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는 무거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가 만든 방주는 막 출항하려던 때였다. 신화에 기록된 방주처럼, 세상의 미래를 새로 쓰기 위해. 이번의 방주가 나아갈 곳은 홍수로 불어난 물이 아니라 하늘이었고, 동물 한 쌍씩이 아닌 인간만을 태워두었단 것만이 신화와 달랐다. 인간의 대표로서, 신세계를 기대하는 사람으로서. 연구자는 하늘 위로 방주를 보낼 그 순간만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늘 위에, 아니, 차원 위에. 과거 찬란했던 세계만큼 희망적인 신세계를 쌓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이자 인류의 희망.
모두의 기대를 안은 채 방주는 가동음을 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날아올라 곧장 ‘하늘’로 향해야 했는데. 동력은 충분했는데. 이륙한 지 오래지 않아 방주는 땅으로 향했다. 곤두박질치는 방주에서, 연구자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 같단 생각에 사로잡혔다. <추락>은 너무나 빠르고,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며 ─ 목적지는 천상에서 저 바닥으로 바뀌지 않던가.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계획은 완벽했는데. 성공은 눈앞에 있었는데. 이런 결말은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에 통제장치를 마지막으로 조종하려던 때. 발악은 필요 없어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별에 손을 뻗어봤자니까요.
아. ‘그녀’의 말이다. 그를 인류의 희망으로 만들어준 동시에 그를 절망으로도 내몰았던 여자의 말. 지나치게 상냥한 목소리는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 그는 얌전히 눈앞의 결말을 받아들였다. 별에 손을 뻗어봤자, 인간은 별을 쥘 수 없다. 천상으로 향하려 해봐야 천상으로의 사다리는 인간의 죗값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의, 아니, 그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꿈속에서도 현실은 무거웠고.
방주는 추락했다.
*
침략전쟁은 세상을 온전히 삼키지 못하고 끝났다. 침략군에 맞서 결성한 정예병이, 끝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덕분이었다. 침략군이 패배했으나 전범에 대한 처분은 쉽게 결정이 나지 않았다. 한때 스스로 방주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던 연구자, 그 방주가 추락하는 꿈을 꾸었던 사내는 특히나 처분이 늦었다. 인류의 희망을 자처한 그 사내야말로 군대를 키워 침략전쟁을 일으킨 우두머리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거물’은 어떤 처분을 내리든 파장이 크다. 전쟁의 흔적을 얼른 덮고 싶어 하는 세계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사내의 존재 자체가 전쟁의 얼룩이었고, 어쩌다 흘러나오는 그의 이름이 전쟁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트리거였다. 사람들은 공개석상에 그를 세워 제대로 된 처벌을 내리는 것보다, 그로 대표되는 전쟁의 흔적을 하루라도 빨리 덮길 바랐다. 그 덕에 거물 중의 거물, 침략군의 수장이었던 사내조차 건드려서는 안 될 폭탄처럼 조심스럽게 다뤄졌다. 물론 자유를 잃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악의 근원’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세상이 받을 충격 때문인지, 사내는 전쟁 직후부터 어느 시설에 머물라는 지시를 받았다.
언젠가 처분이 결정될 때까지, 조용히 갇혀 죄를 곱씹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곱씹고 있는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저지른 죄는 깎이지 않을 테고, 그의 군대가 짓밟은 땅이 ‘기도’로 회복되지도 않을 텐데. 맞아 죽지나 말라고 피신시킨 모양이지. 사내는 제 처지를 그렇게 판단했다. 그런 것 치곤 몸이 편해서, 꼭 요양이라도 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딱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를 침몰시킨 정예병의 수장, 즉, 적의 우두머리가 자주 그를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사내는 그 남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부자가 패배한 침략군의 수장 대 승전군의 수장으로 마주한다는 것도 퍽 우스운 일이었다.
아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뻔했다. 세상을 삼킬 뻔한 악의 근원이자, 자신에게 죄의 꼬리표를 붙여줄 뻔한 사내를 용서할 수 없어서이리라. 세상은 아직 사내를 처벌하지 않았으나, 사내 때문에 죄인의 아들이어야 했던 아들은 한시라도 빨리 아비를 재판장에 세우고 싶을 터였다. 목숨을 걸고 싸워 아비를 꺾은 대가로 제 결백을 입증하고 싶을 것 아닌가. 사내와 마주앉을 때마다 아들이 냉랭하게 아비를 바라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사내의 요구를 매번 묵살하는 것도.
요구란, 너무나 간결한 것이었다. 사내가 아들의 손에 옥좌에서 끌어내려지던 순간부터 반복해 내뱉은 것. 제삼자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요구. 히미카를, 불러줘. 침략군을 키우느라 내팽개친 아내를, 사내는 아들에게 패한 순간부터 찾았다. 히미카를 불러줘, 네 어머니를. 제법 간절한 목소리에도 아들은 그의 요구를 외면했다. 어머니는 당신의 일에 나서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아들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제 어머니를 닮아있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일에 나서지 않아.]
그것이야말로 사내에겐 아들의 손에 몰락한 것 이상으로 끔찍한 패배감을 안기는 문장이었다.
아들이야 전쟁을 벌일 생각으로 어머니와 자신을 내팽개치고 사라진 아비를 증오할 수 있었다. 사내가 처자식을 두고 먼 이국으로 떠난 때, 아들은 어렸으니까. 한창 애정을 바랄 시기에 아비가 삶에서 잘려나갔고, 결국 자신을 죄인의 자식으로 만들기까지 했으니까. 정예병을 결성한 후 아비에 맞서러 온 아들이 그에게 과거의 일을 꺼낸 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다. 그 여자는, 그렇게 감정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다. 이탈한 <파트너>에 배반감을 느꼈을지는 몰라도, 기본적으로는 그를 냉정하게 추락시킬 수 있을 사람이었다.
당연히, 사내는 세가 기운 것을 알아차린 때부터 자신을 몰락시킬 사람은 아들보단 아내이리라고 믿어왔다. 아비의 삶에 끼어들려 노력했던 아들이 아니라. 패전의 순간 사내가 아내를 찾은 것은 자신이 그려왔던 종말을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봐야 할 터였다. 히미카를 불러줘. 그 말은 ‘그 사람이 내 삶을 결정짓게 해줘’라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아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남편이 몰락하던 순간은 물론, 그 이후 반복된 남편의 요구에도.
아들이 전해주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그 열여섯 살짜리는 아직 아비에게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어머니가 ‘그 남자’에게 신경 쓰는 게 싫어서. 아비의 요구를 중간에서 삼키고 모른 체 하고 있는 게 뻔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제는 마음껏 망가뜨려도 될 <패배자>를 아내가 가만히 두고 있을 리 없다. 처벌이 유보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사내는 아내를 떠올렸다. 아내가 자신을 끌어내리는 것을, 냉랭한 목소리로 그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을 상상했다. 히미카가, 해줘야 해. 그게 어울려.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뇐 말이었다. 아내가 긴 판결문을 읽는 꿈을 꾸고서, 현실이 아님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쯤 되면 사내가 단순히 아내에게 몰락할 수 있다 믿어왔다기보단, 아내에게 완전히 부서지길 바란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그럼 왜 저를 무너뜨리는 건 아내의 손길이길 바랐는가. 왜 심판자 역을 그녀에게 주려 했던가. 이유는 너무나 명확했다. 그를 정상에 올려놓은 것이 아내였고, 그에게 꿈을 꾸게 만든 게 아내였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먼 이국을 본거지로 삼아 전쟁을 꾀하기 전부터 세상을 뒤흔들 힘을 쥐고 있었다. 아들에게 동경의 대상이던 때만 해도, 사내는 대기업의 창업주였다. 그에 앞서서는 그야말로 혁명을 일으킬 기술을 쥔 연구자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휘장이야말로 아내가 사내에게 둘러준 것이었다. 아내를 만났기에 그는 대기업의 창업주였고, 아내의 손길 덕에 회사를 키워낸 획기적인 기술을 세상에 성공적으로 발표할 수 있었다. 아내가 없었다면? 그는 그저 그런 천재로, 빛을 보지 못한 기술자로 남았으리라. 어느 시대마다 한둘은 나오는 ‘비운의 천재’ 정도 되었을까.
제 능력을 깨달았을 때 사내는 아무것도 쥔 것 없는 이방인이었다. 과거의 기억조차 온전치 않은. 때문에 기댈 것도 믿을 것도 없는. 그럼에도 머릿속에서 번득이는 기술을 세상에 발표하고 싶어서 어딘가의 지면을 빌려 제 연구를 드러냈던 것이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걸 본 사람이 그에게 연락해, 후원 의사를 밝히면서부터 그는 제대로 된 천재가 되었으니. 그때 만난 사람의 얼굴을 사내는 지금도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다. 자주색의 머리칼에 물빛 눈. 조각상처럼 기품 있는 인상.
[히미카라고 불러요.]
사내와 마주앉으며 저를 소개할 때 입가에 걸치던 웃음도.
그 사람은 젊고 영민한 여자였는데, 사내가 쥐지 못한 모든 것을 안고 있었다. 얕게 보자면 연구비로 사용할 수 있을 막대한 재산부터, 좀 더 넓히자면 대단한 인맥과 미래를 보는 눈까지도. 그러니 그녀가 사내의 연구를 보자마자 후원자가 되겠다고 약속한 것과, ‘교제’를 요구한 것도 미래에의 투자였던 셈이다. 다르게 말하면, 사내가 그녀의 선택을 받았다고 해야 할 터다. 그녀가 바라는 미래를 만들 사람으로.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결혼이라는 법적인 결합은, 몇 번을 곱씹어봐도 사내를 묶어두기 위한 장치였다. 그는 제 재능을 알아본 후원자에게 미래를 그릴 도구가 된 것이다. 그 사실은 사내에게 줄곧 묘한 자부심을 안겼다. 그는 그 뛰어난 사람에게 선택받았고, 능력을 입증해 보였다. 그녀의 선택이 옳았음을, 회사의 성공으로, 존경받는 연구자가 되는 것으로 확실하게 보였다. 신의 선택을 받은 사제가 된 기분이었다.
거기까지만 머물렀다면, <아내>라는 이름을 쓴 <스카우터>의 선택에 감사하고 살기만 했다면. 그랬다면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의 삶만이 아니라 세상 곳곳의 미래가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다. 아내에게서 뛰쳐나오면서 그는 죄를 저지르기 시작했고, 끝내는 침략전쟁의 주범이 되었으니. 그가 짓밟은 나라의 민간인, 그의 손에 침략군이 된 어린 학생들, 그리고 아비를 마냥 동경하던 어린 아들까지. 그의 죄에 삶이 바뀌어버린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 사내는 자신에게 그런 힘을 쥐게 해준 이가 자신의 종말을 결정짓는 게 합당하다고 판단했다. 그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만든 자. 그에게 세상의 미래마저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을 심어준 사람. 그의 아내. 그를 세상에 끌어낸 사람이 그를 세상에서 격리하고 처벌하는 게 옳았다. 그것은 신이 타락한 인간을 처벌하는 방식과 같았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아비의 뜻을 전해줘야 하는데. 아내를 불러와줘야 하는데. 증오하는 아비를 심판할 자를 집에서 끌어내어, 세상의 죄인 앞에 세워야 하는데.
그렇게 동화의 결말을 써야 하는데.
아내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시설에 틀어박혀 지내던 어느 날. 사내는 과거의 일을 꿈으로 꾸었다. 침략전쟁의 막바지에 실행하려고 했던, 신세계로 방주를 이끌고 가려 했던 일이었다. 신세계를 가꿀 인재를 가득 채운 채 방주를 가동하던 그는 성공 직전에 처참한 실패를 맞닥뜨렸다. 가득한 연료로도 방주는 제대로 가동되지 않더니, 결국 그의 희망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정예병에게 포위당한 채 최후의 발악을 하려던 때. 아내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발악은 필요 없다는 말은 지나치게 상냥해서 사내는 눈을 떴고, 시설의 봉사자에게서 면회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 저를 찾아왔다는 말에 사내는 아무런 감흥 없이 면회실로 향했다. 상대야 뻔하다.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를 이용해먹을 인간도 아닌. 유효기간이 지난 감정을 다 쏟아내지 못해 아비를 찾는 아들일 게 분명했다. 아들을 만나도 해야 할 말은 이미 수없이 반복해온 요구뿐인데. 이번에야말로 아내를 꼭 불러달라고 말하겠다 다짐하고 면회실에 들어가 기다리던 때. 사내는 익숙한 향내를 맡았다. 점점 짙어지는 향내는, 그의 기억에 너무나 깊게 뿌리내린 사람의 향내였고. 혹시나 하는 마음을 꺼내보기도 전에, 향의 주인이 나타났다.
“오랜만이네요, 아카바 레오.”
귀에 익은 목소리는 사내가 짐작한 그 사람의 것. 그가 내내 찾아왔던 사람은, 아내는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우아하게 그 앞에 섰다.
*
“그동안 계속 찾았다면서요.”
맞은편에 앉은 아내는 부드러운 웃음을 띤 얼굴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사내는 투명한 막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상대가 아내라는 게 쉽게 믿기지 않았다. 얼마나 자주 불렀던가. 한편으로는 얼마나 자주 그렸던가. 애원에도 기원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사람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를 찾아오다니.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레이지가 전해주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아뇨. 말해줬어요. 내가 응하지 않았을 뿐이죠.”
목소리에서는 자신을 팽개친 도구, 혹은 남편에 대한 분노는 묻어나오지 않았다. 기억에 남은 것과 똑같이 평온해 오히려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남편 앞에 앉은 것인지.
“그럼 이번엔 왜 응했지요?”
아내는 그에게 아내보다는 스카우터였고, 배우자보다는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아니, 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경영 전반을 맡는 것으로 그의 회사를 키워준 진짜 공신이었다. 거기에 결혼 이전에 후원자 대 후원 대상으로 만났던 시간 때문인지, 사내는 아내에게 절반쯤은 경어를 쓰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
“아카바 레오의 처분에 관여할 수 있게 되어서요. 처분을 기다리느라 지루했죠?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난 이미 당신의 처분을 결정했거든요.”
손뼉을 짝짝. 치는 아내에, 사내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아내의 저런 태도가 좋았다. 저렇게 감정적인 동요 없이 남편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확실한 종말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을 읽는다니까. 내가 당신에게 뭘 기대하고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뻔하니까요. 난 과거의 아카바 레오를 기억하니까. 그 남자는 동화를 좋아했지요. 그러니까, 바람직한 결말이 나는 이야기를요.”
“그럼 들어봅시다. 당신이 가져온 ‘처분’을. 이런 죄인에겐 어떤 처벌이 적합하지?”
무엇이든 사내는 조용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침략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삼키려고 했던 사내에게,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던 사내에게 거부할 권리는 없다. 설령 있다 해도 행사할 생각은 없었다. ‘악마의 심판’이라는 멋진 극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전쟁을 벌일 때까지만 해도 사내는 자신이 일으킨 일이 성전이라도 되는 줄 알았으나 돌아보니 결국은 추한 폭력의 극단일 뿐. 악인은 악인으로 퇴장하면 그만이었고 그 과정이 극적이라면 더 좋다. 아내의 말대로 그는 바람직한 결말의 이야기를 좋아했으니.
사내가 제법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데도 아내는 물빛 눈으로 남편을, 끔찍한 죄인을 한동안 담을 뿐이었다. 보드라운 입술은 빠르게 열리지 않았다. 그럴 때 그녀의 눈길은 꼭, 표본을 보는 연구자 같았다. 이제 사내는 자신이 아내 앞에서 표본 정도의 가치나 가지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서두를 필요 없어요. 이 시간을 충분히 즐기는 게 좋을 거랍니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흘러나온 말은, 무가치한 존재를 향한 것이라고는 지나치게 자비로웠다. 눈앞의 상대가 한때는 남편이었기 때문에? 아니면 아들의 아비였기 때문에? 그게 아니면, 그녀가 선택했던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우스워서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난 두려워할 게 없어요. 최악의 처분이라 해봤자…….”
“편리하게 생각하는 건 당신의 나쁜 버릇이죠. 당신이 가시관을 쓴 성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래서 죽음이라도 당장 짊어지고 편해질 줄 아는 모양인데. 그런 처분은 없어요. ‘내가’ 허락하지 않고요.”
“단호하군. 난 이제 당신에게 가치가 없는 존재인 건 맞지만.”
“정말로 무엇이든 짊어질 자신이 있다면, 그렇게 의연한 체 하지 않아요. 아직도 뭔가, 헛된 희망을 품는 모양이네요.”
아내의 긴 손가락이, 사내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은 투명막을 쓸었다. 그녀의 손이 닿은 부분 너머로 비치는 건 사내의 뺨. 막이 없었다면 그녀는 남편의 뺨을 쓸어주었을 것이다. 그 메마른 친절이야말로 사내에게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아내는 이제 확실하게, 그라는 남자를 포기했다고. 곧 죽을 동물을 쓸어주듯, 완전히 버릴 존재에게 의미 없는 친절을 보여줄 뿐이라고.
“……여기에서 지내며, 당신이 내 목을 조르는 꿈을 꿨어. 히미카.”
“꿈속의 나는 현실보다 열 배는 더 자비로웠군요. 당신의 일에 나서주기도 하고.”
“목을 조르진 않아도 내 운명을 결정지으러 온 것 아닌가? 예지몽이었던 셈이지. 지금 날 보는 당신 눈길은 도살장에 끌려가기 직전의 가축을 보는 것 같아요.”
“당신은 내 앞에서 희생 제물처럼 굴고요. 레오.”
“그 모습이 역겹겠지. 그럼 내가 ‘정신을 차리도록’ 말해보지 그래요. 도대체 무슨 처분이길래 이 시간을 즐기라고 말하는지. 나에게 말해주는 걸 자꾸만 미루는지.”
사내도 제 손가락을 막에 얹으며 물었다. 다음 순간 그의 손가락도 아내의 뺨이 있는 자리를 쓸었다. 단순히 아내를 흉내 낸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아내의 뺨을 쓸어보고 싶었는지는 그조차 알 길이 없다.
“나는 별에 손을 뻗던 남자의 꿈을 꿨어요.”
그럼에도 닫혀있던 아내의 입술은 한참이나 지나서 열렸다. 그녀의 말은 부부에게 너무나 익숙했던 비유를 담고 있어서, 사내는 말을 듣자마자 움찔했다.
“내가 믿었던 어떤 남자의 꿈을요.”
‘그 남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아내가 천천히 흘리는 말에서, 낡은 비유에서 사내는 과거의 어느 순간을 떠올린다. 그들이 부부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묶어두기 전. 사내가 그저 순진한 연구자였던 시절. 그 순진한 연구자를 후원하기로 결심한 어느 여자가, 자신이 선택한 남자를 만나던 때. 그때 사내는 자신의 연구를 여자 앞에서 설명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열심히. 그러나 그 시점에 사내의 연구는 지원금도 지원 시설도 없어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사내는 말하자면, 설계도만 가지고 있는 상태였는데, 설계도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한참이고 설명하다가 사내는 스스로 힘이 빠지고 말았다. 미안해요, 히미카. 이런 이야기, 밖에서 하면 모두가 헛된 생각에서 벗어나라 하겠지요. 여자가 사내의 주장을 허황된 말로 치부하기도 전에, 사내는 지레 자신의 연구를 탓했다. 그동안 제가 쌓아왔던 것을 몽상의 결과물처럼 취급하고는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것으로 정말 내가 꿈꾸는 단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거의 눈물을 쏟는 것 이상으로 깊은 절망이 그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히미카. 당신이 판단해줘요. 난, 몽상가인가요?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면서 시간도 지원도 헛되이 쓰는 인간인가요? 그렇다고 말한다면.]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포기할게요. 말을 마치고는 여자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후원자에게 연구의 결말과 연구자로서의 삶을 지속할지 여부를 결정지어달라, 요구했던 것이다. 그때 여자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고.
[당신은 날 과소평가하는군요. 난 몽상가와 별을 찾는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아요. 몽상가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꿈에 빠져드는 도피자죠. 하지만 세상엔, 언뜻 몽상가처럼 보여도 실제론 ‘별’ 같은 것에 손을 뻗는 사람이 있답니다. 인간으로서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것을 추구하면서, 삶을 그에 바칠 수 있는 사람이요.]
그때 여자의 목소리는 더없이 상냥해, 사내는 꼭 꿈결에 들은 것처럼 느껴졌다. 예언자의 음성을. 인간을 사자(使者)로 삼아 세상에 제 뜻을 펼치던 신의 목소리를.
[레오, 별에 손을 뻗어요.]
[추락할 텐데요?]
[내가 천상으로의 사다리를 만들어줄게요. 당신은 그 사다리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돼요.]
여자의 손은 연구자의 뺨을 쓸었고 그녀의 팔은 눈물이 흐를 뻔한 연구자의 얼굴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레오. 나를 믿어요. 사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달콤했던 문장이었다. 동시에 그의 꿈을 용인해준 문장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파트너가 되고, 부부가 되고, 아들의 부모가 되고 ─
“꿈에서 그 남자는 어땠죠?”
그러다 결국, 사내의 이탈로 이렇게 건조한 사이가 되어 면회실에 함께 앉아있다. 죄인과 심판자로.
“별의 존재를 의심하더군요. 자기가 올라탄 사다리를 내려다보며 지상의 반짝임을 돌아보고요. 난 그 사람이 계속 하늘을 보길 바랐어요. 별빛을 눈에 담으며, 계속 별을 사랑하길 바랐는데.”
“그랬다면 결말은 하나뿐이었을 텐데.”
사내는 그 남자의 결말을 안다. 별에 손을 뻗다가 함부로 지상을 돌아보고, 의미 없는 빛을 탐한 결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별에 손을 뻗은 남자는, 한때 아내가 선택한 남자였고 한때는 그의 아들의 아비였으니. 세상 사람들의 동경을 받았던 연구자이자, 세계적인 대기업의 창업주는 자신의 기술을 전쟁에 활용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의 세계를 열어줄 수 있었을 그의 힘은 절망만을 만들었다. 이제 와서 ‘타락’의 이유를 짚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어차피 그만이 아는 사욕이었고, 이뤄져선 안 될 추악한 마음이었다.
이제 그가 기억해야 할 것은, 결말뿐.
“네, 사다리에서 발을 떼다 추락했어요. 꽤 높이 올라왔었으니 추락하는 속도도 빨랐겠죠.”
“당신이 마련해준 사다리였는데.”
“이젠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될 거랍니다. 내가 말했죠, 이 시간을 충분히 즐기는 게 좋을 거라고. 난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감상에 젖을 시간을 준 거예요.”
“당신은 내 심판자지만, 내가 당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할 힘까진 쥐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나요?”
미지근한 물음이었다. 그렇게 물으며 물빛 눈 가득 사내를 담아주는 아내는 꼭 어리석은 인간을 보는 신을 연상시켰다. 아. 저 사람이라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무기’를 쥐고 있을 텐데. 저 사람의 선언이 허풍일 리 없는데. 사내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아내의 입술은 다시 열렸다.
“처분은 간단해요. 당신의 기술로 망가뜨린 세계를 복구하게 하는 것이 기본. 다른 사람을 투입하려 했지만, 당신의 기술이 꼭 필요한 모양이더군요. 유감스럽게도.”
“이것만일 리가 없을 거야. 무슨 조건이 붙었죠? 아니면, 그것 외에 어떤 처분이 더 있는 거지?”
“네, 조건이 하나 붙었어요. 이건 내가 추가한 조건이죠. 아카바 레오에게서, 그 자가 세상의 희망이었던 때의 기억은 전부 지우도록 한다. LDS의 기억조작 기술로. 세상에 그만큼의 해를 끼쳤다면, 그런 과거를 기억할 필요 없어요. 죄의 기억만 안고 살도록 하세요. 그게 당신을 평생 따라다닐 거랍니다. 아니면 전부 지우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안 돼. 예전의 기억을 지워버리면…….”
“그래요, 당신의 삶에서 나와 레이지는 지워질 겁니다. 필요 없잖아요?”
말을 마친 아내는 의자에서 일어나 면회실의 문 쪽으로 곧장 향했다. 이제는 더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앞으로 감상에 젖을 수 없게 되리란 이야기가, 아내를 돌아보는 것도 불가능하리란 이야기가 사내의 머리를 때렸다. 그녀가 면회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버리면, 이제 사내는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게 된다. 다시는.
“제발, 히미카. 당신의 기억만은 남겨줘. 앞으로는 별을 계속 바라볼 테니……당신이란 별을 기억하도록, 제발.”
다급한 말은 아내가 막 문을 열던 때 그녀의 등에 꽂혔다. 아내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당신의 별이었던 적이 없어요. 당신은 이제 지상의 죄밖에 볼 수 없게 되었고요. 아카바 레오, 과거의 내 판단이 틀렸어요. 결국 그 남자는, 몽상가가 되었군요. 그것도 모두를 해치려 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내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내의 심판자는, 그를 발굴해낸 스카우터는, 그의 능력을 인정했던 후원자는. 그렇게 그를 떠났다. 하필, 사내의 눈에 새겨진 아내의 마지막 모습은 뒷모습이었다. 그의 삶에서 퇴장하길 택한 아내는 다시는 그를 정면에서 봐주지 않을 텐데.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토+슌] 괴물의 그림자 (0) | 2021.12.31 |
---|---|
[사장슌ts] 계약은 신중하게 (0) | 2021.11.30 |
[사장슌] 악령의 밤 일시동맹 (0) | 2021.10.31 |
[자크+레이] 무너지는 갑판에서 (0) | 2021.07.26 |
[유리] 괴물의 온실 (0) | 2021.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