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여슌] 말라붙은 독

2020. 3. 31. 22:58 from 03/1

 

여자는 쓰러진 청년에게 올라타 그 목을 양손으로 감쌌다. 청년은 체념한 듯 아무런 저항도 없었지만 여자는 그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상대의 목숨을 쥐고 있다는 것만 선명히 느낄 뿐이다. 이럴 때 그녀는 상대의 숨을 끊어버리는 온갖 방법을 상상한다. 유감스럽게도, 어느 것도 짜릿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 청년은 죽음으로도 그녀의 삶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 손 안에 쥔 목숨을 끊어버리지 않는 것은 그래서였다.

청년이 저항하거나 목숨을 구걸하기라도 했으면 약간은 보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청년은 저렇게 쉽게 포기하고 만다. 삶도, 용서를 구하는 것도. 안 해? 제단에 놓인 제물처럼 죽음을 기다리던 청년이 물었다. 여자는 그 괴상한 물음에, 목을 감싸던 손가락을 살짝 떼어내는 것으로 답한다.

나를 무대에서 끌어내릴 때까진 독기에 차 있었는데.”

시시해졌네, 쿠로사키도. 싱글거리며 덧붙이는 말은 이제 여자를 흔들지도 못한다. 그녀는 청년의 나긋한 공격에 이미 무뎌졌으므로.

큰 목적은 이뤘잖아. 너를 망가뜨리는 것.”

여자는 무심하게 받아친다. 그녀의 손에 청년은 추락했다. 그 후 청년은 모든 의욕을 잃고 그녀의 은신처였던 이곳에 틀어박힐 뿐. 청년을 완벽하게 무력하게 만든 것만은 삶에서 몇 없는 성공이었다.

그런데도 우리의 관계는 끝이 안 났네.”

처음부터 어긋나서 끊어지기도 힘든 모양이야.”

이렇게 오래도록 어긋날 거였다면 쿠로사키 쪽 사람들은 모르는 게 나았지.”

청년의 말에 여자는 웃었다. 그런 말을 청년이 먼저 입에 올릴 줄은 몰랐다. 그와 얽히지 않은 세계를 얼마나 상상했는지. 청년이 고향에 침투하지 않은 세계, 동생이 그의 수작에 휘말리지 않은 세계, 최소한 그와 마주치지 않은 세계를 바랐다. 청년이 없었다고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와 얽히지 않았다면 이렇게 쟁그라운 것만 남진 않았으리라. 타다 만 증오와 얄팍한 냉소, 고칠 수 없는 관계까지.

모든 것의 시작은 청년이었는데, 어긋난 관계에 투정을 부리는 것도 청년이었다. 청년의 대단찮은 비겁성을 새삼 떠올린 여자는 그를 비꼰다.

하트랜드를 떠나기 전에 나까지 처리했으면 깔끔했을 텐데. 네 알량한 양심으론 무리였을까.”

나는 하트랜드에서 최소한의 역할만을 하고 싶었지.”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악역이고 싶었던 거야.”

스스로를 가여워하는 사람의 죄악감이란 얼마나 얄팍한지. 악행에 소극적이었다는 말은 피해자 앞에서 얼마나 기만적인지. 훤히 아는 여자는 청년에게 별로 자비롭지 않다. 그를 비난하는 대신 그의 속내를 짚는 것이다. 지나가는 듯이, 웃으며.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루리 양을 닮았어. 정말, 다른 부분은 하나도 안 닮았는데.”

과연 청년은 동요했다. 사라진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여자를 흔들고 싶은 것이다. 그녀가 잃은 동생을 들먹여서. 자신의 죄이자 그녀의 가장 깊은 절망을 파헤쳐서.

청년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그녀의 감정이 거의 말라붙었다는 것이었다. 청년 때문에 황폐해진 나머지 그녀는 감정을 소모하는 법을 잊었다. 한때 그를 향해 타올랐던 증오도 분노도 퇴색되고 말았다.

그래서, 어때?”

여자는 분노로 그의 목을 조르는 대신 물었다. 물기 없는 목소리로.

나는 루리처럼 너에게 괴로운 존재야?

뒷말이 머리를 쟁쟁 울린다. 언젠가부터 도발조차 먹히지 않는 그녀는, 도리어 청년에게 침투하는 독이 된다. 청년은 그녀 때문에 무너지고, 쓰러지고, 일어서지 못한다. 날름거리는 혀가 독사의 그것 같다고 생각하며 청년은 입을 뗀다.

. 그래. 너는 내 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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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30. 01:16 from 03/1

 

  야생의 포식자는 우리에 갇혀서도 야성을 쉬이 내려놓지 못하는 법이다. 부질없는 저항을 반복하여 발톱이 부러지고 부리가 뭉툭해지더라도. 날개가 짓이겨져 다시는 비상을 바랄 수 없을지라도. 그 하잘것없는 야성이 그들의 뼈에 새겨진 본능인 탓이다. 몸을 옥죄는 우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다시는 본래의 터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본능에 따라 매순간 투쟁한다. 참으로 처절한 생존방식이 아닌지. 짐승을 가둬둔 우리로 향하며, 소년은 입매를 비튼다.

  발소리를 죽였음에도, 우리에 갇힌 짐승은 귀신처럼 인기척을 느끼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한때 포식자였다 해도 지금은 붙들린 신세. 가련한 약자에 지나지 않음에도 저렇듯 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어둑한 우리에서 몸을 웅크린 채, 먹잇감을 위협하듯. 스위치를 누르자 우리에 달린 전등이 켜지며 일시에 공간이 밝아졌다. 어둠에 익숙해졌던 짐승이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안녕, 잘 있었어?”

  답이 돌아올 리 없는 인사를 던지며 소년은 친근하게 손을 내민다. 짐승의 금빛 눈이 소년을 꿰뚫었다. 아니, 눈앞의 그것을 짐승이라고 하기엔 위화감이 있었다. 낮게 으르렁거리던 것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희고 가는 몸을 검은색으로 가린 청년이었다. 그를 감싼 모든 것이 검었다. 창백한 피부와 그 위를 덮은 검은색의 대조가 기묘한 미를 이룬다.

  청년은 내민 손을 세게 물어뜯었다. 소년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얼마간 그에게 손을 내어주었다. 관대한 주인이 기르던 것의 장난을 용납하듯.

  “, 말짱한 것 같네.”

  청년에게서 손을 빼낸 소년이 가볍게 말했다. 푸른 눈에는 정복자로서의 여유가 비친다.

  “내가 왜 너를 살려두고 있는지 알아?”

  소년이 물었다. 청년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너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창살에 바짝 붙은 청년의 녹색 머리카락을 소년은 가볍게 쓸었다.

  “검은색은 망자의 색. 난 산 사람에겐 검은색을 씌우지 않아.”

  청년의 금빛 눈이 일순 흔들렸으나, 그뿐. 손 안의 짐승을, 소년은 나긋하게 농락한다.

  “살아가야 할 이유도, 살아가게 하던 이도 사라졌어. 삶의 목적인 사명이 꺾였으니 삶에 대한 미련도 없겠지. 그 모든 게 사라진 사람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한때 야생의 포식자였던 청년은 모든 것을 잃고 우리에 갇혔다. 살아갈 터전은 진즉에 잃었다. 함께하던 동족도 악랄한 정복자에게 전부 짓밟혔다. 마지막 투쟁조차 꺾였다. 그렇다면, 이제 포식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날개조차 제대로 펴지 못할 우리에서. 포식자로서의 생명은 끊어졌다. 이곳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정복자의 손에서 농락당하는 것은 포식자가 아닌 먹잇감일 뿐이다. 포식자였던 시절의 본능만이 남아 처절하게 으르렁거리는. 우리 속의 짐승은 그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사냥꾼이었다.

  “이름이 아깝게 됐구나, .”

  본능만이 남은 포식자를, 아니, 먹이사슬의 최상부에서 추락한 가련한 사냥감을 정복자는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잊었던 과거의 이름에 짐승은 격렬하게 꿈틀댔다. 그러나 그뿐, 이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양 몸을 말 뿐이다.

  날이 갈수록 포식자의 발톱은 무뎌지고 부리는 뭉툭해질 것이다. 부질없이 날을 세우던 야성이 잦아드는 날도 마침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것은 마침내 완전히 생을 다하게 되리라. 마지막까지 간직하던 포식자로서의 본능조차 잃는 것이니.

  “나는 네가 완전히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어. ”

  그 날이 오면, 저것이 으르렁거리는 것조차 잊는 날이 온다면, 그가 본능에 근거한 부질없는 저항조차 잊게 된다면.

  “나는 그 날이, 몹시 기대돼.”

  우리 속의 짐승을 보며 소년은 천진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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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30. 01:14 from 03/1

  

  상처 입은 사냥감은 가슴을 움켜쥔 채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생기 잃은 눈이 머잖아 찾아들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다. 숨을 헐떡일 때마다 죽음의 빛이 짙어진다.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 망가진 몸으로 언제까지 움직일 수 있을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다. 성치 않은 몸으로 움직여봤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이대로, 곧 죽음을 맞게 된다. 삶을 지배한 재앙으로부터 도망쳐 지금까지 살아남았으나, 결국 사냥감으로서의 무력한 종말을 피할 수 없었다. 사냥꾼에게 쫓기고, 장난삼아 사냥당하다 죽음을 맞는.

  지금까지 동지들이 맞이한 결말은 그러한 것이었다. 겨우 도피해온 운명이 이제 자신에게도 들이닥칠 뿐이다. 사냥감은 사냥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고, 이미 정해진 종말이니까. 그랬다. 결말은 정해져있었다. 그것만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그 결말을 맞는가다. 순응하여 얌전히 무너지는가,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발악하다 종말을 맞는가. 지금껏 참혹한 운명에 저항해온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눈앞의 기둥에 의지해 중심을 잡은 후 겨우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극심한 고통이 몸을 휩쓸었으나 끝까지 움직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멈추지 않았다. 목적지는 적이 있는 곳.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싸운다. 힘이 닿는 데까지 싸우고, 죽음으로 사명에서 해방된다. 그것뿐.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시야는 흐렸다. 그나마 시야에 들어오는 것조차 잔뜩 이지러진 채. 이제 그를 움직이는 것은 머리도, 다리도 아니었다. 싸워야 한다는 본능이었다. 본능이란 참으로 놀라운 것이어서, 이미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사냥감은 본능의 인도로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저 멀리, 사냥꾼이 보인다. 이지러진 세상 속에서도 그 모습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오만하고 잔인한 어린 정복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냥감의 시선은 정복자에게 꽂혔고, 정복자의 시선은 사냥감에게 꽂혔다. 그들은 서로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사냥감은 정복자를 물어뜯기 위하여, 정복자는 사냥감의 저항을 지켜보기 위하여.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주제에 사냥감은 정복자에게로 걸었다. 정복자는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곧 죽어갈 사냥감 주제에, 저항군의 이름이 헛되진 않았는지 끝까지 저를 노리는 것이다.

  전부터 그랬다. 삶을 지배한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운명을 새로 쓰기라도 하려는 양, 저것은 사납게 덤벼들곤 했다. 정복자가 그를 주시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정해진 결말에 순응하지 않고 부질없는 저항을 반복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만큼 흥미로운 유형이기에.

  저것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언제까지 정해진 결말에 저항할 수 있을지 지켜보기로 하자. 그것이 정복자가 사냥감을 지켜본 이유였고, 사냥감이 지금껏 목숨을 이어온 이유였다. 그것에게 흥미를 품지 않았다면 여느 사냥감처럼 단번에 쓰러트리고 말았을 것이다. 결국, 그 가당찮은 저항이 그의 삶을 연장시켜온 것이다. 우습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은 어떨까.

  정복자는 사탕을 베어 물며, 제게로 다가서는 사냥감의 움직임을 무미건조하게 훑었다. 저것은 이미 소생할 수 없을 정도까지 망가져버렸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기적일 것이다.

  “너 말야, 내가 있는 곳까지 올 수는 있겠어?”

  빛을 잃은 금빛 눈이 앳된 목소리에 반응해 깜빡였다. 맹금을 의미하는 이름처럼 날카롭게 번득이던 것이 저렇게 죽어버린 것은 정복자로서도 꽤 유감이었다.

  “그런 몸으로 괜찮겠냐고.”

  입은 열렸으나, 말은 나오지 않는다. 아니, 이미 소리조차 죽었으리라.

  “, 좋아. 어디 한 번 끝까지 와봐. 기다릴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정복자는 자리에 붙박여 불손한 사냥감만을 기다리기로 했다. 지금껏 흥미롭게 지켜본 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혹시 모르지. 네가 여기 닿아서 나를 물어뜯는다면.”

  사냥감이 멈칫했다.

  “그렇다면 얌전히 네게 목을 내어줄지도. 그러니까 힘을 내라고,”

  사냥꾼을 물어뜯는 건, 너희들 레지스탕스가 바라던 일이잖아? 정복자는 말을 이으며, 키들거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래. 그 정도의 보상이 없으면 재미가 없다. 게임은 보상이 따라야 확실히 열기를 띠는 법이다. 더구나, 정복자는 지금껏 처절한 발악으로 자신을 즐겁게 해준 것에게 그 정도의 보상은 따라도 된다고 생각했다.

  자, 그러니 끝까지 움직여봐. 내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어봐.

  어서 내게 발악해봐.

  그 말이 사냥감에게 움직여야 할 이유를 확실히 심어준 모양이었다. 주검처럼 너덜너덜해진 주제에 그것은 한 걸음, 한 걸음 느릿하게 걸었다. 그러나 중간쯤 닿았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려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것은 기었다. 차가운 바닥을 짚고서. 정복자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저것은 자신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운명에 대한 처절한 저항과 목적에 대한 지독한 집착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이제 조금만 더 움직이면 닿는다. 정복자는 사냥감이 자신에게 닿기만 한다면 정말로 목을 내어줄 생각이었다.

  이제 열 걸음. 흰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사냥감은 꿈틀거렸다. 이제 일곱 걸음. 빛을 잃은 금빛 눈이 잠깐 허공을 본 것 같았다. 이제 다섯 걸음. 정복자는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이제 세 걸음.

  겨우 세 걸음.

  바로 거기서, 사냥감은 고꾸라졌다.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연료가 다한 기계처럼.

  정복자는 세 걸음 나아가 사냥감 앞에 섰다. 녹색을 띄는 머리카락을 잡아채, 고개를 들게 했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 제게로 얼굴을 돌려보았으나, 텅 빈 금빛 눈은 눈앞의 목표물을 비추지 못했다. 겨우 세 걸음을 남기고 사냥감은 패배했다. 결국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냥꾼을 물어죽이지 못한 채 죽었다. 그 무기력한 결말에 사냥꾼의 입매가 한껏 일그러졌다. 당연한 종말인데, 사냥감에겐 합당한 것인데, 이상하게도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저기, 내가 친히 와줬다고. 세 발짝은 봐줄 테니까, 이제 물어뜯어봐.”

  앳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맺지 못한 소망으로도 죽은 이는 깨울 수 없기에, 답이 돌아오지 않는 말은 외로이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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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슌] 조각1

2015. 10. 30. 01:12 from 03/1

 

  그녀는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양 웅크리자 시선은 자연히 바닥으로 향했다. 차가운 바닥엔 아무것도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누군가가 몸을 녹이던 곳엔 무엇도 없다. 여자는 경험적으로 그 공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챈다. 공백은 부재를 뜻하고 부재는 죽음을 뜻했다. 죽음. 여자는 그 싸늘한 단어를 되뇌었다. 낯설기만 했던 단어는 이제 현실이 되어 그녀의 세상 군데군데 스미고 있었다. 침략자들이 닿는 곳마다 죽음의 잿빛이 세상을 덮으며 모든 것을 말려 죽였다.

  이제 살아있는 것은 희귀해졌다. 공백이 늘어갈수록 그랬다. 바로 얼마 전까지 함께 대화하던 이들도 어느 순간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의 공백은 공동처럼 공허하게 남아 남겨진 이들의 가슴을 쑤셔댔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 대해 말하는 일은 없다. 불행은 입에 담을수록 선명해진다. 살아남은 이들은 한순간이라도 불행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라 해도.

  공백을 헤아려 무엇하겠는가. 다시 채울 수도 없는 것을. 사라진 이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을. 평소라면 여자도 그렇게 공백을 머릿속에서 지워냈을 것이다. 사라진 이를 헤아리지 않고 나아가는 일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이번의 공백은 그녀에게 아프게 몰아쳤기 때문이었다. 정을 붙여서는 안 되었는데. 여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쉽게 잃을 것이라면, 마음을 두지 않아야 했는데. 돌아보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미련을 품어선 안 되었는데.

  여자는 다소 약해져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누이의 부재에 지쳐 암묵적인 법칙을 깨버린 것이다. 강인하여 지켜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감정을 쌓아서는 안 되었다. 잃었을 때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무력한 이들이기에 얽매이는 법칙이었다. 하루하루 잃어가는 이들이기에 감내해야 할 원칙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정을 붙인 것이 잘못이었다.

  하필, 사라진 누이와 닮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필 그 나이대의 소녀였기 때문에. 하필 누이처럼 웃어주었기 때문에. 하필 상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정을 붙였고 미련을 품었고 감싸려 했다. 무력하여 자신조차 지키기 버거운 주제에.

  침략자는 탐욕스레 모든 것을 삼킨다. 이미 소중한 이는 전부 빼앗겼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사랑할 것은 남지 않았다. 돌아보는 것이 무의미한 걸 알면서도 타인의 부재에, 세상의 멸망에 아파한다. 그렇게나 고통스러웠는데, 통각은 도무지 무뎌지질 않는다. 우습게도 고통은 언제나 남겨진 이들의 몫이었다. 언제까지 살아남을지는 모르나, 살아있는 한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뼛속까지 스미는 타인의 부재에, 여자는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그것으론 시시각각 닥치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둠 속에 얼굴을 묻은 채, 여자는 기도한다.

  눈을 감았다 뜨면 모든 것이 사라지게 해주세요. 차라리 같은 지옥에서 만나게 해주세요.

  그것도 아니라면, 나만이 사라져서 더 이상 누구도 사라지지 않도록 해주세요.

  참혹한 기도는 허공에 맴돌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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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슌] 조각3 (To. 훈님)

2015. 10. 30. 01:10 from 03/1

  

  세상을 잃은 날부터 그들은 언제나 극도로 날을 세우게 되었다. 그 누구도 신용하지 않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은 적이거나 적으로 돌아설 수 있는 자로 구분될 뿐. 그들은 사냥감처럼 경계하고 포식자처럼 적을 노렸다. 깨어있을 때는 단단히 무장한 채 시선을 피해서 돌아다녔다. 낯선 세상에 녹아든 채, 적을 찾아서. 혹은 상황을 반전시킬 작은 가능성을 찾아서.

  고된 탐색이 끝나고 돌아오면 그들은 발길 닿지 않는 아지트에 몸을 숨긴 채 겨우 휴식을 취했다. 버려진 건물, 초라한 아지트. 사람이 찾아들 리 없는 그곳에서만은 편히 쉬어도 되련만 그들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온몸을 내리누르는 피로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잠을 거부했다. 잠이라는 무방비상태에 놓이는 게 두려워서. 그들은 언제나 무장해야 했으므로.

  그렇게 늦은 시간에서야 겨우 잠이 들었던 어느 밤이었다. 소년은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침입인가. 머리가 완전히 개이지 않은 중에서도 본능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했지만 잠을 깨운 이는 함께해온 동료였다. 그 얼굴엔 괴상한 감정이 비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공간을 공허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동료의 입이 열렸다.

  “그냥 확인하러 온 것뿐이야.”

  동료의 말에는 생략된 부분이 있었다. 부러 얼버무리는 것처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침입이 있었나?”

  “그게 아니라.”

  말을 고르고 있었다.

  “네가 잘 있는가를 보러 온 거야.”

  “무슨 바보 같은.”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 상대의 얼굴에 비치는 것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계속 함께해왔지만 그런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극도의 두려움.

  “괜찮아?”

  얼어붙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꿈을 꿨어.”

  어깨를 감싸 안정시키자 동료는 느릿하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모두가 사라졌어.”

  과거를 보고 있는 것일까. 동료의 시선은 저 먼 곳에 머물러 있었다.

  “차례차례, 아무렇지도 않게 지워졌어. 그러다 하나만 남았지.”

  가는 어깨가 떨고 있었다. 언제나 차갑게 식어있던 잿빛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나 의젓하던 동료 또한 결국 제 또래의 소년이라는 걸, 그는 새삼 깨달았다.

  “그 세상에서 결국 너 혼자만 남았던 거야!”

  터져 나온 것은 울음에 가까운 절규였다. 그제야 소년은 알 것 같았다. 동료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유를. 그 어둑한 밤에 갑자기 자신을 찾은 이유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 그때 남겨진 네가 얼마나 비참한 얼굴이었는지 보았으니까. 네가 무너지는 걸 봤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힘주어 말했다. 그럼에도 잿빛 눈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일어날 리 없는 일이잖아. 네가 나를 혼자 두거나 내가 너를 혼자 두는 일이 생길 것 같아?”

  “그래도.”

  “그럴 거라면 애초에 혼자 왔겠지. 같이 온 이상 계속 함께다.”

  여전히 두려움을 씻지 못하는 동료를 잠재우느라 그 날은 그대로 지샌 것 같다. 그 날, 동료는 답지 않게 계속 소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꾸만 말을 걸었다. 무의미한 물음. 무의미한 응답. 무의미한 접촉. ,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결과적으로 동료는 옳았다. 그의 꿈이 참혹한 예언이 된 것이다.

  답이 오지 않는 통신기에 통신을 시도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소년은 이제 동료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이도 떠났으니 남은 것은 아무도 없다. 믿을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낯선 세상에, 그렇게 소년은 혼자 남겨졌다. 동료라 불리는 자들이 생겼음에도 그는 쉽게 그들을 허락하지 않았다. 잃어갈수록 경계는 깊어지는 법. 마지막 버팀목조차 잃은 그는 사납게 날을 세우며 스스로를 갉아먹어갔다.

  지칠 대로 지친 어느 날, 소년은 깨달았다.

  너는 이걸 걱정했던 것이구나. 너는 이걸 예견했기에 그렇게 불안해했구나.

  홀로 내뱉은 말은 허공을 때렸다가 흩어졌다. 답조차 돌아오지 않는 세상에서, 그는 지독하게도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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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

[유토+슌] 조각2 (To. 블랑님)

2015. 10. 30. 01:08 from 03/1

 

  열기로 달아오른 이마를 서늘한 손이 쓸었다. 서툰 손길, 거친 감촉. 그 모든 것이 익숙해, 소년은 힘겹게 눈을 떴다. 시야는 개이지 않았지만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예상대로의 인물이었다. 함께 싸워온 동료였던 것이다. 소년의 마지막 기억은 전장에서였으니, 아마도 그는 어떻게든 싸움에서 소년을 구해온 모양이었다. 표정 없는 흰 얼굴엔 지친 기색이 비치는 듯해, 소년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깼어?”

  상냥함이라곤 조금도 묻어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상대는 무심하게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키려다, 신음만을 토해냈다. 격렬한 통증이 온몸을 내리누르고 있었던 탓이다.

  “좀 쉬어둬. 아직 움직이긴 무리일 테니까.”

  “싸움은?”

  흐릿한 시야에서도 상대의 입매가 일그러지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소년은 제 질문의 답을 알 것 같았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쉬어.”

  한참이나 지나서 토해낸 말은 그것뿐. 큰 손이 머리를 서툴게 쓸었던 것 같다. 그것이 참담한 답을 차마 꺼내고 싶지 않아서란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분명히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패했지?”

  “유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꺼질 듯 위태로운 정신을 집중하자, 그저 일렁이던 상대의 형체가 보다 선명해진다. 그리고 곧바로 소년은 아픈 말을 꺼낸 것을 후회했다. 상대가 입술을 짓씹으며 감정을 누르는 것을 보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채 삭이지 못한 감정은 그의 금빛 눈을 제 색으로 물들였다.

  “사라졌어.”

  주먹을 꽉 쥔 채, 그는 고통스러운 답을 쏟아냈다.

  “전부 구하고 싶었지만 데리고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너뿐.”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분한 것이리라. 나약함을 용납할 수 없는 자였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압도적인 힘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제 한계를 깨달았기에.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자조의 빛을 띤 목소리였다.

  “너라도 구할 수 있었으니까.”

  전쟁이란 참담한 재앙과 맞닥뜨리면서 그들은 약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다. 상실이 당연해지며, 살아남은 것에 감사해야 하고, 한 가닥 희망에 목을 매게 되는 비참한 삶. 그는, 그 수많은 상실 속에서 단 하나 잃지 않은 것에 안도한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구해낼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던 것이다.

  “너는 이틀을 심하게 앓았어. 곧 죽을 것처럼. 겁이 나서 기도했어. 다른 건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너만은 살려달라고.”

  “쓸데없는 걱정이네.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는데.”

  목소리를 애써 밝게 짜내어 말했다. 허세를 부린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상대는 침묵하더니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렸다. 여전히 굳은 얼굴.

  “걱정할 수밖에. 너는 곧 죽을 사람처럼 굴잖아.”

  그러면서 어린 동생을 대하듯 장난스레 소년의 머리를 툭툭 쳤다. 동생이 있어서였을까. 그는 저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어린 아이들을 잘 보듬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 동생마저 적에게 빼앗긴 지 오래. 이제 그 얼굴에선 예전의 따스함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전쟁은 아직 소년인 그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앗아간 것이다. 사랑하는 것들도, 의지하던 사람도, 상냥함도,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그저 적만을 보고 싸울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슬프게도, 그것은 그들 저항군 전부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전쟁이란 절대적인 재앙 앞에서 인간은 너무도 무력하여 때로는 가장 본질적인 것조차 빼앗기지 않던가. 소년 또한 많은 것을 잃었고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소년은 그 무시무시한 재앙에게 단 하나 소중한 것만은 빼앗기지 않으려 처절하게 버텼다.

  인간성. 인간으로서 최소한 품어야 할 것.

  그것마저 빼앗기면 저들 침략자나 다를 바 없는 괴물이 될 것 같아, 지금껏 소년은 필사적으로 그 하나만은 잃지 않으려 저항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에서는 약점인지라, 계속 소년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절망적인 싸움 속에서 소년을 구해온 소중한 동지조차도 그의 그 약함에 대해 때로 지적하곤 했다. 그래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전장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라고. 곧 죽을 사람도 아니고, 그쯤은 적당히 포기하라고.

  아마도, 장난처럼 던진 그의 말은 전장에서 모질지 못한 소년의 결점을 지적한 것이리라. 인간으로서 절대 포기해선 안 될 것마저 쉬이 내버리게 만드는 전쟁의 참혹함에 소년은 쓰게 웃었다. 차라리 전부 버리고 그처럼 자비 없는 전사가 되었다면 나았을까. 그렇게 씁쓸한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동료의 손이 소년의 뺨을 쓸었다.

  “유토, 너는 죽지 마라.”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담긴 말은 무거웠다.

  “갑자기 왜 그래.”

  “죽으려거든 내가 죽은 후에 죽어. 난 세상이 복구될 때까진 죽지 않을 테니.”

  묵직한 말에도, 슬픈 가정에도, 동료의 얼굴은 지극히 덤덤했다. 그것이 소년을 힘들게 했다. 최악의 결말을 가정할 수밖에 없는 약자라지만 그걸 입 밖에 내진 않는 것이 그들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것을, 나약함을 허락하지 않는 그가 먼저 깨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소년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상대가 먼저였다.

  “나는 이제 돌아올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너는 아니잖아? 나약하다며 네 약점을 물어뜯으면서도 한편으론 안도했다. 아직껏 자신을 버리지 않고 지켜가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텅 빈 웃음이 동료의 입에 걸렸다.

  “돌아올 수 없다니, 무슨 소리야?”

  “폭력은 시작하기 어렵지만, 시작하면 빠져나오기 어렵지. 나는 그들을 모방해 폭력을 쓰게 됐어. 그들처럼 악랄하게.”

  “.”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몸도 함께 떨렸다. 소년은 동료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아니, 돌아올 수 있어.”

  “아예 이대로 싸울 생각이야. 구역질나는 방식이지만, 저들에게 그대로 돌려줄 수밖에. 나라면 괜찮아. 이미 더럽혀졌으니 괜찮아.”

  마디마디 고통스러운 말을 그는 한껏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아니지. 그러니 넌 살아남아야 해. 살아남아서, 세상이 복구되면 희망을 펼쳐야지.”

  “내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너라면 가능해. 아니, 너라서 가능해.”

  열기가 걷히며 동료의 얼굴이 또렷하게 비쳤다. 구원자를 보듯 절박한 얼굴.

  “약속해줘. 죽지 않겠다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미래를 열겠다고.”

  그것은 이미 간원이었다. 그가 절망 속에서 힘겹게 간직하고 있었던 마지막 소망이었다.

  “약속할게. 끝까지 버티겠다고. 그리고 미래를 위해 싸우겠다고.”

  소년은 상냥하게 속삭이고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고 저를 내려다보던 동료를 안았다.

  “그러니 슌은 내 곁에서 싸워줘.”

  그는 소년의 좁은 품에 무너졌다. 따뜻한 것이 소년의 옷을 적셨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인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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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

 

  네가 그렇게 언성을 높여 화낼 수 있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 그 전까지의 네가 모든 것을 조용히 삼켰기 때문이었다. 절망을 감내하고 분노를 삭여 또렷한 증오만을 적에게 향했기 때문이었다. 폭발적인 감정을 삼킨 만큼 스스로를 벼린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은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짝짝짝. 무미건조한 박수로 이 놀라운 광경에 감탄을 표하자, 네 입매가 한껏 일그러졌다. 거듭 쌓여온 분노는 통제장치를 잃자마자 폭발적으로 쏟아져, 네 가무잡잡한 얼굴마저 발갛게 물들였다.

  “감격스럽네. 이런 귀중한 광경을 보게 되다니.”

  부러 감정을 담지 않은 목소리에, 너는 사납게 달려들어 목을 졸라왔다. 설핏, 너의 눈에서 살의를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건, 몹시 진귀한데. 고통 속에서도 입꼬리를 올렸던 것은 기뻤기 때문이었다.

  쉬지 않고 토해내는 너의 말은 짐승의 울음처럼 거칠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 파헤칠 필요가 있을까. 지금껏 너와 같은 이들은 몇 명이고 봐왔다. 감당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방향을 잡지 못하는 이들. 그들이 쏟아내는 말은 고작 응어리진 감정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조차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그저 토해내는 것이 전부인 것이다. 너 역시 그러해서 너의 말은 순서 없이, 주제도 없이 허공을 떠돌다 흩어졌을 뿐이다.

  아무것도 해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 시야가 차츰 흐려졌다. 살의를 품은 만큼, 이번의 너는 진심이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눈앞의 사람을 진짜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너는 여전히 나약하여 마지막까지 그 살의를 가져가진 못했다. 목을 조르던 손이 서서히 풀렸다.

  “, 죽이지 그랬어?”

  겨우 몸을 추스르자마자 물었다.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목소리는 희미했으나, 너는 분명히 알아들은 것 같았다.

  “너는, 그럴 가치도 없어.”

  “그럴 수 없는 게 아니라?”

  네가 주먹을 꽉 쥐는 게 보였다. 정곡을 찔린 것이리라.

  네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여 화를 내고, 심지어 덤벼들기까지 한 이유는 분명했다. 네가 품고 있던 유일한 희망마저 짓밟혔기 때문이었다. 모든 희망적인 가능성이 말라붙었기 때문이다. 기댈 것마저 사라졌다.

  그 극도의 절망 앞에서, 너는 어떻게 움직일까.

  너의 모든 것을 빼앗은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다른 목적은 없었다. 바로 네 눈앞에서, 궁핍하기 짝이 없는 네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마저 탐욕스레 삼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유쾌한 일이었다. 심지어 너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모습마저 보여주지 않았던가.

  “어정쩡하게 덤벼들지 마. 태도는 확실히 해야지.”

  그러나 오롯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은 네 진귀한 행동이 중간에 멈춰버렸기 때문이었다. 너의 나약함에, 혹은 두려움에 가로막혀 봉오리만 맺고 져버렸기 때문이다.

  “완벽히 복종하거나, 철저히 저항하거나.”

  너는 입술을 깨물었으나, 입을 열지는 못했다.

  “전자라면 우리의 충실한 백성이 되어 연명할 테고 후자라면 저항군의 이름으로 지겠지. 어느 쪽을 원해, 레지스탕스씨?”

네 입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너는 언제나 그렇게 고뇌할 뿐 나아가지 못했다.

  “적당히 착하게, 혹은 적당히 반항적으로 버티려고는 하지 마. 목을 조르려면 목을 부러뜨리고, 무릎을 꿇으려면 바닥을 기어 발에 입이라도 맞추라고.”

  내 땅에서 살아남으려거든, 아니면 깨끗이 죽으려거든

  네 눈꺼풀을 손으로 덮으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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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

 

  소년은 최고의 엔터테이너였다.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고 관객에게 최고의 쇼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거듭되는 반전, 아슬아슬한 전개, 몸에 밴 매너, 즐거움을 쫓는 소년의 습성. 이 모든 것이 소년의 무대를 화려하게 구성했다. 그 놀라운 무대에 관객들은 소년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곤 했다. 자연스럽게 달아오른 분위기. 절정을 장식하는 묘기. 쏟아지는 박수 속에서 소년의 쇼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관객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소년은 앞으로도 최고의 쇼를 선보이겠노라 약속한다.

  즐거움을 쫓는 이로서 어느 무대건 즐겁지 않았겠냐마는, 소년은 지금의 무대만큼 즐거운 것은 이전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고 단언한다.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한 무대.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인정하는 최고의 무대가 되리라, 소년은 눈을 빛내며 예언한다. 다만 이번에는 여느 때와는 달리 그 혼자만의 무대는 아니다. 스포트라이트는 소년뿐만 아니라 소년을 도울 동료들에게까지 비춰질 것이니까. 이번의 무대에선 혼자일 수도 없고 혼자여서도 안 되었다. 단 하나의 관객에게 최상의 쇼를 선물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무대를 만들고자 하는 욕심과 철저한 준비로 갈고 닦은 무대는 마침내 막을 올렸다. 소년의 쇼를 감상할 유일한 관객에겐 긴장감을 위해 잠시 안대를 씌워둔 채로.

  “, 그럼 쇼를 시작하겠습니다!”

  소년의 경쾌한 목소리가 무대를 가득 채웠다.

  쇼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그리하여 분위기가 달아오를 때까지, 관객은 최고의 설렘을 위해 무대를 봐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야 기대가 죽어버린다고. 소년은 자꾸만 안대를 벗으려는 관객에게 몰래 입을 삐죽였다. 얌전히 있지 않으리라곤 예상했지만, 너무한걸. 절정으로 향하기 전까지만이라도 얌전히 있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의자에 묶어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꾸만 의자를 삐걱대면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뿐. 관객은 여전히 이 무대에 묶여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이제 곧 하이라이트야. 소년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오늘의 하이라이트!”

  하나뿐인 관객은 소리만으로 무대를 짐작하느라 긴장감이 극에 달했을 터였다. 그것이 소년이 노리던 것. 조급하게 버둥거리는 관객에게 향한 소년은 그제야 안대를 벗겨주었다. 그에게 최상의 즐거움을 선물하기 위하여.

  “어때?”

  그제야 빛을 볼 수 있게 된 금빛 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가 짐작한 최악의 결말이 무대에서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이 가려진 채로, 익숙한 이들의 신음을 들었다. 드문드문 저주의 말도 쏟아졌다. 그 모든 것은 쇼를 기획한 소년에게 향한 것. 박해받는 성자마냥 무대 곳곳에 매달린 자들은 전부 그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같은 목적으로 함께 싸워가던 이들이, 전사들이 그곳에 묶여있었다. 어째서. 의문은 소리로 나오지 못했으나 소년은 귀신같이 읽어내 답한다.

  “그야 최고의 쇼를 위해서지.”

  너를 만족시킬. 뒷말은 웃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맹금을 닮은 금빛 눈이 소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소년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쇼라는 건 말이지. 관객에게서 가장 격렬한 감정을 이끌어내야 해. 기쁨이건 슬픔이건, 혹은 분노여도 좋아.”

  그렇다면 소년은 이미 성공한 것이다. 유일한 관객을 극단적인 감정에 휩싸이게 했으니.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진 것을 소년은 기쁘게 감상했다.

  “지금 네가 느끼는 게 뭘까 궁금해. 분노? 배신감?”

  아니면 무력감일까. 소년의 손이 관객의 뺨을 쓸었다.

  손가락이 뺨을 타고 흐르는 내내 마치 병균이 묻는 양 몸을 떠는 관객의 모습이 소년은 퍽 흥미로웠다. 아니면 혐오일까. 마지막 순간 모두를 배신한 나에 대한, 혹은 나를 믿은 너 자신에 대한.

  “이상하네, 내게 할 말은 전혀 없어?”

  “뭘 바라지?”

  “이 무대에 대한 슌의 감상.”

  “박수라도 치길 바라나?”

  이전부터 타인은 언제나 경계해왔고 소년 역시 한동안 날을 세운 채 대했다. 그러나 함께하면서 마음의 벽을 허물고 믿으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모든 것을 뒤흔들 줄이야.

  “예전처럼 쌀쌀맞아졌네. 하지만 역시 만족스러워. 이번 무대. 아무래도 격하게 반응해주는 것 같아서 말이야.”

  처음부터 이것은 그에게 절망을 선사하기 위한 것. 목적은 분명히 달성한 셈이다. 그의 눈에 스민 참혹한 감정을 소년은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면 마지막까지 달려보도록 할게. 슌을 위해 준비한 무대.”

  소년은 다시 무대에 올라 결말을 위해 달려간다. 유일한 관객을 위해 최상의 결말을 선사하도록 하자. 가장 화려하고 절망적인 것으로.

  그렇게 결말에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Three!”

  의자가 삐걱댔다. 결박된 관객이 빠져나오려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Two!”

  소년은 자신을 도와 무대를 꾸민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감스럽게도 모두 정신을 잃은 것 같다.

  “One!”

  소년이 무대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동시에 불길이 무대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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