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는 무거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가 만든 방주는 막 출항하려던 때였다. 신화에 기록된 방주처럼, 세상의 미래를 새로 쓰기 위해. 이번의 방주가 나아갈 곳은 홍수로 불어난 물이 아니라 하늘이었고, 동물 한 쌍씩이 아닌 인간만을 태워두었단 것만이 신화와 달랐다. 인간의 대표로서, 신세계를 기대하는 사람으로서. 연구자는 하늘 위로 방주를 보낼 그 순간만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늘 위에, 아니, 차원 위에. 과거 찬란했던 세계만큼 희망적인 신세계를 쌓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이자 인류의 희망.

  모두의 기대를 안은 채 방주는 가동음을 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날아올라 곧장 하늘로 향해야 했는데. 동력은 충분했는데. 이륙한 지 오래지 않아 방주는 땅으로 향했다. 곤두박질치는 방주에서, 연구자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 같단 생각에 사로잡혔다. <추락>은 너무나 빠르고,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며 목적지는 천상에서 저 바닥으로 바뀌지 않던가.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계획은 완벽했는데. 성공은 눈앞에 있었는데. 이런 결말은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에 통제장치를 마지막으로 조종하려던 때. 발악은 필요 없어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별에 손을 뻗어봤자니까요.

  아. ‘그녀의 말이다. 그를 인류의 희망으로 만들어준 동시에 그를 절망으로도 내몰았던 여자의 말. 지나치게 상냥한 목소리는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 그는 얌전히 눈앞의 결말을 받아들였다. 별에 손을 뻗어봤자, 인간은 별을 쥘 수 없다. 천상으로 향하려 해봐야 천상으로의 사다리는 인간의 죗값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의, 아니, 그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꿈속에서도 현실은 무거웠고.

  방주는 추락했다.

 

*

 

  침략전쟁은 세상을 온전히 삼키지 못하고 끝났다. 침략군에 맞서 결성한 정예병이, 끝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덕분이었다. 침략군이 패배했으나 전범에 대한 처분은 쉽게 결정이 나지 않았다. 한때 스스로 방주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던 연구자, 그 방주가 추락하는 꿈을 꾸었던 사내는 특히나 처분이 늦었다. 인류의 희망을 자처한 그 사내야말로 군대를 키워 침략전쟁을 일으킨 우두머리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거물은 어떤 처분을 내리든 파장이 크다. 전쟁의 흔적을 얼른 덮고 싶어 하는 세계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사내의 존재 자체가 전쟁의 얼룩이었고, 어쩌다 흘러나오는 그의 이름이 전쟁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트리거였다. 사람들은 공개석상에 그를 세워 제대로 된 처벌을 내리는 것보다, 그로 대표되는 전쟁의 흔적을 하루라도 빨리 덮길 바랐다. 그 덕에 거물 중의 거물, 침략군의 수장이었던 사내조차 건드려서는 안 될 폭탄처럼 조심스럽게 다뤄졌다. 물론 자유를 잃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악의 근원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세상이 받을 충격 때문인지, 사내는 전쟁 직후부터 어느 시설에 머물라는 지시를 받았다.

  언젠가 처분이 결정될 때까지, 조용히 갇혀 죄를 곱씹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곱씹고 있는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저지른 죄는 깎이지 않을 테고, 그의 군대가 짓밟은 땅이 기도로 회복되지도 않을 텐데. 맞아 죽지나 말라고 피신시킨 모양이지. 사내는 제 처지를 그렇게 판단했다. 그런 것 치곤 몸이 편해서, 꼭 요양이라도 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딱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를 침몰시킨 정예병의 수장, , 적의 우두머리가 자주 그를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사내는 그 남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부자가 패배한 침략군의 수장 대 승전군의 수장으로 마주한다는 것도 퍽 우스운 일이었다.

  아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뻔했다. 세상을 삼킬 뻔한 악의 근원이자, 자신에게 죄의 꼬리표를 붙여줄 뻔한 사내를 용서할 수 없어서이리라. 세상은 아직 사내를 처벌하지 않았으나, 사내 때문에 죄인의 아들이어야 했던 아들은 한시라도 빨리 아비를 재판장에 세우고 싶을 터였다. 목숨을 걸고 싸워 아비를 꺾은 대가로 제 결백을 입증하고 싶을 것 아닌가. 사내와 마주앉을 때마다 아들이 냉랭하게 아비를 바라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사내의 요구를 매번 묵살하는 것도.

  요구란, 너무나 간결한 것이었다. 사내가 아들의 손에 옥좌에서 끌어내려지던 순간부터 반복해 내뱉은 것. 제삼자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요구. 히미카를, 불러줘. 침략군을 키우느라 내팽개친 아내를, 사내는 아들에게 패한 순간부터 찾았다. 히미카를 불러줘, 네 어머니를. 제법 간절한 목소리에도 아들은 그의 요구를 외면했다. 어머니는 당신의 일에 나서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아들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제 어머니를 닮아있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일에 나서지 않아.]

  그것이야말로 사내에겐 아들의 손에 몰락한 것 이상으로 끔찍한 패배감을 안기는 문장이었다.

  아들이야 전쟁을 벌일 생각으로 어머니와 자신을 내팽개치고 사라진 아비를 증오할 수 있었다. 사내가 처자식을 두고 먼 이국으로 떠난 때, 아들은 어렸으니까. 한창 애정을 바랄 시기에 아비가 삶에서 잘려나갔고, 결국 자신을 죄인의 자식으로 만들기까지 했으니까. 정예병을 결성한 후 아비에 맞서러 온 아들이 그에게 과거의 일을 꺼낸 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다. 그 여자는, 그렇게 감정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다. 이탈한 <파트너>에 배반감을 느꼈을지는 몰라도, 기본적으로는 그를 냉정하게 추락시킬 수 있을 사람이었다.

  당연히, 사내는 세가 기운 것을 알아차린 때부터 자신을 몰락시킬 사람은 아들보단 아내이리라고 믿어왔다. 아비의 삶에 끼어들려 노력했던 아들이 아니라. 패전의 순간 사내가 아내를 찾은 것은 자신이 그려왔던 종말을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봐야 할 터였다. 히미카를 불러줘. 그 말은 그 사람이 내 삶을 결정짓게 해줘라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아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남편이 몰락하던 순간은 물론, 그 이후 반복된 남편의 요구에도.

  아들이 전해주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그 열여섯 살짜리는 아직 아비에게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어머니가 그 남자에게 신경 쓰는 게 싫어서. 아비의 요구를 중간에서 삼키고 모른 체 하고 있는 게 뻔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제는 마음껏 망가뜨려도 될 <패배자>를 아내가 가만히 두고 있을 리 없다. 처벌이 유보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사내는 아내를 떠올렸다. 아내가 자신을 끌어내리는 것을, 냉랭한 목소리로 그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을 상상했다. 히미카가, 해줘야 해. 그게 어울려.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뇐 말이었다. 아내가 긴 판결문을 읽는 꿈을 꾸고서, 현실이 아님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쯤 되면 사내가 단순히 아내에게 몰락할 수 있다 믿어왔다기보단, 아내에게 완전히 부서지길 바란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그럼 왜 저를 무너뜨리는 건 아내의 손길이길 바랐는가. 왜 심판자 역을 그녀에게 주려 했던가. 이유는 너무나 명확했다. 그를 정상에 올려놓은 것이 아내였고, 그에게 꿈을 꾸게 만든 게 아내였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먼 이국을 본거지로 삼아 전쟁을 꾀하기 전부터 세상을 뒤흔들 힘을 쥐고 있었다. 아들에게 동경의 대상이던 때만 해도, 사내는 대기업의 창업주였다. 그에 앞서서는 그야말로 혁명을 일으킬 기술을 쥔 연구자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휘장이야말로 아내가 사내에게 둘러준 것이었다. 아내를 만났기에 그는 대기업의 창업주였고, 아내의 손길 덕에 회사를 키워낸 획기적인 기술을 세상에 성공적으로 발표할 수 있었다. 아내가 없었다면? 그는 그저 그런 천재로, 빛을 보지 못한 기술자로 남았으리라. 어느 시대마다 한둘은 나오는 비운의 천재정도 되었을까.

  제 능력을 깨달았을 때 사내는 아무것도 쥔 것 없는 이방인이었다. 과거의 기억조차 온전치 않은. 때문에 기댈 것도 믿을 것도 없는. 그럼에도 머릿속에서 번득이는 기술을 세상에 발표하고 싶어서 어딘가의 지면을 빌려 제 연구를 드러냈던 것이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걸 본 사람이 그에게 연락해, 후원 의사를 밝히면서부터 그는 제대로 된 천재가 되었으니. 그때 만난 사람의 얼굴을 사내는 지금도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다. 자주색의 머리칼에 물빛 눈. 조각상처럼 기품 있는 인상.

  [히미카라고 불러요.]

  사내와 마주앉으며 저를 소개할 때 입가에 걸치던 웃음도.

  그 사람은 젊고 영민한 여자였는데, 사내가 쥐지 못한 모든 것을 안고 있었다. 얕게 보자면 연구비로 사용할 수 있을 막대한 재산부터, 좀 더 넓히자면 대단한 인맥과 미래를 보는 눈까지도. 그러니 그녀가 사내의 연구를 보자마자 후원자가 되겠다고 약속한 것과, ‘교제를 요구한 것도 미래에의 투자였던 셈이다. 다르게 말하면, 사내가 그녀의 선택을 받았다고 해야 할 터다. 그녀가 바라는 미래를 만들 사람으로.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결혼이라는 법적인 결합은, 몇 번을 곱씹어봐도 사내를 묶어두기 위한 장치였다. 그는 제 재능을 알아본 후원자에게 미래를 그릴 도구가 된 것이다. 그 사실은 사내에게 줄곧 묘한 자부심을 안겼다. 그는 그 뛰어난 사람에게 선택받았고, 능력을 입증해 보였다. 그녀의 선택이 옳았음을, 회사의 성공으로, 존경받는 연구자가 되는 것으로 확실하게 보였다. 신의 선택을 받은 사제가 된 기분이었다.

  거기까지만 머물렀다면, <아내>라는 이름을 쓴 <스카우터>의 선택에 감사하고 살기만 했다면. 그랬다면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의 삶만이 아니라 세상 곳곳의 미래가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다. 아내에게서 뛰쳐나오면서 그는 죄를 저지르기 시작했고, 끝내는 침략전쟁의 주범이 되었으니. 그가 짓밟은 나라의 민간인, 그의 손에 침략군이 된 어린 학생들, 그리고 아비를 마냥 동경하던 어린 아들까지. 그의 죄에 삶이 바뀌어버린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 사내는 자신에게 그런 힘을 쥐게 해준 이가 자신의 종말을 결정짓는 게 합당하다고 판단했다. 그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만든 자. 그에게 세상의 미래마저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을 심어준 사람. 그의 아내. 그를 세상에 끌어낸 사람이 그를 세상에서 격리하고 처벌하는 게 옳았다. 그것은 신이 타락한 인간을 처벌하는 방식과 같았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아비의 뜻을 전해줘야 하는데. 아내를 불러와줘야 하는데. 증오하는 아비를 심판할 자를 집에서 끌어내어, 세상의 죄인 앞에 세워야 하는데.

  그렇게 동화의 결말을 써야 하는데.

  아내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시설에 틀어박혀 지내던 어느 날. 사내는 과거의 일을 꿈으로 꾸었다. 침략전쟁의 막바지에 실행하려고 했던, 신세계로 방주를 이끌고 가려 했던 일이었다. 신세계를 가꿀 인재를 가득 채운 채 방주를 가동하던 그는 성공 직전에 처참한 실패를 맞닥뜨렸다. 가득한 연료로도 방주는 제대로 가동되지 않더니, 결국 그의 희망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정예병에게 포위당한 채 최후의 발악을 하려던 때. 아내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발악은 필요 없다는 말은 지나치게 상냥해서 사내는 눈을 떴고, 시설의 봉사자에게서 면회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 저를 찾아왔다는 말에 사내는 아무런 감흥 없이 면회실로 향했다. 상대야 뻔하다.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를 이용해먹을 인간도 아닌. 유효기간이 지난 감정을 다 쏟아내지 못해 아비를 찾는 아들일 게 분명했다. 아들을 만나도 해야 할 말은 이미 수없이 반복해온 요구뿐인데. 이번에야말로 아내를 꼭 불러달라고 말하겠다 다짐하고 면회실에 들어가 기다리던 때. 사내는 익숙한 향내를 맡았다. 점점 짙어지는 향내는, 그의 기억에 너무나 깊게 뿌리내린 사람의 향내였고. 혹시나 하는 마음을 꺼내보기도 전에, 향의 주인이 나타났다.

  “오랜만이네요, 아카바 레오.”

  귀에 익은 목소리는 사내가 짐작한 그 사람의 것. 그가 내내 찾아왔던 사람은, 아내는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우아하게 그 앞에 섰다.

 

*

 

  “그동안 계속 찾았다면서요.”

  맞은편에 앉은 아내는 부드러운 웃음을 띤 얼굴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사내는 투명한 막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상대가 아내라는 게 쉽게 믿기지 않았다. 얼마나 자주 불렀던가. 한편으로는 얼마나 자주 그렸던가. 애원에도 기원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사람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를 찾아오다니.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레이지가 전해주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아뇨. 말해줬어요. 내가 응하지 않았을 뿐이죠.”

  목소리에서는 자신을 팽개친 도구, 혹은 남편에 대한 분노는 묻어나오지 않았다. 기억에 남은 것과 똑같이 평온해 오히려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남편 앞에 앉은 것인지.

  “그럼 이번엔 왜 응했지요?”

  아내는 그에게 아내보다는 스카우터였고, 배우자보다는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아니, 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경영 전반을 맡는 것으로 그의 회사를 키워준 진짜 공신이었다. 거기에 결혼 이전에 후원자 대 후원 대상으로 만났던 시간 때문인지, 사내는 아내에게 절반쯤은 경어를 쓰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

  “아카바 레오의 처분에 관여할 수 있게 되어서요. 처분을 기다리느라 지루했죠?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난 이미 당신의 처분을 결정했거든요.”

  손뼉을 짝짝. 치는 아내에, 사내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아내의 저런 태도가 좋았다. 저렇게 감정적인 동요 없이 남편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확실한 종말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을 읽는다니까. 내가 당신에게 뭘 기대하고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뻔하니까요. 난 과거의 아카바 레오를 기억하니까. 그 남자는 동화를 좋아했지요. 그러니까, 바람직한 결말이 나는 이야기를요.”

  “그럼 들어봅시다. 당신이 가져온 처분. 이런 죄인에겐 어떤 처벌이 적합하지?”

  무엇이든 사내는 조용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침략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삼키려고 했던 사내에게,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던 사내에게 거부할 권리는 없다. 설령 있다 해도 행사할 생각은 없었다. ‘악마의 심판이라는 멋진 극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전쟁을 벌일 때까지만 해도 사내는 자신이 일으킨 일이 성전이라도 되는 줄 알았으나 돌아보니 결국은 추한 폭력의 극단일 뿐. 악인은 악인으로 퇴장하면 그만이었고 그 과정이 극적이라면 더 좋다. 아내의 말대로 그는 바람직한 결말의 이야기를 좋아했으니.

  사내가 제법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데도 아내는 물빛 눈으로 남편을, 끔찍한 죄인을 한동안 담을 뿐이었다. 보드라운 입술은 빠르게 열리지 않았다. 그럴 때 그녀의 눈길은 꼭, 표본을 보는 연구자 같았다. 이제 사내는 자신이 아내 앞에서 표본 정도의 가치나 가지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서두를 필요 없어요. 이 시간을 충분히 즐기는 게 좋을 거랍니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흘러나온 말은, 무가치한 존재를 향한 것이라고는 지나치게 자비로웠다. 눈앞의 상대가 한때는 남편이었기 때문에? 아니면 아들의 아비였기 때문에? 그게 아니면, 그녀가 선택했던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우스워서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난 두려워할 게 없어요. 최악의 처분이라 해봤자…….”

  “편리하게 생각하는 건 당신의 나쁜 버릇이죠. 당신이 가시관을 쓴 성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래서 죽음이라도 당장 짊어지고 편해질 줄 아는 모양인데. 그런 처분은 없어요. ‘내가허락하지 않고요.”

  “단호하군. 난 이제 당신에게 가치가 없는 존재인 건 맞지만.”

  “정말로 무엇이든 짊어질 자신이 있다면, 그렇게 의연한 체 하지 않아요. 아직도 뭔가, 헛된 희망을 품는 모양이네요.”

  아내의 긴 손가락이, 사내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은 투명막을 쓸었다. 그녀의 손이 닿은 부분 너머로 비치는 건 사내의 뺨. 막이 없었다면 그녀는 남편의 뺨을 쓸어주었을 것이다. 그 메마른 친절이야말로 사내에게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아내는 이제 확실하게, 그라는 남자를 포기했다고. 곧 죽을 동물을 쓸어주듯, 완전히 버릴 존재에게 의미 없는 친절을 보여줄 뿐이라고.

  “……여기에서 지내며, 당신이 내 목을 조르는 꿈을 꿨어. 히미카.”

  “꿈속의 나는 현실보다 열 배는 더 자비로웠군요. 당신의 일에 나서주기도 하고.”

  “목을 조르진 않아도 내 운명을 결정지으러 온 것 아닌가? 예지몽이었던 셈이지. 지금 날 보는 당신 눈길은 도살장에 끌려가기 직전의 가축을 보는 것 같아요.”

  “당신은 내 앞에서 희생 제물처럼 굴고요. 레오.”

  “그 모습이 역겹겠지. 그럼 내가 정신을 차리도록말해보지 그래요. 도대체 무슨 처분이길래 이 시간을 즐기라고 말하는지. 나에게 말해주는 걸 자꾸만 미루는지.”

  사내도 제 손가락을 막에 얹으며 물었다. 다음 순간 그의 손가락도 아내의 뺨이 있는 자리를 쓸었다. 단순히 아내를 흉내 낸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아내의 뺨을 쓸어보고 싶었는지는 그조차 알 길이 없다.

  “나는 별에 손을 뻗던 남자의 꿈을 꿨어요.”

  그럼에도 닫혀있던 아내의 입술은 한참이나 지나서 열렸다. 그녀의 말은 부부에게 너무나 익숙했던 비유를 담고 있어서, 사내는 말을 듣자마자 움찔했다.

  “내가 믿었던 어떤 남자의 꿈을요.”

  ‘그 남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아내가 천천히 흘리는 말에서, 낡은 비유에서 사내는 과거의 어느 순간을 떠올린다. 그들이 부부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묶어두기 전. 사내가 그저 순진한 연구자였던 시절. 그 순진한 연구자를 후원하기로 결심한 어느 여자가, 자신이 선택한 남자를 만나던 때. 그때 사내는 자신의 연구를 여자 앞에서 설명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열심히. 그러나 그 시점에 사내의 연구는 지원금도 지원 시설도 없어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사내는 말하자면, 설계도만 가지고 있는 상태였는데, 설계도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한참이고 설명하다가 사내는 스스로 힘이 빠지고 말았다. 미안해요, 히미카. 이런 이야기, 밖에서 하면 모두가 헛된 생각에서 벗어나라 하겠지요. 여자가 사내의 주장을 허황된 말로 치부하기도 전에, 사내는 지레 자신의 연구를 탓했다. 그동안 제가 쌓아왔던 것을 몽상의 결과물처럼 취급하고는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것으로 정말 내가 꿈꾸는 단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거의 눈물을 쏟는 것 이상으로 깊은 절망이 그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히미카. 당신이 판단해줘요. , 몽상가인가요?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면서 시간도 지원도 헛되이 쓰는 인간인가요? 그렇다고 말한다면.]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포기할게요. 말을 마치고는 여자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후원자에게 연구의 결말과 연구자로서의 삶을 지속할지 여부를 결정지어달라, 요구했던 것이다. 그때 여자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고.

  [당신은 날 과소평가하는군요. 난 몽상가와 별을 찾는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아요. 몽상가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꿈에 빠져드는 도피자죠. 하지만 세상엔, 언뜻 몽상가처럼 보여도 실제론 같은 것에 손을 뻗는 사람이 있답니다. 인간으로서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것을 추구하면서, 삶을 그에 바칠 수 있는 사람이요.]

  그때 여자의 목소리는 더없이 상냥해, 사내는 꼭 꿈결에 들은 것처럼 느껴졌다. 예언자의 음성을. 인간을 사자(使者)로 삼아 세상에 제 뜻을 펼치던 신의 목소리를.

  [레오, 별에 손을 뻗어요.]

  [추락할 텐데요?]

  [내가 천상으로의 사다리를 만들어줄게요. 당신은 그 사다리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돼요.]

  여자의 손은 연구자의 뺨을 쓸었고 그녀의 팔은 눈물이 흐를 뻔한 연구자의 얼굴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레오. 나를 믿어요. 사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달콤했던 문장이었다. 동시에 그의 꿈을 용인해준 문장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파트너가 되고, 부부가 되고, 아들의 부모가 되고

  “꿈에서 그 남자는 어땠죠?”

  그러다 결국, 사내의 이탈로 이렇게 건조한 사이가 되어 면회실에 함께 앉아있다. 죄인과 심판자로.

  “별의 존재를 의심하더군요. 자기가 올라탄 사다리를 내려다보며 지상의 반짝임을 돌아보고요. 난 그 사람이 계속 하늘을 보길 바랐어요. 별빛을 눈에 담으며, 계속 별을 사랑하길 바랐는데.”

  “그랬다면 결말은 하나뿐이었을 텐데.”

  사내는 그 남자의 결말을 안다. 별에 손을 뻗다가 함부로 지상을 돌아보고, 의미 없는 빛을 탐한 결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별에 손을 뻗은 남자는, 한때 아내가 선택한 남자였고 한때는 그의 아들의 아비였으니. 세상 사람들의 동경을 받았던 연구자이자, 세계적인 대기업의 창업주는 자신의 기술을 전쟁에 활용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의 세계를 열어줄 수 있었을 그의 힘은 절망만을 만들었다. 이제 와서 타락의 이유를 짚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어차피 그만이 아는 사욕이었고, 이뤄져선 안 될 추악한 마음이었다.

  이제 그가 기억해야 할 것은, 결말뿐.

  “, 사다리에서 발을 떼다 추락했어요. 꽤 높이 올라왔었으니 추락하는 속도도 빨랐겠죠.”

  “당신이 마련해준 사다리였는데.”

  “이젠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될 거랍니다. 내가 말했죠, 이 시간을 충분히 즐기는 게 좋을 거라고. 난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감상에 젖을 시간을 준 거예요.”

  “당신은 내 심판자지만, 내가 당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할 힘까진 쥐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나요?”

  미지근한 물음이었다. 그렇게 물으며 물빛 눈 가득 사내를 담아주는 아내는 꼭 어리석은 인간을 보는 신을 연상시켰다. . 저 사람이라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무기를 쥐고 있을 텐데. 저 사람의 선언이 허풍일 리 없는데. 사내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아내의 입술은 다시 열렸다.

  “처분은 간단해요. 당신의 기술로 망가뜨린 세계를 복구하게 하는 것이 기본. 다른 사람을 투입하려 했지만, 당신의 기술이 꼭 필요한 모양이더군요. 유감스럽게도.”

  “이것만일 리가 없을 거야. 무슨 조건이 붙었죠? 아니면, 그것 외에 어떤 처분이 더 있는 거지?”

  “, 조건이 하나 붙었어요. 이건 내가 추가한 조건이죠. 아카바 레오에게서, 그 자가 세상의 희망이었던 때의 기억은 전부 지우도록 한다. LDS의 기억조작 기술로. 세상에 그만큼의 해를 끼쳤다면, 그런 과거를 기억할 필요 없어요. 죄의 기억만 안고 살도록 하세요. 그게 당신을 평생 따라다닐 거랍니다. 아니면 전부 지우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안 돼. 예전의 기억을 지워버리면…….”

  “그래요, 당신의 삶에서 나와 레이지는 지워질 겁니다. 필요 없잖아요?”

  말을 마친 아내는 의자에서 일어나 면회실의 문 쪽으로 곧장 향했다. 이제는 더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앞으로 감상에 젖을 수 없게 되리란 이야기가, 아내를 돌아보는 것도 불가능하리란 이야기가 사내의 머리를 때렸다. 그녀가 면회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버리면, 이제 사내는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게 된다. 다시는.

  “제발, 히미카. 당신의 기억만은 남겨줘. 앞으로는 별을 계속 바라볼 테니……당신이란 별을 기억하도록, 제발.”

  다급한 말은 아내가 막 문을 열던 때 그녀의 등에 꽂혔다. 아내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당신의 별이었던 적이 없어요. 당신은 이제 지상의 죄밖에 볼 수 없게 되었고요. 아카바 레오, 과거의 내 판단이 틀렸어요. 결국 그 남자는, 몽상가가 되었군요. 그것도 모두를 해치려 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내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내의 심판자는, 그를 발굴해낸 스카우터는, 그의 능력을 인정했던 후원자는. 그렇게 그를 떠났다. 하필, 사내의 눈에 새겨진 아내의 마지막 모습은 뒷모습이었다. 그의 삶에서 퇴장하길 택한 아내는 다시는 그를 정면에서 봐주지 않을 텐데.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토+슌] 괴물의 그림자  (0) 2021.12.31
[사장슌ts] 계약은 신중하게  (0) 2021.11.30
[사장슌] 악령의 밤 일시동맹  (0) 2021.10.31
[자크+레이] 무너지는 갑판에서  (0) 2021.07.26
[유리] 괴물의 온실  (0) 2021.07.10
Posted by 현소야 :

[유토+슌] 괴물의 그림자

2021. 12. 31. 23:25 from 02

 

  “잠들면 안 돼. . 잠들지 않기로 약속해.”

  “왜 내가 잠들 거라 생각해? 하트랜드의 하늘은 언제나 우중충하다지만 아직 밤이 되지 않았단 것쯤 나도 알아. 걱정도 많다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 눈꺼풀이 닫히고 있잖아. 잠들면 나도 루리도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여기에 없는 루리까지 끌어오는 걸 보니 내가 정말 걱정되는 모양이지. 루리가 여기 있었다면 자기 핑계 대지 말라고 먼저 말했을걸. 걱정, 안 해도 돼. 사실 조금 졸리긴 하지만 그뿐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졸린 게 문제야. 널 깨우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되는 거라고, . ,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상처가 꽤 깊어서 그렇지. 지금까지 무모한 일을 벌이던 널 업고, 둘러메고 온 것도 여러 번이지만 이렇게나 네 몸이 축 처진 때가 없었어. 이대로 의식을 잃으면 위험하니까, 내 말에 집중해. 절대 잠에 떨어지면 안 돼.”

  “……이것 봐, 겁이 많지. 지금까지 아카데미아 놈들에게 당한 사람들은 루리를 빼고 전부 카드화당했잖아. 루리조차 납치되었고. 부상을 입고 잘못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지혈도 마쳐놓고 뭘 겁내. 쿠로사키 슌이 지금까지 너에게 돌아오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피를 뒤집어쓰고도, 옷이 너덜너덜해져서도. 매일 돌아오지 않았나?”

  “그러니 네가 첫 번째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란 뜻일 텐데. 우리 레지스탕스에 제대로 된 치료가 가능한 사람이 아무도 없단 건 너도 알잖아. 지혈만으론 안심할 수 없어. 네 눈이 자꾸 감길 것 같단 말야. 그렇게 감겨서, 그대로 의식을 잃고 내가 깨울 수 없게 되어서…….”

  “평소엔 어른스럽게 굴어서 정신연령은 내 또래인 줄 알았더니. 순 겁쟁이였군, 유토도. 이해해. 아직 아카데미아 디스크 분석을 끝내지 못했는데 카드화당하는 이들은 늘어만 가지. 루리도 없지. ‘유일무이한 친우에게 심적으로 더 기대게 된단 거 아냐.”

  “몸 움직이지 마. 상처 벌어질지도 몰라. 지금 내 모습을 어떻게 생각해도 좋으니, . 잠들지 않기로 약속해. 아직까지 제대로 약속하지 않았어. 자꾸 제대로 된 답을 피하는 건 비겁한 태도 아닌가? 버틸 자신이 없는 거라면 말 빙빙 돌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힘들어서, 이대로 의식을 놓고 싶다고.”

  “알겠어. 알겠다고. 약속해, 잠들지 않기로.”

  “눈 감지 마. 방금도 눈이 반쯤 감겼어.”

  “난 이미 약속했지. 그럼 이제부터는 네 몫 아닌가? 네가 정말로 내가 잠들지 않길 바란다면, 의식을 잃지 않도록 하려 한다면……어떻게든 내가 정신을 유지하도록 도와줘야지. 물을 뿌려서건 부상 부위를 쑤셔서건. 네 힘으로 날 재우지 않고 있어봐. 유토. <네 목숨은 네게 맡긴다.>고 칠 테니까. 너는 그런 류의 대사를 좋아하지 않나?”

  “자리를 뜨면 눈을 감아버리겠지. 상처를 들쑤시면 또 피가 날 테고. 방법은 하나뿐일 거야. 네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의식을 놓지 않도록 끝없이 말을 걸기.”

  “웬일이야. 내가 아는 유토는 그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쩌겠어. 널 재울 수는 없으니 이야기를 쥐어짜내서라도 말을 걸어야지. 내가 말을 걸면, 그대로 듣고 있으면 안 돼. 어떻게든 답을 하는 거다, . 너도 노력하고 있단 걸 보여줘. 의식을 잃지 않으려, 버티려고 노력한단 걸 말이야.”

  “루리가 없어지고 나선 잔소리가 너무 늘었어. 형님처럼 굴긴.”

  “네 탓이기도 할 텐데. 네가 그렇게 아무렇게나 몸을 던지고 다니지 않았다면 나도 네 일에 간섭하지 않았어. 레지스탕스 쿠로사키 슌을 믿지만, 내 친우는 불사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알지. 넌 내일이 없는 것처럼 싸우고, 스스로를 너무 쉽게 내던지잖아. 이전에 말했듯이, 나는 너희 남매를 다 잃고 싶지 않아.”

  “잃지 않았어. 망할. 왜 또 약한 소리야? 루리는 납치당한 거지 잘못된 게 아니라니까! 아카데미아에 가서 루리를 찾기만 하면 되는데, 왜 잃기라도 한 것처럼 말해?”

  “상처 벌어지니까 움직이지 마. 흥분하지도 말고. 실언이었으니 조금 전 말은 잊어줘. 그래, 루리는 아직우리가 찾지 못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네가 더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아카데미아로 향하기 전에, 루리를 찾으러 가기 전에 네가 먼저 쓰러지면 안 된다고. 루리를 구하러 가는 길에 오빠인 네가 빠져서야 되겠어? 그러니까 제발…….”

  “……디스크 분석은 곧 끝나. 아카데미아의 카드화 기능에 대항할 길을 찾아내기 전까지, 우리는 버티지 않으면 안 돼. 그러니 가능한 모든 싸움에 뛰어들 수밖에.”

  “걸핏하면 널 미끼로 삼고 있으니 문제지. 네 무기인 RR은 일대다 특화의 덱이라지만 승기를 잡을 때까지 버티지 못한다면 집중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건 네 쪽…….”

  “루리가 이 자리에 없는 게 다행이군. 너도 루리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을 테니까.”

  “루리가 있었다면 오빠의 무모함을 먼저 지적했을 텐데?”

  “이런 소모적인 이야기, 그만하지 그래. 어차피 부상은 입었고, 다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으니.”

  “급하게 말을 돌리는 것 같아서 내키진 않지만, 그래. 지금 우리가 계속 말을 주고받는 목적은 서로를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지. 널 계속 깨워두기 위해서니까, 화제는 바꾸는 게 좋겠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지금 상황 따위 잊을 정도의 밝은 이야기? 네가 몰랐던 스페이드교의 소문? 그게 아니면.”

  “그동안 쿠로사키 슌이 유토에게 궁금했던 것은 어때.”

  “그런 게 있었어? 생각도 못 했는데.”

  “물론 있었지. 스페이드교에서 만났을 때부터 쭉 머리에 넣어두었던 의문 말이야.”

  “뭐였는지 말해봐. 남들 앞에선 말하고 싶지 않은, 대단한 비밀이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여기는 우리 둘밖에 없고, 기지로는 네가 좀 더 안정되었을 때 갈 생각이니까.”

  “내가 부상을 입었다고 평소답지 않게 친절한데? 기회를 놓치긴 싫으니 지금 물어야겠어. 내가 궁금했던 건 이거야. 왜 스페이드교에서 처음 만난 유토는, 바로 그 첫날부터 이미 나를 알고 있었던 체 쿠로사키 슌을 친근하게 대해주었을까?”

  “잠깐만, . 우리가 정말로 그날 처음 봤다고 생각해온 거야? 지금까지 그렇게 믿어왔어?”

  “뭐야, 그 반응은. 꼭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 우리는 그때 처음 만난 게 아냐. 그보다 몇 년은 더 전에 만났지. 난 옛 일이라 일부러 안 꺼내는 줄 알았는데, 아예 기억을 못 할 줄은.”

  “몇 년은 더 전이라고? 어릴 땐 루리를 돌보느라 거의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 날 닮은 사람을 본 게 아니고?”

  “쿠로사키 슌과 똑같이 생겼으면서, 똑같이 RR이란 덱을 쓰고, 나와의 나이 차이가 지금 너와 내 나이 차이와 같은 사람이 하트랜드에 또 있을 거라 생각해?”

  “이상한데. 난 전혀 기억이……날 재우지 않으려고 방금 만들어낸 이야기는 아니고?”

  “마음대로 생각해. 의심한다고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내 기억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어. 쿠로사키 슌을 처음으로 본 때. 물론 그때는 네 이름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좋아, 설명해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면 듣고 바로 흘려버릴 테니.”

  “스페이드교에서 마주친 첫날, 네가 내 드래곤에 관심을 보였던 거 기억해? 다크 리벨리온 엑시즈 드래곤을 보자마자 반가워했지. ‘너에게 제법 어울리는 드래곤이야라 말하면서. 몇 살 어렸을 때의 너도 그런 반응을 보였어. 그러니까…….”

  “듀얼리스트 세계에선 덱과 사용자가, 몬스터와 사용자가 파트너처럼 깊게 얽히는 게 보통 아닌가? 덱과 사용자가 닮아간다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지. 처음 본 때부터 너와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어.”

  “……말은 끝까지 들어줬으면 해. 물론 네가 말한 대로 듀얼리스트와 몬스터는 깊은 유대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지. 그래서 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 난 어릴 때 다크 리벨리온과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어. 기억이 시작된 때부터 가지고 있었으니, 듀얼리스트의 입장에선 특별한 카드인데도.”

  “이유는?”

  “지금 생각하면 상상력이 풍부했던 어린 날의 망상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때의 난 다크 리벨리온의 <그림자>를 보곤 했거든. 다크 리벨리온을 불러낼 때마다 그 몸체보다 더 큰 실루엣이 허공에비쳤어. 녀석의 어금니가, 내 듀얼상대의 몸을 정통으로 꿰뚫거나 발톱을 휘두르는 실루엣이 보였지. 지금에야 아카데미아라는 <병사>를 상대해야 한다지만, 그때는 기껏해야 내 또래의 꼬마들과 맞설 뿐이었는데도, 다크 리벨리온은 매번 내 상대를 삼킬 것처럼 굴었던 거야.”

  “녀석이 그렇게나 사나웠다고?”

  “내 드래곤이긴 하지만 냉정하게 봐서, 한 번도 사납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말해야겠군. 예전과 지금의 차이가 있다면 내가 자랄수록 다크 리벨리온이 덜 위협적으로 비친다는 것 정도일까. 발톱을 숨기고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삼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대로 말하면 어렸을 땐 다크 리벨리온이 사나운 면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는 거고. 아마 그 결과가, 내가 본 <그림자>였겠지. 내 드래곤의 난폭하고 공격적인 면에 대한, 어린 날의…….”

  “두려움의 투영?”

  “그럴지도. 하지만 중요한 건, . 내가 보았던 실루엣이 진짜냐 망상이냐가 아냐. 다크 리벨리온을 꺼낼 때마다, 누군가와 몬스터를 두고 듀얼을 할 때마다. 때로는 단순히 다크 리벨리온 카드를 든 때조차. 나와 듀얼로어울리려는 이들만 있으면 놈이 사납게 굴었다는 거지. <그림자>가 비칠 때면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같이 들리곤 했어. 실루엣을 보는 것도, 위협한답시고 내는 소리를 듣는 것도 나뿐이었던 것 같지만, 그때의 나는 어렸기 때문에 전부 감당하긴 어려웠고.”

  “그래서, 다크 리벨리온이 상대를 위협할 때마다 어떻게 반응했는데? 듀얼을 포기했나?”

  “어쩌면.”

  “모호한 답변이야. 제대로 말해주지 그래.”

  “처음엔 당혹스러웠던 것이 반복될수록 공포로 바뀌어갔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 지금도 봐, 열일곱 살인 너도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어른들이 그런 말을 믿어주기야 하겠어.”

  “제대로 맞서진 못했다는 뜻이군.”

  “유감스럽게도. 날이 갈수록 공포는 짙어졌으니까. 언젠가부턴 다크 리벨리온 소환 조건을 충족했는데도 소환하기가 쉽지 않았어.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지는 걸 느끼면서 겨우 소환해냈다가 효과를 쓰지도 못하고 듀얼에서 패하기도 했던가. ‘나의드래곤인 건 분명한데, 놓고 싶지도 않은 카드인데 사용자인 내가 오히려 다크 리벨리온에 먹히는 것만 같던 나날이었지. , 드디어 쿠로사키 슌이 등장할 차례야. 우리의 진짜첫 만남에 대해 들을 준비 됐어?”

  “내 배역은 뭐였지? 유토와 함께 다크 리벨리온에 겁을 먹는 친구인가?”

  “그랬다면 내가 그 후 몇 년이나 지나도록 너를 기억했겠어? 다크 리벨리온을 겁내는 아이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는데. 다크 리벨리온도 내가 저를 두려워한단 걸 알았는지 자꾸만 사나워져서, 너를 만나기 직전엔 결국 나와 듀얼을 하던 아이들조차 그 난폭한 모습에 겁을 먹고 도망치더라고. 그래서……그날엔, 너를 처음 만난 날엔 어디 창고 같은 곳의 구석에 혼자 틀어박혀 있었어. 다크 리벨리온을 꺼내둔 채로. 녀석의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혼자 있고 싶었던 때일 텐데 내가 눈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군.”

  “그러게. 정말이지, 그때도 넌 사람을 놀라게 했단 말이야. 문을 조심스레 여는 것도 아니고, 쳐들어가겠단 마음을 먹기라도 한 것처럼 벌컥 열었지. 가뜩이나 예민하던 때 예고도 없이 찾아든 손님이라. 달가울 리가 없었어. 누가 들어온 거야? 하는 짜증이 먼저 치밀었지. 그런데…….”

  “그런데?”

  “다크 리벨리온의 그림자. 그때까지 나를 괴롭혀온 그 실루엣이 불청객이 온 창고 입구 쪽으로 향하는 게 보이더군. 순간 숨이 막혔어. 그 전까지 다크 리벨리온이 날뛴 건 바깥에서였지만, 그때는 좁은 창고 안이었잖아. 거기다 불청객이 한 무리일 리도 없고. 이번에야말로 내 드래곤이 누군가를 덮칠 것만 같았어. 내가 혼자 숨어든 틈을 타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때. 안 돼. 위험해. 불청객에게, 희생자가 될지도 모를 이에게 경고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 거야.”

  “당연히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네 쪽으로 가까워졌을 테고.”

  “……발걸음 소리는 점점 커지기만 했어. 다크 리벨리온의 실루엣은 위협적으로 꿈틀거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때 난 나보다 서너 살쯤 많아 보이는 남자아이를 발견했지.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한 거야. 그제야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 말은 도망쳐가 아니었어. ‘왜 여기 온 거야?’였던가. 잔뜩 뾰족해져선 엉뚱한 말을 흘렸지.”

  “그때도 낯가림은 상당했던 모양이야.”

  “시끄러워.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우니까 굳이 말하지 말고 그냥 얌전히 들어. 당연히, 그 남자애는 눈을 둥그렇게 떴어. 무슨 엉뚱한 말이야, 갑자기? 란 말이 튀어나올 차례였지. 그런데 말야. 그 애가 꺼낸 첫마디는 그런 게 아니었어. 내 귀에 박힌 건 의문문이 아니라 감탄이었거든. 우와, 네 드래곤 정말 멋지다!이상하지 않아? 내 또래 애들은 물론, 나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이나 많은 애들도 겁먹고 도망치던 드래곤을, 그것도 잔뜩 난폭해진 상태의 드래곤을 그렇게 본다는 게.”

  “그때의 네 반응이 상상이 가는걸. 분명 멍청한 얼굴을 하고서…….”

  “웃지 마, . 그렇게 낄낄대면 상처 벌어진다고. 그 녀석은 위험해.라고 답하려던 때, 나는 그 애를 삼킬 듯했던 다크 리벨리온의 실루엣이 변하는 걸 봤어. 성격 급한 그 애가 다크 리벨리온에 손을 뻗었는데도. 다크 리벨리온의 어금니는 그 애 쪽으로 향하지 않았어. 발톱은 내렸고, 무시무시하게 커졌던 실루엣은 보통 크기로 돌아갔지. 보통의 드래곤처럼. 그 모습을 확인하자, 무엇 때문인지 다리에 힘이 풀렸어. 주저앉은 나를 보고, 그 애는 제 손을 잡고 일어나라는 듯 손을 내밀더라고. 뭐야, 저런 멋진 드래곤을 가지고 있으면서 바보같이 주저앉기나 하고. 명랑한 목소리였어. 우습게도 그때, 내 두려움이 아무것도 아니었단 생각이 들었지.”

  “듣고 보니 내 배역이 나름 괜찮은 배역이었던 것 같아. 단역은 아니고 조연쯤은 된 모양이네.”

  “그냥 조연이겠어? 그 시기의 나에겐 처음으로, 다크 리벨리온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해준 특별한 조연이었는데. 왜 다크 리벨리온이 날뛰는 걸 멈췄을까? 왜 내 공포의 투영이었을지도 모를 그림자가 그 애와 마주한 때는 얌전해진 걸까. 지금도 답은 모르겠지만, 그때가 내 삶에서 전환점이 된 것은 분명해. 그날 이후로 난 더는 다크 리벨리온의 실루엣에 시달리지 않았으니까.”

  “그날로 공포의 환상에서 벗어난 거겠지. 내가, 아니, 진짜 나인진 모르겠지만. 그 애가 너무 당당하게 다크 리벨리온에 접근해서 그만 겁을 줄 타이밍을 놓친 거 아닐까?”

  “글쎄. 그런 우스운 이유여도 좋고, 네가 내 드래곤과 상성이 맞았다는 비밀이 있어도 좋겠지. 듀얼학원에서 만나 너와 제대로 가까워지고는 네가 편한 사람이어서 그랬단 생각이 들지만. 이야기는 아직 남아있으니, ‘그날의첫 만남으로 돌아가자. 그 애의 손을 잡고 일어나자, 그래서, 저 드래곤 이름이 뭔데?그 애가 물었어.

  「다크 리벨리온 엑시즈 드래곤.」  나도 모르게 답했지. 내 손을 잡아주느라 바짝 가까이 온 그 애의 눈이 꼭, TV에서 본 맹금류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어. 그리고 그 애는…….

  「너랑 어울리는 드래곤이네.그렇게 말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해.”

  “스페이드교에서 만났을 때와 비슷한 말을 한 모양이지. .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긴 해. 다크 리벨리온만큼 너에게 어울리는 드래곤은 지금껏 본 적이 없으니.”

  “그러니 스페이드교에서 마주친 첫날, 내가 얼마나 반가웠겠어. ,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구나. 일부러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그런 생각까지 했더니.”

  “사실 지금이라고 기억이 나는 건 아냐. 그래도, 내 판단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만은 다행스럽게 느껴져. 그만큼 너도, 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뜻일 테니까.”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조금 서운하지만, 그래. 그때는 어렸고, 이제 우리 나이는 사소한 것을 잊지 않을 수 있는 나이니까 내 기억의 나머지를 다 끌어내서 이야기해줄게.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다크 리벨리온의 그림자에 시달린 이후론 오랜만에 한 점 불안도 없이 그 애에게 말했어. 네 덱도 궁금해. 덱을 가져왔다면 듀얼하지 않을래? 그 애는 말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덱케이스와 디스크를 꺼내더라고. 그때 그 애가 꺼낸 덱이 분명히, RR. 레이드 랩터즈였어. 어둠속성 비행야수족 카드로 구성된. 기계 새 카드.”

  “꼬마 유토의 감상이 궁금해. RR을 사용하던 그 애는 어때 보였지?”

  “감상? 간단했어. , 저 애도 자기랑 닮은 덱을 쓰는구나. 그리고 전술이 재미있구나. 친구가 되면 좋을 텐데. 그 정도. 그렇지만 그 애는 오래 머물지 않았어. 듀얼을 마치고는 집에 돌아가야 한다면서 미련 없이 입구로 향하더라고. 그러면서 엉뚱한 말을 하던데. 뭐였더라. 네 그림자, 드래곤 모양을 닮았어.였던가?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모를 말을 한 걸 보면 확실히 쿠로사키 슌이지, 그 애. 넌 요즘도 그러잖아.”

  “그 후로는 못 만났고?”

  “그래. 그땐 오랜만에 즐거운 듀얼을 한 여운 때문에 창고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한동안 혼자 남아있었는데, 그러지 않을 걸 그랬다고 그로부터 몇 달은 후회했어. 그때 본 아이, 이름도 모르고 사는 곳도 정확히 모르는데 근처에서 다시 마주치지 못했으니까. 시간이 좀 흘러서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라 생각하고 슬슬 잊어가려던 때. 듀얼학원 스페이드교에 등록했어. 다음 이야기는 예상이 가겠지. 스페이드교에서 우연히 만난 애가 딱 기억 속의 그 아이와 같았다는 것.”

  “그렇게 두 번째의첫 만남을 하고서 그때야말로 친해지게 되었다는 것. 맞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쩌면, 그래. 너와 만났을지도 몰라. 그래서 다크 리벨리온을 본 때 더 호의적이었을지도 모르지. RR과 다크 리벨리온의 합이 좋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지금 내가 궁금한 건 이거야. 꼬마 유토가 본 그 애는, 친구가 되고 싶었던 그 애는 지금도 너에게 친구로 남아있었으면 하는존재일까? 이 전장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존재일까?”

  “부상을 입더니 마음이 약해지기라도 한 모양이지. 물을 필요 없는 걸 묻는 걸 보면. 어릴 때의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내 드래곤의 난폭한 그림자를, 아니면 드래곤에 대한 내 두려움을 가라앉혔던 그 애는 지금도 내 방패가 되어주고 있지. 유일무이한 친우란 이름을 괜히 꺼냈을 리 없잖아. 그러니 슌. 너는 더더욱 오래 버텨야 해. 내가 버티는 만큼, 내 또래의 레지스탕스가 버티는 만큼. 너도 버텨줘야만 해. 이기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네가 남아있는 쪽이 안심이 돼.”

  “……어리광은. 곧 죽을 사람 보는 것처럼 말하는 것 봐. 그래도 하루쯤은 봐줄게. 어릴 땐 제 드래곤에도 겁을 먹었던 아이였다고 하니까.”

  “그렇게 놀리라고 알려준 게 아니라고. 기억력이 나빠서 나를 몇 년이나 잊고 있었던 주제에. 농담까지 하는 것을 보니 이젠 좀 정신이 든 것 같지만.”

  “그럼 이제 기지로 좀 옮겨주지 그래? 여기에 누워있는 것도 슬슬 지루하단 말이지. 지혈은 진즉 마쳤겠다, 상처는 더 벌어질 것 같지도 않고. 너랑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멀쩡해졌는데. 설마 아직도 겁을 먹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널 부축해서 가는 것도 괜찮겠지만, 조금 전에 기지 쪽으로 연락해뒀어. 혹시 도중에 아카데미아의 공격이 있을지도 모르니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와달라고 했지. 아마 곧 올걸? 강한 놈들이라 안심이야.”

  “애초에 직접 날 데려갈 생각도 없었군. 어째 시간을 너무 끌더라니.”

  “더 안전해졌다 생각하라고, . 널 옮기는 것이야 문제없지만, 부상을 입은 너에게 듀얼을 시키는 일이 일어나선 곤란하다고 판단한 거야. 우선은 몸을 일으키고 기다릴까?”

  “다음번엔 네 말에 속을 생각 없어. 몸을 못 움직일 정도의 부상만 아니면 단신으로 바로 기지로 갈 테니까, 이렇게 사람 귀찮게 만들지 마.”

  “아무래도 좋으니 다쳐 오지나 마. ‘귀찮아진원인은 내가 아니라 네 쪽에 있었으니까.”

  “꼬맹이 때도 이렇게 잔소리가 많았던가?”

  “예전 일처럼 기억에서 지워버리면 되지, 불평이 많아.”

  “이제는 다시 잊지 않아. 두 번이나 잊어버리면 그땐 용서받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 똑똑히 기억할 테니, 잔소리만 좀 줄여줘. 루리가 없으니 루리 몫까지 하는 것 같아.”

  “네 논리대로라면 루리를 되찾기만 해도 잔소리가 반으로 줄지 않겠어. 이대로 오래 버텨서, 아카데미아로 가는 거야.”

  “그리고 루리를 구해내, 다시 원래 우리로 돌아오는 것. 우리의 목적에 충실하잔 뜻이군. 그런 것쯤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아. 난 언제나 준비가 되어있으니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강하게 맞서기나 하라고.”

  “그래. 이제야 안심이야. 복귀 준비해, . 동료들이 왔으니 함께돌아가자. 내일을 위해서.”

Posted by 현소야 :

[사장슌ts] 계약은 신중하게

2021. 11. 30. 23:34 from 02

 

  치솟는 불길이 시야를 메운다. <마녀 처형>이라는 외침과 함께 퍼지기 시작한 불길은, 마녀가 숨어든 숲을 빠르게 태우고 있었다. 마녀를 없애려 지른 불은 마녀를 포함해, 그녀가 택한 종착점마저 잿더미로 만들고 마리라 마녀의 계약자는 마녀의 은신처까지 태우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냉소를 걸친다. 마녀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으나 인간은 마녀를 감당하지 못한다. 인간일 수 없는 존재를 경멸하고 두려워하여, 세상에서 잘라내려 할 뿐. 마녀가 벌였다고 알려진 대부분의 사건이 인간이 빚어낸 재앙이며, 마녀의 마법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신비일 뿐임을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마녀가 인간을 꼬드긴 일은 없다. 마녀의 힘을 탐한 소수의 인간이 마녀에게 접근해 계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다. 인간의 욕심이 마녀를 붙들어왔음은, 지금 병사에 포위된 마녀의 계약자도 자신의 경험으로 입증할 수 있다. 마녀가 뛰어들어간 숲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무장한 전사들을 이끄는 청년이 마녀의 계약자. 오래도록 계획해온 적진에의 침투를 앞둔 청년이 잠시 이곳에 멈춰, <처형>을 지켜보는 건 계약자에 대한 마지막 의리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제가 끌어들인 마녀에 대한.

  그는 마녀에 이끌렸으리라곤 누구도 상상 못 할, 잘 교육받은 도련님이었다. 명문가의 후계자로 태어났으니 평생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으련만, 세상을 위협하는 악인이 나타나자 도련님은 악에 맞서기를 택했다. 정예병을 결성하고 지휘관을 자처한 정의로운 청년, 어쩌면 영웅이 될지도 모를 자. 사람들은 그런 반듯한 인간이 마녀에 이끌렸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젊은 지휘관이 공공연하게 마녀를 데리고 다녔음에도. 마녀를 제 전사처럼 사용했음에도.

  마녀가 지휘관에게 묶이게 된 것도 그가 마녀에게 계약을 요구해서인데도.

  왜 불길하게 마녀를 데리고 다니느냐 물을 때마다 지휘관은 계약을 해버려서, 라고 건조하게 답했는데 사람들은 마녀의 계약자가 정예병의 일원이라 믿는 눈치였다. 지휘관이 마녀를 데려온 시점이 정예병 결성 직전이란 사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왼팔에 수상쩍은 표식이 있다는 것도. 피처럼 붉은 표식이, 마녀가 사용하는 무기마다 새겨진 심볼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도.

  지휘관에게 그 표식을 새겨준 계약자는 지금쯤 에게 둘러싸였으리라. 마녀는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의 외형을 지니고 인간의 육신을 빌린다. 불멸자라고도 볼 수 없다. 마녀가 숨어든 곳으로 향해봤자 지휘관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사람들의 두려움과 증오 탓에 공격당한 후 불길에 갇히는 마녀뿐이다. 지휘관은 눈앞에 그려지는 계약자의 상을 떨쳐내려 애썼다. 마녀가 표정 없는 얼굴로 칼을 맞는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그녀는 인간의 병기로 죽이기 힘들고, 인간의 증오로 망가지지 않으며. 불태워지더라도 마녀의 힘은 유효하고. 마녀의 계약자만이 아는 이야기를 지휘관은 속으로 읊는다. 정예병은 경비를 뚫고 적진에 침투하기 위해 마녀를 인간에게 던져주었다. 그것도 보통의 인간이 아닌, 마녀의 동족을 사냥해온 잔학한 병사에게 내주었으니 사실상 마녀를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지휘관의 선택이었고, 정예병이 택할 수밖에 없는 차악의 길이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경멸받는 패를 버리기.

  [이대로라면 아카데미아에 진입하기 어려워. 랜서즈는 고작 8명이다. 정면돌파가 불가능하니 수를 쓸 수밖에. 필요한 건, 미끼. 누군가가 아카데미아의 집중 타깃이 되어야 한다.]

  진입작전을 실행하기 전 마녀를 따로 부른 지휘관이 건넨 말이었다. 굳이 말을 덧대지 않아도 마녀와 그 계약자는 누가 미끼가 되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길로 지휘관을 떠난 마녀는 무기인 기계 새를 불러냈고, 오래지 않아 적진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쫓기기 시작했다. 침략군이 마녀를 없애려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지휘관과 그 계약자가 마녀를 미끼로 쓰기로 합의한 순간, 마녀는 이런 결말까지 생각했을까? 저를 사냥하려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불길에 휩싸이는 일까지?

그리고 마녀에게 미끼 역을 요구한 지휘관은 이런 것까지 각오했던가?

  “리더, 어서 아카데미아로 가야…….”

  무의미한 생각을 끊은 것은 동료의 목소리였다. 정예병의 희망인 소년은 지휘관을 붙잡다시피 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바로 머리가 차가워진 지휘관은 감상을 걷고 몸을 돌렸다. 마녀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알고 있다.”

  “쿠로사키는 괜찮은 거지?”

  마녀의 이름이 흘러나왔지만 지휘관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건 우리가 지금 신경 쓸 게 아냐.”

  대신 병사가 마녀를 노리는 한, 지휘관과 그가 이끄는 정예병은 적진에 쉽게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마녀를 향한 병사의 공격이 거셀수록, ‘처형이 오래 걸릴수록, 정예병은 안전해진다. 지휘관은 타고나길 영민했고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가장 좋은 길을 택할 줄 알았다. 지금 그가 향해야 할 곳은 마녀가 갇힌 숲이 아닌 적진이었다. 수년 전부터 끌어내리기로 마음먹었던 침략군의 수장을, 당장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계약자를 영영 잃게 되더라도.

  마녀가 마지막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한 덕에 정예병은 큰 방해 없이 적진에 침투할 수 있었다. 무장한 전사들이 침략군 간부를 처리하던 때 지휘관은 적진의 최중심부로 향했다. 침략군의 기지라지만 내부 구조는 이미 훤하게 알고 있어서였다. 그가 선발해낸 정예병에게는 처음 들어오는 곳이었으나 그에게는 이미 수년 전 곳곳을 누볐던 익숙한 장소였으니. 침략군의 수장도, 그 끔찍한 남자가 꾀하는 것도 지휘관에게는 너무도 선명했다. 그는 한때 그 남자를 아비라 불렀고, 그 남자의 야심을 아들로서 엿들었으며

  “지긋지긋하게 따라붙는구나.”

  지금은 저항군의 리더자격으로 침략군의 수장 앞에 섰다. 오랜만에 보는 아비는 부쩍 늙었고 그만큼 초라해 보였다. 세계를 삼키겠다는 야욕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카바의 죄는 아카바가 끊어야 할 테니까.”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너는 너무 감상적이야. 널 내 곁에 세우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지.”

  “그런 걸 바란 적도 없어. 당신과 얽히는 건 수치스럽거든.”

  “그래. 3년 전보단 단단해진 모양이야. 마녀를 버리고 왔더구나. 내가 키운 군사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주고서. 계약자와 함께하는 것보다 아비를 끌어내리는 게 더 끌리더냐? 그래서 너답지 않게 마녀를 미끼로 삼은 거냐?”

  “아카바 레오를 끌어내리려면 그 정도의 각오는 되어있어야지.”

  적진에 들어서기 전이라면 모를까, 일단 침투하기만 하면 그 주변 군사를 빠르게 정리할 수 있을 실력을 가진 이들이 바로 지휘관이 이끌던 전사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소란은 잦아들고, 간부를 인질 삼아 남은 군사를 무장 해제시킬 수 있으리라.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아. 아들은 아비에게 낮게 속삭였다.

  “당신이 가르쳐준 대로 자기 사람을 버리고, 영광을 포기하며 여기까지 왔다. 남은 건 아카바 레오를 처리하는 것뿐.”

  수년간 꿈꿔왔던 일이 이루어지기 직전. 지휘관의 머리를 스치는 것은 기쁨도 감격도 아닌 해방감이었다. 이제 악몽은 끝이야. 지휘관은 소리 없이 중얼거렸고,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다음 순간, 침략군은 패배를 선언했다.

 

*

 

  마녀는 사라진 나라에서 왔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크게 발전한 문명을 자랑했던 나라지만, 침략군이 밀려들면서 그대로 묘지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생명 하나 싹틀 수 없게 된 나라는 지도상에서 지워지고, 역사에서 찢겨나갔다. 마녀는 그 처참한 묘지의 생존자였다. 폐허 어딘가에 내 동료들이 남아있을지 모르니 생존자로선 유일하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겠지만, 살아남은 마녀는 나뿐이었지. 마녀의 계약자는, 언젠가 마녀가 머리칼을 빗으며 흘린 말을 기억한다.

  [왜 네가 최후의 마녀라고 확신하지?]

  [그야, 마녀는 만들어지는거니까. 내 주변 사람들은 마녀로 만들어지지 않았어.]

  [만들어졌다고?]

  [기계를 만들어내는 것과 다를 것 없는데. 재료 몇 개만 있으면 인간도 마녀로 만들 수 있지.]

  [그럼 너도 인간이었단 건가?]

  거기서 마녀는 입술을 닫았다. 부정도 긍정도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마 그 침묵은 긍정의 침묵이었던 것 같다. 전쟁을 끝내고 침략군의 기지에 남은 자료를 챙기던 지휘관은 그녀의 고향에선 단 한 명의 마녀도 없었다는 조사결과를 찾아냈다. 때때로 인간이 마녀로 각성하기도 한다는 전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설에서는 마녀로의 각성이 절망이나 분노 같은 강렬한 감정을 재료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마녀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하면 제법 의미심장한 설정이었다. 마녀는 무덤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왔고, 그녀의 고향을 무덤으로 만든 건 침략군이었으며, 그들이 마녀에게서 앗아간 가장 큰 보물은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었으니.

  먼 이국에 살던 마녀가 지휘관의 영역에 뛰어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침략군에 납치당한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마녀의 고향에 밀려든 침략군이 어느 날 부주의하게 수장의 아들이야기를 흘린 모양이었다. 마녀는 단숨에 국경을 넘어 지휘관이 살던 도시에 왔고, 그가 키우던 학생을 하나하나 습격하기 시작했다. 명백히 지휘관을 유인하기 위한 도발이었다. 그에 응해 <습격범>을 찾아 나섰을 때. 지휘관은 제 나이 또래로 보이는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의 왼쪽 손목엔 사라진 나라의 유물이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여자의 출신지와 목적을 대강 파악했다.

  [나를 찾은 목적은?]

  그럼에도 확신을 얻기 위해 묻자, 딱딱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프로페서, 아카바 레오에게서 동생을 되찾아오는 거다. 프로페서의 아들을 붙잡아두면 협상이 가능하겠지.]

  [단신으로?]

  [보통 사람이라면 안 되겠지만, 이쪽은 마녀야. 저주로 묶어두는 것쯤 가능해.]

  [마녀라.]

  그때까지만 해도 지휘관은, 아니, 정예병 결성을 계획하고 있던 청년은 자신만만했다. 마녀가 망국의 생존자라는 것에 아비의 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한편, 마녀란 신비를 쥐고 싶다는 욕심도 꿈틀거렸다. 청년은 마녀에게 무기를 들고 맞서는 대신, 그녀를 자신의 기지로 끌어들였다. 네 목적을 이룰 수 있게 해주지. 아카바 레오를 처리하고, 동생을 구하는 것 말이다.

  [굳이 네 뜻을 따라줘야 하는 이유는?]

  [네 힘으로도 아카데미아에 침투하는 것까진 가능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네 고향인 엑시즈까지 구하는 건 무리겠지. 나는 완전한 결말을 만들어줄 수 있어. 하트랜드에 남은 아카데미아를 몰아내고, 침략군을 벌하는 것까지 약속하겠단 거야.]

  호기롭게 던진 말을 마녀는 의외로 순순히 받아주었다. 그래. 너는 아카바니까. 한 번 믿어보도록 하지. 건조한 목소리를, 저를 따라오던 마녀의 모습을 청년은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마녀가 묵기로 한 객실에 찾아온 그가 마녀에게 손을 붙잡힌 것도. 바로 다음 순간 마녀가 불러낸 기계 새가 그를 포위한 것도.

  [그래서, 어떻게 증명할 생각이지? 아카바 레이지의 쓸모를?]

  여유롭게 날아든 말에, 청년은 직감했다. 마녀를 단순히 괜찮은 패로 확보해두는 게 아니라, 마녀를 도와주는 체 하는 게 아니라, 그녀와 확실하게 얽혀야 한다는 것을. 그녀가 그를 속박하고 그가 그녀를 속박하지 않는 한, 마녀를 제 곁에 두는 건 불가능하단 것을.

  [내가 너를 가장 위협적인 무기로 만들어줄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정예병을 결성할 계획이야. 네가 오기 전부터 구상해뒀지. 너와 함께 전사를 선발해 아카데미아에 침투시키는 게 내 목표. 네가 엑시즈의 전장에 있었다면 느꼈겠지만, 전투 상황에서는 단신보다는 동료와 함께인 게 낫고 앞뒤 없이 뛰어드는 것보단 지휘관이 있는 게 낫다.]

  [전장에 서지도 않아본 게 아는 체는.]

  [그렇지만 너의, 아니, ‘우리의적을 제대로 아는 건 내 쪽이지. 나와 함께하다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나를 어떻게 해도 좋아. 그러니, 나를 네게 묶어둬.]

  마녀의 족쇄가 있잖아. 계약 말이지. 언제나 판을 쥐고 있는 양 구는 건 청년의 특기였다. 제 목에 칼날이 들어오는 상황이라 해도. 그 뻔뻔한 여유가 우스웠는지, 마녀는 깔깔댔다. 계약해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한단 말이지?

  [좋아. 아카바의 자식을 풀어놓는 건 안심이 되지 않으니, 내게 묶어둬야겠어.]

  말이 끝나자마자 마녀는 청년의 왼쪽 소매를 걷고, 드러낸 팔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렸다. 마녀의 차가운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움찔했던 청년은 이내 자신의 왼쪽 팔에 흔적이 남은 것을 알아차렸다. 마녀의 기계 새에 하나같이 찍혀있던 심볼이었다. 그것도 붉은색. 피를 연상시키는 색채. 이게 계약의 증거인가? 물음을 건네자 바로 답이 돌아왔다.

  [속박의 표식이지. 원래는 먹잇감에 남기는 거야.]

  제법 거친 표현이었으나 청년은 여자가 취하는 포식자 같은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청년이 원하는 것은 유순한 수하가 아니라 위협적인 무기였으므로. 인간 이상의 힘을 지닌 존재를 자신을 담보하여 묶어둘 수 있다면 청년으로선 조금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그날 청년이 제 팔에 남은 표식을 만족스레 눈에 담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로는 청년의 뜻대로 되었다. 청년은 마녀의 힘을 빌려 우수한 전사를 선발했고, 그렇게 결성한 정예병에 마녀를 끼워 전투에 나섰다. 선별된 전사가 지휘관의 인도대로 인간의 싸움을 하면, 마녀는 그 뒤에서 괴물의 싸움을 벌였다. 마녀가 긴 손가락을 지휘하듯 움직이면 그녀의 무기인 기계 새가 일제히 움직였고, 이내 적의 모든 것을 무심하게 쓸어버리는 식이었다. 그럴 때 마녀는 신벌을 내리는 초월자 같기도 했고, 재앙을 품은 괴물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 절반쯤은 맞는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마녀는 욕망으로 타인을 짓밟는 침략군을 벌하듯쓸어버렸고, 마녀가 적군을 덮치는 방식은 언뜻 재앙을 연상시켰으니. 지휘관의 눈엔 마녀가 전자의 모습으로 각인되었지만 아마 적군이 기억하는 마녀는 완벽히 후자의 모습이었으리라. 그것도 마녀의 이름을 달고 다니는 자에, 그들이 짓밟고 온 나라의 생존자이기까지 했으니. 마녀는 침략군의 시각에선 단순히 <끔찍한 마녀>가 아니라 지옥에서 온 유령처럼 비쳤으리라. 그들이 죽이고 그들이 빚어낸, 악몽 같은 괴물.

  그래서일까. 침략군은 각자의 능력으로 무장한 인간의 전사보다 마법을 두른 마녀에게 훨씬 더 공격적으로 굴었다. 몇몇 어리석은 이들은 사악한 마녀를 없애겠다며 그녀에게 겁 없이 덤벼들기도 했다. 일부는 그녀가 망국 출신임을 두고 헌팅게임의 먹잇감이라며 경멸을 내비치기도 했는데, 누구도 마녀의 전의를 꺾지 못했다. 마녀는 제 모든 것을 앗아간 침략군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되레 저에게 쏟아지는 경멸과 두려움을 흡수하여 더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는 듯했다.

  그럼에도 지휘관은 때로 마녀를 걱정했는데 그녀가 꼭 내일이 없는 것처럼 싸우기에 그랬다. 마녀의 육신은 생각보다 쉽게 망가졌고 몸에 걸쳐지는 부상은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으며, 마녀는 자신을 미끼로 쓰는 것을 즐겼다. 몸을 조심하라 말해도 통 듣질 않아서, 부상을 안고 돌아온 마녀를 지휘관이 불러다 굳이 상처를 확인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너는 내게 중요한 무기다. 쿠로사키. 그러니 다쳐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마녀의 마른 등에 새겨진 상처를 훑으며 달랬던 기억이 있다.

  [무기로서 기능만 하면 상관없잖아?]

  [금이 가는 게 싫은 거라면?]

  [걱정할 것 없어, 리더.]

  금이 가는 건 그릇이고 마녀 자체는 아무리 내던져져도 흠집이 나질 않거든. 그러니까 눈앞의 실금 하나하나에 집중하지 말라고. 지휘관의 손길을 떨쳐낸 마녀는 마른 몸을 다시 싸매며 한마디 더 건넸다.

  [그릇이 깨져도 마녀를 묶어놓는 안전장치, 알려줄까?]

  안전장치만 제대로 남아있다면, 부서지더라도, 불태워지더라도 마녀는 유효해. 시라도 읊듯 말하는 마녀에게 지휘관이 답을 조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의 병기에 당하는 걸 두려워하지 마. 그릇은 쉽게 깨질 수밖에 없는 거니까. 안전장치만 있다면 어느 순간에든 마녀는 세상에 뿌리내릴 수 있어. 답을 말해준 마녀는 계약자를 안심시키고 싶은 것인지 안전장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그래, 불태워지더라도.

  그리고 정말 마녀는 불태워졌다 마녀를 감당하지 못하는 군사에게 미끼로 던져졌기 때문에. 지휘관은 아비를 끌어내린 후, 마녀가 마지막으로 향했던 숲에 들어갔다. 처참하게 탄 숲에 남은 것은 괴물의 육신이나 파편이 아닌, 마녀를 덮쳤던 병기뿐. 수 세기는 된 유물인 양 하나같이 녹이 슨 병기는, 마녀가 결국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신비였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정작 그 마녀는 불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유품 한 조각 남기지 못했지만.

  “주변을 다 수색했는데도 건진 게 없다고 해.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함께 들어온 동료, 정예병의 일원이었던 소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할 때도 지휘관은 무표정했다.

  “짐작하고 있었다.”

  “쿠로사키를, 보내지 않았다면…….”

  “승리도 없었겠지.”

  짤막한 답은, 상대의 감상을 끊어내려는 듯한 냉랭함마저 묻어있었다.

  “나는 쿠로사키 슌과의 약속을 지켰어. 어떤 식으로든 승리를 가져오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말해도 장본인은 여기에 없는걸.”

  “책임은 평생 안고 갈 생각이야. 쿠로사키의 고향, 엑시즈를 복구하는 것으로. 전쟁 피해를 내 선에서 최대한 보상하는 것으로. 그럼 전쟁을 끝낸 후 쿠로사키가 하려던 일까지 전부 맡는 것이 되겠지.”

  계약자의 몸을 부순 병기를 짓밟으며, 지휘관은 건조하게 덧붙였다.

  “마녀의 삶에 끼어들어 무기로까지 사용했으니, 평생은 바칠 자신이 있거든.”

 

*

 

  집무실을 찾아온 자는 달갑잖은 소식을 물고 왔다. 어느 고위 관료의 여식과의 혼담이었다. 이제 혼처를 찾을 나이가 되었지요. 아카바 씨를 각별히 아끼는 D 의원님의 이야기인데. 지휘관은, 아니, 이제 더는 전장에 나서지 않는 영웅은 미리 준비한 답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결혼은 생각지 않는다는 답이 바로 그것이었다. 적당한 핑계를 덧붙이며 혼담을 차단했음에도 상대방은 후사를 들먹이며 교제해보라고 떠민다.

  전쟁이 끝난 지 벌써 수년.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어낸 청년은 모두의 존경을 받으며 살고 있다. 통치자가 되기는 한사코 사양하였으나 거의 그에 준하는 권력을 쥐고서, 만만찮은 세력을 이끄는 청년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명문가의 후계자였고, 세상을 구했다는 명예까지 얻은 그를 제편으로 만들고 싶은 이가 많은 게 당연했다. 걸핏하면 혼담이 들어오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터다. 탐나는 젊은이를 제 가문으로 끌어들이기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 혼사였으니.

  그러나 영웅은 온갖 곳에서 들어오는 혼담에 한 번도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딱 봐도 좋은 조건의 혼담인데도 그러했다. 이제는 소식을 전하는 이조차 조금 난감해할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소극적이신 이유가 있나요? 이제 좋은 가문의 여식과 결합해 더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고 싶다거나 후계자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도 해봄 직한데. 우물쭈물 흘러나오는 말에 영웅은 부드러운 웃음을 걸쳤다.

  “아카바를 맡아줄 이라면 이미 있지 않습니까. 제 동생도 이제 제법 어른티가 나는 듯한데요.”

  “세상이 아카바에게 기대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

  “아카바 레이지의 재능을 후대에까지 물려주는 걸 바란다고요? 그런 말도 많이 듣긴 했지요. 저에겐 별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요. 세상이 기대를 걸어야 할 건 아카바 레이지가 아니라, 그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줄 원석들입니다. 후사를 남기는 것엔 관심이 없어요.”

  능숙한 말엔, 조금의 가능성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철저함이 엿보였다. 또 어느 가문과의 혼담을 물어왔던 상대방은 결국 별 소득 없이 영웅의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매정하네.

  혼담을 전하러 온 이가 자리를 뜨자마자, 나긋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청년은 어느새 제 책상에 걸터앉은 여자를 본다. 녹색을 띤 머리칼과 금빛 눈이 인상적인 여자는 그보다 몇 살쯤 어려 보인다. 한때는 그 또래로 보였던 여자인데, 어느 순간부터 세월의 격차가 생기고야 말았다. 여자의 시간은 그녀가 더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된, 수년 전에 멈춰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환상처럼 나타난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청년은 방문자의 말을 가볍게 받아쳤다.

  “마음에도 없는 혼담 따위 넘겨버리는 게 낫지.”

  「정말로 마음이 없어?

  “마녀의 계약자가 어떻게 새로운 상대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이상하네, 나는 계약자의 반려에 질투 같은 건 하지 않는데?

  혹시 질투해주길 바라는 건가?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귀를 때렸다. 청년은 소매를 걷어, 그만이 알고 있는 족쇄를 확인한다. 왼팔에 새겨진 표식. 마녀가 새긴 심볼이자, 마녀의 그릇이 깨졌음에도 지워지지 않고 남은 흔적.

  물론 마녀는 수년 전에 불태워졌다. 세상에 알려진 대로라면 그의 계약자이자 그가 탐했던 마녀는 바로 그날 영영 흩어졌을 테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있다. 계약자끼리만 공유한 비밀. 마녀의 그릇이 붕괴해도 마녀를 이 세상에 묶어둘 수 있는 안전장치의 존재. 마녀의 계약자가 계약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 한, 계약은 지속되고 그 시간만큼 마녀는 계약자의 곁에서 실재할 수 있다. 어떤 타격을 입더라도.

  보통 상황이라면 진작 사라졌어야 할 마녀가 청년 앞에서만은 모습을 드러내는 게 그 증거. 본디 붉은색이었던 계약의 증거는 마녀가 죽은때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지워지려던 표식을 계속 남아있게 한 건, 삶에 유령이 끼어드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계약을 유지해온 건 그답지 않은 변덕이다.

  “마녀의 육신이 깨져도 계약을 유지하기로 한 건 나. 그 선택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

  「지휘관님. 예전에 그쪽이 사카키 유우야에게 말한 대로, 아카바 레이지는 계약자로서 약속을 지켰어. 굳이 나에게 더 매여있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리고 계약을 유지한다고 해서 아카바 레이지가 새로운 파트너를 구하지 못할 이유도 없고. 청년만이 볼 수 있는 그의 계약자는 낮게 속삭인다. 우리는 계약자지 반려가 아니잖아?

  「질투해서 저주하는 일은 없어. 약속할게. 그러니까.

  “내 쪽이 질투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 청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자에게 바로 설명을 붙여주었다.

  “새로운 파트너가 생기는 것 말이야.”

  마녀가 반응하기까지는 10초가량의 시간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세상에선 끔찍한 괴물로 취급받았던, 결국 인간의 악의 속에 내던져졌던 마녀는 계약자의 말에 한참이나 깔깔댔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이라도 보는 양.

  「그래서 나를 놓아주지 않으려 계약을 유지하고 있다고?

  “계약은 속박이기도 하니까. 내게 족쇄를 채우는 것으로 얼마든 상대를 묶어둘 수 있단 말이지.”

  「좋아. 10년은 버텨봐.

  “그보다 더 걸 자신이 있다면?”

  「, 그래. 아카바의 사람은 독점욕이 강했던가. 계약 상대로 잘못 택했어.

  옅게 한숨을 내쉰 여자는 책상에서 내려오더니 계약자 앞에 선다. 자신의 사용자였고, 지휘관이었으며 파트너이기도 한 청년 앞에. 아직은 호기롭게 말할 수 있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감당하기 힘들 거야. 나는 너를 붙잡아두기 위해 계약을 유지하진 않을 테고.

  「질투하지 않겠단 얘기는,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야. 그러니 놓고 싶을 때 불러. 앞길 창창한 도련님을 놓아줄게.

  청년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마녀는 환상처럼 흩어졌다. 본디 세상에는없는 존재이니 어쩌면 당연한 퇴장일지도 모른다. 홀로 남은 청년은 마녀가 있었던 곳을 바라보다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그런 자유는 바라지 않아. 빠르게 흩어진 소리를, 보이지 않게 된 만큼 언제든 곁에 있게 된 마녀가 들었을지는, 알 수 없다.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오미카(아카바 부부)] 별에 뻗은 손  (0) 2022.01.31
[유토+슌] 괴물의 그림자  (0) 2021.12.31
[사장슌] 악령의 밤 일시동맹  (0) 2021.10.31
[자크+레이] 무너지는 갑판에서  (0) 2021.07.26
[유리] 괴물의 온실  (0) 2021.07.10
Posted by 현소야 :

[사장슌] 악령의 밤 일시동맹

2021. 10. 31. 15:11 from 02

 

  “바람이 심상찮아. 으스스한 게 할로윈답군.”

  「문을 제대로 잠가두랬잖아. 오늘밤은 악령의 밤이라고.

  “보다시피 제대로 잠가두었다만. 방문은 물론 창문까지도. 네가 날 찾아와서 다짜고짜 우리를 가둬버리는 바람에 난 LDS에서 준비한 할로윈 파티엔 참가하지도 못하게 됐어. 작년보다 화려하게 연 파티를 너 때문에 포기했으니, 그 대가로 너도 하나 알려줬으면 하는데. 왜 오늘 하루 이렇게까지 긴장했는지 말이지.”

  「나라고 아카바 레오의 자식과 방 한 칸에 갇혀있고 싶을 리가 있겠어? 하룻밤만 잘 넘기고 싶을 뿐이야. 설마 하룻밤도 못 참겠단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쿠로사키. 상대를 자기 뜻대로 휘두르고 싶다면 그 이유는 제대로 설명하는 게 예의다. 네가 LDS에 들어온 후로, 내가 어떤 듀얼에 널 내보내든 그래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것처럼. 정식으로 묻지. 쿠로사키 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아카바 레이지를 데리고, 할로윈 밤이 끝날 때까지 방에 틀어박혀 문을 꼭꼭 걸어잠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일시동맹이라고 생각해. 우리 둘 다, 악령에 시달리지 않도록 이 밤만 함께 있는 거라고. 문을 열어두는 건 악령이 들어오도록 판을 깔아주는 셈이니 닫아두라 한 것뿐인데.

  “악령, 악령, 악령……벌써 몇 번째나 악령 이야긴지 모르겠군. 할로윈에 악령이 찾아든단 말이야 많다만, 쿠로사키 슌이 그렇게 악령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던가? 폭격 속에서도 살아남은 레지스탕스인데? 아카데미아에게서 세계를 지키려 나선 랜서즈의 멤버이기도 한데도? 하트랜드의 할로윈은 무서운 날로 전해지기라도 했나?”

  「하트랜드라고 특별히 다를 건 없었어. 루리가 어릴 땐 지금 여기, 스탠더드의 아이들처럼 내가 직접 할로윈 분장을 시켜주기도 했지. 그때는 나도 어려서 센스가 없었으니 별로 무섭게 되지도 않았지만, 루리의 목적은 할로윈 분위기를 내어 사탕을 받아오는 거였으니까 문제는 없었고. 하트랜드 사람들은 애들을 좋아했으니 아이들이 문을 두드릴 때마다 사탕이며 초콜릿이며 잔뜩 안겨줬었지.

  “그런데도 이제 와서 악령의 밤이라 이야기하며 내 할로윈도 빼앗는다, . 여기, 스탠더드의 할로윈은 아이들이 즐겁게 사탕을 받아가는 날인데 말이야. LDS에서 할로윈 파티를 왜 열었겠어?”

  「그래서 레이라는 오늘 너한테 사탕을 받아갔나?

  “LDS에서는 오늘 학원의 학생과 강사는 물론, 방문자에게도 전부 사탕을 주기로 이야기됐다. 그러니 레이라도…….”

  「학원이 챙겨주는 거 말고. ‘네 동생이직접 너에게받았는지 묻는 거다. 그 애는 널 너무 어려워해서 이런 날에도 네 잘난 사장실 문 한 번 못 두드렸을까 걱정된다고.

  “사탕이라면 한 바구니 준비되어 있지만, 그래, 찾아오진 않았어. 미리 할로윈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좋았을까.”

  「바보 같긴. 레이라 같은 애한텐 그런 걸 받으러 와도 된다고 미리 허락을 해야지. 지시대로 움직이는 게 습관이 된 아이인 걸 알면서 그렇게 소극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다니.

  “레이라를 그렇게 신경 써주는 건 감사하다만, 쿠로사키. 네가 날 가둬버렸으니 오늘은 레이라에게 직접 사탕을 줄 순 없어. 내일이건 내년이건 다음 기회를 위해서라도 네 충고는 머리에 새겨두도록 하지. 그건 그렇고, 내 물음엔 아직 제대로 답해주지 않은 것 같은데. 너희 남매의 할로윈 이야기를 들으니 더 궁금해지거든. 하트랜드에서도 할로윈을 평범하게 즐겼다면, 왜 지금의 너는 할로윈에 악령이 찾아들 거라 굳게 믿고 있는 거지?”

  「간단해. 죽은 사람을 너무 많이 봤으니까. 하트랜드에는 죽음이 흔했다. 거리마다 건물마다 죽음이 그득했지. 하트랜드에 침략군, 아카데미아가 밀려든 후로 우리는 살면서 볼 죽음을 다 봐버린 것 같아. 그래서.

  “아카데미아에 희생당한 네 이웃이, 동료가 악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한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좀 서글프군. 죽어서까지 안식을 얻지 못하고 악령으로 떠도는 희생자들이라.”

  「한 움큼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과연 저승에서 편히 쉴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악령이 되는 건 생전의 울분과 한 때문이다?”

  「, 아카바의 도련님에겐 망상으로만 들리겠지만. 난 내 동료가, 이웃이, 아카데미아가 짓밟은 모든 사람들이 오늘 밤 찾아들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거든. 그러니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밤이 지날 때까지 방에만 있기로 하는 거다. 이제 설명은 되었겠지?

  “역시 서글프군.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네가 너무 많은 상실을 겪었다는 게. 한편으론 그렇기 때문에 또 의문이 들어. 너는 아카데미아에게 원한을 품은악령이 찾아올 거라 생각하면서 왜 아카데미아 수장의 아들인나랑 같이 숨은 거지?”

  「질문에 답이 있잖아. 아카데미아 수장의 아들이니까. 하트랜드를 지옥으로 만든 아카바 레오의 아들이 곁에 있다면 불운한 악령들도 다들 그쪽에 주목해서, 누구도 내게 관심을 갖지 않겠지.

  “아카바 레오의 아들인 나를 악령들에게 넘겨주고 싶은 게 아니고? 애초에 널 잘 알고 있을 고향 사람들이, 네게 원한이라곤 없을 희생자들이 널 노릴 것 같진 않은데.”

  「내가 잃은 사람들이 내게 해코지할까 불안해하는 게 아냐. 일단 나를 찾으면 다들 날 꼼짝도 않고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아 피하고 싶은 거지.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 대부분은 특별히 강하지도 않았어. 먼저 죽은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의 차이는 운이 따랐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뿐이었을지도 몰라. 아마 나도, 죽은 사람보단 운이 좋았을 거다. 딱 그 정도였겠지. ‘운이 나빠서아카데미아란 괴물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쩌다 살아남은나는 어떻게 비칠까? 아마도.

  “그자들이 왜 네가 살아남은 거냐고, 무언으로 물을 것 같나?”

  「그래, 빤히 쳐다보면서……내게서 자기들보다 더 버텨낸 이유를 찾을 거야. 그런 이유 따위 제대로 없는데도. 그자들보다 더 오래 버텼던 행운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도. 날 찾아온 망자를, 내가 아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도 내 생존의 가치를 따지게 될 것만 같아.

  “침략전쟁의 피해자에게 죄는 없다.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하트랜드의 민간인이 희생되어야 할 명분 따위 없었던 만큼 네가 살아남은 데 가책을 느낄 이유란 없어.”

  「아카바의 핏줄에게 위로를 받는다니, 우습군.

  “네 앞에선 언제나 아카바로 태어났단 원죄를 안고 있단 생각이 들어.”

  「정확히는 아카바 레오의아들이란 거지. 어쨌건 나는 네가 랜서즈를 결성하게 된 것도, 아카데미아를 적대하기로 한 것도 네 출신에서 비롯한 죄의식이라 생각했는데, 틀렸나?

  “부정은 못 하겠는걸. 나도 어느 정도는 불순한 동기로 움직이고 있다고 봐야지. 아카바의 죄를 씻고 싶다는 것.”

  「아무래도 좋아. 난 네가 정말로 아비를 끌어내리기만 한다면, 아비가 저지른 일을 제대로 막기만 한다면 네 뜻대로 움직여줄 거다.

  “마지막까지 함께 가주겠다고?”

  「, 이제 와서 껄끄럽나? 내가 네 목이라도 조를까 걱정되기라도? 아니면 아비의 죄를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

  “그럴 리가. 적의 아들인 내게 기꺼이 묶여주겠다는 네 마음이 대단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러니, 나도 하룻밤 정도는 네 고집대로 움직여줘야지. 일시동맹이라고 했나? 아카데미아에 맞서 협력하기로 한 우리 사이에 왜 굳이 일시동맹이란 말이 필요한진 모르겠지만, 이 밤은 문을 걸어잠그고 있을 테니 안심해.”

  「협력? 계약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내가 보기에 아카바 레이지는 사업가라 그런지 자꾸만 본인의 책임을 최소화하려 들거든. 내가 언제 자기를 배반할지 모른다 생각하는지, 아니면 껄끄러운 엑시즈 사람 따위 안고 가기 싫은 건지. LDS에 들일 때조차 계약을 하자고 이야기했지.

  “그때의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으니까. 계약이란 절차로 서로를 묶어둬야 했던 거야. 랜서즈를 결성한 지금은 용병과 고용주 같은 계약관계론 함께할 수 없어. 서로를 신뢰하며 협력자로 같이 나아갈 수밖에.”

  「혀는 잘 놀린단 말이야.

  “그래도 동맹이라는 말은 마음에 들어. 쿠로사키 슌이, 이 악령의 밤만은 나를 필요로 한단 말이지. 동맹이란 말까지 들먹이면서.”

  「내가 너를 이용한다고만은 볼 수 없어. 동맹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함께한단 것. 아카바 레오가 만들어낸 괴물이 이 세계엔 넘쳐나. 내 고향을 쓸어버리러 온 아카데미아 놈들 같은. 아카바 레오의 궤변에 머리가 지배돼 끔찍한 악행을 저지른 놈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겠어. 자기네를 받아줄 지옥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아카바의 본거지로 향하겠지.

  “그게 아카데미아가 아닌 여기, 마이아미라고?”

  「아카데미아는 다들 프로페서의 아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본거지가 어딘지도, 프로페서가 어디서 왔는지도. 경비가 삼엄한 아카데미아에 다시 들어가긴 힘들 테니 프로페서의 본거지라도 찾으려 하지 않겠어? 이렇게 평화로운 차원에, 할로윈을 맞아 다들 유령 분장을 할 시기라면 악령이 슬그머니 섞여들기도 쉽겠지.

  “아무리 내가 노력해봐야 아카바가 낳은 죄는 어찌할 수 없다는 건가. 아카바 레오는 처자식 따위 진즉 내팽개쳤는데 그자가 만들어낸 악령은 내게로 올 거라니, 불공평하군.”

  「신경 쓸 것 없어. 오늘밤 네 곁엔 레지스탕스가 있으니까. 내가 엑시즈 출신이란 걸 알아채면 놈들은 사냥감을 찾았다 생각하고 날 노릴 거다. 물론 네가 부주의하게 문을 열어서 악령이 밀려들 때의 이야기다만.

  “아카데미아의 악령을 상대하는 건 자신 있다? 이해가 되지 않아. 너는 아카데미아에 평화로운 삶도, 고향도, 주변 사람도 잃은 처지다. 그 때문에 레지스탕스가 되기로 했으면서, 네게 악몽을 남겨준 아카데미아를 또 상대하겠다고?”

  「아카데미아는 차라리 나아.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아카데미아 때문에 원혼이 되었을, 내가 아는 사람들이지. 아카데미아 같은 괴물은 증오하고 적대하며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면 그만이야. 이미 죽은 악령을 적대하는 것 따위, 잘난 아카바 레이지도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 속이 편하고.

  “그래서 동맹이라는 거군. 나는 널 괴롭게 만드는 고향의 희생자로부터 널 지켜내는 거고 너는 아카바의 죄악을 상징하는 아카데미아로부터 날 지켜낸다, .”

  「하룻밤을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지 않나?

  “네 말대로. ‘일시동맹이란 건 조금 아쉽지만.”

  「일시적 동맹인 게 당연하지. 우리가 이렇게나 붙어있을 날은 오늘 하룻밤이 전부니까. 어디까지나 오늘밤을 넘기기 위한 동맹이니까, 밤이 지나면 원래 우리 위치로 돌아가는 게 맞아.

  “그 점이 아쉽다는 거다. 네게 난 아직도 아카바의 아들이고, 완전히 믿지 못할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망할, 갑자기 누가 문을 두드리는 거야? 아무도 찾아오지 않게 해두랬잖아!

  “신경 쓸 것 없어, 쿠로사키. 네 요구대로 미리 주변에 일러뒀다. 오늘밤은 누구도 여기 출입해선 안 된다. 중요한 일은 중간결재자에게까지 올린 후 내게는 메시지로 보고하도록. 이라고. 일정도 전부 취소해뒀어. 그러니까.”

  「그럼 뭐해, 아직도 문을 두드리는데!

  “진정해. 파티에 참가한 스쿨 학생들이 장난치는 걸 거다. 내가 돌려보낼 테니까.”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말고. 흘러나오려던 말이 입 안에서 갇혔다.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

 

  젊은 사장은 팔짱을 낀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에게 그는 한순간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문이 열린 직후부터 쭉,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오래도록 사장을 보좌해온 비서는 사장의 표정 없는 얼굴에서 미묘한 불만을 읽어냈다.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오늘 저녁부터는 절대 찾아오지 말라고 했던가. 그가 평소 오랜 시간을 보내던 사장실을 굳이 비워두고 회의실에 가 문을 걸어 잠갔던 이유가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앞에선 꺼내고 싶지 않은 사적인 이유가.

  그럼에도 사장을 찾은 것은 명백히 제 실책이었다. 사장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사장을 직접 만나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다 후자를 택했으나, 결국 사장을 실망시키고 만 것 같다. 그렇다고 이대로 모든 걸 불편한 채로 남겨둘 수는 없다. 비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입을 뗐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사장님.”

  긴 침묵을 깬 말에 사장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문을 열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죄송합니다. 사장님의 지시를 지키려 했지만, 이사장님이 추진 중이신 회사 인수 건이 워낙 급해서 직접 의견을 구하기 위해…….”

  “그렇다고 패스키로 문을 열고 들어올 줄은 몰랐어. 매년 이날만 찾아오는 손님을 보고 있었는데 말이지.”

  두 사람이서 쓰기엔 다소 큰 공간에, 사장의 한숨소리가 퍼졌다. 손님이라는 단어에 비서는 이번에야말로 문을 열어버린 것을 후회했다. 평소처럼 사장실에서 만나선 안 될, 누구에게도 보이려 들지 않는 손님이라. 그것도 일 년에 한 번밖에 만날 기회가 없는 사람이라니. 아마도 귀한 손님이었으리라. 기껏 상대를 기다렸을 사장이 방해에 얼마나 날카로워졌을지.

  그러고 보면 하나 희한한 점이 있었다. 문을 열었을 때 회의실에 보였던 건 사장 한 명뿐이었다는 사실. 문이 열리자마자 손님이 자취를 감췄단 뜻인데,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사라진 것인지 신기하기만 했다. 숨었다 해도 자리를 떴다 해도 참 행동이 빠른 사람이란 생각을 안고, 비서는 슬쩍 손님에 대해 물었다.

  “손님은 이미 돌아갔습니까?”

  “자네가 문을 열자 바로 빠져나갔지. 방해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니 내년엔 오지 않을지도 몰라.”

  “부주의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 미움받아도 어쩔 수 없지. 할로윈 파티는 잘 진행되고 있나?”

  “. 다들 즐거워하더군요.”

  “나도 중간에 얼굴은 비춰야겠군. 그나저나, 나카지마. 쿠로사키가 죽은 게 올해로 몇 년째지?”

  사장이 흘린 낡은 이름에서 비서는 수년 전 회사에 머물렀던 청년을 떠올려냈다. 사장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던 청년은, 침략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왔다고 했다. 고향이 맞이한 비극처럼 황폐했던 청년은, 사장의 <계약자>가 되어 전장으로 떠났다. 사장이 포섭한 다른 전사들, 열 명도 되지 않는 정예병과 함께 전쟁이란 악몽을 끝내러 간 것이었으나 전쟁과 함께 자신의 삶도 끝맺고 말았다.

  사장은 그 불행한 청년의 사인을 끝내 이야기하지 않았다. 때문에 비서는 청년이 전사했는지 사고로 죽었는지, 절망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아예 알지 못한다. 청년이 죽은 해만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비서가 섬겨왔던 젊은 사장이 살면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해가 바로 청년의 삶이 끝난 해였으니.

  “7년이었던가요.”

  “벌써 그렇게나 됐던가.”

  “시간이 참 빠르지요.”

  “……하긴 벌써 몇 번은 만났으니.”

  “?”

  “아니. 잠깐 다른 생각을 했을 뿐이다. 신경 쓸 것 없어.”

  그러나 들릴락 말락 한 혼잣말을 한 때부터 사장의 시선은 너무 먼 곳으로 향해있었다. 이곳이 아닌, 어디에도 없는 곳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여 비서가 뭐라도 말을 얹으려던 때, 사장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죽은 사람을 달래는 날이기도 하지, 할로윈은?”

  “그런 의미가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어려서는 죽은 자가 산 자의 세상에 끼어드는 건 불합리하다 생각했는데, 이젠 생각이 달라졌어. 하루쯤은, 끼어들어도 되지 않을까. 산 자가 죽은 자의 흉내를 내는 날만큼은. 나도 참 감상적으로 변했다니까.”

  “오늘따라 쿠로사키가 생각나십니까?”

  아까부터 쿠로사키 이야기를 꺼내시는 게, 어쩐지. 조심스레 덧붙인 말에 사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년이 되기도 전에 죽은 청년에게 안타까움이 짙게 남았던 모양이었다. 사장이 실로 오랜만에 청년의 이야기를 꺼내며 씁쓸함을 숨기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오늘의 손님은 청년과 연이 있던 사람이리라. 죽은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혹은, 죽은 사람에 대해 무언가 증언해준.

  “죽음이 너무 많았던 삶이라 오래 버티지 못한 걸까.”

  “그래도 더는 죽음의 악몽에 시달리는 일은 없게 되었으니, 그걸 위안으로 삼아야지요. 전쟁은 이미 끝났잖습니까. 쿠로사키의 기여로.”

  “그래도 쿠로사키의 마지막엔 울분 같은 건 없었을 거다?”

  “물론 알 길은 없죠. 그랬길 바랄 뿐.”

  “……그런 거라도 있어야, 망령으로 남지 않나?”

  팔짱을 푼 사장은 비로소 비서를 제대로 바라보며 말했다. 비서가 저지른 실수를 이젠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단 것처럼. 저에게로 향한 시선에 안도한 비서는 사장을 마주보다 그의 오른손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사장이 제법 힘을 주어 쥐고 있는 게 무엇인지는, 살짝 삐져나온 부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불에 그슬린 카드 조각. 두 사람이 일하는 회사의 중점 사업인 게임 사업에 쓰이는 카드 일부.

  거기서 비서는 청년의 유일한 유품을 떠올려냈다. 그 불운한 청년이 언제나 지니고 다니던 카드. 청년의 무기인 기계 새가 깃들었던 카드 중에서 딱 한 장. 불에 타서 일부만 남은 카드를 사장이 챙겨온 후, 내내 간직해왔음을 비서는 안다. 그러니 사장이 던진 괴상한 말에 어떤 감정이 붙어있었을지도 이해한다.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에 망자를 망령으로 만드는 건 산 사람인 것 같습니다만.”

  “의미를 모르겠군.”

  “산 사람의 미련이, 망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망자의 영혼을 붙들어놓는 것이리란 이야기입니다. 망령이 실재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요.”

  “이제 이해가 돼. 일리 있는 이야기인데.”

  “그렇지만 망령으로 남는단 건…….”

  “산 사람이 욕심을 낸다는 게 되지만 말이야. 다르게 말하면 죽은 사람을 산 사람에게 묶어두는 셈이지.”

  말을 마치자마자 소파에 앉아있던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문 쪽으로 향하는 것이, 이제 회의실을 나서려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종료된 만남에 대한 아쉬움도, 죽은 이에 대한 감상도 전부 떨쳐낸 것인지. 자네가 이야기한 회사 인수 건은 조금 있다 어머니와 직접 상의하려 해. 이미 얼마 전에 어느 정도 답을 정해놓긴 했지만. 그러니 이제 걱정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비서가 저를 찾아온 이유를 정확하게 풀어주는 말에서, 조금 전 같은 쓸쓸함은 비치지 않았다. 사장은 본디 그런 사람이었다. 쓰린 실패도 괴로운 감정도 알아서 소화해낼 수 있는, 타인 앞에 내면을 드러내는 것조차 드문 사람.

  그렇기에 오늘 사장에게서 잠시나마 날것의 감정을 이끌어낸 <손님>, 비서는 내심 궁금해진다. 함께 회의실을 나서 복도를 걸으며 비서는 슬그머니 물음을 얹었다.

  “오늘의 손님이 누구였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 때문에 방해받은 것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 자네도 아는 사람이었어.”

  힌트라도 하나 건져볼까 싶어 던진 질문이었으나, 선을 긋듯이 짤막한 답변이 돌아오는 바람에 소득은 없었다. 사장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가 아니라 내게 화가 났을 거고.”

  “너무 범위가 넓은데요. 랜서즈였습니까?”

  “수수께끼 놀이를 할 생각은 없으니 이렇게만 말해두지. 자네가 영영 다시 못 만날 사람이라고.”

  그럼 잠깐 할로윈 파티에 갈까. 레이라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거든. 능숙하게 화제를 바꾼 사장은 이제 더는 비서에게 매이지 않겠다는 듯 성큼성큼 앞서갔다. 파티가 열리는 라운지로 향하는 사장의 오른손에는 여전히 청년의 유품이, 타다 만 카드 조각이 들린 채였다.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토+슌] 괴물의 그림자  (0) 2021.12.31
[사장슌ts] 계약은 신중하게  (0) 2021.11.30
[자크+레이] 무너지는 갑판에서  (0) 2021.07.26
[유리] 괴물의 온실  (0) 2021.07.10
[유야유즈] 아주 사소한 종말  (0) 2021.03.15
Posted by 현소야 :

 

  깨어난 때부터 시야를 메운 것은 암흑이었다. 어둠이 드리워진 것인지, 아니면 모든 빛이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거대한 상자에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타자의 기척은 없고 손을 뻗어봐야 잡히는 것도 없다. 거의 모든 감각이 의미를 잃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제 기능을 하는 것은 청각. 언젠가부터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말소리도 발걸음 소리도 아니지만, 그곳이 깜깜한 상자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려주는 것.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괴물은 청각의 날을 세웠다. 귀에 익은 소리인데 무엇인지 바로 짚기는 어렵다. 이곳의 문이 열리는 소리일까? 아니면 이 어두컴컴한 공간에 균열이 생기는 소리? . . 일정 시간마다 반복되는 소리를 두고 온갖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어둠뿐인 이곳에, 타자의 존재를 느낄 수 없는 곳에 무엇이라도 변화가 생기길 바라서이리라.

  암흑 속으로 떨어지기 전만 해도 괴물은 세상을 손에 쥐는 일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괴물을 보고 죄 두려움에 굳어버렸고, 용기 내어 괴물에 덤벼든 정예병은 거짓말처럼 꺾였다. 열 명도 되지 않는 정예병을 무참히 짓밟고서 세상에 제 이름을 새기기만 하면, 세상은 괴물의 먹이가 될 터였다. 저를 향한 저주에도 귀를 때리는 비명에도 괴물은 한껏 들뜬 채였다. 그것이야말로 괴물에게 힘을 실어주는 마법의 약이기에 그랬다.

  인간의 두려움이 되기로 한 괴물에게 저를 향한 공포는 양분이었고 날아드는 비명은 달콤한 찬사였다. 두려움이 짙어질수록 괴물은 무시무시한 악마가 되어갔다 한 걸음만 더 떼면 세상을 삼킬 듯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방해꾼이 나타나는 바람에 괴물은 힘을 잃고 추락하고 말았다. 하필 그를 막아선 건 이미 오래 전 한 번 괴물을 끌어내린 적 있는 방해꾼이었다. 제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괴물을 처치하기로 한, 자연의 힘으로 무장한 지독한 인간.

  방해꾼의 첫 번째 개입은 이십여 년 전의 일. 4체의 드래곤과 결합해 무시무시한 힘을 두른 괴물이 이번처럼 세상을 폐허로 만든 시점이었다. 괴물이 인간의 마지막 은신처까지 쓸어버리고 <정복자>가 되려던 때. 방해꾼은 자연의 정수를 담은 4장의 카드를 쥔 채 괴물 앞에 섰다. 다음은 자연의 힘으로 그와 결합한 드래곤을 흩어버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없다는 듯 세상을 네 개의 차원으로 찢어, 각 차원에 드래곤을 하나씩 몰아넣기까지 했다. 그때 괴물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은 저 또한 네 갈래로 나누어, 4개의 차원에 나뉘어 떨어진 드래곤을 틀어쥐게 하는 것뿐.

  넷으로 찢어지면서 힘도 분신들에 분산되고 만 괴물은 오랜 시간을 들여 분신을 하나로 뭉쳤다. 네 개의 조각이 쥐고 있던 드래곤도 한곳에 모인 덕에 괴물은 원래의 힘을 찾을 수 있었다. 세상을 위협했던 힘을 쏟아내며 괴물은 과거에 이루지 못한 목표에 빠르게 다가섰다. 정예병과 그 리더까지 쓰러트릴 때만 해도 괴물은 자신만만했다. 이번에야말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방해꾼이 다시 나타난 건 바로 그 시점이었다. 괴물의 분신을 감시하기 위해 똑같이 4개의 차원에 분신을 흩어놓은 그 자는, 과거의 힘을 다시 끌어와 그에 맞섰다.

  결말은 빤했다. 괴물은 또다시 실패했다. 과거와 똑같은 무기에 당해서. 실패했다는 것만큼이나 괴물을 처참하게 만든 건 그가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는 분신들이 마지막 순간 방해꾼에 동조했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세상에 섞여드느라 인간의 모습을 덮어썼던 바람에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일까. 인간과 가까웠던 탓에 본체인 괴물보다 주변 인간들의 주장에 더 이끌리게 된 것일까. 알 길은 없다. 배반당했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물론 괴물이 진짜 원망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었다. 그의 뜻을 번번이 꺾어놓고 마는 자. 아직도 괴물은 저를 막아선 방해꾼의 동기를 알지 못한다. 자연의 힘을 두른다는 건, 더는 인간으로 살 수 없게 된다는 뜻. 그 날부터 개인이 아닌 정의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 세상을 위해 몸을 던졌다고 하기엔 괴물이 아는 인간이란 제 욕망에만 몰두하는 어리석은 족속이었다. 혹 괴물 앞에서 심판자를 자처한 것이 미래가 없다는 체념에서 비롯한 자기파괴적 선택이었다 해도 다시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번엔 과거 자연의 힘을 사용한 여파로 원래의 육신을 잃은 상태이기까지 했다.

  왜 그 자는 그렇게 지독한 선택을 했을까. 방해꾼에게로 생각이 뻗는 건 이루기 직전에 물거품이 된 목표 때문이다. 그 자만 없었다면, 이번에는 이룰 수 있었다. 한 번 실패한 후 이십여 년이나 벼르던 소망을. 괴물이 인간의 모습을 덮어쓰면서까지 오래도록 버티게 한 꿈을. 왜 방해꾼은 그를 가만두지 않는 것일까. 저번 대에 그를 방해해 인간의 삶을 잃었다면 이번에는 나서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자연의 힘에 기대봤자 괴물의 숨통도 끊지 못한다면 저항을 이어갈 이유가 없는데.

  생각은 거기서 멎었다. 규칙적으로 울리던 소리의 정체를 알아채서였다. 기억을 더듬어 답을 찾고 나니 너무도 시시한 것이었다. . 방울져 떨어지는 물소리. 이 공간에 균열을 내는 것이나 탈출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는 소리. 굳이 위안거리를 찾자면 물이 있다는 걸 확인한 만큼 어쩌면 이곳에 다른 생명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 정말 괴물 이외의 생물이 있다 해도 소통 가능한 존재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괴물은 물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무엇이라도 만날지 모른단 희망을 품고. 지금 괴물이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방해꾼 때문에 또다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단 사실이 아니라 이곳에 혼자 남겨졌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 어떻게든 타자를 찾아야 하는 외로움은 한때 세상을 위협했던 괴물에겐 어울리지 않는 약점이다. 오히려 괴물에게 지배당할 운명인, 인간을 닮은 듯했다 치미는 불쾌감에 괴물은 이빨을 으득거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괴물에겐 인간을 닮은 부분이 일부 남아있다. 남아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 부분들이 우연히 인간과 겹친 부분이 아니라, 그 자신이 아직 끊어내지 못한 과거의 잔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지배하겠다고 나섰지만 괴물의 바탕은 본래 그들과 같았으니. 평소엔 일부러 덮어두던 한계를 괴물이 어쩔 수 없이 떠올리고 만 때.

  “안녕. 또 만났네.”

  명랑한 목소리가 괴물의 귓속에 박혔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 전까진 무엇 하나 알아보지 못하도록 어두컴컴하기만 했던 세상에 희한하게도 드문드문 형체가 보인다. 그가 선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호수가, 저 위쪽에 가파른 벼랑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시각이 드디어 제 기능을 하게 된 것인지, 그곳만은 어둠이 걷힌 것인지. 무의미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휙휙 넘겨버렸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아무래도 달갑지 않았던 탓이다.

  귀에 익은 목소리로 대강 짐작한 사실이지만, 눈으로 보니 확실해졌다. 이 괴상한 공간에서 만난 첫 번째 타인이 누구인지. 괴물의 목적을 두 번이나 꼬아버린 방해꾼은 처음 괴물 앞에 섰을 때의 모습을 덮어쓰고 벼랑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오랜 친구를 만난 양, 저 아래쪽에 선 괴물에게 손까지 흔들면서. 많아봐야 스물이나 됐을까 싶은 젊은 여자에게 괴물의 시선이 고정된다. 균형을 잃기만 하면 바로 추락할, 아슬아슬한 곳에서 여자는 겁 없이 발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왜 하필…….”

  결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상대와 마주쳐서일까. 저도 모르게 흘린 첫 마디엔 불만의 기색이 가득했다. 어차피 의미 없는 이야기란 생각에 제대로 말을 맺지 않았지만 상대는 괴물의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듯 바로 받아친다.

  “나였냐고? 그야 우리는 한 배를 탄 사이니까. 둘이서 세계의 운명을 두고 다퉜잖아?”

  “그런 건 한 배를 탄 사이보다 적대하는 사이라고 부르지 않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애틋한 관계는 아니지만, 같이 침몰할 관계를 적대관계 정도로 요약할 순 없지.”

  우리의 싸움은 끝이 났지만 세상의 문제가 즉시 바로잡히진 않았거든.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온 거야. 동화를 읽어주듯 평온한 목소리로, 여자는 말을 이었다. 여기는 일종의 소용돌이지. 너 때문에 흐려진 차원의 경계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과정에 일시적으로 생긴 공간. 네 개의 차원이 안정을 찾는 순간 사라질 곳. 이곳에 빨려든 것들은 전부, 새로운 시대에는 남아있지 않아야 할 것들이지. 불순물이라 할까.

  “그러니 너도, 나도. 여기서 끝나게 될 거야.”

  “끝난다고?”

  “그래. 없어지는 거야. 세상은 안정을 찾고, 인간은 이제 더는 우리를 바라지 않을 테니까. 모든 게 바로잡히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인 셈이지.”

  나쁘지 않잖아, 함께 간다는 건? 여유로운 목소리에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나 미래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은 비치지 않는다. 괴물은 여자의 그런 태도가 이전부터 불쾌했다. 인간이었던 주제에, 지금도 인간이었던 시절의 외형을 덮어쓰고 있는 주제에 그녀는 언제나 신처럼 군다. 인간의 욕망에 얽매이지 않는 정의의 대행자인 양.

  여자를 볼 때면 괴물은 오래 품어온 제 야망이 조잡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사로잡힌다. 실은 자신이 세상을 위협하는 악마가 아닌, 힘 자랑에 빠진 어린아이였다면? 신화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최후의 재앙이 아닌, 영웅에게 사냥당할 괴물이었다면? 괴물과 여자, 양쪽 모두 인간에서 출발해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존재로 거듭났기에 드는 의문이다.

  인간의 삶을 포기한 여자가, 마찬가지로 인간에서 벗어난 괴물의 심판자처럼 군다면. 주제넘은 착각을 하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심판자를 흉내 내는 쪽일까, 아니면 악마가 되려 했던 쪽일까? 만일 후자라면 괴물은 앞으로 무엇을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하는 걸까. 혹 양쪽 모두 착각에 빠진 채였고 어느 쪽도 상대를 완전히 무너뜨릴 힘이 없다 해도 여자는 잃을 게 없다. ‘철없는괴물을 막아서려 노력했고 실제로도 그를 무력화했다며, 자신이 믿는 성과를 내세우면 그만이다.

  어쩌면 그렇게 자기위안을 할 수 있기에 굳이 괴물을 방해해온 것인지.

  “함께라니. 그런 일은 없어.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 건 그쪽뿐이야. 넌 그 망할 카드를 써서 내 힘을 빼앗고 인간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줬다고 생각했겠지만, 달라진 건 없었지. 이번 세대의 인간들도 결국 날 찾았으니까.”

  여자처럼 초연하게 반응해야 하는데. 그래야 끝까지 위협적인 악마의 모습을 쓸 수 있을 텐데. 막상 답을 하니 괴물의 생각과는 반대로 감정이 가득 실리고 말았다. 여자의 말을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다는 마음이 머릿속을 흐린 모양이었다. 괴물은 여자의 말 마디마디가 싫었다. 세상에서 사라지리라는 불길한 예언도, 인간이 저를 바라지 않으리란 말도.

  종말 따위 생각해본 적도 없다. 여자의 방해로 두 번이나 목적 달성에 실패한 것부터 괴물에겐 예상 밖의 일. 어쩔 수 없이 쓰러지는 날이 온다 해도, 그건 목표를 이룬 후여야 했다. 한 번이라도 세상을 손에 넣은 후의 일이어야 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지금 종말을 맞는 건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것도 자신을 방해해온 여자와 함께라면 더더욱. 괴물의 목소리에서 충분히 감정을 읽어냈을 텐데도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친다.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 어차피 우리 미래는 바뀌지 않거든. 분신에게도 부정당한 널 누가 또 불러내겠어?”

  “모르지. 인간은 어리석으니까. 나에게 또 무대를 줄지도.”

  “인간은 어리석다, . 틀린 말은 아냐. 인간의 욕망에 매달린 네가 광대밖에 되지 못한 것도 아마 그래서겠네.”

  나른한 목소리로도 여자는 퍽 효과적으로 빈정거린다. 괴물을 더욱 자극하는 건 여자의 말에 별달리 독기가 없다는 점이었다. 괴물이 마디마디 감정을 담아 답하는 것과는 반대로. 한갓 인간의 발악을 지켜보는 신이라도 되는 것 같다. 아마 괴물이 다른 말을 꺼내도 동요하는 일 없이 그의 한계를 짚어줄 뿐이리라. 혹은 운명을 들먹일지도 모른다. 괴물이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는, 그녀만이 미리 보았을 결말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무엇을?”

  “내가, 여기서 끝나리란 걸?”

  망설이다 꺼낸 물음에 여자는 무심하게 반응했다.

  “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지리란 건 알았지. 그게 여기서, 이제야 이뤄질 줄은 몰랐지만.”

  “, 진작 알고 있었지?”

  네가 날 막아섰기 때문에? 아니면 내 힘이 너무 우습게 느껴져서? 따라붙은 말에 여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다소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보아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아마도 엷은 웃음.

  “패왕룡 자크는 악마가 되기엔 너무 인간적이었거든.”

  악마건 신이건,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되려면 인간의 면을 버려야 해. 인간의 감정도, 미련도 전부. 인간성을 잃어야만 인간에서 벗어날 수 있단 거야. 넌 그러지 못했지. 둘만의 공간을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느릿하게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괴물은 그동안 덮어두던 과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괴물의 이름을 얻기 전, 누구에게도 두려움을 사지 않았던 때의 일.

  드래곤과 결합하기 전까지 그는 과거의 여자와 다를 것 없는 인간이었다. 배틀 게임의 프로 선수. 그러나 무대에 올라 상대 선수를 마구 짓밟기 전까지만 해도 주목받지 못했던, 평범한 인간. 처음으로 상대 선수에게 상처를 입힌 때,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에게 갑자기 환호가 쏟아졌다. 객석에선 그의 이름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상대를 일으켜 세우려던 그는 뜻밖의 반응에 들떠 웃어젖혔다. 쓰러진 사람을 두고 웃어버린 그의 모습은 <정복자의 웃음>으로 온갖 지면에 실렸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가 긴장감 넘치는 대결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함께 무대에 오른 상대 선수를 극한으로 몰아세우기 시작한 것이. 그에게 몸을 부비던 드래곤은 그의 파트너가 아닌 무기가 되어 상대의 몸을 할퀴고 물어뜯었다. 무대에 상대 선수의 피가 흘러도, 불운한 패자의 비명이 객석까지 울려도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도리어 한껏 들떠 환호를 보낼 뿐이었다. 타인을 짓밟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을 그가 대신 실현해줬기 때문이었다. 잔인한 무대를 펼치는 엔터테이너로서, 모두의 욕망을 투영한 정복자로서 그는 줄곧 사랑받았다. 오랜 외로움도 거의 걷혀가는 듯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 한 켠엔 언제나 불안이 있었다. 만일 관객의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간다면? 인기를 얻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가 단시간에 모두의 사랑을 받는 선수가 되자 그를 모방하는 이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2의 자크>란 이름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건 그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이미 달콤한 성과를 맛본 이상 이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또다시 주목받지 못하고 외롭게 말라갈 수는 없었다.

  만약, 그가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정복자가 된다면. 인간을 넘어선 괴물이 되어 아예 세상을 지배한다면? 무시무시한 생각을 품은 채 그는 마지막 무대에 올랐다. 여느 때와 같은 승부를 기대했을 관객 앞에서, 그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을 벌였다. 그동안 제 무기가 되어주었던 드래곤 4체와 자신을 융합한 것이다. 몬스터와 합쳐진 인간이 보통의 인간으로 남을 순 없다. 하나로도 위협적인 드래곤을 넷이나 틀어쥔 그는, 바라던 대로 괴물이 되었다.

  세상을 파멸로 몰아간 괴물의 탄생도, 결국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서 출발한 재앙이었던 셈.

  “너는 인간의 욕망에 기대고 있잖아. 모두의 욕망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기생해 네 욕망을 채우지. 거기서부터 틀려먹었던 거야.”

  그러니 여자의 말을 부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녀가 짚은 대로 괴물은 아직 인간성을 버리지 못했고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도 않았다. 그 증거가, 여기서 여자를 두고 도망치지 않는 것. 여자를 찾아낸 때, 이곳에서 만난 유일한 타인이 그녀란 것에 불쾌해한 한편 그녀라도 있어 안도했던 괴물이었다. 여자와의 대립은 애초에 불공평한 승부였음을 괴물은 새삼 깨닫는다. 이 승부는 처음부터 드래곤의 힘으로 무장한 괴물이 아닌, 자연의 힘을 쥔 여자 쪽이 한참이나 유리했다.

  인간의 욕망에 얽매이는 존재와 인간의 삶을 포기한 신의 대결이라면 당연히 후자가 이길 테니.

  조잡한 바탕이 해부된 때, 괴물은 차라리 해방감을 느꼈다. 비로소 자신의 패인을 이해하고 실패를 인정할 수 있어서였다. 자꾸만 실패를 상기시켰던 여자도, 그녀의 주장도 이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와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대치하듯 거리를 유지했던 괴물은, 천천히 여자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혹은 그녀의 얼굴에 걸린 표정을 보다 선명하게 읽기 위해.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따라붙었다. 어쩐지 발이 축축한 듯했으나 괴물은 발을 확인하지 않고 여자와의 거리를 좁힌다. 걸어갈수록 둘은 가까워지고, 여자의 얼굴에 비친 감정도 조금씩 선명해진다. 이제 괴물은 벼랑 아래 호수까지 닿았다. 벼랑으로는 올라가지 않았기에 여자를 눈에 담으려면 여전히 한참 올려다보아야 했지만, 그녀와 서로를 살피며 대화할 정도로는 가까워진 듯했다.

  “아마 네 뜻대로 되었다 해도 너는 외로움에 미쳐버렸을걸. 너를 봐줄 관객이 세상에 한 명도 남지 않았을 테니까.”

  여자가 말을 마친 때 괴물은 호수에 비치는 제 모습을 눈에 새겼다. 드래곤과 결합하며 무시무시한 괴물로 변모했던 그인데, 물에 그려지는 모습은 인간이었던 때의 것이다. 아직껏 인간의 감정을 버리지 못해서인지.

  “차라리 이렇게 되는 게 나았다고?”

  “사실은 조금 유감이야. 난 이번 대의 인간에게만 기회를 준 게 아냐. 그쪽에게도 기회를 줬어. 새롭게 시작해 다시인간으로 사랑받으며 살 기회를 말이야. 그렇지만 너는 그 기회를 버렸지.”

  “이번에야말로 다시, 패왕룡 자크로 영원히 남을 수 있을 줄 알았거든.”

  “어쩌겠어. 네 말대로 인간은 어리석잖아.”

  그 말에 무어라 반응할 생각으로 고개를 든 괴물은 여자의 발에 시선이 닿은 때 말을 잃었다. 신발을 신지 않은 양발에서 물방울이 자꾸만 흘러내리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의 발도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쏟아지는 물에 비누가 녹는 것처럼, 조금씩. 네 발, 어떻게 되는 거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여자는 미지근한 웃음을 걸치며 답했다.

  “우리는 여기서 없어질 거랬잖아. 발끝부터 천천히 흩어지는 것뿐이야. 한 방울씩 녹아내려서 결국 저 호수의 일부가 되겠지.”

  “벌써 녹아내리고 있었다고?”

  “물소리, 계속 들리지 않았어?”

  암흑 속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물소리와, 호수 쪽으로 걸어오는 내내 귀를 때린 찰박거리는 소리가 떠오른다. 어쩌면 여기서 눈을 뜬 때부터 괴물도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야말로 시선을 아래로 옮기니 어느새 조금 줄어들고 만 발이 보인다. 윤곽조차 제법 흐려진 듯하다.

  “그러니까 함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한 거야. 혼자서 이런 결말을 맞는 건, 너무 쓸쓸하잖아. 나는 문제 될 게 없지만 넌 언제나 외로움을 타지.”

  “날 위해서 같이가주겠다고? 대단한 희생정신이야. 넌 나를 끔찍하게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살짝 빈정대자 여자는 깔깔댔다. 착각하는 모양인데, 널 죽도록 미워할 만큼 그쪽에게 관심이 있진 않거든. 가볍게 건네는 말엔 감정이라곤 한 가닥도 비치지 않았고.

  “운명을 함께한 상대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고 해둘게.”

  말을 마치자마자 여자는 벼랑에서 뛰어내렸다. 이미 인간에서 너무도 멀어진 존재여서일까. 저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도 여자는 상처 하나 없이 괴물 앞에 서는 데 성공했다. 삶에 다시는 찾아들지 않았으면 했던 방해꾼은 이제, 괴물과 숨이 닿을 거리에 있다. 그의 금빛 눈에 제 모습을 새기며.

  “이젠 우리가 맞이할 결말을 인정하는 것 같네. 곧 흩어질 거라는 말에도 얌전히 서 있고.”

  “도망치기엔 이미 너무 멀리 오지 않았나?”

  “그래. 빨리 인정하는 게 좋아. 조금이라도 더 우아하게 끝나려면.”

  “우아한 종말이란 선택지도 있어?”

  “모든 게 끝나기 전 미리 움직이는 거지. 우린 아직 스스로끝날 기회가 있거든.”

  조금만 더 있으면 우리는 움직이지도 못하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무력하게 녹아가는 길밖에 없겠지. 그러니까 그 전에, 선수를 치면 돼. 여자의 흰 손가락이 호수를 가리켰다. 녹아내린 것은 물방울이 되어 흘러간다는 사실, 녹아내리면 결국 호수의 일부가 되리라는 여자의 말. 두 가지를 통해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

  “미리 저기 들어가자는 거지?”

  “두려워?”

  여자는 반문했고 괴물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호수에 발을 담그진 않는다. 여자의 말대로 스스로 뛰어드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제 와서 도망치고 싶어서도 아니라 확신이 없어서였다. 그동안 그를 막아섰던 여자가 정말로 그와 함께할 마음이 있는 걸까? 그가 먼저 발을 담그면 그것만을 기다렸다는 듯 바깥에서 팔짱을 끼고 감상하는 것 아닐까? 그가 홀로 녹아가는 걸 바라보면서 그것이야말로 괴물에게 어울리는 종말이라고 빈정거린다면?

  그렇게 홀로 흩어져야 한다면?

  머리를 내리누르는 의심에 괴물이 차마 다음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던 때. 여자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호수로 걸어 들어가더니 이내 허리까지 잠긴 채로 괴물을 바라보았다. 이것 봐. 내가 먼저 들어왔지. 목소리는 여전히 명랑하고, 얼굴엔 한 점 그림자도 드리워지지 않았다.

  “자신이 없다면 손을 잡으면 돼. 그럼 여기로 끌어줄 테니까.”

  그렇게 말할 때 여자는 정말로 한 손을 괴물에게 뻗고 있었다. 어쩌면 저를 두고 도망칠지도 모를 자, 얼마 전까지도 그녀가 사랑한 세상을 망가뜨렸던 악마에게. 인간을 뛰어넘은 자로서의 자비일까. 아니면 악마와 함께 침몰하겠다는 지독한 고집일까. 어느 쪽이건, 여자가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단 것만은 달라지지 않는다. 비로소 안도한 괴물은 여자의 손을 잡고 스스로 호수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여자처럼 허리까지 잠겼으나, 푸른 물은 생각만큼 차갑지 않았다.

  “나쁘지 않네.”

  발끝부터 녹아내리는 걸 느끼면서 괴물은 중얼거렸다. 이제 서서히 형체를 잃는 일만 남았음에도 이상하게 마음은 평온했다. 인간을 짓밟던 발톱도, 몸을 덮던 비늘도 함께 벗겨지고 있어서일까. 수면 아래 비치는 제 몸의 실루엣이, 조금씩 줄어드는 몸이 인간의 것에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괴물은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로, 나쁘지 않아.

  “지금이라면 다시 무대에 오를 자신이 있는데. 패왕룡 자크가 아닌 보통의 프로 듀얼리스트로.”

  이젠 그럴 기회가 없지만. 따라붙은 말에 여자는 자못 상냥하게 답했다.

  “그렇지만은 않아. 이게 완전한 끝이라곤 말한 적 없는걸.”

  네 분신들을 기억하지? 너에게 휩쓸리지 않기로 결심했던 네 명 말이야. 그 애들은 새롭게 살아보기로 했어. 타인을 해하는 괴물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길을 걷는 인간으로. 띄엄띄엄 흘러나온 설명에 괴물은 자신의 피조물인 동시에 자신이기도 했던 분신들을 떠올렸다. 세상이 그들에게 기회를 준다면, 어쩌면 그의 삶은 연장될 수도 있다.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적이 정말로 가능할진 알 수 없지만.

  “그 넷은 살아남은 모양이지?”

  기대 없이 건넨 말에 바로 답이 돌아왔다.

  “새로 기회를 줘도 된다고 판단했어.”

  “세상이? 아니면 네가?”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잖아.”

  “너는, 그 넷을 믿나?”

  어떤 의미론 그 넷 모두가 나이기도 한데? 차마 소리 내어 흘리지 못한 말을 여자는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렇지만 너처럼 살지 않기로 마음먹었잖아. 웃음 띤 목소리가 귓속에 파고든다.

  “……그렇게 외롭진 않을 거야. 그 애들이라면 분명히, 세상에 사랑받을 길을 찾을 테니까.”

  자꾸 녹아내리며 물이 불어난 탓인지, 아니면 그들이 점점 잠기고 있는 것인지. 이제 물은 둘의 가슴께까지 차올라 있다.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십 분? 오 분? 머잖아 모든 게 끝나리란 걸 짐작하고도 괴물은 웃는 낯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이 엉켰고, 이번에는 괴물이 먼저 움직였다. 그러면 됐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괴물은 여자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대로 잠수했다. 무력하게 흩어지기 전 스스로 종말을 맞기 위해.

  물 속인데도 희한하게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만 들 뿐이다. 몸을 담그기만 하고 있을 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기 때문일 테지만, 이 순간 괴물이 느끼는 감정엔 서글픔도 두려움도 없다. 어쩌면 전보다 자유로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랜 외로움에서도, 사랑받아야만 한다는 압박에서도 해방되고서 진정 <모두를 위해> 무대를 꾸밀 기회를 얻는 것이다. 관객의 환호를 받는 건 가 아니더라도, 그의 소망은 언젠가는 꼭 무대에서 이뤄질 것이다. 그러면 됐어. 같은 말을 한 번 더 읊은 괴물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전엔 상상조차 하기 싫었던 종말이 이제는 그저 하룻밤 잠처럼 느껴졌다. 다시 펼쳐진 암흑은 꿈처럼 안락했고 시시각각 덮쳐오는 물결은 거칠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에는 손을 잡아주는 이가 있었다. 세상을 위협했던 괴물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고, 끝까지 함께 침몰해준 이가 있다. 손을 타고 느껴지는 온기에 감사하며 괴물은 의식을 닫았다.

  외롭지 않은 종말이었다.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장슌ts] 계약은 신중하게  (0) 2021.11.30
[사장슌] 악령의 밤 일시동맹  (0) 2021.10.31
[유리] 괴물의 온실  (0) 2021.07.10
[유야유즈] 아주 사소한 종말  (0) 2021.03.15
[레이라] 포식  (0) 2021.01.31
Posted by 현소야 :

[유리] 괴물의 온실

2021. 7. 10. 22:39 from 02

 

  소년은 스스로를 식물을 돌보는 게 취미인 사람이라 소개하곤 했다. 그 문장에 거짓은 없었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고부터 자기만의 온실을 만들었고, 여유 시간을 식물을 살피는 데 썼다. 취미에 대해 들은 사람들이 식물을 가져와 이름을 물으면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답해주었다. 물을 많이 먹는 꽃이니 자주 물을 주고 흙이 마르지 않도록 점검해야 해. 따위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그러니 세상의 눈에 비친 소년은 어디까지나 식물을 사랑하는, 무해한 인간이었으리라. 생명을 아끼는 이를 나쁘게 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소년과 줄곧 함께해온 청년은 안다. 소년은 식물을 좋아할 뿐 진정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아니란 것을. 나긋한 어투와 앳된 얼굴 아래 섬뜩한 면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지금 사람들이 보는 소년이란, 소년 그 자체라기보다 그가 덮어쓴 이미지에 불과하다. 여유로운 모습도 느긋한 태도도 그의 일부일 뿐 무해함의 증거가 아니다. 소년의 본질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나태한 맹수이리라고, 청년은 생각한다. 송곳니도 발톱도 단숨에 먹잇감을 찢을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다. 당장은 사냥을 하지 않아도 되기에 숨기고 있을 뿐.

  그렇다 해도, 소년이 식물을 좋아한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의 온실에 발을 들인다면 그 사실이 더 와 닿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날부터는 소년을 이전처럼 볼 수 없게 되겠지만.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소년이 키우는 것을 확인한 때 바로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갈 것이다. 청년이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있는 건 소년과 취향이 비슷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취향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뿐. 어쩌면 무뎌져가는 것일 수도 있다. 평범한 사람의 수준에서 아득히 멀어진 소년의 취향에. 그의 미학에.

  오늘도 청년은 그 괴상한 온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초대받은 것도, 설렘을 안고 방문하는 것도 아니다. 임무에 나설 때를 제외하면 소년이 머무는 곳이 그곳이기에 향할 뿐이다. 소년의 곁에 머물며 그의 이해자인 체 구는 게, 청년이 진짜임무를 수행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으므로.

  어려서부터 엘리트로 인정받고 수많은 전공을 쌓아온 소년에겐 통제할 수 없는 위험성이 잠들어 있다. 언제 악마 같은 본성이 깨어날지 모르니 지켜볼 수밖에. 청년을 소년에게 붙이며 이곳의 수장이 흘린 말이었다. 상부의 지시는 소년과 친구처럼 지내라는 것이었지만 그 아래 숨겨진 말이 <감시역이 되어라>인 것쯤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 청년은 슬그머니 소년의 삶에 끼어들었고, 그의 흥미를 끌 법한 여러 일을 한 끝에 소년의 친구 행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소년은 청년 앞에서, 남들은 모를 면까지 보여준다. 감시 대상에게 신뢰를 산 결과겠지만 그렇게 확인한 소년의 내면은 하나같이 보통 사람의 시각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섬뜩한 것들이었다. 가장 오싹한 건, 소년의 섬칫한 면모 아래 별달리 악의가 비치는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손에 넘겨진 새끼 맹수나 순진한 악마를 보는 듯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종()에게라면 그런 면도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년은 인간의 틈에서 인간의 외형으로 살고 있다. 앞으로 계속 소년의 친구 역을 연기한대도 청년은 소년이란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소년의 온실에 들어서고도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소년의 이질성에 적응해갈 뿐이리라. 세상엔 이러한 괴물도 있는 법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그 괴물에 언제까지 매여야 할지는 알 길이 없지만.

  온실 입구 앞에 선 청년은 유리벽 너머, 녹색으로 물든 풍경을 눈에 담으며 심호흡했다. 소년의 기괴한 취향에 그럭저럭 익숙해졌다곤 하지만 아직도 온실에 들어서기 전엔 긴장이 되는 그였다. 얼마간 숨을 고른 후에야 청년은 걸음을 다시 뗄 수 있었다. 잠가두지 않은 문은 살짝 미는 것만으로 열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청년은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입구 쪽의 식물은 그래도 무난한 편이다. 정말 섬뜩한 건

  생각이 멎었다. 어딘가에서 뻗어나온 덩굴이 오른손을 휘감은 탓이다. 팔을 흔들어 풀어내려 해도 제법 억센 힘으로 감싸고 있는 터라 쉽지 않다. 소년의 온실에서 자라는 식물이란 대개 이런 것들이었다. 언제나 먹잇감을 찾는, ‘침입자를 귀신같이 감지하고 공격하는 것. 식물에서 연상하는 무해한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포식자처럼 구는 생물.

  지금처럼 붙들리거나 공격당했을 때 빠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청년은 경험으로 안다. 붙잡히지 않은 손을 급히 주머니에 찔러넣은 청년은 미리 준비한 것을 꺼냈다. 이곳에 올 때 빼먹지 않고 챙기는 것, <먹이>였다. 작은 곤충을 짓이겨 만든 블럭을 던지자 포식자의 관심은 그쪽으로 옮겨갔다. 덩굴에서 풀려나자마자 청년은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입구 쪽 식물은 무난한 편이란 판단도 이제 수정할 때가 된 듯했다.

  시작부터 호되게 당하고 나서일까. 청년의 불운도 딱 그 정도였던 것일까. 그 다음부터는 식물에게 붙들리는 일은 없었다. 대신 청년은 중심부로 향하는 내내 제 등에 시선이 따라붙는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에 시달렸다. 그것도 한둘의 시선이 아니다. 온실에 있는 사람은 방문자인 청년과 주인인 소년뿐일 텐데. 꼭 수많은 식물이 침입자를 응시하는 것만 같다. 불쾌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긴 청년은 목적지에서 익숙한 형체를 발견했다. 식물의 잎을 정성 들여 닦아주고 있는 자. 온실의 주인.

  이제 열너댓 살이나 되었을까,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얼굴에 청년의 시선이 내리꽂힌다. 언뜻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 아래 흉포한 본성이 깔려있다는 건 이곳에서도 청년을 포함한 극소수만 아는 사실. 아마 상부도 그가 어느 정도로 위험한 인물인지 잘 알지는 못할 것이다. 온실의 식물이 밖에서는 그저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희귀 식물로 보이는 것처럼.

  “그거, 사람도 먹어?”

  식물을 돌보는 데 열중해 돌아보지도 않는 소년에게, 청년은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방문자가 온 것쯤이야 소년도 기척으로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대뜸 엉뚱한 말을 건네는 것은 단지 소년의 관심을 저에게로 끌어오기 위해서일 뿐.

  “필요하면 그렇게 하겠지.”

  아끼는 식물을 화제로 삼으면 관심을 끌 수 있으리란 생각은 적중했다. 즉답한 소년은 잎을 닦던 헝겊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는 방문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다음은 청년의 손을 잡아 장난스레 말하는 것이었다. 어디 보자, 손가락도 팔도 멀쩡한 걸 보니 아직 프레데터 플랜츠에게 먹히진 않은 모양이네. 나긋한 목소리와 천진한 웃음이, 입에 올린 말의 무게와 대조되어 섬뜩했다.

  “오늘도 너무 요란스레 맞아주던데. 먹이를 주지 않았으면 먹혔을지도.”

  “너에게 관심이 있나 봐.”

  “그런 관심은 사양이야.”

  “글쎄. 친해져서 나쁠 건 없지 않나? 혹시 모르잖아. 언젠가 프레데터 플랜츠가 데니스 맥필드를 지켜줄지도.”

  그때 소년이 매만졌던 식물의 가지가 슬금슬금 청년에게로 휘어졌다. 소년의 말에 반응하기라도 한 것처럼. 얘네, 제법 똑똑한 녀석들이거든. 소년의 말이 귀를 때렸다.

  “그 점이 무서워. 언젠가 온실을 빠져나갈 것만 같아서.”

  “하긴, 이런 곳에서 서로 빽빽하게 붙어있기만 하면 답답하겠지? 문을 열어주면 바깥까지 덩굴을 뻗으려나.”

  “유리도 참, 무서운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니까.”

  “내가 주는 먹이론 분명히 만족 못 해.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언젠간 틈새로 가지를 뻗어서라도 싱싱한 먹이를 찾을걸?”

  말라비틀어진 곤충 블럭만 삼키기엔 포식식물이란 이름이 아깝잖아. 녀석들을 여기에 가둬서 그런 먹이를 주는 것도 마음이 아픈데. 투정처럼 흘린 말만 들으면 꼭, 소년이 무해한 생물을 어쩔 수 없이 숨겨두고 있는 것만 같다. 소년의 온실에 드나드는 외부인이 청년뿐인 건, 이곳 식물이 절대 바깥에 내놓을 수 없어서인데. 이곳에서 자라는 모든 것이 소년만큼이나 기괴한 생물이어서인데.

  수많은 식물이 피워낸 꽃에, 그만큼 짙은 꽃향기에 가려져 있을 뿐. 온실 어딘가에선 언제나 부취가 난다. 소년이 몰래 들여온 특식 때문이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동물의 사체를 모아두었다 식물 앞에 꺼내놓는 소년을, 청년은 몇 번이나 보았다. 때로는 그 사체 더미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먹이도 발견할 수 있었다. 죽기 직전의 동물을, 아껴마지않는 식물에게 내놓은 것이다.

  숨이 채 끊어지지도 않은, 살아있는 먹이를 포식식물이 삼키도록.

  입을 벌리듯 꽃잎을 열고 먹이를 낚아채가는 식물의 정체를, 청년은 알지 못한다. 식충식물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으나 이곳의 생물은 그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맹수나 다를 것 없는 식물이나, 그런 식물을 몰래 키우다 못해 산 동물까지 던져주는 소년. 식물이 먹이를 분해하고 게걸스럽게 삼키는 과정을 들뜬 얼굴로 지켜보는 소년을 목격할 때면, 상부가 지적한 그의 위험성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반역자를 처단하는 전사로 선택받았다지만 반역자 앞의 소년은 지나치게 잔학했다. 단숨에 숨을 끊는 게 아니라 잘근잘근 짓밟다 처형하는 모습은 꼭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포식자를 연상시킨다. 희생자가 목숨만 살려달라 애원할 때도, 깨끗하게 죽이라고 소리칠 때도 소년은 재미있다는 듯 깔깔댈 뿐. 처형을 사냥처럼 여기는 그가 몰래 포식식물을 키우는 것을 단순한 취향 문제라 할 수 있을까?

  사실은 포식식물의 기괴한 사냥을 관람하고 싶은 것이라면? 살아있는 먹이를 슬그머니 던져주는 것도, 단순히 식물을 아껴서가 아니라 보다 생생한 사냥을 보고 싶어서라면?

  아직껏 청년은 온실의 실체에 대해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있다. 만일 소년이 키우는 식물의 정체와, 식물에게 동물 사체를 비롯한 온갖 먹이를 던져주고 있단 것까지 알리면 상부는 즉시 소년을 위험인물로 판단할 것이다. 단순히 경계하는 걸 넘어서, 그를 가두거나 힘을 빼앗는 것까지 고려할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건 아직은 신중하기 위해서인 동시에.

  “가지가 너무 가까워. 얼굴이 긁힐 뻔했잖아.”

  두려워서이기도 했다. 저를 보는 소년의 눈, 지나치게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가 파충류의 그것을 닮았다고 청년은 생각한다. 들여다볼수록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을 보는 것 같은 소년인데 발상마저 인간 같지가 않다. 소년에게 제대로 휘말리면 어떤 일이 생길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힌다. 만일 상부에 소년의 비밀을 일러바치다 본인에게 들키게 된다면? 그 바람에 온실로 끌려와 이 기괴한 식물의 먹이로 던져진다면?

  아마 그런 날이 오더라도 소년은 보랏빛 눈을 빛내며, 아끼는 식물의 사냥을 지켜볼 것이다.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굳이 뽐내는 일 없이 조용한 관람자 역을 맡는 것이다. 먹잇감이 비명을 질러도 도와달라고 매달려도 사냥의 관객으로서 생생한 발악을 눈에 새기리라. 소년에겐 인간을 향한 애정도, 연민도 없으므로. 살갗에 닿을 듯 가까워진 가지에 <최악의 결말>을 생각하고 만 청년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고.

  “겁쟁이라니까.”

  소년이 슬쩍 가지를 건드리자 청년을 휘감을 듯했던 가지가 거짓말처럼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래서 언제 친해지려고 그래? 장난스레 덧붙이는 목소리엔 청년에 대한 경계나 의심은 비치지 않는다. 아직은 믿어주는 것인지, 아니면 청년의 진짜 역할을 뻔히 알고도 못 본 체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장 사냥감이 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청년은 안도했다.

  상대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는 이런 관계는, 친구라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상부가 의도한 대로 감시역이 감시 대상을 온전히 틀어쥔 관계라 보는 것도 어렵다. 정보를 쥔 것도 상대를 속인 것도 청년인데 관계의 키를 쥔 것은 처음부터 소년 쪽이었다. 사고도 행동도 인간의 범위를 아득히 넘어선 괴물을, 어떻게 인간의 방식으로 묶어놓을 수 있을까. 어떻게 재앙의 앞일을 예측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리란 음울한 예언이 머리를 스친다.

  애초 상부의 뜻대로 소년의 삶에 뛰어든 것부터 잘못된 일이었다고. 그 날부터 반전의 기회 따위 없이, 천천히 타는 불길 속에서 옷이 그을리는 걸 보고 있을 뿐이라고.

  “너는 나랑 비슷한 취향인 줄 알았더니.”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난 식물을 키우는 데는 별 관심 없어. 네가 좋아한다기에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지.”

  “이해라. 좋은 말이야.”

  그러니 청년은 감시 대상의 웃음에 긴장할 수밖에 없다. 갑자기 거리를 휙 좁히는 것도,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것도 진심을 시험하기 위한 압박으로만 느껴진다. 그럼 내가 뭘 꾸미든 받아들이려 노력하겠지? 은근하게 속삭인 말도. 청년에게 선택지 따위 없다. 임무를 위해서건 생존을 위해서건 정해진 답을 흘려야 할 뿐이다. 물론. 살짝 떨려 나온 답에 소년은 웃었다. 좋아, 데니스 맥필드에게만 알려줄게. 내가 프레데터 플랜츠를 키우는, 가장 큰 이유. 자못 상냥하게 흘린 말에는 흡족함마저 밴 듯했다.

  “힌트는 지금 네 근처에 있지.”

  “어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네 머리에 침을 흘리고 있어. 미안, 네가 먹음직스러운 모양이네.”

  괴상한 말에 고개를 든 청년은 제 머리를 삼킬 듯 입을 쩍 벌린 <괴물>을 보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소년을 무시무시한 포식자로 만들어준 그의 무기, 그의 말을 따르는 드래곤이 기척도 없이 두 사람의 곁에 와 있었다. 전투에 내보내지 않을 때면 드래곤을 온실에 대기시킨다는 말을 언젠가 소년에게 듣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이 마비되고 만다.

  두려움으로 얼어붙은 청년을 달랜 것은 소년의 목소리였다. 안심해. 먹게 하진 않을 테니까. 스타브 베놈은 내 명령이 없으면 사냥을 하지 않아.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한 소년이 드래곤의 몸체를 쓰다듬자, 괴물의 입이 천천히 닫혔다. 그럼에도 머리에 한 번 더 축축함이 느껴진 건 삼키지 못한 침이 또 한 방울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청년은 머리칼을 닦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물었다.

  “스타브 베놈이랑 프레데터 플랜츠가 무슨 관계가 있단 거지?”

  “스타브 베놈은 말이야. 프레데터 플랜츠의 세력에 비례해 강해져. 프레데터 플랜츠가 내뿜는 물질이 스타브 베놈을 성장시키거든. 이것 봐, 발톱이 전보다 훨씬 날카로웠지. 몸집도 커졌고.”

  “드래곤이 잘 자라날 환경을 만들고 있는 거네. 확실히 전에 본 것보다 상태가 좋아졌어. 그런데…….”

  그새 너무 커지지 않았나?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의문이었다. 본래도 거대했던 드래곤은 좋은 환경에서 자라며 단기간에 부쩍 커졌다. 이대로라면 오래지 않아 온실에서 머물기 어려워질 것이다. 주인처럼 흉포한 드래곤이 좁은 공간에 몸을 구겨넣는 걸 좋아할 리 없으니. 이러다 네 드래곤이 이곳에서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 어떡할 거야? 슬그머니 덧댄 물음에 뜻밖에도 바로 답이 돌아왔다.

  “그때가 되면 스타브 베놈에게 새 집을 마련해줄까? 여기를 부수고, 아카데미아 전구역을 프레데터 플랜츠로 채우는 거야. 스타브 베놈이 널찍한 집에서 언제나 배부르게 살 수 있도록!”

  한껏 들뜬 목소리에 청년의 혀가 굳었다. 괴물에게나 가능할 끔찍한 발상에 어떤 말을 얹을 수 있을까. 소년은 온실을 열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드래곤을 풀어놓는 건 물론, 사람들이 사는 곳을 죄 포식식물로 덮어버릴 상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끼는 드래곤을 해방시키겠다는 이유로. 소년의 뜻대로 되면 두 사람이 소속된 집단과 그들이 살아온 땅은 전부 드래곤을 위한 제물이 되고 만다.

  아니, 그 선에서 멈출 수 있을까? 인간의 모습을 덮어썼을 뿐 내면은 괴물과 다를 게 없는 소년이 청년의 예상 범위에서 움직일 것 같지 않다. 이곳을 드래곤을 위해 넘겨주고 나면, 어쩌면 다른 지역까지 노릴지도 모른다. 청년이 가끔 넘나들었던 타지, 이차원에까지 마수를 뻗치지 않으리라 어떻게 장담할까. 모든 걸 집어삼킨 드래곤이 울부짖으면 괴물에게 또 새로운 차원을 안기고, 또 많은 이를 제물로 바쳐서 청년은 눈앞에 그려지는 처참한 미래를 지워내려 애썼다. 생각할수록 무력해지기에 그랬다.

  드래곤보다 더 끔찍한 괴물, 소년이란 악마가 무엇을 꾀하든 절대 막아서지 못하리란 점에서.

  먹이는 충분할 거야. 프레데터 플랜츠는 물론 스타브 베놈의 것까지도. 반역자가 넘쳐나잖아. 한두 명씩만 던져줘도 배부르게 먹일 수 있겠지? 청년이 삼킨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떠들어댔다. 앳된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기까지 하며.

  “……그래서 말인데, 데니스. 내가 한 얘기 프로페서에겐 이르지 않을 거지?”

  마침내 끔찍한 계획을 전부 털어놓은 소년이 건넨 말이었다. 가볍게 떠보는 게 분명한 물음이었으나, 청년은 바로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런 건 왜 물어?”

  “그야, 아카데미아 소속이라면 누구든 프로페서를 따르게 되어있으니까.”

  “이야기할 리가. 친구의 일을 일러바칠 순 없지.”

  상부의 지시대로라면 낱낱이 고해야 할 일이었으나 청년은 그럴 마음은커녕 소년의 계획을 머릿속에 남겨둘 의지조차 없었다. 기억을 삭제할 수만 있다면 깨끗이 지우고 싶을 정도였다. 인간의 그릇으론 다 담아낼 수 없을 괴물의 이야기를. 둘 사이에 오간 이야기는 친구끼리의 비밀로 남겨두면 되었다. 상부는 물론 믿을 수 있는 사람 앞에서도 그런 이야기 따위 꺼내고 싶지 않았다. 말하는 순간, 섬뜩한 기억이 되살아나기만 할 테니.

  “하나 당부할 게 있는데, 유리. 프로페서 앞에선 절대 티 내지 마. 네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 스타브 베놈을 어떻게 키울 생각인지. 그리고…….”

  “당연히 프레데터 플랜츠에 대해서도 말 안 해. 내 계획을 이해하지도 못할 인간들에게 들킬 생각 따위 없거든.”

  “잘 생각했어. 이런 건 나 정도나 이해할 일이야.”

  그렇게 말하며 청년은 겨우 웃음을 꾸며냈다. 그것은 소년에 대한 두려움과 입을 다물기로 한자신을 향한 혐오를 감추기 위한 가면이었다. 청년의 웃음에 가려진 감정을 모를 소년은 역시 데니스는 내 편이라니까. 라고 자신만만하게 받아칠 뿐.

  다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청년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일상 이야기가 오간 것 같긴 하나,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어 무슨 물음에건 적당히 답하기만 했던 터라 대화의 내용은 떠오르지 않는다. 소년에게 인사하고 제 방으로 향할 때 소년이 웃고 있었던 걸 보면 다행히 청년의 답이 그의 심기를 거스르진 않은 모양이었다.

  다만 온실을 나설 때 청년의 손에는 화분이 하나 들려 있었다. 선물이랍시고 소년이 건넨 화분으로, 온실에 있던 어린 식물 한 뿌리를 그대로 심은 것이었다. 화려한 색채를 뽐내는 꽃이 제법 진한 향내를 풍겼으나 청년은 코를 찌르는 꽃향기가 불쾌하기만 했다. 온실에서 자라던 것인 이상 아무리 예뻐 보여도 포식식물일 게 뻔했다. 얼마나 많은 먹이를 삼켰기에 꽃도 향도 이렇게 생생한 걸까.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자꾸만 얼굴을 찡그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소년이 건넨 선물을 아무렇게나 처분할 수는 없다. 치워버리거나 죽게 내버려두면 언젠가 선물을 확인한 소년이 호의가 무시당했다며 화를 낼지도 모르니. 어쩔 수 없이 방 한쪽, 볕 드는 곳에 화분을 내려놓은 청년은 주머니에서 <먹이> 블럭을 꺼내 화분 쪽으로 가져갔다. 그 섬뜩한 식물이 이미 배부른 상태이기만을 바라며.

  다음 순간 청년의 소망을 비웃듯 바로 꽃잎이 열리더니, 혀를 연상시키는 기다란 대롱이 손에 쥐었던 먹이를 낚아챘다. 대롱이 스쳐간 자리에 남은 액체는 꼭 드래곤의 침처럼 축축했고.

  그 바람에 덮어두고 싶었던 걸 다시 떠올리고 만 청년은 화분을 두고 욕실로 달려가야만 했다. 치미는 역겨움에, 청년은 세면대에 고개를 숙이고 몇 번이고 구역질했다. 목을 타고 꾸역꾸역 올라온 음식은 차례로 세면대에 쏟아졌다. 누구를 향한 구토인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삶에 뿌리내린 괴물, 소년에 대한 것인지. 소년을 막지 못한 저를 향한 것이었는지. 어느 쪽이건 청년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으니. 청년을 내리누르던 역겨움은, 먹은 것을 죄다 게워내고서야 멈췄다.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장슌] 악령의 밤 일시동맹  (0) 2021.10.31
[자크+레이] 무너지는 갑판에서  (0) 2021.07.26
[유야유즈] 아주 사소한 종말  (0) 2021.03.15
[레이라] 포식  (0) 2021.01.31
[쿠로사키 남매] 1225  (0) 2020.12.25
Posted by 현소야 :

[유야유즈] 아주 사소한 종말

2021. 3. 15. 01:01 from 02

 

  무대에 오른 엔터테이너가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저만을 바라보는 수십, 수백 쌍의 눈이다. 객석에 앉은 이들이 무대의 주인공에 시선을 고정하기 때문이다. 그 눈에 깃든 감정이야 다양하겠지만, 엔터테이너가 새겨줘야 하는 것이야 정해져 있다. 즐거움, 그리고 기대. 기대하고 온 사람에겐 곱절의 기대를 돌려줘야 하고, 시험하려 드는 이에겐 확신을 안겨줘야 한다. 슬픔을 누르고 온 사람도 미소 짓고 돌아갈 수 있도록, 즐거운 무대를 꾸리는 게 엔터테이너의 역할. 프로 자격 취득 후 수없이 무대에 오른 소년에겐 이미 상식 수준의 이야기였다.

  소년은 자신을 찾은 이들이, 객석을 메운 사람들이 전부 평가자임을 안다. 프로 선수로서 상대와 실력을 겨루는 것이 이번 경기의 1차 목적이지만, ‘그에게기대하는 것은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도. 사람들은 소년을 프로 듀얼리스트라고 부르기보다 엔터테이너로 칭한다. 상대 선수와 함께하는 경기를, 소년이 펼치는 공연으로 받아들인다. 설령 소년이 승리를 가져간다 해도, 그가 보여준 것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쇼가 아니었다면 관객은 그를 외면할 것이다.

  관객이 평가하는 것은 하나. 소년의 이번 무대가 얼마나 매력적이냐는 것 소년은 저를 담는 수백 쌍의 눈을 보고서 숨을 크게 삼켰다. 다수에게 평가받는 것은 익숙하다. 그들을 만족시키는 것도 쌓인 경험 덕에 어렵지 않다. 소년이 의식하는 것은 단 한 명이었다. 당장은 눈에 띄지 않으나 시선이 닿기만 하면 알아볼 수밖에 없을, 그의 소꿉친구.

  지금껏 소년의 무대, 무대의 형태를 띤 경기 중 9할은 봐왔던 소꿉친구는 이번에도 객석에 있을 터였다. 매일 같이 등하교하는 친구 사이로서, 소년의 스케줄을 훤히 꿰고 있는 주변인으로서 그의 경기를 모른 체 넘어갈 리 없으니. 분명 어딘가에는 소년 또래의 소녀가 미소를 걸친 얼굴로 앉아있을 것이다. 승리를 기원하며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년의 짧은 생에서 부모를 제외하고 그에게 가장 호의적이었던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소녀였다. 승리한다면 믿고 있었다며 안아줄 것이고, 패하더라도 응원의 말을 건넬 게 뻔하다.

  그럼에도 소년은 소녀를 의식할 때마다 가슴이 마구 뛴다. 수백 명의 관객보다 소녀 한 명이 안기는 긴장이 훨씬 컸다. 소년에게 그녀가 지켜보는 무대에 선다는 건, 반드시 최상의 무대를 꾸며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관객 모두가 용납하더라도 소녀가 바라는 것에 조금이라도 어긋나선 안 된다 소년은 객석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는 대신 상대 선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소년이 어떤 생각으로 제 앞에 섰을지 상상도 못 할 상대 선수는 그에게 온화하게 웃어주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소년은 모두의 기대대로, 능숙한 엔터테이너로 바뀐다. 긴장은 걷히고 얼굴엔 명랑한 웃음이 걸리며, 움직임 하나하나가 환호를 이끌어낸다. 소년이 불러내는 동물 극단이 승부의 무대를 유쾌한 서커스로 만든 덕에 모두가 긴장보다 기대를 안고 선수들을 지켜보았다. 물론 소년은 승부도 놓치지 않는다. 소년의 무대를 상징하는 동물 극단은 화려하게 재주를 넘으며 상대 선수의 몬스터를 무너뜨린다. 객석에서 <공연>을 즐기는 사이, 소년은 승기를 잡았다.

  이제 두어 번의 턴만 돌아오면, 끝난다. 함성 속에서 소년은 다음 패를 계산했다. 미리 깔아둔 함정으로 상대 몬스터의 공격을 막은 후, 몬스터 효과로 공격력을 증폭시켜 상대 선수를 직접 공격하면. 생각을 끊은 것은 상대 선수였다. 웃음 띤 얼굴로 경기를 시작했던 그는 승부의 추가 기울자 여유를 잃은 모양이었다. 굳어진 얼굴에서 언뜻 분노가 비쳐, 소년은 긴장했다. 다음 순간 무대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상대 선수가 지휘하듯 손짓하자마자 필드에 남아있던 몬스터가 소년의 동물 극단에로 돌진했다.

  찢어버려! 날카로운 목소리가 머리를 울리더니 이내 객석에서 비명이 터졌다. 몬스터의 무시무시한 발톱이 소년이 소환한 동물의 배를 찢은 것이다. 그렇게 하나가 빛으로 허물어지자, 다음번 몬스터는 동물 단원의 팔을 뜯어버린다. 서커스를 연상시키던 무대는 단숨에 끔찍한 결투로 바뀌었다. 그런 어린애 장난 같은 짓 그만두고, 제대로 맞서! 엔터메랍시고 쇼를 하는 거 같잖으니까. 상대의 악에 받친 외침에 소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승리는 소년에게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는데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경기에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객석에서 눈을 빛내며 박수를 치던 아이들이 하나둘 울음을 터트렸다. 부모의 시선에도 걱정이 깃든다. 무대에서 보여줘선 안 될 것이 자꾸만 펼쳐져서이리라. 소년이 방어에 치중하는 사이, 상대의 몬스터는 필드마저 무너뜨린다. 환상으로 쌓아올린 도시가 포탄에 부서지는 광경은 즐거움 대신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소년도 그쯤 되니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다. 승부를 내지 않으면 꼭 전장 같은 끔찍한 풍경만을 관객에게 보여주게 된다.

  어떤 경우에서도 이런 싸움, 관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소년이 가장 의식하는 관객, 소녀에게라면 특히 더. 계산은 빨랐다. 소년은 계획한 대로 함정을 발동시켰고, 상대의 몬스터를 파괴했다. 무대에서 날뛰던 몬스터가 부서지는 걸 무심히 바라보며, 소년은 다시 자신의 동물 극단을 지휘한다. 이것 봐. 점잖은 척 하더니 나랑 똑같잖아! 상대의 낄낄거림이 머리를 친다. 이런 거 너도 익숙하잖아. 똑같은 괴물이 되자고. 마지막 말은 환청으로 울렸다.

  질 낮은 도발임을 알면서도 속이 울렁거렸다. 과거 무대에서 저도 모르게 누군가를 짓밟은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경기를 끝내지 않으면. 이 경기에 먹히고 만다. 소년을 지배하는 생각은 그것뿐. 소년은 빠르게 몬스터를 불러내고, 공격을 지시했다. 방어에서 공격으로 방향을 바꾸자마자 주도권은 소년에게로 넘어간다. 기세 좋게 돌진하던 상대 몬스터가 차례로 파괴되며, 이내 상대는 방어벽을 잃었다.

  이제 아무런 방패도 없는 적을 그대로 공격하기만 하면 소년이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던 때. 거친 외침이 무대에 꽂혔다. 빨리 끝장내! 누군가 그렇게 외치자 객석 군데군데에서 비슷한 말이 터져 나왔다. 어서 공격하고 이겨! 어차피 이기러 온 거잖아! 조급하게 쏟아내는 말을 외면하고 상대만을 바라보는 소년을, 얼굴 없는 목소리가 흔들었다.

  아비처럼 도망치지 말고, 부숴서 이겨야지!

  거기서 사고가 정지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소년이 본 것은 무대에 쓰러진 상대 선수였다. ‘어떻게승부를 낸 것인지 기억은 비어있는데 이미 모든 것이 끝나있었다. 함성이 쏟아지고 박수가 터지는 걸 보니 나쁘게 끝내진 않은 것 같다. 불분명한 기억을 헤집는 대신 관객에게 공손하게 인사한 소년은, 객석에서 아는 얼굴을 찾기로 한다. 승리를 지켜보았을 사람. 어떤 관객보다도 소년에게 호의적인 소꿉친구. 단정한 얼굴을, 상냥한 푸른 눈을 찾아 소년은 객석을 훑는다. 예상대로 중앙 자리에서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때, 유즈?

  소년은 소리 없이 물었고, 답은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말보다 훨씬 강력한 수단으로. 소년이 선 자리를 중심으로, 무대에 꽃이 번졌다. 순식간에 퍼져나간 꽃이 무대를 넘어 객석으로 향하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언젠가부터 세상에 발생한 이상현상이 대개 꽃이 번지는 것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우르르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광경을, 소년은 무대에 선 채 눈에 담았다. 사람이 가득 들어찼던 경기장에 남은 것은 시야를 가득 메우는 꽃과, 오늘 경기의 주인공 둘. 그리고 객석에 남은 단 한 명의 관객.

  소녀는 소년을 보고 웃어주었지만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는 끝없이 꽃이 번지고 있다. 이상현상의 근원, 재앙의 시작은 바로 저쪽, 소녀에서부터였으리라. 그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 소녀가 바라는 무대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소녀는 평가자로서, 이번 경기를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

  아. 실패했구나.

  현실을 자각하자마자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 소년은 그 자리에 무너졌다.

 

*

 

  소년이 살아가는 세계는 동화 속 세상처럼 평화로웠다. 역사에 기록된 불행, 전쟁이나 억압 같은 비극도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행복했으며 때로 눈물짓더라도 곧 삶에서 희망을 찾아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세계가 하마터면 완전히 파멸할 뻔했다는 것은 극소수만 아는 사실. 소년은 세계의 진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한때 세계의 존망이 그에게 달려있었기에 그랬다.

  세계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과거를 한참 거슬러올라야 한다. 소년이 태어나기도 전, 지금 4개 구획으로 나뉘었던 세계가 하나였던 때. 그 시대에, 인간의 욕망을 그림자 삼아 나타난 악마가 있었다. 악마의 등장과 함께 세상은 어둠에 잠겼다. 문명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휩쓸리며 절망만이 그득했던 어느 날. 세계가 파멸하기 직전에, 한 인간이 악마 앞에 섰다. 평범한 인간이었던 그는 자연의 힘을 빌려 악마를 넷으로 찢고 세계를 재구성했다.

  다음은 악마의 조각이 다시 힘을 얻지 않도록, 세계를 넷으로 나눠 각 조각들을 하나씩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 그 역시 넷으로 나뉘어 악마의 조각 곁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악마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는지, 세계의 운명에 관여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악마의 조각이 평범한 소년들로 성장했듯, 구원자의 분신도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것만이 분명했다. 4갈래로 나뉜 각각의 세상에서, 소녀의 모습으로.

  문제는 악마였던 소년들과 구원자였던 소녀들이 딱 열네 살이 되었을 때 발생했다. 침략전쟁을 비롯해 인간의 욕망 때문에 시작된 폭력이, 오래 전 잠들었던 악마의 본성을 깨우기 시작했다. 악마의 분신들은 결국 하나로 뭉쳐 과거의 악마를 세상에 불러냈고, 세상은 또다시 파멸의 위기에 몰렸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나타난 것이 바로, 악마의 부활을 감지한 구원자였다. 네 명의 분신을 제물 삼아 나타난 구원자는 또다시 자연의 힘으로 악마를 정화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는 그때 얻은 것이다. 악마의 등장이니 세계의 파멸이니, 너무 무거운 재앙을 굳이 세상에 알리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할 뿐. 소년에게는 특히나 더, 진실을 떠들고 다닐 이유가 없다. 세상을 파멸시킬 뻔한 악마의 분신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년에게 언제나 호의적이었던 소꿉친구는 구원자의 분신이었다. 악마였던 소년과 구원자였던 소녀가 함께 다니는 광경은, 평화의 배경을 아는 이에겐 꽤 기묘한 풍경이리라.

  물론 세상의 혼란은 전부 해결되었다. 악마의 본질은 소년에게서 떠났고, 악마의 양분이 되었던 사악한 욕망은 이제 웬만해선 비치지 않는다. 어렵게 얻은 평화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소년이 노력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프로 자격 취득 후 엔터테이너로서 무대에 오르길 고집하는 것도, 단순히 어렸을 때부터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세상을 파멸시킬 수도 있었던 불씨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분명, 소년은 악마가 걷힌 후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왔다. 위험이 완전히 사라졌으므로 다시 폭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녀는? 구원자였던 소녀는? 그녀 또한 평범하게 귀환했던가?

  소녀가 관람한 경기가 끔찍하게 마무리된 지 며칠 만에, 소년은 소꿉친구의 귀환을 곱씹었다. 구원자의 부활에 동원되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았던 소녀는 기적적으로 돌아와, 그의 일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 후 표면적으로, 두 사람의 삶엔 어떤 문제도 없다. 그럼 좀 더 깊게 파고든다면?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하나하나 따진다면? 히이라기 유즈는. 소년은 노트를 펴고 소꿉친구의 이름을 적는다. 다음은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을 옮기는 것이었다.

  「히이라기 유즈는 인간이 아니다.

  소년은 자신이 쓴 문장을 속으로 읽어보았다. 상황을 냉정하게 보기 위해서 쓴 문장이지만 너무도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소꿉친구가, 누가 봐도 평범한 여자아이가 인간이 아니다. 동시에 세상에 가끔 발생하는 이상현상의 근원이기도 하다. 소녀 본인은 확실하게 말해준 적이 없으나 여러 정황을 볼 때 거의 확실한 사실이었다. 소년은 소꿉친구이자, 자신을 악마에게서 구해준 소녀가 인간이라기보다 현상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증거는 세상 곳곳에서 발생하는 이상현상 언젠가부터 자연의 힘이 폭주한다고밖에 볼 수 없는 일이 간간이 일어났다. 첫 번째 유형은 이번에 소년의 경기에서 생긴 일처럼, 갑자기 꽃이 피어나며 공간을 아예 꽃으로 덮어버리는 경우. 소년의 주변에선 가장 자주 일어나는 이상현상이기도 했다. 두 번째는 거센 바람이 불어와 그곳의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경우였다. 태풍과 비슷하지만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세 번째 유형은 해가 뜨지 않는 날이 얼마간 지속되는 경우. 한 번 발생했다 하면 사람들이 기댈 빛이라곤 달빛밖에 없었다. 사람 외 여러 동식물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꽤 골치 아픈 현상이었다. 마지막 유형은 새 떼가 나타나 피해 지역을 뒤덮는 것. 역시나 피해가 막심했고 일단 발생했다 하면 주변 생태계 균형도 깨어졌기에 사람들은 그런 날이 오지 않기만을 바라야 했다.

  첫 번째를 제외하면 전부 소년의 주변보단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으나, 소식을 들을 때면 소년은 초조해졌다. 하나가 일어나면 곧 나머지 셋도 차례로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하나 더 그를 긴장시키는 것은 이상현상의 발생을 예견할 수 있을 징조가, 꼭 그의 주변에서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소년은 경험적으로 안다. 소녀가 감정적으로 흔들리면 이상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을.

  [유우야, 너는 히이라기 유즈가 인간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

  언젠가 소년의 지인은, 세계의 진실을 아는 사내는 소년에게 물었다. 굳은 얼굴과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소년은 그가 흘리는 의문이 심상찮은 이야기임을 알아차렸다.

  [무슨 뜻이야?]

  [히이라기 유즈가 귀환한 후, 건강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검진을 받게 했다. 거기까진 너도 들었겠지.]

  [문제가, 있었어?]

  [대부분의 검사에서 인간에겐 불가능한 수치가 나오더군.]

  [검사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한 가닥 희망을 안고 들먹인 가능성에 사내는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온갖 의료기관에 검사를 의뢰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같았어. 딱딱한 말은 냉랭한 진실을 알렸다. ‘그 일이후의 소녀가 전과 같을 수 없음을. 구원자로 각성했던 일을 계기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결국 소년은 소녀의 이질성을 반쯤 인정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가설을 천천히 늘어놓았다.

  [과거에 레이가 사용했던 네 장의 카드, 자연의 힘이 깃든 카드는 드래곤 사용자, 자크와 카드 사용자 모두를 무구한 존재로 되돌리는 카드로 알려졌지. 하지만 자연의 힘을 빌려오는 대가가 정말로 아이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을까? 진짜 대가는 인간을 자연 에너지화하는 것이었다면?]

  [설마.]

  [네 전생체였던 자크는 네 몸을 통해서 강림했다. 레이도 히이라기 유즈를 비롯한 네 명의 분신이 통합되며 부활한 건 맞지만 실체를 유지할 수 없었지. 자기와는 무관한 사람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자크를 물리칠 수밖에 없었어. 사실 레이는 과거 자연의 카드를 쓴 때 이미, 흘러가는 자연 그 자체가 된 거라면? 그 분신인 히이라기 유즈도 마찬가지라면?]

  [하지만 유즈는 돌아왔잖아.]

  [자연이 인간의 모습을 빌려 나타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 무엇보다 히이라기 유즈는 인간의 모습으로 살면서 인간의 자아를 형성했으니까. ‘네가 아는사람의 모습을 취할 순 있을 거다. 그렇지만 바탕까지 인간일까?]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은데, 유우야. 그 날 사내가 꺼낸 마지막 말에 소년은 끝내 답하지 않고 돌아왔다. 정확히는 답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사내가 의문을 던지기 전부터 이미 소녀는 그가 알던 <그 사람>은 아니었다. 외형도 어투도, 행동도, 좋아하는 것도. 소년이 기억하는 것은 모두 같은데도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이 있었다. , 그녀의 기억을 지닌 타인을 보는 것만 같은.

  소녀와 함께할수록 느끼고 있다. 소년과 소녀가 악마와 구원자가 되어 대치한 날 이후, 소녀가 변했다는 것을. 소년이 악마의 본질에서 벗어났다면 소녀는 구원자의 삶을 계승한 것 같았다.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꿰뚫어 보고, ‘인간의상식을 뛰어넘는 판단을 내린다. 인간의 약점엔 성자처럼 자비로운 한편, 폭력에 대해선 심판자처럼 냉랭한 것이 소녀였다. 그런 모습은 분명, 그 날 이전까진 없었던 면모였다.

  구원자가 되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거기에 소년은 벌써 몇 번이나 보았다. 소녀 근처에서 이상현상이 시작되는 것을. 가끔은 소녀와 별생각 없이 대화하다가 코를 찌르는 향내에 주변을 둘러보면 그들이 앉은 자리 가득 꽃이 피어있기도 했다. 슬픈 일이 생긴 소녀를 위로한 밤, 분명 초승달이었던 달이 보름달로 바뀐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한 번 그런 일이 있으면 얼마간은 보름달만 떴다. 먼 곳에선 해도 뜨지 않고 달 뜨는 밤만 지속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언젠가 소녀가 부당한 일을 겪어 화가 잔뜩 났을 때. 소년은 그녀가 방문했던 곳 근처에서 돌풍이 불었다고 전해 들었다. 소녀와 함께 공원에 있다 눈물짓는 소녀 앞에 새 떼가 끝없이 날아든 것을 보기도 했다. 어떤 것이건, 소녀가 강한 감정,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는 날에는 이상현상이 일어날 낌새가 보였다. 그리고 정말로, 세계에 이유 모를 현상이 발생했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히이라기 유즈는 인간이 아니다.

  소년은 꾹꾹 눌러 쓴 문장을 다시 읽어보았다. 어쩌면 정말로 소녀는 초월자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보단 자연 그 자체에 가까워진, 때문에 자연의 힘을 마음껏 끌어 쓸 수 있는 존재. 때로는 그 힘이 폭주하여 세상에 재난을 불러올 수도 있을 존재.

  그러나 소녀가 <무엇>인지는 소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이자 든든한 아군인 소녀와 함께할 수 있다면 설령 소녀가 괴물이라도 모른 체 넘어갔을 것이다. 초월자라면 초월자인 것이고, 사실은 자연의 힘을 일부 쓸 수 있게 된 인간이라고 하면 그렇게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혹 소녀가 자신의 이질성을 알아채고서 그걸 숨기려 한다면 소년은 얼마든 그녀를 도울 각오가 되어있었다.

  진짜 문제는 이상현상이 점점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 소년의 추측이 맞다면 그것은 소녀와 연결된 자연의 힘이 폭주하기 때문이고, 폭주의 원인을 찾자면 소녀가 계속 감정적으로 흔들리고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이상현상의 근원을 대강 눈치챈 날부터 소년의 머리를 지배하는 의문이 그것이었다. 최근 소녀를 뒤흔드는 것은 무엇일까. 왜 그녀는 평화 속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자주 흔들리는 것일까. 이상현상이 일어난 날, 소녀에게 일어났던 일을 소년은 하나씩 노트에 적어보았다. 사소한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몇몇 눈에 띄는 것들이 있었다. 소녀가 무척 속상해하며 꺼냈던 이야기.

  이 평화로운 세상에서도 사람을 상처 입히는 무리.

  상대 선수를 위험으로 몰아넣으면서 인기를 끄는 프로 선수.

  그리고 소년이 무대에 오른 때, 객석에서 슬그머니 던지는 야유. 소년이 아닌, 그를 괴롭혀온 과거를 들먹이며 소년을 깎아내리는 목소리 등.

  이 세상에서 아직도 고개를 들고 사람들을 좀먹는 폭력을, 소녀는 감당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폭력이야말로 사람의 약점을 파고들며 어두운 욕망을 자극하는 그림자 아니었던가. 실제로 사악한 욕망에 먹힐 뻔했던 소년이 할 수 있는 건 자신 같은 이가 없도록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길뿐이었다. 프로 선수로 무대에 올라, 엔터테이너에 걸맞은 무대를 꾸미고, 모두가 웃고 돌아가게 만드는 것. 그 과정에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는 것.

  소녀도 그런 것을 기대하고서 소년의 경기를 관람했을 텐데.

  정작 소년은 그런 무대를 보여주지 못했다. 상대의 도발과 객석의 부추김에 휘말려 상대를 완전히 짓밟고 말았다. 소녀가 앉은 자리에서부터 꽃이 피어나 순식간에 무대를 덮어버린 건, 그만큼 소녀가 상심이 컸기 때문이리라. 믿고 응원하던 사람이, 자신이 바라지 않는 무대를 선사했다는 것에. 소년은 제 나약함을 탓하며 노트를 덮었다. 소녀에게서 시작된 꽃은 경기장 밖까진 번지지 않았으나, 소년은 소녀를 실망시켰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렇잖아도 세상엔 소녀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데.

  소녀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소년은 그대로 집을 나섰다. 바로 근처에 있는 소녀의 집을 찾아가자, 소녀 대신 그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저씨의 트레이닝복에 붙은 온갖 색의 꽃잎을 보고서, 소년은 소꿉친구에게 일어난 일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짙게 풍기는 꽃향기와 바닥에 잔뜩 흩어진 꽃에서 소년은 불길한 예감이 사실이 되었음을 알았다. 유즈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있어서 말이야. 만나줄진 모르겠네. 언제나 기운이 넘치던 아저씨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하더니, 소년에게 쟁반을 건네주었다.

  “그래도 네가 왔다면 잠깐 얼굴은 보여줄지도 몰라. 과자랑 주스 가져가.”

  소년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쟁반을 든 채 소녀의 방 쪽으로 걸었다. 걷는 내내 소녀에 대한 걱정이 피어올랐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엔 정말로 마음이 많이 상한 것일까. 그래서 또 힘이 멋대로 나온 걸까. 방에 혼자 있는 것은 괴롭지 않을까. 어떻게 말해야 만날 수 있을까. 온갖 걱정을 해소할 길을 찾기도 전에, 소년의 걸음이 멈췄다. 익숙한 방문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방. 잠겨버린 곳.

  “화났어, 유즈?”

  굳게 닫힌 문 앞에 선 소년은 조심스레 물었다. 노크를 할 자신도 없었거니와 소녀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지도 않았기에, 소녀가 아무 반응도 없으면 인사만 건네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소년의 말이 떨어지자 안에서 기침 소리가 한두 번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침묵이 찾아들었다. 역시, 안 되는구나. 빠르게 체념한 소년이 돌아서려던 때.

  문이 열렸다.

  “……날 찾아온 게 유우야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소녀는 웃고 있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위태로워 보였다. 방의 구석에 틀어박혀 몸을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짐작대로, 소녀의 방은 완전히 꽃에 덮여 있었다. 꽃밭이나 정원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 공간만 어떤 전염병이 돌기라도 한 듯 꽃에 잠식되어있었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풍경에 소년의 혀가 굳어버렸을 때. 소녀는 느릿하게 덧붙였다.

  “참고로 화난 거 아냐.”

  “내 경기를 보러 왔을 때도 이랬잖아. 꽃을, 피웠었잖아. 그거, 유즈한테서 시작되었단 거 알아.”

  나한테 실망했던 거지? 소년은 소녀의 공간에 한 발짝도 들이지 못한 채 물었다. 문이 열렸다 해서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랬다. 한편으론 자신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소녀가 혹 울음을 터트리거나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떨치기 힘든 소년이었다.

  “유우야에겐 화나지 않았어. 실망한 것도 아니고.”

  “그럼 왜 힘들어했어?”

  쟁반을 문 앞에 내려놓은 소년이 물었다. 소년이 방에 들어가지 않았고 소녀도 구석에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둘 사이의 거리는 처음 문이 열렸을 때에서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소년은 그것이 꼭, 지금 그들의 심리적인 거리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할 뿐 상대를 제대로 돌아볼 수는 없는 거리. 누구도 쉽게 나아가서 상대를 살펴주지 못하는, ‘어려운상황.

  “유우야를 그렇게 몰아세우는 분위기가, 싫었을 뿐이야. 그래서…….”

  담아둔 말을 바로 토해내기 힘들었는지, 소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순간까지도 새롭게 피어오르는 꽃을 보자 소년은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소년은 방에 들어서, 소녀에게로 향했다. 걸을 때마다 발에 채는 꽃을 무심하게 밟아가면서. 소녀에게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표정도 선명해졌다. 멀리선 그저 웃음으로 보였던 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슬픔을 누르는 표정으로 비쳤다. 역시, 괴로웠던 것이다. 유즈. 마침내 숨이 닿는 거리까지 왔을 때, 소년은 몸을 숙여, 소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난 그 날 아무 일 없이 내려왔어. 그러니까.”

  “그걸로 끝이 아니었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단 말이야. 드디어 사카키 유우야도 엔터메 같은 포장을 벗어던졌다고.”

  있잖아, 세상이 평화로워지니까 사람들이 평화를 시시하게 여겨.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즐겁게 만드는 걸 지루해해. 소녀는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단정한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소년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근심이 없으니까 서로 다투고, 엔터메가 유행하니까 더 긴장시키는것을 찾지. 내 재미를 위해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고, 내가 더 가지려 상대의 것을 빼앗아.

  “이런 세상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 그런 생각에 불안해질 때마다 세상 곳곳에서 자연이 폭주해. 그렇게라도 사람들의 나쁜 마음을 덮어버리라는 것처럼.”

  “……그래서 계속 세상에 이상현상이 일어났구나.”

  “그 일들이 전부 날 중심으로 퍼진다는 건 알겠어. 아무래도 내가 힘을 쓰고 있나 봐. 하지만 그 힘을 내가 통제하는 건 불가능해. 꽃이 피는 것도, 해가 뜨지 않고 달만 비치는 것도, 돌풍이 부는 것도, 새 떼가 날아드는 것도! 통제하고 싶어 할수록 오히려 더 심해지기만 해.”

  가느다란 손가락이 소년의 뺨을 감쌌다. 소녀는 소년을 눈에 가득 담으며 속삭였다. 너도 그랬어?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제멋대로 날뛰었던 거야? 젖은 눈에서 소년은 여러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슬픔, 두려움. 그리고 연민. 소녀 본인이 아닌, 과거 타의에 휘둘렸던 소년에 대한 안쓰러움. 이런 때조차 소녀는 너무도 상냥하다. 자신의 고통보다 소년의 상처를 들여다보려 하고, 깨진 일상보다 세상의 혼란을 걱정한다.

  그럼에도 소년을 제외한 누구도 소녀의 그런 마음을 알지 못한다. 소녀가 놓인 상황을 짐작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었다. 그렇다면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이 그녀를 감싸줄 수밖에 없다. 소년은 힘주어 말했다.

  “방법이 있어. 유즈가 그런 일에 휘말리지 않게 할 방법.”

  “뭔데?”

  “간단해. 사람들이 나쁜 마음을 먹지 않도록 만드는 거야.”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소녀의 눈이 둥그레졌다. 어떻게 하려고? 라는 물음은 기대보단 걱정이 더 짙게 느껴졌으나, 소년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가장 정석적인 길로 가야지. 어쩌겠어.”

  엔터메. 내가 배워둔 길 말이야. 난 누가 뭐래도 내 길을 밀고 갈 자신 있거든. 정해둔 답을 읊자 소녀의 얼굴이 비로소 밝아졌다.

  “유우야답네.”

  마지막 말에 그림자는 비치지 않았다.

 

*

 

  소녀를 찾은 날 이후, 소년은 경기 일정을 가득가득 채워 넣었다. 무리할 정도로 끼워 넣은 경기는 소년에게 소녀를 돕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세상을 향한 시위이기도 했다. 그는 가능한 많은 무대에 올라,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가능한 자주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평화에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긴장 없는 경기로도 충분히 즐거워할 수 있음을. 타인을 쥐어짜는 게 잘 사는 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짓밟지 않고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소년이 언제나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지극히 소년다운 방식으로 전달해야만 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이상현상이 인간의 욕망 때문에 시작된 재앙임을 알려야 했다. 사람들이 어두운 욕망을 스스로 버릴 수 있도록. 그런 생각에서 소년은, 이상현상이 일어난 지역의 무대를 자주 찾았다. 피해 지역에서 초청받을 때마다 찾아가는 건 물론, 위로공연이란 이름으로 이벤트성 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피해 지역의 관객을 만날 때면 소년은 꼭, 그곳에 닥친 재앙이 인간이 낳은 위험임을 강조했다. 인간의 욕망이 자연을 해쳐 죄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불똥이 튄 것이라고. 그렇기에 사람은 폭력이나 탐욕에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여기에 닥친 불행이, 인간이 받아야 할 벌이라는 건가요?]

  어느 날, 피해 지역의 관객이 물었을 때 소년은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답했다.

  [어떤 의미론 그런 셈이죠.]

  다음 순간 무대에 날아든 것은 제법 날카로운 돌이었다. 남의 일에 깨끗한 척 하긴. 객석에서 터진 빈정거림을 듣지 못한 체 소년은 바로 경기를 시작했다. 그런 것에 멈칫해서야 소녀를, 사람들을, 세상을 재앙에서 구할 수 없다. 이대로 두었다간 어쩌면 또 다른 악마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인간의 욕망으로 무장하여 세계를 파멸시키는 존재가.

  소년이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면서까지 꾸역꾸역 경기에 참가하는 것도, 야유를 삼키며 사람들에게 욕망을 거두라고 요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과거의 재난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소년이 악마가 되기 전 세상엔 침략전쟁과 착취가 일어났다. 그렇게 인간의 어두운 욕망이 극대화된 바람에 악마는 손쉽게 부활할 수 있었다. 그 이전의 세계 또한 폭력에 대한 갈망으로 악마가 나타날 배경을 만들어주었다. 세계의 진실을 모르는 사람에겐 소년의 메시지가 허무맹랑한 예언으로 느껴질지 몰라도, 소년은 혹시 일어날지 모를 재난을 계속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소년은 사명감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었다. 세상의 존망을 결정지을 뻔했던 자로서, 소녀를 돕기로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신념을 꺾어본 적이 없는 인간으로서. 문제를 해결하고서 세상의 오점을 지우겠다는 생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 투철한 사명감이 독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소년의 경기는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부담을 가득 안고 무대에 올랐다 상대방의 도발에 휘말리거나, 실수로 상대를 다치게 하는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 환호를 얻는 일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관객이 자극적인 무대를 바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무대가 점점 더 경직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무대만을 짜다 보니, 목적이 뚜렷한 무대만을 짜다 보니 나날이 빤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개도 결과도 뻔히 보이는 무대를 사람들은 조금씩 외면했고, 소년은 야유에 익숙해졌다. 그럴수록 상대 선수는 소년을 몰아세웠다. 찍어누르려는 의도가 선명한 전술이었다. 피하려 들면 패했고, 이기려 들면 상대와 다를 것 없는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승리해도 패해도 씁쓸한 무대가 반복되던 어느 날, 소년이 선 무대에 꽃이 번졌다.

  소녀를 또 괴롭게 만든 것이다.

  다음번에도, 다음번에도. 소년의 무대에서 이상현상이 발생했다. 소년이 재앙을 이끌고 다니기라도 하는 것처럼. 경기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일부러 소년의 무대를 찾아 이상현상이 시작되는 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때문에 소년의 경기엔 관객이 그득그득 들어찼으나, 눈을 빛내며 응원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팔짱을 끼고 앉아 <문제>가 나타나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재앙의 단서를 취재하는 기자라도 되는 것처럼.

  무리한 일정에 슬슬 지쳐가던 소년이 두통을 참고 무대에 오른 날도 예외는 없었다. 경기장에 꾸역꾸역 밀려든 관객들은 처음부터 경기를 볼 생각 따위 없는 듯했다. 분명 뭔가가 있어. 꼭 사카키 유우야가 경기할 때 시작된다니까. 수군거리며 객석에 앉은 이들은 소년을 바라보는 대신, 의심 가득한 눈길로 경기장 곳곳을 훑었다. 소년이 선 무대, 자신이 앉은 자리, 그리고.

  “저기다!”

  저기서 시작했어! 어느 순간 객석에서 터져 나온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경기를 보러 온 게 아니라 재앙을 캐러 온 사람이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에 앉은 것은, 모두가 주목하는 사람은.

  “저 여자애라고?”

  “왠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 예전에 MCS에 나왔던 애 아냐?”

  사람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소년의 머리를 때렸다. 시선이 닿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 재앙의 근원으로 지목된 희생자가 누구인지. 그곳엔 소녀가 앉아있었다. 혹 야유가 터져도 소녀가 상심하지 않게 하려고, 경기는 보러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해두었는데. 그러니 이 자리엔 없어야 하는 사람인데. 왜 하필 이런 때 경기장을 찾았는지. 왜 지금 사람들이 소녀를 찾아낸 것인지.

  그리고 소녀는 왜, 체념한 듯 웃는 것인지.

  다음 순간에 일어날 일을 소년은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소녀에게 달려들 것이다. 그동안 일어났던 재앙을 들먹이며 소녀를 죄인으로 만들 것이다. 이상현상을 겪으며 쌓여온 분노를 소녀 한 명에게 쏟아내고서, 그녀를 치우려 하리라. 소녀가 이유를 밝히건 그렇지 않건, 모두가 손쉽게 미워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소녀를 구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소년은 빠르게 판단을 마치고 입을 뗐다.

  “여러분, 저를 봐주세요! 이렇게 사실이 밝혀진 이상 고백해야만 하는 게 있습니다.”

  큰소리로 외치자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호기심과 의심이 한데 얽힌 시선이라. 사람들을 속이기 딱 좋은 판이었다. 소년은 손뼉을 쳐 다시 시선을 모으고서 말을 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제가 엔터메를 내세우며 무대를 꾸민 것엔 불순한 목적이 있었답니다. 그럴듯한 포장으로 제 본질을 속이고 싶었던 거예요. , 바탕만 따지면 전 지금 세상의 어느 듀얼리스트보다 더 추잡한 인간일 겁니다.”

  그렇게 운을 뗀 소년은 자못 진지한 어투로 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제 본성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절 꺼렸어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을 짓밟는 걸 즐겼으니까요. 그렇게 짓밟고 또 짓밟다 보니 결국 세상의 분노를 샀죠. 벌을 받게 된 겁니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망설이는 듯 띄엄띄엄 흘리는 말에 사람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였던 과거를 재료 삼아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엔터테이너로서의 연기력 덕분인지 다들 쉽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왜 제 경기마다 재난 같은 일이 일어났겠어요?”

  “그럼, 저 여자애는? 같은 편이었나?”

  이미 시작된 거짓말에 살을 붙이는 것이야 어렵지도 않다. 객석에서 날아든 물음에 소년은 바로 말을 만들어낸다.

  “, 이런 이야기엔 꼭 심판자가 등장하잖아요? 사카키 유우야를 벌하러 온 게 바로 저쪽이었던 거죠. 요즘 일어나는 심상찮은 일을 두고 자연을 해친 벌을 받는다 운운한 건 저 사람이 저에게 내릴 벌이 딱 그거여서였어요. 폭주한 자연에게 그대로 휩쓸려 죽는 거 말이에요. 혼자 휩쓸리기 싫어 그동안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려왔죠.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건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자연이 노한 것이니 욕망을 버려야 한다! 이제 고백하지만 전부 속여왔던 겁니다.”

  세상 사람들 전부를 말이지요. 마지막 말을 흘릴 때 소년은 들뜬 마음을 누르려 노력해야 했다. 사람들의 눈에 경멸이 깃드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일이 바람대로 풀릴 모양이었다. 소녀 대신 모든 걸 끌어안는 것. 그것으로 재앙을 덮어버리는 것.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이 일은 전부 나한테서 소년의 계획을 알아챈 소녀가 필사적으로 소리쳤으나, 객석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온 날 선 비난에 묻혔다. 사람들의 시선도 소녀에게서 떠난 지 오래였다. 유우야. 제발, 내가 사람들을 설득할 기회를 줘. 소년에게 향한 외침도 무대까진 닿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라기보다 원망할 대상이었으므로, 순순히 를 고백한 소년은 바로 사람들의 타깃이 되었다. 객석에 있던 이들은 우르르 무대에 올라가 소년을 붙잡았다. 여러 사람에게 붙들려 내려오며, 소년은 잠깐 객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은 소녀에게, 조금 전 그녀가 지었던 표정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었다. 체념을 띤 웃음. 텅 빈 웃음.

  경기장에서 끌려나가는 순간 소년은 언뜻, 소녀의 비명을 들은 것 같았다.

 

*

 

  소년의 처분은 빠르게 정해졌다. 다수를 고통받게 한 이상현상의 근원으로서, 또 타인을 현혹시키며 자신의 죄를 가리려 한 사람으로서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재판이랄 것도 없이 여론만으로 결정된 처분이었다. 소년으로선 변호할 기회가 아예 주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 덕에 소년은 새로 죄를 꾸며낼 이유가 없었고, 사람들의 시선이 소녀에게로 향할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대로 모두의 원망을 안고 침몰하면 그만이었다. 격리 장소로 이송되는 동안, 소년은 날아드는 야유에도 자꾸 웃음이 나왔다.

  격리 기간은 수년이었던가 그보다 더 길었던가. 제대로 듣지 않은 소년은 알 길이 없다. 이 일로 모두가 평화를 얻는다는 사실이 더없이 만족스러울 뿐이었다. 소녀는 더는 의심을 사지 않는다. 이제, 평범한 십대 소녀에게 어떤 힘이 숨겨져 있는지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재앙의 근원>을 격리시켰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심리적인 여유를 얻을 것이다. 어쩌면 재앙에서 벗어났다 생각하고서 특별한 사건 없이 흘러가는 나날에 감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년은. 짓지 않은 죄를 안게 되었다지만 그렇게 나쁠 것도 없다. 세상을 평화롭게 만든 것으로, 모두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소망이 일부 이뤄진 셈이니까. 앞으로 조금 외로울 거란 생각이 들 뿐. 그가 격리된 곳은 우리를 연상시키는 좁은 공간이었고 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엔 절대 혼자서 나갈 수 없을, 험난한 자연이 펼쳐져 있었다. 사실상 감옥에 갇힌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것도 혼자. 외부로부터의 모든 것이 끊긴 채.

  디스크에 통신 불가 표시가 뜨는 것을 확인한 소년이 좁은 벽에 기대어 미래를 생각할 때였다. 희미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를 이곳에 데려온 사람도, 식량을 가져다주는 사람도 전부 떠났는데도. 이곳은 버려진 지 오래인 곳이라 주민도 없다고 들었는데도. 수상쩍은 소리를 외면하려던 소년은, 단단히 잠긴 문이 스르륵 열리는 것을 보았다. 다음 순간 소년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이곳엔 없어야 할, 아늑한 집에서 평화를 누려야 할 사람.

  “, 여기 온 거야?”

  목소리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떨려 나왔다. 소년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어도 덤덤하게 묻진 못했으리라. 소년을 찾아와준 사람은 소꿉친구였으니.

  “‘어떻게라고 물어야 하지 않아?”

  장난스레 받아친 소녀는 열쇠를 흔들어 보인다. 이거, 아카바 레이지가 몰래 넘겨줬거든. 반신반의했는데 진짜 여기 열쇠가 맞았네. 소녀는 말을 이으며 소년에게로 다가섰다. 한 사람이 쓰기에 빠듯한 공간에 두 사람이 섰다. 이렇게까지 오지 않아도 되는데. 위로를 위해 온 거라면 얼굴만 보이고 돌아가도 되는데.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말을 꺼내는 대신, 소년은 간결한 물음을 던졌다.

  “아니. 내가 듣고 싶은 건 .”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이런 곳에 있으면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겠더라고. 그래서 나도, 세상을 위해 여기 들어가야겠다 싶었지. 바깥에서 또 이상현상이 일어나면 곤란하잖아? 위험을 여기다 가두는 거야.”

  “널 스스로 가두겠다고?”

  “네가 한 일을 나는 못 할 거라 생각해?”

  어차피 우리는 함께여야 해. 소녀는 소년을 눈에 가득 담으며 속삭였다. 누구한테서 재앙이 시작되건, 상대는 그걸 막아주잖아. 우리는 계속 그렇게 살았잖아.

  “그래도 유즈한텐 열쇠가 있으니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녀는 열쇠를 불길에 던졌다. 그녀를 다시 세상으로 내보내줄 유일한 수단은 그렇게 손을 떠났고.

  “재앙을 가뒀으니 이제 평화만이 남았어.”

  소녀의 얼굴에 그려지는 웃음을 보고서, 소년은 그들에게 놓인 결말을 직감했다. 소녀가 무엇을 각오하고 왔는지도. 아무래도 구원자는 이번마저 소년을 구해줄 모양이었다. 이미 모든 게 정해져 있다면, 받아들일 뿐. 소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가 팔을 벌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소년은 그대로 소녀의 품에 파고들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시야가 검게 물들자마자 새의 지저귐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향긋한 꽃향기가 둘만의 공간에 퍼졌다.

  비로소 낙원이었다.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크+레이] 무너지는 갑판에서  (0) 2021.07.26
[유리] 괴물의 온실  (0) 2021.07.10
[레이라] 포식  (0) 2021.01.31
[쿠로사키 남매] 1225  (0) 2020.12.25
[사장슌] 흉  (0) 2020.11.30
Posted by 현소야 :

[레이라] 포식

2021. 1. 31. 18:58 from 02

 

아이는 모든 것을 삼키는 심연이었다. 무력한 생물로서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보다 강한 타자를 삼켜 무장하는 존재로 진화해왔기 때문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삼킨 수많은 타인이 양분으로 사그라질 때마다, 아이는 그들의 모습마저 게걸스레 먹어치워 제 것처럼 둘렀다. 수많은 타자를 덮어쓴 탓에, 아이는 본래 제 모습을 기억하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아이는 자신의 원형이 무색무형의 생물이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무엇이든 삼켜야 할 존재.

그렇게 끝없이 타자를 삼키던 아이를 구해준 사람이 있었다. 물빛 눈이 꼭 렌즈처럼 빛나던 여자는 전장에서 아이를 찾아내 안온한 세계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아이가 만난 것은 저보다 몇 살 위인 사내. 여자의 아들이라는 그 사내는 아이와는 정반대로, 날 때부터 모든 것을 쥔 축복받은 존재였다. 세계적인 대기업 창업주의 아들로 태어나 뛰어난 재능으로 일찍부터 주목받았으며, 무엇이든 풍족한 환경에서 부족함 없는 교육을 받았다. 아이를 만난 시점엔 이미 창업주의 후계자로서, 부모의 기업을 물려받은 젊은 사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내와 처음 만나 악수한 날, 아이의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되었던 이름은 그에게 따라붙은 화려한 수식어가 아니었다. 사내가 내세운 형이라는 호칭이었다. 내 이름은 아카바 레이지. 우리는 언젠가 아카바 레오에 맞서 싸우게 될 거다. 그때까지 너는 아카바 레이라란 이름을 쓰며 내 편이 되어줘야 해. 메마른 목소리로 말한 사내는 희미한 웃음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어?

[네 형이 되어주겠다는 뜻이다. 레이라.]

형이라는 단어의 의미야 알고 있었다. 손위의 남자형제를 부르는 호칭. 기억이 시작된 시점부터 혼자였던 아이에겐 원래라면 부를 일이 없을 이름. 사내는 바로 그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 사내가 쓰러트릴 적이 존재하는 한, 아이는 그의동생이 되어 그와비슷한 이름을 쓰며 그의곁에 있을 수 있게 된다 그 날 형과 악수한 때부터 아이는 무색무형의 생물이 아닌, 어린 소년이 되었다. 이름도, 보호해줄 사람도, 함께할 가족도 있는 존재로.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더라. 아이는 앞장서 걷는 의 뒷모습을 보며 흘러간 시간을 생각한다. 몇 개월이었던가. 1년을 조금 넘었던가. 제대로 헤아리고 싶지 않은 것은, 사내를 형이라 부를 수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사내에겐 동생이 없었고, 아이에겐 형이 없었다. 다만 사내가 제거하고 싶었던 적을 무너뜨리기에, 아이의 힘이 필요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사내의 어머니는 전장에서 가여운 아이를 구조해온 것이 아니었다. 썩 신기한 무기를 찾아 아들에게 가져다주었다 보는 게 옳다.

실제로 아이는 의 계획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사내의 전사가 되었다. 사내가 그의 적, 침략군에 맞서려 결성한 정예병의 멤버가 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 후 아이는 리더인 형의 지시대로 이국의 전사와도 몇 번이나 싸웠고, 형에게 매번 승리를 안겨주었다. 아이를 포함한 모든 정예병 멤버들이 착실하게 적을 쓰러트린 덕에, 사내는 이제 적진의 중심부에 들어와 있다. 수년간의 준비는 빛을 보았다. 세상을 위협하던 침략군 수장을 끌어내린 그는 마지막 목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바로, 적이 준비하던 끔찍한 연구를 중지하는 것.

이대로 침략군의 비밀 연구실을 찾아, 적이 숨겨두었던 장치를 가동중지시키면 모든 것이 끝난다. 현 세계를 양분 삼아 이상세계를 만든다는 침략군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더는 침략군의 희생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며, 정예병은 해체된다. 세계가 평화를 찾고 전사는 무사히 귀환한다 동화의 마지막 페이지 같은, 바람직한 결말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아이의 얼굴엔 긴장이 드리워진다. 평화로운 세상에 무기는 불필요하다. 사내는 본디 제 형제가 아니었던 아이를 가족의 이름까지 붙여가며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다.

형을 잃게 된다. 혹은, 버려진다.

둘 중 어느 것을 더 두려워하고 있는지, 아이는 알지 못한다. 어느 쪽이건 저에겐 끔찍한 결말이란 것만 짐작할 뿐이다. 하필 사내는 연구실을 찾아가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너무 들떠서인지, 이제 아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게 되어서인지. 말 한마디 없는 형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내내 아이는 기적을 소망했다. 사내가 저에게서 아카바 레이라라는 이름을 앗아가지 않는 것이라거나. 사내의 계획이 완전히 꼬여, 계속 저라는 무기를 지니고 다니게 되는 길이라거나.

물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내는 결국, 목적지에 들어섰고 모든 장치를 가동중지했다. 적막이 감도는 연구실에서 아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절망했다.

레이라.”

곧 들이닥칠 결말을 생각하며 바닥만 보고 있던 아이는, 형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몇 걸음 앞에 선 사내가 웃는 얼굴로 손짓하고 있었다. 아이는 훈련받은 짐승처럼 그에게 향해 곁에 딱 붙어섰다.

그동안 수고했어.”

사내는 큰 손으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지만 아이는 평소와 다르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여기서 나가면 어차피 버려질 텐데. 지금 여기 선 형도, 형이 내주었던 이름도 모두 잃고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아이가 잔뜩 풀이 죽은 걸 느낀 것일까. 사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말인데, 레이라.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도와준 네게, 감사의 뜻으로 소원을 들어주려 해.”

생각한 적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사내가, 이제는 가치가 없어진 아이를 버리는 대신 최대의 호의를 베풀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가 빌 소원은 하나뿐이다. 영원히 형과 함께 있을 수 있을 길. 거절당한다면 형에게 버리지 말아달라고 매달릴 것이다. 만일, 받아준다면. 그러면 형은 그때부터 아이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소원을 토해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건.

형님을…….”

겨우 말을 마치고서 아이는 겁먹은 얼굴로 리더를, 형을 바라보았다. 어떤 쪽이건 답이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기다림은 그렇게 길지도 않았다. 흩어질 듯 여린 목소리에 리더도 속삭임으로 답했다. 원하던 답을 들은 아이는 커다란 눈 가득 형의 모습을 담고 웃었다. 이것이 서로를 마주보는 마지막 순간이 되리란 것을 두 사람 모두 알았다.

 

*

 

전쟁은 끝났다. 세상을 삼킬 듯했던 침략군은 열 명도 되지 않은 정예병에게 패배했다. 정예병을 이끈 자는, 침략군 수장의 아들이기도 했던 사내. 고작 열여섯 살의 도련님은 세계를 구하고 자신의 전사를 지켜냈으며 세상에 평화를 가져왔다. 침략군이 비밀히 진행하던 끔찍한 연구까지 중단시킨 사내는 이제 오래도록 영웅으로 존경받게 될 것이다. 마지막까지 따라준 전사들을 치하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라고 지시할 때 사내의 얼굴엔 안도와 기쁨이 걸려있었다.

귀환을 앞두고, 정예병이 승리를 축하하던 자리에서였다. 모두가 웃고 떠들 때, 이국의 저항군 출신으로 전사들 중 유일하게 전쟁을 경험했던 청년이 슬그머니 리더의 곁에 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다음은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낮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눈이 죽어있어. 리더.”

쿠로사키한테서 걱정을 받을 줄이야.”

가볍게 하는 말이 아냐.”

글쎄, 나는 괜찮은데.”

적당히 받아쳤는데도 청년은 사내를 놓아줄 기미가 없다. 맹금을 연상시키는 눈에 리더를 담을 뿐이다. 리더를 붙잡은 이유가 단순한 걱정이 아니었음은, 청년의 다음 말로 명확해진다.

레이라를 랜서즈에 넣은 걸 후회해?”

동생을 데리고 마지막 임무에 나섰던 리더는 홀로 돌아왔다. 사내의 손이 세상에의 연결고리라도 되는 양 붙잡고 있던 아이는, 그의 동생은 이제 없다. 아이의 행방을 묻는 이들에게 리더는 간결하게 설명했다. 모든 위험을 끝낸 것은 그 아이라고. 마지막 임무에는 두 사람만 뛰어들었으니 아이가 어떤일을 했고 어디로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 리더의 손을 떠나, 아마 영영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만 짐작할 뿐. 대개 소년으로 구성된 정예병에서도 제일 어렸던 아이였기에, 전사 몇몇은 아이의 결말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 중에서도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이 눈앞의 청년.

처음부터 전장이라는 지옥에 아이를 세우는 것을 마뜩찮게 본 청년이었다. 전쟁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던 사람으로서, 아이가 버티지 못할 것을 염려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리더를 보는 청년의 시선엔 책망이 어린 듯하다. 결국 염려대로 되었다고, 형만 찾던 아이를 리더로서도 형으로서도 끝내 보호하지 못했다고. 그러나 리더는 청년의 시선을 외면했다. 아이의 결말은 형제간의 합의로 정해진 것이고, 그에 타인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후회?”

네가 갑자기 음침해진 게 그 때문이라면…….”

레이라는 랜서즈의 싸움에, 마지막까지 도움이 되었어.”

그것뿐?”

승리를 기뻐해줬으면 해. 랜서즈에서 그걸 가장 기대하던 자는 너였으니까.”

너는 리더로서 전사를.”

지켰어야지. 그런 말이 따라붙을 것 같아 리더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이가 에게 정말로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완벽한 타인 주제에.

그 날의 일은 전부 레이라가 선택한 길이었다.”

그러니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면 될 것이다. 리더는 청년의 말을 자르고, 그를 뿌리쳤다.

다만 그 대화로 사내가 느낀 것은, 아이의 존재를 의식하는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리더에게 따라붙고 제 목소리 한 번 내는 일조차 드문 아이였는데도. 전사로 선발되고도 한참을 독립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아이가 세상에 뿌리내리긴 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사내의 본래 영역인 회사에서도 한두 번은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귀환한 전사를 맞이할 때, 한 명이 빠졌다는 것을 알아채고. 사장에게 매달리다시피 떠난 아이의 행방을 묻는 식으로. 이렇게 된 이상 아이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저를 제외한 모두가 서서히 잊도록. 어디에도 없는 사람은 기억에서도 걷혀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사라진 사람과 남은 자신, 둘을 위하는 길이라고 리더는 믿었다.

청년은 그 후로 아이에 대해 묻지 않았다. 리더에 한 가닥 기대조차 없어진 것인지 제 일이 바빴는지 이름을 꺼내는 일도 없었다. 리더와는 필요로 얽혔을 뿐인 청년이니 그런 건조한 태도가 되레 자연스러웠다. 그때도, 전장에서 아이들을 보호해온 습성 때문에 잠깐 그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을 뿐이리라. 오랜 싸움에서 벗어난 청년은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홀로 고향으로 떠났다. 그 뒷모습에 리더는 슬며시 웃었다. 이제 누구도 형제가 선택한 결말에 불만을 표하지 않을 것이다.

리더는 리더대로, 남은 전사를 이끌고 귀환했다. 기대와 염려를 안고 떠났던 소년병은 이제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 전쟁은 끝났고, 전사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들이 구해낸 미래를 모두가 누리며 평화가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환대하는 이들에 둘러싸였던 리더는 자신이 이뤄낸 승리를 즐기며 회사에 들어섰다. 그의 삶이 시작되고, 세상이 바라는 그가 만들어진 곳. 때문에 어떤 곳보다도 그에게 익숙한 장소에.

회사는 젊은 사장의 귀환에 들썩였다. 창업주 대부터 쌓아온 굳건한 바탕은 사장이 자리를 비운다고 흔들리지 않았으나, 사장은 이곳에서 이미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를 통해서만 굴러갈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혹은, 창업주가 뿌린 재앙의 씨앗을 그 아들이 완전히 날리고 돌아왔다는 것에 들떴는지도 모른다. 채 스물도 되지 않은 젊은 사장은 희망을 발굴해 절망을 덮었다. 자칫 악의 근거지로 취급받을 수 있었을 회사는, 악의 패배를 기쁘게 알렸다.

요란스러운 축하를 더 즐겨도 되었으련만, 돌아오자마자 사장이 한 일은 간부회의를 여는 일이었다. 종전까지 있었던 사소한 실패와 중대한 위기, 승리까지 상세하게 전달해야만 했다. 더 나아가 피해 지역의 복구와 전사에 대한 지원, 보상을 논의하는 것이 사장의 목표. 리더로서의 임무까지 포함해, 열 명도 되지 않은 이들의 성과가 낱낱이 공개되었다. 마지막은 정예병에서 가장 기대받았던 인물로 가장 큰 위기를 불러오기까지 했던 소년의 이야기였다.

리더, 그리고 여덟 명의 전사까지. 떠난 것은 아홉 명인데, 이야기는 여덟 명째에서 끝났다. 정예병 결성 계획을 사장과 함께 짰던 간부들이 일순 의문스러운 시선을 보내다 거둬들였다. 아이의 부재를 인지했다가 헤집을 일이 아님을 눈치챘으리라. ‘괴로운 실패를 굳이 자극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라기보다 무기로 취급받던 아이였지만 사장은 제법 정을 주었기에, 드러내진 않아도 슬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장이 끝까지 입을 다문 까닭에, 모두가 조심스레 미래의 이야기만 꺼냈다.

아이를 묻는 일은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장은 타자를 압박해서라도 그 이름을 감추고, 존재를 덮어야만 했다. 결국 누구도 아이를 기억하지 못해 제 머릿속에만 남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계획. 그 괴상한 소망이 어디에서 근거했는지는 사장만이 안다. 누구에게도 꺼낼 일이 없거니와 꺼내도 이해받을 수 없을 조잡한 심리.

물론, 겉으로야 사장은 조악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우수한 인간이었으며, 아이의 일을 제외하면 제가 굳이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까지 세심하게 살피는 자이기도 했다. 때문에 사장은 누구에게도 속내를 들키지 않으리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누군가 기억을 파헤치지 않는 한, 그는 언제까지나 천재 사장이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기묘한 만족감을 안겼다.

그런 사장이 마주한 마지막 난관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빡빡한 일정을 모두 끝내고 모처럼 휴식을 취할 때였다. 그가 사장직을 물려받기 전까지 경영을 도맡았던 어머니가 그를 찾았다. 한동안 자리를 비웠던 아들을 만나기 위함이었겠지만, 사장은 뜨거운 것에 데기라도 한 듯 움찔했다. 어머니의 물빛 눈을 보는 순간 제 내면이 낱낱이 해부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든 탓이다. 이전부터 그는 저 눈을 볼 때면

속에서 끓던 것은 말이 오가는 사이 가라앉았다. 어머니는 아들이 지쳤을 거라 생각했는지 무난한 이야기만 꺼냈고, 사장은 가벼이 답하며 차차 평안을 얻었다. 익숙한 곳에서 가족과 시시한 대화를 한다는 점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몸은 전장에서 벗어났고, 그를 사랑하는 모든 것이 무사히 남아있다. 어쩌면 당연한 평화에 저도 모르게 감격했을 때, 어머니가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그 애는요?”

굳이 되묻지 않아도, 그 모호한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어머니가 데려와 저에게 넘겨주었던 아이를 말하는 것이다. 사장은 길게 설명하는 대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한 가닥 감상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아이의 종말을 정리할 뿐이다.

아카바 레오에 대항한다는 목표를 이룬 것으로 끝났군요.”

전부 끝나면, 그 애도 해방시키고 싶었지만.”

괜찮아요?”

어머니에게 아이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쓸모는 있지만 정을 붙일 이유는 없는 장치. 그러니 지금의 물음은 그저 아들의 심정을 헤아려 꺼낸 예의상의 질문이리라. 사장은 신원불명의 아이를 가문에 끌어오기 위해 붙여준 허울뿐인 이름을 떠올렸다. 저와 같은 성씨. 저와 비슷한 이름. 내면이 빈 아이는 부유하지 않으려 가짜 이름에 집착했다. 심연을 연상시키는 눈에 사장만을 담으며, 걸핏하면 을 불렀다. 자의가 제거된 주제에 사장의 손은 명령 없이도 잡았다.

차라리 끝까지 인형으로 취급했다면 기대도 않았을 것을, 연민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으로 사장 역시 형제라는 관계를 진지하게 받아주었다. 어쩌면 그것이 아이가 침몰한 원인일지도 모른다. 형을 위해 무리한 요구를 기쁘게 실행한 끝에 자신마저 던져버렸을지도.

그 애는 마지막까지 후회는 없어 보였어요.”

레이지만은 따랐으니까요.”

랜서즈는 전쟁을 끝냈습니다. 희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바로잡지는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이뤘어요. 그 애의 노력을 헛되이 하지 않게, 남은 것도 차차 해결해야지요.”

그 정도면 되었어요. 형이 계속 기억해준다면, 그리 나쁜 결말은 아닐 거예요.”

기억은 계속 가져갈 겁니다. 그 애를 포함해, 돌아오지 못한 모두의 기억을.”

사장은 어머니의 입가에 걸린 웃음을 보았다. 아들의 성장이 기쁜 듯, 흡족함이 비치고 있었다.

좋아요. 레이지다운 모습이네요.”

그것은 그에게도 만족스러운 인정이었다.

 

*

 

회사로 돌아온 후로 사장이 몰두한 것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정예병을 이끌고 회사를 떠나기 전에도 미래를 위해 가능성에 투자하던 사장이었으나, 귀환하고는 모든 선택이 훨씬 과감해졌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영역에 인재를 동원하고,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곳에 거금을 투자하기도 했다. 이유를 물으면 미래를 보고 싶다는 답을 돌려주곤 했다. 처음에는 간부들조차 사장의 선택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과감한 도전은 빛을 보았다. 이제는 금기어가 된 창업주가 세상을 뒤집을 신기술을 발표했던 때처럼, 사장이 선택한 것들이 미래를 이끌게 된 것이다.

한때 사장의 판단을 위험성이 높은, 신중하지 못한 투자로 다루었던 언론에선 앞다투어 사장의 안목을 칭찬했다. 회사의 가치는 더욱 올라갔으며 사장은 미래를 연 사람으로 칭송받았다. 그렇게 짜릿한 성공을 거둬낸 사장은 어느 날, 곁을 지키던 비서에게 물었다.

최근에 내가 한 일을 어떻게 생각하지, 나카지마?”

객관적인 수치를 볼 때 성공적입니다.”

자네가 보기엔, 아카바 레이지다운 선택이었나?”

지금껏 사장님답지 않은 선택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렇단 말이지.”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벽 앞에 섰다. 그곳에 비치는 사장의 얼굴은 드물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른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둔 사내도, 축복받은 천재도 아닌 꿈 많은 소년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시군요. 사장님.”

, 그래. 나카지마.”

아카바 레이지로서, 성공했단 게 만족스러워. 사장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비서는 지금까지 젊은 주인을 모셔온 경험으로 알았다. 지금의 그는, 분명 성공에 도취되어 있다.

바라던 것은 모두 이뤘다. 이제 더 원하는 건 없어.”

사장은 저 아래에서부터 치미는 만족에 웃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자신의 유일한 소원은 가장 성공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나는 아주, 배가 불러.”

사장은, 아니, 사장을 연기하고 있는 아이는 말했다. 아이의 소망은 간결하고 악랄했다. 형님을 삼키게 해줘. 타인을 삼켜 그 사람이 되는 능력을 지닌 아이에게 딱 맞는 바람이었다. 사랑하는 형은 그것을 수락해 아이에게 남김없이 먹혀주었다. 아이는 형의 모습을 두르고, 형의 역할을 짊어지고, 형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형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누구도 아카바 레이라를 찾지 않는다. ‘아카바 레이지를 삼킨심연을 모두가 아카바 레이지로 믿고 있다.

아카바 레이지는 문자 그대로 그와 하나가 되었다.

아이는 제 속을 가득 채운 <>에 깊은 포만감을 느꼈다.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리] 괴물의 온실  (0) 2021.07.10
[유야유즈] 아주 사소한 종말  (0) 2021.03.15
[쿠로사키 남매] 1225  (0) 2020.12.25
[사장슌] 흉  (0) 2020.11.30
[사장슌ts] 존재의 증거  (0) 2020.10.16
Posted by 현소야 :

[쿠로사키 남매] 1225

2020. 12. 25. 22:45 from 02

 

커다란 케이크에 조심스럽게 초를 꽂는다. 큰 초 하나, 작은 초 여섯 개. 소녀가 준비한 케이크의 주인은, 그녀의 유일한 형제는 오늘 열여섯 살이 된다. 매년 하나씩 늘어가는 초로 형제의 성장을 확인하는 것이 소녀의 기쁨. 오빠는 생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오래도록 오빠와 단둘이서 살아온 소녀에게 형제가 탄생한 날이란 의미가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날부터 소녀의 삶은 혼자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되었으므로.

소녀에게 가족을 알려준 것도, 친구를 소개해준 것도. 그녀의 성장을 돕고 생활을 가르친 것도 오빠였다. 오빠는 그녀에게 형제였고 보호자였으며 최초의 친구였고 처음 만난 인간이기도 했다. 성장하면서 조금씩 오빠와 충돌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소녀는 오빠에 애정을 품고 있었다. 다소 고집스럽고 행동이 앞서는 면이 있긴 해도, 오빠는 소녀가 바라는 형제의 모습에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그 기준이 아주 어릴 때의 것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낡은 기준이라고 나쁠 건 없다. 오빠는 책임감이 강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울타리가 되길 자처하는 타입. 그와 함께 지내면 다치는 일이란 없다. 어려운 일은 도맡아 해주기도 하고, 애정은 결코 쇠하지 않는다. 어릴 적 소녀가 세운 좋은 형제의 기준에 잘못된 부분은 없다. 설령 잘못되었다 해도 이제 와서 오빠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빠는 이미 그렇게 굳어진 사람이니까.

유토 부를까?”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소녀는 생각을 흩었다.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오빠가 불쑥 말을 걸어온 것이다. 음식을 준비하다 문득, 손님 초대로 생각이 튄 모양이었다. 오빠가 꺼낸 이름은 남매와 제법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소년의 것. 소녀에게는 마음 가는 이성이며, 오빠에게는 유일무이한 친우라 부를 정도로 신뢰할 수 있을 대상이 바로 소년이었다.

크리스마스인데 우리끼리만 파티 하긴 조금 아깝잖아.”

덧붙인 말에서 소녀는 기대를 읽을 수 있었다. 오빠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뿐인 가족인 소녀. 가족 범위를 벗어나면 그에게 가장 소중한 타인은 소년일 것이다. 주변인에게 헌신적인 오빠가 모처럼의 휴일을 아끼는 사람들과 보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늦지 않게 줄 생각이었지만 유토도 마침 오늘 혼자 있다고 하고. 음식도 넉넉하게 준비해뒀지. 루리 너도 유토랑 있는 건 편하댔잖아. 평소답지 않게 말이 길어지는 걸 보니 오빠는 제법 들뜬 모양이었다. 소년을 부르는 것이야 소녀의 계획에도 있었던 일이므로 반대할 이유는 없다.

유토를 부르는 건 좋은데, 오빠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파티만 생각한 거야?”

다만 하나, 오빠의 말에서 걸리는 게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오빠가 중요한 일을 잊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소녀에게 오늘이 큰 의미를 갖는 건 크리스마스여서가 아닌데. 소녀가 며칠 전부터 선물을 준비하고, 전날 신중하게 케이크를 고르고서 지금 이렇게 상을 차리는 건 오빠의 생일 때문인데.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 떠보듯이 던진 말에 오빠는 여전히 답을 모르겠다는 눈치다.

그래서 이렇게 케이크까지 준비한 거 아냐? 오늘 1225일인데.”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흘린 물음에 소녀는 결국 답을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케이크, 오빠 거야.”

오빠의 눈이 둥그레졌다. 정말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 와서 봐. 오빠 나이에 맞춰 초를 꽂았더니.”

그런가.”

또 잊어버렸지.”

소녀는 한숨을 내쉰다. 사실 오빠가 생일을 잊는 건 드문 일도 아니다. 최근 수년간 거의 매해 되풀이된 일이기도 했다. 오빠의 사고회로는 무척 독특한 편이라 볼 수 있는데, ‘자신의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했다. 그는 소녀나 소년 같은, 소중한 사람과 연결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잘 기억한다. 당사자들도 생각지 못한 것을 미리 준비해 감동을 주기도 한다.

이번에도, 동생의 생일이라면 잊었을 리가 없다. ‘자신의생일이니까 잊은 것이다. 타인에게 축하받을 일도, 대가를 요구해도 될 일도 오빠는 머릿속에서 쉽게 날려버린다. 그런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사고회로 자체가 자신의 몫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어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 맞아. 겨울이었지. 연말엔 축하할 일이 많으니까 이런 것까진 잘 생각나지 않아서.”

어차피 유토도 모를 거니 생일 축하는 우리끼리 적당히 하자. 그 다음 유토를 맞는 건 어때. 황급히 수습하려는 오빠에게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유토도 알고 있어. 오빠 선물, 며칠 전에 나랑 같이 샀거든. 그래서 오빠가 얘길 안 꺼내도 유토를 부르려 했지.”

……서운해?”

내가, 잊어버려서? 기껏 준비했는데 이런 식이어서? 따라붙은 말엔 자신이 없다. 오빠의 눈에, 낯선 감정이 비치고 있었다. 초조함, 두려움. 혹 소녀의 들뜬 마음을 깨트렸을까, 불안한 것이리라. 이 순간에도 오빠는 동생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 그의 사고회로는 확실히 희한하다.

조금도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오빠가 저렇게 쩔쩔매는 것을 보다 보면 소녀는 섭섭함 정도야 잠시 접어둘 수 있다. 소녀는 오빠의 그런 헌신적인 모습이 언제나 만족스럽고,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그 정도는 아냐. 오빠가 확실히 기억해줬으면 좋겠지만.”

때로는 오빠의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오빠는 어딘가 큰 결함이 있으니, 남들과 다른 건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다. 어떤 부분은 부족하고, 어떤 부분은 과하게 발달했으며, 어떤 부분은 의도적으로 잘려나갔다. 소녀는 그런 면까지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오빠의 바탕을 부정하게 되는 셈. 처음부터 둘이서 함께 살길 원했던 것은 오빠가 아니라 소녀 쪽인데. 오빠는 그녀의 삶에 휩쓸렸을 뿐인데.

난 그냥, 오빠가 축하받을 준비가 되어있었으면 하는 거야.”

난 크리스마스보다 오빠 생일이 더 중요한 사람이니까. 상냥한 목소리에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뻣뻣한 것이 긴장이 덜 풀린 듯하지만 아까보다는 안심한 얼굴이다. 그래도 미안하다면 내가 준비한 고깔모자 써주고. 장난스러운 말까지 흘리자 비로소 오빠의 입가에 웃음이 걸린다. 올해 생일은 정말 즐거운 날로 만들어줘야지. 다시는 잊지 않도록. 마음을 꼭꼭 숨기고서, 소녀는 케이크를 들어 테이블의 중앙에 올려놓는다. 오늘의 주인공을 위해서였다.

 

*

 

오빠의 생일 선물을 사러 가자며 소년을 꼬드기는 건 쉬웠다. 소년은 친우를 아꼈고, 소녀와 함께 있는 것도 좋아했으므로. 오빠는 성격이 까다로우니까 잘 따져서 골라야 해. 며칠 전, 그런 말을 내세우며 소년을 잡아끌고 가게를 몇 군데나 들락거린 날 소년은 끝까지 한마디 불평도 없었다. 너희 남매는 사이가 좋네. 난 형제가 없으니까 조금 부러워질 지경이야.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소녀와 함께 선물을 고를 뿐이었다.

[슌의 생일, 잊어버리기도 어렵겠어.]

마침내 소녀가 선물을 골라 포장하던 때. 소년이 말했다.

[크리스마스니까?]

[그래. 모두가 축복하는 날에 태어났다니, 행운일지도.]

아이들을 특히 챙겨주는 날이니까 어릴 땐 두 배로 축하받았을까. 소년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받아 가는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을 이었다. 아이들의 세계야, 보통은 그렇다. 생일이 크리스마스보다 며칠 앞선 날이기만 해도 흔히 그런 말이 돈다. 크리스마스 선물과 생일 선물까지, 두 개씩 선물을 받을 것이라느니. 사람들이 생일을 잘 기억해 챙겨줄 것이라느니. 그러나 소녀는 사실 어린 날의 오빠가 그리 축하받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오빠는 소녀의 삶에 나타난 순간부터 보호자여야 했다. 어른이 없는 곳에서 어린 동생을 키워내느라 오빠는 아이로서축하받을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오빠가 아이 시절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것을 서운해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오빠는 어릴 때부터 소녀를 돌봤던 것에 꽤 자부심을 느꼈다.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던 아이가 대개 그러하듯, 어른들 앞에선 어리광부리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고 말하고 다니기까지 했다.

분명, 오빠는 소녀에게 그때의 보상을 받으려는 생각이 없다. 다만 소녀는 자라날수록 오빠가 축하받지 못하고 누리지 못했던 것에 자꾸만 신경이 쏠렸다. 오빠가 그녀를 위해 애썼듯, 그녀도 오빠를 위해 마음을 쏟고 싶었다. 오빠의 사고회로가 희한한 것은 알고 있지만, 그가 스스로를 돌아보기 힘든 사람이란 걸 알지만. 동생을 위해 사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는 것도 명백했지만, 소녀는 오빠를 위한 날을 하루쯤은 만들어주기로 했다.

모두가 축하받는 날. 크리스마스. 오빠의 생일.

세 날짜 모두 같은 날을 의미했다. 1225. 오빠는 크리스마스에 왔고, 서로 다투는 사람들도 크리스마스엔 분쟁을 멈추고 모두의 휴일을 기념한다. 오빠를 위한 날로 삼기에 딱 마음에 드는 날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뻗은 해, 소녀는 크리스마스에 커다란 케이크를 준비했다. 오빠를 위해 사왔어. 소녀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자 오빠는 이번 생일에 그러했듯 눈이 둥그레졌다.

?

오빠 생일이잖아.

하긴, 대충 이 비슷한 날짜였던 것 같긴 해.

대충이 아냐. 정확히 크리스마스였어. 1225.

그랬던가.

미지근하게 반응한 오빠는 케이크를 큼직하게 잘라 동생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촛불 안 켰잖아! 동생의 원성에 남은 케이크에 급히 초를 꽂았던 오빠를, 소녀는 기억한다. 그 해부터였을 것이다. 소녀가 오빠의 생일을 챙기게 된 것은.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소녀의 삶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된 것은.

[. 글쎄. 어릴 땐 어땠는지 기억이 잘 안 나네. 그땐 나도 어렸으니까. 최근엔 내가 몇 배로 챙겨주고 있어.]

소년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소녀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다행히 소년은 더 묻지 않고 넘어가주었다.

[그런 것 같아. 생일을 며칠 전부터 준비해주잖아. 슌은 운도 좋지.]

[그래서 말인데, 유토. 크리스마스에 우리 집에 올래? 유토가 깜짝 등장하면 오빠가 더 기뻐할걸?]

기대 섞인 눈으로 묻자 답은 곧 돌아왔다. 소년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연 소녀는 선물을 안은 소년과 마주쳤다. 막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약속을 기억하고 있던 소년이 먼저 찾아주었다.

어서 와, 유토.”

메리 크리스마스, 루리. 슌은?”

음식 세팅하고 있어. , 이런 날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서야 거실로 나온 오빠는, 소년이 바로 선물을 떠안기는 바람에 엉겁결에 큰 상자를 받아들었다.

생일 축하해. 너에겐 이 말이 먼저겠지.”

……, 생일. 그랬지.”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멍한 목소리에 소년의 얼굴에 의문이 비친다. 신경 쓰이는 것은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오빠는 또다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반응하고 있다. 바로 조금 전, 오늘이 그의 생일이라고 짚어주었는데.

뭐야. 왜 남의 일처럼 이야기해.”

아냐. 조금 피곤해서. 선물 고마워.”

오빠는 어색한 웃음을 걸치며 인사를 건넸다. 소년이 무언가 의심을 품기라도 할까 걱정되었던 소녀였지만, 짧은 인사를 듣자마자 소년의 입가에 안도 섞인 웃음이 걸렸다. 테이블로 안내된 소년은 차려진 음식을 보고 눈이 커졌다. 중앙의 케이크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오빠가 준비한 음식이 가득 올려져 있어서였으리라.

음식을 이렇게나 차렸다고? 셋이서 실컷 먹어도 남겠는데?”

오빠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더라고.”

크리스마스잖아. 루리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해.”

크리스마스여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니까, 오빠.”

생일. 오빠 생일이어서라고. 다시 강조하자 오빠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일. 그 단어에 반응한 것처럼 오빠의 시선은 케이크로 향한다. 크림이 잔뜩 얹힌, 과일과 장식이 먹음직스럽게 올라간 케이크. 그의 시선은 제일 위쪽, 소녀가 그의 나이에 맞춰 꽂은 초에서 멈췄고.

있지, 루리. 사실은 매년 실감이 안 나. 이 날이 돌아온다는 것도, 내가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것도.”

그래. 오빠는 자기 나이를 자꾸 틀리지. 또 잊어버릴까 싶어 정확하게 꽂아뒀으니 제대로 확인하라고. 열여섯 살.”

……그렇게나 됐나?”

내가 열세 살, 오빠는 나보다 세 살 위. 바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내 나이를 기억하면 되잖아.”

그렇게 계산하는 게 확실히 편해. 예전 기억은 조금, 흐릿해서.”

언제까지 초만 꽂아두고 있을 거야? 생일 케이크는 촛불을 불어야지.”

슬그머니 끼어든 소년은 성냥으로 초에 불을 붙였다. 소녀가 전등을 끄고 올 동안 오빠는 넘실거리는 촛불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서. 촛농이 떨어져. 동생이 재촉하자 오빠는 조금 쑥스러운 듯 눈치를 살피더니 입김을 후, 불었다. 촛불은 한 번에 꺼졌다.

그 날 세 사람은 밤 늦게까지 즐겁게 놀았다. 남매야 둘뿐이었기에 신경 쓸 것이 없었고 소년도 이미 작정하고 왔는지 집으로 돌아가겠단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는 무엇을 하든 재미있는 법이어서, 그들은 사소한 화제로 수다를 떨면서도 시시한 게임을 하면서도 깔깔 웃었다. 그 사이 잔뜩 차려놓은 음식은 거의 동났고, 선물은 이미 포장이 뜯겨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이렇게 신나게 놀 수 있을 줄 몰랐어. 자정을 조금 앞두고 자러 들어가며 소년이 건넨 말이었다. 앳된 얼굴이 열기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우린 네가 와줘서 평소보다 훨씬 좋았어. 정말, 다음에도 이렇게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럼 내년 크리스마스도 같이 놀까. 슌 생일 축하도 해줄 겸.”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이야기에 소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도 분명 좋아할 거야. 까지 이야기하고서 소녀는 멈칫했다. 조금 전부터 거실엔 두 사람뿐이다. 오빠는 어디에 있지?

그러고 보니, 오빠는? 아까부터 안 보이네.”

. 머리가 아프다더라고. 먼저 자야 할 것 같아, 미안해. 라면서 방에 들어가던데.”

오늘 이상하게 피곤해 보이지. . 우리랑 어울려주긴 하는데 생각도 많아 보이고. 소년의 말에 소녀의 얼굴이 살풋 굳어졌다. 소년이 느낄 정도였다니, 단순히 멍한 게 아니라 정말로 뭔가 걸리는 게 있었던 것일까.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캐묻고 싶지만, 생각에 잠겼을 때의 오빠는 속을 털어놓지 않는단 것을 소녀는 경험적으로 안다. 아무래도 자고 일어나서 오빠를 잘 관찰해야 할 듯했다.

분명 상 차리는 데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야. 내년엔 이렇게 무리하지 않게 해야겠어.”

애써 밝은 목소리를 꾸며내어 이야기한 소녀는, 소년에게 인사를 건넨 후 오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정말로 자고 있을까. 그게 아니면. 소녀의 생각은, 오빠의 곁에 드리워진 수상쩍은 그림자를 본 때 멎었다. 누군가, 있다. 소녀가 아는 존재. 아마 소녀만이 아는 이 오빠의 방에 숨어들어와 있다. 소녀는 거의 확신을 품고 <그것>에게로 다가섰다.

우리가 준 선물은 마음에 들었니, 루리?

잠든 오빠에게 손을 얹은 채 말을 걸어온 것은 천사상이었다. 입은 조각되지도 않았는데 소리를 흘리는 것이 기괴하기 짝이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비명을 질렀을 광경이지만, 소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침입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천사상의 모습을 취한 <그것>은 어릴 적 수없이 마주쳤던 존재. 오빠가 소녀의 삶에 휩쓸리기 전, 소녀에게 가족이 없었던 시절. 소녀는 이른바 인공 자궁에서 신처럼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랐다. 그곳에서 저를 돌봐주었던 모두가 <그것>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을 소녀는 기억한다. <그것>들 모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나, 그뿐. 정체는 알 길이 없다.

이제 와선 정체를 파헤치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소녀는 이미 오래 전 인공 자궁에서 내쫓겼고, 당연히 <그것>에게서도 벗어났으니. 이제 아무런 연이 없는 그것이 왜 저를 찾아왔던가. 그리고 왜 뒤늦게 선물을 언급하는가. 소녀는 그것이 들먹인 선물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하면서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어떤, 선물?”

여기 있는 네 오빠 말이야. , 어릴 때 소원을 빌었잖아. 가족을 주세요. 라고.

아주 어린 날, 보통 사람들이라면 거의 기억이 날아갔어야 할 나이의 어느 밤을 소녀는 기억한다. 무엇이든 풍족했던 방, 타인 외에 모든 것이 있었던 방에서 소녀는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가족을 주세요. 형제면 좋겠어요. 내 말을 다 들어주는 사람이었으면. 왜 그렇게 구체적인 소원을 빌었는지는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태어나 인간을 만난 적 없던 소녀는 그 즈음 책으로만 배운 가족을 미치도록 선망하고 있었고, 그 날은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족을 받고 싶어 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소녀는 혼자 쓰던 방에서 자신보다 조금 더 큰 남자아이를 보았다. 한참 찾았잖아, 루리. 대뜸 소녀의 이름을 부른 아이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그녀와 닮아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처럼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아이를 본 때 소녀는 문득 전날 밤 흘린 소망을 떠올렸다. 가족을 주세요. 형제면 좋겠어요.

[오빠?]

가장 갖고 싶었던 가족의 이름을 말하자 아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그가 <선물>임을 알아채고 바로 그 품에 달려들었다. 오빠,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어. 설렘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며. 처음 보는 오빠는 소녀를 꼭 안아주었지만, 잠깐 그 품에서 벗어났을 때 소녀는 보았다. 그의 얼굴에 비친 혼란을.

자라면서 소녀는 서서히, 오빠가 어떤 인간인지 눈치챘다. 그는 선물이란 위치에 걸맞게 소녀가 막연히 바라던 오빠의 상에 완벽히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언제나 동생을 먼저 생각하고, 동생을 보호해주는 존재. 든든한 울타리. 그만큼 특이한 사고회로를 지닌 인간. 동생을 무조건적으로 위하는 존재를 만들려면 자기중심성도 잘라내는 게 좋다. 오빠의 사고회로에선 자신을 챙기는 판단력이 끊겨버렸다. 그것이 오빠의 장점이자, 인간으로서의 결함. 소녀의 선물이 된 바람에 오빠는 보통의 인간으로 살 수 없다.

오빠는 어떻게 된 일인지 기억 못 하지?”

글쎄. 알 수 없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면 자기 생일과 나이에 의문을 품을 이유도 없지 않나 싶지만.

의심하고 있어?”

정확히 말하면 그 애, 네 소망에 맞춰져 배달된 아이잖아. 네 크리스마스 선물로 네 주변에 떨어졌을 뿐 원래그렇게 살 아이가 아니었다고. 자기 삶의 모든 게 갑자기 쿠로사키 루리의 것이 되었으니 가끔 이질감을 느끼겠지.

크리스마스는 오빠가 찾아온 날이지 그의 진짜 생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가 <오빠>가 된 날이 크리스마스였기에 소녀는 그 날을 그의 생일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어쩌면 오빠가 생일을 계속 잊었던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녀에게만 의미가 있던 날을 자꾸만 생일이라고 믿어야 했기에. 실제 그가 태어난 날은 따로 있기 때문에. 몇 년 전, 처음으로 생일을 챙겨준 날부터 미지근하게 반응하던 오빠의 모습이 소녀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쿠로사키 슌은 내가 받은 선물이야.”

그렇지만 소녀에게 그는 오빠였고 선물이었다. 크리스마스에 찾아온, 그녀의 유일한 가족. 소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라는 불순물을 끌어안은 바람에 <인공 자궁>에서 나가야만 했고 더는 전 같은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해도. 물론 그 역시 소녀를 사랑하고 있다. 그것이 소녀의 소망에 맞춰 입력된 애정이라 해도.

맞아. 하지만 그 애는.

내가 받은 선물이야. 원래 자리가 있더라도 돌려줄 생각 없어.”

, 의외로 고집이 강하구나.

쿠로사키 슌은 내 오빠고, 열여섯 살에,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사람. 이미 이렇게 굳어졌잖아.”

「……그렇게 믿게 할 생각이야?

안 돼?”

얼마간 김빠진 웃음소리가 났다. 입이 없는 그것, 미완의 천사상이 웃고 있다. 아이의 철없는 소망을 받아주는 어른처럼. 보호자였던 적도 없는 주제에 그것은 언제나 소녀 앞에서 부모 흉내를 낸다.

안 될 것은 없지. 실은 그 때문에 찾아온 거야. 이대로 혼란이 깊어져 그 애가 널 떠나는 일이 생기면 네가 불행해질 테니까. 어쨌든 우리는 네 행복을 위해 움직여야 하거든.

그럼 오빠의 혼란을 없애줘.”

어려운 건 아니지만, 루리. 이건 명심해. 너는 행복해도 그 애는 분명 불행해질 거야. 쿠로사키 루리가 책임을 다하고 떠나면 혼자 남겨질 테니까. 그때 쿠로사키 루리의 것이란 속박이 풀린다 해도 그 애는 미아가 되잖니.

너 때문에 돌아갈 곳을 잃었으니까. 심술궂게 덧붙인 <그것>은 오빠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가져다 댔다. 그것의 손이 닿은 자리에서 회색의 연기가 한동안 피어오르는 것을, 소녀는 보았다. 아마 연기의 정체는 지금껏 오빠를 괴롭혀왔던 의문이리라. 저것만 걷히면, 오빠는 더는 혼란스러워하지 않게 된다. 이대로 소녀를 믿고, 자신의 만들어진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된다. 연기가 전부 흩어지자 소녀는 오빠에게로 바짝 다가갔다. 잠든 얼굴은 이제,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 평온하고.

난 오빠를 혼자 두지 않아.”

저에게 휩쓸린 불쌍한 남자를 보며, 소녀는 선언했다. 가장 큰 선물로 찾아온 사람을, 그녀는 끝까지 책임질 것이다. 불행해지는 일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소녀는 그를 사랑했고 그는 이미 소녀의 부속품이 되었으니.

네 마음대로 되진 않겠지만, 그래. 힘내봐.

마지막까지 달갑잖은 말을 남긴 그것은 이내 소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오빠의 방에는 이제, 어린 날부터 함께 자라온 남매뿐. 잘 자, 오빠. 깨어났을 땐 더는 힘들지 않을 거야. 소녀는 오빠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서 돌아섰다. 앞으로 둘의 삶에 그림자가 깔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야유즈] 아주 사소한 종말  (0) 2021.03.15
[레이라] 포식  (0) 2021.01.31
[사장슌] 흉  (0) 2020.11.30
[사장슌ts] 존재의 증거  (0) 2020.10.16
[반역조/여슌] 빛이 부서진 자리  (0) 2020.09.18
Posted by 현소야 :

[사장슌] 흉

2020. 11. 30. 23:53 from 02

 

청년은 핏자국을 밟고 서 있었다. 땅을 적신 피는 그가 흘린 것. 전투에 나서 적을 쓰러트리는 덴 성공했으나, 적이 부리던 몬스터에 부상을 입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청년의 등을 할퀸 것은 청년이 막 승기를 잡은 시점이었다. 정통으로 날아든 공격은 꽤 묵직해, 옷이 찢긴 틈새로 상처가 선명했다. 흘러내린 피는 외투를 적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바닥에까지 흔적을 남겼다. 그런데도 청년은 물러서는 일도,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일도 없었다. 청년의 금빛 눈은 도리어 공격당하기 전보다 매섭게 상대를 노려보았다.

청년이 지휘하듯 손가락을 움직이자, 그의 무기인 기계 새가 바로 적을 노렸다. 적을 섬멸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무기였다. 그에 포착된 이상, 적이 맞이하는 결말은 하나. 상대는 물론 그가 내세운 몬스터까지 쓸어버리는 것으로 청년의 전투는 끝났다. 무기를 거둔 청년은 맹금을 닮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또 다른 위협이 없는지 살피는 것이 분명했다.

쿠로사키, 부상은?”

그때, 근처에서 청년처럼 적을 쓰러트린 소녀가 청년에게 달려와 물었다. 피는 멎었다지만 통증은 남았을 텐데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보다, 숨어든 놈이 있을지도 몰라. 같이 살필까, 세레나.”

언뜻 제안의 형태를 띠고 있긴 하나 소녀의 의사가 어떻든 이미 결론은 나 있는 듯한 말이었다.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청년은 적의 흔적에 민감하다. 적을 쓰러트려 전사로서의 임무를 마치고도 청년의 시선은 계속 전장에 머무르고 있다. 뛰어난 전사인 청년은 침략당한 나라의 생존자란 배경 때문인지, 적과 관련된 것은 뿌리조차 남겨둬선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다.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청년은 그곳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며 모든 위험을 제거하려 들 것이다. 관제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사내는 자신이 나설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청년과 소녀를 포함한 정예병의 지휘관으로서, 그는 자신의 전사를 제대로 관리할 의무가 있었다. 부상을 살피고 치료하는 것은 그로선 포기할 수 없는 책임이다. 사내는 통신으로 청년에게 지시했다.

[쿠로사키는 그대로 복귀해, 치료실로 가도록.]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역시, 바로 듣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 청년은 언제나 자신을 병기처럼 취급한다. 전장에서 벗어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청년에겐 병기의 시각에서 접근하면 된다. 사내는 고집을 부리는 청년에게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부상을 치료하지 않으면 다음번엔 내보내지 않을 거다. 그런 걸 바라진 않겠지, 쿠로사키. 청년을 병기로서 대하는 전략은 효과가 있었다. 청년은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치료실 쪽으로 향했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 몸을 살피지 않은 청년이 걱정되었을까, 함께 복귀 지시를 받은 소녀도 청년에게 따라붙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날 사내는 청년을 더 만나지 못했다. 전투에 대해 보고하러 온 것은 소녀뿐이었으므로. 소녀에게 청년의 부상이 어떠한지 묻자 큰 문제는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사내가 확인하려던 것은 그 정도까지였으나, 소녀는 기대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았다. 소녀가 치료실에 들어섰을 때 마침 청년이 웃옷을 벗고 상반신에 붕대를 감던 중이었다는 것이다. 평소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꽁꽁 싸매고 다니던 청년이 몸을 내놓은 것을 본 건 소녀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바로 나가려고 했는데 내가 온 걸 확인한 쿠로사키가 날 불렀어. 자기 등을 좀 봐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도와줬나?”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상은? 가볍게 묻자 덤덤한 답이 돌아왔다.

생각보다 상처가 많았다.”

레지스탕스로 살아왔기 때문이겠지.”

사내의 전사가 되기 전까지, 청년은 고향에서 저항군으로서 싸웠다. 평화 속에서 살아가던 소년이 전사가 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지 사내는 쉽게 상상할 수 없다. ‘생존의 대가가 상처 몇 개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발 딛는 모든 곳을 전장으로 삼는 청년은, 아마 내면도 지독하게 황폐해져 있으리라. 사내가 건조한 감상을 쌓을 때, 소녀는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자신이 관찰한 것을 털어놓는다.

전장에서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한 모양이야. 대부분은 흉터가 남았지. 흉하게 찢긴 자리나, 만지면 울퉁불퉁할 것 같은 자국이 군데군데 있었어. 그런데…….”

그런데?”

딱 하나, 너무 깨끗한 상처가 있어서.”

바로 여기. 소녀는 왼손을 자신의 등에 대고 견갑골 부근을 짚었다.

쿠로사키가 살펴달라고 한 곳이기도 해. 자기 날개뼈의 상처 자국을 보고 뭔가 이상한 점이 없냐고 물었다.”

확인하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

그래. 그렇게 답해도 안 믿기는지 몇 번 더 물었어. 계속 문제없다고 답하니 그제야 믿었고. 그쯤 되니 궁금해졌지.”

그 상처가 무엇이었는지. 덧붙여진 말에 사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도 궁금증이 인다. 문제의 상처는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몸을 보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청년이, 타인에게 그렇게 무방비하게 몸을 보이면서 확인하려 들었던 것은. 그래서, 답은? 속에서부터 뭉글뭉글 솟아나는 호기심으로, 사내는 물었다.

이건 어쩌다 생긴 상처인지, 어떻게 이렇게 깨끗한 건지 물었더니 잘라낸 곳이거든.’이라고 답하더군.”

잘라내다니, 무엇을?”

물어도 답을 안 해. ‘글쎄, 남에게 보일 것은 아니었겠지.’라고 얼버무리기만 하고.”

숨기고 싶었던 부분인가.”

알 수 없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소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짚이는 게 없어서 너한테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기도 한데. 거기서 사내는 소녀가 청년의 상처에 대해 제법 길게 털어놓은 이유를 알아차리고 미소를 머금었다.

나라면 답을 알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쿠로사키는 네가 자기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불평했으니까.”

정말로 그만큼 알았으면 좋았을 거다. 쿠로사키는 경계가 너무 심해서 자기 이야기를 도통 하지 않거든.”

누구에게나 그렇겠지. 라고 덧붙였으나, 사내는 청년이 자신에게 유독 높은 벽을 쌓았음을 안다. 소녀를 포함한 정예병 동료 일곱 명과, 지휘관인 사내. 같은 목적으로 얽힌 여덟 명 중에서도 사내에게 특히 냉랭한 청년이었다. 여덟 명 중 청년이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대하는 사람이란, 사내의 어린 동생. 청년의 누이를 닮은 소녀. 청년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어 그럭저럭 신뢰를 쌓은 소년 정도. 지휘관이란 역할을 제외하면 사내는 그의 삶에 들어갈 틈이 없다.

그토록 촘촘한 경계를 단순한 불신으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청년은 사내의 뿌리를 혐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간 침략자가 바로 사내의 아비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청년이 마음을 연 소녀에게까지 털어놓지 않으려 하는 것이라면, 사내에겐 웬만해선 비밀로 남겨두려 할 것이다.

그래도 확인해둘 필요는 있겠군.”

그럼에도 사내는 소녀 앞에서, 얼마든 청년의 내면을 파헤칠 수 있는 듯 군다. ‘전사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위치를 가장하는 것인 동시에, 정말로 청년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소망을 담은 말이기도 하다.

무엇을?”

잘라냈다는 상처. 그걸 의식하는 이유가 있을 거야. 심리적인 이유건 신체적인 이유건.”

쿠로사키가 이야기할지 의문인데.”

레지스탕스 시절에는 벼랑 끝에 몰려있으니 뭐든 덮어둬야 했겠지. 랜서즈인 지금은 달라. 스스로를 괴롭히는 문제가 있다면 수정해야 하고, 방치한 상처가 있다면 치료해야 해.”

전사로서최상의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해서라고 하면 쿠로사키도 이해할지도. 따라붙은 말에, 소녀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세레나. 그 상처가 날개뼈 쪽에 있었다고?”

확인하려 묻자 소녀가 즉답했다.

맞아. 그쪽에서 잘라낼 것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어.”

사람한테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심하게 덧붙인 말에 사내도 여러 가능성을 셈해보았지만, 상처 부위를 직접 보지 않은 이상 상상에도 한계가 있었다. 질환의 흔적? 어떠한 이유로 부착했던 기계 장치? 그런 것이라면 잘라낸다는 말보다 제거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마땅히 짚이는 것이 없어 사내는 결국 적당한 말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 옷으로 가릴 수 있을 만한 것이었겠지. 그게 아니었다면 전장에선 방해가 되었을 테니까. 지금으로서 추측할 수 있는 건 그것뿐.”

답은 쿠로사키에게서 확인해야겠어. 무엇보다 상처를 내 눈으로 보면 좋겠는데. 타자를 관찰하고 정보를 틀어쥐고 싶어 하는 욕구를 사내는 숨기지 않는다. 청년처럼 비협조적인 사람이라도 예외는 없다. ‘그의전사이기에 사내는 청년에 대해 더욱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제법 의욕적으로 나서는 사내에게 소녀는 물었다.

몸을 보이게 할 방법이 있나?”

당연한 의문이었다. 청년은 단순히 타인을 경계하는 것만이 아니라, 몸을 드러내는 걸 꺼리는 사람이었으니. 스스로를 병기로 취급하는 만큼 상처를 보이는 것을 싫어하리란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사내에게는 한 가지, 핑계거리가 있었다. 청년의 몸을 싸매는 코트를 풀고, 그의 몸을 확인하게 할 수 있을 것.

쿠로사키가 줄곧 피해온 것이 하나 있지.”

신체검사. 그럴듯한 핑계를 꺼내고서 사내는 만족스레 웃었다.

 

*

 

청년은 정예병 결성 전부터 사내의 품에 들어온 전사였다. 청년의 뛰어난 전투력과 실전 경험, 침략자에 맞선다는 공통된 목적. 거기에, 아비의 죄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내의 책무감까지. 사내가 청년을 거둬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사내에게 접근하겠답시고 사내의 사람들을 습격하기까지 한 청년을 주변에선 경계했으나, 사내는 청년을 제법 믿었다. 이국에서 온 청년에게 정예병 결성 계획을 알리고, 전사 선발을 맡기기까지 한 것은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언제나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의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제안은 전투와 관계된 것을 제외하면 거의 거절했고 이야기의 초점이 자신에게 맞춰지면 바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너를 전사로서 믿고 있다, 쿠로사키. 너도 나를 지휘관으로 믿으면 돼. 사내가 그렇게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청년은 낡은 기계처럼 삐걱거리는 목소리로 쏘아붙일 뿐이었다. 지휘관이라면 더더욱 나를 전사 이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없을 텐데.

그동안 검진을 거부해온 것도 그러한 불신의 연장선이었으리라고, 사내는 생각한다. 전장에서 버텨온 청년의 몸을 걱정해 지금까지 몇 번이나 검진을 받으라 지시했으나 청년은 한 번도 따르지 않았다. 전투에 영향을 미치는 부상? 없어.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한 질환도 마찬가지. 그러니 검진은 필요 없어. 코트까지 꼭꼭 여민 채 청년은 자꾸만 선을 그었다.

[타인이 너를 들여다보는 것이 두렵나?]

어느 날 사내는 슬그머니 도발하기도 했다. 청년이 그에 반박하려 들면 검진을 받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불필요한 부분까지 보이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렇게 말할 때조차 청년은 코트 차림이었다. 계절에 맞지 않은 옷차림은 몸을 숨겨야 한다는 강박의 결과로 느껴지기도 했다. 저항군의 표식이라는 붉은 스카프까지 목에 둘러, 살갗이 보이는 부분이라곤 얼굴과 손 정도.

[너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해도?]

[네가 나에게 줘야 할 도움은 나를 무장시키고 제대로 지휘하는 것뿐이다. 어중간한 관심이 아니라.]

[바로 그 점에서, 검진이 필요해. 아카데미아에 가기 전에 한 번쯤은 받게 할 생각이다.]

사내가 집요하게 검진을 요구하자 청년은 더 받아칠 가치도 없다는 듯 자리를 뜨는 것을 택했다. 그 후로는 정예병을 결성하고 임무를 알려주는 것이 바빠 청년에게 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사내였다. 물론 청년만큼이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고집스러운 사내였으므로, 검진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다음 목적지로 갈 준비는 되었나, 쿠로사키?”

사내가 청년을 불러들여 물은 것은 청년의 상처에 대해 들은 지 닷새가 된 시점이었다. 출격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청년은 즉답했다.

난 준비되지 않은 적 없었어.”

하나 놓친 것이 있을 텐데.”

덱은 점검을 마쳤고, 그쪽이 내준 정보로 적에 대해서도 미리 파악했다. 무얼 더 원하는지 모르겠는데.”

너를 제외한 랜서즈 멤버, 7명은 내게 검진 결과를 제출했어.”

청년이 만지작거리던 카드가 손아귀에서 구겨졌다. 사내를 올려다보는 눈에 불쾌가 깃든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내가 그 다음에 꺼낼 말을 이미 짐작한 것이리라.

나는 안 받을 거라고 했지.”

미리 선을 긋는 청년에게 사내도 딱딱하게 답했다.

랜서즈 중 유일하게 부상까지 입은 사람이, 끝까지 자기 몸을 점검하지 않고 갈 생각이라고?”

네 전사에 그렇게 확신이 없나?”

쿠로사키 슌을 사용해달라고 이야기한 건 너다. 난 내 무기가 제대로 기능할지 확인해야 해.”

내가 요구하는 건 간단한 신체검사에 불과해. 그걸 피한다는 건 스스로 몸에 자신이 없다는 뜻일 거다. 무어라 반박하려는 청년에게 틈을 주지 않고, 사내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선택권을 주지. 쿠로사키. 첫째, LC 산하 병원에서 검진을 받는 것. 둘째, 의사에게 다시 등에 입은 부상을 확인받고 올 것. 둘 중 하나를 택하면 돼.”

꼭 네 회사 병원이어야 하나?”

“LC 산하 병원은 의료진도 시설도 흠 잡을 데가 없어. 내 회사, 레오 코퍼레이션과 연결되어 있으니 이방인인 네가 번거로운 절차 없이 검진을 받을 수 있고.”

물론 청년의 검진에 관여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두 개의 선택지를 주기는 했으나, 청년이 어느 쪽을 택하건 사내는 목적을 달성할 자신이 있었다. 전자를 택한다면 청년의 부상까지 낱낱이 살피도록 해 보고받으면 된다. 후자를 택하면 더욱 좋다. 등에 남은 상처를 파헤칠 명분이 충분하다. 어쩌면 진료 중 상처의 배경까지 듣게 될지도 모른다 사내가 답을 기다리는 동안 청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신경질적인 행동은 의외로 오래가지 않았다. 청년은 예상보다 빨리 입을 뗐다.

좋아. 후자로 하지.”

불만이 선명히 그려진 얼굴으로나마 청년은 사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만 순순히 따라줄 생각은 없었는지 단서를 붙인다.

네 지시대로 하기로 했으니 내 편의는 조금 봐줘야겠어.”

어떤 식으로?”

사내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스카프를 푸는 것이었다. 저항군의 표식이란 이유로 언제나 목을 감싸던 것이 너무도 쉽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청년의 손가락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코트 단추를 풀었다. 쿠로사키, 무슨 생각이지? 짚이는 것이 없는 사내가 물어도 청년은 코트를 벗어던질 뿐이었다. 청년이 와이셔츠 단추까지 풀기 시작한 때서야 사내는 그가 웃옷을 다 벗어던지리란 것을 깨달았다. 잠깐만, 쿠로사키. 급히 청년을 불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와이셔츠가 바닥에 떨어지고, 그 아래 입었던 것도 주변의 테이블에 놓였다.

의사에게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청년이 그렇게 말했을 때 그의 상반신에 걸쳐진 것이라곤 상처를 싸맨 붕대뿐. 사내가 청년에게 말할 시간도 주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던 것처럼, 청년도 사내가 상황을 판단할 틈 없이 사내에게 바짝 다가왔다. 숨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졌을 때 청년은 뒤돌아 섰다.

네가 직접 확인하라고.”

거기서 사내는 확실하게 이해했다. 청년은 그에게 등을 보이려 한 것이라고. 의사 대신 그에게 부상 확인이란 일을 맡기는 셈이다. , 무슨 이유로, 머리를 치는 의문을 굳이 입 밖에 낼 필요는 없으리라. 소녀에게 들었던 수상한상처, 청년이 다른 사람에겐 내보이지 않을 부분을 직접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호기심을 해결할 기회가 너무 쉽게 찾아와서 사내는 되레 찜찜할 정도였다.

안 보고 뭐 해.”

얼마간 멍하니 서 있던 사내는, 청년의 재촉에 붕대를 풀었다. 닷새 전에 새겨진 상처가 얌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관제실에서 볼 땐 몬스터가 제법 깊게 할퀸 것 같았는데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는 가벼운 상처였다. 특별한 치료 없이 잘 관리하기만 해도 전투에 방해되는 일은 없을 듯했다.

네가 보기엔 어때.”

청년의 물음에 사내의 입술이 열렸다.

확실히…….”

일단 운을 떼긴 했으나 무어라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사내에게, 청년은 이번에야말로 생각지 못한 말로 받아쳤다.

별로 관심 없겠지. 네가 보고 싶었던 건 그쪽이 아니었을 테니까.”

의미를 모르겠어, 쿠로사키.”

너는 제 눈으로본 것에는 그렇게 관심은 없어. 이미 네 판단이 선 것이니 크게 흥미가 없는 거지. 바로 며칠 전 관제실에서 직접 목격한 부상보다 내가 스탠더드에 오기 전에 입은 상처에 더 관심을 둘 수밖에.”

그걸 알면서도, 너는.”

나에게 일부러 보여줬던 건가? 흘러나오려는 말을 사내는 삼킨다. 청년이 그의 속내를 눈치챈 이상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상대를 들여다볼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은 사내인데, 정말로 그 머릿속을 해부한 것은 청년이었다. 속에서 당혹스러움과 패배감이 뒤엉켰다. 입술을 깨문 채 말을 고르는 사내에게, 청년은 여유롭게 말을 건넨다. 그러니까 네 눈으로 직접 보고 머리에 담아두라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여기서 나가면 없었던 일로 쳐줄게. 자못 관대한 말에 사내는 손을 뻗었다. 기다란 손가락은 청년의 등으로, 정확히는 청년의 과거를 상징하는 흉터로 향했다. 유물이라도 살피는 듯 조심스레 쓸자, 기묘한 감각이 손을 타고 전해진다. 덧난 곳의 울퉁불퉁함, 제대로 봉합되지 않았던 상처의 패인 자국. 싸움의 증거이자 생존의 대가였던 상처를 사내는 하나하나 훑어내렸다. 비극의 흔적에 감상을 흘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렇게 차례로 쓸어보다, 하나가 남았다. 사내가 내내 궁금해했던 날개뼈 쪽의 상처. 직접 보니 소녀의 말대로 이질적인 상처였다. 지나치게 말끔한 형태를 보면 알 수 있다. 분명, 타인의 손이 닿은 흔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안고 온 부상이 아니라, ‘시술을 받은자국이었다.

이건 어쩌다 난 거지?”

그러니 사내는 물을 수밖에 없다. 수상쩍은 상처의 정체를. 청년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야 했던 이유를.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청년이 지금껏 말해준 적 없는 신체적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 자리, 부상을 입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바로 답을 주지 않는 청년을 은근히 압박하자 짤막한 답이 돌아왔다.

잘라낸 자리야.”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에 만족할 수 없다. 사내는 집요하게 묻기로 했다.

세레나에게 몇 번이나 확인해달라고 했다던데, 불안해했던 이유는?”

역시 이쪽에 관심이 있었군. 환상통에 시달렸을 뿐이다만.”

무엇을 잘라냈기에?”

거기서 청년은 몸을 홱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 줄 알았는데, 청년의 금빛 눈에 깃든 것은 불쾌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사내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씁쓸함.

날개.”

메마른 목소리로 청년은 고백한다. 잘라내야만 했던 것을, 이제는 제 몸에 남아있지 않은 것을. 날개라고 해서 보통의 날개를 생각해선 안 돼. 인간에겐 그런 날개가 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쓸모없는 조직이 생겨난 거라 생각해야지. 그게 어쩌다 날개를 닮았을 뿐이고, 보통의 날개처럼 자라기까지 했을 뿐이야. 너 같은 사람이 절대 믿지 않을 이야기군. 청년이 띄엄띄엄 말을 흘릴 때, 사내는 문제의 상처가 난 자리를 눈앞에 그려본다. 저기에 청년의 <날개>가 뿌리내렸을까. 그의 날개는 어디까지 덮었을까. 사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날개를 상상한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고 마땅히 붙일 설명도 없어서, 적당히 옷으로 가렸지. 그런데 점점 자라났단 말이야. 감당하기 힘들어질 정도로. 그래서. 청년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말을 잇는다. 내 주변에선 딱 한 명, 날개를 본 사람이 있었거든. 그 쓸모없는 조직에 날개란 이름을 붙여준 것도 그 애였어. 누구일 것 같아? 청년의 물음에 사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청년의 고향 사람 중 사내가 아는 것은 두 명뿐이다. 침략군에게 납치된, 그의 누이. 그리고 유일무이한 친우라고 부르는 소년. 네 동생? 확신 없는 목소리에 청년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플 텐데.’하고 이야기하더군. 하지만 거절하진 않았지. 루리는 손재주가 좋았지만 날개를 깔끔하게 잘라내지 못했어. 아마 마음이 약해서일 거야. 정말로, 내가 아플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잘 자르지 못했다기엔 이 자리는 너무도 깔끔한데.”

그야, 그건 루리 솜씨가 아니니까.”

루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납치되었다. 날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물론 잘라줄 사람마저도 없어졌다는 거야. 청년은 잔해처럼 텁텁한 목소리로 비극을 읊었다.

그 후로도 날개가 말썽이었나.”

깨끗하게 잘라내지 못하니, 뿌리가 남은 모양이야. 괴상하게 자라나서 언젠가부턴 싸우는 데도 방해가 되었어. 남에게 날개를 보이지 않으려 하다 보니 등에 입은 부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것도 싫었지.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칼을 쥐여주었다. 루리만큼이나 믿을 수 있는 사람. 그 끔찍한 조직에 대해 깊게 묻지 않을 자.”

유토.”

조건에 들어맞는 것은 한 사람밖에 없다. 청년의 유일무이한 친우. 청년이 희망을 찾아 무작정 사내의 나라로 왔을 때, 청년을 따라와주기까지 한 소년. 과연 청년은 미지근한 웃음을 걸친다. 바로 맞혔다는 뜻임을, 사내는 안다.

유토는 손재주가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잘라낸 자리는 루리 때보다 깔끔했어. 제법 과감하게 잘랐었거든. . 이제 됐어. 이제 방해되는 건 없어. 유토는 그렇게 말하고서, 날개를 아무렇게나 버렸다. 쓰레기처럼, 미련 없이.”

그렇게 날개에서 해방되었군.”

그럴 줄 알았는데 요즘 다시 그 자리가 욱신거리는 거야. 정확히 날개가 돋아날 때의 욱신거림이었어. 그 공허한 통증이 어디서 왔나 생각했을 때 유토와 루리의 얼굴이 떠오르더군. 이제 내 곁에 없는 사람들. 그 망할 조직을 잘라준 사람들 말이야.”

사내는 그제야 청년이 소녀에게 몇 번이고 상처에 대해 확인한 이유를 알아챈다. 환상통의 근원도 이해한다. 청년이 내내 숨겨왔던 상처는,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부위는 이제 사라진 사람들과의 연결고리가 된 것이다. ‘쓸모없는 조직이 몸에 붙어있을 때까지만 해도 누이와 친우는 청년과 함께했다. 그들이 그의 세상에서 희미해진 건 날개가 잘려나간 후였다.

……날개, 가 있던 자리를 스스로 확인할 자신은 없었어. 그래서 세레나에게 부탁한 거다. 세레나는 무심하게 답해줬고. 아무 문제도 없어, 쿠로사키. 아주 말끔해.”

아주, 말끔해. 청년은 눈을 내리깔며 느릿하게 되풀이했다.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 전투에 방해되는 것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는 것뿐. 그래서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지.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텐데, 분명 더 감상이 있었을 텐데 청년은 거기서 이야기를 끝내고 만다. 사내는 청년이 조용히 옷을 챙기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때? 설명은 충분했나?”

그렇게 물었을 때 청년은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사내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었으므로 이제 더 보일 폐허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사내는 청년이 와이셔츠 단추를 전부 채우고 코트를 걸칠 때서야 입을 뗐다.

충분해.”

내 심연을 보길 기대했을 텐데, 이 정도라서 미안하군.”

저항군의 표식을 집어 들며, 청년은 가볍게 빈정댄다. 과거의 흔적을 통해 그의 내면까지 들여다보려던 사내의 욕구를 진즉 눈치챈 모양이었다. 사내는 굳이 부정하는 대신 건조한 말을 흘렸다.

……날개는 다시 돋아나지 않을 거다.”

알고 있어.”

앞으로 환상통에 시달리는 일도 없어.”

어떻게 확신하지?”

너는 아카데미아를 무너뜨리고 동생을 구하기 위해 랜서즈가 되기로 했지. 나는 네게 승리를 약속했고. 내가 목표를 이룬다면 루리도, 유토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이미 잘라낸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난 너에게 예전 같은 날을 돌려줄 테니까. 자신만만한 선언에 청년은 사내를 응시했다. 폐허를 닮은 눈이, 황폐함에 익숙해진 저항군의 눈이 지휘관을 오래도록 담았다. 삼켜버릴 듯 진득한 시선은 사내를 시험하는 듯했으나, 사내는 끝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긴 침묵 끝에 청년의 입술이 열렸고.

시시하긴.”

스카프를 목에 맨 청년은 사내를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라지려는 청년에게 사내는 한 번 더 말을 꽂는다.

난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 없어.”

그래, 순진한 놈들을 믿어주는 게 내 나쁜 버릇이지.”

그럼, 어디 끝까지 힘써보라고. 그렇게 말하고서 청년은 이번에야말로 문을 열고 자리를 떴다. 코트로 싸맨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서야, 사내는 청년이 자신의 선언에 부정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절망에 짓눌리고 황폐해진 인간임에도 희망을 마냥 불신하지 않은 것이다. 사내의 말을 가볍게 넘겨버린 것인지, 사내를 선택한 이상 그를 믿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청년이 그의 선언을 받아들였다는 것.

전사는 지휘관을 믿어주기로 했다. 덮어둘 수 있을 과거를 보여주고서, 공허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약속까지 받아주었다. 이제는 사내가 약속을 지키는 일만이 남았다. 사내는 청년의 희망이 될 수 없어도 청년의 전쟁은 끝낼 수 있을 사람이었다. 청년의 세계엔 들어설 수 없더라도 청년의 세계를 지킬 힘을 줄 사람이기도 했다. 실패를 겪어본 적 없는 사람으로서, 사내는 승리를 자신한다. 언젠가 청년은 그의 전사가 되어준 대가로 일상을 돌려받게 되리라.

그러기 위해선 청년이 스스로를 뛰어난 전사로 만들어왔듯 사내도 최고의 지휘관이 되어야만 한다. 전사가 떠난 자리에서 사내는 스크린 가득 침략군의 자료를 띄운다. 전사를 움직여야 할 지휘관으로서 사내가 가장 믿는 무기가 그것이었다. 오랜 기간 긁어모은 정보는 사내를 무장시키고, 그의 전사들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거다. 우리는 준비되어 있으니까. 청년이 맞닥뜨릴 위험을 미리 살피며 사내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반드시 승리할 전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이라] 포식  (0) 2021.01.31
[쿠로사키 남매] 1225  (0) 2020.12.25
[사장슌ts] 존재의 증거  (0) 2020.10.16
[반역조/여슌] 빛이 부서진 자리  (0) 2020.09.18
[반역조] 닫힌 행복  (0) 2020.08.14
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