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 들어서자마자 발견한 것은 다발째로 화병에 꽂은 프리지아였다. 화사한 색채의 꽃잎이며 은은한 향기가 바로 감각을 자극한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없었던 꽃이, 그것도 잘 포장된 다발이 화병에 꽂혀있는 이유라면 하나. 누군가가 선물한 것이다. 아버지는 꽃을 선물한다는 센스는 없는 사람이다. 가끔 소꿉친구가 꽃을 내밀긴 하나, 프리지아를 고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게 소거하다 보면 꽃을 준비한 사람은 한 명으로 좁혀진다. 화병이 놓인 테이블에 마침 그 사람을 짐작할 단서가 자리하고 있었다. 꽃을 배달할 때 꽃집에서 끼워주는 메시지 카드였다.

 

  『 히이라기 유즈에게.

  대회 수상을 축하하며.

 

  흘려 쓴 글씨의 주인은 뻔했다. 사실 프리지아 꽃다발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며, 다발의 크기며 메시지의 내용까지 매번 거의 비슷비슷했다. 삐뚤빼뚤한 필체도 마찬가지. 그동안 한 번도 보낸 이의 이름이 없었던 것은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리라. 아는 이가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꽃을 보내줄 정도로 섬세한 그 사람, 너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기조차 싫어했으니.

  눈앞에 네 모습이 그려진다. 창백한 얼굴과 표정 없는 얼굴. 낡은 코트를 단단히 여민 채 상대를 냉랭하게 내려다보던 청년. 혹은 전장에서 닳아버린 소년병. 너는 폐허가 된 도시에서 왔다. 네 고향에서 일어난 전쟁은 세계를 덮을 뻔했으나, 용감하게 나선 정예병이 결국 싸움을 끝냈다. 살아남기 위해 무장했던 너는 그렇게, 전쟁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지금 네가 평화 속에서 살며, 내킬 때마다 꽃을 보낼 수 있는 것도 그 덕분.

  “, 유즈. 그 꽃 이번에도 배달 왔더라고. 뭐라고 했지? 프리지아?”

  고개를 숙여 꽃향기를 맡을 때, 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또 그 사람이네.”

  “그 사람이 누군데?”

  “비밀.”

  “열렬한 팬이 생긴 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다시 방문을 닫았다. 아버지에게 너를 소개하기란 쉽지 않다. 낯선 남자여서가 아니라, 먼 이국에서 온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네가 어떤 인간이며 당신 딸과는 어떤 관계인지 이해시키려면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일 복잡한 게 그 아이의 이야기였다. 너의 누이. 아마도 네가, 껄끄러운 여자애에게 자주 꽃을 보내게 만든 이유이기도 한 사람.

  희망을 찾아 고향을 떠나왔다는 너는 전쟁이 끝나고도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잠깐 머무를 예정이었던 이 도시에 아직도 남아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누이가 이제는 없기 때문이다. 고향에 가면 분명 너를 따뜻하게 맞아주겠지만, 네 누이의 빈자리 또한 크게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네 누이는 전쟁의 끝에 희생되어서, 종전 후엔 사실상 그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다. 네 앞에서 그 이름을 꺼내는 순간 네가 또다시 절망에 떨어질 게 뻔하니까.

  거울 앞에 서자, 언젠가 네 친우에게서 들은 말이 머리를 울린다. 루리는 내 동료 슌의 여동생이야. 너는 루리를 정말 닮았어. 너는 이국의 여자아이에게서, 사라진 동생을 본다. 그 껄끄러운 타인이 자랄 때마다, 사라진 시점에 멈춘 누이의 성장까지 상상하게 될 것이다. 네가 누이를 닮은 이에게 꽃을 보내면서 정작 그 앞에 직접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누이의 부재가, 동생을 상기시키는 존재가 아직은 너에게 큰 고통을 안기기 때문이다.

  만일 네 누이와 닮지 않았다면, 완전한 타인이었다면. 네가 꾸준히 꽃다발을 준비할 일이 있었을까. 생각할 때마다 속이 텁텁해진다. 메시지 카드를 쓸 때 너는 한두 번쯤은 히이라기 유즈라는 이름 대신, 네게 훨씬 익숙한 이름을 쓰는 것을 상상했을 것이다. 쿠로사키 루리, 네 누이의 이름. 두세 번은 무대에 선 네 동생을 그려보았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의 상을 흩었을지도 모른다. 네 머릿속에 어떤 상상이 휘몰아쳤건, 마지막에 네가 맞닥뜨린 감정은 언제나 같았으리라.

  씁쓸함. 그리움. 그리고 옅은 절망.

  프로 듀얼리스트 자격을 취득하고부터, 대회에 나설 때마다 너에게 초대권을 보냈다. 시간 나면 한 번쯤 와줬으면 해. 매번 건넨 말에도 너는 한 번도 객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선명한 거절에 조금 슬퍼질 때쯤이면 꼭 프리지아 꽃다발이 배달되었다. 첫 번째 꽃다발과 함께 온 카드에는 바로 그 다음부턴 삭제된 문장이 하나 들어있었다.

  『직접 대회를 보러 가지 못한 것은 미안해.

  그런 말을 쓸 사람은 너밖에 없었으므로, 꽃을 보낸 이가 너라는 걸 그때부터 대강 알아챈 것이다. 그 이후로도 프리지아 꽃다발은, 그때와 같은 필체의 카드와 함께 배달되었다.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네가 객석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마다 하나씩.

  직접 대회를 보러 가지 못한 것은 미안해. 라니. 정말로 미안하다면 모습을 보여주면 되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이 관계에 어쩔 수 없이 쌓인 껄끄러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객석에 나타나주었으면. 무대를 보는 순간 동생이 떠올라 괴로울 것 같았다면, 꽃도 보내지 않는 것이 나았으리라. 이렇게 뻔한 행동을 계속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관계는 여전히 어색하고, 너는 동생을 닮은 이를 아직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한다.

  서로를 아예 모른 체 하고 살아갈 것이 아니라면, 상황을 바꿔야만 한다. 네 누이는 과거가 되었지만 너는 현재를 살아가기에 타인을 제대로 응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네가 아예 만나주지 않는 것을. 포장도 다 벗기지 않은 꽃다발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네가 어디서 지내는지는 알고 있다. 한두 다리만 건너면 너를 부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네가 응해줄 리 없을 뿐.

  너무 많은 것을 잃어 황폐해진 너는 홀로 살아가기 힘들 거라는 주변의 판단으로, 이 도시에서 그나마 너를 잘 아는 사람에게 맡겨져 있다. 전쟁이 한창일 때, 이곳에서 정예병을 결성하여 너를 포함한 전사들을 지휘했던 남자. 세계적인 대기업의 사장이기도 한 그 남자는 너를 회사에 두고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네가 가끔 회사의 일을 돕는다고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다.

  회사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너를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시작된 생각에 이내 걱정이 다닥다닥 붙었다. 외부인은 들어가는 것부터 난관이라는데, 가능할까?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서 들어간다고 해도 거의 틀어박혀 있을 너를 찾는 게 가능할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진 때였다. 갑자기 통신기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방 안에 놓인 통신기를 집어 들었더니 화면에 메시지가 떠 있었다.

  「유즈, 오늘 오후에 시간 있어?

  예전, 대회에서 대결한 걸 계기로 친구가 된 아이의 메시지였다. 시간 되면 OOO 건물 근처에서 만났으면 해서. 이번에 너랑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눈으로 메시지를 읽었을 뿐인데 그 애의 명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반가운 연락에 답장을 보내려다, 문득 메시지를 보내온 친구에 대한 사소한 사실을 떠올려냈다. 그 애는 네가 머무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학원에 다니고 있다 어쩌면 너와의 연결고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좋아. 오늘 만나. 친구에게 답장을 하면서 너를 떠올렸다. 우선은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메웠다.

  약속장소에 향했더니 친구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의 손에 이끌려 거리를 걷고 미리 점찍어둔 가게로 향하는 내내 즐거웠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까지 겹쳐 한참이나 재잘거리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변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눈길을 끈 것은 먹음직스러운 파이와 조각케이크였다. 한참이나 고민하여 몇 개를 골라온 친구는, 수확물을 자랑스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여기, 사와타리가 자주 가던 곳이라던데. 한 번 왔더니 괜찮은 것 같아서 널 데려왔지.”

  큼직하게 자른 케이크를 건네며, 친구는 설명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들뜬 기색이 선명하게 비쳤다.

  “LDS는 커서 그런가, 소문이 잘 퍼진다니  까.”

  “그러고 보면 마스미랑 사와타리 말곤 LDS 소속인 사람들이랑은 한참이나 안 만났네. 다들 잘 지낼까.” 

  “누구 소식이 궁금한데?”

  과연 친구는 바로 반응해주었다. 근황이 궁금한 사람이라곤 하나뿐이다. 언젠가부터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없었던 사람. 사장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이방인. 미리 생각해둔 대로 네 이야기를 슬쩍 꺼내보기로 했다.

  “마스미는 요즘 쿠로사키 만나?”

  “. 가끔 마주치긴 하지. 인사하면 받아주긴 하는데, 그뿐이야.”

  너무 과묵하다니까. 친구는 깔깔 웃으며 파이를 집었다.

  “그런데 쿠로사키는 왜?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았어?”

  “예전에 몸이 안 좋았다고 들은 것 같아서.”

  “이건 LDS에서 떠도는 얘긴데 말이야, 사실 이번에 쿠로사키가 엑시즈 코스 강사가 될 뻔했대. 구체적으로 말이 나왔는데 수락을 안 했다는 것 같더라고. 그 말은 뭐겠어. 잘 지내고 있단 거지.”

  “무엇 때문인진 몰라도 강사는 안 된 거네. 그럼 지금은 무슨 일 해?”

  “글쎄, 듀얼 분석이라던가? 사장을 조금 도와주긴 하나 봐. 실력이 좋으니 프로로 나갈 줄 알았더니 자격만 취득하곤 아예 방향을 틀어버린 것 같아.”

  “듀얼 분석이라면 경기를 많이 보고 다니겠지? 대회 열릴 때면 찾아갈 거고.”

  “그렇지. 저번 주에 스타디움에도 갔던 것 같고, 저번 달엔 또 다른 곳의 대회에 갔다고 들은 것 같아.”

  전부터 짐작하기야 했지만, 친구의 말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너는 지금까지 특별한 사정으로 객석에 나타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상대가 보내오는 초대권을 매번 외면하고서, 일부러 대회를 보러 가지 않은 것이다. 서운함이나 실망보다 역시하는 생각이 앞섰다. 확인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앞으로 너에게 접근할 기회를 찾아 하나씩 풀어가면 된다. 소년병 시절의 너는 불신과 경계가 강해 파고들 틈이 없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여유는 생겼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때 친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유즈는 대회 자주 출전하잖아? 쿠로사키랑 우연히 마주친 적 없어?”

  “, 마이아미로 돌아오고는 한 번도 쿠로사키랑 만난 적이 없어.”

  네가 부러 만남을 피하고 있다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타인에게 설명하기 힘든 것에 대해선 덮어두면 된다. 물론 그에는 너에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다행히 친구는 답하기 전까지의 짧은 침묵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참 보기 힘든 사람이라니까. 나도 가끔은 MCS 이전에 어떻게 쿠로사키랑 친했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해.”

  “그러게. 마스미랑 쿠로사키는 프라이드가 강한 것 외엔 별로 닮은 점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야.”

  “둘 다 LDS에서 엘리트였으니까. 그런 점에서 맞았던 거 아니겠어.”

  자신만만한 말에 웃음이 나왔다. 친구의 이런 당당한 면이 언제나 마음에 들었다.

  너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너에 대해 더 물을 것이 없었기에 자연히 화제를 다른 것으로 바꾸게 되었다. 다음부터는 사소한 대화가 쭉 이어졌다. 학교생활 고민이라거나, 요즘 한창 인기를 끄는 선수에 대한 생각이라거나. 몇 년 지기의 변화라거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주고받았다. 날이 어두워진 것 같아 시계를 보니, 약속장소에서 본 지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있지, 유즈. 쿠로사키가 신경 쓰인다면, LDS 견학 올래?”

  다음번에 또 만나기로 하고 가게를 나설 때, 친구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견학?”

  “LDS는 견학생에 친절해. 쿠로사키는 일단 LDS 소속이니까 운 좋으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더라도 음. 적당히 핑계 대서 불러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유즈, 네가 필요하다면 말이야. 친구의 붉은 눈이 반짝였다. 언제나 의욕적인 친구가 마침 남을 도울 일을 찾아 들뜬 모양이었다.

  “나 때문에 일이 커지는 건 아니지?”

  “아니. 사실 나도 쿠로사키를 만나고 싶어서 그래. 분명 친했었는데 이렇게나 서먹해진 건 찜찜하다고.”

  “그렇다면야 나쁠 것 없지.”

  기쁨을 숨기지 않고 답했다. 친구의 말대로만 된다면 자연스레 네 앞에 설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는다 해도 네 삶에 한 번 끼어들 수 있으니 거절할 이유 없는 제안이었다. 너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게 2년 전이었던가, 3년 전이었던가. 기억조차 불분명할 정도로 오랜만에 너를 보게 된다. 그동안 너는 어떻게 자랐을까. 줄곧 피해왔던 사람, 동생과 닮은 껄끄러운 여자애를 만난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너와의 만남을 상상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두근거림과 긴장이 마구 뒤섞였다. 그러고 보면 너는, 언제나 양면적인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다.

 

* * *

 

  친구는 제법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네 이야기가 나온 그 다음날, 학원에 나가자마자 관계자에게 견학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친구가 호언한 대로,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그 소식을 친구가 바로 전해준 것은 물론이었다. 히이라기 유즈가 온다니까 좋아하던데. 이번 주도 괜찮다는데, 넌 어때? 통신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친구의 목소리는 승전이라도 거둔 양 의기양양했다. 이렇게나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는데. 일이 너무 잘 풀려 조금은 겁이 날 정도였다.

  「쿠로사키는, 어떤 것 같아?

  그러니까, 일정 말이야. 조심스레 덧붙였다. 친구라고 너에 대해 모든 걸 알지 못하겠지만, ‘관찰 대상의 근처에 있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쥘 수 있게 해준다. 어쩌면, 약간의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서 끓는 기대를 모를 친구는 간결한 답을 돌려주었다.

  「당분간은 회사에 붙어있을 것 같아. 요즘 부쩍 자주 보여.

  「그럼, 다음주에 갈까. 나 이번 주는 일정이 있어서.

  「좋아. 우선 다음주 중이라고 말해놓을게. 그렇게만 하면 아마 학원에서 적당한 날 잡아줄 거야.

  「고마워, 마스미. 다음주는 언제든 괜찮으니까, 답을 들으면 나한테 말해줘.

  통신을 끊자마자 관심은 화병, 정확히는 화병에 꽂힌 프리지아로 옮겨갔다. 벌써 몇 번째로 받은 꽃다발이었더라. 달가운 선물은 아니지만, 조심스럽게 다룬 덕에 지금까지 꽃다발이 일찍 시든 적은 없다. 이번 것도 계속 물을 갈아주면서 자주 관심을 두면 한동안 방의 한쪽을 화사하게 장식할 것이다 노란 꽃잎을 들여다보다 문득, 한 번도 품은 적 없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왜 하필 프리지아였을까.

  집 근처의 꽃집만 해도, 장미를 비롯해 온갖 꽃을 팔고 있다. 선물용 꽃다발을 찾는다면 보통은 크고 화려한 꽃을 추천할 것이고, 한 종류의 꽃만 엮기보다는 여러 종을 한데 섞어주는 경우가 대부분. 프리지아, 그것도 노란색 프리지아 한 종류만 엮는 것엔 무언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프리지아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것일까. 혹시나 하는 생각에 프리지아의 꽃말을 찾아보았지만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순 없었다.

  프리지아. 노란색의 프리지아 다발. 한 번 의식한 때부터 그 의미를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껄끄러운 상대에게 보내는 꽃이라면 더더욱 메시지를 담지 않았을까. 너에게 직접 듣는 이상 모를 것이기에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혼자선 답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아 주변 사람에게도 의미를 묻고 다녔다. 몇몇은 애인이 생긴 거냐며 깔깔거렸고 몇몇은 사실은 무서운 저주일지 모른다며 장난스레 받아쳤다. 온갖 답을 들었지만 그 중 진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유즈, 답은 알아냈어?”

  그렇게 소득 없이 며칠이 지났다. 소꿉친구의 집에 놀러가 함께 간식을 먹고 있을 때 소꿉친구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앞뒤 없이 흘러나온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 애는 바로 덧붙였다.

  “, 요즘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다니는 거 있다며. 프리지아인가 뭔가.”

  “그거, 너희들끼리의 암호 같은 거니?”

  불쑥 들려온 목소리는 귀에 익은 것이었다. 그 애의 어머니가 핫케이크를 가져다주시다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든 것이다. 어른이 듣고 있었다는 사실에, 장난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입을 다물고 시선을 외면하고 있으니, 그 애가 눈치 없이 말을 건넸다.

  “엄마는 알지도 모르니까 한 번 물어봐.”

  입을 떼고 싶지 않았는데, 그대로 모른 척 하고 싶었는데. 아주머니의 얼굴에 걸린 웃음이 너무도 상냥해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 프리지아 선물에 뭔가 숨겨진 의미가 있나요?”

  “? 누가 프리지아를 선물하기라도?”

  “유즈 벌써 몇 번째 프리지아 꽃다발 받았다던데.”

  “유우야는 끼어들지 마.”

  “선물한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너무 부끄럽겠지? 아줌마가 생각하기엔 그 사람, 유즈를 많이 아끼는 것 같은데? 어떤 꽃이건, 꽃을 선물한단 건 상대를 기쁘게 해주고 싶단 뜻이야.”

  정말로 그럴까. 희망적인 해석에 오히려 자신이 없어진다. 기억 속의 너는 언제나 비극에 지친 소년병의 모습이다. 타인을 기쁘게 하기는커녕 저를 덮친 불행에 익 사할 것 같은 사람. 그 자리에 버티고 선 것만으로도 힘겨워 보이는 자. 전쟁이 끝난 후, 정예병의 리더였던 사장이 너를 맡기까지. 너는 얼마간 옛 정예병 동료들에게 맡겨졌다고 한다. 지금, 옆자리에 앉은 소꿉친구부터 시작해 몇 명이 순번을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너를 돌봤었다. 가만히 두면 언젠가 뚝 기능정지할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단 것이 그 이유.

  그러나 그 멤버들이 1번부터 마지막 번호까지, 딱 한 바퀴째 돌았을 때 뭔가 문제가 터졌다고 한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의 사건을 계기로 너는 아예 사장의 관리대상이 되어야 했다. 적어도 그때까지 너는 안정이 되지 않은 것이다. 시간이 제법 흐른 일이긴 하나, 네가 그때의 불안정함과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긴 어렵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사라진 동생을 연상시키는 자를 위해 힘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네가 보내온 꽃다발도, 실은 선물이라기보다 의무적으로 보내는 물품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아마 아닐 거예요. 그 사람은…….”

  나를 보면서 조금도 행복하지 않을 텐데. 혀끝에 걸린 말을 겨우 삼켰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봤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언제나 친절한 아주머니라 해도 예외는 없다.

  “유즈. 사람의 감정이란 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냐.”

  아주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론 동조할 수 없었다. 복잡한 심리가 얼굴에 드러난 것일까. 아주머니가 동물을 돌보러 가신 때, 소꿉친구가 속삭였다. 아무래도 엄마 답은 성에 안 차는 모양이네. 아니라고 답했지만 그 애는 영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그럼 유즈. 나한테만 슬쩍 말해줘. 꽃 보내준 사람, 누구야?”

  “짚이는 사람은 있는데 확인은 안 해봐서 몰라.”

  “그러지 말고. 혹시 모르잖아. 누군지 알면 내가 그 사람 심리 짚어줄 수 있을지.”

  “유우야한텐 말 안 해.”

  그 애에게 말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개인적인 일을 꺼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고, 둘째는 그 애 역시 너와 묘하게 얽혀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애는 너에게 단순히 옛 동료로 요약되는 사람이 아니다. 전쟁 끝에 돌아올 수 없게 된 네 친우와 쌍둥이처럼 닮은 자이기도 했다.

  예전, 그 애가 너를 얼마간 돌봤던 것은 그 애 나름의 책임감과 너에 대한 부채감 때문일 것이다. 너에게, 친우의 부재를 채워줘야 한다는 생각. 상실감으로 괴로워할 너를 보호해야 한단 마음. 이제 와서 그 애 앞에 네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 애에게 불필요한 무게를 지워주게 된다. 아마, 지금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과 비슷한 생각에 사로잡힐 것이다. 쿠로사키의 마음을 좀 더 신경 써줘야 하는데. 같은. 지금껏 자신을 위해서건 너를 위해서건 충분히 노력해온 그 애가 또다시 많은 것을 짊어지길 바라지 않았으므로, 네 이야기는 숨기기로 한다.

  “정말로 말 안 해줄 거야?”

  “확실하지 않은 건 말하는 거 아냐.”

  딱 잘라 거절하자 그 애는 더는 묻지 않았다. 뾰로통한 얼굴을 못 본 체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 것보다, 유우야. 요즘도 하트랜드 사람들이랑 연락해?”

  하트랜드란 네 고향의 이름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폐허였다는 그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그 애를 통해 주민 몇몇의 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 그 애가 네 고향에 불시착하면서 그곳 사람들을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어, 작년까진 연락을 이어갔다고도 들었다. 굳이 네 고향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곳 사람에게만 들을 수 있는 게 있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네가 머무는 곳이었지 너를 아는 곳은 아니었다. 그나마 너를 아는 사람, 옛 정예병 동료라거나 너를 보호하는 사장까지도 전쟁 전의 너에 대해선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과거의 너, 소년병이 아니라 평범한 청년이었던 너를 아는 사람은 고향 주민들이 유일할 것이다. 그들에게 너에 대해 물으면 어쩌면 조금은 너를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너에게 접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벽을 허물고, 내면에 파고들 단서를 찾을지도 그런 희망을 안고 꺼낸 질문에 다행히 그 애는 긍정의 답을 돌려주었다.

  “. 꾸준히 연락하고 있지. , 전할 말이라도 있어?”

  “하트랜드에 대해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데, 연락처 가르쳐줄래?”

  “. 그러고 보니 전에 알렌한테 빌린 거 아직 안 돌려줬네. 내 디스크로 알렌 연락처 찾아서 먼저 통화할래? , 돌려줄 물건 찾고 있을게.”

  연결되면 내 얘기도 좀 해줘. 그 애는 바로 급하게 방을 나서며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처만 알아내 집에서 혼자 연락해볼 생각이었는데.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에 바로 그 애의 통신기를 집어 들었다. 다음은 번호부에서 그 애가 알려준 이름을 찾는 것이었다. 제일 위쪽에 뜨는 이름이라 어렵잖게 찾아냈다.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누르자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연락처가 바뀐 것일까 슬슬 걱정이 될 시점에, 명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유우야. 무슨 일이야?

  통신기 화면에 떠오른 것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소년이었다. 몇 년 전 우연히 얼굴을 본 적은 있는 소년이었지만 그로부터 시간이 지난 탓인지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당장 반응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소년은 상황을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떠들었다. 나 지금 바빠서 화상 연결했는데 괜찮겠지? , 뭐야. 유우야가 아냐? 뒤늦게 상대가 누군지 파악한 소년은 눈이 둥그레졌다. 어색한 웃음을 걸치며, 인사부터 건넸다.

  「안녕, 알렌. 난 히이라기 유즈. 예전에 본 적 있지? 유우야는 잠시 다른 데 갔어. 너한테 빌린 물건 찾아서 돌려줄 생각이래.

  「, 그거. 나도 잊고 있었는데! 알려줘서 고마워. 그거 전해주려 연락한 거야?

  「그것만은 아니고, 물어볼 게 있어서 유우야 디스크 빌렸지.

  「물어볼 거라는 게 뭔데? 내가 아는 거라면 다 답해줄게. 내가 모르는 거면 내 옆의 사야카가 답해줄 거야.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킨다. 역시, 이전에 얼굴만 보았던 소녀가 화면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 애에게서 몇 번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아이이기도 했다. 얼굴만 보았을 뿐 제대로 만난 적 없는 상대에게 두 사람은 친절했다. 네 이야기를 꺼내도 큰 거부감 없이 답해줄 것 같다. 그럼 어느 것부터 시작해야 할까.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뒤엉켰다. 하지만 이 순간 제일 알고 싶은 것을 고르라 하면 간단해진다.

  「있지. 쿠로사키, 그러니까 슌은 프리지아 좋아해?

  결국 가장 먼저 꺼낸 건 내내 신경 쓰였던 것에 대한 질문이었다. 네가 메시지 카드와 함께 보내주었던 프리지아 꽃다발. 일단 말을 던지긴 했으나 사실 기대는 없었다. 너를 아는 사람이라고 모든 걸 꿰고 있을 순 없을 테니.

  「슌은 꽃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 아마?

  소년은 자신이 없는 듯 옆에 선 소녀를 돌아보았다. 답은 소녀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 동생인 루리 때문에 자주 사긴 했었지만. 보통은 노란 프리지아를 골랐어. 루리가 노란색을 좋아했었다나.

  루리가 대회에서 우승한 날, 프리지아 꽃다발을 안겨줬던 게 기억나. 그때 루리가 얼마나 예뻤는데. 소녀의 말을 듣는 내내 지금껏 받았던 꽃다발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프리지아. 그것도 꼭 노란색. 카드에는 대회 수상을 축하하며라거나 대회 참가를 기념하여같은 문구가 적혀있었고.

  「그런데 그건 왜?

  소녀가 물어왔지만, 머리가 정지한 것처럼 무슨 말을 돌려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입은 억지로 열었지만 소리는 쉽게 나오지 않았고.

  「아니. 그냥, 쿠로, 아니 슌한테 꽃을 선물할까 해서.

  간신히 답했을 때 그 애가 돌아왔다. 왜 그래, 유즈? 표정이 안 좋은데.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어떻게 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꿉친구의 집에서 거의 도망치듯 나와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방에 들어가 화병을 보는 순간 설움이 북받쳤다. 보통은 노란 프리지아를 골랐어. 루리가 노란색을 좋아했었다나. 루리가 대회에서 우승한 날, 프리지아 꽃다발을 안겨줬던 게 기억나. 소녀의 말이 머리를 쟁쟁 울렸다. 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동생을 닮은 사람에게, 동생을 위한 선물을 보낸 것이라고.

  네가 얼마나 동생을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는데. 네가 동생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도 자주 생각했는데. 네가 꽃을 보내기 전 동생을 생각하는 것까지도 상상했으면서. 마음 한편에선 최악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네가 어떤 특별한 이유로 꽃을 보내주고 있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대체가 된다는 것은 너무 비참한 일이니까.

  그러나 이제 명확해졌다. 네가 어떤 생각으로 지금까지 카드를 써왔는지. 왜 매번 프리지아 꽃다발을 보냈는지. 뻔한 결론에 숨이 막히면서도, 한편으론 이렇게 미리 알게 되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이런 것을 너에게서 직접 듣게 되었다면 충격이 몇 배는 되었을 것이다. 네 앞에서 울음이 터져 도망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던 때, 테이블에 올려둔 통신기가 진동했다. 화면을 들여다보니 며칠 전 만난 친구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유즈. 저번에 이야기한 견학 말이야. 화요일 괜찮아?

  화요일이라면, 이틀 후. 머릿속에 뒤엉킨 생각을 정리하기엔 충분히 긴 시간이면서, 기다리기에도 그렇게 지루하지 않을 정도였다.

  「괜찮네.

  바로 답장을 보내주면서 화병을 힐끔거렸다. 볕이 드는 자리에 놓인 프리지아는 아직껏 화사했다. ‘선물의 의도를 안 순간부터 바로 치워버리고 싶어진 꽃이었지만, 이틀간만 남겨두기로 마음먹었다. 이틀 후, 너에게서 답을 듣고 오면 깨끗이 치울 것이다. 그동안 받았던 메시지 카드와 함께, 꽃잎 하나 남기지 않고.

 

* * *

 

  이틀은 거짓말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화요일, 학교를 마치자마자 매일 같이 하교하던 소꿉친구를 떼어놓고 네가 머무는 회사 건물로 향했다. 세계적인 대기업이란 명성에 걸맞게 웅장한 건물은 언제 봐도 익숙하지 않다. 살짝 긴장한 채, 회사로 발을 들였다. 입구에서부터 제복을 입은 경비원과 마주쳤지만 미리 준비한 방문증을 제출하자 어려움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견학하기로 한 곳은 회사 직속의 학원. 너는 회사에서도 학원 강의실 근처의 방에 머문다고 하니 운이 좋다면 힘들여 찾지 않아도 너와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내원을 따라 학원 건물을 구경하면서도 생각은 자꾸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자꾸만 울리는 통신기라거나, 지난 몇 년간 우연히 스쳐간 적도 없는 너라거나. LDS의 펜듈럼 코스는 가장 늦게 만들어진 코스지만 꽤 인기랍니다. 지난 MCS에서도 펜듈럼 코스의 학생이 우승을 거두었지요. 안내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통신기로 시선을 돌렸다. 통신기가 계속 진동하는 건 친구가 보내온 메시지 때문이었다. 친구는 비밀 프로젝트라도 수행하는 것처럼 들떠서, 메시지로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유즈. 근처에 쿠로사키 있는 것 같아.

  10분 전의 메시지였다.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다시 통신기가 울린다.

  「붙잡아둘게. 나중에 휴게실 쪽으로 와.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마침 너는 회사에 있었고, 친구의 시야에 들어왔으며, 친구에게 곧 붙들릴 것이다. 견학을 명목으로 회사에 찾아온 자가 너를 만나러 갈 때까지. 휴게실 근처에 묶여있는 것이다. 너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까. 오랜만에 만났으니 인사부터 꺼내야 할까. 그게 아니면, 예의상 안부를 묻는 것이 먼저일까. 어차피 목적은 뚜렷한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까. 너를 만날 순간만 기다리며 걸음을 옮겼다.

  “……해서, 원하신다면 사장님을 만나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견학이 끝날 즈음 날아든 말에 순간 멈칫했다. 말하는 사람이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신경이 다른 곳에 쏠려있어, 바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던 탓이다.

  “?”

  “. 히이라기 씨는 프로 듀얼리스트니까요. LDS에서는 수강생을 키워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랍니다. 미래를 열어갈 프로 듀얼리스트도 지원하고 있답니다. 사장님을 찾아간다면 많은 도움을 받을 겁니다.”

  다행히도 그리 중요한 말은 아니었다. 아마 견학생에게 건네는 멘트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음을 들키지 않은 데 만족하고서 적당히 받아치기로 했다.

  “감사한 일이네요. 오늘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아서,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만나야겠어요. 그래도 괜찮겠죠?”

  “물론입니다. 사장님은 언제나 히이라기 씨 같은 유망한 선수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만 기억해주세요.”

  정중하게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안내원에게 하나, 물을 것이 있었다. 그동안 방문한 적 없어 낯설기만 한 건물에서 꼭 찾아가야 할 장소.

  “휴게실이 어느 쪽이지요?”

  “여기서 왼쪽 방향으로 쭉 가시면 나올 겁니다. 안내가 필요하신가요?”

  “아뇨. 직접 찾도록 할게요.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견학이 끝났다. 바꿔 말하면 이제 회사고 학원이고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단 뜻. 안내원이 이야기해준 대로 걷다 보니 학생들이 여럿 모여있는 장소가 있었다. 아마도 저곳이 휴게실이리라. 확신을 품게 한 것은 저 앞에 선 친구의 모습이었다. 친구는 저보다 조금 더 큰 남자와 마주본 채 무어라 대화하고 있었다. 친구의 말 군데군데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그렇지, 쿠로사키? 내 기억엔……했는데, 쿠로사키가 생각하기엔 어때? 계속해서 너의 이름이 들리고 있다. 그곳에 네가 있다. 두근거림과 긴장으로 아찔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친구 쪽으로 걸었다.

  이제 네가 선 자리까지 열 걸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제 다섯 걸음.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세 걸음. 남은 걸음이 줄어들수록 친구와 마주 보고 선 남자의 모습도 선명해졌다. 오랜만에 본 너는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모자를 푹 눌러쓴 너는 코트로 온몸을 감싸던 예전과 달리 가벼운 점퍼를 입고 있었다. 몸이 앙상해진 만큼 자세가 구부정해졌고, 어깨를 살짝 넘던 머리카락은 제법 길러 느슨하게 묶어 내렸으며.

  “유즈, 여기야!”

  과거와 다르게 쉽게 도망쳤다.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자리를 뜨려는 너를, 빠른 걸음으로 쫓았다. 하나. 너와 거리를 좁혔다. . 뒤에서 네 팔을 잡았다. . 팔을 잡으며 너를 돌려세웠다. 그 과정에 모자가 벗겨지며 네 얼굴이 드러났다. 핏기 없는 피부와 흐리멍덩한 눈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긴 했지만, 얼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힘겹게 붙잡은 사람은, 분명히.

  “찾았다.”

  쿠로사키, . 네 이름을 겨우 토해냈다. 너는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LDS에 있었네.”

  “바쁘신 분이 무슨 용무인지 모르겠어.”

  “묻고 싶은 게 있을 뿐이야. 나는.”

  너를 만나기만 하면 쏟아져나올 줄 알았던 말이 막상 널 붙잡으니 입 안에서 말라붙었다. 무엇 때문일까. 네가 저를 붙잡은 손을 뿌리치지도 않을 정도로 무기력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에게 답을 듣기 두려워서일까. 이 만남이 그동안 이뤄지지 않았던 건 사실 네가 기회를 주지 않아서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양쪽 모두 상대를 들여다보기를 거부하며 돌아섰던 것일지도.

  “나는…….”

  망설이는 것을 느낀 것일까. 너는 손을 풀고 도망치는 대신, 신경질적으로 용건을 묻는 대신 부드럽게 속삭였다. 사람들 앞에서 얘기할 생각은 없겠지. 안 그래? 손위형제 같은 능숙한 태도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 최상층으로 가자.”

  도망치지 않을 테니 걱정 마. 머릿속을 읽은 듯한 말이었다. 답 대신 너를 붙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최상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서 너는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그곳은 사람이 많아. 나 같은 건 알아보지 못해도 프로 듀얼리스트 히이라기 유즈는 알아보겠지. 무슨 얘기든, 거기서 하면 왜곡될 거다. 분명히 청자를 두고 하는 이야기인데, 네가 정면만 보고 이야기해서인지 혼잣말처럼 느껴졌다. 문득 과거에도 너와는 몇 번 스쳐갔을 뿐 제대로 대화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제대로 반응해줘야 할 텐데, ‘평범한대화는 이 관계에서 너무나 낯설어서 입을 뗄 수 없었다. 대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에도 너를 붙잡고 있었다. 여기에 있다고, 계속 듣고 있다고. 전하기라도 하려는 양.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너를 따라 내린 때. 왜 네가 이곳을 골랐는지 바로 이해했다.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지금의 방문자 둘 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너는 상대가 안전하게 도착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갔다. 얼핏 보기에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곳, 좋아하지?”

  너를 붙잡은 손을 풀고서 물었다. 가장 먼저 꺼낸 질문이 그런 것이었다니. 스스로도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성큼성큼 난간으로 향한 너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진 짐작이 가?”

  “네가 말해주기 전까진 몰라.”

  “프리지아. 네가 보냈지?”

  너는 긍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 침묵이 의미하는 것은 뻔했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기에 특별히 놀랄 것도 없었다. 정말로 듣고 싶었던 것은 지금껏 꽃다발을 보내왔다는 인정이 아니라 왜 그러했는지, 이유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조차 빤했지만 네 입으로 듣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 하필 프리지아였어?”

  어쩌면 마지막까지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네게 다른 뜻이 있었던 거라고.

  “왜 프리지아여야만 했어? 다른 꽃도 많은데 왜 하필? 그리고 왜 노란색 프리지아만 골랐던 거야?”

  그러나 기대는 무참하게 깨지고 만다. 너는 답하기는커녕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의문을 하나하나 꺼내도 너의 시선은 저 아래에만 꽂혀있다. 도시의 풍경을 보기 위해서건 외면하기 위해서건 상대를 등진 채, 입도 떼지 않는다. 이것은 대화가 아니다. 같은 자리에서, 독백을 하고 있을 뿐.

  “도망치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건 내 말에 제대로 답해주겠단 거 아니었어?”

  대답해, 쿠로사키.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다섯 걸음이 남았을 때. 너는 침묵하고 있었다. 네 걸음. 너는 살짝 고개를 돌린다. 세 걸음을 남긴 때. 네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두 걸음. 네 입이 열렸고.

  “그건.”

  한 걸음. 너와의 거리가 한 걸음으로 좁혀졌을 때 네 말을 자르며 물었다.

  “루리가 노란 프리지아를 좋아했으니까?”

  그 말을 직접 꺼내는 것은 제법 비참했다. 결국 너에게 누이의 대체로 취급되었다고 스스로 의심하는 셈이니. 네 동생이 먼 이국에서나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면 차라리 나았다. 너에게 잠깐 그리움을 투영할 대상이 된 것이라고 위안할 수 있었다. 네 동생은 이미 환상처럼 사라진 사람이기에 모든 것이 몇 배로 비참해진다. 너는 존재하지 않는 동생을 살아있는 사람에게 투영하는 것이 되고, 지금 네 앞에 선 자는 망자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도, 동생을 잃은 네가 얼마나 무력해졌는지 알기에 드러나게 원망할 수도 없다.

  “나는.”

  “내 듀얼엔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으면서, 다 끝나고서야 루리에게 챙겨줬듯이 꽃다발을 보냈어. 그것도 루리의 취향에 맞춰서!”

  왜 한 번도 오지 않은 거야? 나를 보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듀얼 분석 때문에 다른 듀얼을 보고 다니기까지 했다면서 왜 내 듀얼은 봐주지 않았어? 네 머릿속의 나는 루리처럼 열네 살에 멈춰있어야 하니까? ‘루리 같은 애가 잘 살아가는 걸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거야? 말을 쏟아내는 내내 네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듣고 싶지 않아서. 편리하게 생각하고 적당히 외면하기 위해 지금까지 만남을 피했다. 서로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한참을 보냈다.

  “날 정면으로 봐줘.”

  그러니 지금이라도 상대를 응시하며 서로의 말을 듣고, 삐걱거리는 것들은 서로 맞춰가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된 대화이고 이해이며, 성숙한 인간의 태도임을 이제는 안다.

  “네가 먼저 내 삶에 뛰어들었잖아. 아무것도 모르던 내 삶을 뚫고 들어와서, 전쟁을 말하고 이차원의 존재를 알려주었잖아. 그랬으면 나를 제대로 바라봐야지. 내 삶에 그만큼의 파란을 일으켰으면…….”

  그래야 공평하잖아. 말을 맺었을 땐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너는 손을 뻗어 가만히 눈물을 닦아주었다. 보호자였던 시간이 길었던 너는, 힘겨워하는 사람 앞에서는 언제나 어른스러웠다. 너의 메마른 친절 때문인지, 속에 담아둔 것을 전부 쏟아내어서인지, 거칠어진 숨소리도 흘러넘칠 듯한 감정도 차차 잠잠해졌다. 침착하게 기다리던 너는, 눈물이 더 흐르지 않게 되었을 때 입을 뗐다.

  “네가 초대권을 보내주었을 때.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어.”

  담담하게 이야기할 때 네 시선은 청자에 향해 있었다. 드디어 독백이 아니라, 대화를 하려는 것이다.

  “무엇을?”

  “네 삶에 끼어드는 것 말이야. 무슨 자격으로 네 앞에 서야 하는 걸까? 친구였던 적도 동료였던 적도 없는데 어떤 사람으로 나타나야 하는 걸까? 네가 말한 대로, 난 처음부터 네 삶을 찢고 들어갔다. 그러니 더 조심스러웠어야 했던 거야. 무엇보다…….”

  망설이는 기색이 있었다. 그 다음에 흘러나올 이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지만 네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마구 쏟아지는 말을 네가 끝까지 들어주었던 것처럼. 과연 너는 약간의 침묵 끝에 짐작했던 이름을 토해냈다. 루리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우리는 마냥 깔끔할 수 없는 관계였지. 건조한 목소리에서, 그동안 너를 괴롭혔을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너는 회사에 머무는 동안 많은 것을 홀로 삭혔으리라. 타인 앞에서 실수로라도 쏟지 않을 수 있도록.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보다 그 덤덤함이 더 처참하게 느껴졌으나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잇는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루리를 의식하게 되는 일이 싫었다. 내가 루리 때문에 널 만난다 생각하고서 너 스스로 루리에게 매이게 되는 거 말이야. 그래서 한동안 너를 일부러 피했지. 그래도 너에게, 네 호의를 완전히 거절하는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 대회 때마다 꽃을 보내기 시작했고.”

  “네가 보낸 꽃이란 건 바로 알아차렸지만, 네가 보내오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기쁘지 않았어. 무슨 생각이건 속에 담아두기만 하면 상대는 알지 못해. 그러니.”

  말을 해주는 게 좋았단 거지? 너는 조심스레 물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동안 내내 마음에 담아두었던 의문을 다시 꺼냈다.

  “그럼 프리지아는?”

  “그건 확실히 내 잘못이야. 그냥 습관적으로, 제일 익숙한 꽃을 골랐던 것이거든. 그 전까진 루리에게만 꽃을 안겨줬었으니까, 프리지아가 먼저 눈에 들어왔지.”

  “쉬운, 답이네. 정말로 쉬운 답이었어. 난 사야카에게까지 답을 물었었는데.”

  “내가 한 번만 제대로 이야기했다면, 달랐을까.”

  “물론. 달랐겠지. 애초에 이렇게까지 마음을 썩히며 빙빙 돌아올 필요가 없었어. 네가 꽃을 보낼 때 난 꽃을 잘 몰라서 내 눈에 예쁜 것을 골랐어라고 한마디만 더 적어주었거나. 아니면 카드에 네 이름이라도 제대로 써주었다거나. 가장 쉬운 길은, 한 번이라도 내 경기를 보러 와주는 거였어. 그럼 난 널, 그렇게 의식하진 않았을 거라고.”

  그랬다면 오해도 없었다. 서로의 진심을 바로 받아들일 순 없었더라도 조금씩 상대를 인정하고 가까워질 수 있었으리라. 그동안 상대를 생각한다고 침묵한 것이 오히려 상대에게 마음의 짐과 상처를 남길 뻔했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이야기가 나온 게 다행이었다. 너는 도망치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상대의 말을 들어주었으며, 다소 늦은 시점이긴 했지만 속마음까지 털어놓았다. 이 관계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그동안 괜한 일로 마음을 쓰게 했군. 미안하게 됐어. 이렇게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직, 안 끝났어.”

  단순히 사과를 듣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어렵게 대화를 시도한 것도, 너에게서 솔직한 답을 들으려 노력한 것도 그 이상을 바라서였다. 일부러 너를 찾아오기 전까지, 너를 떠올리면 언제나 처음 만난 때, 열일곱 살 소년병의 모습으로만 그려졌다. 이미 전쟁에서 벗어난 것도 그때보다 나이가 든 것도 아는데도 머릿속 네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네가 지금의 모습, 스물에 가까운 청년의 모습으로 각인되기 위해서는 계속 마주치고, 부딪치고, 마주 서야 한다.

  “앞으로 내가 참가할 대회는 많아. 언제라도 좋으니 한 번, 보러 와줘.”

  이제 너는 눈앞에 선 사람에게서 동생을 닮은열네 살짜리 소녀가 아니라, 열여섯 살의 프로 듀얼리스트를 보아야 했다. 용기 내어 제안한 것은 그래서였으나, 너는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괜찮겠어? 자신 없는 목소리에서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분명, 너는 편한 상대가 아니다. 네 누이라는 기묘한 연결고리 때문에라도, 너에게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미 결심은 서 있었다. 그게 싫었다면 내가 지금까지 너한테 초대권을 보냈을 것 같아? 살짝 웃어주며 말하자 너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거부감은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뭐가 어려운 거야?”

  “네 문제가 아냐. 얼마 전에 사장과 상담을, 했거든. 최근 몸이 안 좋아져서 듀얼 분석 같은, 체력 소모가 큰 일은 곧 그만두기로 했어. 일부러 모른 체한 처음 두세 번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네 경기를 보지 않은 건 그 때문이기도 했지.”

  혹시라도 객석에서 몸에 문제가 생긴다면, 네 무대를 망칠 게 걱정되어서. 네 목소리는 지나치리만큼 덤덤했다. 문득 회사에 들어가기 직전 네가 얼마간 입원해 있었다던 소꿉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못 보던 새 안쓰러울 정도로 마른 몸과 나른해진 눈빛도 마음에 걸린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더 나빠진 것일까. 네 상태를 살피지 않은 게 조금 미안해져,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던 때. 네 입술이 먼저 열렸다.

  “그래도 하루. 가능하다면 하루쯤은. 네 무대를 보러 가도록 노력해볼게.”

  너무 늦게 되면 기회를 잃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때, 녹색을 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난간을 등지고 선 네 얼굴에 옅은 웃음이 걸린다. 이전의 너라면 위태로워 보였을 모습이 이번엔 조금도 불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비로소 머릿속의 네가, 쿠로사키 슌이 열일곱 살의 소년병에서 평범한 청년으로 바뀐다.

  아. 이제 되었다. 이제는 너를 떠올리면서 씁쓸함도 슬픔도, 부채감도 들지 않을 것이다.

  최상층의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안도감이었다.

 

* * *

 

  그 주의 마지막 날에는 두어 달 전부터 잡힌 일정이 있었다. 친분이 있는 선수가 주관하는 자선행사의 이벤트 경기에 나서는 것이었다. 공식전이 아니니만큼 승패에 대한 부담이 적은 데다 상대 또한 잘 아는 사람이라 큰 긴장 없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분명 이벤트 경기라고 설명해두었는데. 객석에 히이라기 유즈란 이름이 붙은 응원 팻말이 몇 개나 보였다. 소꿉친구와 아버지를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이 부러 찾아와준 것이다. 다들 유별이라니까. 가볍게 웃어버리고 경기를 시작하려던 때였다. 스타디움의 문이 닫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들어온 사람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녹색을 띤 머리카락에, 금빛 눈을 가진 남자. 낯익은 사람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만나고 온 사람. 그 전까지 대화를 피하다 겨우 오해를 풀었던 너. 가능하다면 하루쯤은 네 무대를 보러 가도록 노력해볼게. 네 메마른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그 날의 약속을 너는 지켰다. 상대가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이번 달 내의 일정 중에서도 가장 먼저 치러지는 경기를 보러 와준 것이다. 너를 발견하자마자 머리를 친 놀라움은 이내 기쁨으로, 다시 감사로 바뀌었다. 어렵게 찾아와준 사람을 위해서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이벤트 경기이지만 최선을 다해 대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일까. 승리를 거둔 때 객석에선 열렬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공손하게 인사하고 무대를 내려올 땐 너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만족으로 들뜬 채였다. 잔뜩 흥분한 아버지에게 안기고, 소꿉친구의 축하를 받은 후. 객석을 몇 번이고 살폈다. 너에게 제대로 인사하고 싶어서였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끝내 너를 찾지 못했다. 승부가 나기 직전까지도 네가 살짝 보였으니 경기를 끝까지 관람하긴 했겠지만 너에게서 직접 축하 인사를 듣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견학을 핑계로 너와 만나게 해준 친구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줄 것이 있으니 중앙공원으로 나와줄래? 몇 번이나 다시 읽어도 별다른 단서가 없어, 호기심을 안은 채 공원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는 만나자마자 불쑥,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거. 쿠로사키가 너한테 주고 싶어 했던 거래. 직접 줄 상황이 안 되어서 나한테 대신 전해달라고 한 거야.”

  뜻밖에 네 이름이 나와서 고개를 갸웃거렸더니 친구가 설명을 보탰다. 쿠로사키는 사장에게 부탁하고, 사장은 내가 너랑 친한 거 아니까 나한테 맡긴 거지. 시들기 전에 주려고 급하게 연락했어. 친구의 말을 듣는 내내 시선을 꽃다발에 두고 있었다. 네가 준비한 것이라고 듣고 보니, 하나 특별하게 느껴지는 점이 있었다.

  “……이번엔 장미네.”

  이번 꽃다발은 지금까지 받은 것과는 달리, 분홍색의 장미가 예쁘게 엮여 있었다는 것. 다른 사람이 아닌 네가 선택한 꽃이라면 이번에야말로 무언가 의미가 있을 터였다. 자세히 살피니 꽃을 묶은 자리에 작은 카드가 끼워져 있었다. 어쩌면 특별한 메시지를 담았을지도 모를 것.

  “‘이번엔?’”

  “아무것도 아냐. 장미를 받는 건 처음이어서.”

  카드를 살그머니 뽑아 주머니에 숨기며 둘러댔다. 친구는 더 묻는 대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있지, 쿠로사키 말이야, 네 듀얼 보러왔었어.”

  “. 알고 있어.”

  “네 듀얼 끝나자마자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겼대. 지금 입원중이라고 들었어.”

  “쓰러졌다고?”

  “최근 들어 몸이 나빠졌다더라고. 워낙 말이 없는 데다 원래 잘 돌아다니지 않는 편이니 그런 줄은 몰랐지.”

  네 창백한 얼굴이, 선이 가는 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몸이 좋지 않아서 하던 일을 그만두려 한다던 네 말도 머리를 쳤다. 경기를 보러 와주는 것만으로도 약속은 지킨 셈인데. 책임감이 강한 너는 마지막까지 객석을 떠나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이다. 몸의 이상신호를 느끼면서도 끝까지 버티다, 승부가 난 후에 무너졌으리라. 객석에 소란이 없었던 걸 보면 너는 승리를 확인하자마자 경기장을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승자가 스포트라이트를 오롯이 받을 수 있도록.

  “, 많이 안 좋은 것 같아?”

  “사장은 상세하게 이야기해주지 않았어. 안정을 취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만 했지.”

  언제든 문병 가도 된다던데. 어디인지 이야기해줄까? 친구의 말에 네가 입원한 병원과 병실 호수를 받아적었다. 면회가 가능하다면, 그렇게 상태가 나쁜 편은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친구와 헤어졌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방문을 닫아걸고 외투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는 것. 카드를 펼치자마자, 이제는 익숙한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다만 카드 자체가 작아서인지, 전할 말을 최대한 간결하게 쓰는 것이 네 습성인지, 단 두 문장만 적혀있었다.

 

  『 히이라기 유즈에게.

  너에게 가장 어울리는 꽃을.

 

  그동안의 서운함을 풀어내는 데는 그 두 문장으로 충분했다. 카드를 수첩에 끼워두고서, 바싹 마른 프리지아를 화병에서 꺼내 거실 벽에 걸었다. 다음은 기분 좋은 선물을 예쁘게 전시하는 일이었다. 탐스러운 장미 다발을 포장째로 화병에 꽂았다. 큼직한 분홍색 꽃송이가 투명한 화병에 잘 어울렸다. 과연 마지막에 어울리는 화사함이었다. 네 속내를 들여다볼 기회는 없었으나, 이번의 장미 다발이 너에게 받는 마지막 선물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 너는 꽃다발을 준비할 일이 없을 것이다. 상대와 제대로 이야기하는 법을 익힌 것은 물론 그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게 되었으니, 꽃으로 마음을 전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이번엔 너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는 것이 어떨까. 꽃집에서 한 송이 한 송이 다른 종류의 꽃을 골라 하나로 엮는 것이다. 조화라곤 찾아볼 수 없을 괴상한 꽃다발을 상상하고 웃었다. 그런 것이라면 분명, 병실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낼 너에게도 제법 재미를 줄 것이다.

  다음주에, 가능하다면 소꿉친구와 함께 네 문병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애는 너에게 친절하니 아마 이야기만 꺼내면 같이 가겠다고 나서리라. 꽃다발은 문병 당일에 준비한다 해도, 카드는 미리 써둘 수 있다. 오랜만에 장난을 칠 생각에 키들거리며 카드와 펜을 꺼냈다. 맹금의 이름을 가진 너를 위해 날개 장식이 붙은 카드를 고르고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메시지를 쓴다.

 

  『 쿠로사키 슌에게.

  그동안 속을 썩인 복수로, 눈을 뗄 수 없을 꽃다발을 준비했어.

  빨리 나아서 이걸 안고 퇴원하길 바라.

 

 

 

Posted by 현소야 :

 

 

  너를 만나기 전부터 너를 알고 있었다. 이름은 물론, 생김새와 취미, 생활습관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꿈꾸는지도. 타인이 얻기엔 다소 많은 정보를 일찍부터 꿰고 있었다. 너를 파헤치려 했던 결과는 아니었다. 너는 원래 관심 범위 밖에 있었으며, 상부가 표적으로 삼은 소녀와 우연히친밀한 사이였을 뿐이다. 소녀는 너를 퍽 좋아했는데, 애초에 그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뿐인 가족, 그것도 자신을 키워주다시피 한 손위형제. 그것만으로도 너는 소녀의 애정을 사기 충분했다.

  조금은, 질투가 날 정도로.

  소녀는 걸핏하면 네 이야기를 했다. 오빠는 프로 듀얼리스트가 되는 게 꿈이래요. 꿈으로만 남진 않을 거예요. 듀얼 학원끼리 붙으면 스페이드교 대표로 나선다니까요. 그 카이토의 라이벌로 취급될 정도니까.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 거겠죠. 그렇게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마다 소녀는 들뜬 얼굴이었다. , 저와 닮았냐고요? 글쎄요, 사람마다 다르게 얘기해서. 전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사진 보실래요?

  너를 알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표적>인 소녀와 친해지려면 너에 대해서 들어야만 했다. 소녀가 흘리는 일상의 대부분에 네가 끼어있었으므로. 상부의 명령은 간결했다. 이름만 몇 번 들어본 먼 도시로 향해, 그곳에 침투하여 표적을 찾아낸다. 다음엔 표적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은 후, 꾀어내 납치해라. 그 여자아이를 포획해갈 사람은 따로 준비해두었으니 유인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어렵지 않은 명령에서 그나마 가장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소녀의 마음을 사는 일이었다. 표적에게 친절한 사람으로 각인되어 믿음을 얻어야만 언젠가 소녀를 꾀어낼 수 있을 테니.

  [마술사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우리 남매, 닮은 것 같아요? 어느 날 소녀는 사진을 내밀며 물었다. 사진 속 소녀의 곁에는 그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그것이 처음으로 본 너였다. 소녀의 오빠, 표적의 곁을 지키는 성가신 존재. 소녀가 그렇게나 자주 들먹이던 오빠는 상상하던 모습보단 평범했다. 얼굴에 걸린 어색한 웃음이며, 잘 꾸민 소녀와 대조되는 수수한 옷차림에 고개를 갸웃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렇네요. 찬찬히 들여다보면 제법 닮았어요. 루리 양과는 이미지가 많이 다른 편이긴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리 닮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소녀의 기대에 어울려주고 싶어 적당히 답했다. 과연 소녀는 단정한 얼굴 가득 웃음을 걸쳤다.

  [남매니까요. 가족은 어떻게든 닮게 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많은 가족이 서로를 좋아하는 걸까요? 함께 살아가면서, 가족이란 이름으로 얽히면서 닮아가기 때문에?]

  루리 양은 오빠 얘기를 참 자주 해요, 알고 있나요? 남매간에 정이 깊은 모양이에요. 덧붙인 말에 소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궁금해지는데, 언젠가 소개해줄래요? 당신의 오빠.]

  그때 소녀는 웃는 낯으로 냉정한 답을 흘렸다. 아니요.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라고.

  너무 명백한 거절이라, 이유조차 물을 수 없었다. 너와 만나는 걸 소녀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었다. 바로 그 이유에서, 너는 얼마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소녀가 제법 애정을 품고 있는, 그럼에도 몇 번 만난 이방인에겐 소개하고 싶지 않은 사람. 소녀의 설명을 정리하자면 상냥한 동시에 제멋대로라는 사람. 분명 자랑스러워함에도 타인에게 깊이 알려주지 않으려는 자. 너를 대하는 소녀의 태도도, 너에 대한 설명도 뜯어볼수록 모순적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머리를 치는 의문이었다.

  너를 좀 더 깊이 알아보고 싶었으나,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첫째론 표적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얼굴을 많이 노출시켜선 안 된다는 상부의 지침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목적이 끝나면 도시를 떠나야 할 처지 때문이었다. 소녀가 살던 도시를 전쟁터로 만들고서, 소녀를 상부에 넘긴다는 목적까지 달성한 후. 소녀 때문에 침투했던 도시를 떠나며 문득 네 생각을 했다. 표적의 오빠, 정보는 많은데도 뚜렷한 이미지가 잡히지 않는 남자. 끝내 제대로 접근하지 못한 존재에 대한 아쉬움보다 쓸쓸한 감상이 앞섰다. 전쟁이 일어났으니 아마, 그 남자도 죽었겠지. 그게 아니라도 곧 죽겠지. 하고.

  뜻밖에도 너는 살아남았다. 이미 지옥이 된 고향을 떠난 덕분이었다. 또 다른 나라에 침투하여 첩자 노릇을 하던 때, 네가 갑자기 시야에 들어왔다. 주위로부터 두려움을 사는 이방인으로. 잔뜩 무장한 청년으로. 사람들은 네가 먼 곳에서 온 저항군이라고만 했다. 출신지라는 곳은 엑시즈, 하트랜드 그 나라 사람들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지명에 가슴이 뛰었다. 그곳은 네 고향의 이름. 모든 것이, 들어맞는다. 이름도, 외모도. 소녀와 친분을 쌓을 때 알게 된 것과 일치했다.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졌고 금빛 눈엔 경계가 짙게 깔려있었으나, 너는 소녀의 사진 속 오빠가 틀림없었다.

  사람들은 너의 이야기를 쉽게 흘렸다. 침략군이 고향을 짓밟았다거나, 누이가 적에게 납치되었다거나.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청년이 짊어지기엔 너무 음울한 이야기가, 그 무게만큼의 연민이 네가 가는 곳마다 따라붙었다. 네가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타인을 의식했다면 분명, 연민 이외에 진득한 시선도 느꼈을 테니까. 비극의 주인공에게 어울리지 않는 호기심과 괴상한 관심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잠깐 잊었던 관심은 너를 만난 순간 되살아났다. 어떻게든 핑계를 대 접근하려 했더니 마침 행운이 찾아왔다. 너를 만난 나라에서 <침략군>에 맞서기 위해 조직한 정예병에 너와 함께 들게 된 것이다. ‘동료로서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너는 어떨까. 네 누이가 흘린 설명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정예병으로 출격하기 직전, 네게 악수를 청했을 때 머리를 메우는 것은 그런 생각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랜서즈 동지니까, 잘 지내보자고. 쿠로사키.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더니, 너는 못마땅한 얼굴로 살짝 손을 내밀었다 곧 거두어갔다.

  [동지란 말은 그렇게 함부로 붙일 게 아냐.]

  냉랭한 말엔 타인에 대한 짙은 불신과 경계가 내비쳤다. 전쟁에 찢긴 네 마음을 얻긴 쉽지 않으리라 생각하기야 했지만 당시엔 네게 의심을 사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네 누이를 완벽히 속였다는 것, 그녀의 삶에 무해한 사람으로 남았단 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네 누이 앞에 선 때나 네 동료가 된 때나, 첩자 역을 수행하고 있단 점도 자신을 키웠다.

  네가 적으로 삼은 침략군, 너의 고향을 짓밟은 군대는 이쪽에겐 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지이자,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진짜 자리이기까지 했다. 애초에 너와 함께 정예병에 소속되려 노력했던 것도 첩자로서 모두를 속이기 위해서였으니. 상부에서 원하는 정보를 전부 캐내면, 첩자 역을 종료할 때가 되면 정예병에서 이탈하게 된다. 극이 끝난 때 배우가 무대에서 내려오듯. 동지인 체 했던 이들과 말끔하게 끊어진다. 정예병에 들어갈 때부터 정해놓은 결말이었다.

  언젠가 네가 이탈자의 정체를 눈치챌지도 모르지만 네 누이와의 일을 알아차릴 리 없다. 상부의 지침에 따라, 네 누이를 제외하곤 네 고향 사람들에게도 인상을 남기지 않았으니. 그럼 너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불공평한 관계가 아닌가. 한쪽은 통성명하기 전부터 상대를 알고 있는 데다 이미 상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다른 쪽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른다니. 언뜻 동등해 보일지 모르나 정보의 양도 상대에게 입힐 수 있는 타격의 정도도, 네가 몇 배는 불리했다.

  그러니 오만해졌던 것이다. 네가 전장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위험을 감지하는 데 특화되었다는 뜻인데. 직감으로든 예리한 관찰력으로든, 너는 얼마든 주변 사람마저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도.

  동료로서 네 곁에 서게 되었단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정예병에서 이탈하게 된 탓이었다. 정예병으로 출격하자마자 낯선 이국에서 뿔뿔이 흩어지게 된 바람에 너를 관찰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겨우 전원이 모였을 때도 네가 마음을 닫아걸고 있어 얻어낸 정보가 거의 없었다. 너의 동료였던 짧은 시간 동안, 너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이라곤 전쟁이 남긴 황폐함 정도. 이미 듣고 온 것이 있는데도, 너라는 인간은 함께할수록 선명해지기는커녕 흐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네 누이가 말해주지 않은, 전쟁 이후의 네가 너무 뚜렷했기 때문이리라.

  너에게서 전쟁을 걷어내면 무엇이 남을까. 원래의 너는 어떤 인간이었을까. 답 없는 의문은 언제나 야릇한 감상으로 끝났다. , 네 삶에 너무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말았구나. 조금 유감이네. 그 짤막한 감상에 죄책감이 깃들어 있었는지는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있었다 해도 의미는 없었으리라. 네게 드리운 그림자만큼, 이쪽도 똑같이 돌려받았으니까.

  계획보다 빠르게 정예병에서 이탈한 것은 너에게 패해 모든 것을 잃어서였다. 언젠가부터 의심 섞인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던 너는 둘이서 대결할 일이 생기자마자 적의 첩자라는 확신을 안고 덤벼들었다. 훈련받지 못한 저항군 따위 쉽게 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는 끈덕지게 버티는 것만이 아니라 첩자의 위장까지 벗겨버렸다. ‘아군앞에서, 타인의 손에 그동안 숨겨왔던 것이 공개되는 것. 진짜 소속과 속셈까지 단번에 들통나는 것. 첩자로선 최악의 결말이었다.

  용서 없이 몰아치는 너의 공격은 분노를 연료 삼아 점점 거세져만 갔다. 네 분노가 향하는 대상은 명백했다. ‘침략자가 보내온 첩자. 네 고향을 짓밟은 군대와 같은 부류의 인간. 정체를 안 것만으로도 공멸할 각오로 공격하는 너인데, 덮어둔 죄까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네 공격을 막아내다 든 생각이었다.

  누이의 이야기를 꺼내면 너는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무너질지도 모른다. 혹은 상당한 충격으로 흔들릴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너를 추락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 번도 너를 제대로 파악한 적 없는 타인으로서, 완전히 잘못 판단했지만. 경악은 짧았고, 너는 이내 냉정해져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공격 지시를 내리는 네 얼굴에 언뜻, 네 누이가 겹쳐지는 듯했다.

  . 그 애.

  그 순간, 내내 외면하고 있던 것이 머리를 스쳤다. 네 동생의 미래. 상부에 넘겨진 후, 열너댓 살짜리 소녀가 감당해야 할 것들.

  그 애, 프로페서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네 공격을 정통으로 맞고 바닥을 나뒹굴 때, 머리를 메운 감정은 울분도 분노도 아닌, 씁쓸함이었다. 그리고 너는, 비극을 깨지 못하겠구나. 굳이 상부에 묻지 않아도, 예언을 찾지 않아도 너희 남매의 미래는 뻔했다. 두 명 모두, 반드시 불행해진다. 소녀는 돌아오지 못하고 너는 누이를 되찾지 못할 테니까.

  너의 미래를 본 그 순간부터, 너에겐 도무지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네가 주먹을 휘둘러도 복수를 하겠다 덤벼들어도, 막을 길은 없었다. 아니, 저항할 의지조차 없었다. 네 모든 감정을 받아주어야 한다는 생각과, 처분당해도 좋다는 무력감에 휩쓸린 것이다. 그러나 네가 누이의 일을 알게 된 그 날부터 지금까지, 너는 한 번도 제대로 복수한 적이 없다. 그 날은 주위 사람들에게 가로막혔고, 그 다음부터는 번번이 엇갈렸다. 종전 후 겨우 너와 다시 마주쳤을 때. 너는 오래 앓은 사람처럼 망가져 있었다. 음울한 예언이 실행된 탓이다.

  전쟁은 정예병의 승리로 끝났다지만, 그뿐. 네 누이는 전쟁 끝에 흔적도 없이 흩어졌고, 네 나라를 덮쳤던 군대는 별다른 처벌 없이 세상에 섞여들었다. 소중한 사람을 죄 잃고 돌아온 너는 그 씁쓸한 현실에 침묵해야만 했다. 세상 사람들이 전쟁의 흔적을 하루라도 빨리 지우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종전 직후 한두 번 침략군 처벌을 주장했다던 너는, 세상 사람들의 외면과 압박 속에서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세상은 평화로워졌으나, 삶이 비극이 된 너는 조용히 말라갔다. 고향이 아닌 먼 이국에, 정예병 동료들을 만난 도시에 머물며.

  전쟁이 끝났음에도 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건 아마 잃은 것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혹은 너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너는 그곳에서 이방인이었기에, 네 과거를 모르는 이들에겐 그저 낯선 이로 비칠 뿐이었다. 정예병 동료들과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네가 돌봐줄 사람 없이 망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예병 멤버 중 하나, 그곳에서 나고 자란 소년이 어느 날 우연히 너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초췌해진 너를 집에서 억지로 끌어내지 않았다면. 너는 아무도 모르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쿠로사키를 이대로 둘 수 없어.]

  기운을 차려야 한다며 너를 억지로 병원에 입원시킨 소년이, 정예병 멤버들을 모아놓고 꺼낸 말이었다. 쿠로사키는 혼자 두면 자기를 조금도 돌보지 않아. 이대로라면 분명 병이 생기겠지. 그 애의 붉은 눈엔 두려움과 연민이 한데 깃들어 있었다. 최악의 결말을 상상하고, 덜컥 겁이 난 것이리라.

  [그러니 우리, 쿠로사키가 퇴원하면 돌아가면서 맡자. 우리가 데리고 있는 한, 쿠로사키는 안전할 거야.]

  [잠깐. 질문이 있는데, 유우야.]

  손을 들고 명랑하게 말을 건네자 그 애는 바로 반응했다. 뭔데, 데니스?

  [쿠로사키를 맡을 사람에 데니스 맥필드를 넣어도 괜찮겠어? 쿠로사키가 날 감당할 수 있을까?]

  [……어려운 질문인데.]

  그 애는 끝내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모두의 의견을 듣자며, 둘러앉은 동료들에게 기회를 넘길 뿐이었다. 모두의 얼굴에 껄끄러움이 걸려있었으나 논의는 싱겁게 끝났다. 의견을 낸 사람이 두세 명뿐이었던 탓이다. 나머지는 그들의 의견에 미적지근하게나마 동조했다. 그렇게 나온 결론은 데니스 맥필드 또한 쿠로사키 슌을 돕는 것’. 쿠로사키를 도우면서 용서받을 기회일지도 몰라. 근거인지 핑계일지 모를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네, 하면서.

  용서받을 생각은 없었다. 네가 누이의 일을 용서해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거니와, ‘죄가 씻기는 것따위 희망사항도 아니었다. 다만 용서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하나, 중요한 것을 떠올렸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네가 하지 못했던 것. 누이의 미래를 닫아버린 자에게 네가 돌려주어야 했던 것.

  [그럼, 유우야. 날 마지막 순서로 해줄래?]

  순서를 정할 때, 일부러 마지막 순번을 부탁했다. 동료들에겐 쿠로사키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서라 둘러댔지만, 실은 너를 위해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불순한 목적을 숨기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 날 모인 모두는 별 생각 없이 부탁을 들어주었다. 마지막 순서를 받고서, 슬쩍 웃음지었다. 1번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멤버가 자기 역할을 마쳐 한 바퀴 돌면 또다시 1번으로 돌아가기로 되어있었으나, 아마 두 바퀴째 도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옛 정예병 동료들이 너를 맡는 건 첫 바퀴에서 끝난다. 그래야만 했다.

  마지막 차례였기 때문에, 너를 맡을 날까지 여유 시간은 충분했다. 그동안 준비할 것은 둘. 첫째로는 너를 데리고 있을, 안락한 공간. 과거 정예병을 지휘했던 동시에, 네가 머무는 도시에서 대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 제법 괜찮은 집을 마련해주었다. 다음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진짜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재료. 불순한 목적에 걸맞은 물품이기에, 재료를 찾는 일은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다. 너는 물론이거니와, 동료들조차 알지 못하도록.

  모든 준비를 마친 때, 마침 앞 순서가 끝났다. 네 동생 또래의 소년 집에서 머물렀던 너는 다음 목적지가 어딘지 알면서도 말없이 짐을 챙겼다고 한다. 체념한 것인지, 아니면 별달리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느 쪽이건 네가 유지하던 평온이, 곧 깨지리란 생각이 들 뿐이었다.

  「괜찮겠어, 데니스?

  바로 전 순서였던 동료가, 너를 보내주기에 앞서 연락해왔다. 통신기로 흘러드는 목소리에 불안이 묻어있었다. 마지막 순서에서 문제가 터질지 모른다 생각한 것이리라. 동료들은 전부, 네가 어느 순간 자제력을 잃고 동생을 앗아간자에게 덤벼들 것을 걱정했다. 지금이야 닳아버리긴 했지만 본디 너는 날이 잘 드는 병기였고, 분노를 연료 삼아 적을 쓰러트리는 자였으니.

  「뭘 걱정하는진 알겠지만, 문제없어. 어차피 쿠로사키, 이제 힘도 없고.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해.

  끝까지 걱정 가득한 말에 건성으로 답하고 통신을 끊었다. 약속대로라면, 너는 이미 근처에 와 있다. 앞으로 10분 내, 약속장소인 중앙공원에 도착하리라. 시간을 확인하면서, 입가에 스멀스멀 번지는 웃음을 지우려 노력해야만 했다. 이렇게나 기대하고 있다는 걸 너에게 들켜선 안 된다. 그래서야 그동안 준비한 것이 물거품이 될 수도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시야에 불쑥 들어오는 형체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점퍼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왜 이 자는 소리도 없이 나타났는가. 그리고 왜 앞을 가로막았는가. 의문의 답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내려다보는 금빛 눈이 너무도 익숙하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 오늘 만나야 하는 자. 너라는 걸 알아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포식자를 만난 짐승처럼. . 쿠로사키. 몇 박자나 늦게 반응하자 너는 핼쑥한 얼굴에 빈 웃음을 걸쳤다.

  잘도 정신을 놓고 있었군. 겁도 없이.

  네 입술은 굳게 닫혀있는데 네 목소리가 머리를 울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악몽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환청이었다.

 

* * *

 

  ‘방문자가 가져온 짐가방은 고작 한 개였다. 연락을 끊고 홀로 지낼 때부터 네 살림이 단출했다지만 거기서 대부분을 긁어왔다는 짐도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도 너는 짐을 전부 풀지도 않았다. 어차피 곧 다음 순서가 될 텐데.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하며 너는 소파에 기대앉았다. 제대로 닫지도 않은 짐가방을 슬쩍 들여다보자 몇 안 되는 옷가지와, 이제는 의미 없는 물품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정예병으로 움직였을 때 지급받았던 물품이나, 아마도 네가 고향에서 가져왔을 몇 안 되는 유물 등.

  쓸모없는 것을 끌어안는 것이 이미 네 삶에 뿌리내린 습성임은 안다. 이를테면 네 목에 걸쳐진 스카프, 낡아빠진 붉은 천도 그러하다. 고향을 떠나기 전, ‘침략군에 맞서는 저항군이었던 네가 언제나 지니고 다니던 것. 저항군의 표식. 너는 정예병으로 움직일 때조차도 저항군의 표식을 목에 매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지옥에서 싸우는 이들과의 연결고리인 양. 자신이 끝까지 짊어져야 할 책임인 양. 언젠가 네가 그걸 스스로 풀어버리는 날이 온다면 그 날이야말로 네가 책무를 내려놓고, 평범한 청년으로 돌아갈 날이라 생각했는데.

  너는 아직껏 해방되지 않았다. 과거로부터도, 전쟁이란 재앙으로부터도. 저항군이 해체되면서 가치를 잃은 스카프를 아직도 지니고 다니는 건, 결국 네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너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고 삶은 여전히 폐허이기에 너는 아직도, 저항군 시절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봤자 누구도 너와 함께 싸워주지 않을 텐데도. 씁쓸한 현실을 새삼 확인한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너를 맡기로 한 진짜 이유였다. 누구도 모를, 제법 불손한 목적.

  그것만 이루면. 시선은 너의 목에, 정확히는 그 목을 감싼 스카프에 꽂힌다. 제대로 이루기만 하면, 앞으로 너는 저항군의 표식 따위 풀어내게 된다. 더는 과거에 매이지 않고, 현재를 살게 되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 필요한 건 하나. 너를 자극하는 것.

  “쿠로사키는 내가 마지막 순번이니, 조금만 버티면 1번인 유우야로 돌아갈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틀렸나?”

  “유감이지만, 쿠로사키. 다음번은 안 와.”

  “평생 책임져주려고? 대단한 희생정신이야.”

  빈정거리고는 있으나 네 목소리에선 독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말을 건넬 때마다 반사적으로 받아치면서도, 너의 시선은 이쪽으로 향하기는커녕 창밖에 걸쳐져 있고.

  “랜서즈는 네가 날 용서해주길 바라거든. 그게 잘 안 되면 다음번으로 넘어갈 일도 없겠지.”

  “그럼 답 안 나오는 사람과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하트랜드로 가지 그래. 거기서 실컷 네 무대나 펼쳐. 네 식대로라면 그게 진정으로 속죄할 길 아닌가?”

  “쿠로사키. 나는 말이야.”

 너에게 다가가, 바로 옆자리를 차지했다. 너의 시선은 그제야 이쪽으로 향한다. 그러나 아직 반응이 미지근하다. 네 눈에 깃든 감정은 고작 불쾌뿐이었으니. 이럴 때, 네 감정에 불을 붙일 수 있는 화제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너를 자극하기 위해선 계속 꺼낼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루리 양의 일을, 제대로 풀고 싶어. 물론 루리 양은,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오빠인 네가 남아있으니.”

  “……그 이름을 부를 용기가 있는 모양이지.”

  “언제까지나 묻어둘 순 없잖아?”

  이제 과거의 감정은 해결해야지. 심술궂게 덧붙인다. 너는 이 논리를 잘 알고 있다. 너에게 적을 용서하라고 말한 이들이 딱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어차피 전부 끝난 일이라고. 이미 세상이 용서해준 이들에게 울분과 적개심을 품어봤자 타인은 물론 자신마저 상하게 할 것이라고. 그러니 그런 나쁜감정은 털어버리고 현재를 살아야 한다고. 물론 그들은 네 발언권을 앗아갔을 뿐 한 가닥 위로조차도 건네지 않았다. 네 비극을 해결하려는 도움이 없었던 건 물론이었다.

  “어떻게?”

  “네가 나에게서 합당한 보상을 받는 거야.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누이도, 평범한 삶도. 네가 잃은 것은 되돌릴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식으로 감정을 해소할 수밖에. 네 삶을 파괴한 자에게서 그 죗값을 받아내는 게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이다. 마침, 죗값을 치를 자가 바로 네 눈앞에 있지 않은가. 무엇이든 지불할 자신이 되어있는 사람이.

  “너라는 인간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 네가 나에게 줄 게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 있지. 데니스 맥필드의 미래는 어때?”

  나는 신체 건강한 남자니까,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살 수 있어. 그 삶을 네게 전부 넘긴다면? 나긋하게 덧붙이고서 반응을 기다리기로 한다. 표면적인 의미야 평생 봉사하며 살겠다는 뜻이며, 네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지금부터 바로 실행할 수 있을 일이기도 했다. 물론, ‘무엇이든지불하겠다 각오하고서 꺼낸 제안이 겨우 그 정도의 의미만 품고 있을 리 없다. 뒤집어 본다면,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넘긴다는 것은, 목숨을 줄 수도 있다는 뜻. 잘 생각해, 쿠로사키. 복수란 말이야.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누르고 너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네가 가장 바라는 걸 줄 생각이라니까?

  기다림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너는 이내 입술을 열었고.

  “멍청한 놈. 그런 것 따위 관심 없다고.”

  약간의 동요도 비치지 않는 얼굴로 답했다.

  “넌 내 삶을 쥘 수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너 말이야. 그런 식으론 평생 날 못 이겨.”

  그렇게 매달릴수록 지고 들어간다니까. 그렇게 덧붙인 너는 지루해 못 견디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방으로 향하는 너의 뒷모습에 네 누이가, 폐허가 된 네 고향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그녀의 모습이 겹쳐진다. 너에게서 그녀를 보고,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너를 본다. 너희 남매는 이제, 하나의 악몽이 되었다. 너에게 목을 졸리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악몽. 견딜 수 없어, 너의 등에 말을 꽂았다.

  “지금껏, 내게 복수를 꿈꾼 적 없어?”

  “이제 네 진짜 속셈을 알겠군.”

  쥐고 있는 패를 전부 공개하는 것은 엔터테이너로서는 미숙한 행동이다. 매달릴수록 상대에게 밀리게 된다는 너의 말 또한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네 덤덤한 태도에 다급해져 먼저 속내를 흘리고 말았다. 네가 첩자의 가면을 벗긴 때부터, 너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솔직하게 말한 건 칭찬해주겠지만. 방에 들어가기 직전, 너는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난 네가 원하는 걸 그렇게 쉽게 줄 생각 없어.”

  “아직은 때가 아니란 거야?”

  “‘아직은?’”

  공허한 웃음소리가 귀를 때리더니,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너는 방으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 매정하게 닫힌 문을 열어봐야 네가 다시 말을 들어줄 리 없음은 뻔했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네 짐가방이라도 치우려다 의미 없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두 사람이 머물기에도 넓은 거실에 홀로 남겨지니 패배감이 더욱 짙게 느껴졌다. 너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네 삶을 망가뜨린 이에게 돌려줄 수 있을, 가장 쓰린 고통을.

  그 전까지 널 맡았던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들었던 말은 네가 지독하게 무기력해졌다는 이야기였다. 꿈에 젖은 사람처럼 멍하니 바깥만 바라보는 날이 대부분에, 행동이 둔해져 걸핏하면 손을 다쳤다는 것이다. 너답지 않은 극도의 무력함은 전부, 네가 스스로의 비극을 해결할 기회를 잃은 데서 시작된 문제였다.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적을 처단할 수 없고 그렇다고 울분을 쏟을 수도 없게 되었으니 삶에 의욕이 있을 리 없다. 우리에 갇힌 맹수가 공격성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

  그런 모습은 너를 걱정하는 동료들, 선량한 이들에게는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으리라. 한두 명은 그것이 네가 전쟁 피해자로서의 삶에서 서서히 벗어나,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에게 지은 죄가 있는 사람이라면, 무기력한 네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낳은 결과를 상기시키는 단서가 된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네 누이를 상부에 넘기지 않았다면. 그럼 네가 한창나이에 이토록 닳아버렸을까? 어디인지도 모를 먼 곳만 눈에 담으며, 저도 모를 상처를 몇 개씩이나 몸에 새길 일이 있었을까?

  너는 네 비극에 발언권을 잃은 대신, 자신의 삶을 망친 이들 앞에 망가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이 너를 발견한 때부터, 그 처참함에 질려 다시는 너를 잊지 못하게 되도록. 가책과 부채감으로 너에게 묶이도록. 조용한 시위였다. 동시에 효과적인 복수이기도 했다. 너와 함께 지내게 된 후로, 너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다칠 것을 걱정해 날카로운 물건을 죄다 치웠다. 그럼에도 피를 뚝뚝 흘리며 앉은 네 손을 몇 번이나 치료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네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온갖 공연을 준비하고, 네가 좋아할 것 같은 것은 무엇이든 찾아와 바쳤다.

  호의인지 애원인지 모를 노력에 너는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무료한 얼굴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신이 공물을 거두어가듯. 이번에 처음으로 얹은 감상도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이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알고 있어.”

  “정말로?”

  “내 뜻은 아직 달라지지 않았거든. 데니스 맥필드의 미래를, 남은 삶을 넘겨줄 마음이 있단 거야.”

  “그럼 이걸 답해주지 그래. 그렇게 해서 데니스 맥필드가 얻는 이득은 뭐지?”

  금빛 눈이 오랜만에 이쪽을 담았다. 드디어 제대로 상대해줄 마음이 생긴 양. 제법 날카로운 질문에 바로 답을 꺼내지 못하자 너는 무심하게 자신의 추측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나는 노력했다는 자기위안? 쿠로사키 루리를 향한 속죄? 그게 아니면, 나에게 한마디라도 좋은 말을 듣는 것? 흘리는 추측마다 냉소가 짙게 배어있었으나 그 중 무엇도 확실하게 부정할 수 없었다. 네가 나열한 모든 가능성이, 어느 정도는 그럼직했던 탓이다.

  어쩌면 자기합리화를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네 누이에게 공허한 속죄라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데니스 맥필드란 인간을 재평가해주길 바랐다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네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네게 읽히고 있단 생각이 들 뿐이었다.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는 결심조차, 사실은 얕은수에 불과했을지.

  “어때. 내가 맞혔나?”

  온갖 가능성을 늘어놓은 너는 여유롭게 묻는다. 여유로운 표정을 보면 이미 답을 알고서 묻는 것 같았으나, 반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글쎄. 어쩌면?”

  “이제 별로 숨기지도 않는군.”

  “넌 포장하는 걸 싫어하지 않았나?”

  “그럼 내 식대로 판단해도 상관없겠지. 네 욕망을 해석해볼까? 데니스 맥필드는 무결한 인간이 되고 싶은 거다. 누군가에게 가해자로 기억되며 평화를 누리는 것보단 가시관을 쓰고 성자처럼 쓰러지고 싶은 거야.”

  “누구 앞에 무결해지고 싶어 한단 거지? 세상 사람들? 아니면 엑시즈의 모든 주민?”

  “아직 너에게 가시관을 벗어도 된다고 말하지 않은 사람들.”

  누구인지는 듣지 않고도 뻔하다. 네 고향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직후, 일부 침략군을 용서해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죄를 씻은 이들 중에는 네 누이의 미래를 닫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네 누이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하여 신뢰를 쌓고, 결국은 상부에 그녀를 넘겨버린 사람. 네 눈앞에 앉아있는 사람. 너는 그를 용서하지 않은 유이한 인간이다.

  ‘유일한자가 아니라 유이한자인 이유는, 그가 네 누이에게서도 용서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분명 상냥한 사람이지만, 잘못된 행동에 대해선 누구보다 강하게 목소리를 낼 각오가 되어있었다. 저를 속였다는 건 혹 넘어가주더라도 고향 사람들을 전쟁에 내던진 것만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녀가 이미 단절된 사람이라는 점.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녀에겐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

  “맞아. 나는 너희 남매 앞에서 무결해지고 싶은 거야.”

  테이블에 올려둔 네 양손을 조심스레 끌어오며 말했다. 이전부터, 길쭉하게 뻗은 네 손가락을 볼 때면 병기를 쥐기엔 아까운 손이라 생각했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너는 그 손으로 악기를 쥐었을지도 모른다. 평생 악기를 익히지 않는다 해도 지금처럼 손에 상처가 그득하진 않았으리라. 정예병 시절에 이미 상처로 손이 울퉁불퉁했던 너는 전쟁이 끝나고는 부주의한행동으로 걸핏하면 손을 베여온다. 지금도 군데군데 밴드를 붙인 손가락이 처량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너는 이제 이 손으로 무언가 이룰 수 있다. 네가 수없이 꿈꿨을 바람직한결말을.

  “그러니까, 쿠로사키. 우리 쉽게 해결하자. 이 싸움은 네 말대로 내가 질 수밖에 없는 거였어.”

  갑자기 손을 붙들린 너는 손을 빼려 노력했지만, 힘이 부족해 실패했다. 덕분에 별다른 방해 없이 네 손을 목표 지점까지 끌어올 수 있었다. 네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 남자. 네 앞에 앉은 사람의 목에. 이제 너는 그 남자의 목을 양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네 의지는 조금도 없었지만, 상황만 따지고 보면 네게 나쁠 것이 없다. 지금 너는 증오하는 대상의 목을 감싸고 있고, 상대는 저항할 의지가 없다. 이대로 힘을 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끝난다.

  데니스 맥필드의 목을 졸라. 용서받지 않을 테니, 너는 복수를 해. 너무도 명백한 메시지에도 너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목을 감싼 손이 떨리는 것은 느낄 수 있었으나, 힘은 들어가지 않았다. 망설이는 것인지, 아예 거부할 생각인지. 알 길이 없기에 한 번 더 너를 떠밀기로 마음먹었다.

  “쉬운 먹잇감이야. 몇 분만 힘을 주면 돼.”

  그렇게 말할 때 어떤 표정으로 너를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네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던 걸 보면 아무래도 웃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꽤 진하게.

  “비겁한 새끼.”

  답은 냉정했다. 다음 순간 목 대신 뺨이 화끈거렸다. 왼뺨을 후려친 너는 주먹을 꽉 쥐더니 자리를 떴다.

  그 날, 잠들기 전까지 수시로 거울을 확인했지만 목덜미엔 손자국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네가 목을 감싸고 있었던 짧은 시간, 손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탓이다. 거기서 깨달았다. 너는 증오하는 이의 목을 조를 수 있을 상황에서,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는 것을.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얼마간 기다렸던 건 그저 상대의 행동을 살피기 위한 시간이었음을. 벌겋게 달아오른 뺨보다 더욱 쓰렸던 건 이번에도 너를 흔들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후로는 거의 자포자기한 채로 지냈던 것 같다. 무엇을 시도해도 널 움직일 수 없다는 체념이 무력감으로 번졌던 탓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매일 너를 돌봤고, 네 몸에 이유 모를 상처가 새겨질 때마다 꼼꼼하게 치료해주었다. 의미 없는 노력을 쏟지 않았을 뿐, 너와의 관계는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평화로웠다. 하루, 이틀, 사흘. 휴전 상태 같은 고요 속에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일주일, 보름. 항상 지퍼를 조금 열어둔 채였던 네 짐가방이, 어느 날 보니 닫혀있었다. 드디어 이곳에 적응한 것일까. 하는 생각은 갑자기 통신기가 울리며 끊겼다.

  「쿠로사키랑은 잘 지내고 있어?

  통신을 연결하자마자 흘러나온 건 명랑한 목소리. 너를 첫 순서로 맡았던 소년의 목소리였다.

  「그럭저럭.

  「다행이네. 사실 좀 걱정했는데, 별일 없었나 봐. 쿠로사키한테 연락하니 이제 자기가 또 짐을 쌀 때가 되었다더라고. 일주일 남았다던가? 다음 순서는 나니까, 나도 집을 깨끗하게 치워둬야지.

  거기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를 맡을 수 있을 기간은 겨우 일주일. 그 기간이 지나면, 너는 또다시 동료들에게 넘어간다. 다음 순서가 돌아오기까지 한참이나 걸리는 데다, 차례가 되어도 과연 네가 순순히 말을 들어줄지 의문이었다. 이곳에서 나가자마자 보호자’ 1번인 소년에게로 향해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털어놓는 네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지는 듯했다. 그 자식. 비겁한 짓을 하더라고. 나한테 용서받겠답시고 자기 목을 조르게 하려 했어. 그런 제정신 아닌 놈에게 날 또 맡길 생각은 없겠지?

  그러면 소년은 당장 겁을 먹고 순번을 조정하리라. 네가 아닌, 너에게 복수를 강요한 이를 걱정하여 다음번엔 영영 너를 보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너의 삶에서 완전히 잘려나가는 것이다. 평생 죗값을 치르지 못했단 가책에 시달리면서 네 비극을 곱씹을 수밖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조급해졌다. 다음 순서로 넘어가기 전에, 너를 붙들고 있을 동안에 일을 마쳐야 한다. 너에게서 무기력함이 옮은 탓에 한 번도 꺼내지 않고 있었으나, 애초 너를 맡기 전 미리 준비해둔 비장의 패가 있었다.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될 것. 너를 맡기로 한 진짜 목적을 이뤄줄, 비밀스러운 재료.

  그동안 숨겨둔 재료를, 쓸 때가 되었다. 통신을 끊자마자 방에 들어가 작은 상자를 찾아냈다. 자물쇠로 굳게 잠긴 상자를 열자, 자그마한 약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챙겨 거실로 나온 때, 마침 짐가방에 옷가지를 넣던 너와 마주쳤다.

  “일주일 후에, 넌 유우야에게 갈 거지?”

  “고집 피워봐야 소용없어. 약속은 약속이니까.”

  시선은 여전히 가방에 둔 채, 너는 건성으로 받아쳤다. 본래 비협조적인 사람인 것은 알지만, 이번의 네 모습엔 아예 말을 끊어내려는 냉랭함마저 엿보였다. 네 짐가방을 홱 빼돌리자 그제야 네 얼굴에 불쾌가 서렸다.

  “널 계속 데리고 있겠단 건 아닌데? 난 그냥, 끝나기 전에 우리 일까지 마무리했으면 할 뿐이야.”

  “일주일만 무시하면 되는데, 내가 네 뜻대로 움직여줄 것 같나?”

  “왜 저번에 나더러 비겁하다고 했는지 이제 알겠어.”

  너에게 복수하라고 말하는 주제에 네 손을 더럽히려 했어. 그래서지? 거의 매달리다시피 던진 말에도 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번엔, 정말로. 내가 전부 끌어안을게.”

  “무슨 속셈이냐.”

  “이걸 봐줄래?”

  약병을 꺼내어 흔들자 네 시선이 바로 그곳에 꽂혔다. 투명한 유리병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흰 가루가, 동료들 몰래 준비한 비장의 패. 이거, 예쁜 가루처럼 보이지만 사실 위험한 거야. 덧붙인 말에 재료의 정체를 알아챈 너는 약병을 빼앗아가려 했지만, 간발의 차로 지켜냈다.

  “안 돼. 이거, 내 차에 탈 거니까.”

  “……독을, 타겠단 건가?”

  “맞아. 효능은 확실해. 그러니까 안심하고, 당장 나가 어떤 사람이든 만나고 와. 네가 나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난 이걸 타 마실 거야.”

  네가 돌아올 때면 난 이미 쓰러져 있을 테고, 너는 알리바이가 입증되겠지. 흥분되어 흘린 말에 너는 나른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어 기억을 더듬으니, 네 누이가 자주 짓던 표정이었다. 그녀에게서 그 표정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바로 네 이야기를 했을 때. 오빠를 소개시켜줄래요? 란 말에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라 답하던 때, 네 누이는 딱 지금 너처럼 웃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녀의 말이 백번 옳았다. 우연히 만나버린 탓에 너와 질긴 악연으로 얽히게 되었으니. 그럼에도 하나 희망적인 게 있다면, 그 악연도 오늘 끝나리라는 사실. 모든 걸 내려놓겠다는 태도를 보여서일까. 제법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해서일까. 너는 이전과는 다르게, 불쾌를 내비치지 않았다. 잠깐만 앉아서 이야기해달라는 애원에, 순순히 맞은편에 앉아주기까지 했다. 이게 정말 독이라고? 약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자마자 냉큼 가져간 네가, 약병을 손가락으로 굴리며 던진 말이었다.

  “굳이 나에게 네 계획을 전부 알려주는 이유는? 독을 먹는 게 목적이었다면 아무 말 없이 혼자 실행해도 되었을 텐데?”

  “아니. 그래선 곤란해. 이유는 두 가지. 첫 번째 이유. 쿠로사키 슌은 데니스 맥필드를 증오한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잖아? 네 알리바이가 확인되지 않을 경우엔 바로 네가 의심받아. 그러니 전부 설명하고 네게 알리바이를 만들어줄 수밖에.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나한테 보여주고 싶은 거지. 데니스 맥필드는, 진심이었다고. 용서해주건 그렇지 않건 진심으로 죄를 갚고 싶었다고.”

  “부정하진 않을게.”

  너에게 처분을 맡기고픈 마음에, 무결해지고 싶은 욕망에 얄팍한 감정이 깃들어 있으리란 건 뻔한 사실이었다. 조잡한 바탕을 애써 외면해왔을 뿐. 그동안 두르던 포장도, 변명도.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해져 절로 얼굴에 웃음이 걸린다. 이제, 남은 것은 결말뿐.

  “기뻐해줄래, 쿠로사키?”

  너에게서 약병을 돌려받고서 물었다. 네 시선이 오롯이 이쪽을 담는 것을 느낀다.

  “……무엇을?”

  “나에게서 해방되는 거 말이야.”

  “너는, 만족하나?”

  “물론.”

  “그럼 내가 보는 앞에서, 준비를 마쳐둬. 바로 실행할 수 있도록. 그래야 네 진심을 믿을 수 있을 것 같거든.”

  “바라는 바야.”

  자리에서 일어나, 다기와 차를 가져왔다. 그 사이 약병을 열어둔 너는 두 개의 잔을 끌어와 한쪽에 가루를 쏟았다. 마실 사람은 한 사람인데 왜 잔을 두 개 챙기느냐 물으려다, 네가 꽤 즐거워 보이기에 마음을 접었다. 오랜만에, 너는 들떠있었다. 창백한 뺨이 상기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독을 탄 차라. 너답지 않게 재미있는 발상인데. 티팟에 차를 우리며 너는 중얼거렸다. 극적이기도 하고 말이야. 마음에 들어.

  “미리 차를 부어둬야겠어. 그래야 확실하니까.”

  “친절하네. 내가 제대로하도록 도와주는 거지? 날 믿지 않는 건 조금 유감이지만.”

  살짝 비꼰 말에도 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두 개의 잔에 차를 부었다. 다음은 티스푼으로, 독을 탄 쪽의 차를 마구 휘젓는 것. 독이 혹 제대로 퍼지지 않을 것을 걱정한 것일까. 평소답지 않은 철저한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아무래도 너는 이번 계획엔 제법 만족한 것 같다. 아무것도 타지 않은 차를 네 쪽으로 밀어두고서 인사를 건넸다.

  “그럼, 쿠로사키. 안녕이야. 마지막 억지를 들어줘서 고마워.”

  “, 그래. 너에겐 마지막 인사인가?”

  “이제 약속한 대로 나가야지. 내가 쓰러지는 모습을 못 보여주는 건 미안하지만, 아까 얘기한 대로 네가 의심받으면 곤란하니까. 이 동네 산책이라도 하고 와.”

  돌아오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거야. 주문처럼 흘린 말에 너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때문에 네 입술이 옴죽거리는 걸 빨리 파악하지 못했다.

  “……없을 텐데.”

  독이 담긴 찻잔을 이쪽으로 끌어온 때, 네가 흘린 말이었다.

  “?”

  “, 약속한 적이 없을 텐데.”

  다음 순간, 찻잔은 너에게 넘어가 있었다. 한때 전장을 누비던 전사에 걸맞게,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도 빨랐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너는 독이 든 차를 들이키고 있었다. 네 손에서 떨어진 찻잔이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부서질 때서야 겨우, 네 말 뜻을 이해했다. 돌이켜보면 너에게 계획을 줄줄 늘어놓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너는 그 뜻에 동조하겠다 말한 적이 없었다. 상대가 준비한 판을 멋대로 이용하려 했을 뿐.

  알아챈 시점엔 너무 늦었다. 테이블에 핏방울이 뿌려지는가 싶더니 네 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 순간 가장 고통스러웠던 사실은 네게 기습적으로 당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네 얼굴에 걸린 승리의 표정이었다.

  모든 것이 끝나기 직전, 너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 * *

 

  사장은 연락이 닿자마자 달려와주었다. 과거 정예병을 이끌었던 그 남자는 자신의 사람이었던 이들에겐 꽤 강한 책임감을 품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방황했던 너에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으리라. 너를 급히 병원으로 보낸 사장은,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테이블에 뿌려진 피와 산산이 부서진 잔. 식어빠진 차가 남은 티팟까지. 그 남자의 시선이 훑고 지나갔다. 물론 찾아낼 것은 없었으리라. 네가 어쩌다 쓰러졌는지는 물론, 이곳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까지. 사건의 진실에 대해선 동거인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니까.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네가 스스로 독이 든 차를 마셨다고? 그 원인이 네 앞에서 죽어주겠다는 정신 나간 선언이었다고? 패배감과 부끄러움이 한데 엉켜, 입을 뗄 수 없었다. 무엇이라도 털어놓는 순간 그 남자의 시선에 해부될 것만 같았다. 그렇군. 빤한 인간이었어. 그렇게 운을 떼며, 그동안 너밖에 몰랐을 얄팍한 면들을 짚어주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생명엔 지장이 없다고 하더군.”

  복잡한 마음을 누르고 바닥만 보고 있던 때, 사장이 건넨 말이었다. 조금 전까지 통신기로 무어라 연락을 하는 것 같더라니. 널 병원으로 옮긴 수하에게서 보고를 받은 모양이었다.

  “정말로?”

  “그가 삼켰다는 독극물, 치사량엔 못 미쳤다고 해.”

  그럴 리가 없는데. 튀어나올 뻔한 말을 겨우 삼켰다. 분명히, 충분한 양을 입수했다. 필요한 만큼 덜어 약병으로 옮긴 때 계산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면 네가 일부러 약간 덜어내고 차에 탄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알 길이 없을뿐더러 알 필요도 없다. 쓰린 실패를 굳이 파헤치고 싶지도 않으므로 길게 한숨만 내쉬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 무엇이 잘못되었건 너는 최악의 사태를 피했다는 것. 아마 일정 시간이 지나면 무사히 퇴원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이 있다. 쿠로사키 슌이 굳이 네 앞에서 독을 마신 이유는 뭐지? 짐작 가는 게 있나?”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더니 사장이 머릿속을 헤집고 말았다. 물론, 외면할 수는 없다. 이 도시에서 네 신분을 보증해주는 사람으로서, 한때 너를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그도 사건에 대해 알 권리가 있었으므로. 다만 그 질문에 답하기 전, 먼저 풀고 싶은 의문도 있었다.

  “……왜 그 자가 스스로 마셨을 거라 생각해?”

  “너무 넘겨짚었나?”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은 같이 있던 사람을 의심하잖아.”

  “네가 그를 해하려 했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어. 데니스 맥필드는 그럴 사람이 못 되지. 하지만 쿠로사키라면, 충분히.”

  그럴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모호한 말의 의미를 캐묻고 싶었으나, 그러다 사장에게 속내가 들킬까 두려워 마음을 접었다. 상대가 모든 걸 털어놓을 때까지 쥐고 흔드는 것이 너라면, 사장은 몇 안 되는 단서로 상대의 심리를 읽어내는 사람이었다.

  “이유를 물었지? 짐작 가는 건 하나뿐이야. 나를 고통받게 하고 싶어서일걸. 이런 일이 일어나면 내가 패닉에 빠질 걸 알았을 테니까.”

  보통 사람들이라면 질문을 몇 개 더 달겠지만 사장이라면 그쯤만 설명해도 대강 이해할 것이다. 과연 사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쿠로사키는 지독한 데가 있지만. 메마른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그 정도의 일도 아닐지 몰라. 넌 그에게 마음의 빚이 있으니 그 자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압박감을 느꼈겠지. 용서를 구하려 들었다거나. 그 자에게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거나.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면.”

  “내가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고?”

  “네게 잘못이 있단 이야기가 아냐. 네가 그에게 매달린 반작용이었을지도 모른단 뜻이지.”

  물론 결과적으론 그 자가 널 괴롭게 만든 게 되었지만. 따라붙은 말에 망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너는 독을 삼킬 때까지도 복수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저 상대의 계획을 틀어버리는 것이 목표였을 수도 있다. 다만 의도치 않았더라도 상대에겐 최고의 복수가 되었으리란 게 아이러니할 뿐이다. 네가 쓰러지는 순간, 그 전까지 느껴본 적 없었던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누이를 잃은 날부터 네 삶에 진득하게 깔렸을 감정을, 누이를 앗아간 이에게 돌려준 것이다. 그것도 상대가 사용하려던 방법 그대로, 네 목숨을 담보로 삼아서.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머리가 차가워졌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한 답을 얻은 것 같다.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사장에게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부탁할 게 있는데.”

  “말해.”

  “쿠로사키를 맡아줘. 아무래도 그 남자, 제대로 관리받아야 할 것 같으니까.”

  “돌보는 게 아니라 관리인가.”

  “쿠로사키에겐 그게 딱 맞아. 랜서즈는, 날 포함해 전부가 어쩔 수 없이 그 자를 감정적으로 대하게 되거든. 쿠로사키에게나 우리에게나 좋지 않은 일이야. 그쪽도 쿠로사키를 눈 닿는 곳에 두는 게 편하지 않아?”

  “쿠로사키가 회복하면 생각해보지. 그의 의견을 들어야 하니까.”

  옛 동료들끼리 너를 맡고 있단 점 때문인지, 사장은 평소보다 훨씬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 랜서즈끼리도 논의해봐야 할 거야. 지금까지 다들 쿠로사키를 맡아주었잖아. 그렇게 반응하긴 했으나, 사실 앞으로 네가 누구에게넘겨질지는 뻔히 짐작하고 있었다. 사장이 나선다고만 하면 정예병 동료들은 너를 그에게 넘겨줄 것이다. 너는 분명 연민의 대상이었지만, 그만큼 상대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존재였으므로.

  너도 상냥한동료들보단 사장에 기대고 싶어 할 것이다. 사장은 너의 울타리 이상이 되지 않을 사람이고, 너는 연민과 방관 중 고르라면 후자를 택할 인간이었으니. 특히나 지금 널 돌보는 사람들엔 너에게 자꾸만 껄끄러운 일을 들먹이는 자까지 끼어있지 않은가. 정예병 동료들에게 계속 보호받는다면, 너는 언젠가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런 것보다야 사장을 따라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사장은 자기 회사로 돌아갈 때까지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나,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너 대신 네 가방을 정리했다. 어차피 곧, 네가 회사에 들고 들어가야 할 짐이었다.

  네 짐을 챙기고, 네가 쓰러지며 엉망이 된 자리까지 정리하고 나니 넓은 집이 새삼 휑하게 느껴졌다. 두 명이 쓰기에도 지나치게 큰 집에 홀로 남겨진 것이다. 텅 비다시피 한 집을 둘러보며 떠오른 감정은 쓸쓸함보다는 패배감이었다. 사장이 마련해준 거처인 이곳은 네 안락한 삶을 위해 준비된 집이었는데. 네 보호자를 자처한 동거인의 목적도 네 복수를 완성시켜 네가 비극에서 벗어나게 돕는 것이었는데. 결국 네가 이곳을 떠나게 된 때까지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너에게 죗값을 치르겠다는 결심도, 네 앞에서 무결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망도. 너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사장의 호의까지도 전부 의미를 잃었다. 그 무엇도 회복되지 않은 자리에 쓰린 상처만 하나 더 생겼을 뿐이다. 퇴원하더라도 너는 이곳에 돌아올 필요가 없다. 네 짐은 미리 사장에 맡겨둘 것이고, 본래 사장의 소유였던 이 집은 주인에게 돌아갈 테니. 그걸 핑계로 가능한 빨리 집을 비우기로 한다. 사장은 얼마든 머물러도 좋다고 이야기했지만, 더 있어봐야 너의 부재에서 처참한 실패를 떠올리게 될 것이 뻔했다.

  마술 도구, 무대용 의상. ‘너를 위해준비했으나 지나고 보니 제대로 쓰이지도 않은 물품을 챙기며, 패인을 생각한다. 왜 이렇게까지 실패했을까.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기대를 안고 너를 만났다. 너에게 복수의 칼을 쥐여줄 수 있을 것이라거나. 네 비극을 깔끔하게 끊어줄 수 있을 거라거나. 능력 이상의 일을 꿈꾸며 네 구원자라도 될 듯 굴었다. 언젠가 네가 비꼬았듯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결과였다.

  아무래도 너에게 상처를 입힌 만큼, 네 삶을 쥐고 흔들 수 있다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너에게 바람직한 복수를 마련해주겠다는 오만은 복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결말을 맞았다. 패배는 쓰리지만 잃은 것은 없다. 어쩌면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고 보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너는 이전처럼데니스 맥필드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데니스 맥필드는 원래대로네 비극의 원흉으로 남을 뿐.

  너와 함께 지내는 동안, 너를 유일한 관객으로 삼느라 본업에 소홀했다. 엔터테이너로서 무대에 한 번도 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이 집을 떠나면 고향도, 2의 고향 같은 이 도시도 아닌 네 고향으로 향하려 한다. 아직 전쟁의 흔적이 다 걷히지 않은 그곳에서 모두를 위한 무대를 펼칠 것이다. 네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네 삶에 유일하게 기여할 길이 되리라.

 

 

* Side Y: https://hyeonsoyah.tistory.com/152

Posted by 현소야 :

 

 

  종말은 빛을 몰고 온다. 이곳이 전장이기에 가능한 아이러니다. 적을 쓰러트릴 때도, 적이 아군을 쓰러트릴 때도 빛이 일었다. 누가 승리하건 패자는 빛으로 허물어지는 게 이곳의 법칙. 지금 발밑에 쓰러진 적도 예외는 없다. 이번의 패자는 유독 앳된 얼굴이었다. 열너댓 살인가, 그보다 아래인가. 아직 세상 물정도 모를 어린 여자애란 것만이 확실하다. 이 자리에 혼자 서 있다는 것이 문득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너와 함께 있었다간 분명 네가 손을 떠는 것을 보았을 테니. 너는 딱 이 나이대의 여자애만 보면 불안에 빠지곤 했다.

  물론 네가 있었다 해도 결말은 같다. 너라고 적에게 자비로운 것은 아니었으니. 이곳에서 만나는 적은 전쟁놀이를 하는 아이가 아니라 침략군이다. 배틀용 디스크에 붙은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으로, 패자는 간편하게 처리된다. 잔해뿐인 땅에 빛이 내리쬐었다가 패자를 삼키고는 사그라진다. 빛이 걷힌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 돌아보지도 않는다. 돌아보는 순간 빤한 현실과 또다시 마주할 뿐이다.

  어느 날 고향을 덮친 침략군은 화사한 도시의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그렇게, 이곳 사람들의 세상은 뒤집혔다. 아이들이 뛰어놀아야 할 광장엔 이제 건물의 잔해가 그득하다. 공원이었던 자리에선 풀잎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오직 탄내만이, 탄약과 파괴의 냄새만이 코를 찌른다. 웃음소리에 익숙했던 귀는 비명을 담게 되었다. 찢어질 듯한 비명보다 더 섬뜩한 것은 그 뒤의 침묵이다. 오랜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존자는 모두 알았다.

  침략군은 자비가 없고 오로지 쓸어버리는 것에만 집중했으므로,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무엇도 남지 않았다. 산책을 나왔던 가족이 짓밟히는 일이 있었다. 적습에 놀라 도망치던 아이는 폭격에 휩쓸렸다. 운이 좋아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생존이란 행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진 누구도 몰랐다. 그렇기에 운에 기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오래지 않은 과거, 급하게 난민캠프를 꾸린 날, 너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의 소지품을 쥔 채 이야기했다. 이래서는 미래가 없어. 어떻게든 싸워야 해.

  그렇게 말하는 너의 얼굴엔 슬픔보다 분노가 비쳤다. 두려움보단 적개심이 보였다. 하루하루 삶을 무너뜨리는 침략군은, 너에게 도망쳐야 할 포식자가 아닌 없애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어떻게?]

  돌아올 말을 뻔히 짐작하고서 물었다. 너는 즉답했다.

  [무장해야지.]

  예상대로의 답변이었다. 동시에, 그 상황에서의 유일한 선택지이기도 했다. 살아남기 위해선 싸워야만 한다. 싸우기 위해선 무장해야 한다. 그리고 무장하기 위해서는.

  [아카데미아의 디스크, 내가 분석하지.]

  네 어깨를 치며 낮게 속삭였다. 너는 바로 그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군인은 없었다. 죄 없이 쓰러진 자들과 한 번도 무기를 잡아본 적 없는 이들뿐. 생존자가 무장하기 위해선 적의 무기를 제대로 알아야 했다. 군사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이 당장 무장할 길이란 적의 것을 두르는 것뿐이었으므로. 한 놈만 쓰러트리면 돼. 짧게 덧붙이고 돌아서자, 네 목소리가 등에 박혔다. 조심해. 너의 메마른 배려를 안고서, 바로 폐허로 걸어 들어갔다.

  너의 소망대로 되었다. 침략군은 대개 학생이었고 전공을 세우고 싶어 눈이 벌겠기에 그 중 어리숙한 쪽을 노리면 그만이었다. 침략군 하나를 외딴곳으로 유인한 후 맹렬하게 공격하자 오래지 않아 제압할 수 있었다. ‘사냥감에게 짓밟힌 패자는 겁에 질려 도망치려 했으나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느샌가 나타난 네가 패자를 힘으로 누른 덕분이었다. 패자의 왼팔에서 배틀용 디스크를 떼어내자마자 너는 구둣발로 놈을 지그시 밟았다.

  [이거, 어쩔까. 카이토.]

  다음 순간 네 입에서 흘러나온 건 섬뜩하리만큼 무심한 목소리였다. 패자는, 네 동생 또래로 보인 침략군은 너를 올려다보았다. 패자의 눈이 두려움으로 젖어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가 자신의 처분에 대해 묻고 있음을 바로 눈치챈 것이리라.

  [그게 중요한 일인가?]

  [아무래도 좋다면 내가 처리하고.]

  [난 가능한 빨리 분석해야 하니까 네게 맡기는 게 좋겠어.]

  [내게 맡긴다. .]

  그렇게 반응하는 사이에도 너의 시선은 적군에게 향해 있었다. 싸늘한 시선이 꼭 먹잇감을 서서히 죽이는 포식자 같았다. 너의 믿음직스러운 부분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적에게 용서가 없는 모습. 어떤 상황에서도 약해지지 않고 위험을 제거하려는 태도. 너에게 힘을 실어줄 생각으로, 한마디 건네기로 했다. 디스크를 챙겨 자리를 뜰 때, 부러 웃음을 꾸며내며 말했다. 우린 다른 녀석들처럼 착하진 않지, ? 너는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너는 늦게서야 돌아왔다. 피로한 얼굴의 너에게, 패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너는 너대로, 처리의 방식을 따로 보고하는 일 없이 필요한 말만 꺼냈다.

  [디스크의 분석, 어떻게 됐어?]

  탄약 냄새가 밴 코트를 벗으며 너는 물었다. 난민캠프의 아이들을 재우고서 <연구실>에 찾아온 너는, 얼굴에 표정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다.

  [대강은 알겠어. 바탕은 간단하니 우리 디스크에도 아카데미아의 기술을 이식할 수 있을 거야.]

  [적에게 리얼 데미지를 주는 기술? 아니면 카드화 기술?]

  [둘 다.]

  [기쁜 소식인데.]

  그러면 우리도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을 테니. 제 디스크를 들여다보며 말하는 너에게서 불안이나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에 선 사람이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너처럼 반응했을 리 없다. 네 상냥한 누이라거나, 전투에 투입될 때마다 괴로워하는 네 친우이기만 했어도 하지만 그건 우리도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다는 거잖아.란 말이 먼저 튀어나왔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반응해야 한다. 적을 상대하고 있다고 해도 타자를 해할 방법을 너무 쉽게 받아들여선 안 된다. 그러나 너는 주변의 아이들과는 달랐고.

  [당장은 무리야. 하지만 이식하게 된다면 우리에겐 큰 힘이 되겠지.]

  그 점이 네 장점이었다. 적어도 전장에서 너는 다수를 지킬 수 있는 존재였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언제든 적을 상대할 준비가 되어있었으니. 네가 복귀하기 전까지 난민캠프에 모인 생존자들은 모두 저항군을 결성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너도 연구실에 오기 전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을 것이다. 그래, 레지스탕스에게. 저항군의 이름을 먼저 들먹이는 데서 알 수 있었다.

  [처음엔 껄끄러워해도 언젠간 다들 필요성을 이해하게 될 거다. 레지스탕스가 된다는 건 자기를 방어하는 건 물론 상대도 습격해야 한다는 것.]

  [넌 이해가 빨라서 좋아.]

  [우리는 비슷한 부류니까.]

  네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비슷한이라는 말이 묘한 안도감을 주어, 마주 웃었던 기억이 있다.

  옳은 것과 필요한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쟁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너는 언제나 필요한 방식을 따랐고, 바로 그 부분이 네게서 마음에 드는 면이었다. 너를 볼 때면 지금 선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동시에, 너라는 동지가 있다는 것에 안심할 수 있었다.

  너는 분명히, 저항군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연구의 성과는 오래지 않아 나왔다. 저항군에게 방패이자 검이 될 <적의 기술>을 심어줄 수 있게 되었을 때 너의 삶에는 큰 불행이 닥쳤다. 너의 하나뿐인 가족, 누이가 사라진 것이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 누이가 흘린 소지품 하나를 찾아온 너는 동생이 적에게 납치당한 것이라 주장했다. 카드화되었다면 이런 걸 남겼을 리 없어. 루리가 흔적을 남겼단 건 포로가 되었단 거라고. 네가 큰 소리로 떠들 때, 동료들이 전부 네 눈을 피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그때는 물론이고,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까지도 포로는 발견된 적 없다. 무엇이든 쓸어버리는 침략군이 몇몇 사람만 납치해간다는 번거로운 일을 할 리도 없다. 너는 동생이 적에게 당했다는 최악의 결말을, 차마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네 누이의 친구가 결국 불편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뜨자, 너는 바로 적 앞에 뛰어들기라도 하려는 듯 디스크를 집어 들었다. 안 돼, . 너의 친우가 네 오른팔을 잡아 제지하려 했으나 너는 그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디스크를 왼팔에 장착하는 너에게서 이전 같은 침착함은 보이지 않았다. 금빛 눈은 광인처럼 번득였고 숨소리는 너무 가빴다.

  이대로라면, 망가진다 불안감으로 네 이름을 부르자 네가 갑자기 이쪽으로 와 팔을 덥석 잡았다. 신을 만나기라도 한 듯 들뜬 얼굴로. 떼어내고 싶었으나 힘이 지나치게 셌다. 어떻게 떨쳐내야 할까. 너를 어떻게 진정시키는 게 좋을까. 급류가 되어 몰아친 생각을 끊은 건 너였다. 너는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연구가 끝났다고 했지, 카이토?]

  [그래. 디스크를 개조할 수 있을…….]

  [뭘 지켜보고 있는 거야. 당장 개조해야지.]

  네 눈에 깃든 감정이 너무도 무거웠다. 뒤엉킨 감정 하나하나가 묵직하여 외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네 것부터? 저도 모르게 흘린 말에 너는 이미 왼팔의 디스크를 풀고 있었다.

  [물론. 우린 이미 이야기가 되었잖아, 카이토.]

  적의 기술을 장착한 디스크, ‘무장한 디스크’ 1호는 그렇게 너의 디스크가 되었다. 바꿔 말하면 적과 같은 방식으로 싸우기로 한 첫 번째 저항군이 너였다는 것. 너는 개조된 디스크를 받은 날부터 적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짓밟혀야 하는데 오래 버텨 성가신정도가 아니다. 적을 쓰러트려 한 장의 카드로 만드는 무시무시한 전사가 된 것이다. 너에게선 날이 갈수록 죽음의 냄새가 났다. 흙과 쇠의 냄새, 화약 냄새. 그 모든 게 뒤엉킨 체취는 네가 삼킨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침략군. 너의 고향을, 너의 동료를, 그리고 네 가족을 앗아간 적.

  생각해보면 그 냄새는 본래 침략군의 것이었다. 네 체취가 적군과 닮아가면서부터 동료들은 너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내용은 대개 비슷비슷했다. 저러다 힘을 잃으면 안 되는데. 슌은 너무 무모하게 싸우잖아. 아카데미아가 슌을 집중적으로 노리면 어떡하지? 같은 식이었다. 드러나게 동조할 것은 아니었으나 마냥 흘려들을 이야기도 아니었다. 누이의 실종을 기점으로 너는 정말로 급격하게 위태로워졌다. 너무 많은 싸움에 나서 너무 쉽게 자신을 내던지게 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누이를 지키지 못했단 죄책감을 덮을 길인 양.

  이제 너는 전쟁이란 불이 옮겨붙었다기보다 스스로 불덩이가 되어 적 앞에 뛰어드는 듯했다. 아무리 강한 전사라도, 그런 식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빠르게 닳아가, 언젠가 거짓말처럼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런 결말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카이토라면 슌을 이해할 수 있지?”

  시한폭탄 같은 너를 유독 걱정하는 사람이 있었다. 네 누이가 사라진 후로, 언제나 할 말이 가득한 얼굴로 너를 지켜보는 아이. 네 누이의 친구. 전투를 마치고 기지에 복귀하는 길에 그 애가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걸음을 멈췄다. 푸른 눈에 온갖 감정이 엉겨 있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상대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이토는 슌이랑 닮았으니까.”

  “그런 면이 있긴 하지.”

  우리는 비슷한 부류니까. 이전에 네가 흘렸던 말을 떠올리며 답했다.

  “아마 슌도 카이토의 말이라면 들을 거야. 그러니까.”

  “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해. 그럼 나도 제대로 전할 테니.”

  “돌아와달라고, 해줘. 같이 나서기로 한 유토를 뿌리치고 혼자 나가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아. 알잖아, 요즘 슌이…….”

  입은 열려있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속에 담아둔 말을 꺼내기 너무 힘겨운 것이리라.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짐작이 가거니와 그 애의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젖어있어서, 더 묻지 않기로 한다.

  “알겠어. 일단 슌을 찾고.”

  “우린 슌이 싸우는 걸 말리는 게 아냐. 다치지 않길 바랄 뿐이야. 그걸 꼭 말해줘.”

  “그래.”

  목적지가 바뀌었다. 기지로 가는 대신 너를 찾아 폐허를 헤매야만 한다. 잿빛으로 물든 도시, 잔해가 그득한 도시에서 몸을 숨기는 것이란 어렵지 않다. 동료와 다툼이 있었던 듯한 너라면 더욱 눈에 띄지 않으려 할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네가 갈 만한 곳을 하나씩 짚는다. 너는 뼈대만 남은 건물을 좋아했고, 윗부분이 날아간 탑과 기구가 죄다 파손된 유원지를 좋아했으며 의심 가는 장소를 찾아갈 때마다 허탕이었다. 네 모습은 물론이고, 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실패. 실패. 그리고 또 실패. 다리가 아파오고 숨이 거칠어졌으나 계속 걸음을 옮겼다. 너를 찾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다. 너를 기다리는 사람들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이었다. 너를 걱정하던 그 애는,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네 친우는 잠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너를 따르던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 것이 뻔하다. 원래의 너는 그렇게 여러 사람을 걱정시키지 않았는데.

  누이가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너는 <저항군> 사이에서 믿음직스러운 연장자였고, 어른의 빈자리를 채우는 사람이었으며 좋은 동료였다. 동시에 내면까지 강한 전사이기도 했다. 네가 어찌할 수 없었던 사건이, 그런 너를 망쳤다. 그동안 잘 버티고 있었던 너에게 균열을 내, 네가 무너지게 했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생각이 멎었다. 눈에 들어오는 형체가 익숙해서였다. 전쟁 전 다니던 학원 근처, 작은 공원에 네가 있었다. 잔뜩 부서진 벤치 대신 산처럼 쌓인 잔해 위에. 말을 걸까 하다 너무도 쓸쓸한 모습에 입을 닫았다. 맹금을 의미하는 이름에 어울리게 너는 평소에도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번엔 잔해 더미에 올라탄 탓에 배로 쓸쓸해 보였다. 무리를 잃고 홀로 남겨진 맹수처럼.

  “……유토?”

  기척을 느끼기는 했는지, 너는 친우의 이름을 흘린다. 돌아보지도 않고서.

  “유토가 아니라서 유감이군.”

  “, 카이토. 바쁘신 분이 웬일이야.”

  그제야 네가 돌아본다. 금빛 눈이 어쩐지 흐리멍덩하다. 이제는 익숙해진 네 체취, 죽음의 냄새에 희미하게 피 냄새가 섞여 나는 것이 수상쩍다. 다쳤어? 슬쩍 물었더니 너는 웃어버릴 뿐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 너는 답하기 싫은 것에 대해선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사야카가 걱정해. 어서 돌아가야지.”

  “진짜 걱정받아야 할 사람은 너 아닌가? 나는 너처럼 아카데미아에 수배당하진 않거든.”

  적군의 눈에 띄어 집중 경계 대상이 된 일을 두고, 너는 살짝 비꼰다.

  “너도 조금만 더 날뛰면 똑같은 처지가 될 텐데.”

  “그럴 일은 없을걸. 쿠로사키 슌은 카이토만큼 위협적이지 않아서.”

  위협적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덧붙이는 말이 먼지를 들이마신 듯 텁텁하다. 너는 역시, 스스로를 병기처럼 취급하고 있다. 적을 삼키는 것이 존재가치인, 날이 잘 드는 무기로. 생각이 거기까지 뻗자, 속에서 정체 모를 감정이 치민다. 네 멱살을 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편해? 널 포기하고 전쟁에 내던지기만 하면 그만이야?

  자기를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는 주제에.

  너는 자주 다쳐서 돌아왔고, 낫지도 않은 몸으로 또 적 앞에 뛰어들곤 했다. 그렇게 쉽게 불길에 뛰어들 거라면 균열 하나 생기지 않을 정도로 강해야 했다. 혹은 망가진 부분을 꾸준히 고쳐야 했다. 그게 아니면 최소한 강한 체라도 해야 했는데. 잔해 더미에 앉은 너는, 날개 다친 새처럼 위태로워 보일 뿐이다.

  이대로 두면, 안 된다. 너를 걱정하던 아이의 뜻대로 당장 기지에 데려가야만 한다. 내려올 기미가 없는 너를 붙잡으려 잔해 더미에 올라갔다. 꼭대기까지 한 걸음을 남겨두었을 때, 가만히 앉아있던 네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여긴 위험해. 내 손을 잡고 앉아. 그 손을 잡고 너를 끌어내리려다, 너와 말이나 섞을 생각으로 일단 네 곁에 앉았다. 그 잠깐 사이에도 네 자리에선 쇠붙이와 타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필 이런 곳에. 불만을 누르고 입을 떼려는데, 또다시 네가 선수를 쳤다.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말이야. 모든 게 작게 보이잖아. 지나가는 사람도, 부서진 건물도 전부. 그게 마음에 들더라고.”

  너답지 않게 한가한 말이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이에도 너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는 걸 보고 순간 기가 막혔다. 저를 걱정하는 동료들을 두고 이곳에서 풍경이나 감상하고 있었는지.

  “그래서 이런 곳에 올라가 있었나?”

  “그래. 여기 말고 높은 곳을 찾자면 다 부서진 건물인데 그런 곳은 위험하다고 유토가 자꾸 간섭이야.”

  “내가 올 때까지 풍경은 실컷 봤겠지. 그러니까 이제.”

  “잘 봐, 카이토. 이렇게 내려다보면, 이렇게 전부 조그맣게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으면. 우리가 겪는 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거든.”

  잠깐이나마 생각을 멈출 수 있단 말이야. 메마른 목소리에선 감정이 비치지 않는다. 퍽 쓸쓸한 말을 흘리고도 네 옆얼굴엔 뜻 모를 미소가 걸쳐져 있을 뿐. 지옥에서 버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알게 된다. 너처럼 웃는 이들이 보통 어떤 결말을 맞는지.

  “달라지는 건 없어. 내려가면 우린 또 전장에 내던져진다고.”

  그런 사람은 대개 오래 버티지 못한다. 황폐해진 채로 최대출력을 내다 버티지 못하고 꺾이는 것이다 그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미래다. 그러니 의식적으로라도 강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미 먼 곳에 꽂힌 네 시선을 이곳으로 끌어오기 위해서라도.

  “너한테서 피 냄새 나. 부상자는 감상에 젖을 여유 같은 거 없어. 약한 말은 접어두고 이제 그만 내려가지.”

  “미안, 다들 내가 다쳐오는 거 싫어하지.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이유가 있었어. 지금 당장 돌아갔다간 유토에게 한 소리 들을 것 같으니까 조금만 시간 끌다 가자.”

  평소와 다르게 지나치게 수다스럽다. 태평한 것이 아니라, 태평함을 가장하는 태도엔 분명히 의도가 있다. 너는 무언가를 감추고 싶은 것이다. 혹은 무언가를 잔뜩 털어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너에게조차 괴로운 것을. 어느 쪽이건 위태롭게 느껴져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너는 몽롱한 눈으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있잖아, 무슨 일이 있었냐면.

  “아카데미아 놈을 처리하고 돌아가는 길에 쓰러진 여자애를 봤어. 멀리서 언뜻 보기에, 검은 머리카락이 길게 흩어져 있었고 붉은색 천이 몸을 덮고 있더라고. 레지스탕스의 표식, 루리는 허리에 맸었잖아.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루리 목소리가 울리는 거야. 오빠. 왜 날 이렇게 차가운 곳에 내버려두고 있는 거야? 날 놓친 것으론 부족했어? 날 구하러 와야지, 오빠.”

  “……, 루리가 사라진 건.”

  네 탓이 아냐. 란 말을 건네는 것보다 네가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것이 더 빨랐다.

  “루리가 사라진 날, 그 주변을 몇 번 더 뒤졌어야 했는데. 못 했던 게 계속 마음에 걸리는 거야. 혹시 그때 내가 더 돌아보지 않아서 발견하지 못한 거라면? 그래서 루리가 저기, 쓰러져 있는 거라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그 여자애에게 가지 않을 수 없었어. 가야, 확인하잖아. 루리인지 아닌지.”

  그래서 너는, 쓰러진 자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동생이 부상을 입었거나, 최악의 경우 죽었을 가능성까지 생각하고서. 누이가 사라진 후 급격하게 망가진 네가 어떤 심정으로 <누이일지도 모를> 자에게 향했을지는 상상할 수도 없다. 다음에 이어질 것은 분명 묵직한 이야기일 텐데 너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말을 잇는다.

  “그 여자애와의 거리를 세 걸음 정도로 좁혔을 때, 난 그 애의 몸을 덮던 붉은색 천이 뭔지 알아차렸어. 사실 그만큼 가까워지기 전부터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 애는, 붉은색의 재킷을 입고 있었던 거야. 그건. 그러니까.”

  뻔하잖아. 네 말의 뜻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잿빛의 도시에서 붉은 재킷을 입고 다니는 무리는 정해져 있다. 침략군. 제복을 입은 전사.

  “아카데미아였군.”

  “놈들의 제복이란 걸 바로 알아챘지만, 꼼짝도 않고 엎드려 있는 그 여자애를 한 번 뒤집어봐야 할 것 같았어. 그 애, 루리처럼 머리가 정말 길었단 말이야.”

  “아니었지?”

  “눈이 회색이었으니까, 그래. 루리가 아니었어. . 아직은 신이 있구나.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감사 인사라도 건네고 싶어졌을 때, 공격이 날아들더라고. 숨어든 적군이 있었던 모양이야. 딴에 동료를 구하겠다고 내게 덤벼든 거겠지. 나답지 않게 경계를 늦추고 있었어서, 큰일 날 뻔했어.”

  이제 이해했겠지, 카이토. 오늘은 정말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너는 가벼운 웃음과 함께 이야기를 마쳤다. 그제야 네가 왜 고집스레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왜 시간을 끌며 이곳에 앉아있는지 확실히 알아차렸다. 너는 변명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한심하긴.”

  “요즘 많이 닳았나 봐.”

  그대로 기지에 돌아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너는 누가 봐도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으니까.

  사실은 말이야, 카이토. 너는 시선을 천천히, 이쪽으로 돌리며 속삭인다. 나를 찾아와준 게 유토가 아니라 너라서 다행이라 생각했어. 그 말에 숨겨진 뜻은 분명하다. ‘동류가 아니면너를 감당해줄 수 없으리란 체념. 어쩌면 네가 자꾸 혼자 다니려 했던 것도, 주변에 네 황폐함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단 소망에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옥은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료를 떼어놓고 다닐수록, 자신을 내던질수록. 배로 닳아버릴 뿐.

  “……예전엔 소원이 제법 뚜렷했는데 말이야. 요즘은 그냥 막연해. 전부, 끝나버리면 좋겠단 생각뿐이지.”

  그렇게 닳아버린 끝에, 너는 미래를 꿈꿀 수도 없게 되었다. 무기력한 소망이 말해주고 있다. 지금 너에게 건넬 수 있는 것이라곤 의미 없는 위로뿐.

  “언젠간 이 싸움도 끝날 거다. 아카데미아가 언제까지나 이곳을 휘젓고 다닐 순 없어.”

  “그러다 나도, 끝나버렸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도록. 메마른 목소리가 폐허를 울렸다.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모두, 너를 걱정하는 한편 마음 깊은 곳에선 언제나 강했던너를 믿고 있었다고. 그래서 너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라고. 모두의 미래에, 너는 있을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네가 버텨줄까. 그럴 거라 확신할 수 없어서 괴롭다. 차마 말을 덧댈 수 없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더니, 너는 어깨에 손을 올려주며 덧붙였다.

  “이런 이야기, 너라서 하는 거야. 유토에게라면 못 해.”

  “애들한텐 그런 모습 보이기 싫단 건가.”

  “아니. 순진한 애를 괴롭힐 수 없단 뜻이지. 넌 이런 걸, 그냥 듣고 흘려줄 것 같단 말이야.”

  믿음이라기보다 요구에 가까운 말이었다. 너는 여기서 고백한 모든 것을, 네가 흘릴 수밖에 없었던 황폐함을 모른 체 하길 바라는 것이다. 기지에서 너를 기다리는 이들이 네가 이토록 망가졌단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싸움은, 어떻게든 끝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몇 번이고 반복해온 약속을 흘린다. 저항군을 결성한 날부터, 흔들리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주문처럼 외던 말을.

  “카이토라면 믿을 수 있지.”

  “그러니까 넌.”

  “무리하지 마라, 라고 할 생각이었지? 뻔하지.”

  너는 핏기 없는 얼굴로 낄낄댄다. 그 정도의 말로 요약될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어쩌면 일부러 뒷말을 듣지 않기로 한 것인지.

  “걱정할 것 없어. 나는 곧 여기를 떠날지도 모르니까.”

  “어디로 가려고?”

  “아카데미아 수장의 본거지, 알 것 같거든. 거기서 뭐라도 약점을 찾는다면. 어쩌면 여기의 전쟁도 루리를 찾는 일도 조금은 수월하게 끌어갈 수 있을지도.”

  “어디인지는 끝까지 말 안 할 생각이군.”

  “차원을, 넘어갈지도 몰라. 유토에겐 비밀로 해줘. 쫓아오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도망치고 싶은 거라면 돌아오지 않아도 돼. , 지금 그 상태론 레지스탕스에 별로 보탬도 안 되니까.”

  심술궂게 이야기한 데는 이유가 있다. 개조한 디스크에는 먼 이국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는 기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기술로 네가 갈 수 있는 곳은, 적국을 제외하더라도 두 군데. 두 곳 모두 전쟁의 불똥이 튀지 않은 곳이라 하니, 네가 작정하고 숨어들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쟁을 잊고, 괴로운 삶에서도 벗어나서. 더는 망가지지 않고.

  그렇게라도 네가 살 길을 찾았으면 했는데. 너는 천천히 고개를 내젓는다. 안 돼. 애들의 방패는 되어줘야지. 라면서.

  “여기로 돌아와서, 애들을 구하면서 끝나야 해.”

  그래도 마지막엔 어른 행세를 하고 싶거든. 너는 폐허를 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선, 잔해 더미에서 풀쩍 뛰어내린다. 아슬아슬하게 착지한 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쪽을 돌아보며 웃는다. 뭐 해. 설마 뛰어내릴 자신 없는 건 아니겠지? 느슨한 도발에 반응하는 대신, 잔해의 언덕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부서진 벤치 곁에 선 너에게서 조금 전의 쓸쓸함은 찾아볼 수 없다. 감상을 빠르게 죽이는 게 네 특기였다.

  “이렇게 늦은 것에 대해선 어떤 핑계를 댈까.”

  공원을 나서며 너는 물었다. 의도가 분명한 질문이었다. 오늘 쏟아낸 이야기를 어떻게덮어놓을지를 묻는 것이다. 너는 이미 결론을 지어놓고 있었다. 네가 털어놓은 모든 걸, 모른 척 해줄 것이라고.

  “널 찾는 데 오래 걸렸다고 해야지.”

  꼴사나운 모습까지 전할 순 없으니까. 무심하게 덧붙이자 답 대신 가벼운 웃음소리가 귀를 때렸다. 한 번이라도 눈감아주기로 한 것에 만족했는지.

  “다쳐오지나 마. 다음번에 또 그런 식으로 굴면 애들 앞에서 낱낱이 얘기할 테니까.”

  “노력해볼게.”

  진심이라곤 눈곱만큼도 비치지 않는 목소리였다. 기지로 향하는 내내 네가 돌아보지 않은 것은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인 듯했지만, 그 얄팍한 비겁함을 탓하진 않았다. 앞장선 너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너무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늘만은, 덮어줄 것이다. 너의 가장 약한 부분을, 황폐함을, 전부 외면해달라는 뻔뻔한 요구를. 그것이 너와 비슷한 부류로서, 의도치 않게 너를 들여다본 사람으로서. 너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호의임을, 알고 있었다.

 

 

* Side D: https://hyeonsoyah.tistory.com/151

 

 
Posted by 현소야 :

* 2021년 2월에 발행한 쿠로사키 슌 중심 회지 <유물에 관하여> 웹공개

* 프롤로그격 스토리/1부/2부/3부로 나누어 업로드

 

  사사야마 사야카 양에게

  이전 장례에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부탁하신 대로 쿠로사키 슌의 유품을 정리하여 보내려다, 그의 장례 때 사야카 양이 「전쟁이 일어난 후론 슌이 어떻게 살았는지, 거의 알 수가 없었던 게 슬펐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떠올랐지요.
  그래서 사야카 양과도 친분이 있는 사카키 유우야 군의 도움을 받아, 쿠로사키 슌에 대한 기록을 만들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쿠로사키 슌을 기억하는 사람을 찾아 그에 대한 증언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 회사에서 그를 지켜보았던 자, 쿠로사키 슌의 레지스탕스 동료였던 사람. 그와 연이 있었던 이들까지. 그들이 이야기하는 쿠로사키 슌을 듣고 재구성하였습니다. 그렇게 만든 이 기록을, 유품과 함께 당신께 보냅니다.
  이것이 쿠로사키 슌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의 삶의 일부를 담아낸 자료로 당신에게 남길 바랍니다.

                                                                                                           아카바 레이지
  [ 차례 ]
  첫 번째 기록 : 레오 코퍼레이션 비서 OOOO
  두 번째 기록 : 전(前) 레지스탕스 카이토
  세 번째 기록 : 구 아카데미아 데니스 맥필드
  네 번째 기록 : 히이라기 유즈

 

 

 

 

 

  너의 장례는 생전 네가 둘렀던 음울함에 걸맞게 비 내리는 날에 치러졌다. 타지에서 맞은 죽음이라 조문객은 많지 않았다. 가족과 친우, 가장 가까웠던 이가 없어 더욱 조용한 장례였다. 너의 고향 친구는 몇몇 모습을 드러냈지만 눈물이 말라붙어 울지 못했다. 이곳 사람들은 너를 알지 못해 그들이 아는 불행만 위로했다. 너의 누이를 닮은 소녀와 친우를 닮은 소년만이 소리 없이 울었다.

  침략군이 밀려든 고향을, 희망을 찾겠다며 떠났던 너는 종전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트랜드에는 더 볼 일이 없어. 라는 말의 뜻이 이제 그곳엔 사랑하는 게 남지 않았어임을 모두가 알았다. 전쟁의 끝에 가족과 친우를 잃고 돌아온 너는 더는 폐허를 눈에 담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확실하게 정착할 곳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제법 날이 잘 드는 무기였던 너는 종전까지의 수개월 사이에 낡아버려서 갈 곳이 마땅찮았다. 무기로선 이가 빠진 칼이고 인간으로선 폐허가 된 너를 받아줄 사람은, 한때 너를 사용했던 사람뿐.

  수년 전의 너는 <사용자>를 따라, 그가 경영하는 회사에 들어섰다. 회사에 발을 디딘 때부터 쏟아진 시선을 너는 빠르게 느꼈으리라. 망가진 물건을 보는 듯 떨떠름한 눈길. 옅은 연민과, 그보다 훨씬 선명한 불안. 평범한 사람들에게 황폐한 소년병이란 시한폭탄과 같다. 잘못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져버릴, 주변까지 휩쓸지도 모를 위험한 자. 너는 사람들에게 무해함을 증명하는 대신 스스로를 가두는 것을 택했다. 안락한 회사는 너에게 거대한 우리가 된 것 같았다.

  인간에게 붙들린 맹수가 그러하듯 너는 끝내 우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대기업 본사에 걸맞은 큰 건물에서 너는 제한적인 영역만을 다녔다. ‘사장의 손님에게 제공된 방. 회사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될 최상층. 회사의 식당 등. 네 근처엔 사람들이 앉지 않았고 너를 찾는 사람은 <사용자>가 전부였다. 어느 날 네가 쓰러졌을 때도 너는 회사를 떠나는 대신 회사 산하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의 1인실이 너의 마지막 자리가 되었다. 입원한 후로 내내 창밖을 보던 너에게, 살아서 밖으로 나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례를 마치고 오래지 않아 너의 짐은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몇 년간 머물렀던 회사에 너는 고작 두 박스 정도의 짐밖에 두지 않았다. 그 단출한 살림에 너의 삶을 짐작할 단서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회사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너는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나마 너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 너의 사용자만이 초라한 유품을 넘겨받으며 물었다. 쿠로사키의 데이터, 자료실에 남아있겠지.

  젊은 사장의 눈에 너는 언제나 책임져야 할 존재로 보였던 것 같다. 시한폭탄이건 폐허가 된 인간이건, 언젠가 폭발하건 재가 되어버리건. 마지막까지 눈에 담고 관리해야 할 대상. 네가 처음 그의 전사가 되었을 때부터 상담을 명목으로 너의 관찰 기록을 남겨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으리라. 매년 네 모습이 담긴 영상이나 네 심정을 들을 수 있는 녹취 자료가 새로 자료실에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글쎄. 원하는 대로.”

  그러나 그 속에 너를 절망에서 구해낼 답은 없었던 모양이다. 사장은 매년 네 자료를 살폈지만 네가 말라 죽는 것을 막지 못했으니. 그래서일까, 사장의 목소리는 감상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건조했다. 보랏빛 눈에도 씁쓸함만 비칠 뿐이다. 그렇다면 네 너절한 기록을 어떻게 처리할지, 알아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파기하겠습니다.”

  회사의 사람도 아닌, 사장이 떠맡았을 뿐인 외부인의 자료라. 사장에게라면 모를까, 회사 입장에선 무가치한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상이 죽었다면 더더욱. 사장실에서 물러나 자료실로 향할 때 머릿속엔 가여운 소년병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네 삶의 마지막 몇 년을 가두었던, 거대한 우리에서.

  자료실에 들어가자마자 K행으로 향했다. 이방인인 너는 이름보다는 <쿠로사키>로 불리곤 했으므로. 예상대로 네 마지막 몇 년의 기록은 그곳에 있었다. 꺼내자마자 파기하려다 이것이 네 마지막 기록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멈칫했다. 이제 여기에 더 쌓을 것은 없다. 파기하는 순간 유품보다 확실한 흔적이 날아가고 만다. 단절된 사람인 네가 영영 흩어지고 만다 그러니 전부 날려버리기 전 한 번쯤은 들여다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사람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너를.

  영상 자료를 꺼내 재생하자 스크린 가득 네 모습이 담긴다. 사장이 차곡차곡 남긴 기록은 열일곱 살의 너에게서부터 시작한다. 전쟁이 끝나기 전, 네가 막 사장의 전사로 움직이던 시절. 첫 번째 상담에서 열일곱 살의 소년병은 화면을 노려보며 이야기한다. 스스로 고향을 떠나 사장의 품에 들어왔으면서 붙들린 짐승처럼 으르렁거린다.

  [나에게서 듣고 싶은 게 뭐야.]

  거친 목소리는 방어적으로 느껴진다. 카메라에 클로즈업되는 얼굴이 잔뜩 경직된 채여서인지. 수년 전엔 사납게만 느껴지던 모습이 시간이 지나 다시 보니 처량하다. 그 시기 너의 날카로운 태도가 생존을 위한 위협이었음을 깨닫는다.

  [네 목적이다. 쿠로사키.]

  너는 왜 여기에 왔지? ‘동생을 구하기 위해라는 최우선의 목표를 빼고 설명한다면? 맞은편에 앉은 사장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덤덤하여 되레 긴장감을 높인다. 열일곱의 너는 그의 얼굴 대신 입술을 보고 있다. 금방이라도 그가 앉은 테이블을 엎을 것처럼 날을 세우지만, 실은 그의 다음 말 한마디에 집중해야 하는 처지였다. 적의 정보를 쥔 것도, 너를 침략군으로부터 보호해줄 사람도, 너에게 함께 싸울 동료를 줄 수 있는 자도 사장이었으므로.

  [선택지를 주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아니면 적을 쓸어버리기 위해?]

  사장의 말에 너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겨우 전자라고 답한다. 신중하게 골랐을 답에 사장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걸치고.

  [좋아. 그럼 나에게 협조해줘야겠어.]

  [어떤 식으로?]

  [디스크를 내놓는 거다. 랜서즈로서 움직일 때 필요한 장치를 넣어주기 위해서야.]

  가능하겠지? 사장의 말에 너는 바로 왼팔을 감싼다. 왼팔에 장착된 배틀용 디스크가 열일곱 살의 너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이기 때문이리라. 명백한 협력자 앞에서도 쉽게 무기를 내놓지 못하는 것은 불신과 경계 탓이다. 너는 죽을 때까지 타자를 제대로 믿지 못했다.

  물론 영상에 담긴 것은 과거의 장면이므로, 그 상황에서 네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너는 결국 디스크를 풀어 사장에게 내밀 것이다. 사장은 너를 통제범위에 넣었다는 것에 만족하고, 너는 위험성이 삭제된 무기를 돌려받게 된다. 뻔한 결말을 볼 필요는 없었으므로 영상을 껐다. 열일곱 살의 너는 그렇게 눈앞에서 사라진다.

  다음으로 열어볼 것은 열여덟 살의 너였다. 종전 후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던 네가, 겨우 회사에 몸을 붙였던 시절. 전쟁은 너에게 짧은 미래만을 남기고 끝났다. 구해야 할 것을 전부 잃은 너는 회사의 보호를 받게 되고도 도통 방향을 잡지 못했다. 네 방황의 증거는 목덜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고향에서 침략군에 맞서 싸우던 때, 네가 저항군의 표식으로 목에 매었던 스카프는 열여덟 살 생일이 되기 직전에 겨우 사라졌다. 그마저도 사장의 손에 풀린 것이었다.

  한동안 볕을 보지 못했던 목은 유달리 희었는데, 너는 희디흰 목에 자꾸만 불그죽죽한 상처를 만들곤 했다. 과거의 책무, 저항군의 표식에서 해방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과연 열여덟 살의 너는 신경질적으로 목을 긁고 있다. 상처 난 자리를 또다시 긁어 살짝 피가 맺힌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사장의 얼굴엔 표정이 없지만 안경 너머 보랏빛 눈에는 불쾌가 비친다. 너와 비슷한 나이의 사장은 네 방황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오늘은 네 미래 계획에 대해 들으려 해.]

  그러니 자꾸만 네게 답을 들으려 했을 것이다. 앞으로의 삶이라거나, 도전하고 싶은 일이라거나. 네 관심사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을. 사장의 말에 답하는 대신, 너는 작게 중얼거린다. 질리지도 않고 묻는군.

  [LDS 강사 자리를 거절했다니 하는 말이다.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나? 아니면 다른 계획이 있어서 거절한 건가?]

  시선을 맞추지도 않는 너에게 사장은 묻는다. 너는 바닥을 보며 답한다.

  [엑시즈를 가르칠 사람은 많잖아.]

  [‘진짜 엑시즈를 가르칠 사람은 마이아미에서 너뿐인데도?]

  나는 네가 정착할 방법을 찾는 거다. 쿠로사키. 이 길은 네 원래 꿈에서 그렇게 먼 길도 아니고. 사장이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자 너는 겨우 고개를 든다. 금빛 눈은 사장을, 너의 방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를 담고.

  [그런 건 내가 자신이 없어.]

  이제 사람들 앞에 서는 것도 피곤하고. 너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독기 빠진 모습이 처연하다. 우리 속 짐승처럼 무력한 모습은 모두가 기억하던 소년병이 아니었다.

  방향을 찾지 못하던 너를 지나 다음 해의 너를 만난다. 열아홉 살이 된 해 너는 조용히 쓰러졌다. 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인지, 아니면 매일 말라가는 네가 안쓰러웠던 것인지. 그래도 입원 초에는 면회가 잦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네 누이를 닮은 소녀라거나, 너의 친우를 닮은 소년이라거나. 몇몇 사람들이 선물을 안고 너를 찾았다. 너와 함께 사장의 전사로 싸운 이들이 한꺼번에 병문안을 가기도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금세, 사람들의 관심은 걷혔다. 너는 병원을 나설 수 없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삶이 바빴으므로. 유일하게 꾸준히 병원을 찾은 이는 사장이었다. 책임으로 무장하고 불안에 눌린 채, 사장은 네 병실에 드나들었다. 네가 말라갈수록 더 집요하게. 너는 면회를 거부하진 않았지만 그를 반갑게 맞아주는 일도 없었다. 언제나 심드렁한 반응이었다는 사장의 말대로, 화면 속의 너는 건성으로 답하고 있다.

  괜찮아. 라고.

  무슨 질문에건, 어떤 걱정에건 너는 8할은 괜찮다고만 답한다. 사장의 질문을 자르고서,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그만 돌아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지?]

  사장의 목소리에, 열아홉 살의 너는 화면을 바라본다. 핼쑥한 얼굴과 생기 잃은 눈에서 네가 시들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앙상한 모습에 걸맞게 여린 목소리로 너는 답한다. 너희 세계에 망가진 사람은 필요 없어. 여기서 나는, 말하자면 깨진 조각 같은 거지. 잘못 쥐면 다치는 것.

  [나 같은 사람이 끼어들어봤자 평화에 금이 갈 뿐이야.]

  [랜서즈답지 않은 발언이군. 병상에 있다 보니 심리적으로도 약해진 건가?]

  [이제 와서 그 이름을 끌어오는 이유를 모르겠어. 랜서즈도, 그 리더인 너도. 전쟁이 끝난 날부터 제자리로돌아가는 게 맞았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랜서즈로서 세상을 지키는 데 기여한 네가, 그렇게 숨어들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만.]

  [하지만 사람들은 낡은 병기를 싫어하지.]

  [내가 어떻게든 너를 감당한다고 해도?]

  [……알고 있잖아, 리더.]

  낡은 호칭을 입에 올리며 너는 참으로 오랜만에 웃는다. 다만 웃음에 깃든 것은 희망도 기쁨도 아니었다. 아이를 달래는 어른 같은, 미지근한 연민이 비칠 뿐이다. 무엇을 알고 있다는 거지? 잘린 말에 매달리는 사장은 조금 괴로워 보인다. 그가 실패를 알게 된 것은 너와 함께 돌아온 때, 너의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얻은 날부터의 일.

  종전을 기점으로 사장과 너의 삶은 갈렸다. 젊은 사장이 연일 성공을 쌓을 때 그 또래인 너는 빠르게 무너져갔다. 야생의 포식자가 우리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듯. 방치된 무기가 빠르게 녹슬고 낡아가듯. 승리에 익숙한 사장이 그 씁쓸한 실패를 인정하고 싶었을 리 없다. 그는 어떻게든 너를 구해, ‘평화에의 적응을 이뤄내고 싶었을 텐데.

  [승산 없는 싸움이라는 걸.]

  리모컨엔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영상이 꺼졌다. 다시 틀지 않아도 뒷부분이 없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사장은 그 이상 네 이야기를 담지 않기로 한 것이다. 너를 바라보는 것이 처참했기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을 맛보았기에. 너는 스무 살 생일을 열흘 남기고 죽었다. 사장은 그 이른 종말을 들었을 때 결국 그런가라고 반응했을 뿐이었다. 아마 그도 알고 있었으리라. 자신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너에게 어떤 해답도 주지 못했다는 것을.

  네가 스무 살이 되지 못한 탓에, 매년 남겼던 너의 영상은 열아홉 살의 기록에서 멈췄다. 그나마 몇 개 남은 녹취 자료를 재생하려다, 지금까지 본 것과 별반 차이가 없으리란 생각에 손을 대지 않기로 한다. 네 기록을 원래대로 정리하고는 통신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사장에게 자료 처리에 대해 보고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는 무엇이든 말끔하게 매듭지으려는 사람이었으니.

  「쿠로사키의 기록 말입니다.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장은 바로 반응했다.

  「제대로 있던가?

  「관리를 잘못해서 훼손된 모양입니다. 확인해봤더니 제대로 재생되지도 않는군요.

  「유감이군.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치고는 동요가 없다. 사장도 네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 사장뿐만이 아닐 것이다. 회사의 누구도 그런 기록을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보람 없는 싸움 끝에 급격히 망가져 죽은 소년병이라. 연민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제대로 마주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넘쳐나는 자료 중 열 편도 되지 않는 기록을 누락시키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파기했다는 서류를 남겨놓으면 더더욱 쉽다. 관리 장부를 꺼내 <파기 목록> 페이지에 슥슥 휘갈긴다. K, 쿠로사키 슌 상담 자료, 전체 파기. 사유는 자료의 손상과 소장 이유 상실. 두어 문장을 남기는 것으로 너의 기록은 자료실의 관리에서 벗어난다.

  자료실에서 나설 때는 들어갈 때와는 달리, 손에 상자가 들려 있었다. 누군가의 자료를 챙겨 나온 것이었으나, 빼돌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청소하는 것에 가까운 행위였다. 상자에 든 것은 모두를 침울하게 할 자료였으니. 그런 음울한 유물이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다. 이미 수년 전에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곳. 이제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회사의 옛 휴게실. 빛이 들지 않는 휴게실에 들어가 상자를 내려놓으며 건조한 소망을 얹는다. 하루라도 빨리 네 기록에 먼지가 앉기를. 그것으로 네 불행한 삶이 조용히 잊히기를.

  물론 너의 안식을 위해 이번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자료도 잊으려 한다. 너절하고 씁쓸한 생애를, 앞으로 다시는 꺼내보지 않을 것이다.

 

 

* Side K: https://hyeonsoyah.tistory.com/150

 
Posted by 현소야 :

3호는 오빠의 몸을 꿰뚫는 빛줄기를 보았다.

닫히려는 눈꺼풀을 힘겹게 열었을 때, 유리벽 너머로 비친 광경이었다.

 

*

  

  맹금의 이름을 가졌던 오빠는 거짓말처럼 추락했다. 녹색의 빛줄기에 꿰뚫린 몸이 사냥당한 새처럼 힘없이 바닥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곧 둔탁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오빠의 육신이 바닥에 거칠게 닿는 소리였다. 3호는 거기서 오래된 악몽을 떠올렸다. 오빠가 아무렇지도 않게 망가지는 꿈. 아무래도 또다시 악몽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거대한 장치에 갇혀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던 3호였다. 그대로 심신의 스위치가 내려가기 직전, 몽롱해진 채로 익숙한 꿈을 꾸고 만 것이다. 3호가 가장 싫어하는 꿈인 동시에 자꾸만 제 삶에 끼어들었던 꿈을.

  어려서부터 말보다 행동이 앞섰던 오빠는, 당장 필요한 일이다 싶으면 위험한 일에도 무모하게 뛰어들기 일쑤였다. 청년기에 접어들어 고향에 침략군이 밀려드는 불행을 겪고는 더욱 무모해졌다. 살아남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방패가 되기로 한 것이다. 모두를 지키려 싸울 거라 이야기하긴 했지만, 오빠는 너무 많은 싸움에 너무 쉽게 뛰어들었다. 침략군에 맞서는 레지스탕스가 되고는 거의 몸을 던지는 수준으로 전투에 나서는 오빠였다.

  오빠에게 미래를 빚지는 사람들조차 오빠의 지친 등을 보고 걱정 어린 말을 흘리곤 했다. 저렇게 위험한 싸움에 뛰어들어서야……저러다 제일 먼저……제대로 버틸 수나 있을지. 짧은 침묵 사이사이에 생략된 말을 3호는 듣지 않고도 알았다. 그런 기분 나쁜 예언이 귀에 박힐 때면 3호는 오빠의, 무모함이, 저를 돌아보지 않는 태도가 싫어졌다. 저러다 예언이 실행되고 만다면? 오빠가 정말 꺾여버린다면? 어느 날 침략군에게 짓밟혀, 패자가 전부 그러했듯 종잇조각이 되고 만다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불안을 떨칠 순 없었다. 오빠는 한 번 옳다고 생각한 일을 포기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3호가 바라지 않는다 해도 동생을 구하려 싸워야 한다 판단했다면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게 오빠였다. 3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빠의 싸움을 함께 짊어지는 것뿐이었으나 오빠는 그럴 기회조차 잘 주지 않았다. 루리. 너는 안전하게 여기 있어야지. 짤막한 말로 오빠는 동생의 싸움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계속 위험한 전투에 뛰어들어 너무도 쉽게 몸을 내던지고, 잔뜩 망가져선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난민캠프에서 지내던 시절 3호는 잊을만하면 똑같은 꿈을 꾸었다. 자꾸만 동생에게 등을 보이고 앞서가던 오빠가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버리는 것. 꿈속에서 오빠는 칼에 찔리기도 했고, 공습에 휩쓸리기도 했다. 언젠가의 꿈에선 총탄에 몸이 꿰뚫리기도 했는데, 어느 꿈이건 오빠가 죽어버렸기에 3호에겐 전부 <같은> 꿈이나 다름없었다. 끔찍하기만 한 꿈에서 가장 처참했던 건, 꿈속에서조차 오빠를 도울 길은 없었다는 것. 오빠의 죽음을 막는 것도, 싸움을 중단시키는 것도 불가능했다. 피투성이가 된 오빠를 몇 발짝 밖에서 멀거니 바라볼 뿐.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도 악몽의 연속이리라. 미동조차 없는 오빠의 몸이, 부자연스러운 자세가 말해주고 있다. 이건 무의식이 빚어낸 장면이라고. ‘꿈속에서 오빠를 죽여버린 거라고. 여태껏 꾼 꿈과 다른 점은 하나, 빛에 꿰뚫린 자리에서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것뿐. 그동안 피투성이가 된 오빠를 수없이 봐왔던 3호에겐 그나마 덜 괴로운 광경이었다. 고통 속에 죽지 않았을 거라, 스스로를 달랠 수 있었으니.

  물론 이런 순간에까지 악몽에 시달리는 건 달갑지 않다. 의식이 끊어질 땐 끊어지더라도 불쾌한 꿈에 사로잡힌 채 정신을 잃고 싶진 않았다. 오빠의 상을 흩어내려 정신을 집중하던 3호는, 귓가에 파고드는 낯선 목소리를 들었다. 외부인이 들어오게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날카로운 목소리는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선명하게 울렸다. 저놈이 뛰어드는 바람에 아크파이브가 멈출 뻔했잖아. 날 선 비난에, 우물쭈물하는 목소리가 바로 따라붙었다.

  나도 막았어! 막았는데 갑자기 뛰어들었다고.

  프로페서가 맡긴 일이 얼마나 막중한 건지 몰라? 리바이벌 제로가 중단되기라도 했다간 어쩔 뻔했어?

  알겠으니까 그만 좀 해. 어차피 저거, 죽어버렸을 거라고. 아크파이브의 기능이 뭔지 알잖아.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거.

  아크파이브의 광선에 아예 몸을 관통당했으니 생명력을 죄다 빼앗겼겠지. 리바이벌 제로를 가동시킬 동력을 더한 것으로 쳐. 변명하듯 자꾸만 이어지는 말에 3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왜 정신을 집중할수록 쓰러진 오빠의 모습이 흐려지는 게 아니라 낯선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걸까. 그리고 왜, 목소리의 주인들은 저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걸까. 아크파이브, 리바이벌 제로. 3호가 알기로 그것은, 각각 자신을 가둔 장치와 제가 휘말린 프로젝트의 명칭이었다.

  그러고 보면 오빠를 꿰뚫은 빛줄기도, 3호가 갇힌 장치에서 새어 나오는 빛과 색이 완벽히 같았다. 불길한 녹색으로. 다시 보니 오빠가 쓰러진 자리도 바로 장치 밖의 바닥이었고

  바닥에 떨어진 건 치워버려. 생명력을 끌어냈으니 더 볼 일은 없다.

  냉랭한 말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인물은 심지어 3호를 장치에 가두라 명령한, 이곳의 수장이었다. 꿈에서 깨기 위해 눈꺼풀을 열고 있었던 덕에 3호는 그 남자가 장갑 낀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챘다. 그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은, 바닥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수장의 지시에 몰려든 사람들이 짐짝처럼 들어 옮기려는.

  꿈에서 걸핏하면 죽어버렸던.

  “오빠한테 손대지 마!”

  3호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쓰러진 오빠를 든 사람들도, 오빠를 치워버리라 명령한 악의 수장. 전부 얼어붙어 3호만을 응시했다. 묵직한 침묵 속에서 가장 먼저 열린 것은 수장의 입술이었다.

  왜 조각이 깨어난 거지? 그것도 하나만?

  주변을 둘러보니 웅크린 소녀가 셋 보였다. 1, 2, 4. 3호와 같이 장치에 갇힌, 불운한 소녀들. 세 명의 눈꺼풀이 단단히 닫힌 것을 확인한 때 3호는 수장의 말을 이해했다. 동시에 자신의 처지도 이해했다. 그러자 머리를 짓누르던 의문이 하나둘 풀리기 시작했다. 빛줄기에 관통당한 오빠가 피를 흘리지 않은 이유, 아무리 노력해도 꿈이 깨지 않은 이유, 그리고 오빠가 맞이한 진짜결말까지.

  결론이 난 때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다음 순간, 재앙이 일었다.

 

*

 

  정예병의 리더는 겨우 눈꺼풀을 들었다. 숨이 막히도록 짙은 향내가 코를 찌른 탓이었다. 코가 향에 적응할 즈음에 리더는 자신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조금 전까지 정신을 잃은 채였단 걸 떠올려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의식을 잃기 직전 굉음을 들은 듯했다. 굉음의 원인은 확실치 않으나 소리가 들린 직후 건장한 남성인 그가 멀리 튕겨 나가 바닥에 내던져졌으니, 무언가 큰일이 일어난 건 틀림없었다. 문제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였다. 바닥에서 일어난 리더는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세상을 선명하게 담으려 노력했다. 눈앞에 비치는 풍경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던 탓이다.

  의식이 끊어지기 전까지 그가 있었던 곳은 침략군의 본거지이자 적진의 중심부였는데. 온갖 장치로 그득했던 <기술의 정점>이었는데. 지금 리더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꽃밭이었다. 그를 깨운 향내도 아마 빼곡하게 뿌리내린 꽃에서 난 것이리라. 정신을 잃고 깨어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길어봐야 1시간 남짓일 텐데, 그 사이 기계장치가 들어찼던 위험한 공간이 꽃밭으로 바뀐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도, 낙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꽃만 가득 들어찬 공간이었다.

  짧은 시간에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리더는 통신장치의 화면에 제 얼굴을 비춰보았다. 혹 세월이 너무 흘러버린 것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해 한 행동이었으나 화면에 비치는 얼굴은 조금도 늙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꽃밭 군데군데 쓰러진 정예병의 모습도 그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너무 늦게 깨어난 게 아니라면, 그의 눈앞에 놓인 비현실을 설명할 방법이란 하나뿐. 꿈에 젖어있다고밖에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튕겨 나가며 몸에 가해진 충격과 그로 인한 통증은 너무도 선명했다. 깨어난 순간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지속되는 고통이 현실감을 일깨웠다.

  찜찜함을 누르며 꽃밭을 둘러보던 리더는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몸을 숙였다. 다음은 서로 엉긴 꽃을 풀어내며, 꽃이 뿌리내린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빽빽하게 자리한 꽃을 손으로 헤치고, 꺾어내기를 반복해 바닥을 보았을 때. 리더는 거기서 기계의 부품들을 잔뜩 발견할 수 있었다. 군데군데 흩어진 유리 파편까지, 꽃밭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품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본디 이곳에 들어찼던 장치들.

  꿈이 아니었다.

  굉음이 들린 것과 장치가 산산이 부서진 것을 보면, 이 근처에서 폭발이 일어났을 확률이 높다. 리더와 그가 이끌던 정예병은 폭발의 여파로 여기까지 튕겨왔고, 폭발에 휩쓸린 이들과 흩어진 파편 위를 꽃이 덮었다고 봐야 할 터다. 여전히 비현실적이기 그지없는 상황이지만 지금은 그 외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가 없다. 이제 리더의 머리를 메우는 의문은 사고의 흔적을 덮은 게 왜 하필 꽃이었는가였다. 굉음이 들리고 기계의 파편이 튀는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자연의 흔적이라. 곱씹어볼수록 기묘했다.

  그럼에도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 갑자기 꽃이 번진 까닭을 파헤쳐야 도대체 어떤 상황에 놓인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을 테니. 타고나길 영민했던 리더는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빠르게 조합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리더가, 그가 데려온 정예병이 맞서 싸우던 침략자의 본거지. 오래전부터 야심을 품고 인재를 모은 침략군의 수장은 자신이 선발한 엘리트에게 위험한 연구를 맡겼다고 들었다. 이곳에 놓였던 수많은 장치도 전부,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무시무시한 기능이 담긴 기계였으리라.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지 모를 악인과, 빼어난 능력을 지닌 엘리트. 거기에 발전된 기술이 총동원되었을 기계가 가득 찬 환경이라. 조금만 어긋나도 엄청난 희생자가 나올 수 있을 상황이었다. 리더가 예상한 대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면 특히.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리더는 꽃으로 뒤덮이는 바람에 그가 이끌던 전사 누구도 치명상을 입지 않았단 것을 떠올려냈다. 위험한 화학품이 흘러나오거나 기계가 폭주하는 일도 없었다. 급작스레 퍼진 자연의 힘이, 인간이 벌인 사고를 눌러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전쟁을 벌여 죄 없는 이들을 짓밟고 자원을 착취했던 침략자. 그리고 제 나라의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침략이란 폭력을 방관했던 다수. 정의를 내세우며 나섰으나 침략자의 계획을 제대로 막지 못한 정예병과 리더까지. 리더가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본 인간이란 저를 포함해 대부분이 신 앞에 떳떳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경전에 기록된 종말은, 바로 이렇게 어리석고 부족한 인간이 그득한 때 몰아치지 않았던가 그렇게 보면, 재앙이 퍼질 수도 있었던 이곳을 자연의 힘이 덮은 것은 구원처럼 비치기도 했다.

  인간의 문명으론 넘어설 수 없는 자연, 신이 재앙을 내릴 때 사용했던 자연이 인간의 희생을 막아준 것이니.

  신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묘한 기분에 젖어, 리더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까지 향해, 동료들 외에 재앙을 피한 이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고가 일어난 곳은 침략군과 연구원이 지키고 있던 적진의 최중심부. 정예병만이 사고의 여파로 튕겨 나갔을 리 없다. 가까이서 폭발에 휘말렸을 이들을 찾아야만 자연의 개입이 어느 정도까지 뻗쳤는지 알 수 있으리라.

  이 세상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던 침략군과, 무시무시한 일을 꾸미던 엘리트. ‘죄짓던 이는 무사했을까? 그들에게도 자연의 신비가 닿았을까, 아니면 징벌당했을까. 발걸음이 떨어질 때마다 머리를 때리는 생각이었다.

  리더의 입장에서 제일 결말이 궁금한 인물은 침략군 수장. 야심 때문에 이곳을 죄인의 땅으로 만들고서 수많은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악인이었다. 자꾸만 그에게로 생각이 튀는 것은 단순히 그 남자가 <죄악의 근원>이어서는 아니다. 리더의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기도 하다. 한때는 그 남자도 세상의 희망이었다. 존경받는 기술자였고, 놀라운 기술을 선보인 천재이자, 그 기술을 바탕으로 회사를 차려 성공한 기업인이기도 했다. 한때는, 그랬다.

  한때는 리더의 눈에도 빛나는 사람이었다.

  아니, 리더에겐 다른 사람에게보다 몇 배는 더 빛나는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남자는 리더에게 단순한 기업인이 아니었으니. 수많은 사람의 롤모델이 된 천재라거나, 뛰어난 기술자라거나. 세계적 대기업의 창업주라는 타이틀보다 더 중요한 수식어가 리더에게는 보였다. 그와는 특별한 관계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유년기에 리더는 그 남자를 아버지라 부르곤 했으니까.

  그 남자가 더 이상 빛나 보이지 않은 지도 벌써 몇 년인데, 리더는 아직도 그의 유산을 떠올릴 때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그 남자가 야심을 품고 먼 이국으로 사라지는 바람에 떠안게 된, 그의 책임이라거나. 회사 곳곳에 남은 그의 기술이라거나 그런 것보다 훨씬 자주 마주치고, 더욱 쟁그라운 유산도 있다. 공식적인 서류에 서명할 때마다 쓸 수밖에 없는 성씨. 그 남자가 물려준, 가장 무거운 족쇄. 아카바(赤馬).

  그 남자가 아카바라는 성씨를 세상에 알려버린 탓에 리더는 아비가 처자식을 버리고 사라진 후로도 제 성씨에 따라붙는 기대를 느껴야 했다. ‘아카바 레오의 아들. 그 레오 코퍼레이션 창업주의 아들. 세상 사람들이 리더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얹는 기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세상은 리더가 아비만큼의 자식으로 성장하길 바랐다. 그 남자의 가장 자랑스러운 후계자가 될 거라 믿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들에게 회사를 넘겨준, 정확히는 그렇게 알려진 그 남자는 실은 먼 이국에서 어린 학생들을 침략군으로 키워내고 있었는데.

  리더가 정예병을 결성해 침략군에 맞서기로 한 건, 분명 정의를 위한 결심이었다. 아비를 꺾고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는 순간을 꿈꾸며 리더는 여기까지 왔다. 다만 아비의 죄악을 잘라내고 싶다는 욕망도 없진 않았으리라. 리더는 자신의 성씨에서, 세상이 저에게 쏟는 기대에서 아비의 그림자를 지워내고 싶었다. 그 남자라는 악몽을 끊고, ‘그 남자의 아들이기도 한자신을 오롯이 인정하고 싶었다.

  그러니 이 순간, 리더는 아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수많은 죄악을 낳은 이답게 사고에 제대로 휩쓸리고 말았을까. 아니면 자연의 자비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 그 남자조차 화를 피했을까. 어느 쪽이어도 감정이 깔끔하지 않을 듯했다. 전자라면 리더는 그라는 죄악을 제 손으로 끊을 기회를 잃게 된다. 후자라면 그가 죄 없는 이들과 함께 살아남았음에 불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역시 이곳에 침투해 그 남자를 상대했을 때 제대로 처리했어야 생각을 끊은 것은 시야에 들어온 익숙한 형체였다.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리더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자가 있다. 리더는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한 순간 걸음을 멈췄다. 발끝부터 머리털까지,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한 감각에 사로잡힌 채.

  “……아카바 레오.”

  “버릇없긴.”

  유감스럽게도 살아남은 아비는, 존칭 없이 이름을 읊는 리더를 보며 혀를 찼다. 내팽개친 자식에게 새삼 공손함을 바라는 것인가. 예상대로의 뻔뻔함에 리더는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하긴 수하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놈이니.”

  “그쪽이야말로.”

  그나마 리더에게 위안이 되는 건, 아비가 걸친 제복이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옷이 찢겨 살갗이 드러나는 자리마다 바로 조금 전 난 듯한 상처도 보였다. 신의 자비인지 지독한 행운인지 목숨은 건졌지만 사고에 제법 휩쓸렸던 것 같다. 세상은 그 남자에게 완전한 행운은 허락하지 않았다 리더를 포함한 저항군이 정신만 잃었을 뿐 무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보다 당신, 하나 수정해야 할 게 있어. 내가 아카데미아에 데려온 자들은 수하가 아냐. 당신의 군대에 맞서기로 한, 전사들이지.”

  “그 잘난 전사가 모든 걸 꼬아버렸단 건 아나?”

  “우리는 아카데미아를 꺾으러 이곳에 왔다. 당연히…….”

  “아카데미아의 문제가 아니야! 세계의 운명이 꼬여버렸단 말이다.”

  멈춰 선 아들에게 바짝 다가온 아비는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 전사 하나가 우리 모두의 미래를 망쳤어! 리더는 제 삶의 얼룩이었던 남자에게서, 그의 회색 눈에서 분노 대신 공포를 읽었다. 아비는 가족을 팽개치고서 긴 시간을 제 야심만 따라 움직였던 남자였다. 계획 하나가 어그러지는 것으로, 생각지 못한 방해꾼이 뛰어드는 것만으로 흔들릴 리가 없다. 아들이 정예병을 이끌고 왔단 보고를 받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적군을 불러들였던 그가, 고작 한 사람의 방해에 저렇게나 격하게 반응한단 말인가.

  특히 신경 쓰이는 것은 세계의 운명이라는 표현이었다. 왜 아비는 갑자기 운명을 논하는 것인가. 왜 미래를 잃은 듯 떨고 있는 것인가. 꼭 신벌을 앞둔 사람처럼.

  “랜서즈 중 하나라는 건 알겠는데, 대체 누구를 이야기하는 거지?”

  이유를 알려면 상황을 들을 수밖에 없다. 리더는 아비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아비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여전히 까끌까끌한 목소리로 답했다.

  “쿠로사키 루리의 오빠.”

  “…….”

  “그놈이 갑자기 통제실에 뛰어들면서 아크파이브 장치가 오작동했다. 누가 보냈지? 네 지시였나?”

  내 일을 방해하고 싶어서 머리가 흐려지기라도 한 거냐? 따라붙은 말에 반박을 얹는 대신 리더는 입술을 깨물었다. 문제의 인물이 누구인지 확인하자마자 마음이 복잡해진 탓이었다. 사고에 휩쓸렸다 정신이 들었을 때, 리더는 주변에 쓰러진 정예병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있어야 할 전사 하나가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열 명도 되지 않는 정예병으로 적진에 침투한 상황에, 한 명이라도 단독행동을 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이탈자를 굳이 찾지 않은 건 나서봐야 말릴 수 없으리란 옅은 체념 때문이었다.

  혹은, 마음의 빚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리더는 시야에서 멋대로 벗어나고 만 전사가, 이전부터 단독행동을 하던 그 청년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너무도 잘 알았으므로. 청년은 아비가 침략한 나라의 몇 안 되는 생존자였다. 동시에 침략군이 납치한 동생을 구하려 정예병이 된 사람이기도 했다. 청년에게서 고향도, 동생도 앗아간 아비는 청년에게 한 가닥 죄악감도 느끼지 않을 터였으나 리더는 그에게 무거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언젠가는 아비가 낳은 비극에서 그를 구해야 한다는 책임은 리더에게, 아비를 꺾겠다는 마음을 더욱 벼리게 하는 자극제이기도 했다.

  다만 정예병 결성 직후부터 리더는 모두를 위해, 정예병 동료들을 위해 청년의 간절함을 못 본 체해왔다. 금방이라도 적진에 뛰어들려는 청년을 설득하고 통제하며 이곳저곳을 누비다 뒤늦게 여기까지 온 리더였다. 청년의 동생이 끌려온 곳, 침략자의 본거지에 침투한 이상 이제 청년을 묶어둘 핑계는 사라졌다. 청년의 부재를 확인한 때 리더의 머리를 스친 것은 이번에야말로 청년을 놓아주어야 할지도 모른단 생각이었다.

  청년이 늦지 않게 동생을 구할 수 있도록.

  통제실로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청년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가 대강 눈앞에 그려진다. 이곳에 침투한 때부터 리더와 함께 움직이지 않은 그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무작정 적진의 최중심부로 향했으리라. 그러다 수상쩍은 공간을 발견해, 동생의 흔적을 찾아 뛰어든 것이다. 하필 그곳은 침략군의 수장인 아비와 위험한 연구를 해온 기술자가 가득한 곳이었고, 붙들린 동생을 발견한 그는 바로 가장 중요한 장치로 향해

  “막는다고 얌전히 붙잡혀있을 자가 아냐. 돌발 상황이 없길 바랐다면 애초에 리바이벌 제로 같은 일을 꾸며선 안 됐지.”

  동생을 납치하고 고향을 폐허로 만든 이에게 최고의 복수를 했을 게 뻔하다. 침략군 수장의 야심을 이뤄줄 장치를 망가뜨리는 것으로. 아비가 저항군앞에 자랑스레 소개했던 장치가 청년 때문에 오작동했다 하니, 굉음이 울리고 모두가 튕겨 나가게 한 사고는 청년이 일으킨 사건일 확률이 높다. 중대한 장치에 청년이 손을 대자 그 여파로 주변의 기기들까지 오류를 일으켜, 결국은 침략군 수장의 야심이 실현될 뻔한 공간을 반쯤 날려버린 것이리라.

  “내가 하려던 대로 뒀다면 이런 일도 없었다! 아크파이브 장치가 오작동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레이의 조각들이 폭주하면서 완전히 통제불능이 됐다. 레이의 힘을 가진 괴물이 넷이나 생겨버렸단 거야!”

  “이해가 가지 않는데.”

  그냥 레이의 힘을 가진 넷이 당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게 되었단 뜻 아닌가? 리더는 옅은 웃음을 걸치며 빈정거렸다. 아비는 상황을 제 뜻대로 왜곡하는 나쁜 습성이 있어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다. 아비가 이야기하는 조각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멀쩡히 살아 숨 쉬는 인간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신성한 힘을 타고났다는 네 명의 소녀를 세계 곳곳에서 납치한 아비는, 그들을 구원자의 조각으로 명명하고서 넷을 세뇌해 뜻대로 부리려 들었다. 네 명의 초월적인 힘에 기대 야심을 실현하려는 동시에, 그동안 벌여온 악행에 초월자의 뜻이란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려 한 셈. 아비가 어떤 인간인지 훤히 아는 리더로선 그저 우습게만 보이는 수작이었다.

  “못 믿겠거든 네 눈으로 똑똑히 보거라. 네 망할 전사가 어떻게 일을 망쳤는지. 당장 여기서 조금만 나가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거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에는 여느 때와는 다른 긴장이 내비친다. 아들의 빈정거림을 제대로 받아치는 대신 어떻게든 진실을 확인하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평소답지 않다. 꼭 신벌을 앞둔 사람 같다는 감상이 다시 머리를 쳤다. 튕겨나온 기계의 잔해와 사고의 흔적을 덮은 꽃의 무덤이 신화 속 구원 같다는 생각도 되살아난다. 아비가 이 시대에 내세우려 했던 구원자, 네 명의 소녀가 품은 초월자의 모습이란 자연의 힘으로 무장한 심판자라 했던가. 어쩌면 청년이란 방해꾼의 침입으로 정말로 심판이 떨어진 것이라면?

  그것이 아비가 쌓아온 모든 것을 망치고, 모든 죄악을 날려버린 거라면?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첫째로, 리더는 세계의 운명이 꼬여버렸다고 떠들어대는 아비, 눈앞의 남자를 막아서기 위해 이곳에 왔다. 둘째로, 아비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든 건 리더의 전사였으며 리더는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전사를 보호해야만 했다. 단독행동을 감행한 청년을 다시 데려갈 겸, 상황을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다음 행동을 결정하려면 아군은 물론이거니와 적의 현 상황까지 낱낱이 훑어야 할 테니.

  “원하신다면야.”

  대신 당신의 말이 들어볼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면, 앞으로 내게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아야 해. 리더가 호기롭게 말하자 아비는 왔던 방향으로 몸을 돌리더니,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안내하는 것 같은 모습에 순간 거부감이 치밀었으나 리더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를 아비를 두고 움직이느니 차라리 그 남자의 등을 보고 따라가는 게 마음이 놓였다. 긴장을 누르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신 아비가 걸음을 떼자 리더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린 꽃을 무심하게 짓밟으며.

  사고의 여파로 비틀거리면서도, 피가 배어 나온 상처가 있는데도 아비는 제법 빠르게 걸었다. 상대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보폭에, 오히려 몸이 말짱한 리더가 따라가느라 숨이 가쁠 정도였다. 제 생각에 빠져 뒤따른 이를 돌아보지 않는 아비의 모습은, 내팽개친 가족을 끝내 모른 체한 지난날을 연상시킨다. 가족을 버리고, 수많은 젊은이의 미래를 버려서 다다르려 했던 목적지가 겨우 여기인가? 꽃 덩굴이 엉긴 기계 파편과 군데군데 부서진 벽을 눈에 담을 때마다 냉소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리더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비가 이끄는 곳으로 걸었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뻔히 알고 있다. 얼마 전 리더가 전사를 이끌고 들어섰던 곳. 부자가 함께 선 <악의 요새>의 입구. 간부 이하의 출입을 제한하고 외부인에게 문을 닫아건 이곳에서 바깥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곤 그쪽이 전부일 터다. 반드시 아비를 무너뜨리겠다는 결심을 안고 들어섰던 곳이므로 리더는 그곳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선명하게 기억한다. 침입자를 어떻게 막도록 설계되었는지. 장벽은 얼마나 높고 경비병은 몇이나 준비되었는지.

  그러니 아비의 말에 한 가닥 거짓이나 과장이라도 있을 경우엔

  생각이 멎었다.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상황을 확인하자마자 입을 뗄 생각이었던 리더는 혀를 놀리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안경 너머 보랏빛 눈에도 평소답지 않은 긴장이 드리워진다. 아비의 공포와 좌절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리더였으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것도 단단히.

  부자 앞에 펼쳐진 세상에 문명의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자연이 모든 것을 덮어버린 탓이다. 자연으로 덮인 세상은 신화 속에서 아름다운 낙원으로 묘사되곤 하나 리더의 눈에 새겨지는 것은 아름답기보다 기괴했다. 허리 높이로 자라난 꽃이 지독하게 짙은 향을 뿜어내고, 새 떼가 하늘을 검게 수놓으며, 쉼 없이 부는 바람에 모든 생물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광경이라. 이것은 낙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때, 이걸 보고도 아무 생각도 없나?”

  “이건…….”

  “재앙이다.”

  묵직한 말은, 눈앞에 놓인 세상에 대한 리더의 감상을 정확히 요약한 표현이었다.

 

*

 

  3호는 자신에게 붙은 번호가 싫었다.

  번호의 의미는 알았다. 3. 세 번째 조각이란 뜻이었다. 3호 이외에도 1호와 2, 4호까지 있는 것을 보면 조각은 총 4명이며 어떤 기준으로 번호가 매겨졌음이 분명했다. 번호가 붙었다고 해서 3호라는 인간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3호에겐 여전히 이름이 있었고, 제 얼굴이 있었으며, 십오 년 가량을 살아온 기억도 남아있었으니. 그러나 인간에게 <몇 번째 조각>이란 수식어를 붙인다는 것은 그를 인간이라기보다 사물로 취급한다는 뜻. 번호가 붙은 때부터 3호는 그 전까지의 삶을 부정당했다.

  ‘3호의삶 같은 건 없었다고.

  고향에 밀려든 침략군에게 납치되어 침략국의 탑에 갇힌 후로도 3호는 한동안 왜 자신이 감금되어야 했는지 알지 못했다. 같은 처지인 1호와 2, 4호까지 만나게 되어서야 답을 알게 되었다. 쌍둥이처럼 똑 닮은 얼굴의 넷이서 서로를 바라볼 때, 그들을 세계 곳곳에서 납치한 장본인이 직접 제 속내를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너희는 레이의 조각이란다. 나는 지금까지 4개의 차원에 흩어진 레이의 분신을 찾아 헤맸지. 침략군의 수장은 제법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너희가 전부 닮은 것도, 신비한 힘을 가진 것도. 전부 레이의 분신이기 때문이야. 그동안은 갈라져서 살았지만 하나로 돌아가는 게 맞겠지. 세계를 위해서도 그게 옳아. 레이는, 내 딸은, 세계를 구하려 몸을 던졌으니까. 전생인 레이가 나서지 않았다면 너희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쉼 없이 쏟아지는 말에, 4명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지금까지 내 고향에서, 내가 알던 사람들과 쌓아온 시간들은 어떻게 되지?

  답은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돌아왔다.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꿈이라고 생각하거라. 레이라는 본모습을 찾기 전까지, 너희가 원래 의지를 되찾을 만큼 성숙하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 적응하기 위해 꿨던 짧은 꿈이라고.

  그러니 3호에겐 형제란 거짓 가족이었고 이름은 가치가 없으며 고향은 돌아볼 이유가 없는 곳이라 했다. 친구와 쌓은 우정도 마음을 준 소년에게 품은 감정도, 하나뿐인 형제와 나눴던 애정도 3호에게는 전부 현실이었는데. 한 번도 꿈처럼 환상처럼 넘겨본 적이 없는데.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전생보다, 십오 년 가량이나 지속해온 지금의 삶이 3호에겐 훨씬 중요했는데.

  그러나 전생의 아비였다는 자는, 이번 생에서 3호를 포함한 넷을 납치한 남자는 3호의 의견 따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저를 경계하는 네 명을 기분 나쁜 장치에 밀어넣은 남자는 바로 문을 닫았다. 이제 더는 빠져나올 수 없다고 무언으로 말하는 듯했다. 아크파이브에서 잠깐 자고 일어나면 돼. 깨어났을 때는 원래 모습일 거다, 레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 남자의 회색 눈은 광인처럼 번득였다. 네 명을 짓이겨 하나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당당히 꺼내는 이를 설명할 말이란 광인 외엔 없기도 했다.

  그런 광인에게 붙들려 모든 걸 포기할 순 없었다. 3호는 닫혀버린 장치의 유리벽을 내리쳤으나 장치가 열리지도, 벽이 깨지지도 않았다. 불길한 녹색 불빛만이 장치를 가득 채울 뿐. 네 명에게 들이닥칠 운명을, 실험대에 놓인 동물과 다를 것 없는 처지를 일깨워주는 듯한 색채에 3호는 몸을 떨었다. 이런 날을 맞기 위해, 이런 삶을 바라서 지금껏 살아온 게 아니었다. 타인을 불러내기 위한 제물로 소모될 날 따위 상상해본 적도 없다. 고향을 덮친 전쟁에서 살아남으려 노력했던 것도, 탑에 갇힌 채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도 전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서였다.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날이 이어져도, 언젠가는 전쟁이 끝날 거라 생각했다. 침략군의 영역에 붙들리고도, 머잖아 탈출해 소중한 이의 품으로 돌아갈 거라 믿었다. 언젠가는 평범한 삶을 되찾고 내내 꿈꿔왔던 특별한 행복도 누릴 거라 기대했다. 그 모든 게 전부 3호가 그려내는 미래였고 ‘3호의꿈이었다. 기억도 없는 전생을 재현하기 위한 환상이 아니라.

  나가야만 해. 여기서 나가야만, 나를 잃지 않아야만 그 미래를 현실로 만들 수 있어. 소리 없이 중얼거린 3호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소중한 이를 하나씩 눈앞에 그려보았다. 언제나 상냥했던 친구. 다소 덤벙거렸지만 활기찬 모습이 매력적이었던 아이. 마음을 주었던 소년. 언제까지나 3호의 편이 되어줄 사람들을. 그중 가장 간절하게 그려낸 자는, 태어나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도 했다.

  바로, 3호의 하나뿐인 가족.

  오빠는 3호가 처음으로 만난 타인이자 3호의 삶에 가장 크게 그림자를 드리운 자였다. 3호에겐 울타리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었는데, 3호를 지켜온 사람이라는 점에서도 삶에 너무 깊게 들어왔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어려서부터 보호자 노릇을 해온 손위형제. 동생에게 세상을 가르치고, 미숙한 부분을 채워줬던 존재 아마 3호의 삶에서 오빠를 잘라내면 3호라는 인간 자체도 꽤나 잘려나가고 말 터였다. 그러니 를 잃을 수도 있을 상황에서 특히 간절하게 떠올린 사람이 오빠였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빠는 3호가 쌓아온 삶을 증명해줄 수 있는 존재였으니.

  한편으로 오빠는 3호에게 고집스레 <내 동생>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인물이기도 했다. 3호는 그의 동생이었고, 그가 키워온 사람이며, 그와 함께한 존재였다. ‘나의동생이라는 소유격의 수식어가, 동생을 당연하다는 듯 자신과 연결하는 오빠의 태도는 운명에 휩쓸리기 직전의 3호에게 안도감을 안겼다. 오빠는 3호를 이 세상에 묶어둘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오빠의 동생으로 남는 한, 평범한 인간인 오빠와의 관계가 유지되는 한 3호는 <구원자의 조각>이 아니라 독립적인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거기에 오빠는 3호를 구하기 위해 이미 고향에서 침략국까지 침투한 상황이었다. 탑에 갇혀있던 3호를 찾아와, 데리고 탈출한 것이 오빠. 전장에서 살아남아 적진까지 뛰어들고 납치된 동생을 기어이 찾아내는 집념이라니. 그런 사람이 운명이란 말에 속아 3호를 전생체의 파편으로 취급할 리가 없다. 침략국의 수장이 아무리 떠들어대도 3호가 쿠로사키 루리라는 인간임을 주장하며 끝까지 3호 자체를 지켜내려 할 것이 뻔했다.

  적진에서 실수로 손을 놓고 만 오빠가 다시 찾아온다면. 어떻게든 길을 찾아 여기까지 오기만 한다면.

  인간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도록 설계되었다는 장치는 조금씩 의식을 꺼트려갔다. 3호는 함께 장치에 갇힌 이들이 서서히 눈꺼풀을 닫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언뜻 보기엔 잠에 빠져드는 과정이었지만, 그것이 보통의 잠처럼 휴식일 리 없었다. 그 끝에 기다리는 건 자아를 잃는 것, 더 나아가 삶을 잃는 것뿐이리라. 그런 결말만은 피하기 위해 의식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3호의 눈꺼풀도 자꾸 무거워지기만 했다. 오빠가 기적처럼 여기에 온다면. 잠깐만이라도 이 끔찍한 상황을 멈춰준다면. 몽롱해진 채 유리벽 너머를 보며 언뜻, 그런 소망을 흘린 것 같다.

  불행한 이가 대개 그렇듯이 3호의 소망도 절반만 이루어졌다. 오빠는 3호의 소망대로, 장치가 놓인 통제실까지 닿았다. 절반의 실패는 바로 그 다음에 이루어졌다. 3호의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오빠가 동생을 구하기 위해 남은 힘을 짜내어 장치에 접근했던 때 3호는 오빠의 몸을 꿰뚫는 빛줄기를 보았다. 거짓말처럼 추락하는 오빠도, 더는 움직이지 않는 오빠의 몸도 보았다. 꿈이길 바랐지만 끝끝내 현실이었다. 그것으로 3호의 삶을 증명해줄 유일한 사람은 허망하게 부서졌고.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네 말대로 쿠로사키를 숨겨두고 왔다.”

  루리. 등 뒤에서 불린 이름에 3호는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의 1호가 3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당하게 선 1호의 모습에서, <운명에 휩쓸린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장치에 갇힌 채로 꼼짝없이 녹아내릴 운명이었던 4명은, 3호를 비롯한 4명의 소녀는 제힘으로 장치를 빠져나왔다. 장치를 가동시키던 여러 명의 연구원은 물론, 4명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려던 침략군의 수장조차 그들을 막지 못했다.

  오빠가 맞이한 결말을 확인한 때, 3호가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그 후의 기억은 어쩐지 선명하지 않다. 몰아치는 감정이 머리를 가득 채웠고,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을 벌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졌으며.

  그러다 정말로 벌을 내리고 만 것 같다. 오빠를 다치게 하고 3호의 삶을 빼앗으려 했던 이들에게든, 세상을 향해서든.

  굉음이 귀를 때리는가 싶더니 네 명을 가뒀던 장치가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다음은 격한 화학반응으로 시험관이 깨지듯, 굳게 닫혔던 유리벽이 부서지는 일이었다. 극도의 흥분 속에서도 3호는 제 오른 손목에서 밝은 빛이 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3호에게서 시작된 빛은 함께 있던 세 명에게 차례로 번졌고.

  눈이 멀 것 같은 빛이 네 명을 감쌌다. 3호가 떠올려낼 수 있는 건 거기까지. 빛이 걷힌 때 세상은 그들이 알고 있던 모습에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통제실은 물론, 주변의 연구실까지. 쟁그랍게 들어찼던 장치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3호가, 아니, 4명이 만들어낸 소란에 전부 휩쓸린 게 틀림없었다. 악인이 쌓아올린 모든 것이 뜯겨나간 자리를 메운 건 자연이었다. 군사를 키워내고 인간을 제물로 던지던 자리에 식물이 빽빽하게 피어났다. 그 자연을 바탕 삼아 새도 가득 날아들었는데 그 많은 새가 날갯짓하는 모습은 재앙의 징조를 연상시켰다.

  갑자기 피어난 자연은 모든 부분이 과했으나 3호는 그 비정상적인자연이 마음에 들었다. 최소 한 세기 이상 발길이 닿은 적 없었던 양, 섬뜩하리만큼 인간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풍경이어서였다. 인간의 흔적이 없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자연에 덮여버렸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과도 마주할 일이 없다는 것.

  고향에 밀려들었던 침략군은, 그들이 몰고 온 전쟁은 인간의 가장 저열한 욕망인 폭력의 극한을 보여주었다. 침략군의 수장으로 3호에게 딸의 제물이 되길 강요했던 남자는 제 욕망만으로 죄 없는 이들을 희생시켰다. 한 도시의 사람을 거의 몰살시키고 평범한 소녀들을 제물로 내몬 원인이 한 사람의 욕망 탓이었다니. 그 모든 악행을 지켜봤던 3호는 인간의 사악한 욕망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욕망이 인간을 파멸로 내몰곤 한다면 차라리 품지도 못하게 덮어버리는 게 나았다. 그러니 욕망으로 쌓아올린 문명이 자연에 휩쓸려 날아가는 것쯤 아쉬운 일도 아니었다.

  거기에, 운명의 동지 격이었던 네 명의 소녀는 그들 앞에 놓인 지독한 자연이 조금도 버겁지 않았다. 본래 그들이 살던 곳처럼 편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곳이 침략군의 기지였음을 감안하면 어차피 생존자는 대부분 침략군과 수장의 뜻에 동조했던 연구원들이리라. 살아남은 악인들이 갑자기 이곳을 덮친 자연에 숨이 막히건 말건, 3호가 신경 쓸 바 아니었다. 3호는 주변을 가득 메운 자연의 울타리에 만족하며, 1호의 말에 답했다.

  “고마워, 세레나.”

  “이렇게 하는 것으로 정말 괜찮겠어? 오히려 쿠로사키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쿠로사키는 네 오빠잖아. 지금 우리가 힘을 합치면, 아카데미아 연구원을 협박해 쿠로사키를 고쳐보게 하는 것도 가능할 텐데. 따라붙은 말에서 3호는 1호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전사가 되려 노력했던 1호는 어떤 상황에서든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강력한 길을 쟁취해내는 듯했다. 본디 침략국에서 태어났던 1호이니만큼 적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으리란 건 알았지만, 때문에 1호가 제법 그럼직한 제안을 했단 걸 알았지만 3호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괜찮아. 프로페서나 아카데미아 사람들이 오빠한테 손을 대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거든. 차라리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 게 나아.”

  보호라는 말이 적절한 표현인지는 3호도 확신이 없었다. 단순한 보존이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장치의 기능은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것. 장치에서 뻗어 나온 빛이 오빠를 덮친 이상, 오빠가 평범하게 살아있다고 생각하기란 어렵다. 장치에서 빠져나온 후 쓰러진 오빠에게 다가섰을 때 3호는 하나뿐인 형제의 숨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죽었다고 결론내릴 생각도 없었다. ‘생명력을 잃은 것죽음이라는 단어 사이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으니.

  그래서 3호는 오빠를 숨겨놓기로 마음먹었다. 당장은 깨어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오빠라 해도, 어쩌면 이미 시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일지 모른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오빠를 내놓을 순 없었다. 오빠를 넘겨주는 순간 3호의 삶에 아무런 가치도 없었던 이들이 유일한 가족을 앗아갈 것만 같았다. 이미 죽어버렸잖아. 시신을 안고 있을 셈이야? 같은 말로, 3호가 두려워하는 가능성을 이미 일어난 사건인 양 떠들어대며.

  “그럼 이제 다르게 묻지. 넌 지금 괜찮은 건가, 루리?”

  “똑같은 질문이네? 답은 아까도 이야기한 대로인걸.”

  “아니, 다른 질문이야. 나는 네가괜찮은지 물어본 거다. 지금 너, 괜찮은 거 맞나?”

  네 오빠 일 때문에, 괜찮은가 걱정되는데. 따라붙는 말에, 3호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오빠의 모습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지금껏 1호를 비롯한 나머지 세 명은 3호 앞에서 오빠의 일을 굳이 헤집지 않았다. 배려였는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3호가 그들 덕분에 오빠가 당한 일을 자주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그 이야기는 왜?”

  그런데 왜 지금 와서 오빠를 화제로 올리는 것인가. 3호는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기만을 바라며, 최대한 명랑하게 물었다.

  “우리가 여기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할 동안 유즈와 린은 밖에 나가서 상황을 지켜봤어. 거기까진 너도 알고 있겠지.”

  “물론.”

  장치에서 빠져나온 후 네 명은 역할을 나눠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의 위험요소를 확인하고 오겠다고 나선 2호와 4호를 떠올리며 1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중 린이 프로페서가 말하는 걸 엿들었다고 해. 지금의 문제가 우리의 폭주에서 시작되었다고, 우리를 원래대로 돌려야 한단 말을 했다더군.”

  “폭주라.”

  “너에게서 시작됐었지, 루리. 프로페서, 아카바 레오가 우리를 아크파이브에 가두고 <리바이벌 제로>를 실행하던 때. 그대로 프로페서의 뜻대로 되려던 때 네가 리바이벌 제로를 거부하면서 상황이 역전됐어.”

  3호가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던, 한편으론 제대로 떠올리려 하지 않으려 했던 이야기를 1호는 차근차근 풀어갔다. 우리 모두가 힘을 잃고 있었는데, 네가 정신을 차리고 저항하면서 프로페서의 계획이 꼬여버린 거야. 레이를 부활시키는 덴 네 명이 필요한데 너 한 명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서 우리가 있던 아크파이브 기계가 오류를 일으켰지. 그러면서 먼저 네 팔찌의 힘이 발동됐던 것으로 기억해. 다음으로 나, 유즈, 린의 팔찌까지 공명하면서 팔찌의 힘이 폭주하고 만 거다.

  “여기, 프로페서의 성이 완전히 자연으로 덮여버린 것도 그 때문이지. 레이가 사용했다던 자연에너지가 우리의 팔찌에 깃들어 있었으니까.”

  긴 이야기를 마친 1호는 질문의 의도를 더 설명하는 대신 녹색 눈 가득 3호를 담았다. 아무래도 1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3호가 알아서 생각해내야 할 듯했다.

  “세레나도 이런 걸 바랐던 거 아냐? 프로페서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잖아. 안 그래?”

  1호의 질문에 깔린 게 <폭주>의 원인에 대한 추궁이라 결론 내린 3호는, 다소 방어적으로 받아쳤다.

  “물론 그렇지. 내가 괜찮냐고 묻는 건, 앞으로 세상이 우리의 상태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 한 번의 폭주가 이런 결과를 낳았는데 한 번 더 폭주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몰라.”

  “……그래서 내가, 또 폭주할 것 같아?”

  침략군 수장의 계획을 완전히 엎어버린 폭주의 트리거는 명백했다. 하필 3호에게서 폭주가 시작된 이유도 바로 짚을 수 있었다. 지금껏 부러 입 밖에 내지 않은 이유를 1호는 알고 있는 듯했기에, 3호는 불완전한 물음을 던졌다. 1호가 꿰고 있는 것을 말하는 대신, ‘그런 문제를 안고 있는자신을 염려하고 있는지만 물은 것이다.

  “글쎄. 하지만 네가 오빠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고 있는 건 알겠군. 내게 가족 같은 건 없었지만, 쿠로사키와 랜서즈로 함께 움직일 때 쿠로사키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는 확인했어. 그러니 너도, 오빠를 최대한 보호하고 싶겠지. 이해해.”

  마지막 말이 꼭 네 약점을 이해해라는 말로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실제로 조금 전부터 1호는 3호를 뒤흔드는 존재를 계속 입에 올리고 있었다. 3호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들었던, 그러나 자꾸만 3호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을. 이렇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면 약점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1호가 3호에게, 미리 파악한 약점을 흘리는 의도는 무엇인가. 은근한 압박? 아니면 경고? 그것도 아니면.

  “나는.”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기에 3호는 얼른 입을 뗐다. 무슨 말이건 흘려 화제를 바꾸기 위해.

  “네 오빠한텐 손대지 못하게 할게. 걱정 마.”

  말을 가로챈 1호는 의외로 친절한 말을 건넸다. 폭주란 위험을 막겠단 계산에서건 3호를 걱정해서건, 1호는 3호의 약점을 덮어줄 의사가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긴장을 놓지 못한 3호는 1호의 호의를 시험하고 싶어졌다. 3호는 바로 감사인사를 건네는 대신 물었다.

  “말할 거야?”

  “유즈와 린에게?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꼭 할 필요는 없겠지.”

  그 말에서 상대의 약점을 쥐고 마음대로 휘어잡겠다는 등의, 조잡한 심리는 내비치지 않았다. 천성이 정직한 1호답게 진심이 느껴질 뿐이었다. 거기서 3호는 겨우 긴장을 놓았다. 이젠 1호의 걱정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마워.”

  “하지만 루리, 우리의 힘은 공명하고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크게 세상에 영향을 미쳐. 그러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하나 내게 알려줬으면 해.”

  “뭘 듣고 싶어?”

  “간단한 거야.”

  너는, 오빠를 어떻게 했으면 하지? 평소보다 낮게 내리깐 목소리였다.

  의미심장한 말에 3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무래도 답을 하는 덴 시간이 제법 걸릴 듯했다.

 

*

 

  저항군의 리더는 팔짱을 낀 채 스크린에 비치는 장면을 눈에 담고 있었다. 아비는 그에게 바깥을 보여준 직후, 잔뜩 긴장한 그를 이끌고 자연의 힘에 휩쓸린 본거지에서 그나마 말짱해 보이는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비가 튼 것이 지금 스크린에 떠오르는 영상이었다. 통제실에 있던 감시카메라가 담아냈던 영상을 겨우 가져온 것이라 했다. 너도 알다시피 통제실은 엉망이 되어서 말이다. 다 망가진 감시카메라에서 이거라도 복구해내느라 꽤 애썼지. 영상을 틀 때, 아비는 다 갈라진 목소리로 설명했다.

  [상황을 확인하기엔 그래도 이게 나을 거다.]

  아비가 말한 대로였다. 화면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나, 영상은 리더가 꼭 알고 싶었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재앙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의 전사이기도 한 청년이 어떻게 아비를 방해했고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까지.

  첫 장면은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장치와 열심히 움직이는 연구원의 모습이었다. 불길한 녹색 빛을 뿜어내는 장치를 리더는 굳은 얼굴로 감상했다. 아비의 계획이 순조롭게 흘러가, 목표 수치에 다다르기 직전. 갑자기 통제실의 문이 열리며 외부인이 끼어들었다. 감시카메라의 영상으로도 그 불청객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다소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것과, 이미 부상을 입은 듯 어깨를 감싸는 모습이 전부 담겨있어서였다.

  성치 않은 몸으로 끼어든 외부인은, 리더에게 너무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정예병의 일원이자 동생을 찾아 적진까지 침투한, 강인한 의지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청년. 전장에서 살아남고 나라도 두어 개나 넘어 통제실에 온 청년은, 동생이 갇힌 장치로 걸음을 옮긴다. 아마 청년은 그곳이야말로 자신의 마지막 목적지라고 생각했으리라. 침략군 수장의 계획에 휘말려 동생을 잃기 직전, 운 좋게 그곳에 닿은 청년은 어떤 감정에 휩싸여 있었을지. 리더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갑자기 끼어든 외부인을, 프로젝트 성공을 앞두고 있던 연구원들이 달가워할 리가 없다. 방해꾼을 치우려 황급히 발동한 보안 시스템이 청년을 붙잡는 것보다, 위기감을 느낀 청년이 장치에 덤벼드는 게 빨랐다.

  다음 순간 장치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가 청년의 몸을 관통했다. 날개 꺾인 새처럼 추락한 청년은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불청객의 등장에 심기가 불편해진 아비가 청년을 치워버리라 명령한 직후 문제가 생겼다. 장치 속에서 청년의 누이가 비명을 지르는가 싶더니, 그의 절망에 반응한 것처럼 단단한 장치가 거짓말처럼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영상엔 노이즈가 낀다. 사고의 여파로 카메라에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지직거리는 화면에, 청년의 누이를 비롯한 네 명의 소녀가 비친다. 장치에서 풀려나온 소녀들의 손목, 정확하게는 오른 손목의 팔찌에서 빛이 번지는 게 리더의 눈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다음엔.

  “보다시피 3, 그러니까 쿠로사키 루리에게서 시작된 일이다. 아크파이브에서 깨어난 건 아마도 네 전사가 벌인 소란 때문인 것 같은데, 오빠가 저렇게 된 걸 보고 완전히 이성을 잃었지. 그러면서 아크파이브가 망가지고, 나머지 셋도 깨어나고 만 거다.”

  다음엔, 기계가 가득했던 악의 요새에 무서운 속도로 꽃이 번지기 시작했다. 병균처럼 퍼지는 꽃이 시야에 가득 들어찬 때 영상이 끊어졌다.

  “네 명은 전부 레이의 조각. 서로 공명하는 게 당연해. 그러니 3호가 폭주하면서 전부 다 폭주한 거고, 세상이 이 꼴이 되었지. 이제 이해했나? 네 전사 하나가 우리 미래를 어떻게 망쳐버렸는지?”

  “쿠로사키는 어떻게 되었지?”

  아비의 말에 제대로 답하는 대신, 리더는 가장 듣고 싶었던 것인 청년의 상태를 먼저 물었다. 청년은 그의 전사였고, 정예병 중에서도 전투력이 뛰어난 축에 드는 자였다. 청년을 잃는 것은 리더에게도 큰 손해일 수밖에 없다. 청년의 삶에서 아비가 만든 불행을 끊어야만 한다는 오랜 책임감도 청년의 안부를 확인하게 하는 이유였다.

  “그런 게 중요해?”

  “중요하지. 어쨌든 그자는 랜서즈고, 당신 계획을 틀어버린 트리거니까.”

  “……아크파이브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니 회수해 조사하려 했지만, 누가 선수를 쳤어. 내가 정신을 차리고 가봤을 땐 이미 누가 가져간 후였지. 아마 3호일 거다. 제 오빠를 데려가고 싶었을 테니까. 가져가봤자 시신이겠지만.”

  “정말로 죽었다고 생각해?”

  “헛된 꿈을 꾸는 게 네 천성인 건 안다만, 최근엔 좀 지나치구나. 랜서즈를 이끌고 온 것부터 헛된 희망에 부풀어 있다 싶었는데 이젠 죽은 놈이 살아있길 바라는 거냐? 아크파이브의 기능은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거다. 그놈은 이미 죽었어.”

  여기까지 와서 죽을 거였다면 차라리 고향 사람들처럼 카드화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지. 아비는 무심하게 덧붙였다. 침략전쟁의 희생자가 맞이한 종말을 입에 올리는 뻔뻔함에 리더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낳은 희생자 앞에 저 남자는 왜 저렇듯 당당한지.

  “그래도 그놈이 <리바이벌 제로>를 완전히 뒤집어버리다니. 개죽음은 아니게 됐군. 죽으러 뛰어들면서 내 계획을 망쳐버렸으니 말이다. 왜 그놈이 폭주의 트리거가 됐는지 알 수 없단 게 분해. 그놈이 트리거가 될 수 있단 걸 알았다면 포착된 즉시 붙잡아버렸을 텐데.”

  “이유를 알 수 없다니. 답은 뻔하지 않나?”

  잠자코 듣고 있던 리더는 짤막하게 받아쳤다. 아비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으나, 회색 눈에는 불쾌감이나 냉소 대신 의문만이 비칠 뿐이다. 정말로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듯.

  그러나 리더는 분명히 이해했다. 왜 청년이 뛰어들면서, 청년이 쓰러지면서 모든 것이 꼬여버렸는지. 왜 청년은 <구원자의 조각>들이 폭주하는 트리거가 되었는지. 너무도 간단한 답이기에 아비가 깨닫지 못하는 게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직접 깨달으란 의미로 리더는 아비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침묵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입술을 뗐다.

  “당신은 레이가, 아버지인 당신 대신 희생하기로 결심했다고 했지. 본래 희생해야 할 당신 대신 자크 앞에 나선 게, 그 동기가 가족인 당신 때문이었다고.”

  힌트는 충분히 주었다. 이젠 아비가 답을 찾는 일만이 남았다. 리더는 답을 기다리며 아비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래. 그런 레이의 조각들이 내 뜻을 거역하다니 끔찍할 뿐이야. 그놈이 끼어들어서 죽은 게 뭐라고 그렇게 격하게 반응한 건지.”

  “히이라기 유즈, 세레나, , 쿠로사키 루리. 당신이 레이의 조각이라고 부르는 네 사람. 그 넷 중에서 하필 쿠로사키 루리가 먼저 폭주한 이유를 생각해.”

  “잠깐만. 설마 뛰어든 놈이 쿠로사키 루리의 오라비여서 그런 일이 벌어졌단 거냐?”

  아무래도 아비는 이제 갈피를 잡은 것 같다. 청년의 개입이 조각의 폭주를 불러온 이유, 정확히 말해, 청년의 누이가 폭주하게 만든 이유에 대해. 리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댄다.

  “레이는 가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희생을 택했지. 레이에게 가족이란 잃어선 안 될 존재이며, 제 몸과 미래를 바칠 소중한 대상이라는 뜻. 그러니 레이의 조각이라는 이들도 당연히.”

  “아니, 그런 게 답일 리 없어. 그놈은, 쿠로사키 슌은 레이의 가족이 아냐! 레이 때와는 다른 상황이라고.”

  “그자는 쿠로사키 루리에게는오빠였어. 당신의 말대로라면 쿠로사키 루리는 레이의 조각이며, 레이의 의지를 타고났고. 가족을 잃고 싶지 않은 레이의 마음은 쿠로사키 루리에게도 강하게 뿌리내렸을 거다. 그러니 오빠가 아카데미아에게 당해 쓰러진 걸 봤을 때 쿠로사키 루리가 당신에게 품은 감정이 무엇이었을진 뻔하지.”

  “레이의 조각이 아비인 나에게 분노했단 거냐?”

  “유감스럽게도 쿠로사키 루리를 포함한 지금의 모든 조각들에게 당신은 가족이 아니거든. 가족을 잃게 한 사람을 용납할 수 없었던 쿠로사키 루리가 폭주. 다음으로 레이의 의지를 이어받은 세 명이 같은 이유로 공명. 그 결과가 이거야.”

  그렇게 말할 때 리더는 웃음을 걸치고 있었다. 언제나 제 욕망대로만 움직였던, 그 이유로 가족까지 내팽개쳤던 아비는 욕망을 이루려 무수한 희생을 낳은 끝에 패배했다.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쌓아온 희생이, 그의 죄악이 결정적인 순간 걸림돌이 된 탓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동화에서 이야기하는 심판이 아닌지. 리더는 아비 앞에서 오랜만에 유쾌해졌다.

  “그러니까 네 이야기는 내가…….”

  “그래. 당신은 레이의 역린을 건드린 셈이라고. 레이가 가족을 소중히 여긴단 걸 알았다면, ‘레이의 가족은 다치게 하지 않았어야지.”

  기뻐해. 당신은 레이의 조각들을, 가장 레이답게 만들었으니까. 가족을 위해 세계의 운명을 바꿨잖아? 한껏 빈정거린 리더는 짝짝짝, 과장되게 손뼉을 친다. 아비의 실패를 진정으로 축하한다는 듯. 다음 순간 리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비의 얼굴에서 패배감을 읽을 수 있었다.

Posted by 현소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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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량한 인간은 평화로운 세계를 사랑하지만 죄지은 자는 혼란에 안도한다. 그런 세계야말로 죄를 가리고 섞여들기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국의 도시에 정착하며, 청년은 그곳도 혼란에 잠겼음에 안심했다. 사는 게 팍팍해진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에게 예의로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덕분에 청년은 순조롭게 도시의 일부가 되었다. 수상쩍은 이방인이 사실은 도망자였으며, 그가 도망쳐온 나라가 도시를 혼란에 빠트린 침략국이란 배경은 그렇게 감춰졌다.

  그러나 청년이 혼란을 이용한 것은 제 안위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도망쳐올 때 데려온 사람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는 검은 머리칼의 여자를 데리고 도시에 숨어들었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서 베일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한 여자는 그 날 꼭 상복을 입은 귀부인 같았다. 그녀가 사랑하던 이들이 죄 죽었음을 생각하면 참 씁쓸한 인상이었다. 죽음을 불러온 것이 청년의 옛 동료들이란 것까지 짚으면 더더욱.

  그럼에도 여자는 청년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도 청년처럼 도망자이기에 그랬다. 도망치지 않았다면 평생 새장에 갇혀 살아야 했을, 사로잡힌 신비. 청년이 탑에 갇힌 그녀에게 같이 갈래요?’라고 물었을 때 그녀가 목적지를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인 건 바깥으로 한 발짝이라도 떼고 싶어서였으리라. 그녀의 승낙이 저에게 삶을 맡기겠다는 뜻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답을 듣자마자 청년은 입가에 웃음을 걸쳤다. 그는 줄곧 그녀와 함께 도망치는 걸 꿈꿔왔으므로.

  실행은 빨랐다. 탑의 구조를 훤히 꿰고 있던 청년은 오래지 않아 여자를 데리고 제 나라를 뛰쳐나왔다. 사랑의 도피였던가? 그럴 리는 없었다. 청년 혼자서 그런 낭만적인 형태를 내심 바랐다면 모를까. 여자의 삶은 과거, 고향에서 그를 만난 때부터 꼬여버렸다. 평화롭던 그녀의 고향에 전쟁을 들여온 것도, 그녀의 납치를 방조한 것도 전부 청년이었으니까. 청년의 손을 잡은 때 여자는 그동안 그가 가져온 불행을 새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미지근한 증오를 억지로 삼키며.

  옛 일이 마음에 걸려서였을까. 청년은 여자와 함께 움직이게 된 후 계속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려 들었다. 짐가방을 챙기면서도, 미리 챙겨온 보석을 돈으로 바꾸러 갈 때도, 그녀에게 베일을 씌워주면서도. 그는 자꾸만 물었다. 괜찮아요, 루리? 그럴 때면 여자는 붉은 눈으로 청년을 바라볼 뿐. 굳게 닫힌 입술은 열리는 법이 없었다. 침묵에 담긴 감정을, 청년은 굳이 파헤치려 들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증오였을 수도 있고,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는 이에 대한 연민이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여자가 답을 회피할 뿐 청년의 손을 놓지 않았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정확히는 청년 이외의 선택지가 없었다고 보아야겠지만.

  고향은 폐허가 되고 사랑하던 사람은 전부 잔해에 묻혔다. 홀로 도망쳐봐야 쥔 것도 기댈 곳도 없는 여자였다. 침략군 수장이 눈독 들인 타깃이니 작정하고 숨지 않으면 언제 다시 끌려갈지 모를 처지이기도 했다. 그나마 저에게 호의적인 청년의 도움을 받아 몸을 숨기는 게, 그녀의 유일한 선택지였으리라.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삶에서 감정은 사치였다.

  여자의 처지를 알고 있었기에 청년은 그녀가 떠날 수도 있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녀에게 기반이 생기기 전까진 거의 불가능한 미래였으므로. 청년의 짐작대로 여자는 그의 뜻을 잠자코 따라주었다. 가끔 시선이 청년 너머의 먼 곳에 향하긴 했으나, 그뿐. 청년의 요구에 거부의 뜻을 흘리는 일은 없었다. 도피처가 되어줄 집을 계약할 즈음엔, 청년도 제법 자신에 차 있었다. 여자의 마음이야 어떻건 저와 그녀는 제법 거리를 좁혔으며, 앞으로도 보통의사람들처럼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이 과했던 것일까.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날 청년은 여자에게 여분의 열쇠를 건네주며, 자못 당당하게 말했다.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집이에요. 오래 머물 수 있겠죠. 아예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그러자 여자는 메마른 목소리로 받아쳤다.

  “얼마나 오래 있으려고?”

  “당신이 바라는 때까지죠. 루리.”

  그렇게 답한 청년은 문득 머리를 스친 불안에 바로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웬만해선 침묵하던 여자가 드물게 반응한 것이 신경이 쓰인 탓이었다. 그녀에게 자신이 본디 껄끄러운 상대임을 잠시 잊고 있었다. ‘바라는 때까지라고 하면, 여유가 생긴 때 여자가 홀로 이곳을 떠난다 해도 잡을 길이 없는데. 다행히 여자는 묘한 웃음을 걸칠 뿐 그 이상 이야기를 끌어가지 않았다. 짐가방을 풀어, 챙겨온 옷가지를 정리하는 여자를 보고서야 청년은 안도했다.

  이렇게, 누구도 저를 모르는 곳에서 일상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그녀의 꿈이었으리라고. 그러니 여자가 평온한 나날을 더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여기 남아있을 거라 스스로를 달래며.

  그 이후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청년은 밖에서 거리공연을 하다 들어오고, 여자는 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다 동거인이 돌아오면 맞아주는 날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여자에게 혼자 있는 동안 집에서 무엇을 하고 있냐 묻자, 바깥 풍경을 본다는 답만 돌아왔다.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듯 창가에 안락의자가 놓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여기에 좀 더 일찍 왔다면 더 좋은 풍경을 보았을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 훨씬 화사했거든요. 명랑하게 말을 덧대며 청년은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밤이 되기까진 아직 멀었음에도 어쩐지 우중충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청년이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형형색색의 불빛이 인상적이었던 도시는, 이제 늦은 오후만 되면 무채색을 덮는다. 침략군 분대가 침투해 민간인을 공격한 일을 겪으며, 사람들이 불신과 경계를 두르고 살게 된 탓이다.

  “낮에는 그럭저럭 볼만하지만 이 시간쯤은 조금 칙칙하죠?”

  “글쎄요. 하트랜드보다야 나은걸.”

  지나가는 듯 던진 말이 묵직했다. 여자가 꺼낸 것은, 폐허가 된 고향의 이름. 귀에 익은 이름에 과거의 죄를 떠올린 청년은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청년을 더욱 짓눌렀던 건, 여자의 얼굴에 원망은커녕 불쾌조차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불행도 상실도 너무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을 일상이 된 듯.

  “공연은 괜찮나요?”

  그때 여자가 말을 건네지 않았다면 청년은 밀려드는 감정에 질식했을지도 모른다. 반응을 묻는 거예요. 재차 귀를 때리는 목소리에 청년은 겨우 입을 뗐다.

  “나쁘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나한테 소소한 선물을 주기도 하죠. 이 동네는 엔터테이너가 먹히는 모양이에요.”

  “여기는 아직 외부인을 믿어주는구나.”

  “……그러네요.”

  하트랜드만큼 당하진 않아서일지도 모르죠. 자조 섞인 말을 흘리고서, 청년은 커튼을 쳐 창을 가렸다. 고향의 이름에도 여자는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아득히 먼 곳으로, 아마 청년이 담아낼 수 없을 곳으로 시선을 돌릴 뿐. 그녀가 바라보는 곳은 이 도시가 아니다. 높은 확률로, 그녀가 살았던 폐허이거나 평생 닿을 수 없을 낙원일 것이다. 청년이 결코 데려가줄 수 없을 곳.

  “밖에 나가지 않는 건, 사람들을 믿지 못해서인가요?”

  “시선이 달갑지 않을 뿐이에요. 여기서는 당신만 감당하면 되지만 밖에선 어떻게 될지 모르니.”

  “데니스 맥필드란 사람 하나 정도는 받아줄 수 있나 봐요.”

  “당신은 나를 해치지 못할 테니까요.”

  ‘않을 테니까가 아니라 못할 테니까였다. 청년은 여자가 자신의 약점을 꿰고 있다고 확신했다. 여자의 세상을 망가뜨렸기에 그녀의 남은 삶에선 언제까지나 무해한 인간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을. 당신을 다치게 할 리가요. 그런 일은 생각도 한 적 없어요. 애써 받아친 청년은 거리공연에서 쓴 마술도구를 정리하다 카드 한 벌을 통째로 쏟았다. 카드를 전부 정리하고 일어났을 땐 여자는 이미 방으로 들어간 후였다.

  그렇게 가끔 <껄끄러운 화제>가 흘러나오긴 해도 두 사람의 관계는 표면적으론 어떤 문제도 없었다. 어쨌건 두 사람은 함께 지냈고, 여자는 청년의 도움을 거부하지 않았다. 청년이 그녀의 협력자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둘은 나쁘지 않은 한 쌍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연기에 능한 청년이라면 얼마든 그런 모습을 취할 수 있다 청년의 얄팍한 생각에 힘을 실어준 것은 이 도시에서 그가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청년은, 거리에서 집주인과 우연히 마주쳤다.

  이곳 사람답지 않게 친절하고 붙임성 좋은 사내는, 청년을 보자마자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OOO씨라 했던가? 사람 많은 거리에서 이름까지 부르는 친화력에, 청년은 가명으로 집을 계약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 .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적당히 인사만 하고 빠져나가려던 청년을, 사내의 말이 묶었다.

  “집은 마음에 드나?”

  “, 덕분에 여기서 잘 적응하고 있지요.”

  “그래야지. 아가씨랑 살림도 차려야 할 테니. 저번에 같이 온 아가씨, 결혼할 사람이지? 그게 아니면 파릇파릇한 남녀가 함께 와서 집을 마련할 일도 없잖나.”

  거기서 청년이 떠올린 건 수개월 전, 집을 계약하러 가던 날의 기억이었다. 도시에 들어오고도 마땅히 지낼 곳을 찾지 못했던 시기, 청년과 여자는 어디나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제법 괜찮은 매물을 발견한 청년이 집주인을 만나러 갈 때, 여자가 따라붙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집주인과 말이 통한 덕에 청년이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쓸 때도 여자는 동상처럼 가만히 청년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집주인은 그 날 본 여자를 줄곧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청년과 비슷한 나이라는 것도, 도통 입을 열지 않는 여자에게 청년이 살갑게 말을 걸었던 것까지도. 타인이 저와 여자와의 관계를 넘겨짚었던 사실이, 청년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설레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의 눈엔 그들이 지극히 정상적인관계인 동시에, 미래를 기대할 사이로 비친다는 것이.

  “그렇게 보였나요?”

  “아니면 벌써 살림을 차린 건가?”

  “언젠간 그렇게 될지도 모르죠. 아직은 제 쪽이 훨씬 마음이 커서…….”

  “다음에 볼 땐 좋은 소식 전해주길 기대하겠네.”

  웃음 띤 얼굴로 인사하는 집주인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청년은 집으로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리의 엔터테이너로, 혹은 첩자로 살아오면서 청년이 익힌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관심을 품는 건 외양이지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진실이야 어떻건 언뜻 보기에 아름답게 비치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 되며, 그 역도 성립한다. 청년과 여자의 관계라고 다를 것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이 연인이나 약혼자라면 사람들이 그들에게 기대하는 상도 그러한 것들이리라. 청년이 그녀에게 어떤 죄를 지었는지, 그녀가 청년에게 어떤 감정을 품는지는 중요한 사항도 아니다.

  오히려 껄끄러운 진실을 보기 좋은상으로 덮어버리는 것이 두 사람에겐 더 나은 길일지도 모른다. 서로만이 아는 감정을, 사건을 입에 올리지 않고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평온한 나날이 계속된다면, 둘 사이의 껄끄러움도 조금씩 옅어지지 않을까. 청년의 죄책감이 줄어드는 건 물론, 그가 안겨준 비극으로 인한 여자의 불행도 줄어들지 않을까.

  행복한 삶을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서로의 행복을 위해 설정한 역할을, 진짜 제 모습으로 믿어버리면 그만인데.

  여자의 뜻은 듣지도 않았으면서, 청년은 바로 배우가 될 마음을 먹었다. ‘함께하여 행복한 남녀를 연기하기로 한 것이다. 무대 위의 배우에게 필요한 것은 배역, 그리고 몰입뿐. 타인은 물론 그들 두 사람까지 속일 만큼 좋은 배역으론 어떤 것이 있을까. 이미 한 번 제시된 적 있는 배역에 먼저 생각이 뻗었다. 집주인이 무심하게 이야기했던 것.

  연인. 혹은 약혼자.

  타인의 눈엔 결혼을 약속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가까운 연인을 연기하자. 여자의 곁에서 그녀의 해답이자 파트너인 양 행동하자. 집에 도착해 문을 여는 순간까지, 청년은 자신의 배역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

 

  한때 꿈의 땅이라고도 불렸다는 도시는 우중충했다. 볕이 강한 시간까지는 화사한 색채를 볼 수 있으나 조금만 어둑해지면 금세 무채색에 덮이곤 했다. 창밖 풍경을 자주 감상하는 여자에게, 동거인인 청년은 이 도시가 맞은 비극을 알려주었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침략군 분대가 잠입해 민간인을 공격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날부터 사람들은 불신에 빠졌죠. 서로를 의심하고, 사소한 일로 다투곤 했대요. 결국 그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이들은 하나둘 떠났다는군요. 씁쓸한 이야기를 담으면서도 청년의 목소리는 동화를 읽어주듯 나긋했다.

  [슬프지 않나요?]

  이야기를 끝맺는 물음에 굳이 답하지 않은 것은 그보다 더한 비극이 떠올라서였다. 여자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운 사건. 아마 평생 삶에서 잘라내지 못할, 끔찍한 비극. 여자는 평화롭던 고향에서 갑자기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던 날을 기억한다. 한 사람이 아닌 수많은 사람의 비명이 겹치기에 소리의 근원을 보았더니 무장한 군인이 밀려들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달렸던 날. 불행히도 그 날이 전쟁의 시작이었다. 조상 대부터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고 죄 없는 사람들이 쓸려나가는 비극이, 그 날 이후로도 쭉 이어진 것이다.

  모두를 짓밟은 침략군이 왜 들이닥쳤는지는 지금도 명확히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끔찍한 폭력을 정당화할 이유가 있다면 너무나 처참할 테니까. 따라서 여자는 매일 함께하는 청년에게 전쟁의 목적을 물은 적이 없다. 그가 본디 침략국의 사람이며, 그녀의 고향에 전쟁을 끌어온 첩자였음을 알면서도. 침략군과 한패였으면서 그는 왜 이곳에 침투한 침략군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은 것일까. 뻔뻔하게도 죄를 잊은 것인지, ‘동지의 죄를 새삼 되새기며 떳떳하지 못한 제 출신을 자조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설령 전자라 하더라도 여자는 별달리 동거인에게 실망하지도 않을 터였다. 그는 이미 그녀의 삶을 망가뜨렸고, 그로 인해 꼬여버린 미래는 다시 복구할 수 없으므로. 여자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고향은 지옥이 되었고 연을 맺은 사람은 거의 잃었으며, 그녀 자신도 침략국에 끌려가 꼼짝없이 죽을 뻔했다. 탑에 갇혀 지내던 날 청년이 도망치자고 권유한 덕에 침략국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애초 청년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갇힐 일도 없었을 터였다. 그는 구원자도 협력자도 아니라 그녀의 삶을 제멋대로 끌어간 사람일 뿐이다.

  그렇기에 여자는 청년의 말을 별로 머리에 담아두지 않았다. 이 낯선 도시에 닥친 비극 이야기도, 거기서 슬픔이란 감정을 끌어내려는 듯한 마지막 물음도. 적당히 듣고 흘려버렸을 뿐이다. 우중충한 풍경을 보면서도 별다른 감상이 피지 않는 것도 아마 그래서이리라. 이곳의 음울함은 여자에게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다. 이곳은 고향의 폐허만큼 처참하지도 않고, 침략국의 탑처럼 숨이 막히지도 않는다. 화사하기 그지없었던 도시가, 색채를 조금 잃었을 뿐이다.

  다만, 풍경이 무채색으로 물드는 순간부터는 비슷한 색채를 덮어썼던 고향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뼈대만 남은 건물. 검게 말라붙은 땅. 침략군에 맞서기 위해 급히 무기를 든, 대부분 십대 청소년으로 구성되었던 저항군. 그 속에서 어른 행세를 하던 오빠.

  루리. 도망칠래?

  그럼에도 하나뿐인 누이 앞에선 때로 약한 말을 하던 오빠. 그녀의 유일한 가족. 오빠는 둘만 있을 때면 낡은 병기 같은 목소리로 속삭이곤 했다. 도망칠래, 루리? 너라도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래? 그렇게 이야기할 때 오빠는 입가에 웃음을 걸치고 있었다. 그에 깃든 감정은 기대라기보단 체념에 가까웠다는 걸, 여자는 이제 안다.

  오빠는?

  그 즈음 오빠는 몰래 국경을 넘을 때가 잦았다. 침략군에 맞서 버티는 데 필요한 것을 바깥에서라도 구해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국외로 향했다 굳이 돌아가지 않기로 한다면, 오빠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함께 지내는 가족으로서 사정을 훤히 알기에, 그때의 여자는 장난스레 받아쳤다. 내가 간다고 하면 오빠도 같이 도망치려고?

  아니. 하트랜드에서 도망친다면 너나 유토만 가야 해. 내가 도망치면 다들 배신당했다 느낄 테니까.

  그래도 너는 혼자라도 도망치는 걸 생각했으면 좋겠어. 오빠가 메마른 목소리로 덧붙였던 말을 여자는 기억한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오빠가 건넨 말은 절반쯤은 이루어진 셈이다. 침략군에게 납치당하며 지옥에서 강제로 끌려나간 여자는 적의 도움을 받아 안전한 세계로 도망쳐왔으니. 그러나 지옥에서 확실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여자뿐이다. 이 도시에 온 지도 수개월이 된 지금, 지옥에 남겨졌던 사람이 얼마나 생존했을지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원래도 얼마 되지 않던 사람이 제법 줄었으리라는 것만 짚일 뿐이다.

  마지막까지 같이 버티자고 했던 친구, 포성에 놀라 여자의 품에 파고들었던 아이. 급조된 저항군에서 강한 축에 들었던 오빠와, 어쩌면 여자와 마음을 주고받았던 소년 중에서도 한둘은 쓰러졌을지도

  초인종 소리에 생각이 끊어졌다. 창가에 앉아있던 여자가 문으로 향하기까지의 짧은 시간에, 문 밖에 선 사람은 목소리로 정체를 밝혔다. 나예요, 루리. 명랑한 목소리는 동거인의 것. 여자는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혼자 집에 있으면서 지루하지 않았나요?”

  “아무 일도 없어서 마음이 편하던걸요.”

  “그런가요. 지루하게 지내는 거라면 한 번쯤은 같이 나가자고 말하려고 했더니. 전에 하던 것보다 훨씬 멋진 공연을 보여줄 자신이 있거든요.”

  가방 가득 가져간 공연 도구를 정리하며 청년은 웃었다.

  “나를 또 도우미로 쓰려고?”

  하트랜드에서처럼? 고향의 이름을 꺼내며 살짝 빈정거리자 청년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당신도 슬슬 밖에 나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내가 곁에 있어줄 수 있으니까. 따라붙는 말에 여자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더 할 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여자의 미지근한 반응에 한 발짝 물러섰다. 여자가 집에 틀어박혀 있는 바람에 보지 못한 도시의 곳곳을 소개해주는 것으로 화제를 돌린 것이다. 오늘 사온, 중앙공원 쪽 가게의 초콜릿은 유명해요. 먹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다음에도 사올게요. 그리고 그 근처에는. 청년이 계속 떠들어댈 때 여자는 무너지기 전의 고향을 떠올렸다.

  미래도시란 별명이 붙었을 만큼 기술이 발전한, 아름다운 도시. 아마 이곳이 혼란이 잠기기 전 모습보다 몇 배는 더 화사했을 곳. 무엇이든 풍족했던

  “……그래서 어때요, 루리? 다음번엔 같이 가볼래요?”

  “밖으로 나갈 마음이 생긴다면요.”

  청년이 어떤 장소를 이야기했는지도 모르면서 여자는 적당히 답했다. 상황을 넘기기 위한 답변이었다. 어차피 그와 함께 거리를 걷는 날은 오지 않을 테니까. 역시 조건이 달려있네요. 그렇게 말한 청년의 얼굴에 서운함이 비친 듯도 했으나 여자는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있잖아요, 루리. 무해한 거짓말은 어느 정도까지 용서해줄 수 있나요?”

  침묵하던 여자에게 날아온 것은 어쩐지 긴장한 목소리였다. 거짓말에 대한 의견을 묻는 걸 보니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거짓말이라는 단어에 무해하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게 얼마나 될지 모르겠는걸요. 굳이 묻는 이유가 있나요?”

  “어쩌다 거짓말을 해버렸거든요. 우리 관계에 대해서.”

  아, 물론 당신에게 한 게 아니라 집주인에게 한 거예요. 어쩌다 만났는데 민망할 정도로 아는 척을 하지 뭐예요. 집을 계약할 때 우리가 같이 갔었다고 당신이랑 내가 특별한 사이인 줄 알고 있더라고요. 우리 관계를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고, 아무래도 다른 사람 앞에선 그럴듯한 이름이 있는 게 좋으니까. 구구절절 늘어놓는 말을 듣고 있으니 청년이 한 거짓말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그들 두 사람의 관계에 엉뚱한 이름을 붙인 것이리라. 청년이 가장 바라는 관계인 동시에.

  “그래서 약혼자인 체 했어요.”

  두 사람이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관계의 이름. 겨우, 얄팍한 거짓말을 털어놓았을 때 청년은 여자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묘하게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걸, 연기할 수 있다고 멋대로 생각한 것일까.

  “나한테 그걸 말해주는 이유가 있나요?”

  “혹시나 해서 이야기했을 뿐이에요. 아무래도 우리는…….”

  청년의 시선이 방황했다. 지나치게 메마른 반응에 당혹스러워진 것인지. 말을 맺지 못하는 청년 대신 대화를 종료하려던 여자는, 청년의 시선이 제 손에서 멈추는 걸 느꼈다. 정확히는, 그녀의 왼손에서였다. 반지가, 있었네요. 청년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자가 끼고 있는 반지란 하나뿐이다. 청년과 함께 도망치기 전, 아니, 청년의 동료에게 납치당하기도 전부터 낀 것. 하필 왼손 약지의 반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예전에 받은 거예요.”

  “반지의 의미를 묻진 않을게요. 그냥, 일이 쉬워졌단 생각이 들어서 얘기를 꺼낸 거예요.”

  왼손 약지에 낀 반지는 보통 약혼반지나 결혼반지로 생각하잖아요. 우연이긴 하지만 둘러댄 말이랑 잘 들어맞네요. 청년이 줄줄이 늘어놓는 말을 잠자코 듣던 여자는 말이 끝나자마자 무심하게 받아쳤다.

  “거짓말이든 연극이든, 제대로 하고 싶다면 당신도 반지를 하나 끼지 그래요. 왼손 약지에.”

  “그래도 되나요?”

  간절한 물음에 여자는 메마른 웃음을 걸치는 것으로 답했다. 사실상 빈정거림에 가까운 말에 매달리는 꼴이라니. 상대의 삶을 마구 흔들어놓고도 상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여자는 청년이 그 얄팍한 소망을 채우려 조잡한 연기를 하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여자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청년은 꽃다발을 들고 집에 들어왔다. 여자가 문을 열자마자 한껏 들뜬 얼굴로 꽃을 안겨주는 게, 연인 행세를 하고 싶은 듯했다. 이 근처에 생생한 꽃을 파는 곳이 있더라고요. 제일 예쁜 것으로 골라왔어요. 푸른 눈에 얹힌 기대를 못 본 체 하며, 여자는 꽃을 다발 그대로 화병에 꽂았다. 이 집이 조금 더 화사해지겠네요. 심드렁한 말에 청년은 고백이라도 받은 양 웃었다.

  열흘쯤 지나서는 청년이 작은 상자를 내밀었는데 열어보니 반지가 들어있었다. 중앙에 작은 보석이 박힌 반지 한 쌍 아마도 연기의 주요 소품으로 준비한 것이었으리라. 여자는 두 개의 반지 중 조금 큰 쪽을 꺼내 동거인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왼손 약지, 결혼반지를 끼는 자리에. 여자가 제 뜻을 읽고 어울려줬다는 것 때문일까. 청년은 바로 상기된 얼굴로 남은 반지를 꺼냈으나, 여자에게 끼워주지는 못했다.

  난 이 반지가 익숙해요.

  웃는 낯으로도 여자는 제법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어차피 우리한테 중요한 건 둘 다 약혼반지를 낀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니까. 굳이 꺼내지 않은 말을, 청년도 알아차린 듯했다.

  “……아마도 그쪽이, 당신의 진심일 테니까요.”

  상자를 닫으며 중얼거린 말엔 그동안 의욕적이었던 청년답지 않게, 체념마저 묻어있었다.

  물론, 여자가 반지를 거절했다고 해서 둘의 관계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청년은 계속 연기에 빠져들었고 여자는 그의 연극에 어울려주었다. 원하지 않았다 해도 이미 청년의 극에 상대 배우가 되어버린 게 여자의 현실이었다. 연고자 하나 없는 이국에 도망쳐온 이상, 저에게 유일하게 호의적인 인간인 청년을 떠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혼자라도 도망치는 걸 생각했으면 좋겠어. 과거 오빠가 건넨 말이 혼자라도 살아줬으면 좋겠어란 의미란 것을, 여자는 안다.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얼마간은 안전한 삶을 택해야 했다.

  언젠가 전쟁이 끝난다면, 여자가 홀로 뛰쳐나가도 생존할 수 있을 정도로 이곳에 익숙해진다면.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침략국에서 그녀를 잊을 정도로 시간이 흐른다면. 그때쯤이면 청년에게서도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제 삶을 망가뜨린 이의 그늘에 숨어 사는 게 아니라, 여자 혼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안고 여자는 청년의 곁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까지 미래를 약속한 연인 흉내를 내는 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청년에게 여자의 옆자리를 차지하려는 노력이 표면적으로 연기의 일부인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도 일시적으로 연기를 한다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그의 몰입이 깨지지 않을 정도로만. 그가 분에 넘치는 기대를 걸지 않을 만큼만 연기하자 여자가 스스로를 달랜 덕에 두 사람의 연극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청년의 소망대로, 여자의 생각대로 평온한 나날이 이어지던 때. 또다시 그녀의 삶에 큰 물결이 일었다. 사건은 청년이 공연에 필요한 도구를 챙겨 나간 어느 날에 일어났다. 청년의 가방이 거실에 놓인 것을 보고 그의 방으로 치워주려던 여자는, 가방을 들어 옮기다 그 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헝겊으로 만든 주머니는 제대로 여미지 않아 내용물이 비쳤는데, 문제의 물품은 하필 여자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여자는 주머니를 거꾸로 해 안에 든 것을 쏟았다. 조그마한 비닐백에 넣어둔 물건이 힘없이 그녀의 손에 떨어졌다.

  비닐백에 담긴 것은, 갈색의 가죽팔찌. 여자가 잘 아는 사람의 물건이었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단 그녀의 기대를 비웃듯, 비닐백에 물건의 원래 소유자로 추정되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팔찌를 보자마자 그녀가 떠올렸던 이름. 지인의 물건이 엉뚱하게도 청년의 손에 들어가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여자는 그 자리에서 울었다.

 

*

 

  여자의 왼손 약지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여자는 오래된 것인 양 이야기했고, 실제로도 이전부터 지녀온 액세서리로 보였다. 의미를 묻지 않았으나 여자가 그걸 왜 끼게 되었을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왼손 약지에 끼는 반지는 보통은, 미래를 약속한 상대끼리의 반지이니까. 연인, 혹은 약혼자. 의미가 깊었던 누군가와 반지를 나눠 꼈을 게 뻔하다. 청년은 여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짧은 시기, 그녀에게서 들었던 일상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녀에게는 오빠가 하나 있었고, 마음씨 고운 친구와 <오빠의 친우>가 있었으며

  그 중, 오빠가 직접 소개해주었다던 친우는 여자가 제법 마음을 준 이성이었던 것 같다. 임무 때문에 여자의 고향에서 머물던 시기의 언젠가. 청년은 거리를 걷다, 오빠의 친우가 벤치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은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하필 그 남자가 동료와 쌍둥이처럼 닮았기에, 아직도 청년의 머릿속에 그의 얼굴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살짝 가무잡잡한 피부. 회색 눈. 그리고 진중해 보이는 인상. 꼭 오래된 서사시 속 공녀를 지키는 기사 같던 남자.

  제3자인 청년이 지켜보기에도 둘은 연인이거나 그에 준하는 관계였다. 그러니 아마 그 남자가 여자에게 반지를 끼워주지 않았을까. 여자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반지를 끼우고, 상기된 얼굴로 웃지 않았을까.

  청년이 두 사람을 목격한 지 오래지 않아 전쟁이 일어났으니 아마 그 남자도 지옥에서 살아남으려 싸웠을 것이다. 아니, 싸웠다. 청년이 여자에게 털어놓지 않은 사실은 하나. 여자의 하나뿐인 형제와 마주친 적이 있다는 것. 탑에서 여자를 탈출시키기 조금 전, 청년은 이곳이 아닌 먼 나라에서 그녀의 오빠를 만났다. 그 불운한 사내는 청년이 누이의 납치에 관여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죽일 듯이 덤벼들었는데, 결국 청년을 죽이지는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 날 겨우 목숨을 건진 청년은 그녀의 오빠가 제 앞에서 흘린 이름들을 기억한다.

  누이를 비롯해, 제 곁을 떠나버린 동료의 이름을 하나둘 읊었던가. 그 속에 분명히, ‘유일무이한 친우의 이름도 있었다. 여자가 마음을 주었던 남자의 이름. 유토. 부상을 입고 바닥을 나뒹굴면서도 청년은 사내를 보며 서글퍼했다. 납치된 여자도, 그녀의 연인이었을 남자도, 동생과 친우를 전부 떠나보내야 했을 사내도. 전부 가여워졌던 탓이다. 그나마 여자는 청년이 본국으로 복귀한 후 탈출시키긴 했지만, 그녀의 오빠와 연인은 그 후로 다시 마주친 적이 없다.

  아마 여자도 연인이 맞이한 결말을 대강은 짐작하고 있으리라. 탈출하기 직전이었던가, 여자가 고향의 저항군 상황에 대해 물었을 때 청년은 답을 회피했다. 답잖은 망설임의 이유를 여자는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상황이 더욱 나빠졌고, 연인의 생존을 바라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으리란 걸. 전장에서 죽음은 발에 채도록 흔하다는 걸 여자가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반지를 빼지 않는 건 그저 희망에 매달리고 싶어서, 혹은 미련을 놓지 못해서이리라.

  그것마저 빼면 정말로, 연인의 종말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는 없다. 삶을 무덤으로 만들지 않는 이상은. 절망을 감당하면서 비극에 익숙해진 여자라면 언젠가는 연인의 일조차 조용히 받아들이게 되리라. 쓰린 불행 중 하나로, 그럼에도 짊어져야 하는 사건으로. 여자를 위해 준비한 반지를 청년이 자주 꺼내보는 것도 그런 자신이 있어서였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 보면 여자는 그와 같은 반지를 끼고,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는 배역을 더욱 몰입해 연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증거가 있는 편이 좋다. 여자가 연인의 일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할, 증거. 그 남자가 전사했다는 증거라거나 그녀의 고향에 생존자가 거의 남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자료. 혹은 그 남자의 유품. 어차피 뒤집을 수 없는 현실이라면 차라리 빨리 알게 되는 게 낫지 않은가. 여자가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도록. 저처럼 본국에서 도망쳐온 반역자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증거를 찾아보자고 마음먹고서, 청년은 공연 도구를 정리했다. 오늘의 공연은 이 도시에 온 후로 가장 반응이 좋아, 환호에 익숙한 그에게도 흡족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집으로 향하는 내내 청년의 얼굴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최근의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이 도시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것은 물론, 공연도 매번 반응이 좋았다. 날이 갈수록 관객이 불어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거기에, 함께 도망쳐온 여자도 그의 소망대로 움직여주고 있다. 제멋대로인 요구를 거부하지 않고, 그의 연기에 어느 정도 어울려주는 것이다. 이렇게만 흘러간다면. 그는 앞으로 쭉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첩자로 타인을 속이고 이국에 전쟁을 불러오며 쌓은 죄에서 벗어나,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일이 지금 이대로 진행되기만 한다면.

  집에 다다른 청년은 들뜬 마음을 안고 초인종을 눌렀다. 평소라면 곧바로 문이 열릴 터였으나 집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여자의 목소리는 물론, 현관으로 향하는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루리, 나예요. 혹시 여자가 잠든 건가 싶어 몇 번 불러보았으나 여전히 반응이 없다. 청년은 불길한 마음을 누르며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청년이 집에 들어서고도 불길한 고요는 이어졌다. 루리. 돌아왔어요.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말해줘요. 여자를 부르며 거실을 확인했지만 사람이 없었다. 여자의 방 문이 닫혀있기에 노크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루리, 괜찮아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부엌으로 향하며 청년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사고가 난 건 아니어야 할 텐데.

  부엌에서도 소득이 없었던 청년은 결국 마지막 구역으로 향해야 했다. 그의 방. 평소에는 여자가 절대 들어가지 않는 곳. 청년은 잔뜩 긴장한 채 문을 열었고.

  잡동사니 속에 주저앉은 여자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눈물이 말라붙은 자국이 선명했는데 입은 섬뜩하리만큼 꾹 닫혀있었다. 여자의 얼굴에서 청년이 읽은 감정은 슬픔이라기보다, 경멸. 그녀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감정에 청년은 식은땀을 흘렸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여자의 무언가가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무엇이? 청년이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때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할 말 없나요?”

  “몸은, 괜찮나요? 내가 없었던 사이 혹시 뭔가 일이 생겼던 거라면 얘기해줘요.”

  떨리는 목소리로 답한 청년에게 여자는 조그마한 물건을 흔들어 보였다. 무엇인지는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 입수한 후로 주머니에 넣어 다시 꺼내본 적 없는 물건. 갈색의 가죽팔찌. 여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청년은 슬그머니 팔찌를 낚아채려 했으나 여자에게 가슴팍을 떠밀리는 바람에 그대로 균형을 잃고 무너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청년에게,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가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왔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싸늘했다.

  “할 말 없어요?”

  “잠깐만요, 루리. 그건.”

  “쿠로사키 슌의 물건을 당신이 왜 가지고 있냐고!”

  찢어질 듯한 비명에 청년은 현실을 깨달았다. 여자가 결국 그가 숨기려던 사실에 접근하고 말았다는 것. 그녀와 좋은 사이를 유지하려던, 최소한 연기라도 하려던 그의 소망도 물거품이 되리란 것.

  여자가 찾아낸 팔찌는, 그녀의 오빠가 끼던 것이었다. 하나뿐인 형제의 물건을 여자가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지만, 혹 혼동했다 해도 오빠의 것이었음을 확인하고 말았으리라. 팔찌를 입수한 직후 청년은 사건 증거물을 챙기듯 비닐백에 팔찌를 넣었다. 비닐백 표면에 쿠로사키 슌, 소유자의 이름을 쓰고 밀봉해 주머니에 보관해온 게 벌써 수개월째. 오빠의 이름을 확인한 때 여자는 그 팔찌가 형제의 유품임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것도 침략군 첩자였던 이의 손에 들어간.

  어떻게 해명해도 나쁘게 읽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일을 두려워해 지금까지 여자에게 형제의 유품을 넘겨주지 않았던 것인데.

  “내 오빠한테 무슨 짓을 했어?”

  여자는 주먹을 꽉 쥔 채 물었다. 무슨 짓을, 했어? 이건 전리품이야? 이걸 가지고 있었으면서 나한테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한 거야? 쏟아지는 질문에 차마 답할 수 없어 청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진실을 이야기하기엔 시점이 너무 늦었다. 적어도 그녀에게 들키기 전 털어놓았어야 했다. 이제 와선 돌이킬 수도 없는 일.

  두 사람이 이 도시로 도망쳐오기 전, 아니, 청년이 탑을 찾아가기도 전. 사건이 일어났다. 상부의 총애를 받는 동료가 반역자를 처리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청년은 문득 <훈련받은 군대>에 맞선 겁 없는 이들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동료를 찾아가 확인하니 반역자의 정체는 이국의 저항군이었다. 어려서부터 전투기계로 교육받은 군인을 쓰러트리겠다고, 국경을 넘어 침투했다는 정예병이라, 청년이 아는 집단이었다.

  다소 순진하고, 정의로 무장했으나 몇몇을 제외하곤 다들 전쟁의 무게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대부분은 성인도 아닌 십대 청소년으로 구성되었다던, 훈련받지 않은 저항군. 청년의 기억으로는 여자의 오빠도 그에 속해있었다. 원군을 얻으러 고향을 잠시 떠났던 그 사내는, 이국의 소년들을 동료로 삼아 적진에 침투했던 것이다. 불행히도 그에겐 기적은커녕 씁쓸한 종말만 찾아왔지만.

  [혹시, 쿠로사키란 남자 없었어?]

  그 불운한 사내가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하면서도, 청년은 동료에게 확인 삼아 물었다.

  [. 루리랑 같은 성씨인 남자? 그거, 저항이 심하더라고.]

  물론 처리하긴 했지. 장난스러운 목소리엔 연민 따위 묻어있지 않았다. 여자의 얼굴이 떠올라 자리를 뜨기로 한 청년의 등에, 동료의 목소리가 박혔다.

  [혹시 그 남자한테 관심 있어? 몸뚱이를 가져갈 순 없고, 소지품 남아있는 거라도 줄까? 남겨두면 어차피 태울 거여서.]

  그 날 동료의 호의에 챙겨온 소지품은 낡아빠진 코트와, 저항군의 표식이었다는 붉은 스카프. 그리고 가죽팔찌였다. 그 중 코트와 스카프는 너무 너덜너덜해 버려야 했기에 남은 것은 팔찌뿐. 청년에겐 크게 가치가 없는 물품이었지만, 저 때문에 불행해진 남자의 것이었으므로 함부로 처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증거물을 남겨두듯 비닐백에 넣고 주머니로 한 번 더 감싸 보관해온 것이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청년은 본국에서 도망칠 계획을 세웠고, 탑에 갇힌 여자를 데리고 본국을 뛰쳐나왔다.

  그 후 여자와 함께 지내며 청년은 때로 오빠의 일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고민했다. 오빠의 죽음을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전할 수 있을까? 부고만 전하기엔 손에 들어와버린 팔찌가 신경 쓰이는데, 하나뿐인 형제의 유품을 어떻게 넘겨줘야 할까? 조금만 실수하면 여자에게 오빠를 죽였다는 의심을 받게 되는 것 아닐까? 그렇게 되면 가족까지 잃게 한 사람으로 더욱 미움받게 되지 않나? 여러 겹의 걱정 중 핵심은 사실 마지막 것이었다. 미움받게 되지 않을까. 라는 것. 어차피 그녀의 삶을 망가뜨린 인간이면서, 더 미움받게 되는 걸 두려워했다. 그래서 대충 덮어두고 살았던 것이다.

  오빠의 죽음도, 한참 전에 입수했던 망자의 유품도.

  다시 생각하니 여자가 연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있도록 하자고 계획한 것도, 얄팍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다. 수개월 전 사망을 확인한 오빠의 경우, 청년은 유품이란 명확한 증거가 있으면서도 지금껏 부고를 전한 적 없지 않은가. 연인의 죽음은 그녀를 체념하게 하려 공개하려 들었고, 오빠의 죽음은 자신을 위해 모른 체 해왔다. 지금 여자가 그를 죽일 듯 노려보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루리. 난 당신 오빠에겐 손대지 않았어요. 하늘에 맹세할 수 있어요. 마주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럼 왜 오빠 물건을 가지고 있는 건데? 당신 가방을 뒤지니 쿠로사키 슌에 대한 자료도 나오던데?”

  “그건, 아카데미아에서 조사한…….”

  “나한테는 오빠 일을 말해줬어야지! 내가 오빠를 포기하지 않았단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나는, 당신이 괴로워할까 봐…….”

  “제대로 이야기해. 매번 나를 위하는 척 유리한 말만 꺼내지 말고. 내 오빠가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해줘.”

  태생이 상냥한 사람이어서일까. 여자는 이미 저를 몇 번이나 속여온 청년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었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게 될 기회를. 그 메마른 자비에 청년은 오히려 혼란스러워졌다.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말하는 게 좋을까? 여자를 달래기 위해 당신의 오빠는 당신을 위해 날 처리하려 한 적이 있었어요라고 할까? 아니면 당신 오빠는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맞섰어요인가?

  “당신 오빠는, 쿠로사키 슌은 전사했어요, 루리. 나는 당신 오빠의 유품을 입수하고도 지금껏 숨겨왔죠.”

  그러나 청년이 꺼낼 말은 정해져 있었다. 담백한 진실. 그동안 여자에게 숨겨왔던 것. 거짓말과 위장을 쌓아온 청년이 제대로 전해야 할 것.

  “……입수한 건, 팔찌뿐?”

  “옷가지는 너무 너덜너덜해져서 버렸어요. 미안해요. 그 팔찌도, 당신에게 바로 줬어야 했던 건데.”

  “그래놓고 잘도 나한테 반지를 줬어.”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여자는 텅 빈 웃음을 걸치더니, 청년을 두고 방을 나섰다. 청년은 여자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으나, 그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도, 그녀에게 정식으로 용서를 구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청년이 주변을 치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여자의 행동만 살피던 사이, 여자는 제 방으로 몸을 숨겼다. 몇 분쯤 지나 다시 방에서 나온 여자는, 처음 이 도시에 온 날처럼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상복을 연상시키던 옷을.

  그제야 일어나서 방을 나온 청년은 여자가 베일을 썼단 걸 알아차렸다. 그녀의 발걸음이 현관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얼굴을 가렸으니 아마 곧 밖으로 나서리라는 것도. 이 도시는 여자에게 아직 낯설고, 어쩌면 위험한 곳이라는 걸 알면서도 청년은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녀가 현관문을 여는 걸 눈에 담을 수밖에.

  처음으로 혼자 집을 나서는 여자의 손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

 

  오빠는 희망이란 단어를 입에 잘 올리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난 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지칠 대로 지친 저항군 동료들이 그래도 희망이 있을 거야란 말로 서로를 달랠 때, 한 번도 말을 보태지 않았다. 오빠는 좀 비관적인 것 같아. 여자가 장난스레 이야기한 날, 오빠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줄 수 없는 걸 약속할 순 없어. 라고. 전장에서 불행은 흔했고 생존은 너무나 비쌌다. 그나마도 운이 나쁘면 쥐지도 못하는 게 미래였다. 오빠는 생존자 무리에서 강한 축에 들었지만 그라고 해서 동지들에게 미래를 줄 순 없었다. 오빠의 소극적인 태도는 체념에서 비롯했다는 걸 여자는 안다.

  여자가 마음을 준 이성이자 오빠의 친우였던 사람은 오빠와는 전혀 달랐는데,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 앞에서도 미래를 말한다는 점이 특히 그러했다. 그는 희망을 믿는 사람이었고, 미래를 그릴 줄 아는 자이기도 했다. 루리. 우리는 꼭 살아남아. 아카데미아는 하트랜드를 다 삼키지 못하고 쫓겨가게 될 거고. 우리는 여기에 다시 예전의 하트랜드를 쌓겠지. 조곤조곤 흘리는 소망은 헛된 희망이라기보다 예언으로 느껴져서, 여자는 그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쩌면 정말로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그 사람과 함께, 그런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다 언젠가, 그 사람이 복귀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침략군에 맞서는 저항군에게 늦은 밤에 들어오는 것은 드문 일도 아니어서, 처음엔 다들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고,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 그동안 그를 찾아 나선 동료들도 매번 소득 없이 돌아왔다. 그가 사라진 지 나흘째 되던 날. 오빠는 여자를 부르더니 손을 펼쳐보라고 이야기했다. 영문도 모르고 손바닥을 내밀자, 오빠는 그 위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올렸다.

  [반지?]

  [이거, 유토가 준비한 거야. 원래 네 손에 끼워주고 싶어 했는데, 나한테 우선 맡겨뒀지. 생각난 김에 주려고.]

  은빛의 반지는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았으나, 여자는 기쁜 마음으로 반지를 받았다. 누군가 자신을 생각해준다는 게, 이런 지옥 같은 곳에서조차 타인을 위해 선물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는 게 감격스러웠다. 한참이나 반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오빠가 엷은 웃음을 걸치며 물었다.

  [네 손에 끼워줄까?]

  고개를 끄덕이자, 오빠는 바로 반지를 끼워주었다. 하필 왼손 약지에. 오빠는 친우와 동생의 관계를 알았을까? 조금은 눈치챈 듯했으나 <왼손 약지의 반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진 제대로 알았던 것 같진 않다. 아마 세상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자주 반지를 끼기에 동생의 반지도 익숙한 자리에 끼워준 것뿐이리라. 그럼에도 여자는 굳이 반지의 자리를 옮기려 하진 않았다. 반지를 준 이가 그녀와 제법 깊은 관계를 유지해온 사람임을 생각하면, 딱히 틀린 자리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어. 여자는 그 날, 반지에 살짝 입을 맞추며 그 사람을 생각했다.

  소망이 통한 것일까. 다행히 그 다음날에 오빠의 친우, 그녀가 마음을 준 사람도 돌아왔다. 지친 얼굴이긴 했지만 몸에는 큰 부상이 없었다. 여자는 소중한 사람이 돌아온 것이 기뻐, 그에게 반지를 보여주는 것도 잊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여자가 납치되는 바람에, 그 앞에서 반지 이야기를 꺼낼 기회는 사실상 없어졌지만.

  그래도 여자는 반지를 쭉 지니고 있었다. 전장에서는 물론, 침략군에게 납치된 후에도, 침략국의 탑에 감금되고도, 적의 첩자였던 청년과 함께 도망치면서도. 그리고 이 도시에 와서도 언제나 반지를 끼고 있다. 소중한 사람에게 받은 선물을, 언제나 기억하기 위해서.

  청년은 여자가 낀 반지를 약혼반지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애초 그런 의미로 선물받은 반지가 아니었다. 거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반지를 준비한 것도 그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반지를 받아들던 때 여자가 갑작스러운 선물이 어디서 왔을지 조금만 더 의심했더라면, 무언가 이상하단 걸 알아차렸으리라.

  그 사람은 대체 이 지옥에서 어떻게 액세서리를 구해온 거지? 만일 전쟁 전부터 준비했던 반지라 해도, 오빠는 왜 하필 그가 사라진 시점에 반지를 내밀었을까?

  가장 그럴듯한 추측은 이렇다. 그 사람이 난민캠프로 돌아오지 못한 며칠간, 오빠는 동생이 불안과 절망에 빠질 것을 걱정했다. 하루하루 동료를 잃는 지옥에서 그가 무사히 돌아오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 마침 오빠는 국경을 자주 넘던 사람이었고, 전장에서 멀어지면 액세서리 하나쯤은 구할 수 있으니 국외에 나가 반지를 준비한 것이다. ‘그 애가 준 선물이라며 동생에게 반지를 내밀기 위해. 그것으로 동생을 안심시키고, 그 사람이 돌아올 거란 희망을 안고 있을 수 있도록.

  오빠는 희망의 무게를 버거워했지만 주변 사람의 희망을 비웃지 않던 사람이었다. 전장에서 내일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희망이란 걸 이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마 동생이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사소한 거짓말쯤 충분히 할 수 있었으리라. 마땅한 치료약이 없는 환자에게 신약이라며 위약을 내미는 것과 비슷한, 악의 없는 거짓말.

  반지를 준비한 게 오빠였으리라 추측하게 된 결정적인 근거는, 오빠가 바깥에서 물건을 구해오는 방식이었다. 전쟁 전부터 지니고 있던 귀중품을 다른 물건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오빠는 필요한 물품을 구해오곤 했다. 여자의 기억이 맞다면, 오빠가 반지를 건넨 시점부터 그가 내내 지니고 다녔던 물건이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빠에게 남은 물건 중 그나마 값어치가 있었던 시계. 시계가 왜 갑자기 보이지 않냐고 물으니 어디 흘리고 온 후론 찾지 못했단 답만 돌아왔다.

  폐허에 그런 번쩍이는 게 떨어졌다면 시간을 들여 찾지 않아도 눈에 띄었으리라. 오빠는 시계를 반지로 바꿔온 것이다. 희망의 값으로 생각하고서.

  덕분에 여자는 그 이후로도 희망을 안고 살아왔지만, 오빠는 그러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그의 삶이 끝나고 말았으니. 청년의 방에선 오빠의 유품 외에도 몇몇 <저항군>의 소지품이 나왔는데, 그만큼 저항군의 피해가 컸다면 아마 그 사람도 버티지 못했으리라. 여자가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었던 이들은 전부 그녀를 떠났다.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추억과,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남긴 물품뿐. 모두 낡은 것들이었고, 그중 그녀의 손가락에 자리한 반지는 특히나 가치가 사라진 것이었다. 그런 것을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여자는 안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서, 여자는 그동안 청년이 설명했던 마을의 지도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중앙공원, 바닷가, 창고. 큰길의 베이커리와 한 블록 뒤의 꽃집. 그리고 꽃집 근처에 위치한, 오늘의 목적지. 다행히 여자가 갈 곳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거리로 발을 떼자마자 사람들과 뒤엉켜야 했지만, 갈 길이 바쁜 이들은 낯선 사람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베일을 쓴 덕에 스쳐지나가는 사람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오랜만에 외출한 여자를 안심시켰다.

  오늘의 용무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기에, 여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바깥을 다니던 것처럼. 분수대를 지나, 중앙공원으로. 공원을 산책하다, 큰길가로. 큰길가에서 화목한 가족을 바라보다가 청년이 빵을 샀다던 베이커리로. 그리고 청년이 꽃다발을 산 꽃집으로. 꽃집에서 스무 걸음쯤 걸어 도착한 곳은 전당포였다. 물건을 맡기고 돈을 받아오는 곳. 혹은 더는 의미가 없는 물건을 처리할 수 있는 곳.

  여자는 전당포의 문을 열고 들어가, 유리 진열장 위에 반지를 올려놓았다.

 

*

 

  청년이 검은 드레스의 여인에 대해 묻고 다닌 것은 여자가 처음으로 혼자 외출하고 돌아온 바로 그 다음날의 일이었다. 여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와 청년과 저녁 식사를 함께했지만, 청년은 그녀가 밖에서 무엇을 하고 돌아왔는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숨을 돌리고 온 것뿐일까?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잠깐 그를 두고 뛰쳐나갔을 뿐일까? 그러면 왜 해가 질 무렵에야 돌아왔을까. 제대로 듣고 싶은데, 여자는 외출에 대해선 한마디도 흘리지 않았다. 청년이 캐묻는다 한들 제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을 게 뻔했다.

  때문에 청년은 그 날일어난 일을 스스로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날이 밝자마자 공연용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간 청년은 평소와는 다르게 가방을 풀지 않았다. 애초에 오늘 챙긴 짐은, 여자의 눈을 속이기 위한 위장에 불과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공연을 나가는 체 하고서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기 위한. 그녀의 행적을 확인한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위장.

청년이 첫 번째로 들른 곳은 당연히 중앙공원이었다. 도시를 돌아다닌다면서 그곳을 그냥 넘기기란 어렵다. 사람들이 많은 곳이니만큼 목격자를 찾기도 쉽다. 청년은 공원의 관리인에게 전날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들렀는지 물었다.

  “. 그런 여자가 있긴 했지. 특이한 옷차림이라, 기억해. 산책하러 온 것 같더군.”

  “어디로 가는지 보셨습니까?”

  “저기 큰길가였던가.”

  관리인이 가리키는 대로 큰길가로 향하고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청년은 한참 주변을 헤매다 꽃이라도 사서 돌아갈 생각으로 꽃집으로 향했다. 마음씨 좋은 꽃집 주인은 청년이 가게에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곤란하단 얼굴로 말했다.

  “저번에 손님이 예쁘다며 사갔던 꽃은 오늘 거의 안 남았는데 어떡하죠.”

  “어제는 장사가 잘되었던 모양이죠?”

  “어떤 아가씨가 와서 많이 샀답니다. 귀부인처럼 차려입어서 기억에 남아요. 드레스를 입었었지, 그 아가씨.”

  “혹시 검은 드레스를 입고 검은 베일을 쓰고 있지 않던가요?”

  “맞아요! 혹시 아는 분인가요?”

  “, 아는 사람이긴 한데……꽃을 그렇게나 산 이유를 아세요?”

  그러자 꽃집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실은 저도 그게 궁금했는데, 물어보니 말을 안 하더라고요. , 꽃다발도 예쁘게 만들기 힘들 정도로 꽃을 많이 사곤 말이에요. 아무래도 희한한 일이라, 나중에 전당포 아저씨 앞에서 그 아가씨 이야기를 했었죠. 손님도 이 근처에 전당포가 있는 거 아시죠? 이웃 가게다 보니 거기 주인이랑 제가 친하거든요.

  “……그런데 전당포에서, 그 아가씨를 알 것 같단 거예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가 자기 가게에도 왔었다면서! 전당포를 나갈 때 우리 가게 쪽으로 걸어가는 걸 봤다네요. 거기서 바꿔온 돈으로, 꽃을 엄청나게 산 모양이에요.”

  수다스러운 주인 덕에 제법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청년은 처음 생각한 대로 장미꽃 한 다발을 사고서, 가게를 나왔다. 다음 목적지야 정해져 있다. 꽃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도착하는 전당포. 여자가 향할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던 장소. 스무 걸음이 조금 못 되게 걸어, 청년은 목적지에 닿았다. 전당포 문을 열고 들어간 청년은 인사를 건네기 바쁘게 용건을 꺼냈다. 어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손님이 찾아왔었지요? 조급하게 꺼낸 물음에 주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맡겼던 물건을 찾으려 합니다. 어제 집에 돌아오자마자 힘들어하더군요. 소중한 물건을 바꿔오긴 싫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면서.”

  아, 저는 그 사람의 약혼자예요. 동거인이기도 하죠. 그동안 연기를 해온 탓인지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꾸며낸 말에, 주인은 여자가 맡겼다는 물건을 꺼내 유리 진열장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맞나요?”

  생각지도 못한 물건이었다. 청년이 지나치게 의식해왔던 물건. 여자가 언제나 지니고 다녔던 것. 청년과 함께 도망치기도 전부터 착용해왔을 반지. 청년이 사온 반지를 꺼내보지도 않고서 고집스레 왼손 약지에 끼던 반지가 그곳에 있었다.

  “아꼈던 물건 같긴 하던데, 아시겠지만 이런 건 값을 많이 쳐줄 수가 없지요. 그 손님한테도 상황을 설명했더니 괜찮아요. 꽃을 살 정도의 돈이면 돼요.’라더군요.”

  “……집에는 꽃을 가져오지 않았는데요.”

  “꽃을 왜 사야 하냐고 물으니, 죽은 사람한테 꽃을 주지 못했다고 말합디다. ‘관에 꽃을 넣어주고 싶었는데 그 사람이 어디 묻혔는지도 모르거든요.’라면서. 젊은 나이에 서글픈 이야기를 하기에 값을 좀 더 쳐줬어요.”

  죽음으로 여자의 삶에서 잘려나간 사람은 많았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죄 없는 이들이 수없이 쓸려나갔을 테니. 그러나 최근에 죽음을 확인하게 된 사람이라면, 짚이는 건 하나뿐이다.

  먼 곳에서 이미 한참 전에 죽어버린 사람. 적군의 손에 죽어 시신이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를 사람.

  오빠의 장례를 위해서, 그동안 소중히 보관해온 반지마저 포기한 것인가. 어쩌면 그녀에게 남은, 연인과의 유일한 연결고리일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오빠의 죽음을 확인했기에 연인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란 걸 알고 비로소 희망을 버리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전쟁이 끝나고 연인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보답받지 못할 희망을. 청년을 만난 때부터 비극으로 칠해진 그녀의 삶은, 결국 원래의 평온을 되찾을 수 없게 되었다.

  가장 사랑하던 두 사람마저 잃게 되면서.

  미지근한 죄책감을 안고서, 청년은 전당포를 나왔다.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그는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죽은 사람을 위해 꽃을 바칠 곳이라면 한 군데밖에 없지 않은가. 청년도 이 도시에 온 이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지만, 위치만은 알고 있다 제법 열심히 걸어서 도착한 장소는, ‘중심지의 외곽에 자리한 곳이었다. 사람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 곳. 그럼에도 꾸준히 사람들을 맞는 장소. 공동묘지.

  망자가 잠든 곳은 고요했다. 다만 쓸쓸하지는 않았다. 온 무덤 위에 한 송이씩 꽃이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묘비에 이름이 새겨진 무덤은 물론, 이름 없는 무덤에까지 누군가가 바친 꽃이 있었다.

  그 사람이 어디 묻혔는지도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모두에게 꽃을 바칠 수밖에. 여자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청년은 느지막한 시간에야 집에 돌아왔다. 장미꽃 다발을 화병에 꽂고서, 청년은 동거인에게 말을 건넸다. 꽃집에 들렀어요. 예전에 사왔던 꽃을 살까 했는데 어제 누가 많이 사서 거의 없다더라고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일 뿐, 꽃에 대해선 입을 떼지 않았다.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청년이 묘지에 다녀온 일을, 거기서 여자가 바치고 온 꽃을 보았단 걸 그녀 앞에서 꺼내지 않듯이.

  생각해보면, 두 사람에게 어울리는 건 딱 그 정도의 관계였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하되, 도망자라는 같은 처지로서 서로를 돕되 필요 이상으로 서로를 들여다보지 않는 사이. 애초 서로를 이해하는 두 사람이나 연인처럼 깊게 얽힌 두 남녀같은 것은 청년의 환상에 불과했다. 아마 여자와 평생 함께하더라도 청년에겐 허락되지 않을, 분에 넘치는 타이틀. 뻔한 사실을 재확인하고 나니 청년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동안 여자와의 사이에서 몇 번 발생했던 삐걱거림이 전부 제 욕심 때문이었단 걸 확실하게 인정하게 되어서였다.

  모든 배우가 원하는 배역을 맡을 순 없다. 연기력이 갖춰져 있다고 해도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 배역이 있기 마련이다. 여자의 삶에 이미 비극의 원흉으로 출연한 것이 청년이었다면, 그녀의 행복을 상징하는 인물을 연기할 수는 없다. 혹 여자가 그녀의 옆자리, 그가 탐하는 파트너 자리를 비워두고 있다 해도. 여자의 왼손 약지에는 더 이상 반지가 남아있지 않지만 청년은 그 손에 감히 자신이 준비한 반지를 끼워주지 않았다.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 순간에야말로 여자가 저를 감당하길 포기하리란 걸, 알고 있었기에.

  청년이 무리한 배역을 포기하면서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언젠가부터 여자도 때로 집을 비웠고, 그가 알지 못하는 곳을 혼자 다녀왔다. 여자가 청년이 집을 나설 때마다 행선지를 묻지 않는 것처럼 청년도 그녀에게 바깥에서의 일을 묻는 일은 없었다. 한편으로 둘은 함께 식사를 했고, 같은 공간을 썼으며, 가끔은 공통 관심사로 한참이나 이야기하기도 했다. 서로에게 어떤 기대도 요구도 얹지 않을 뿐, 둘은 동거인으로선 지극히 평범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렇기에 청년은 몇 가지, 그가 멋대로 벌인 일에 대해선 입을 다물기로 했다. 여자가 오빠의 장례비를 내느라 담보로 삼은 반지를, 청년이 돈을 내고 다시 가져왔다는 것이나, 그 반지를 조용히 보관하고 있다는 것 같은. 두 사람이 굳이 덮어둔 옛 일을 헤집을 수 있는 정보를. 그런 건 청년 혼자서 삼킬 일이었으니.

  그러나 이따금 여자가 조용히 자리를 비워 집에 혼자 남는 날이면 청년은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보곤 했다. 본래 그가 준비한 반지를 보관하던 상자에는 이제, 여자의 옛 반지가 들어가 있다. 짝을 잃고 가치도 사라진 반지를 잠깐 살피다 다시 넣고 나면 청년의 시선은 한동안 제 왼손 약지에 머무른다. 정확히는 약지에 낀 반지를 눈에 담는 것이다. 여자가 끼워준 날부터 쭉 착용하고 있는 반지, 여자의 옛 반지처럼 이제는 의미가 없는 물건을.

  왜 반지를 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원래 제 짝이었던 반지, 여자에게 끼워주고 싶었던 반지는 이미 처분했는데. 왼손 약지의 반지를 소품으로 써야 했던 연기도 포기했는데. 지나간 것을 한참이고 버리지 못했던 여자를 저도 모르게 닮아간 것인지. 아니면 얼마간 매달렸던 배역에 너무 젖어든 것인지. 알 길은 없다. 여자가 과거를 훌훌 털어버린 지금, 뒤늦게 예전의 그녀를 모방하고 있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아직 반지를 하고 있네요.

  어느 날 여자가 지나가는 듯이 말했을 때 청년은 반지를 빼는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어쩌면 이게 당신의 복수였을 수도 있겠군요. 내가 당신이 사랑했던 것을 유물로 만들었듯이, 당신도 내가 의미 없는 과거에 매달리게 만든 거예요. 생각하면서. 우리의 연기는 끝난 줄 알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인 여자에게 청년은 과거, 그의 반지를 거절하던 때의 여자처럼 웃는 낯으로 답했다.

  그냥, 습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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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

[레이] ARK-RAY

2021. 6. 30. 06:08 from 01

 

  아버지, 세상이 파멸하는 꿈을 꾸었어요.

  왜였을까요? 분명 꿈속의 세상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얼굴엔 두려움 한 점도 없었는데. 고점을 찍은 롤러코스터가 추락하듯, 세상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파멸했답니다.

  거기서 전 공기가 너무 차면 터져버린다는 풍선을 떠올렸어요. 그때 모두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거든요. 즐거워서 미칠 것 같을 정도로. 어쩌면 너무즐거워서 뭔가 문제가 생긴 것처럼요.

  사람은 너무 행복할 때 무너지기도 하는 걸까요?

 

*

 

  언젠가부터 세상은 탄내에 휩싸였다. 서로를 겨누는 병기의 화약 냄새도, 병기 때문에 생겨난 폐허의 냄새도 탄내였다. 탄내가 체취처럼 스며들고부터 세상은 화려한 색채도 잃었다. 하늘도, 도시도. 인간의 눈에 담기는 거의 모든 것이 잿빛에 잠겼다. 여자는 세계에 잿빛 그림자가 드리워진 게 오늘로 며칠째인지 헤아리려다 그만두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처참하게 다가올 뿐이다. 불길한 징조 하나 없이 갑작스레 시작된 파멸과, 그 날부터 무시무시한 속도로 무너져내린 모든 것들이.

  여자는 파멸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수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나날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일 년, 어쩌면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무너져내리며 시간 감각도 무뎌진 것일까. 여자는 <파멸의 날> 이후로 펼쳐진 날을 개월이나 주 단위로 세지 못한다. 일 단위로 세다, 세상의 붕괴가 오래지 않은 비극이었음을 확인하면 고개를 내저어 생각을 흩어버리는 그녀였다. 어쩌면 그렇게 날을 세는 것도 못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누구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으나 생존자모두 최악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 완전한 파멸. 세계의 종말.

  희망보다 절망을 떠올리는 게 쉬운 건, 살아남은 이들이 전부 비관적인 사람이어서는 아니다. 되레 현실을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무너진 건 인간이 다투어서가 아니라, 악마가 나타났기 때문. 인간의 공포가 되고 싶어 했던 남자가 몬스터와 결합해 괴물이 된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인간 이상의 힘을 얻게 된 날부터 괴물은 세상을 파괴하고 다녔다. 블록으로 쌓은 성을 망가뜨리듯, 너무도 쉽게.

  그동안 쌓아온 문명도, 재난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온 기술도 악마를 자처한 괴물 앞에선 무의미했다. 괴물이 한 번 움직이면 무엇이든 장난감처럼 쉽게 무너져내렸다. 괴물을 몰아내기 위해 수많은 병기가 동원되었으나 괴물에게 타격을 입히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나선 전사들이 두려움에 빠져 병기를 버리고 도망치거나 그 자리에 쓰러지는 일이 흔했다. 인간의 공포가 되기로 한 괴물은 두려움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고서, 그것을 양분 삼아 몸집을 불렸다. 두려움으로 무장한 괴물이 공포의 대상이 되고, 그만큼 강력해져 다시 세상을 짓밟고. 그러면 다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악순환이었다.

  갑자기 찾아든 재난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힘으론 상대할 수 없는 위기란 점에서 괴물의 등장은 신화 속 멸망을 연상시켰다. 여자는 낡은 경전에서 그러한 재난을 몇 번이고 보았다. 저항할 수 없는 강대한 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파괴의 흐름.’ 세계멸망이란 정해진 결말보다 더욱 씁쓸한 부분은, 경전에 기록된 멸망이 인류의 불행이 아니라 신의 심판이라는 것. 어리석은 인간이 서로를 해하고 세계를 망가뜨릴 때. 신은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재앙으로 모두를 벌했다.

  그렇다면 세상을 파괴하는 괴물은 심판의 대행자인가? 그 악마에게 짓밟혀 먼지가 되는 것도 운명인가? 생존자 사이에 퍼지는 의문이었다. 누군가 그 이야기를 입에 올리면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고 일부는 그럴 리 없다며 화를 냈다. 여자는 굳이 의견을 내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도 하거니와, 주변 사람들처럼 명확하게 입장을 정하기 어려워서이기도 했다. 다만 한 번,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냐 물었을 때, 그동안 머릿속에만 넣어두던 생각을 털어놓은 적은 있다.

  [자크가 신의 집행자라 여기는 무리도 세상엔 있는 모양이야.]

  세상에 스민 탄내가 지금보다 덜했던 날. 아버지는 악마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아버지의 시선은 연구소의 창 너머, 바깥에 얹혀있었다. 부녀가 지내는 연구소는 그나마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했으나 창 너머로 보이는 처참한 현실까지 막아주진 않았다. 바깥 풍경을 가리고 지내는 것도 가능했으련만, ‘은신처에 머문다는 죄책감 때문일까. 두 사람은 끔찍한 풍경을 그대로 보는 걸 택했다. 아버지는 시시각각 무너지는 세상을 눈에 새기며, 세상을 절망에 빠트린 원흉을 화제로 올린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종말을 기다리기도 한다는구나. 덧붙이는 목소리는 침중했다.

  [저항을 포기한 거로군요. 버티는 것도 지쳐서일까요.]

  [……정말로 신이 인간을 벌하려 악마를 보낸 거라면 가장 먼저 심판당해야 할 건 나일 텐데. 사람들은 내가 희망이라도 될 줄 알고 있지.]

  자조가 비치는 말에 여자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 곁에 섰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절망스러운 풍경을 눈에 담는지, 어떤 심정으로 딸에게 말을 건네는지 전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본래부터 뛰어난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악마가 나타난 후로 더욱 역할이 커졌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비롯한 기술자가 악마를 몰아낼, 아니면 최소한 악마를 격리시킬 길을 찾아내길 바랐으므로. 부녀가 줄곧 연구소에 붙어있으면서도 몸을 피하고 있다고 비난받지 않는 것도, 세상이 아버지에게 기대를 걸고 있어서였다. ‘아카바 레오라면 답을 찾아낼 것이다.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어온 천재이니, 인간의 삶을 말려버리는 괴물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서 그러한 기대를 수없이 읽었다.

  물론 아버지는 이곳에서 밤낮으로 연구에 매달리고 있다. 악마를 단번에 날릴 병기를 만들지 못했을 뿐, 파멸을 늦춰줄 방어막을 꾸준히 세상에 내놓는 아버지였다. 그렇게 인류의 삶을 연장하고 있는데도 아버지는 자신의 성과에 도통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것만으론 부족해. 자크를 완전히 해체시켜야 하는데. 새벽까지 일을 놓지 못한 아버지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걸 여자는 몇 번이고 들었다. 그럴 때 희미한 불빛에 비친 아비는, 핏기 없는 얼굴과 충혈된 눈 때문에 언뜻 광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악마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는 결벽적이었다. 단순히 악마에게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악마라는 죄악을 세상에서 아예 지워내겠다고 결심한 듯했다. 그런 결벽적 태도는 위기감 때문만은 아니다. 기대의 대상으로서 모두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단 압박감 때문만도 아니다. 악마의 등장에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이 가장 컸다. 한때 인간이었던 괴물을 악마로 만든 건 그와 결합한 몬스터였지만, 고작 배틀용 카드에 깃든 몬스터에 생명을 불어넣은 건 아버지의 기술이었다. 아버지는 악마가 싹틀 토양을 만들었단 죄책감에 빠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구나, 레이. 네가 보기에도, 자크가 신벌 같아?]

  그러니 아버지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배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본의 아니게 악마를 무장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세상을 짓밟고 다니는 자크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해? 다시 귀를 때린 물음에 그 날의 여자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답했다.

  [반반이에요.]

  [반반이라. 자크를 없애리란 희망이 조금은 있단 뜻일까? 그러면서 지금 우리가 겪는 일들이 인간의 잘못 때문이란 생각도 있는 거고?]

  [글쎄요, 전 자크를 심판자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 자는 그렇게 자처할지도 모르겠지만.]

  [듀얼에 리얼 솔리드비전을 접목하고, 그 자의 위험한 듀얼을 묵인하면서 이런 위기가 생기지 않았던가?]

  [화약 제조 기술을 익혔다고 모두가 병기를 만들진 않잖아요. 리얼 솔리드비전을 그런 용도로 쓴 건 자크뿐이었어요.]

  물론 그동안 사람들이 그 자를 부추겨온 건 부정하지 않지만요. 그러니까 반반인 거예요. 그렇게 말할 때 여자는 아버지와 같은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잿빛의 세상. 아직은 부녀를 삼키지 못했으나 언젠가는 그들도 먹어치우고 말, 파멸의 그림자에. 아버지에게 끝없이 죄책감을 안기는 악마의 흔적은 여자에게도 묵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아버지의 것과 닮은 감정. 책임감.

  [내가 한 일을 알고도 그렇게 말해줄 수 있는 건 너뿐일 거다, 레이.]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손이 여자의 어깨를 감쌌다. 그것이 신뢰의 증거이자 의존이 깔린 행동이었음을, 그때도 지금도 여자는 안다. 아버지는 언제나 여자를 믿고 있다. 하나뿐인 가족으로, 어떤 순간에든 저에게 호의적인 사람으로. 때로는 유일한 동지.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후 아버지의 믿음은 깊어졌다. 그동안 기술자로서 세상에 기여해왔단 자부심으로 살아가던 그가 악마의 무대를 만들어주었단 자책에 휩싸인 탓이리라. 그렇지만 너는 나를 이해하겠지. 그 날, 아버지의 마지막 말에 섞인 기대는 아마 그러한 것이었으리라. 자기혐오가 깊은 만큼 커지는, ‘상냥한 사람에의 신뢰. 혹은 의존성.

  아버지의 굳건한 믿음이야말로 여자가 아버지 앞에 솔직해지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여자는 아버지가 저에게 매달리기 시작한 때부터 과거의 일에 대해 침묵하게 되었다. 파멸을 몰고 오는 악마가 한 인간이었을 때, 여자가 그를 보고 느꼈던 것. 그에게 걸었던 기대. 어쩌면 그를 염두에 두고 벌였을지도 모를 일들. 의도치 않게 그의 옥좌를 만들어주었을지도 모를, 여자의 행동. 꺼내는 순간 아버지를 침몰시킬지도 모를 것을 여자는 몇 개나 품고 있었다. 최소한 아버지 앞에서만은 땅에 들 때까지 고백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녀였지만, 이번에 마음이 바뀌었다.

  육성으로 꺼낼 수 없다면, 기록으로라도 남겨놓자고. 누구도 발견하지 못할 기록이 되어도 좋으니 그동안 혼자 삼켜온 걸 세상에 꺼내자고.

  태도가 바뀐 이유는 간단했다. 파멸이 너무도 가까워져서였고, 부녀가 지내는 연구소조차 이제 안전한 장소란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내일이라도 당장 무너질 것 같은 세상에 살면서 평생의 비밀을 꼭꼭 삼킬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삶이 끝나기 전에 진실을 풀어놓는 게 낫지 않을까. 여자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기억하는 악마, 아니, 악마가 되기로 한 인간에 대해 삼키고 싶지 않았다.

  결심이 선 여자는 연구소에 뒹구는 수첩, 과거 아버지의 연구일지였던 수첩을 꺼내 펼쳤다. 수식이 기록된 페이지를 촤르륵 넘기고 나니 쓸 수 있는 공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쉬워할 이유는 없다. 종이가 귀해지기도 했거니와, 남은 페이지를 다 쓸 때까지 그녀 자신이 살아남으리란 보장도 없으니.

  여자는 펜을 들고, 떨리는 손으로 첫 문장을 적었다.

  「이 기록은 끝까지 남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

 

  「이 기록은 끝까지 남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하고픈 말을 다 쓰기도 전에 어떤 이유로 중단될지도 모르죠. 그런데도 쓰기로 한 건 남겨두기 위해서예요. 세계가 멸망하기 전, 우리가 가장 후회하는 것과 가장 괴로워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세계파멸에 본의 아니게 기여한 부분은 어느 것이었는지. 세계파멸이 당신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에겐 너무 쓰린 기록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아버지는 지옥에서도 진실을 찾아야 하는 게 인간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아버지의 삶도 그 말을 지켜온 세월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니 이 기록을 넘겨보고 괴로워하는 일이 있더라도, 결국은 여기 담긴 이야기를 전부 받아들일 거라고도요. 누가 가장 먼저 발견할지도 모를 이 이야기를, 아버지가 읽을 거라 설정하고 쓰는 것은 그런 믿음 때문이랍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역시 리얼 솔리드비전 이야기겠죠? 자크의 무대를 만들어주었다고 수없이 자책하셨던 바로 그 <위대한 발명> 말이에요.

  아버지의 연구 성과에 모두가 박수를 치던 날을 기억해요. 리얼 솔리드비전은 아버지와 우리 주변뿐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삶을 바꾸었죠. 그야말로 혁명이었어요. 내가 승리에 너무 취해있는 건 아닐까. 언젠가 아버지는 조금 들든 얼굴로, 마찬가지로 들뜬 목소리를 최대한 차분하게 다듬어 말씀하셨어요. 그때 제가 그럴만한 승리였어요.’라 답했던 걸 기억하시나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어요. 얼마건 도취되어도 좋을 승리였고, 위대한 성과였답니다. 그러니,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싶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에요.

  리얼 솔리드비전을 어디에 새롭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딸인 저에게 물으셨지요. 그때 듀얼이 좋겠다고 답했던 건 제가 듀얼리스트여서만은 아니었어요.

  어려서부터 언제나 몬스터의 소리가 들렸어요. 종잇장에 불과한 카드에서 온갖 소리가 들렸죠. 듀얼 몬스터즈에 영혼이 있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모두가 살아 움직이는몬스터를 만났으면 했어요. 그럼 누구도 몬스터를 괴롭히지 않고, 동물을 키우듯 아낄 것 같다고 생각하고서요. 사람은 살아 움직이는 것에 언제나 의미를 부여하잖아요? 심지어 생명을 흉내 내는 안드로이드에게도 감정을 쏟고, 아껴줄 정도니까요.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악마, 자크도 시작은 그러했을지도 몰라요.

  왜 갑자기 그 남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느냐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전 세상에 아무 문제도 없었던 시절, 그 남자를 만난 적이 있거든요. 정확하게는 우연히 마주쳤다고 해야 하겠죠. 듀얼 대회에서 탈락한 그 자가 스타디움 밖에서 덱을 조정하는 모습을 어쩌다 보게 되었답니다.

  그 남자는 저와 동류였어요. 보자마자 알 수 있었어요. 소환된 몬스터에게 바짝 붙어선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거든요. 우리는 말의 내용을 듣는 것으로 독백인지 대화인지 알 수 있잖아요? 그 사람은 분명히 대화하고 있었어요. 곁에 둔 몬스터와 말이에요. 이따금 몬스터를 돌아보는 눈길엔 애정이 담뿍 담겨있었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몬스터의 감정도 잘 이해하리라 생각했어요. 도구처럼 쓰지 않고 언제까지나 파트너로 여길 거라고요.

  판단이 틀렸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그 남자에겐 분명 그런 미래의 가능성도 있었을 거예요. 제가 기대했던 가능성을, 가장 희망적인 길을 잘라냈을 뿐이지요. 이럴 때 저는 왜 신화에서 인간이 어리석은 자로 그려지는지 생각할 수밖에 없네요. 분명 좋은 미래가 있었는데, 누구도 다치지 않을 길도 존재했는데.

  그 남자도, 세상 사람들도. 가장 나쁜 길을 선택하고 말았던 거예요.

 

*

 

  스크린에 펼쳐진 세계전도는 8할 가량이 검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검은색 외에는 붉은색이 1, 나머지 1할만이 녹색이었다. 각각의 색이 의미하는 것은 악마에 오염된 정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세상을 무너뜨린 악마가 얼마나 침투했는지 색으로 표시한 것이다. 검은색은 악마에게 완전히 점령된 땅, 붉은색은 점령 위기에 놓인 곳, 녹색은 점령되지 않은 곳을 나타낸다. 뛰어난 기술자로서 악마에 맞설 길을 찾고 있는 사내는 검은색으로 물들다시피 한 지도를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세상 곳곳에 방어막을 펼쳐 파멸의 시간을 늦추고 있지만, 상황은 절망적이기 그지없다.

  이대로라면, 오래지 않아 끝난다. 인류도, 세상도. 사내가 확인한 모든 사실이, 그의 눈에 담긴 모든 것이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죄 없는 이들을 바깥에 남겨두고 몸을 피한단 죄책감을 안고도 연구소에 틀어박혔던 건 이런 결과를 바라서가 아니었는데. 세상에 희망을 안기고 싶었던 사내는 순간순간 무력감을 느낄 뿐이다.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고, 누구도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절망과 함께.

  한때 사내와 함께 세상을 발전시켰던 기술자도 대부분 악마의 공격에 휩쓸려 희생되었다. 남은 이들이라고 의욕적으로 연구에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몇몇은 완전히 체념했고 몇몇은 드러내지 않을 뿐 사내처럼 무력감에 짓눌려 있다. 사람들의 기대를 감당하지 못하겠다며 연구소에서 빠져나와 그대로 악마에게 뛰어든 사람도 있었다 사내는 그렇게 자신을 던진 동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듣지 못했다. 그의 연구실이 영영 주인을 잃게 되었으리란 것만 짐작할 뿐이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욕망을 한 번도 품은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짊어진 것이 묵직할수록, 능력이 뛰어날수록 악마를 겪으며 느끼는 절망감도 깊었으니까. 간간이 쓰러질 정도로 연구에 매달리다가도 사내는 때로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날을 상상했다. 그나마 악마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곳에 가족을 데리고 도망쳐, 평생 숨어 살아간다면. 아니면 연구를 전부 내려놓고 정해진 결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무의미한 저항을 멈추고 운명을 받아들인다면 숨 막히는 절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럼에도 사내가 모든 걸 팽개치고 도망치지 못한 건 첫째로는 가족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죄악감 탓이었다. 그의 곁에 남은 유일한 가족인 딸은 아직 아버지를 믿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아비가 계속 싸워가리라고. 그 믿음을 깨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살아갈 날이 긴 딸의 미래를 멋대로 닫을 수도 없었다. 둘이서 도피한다 한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어쩌면 보잘것없는 은신처에서 딸이 하루하루 말라가는 걸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싸울 수 있을 때까지 싸워 딸을 지켜내는 게 아비로서의 책무이리라.

  거기에 사내는 악마가 날뛸 무대를 만든 죄인이기도 했다. 그가 자랑스레 세상에 내놓은 기술을 가장 악랄하게 사용한 이가 바로, 지금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마 정확히 말하면 한때 인간이었던 악마였다. 평범한 인간이 잔학함에 눈 뜨게 한 것도, 그 자극적인 모습으로 인기를 끌게 만든 것도. 결국 인간을 뛰어넘고 싶어진 그 자가 몬스터와 결합해 악마가 되게 만든 것도 사내가 발표한 기술이었다. 삶을 풍요롭게 만들겠다며 세상에 바친 것이 도리어 모두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 셈이다. 악마의 등장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사내는 지금의 연구를 포기할 수 없다.

  악마의 발길이 닿은 곳은 죄 파멸해, 이제 세상의 대부분이 폐허가 되었다 해도. 인간이 희망을 걸어볼 곳은 아직껏 악마가 닿지 못한 극히 좁은 지역이라 해도. 거기서 사내의 머리를 스치는 의문이 있었다. 몇몇 지역에는 왜 악마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걸까? 어디로든 향해 반드시 파멸시키고 마는 악마가 왜 끝까지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곳이 있는 걸까? 그러한 청정지역의 공통점을 찾아낸다면, 악마를 쫓아낼 길도 생기지 않을까?

  모처럼 희망이 피었다. 걸어 잠갔던 연구실 문을 열고 나와 사내가 향한 곳은, 딸과 함께 연구소에 틀어박힌 후 거실처럼 쓰고 있는 휴게실. 사내가 연구실에 들어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면 홀로 남은 딸이 주로 시간을 보내는 곳이기도 했다. 사내가 그곳에 향하는 일은 많지 않았는데, 그것도 대부분은 쉬기 위해서라기보다 딸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찾는 것이었다. 이번의 목적도 그러해서, 사내는 휴게실로 걷는 내내 딸을 생각했다. 세상이 이렇게 무너지지 않았다면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을 젊은이. 아비와 함께 연구소에 스스로를 가두다시피 한, 그의 소중한 가족.

  그리고 그의 유일한 이해자.

  “, 아버지.”

  사내가 지켜야만 하는 사람은 휴게실에서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내는 딸이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언가를 황급히 숨기는 것을 보았다. 비밀이 많을 나이였던가? 실없는 생각을 빠르게 지워내고, 사내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레이.”

  “. 말씀하세요.”

  “자크가 세상을 어지럽히기 전부터 너는 자크가 위험하게 느껴진다고 이야기했었지. 너만이 자크의 본질을 꿰고 있었던 것 같아. 그때 네 말을 귀담아들었다면 이렇게까지 모두가 불행해지진 않았을 텐데.”

  “아니에요. 저도 확신은 없었어요. 누구도 제대로 막아서지 못했던 것이니 자책하지 마세요.”

  아비를 다독이는 차분한 목소리에서, 아비를 향해 한 번도 원망을 얹은 적 없는 딸의 보랏빛 눈에서 사내는 안정을 얻는다. 세상을 뒤엎는 위기 속에서도 딸은 흔들리지 않았다. 모두의 기대를 안고 있는 사내보다도, 세상의 위기를 걱정한다던 엘리트보다도 더 굳건히 버티고 있다. 부녀의 관계에서 겉으로 상대방을 챙겨주는 건 사내였지만 실제로 둘을 지탱하는 건 어쩌면 딸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기에 사내는 언제까지고 딸을 신뢰할 수 있다. 악마가 날뛰기 전까지만 해도 프로 선수였던 딸에게 기술자 동지들에게보다도 더 많은 연구 정보를 털어놓는 건 아마 그래서이리라. 연구가 막힐 때, 혹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때. 사내는 오늘처럼 딸을 찾았다. 전문지식이 필요한 부분까지 전부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그럴 때마다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아비에게 답을 주려 노력하는 딸이었다. 딸과 이야기하고 나면, 사내는 어떤 식으로든 길을 발견했다.

  상황을 바꿀 길이든, 연구의 답이든.

  “자크의 위험성을 미리 알아챈 너라면 아마 자크의 습성도 이해하겠지. 아직껏 자크가 침입하지 못한 구역을 보고, ‘내버려두고 있는지 한 번 상상해볼 수 있겠니?”

  “그 남자의 심리를 따라가보라는 뜻이군요.”

  “불쾌하다면 하지 않아도 좋아.”

  “아니요.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내셨는진 알겠어요. <안전지대>의 특징을 알아내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대피처를 더 만들려 하시는 거죠?”

  “그 이상을 바란다면?”

  사내는 회색 눈 가득 딸을 새기며 덧붙였다. 이 세상에서 아예 자크를 몰아내려 하는 거라면?

  처참하기 짝이 없는 상황임에도 한 번 희망이 피었다는 이유로 기적을 바라고 싶어진다.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걸핏하면 약한 마음이 드는 사내였지만 아직은 그도 절망에 다 먹히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동지이자 유일한 이해자인 딸은.

  “당연히 협조해야죠. 아버지.”

  이번에도 사내의 희망에 어울려주었다. 사내는 답을 듣자마자 딸을 데리고 연구실로 향했다. , 어떻게 생각하니. 레이. 스크린에 담긴 지도를 보여주며 사내는 물었다. 왜 자크는 이 구역들만 남겨두고 있을까? 정복자 행세를 하는 그 자답지 않은데. 뜻밖에도 딸의 시선은 스크린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안전지대를 대강 눈에 담아둔 딸은, 연구실 한 켠에 놓여있던 종이 지도를 꺼내왔다. 꾹 닫혀있던 딸의 입이 열린 건, 종이 지도 곳곳을 꼼꼼하게 확인한 후였다.

  “……역시.”

  짤막한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2음절의 말이 의미하는 건, 딸이 무언가 찾아낸다는 것. 그것도 처음부터 반쯤 짐작했던 걸 지도를 통해 확인했다는 뜻.

  “역시?”

  “자크는 인간의 욕망을 양분으로 삼지요. 기술이 발전한 곳, 인간이 모여든 곳은 자크에겐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될 거예요. 인간과, 인간이 쌓아올린 것들이 가득한 장소니까요. 세계의 대도시들이 가장 먼저 무너진 것도 그 때문 아니겠어요? 그럼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아직도 인간의 욕망에 오염되지 않은 곳은? 인간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곳은?”

  “더럽혀지지 않은 자연!”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사내는 외쳤다. 사내를 천재 기술자로 칭송받게 만든 그 어떤 발견도 지금 꺼낸 답만큼 그를 들뜨게 하진 않았다.

  악마가 침투하지 못한 지역은 모두 사람이 진입하기도 힘들 정도로 험준해, 자연이 거의 그대로 보존된 곳이었다. ‘정복을 꿈꾸며 찾아들었다 목숨을 잃은 사람도 여럿이라고 했던가. 그 날것의 자연이야말로 인간의 욕망이 스밀 수 없는 곳이며, 악마조차 짓밟을 수 없는 최후의 구역이었다. 왜 생각지 못했을까. 인간의 욕망에 반응해 힘을 키우는 악마가 인간이 닿지 못하는 곳에선 무력해지리라고. 누구도 짚지 못한 답을 찾아낸 딸이, 악마의 목을 죌 길을 알려준 딸이 사내는 꼭 신화 속 천사처럼 느껴졌다. 신의 뜻을 전하며 인간에게 희망을 열어주는 존재처럼.

  “이해했어, 레이. 인간의 욕망으로 더럽혀진 이 세상에 자연을 다시 피워내면.”

  들뜬 목소리로 외치자 딸이 그의 말을 완성해주었다.

  “자크라도 버티지 못하겠지요.”

  “이 폐허에 다시 자연을 쌓을 길이 있을까? 옛 이야기처럼, 황량한 땅에 씨를 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나?”

  “나무가 자라기까지 수십 년을 기다리긴 무리일 거예요. 자연의 힘을 가져올 수만 있다면 일이 쉬워지지 않겠어요?”

  “자연의 힘을……아직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힘을 끌어온다면, 안전지대의 자연을 담아올 방법만 있다면 전부 해결될 텐데. 무너지고 찢긴 세계에 그곳의 자연을 풀어내기만 하면.”

  “방법은 있을 거예요. 자크도 몬스터의 힘을 그대로 끌어와 하루아침에 세상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었잖아요.”

  악마의 이야기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악마가 세상에 비현실적인 재앙을 뿌릴 수 있었던 힘. 그 이전에 평범한 인간이 몬스터와 결합해 괴물이 될 수 있게 한 것. 사내에겐 익숙하다 못해 그 바탕까지 낱낱이 이야기할 수 있는, 한때 세상을 열광시켰던 기술. 답을 막 꺼내려던 때 사내는 딸의 얼굴에 감격이 서린 것을 보았다. 딸 역시 떠올려낸 것이 분명했다. 높은 확률로 사내와 같은 것을.

  부녀의 시선이 엉켰고, 두 사람은 같은 답을 뱉어냈다.

  “리얼 솔리드비전.”

  사내가 세상에 내놓은 가장 놀라운 성과이자, 악마가 싹틀 토양을 만들어준 기술. 카드 속 데이터를 질량을 가진 사물로 실체화시키는 기술. 악마는 배틀용 카드 속 몬스터의 힘으로 세상을 부수지 않던가. 자연을 에너지화하여 카드에 담고, 사내의 기술로 자연의 힘을 온 세상에 펼쳐내면. 악마를 몰아내는 건 물론, 종말을 앞둔 세상에 생명을 싹틔우는 것도 가능하리라.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사내는 비로소, 세상에 재난을 가져온 죄인이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웅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내가 낳은 죄로 모두를 지켜내자. 그 순간 사내의 머리를 지배하는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

 

  「자크가 인기를 얻기 시작한 때, 꿈을 꿨어요. 자크의 무대를 관람하는 꿈을요.

  객석에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모두의 얼굴엔 부풀어 올라 터질 것 같은 기대가 비쳤답니다. 불길한 징조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보통의 듀얼 경기였죠. 그런데 갑자기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 몇 번 들리는가 싶더니 세상이 파멸하더군요. 순식간에 땅이 검은색으로 말라붙고 건물이 종잇장처럼 뜯겨나가는데 사람들도 하나둘 검은색 재를 덮어쓰고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버리는 거예요. 너무 비현실적인 종말이라 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도 없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이 이렇게 무너질 줄 누구도 몰랐는데, 왜 하필 불길한 꿈을 꾼 걸까요? 왜 꿈속의 세상은 꼭 지금을 예언하듯 허망하게 무너져내렸을까요?

  그때는 비명의 정체를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아요. 꼭 예언 같은 꿈을 수없이 되새긴 끝에 파멸의 시작을 알린 비명을 누가 질렀는지 눈치챌 수 있었답니다. 그건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어요. 몬스터의 울음이었죠. 리얼 솔리드비전을 통해 실체가 생긴 몬스터 말이에요.

  울음이라는 표현을 보고 울부짖음을 생각하셨겠죠.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건 단순한 울부짖음이 아니었어요. 습관적으로 흘리는 소리가 아니라,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울음이었거든요. 꿈속의 몬스터는 괴로워하고 있었어요. 동시에 분노하고 있었죠. 무엇에 괴로워하고 분노했는지 그 날의 꿈에선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잖아요?

  인간의 욕망, 타자를 해하고, 끌어내리고, 짓밟고 싶은 사악한 욕망.

  자크는 분명 몬스터의 울음을 들었을 거예요. 제가 꿈속에서 들었던 것 같은, 그런 울음을요. 이전에도 그 남자의 듀얼을 보면서 이야기했었지요. 몬스터가 분노하고 있다고요. 제가 과거에 보았던 자크라면, 몬스터와 대화했던 그 남자라면 자기 파트너의 울음을 못 들었을 리 없어요. 아마 듣고도 무시했겠죠. 아니면 멋대로 해석했을지도 몰라요. 자기가 몬스터의 분노를 끌어안아, 인간을 대신 짓밟아주겠다고요.

  그토록 아꼈던 드래곤 4체와 스스로 결합했던 걸 생각하면 후자였을 가능성도 충분할 것 같군요.

  확실한 건 그 남자가 몬스터의 분노를 잠재우지 않았다는 겁니다. 감싸기는커녕 그 힘으로 세상을 계속 짓밟고 있지요. 아직도 간간이 몬스터의 울음을 듣는데, 분노와 괴로움 이외에 두려움도 비치는 것 같아요. 그의 파트너이자 심복이었던 몬스터들조차 그에게 공포를 품는 것일까요. ‘변해버린파트너에게, 아니면 자크라는 거대한 악의에? 어느 쪽이건, 자크가 타자를 해하고 악의를 두르는 한 몬스터의 울음이 그치는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누구도 다치지 않을 길이 있었음에도 가장 나쁜 길을 선택했다고 적었지요. 자크도, 세상 사람들도. 사람들의 과오가 자크에게 무대를 마련하고 그의 타락을 극한까지 관람한 것이라면, 자크의 잘못은 자신의 욕망을 인간의 욕망으로 덮어버린 것이라 생각해요. ‘인간의 욕망에 기대는 게 자신의 욕망을 쉽게 채우는 길이기에 추한 욕망을 그대로 덮어썼겠지만, 결국 그걸 벗고 나오지 않았잖아요. 어느 순간 <인간의 욕망>을 제 것으로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오래된 욕망 정점에 올라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단 욕망에 스스로 갇혀버린 것인지.

  깊게 들여다볼 생각은 없어요. 패왕룡 자크라는 재앙이 닥친 현실은 달라지지 않으니까요. 이제 자크는 관객이 통제할 수 있는 광대가 아니라 모두를 덮치는 재난이지요.

  자크를 이용해 욕망을 채우려던 사람들과, 자기에게 향한 욕망을 치장인 양 둘렀던 자크. 모두 욕망을 잘못된 방식으로 과도하게 추구했다는 죄를 안고 있지요. . 결국은 인간의 죄로군요. 지금 우리 세계는 신벌이 떨어졌다 해도 놀랍지 않을 곳이에요. 단지 자크가, 몇몇 사람들의 믿음처럼 심판의 대행자가 되지 못할 뿐이에요.

  차라리 신벌 그 자체라면 모를까.

 

*

 

  펜이 수첩 위에서 삐걱거렸다. 여자는 펜촉의 잉크가 만든 검은 얼룩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수첩에 문장을 쓰던 중 갑자기 손이 떨린 건 무엇 때문일까. 신벌이라는 묵직한 단어? 거기에서 연상되는 처참한 결말? 그게 아니라면, 글을 쓰다 독자로 상정한 이에게 생각이 닿은 탓일까. 여자가 홀로 삼켜온 이야기를 풀어내는 수첩은 본디 아버지의 연구일지였고, 누군가 수첩을 발견해 지금의 이야기를 읽는다면 첫 독자는 높은 확률로 아버지일 터였다. 여자가 머무는, 동시에 몸을 숨기는 연구소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녀 둘이서 지내던 곳이었으니까.

  악마가 나타난 후로 줄곧 여자와 함께 연구소에 머물던 아버지는, 희망을 찾아 먼 곳으로 떠났다. 인간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날것의 자연에서, 인간을 구제할 힘을 추출하기 위해서. 인간의 욕망과 대조되는 자연의 정수를 에너지화해 카드에 담아오는 게 아버지의 목표였다. 생명을 틔우는 꽃. 하늘과 땅을 오가며 생물을 이어주는 새. 모든 것을 움직이는 바람. 공전하는 달 부녀가 꼽은 대표적인 자연을 끌어와 이 세계에 펼쳐낸다면, 악마도, 악마가 낳은 악몽도 걷히리라.

  어떻게든 자연의 카드를 만들어오겠다며 떠난 아버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지역이 지역이니만큼 연락은 되지 않으며, 홀로 떠났으니 험준한 자연에서 몸을 다치더라도 치료해줄 사람 하나 없다. 아비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도 모르고 여자는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한다. 한 겹 은신처인 연구소에서, 주인 잃은 기계들에 둘러싸인 채. 그동안 서로 의지해온 상대도 없이, 혼자.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 아버지에게 생각이 닿으면 초조해졌다. 오염되지 않은 만큼 위험한 자연에서 무사히 빠져나온다 해도, 연구소로 오는 길에 악마와 마주치지 않는단 보장은 없다. ‘바깥의 사람들처럼 허망하게 휩쓸리게 된다면. 겨우 만들어낸 희망을 꺼내지도 못하고 쓰러진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장면에 여자는 몸을 떨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지.]

  떠나기 전, 함께 가자는 딸의 요청을 거절하며 아버지가 꺼낸 말이었다.

  [자크를 물리칠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 너는 안전한 곳에 있으렴. 내게 뭔가 문제가 생기더라도 자연에너지 카드는 꼭 이곳으로 보내마. 그렇게 여자를 달랜 아버지는 그대로 연구소를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더라. 날을 일 단위로만 세는 여자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숫자는 순식간에 두 자리 수가 되고, 십의자리가 커지고. 여자는 입술을 깨문다. 막연히 생각하던 것보다 더 길었다. 앞으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알 수 없는데. 연결이 잘 되지 않는 통신이라도 시도해볼까 생각한 때.

  여자는 연구소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수첩을 빠르게 숨긴 여자가 연구소 입구로 향하기 전, 그녀가 머물던 휴게실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여자가 줄곧 기다려온 자.

  “돌아왔어, 레이.”

  피로에 짓눌린 얼굴로 아버지가 인사를 건넨 때, 여자는 말없이 아버지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쓰러지듯 잠든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건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였다. 아버지가 몸에 새겨진 상처를 확인한 것도 그때의 일. 깊은 상처가 아닌 것에 안도하며 여자가 간단히 상처를 치료해줄 때, 아버지는 메마른 목소리로 그간의 일을 읊었다. 그렇게 마지막 카드를 만들 수 있었지. 그때 발을 헛디뎠는데 다행히 바위가 많은 쪽이 아닌 풀숲에 떨어지더구나. 죽을 위기를 그렇게 또 넘겼어.

  “이 정도로만 다치고 돌아오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기도가 통한 모양이야. 이번 일만 끝낼 수 있게 해달라고, 수없이 빌었어. 내가 저지른 죄는 내가 끝맺을 수 있게 해달라고. 그게 의 완성일 거라고.”

  “아직도 자크의 일이 아버지 때문이라 생각하세요?”

  “기술자라면 자기가 세상에 내놓은 것에 책임을 져야 해.”

  “책임은 이미 충분히 졌어요. 자크를 물리치는 것까지가 책임이라 생각하신다면, 자크의 위험성을 알고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은 저에게도 책임이 있고요. 그러니 인간의 죄를 혼자 감당하려 하시지 말고, 마음을 조금 편하게 가지세요.”

  여자의 위로에 아버지의 입술은 꾹 닫혔다. 딸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처럼. 군데군데 붕대를 감은 손으로, 아버지는 자꾸만 카드만 만지작거렸다. 4장의 카드. 자연의 정수가 담긴, 인류의 희망이 될 카드를. 거기서 여자는 악마에 대한 아버지의 결벽적 태도를 떠올린다. 죄책감에서 비롯된, ‘인간의 재난을 전부 끌어안으려는 태도. 쌓아온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세상에서 악마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는 모습.

  여자는 아버지의 그런 결벽성이 존경스러운 한편 안쓰러웠다.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그동안 를 지나치게 자책해온 아버지가, 악마를 세상에서 지워낸다는 목표에 투신하다 미래를 잃게 될까 봐. 아버지에게 그녀가 유일한 가족이자 동지인 것처럼, 그녀에게도 아버지는 잃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간 온갖 빛나는 발견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사람이며 세상에 다시 미래를 쌓아야 할 기술자이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가, 악마를 안고 침몰하려 할까 봐 여자는 자꾸 두려워진다.

  연구소로 돌아온 날부터, 아버지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더욱.

  자연에너지 카드를 만든 이후 아버지는 그나마 연락하던 생존자들과의 연락을 차례로 끊었다. 친밀했던 이들에게 통신을 걸어 이제 연락처를 지우라고 말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다음으로는 오랜 시간을 들여 개발했던 기술과 장치의 자료를 딸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이걸 왜 제게 주세요? 조심스레 묻자 소중히 여겨줬으면 한다는 답만 돌아왔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하기엔 아버지의 얼굴에 걸린 웃음이 너무도 쓸쓸했다. 그건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나 지을 웃음이었다.

  “디스크를 이렇게 켜던가?”

  아버지의 자료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여자는 불쑥 들려온 말에 돌아보았다. 아버지가 그녀에게 너무도 익숙한 물건을 들고 서 있었다. 배틀용 디스크. 한때 프로 선수로 무대에 올라 배틀에 참여했던 여자가 쓰던 물건. 마찬가지로 프로 선수였던 악마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모델이기도 했다. 잃어버린 과거를 떠올린 여자가 감상에 젖은 때, 아버지는 딸의 옛 물건을 슬그머니 왼팔에 장착했다.

  “어색하구나, 이런 건.”

  “……사용하시려고요?”

  “언젠가 쓰게 될지도 모르잖아.”

  프로 시절 여자는 디스크에 카드를 세팅해 살아 움직이는몬스터를 무대에 세우곤 했다. 동시대의 프로였던 악마 역시, 인간이었던 때 디스크를 통해 제 파트너인 드래곤들을 불러냈다. 카드에 담긴 모든 것을 현실로 끌어내는 수단이 디스크란 점에서 아버지의 설명은 수상쩍다. 기술자인 아버지가, 이제 과거처럼 몬스터를 무대에 세울 일이 없는 상황에 디스크를 써야 할 이유가 있나? 디스크를 꼭 필요로 할 일이라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쯤이요? 자크 앞에서 자연에너지 카드를 사용할 때요?”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역시 레이는 날 꿰고 있는걸.”

  “왜 아버지가 사용하시려는 거죠?”

  “말하지 않았던가? 기술자는 자기가 세상에 내놓은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나 때문에 시작된 일은 내가 끝맺어야 해. 그게 올바른 행동이겠지.”

  “카드를 사용하는 것만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잖아요, 예를 들어…….”

  “레이. 우리가 쥔 희망이 인간의 욕망에 대조되는 자연의 힘이란 건 알고 있겠지. 사용한다면 자크와 결합한 드래곤을 흩어버리고 자크를 무력화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사용자인 우리도 인간이니만큼 인간의 욕망을 해체하는자연의 힘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차분한 설명에, 아버지가 그리는 미래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해졌다. 카드를 쥔 때부터 주변을 정리해온 이유도. 날것의 자연을 감당해낼 수 없는 건, 인간의 욕망을 먹어치우며 몸집을 불린 악마만이 아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걸 맨몸으로 받아낼 수 없다. 사용하는 순간, 아마도.

  “다시는 이전 같은 삶을 살 수 없겠군요.”

  단순히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연의 힘을 담아낼 그릇이 되어 자아를 잃거나, 아예 흘러가는 자연에 흡수될지도 모른다. 폐허가 된 세상에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되살리고 악마를 물리치는 대신 나의 삶은 영영 잃게 되는 것이다. 씁쓸한 결말을 여자가 몇 갈래나 그릴 때도 아버지는 <진짜 결말>을 이야기하는 걸 피했다. 그런 걸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순 없잖아. 라고, 여자의 말에 일부 동조해줄 뿐.

  “그렇게 나쁜 결말은 아닐 거야.”

  그런 아버지가 마지막에 위로하듯 덧붙인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딸의 얼굴에 괴로운 감정이 뚜렷하게 비쳤기 때문에?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밀려드는 비참함에 도무지 입을 뗄 수 없었다. 여자는 도망치듯 아버지에게서 돌아서,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지금 자신을 덮친 감정이 슬픔인지 두려움인지도 짚지 못하고. 복도를 걷는 내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여자는 돌아보는 대신 유리창 너머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쉼 없이 무너져내리는 세상. 악마가 날뛰는 세상에.

  머잖아 저 세상에선 어둠이 걷히게 되리라. 그 대신 세상은 누군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누가 될지는, 아직 선택할 기회가 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괴롭게 밀려들던 감정이 거짓말처럼 걷혔다. 여자는 세계의 운명에 자신도 관여해보기로 마음먹었다.

 

*

 

  「신벌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감상적이지요. 불행의 핑계를 신에게서 찾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죄가 몰고 온 재난에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표현이기도 해요. 자크의 시대를 사는 지금 사람들에겐, 신벌이라는 말이야말로 운명의 이름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운명이요.

  신을 믿는 이에게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건 심판이 떨어지기 충분한 시대이지요. 신화에선 언제나 인간의 욕심이 극에 달할 때 어리석은 인류를 벌하니까요. 우리 세대는 그릇된 욕망을 감추지도 않고 추구한 끝에 패왕룡 자크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자크가 심판의 대행자라고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 자가 세상을 신화 속 심판처럼 파멸 직전으로 몰고 갔지만, 저는 그에게 심판자란 이름은 줄 수 없어요.

  굳이 따지자면 그 자는 재앙을 뿌리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재난 그 자체지요. 동시에 신이 징벌해야 할 죄인이기도 합니다. 그야, 자크도 욕망으로 탄생한 존재인걸요. 인간의 욕망이 그에게 힘을 불어넣었다고 모두를 지배하겠다는 그의 야망이 없던 것이 되나요? 그 자가 자신의욕망에 휩쓸려 몰고 온 파멸에서, 지금 우리가 겪는 재난에서 그의 죄만 지워줄 수 있나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인과 죄인이 맞서고 있을 뿐이에요. 어느 쪽이 먼저 죄를 뉘우치고 이 불행을 끊느냐가 문제죠. 악마를 자처한 인간에게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어쨌건 아직도 인간이 자신을 불렀다고 주장하는 존재니까요. 자크에게 그만한 힘을 준 사람들이라고 믿음이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엔 인간의 죄를 깨달은 이들이 아예 없지는 않아요. 절망하고 두려워하다 무너지는 게 아닌, 세상을 덮친 재앙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게 아닌. 재앙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명확히 알고서, 상황을 바꾸려는 사람들이요.

  자연의 힘을 써 자크를 물리친다면, 폐허가 된 세상에 다시 자연을 피워낸다면. 그런 사람들이 미래를 쌓게 될 거예요. 다시 문명을 쌓고 기술을 발전시키겠지만 인간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겠지요. 자크의 등장에 책임을 느끼고 지금껏 그 자를 막아내려 한 아버지라면 충분히 <미래를 만드는 자>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

 

  연구실 책상에 낯익은 물건이 올려져 있었다. 악마가 날뛰기 전 사내가 사용했던 자그마한 수첩.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연구일지. 어떻게 발견했을까 하는 의문보다 옛 자료를 찾아냈단 기쁨이 먼저 찾아든 사내였다. 그에겐 이제 큰 의미가 없다고 해도, 딸에겐 추억으로든 연구자료로든 남겨둘 가치가 있는 수첩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곧 돌아오지 못하게 될 아비의 유품으로도.

  사내는 마지막 날을 미리 정해두었다. 자연에너지 카드를 사용해 악마를 막으러 나서는 날. 아마 그의 미래가 닫히는 날을. 자연에너지 카드는 자연의 정수를 담아낸 카드. 인간이 자연 그 자체를 감당해낼 순 없다. 카드를 사용한 순간 인간으로서의 삶은 끝난다고 봐야 하리라. 딸에게 카드의 효과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이었다. 악마를 물리친 미래에 당연히 아비도 놓고 있을 딸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딸은 살아갈 날이 긴, 미래를 상징하는 젊은이였다. 세상을 구해내기만 한다면 악마가 지나간 자리에서 자기 미래를 하루하루 쌓아갈 힘이 충분한 사람. 그런 딸을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사내 혼자만 감당해야 한다. 악마가 나타난 후로 불행도 고통도 딸과 나눠온 사내였지만 희생까지 함께할 수는 없었다. 저번에 사내가 언뜻 희생하겠단 의사를 흘린 후로 딸은 아버지를 막으려는 듯 그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지만, 그가 언제 악마를 막을 무기를 들고 나설지는 모르는 듯했다.

  알아서는 안 되었다. 세상을 위한 희생이라 해도, 악마의 무대를 만든 죄인으로서 속죄하려는 것이라 해도, 딸은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까. 세계를 구하려는 아버지를 막아서거나, 막지 못해 눈물짓거나. 어느 쪽도 사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므로, 그는 속죄의 날을 딸에게 끝까지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그 날까지는, 하나뿐인 가족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동안 의지해온 딸에게 마음을 전하는 건 물론, 함께하는 시간도 최대한 마련해야 했다. 최근 들어 사내가 연구실 대신 휴게실에 주로 머무는 것도, 딸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딸에게 아비의 일을 이야기해주고 싶어 삶을 빛냈던 기술이나 자신이 개발한 장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요즘 사내의 일상이었다. 기술자나 연구자의 길을 희망하진 않을 텐데도 딸은 언제나 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아비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어서인지.

  그런 딸에게 해줄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찾아낼 수 있을까 싶어, 사내는 오랜만에 발견한 연구일지를 펼쳤다. 기억에 남은 수식과 메모를 하나하나 훑다가, 사내는 제 것이 아닌 글씨를 찾아냈다. 딸의 필체로 쓰인 문장은 대충 넘겨봐도 몇 페이지나 적혀있었다. 종이가 귀해진 상황에서 무언가 기록할 게 있었던 걸까? 별생각 없이 딸의 글을 읽기 시작한 사내는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그동안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던 딸의 심리가, 고백이 묵직하게 담겨있어서였다.

  왜 지금까지 딸의 생각을 읽으려 하지 않았을까. 세상을 덮친 재난에 함께 괴로워하고 고뇌한 사람이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가 아니라 그의 짐을 나눠 짊어질 정도로 성숙한 인간이었는데. 이렇게 무거운 말을, 글로 남기지 않게 했다면 좋았으리라. 서로의 감정을 소리 내어 이야기하고, 미래에의 계획을 공유했다면. 그랬다면 사내는 딸이 슬퍼할 것을 걱정하지 않고 딸은 악마에 대한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홀로 품지 않았을 텐데.

  한동안 보이지 않던 연구일지가 연구실 책상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던 것도 딸이 일부러 준비해둔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와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감으로. ‘떠나기 전아버지가 읽어주길 바라고서. 사내가 설정해둔 마지막 날까진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다. 딸을 찾아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충분하다. 네가 담아둔 것을 읽었다고. 네 마음을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다고. 그러니 악마를 물리쳐 네 마음의 짐을 덜어주겠다고, 지금이라도 이야기한다면

  생각이 끊어졌다. 갑작스레 문이 열리더니 딸이 연구실에 들어와 사내가 준비해두었던 무기, 자연에너지 카드를 낚아챈 것이다. 급습하듯 일어난 일에 사내는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상황을 파악한 때는 이미 그가 사용해야 할 카드가 딸의 손에서 덱케이스로 넘어간 후. 카드를 확보하자마자 뛰쳐나간 딸이 디스크를 챙긴 것을 보고서야 사내는 다음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의 계획을 딸이 전부 넘겨받는 것. 아비의 희생을 바라지 않은 딸이 카드를 사용해 악마를 막아서는 것.

  결심이 서면 물러서는 법이 없는 딸을 막기 위해, 사내도 달려나갔다. 딸이 미래를 잃는 일이 없기만을 바라며. 연구실을 떠나, 연구소를 빠져나와, 악마가 모든 것을 짓뭉개는 바깥으로. 부녀가 떠난 자리에는 수첩만이 휑하게 남아, 아비가 미처 읽지 못한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고 있었다.

  「저는 아버지를 대신하러 가려 합니다. 이건 아버지를 위해서이지만 세상을 위해서이기도 해요.

  신화에선 신벌을 내릴 때 미래를 위한 희망을 남겨두죠. 새로운 세계를 쌓을 사람을, 미래를 품은 씨앗을 소수나마 보존하곤 해요. 그렇게 희망을 실은 방주 덕에 신화 속 인류는 심판받고도 계속 살아왔지요.

  인간의 욕망으로 오염된 이 세계가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방주가 필요할 거예요.

  아버지. 그러니 희생해선 안 돼요. 기술과 지식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품고 살아가세요. 당신 머릿속과 가슴에 남은 걸 끝까지 안고, 미래를 쌓아주세요.

  방주가 되어주세요.

 

Posted by 현소야 :

[레이지] 소년의 초상

2021. 5. 19. 18:25 from 01

 

  젊은 사장의 집무실에 수상쩍은 물건이 배달된 건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일 욕심이 많은 사장이 전날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의 공간엔 그가 모르는 물건 따위 없었으니까. 다 해결하지 못한 일이 마음에 걸려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을 때. 사장은 집무실의 책상에 떡하니 놓인 상자를 보았다. 책상을 거의 다 채우는 크기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상자가 제법 잘 포장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아한 무늬가 새겨진 포장지와 섬세한 리본 장식은 배달물의 정체를 바로 짐작하게 했다. 선물.

  세계적인 대기업 창업주의 아들로 십대 때 이미 사장으로 취임한 사내는 줄곧 성공을 써온 사람이었다. 아비의 뒤를 이어 회사를 잘 관리했다는 말로는 그의 성과를 다 담아낼 수 없었다. 2대 사장 취임 수년 만에, 회사는 이전 십수 년간 쌓은 것보다 훨씬 더 발전했다. 전부 현 사장의 공로였다. 새로운 가능성에 투자하는 과감함과 먼 이국에서 일어난 전쟁을 막기 위해 정예병을 파견하는 등의 책임감 있는 모습은 회사의 가치를 높였다. 세상 사람들은 사장이 개척한 기술에 환호했고, 그의 선택을 신뢰했다. 청년층에게 롤모델로 삼고 싶은 사람을 물으면 꼭 한두 명쯤은 그의 이름을 읊었다.

  그만큼 성공을 쌓아온 사람에게 온갖 선물이 흘러드는 것은 당연한 일. 어떤 이들은 선물을 보내며 사내에게서 좋은 거래를 따내고 싶어 했다. 단순히 그에게 환심을 사려 하는 부류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선물을 건네는 이에겐 전부 목적이 있었기에 사내는 무언가 받을 때마다 신중하게 판단해야 했다. 기본적인 태도는 유지해야 할관계에서의 선물은 받고, 신뢰를 쌓지 못한 이들의 선물은 좋은 말을 붙여 거절하는 것이었다. 신뢰를 두텁게 쌓으면서 약점은 잡히지 않아야 했기에.

  그렇다면 이번의 선물은 사내는 상자를 이리저리 살펴보았으나 보낸 이의 이름이 없었다. 어젯밤이나 오늘 아침에 무언가 배달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도 없다. 누군가 몰래 가져다 놓은 것이 분명한데, 선물을 그렇게 비밀스레 건네야 할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다. 왜 익명으로 보냈을까. 무엇을 숨기고 싶은 것일까. 의문을 안은 채 사내는 상자에 손을 뻗었다. 이런 수상쩍은 배달물에 손을 댔다가 폭발에 휩쓸리는 영화를 본 기억이 있지만, 불안감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선물의 정체를 확인하고 처분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메워서였다.

  리본을 풀 때도, 포장지를 뜯었을 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상자를 열어 내부를 확인하는 것. 사내는 숨을 크게 쉬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이 안에 넣어둔 건 무엇일까. 큰 죄를 지어 수년 전 재판에 넘겨진 창업주의 치부? 아니면 사장에게 존재를 알리고 싶은 이의 화려한 자기소개서?

  답은 바로 다음 순간, 확인할 수 있었다. 상자 내부를 본 사내의 눈이 둥그레졌다. 생각지도 못한 물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선물의 정체는 그림. 그것도 사내의 초상화였다.

 

*

 

  커다란 액자에 전시된 그림은 집무실의 한쪽 벽에 걸렸다. 사내로서는 그리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으나, 집무실에 들어온 동생이 그림을 발견하자마자 걸어놓자고 거듭 이야기한 통에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책상 위나 장식장에 두기엔 너무 큰 그림이었다. 동생의 흥미가 떨어질 때까지만 걸어두었다가 슬그머니 치우면 될 것이다. 다만 하나 불만스러운 점을 짚자면, 선물을 발견한 순간 머리를 지배한 의문을 하나도 풀지 못했단 사실이었다.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면 무언가 단서가 생기리라 생각했다. 선물을 보낸 이가 누구인지, 선물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선물을 파기해야 할지 간직해야 할지에 대해서라도. 그러나 사내는 어떤 답도 얻지 못했다. 겨우 확인한 거라곤 작품을 그린 이의 정체. 매우 독특한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을 사내는 한 명 알고 있다. 이번에 배달된 그의 초상화는 바로 그 자의 솜씨였다. 한때 사장의 곁에서 그의 뜻대로 싸워주었던 전사. 사내가 결성한 정예병의 일원. 작가를 확인하고 나니 선물의 목적이 더욱 의심스럽다. 청년은 살아 움직이는그림을 그리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므로.

  청년의 화풍은 전통적인 초상화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인물을 선명하게 그리지 않는다는 점에선 초상화라는 분류도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도 청년에게 곧잘 의뢰가 들어오는 건 들여다볼수록 작품의 주인공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는 공통적인 증언 때문이다. 더 나아가 <유령>을 부른단 말도 있었다. 죽은 가족의 초상을 의뢰한 사람은 그림 속 망자가 잠깐이나마 제 품에 안겼다며 눈물짓기도 했다.

  희한한 소문에 몇몇 사람들은 청년의 그림을 입수해 조사하기도 했지만, 물감에도 캔버스에도 특수한 장치는 없었다. 되레 그 소식에 청년의 유명세만 높아졌다. 지금의 청년은 꽤 바쁘게 작품을 그려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옛 지휘관의 초상화를 선물할 시간은 없을 터다. 청년이 사내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 정도로 애정이 깊지 않은 것도 물론이고.

  지휘관과 전사로 함께하게 되었으나 사내와 청년의 첫 만남은 제법 살벌했다. 청년은 전장에서 왔고, 사내는 그의 고향을 전장으로 만든 침략자의 아들이었으므로. 어느 날 가정을 팽개치고 사라진 창업주가 먼 이국에서 침략전쟁을 꾀하고 있었단 것은 뒤늦게 안 사실이었다. 아비의 죄를 확인한 순간부터 사내는 그 침략자를 적으로 규정했다. 그러니 사내가 전쟁의 피해자 앞에서 취해야 했던 행동은 명백했다. 아비에 맞서기로 결심했음을 알리고, 협력을 요구하는 것. 원수의 아들을 금방이라도 없애버릴 것만 같았던 청년은 함께 싸우자는 제안에 무기를 거두고, 사내를 따라 회사에 들어섰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사내는 청년의 도움을 받아 정예병을 결성했다. 열 명이 채 되지 않은 적은 수였으나 정예병의 이름에 걸맞게 모두 강한 전사들이었다. 덕분에 지휘관을 자처한 사내는 정예병의 손으로 아비를 끌어내릴 수 있었는데. 사내는 초상화를 힐끔거렸다. 그림 속에는 열세 살의 자신이 다소 흐리게 담겨 있다. 그림 속 소년은 소문대로 살아 움직일까? 그 답은 청년만이 알 것이다. 전장에서 이미 유령을움직였던 사람이.

  사내의 전사 중 전쟁을 끝내고픈 열망이 가장 강했던 청년은 다소 섬뜩한 전투를 벌이곤 했다. <유령 전사>를 불러내 함께 싸우는 것이었다. 유령이라고 표현하긴 하지만 청년이 불러낸 지원군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사람을 닮은 무언가라는 것만이 분명했다. 환상으로 빚어낸 듯 투명한 몸에, 적군의 공격이 닿아도 피를 흘리는 대신 그 자리에 종이를 찢어낸 듯 큰 구멍만 생기는 존재라. 유령이어도, 다른 무언가여도 공포를 사기 충분했다. 그들이 청년의 편이고 전투가 끝나면 조용히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었다면 분명 아군 중에서도 그들을 두려워하는 이가 나왔으리라.

  그렇다면 사내는 그 수상쩍은 전사들을 어떻게 대했던가. 지휘관으로서 사내는 전사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적군을 처리해야 했다. 다치지도 않고 챙길 필요도 없는 <유령 전사>는 썩 괜찮은 지원군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청년이 불러낸 전사들의 난입에 침묵하던 사내는 어느 날 그들에게서 특이한 점을 하나 찾아냈다. 하나같이 몸에 붉은 천을 매고 있다는 점.

  청년의 고향에서 붉은 천이란 침략군에 맞서는 저항군의 표식이라 들은 기억이 있다. 그 증거로 청년도 어딜 가나 붉은 스카프를 목에 매고 다니지 않았던가. 청년이 <유령 전사>의 정체를 물을 때마다 동지라고 얼버무린 것까지 사내의 머리를 때렸다. 사내는 청년이 데려온 동지가 누구인지 대강 짐작할 것 같았다.

  [쿠로사키.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네가 불러내는 전사들은 네 고향 사람인가?]

  언젠가 청년과 단둘이 대화할 기회가 생겼을 때 사내는 슬그머니 물었다. 청년은 입을 떼는 대신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단정한 얼굴엔 미지근한 웃음이 걸려있었고.

  [……희생된 사람들을 불러내는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군.]

  [내 능력이 아냐.]

  곧이어 청년이 늘어놓은 것은 기묘한 능력의 배경이었다. 친우의 능력이 옮아버렸다고 했다. 청년이 지옥 같은 전장을 떠나 사내의 도시에 숨어들 때 그를 쫓아올 정도로 친밀했던 친우. 마지막까지 함께할 줄 알았던 동지는 청년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허망하게 꺾였다. 그 날부터 청년에겐 그의 능력이 일부 스미고 말았다. ‘쓰러져도 유령처럼 일어나 싸우는 것이라는 표현을 듣고 사내는 납득했다. 청년은 침략군에게 쓰러진 동지들을 일시적으로 불러내 싸우고 있었다.

  그 능력이 유토에게 끝까지 남았으면 좋았을 텐데. 청년이 드물게 쓸쓸한 얼굴로 흘린 말을, 사내는 기억한다. 청년을 내리누르는 비극이 얼마나 묵직한지 새삼 느꼈기에 사내는 청년에게 능력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면 그 능력도 사라질 것인지, 불러낸 동지들은 나중에 완전히 안식을 찾는 것인지. 위험성이 있는 능력에 대한 의문은 그대로 삼키기로 하고서.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정예병은 적진에 침투했고, 침략군의 기지에서 승리를 거두며 전쟁을 끝냈다.

  정예병과 지휘관이 영웅으로 귀환하는 것만 남겨둔 시점에 청년은 사내를 따라가는 대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침략군에게 짓밟혀 폐허가 된 도시라도 고향은 고향이었다. 청년이 줄곧 돌아가고 싶어 했던 곳이자 행복했던 과거를 상징하는 장소. 사내는 떠나겠다는 청년을 막지 않았다. 전쟁의 상흔이 선명한 곳이라도, 청년에겐 자신의 회사보단 훨씬 나은 거처가 되리라 생각하고서.

  그렇게 청년을 보내고 두 해쯤 지났을까. 사내는 우연히 청년의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때 정예병으로 싸워주었던 청년이 떠올라 일부러 그를 찾아갔더니, 홀로 사는 집에 그림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곳곳에 팔레트와 물감이 잔뜩 어질러진 것을 보면 청년이 꾸준히 그림을 그려온 모양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취미가 있었던가? 의외인데.]

  좁은 집을 찬찬히 돌아보며 사내는 가볍게 말을 걸었다. 벽에 잔뜩 걸어두고도 공간이 모자랐는지 벽장에도 그림이 그득했다. 훑어보니 특이한 점이 몇 개 있었다. 첫째는 전부 인물화라는 것. 다음으론 그 많은 그림 속 인물이 거의 비슷비슷하다는 것. 셋째로는 청년이 그려낸 인물이 전부 더는 세상에 없는사람이라는 것.

  [원래는 없었지.]

  의미심장한 답의 속뜻을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림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두 명의 인물 때문이었다. 하나는 청년에게 능력을 전염시킨 친우. 다른 하나는 침략군이 납치해갔던, 청년의 누이.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을 청년은 끝내 구하지 못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을 거듭 그려내는 건 단순히 그들을 그리워해서는 아닐 것이다. 청년의 능력과 연결해보면, 그 집요한 행동의 진짜 이유는.

  [네 능력, 그림에도 통하나?]

  이 그림 속 인물도 살아 움직이냔 뜻이야, 쿠로사키. 덧붙인 말에 청년은 즉답했다. 어느 정도는.

  [정확히는 살아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 비슷한 느낌이 들긴 하지. 그림 속 인물을 잠깐 그림 밖으로 꺼낼 수 있으니까.]

  청년이 그렇게 말한 때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그림에서 열너댓 살로 보이는 소녀가 살그머니 튀어나왔다. 보랏빛을 띤 흑발과 붉은 눈이 인상적인 소녀는, 사내에게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청년의 누이. 이제 어디에도 없는 사람. 청년이 소중한 사람을 모델로 그림을 그린 이유는 분명해졌다. 그는 사라진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림으로 빚어낸 카피가 오리지널의 부재를 완전히 채워줄 수 없다고 해도.

  [잠깐이지?]

  [글쎄. 어차피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잊지 말라는 걸까.]

  저에게 다가오는 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청년은 무심하게 답했다.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그림을 계속 그려온 건 그 때문이었군. 능력의 지속시간은 길지 않으니까.]

  [그리다 보니 점점 손이 빨라져. 그러니 그렇게 오래……쓸쓸하진 않아.]

  핼쑥한 얼굴로 청년은 웃었다. 손이며 옷에 엉망으로 묻은 물감이, 집에 그득그득 쌓인 그림이 평소 그가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짐작하게 했다. 환상에 매달려 사는 셈이지만 사내는 그의 부질없는 노력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사내의 몸속에 흐르는 피는 침략자의 것이고, 사내가 그에게 안겨준 승리에 소중한 사람을 구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가장 구하고 싶었던 이를 잃고 돌아온 사람에게서 잃은 사람에 대한 추억마저 빼앗는다면, 그는 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사내는 청년의 집을 나설 때 몸은 챙겨가면서 그림을 그리라고만 당부했다.

  그 이후 사내는 청년에게 주기적으로 물감과 붓, 캔버스 등 그림을 그릴 때 필요한 재료를 보냈다. 생활비를 아껴가며 그림에 매달릴 것을 우려하여 예술가 지원 명목으로 후원금도 꾸준히 지급했다. 청년에게 정예병 동료의 초상화를 의뢰하여 몇 점을 사 오기도 했다. 그림 속 인물이 튀어나오는 기현상이 생길까 싶어, 받아온 작품을 창고에 넣어두고 다신 꺼내보지 않았지만.

  세계적 대기업 사장이 지원하는 젊은이란 이유만으로 청년은 언젠가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되었다. 청년은 자신을 화가라 칭하지 않았고 사내가 그를 지원한 목적은 청년의 생존을 돕는 것이었으나 그런 사정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알려졌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으리라. 사람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신비스러운 젊은 화가>, 청년의 상품성이었으니까. 집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리는 청년을 굳이 찾아온 몇몇 사람들은 청년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고서야 그의 집을 떠났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고 자기만족용으로 그릴 뿐이란 말은 그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결국 의뢰인이 청년에게 억지로 그림을 받아낸 후 일이 커졌다. 투박하고 희한한 그림을 받아든 이들이 대기업 사장에게 선택받은재능을 확인하려 계속 그림을 들여다본 것이다. 화가의 능력이 능력이니만큼, 들여다볼수록 그림 속 인물은 생생해졌다. 내키는 만큼만 묘사하고 이목구비도 선명하지 않은 그림인데도 그랬다. 정말 독특하고 멋진 그림이에요. 보통의 초상화처럼 섬세하진 않지만, 오히려 사진보다 생생하게 느껴진다니까요. 자꾸 보다 보면 꼭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의뢰인의 평은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했고, 추억하고 싶은 이가 있는 사람들이 청년을 찾게 만들었다.

  밀려드는 방문자를 거절하던 청년은 딱 하나, 죽은 아이의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만은 조용히 받아주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처지에 동질감을 느낀 것이 틀림없었다. 빛바랜 사진을 자료로 삼아, 제법 오랜 시간을 들여 청년은 망자의 초상화를 완성했다. 공들여 그린 초상화를 받고 돌아간 의뢰인은 오래지 않아 딸을 오랜만에 품에 안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초상화를 걸어둔 후로 환상인지 꿈인지, 죽은 딸과 짧게나마 만났다는 이야기였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노인은 그 말을 꺼낼 때마다 울먹였다.

  그 이후는 세상에 알려진 대로. 청년은 바라지 않은 유명세를 얻었다. 사람들은 기대를 안고 청년을 찾아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청년은 제 작품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자신처럼 추억을 안고 살고 싶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의뢰를 계속 받게 되었다. 멀리서 청년의 삶을 지켜보던 사내는 그의 성공에 꽤 기뻐했다. 단절된 과거 말고는 어디에도 관심을 두지 못할 것 같던 그가 새로운 일거리를 안게 되었음에. 그가 도움을 받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게 되었음에.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 유명해지고부터 사내는 청년의 삶에서 조용히 퇴장했다.

  이제 청년의 곁에는 그를 꾸준히 사랑하는 이도 여러 명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생활도 안정되었을 것이다. 사내가 일부러 연락하지 않는 한 청년은 옛 지휘관을 찾지 않는다. 한때 전장에서 유령을 움직였던 능력을 사내가 속으론 껄끄러워한단 걸 청년이 모를 리도 없다. 그러니 사내가 이번에 받은 그림은 누군가 일부러 청년에게 부탁한 작품일 게 뻔하다. 그것도 하필 열세 살의 모습이라 청년과 만난 건 사내가 열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사내를 사랑하게 된 것도 2대 사장 취임 직전인 열세 살이 아닌, 그 이후의 일.

  그 시기의 사내마저 사랑하여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 할 사람이라. 가족? 아비의 죄를 고백한 열세 살 아들에게 그 남자를 처리해요, 레이지 씨.’라고 속삭였던 어머니? 혹은 열세 살 때의 사내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내의 삶에 뒤늦게 들어온 동생? 그게 아니라면 회사 사람? 사장 취임 직후부터 그를 보좌해온 비서? 그를 아비의 가장 완벽한 대체자라 생각한 회사 간부들? 거기서 사내는 생각을 흩었다. 보낸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그림의 의미였다.

  청년에게 그림을 의뢰했다는 건, 소문처럼 그림의 모델이 살아 움직이는 것까지 생각했다는 것. <의뢰인>은 사내에게 그림을 보내며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것일까. 왜 하필 열세 살의 그여야 했을까. 그 시기는 사내의 삶에서 빛나는 시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이전까지 믿던 행복이 무너지며 최초로 고통을 겪었던 때이기도 한데.

  사내는 그림 속 자신을 다시 보았다. 이목구비는 흐린데 표정만은 너무도 생생하다. 그림 밖의 감상자를 바라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먼 곳에 향한 시선. 잔뜩 굳은 얼굴.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소년의 얼굴에서 답이 보인다. 사내는 의뢰인이 굳이 열세 살의 그를 재현하려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청년에게 초상화를 맡겼다는 점에서 추측은 확신에 가까워진다.

  열세 살은 대기업의 후계자로 살아가던 그가, 살면서 갚을 죄를 깨달은 시점이었다.

 

*

 

  인간의 삶에서 어느 시점까지를 아이로 부를 것인가. 사람마다 의견은 갈릴 테지만 넓게 보자면 성년이 되기 전까지를 전부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십대 후반까지야 실수도 치기 어린 행동도 어느 정도는 용인될 나이이니. 그런데 사내의 삶에서 아이였던 시기는 태어나서 12년까지가 전부였다. 열세 살, 평범한 사람이라면 미래보다는 현재를 생각할 나이. 친구와도 가끔 다투고 꿈은 수시로 바뀔 나이.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잘못을 없앨 수 있는 나이. 사내는 그때 스스로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다.

  어른의 길에 첫 발짝을 들인 일은 사장직을 맡기로 선언한 것이었다. 당시 회사는 창업주의 부재에도 문제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회사의 중역이자 본래부터 경영에 능한 어머니가 회사를 잘 이끌고 있었던 덕분이다. 사내는 완벽하게 준비될 때까지어머니의 그늘에서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열세 살 나이로 아비의 빈자리를 전부 채워야 할 의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사장직을 물려받겠다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집무실을 나서 자료실로 향하며 사내는 기억을 더듬는다. 오래된 일이라 그때의 감정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책임감이었으리라고, 타인의 일처럼 건조하게 추측할 뿐.

  실제로, 아비의 죄를 알게 된 순간부터 사내는 자신이 누려온 모든 것에 책임감을 느꼈다. 부유한 환경도, 잘 교육받았다는 배경도, 창업주의 유일한 자식이란 축복받은 위치도. 심지어 제 성씨에 따라붙는 선망의 시선까지도. 아비의 죄를 생각하면 무엇 하나 당연한 행운이 아니었다. 아비의 후광으로 보통 사람이 꿈꾸지 못할 것을 누려왔다면, 아비가 낳은 피해도 마땅히 짊어져야 했다.

  아비를 막는 것으로든 그의 죄를 대신 씻어내서든.

  사내는 후자가 불가능하단 것을 알고 있었다. 타인의 죄를 완전히 씻어내는 건 신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하는 일은 전자였다. 그러기 위해선 아이로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어머니의 그늘에서도 벗어나야 했다. 그 남자를 처리해요, 레이지 씨. 어머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거기에 실린 기대는 묵직했다. 결심이 설 때까지 아들을 기다려줄 수는 있더라도 언젠간 그녀의 파트너 역을 요구하리란 게 선명히 보였다.

  한때 그녀의 남편이 차지했던 자리를. 방해물을 제거하고 회사를 안전하게 지켜낼 동지 역할을.

  그래서 열세 살 소년은 창업주의 후계자란 편리한 위치를 버리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어머니는 간부회의에서 아들을 차기 사장으로 추천하긴 했지만 쏟아지는 기대로부터 아들을 보호해주진 않았다. 사장이란 이름만 빌려주고 책임은 가져가는 게 아니라 명예도 책임도 전부 아들에게 내준 것이다. 사내가 사장이 되기로 한 때부터 어머니는 비즈니스 파트너였지 보호자가 아니었다. 사내가 어머니에게 감싸줘야 할 아이가 아닌 가장 강력한 패가 되기로 한 것처럼.

  어른의 모습을 덮어쓴 아이에겐 환상을 꿈꿀 여유도 실수를 겪을 기회도 없었다. 단단히 무장한 채 목표만을 위해 싸우는 것이 사내가 가야 할 길이었다. 끝없이 아비의 죄를 상기하며 스스로를 잘 벼린 무기로 만드는 건 고단한 일이었으나 사내는 아이의 삶을 내려놓은 데 후회란 없었다. 정예병과 함께 귀환할 때까지, 사내에게 간절했던 것은 자의로 포기한 삶보다 자신의 길이 옳다는 확신이었다.

  정예병을 이끌고도 아비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신화에서 되풀이되었던 부자간의 대립처럼, 의도치 않게 아비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면? 너무 일찍 어른을 흉내 내게 된 아이는 마음 한 켠에 언제나 불안을 두고 있었다. 그것만은 제 나이에 맞는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자료실로 향한 건 열세 살의 기억을 꺼내보기 위해서였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회사에는 사람의 기억을 열람하는 기술이 있었다. 타인의 머릿속을 마음대로 들여다보는 것만이 아니라 특정 부분을 잘라내거나 덧씌우는 것도 가능한 무서운 기술. 위험성 때문에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기술은, 개발자인 창업주가 자취를 감춘 후에도 회사에서 종종 쓰였다. 제한적으로 사용한다면 제법 유용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사내는 2대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아비의 <>을 따라가려 애썼다. 그 남자가 무엇을 꿈꾸었고 어떤 것까지 꾀했으며 그 과정에 무엇을 동원했는지, 낱낱이 알고 싶었다. 그 과정에 활용했던 것이 바로 기억 열람 기술이었다. 새로운 사장은 아비의 측근을, 아비를 따르던 연구원을 불러 아비가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지 확인하려 들었다. 기억을 억지로 끌어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위안 중 어느 쪽이 더 컸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다만 언젠가부터 사내는 기억 열람 기술을 자신에게도 쓰기로 마음먹었다. 실험에 몰두하는 연구자가 저마저 실험대상으로 삼듯이.

  아마 기억 열람 기술을 통해 영상으로 출력된 기억이 너무 생생했기 때문이리라. 모든 기억을 그렇게 꺼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잊지 않고 살 것 같을 정도로. 어른의 모습을 덮어쓴 후로, 잊어선 안 된다는 말은 몇 년간 사내의 목을 죄는 문장이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거둔 청년에게서 걸핏하면 그 말을 들었다. 거울 속의 사내조차도 때로 입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잊어선 안 되지. 기억해야지.

  그렇게나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뻔했다. 아비의 죄, 거기서 출발한 그의 책임. 열세 살 소년을 어른으로 만들고, 대기업 사장이 먼 이국의 전쟁에 뛰어들게 한 것. 자신의 기억마저 자료로 남기기로 결심한 사내가 제일 처음 꺼낸 기억이 바로 죄의 기억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열세 살, 아버지가 꾀하는 일을 알게 된 나이. 가정을 내팽개친 아버지에 대한 배반감보다 악인을 막아서야 한다는 책임감에 휩싸였던 때의 기억. 청년이 보내온 초상화를 살피다 액자 뒷면에 적힌 문구를 보았을 때. 사내는 자료실에 보관한 최초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네 열세 살을 기억하길.이라고 적혀있었던가. 휘갈긴 글씨는 분명 청년의 필체였다. 청년의 그림이 때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법 짓궂은 문구 선정이기도 했다. 사내가 기억하지 않으려 애써도 청년은 과거의 사내를 잠깐이나마 그의 눈앞에 세울 수 있을 테니.

  열세 살 때의 결심을 지금껏 잊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 열세 살 소년을 제대로 기억한다고 답하긴 어려운 사내였다. 전쟁이 끝난 후로, 그때의 기억을 담아낸 자료를 꺼내보지 않아서였다. 자료실에서 당시의 자료를 찾아내더라도 보통은 존재만 확인하고 덮어두곤 했다. 아비에 맞서기로 결심했던 때를 아직 남겨두고 있음에 스스로 만족하며.

  수년간 그 시절을 돌아보지 않은 건 두려움 탓이었을까. 어른을 막 흉내 내기 시작하던 때의, 완전히 준비되지 않았을 때의 미숙함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실수를 그 속에서 발견할지도 모른단 생각으로. 그게 아니면 승전을 거둔 것으로 책임을 마쳤단 생각 때문이었을까. 전쟁이 끝났다고 아비가 저지른 죄가 전부 바로잡힌 건 아닌데. 청년의 고향엔 아직도 침략군이 휩쓸고 간 흔적이 남아있고, 청년의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이는 돌아오지 못했는데.

  자료실의 A행 선반으로 걸어가 자신이 만든 자료를 꺼낼 때, 사내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아카바 레이지, 13. 지금보단 어린 티가 나는 글씨로 쓴 메모를 발견하자마자 긴장감이 밀려왔다. 수년 만에 들여다보는 기억은, 어떤 모습일까. 그때의 열세 살 소년은 충분히 선량한 인간이었을까.

  그리고 지금의 그는, 이 소년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일까.

  마지막 의문이야말로 사내의 머리를 가장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었다. 미숙했던 만큼 순진했던 시절의 목표를 온전히 이뤄냈다고 자신할 수 없어서였다. 누구도 사내의 성과를 저평가하지 않았다. 그에게 더 좋은 길을 택했어야 한다며 꾸짖지 않았다. 침략자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잃은 청년도 사내에게 분풀이를 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사내는 아직 확신이 없다. 그는 열세 살의 자신 앞에 자랑스럽게 설 수 있을까?

  답은 사내가 방치해두었던 기록에 있다. 사내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과거의 기록을 꺼내 재생했다. 다음 순간 스크린 가득 담긴 인물은 성공적으로 회사를 키워낸 대기업 사장도, 정예병과 함께 영웅으로 귀환한 지휘관도 아니었다. 지금의 사내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긴장한 얼굴의 소년이었다. 어머니를 올려다보면서 무엇이든 답을 내주길 기다리는, 고작 열세 살짜리 소년. 막연한 기억보다 앳된 얼굴의 그에게, 지금보다 젊은 어머니가 웃어주었다. 이미 그 시간을 지나온 사내는 다음 순간 어머니가 흘릴 말이 무엇인지 안다.

  [무엇을 하고 싶어요, 레이지 씨?]

  그 말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도. 어머니의 질문은 다르게 읽어야 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로 듣는 게 정확하리라. 그 시점의 어머니는 이미 아들을 파트너로 취급하고 있었으니까.

  [그 남자, 아카바 레오를…….]

  [좋아요. 그 자에겐 그 정도의 호칭이 적절하겠네요. 우리의 적이니까요.]

  [막아설 겁니다.]

  [어떻게?]

  몸을 숙인 어머니는 아들과 눈높이를 맞춘다. 과거의 장면을 제3자가 되어 지켜보는 상황이지만, 스크린 속 소년의 감정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오히려 관찰자가 되었기에 더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얼굴에 걸린 표정을, 긴장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는, 소년은 두려워하고 있다. 어머니의 응답이 아닌, 자신이 택할 미래를. 그로 인해 바뀔 수밖에 없을 모든 것을.

  [그 남자, 는 군대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훈련받은 전사를 일반인이 상대하기란 어렵겠지요. 대등한 병력이 있다면 좋겠지만 곧 엑시즈를 친다고 했으니 전사를 준비할 여유시간은 많지 않아요.]

  그런데도 소년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답한다. 열세 살의 두뇌로, 한정된 정보로 상황을 분석하고서.

  [병력을 준비하는 데 또 어려운 점이 있다면?]

  [이곳 마이아미에 위기감을 느낄 사람이 없다는 점이지요. 존재도 모르는 먼 곳에서 전쟁이 일어날 거란 말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군대를 결성하잔 건 무리한 요구예요.]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

  각오가 되어있다면 스스로 답해요. 어머니의 물빛 눈에서 사내는 무언의 요구를 읽는다. 저 묵직한 요구에 열세 살의 소년은 어떤 길을 찾아냈더라. 사내의 시선은 스크린에 고정되고.

  [정예병을 결성할까 합니다.]

  짧은 침묵 끝에 소년은 사내가 아는 답을 읊는다. 다음은 칭찬도 비난도 없는 어머니에게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아카바 레오가 키워낸 군대는 전원 듀얼로 무장한 사람들입니다. 총과 포로 무장한 군대를 만드는 건 어렵겠지만 우수한 듀얼리스트를 양성하는 건 회사 차원에서도 가능하죠. 각 소환법의 마스터가 몇 명씩 준비되기만 해도 듀얼 전사에 맞서는 걸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주먹을 꽉 쥐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소년은 어머니 이전에 자신을 설득하고 싶은 것 같았다. 어느 것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이 옳을 거라 믿는 것이다. 그래야만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럼에도 열세 살 소년은 확인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어머니는 짤막하게 답한다.

  [‘레오 코퍼레이션의엘리트를 키워내야겠군요.]

  제법 좋은 생각이에요, 레이지 씨. 어머니의 손은 머리칼을 쓸어주려는 듯 아들의 머리 쪽으로 향하다 허공에서 멈춘다. 긴장에 휩싸여있던 소년은 어머니가 빠르게 손을 거둬들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조금 편해진 얼굴로 숨을 크게 내쉬는 모습만 영상에 잡힐 뿐이다.

  [정예병에 함께 들어갈 생각인가요?]

  [아니요. 물론 저도 그들과 대등한 수준으로 실력을 키워야겠지만, 정예병으로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책임질 사람이 하나쯤은 필요하겠지요.]

  다음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 걸린 것은 열세 살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지휘관이 되겠다는 뜻이군요. 좋은 결심이지만, 레이지 씨. 메마른 웃음에 밴 감정을 뒤늦게 알 것 같다. 옅은 우려와, 그보다 훨씬 짙은 안쓰러움.

  [책임은 그쪽이 훨씬 무겁답니다.]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낡은 기억을 담은 영상이 거기서 끝난 것이다. 어떤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는 스크린을 사내는 한참이나 멀거니 바라보았다. 각오한 것보다 훨씬 강하게 감상이 몰아친 탓이었다. 분명,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던 때의 그는 용기가 있었다. 지금 돌아보아도 부끄러운 모습은 아니었다. 마땅히 짊어져야 할 문제에서 도망치지 않고 제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이후 사내에게는 약 3년의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 회사는 가파르게 성장했고, 전사 양성이란 목표가 뚜렷했던 회사 직속 학원은 매해 엘리트를 배출해냈다. 열여섯 살이 되어 청년과 마주한 때, 사내는 준비는 끝났다고 판단했다. 청년과의 대화로 전쟁이 이미 일어났음을 확인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꽤 자신에 차 있었던 것 같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정예병을 결성하는 즉시 출격시킬 수 있을 정도로, 회사도 그 자신도 준비되어 있다고.

  전사들은 잘 싸워주었다. 열 명도 되지 않은 전사가 전쟁을 끝낸다는 기적을, 정예병은 이루어냈다. 그러나 그 기적이 지휘관의 능력 덕분이었을까. 사내는 어느 때보다도 자신이 없다. 옛 기억 속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머리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탓이다. 책임은 그쪽이 훨씬 무겁답니다. 라고 했던가. 웬만해선 직접 전투에 나서는 일이 없는 지휘관이기에 부상 하나 입지 않고 돌아온 사내였지만 출격할 당시 그의 손엔 여덟 명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제대로 책임졌던가? 전사 중 일부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고, 청년은 생존 이상의 목표를 이루진 못했다.

  조금 더, 준비되었다면. 지휘관의 책임을 좀 더 깊이 이해했다면. 뒤늦게 머리를 때리는 생각이었다. 그랬다면 열세 살 소년의 소망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루어주었을 텐데. 사내는 무거운 마음으로 자료실을 빠져나왔다. 가능한 빨리 집무실 벽에 걸어둔 그림을 떼어내자고 생각하고서. 그림을 들여다볼수록 과거의 자신에 대한 복잡한 감정에 휩싸일 게 뻔했다. 굳은 얼굴의 열세 살 소년, 혹은 그 소년의 바람을 완벽하게 이뤄주지 못한 열여섯 청년을 그 속에서 읽어내고서.

  어쨌건 사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집무실이었다. 어른이 되기로 결심한 때부터 그가 있어야 했던 곳. 그가 성취를 쌓은 장소인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 곳. 이제 너무도 익숙한 집무실의 문을 열어젖히려던 때.

  사내는 닫힌 문 너머로 희미한 말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들었다. 오늘 방문하기로 한 사람은 없었고 개인적인 손님이 찾아오기도 이른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앳된 티가 난다는 것이 수상쩍었다. 사내는 방문자가 놀라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열었고.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 있단 나카지마의 말이 사실이었군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벽 근처에 팔짱을 끼고 선 어머니는 막 들어온 아들에게 살짝 눈짓한 후 바로 시선을 저 앞으로 옮겼다. 어머니가 바라보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자, 앞이 잘린 말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앞에, 익숙한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하나는 사내의 동생. 다른 하나는 바로 조금 전, 자료실에서 만난 사람. 열세 살의 그.

  청년의 능력은 이번 그림에도 통했다. 사내가 바라보고 있을 땐 아무런 변화도 없었는데, 그가 자리를 비운 때 그림 속 소년이 깨어났다. 이렇게 마주하고 싶진 않았으나 사내는 그 환상을 돌려보낼 길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피어오르는 의문을 삼키고 어머니와 함께 옛 모습을 감상했다. 소년기의 자신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었다. 그것도 갇힌 기억이 아닌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신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동생을 상냥하게 감싸주는,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 아이에게 시시한 답변이라도 돌려주려고 노력하는 소년.

  저 시절의 사내에겐 동생이 없었다. 당연히 동생도 저 시절의 그를 몰랐다. 그렇게 서로 형제였던 적이 없던 두 아이는 의외로 잘 엉겨 있었다. , 서로 만나는 미래를 알고 있는 것처럼.

  사내가 사장이 된 이후 어머니가 데려온 동생은 내내 사내에게 의지했다. 작은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세계란 사내의 손밖에 없는 것처럼 굴면서. 그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언제나 잘 대해주려 노력했지만, 동생이 이렇게나 기쁜 얼굴로 타인을 만나는 건 사내로서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아이끼리는 통하는 것인지. 아니면 열세 살 소년의 순수한 친절이 동생에게 잘 닿은 것인지. 어느 쪽이건 둘의 평온한 모습은 사내의 마음을 안정시킨다.

  “……살아 움직인다는 이야기가 제 그림엔 통하지 않길 바랐지만, 레이라에겐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사내는 낮게 속삭였다.

  “어릴 때의 모습을 마주하기 두려웠나요?”

  “조금은요. 지난 시절을 보는 건 미숙함도 잘못도 봐야 한단 뜻이니까요.”

  솔직한 답에 어머니는 아들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주었다.

  “난 조금 안쓰러웠어요. 저 그림, 얼굴이 잔뜩 굳어있더군요. 왜 하필 굳은 얼굴일까 생각해봤는데, 저 시기에 찍힌 레이지의 사진이 전부 웃음기 하나 없는 것이란 게 떠올랐지요.”

  “아카바 레오에 맞서겠다고 생각한 시기였으니까요. 무장하는 게 당연했어요. 좀 더 강하게 마음을 먹고 무장했다면 어쩌면 더 나은 결과가…….”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나요?”

  불쑥 들어온 말에 사내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가 어른이 되려 분투하던 것을 지켜보았던 어머니는, 그의 동지이기도 했던 어머니는 부드러운 웃음을 걸치고 말을 잇는다.

  “그 열세 살짜리 아이가 하트랜드의 전쟁을 끝내고 세계 곳곳에 밀려들 뻔했던 침략군을 막았어요. 그때 결심한 걸, 이뤄냈잖아요. ‘모두를구하진 못했어도 많은 사람의 미래를 지켜냈어요. 내 기대 이상의 성과였죠.”

  그러니 이제, 스스로를 용서해줘요. 난 내 아들이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요. 따라붙은 말에 사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짐을 흘려내고서. 오래된 기억 속 그가 제힘으로 길을 찾도록 거듭 질문을 던졌던 어머니는, 이제 그가 이뤄낸 성과를 인정한다. 단순히 위로해주는 게 아니라 기대 이상이었다고 칭찬해주기까지 했다. 일찍이 어른의 모습을 덮어썼고 나이로도 성인이 된 사내는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다음 순간, 그림이 불러낸 열세 살 소년이 거짓말처럼 허물어졌다. 마법의 시간이 끝난 것이다. 레이라. 사내는 혼자 남은 동생을 불렀고, 동생은 바로 그에게 달려와 안겼다. 작은 몸을 감싸주고서 사내는 물었다. 좋은 시간이었니?

 

*

 

  통신기가 요란스럽게 진동했다. 동생과 어머니가 돌아간 후 서류를 검토하던 사내는 통신기를 바로 집어 드는 대신 화면에 뜨는 이름부터 확인했다. 뜻밖에도 상대는 사내에게 어릴 적의 초상화를 안겨준 화가. 웬만해선 먼저 연락해오지 않는 청년이었다. 제대로 말을 섞은 것은 수년 전이 마지막인데, 아직 연락처를 지우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림이 배송된 지 오래지 않아 통신을 걸어온 것을 보면 어쩌면 사내에게 감상을 듣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한 사내는 통신기를 들었다.

  「그림은 잘 받았나?

  예상대로, 인사조차 생략하고 청년이 꺼낸 첫마디는 그림 이야기였다. 언제나 본론부터 시작하는 버릇은 참 변함없다고 생각하며, 사내도 바로 답을 돌려주었다.

  「물론. 이런 의뢰를 받았다면 나한테 먼저 알려줬으면 좋았겠지만.

  「그야 넌 미리 알리면 그림을 받을 리 없는 인간이니까. 내 그림은 소름 끼친다며.

  「그렇게 말했던가? ‘소문이 사실이라면 좀 섬뜩한데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빙빙 돌려 말해봤자 내 그림을 달가워하지 않는단 건 분명하잖아. 의뢰인이란 사람도 그런 건 알고 있었을 텐데.

  통신기 화면에 떠오른 청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여러 정황상 의뢰인이 내부인이라 거의 확신하게 된 사내이지만 막상 의뢰인 이야기가 나오니 진실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지켜보는 이가 없는데도 사내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의뢰인을 밝힐 수 있나?

  「뻔하잖아. 열세 살짜리 아카바 레이지를 굳이 그림으로 보고 싶어 할 사람이라면.

  「회사의?

  「네 회사의 이름으로 의뢰하긴 했지. 중요한 것도 아니니 그쯤 알아두라고.

  그 말로 의뢰인에 대한 확신은 굳어진다. 선물의 의도를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사내에게 긴장을 안기려는 의도도, 그의 과거를 들추고픈 마음도 없이 순수하게 그의 어린 시절을 담고 싶었던 것이다. 소년기의 사내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그렇다면 이제 사내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액자 뒷면에 적힌 문구의 뜻. 청년이 자필로 메모를 남긴 이유.

  「자료랍시고 받은 사진이 죄다 무표정해서 우스웠다고. 열세 살짜리를 보는 건지 석상을 보는 건지.

  「잠깐, 쿠로사키. 의뢰인이 그 시절에 대해 설명해주던가? 그때 내가 어떤 일을 겪었다고?

  「듣지는 않았지만 대충 알아. 그때 아카바 레오를 만나고 돌아왔다며.

  「그럼 넌 내가 그때의 마음을 안고 살길 바란 건가? 최근 내가 엑시즈에 소홀하다고 생각해서?

  열세 살을 기억하라고 적었잖아, 쿠로사키. 덧붙인 말에 청년은 낄낄댔다. 하긴, 너는 너무 많이 생각하는 버릇이 있지. 돌아온 말엔 오히려 장난기마저 밴 듯하다.

  「의뢰인이 말하길 네가 그때를 기억하기나 할까 의문이라더군. 정말로 기억에서 지우고 산다면 너무 끔찍한 일이다 싶어서 의뢰를 받기로 했어. 의도를 명확히 밝히려고 열세 살을 기억하란 메모를 남겼고. 그뿐이야.

  의문이 풀렸다. 그림과 연결된 사람 중 사내를 탓하려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의뢰인도, 그림을 그려낸 청년도 그가 그 시절을 나쁜 감정 없이 기억하길 바랐다. 사내 역시 그때의 결심을 완전히 이뤄주지 못한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썩 괜찮은 결말이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동생이 어릴 적의 자신과 제법 사이좋게 어울렸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좋은 시간이었냐고 물었을 때 동생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에 무거운 짐을 잔뜩 얹고 있었던 열세 살 소년은, 미래에 만나게 된 아이에게도 행복한 기억을 안겨주었다. 오늘만은 사내도 청년이 그려낸 환상에 감사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네 그림, 전부 살아 움직이진 않는다고 알고 있다. 능력 발동의 조건이 있나?

  「글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간절히 바라는 것아닐까 생각해. 이번에 네가 받은 건 어땠지? 인물이 움직이던가?

  「, 그래. 레이라와 만났어. 그 그림을 사장실에 걸어두자고 조른 것도 레이라였으니까, 아마 그 애의 소망이 반영된 결과겠지.

  좋은 기억이 생겼을 거야. 네 덕분이군. 차분한 목소리에 청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보다 부드러워진 얼굴을 보고 사내는 청년이 본디 아이에겐 관대한 인간이었음을 새삼 떠올렸다.

  「그래서 그림은 계속 걸어두려고?

  「아니. 오늘 하루 충분히 과거를 들여다보았으니 이제 치워두려 해. 소문대로 너무 생생한 그림이라, 보고 있으면 계속 그 시절에 머물 것 같아서. 그래도 네 작품이니까 계속 간직하도록 하지.

  「넌 자신에게 너무 냉정하다니까.

  「천성인 모양이지.

  그림을 떼어낸 자리에 흘깃 시선을 두고서 사내는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았던 기적도 하룻밤의 꿈으로 남길 바라는 건 그 나름의 고집이다. 어른의 모습을 덮어쓰면서 어떤 일에건 약해지지 않으려 했던 각오가, 그러한 엄격함으로 굳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오래 즐기지 못한다고 아쉬워할 것은 없다. 사내에게 오늘의 일은 충분히, 좋은 경험이 되었으므로. 그림을 매일 돌아보지 않아도 오늘의 감상을 선명하게 기억할 자신이 있으므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쿠로사키. 이번 그림은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

  솔직하게 감사를 표한 사내는 청년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걸 보고 통신을 끊었다. 인사는 진심을 담은 몇 마디로 충분하단 걸, 두 사람 모두 안다.

  그림을 걸어두었던 자리엔 아직 공간이 충분하다. 이미 작품을 걸었던 곳이기도 하거니와 의자에 앉으면 바로 보이는 자리이니 새로이 액자를 걸어도 좋을 것이다. 이번엔 어떤 것을 걸어두는 게 좋을까. 과거를 관대하게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으니 현재를 상징하는 작품을 건다면 어떨까. 최근 큰 성공을 거둔 프로젝트 사진을 걸어두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새로운 액자를 고민하는 사내의 얼굴에, 그림자는 더 비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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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

[슌+레이] 침몰

2021. 4. 30. 21:34 from 01

 

  여자는 암흑 속에 홀로 앉아있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곳에 장치의 가동음만 간간이 울렸다. 그것은 그녀가 앉은 자리가 보드라운 풀밭도 은신처도 아니라 거대한 장치의 바닥이기 때문이리라. 심해가 어두컴컴하듯, 떨어진 생명을 놓아주는 법이 없는 이 장치도 너무도 깊어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여자가 움직이지 않고 앉은 것은 저를 인도할 빛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진 것도 아니다. 이곳이야말로 여자가 선택한 종착점, 그녀의 무덤이어서였다.

  초월적 존재인 여자는 인간의 몸을 빌려 세상에 강림했다. 세계를 위협하는 악마를 걷어내기 위함이었다. 인간의 욕망으로 탄생한 악마는 결국 여자가 두른 자연의 힘에 패했다. 여자가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구원자로 추앙받는 미래가 준비되었겠지만, 초월자인 그녀가 택할 길은 하나뿐이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 빌려온 육신을 벗고 환상이었던 양 사라지는 것. 여자는 세상에 평화를 선물하고는 자신이 강림했다는 흔적조차 지울 생각이었다. 그 말끔한 종말은 이곳에서 실현될 터였다. 그녀가 고른 무덤에서.

  악마를 물리쳐 세상을 구한 여자가 사람들의 기억에 남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가 한때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었던 시절, 세상에 광풍이 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악마가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모든 생명이 꺼지기 직전, 여자는 욕망을 정화하는 자연에너지로 무장해 악마에 맞설 심판자가 되었다. 인간의 욕망에 대조되는 자연의 힘을 두른 이상, 그 사용자도 인간일 수 없었다. 그 날 여자는 인간의 삶을 잃고, 초월자가 되었다.

  여자가 두른 힘은 악마를 날려버리고 세상을 재구성했으나, 인간은 모두를 구한 심판자를 기억할 수 없었다.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초월자를, 모두의 머리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단절된 과거가 된 여자는 이 세상에서 자리를 차지해선 안 된다. 이미 한 번 그녀를 <인간으로> 되돌리려는 사람이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과거 악마를 물리칠 때 여자는 악마가 다시 힘을 얻을 것을 우려해 세상을 네 개의 차원으로 나누고 각 차원에 악마의 파편을 던졌다. 다음은 자신의 분신을 네 차원에 흩어버리는 일이었다. ‘인간이었을 때의모습을 덮어씌워서, 인간의 틈에서 살아가도록. 그것은 생에 대한 여자의 뒤늦은 집착이 아니라, 일종의 보험이었다. 각 분신에게 자연의 힘을 안기고, 인간의 모습을 덮어쓴 채 악마의 분신을 통제하게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몸으로 살아갈 악마의 파편들이 다시 뭉치는 일이 없도록.

  최악의 경우, 네 명의 분신을 매개로 본체인 그녀가 세상에 내려오도록.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여자가 심판자가 되었던 날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녀를 지웠는데, 어느 날 단 한 사람이 그녀를 떠올려낸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여자의 아비이기도 했던 그는 그 날부터 <이전 세계>에 집착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그 시절 그대로 되돌리면 세상을 위해 몸을 바친 딸도 돌아오리란 망상에 빠진 탓이다. 그렇게 그는 세계를 파멸시키기 시작했다. 폐쇄적인 차원 하나를 거점 삼아 군대를 키우고, 다른 차원을 침략하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그는 빠르게 죄를 쌓았다. 타인을 짓밟는 침략자의 등장은 부활의 때만을 기다리던 악마를 자극했다.

  마침내 침략군의 거점에서 악마는 부활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틈에서 살아온, 자신들의 운명도 몰랐던 파편들을 제물로. 그 순간 여자는 운명을 정했다. 세상의 파멸을 관망하지 않고, 심판자로서 나서기로. 네 명의 분신을 삼키고, 그들에게 나눠주었던 자연의 힘을 돌려받은 여자는 세상을 다시 구해냈다. 세계의 혼란을 바로잡고서 여자는 결심했다. 이번에야말로 인간의 기억에 남지 않겠다고.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앞으로는 인간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겠다고.

  ‘기억하는 이때문에 파멸할 뻔한 세상을 보았으니 이번엔 같은 비극이 반복되게 해선 안 된다. 여자는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심판자>를 잘라냈다. 평범한 소녀처럼 살아온 분신들의 주변인에게서 그들의 기억을 지워내는 것도, 조금 더 손이 가긴 했으나 전부 마쳤다. 이제 암흑 속에서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그녀가 택한 무덤은, 이 차가운 장치의 본래 목적은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것. 모든 것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 인간의 모습을 덮어썼을 뿐인 여자가 이곳에 머물면 곧, 빌려온 육신도 흩어질 것이다. 이것은 아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결말이기도 하다.

  여자의 아비는, 침략군을 키워낸 남자는 전쟁으로 희생시킨 이차원 사람들을 이곳에 던져넣었다고 한다. 희생자의 영혼은 종잇조각에 가두고 생명력만 긁어내어 여자를 부활시킬 에너지로 쓰려 했다는 것이 아비의 이야기. 초월자를 인간으로 다시 탄생시킨다니, 처음부터 실패할 계획을 위해 한 차원 단위 사람을 동력원으로 삼은 것인가. 거기에 악마를 막으려 세상에 보냈던 분신 넷까지 딸의 조각을 통합시키겠다며 이 장치에서 짓이기려 했다고 들었다.

  한 인간이 벌인 일이 너무도 끔찍했기에 여자는 인간에 대한 기대를 잃었다. 한때 존경받는 기술자였던 아비가 얼마나 극적으로 타락했던가. 딸의 선택을 믿지 않고, 딸이 구한 세계를 파멸에 몰아넣다 악마까지 부활시켰다니. 욕망에 찌든 아비에게서 여자는 과거의 유능한 기술자 대신, 악마의 충직한 지원군을 보았다. 하필 이 장치를 <무덤>으로 택한 것은 타락한 아비에 대한 냉소이기도 했다. 이곳은 그가 설계한 장치였으므로.

  여자는 아비가 만든 요람에서 아비를 완전히 떠날 것이다. 아비로 대표되는 인간은, 다시는 그녀란 초월자를 만날 수 없으리라. 인간의 모습을 벗는 순간부터 초월자의 좌에서 내려오지 않기로, 이미 결심했으니.

  암흑 속에서 여자는 천천히, 인간에게 희망을 품었던 때를 추억한다. 초월자가 되기 직전, 인류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아비 대신 악마에 맞서야겠다고 생각한 때. 분신의 눈을 빌려 본 세상이 한동안 평화로웠던 때. 악마의 조각이었던 소년이 사악한 충동을 누르며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겠다 결심하는 걸 목격한 때. 그리고 바로 그 소년이 침략군을 설득해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게 했던 때 그런 순간도 있었음을 추억해주는 건 초월자로서의 마지막 자비였다. 이제는 돌아보지 않을 인간을, 아름답게 기억하기로 하는 것이니.

  아마 여자가 마지막 희망을 꺼낼 즈음엔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것이다. 반복적으로 울리던 가동음이 점점 잦아드는 것으로, 장치가 서서히 둔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동이 느려진단 것은 작업이 거의 끝나간다는 뜻. 여자의 원래 모습, 초월자의 모습에 조금씩 가까워진다는 것. 여자의 몸이 자꾸 가벼워지는 것도, 빌려온 육신이 서서히 흩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초월자에겐 불필요한 형체도, 이젠 너무도 낯선 인간의 몸도 완전히.

  거기서 생각이 멎었다. 장치의 가동음마저 희미해진 곳에, 여자만이 머무는 <무덤>에 갑자기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 것이다. 생명을 빼앗길 뻔했던 희생자는 전부 원래 위치로 돌려보냈다. 침략자의 끔찍한 유산을 굳이 시험하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무언가 닿을 리가 없을 텐데.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자는 암흑 속에서 빛을 피워냈다. 이 무시무시한 장치에 떨어진 것은 무엇일까. 생명이든 사물이든 제자리로 돌려보내야겠단 생각으로 주변을 살피던 여자는,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굳어졌다.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것은, 사람. 인간이었던 때의 여자와 거의 비슷한 나이의 청년. 그녀의 종말을 방해한 자는 하필 그녀와 진득하게 얽혔던 남자였다.

 

*

 

  진득하게 얽혔다는 말에는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청년을 너무도 잘 알았지만, 청년은 그녀와 제대로 마주한 일도 없었으니. 냉정하게 판단하면 청년은 그저, 본의 아니게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을 뿐이었다. 삶 대부분을, 운명처럼 여자에게 바치며. 작은 아이가 청년이 되기까지의 십수 년. 청년이 여자와 얽힌 긴 시간을, 여자는 초월자가 아닌 인간의 눈을 빌려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세상에서 분신들을 거두어가기 전, 악마가 부활하기 전까지. 여자가 관찰한 청년은 누이를 사랑하여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지키려 드는 오빠였다.

  청년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오빠의 모습인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여자가 동생의 눈으로 줄곧 청년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네 개의 차원에 흩어진 네 명의 분신, 그 중 하나가 청년의 누이였다. 분신의 삶은 그녀에게도 전해지므로 여자는 오빠인청년을 오래도록 지켜본 것이 된다. 물론 평범한 인간인 청년이, 누이가 초월자의 분신이었음을 알 리가 없다. 그는 동생과 함께하는 내내 동생을 사랑했을 뿐, 동생의 뒤에 선 여자를 보지 못했다. 여자가 나타나며 누이를 잃게 된 그는 왜 동생이 세상에서 사라졌는지도 모를 것이다.

  가여운 남자. 다시는 피어오르지 않을 줄 알았던 연민이 여자의 머리를 짧게 스쳤다. 그나마 모두의 기억을 지운 것이 다행이었다. 누이에 대한 기억이 삭제된 청년이라면 남은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잃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 없이. 여자는 쓰러진 청년에게로 조심스레 다가섰다. 깊은 바닥에 그대로 떨어진 탓인지, 청년은 추락한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없었다.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하는데. 인간이 이곳에 계속 있다간 자아를 잃고 흩어질 텐데. 걱정이 든 여자가 청년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청년이 힘겹게 눈을 떴다. 맹금을 연상시키는 금빛 눈과 마주한 순간 여자는 속에서 튀어나올 뻔한 호칭을 삼켜야만 했다. 한때 그녀의 분신이 그를 불렀던 이름, 지금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할 호칭을. 그는 그녀를모르고, ‘그녀는그가 만나려는 사람이 아니다.

  여자가 할 일은 청년이 잊어야 할 사람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이곳에서 탈출시키는 것. 보통의 인간이라면 모를까, 초월자인 그녀에게 불운한 남자 하나쯤 바깥으로 보내주는 것은 어렵지도 않다. 다만 그 전에, 추락의 여파로 다쳤을 청년을 치료해주어야 한다. 여자는 가만히 몸을 숙여, 청년의 뺨을 어루만졌다. 초월자의 손길이 닿았으니 치명상만 아니라면 곧 회복하리라. 이미 많은 것을 잃은 인간에게 이 정도의 자비는 베풀어도 될 것이다.

  과연, 여자의 손이 닿은 지 오래지 않아 고통으로 일그러진 청년의 표정이 펴졌다. 핼쑥한 얼굴에도 핏기가 도는 것 같다. 어때, 몸이 편해졌어? 당신이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줄까? 초월자의 상냥한 말에 청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굳게 닫혀있던 입술도 열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공간을 울린 것은 감사 인사도, 여자의 물음에 대한 답도 아니었다.

  “찾아서, 왔어.”

  엉뚱한 말이었다. 동시에 불완전한 답이기도 했다. 무엇을, 하고 묻기도 전에 청년은 몽롱한 얼굴로 빠진 부분을 채워주었다. 루리. 소리를 내는 대신 입모양으로 그린 이름을, 여자는 분명히 보았다. 그 이름을 확인한 순간 여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서 지워진 이름을, 그는 어떻게.

  그것은 사라진 사람의 이름이었다. 여자의 분신이자, 청년의 누이였던 소녀의 것. 세상을 두 번째로 구한 날 여자는 저와 연관된 기억을 전부 지웠으니, 분신에 대한 기억도 세상에 남아있어선 안 되었다. 분명히 그럴 터인데. 누이와 너무 깊게 얽혀서일까, 청년은 누이의 이름을 여자 앞에서 흘렸다. 동생의 이름을 입모양으로만 그린 것이나 이름을 흘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면 청년도 확신은 없는 듯했으나, <없는 사람>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청년의 삶에서 큰 위치를 차지한 누이는, 세상에서 지워지고도 오빠에게 잔상을 남긴 모양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여자는 청년의 이전 말도 신경이 쓰였다. 누이를 언급한 것과 찾아서 왔다는 말을 연결하면 청년이 이곳을 찾은 이유도 조금은 짐작이 갔다. 청년은 누이의 흔적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다. 침략군이 그의 누이를 내던진 곳이 바로 이곳. 그 가여운 소녀가 구원자의 제물이 되어 흩어진 것도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청년은 동생을 찾다 운 나쁘게 여기에 떨어진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분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판단하자면 청년은 단정한 인상과는 대조적으로 제법 무모한 데가 있었다. 누이를 구할 길을 찾으려 적군 수장의 아들이 이끄는 정예병에 들어간다거나. 일대 다 특화의 무기를 쥐었단 이유만으로 다수의 적에 단신으로 맞선다거나. 적군에게 납치된 동생을 구하려 성치 않은 몸으로 적진에 뛰어들기도 했다.

  전부, 소중한 사람을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얼마든 목숨을 던질 수 있다는 각오가 무모한 행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 청년이기에 여자는 한 가지 슬픈 가능성도 생각하게 된다. 누이의 흔적을 따라 헤매던 청년이 여기서 흔적이 완전히 끊어졌음을 눈치챘다면? 누이의 종말을 직감한 그가, 절망에 빠져 이 깊은 장치에 스스로 뛰어든 것이라면?

  그렇게라도 누이와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물론 답은 알 수 없다. 청년이 발을 헛디뎌 추락한 것인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던진 것인지. 확실한 것은 그가 여자의 무덤이 될 뻔한 곳에 떨어졌고, 그렇게 여자의 영역에 끼어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목적이 있으니까, 당장은 돌아갈 수 없겠지. 청년의 말에 여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 루리가 있다고 생각해?”

  “어쩌면.”

  “있다고 확신도 못 하는 사람을 왜 찾아야 하는데?”

  루리가 당신의 무엇이길래? 나긋한 물음에 청년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고를 뿐이었다. 침묵이 망설임보단 의문의 증거였음은, 한참이나 지나 흘러나온 답에서 알 수 있었다.

  “잘 모르겠어.”

  “루리를 찾아왔다면서, 왜 몰라?”

  집요한 질문에 청년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기억이, 제대로 안 나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혼란이 깃든 것을 여자는 바로 눈치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름을 아는 것과 그 이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 누이를 너무도 사랑했던 청년이 그 이름을 붙들고 있었을 수는 있으나, 지워진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기억해내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만일 청년이 누이의 이름과 그와의 연결고리를 자랑스레 설명했다면 여자는 자신의 힘을 의심해야 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서 구원자와 그 분신들의 기억을 지우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이니.

  “됐어. 나에게 꼭 설명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이제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자. 라고 말하려던 때, 청년이 여자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다시 만나고 싶었던 사람. 루리가 나에게 무엇이냐고, 물었었지.”

  기억은 뚜렷하지 않지만, 그건 분명해. 제법 다급하게 흘린 말에 여자는 미지근한 웃음을 걸쳤다. 저에게 동생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청년이 그렇게라도 누이의 이름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여자는 그에게서 누이의 그림자를 지워야 했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끌어안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도 세상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곳이 아닌, 모든 생물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이곳에서.

  “참고로 여기엔 당신이랑 나밖에 없어. 기다린다 한들 누군가 오지도 않을 거고. 여긴 꽤 고약한 장치여서 떨어진 생물을 죄다 천천히 녹여버리거든.”

  부러 냉정하게 말한 것은 동생에 대한 청년의 미련을 끊어, 그를 바깥으로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간절히 찾던 사람을 만날 수 없단 슬픔에 젖더라도, 앞으로 계속 그 상실을 곱씹더라도, 청년은 살아서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이곳에 머물다간 차차 자아를 잃다 마지막엔 육신마저 바스러질 테니.

  그렇게 먼지처럼 흩어지기엔 청년의 삶은 너무 불행했다. 그의 삶을 무너뜨린 것은, 침략. 여자의 아비가 일으킨 전쟁이 청년의 고향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 날 이후 어울려 살던 이들은 전쟁의 광풍에 휩쓸려 사라졌고, 친우는 악마를 부활시키는 제물이 되었다. 목숨을 던져서라도 구하고 싶었던 누이도 세상에서 지워졌으니, 극도의 불행 속에서 청년은 제 몸만 겨우 지킨 셈이다. 그런 사람이 이곳에서 흩어지게 둘 수는 없었다. 한때 인간을 믿었던 초월자로서, 본의 아니게 청년에게서 누이를 앗아간 자로서. 여자는 그에게 미래를 안길 의무가 있었다.

  당신이 밖으로 나가고 싶다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어. 어때? 여자는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택해야 할 답이야 정해져 있다 침략군에 맞서 끝까지 생존한 청년이라면,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불길에도 뛰어드는 무모함이 걸리긴 하나, 아무리 무모해도 기억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서까지 목숨을 바치진 않을 터였다.

  그런데 청년의 반응은 어쩐지 미적지근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여자를 바라보다가, 답은 하지 않고 저와는 관련 없는 것을 묻는 청년이었다. 뭐든 녹여버리는 곳이라면서. 당신은 나가지 않을 생각이야? 불필요한 질문이란 말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여자는 짤막하게 답했다.

  “난 여기를 떠나선 안 될 이유가 있어서 말이야.”

  “그럼 나도 여기 있어야겠어.”

  당신이 계속 있을 거라면 조금은 같이 있어도 되겠지. 무심한 어투엔 망설임은커녕 한 가닥 불안도 묻어있지 않았다. 여자의 경고도 제안도, 조금도 와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기서 여자가 느낀 것은 하나. 그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여자가 굳이 냉정하게 짚어준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체념인지 태평함인지 모를 태도는 초월자인 여자조차 당혹감에 빠트릴 정도였다.

  “이런 곳에선 얼마 못 버텨.”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을 아꼈던 사람들은?”

  당신이 결국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면? 그 사람들은 돌아오지도 못하는 자를 평생 기다리게 될 텐데? 쉼 없이 몰아치는 말을 방어하는 대신, 청년은 손을 들어 저 위쪽을 가리켰다. 이것 봐, 천장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지. 느릿하게 흘린 말에 여자의 시선은 청년의 손가락이 향한 쪽으로 옮겨갔다.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바닥이 너무 깊은 탓에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새삼 끔찍했다. 그런 곳이기에 이곳에 떨어진 이들은 전부, 제힘으로 나갈 수 없었을 텐데. 청년은 가벼운 목소리로 덧붙인다. 그런데 난 저 위에서 뛰어내렸거든.

  “사람이 이렇게나 깊은 곳에 뛰어내린다면, 둘 중 하나일 거야. 죽으려 했거나, 뛰어내리다 죽을지 모르지만 안으로 꼭 들어가야 했거나.”

  “……죽음을 각오하고 온 거니까, 상관없다고?”

  청년은 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정한 얼굴에 꼭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빈 웃음이 걸쳐져 있어 여자는 힘이 풀렸다. 아마도 그는 전부 버리고 왔으리라. 어쩌면 고통으로 얼룩진 삶을 중단하고 싶어서. 혹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를 찾아야 할 것 같아서.

  이런 사람이라면 어차피, 강제로 내보내도 바로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 것이다. 고통에 눌려 제대로 살지 못하거나, 찾아야 할 사람에 매여 살지 모른다. 청년을 강제로 내보내 그렇듯 방황하게 만드는 것보다야 고집을 꺾을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리는 게 나으리라. 빠르게 판단을 마친 여자는 이곳에서 종말을 맞으려던 계획을 조금 미루기로 했다. 일단 청년이 이곳에 있기로 선택한 이상, 그를 혼자 둘 수는 없었으므로.

  “그냥 천천히 죽어가는 게 아냐. 당신은 스스로를 잃게 될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마지막 책임감으로 건넨 경고에 청년은 건조하게 답했다.

  “어차피 지금도 나한테 남은 건 없어.”

  기억조차도.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선 청년은 그대로 <탐색>을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찾아야 할 대상도 모르면서 그저 막연하게 걸음을 옮기고 주변 풍경을 눈에 새기는 것이다. 미로를 헤매듯 위태로운 뒷모습을 보고서 여자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이곳은 그녀의 무덤이 되기 전, 그의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고.

 

*

 

  청년과 함께하면서 여자에겐 시시한 취미가 하나 생겼다. 청년의 옷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청년의 바짓단은 조금씩 바닥에 끌렸고, 그의 몸을 감싸던 코트는 갈수록 하반신을 더 많이 덮었다. 물론, 옷이 마법처럼 커질 리 없다. 문제는 청년에게 있었다. 그의 몸이 조금씩 작아지기에, 그가 걸친 옷이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의 키가 자꾸만 줄어드는 건, 청년이 머무는 장소의 특성 탓이다. 이곳은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동시에, 모든 것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장소. 청년처럼 보통의 인간이라면, ‘태어날 때의 모습에 차차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다르게 말하면, 청년이 어려지고 있다는 뜻. 처음 보았을 때 여자보다 살짝 더 컸던 키는 이제 여자보다 한 뼘이 작았다. 나이로 따지면 두어 살쯤 어려진 듯했다. 외형만 변화하는 것은 아니어서, 여자는 청년과 말을 섞을수록 그의 어투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구사하는 문장은 짧아지고 어휘는 단순해지며, 비유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정말로 몇 살 어린, 소년 시절의 그로 돌아간 것처럼.

  그 선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육신과 정신만 어려지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쌓아온 모든 것이 차차 흩어지게 된다. 기억의 손실이라도 막으려면 최대한 빨리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하리라. 아마 청년도 알고 있을 터였다. 이곳에 청년이 찾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여자가 피워준 불빛을 길잡이 삼아 장치 속을 헤매도, 그토록 찾던 <루리>는커녕 타인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언제쯤 그 쓰린 현실을 인정할까. 그리고 여자에게 이제 못 견디겠으니 내보내달라고 애원할까. 여자가 먼저 청년을 돕지 않는 건 그의 절망을 방관한다기보다, 그가 자의로 도움을 구할 때를 기다리고 있어서였다.

  그런데도 청년은 아직껏 여자 앞에서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희망을 놓고 싶지 않다는 발버둥인지 실패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알량한 자존심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여자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건 청년이 도움을 구하지 않는 이유가 아니라 그의 얼굴에 걸리는 평온함이었다. 이제 더 탐색할 곳도 희망을 걸어볼 돌파구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청년은 시종 여유로웠다.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라도 되는 양.

  여자는 청년의 덤덤함이, 절망스러운 현실에도 자주 상기되는 그의 뺨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곳을 뒤지며 재미있는 과제에 매달리듯 웃는 그의 모습이 싫었다. 당신, 조금씩 작아지고 있어. 내가 여기 있다간 녹아갈 거랬잖아. 결국 참지 못한 여자가 한숨을 쉬며 던진 말에도 청년은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시시한 말 한마디 돌려주지 않고서, 몸을 숙여 슬쩍 바짓단을 접었을 뿐이다.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흔적을 덮으려는 듯.

  “답은 얻은 거야?”

  그런 청년을 눈에 담고서, 여자는 물었다. 그제야 청년은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답?”

  “당신이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 저번엔 설명이 부족했잖아.”

  루리는 누구인지, 왜 찾아야 했는지, 그래서 여기 머문 소득은 있었는지. 소득이 없었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이제는 답해줄 수 있을 텐데. 청년에겐 결코 가볍지 않을 의문을 하나하나 늘어놓으며 여자는 반응을 기다렸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묻는다면 웬만해선 청년도 무어라 답할 것이다. 혹 답을 피한다 해도, 저에게 놓인 현실을 한 번쯤은 깊게 생각하리라 기대할 수 있다 청년이 무엇이든 선택할 때까지, 여자는 인내심을 발휘할 생각이었다.

  뜻밖에도 침묵은 길지 않았다. 여자가 속으로 10까지 세었을 때, 청년의 입술이 열렸다.

  “답이라, 어느 정도는 찾았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루리를 만나진 못했지만,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아가는 것 같아. 희한하게, 이 주변을 돌다 보면 바라지 않아도 떠오르는 것들이 있거든.”

  꿈을 꾸듯 몽롱한 목소리로 청년은 말을 잇는다. 그 속에서 언제나 나타나는 사람이 있어. 내 손을 잡고 뒤따라오는 아이. 아마도 나보다 키가 두 뼘은 작아. 그만큼 작은 손으로 내 손을 꽉 쥐고선 놓을 줄 몰라. 띄엄띄엄 흘리는 말이 누구를 그려내고 있는지야 뻔했다. 오빠의 손에서 자라난, 그의 누이.

  “……얼굴은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지만 내가 그 애를 아낀다는 건 알겠어. 나도 그 애를 놓칠까 두려워하고 있으니까. 혹시나 내 손을 놓쳐도 찾을 수 있게 그 애에게 이름표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이름을 쓸 수 없더라고. 쓰려고 하면 머리가 너무 아파. 이름도 그 애도 기억해내면 안 되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

  청년이 횡설수설하는 건 겨우 떠올려낸 것을 잊기 전에 털어놓기 위함임을, 여자는 바로 알아챘다. 그도 어렴풋이 아는 것이다. 자신의 기억에 큰 구멍이 났다는 걸. 들여다보아선 안 될 부분이 생겼다는 걸. 그럼에도 청년이 억지로 지워진 부분의단편을 떠올려낸 건 무엇 때문일까. 이곳이 누이의 무덤이어서? 아니면 매일 함께하는 여자가 동생의 본체였기에? 본의 아니게 청년에게 누이를 떠올릴 매개가 된 것인가? 여자의 얼굴이 차차 굳어지는 줄도 모르고 청년은 계속 말을 쏟아낸다.

  “하지만 다른 어떤 이름을 떠올려도 그 애에게 들어맞지 않았어. 딱 하나, 맞는 이름이 있었지. 루리. 당신이 말해주지 않았으면 또 잊을 뻔했다니까. 난 루리의 보호자 같은 거였나 봐.”

  왜 청년은 꼭 정답을 찾아내는 것일까. 진실이란 그에게 고통을 안기는 것밖에 없는데. 지금 그가 알아낸 것을 모른 체 넘겨야 그나마 그를 더 불행하지 않게 할 텐데도, 여자는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부족해. 그래서 왜 굳이 루리를 찾아 여기에 왔는지도, 못 찾으면 어떻게 할지도 답하지 않았잖아.”

  “처음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는데, 루리를 떠올리고 나니 알겠어. 바깥에선 찾을 수 없었으니까 여기 온 거야. 그 애가 내 손을 놓치고, 사라져서. 그냥 없어진 게 아니라 모두가 그 애를 잊어버린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었겠지. 그래서 여기로 뛰어내렸던 거야.”

  “여기서 루리의 흔적이라도 느껴서?”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뭔가 그리운 느낌이 들긴 했지만. 처음부터 나는 루리를 찾아서온 게 아니란 생각이 들어. 느릿하게 흘리는 말은 어쩐지 침중했다.

  “하지만 당신은 여기 온 날 나한테 루리를 찾는다고…….”

  “그때 생각난 게 그것밖에 없었겠지. 뛰어내리기 전까지는 찾고 싶었을 테니까.”

  “그럼 뛰어내릴 땐 무슨 생각을 했는데?”

  “……이런 곳에 뛰어내리면 보통은 죽지?”

  “보통은.”

  “목숨은 건졌지만 말이야. 당신이 여기에 떨어진 건 전부 녹아버린다 하니 안심이 되더라고. 아마도 난 루리처럼 되고 싶었던 것 같아.”

  <없었던 사람>이 되는 거지. 그 말에 여자의 혀가 굳었다. 그동안 절망스러운 상황에도 몽롱하게 웃던 청년이,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단 말을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청년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여기에 있다간 스스로를 잃게 된다고 경고한 때 지금도 나한테 남은 건 없어라 답하던 목소리도 머리를 울린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던 것도 헛된 희망에 매달렸던 것도 아니었다. 여자와 똑같은 생각으로 이곳에 머물고 있었을 뿐이다.

  이곳을 무덤으로 삼자고.

  “당신은 여기에 계속 있었잖아. 여자애가, 왔었어?”

  진작 물었어야 했던 걸 이제야 꺼내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자는 청년이 누이의 종말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고 거의 확신했다. 소중한 사람의 존재를 찾는 게 아니라, 짐작한 결말을 확인하듯 묻는 데서 알 수 있었다.

  “당신을 닮은 애가 오긴 했지.”

  “녹아버렸지?”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청년은 울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슬픔을 토해낸다면 감싸줄 생각이었고 왜 미리 말하지 않았냐며 원망을 쏟으면 받아주려 했으나, 그는 지나치게 얌전했다. 지켜보는 여자가 서글퍼질 정도로.

  “역시 잘 온 것 같아. 여기에.”

  짧은 침묵 끝에 흘러나온 말은 건조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하고 묻기는 했지만 여자는 굳이 듣지 않아도 답을 알 것 같았다. 앞으로 청년이 선택할 결말이 무엇인지도.

  “……이건 그냥 내 느낌인데 말이야. 여기도, 위치마다 힘의 강도가 다른 것 같아.”

  과연 청년은 여자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슬쩍 말을 돌려버린다. 장치여서 그런가? 엉뚱한 말을 흘리는 것은 답을 회피하기 위해서이리라.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그녀가 저를 막아설 거라고 짐작한 것이다. 이곳에 떨어진 이후로 청년과 여자는 언제나 의견이 갈렸으니까. 그가 제 몸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무방비하게 내던졌다면, 여자는 자꾸만 그의 선택을 의심하고 그를 내보내려 했으니까.

  “가동음이 크게 들리는 곳, 거기가 중심일까?”

  “아마도.”

  아비가 내던진 제물’, 즉 생명력을 긁어낼 <희생자>가 떨어질 때 유독 빛이 크게 일었던 곳이 있었다. 빛이 필 때마다 따라붙던 웅웅거리는 소리 또한 그곳이 제일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구조를 들여다본 적은 없으나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던 곳이니 일종의 코어였으리라고 여자는 추측한다.

  “그런데 그건 왜?”

  청년이 어떤 감정으로 서 있는지 어느 정도 짐작했기에 여자는 긴장을 풀지 않고 물었다. 앞으로 두세 마디 안에 청년의 계획을 제대로 확인해야 한다. 그가 지독한 전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건, 빠르게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그의 기민한 판단력 덕이기도 했으므로. 청년을 제 편으로 만들어 뜻대로 움직이려 하면 이미 늦다. 어떤 것이든, 청년이 실행에 옮기기 전에 대처하지 않으면.

  여자의 생각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바로 다음 순간 청년이 그녀에게서 돌아서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방향은 <중심부>로 향하는 쪽. 장치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때문에 그 힘도 가장 강할 곳. 중심으로 간다면 청년이 목표하는 것은 뻔하다. 천천히 녹아가는 게 아니라, 빠르게 허물어지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종말을 기다리는 대신 자의로흩어지기로 마음먹은 게 틀림없었다.

  당장 붙잡아야 하는데. 청년과 함께 있느라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바람에 여자는 바로 쫓지 못했다. 뛰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탓이다. 겨우 청년이 향한 쪽으로 뛰기 시작했을 땐 그녀를 기다려줄 리 없는 청년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제발 버텨주었으면. 녹지만 않아줬으면.

  청년을 쫓아 숨이 차도록 달릴 때, 여자의 머리를 지배한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

 

  작정하고 달리는 사람을 붙잡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도 그 사람이 다른 이에게 방해받기 전 죽기로 마음먹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이곳에 더 오래 있었던 쪽이라면 여자였지만 구석구석 헤매며 구조를 익혔을 쪽은 청년. 청년을 바로 막아서지 못한 이상 이 승부에서 불리한 쪽은 명백히 여자였다. 그의 속내를 좀 더 빨리 알아챘다면, 아니면 궤변으로라도 그를 묶어두었다면 달랐을까. 결국 다리가 버텨주지 못해 달릴 수 없게 된 여자는 뒤늦은 가정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눈앞에 그려지는 건 불길한 결말뿐이다. 이곳에 떨어진 이들이라면 당연히 맞이할, 그러나 청년이 지나치게 앞당기고 만 사멸.

  삶의 끝이라 하면 죽음을 연상하겠지만, 이곳의 종말은 그보다 훨씬 냉혹한 것이었다. <처음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이란 표현을,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라 볼 수는 없다. 모든 걸 잃고 소멸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옳다. 한 인간의 탄생에서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돌리면 결국 수정되지도 않은시점에 다다를 수밖에 없을 테니. 그러니 여자는 청년을 붙잡아야 했다. 아마 그녀가 찾아냈을 땐 이미 장치의 효과로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져 있겠지만, 그만큼 내면도 퇴행된 후겠지만 흩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다급한 마음을 비웃듯, 아무리 걸음을 옮겨도 청년의 얼굴은커녕 그의 옷자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에 머리가 마비되려던 때. 발에 채이는 것이 있었다. 가만히 내려다보니 눈에 익은 물품이었다. 저항군의 표식이라며 청년이 목에 매고 다녔던 붉은 스카프. 청년의 투쟁을 상징했던 물품이자, 가치가 사라지고도 몸에 지니고 다녔던 것이 처량하게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짐작 가는 이유라면 두 갈래. 하나는 점점 몸이 작아지는 바람에 몸에 걸친 모든 게 헐렁해진 청년이, 달리던 중 스카프를 흘려버렸을 가능성. 다른 하나는 저항군으로서 누이를 구한다는 목표를 안고 살아온 청년이 동생의 종말을 확인하고서, 저항군의 책임을 놓아버렸을 경우. 어느 쪽이건 청년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단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씁쓸한 현실에 도리어 머리가 차가워졌다. 청년이 스스로를 망가뜨리게 된 계기는 분명 동생의 종말이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 여자에겐 아직 청년을 설득할 거리가 남아있었다.

  그가 몸을 던지기 전, 잠깐이라도 그를 이 세상에 묶어둘 핑계가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여자는 청년의 스카프를 소중히 챙기고서, 손가락을 튕겼다. 생각해보면 굳이 인간의 방식으로 청년을 쫓을 이유가 없었다. 죽기로 결심하고 달리는 사람을 똑같이 달려서 쫓는 게 아니라, 아예 달리지 못하도록 하면 되었는데. 청년과 어울리느라 인간 흉내를 냈을 뿐, 여자는 이미 청년의 삶 전체보다도 더 긴 시간을 초월자로 살았다.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도 휑한 장치 내부에 군데군데 장애물이 생긴다. 청년이 아무리 빠르게 도망친대도 갈 길이 막혀서야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중심부까지 닿는 것만 막아도 큰 소득일 것이다.

  만일 이미 닿았다고 한다면. 여자는 자신이 세운 장애물, 위협적으로 솟구친 기둥을 지나치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 경우엔 여자의 계획대로 되긴 어려우리라. 장치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그곳에 다다랐다면 청년은 이미 그녀가 아는 모습이 아닐 테니까. 지금의 청년은 몇 살 즈음까지 내려갔을까. 기억은 얼마나 잃었고 자아는 어느 정도 부스러졌을까. 만나기 전까진 알 수 없다. 장애물에 막혀 얼마 가지 못했길 바랄 뿐이다.

  자연의 힘을 둘렀던 초월자로서, 여자는 생명력을 감지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직까지, 이 차가운 장치 안에선 희미하게나마 생명 신호가 느껴졌다. 청년은 살아있다. 그 사실에 희망을 걸고서 여자는 걸음을 옮겼다. 청년이 조금만 더 버텨주기를 바라면서.

  청년을 막기 위해 세운 기둥을 열 개쯤 지난 때. 여자는 드디어 청년을 발견했다. 아니, 이제 그 모습을 청년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여자가 본 것은 고작 열 살 남짓 되었을까 싶은 어린 소년의 뒷모습이었다. 작아졌으리란 건 짐작했지만 너무 작았다. 이곳에 떨어질 때부터 걸치고 있던 코트가 그의 몸을 거의 발끝까지 싸매고 있었다. 달리는 데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바짓단은 접어두었지만 코트는 어찌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막상 만나고 나니 다리가 굳어버린 듯 움직일 수 없어, 여자는 품에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진 <소년>을 가만히 눈에 새겼다.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더는 타인에게 시선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대치 아닌 대치가 이어질 때.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앳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혼잣말일까. 아니면 방해꾼에게 들으라고 한 말일까. 몇 발짝 밖에 선 여자가 입을 떼지 못하고 기다리자 소년은 다시 중얼거렸다.

  “뛰어내리는 것도 실패. 중심부로 가서 녹아버리는 것도 실패.”

  아, 그래도 기다리기만 하면 어떻게든 끝은 날까? 소년은 제 앞을 가로막는 기둥을 손으로 쓸어보며 무심하게 덧붙였다. 벌써 이만큼 녹았으니까.

  “더는 안 돼. 돌아가야지.”

  “어디로?”

  다급해진 여자가 입을 떼자 소년은 그제야 돌아보며 물었다.

  “갈 곳이 있었어?”

  마주한 얼굴이 너무 앳되어서, 여자는 숨을 크게 삼켜야 했다. 머릿속에 남은 분신의 기억으로 알 수 있다. 지금 소년의 모습이 몇 살의 모습인지. 그리고 그 즈음 소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누이로서 바라본 그때의 오빠는 너무도 커 보였었는데 지금은 키가 제 배에나 닿을 정도로 작다.

  “당신이 가야 할 곳은 있잖아. 바깥.”

  “나가면 뭐가 달라지는데?”

  “삶은 지속되겠지.”

  “하지만 루……그 애 이름이 뭐였지? 그 애랑 유원지에 갈 순 없는걸.”

  지금 여자 앞에 선 사람은 간신히 육신을 유지하고 있을 뿐. 살아오면서 쌓아온 경험도 기억도 거의 날아간 빈 껍질 같은 존재임을, 여자는 안다. 남아있는 것이라곤 기억의 찌꺼기, 그것도 지금 그가 멈춘 나이에 겪었던 일들의 단편뿐이리라. 낡은 기억을 멍한 얼굴로 늘어놓는 것만 보아도 뻔하다. 그가 동생과 함께 한창 유원지에 가던 때가 있었다. 그가 열 살 생일을 맞기 조금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쟁을 맞으며 유원지도 폐허가 되었으나, 두 사람이 유원지보다 다른 곳에 관심을 품게 된 것은 그보다 한참 전의 일.

  즉, 소년은 특정 시기의 기억에 매몰되어 있는 셈이다. 그것이 이곳에 떨어지기 직전의 일도 아닌, 어린 시절의 일이란 점도 서글프다. 그의 삶 대부분은 이미 날아간 것이다. 내면이 그만큼이나 황량해진 소년에게 자아가 제대로 남아있을 리 없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목표로 삼은 사람인지 이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궁핍한 기억에 를 나타낼 단서란 없을 테니까.

  “루리.”

  여자는 소년이 제대로 말하지 못한 이름을 완성시켜 읊었다. 그 이름의 주인이 여자의 입장에선 그저 분신이었고 언젠간 거두어갈 안전장치였을 뿐이라 해도, 소년에겐 큰 가치를 가졌다. 애초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은, 그리고 실제로 흩어질 수 있을 소년이 버티고 있는 이유는 하나뿐.

  여자는 소년을 삶에 매어두는 닻이 이제 그가 이름까지도 떠올릴 수 없게 된 누이라 확신한다. 보통 사람도 버티기 힘든 곳에서 <없었던 사람>이 되길 갈망하기까지 한 이가 아직까지 녹지 않은 건 어떤 강렬한 매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소년을 이곳으로 이끈 누이는 그에게 남은 몇 안 되는 기억의 중심인물이 됨으로써, 오빠가 자신을 생각해서라도 세상에 발을 딛고 있게 만드는 것이다. 기억을 되새기는 한 소년이라는 인간은 완전히 허물어질 수 없으니.

  “, 그래. 루리. 이상하다니까. 왜 넌 그 이름을 알아?”

  “당신이 말해주었으니까.”

  “다른 이유가 있지?”

  “왜 그렇게 생각해?”

  “너를 보면 자꾸 그 애가 생각나거든. 달릴 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네가 오자마자 그 애 생각이 났어.”

  “……처음부터 그랬어?”

  고개를 끄덕인 소년은 물었다.

  “내가 말하기 전에도 그 애를 알고 있었지?”

  맹금을 연상시키는 눈이 똑바로 여자를 보고 있었다.

  역시 소년은 정답만을 짚는다. 여자가 누이와의 연결고리임을, 누구도 밝히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알아챘다. 그럼 이제 그는 저에게 누이의 일을 숨겨온 여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절망에서 구해줄 수 있거나, 최소한 빨리 체념하게 할 수 있었으면서도 그의 불행을 외면해온 사람을. 원망할까. 그게 아니면.

  “맞아.”

  원망이건 증오건,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여자는 소년이 진실을 깨달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누이와의 연결고리를 들먹여, 소년을 설득할 수 있을 테니. 이미 답을 짐작하고 물었을 소년은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빈 웃음을 걸쳤다.

  “그러니까 네가 오기 전에 전부 끝냈어야 했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눈을 감아버리도록.”

  “이거, 기억나?”

  여자는 소년 앞에 붉은 스카프를 흔들어 보였다. 과거를 되살려 소년의 자아가 더 흩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나, 소년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묻지 마. 이제 아무것도 모르니까.”

  “당신, 루리를 구하려고 싸울 때 이걸 매고 있었잖아. 동료들과 나누어 가졌었지. 아카데미아에 맞서는, 레지스탕스의 표식이라고.”

  당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어. 나중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정예병에 들어가기까지 했거든. 사라진 과거를 풀어놓으며 여자는 소년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섰다. 고작 몇 걸음의 거리인데, 여자가 바로 좁힐 수 있는 거리인데 소년은 도망치고 싶은 양 뒷걸음질 쳤다. 이미 너무 작아진 몸이 순간순간 줄어드는 것을 여자는 느낀다. 이제 소년은 일곱 살, 아니, 여섯 살. 아니, 다섯 살

  “기억, 안 나.”

  “기억나지 않는다면 채워줄 수 있어. 루리가 당신의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당신이 루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당신이 잊고 싶지 않았던 모든 걸 말이야. 루리의 모든 걸 삼킨 나라면 전부…….”

  “그런 이야기 나는 몰라.”

  계속 뒷걸음질 치다 작은 등이 또 다른 기둥에 닿았을 때. 소년은 거의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여자가 만든 장애물이 길을 막아, 이제 그는 더 도망칠 수 없다.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것조차 타의에 가로막힌 소년은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을 안고 얼굴을 묻었다. 그런 이야기 나는 몰라. 되풀이한 말이 꼭 알고 싶지 않아라고 울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거기서 여자는 자신이 그의 세계를 침범했음을 깨달았다. 이미 삶의 많은 부분이 타의에 휩쓸린 인간을, 또다시 그의 의지를 무시하고서 구하려 했다는 것을.

  여자는 조심스레 소년에게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다음은 가만히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할게. 그러니까 한 번만, 나를 봐줄래? 부드러운 목소리에도 동상이라도 된 듯 소년은 꼼짝도 않았다. 답이 돌아오지 않은 것도 물론이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소년을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뜻대로 따라주건 이대로 그녀를 거부하건, 그의 뜻대로 하라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여자는 소년이 살그머니 고개를 드는 걸 보았다. 앳된 얼굴에 혼란과 당혹스러움이 엉겨 있었다. 그의 얼굴에 그 감정을 씌운 게 누구인지, 여자는 명확히 안다.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돌려주어야 할 말도.

  “내가 잘못 생각했어. 더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걸 기억해낼 의무는 없지. 그리고 그 기억 때문에 억지로 고통스러운 현재에 매여있을 이유도.”

  소년이 비극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누이를 잃었다는 현실. 그 절망은 기억 속에서 누이의 존재만을 지운다고 깨끗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누이를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사라진 사람>에 절망해 몸을 던져야 했고, 하필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여자 곁에서 자신의 불행을 곱씹어야 했다. 지금 그에게서 기억을 전부 지우고 바깥으로 돌려보낸다 한들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오히려 모든 걸 잃은 텅 빈 인간으로 표류하게 되지 않을까?

  인간을 믿을 수 없어서, 인간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리라고 지레 두려워하여 그들에게서 선택권을 빼앗았다. 악마가 제 파편 중 하나의 몸을 빌려 부활했을 때. 아직 세상에 남아있던 분신들에게 맡기지 않고 여자가 직접 나서 악마를 처리한 건, 인간의 선에선 재앙을 해결할 수 없단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돌이켜보면 그녀 역시 인간이었고, 악마와 마주한 때 분신들과 비슷한 생각으로 세상을 걱정했다. 결국 타락해 침략자가 된 아비처럼, 여자도 한때는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구원자가 되었다.

  “소중한 사람을 구하려 싸우는 건 잘못되지 않았어. 당신은 계속 그 뜻을 부정당했고, 결국은 싸울 기회도 잃었지만. 잘못한 건 당신이 스스로 싸우지 못하게 한 쪽이야.”

  인간은 어리석으면서 현명하고, 악하면서 선량하다. 여자가 생각지 못한 것은 바로 어리석은 다수의 틈에서도 바른 선택을 하는 소수와, 언제나 악에 맞서길 결심하는 정의로운 이의 존재였다. 아비가 침략군을 키워낸 차원에서도 침략군에 대항한 이들이 있었다. 악마의 조각이면서도 악이 되지 않으려 계속 저항하던 아이도 있었다. 그런 이들을 모두 마음 한 켠엔 사악함을 품은인간으로 요약하고서 인간의 싸움을 빼앗은 것은 여자의 실책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에서, 몇몇 이들을 지워버린 것도.

  분신에 대한 기억을 지운 건 앞으로 <기억하는 이> 때문에 일어날 파멸을 막기 위함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자의 결벽적인 태도이기도 했다. 세상 곳곳에서 누구도 심판자의 흔적을 기억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들이 인간으로서 살며 쌓은 것도 전부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 그렇게 그들을 세상에서 완전히 거두어가겠다는 발상.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효과가 있었던가? 소년만 보아도 여자의 뜻대로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억의 혼란에 시달리다 결국 제 삶에 채울 수 없는 상실이 있음만 깨닫고 무너지지 않았던가.

  “……사과?”

  “그래.”

  소년의 언어가 망가졌음을 서글퍼하며 여자는 덧붙였다. 나도 당신의 불행에 책임이 있지.

  그러나 여자는 소년의 불행에서 자신의 실책을 알아챈 것으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믿지 않은 인간 중 소년이 유독 불행했을 뿐. 사악한 인간을 경험했다는 이유로 인류 자체를 불신해, 스스로 세상을 바로잡을 기회를 빼앗고 분신의 삶마저 주변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지워버렸다. 소년보단 덜 불행하다 해도, 세상 곳곳에 초월자에게 외면당한 인간이 있을 터였다. 소년처럼 투쟁을 빼앗긴 저항군. 사랑하는 친구를, 마음을 준 사람을, 딸을 초월자의 분신이었단 이유로 통째로 잃게 된 사람들까지.

  그러니 여자는 이제, 한 가닥 자비를 베풀기로 한다. 인간의 선량함을 한 번 더 믿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여자는 소년의 녹색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예언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앞으로 행복해져. 내가 그렇게 되도록 할 테니까. 그리고 당신의 세계도 평화를 찾아.”

  이게 내가 이뤄줘야 할 일이고, 당신을 구할 길이야. 여자는 명랑하게 덧붙였다.

  이것은 소망이 아니라 예언이다. 연민으로 내뱉는 값싼 위로가 아니라, 초월자의 약속이다. 여자는 세상에 분신들을, 그들이 세상에서 쌓은 삶을 돌려줄 것이다. 4개의 차원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던 소녀들. , 그들을 아끼고 기억하던 이들. 모두가 원래의삶을 돌려받는 것이다. 한편으로 여자는 폐허가 된 소년의 고향도, 그 외에 악마가 날뛰며 혼란이 생긴 차원도 안정을 찾게 만들려 한다. 그녀의 힘으로 하루아침에 복구하는 게 아니라, 선량한 이들이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가도록 오래도록 지켜볼 것이다.

  “그러니까, . 이제 안심하고 우리가 갈 곳으로 가자.”

  자리에서 일어선 여자가 손을 내밀며 말하자, 커다란 금빛 눈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은 과거 누이에게 게임을 가르쳐주던 어린 오빠의 눈이었고. 청년기까지 성장했다 다시 아이가 된 오빠는 여자의 손에 작은 손을 올려놓았다.

  여자는 오빠와 함께 유원지에 가던 작은 소녀처럼, 그 손을 꼭 쥐고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소년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는 바깥이 아닌, 여자만이 아는 곳. 상처받은 이들에게만 허락된 초월자의 정원으로 함께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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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