놈들은 사냥감을 찾았다 생각하고 날 노릴 거다. 물론 네가 부주의하게 문을 열어서 악령이 밀려들 때의 이야기다만.

  “아카데미아의 악령을 상대하는 건 자신 있다? 이해가 되지 않아. 너는 아카데미아에 평화로운 삶도, 고향도, 주변 사람도 잃은 처지다. 그 때문에 레지스탕스가 되기로 했으면서, 네게 악몽을 남겨준 아카데미아를 또 상대하겠다고?”

  「아카데미아는 차라리 나아.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아카데미아 때문에 원혼이 되었을, 내가 아는 사람들이지. 아카데미아 같은 괴물은 증오하고 적대하며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면 그만이야. 이미 죽은 악령을 적대하는 것 따위, 잘난 아카바 레이지도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 속이 편하고.

  “그래서 동맹이라는 거군. 나는 널 괴롭게 만드는 고향의 희생자로부터 널 지켜내는 거고 너는 아카바의 죄악을 상징하는 아카데미아로부터 날 지켜낸다, .”

  「하룻밤을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지 않나?

  “네 말대로. ‘일시동맹이란 건 조금 아쉽지만.”

  「일시적 동맹인 게 당연하지. 우리가 이렇게나 붙어있을 날은 오늘 하룻밤이 전부니까. 어디까지나 오늘밤을 넘기기 위한 동맹이니까, 밤이 지나면 원래 우리 위치로 돌아가는 게 맞아.

  “그 점이 아쉽다는 거다. 네게 난 아직도 아카바의 아들이고, 완전히 믿지 못할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망할, 갑자기 누가 문을 두드리는 거야? 아무도 찾아오지 않게 해두랬잖아!

  “신경 쓸 것 없어, 쿠로사키. 네 요구대로 미리 주변에 일러뒀다. 오늘밤은 누구도 여기 출입해선 안 된다. 중요한 일은 중간결재자에게까지 올린 후 내게는 메시지로 보고하도록. 이라고. 일정도 전부 취소해뒀어. 그러니까.”

  「그럼 뭐해, 아직도 문을 두드리는데!

  “진정해. 파티에 참가한 스쿨 학생들이 장난치는 걸 거다. 내가 돌려보낼 테니까.”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말고. 흘러나오려던 말이 입 안에서 갇혔다.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

 

  젊은 사장은 팔짱을 낀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에게 그는 한순간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문이 열린 직후부터 쭉,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오래도록 사장을 보좌해온 비서는 사장의 표정 없는 얼굴에서 미묘한 불만을 읽어냈다.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오늘 저녁부터는 절대 찾아오지 말라고 했던가. 그가 평소 오랜 시간을 보내던 사장실을 굳이 비워두고 회의실에 가 문을 걸어 잠갔던 이유가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앞에선 꺼내고 싶지 않은 사적인 이유가.

  그럼에도 사장을 찾은 것은 명백히 제 실책이었다. 사장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사장을 직접 만나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다 후자를 택했으나, 결국 사장을 실망시키고 만 것 같다. 그렇다고 이대로 모든 걸 불편한 채로 남겨둘 수는 없다. 비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입을 뗐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사장님.”

  긴 침묵을 깬 말에 사장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문을 열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죄송합니다. 사장님의 지시를 지키려 했지만, 이사장님이 추진 중이신 회사 인수 건이 워낙 급해서 직접 의견을 구하기 위해…….”

  “그렇다고 패스키로 문을 열고 들어올 줄은 몰랐어. 매년 이날만 찾아오는 손님을 보고 있었는데 말이지.”

  두 사람이서 쓰기엔 다소 큰 공간에, 사장의 한숨소리가 퍼졌다. 손님이라는 단어에 비서는 이번에야말로 문을 열어버린 것을 후회했다. 평소처럼 사장실에서 만나선 안 될, 누구에게도 보이려 들지 않는 손님이라. 그것도 일 년에 한 번밖에 만날 기회가 없는 사람이라니. 아마도 귀한 손님이었으리라. 기껏 상대를 기다렸을 사장이 방해에 얼마나 날카로워졌을지.

  그러고 보면 하나 희한한 점이 있었다. 문을 열었을 때 회의실에 보였던 건 사장 한 명뿐이었다는 사실. 문이 열리자마자 손님이 자취를 감췄단 뜻인데,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사라진 것인지 신기하기만 했다. 숨었다 해도 자리를 떴다 해도 참 행동이 빠른 사람이란 생각을 안고, 비서는 슬쩍 손님에 대해 물었다.

  “손님은 이미 돌아갔습니까?”

  “자네가 문을 열자 바로 빠져나갔지. 방해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니 내년엔 오지 않을지도 몰라.”

  “부주의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 미움받아도 어쩔 수 없지. 할로윈 파티는 잘 진행되고 있나?”

  “. 다들 즐거워하더군요.”

  “나도 중간에 얼굴은 비춰야겠군. 그나저나, 나카지마. 쿠로사키가 죽은 게 올해로 몇 년째지?”

  사장이 흘린 낡은 이름에서 비서는 수년 전 회사에 머물렀던 청년을 떠올려냈다. 사장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던 청년은, 침략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왔다고 했다. 고향이 맞이한 비극처럼 황폐했던 청년은, 사장의 <계약자>가 되어 전장으로 떠났다. 사장이 포섭한 다른 전사들, 열 명도 되지 않는 정예병과 함께 전쟁이란 악몽을 끝내러 간 것이었으나 전쟁과 함께 자신의 삶도 끝맺고 말았다.

  사장은 그 불행한 청년의 사인을 끝내 이야기하지 않았다. 때문에 비서는 청년이 전사했는지 사고로 죽었는지, 절망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아예 알지 못한다. 청년이 죽은 해만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비서가 섬겨왔던 젊은 사장이 살면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해가 바로 청년의 삶이 끝난 해였으니.

  “7년이었던가요.”

  “벌써 그렇게나 됐던가.”

  “시간이 참 빠르지요.”

  “……하긴 벌써 몇 번은 만났으니.”

  “?”

  “아니. 잠깐 다른 생각을 했을 뿐이다. 신경 쓸 것 없어.”

  그러나 들릴락 말락 한 혼잣말을 한 때부터 사장의 시선은 너무 먼 곳으로 향해있었다. 이곳이 아닌, 어디에도 없는 곳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여 비서가 뭐라도 말을 얹으려던 때, 사장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죽은 사람을 달래는 날이기도 하지, 할로윈은?”

  “그런 의미가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어려서는 죽은 자가 산 자의 세상에 끼어드는 건 불합리하다 생각했는데, 이젠 생각이 달라졌어. 하루쯤은, 끼어들어도 되지 않을까. 산 자가 죽은 자의 흉내를 내는 날만큼은. 나도 참 감상적으로 변했다니까.”

  “오늘따라 쿠로사키가 생각나십니까?”

  아까부터 쿠로사키 이야기를 꺼내시는 게, 어쩐지. 조심스레 덧붙인 말에 사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년이 되기도 전에 죽은 청년에게 안타까움이 짙게 남았던 모양이었다. 사장이 실로 오랜만에 청년의 이야기를 꺼내며 씁쓸함을 숨기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오늘의 손님은 청년과 연이 있던 사람이리라. 죽은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혹은, 죽은 사람에 대해 무언가 증언해준.

  “죽음이 너무 많았던 삶이라 오래 버티지 못한 걸까.”

  “그래도 더는 죽음의 악몽에 시달리는 일은 없게 되었으니, 그걸 위안으로 삼아야지요. 전쟁은 이미 끝났잖습니까. 쿠로사키의 기여로.”

  “그래도 쿠로사키의 마지막엔 울분 같은 건 없었을 거다?”

  “물론 알 길은 없죠. 그랬길 바랄 뿐.”

  “……그런 거라도 있어야, 망령으로 남지 않나?”

  팔짱을 푼 사장은 비로소 비서를 제대로 바라보며 말했다. 비서가 저지른 실수를 이젠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단 것처럼. 저에게로 향한 시선에 안도한 비서는 사장을 마주보다 그의 오른손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사장이 제법 힘을 주어 쥐고 있는 게 무엇인지는, 살짝 삐져나온 부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불에 그슬린 카드 조각. 두 사람이 일하는 회사의 중점 사업인 게임 사업에 쓰이는 카드 일부.

  거기서 비서는 청년의 유일한 유품을 떠올려냈다. 그 불운한 청년이 언제나 지니고 다니던 카드. 청년의 무기인 기계 새가 깃들었던 카드 중에서 딱 한 장. 불에 타서 일부만 남은 카드를 사장이 챙겨온 후, 내내 간직해왔음을 비서는 안다. 그러니 사장이 던진 괴상한 말에 어떤 감정이 붙어있었을지도 이해한다.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에 망자를 망령으로 만드는 건 산 사람인 것 같습니다만.”

  “의미를 모르겠군.”

  “산 사람의 미련이, 망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망자의 영혼을 붙들어놓는 것이리란 이야기입니다. 망령이 실재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요.”

  “이제 이해가 돼. 일리 있는 이야기인데.”

  “그렇지만 망령으로 남는단 건…….”

  “산 사람이 욕심을 낸다는 게 되지만 말이야. 다르게 말하면 죽은 사람을 산 사람에게 묶어두는 셈이지.”

  말을 마치자마자 소파에 앉아있던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문 쪽으로 향하는 것이, 이제 회의실을 나서려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종료된 만남에 대한 아쉬움도, 죽은 이에 대한 감상도 전부 떨쳐낸 것인지. 자네가 이야기한 회사 인수 건은 조금 있다 어머니와 직접 상의하려 해. 이미 얼마 전에 어느 정도 답을 정해놓긴 했지만. 그러니 이제 걱정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비서가 저를 찾아온 이유를 정확하게 풀어주는 말에서, 조금 전 같은 쓸쓸함은 비치지 않았다. 사장은 본디 그런 사람이었다. 쓰린 실패도 괴로운 감정도 알아서 소화해낼 수 있는, 타인 앞에 내면을 드러내는 것조차 드문 사람.

  그렇기에 오늘 사장에게서 잠시나마 날것의 감정을 이끌어낸 <손님>, 비서는 내심 궁금해진다. 함께 회의실을 나서 복도를 걸으며 비서는 슬그머니 물음을 얹었다.

  “오늘의 손님이 누구였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 때문에 방해받은 것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 자네도 아는 사람이었어.”

  힌트라도 하나 건져볼까 싶어 던진 질문이었으나, 선을 긋듯이 짤막한 답변이 돌아오는 바람에 소득은 없었다. 사장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가 아니라 내게 화가 났을 거고.”

  “너무 범위가 넓은데요. 랜서즈였습니까?”

  “수수께끼 놀이를 할 생각은 없으니 이렇게만 말해두지. 자네가 영영 다시 못 만날 사람이라고.”

  그럼 잠깐 할로윈 파티에 갈까. 레이라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거든. 능숙하게 화제를 바꾼 사장은 이제 더는 비서에게 매이지 않겠다는 듯 성큼성큼 앞서갔다. 파티가 열리는 라운지로 향하는 사장의 오른손에는 여전히 청년의 유품이, 타다 만 카드 조각이 들린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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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

3호는 오빠의 몸을 꿰뚫는 빛줄기를 보았다.

닫히려는 눈꺼풀을 힘겹게 열었을 때, 유리벽 너머로 비친 광경이었다.

 

*

  

  맹금의 이름을 가졌던 오빠는 거짓말처럼 추락했다. 녹색의 빛줄기에 꿰뚫린 몸이 사냥당한 새처럼 힘없이 바닥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곧 둔탁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오빠의 육신이 바닥에 거칠게 닿는 소리였다. 3호는 거기서 오래된 악몽을 떠올렸다. 오빠가 아무렇지도 않게 망가지는 꿈. 아무래도 또다시 악몽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거대한 장치에 갇혀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던 3호였다. 그대로 심신의 스위치가 내려가기 직전, 몽롱해진 채로 익숙한 꿈을 꾸고 만 것이다. 3호가 가장 싫어하는 꿈인 동시에 자꾸만 제 삶에 끼어들었던 꿈을.

  어려서부터 말보다 행동이 앞섰던 오빠는, 당장 필요한 일이다 싶으면 위험한 일에도 무모하게 뛰어들기 일쑤였다. 청년기에 접어들어 고향에 침략군이 밀려드는 불행을 겪고는 더욱 무모해졌다. 살아남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방패가 되기로 한 것이다. 모두를 지키려 싸울 거라 이야기하긴 했지만, 오빠는 너무 많은 싸움에 너무 쉽게 뛰어들었다. 침략군에 맞서는 레지스탕스가 되고는 거의 몸을 던지는 수준으로 전투에 나서는 오빠였다.

  오빠에게 미래를 빚지는 사람들조차 오빠의 지친 등을 보고 걱정 어린 말을 흘리곤 했다. 저렇게 위험한 싸움에 뛰어들어서야……저러다 제일 먼저……제대로 버틸 수나 있을지. 짧은 침묵 사이사이에 생략된 말을 3호는 듣지 않고도 알았다. 그런 기분 나쁜 예언이 귀에 박힐 때면 3호는 오빠의, 무모함이, 저를 돌아보지 않는 태도가 싫어졌다. 저러다 예언이 실행되고 만다면? 오빠가 정말 꺾여버린다면? 어느 날 침략군에게 짓밟혀, 패자가 전부 그러했듯 종잇조각이 되고 만다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불안을 떨칠 순 없었다. 오빠는 한 번 옳다고 생각한 일을 포기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3호가 바라지 않는다 해도 동생을 구하려 싸워야 한다 판단했다면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게 오빠였다. 3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빠의 싸움을 함께 짊어지는 것뿐이었으나 오빠는 그럴 기회조차 잘 주지 않았다. 루리. 너는 안전하게 여기 있어야지. 짤막한 말로 오빠는 동생의 싸움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계속 위험한 전투에 뛰어들어 너무도 쉽게 몸을 내던지고, 잔뜩 망가져선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난민캠프에서 지내던 시절 3호는 잊을만하면 똑같은 꿈을 꾸었다. 자꾸만 동생에게 등을 보이고 앞서가던 오빠가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버리는 것. 꿈속에서 오빠는 칼에 찔리기도 했고, 공습에 휩쓸리기도 했다. 언젠가의 꿈에선 총탄에 몸이 꿰뚫리기도 했는데, 어느 꿈이건 오빠가 죽어버렸기에 3호에겐 전부 <같은> 꿈이나 다름없었다. 끔찍하기만 한 꿈에서 가장 처참했던 건, 꿈속에서조차 오빠를 도울 길은 없었다는 것. 오빠의 죽음을 막는 것도, 싸움을 중단시키는 것도 불가능했다. 피투성이가 된 오빠를 몇 발짝 밖에서 멀거니 바라볼 뿐.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도 악몽의 연속이리라. 미동조차 없는 오빠의 몸이, 부자연스러운 자세가 말해주고 있다. 이건 무의식이 빚어낸 장면이라고. ‘꿈속에서 오빠를 죽여버린 거라고. 여태껏 꾼 꿈과 다른 점은 하나, 빛에 꿰뚫린 자리에서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것뿐. 그동안 피투성이가 된 오빠를 수없이 봐왔던 3호에겐 그나마 덜 괴로운 광경이었다. 고통 속에 죽지 않았을 거라, 스스로를 달랠 수 있었으니.

  물론 이런 순간에까지 악몽에 시달리는 건 달갑지 않다. 의식이 끊어질 땐 끊어지더라도 불쾌한 꿈에 사로잡힌 채 정신을 잃고 싶진 않았다. 오빠의 상을 흩어내려 정신을 집중하던 3호는, 귓가에 파고드는 낯선 목소리를 들었다. 외부인이 들어오게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날카로운 목소리는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선명하게 울렸다. 저놈이 뛰어드는 바람에 아크파이브가 멈출 뻔했잖아. 날 선 비난에, 우물쭈물하는 목소리가 바로 따라붙었다.

  나도 막았어! 막았는데 갑자기 뛰어들었다고.

  프로페서가 맡긴 일이 얼마나 막중한 건지 몰라? 리바이벌 제로가 중단되기라도 했다간 어쩔 뻔했어?

  알겠으니까 그만 좀 해. 어차피 저거, 죽어버렸을 거라고. 아크파이브의 기능이 뭔지 알잖아.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거.

  아크파이브의 광선에 아예 몸을 관통당했으니 생명력을 죄다 빼앗겼겠지. 리바이벌 제로를 가동시킬 동력을 더한 것으로 쳐. 변명하듯 자꾸만 이어지는 말에 3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왜 정신을 집중할수록 쓰러진 오빠의 모습이 흐려지는 게 아니라 낯선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걸까. 그리고 왜, 목소리의 주인들은 저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걸까. 아크파이브, 리바이벌 제로. 3호가 알기로 그것은, 각각 자신을 가둔 장치와 제가 휘말린 프로젝트의 명칭이었다.

  그러고 보면 오빠를 꿰뚫은 빛줄기도, 3호가 갇힌 장치에서 새어 나오는 빛과 색이 완벽히 같았다. 불길한 녹색으로. 다시 보니 오빠가 쓰러진 자리도 바로 장치 밖의 바닥이었고

  바닥에 떨어진 건 치워버려. 생명력을 끌어냈으니 더 볼 일은 없다.

  냉랭한 말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인물은 심지어 3호를 장치에 가두라 명령한, 이곳의 수장이었다. 꿈에서 깨기 위해 눈꺼풀을 열고 있었던 덕에 3호는 그 남자가 장갑 낀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챘다. 그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은, 바닥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수장의 지시에 몰려든 사람들이 짐짝처럼 들어 옮기려는.

  꿈에서 걸핏하면 죽어버렸던.

  “오빠한테 손대지 마!”

  3호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쓰러진 오빠를 든 사람들도, 오빠를 치워버리라 명령한 악의 수장. 전부 얼어붙어 3호만을 응시했다. 묵직한 침묵 속에서 가장 먼저 열린 것은 수장의 입술이었다.

  왜 조각이 깨어난 거지? 그것도 하나만?

  주변을 둘러보니 웅크린 소녀가 셋 보였다. 1, 2, 4. 3호와 같이 장치에 갇힌, 불운한 소녀들. 세 명의 눈꺼풀이 단단히 닫힌 것을 확인한 때 3호는 수장의 말을 이해했다. 동시에 자신의 처지도 이해했다. 그러자 머리를 짓누르던 의문이 하나둘 풀리기 시작했다. 빛줄기에 관통당한 오빠가 피를 흘리지 않은 이유, 아무리 노력해도 꿈이 깨지 않은 이유, 그리고 오빠가 맞이한 진짜결말까지.

  결론이 난 때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다음 순간, 재앙이 일었다.

 

*

 

  정예병의 리더는 겨우 눈꺼풀을 들었다. 숨이 막히도록 짙은 향내가 코를 찌른 탓이었다. 코가 향에 적응할 즈음에 리더는 자신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조금 전까지 정신을 잃은 채였단 걸 떠올려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의식을 잃기 직전 굉음을 들은 듯했다. 굉음의 원인은 확실치 않으나 소리가 들린 직후 건장한 남성인 그가 멀리 튕겨 나가 바닥에 내던져졌으니, 무언가 큰일이 일어난 건 틀림없었다. 문제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였다. 바닥에서 일어난 리더는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세상을 선명하게 담으려 노력했다. 눈앞에 비치는 풍경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던 탓이다.

  의식이 끊어지기 전까지 그가 있었던 곳은 침략군의 본거지이자 적진의 중심부였는데. 온갖 장치로 그득했던 <기술의 정점>이었는데. 지금 리더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꽃밭이었다. 그를 깨운 향내도 아마 빼곡하게 뿌리내린 꽃에서 난 것이리라. 정신을 잃고 깨어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길어봐야 1시간 남짓일 텐데, 그 사이 기계장치가 들어찼던 위험한 공간이 꽃밭으로 바뀐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도, 낙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꽃만 가득 들어찬 공간이었다.

  짧은 시간에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리더는 통신장치의 화면에 제 얼굴을 비춰보았다. 혹 세월이 너무 흘러버린 것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해 한 행동이었으나 화면에 비치는 얼굴은 조금도 늙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꽃밭 군데군데 쓰러진 정예병의 모습도 그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너무 늦게 깨어난 게 아니라면, 그의 눈앞에 놓인 비현실을 설명할 방법이란 하나뿐. 꿈에 젖어있다고밖에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튕겨 나가며 몸에 가해진 충격과 그로 인한 통증은 너무도 선명했다. 깨어난 순간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지속되는 고통이 현실감을 일깨웠다.

  찜찜함을 누르며 꽃밭을 둘러보던 리더는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몸을 숙였다. 다음은 서로 엉긴 꽃을 풀어내며, 꽃이 뿌리내린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빽빽하게 자리한 꽃을 손으로 헤치고, 꺾어내기를 반복해 바닥을 보았을 때. 리더는 거기서 기계의 부품들을 잔뜩 발견할 수 있었다. 군데군데 흩어진 유리 파편까지, 꽃밭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품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본디 이곳에 들어찼던 장치들.

  꿈이 아니었다.

  굉음이 들린 것과 장치가 산산이 부서진 것을 보면, 이 근처에서 폭발이 일어났을 확률이 높다. 리더와 그가 이끌던 정예병은 폭발의 여파로 여기까지 튕겨왔고, 폭발에 휩쓸린 이들과 흩어진 파편 위를 꽃이 덮었다고 봐야 할 터다. 여전히 비현실적이기 그지없는 상황이지만 지금은 그 외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가 없다. 이제 리더의 머리를 메우는 의문은 사고의 흔적을 덮은 게 왜 하필 꽃이었는가였다. 굉음이 들리고 기계의 파편이 튀는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자연의 흔적이라. 곱씹어볼수록 기묘했다.

  그럼에도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 갑자기 꽃이 번진 까닭을 파헤쳐야 도대체 어떤 상황에 놓인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을 테니. 타고나길 영민했던 리더는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빠르게 조합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리더가, 그가 데려온 정예병이 맞서 싸우던 침략자의 본거지. 오래전부터 야심을 품고 인재를 모은 침략군의 수장은 자신이 선발한 엘리트에게 위험한 연구를 맡겼다고 들었다. 이곳에 놓였던 수많은 장치도 전부,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무시무시한 기능이 담긴 기계였으리라.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지 모를 악인과, 빼어난 능력을 지닌 엘리트. 거기에 발전된 기술이 총동원되었을 기계가 가득 찬 환경이라. 조금만 어긋나도 엄청난 희생자가 나올 수 있을 상황이었다. 리더가 예상한 대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면 특히.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리더는 꽃으로 뒤덮이는 바람에 그가 이끌던 전사 누구도 치명상을 입지 않았단 것을 떠올려냈다. 위험한 화학품이 흘러나오거나 기계가 폭주하는 일도 없었다. 급작스레 퍼진 자연의 힘이, 인간이 벌인 사고를 눌러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전쟁을 벌여 죄 없는 이들을 짓밟고 자원을 착취했던 침략자. 그리고 제 나라의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침략이란 폭력을 방관했던 다수. 정의를 내세우며 나섰으나 침략자의 계획을 제대로 막지 못한 정예병과 리더까지. 리더가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본 인간이란 저를 포함해 대부분이 신 앞에 떳떳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경전에 기록된 종말은, 바로 이렇게 어리석고 부족한 인간이 그득한 때 몰아치지 않았던가 그렇게 보면, 재앙이 퍼질 수도 있었던 이곳을 자연의 힘이 덮은 것은 구원처럼 비치기도 했다.

  인간의 문명으론 넘어설 수 없는 자연, 신이 재앙을 내릴 때 사용했던 자연이 인간의 희생을 막아준 것이니.

  신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묘한 기분에 젖어, 리더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까지 향해, 동료들 외에 재앙을 피한 이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고가 일어난 곳은 침략군과 연구원이 지키고 있던 적진의 최중심부. 정예병만이 사고의 여파로 튕겨 나갔을 리 없다. 가까이서 폭발에 휘말렸을 이들을 찾아야만 자연의 개입이 어느 정도까지 뻗쳤는지 알 수 있으리라.

  이 세상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던 침략군과, 무시무시한 일을 꾸미던 엘리트. ‘죄짓던 이는 무사했을까? 그들에게도 자연의 신비가 닿았을까, 아니면 징벌당했을까. 발걸음이 떨어질 때마다 머리를 때리는 생각이었다.

  리더의 입장에서 제일 결말이 궁금한 인물은 침략군 수장. 야심 때문에 이곳을 죄인의 땅으로 만들고서 수많은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악인이었다. 자꾸만 그에게로 생각이 튀는 것은 단순히 그 남자가 <죄악의 근원>이어서는 아니다. 리더의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기도 하다. 한때는 그 남자도 세상의 희망이었다. 존경받는 기술자였고, 놀라운 기술을 선보인 천재이자, 그 기술을 바탕으로 회사를 차려 성공한 기업인이기도 했다. 한때는, 그랬다.

  한때는 리더의 눈에도 빛나는 사람이었다.

  아니, 리더에겐 다른 사람에게보다 몇 배는 더 빛나는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남자는 리더에게 단순한 기업인이 아니었으니. 수많은 사람의 롤모델이 된 천재라거나, 뛰어난 기술자라거나. 세계적 대기업의 창업주라는 타이틀보다 더 중요한 수식어가 리더에게는 보였다. 그와는 특별한 관계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유년기에 리더는 그 남자를 아버지라 부르곤 했으니까.

  그 남자가 더 이상 빛나 보이지 않은 지도 벌써 몇 년인데, 리더는 아직도 그의 유산을 떠올릴 때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그 남자가 야심을 품고 먼 이국으로 사라지는 바람에 떠안게 된, 그의 책임이라거나. 회사 곳곳에 남은 그의 기술이라거나 그런 것보다 훨씬 자주 마주치고, 더욱 쟁그라운 유산도 있다. 공식적인 서류에 서명할 때마다 쓸 수밖에 없는 성씨. 그 남자가 물려준, 가장 무거운 족쇄. 아카바(赤馬).

  그 남자가 아카바라는 성씨를 세상에 알려버린 탓에 리더는 아비가 처자식을 버리고 사라진 후로도 제 성씨에 따라붙는 기대를 느껴야 했다. ‘아카바 레오의 아들. 그 레오 코퍼레이션 창업주의 아들. 세상 사람들이 리더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얹는 기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세상은 리더가 아비만큼의 자식으로 성장하길 바랐다. 그 남자의 가장 자랑스러운 후계자가 될 거라 믿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들에게 회사를 넘겨준, 정확히는 그렇게 알려진 그 남자는 실은 먼 이국에서 어린 학생들을 침략군으로 키워내고 있었는데.

  리더가 정예병을 결성해 침략군에 맞서기로 한 건, 분명 정의를 위한 결심이었다. 아비를 꺾고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는 순간을 꿈꾸며 리더는 여기까지 왔다. 다만 아비의 죄악을 잘라내고 싶다는 욕망도 없진 않았으리라. 리더는 자신의 성씨에서, 세상이 저에게 쏟는 기대에서 아비의 그림자를 지워내고 싶었다. 그 남자라는 악몽을 끊고, ‘그 남자의 아들이기도 한자신을 오롯이 인정하고 싶었다.

  그러니 이 순간, 리더는 아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수많은 죄악을 낳은 이답게 사고에 제대로 휩쓸리고 말았을까. 아니면 자연의 자비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 그 남자조차 화를 피했을까. 어느 쪽이어도 감정이 깔끔하지 않을 듯했다. 전자라면 리더는 그라는 죄악을 제 손으로 끊을 기회를 잃게 된다. 후자라면 그가 죄 없는 이들과 함께 살아남았음에 불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역시 이곳에 침투해 그 남자를 상대했을 때 제대로 처리했어야 생각을 끊은 것은 시야에 들어온 익숙한 형체였다.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리더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자가 있다. 리더는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한 순간 걸음을 멈췄다. 발끝부터 머리털까지,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한 감각에 사로잡힌 채.

  “……아카바 레오.”

  “버릇없긴.”

  유감스럽게도 살아남은 아비는, 존칭 없이 이름을 읊는 리더를 보며 혀를 찼다. 내팽개친 자식에게 새삼 공손함을 바라는 것인가. 예상대로의 뻔뻔함에 리더는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하긴 수하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놈이니.”

  “그쪽이야말로.”

  그나마 리더에게 위안이 되는 건, 아비가 걸친 제복이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옷이 찢겨 살갗이 드러나는 자리마다 바로 조금 전 난 듯한 상처도 보였다. 신의 자비인지 지독한 행운인지 목숨은 건졌지만 사고에 제법 휩쓸렸던 것 같다. 세상은 그 남자에게 완전한 행운은 허락하지 않았다 리더를 포함한 저항군이 정신만 잃었을 뿐 무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보다 당신, 하나 수정해야 할 게 있어. 내가 아카데미아에 데려온 자들은 수하가 아냐. 당신의 군대에 맞서기로 한, 전사들이지.”

  “그 잘난 전사가 모든 걸 꼬아버렸단 건 아나?”

  “우리는 아카데미아를 꺾으러 이곳에 왔다. 당연히…….”

  “아카데미아의 문제가 아니야! 세계의 운명이 꼬여버렸단 말이다.”

  멈춰 선 아들에게 바짝 다가온 아비는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 전사 하나가 우리 모두의 미래를 망쳤어! 리더는 제 삶의 얼룩이었던 남자에게서, 그의 회색 눈에서 분노 대신 공포를 읽었다. 아비는 가족을 팽개치고서 긴 시간을 제 야심만 따라 움직였던 남자였다. 계획 하나가 어그러지는 것으로, 생각지 못한 방해꾼이 뛰어드는 것만으로 흔들릴 리가 없다. 아들이 정예병을 이끌고 왔단 보고를 받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적군을 불러들였던 그가, 고작 한 사람의 방해에 저렇게나 격하게 반응한단 말인가.

  특히 신경 쓰이는 것은 세계의 운명이라는 표현이었다. 왜 아비는 갑자기 운명을 논하는 것인가. 왜 미래를 잃은 듯 떨고 있는 것인가. 꼭 신벌을 앞둔 사람처럼.

  “랜서즈 중 하나라는 건 알겠는데, 대체 누구를 이야기하는 거지?”

  이유를 알려면 상황을 들을 수밖에 없다. 리더는 아비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아비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여전히 까끌까끌한 목소리로 답했다.

  “쿠로사키 루리의 오빠.”

  “…….”

  “그놈이 갑자기 통제실에 뛰어들면서 아크파이브 장치가 오작동했다. 누가 보냈지? 네 지시였나?”

  내 일을 방해하고 싶어서 머리가 흐려지기라도 한 거냐? 따라붙은 말에 반박을 얹는 대신 리더는 입술을 깨물었다. 문제의 인물이 누구인지 확인하자마자 마음이 복잡해진 탓이었다. 사고에 휩쓸렸다 정신이 들었을 때, 리더는 주변에 쓰러진 정예병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있어야 할 전사 하나가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열 명도 되지 않는 정예병으로 적진에 침투한 상황에, 한 명이라도 단독행동을 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이탈자를 굳이 찾지 않은 건 나서봐야 말릴 수 없으리란 옅은 체념 때문이었다.

  혹은, 마음의 빚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리더는 시야에서 멋대로 벗어나고 만 전사가, 이전부터 단독행동을 하던 그 청년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너무도 잘 알았으므로. 청년은 아비가 침략한 나라의 몇 안 되는 생존자였다. 동시에 침략군이 납치한 동생을 구하려 정예병이 된 사람이기도 했다. 청년에게서 고향도, 동생도 앗아간 아비는 청년에게 한 가닥 죄악감도 느끼지 않을 터였으나 리더는 그에게 무거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언젠가는 아비가 낳은 비극에서 그를 구해야 한다는 책임은 리더에게, 아비를 꺾겠다는 마음을 더욱 벼리게 하는 자극제이기도 했다.

  다만 정예병 결성 직후부터 리더는 모두를 위해, 정예병 동료들을 위해 청년의 간절함을 못 본 체해왔다. 금방이라도 적진에 뛰어들려는 청년을 설득하고 통제하며 이곳저곳을 누비다 뒤늦게 여기까지 온 리더였다. 청년의 동생이 끌려온 곳, 침략자의 본거지에 침투한 이상 이제 청년을 묶어둘 핑계는 사라졌다. 청년의 부재를 확인한 때 리더의 머리를 스친 것은 이번에야말로 청년을 놓아주어야 할지도 모른단 생각이었다.

  청년이 늦지 않게 동생을 구할 수 있도록.

  통제실로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청년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가 대강 눈앞에 그려진다. 이곳에 침투한 때부터 리더와 함께 움직이지 않은 그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무작정 적진의 최중심부로 향했으리라. 그러다 수상쩍은 공간을 발견해, 동생의 흔적을 찾아 뛰어든 것이다. 하필 그곳은 침략군의 수장인 아비와 위험한 연구를 해온 기술자가 가득한 곳이었고, 붙들린 동생을 발견한 그는 바로 가장 중요한 장치로 향해

  “막는다고 얌전히 붙잡혀있을 자가 아냐. 돌발 상황이 없길 바랐다면 애초에 리바이벌 제로 같은 일을 꾸며선 안 됐지.”

  동생을 납치하고 고향을 폐허로 만든 이에게 최고의 복수를 했을 게 뻔하다. 침략군 수장의 야심을 이뤄줄 장치를 망가뜨리는 것으로. 아비가 저항군앞에 자랑스레 소개했던 장치가 청년 때문에 오작동했다 하니, 굉음이 울리고 모두가 튕겨 나가게 한 사고는 청년이 일으킨 사건일 확률이 높다. 중대한 장치에 청년이 손을 대자 그 여파로 주변의 기기들까지 오류를 일으켜, 결국은 침략군 수장의 야심이 실현될 뻔한 공간을 반쯤 날려버린 것이리라.

  “내가 하려던 대로 뒀다면 이런 일도 없었다! 아크파이브 장치가 오작동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레이의 조각들이 폭주하면서 완전히 통제불능이 됐다. 레이의 힘을 가진 괴물이 넷이나 생겨버렸단 거야!”

  “이해가 가지 않는데.”

  그냥 레이의 힘을 가진 넷이 당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게 되었단 뜻 아닌가? 리더는 옅은 웃음을 걸치며 빈정거렸다. 아비는 상황을 제 뜻대로 왜곡하는 나쁜 습성이 있어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다. 아비가 이야기하는 조각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멀쩡히 살아 숨 쉬는 인간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신성한 힘을 타고났다는 네 명의 소녀를 세계 곳곳에서 납치한 아비는, 그들을 구원자의 조각으로 명명하고서 넷을 세뇌해 뜻대로 부리려 들었다. 네 명의 초월적인 힘에 기대 야심을 실현하려는 동시에, 그동안 벌여온 악행에 초월자의 뜻이란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려 한 셈. 아비가 어떤 인간인지 훤히 아는 리더로선 그저 우습게만 보이는 수작이었다.

  “못 믿겠거든 네 눈으로 똑똑히 보거라. 네 망할 전사가 어떻게 일을 망쳤는지. 당장 여기서 조금만 나가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거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에는 여느 때와는 다른 긴장이 내비친다. 아들의 빈정거림을 제대로 받아치는 대신 어떻게든 진실을 확인하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평소답지 않다. 꼭 신벌을 앞둔 사람 같다는 감상이 다시 머리를 쳤다. 튕겨나온 기계의 잔해와 사고의 흔적을 덮은 꽃의 무덤이 신화 속 구원 같다는 생각도 되살아난다. 아비가 이 시대에 내세우려 했던 구원자, 네 명의 소녀가 품은 초월자의 모습이란 자연의 힘으로 무장한 심판자라 했던가. 어쩌면 청년이란 방해꾼의 침입으로 정말로 심판이 떨어진 것이라면?

  그것이 아비가 쌓아온 모든 것을 망치고, 모든 죄악을 날려버린 거라면?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첫째로, 리더는 세계의 운명이 꼬여버렸다고 떠들어대는 아비, 눈앞의 남자를 막아서기 위해 이곳에 왔다. 둘째로, 아비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든 건 리더의 전사였으며 리더는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전사를 보호해야만 했다. 단독행동을 감행한 청년을 다시 데려갈 겸, 상황을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다음 행동을 결정하려면 아군은 물론이거니와 적의 현 상황까지 낱낱이 훑어야 할 테니.

  “원하신다면야.”

  대신 당신의 말이 들어볼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면, 앞으로 내게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아야 해. 리더가 호기롭게 말하자 아비는 왔던 방향으로 몸을 돌리더니,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안내하는 것 같은 모습에 순간 거부감이 치밀었으나 리더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를 아비를 두고 움직이느니 차라리 그 남자의 등을 보고 따라가는 게 마음이 놓였다. 긴장을 누르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신 아비가 걸음을 떼자 리더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린 꽃을 무심하게 짓밟으며.

  사고의 여파로 비틀거리면서도, 피가 배어 나온 상처가 있는데도 아비는 제법 빠르게 걸었다. 상대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보폭에, 오히려 몸이 말짱한 리더가 따라가느라 숨이 가쁠 정도였다. 제 생각에 빠져 뒤따른 이를 돌아보지 않는 아비의 모습은, 내팽개친 가족을 끝내 모른 체한 지난날을 연상시킨다. 가족을 버리고, 수많은 젊은이의 미래를 버려서 다다르려 했던 목적지가 겨우 여기인가? 꽃 덩굴이 엉긴 기계 파편과 군데군데 부서진 벽을 눈에 담을 때마다 냉소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리더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비가 이끄는 곳으로 걸었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뻔히 알고 있다. 얼마 전 리더가 전사를 이끌고 들어섰던 곳. 부자가 함께 선 <악의 요새>의 입구. 간부 이하의 출입을 제한하고 외부인에게 문을 닫아건 이곳에서 바깥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곤 그쪽이 전부일 터다. 반드시 아비를 무너뜨리겠다는 결심을 안고 들어섰던 곳이므로 리더는 그곳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선명하게 기억한다. 침입자를 어떻게 막도록 설계되었는지. 장벽은 얼마나 높고 경비병은 몇이나 준비되었는지.

  그러니 아비의 말에 한 가닥 거짓이나 과장이라도 있을 경우엔

  생각이 멎었다.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상황을 확인하자마자 입을 뗄 생각이었던 리더는 혀를 놀리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안경 너머 보랏빛 눈에도 평소답지 않은 긴장이 드리워진다. 아비의 공포와 좌절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리더였으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것도 단단히.

  부자 앞에 펼쳐진 세상에 문명의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자연이 모든 것을 덮어버린 탓이다. 자연으로 덮인 세상은 신화 속에서 아름다운 낙원으로 묘사되곤 하나 리더의 눈에 새겨지는 것은 아름답기보다 기괴했다. 허리 높이로 자라난 꽃이 지독하게 짙은 향을 뿜어내고, 새 떼가 하늘을 검게 수놓으며, 쉼 없이 부는 바람에 모든 생물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광경이라. 이것은 낙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때, 이걸 보고도 아무 생각도 없나?”

  “이건…….”

  “재앙이다.”

  묵직한 말은, 눈앞에 놓인 세상에 대한 리더의 감상을 정확히 요약한 표현이었다.

 

*

 

  3호는 자신에게 붙은 번호가 싫었다.

  번호의 의미는 알았다. 3. 세 번째 조각이란 뜻이었다. 3호 이외에도 1호와 2, 4호까지 있는 것을 보면 조각은 총 4명이며 어떤 기준으로 번호가 매겨졌음이 분명했다. 번호가 붙었다고 해서 3호라는 인간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3호에겐 여전히 이름이 있었고, 제 얼굴이 있었으며, 십오 년 가량을 살아온 기억도 남아있었으니. 그러나 인간에게 <몇 번째 조각>이란 수식어를 붙인다는 것은 그를 인간이라기보다 사물로 취급한다는 뜻. 번호가 붙은 때부터 3호는 그 전까지의 삶을 부정당했다.

  ‘3호의삶 같은 건 없었다고.

  고향에 밀려든 침략군에게 납치되어 침략국의 탑에 갇힌 후로도 3호는 한동안 왜 자신이 감금되어야 했는지 알지 못했다. 같은 처지인 1호와 2, 4호까지 만나게 되어서야 답을 알게 되었다. 쌍둥이처럼 똑 닮은 얼굴의 넷이서 서로를 바라볼 때, 그들을 세계 곳곳에서 납치한 장본인이 직접 제 속내를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너희는 레이의 조각이란다. 나는 지금까지 4개의 차원에 흩어진 레이의 분신을 찾아 헤맸지. 침략군의 수장은 제법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너희가 전부 닮은 것도, 신비한 힘을 가진 것도. 전부 레이의 분신이기 때문이야. 그동안은 갈라져서 살았지만 하나로 돌아가는 게 맞겠지. 세계를 위해서도 그게 옳아. 레이는, 내 딸은, 세계를 구하려 몸을 던졌으니까. 전생인 레이가 나서지 않았다면 너희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쉼 없이 쏟아지는 말에, 4명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지금까지 내 고향에서, 내가 알던 사람들과 쌓아온 시간들은 어떻게 되지?

  답은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돌아왔다.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꿈이라고 생각하거라. 레이라는 본모습을 찾기 전까지, 너희가 원래 의지를 되찾을 만큼 성숙하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 적응하기 위해 꿨던 짧은 꿈이라고.

  그러니 3호에겐 형제란 거짓 가족이었고 이름은 가치가 없으며 고향은 돌아볼 이유가 없는 곳이라 했다. 친구와 쌓은 우정도 마음을 준 소년에게 품은 감정도, 하나뿐인 형제와 나눴던 애정도 3호에게는 전부 현실이었는데. 한 번도 꿈처럼 환상처럼 넘겨본 적이 없는데.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전생보다, 십오 년 가량이나 지속해온 지금의 삶이 3호에겐 훨씬 중요했는데.

  그러나 전생의 아비였다는 자는, 이번 생에서 3호를 포함한 넷을 납치한 남자는 3호의 의견 따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저를 경계하는 네 명을 기분 나쁜 장치에 밀어넣은 남자는 바로 문을 닫았다. 이제 더는 빠져나올 수 없다고 무언으로 말하는 듯했다. 아크파이브에서 잠깐 자고 일어나면 돼. 깨어났을 때는 원래 모습일 거다, 레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 남자의 회색 눈은 광인처럼 번득였다. 네 명을 짓이겨 하나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당당히 꺼내는 이를 설명할 말이란 광인 외엔 없기도 했다.

  그런 광인에게 붙들려 모든 걸 포기할 순 없었다. 3호는 닫혀버린 장치의 유리벽을 내리쳤으나 장치가 열리지도, 벽이 깨지지도 않았다. 불길한 녹색 불빛만이 장치를 가득 채울 뿐. 네 명에게 들이닥칠 운명을, 실험대에 놓인 동물과 다를 것 없는 처지를 일깨워주는 듯한 색채에 3호는 몸을 떨었다. 이런 날을 맞기 위해, 이런 삶을 바라서 지금껏 살아온 게 아니었다. 타인을 불러내기 위한 제물로 소모될 날 따위 상상해본 적도 없다. 고향을 덮친 전쟁에서 살아남으려 노력했던 것도, 탑에 갇힌 채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도 전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서였다.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날이 이어져도, 언젠가는 전쟁이 끝날 거라 생각했다. 침략군의 영역에 붙들리고도, 머잖아 탈출해 소중한 이의 품으로 돌아갈 거라 믿었다. 언젠가는 평범한 삶을 되찾고 내내 꿈꿔왔던 특별한 행복도 누릴 거라 기대했다. 그 모든 게 전부 3호가 그려내는 미래였고 ‘3호의꿈이었다. 기억도 없는 전생을 재현하기 위한 환상이 아니라.

  나가야만 해. 여기서 나가야만, 나를 잃지 않아야만 그 미래를 현실로 만들 수 있어. 소리 없이 중얼거린 3호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소중한 이를 하나씩 눈앞에 그려보았다. 언제나 상냥했던 친구. 다소 덤벙거렸지만 활기찬 모습이 매력적이었던 아이. 마음을 주었던 소년. 언제까지나 3호의 편이 되어줄 사람들을. 그중 가장 간절하게 그려낸 자는, 태어나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도 했다.

  바로, 3호의 하나뿐인 가족.

  오빠는 3호가 처음으로 만난 타인이자 3호의 삶에 가장 크게 그림자를 드리운 자였다. 3호에겐 울타리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었는데, 3호를 지켜온 사람이라는 점에서도 삶에 너무 깊게 들어왔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어려서부터 보호자 노릇을 해온 손위형제. 동생에게 세상을 가르치고, 미숙한 부분을 채워줬던 존재 아마 3호의 삶에서 오빠를 잘라내면 3호라는 인간 자체도 꽤나 잘려나가고 말 터였다. 그러니 를 잃을 수도 있을 상황에서 특히 간절하게 떠올린 사람이 오빠였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빠는 3호가 쌓아온 삶을 증명해줄 수 있는 존재였으니.

  한편으로 오빠는 3호에게 고집스레 <내 동생>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인물이기도 했다. 3호는 그의 동생이었고, 그가 키워온 사람이며, 그와 함께한 존재였다. ‘나의동생이라는 소유격의 수식어가, 동생을 당연하다는 듯 자신과 연결하는 오빠의 태도는 운명에 휩쓸리기 직전의 3호에게 안도감을 안겼다. 오빠는 3호를 이 세상에 묶어둘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오빠의 동생으로 남는 한, 평범한 인간인 오빠와의 관계가 유지되는 한 3호는 <구원자의 조각>이 아니라 독립적인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거기에 오빠는 3호를 구하기 위해 이미 고향에서 침략국까지 침투한 상황이었다. 탑에 갇혀있던 3호를 찾아와, 데리고 탈출한 것이 오빠. 전장에서 살아남아 적진까지 뛰어들고 납치된 동생을 기어이 찾아내는 집념이라니. 그런 사람이 운명이란 말에 속아 3호를 전생체의 파편으로 취급할 리가 없다. 침략국의 수장이 아무리 떠들어대도 3호가 쿠로사키 루리라는 인간임을 주장하며 끝까지 3호 자체를 지켜내려 할 것이 뻔했다.

  적진에서 실수로 손을 놓고 만 오빠가 다시 찾아온다면. 어떻게든 길을 찾아 여기까지 오기만 한다면.

  인간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도록 설계되었다는 장치는 조금씩 의식을 꺼트려갔다. 3호는 함께 장치에 갇힌 이들이 서서히 눈꺼풀을 닫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언뜻 보기엔 잠에 빠져드는 과정이었지만, 그것이 보통의 잠처럼 휴식일 리 없었다. 그 끝에 기다리는 건 자아를 잃는 것, 더 나아가 삶을 잃는 것뿐이리라. 그런 결말만은 피하기 위해 의식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3호의 눈꺼풀도 자꾸 무거워지기만 했다. 오빠가 기적처럼 여기에 온다면. 잠깐만이라도 이 끔찍한 상황을 멈춰준다면. 몽롱해진 채 유리벽 너머를 보며 언뜻, 그런 소망을 흘린 것 같다.

  불행한 이가 대개 그렇듯이 3호의 소망도 절반만 이루어졌다. 오빠는 3호의 소망대로, 장치가 놓인 통제실까지 닿았다. 절반의 실패는 바로 그 다음에 이루어졌다. 3호의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오빠가 동생을 구하기 위해 남은 힘을 짜내어 장치에 접근했던 때 3호는 오빠의 몸을 꿰뚫는 빛줄기를 보았다. 거짓말처럼 추락하는 오빠도, 더는 움직이지 않는 오빠의 몸도 보았다. 꿈이길 바랐지만 끝끝내 현실이었다. 그것으로 3호의 삶을 증명해줄 유일한 사람은 허망하게 부서졌고.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네 말대로 쿠로사키를 숨겨두고 왔다.”

  루리. 등 뒤에서 불린 이름에 3호는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의 1호가 3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당하게 선 1호의 모습에서, <운명에 휩쓸린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장치에 갇힌 채로 꼼짝없이 녹아내릴 운명이었던 4명은, 3호를 비롯한 4명의 소녀는 제힘으로 장치를 빠져나왔다. 장치를 가동시키던 여러 명의 연구원은 물론, 4명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려던 침략군의 수장조차 그들을 막지 못했다.

  오빠가 맞이한 결말을 확인한 때, 3호가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그 후의 기억은 어쩐지 선명하지 않다. 몰아치는 감정이 머리를 가득 채웠고,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을 벌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졌으며.

  그러다 정말로 벌을 내리고 만 것 같다. 오빠를 다치게 하고 3호의 삶을 빼앗으려 했던 이들에게든, 세상을 향해서든.

  굉음이 귀를 때리는가 싶더니 네 명을 가뒀던 장치가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다음은 격한 화학반응으로 시험관이 깨지듯, 굳게 닫혔던 유리벽이 부서지는 일이었다. 극도의 흥분 속에서도 3호는 제 오른 손목에서 밝은 빛이 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3호에게서 시작된 빛은 함께 있던 세 명에게 차례로 번졌고.

  눈이 멀 것 같은 빛이 네 명을 감쌌다. 3호가 떠올려낼 수 있는 건 거기까지. 빛이 걷힌 때 세상은 그들이 알고 있던 모습에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통제실은 물론, 주변의 연구실까지. 쟁그랍게 들어찼던 장치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3호가, 아니, 4명이 만들어낸 소란에 전부 휩쓸린 게 틀림없었다. 악인이 쌓아올린 모든 것이 뜯겨나간 자리를 메운 건 자연이었다. 군사를 키워내고 인간을 제물로 던지던 자리에 식물이 빽빽하게 피어났다. 그 자연을 바탕 삼아 새도 가득 날아들었는데 그 많은 새가 날갯짓하는 모습은 재앙의 징조를 연상시켰다.

  갑자기 피어난 자연은 모든 부분이 과했으나 3호는 그 비정상적인자연이 마음에 들었다. 최소 한 세기 이상 발길이 닿은 적 없었던 양, 섬뜩하리만큼 인간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풍경이어서였다. 인간의 흔적이 없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자연에 덮여버렸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과도 마주할 일이 없다는 것.

  고향에 밀려들었던 침략군은, 그들이 몰고 온 전쟁은 인간의 가장 저열한 욕망인 폭력의 극한을 보여주었다. 침략군의 수장으로 3호에게 딸의 제물이 되길 강요했던 남자는 제 욕망만으로 죄 없는 이들을 희생시켰다. 한 도시의 사람을 거의 몰살시키고 평범한 소녀들을 제물로 내몬 원인이 한 사람의 욕망 탓이었다니. 그 모든 악행을 지켜봤던 3호는 인간의 사악한 욕망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욕망이 인간을 파멸로 내몰곤 한다면 차라리 품지도 못하게 덮어버리는 게 나았다. 그러니 욕망으로 쌓아올린 문명이 자연에 휩쓸려 날아가는 것쯤 아쉬운 일도 아니었다.

  거기에, 운명의 동지 격이었던 네 명의 소녀는 그들 앞에 놓인 지독한 자연이 조금도 버겁지 않았다. 본래 그들이 살던 곳처럼 편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곳이 침략군의 기지였음을 감안하면 어차피 생존자는 대부분 침략군과 수장의 뜻에 동조했던 연구원들이리라. 살아남은 악인들이 갑자기 이곳을 덮친 자연에 숨이 막히건 말건, 3호가 신경 쓸 바 아니었다. 3호는 주변을 가득 메운 자연의 울타리에 만족하며, 1호의 말에 답했다.

  “고마워, 세레나.”

  “이렇게 하는 것으로 정말 괜찮겠어? 오히려 쿠로사키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쿠로사키는 네 오빠잖아. 지금 우리가 힘을 합치면, 아카데미아 연구원을 협박해 쿠로사키를 고쳐보게 하는 것도 가능할 텐데. 따라붙은 말에서 3호는 1호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전사가 되려 노력했던 1호는 어떤 상황에서든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강력한 길을 쟁취해내는 듯했다. 본디 침략국에서 태어났던 1호이니만큼 적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으리란 건 알았지만, 때문에 1호가 제법 그럼직한 제안을 했단 걸 알았지만 3호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괜찮아. 프로페서나 아카데미아 사람들이 오빠한테 손을 대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거든. 차라리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 게 나아.”

  보호라는 말이 적절한 표현인지는 3호도 확신이 없었다. 단순한 보존이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장치의 기능은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것. 장치에서 뻗어 나온 빛이 오빠를 덮친 이상, 오빠가 평범하게 살아있다고 생각하기란 어렵다. 장치에서 빠져나온 후 쓰러진 오빠에게 다가섰을 때 3호는 하나뿐인 형제의 숨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죽었다고 결론내릴 생각도 없었다. ‘생명력을 잃은 것죽음이라는 단어 사이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으니.

  그래서 3호는 오빠를 숨겨놓기로 마음먹었다. 당장은 깨어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오빠라 해도, 어쩌면 이미 시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일지 모른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오빠를 내놓을 순 없었다. 오빠를 넘겨주는 순간 3호의 삶에 아무런 가치도 없었던 이들이 유일한 가족을 앗아갈 것만 같았다. 이미 죽어버렸잖아. 시신을 안고 있을 셈이야? 같은 말로, 3호가 두려워하는 가능성을 이미 일어난 사건인 양 떠들어대며.

  “그럼 이제 다르게 묻지. 넌 지금 괜찮은 건가, 루리?”

  “똑같은 질문이네? 답은 아까도 이야기한 대로인걸.”

  “아니, 다른 질문이야. 나는 네가괜찮은지 물어본 거다. 지금 너, 괜찮은 거 맞나?”

  네 오빠 일 때문에, 괜찮은가 걱정되는데. 따라붙는 말에, 3호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오빠의 모습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지금껏 1호를 비롯한 나머지 세 명은 3호 앞에서 오빠의 일을 굳이 헤집지 않았다. 배려였는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3호가 그들 덕분에 오빠가 당한 일을 자주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그 이야기는 왜?”

  그런데 왜 지금 와서 오빠를 화제로 올리는 것인가. 3호는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기만을 바라며, 최대한 명랑하게 물었다.

  “우리가 여기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할 동안 유즈와 린은 밖에 나가서 상황을 지켜봤어. 거기까진 너도 알고 있겠지.”

  “물론.”

  장치에서 빠져나온 후 네 명은 역할을 나눠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의 위험요소를 확인하고 오겠다고 나선 2호와 4호를 떠올리며 1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중 린이 프로페서가 말하는 걸 엿들었다고 해. 지금의 문제가 우리의 폭주에서 시작되었다고, 우리를 원래대로 돌려야 한단 말을 했다더군.”

  “폭주라.”

  “너에게서 시작됐었지, 루리. 프로페서, 아카바 레오가 우리를 아크파이브에 가두고 <리바이벌 제로>를 실행하던 때. 그대로 프로페서의 뜻대로 되려던 때 네가 리바이벌 제로를 거부하면서 상황이 역전됐어.”

  3호가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던, 한편으론 제대로 떠올리려 하지 않으려 했던 이야기를 1호는 차근차근 풀어갔다. 우리 모두가 힘을 잃고 있었는데, 네가 정신을 차리고 저항하면서 프로페서의 계획이 꼬여버린 거야. 레이를 부활시키는 덴 네 명이 필요한데 너 한 명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서 우리가 있던 아크파이브 기계가 오류를 일으켰지. 그러면서 먼저 네 팔찌의 힘이 발동됐던 것으로 기억해. 다음으로 나, 유즈, 린의 팔찌까지 공명하면서 팔찌의 힘이 폭주하고 만 거다.

  “여기, 프로페서의 성이 완전히 자연으로 덮여버린 것도 그 때문이지. 레이가 사용했다던 자연에너지가 우리의 팔찌에 깃들어 있었으니까.”

  긴 이야기를 마친 1호는 질문의 의도를 더 설명하는 대신 녹색 눈 가득 3호를 담았다. 아무래도 1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3호가 알아서 생각해내야 할 듯했다.

  “세레나도 이런 걸 바랐던 거 아냐? 프로페서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잖아. 안 그래?”

  1호의 질문에 깔린 게 <폭주>의 원인에 대한 추궁이라 결론 내린 3호는, 다소 방어적으로 받아쳤다.

  “물론 그렇지. 내가 괜찮냐고 묻는 건, 앞으로 세상이 우리의 상태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 한 번의 폭주가 이런 결과를 낳았는데 한 번 더 폭주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몰라.”

  “……그래서 내가, 또 폭주할 것 같아?”

  침략군 수장의 계획을 완전히 엎어버린 폭주의 트리거는 명백했다. 하필 3호에게서 폭주가 시작된 이유도 바로 짚을 수 있었다. 지금껏 부러 입 밖에 내지 않은 이유를 1호는 알고 있는 듯했기에, 3호는 불완전한 물음을 던졌다. 1호가 꿰고 있는 것을 말하는 대신, ‘그런 문제를 안고 있는자신을 염려하고 있는지만 물은 것이다.

  “글쎄. 하지만 네가 오빠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고 있는 건 알겠군. 내게 가족 같은 건 없었지만, 쿠로사키와 랜서즈로 함께 움직일 때 쿠로사키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는 확인했어. 그러니 너도, 오빠를 최대한 보호하고 싶겠지. 이해해.”

  마지막 말이 꼭 네 약점을 이해해라는 말로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실제로 조금 전부터 1호는 3호를 뒤흔드는 존재를 계속 입에 올리고 있었다. 3호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들었던, 그러나 자꾸만 3호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을. 이렇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면 약점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1호가 3호에게, 미리 파악한 약점을 흘리는 의도는 무엇인가. 은근한 압박? 아니면 경고? 그것도 아니면.

  “나는.”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기에 3호는 얼른 입을 뗐다. 무슨 말이건 흘려 화제를 바꾸기 위해.

  “네 오빠한텐 손대지 못하게 할게. 걱정 마.”

  말을 가로챈 1호는 의외로 친절한 말을 건넸다. 폭주란 위험을 막겠단 계산에서건 3호를 걱정해서건, 1호는 3호의 약점을 덮어줄 의사가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긴장을 놓지 못한 3호는 1호의 호의를 시험하고 싶어졌다. 3호는 바로 감사인사를 건네는 대신 물었다.

  “말할 거야?”

  “유즈와 린에게?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꼭 할 필요는 없겠지.”

  그 말에서 상대의 약점을 쥐고 마음대로 휘어잡겠다는 등의, 조잡한 심리는 내비치지 않았다. 천성이 정직한 1호답게 진심이 느껴질 뿐이었다. 거기서 3호는 겨우 긴장을 놓았다. 이젠 1호의 걱정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마워.”

  “하지만 루리, 우리의 힘은 공명하고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크게 세상에 영향을 미쳐. 그러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하나 내게 알려줬으면 해.”

  “뭘 듣고 싶어?”

  “간단한 거야.”

  너는, 오빠를 어떻게 했으면 하지? 평소보다 낮게 내리깐 목소리였다.

  의미심장한 말에 3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무래도 답을 하는 덴 시간이 제법 걸릴 듯했다.

 

*

 

  저항군의 리더는 팔짱을 낀 채 스크린에 비치는 장면을 눈에 담고 있었다. 아비는 그에게 바깥을 보여준 직후, 잔뜩 긴장한 그를 이끌고 자연의 힘에 휩쓸린 본거지에서 그나마 말짱해 보이는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비가 튼 것이 지금 스크린에 떠오르는 영상이었다. 통제실에 있던 감시카메라가 담아냈던 영상을 겨우 가져온 것이라 했다. 너도 알다시피 통제실은 엉망이 되어서 말이다. 다 망가진 감시카메라에서 이거라도 복구해내느라 꽤 애썼지. 영상을 틀 때, 아비는 다 갈라진 목소리로 설명했다.

  [상황을 확인하기엔 그래도 이게 나을 거다.]

  아비가 말한 대로였다. 화면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나, 영상은 리더가 꼭 알고 싶었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재앙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의 전사이기도 한 청년이 어떻게 아비를 방해했고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까지.

  첫 장면은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장치와 열심히 움직이는 연구원의 모습이었다. 불길한 녹색 빛을 뿜어내는 장치를 리더는 굳은 얼굴로 감상했다. 아비의 계획이 순조롭게 흘러가, 목표 수치에 다다르기 직전. 갑자기 통제실의 문이 열리며 외부인이 끼어들었다. 감시카메라의 영상으로도 그 불청객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다소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것과, 이미 부상을 입은 듯 어깨를 감싸는 모습이 전부 담겨있어서였다.

  성치 않은 몸으로 끼어든 외부인은, 리더에게 너무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정예병의 일원이자 동생을 찾아 적진까지 침투한, 강인한 의지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청년. 전장에서 살아남고 나라도 두어 개나 넘어 통제실에 온 청년은, 동생이 갇힌 장치로 걸음을 옮긴다. 아마 청년은 그곳이야말로 자신의 마지막 목적지라고 생각했으리라. 침략군 수장의 계획에 휘말려 동생을 잃기 직전, 운 좋게 그곳에 닿은 청년은 어떤 감정에 휩싸여 있었을지. 리더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갑자기 끼어든 외부인을, 프로젝트 성공을 앞두고 있던 연구원들이 달가워할 리가 없다. 방해꾼을 치우려 황급히 발동한 보안 시스템이 청년을 붙잡는 것보다, 위기감을 느낀 청년이 장치에 덤벼드는 게 빨랐다.

  다음 순간 장치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가 청년의 몸을 관통했다. 날개 꺾인 새처럼 추락한 청년은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불청객의 등장에 심기가 불편해진 아비가 청년을 치워버리라 명령한 직후 문제가 생겼다. 장치 속에서 청년의 누이가 비명을 지르는가 싶더니, 그의 절망에 반응한 것처럼 단단한 장치가 거짓말처럼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영상엔 노이즈가 낀다. 사고의 여파로 카메라에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지직거리는 화면에, 청년의 누이를 비롯한 네 명의 소녀가 비친다. 장치에서 풀려나온 소녀들의 손목, 정확하게는 오른 손목의 팔찌에서 빛이 번지는 게 리더의 눈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다음엔.

  “보다시피 3, 그러니까 쿠로사키 루리에게서 시작된 일이다. 아크파이브에서 깨어난 건 아마도 네 전사가 벌인 소란 때문인 것 같은데, 오빠가 저렇게 된 걸 보고 완전히 이성을 잃었지. 그러면서 아크파이브가 망가지고, 나머지 셋도 깨어나고 만 거다.”

  다음엔, 기계가 가득했던 악의 요새에 무서운 속도로 꽃이 번지기 시작했다. 병균처럼 퍼지는 꽃이 시야에 가득 들어찬 때 영상이 끊어졌다.

  “네 명은 전부 레이의 조각. 서로 공명하는 게 당연해. 그러니 3호가 폭주하면서 전부 다 폭주한 거고, 세상이 이 꼴이 되었지. 이제 이해했나? 네 전사 하나가 우리 미래를 어떻게 망쳐버렸는지?”

  “쿠로사키는 어떻게 되었지?”

  아비의 말에 제대로 답하는 대신, 리더는 가장 듣고 싶었던 것인 청년의 상태를 먼저 물었다. 청년은 그의 전사였고, 정예병 중에서도 전투력이 뛰어난 축에 드는 자였다. 청년을 잃는 것은 리더에게도 큰 손해일 수밖에 없다. 청년의 삶에서 아비가 만든 불행을 끊어야만 한다는 오랜 책임감도 청년의 안부를 확인하게 하는 이유였다.

  “그런 게 중요해?”

  “중요하지. 어쨌든 그자는 랜서즈고, 당신 계획을 틀어버린 트리거니까.”

  “……아크파이브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니 회수해 조사하려 했지만, 누가 선수를 쳤어. 내가 정신을 차리고 가봤을 땐 이미 누가 가져간 후였지. 아마 3호일 거다. 제 오빠를 데려가고 싶었을 테니까. 가져가봤자 시신이겠지만.”

  “정말로 죽었다고 생각해?”

  “헛된 꿈을 꾸는 게 네 천성인 건 안다만, 최근엔 좀 지나치구나. 랜서즈를 이끌고 온 것부터 헛된 희망에 부풀어 있다 싶었는데 이젠 죽은 놈이 살아있길 바라는 거냐? 아크파이브의 기능은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거다. 그놈은 이미 죽었어.”

  여기까지 와서 죽을 거였다면 차라리 고향 사람들처럼 카드화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지. 아비는 무심하게 덧붙였다. 침략전쟁의 희생자가 맞이한 종말을 입에 올리는 뻔뻔함에 리더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낳은 희생자 앞에 저 남자는 왜 저렇듯 당당한지.

  “그래도 그놈이 <리바이벌 제로>를 완전히 뒤집어버리다니. 개죽음은 아니게 됐군. 죽으러 뛰어들면서 내 계획을 망쳐버렸으니 말이다. 왜 그놈이 폭주의 트리거가 됐는지 알 수 없단 게 분해. 그놈이 트리거가 될 수 있단 걸 알았다면 포착된 즉시 붙잡아버렸을 텐데.”

  “이유를 알 수 없다니. 답은 뻔하지 않나?”

  잠자코 듣고 있던 리더는 짤막하게 받아쳤다. 아비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으나, 회색 눈에는 불쾌감이나 냉소 대신 의문만이 비칠 뿐이다. 정말로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듯.

  그러나 리더는 분명히 이해했다. 왜 청년이 뛰어들면서, 청년이 쓰러지면서 모든 것이 꼬여버렸는지. 왜 청년은 <구원자의 조각>들이 폭주하는 트리거가 되었는지. 너무도 간단한 답이기에 아비가 깨닫지 못하는 게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직접 깨달으란 의미로 리더는 아비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침묵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입술을 뗐다.

  “당신은 레이가, 아버지인 당신 대신 희생하기로 결심했다고 했지. 본래 희생해야 할 당신 대신 자크 앞에 나선 게, 그 동기가 가족인 당신 때문이었다고.”

  힌트는 충분히 주었다. 이젠 아비가 답을 찾는 일만이 남았다. 리더는 답을 기다리며 아비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래. 그런 레이의 조각들이 내 뜻을 거역하다니 끔찍할 뿐이야. 그놈이 끼어들어서 죽은 게 뭐라고 그렇게 격하게 반응한 건지.”

  “히이라기 유즈, 세레나, , 쿠로사키 루리. 당신이 레이의 조각이라고 부르는 네 사람. 그 넷 중에서 하필 쿠로사키 루리가 먼저 폭주한 이유를 생각해.”

  “잠깐만. 설마 뛰어든 놈이 쿠로사키 루리의 오라비여서 그런 일이 벌어졌단 거냐?”

  아무래도 아비는 이제 갈피를 잡은 것 같다. 청년의 개입이 조각의 폭주를 불러온 이유, 정확히 말해, 청년의 누이가 폭주하게 만든 이유에 대해. 리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댄다.

  “레이는 가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희생을 택했지. 레이에게 가족이란 잃어선 안 될 존재이며, 제 몸과 미래를 바칠 소중한 대상이라는 뜻. 그러니 레이의 조각이라는 이들도 당연히.”

  “아니, 그런 게 답일 리 없어. 그놈은, 쿠로사키 슌은 레이의 가족이 아냐! 레이 때와는 다른 상황이라고.”

  “그자는 쿠로사키 루리에게는오빠였어. 당신의 말대로라면 쿠로사키 루리는 레이의 조각이며, 레이의 의지를 타고났고. 가족을 잃고 싶지 않은 레이의 마음은 쿠로사키 루리에게도 강하게 뿌리내렸을 거다. 그러니 오빠가 아카데미아에게 당해 쓰러진 걸 봤을 때 쿠로사키 루리가 당신에게 품은 감정이 무엇이었을진 뻔하지.”

  “레이의 조각이 아비인 나에게 분노했단 거냐?”

  “유감스럽게도 쿠로사키 루리를 포함한 지금의 모든 조각들에게 당신은 가족이 아니거든. 가족을 잃게 한 사람을 용납할 수 없었던 쿠로사키 루리가 폭주. 다음으로 레이의 의지를 이어받은 세 명이 같은 이유로 공명. 그 결과가 이거야.”

  그렇게 말할 때 리더는 웃음을 걸치고 있었다. 언제나 제 욕망대로만 움직였던, 그 이유로 가족까지 내팽개쳤던 아비는 욕망을 이루려 무수한 희생을 낳은 끝에 패배했다.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쌓아온 희생이, 그의 죄악이 결정적인 순간 걸림돌이 된 탓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동화에서 이야기하는 심판이 아닌지. 리더는 아비 앞에서 오랜만에 유쾌해졌다.

  “그러니까 네 이야기는 내가…….”

  “그래. 당신은 레이의 역린을 건드린 셈이라고. 레이가 가족을 소중히 여긴단 걸 알았다면, ‘레이의 가족은 다치게 하지 않았어야지.”

  기뻐해. 당신은 레이의 조각들을, 가장 레이답게 만들었으니까. 가족을 위해 세계의 운명을 바꿨잖아? 한껏 빈정거린 리더는 짝짝짝, 과장되게 손뼉을 친다. 아비의 실패를 진정으로 축하한다는 듯. 다음 순간 리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비의 얼굴에서 패배감을 읽을 수 있었다.

Posted by 현소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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