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기로 달아오른 이마를 서늘한 손이 쓸었다. 서툰 손길, 거친 감촉. 그 모든 것이 익숙해, 소년은 힘겹게 눈을 떴다. 시야는 개이지 않았지만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예상대로의 인물이었다. 함께 싸워온 동료였던 것이다. 소년의 마지막 기억은 전장에서였으니, 아마도 그는 어떻게든 싸움에서 소년을 구해온 모양이었다. 표정 없는 흰 얼굴엔 지친 기색이 비치는 듯해, 소년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깼어?”
상냥함이라곤 조금도 묻어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상대는 무심하게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키려다, 신음만을 토해냈다. 격렬한 통증이 온몸을 내리누르고 있었던 탓이다.
“좀 쉬어둬. 아직 움직이긴 무리일 테니까.”
“싸움은?”
흐릿한 시야에서도 상대의 입매가 일그러지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소년은 제 질문의 답을 알 것 같았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쉬어.”
한참이나 지나서 토해낸 말은 그것뿐. 큰 손이 머리를 서툴게 쓸었던 것 같다. 그것이 참담한 답을 차마 꺼내고 싶지 않아서란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분명히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패했지?”
“유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꺼질 듯 위태로운 정신을 집중하자, 그저 일렁이던 상대의 형체가 보다 선명해진다. 그리고 곧바로 소년은 아픈 말을 꺼낸 것을 후회했다. 상대가 입술을 짓씹으며 감정을 누르는 것을 보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채 삭이지 못한 감정은 그의 금빛 눈을 제 색으로 물들였다.
“사라졌어.”
주먹을 꽉 쥔 채, 그는 고통스러운 답을 쏟아냈다.
“전부 구하고 싶었지만 데리고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너뿐.”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분한 것이리라. 나약함을 용납할 수 없는 자였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압도적인 힘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제 한계를 깨달았기에.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자조의 빛을 띤 목소리였다.
“너라도 구할 수 있었으니까.”
전쟁이란 참담한 재앙과 맞닥뜨리면서 그들은 약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다. 상실이 당연해지며, 살아남은 것에 감사해야 하고, 한 가닥 희망에 목을 매게 되는 비참한 삶. 그는, 그 수많은 상실 속에서 단 하나 잃지 않은 것에 안도한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구해낼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던 것이다.
“너는 이틀을 심하게 앓았어. 곧 죽을 것처럼. 겁이 나서 기도했어. 다른 건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너만은 살려달라고.”
“쓸데없는 걱정이네.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는데.”
목소리를 애써 밝게 짜내어 말했다. 허세를 부린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상대는 침묵하더니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렸다. 여전히 굳은 얼굴.
“걱정할 수밖에. 너는 곧 죽을 사람처럼 굴잖아.”
그러면서 어린 동생을 대하듯 장난스레 소년의 머리를 툭툭 쳤다. 동생이 있어서였을까. 그는 저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어린 아이들을 잘 보듬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 동생마저 적에게 빼앗긴 지 오래. 이제 그 얼굴에선 예전의 따스함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전쟁은 아직 소년인 그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앗아간 것이다. 사랑하는 것들도, 의지하던 사람도, 상냥함도,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그저 적만을 보고 싸울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슬프게도, 그것은 그들 저항군 전부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전쟁이란 절대적인 재앙 앞에서 인간은 너무도 무력하여 때로는 가장 본질적인 것조차 빼앗기지 않던가. 소년 또한 많은 것을 잃었고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소년은 그 무시무시한 재앙에게 단 하나 소중한 것만은 빼앗기지 않으려 처절하게 버텼다.
인간성. 인간으로서 최소한 품어야 할 것.
그것마저 빼앗기면 저들 침략자나 다를 바 없는 괴물이 될 것 같아, 지금껏 소년은 필사적으로 그 하나만은 잃지 않으려 저항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에서는 약점인지라, 계속 소년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절망적인 싸움 속에서 소년을 구해온 소중한 동지조차도 그의 그 약함에 대해 때로 지적하곤 했다. 그래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전장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라고. 곧 죽을 사람도 아니고, 그쯤은 적당히 포기하라고.
아마도, 장난처럼 던진 그의 말은 전장에서 모질지 못한 소년의 결점을 지적한 것이리라. 인간으로서 절대 포기해선 안 될 것마저 쉬이 내버리게 만드는 전쟁의 참혹함에 소년은 쓰게 웃었다. 차라리 전부 버리고 그처럼 자비 없는 전사가 되었다면 나았을까. 그렇게 씁쓸한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동료의 손이 소년의 뺨을 쓸었다.
“유토, 너는 죽지 마라.”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담긴 말은 무거웠다.
“갑자기 왜 그래.”
“죽으려거든 내가 죽은 후에 죽어. 난 세상이 복구될 때까진 죽지 않을 테니.”
묵직한 말에도, 슬픈 가정에도, 동료의 얼굴은 지극히 덤덤했다. 그것이 소년을 힘들게 했다. 최악의 결말을 가정할 수밖에 없는 약자라지만 그걸 입 밖에 내진 않는 것이 그들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것을, 나약함을 허락하지 않는 그가 먼저 깨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소년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상대가 먼저였다.
“나는 이제 돌아올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너는 아니잖아? 나약하다며 네 약점을 물어뜯으면서도 한편으론 안도했다. 아직껏 자신을 버리지 않고 지켜가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텅 빈 웃음이 동료의 입에 걸렸다.
“돌아올 수 없다니, 무슨 소리야?”
“폭력은 시작하기 어렵지만, 시작하면 빠져나오기 어렵지. 나는 그들을 모방해 폭력을 쓰게 됐어. 그들처럼 악랄하게.”
“슌.”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몸도 함께 떨렸다. 소년은 동료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아니, 돌아올 수 있어.”
“아예 이대로 싸울 생각이야. 구역질나는 방식이지만, 저들에게 그대로 돌려줄 수밖에. 나라면 괜찮아. 이미 더럽혀졌으니 괜찮아.”
마디마디 고통스러운 말을 그는 한껏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아니지. 그러니 넌 살아남아야 해. 살아남아서, 세상이 복구되면 희망을 펼쳐야지.”
“내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너라면 가능해. 아니, 너라서 가능해.”
열기가 걷히며 동료의 얼굴이 또렷하게 비쳤다. 구원자를 보듯 절박한 얼굴.
“약속해줘. 죽지 않겠다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미래를 열겠다고.”
그것은 이미 간원이었다. 그가 절망 속에서 힘겹게 간직하고 있었던 마지막 소망이었다.
“약속할게. 끝까지 버티겠다고. 그리고 미래를 위해 싸우겠다고.”
소년은 상냥하게 속삭이고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고 저를 내려다보던 동료를 안았다.
“그러니 슌은 내 곁에서 싸워줘.”
그는 소년의 좁은 품에 무너졌다. 따뜻한 것이 소년의 옷을 적셨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인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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