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슌] 조각1

2015. 10. 30. 01:12 from 03/1

 

  그녀는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양 웅크리자 시선은 자연히 바닥으로 향했다. 차가운 바닥엔 아무것도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누군가가 몸을 녹이던 곳엔 무엇도 없다. 여자는 경험적으로 그 공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챈다. 공백은 부재를 뜻하고 부재는 죽음을 뜻했다. 죽음. 여자는 그 싸늘한 단어를 되뇌었다. 낯설기만 했던 단어는 이제 현실이 되어 그녀의 세상 군데군데 스미고 있었다. 침략자들이 닿는 곳마다 죽음의 잿빛이 세상을 덮으며 모든 것을 말려 죽였다.

  이제 살아있는 것은 희귀해졌다. 공백이 늘어갈수록 그랬다. 바로 얼마 전까지 함께 대화하던 이들도 어느 순간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의 공백은 공동처럼 공허하게 남아 남겨진 이들의 가슴을 쑤셔댔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 대해 말하는 일은 없다. 불행은 입에 담을수록 선명해진다. 살아남은 이들은 한순간이라도 불행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라 해도.

  공백을 헤아려 무엇하겠는가. 다시 채울 수도 없는 것을. 사라진 이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을. 평소라면 여자도 그렇게 공백을 머릿속에서 지워냈을 것이다. 사라진 이를 헤아리지 않고 나아가는 일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이번의 공백은 그녀에게 아프게 몰아쳤기 때문이었다. 정을 붙여서는 안 되었는데. 여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쉽게 잃을 것이라면, 마음을 두지 않아야 했는데. 돌아보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미련을 품어선 안 되었는데.

  여자는 다소 약해져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누이의 부재에 지쳐 암묵적인 법칙을 깨버린 것이다. 강인하여 지켜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감정을 쌓아서는 안 되었다. 잃었을 때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무력한 이들이기에 얽매이는 법칙이었다. 하루하루 잃어가는 이들이기에 감내해야 할 원칙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정을 붙인 것이 잘못이었다.

  하필, 사라진 누이와 닮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필 그 나이대의 소녀였기 때문에. 하필 누이처럼 웃어주었기 때문에. 하필 상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정을 붙였고 미련을 품었고 감싸려 했다. 무력하여 자신조차 지키기 버거운 주제에.

  침략자는 탐욕스레 모든 것을 삼킨다. 이미 소중한 이는 전부 빼앗겼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사랑할 것은 남지 않았다. 돌아보는 것이 무의미한 걸 알면서도 타인의 부재에, 세상의 멸망에 아파한다. 그렇게나 고통스러웠는데, 통각은 도무지 무뎌지질 않는다. 우습게도 고통은 언제나 남겨진 이들의 몫이었다. 언제까지 살아남을지는 모르나, 살아있는 한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뼛속까지 스미는 타인의 부재에, 여자는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그것으론 시시각각 닥치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둠 속에 얼굴을 묻은 채, 여자는 기도한다.

  눈을 감았다 뜨면 모든 것이 사라지게 해주세요. 차라리 같은 지옥에서 만나게 해주세요.

  그것도 아니라면, 나만이 사라져서 더 이상 누구도 사라지지 않도록 해주세요.

  참혹한 기도는 허공에 맴돌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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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