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청년은 화끈거리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보니, 뜨거운 것에 덴 것이 확실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쥐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잔의 절반쯤 채웠던 차는 겨우 몇 모금을 남기고 고스란히 그의 손과 바닥을 적셨다. 잠깐 긴장을 놓고 차를 마시려 했는데 손에 힘이 빠지면서 차를 쏟은 것 같았다. 그마저도 쏟은 것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감각이 둔해져 있었다. 화끈거리는 손을 옷소매로 감싸자, 맞은편에 앉은 이가 상황을 파악하고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러게, 조심하지 그랬어.”

나긋한 목소리에도 청년은 입을 꾹 다문 채 손을 닦을 뿐이다. 주의력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지던 참에 날아든 목소리가 곱게 들릴 리 없었다.

“LDS에 온 후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며? 너무 지쳐있었던 거 아냐?”

누가 말했지?”

말이 끝나자마자 청년이 으르렁댔다. 청년은 자신에 대한 타인의 말에 언제나 날카롭게 반응하곤 했다. 아마도 그것은 극도의 경계로 무장할 수밖에 없는 청년의 처지에서 온 습관이리라. 그것을 알기에, 상대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물어뜯을 듯 노려보는 청년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카바 레이지? 아니면 사카키 유우야?”

마음대로 상상하라고.”

쓸데없는 말을.”

청년은 손수건을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아무튼, 그런 말이 나왔다는 건 다들 걱정하고 있다는 뜻 아니겠어?”

전투에는 이상 없어.”

네 실력을 의심하는 자야 없겠지만 그렇게 자꾸 피로가 누적되다 보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거든. 갑자기 쓰러지게 된다거나 위기상황에서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곤란하잖아?”

더 이상의 간섭은…….”

간섭만 할 생각은 없어. 원한다면, 도와줄 생각도 있는데.”

청년은 상대를 흘깃 바라보았다. 냉랭하게 잘라내도 자꾸 다가오는 것을 보면 거절해도 소용없을 것이 분명했다. 귀찮은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적당히 받아주는 척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좋아.”

무슨 말이 흘러나올지도 모르면서 청년은 얼른 답했다. 자꾸만 벽을 허물고 자신에게 파고들려 하는 상대가 그는 언제나 불편했다. 상대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청년은 가능한 빨리 끊어내고 자리를 뜰 작정이었다. 호의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보이자, 상대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쿠로사키, 왜 사람들이 환술에 당한다고 생각해?”

생각한 적 없다.”

그럼 지금 생각해. 왜 이성으로 무장한 사람들마저 환술에 무력하게 당하고 마는지. 어떻게 지금까지 내가 성공할 수 있었는지.”

푸른 눈이 웃었다. 그 여유로운 웃음에, 청년은 그를 따라다니는 이름을 새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환혹. 환혹의 데니스. 그의 환술에 걸려든 사람들은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눈으로 환술사가 바라는 모든 것을 토해냈다. 예외는 없었다. 누구든 그에게 자신의 내면을 내보이고 그의 포로가 되어야만 했다.

사람의 약점을 파고드는 네놈의 교활함 때문이겠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겠네. 크게 벗어나진 않았어.”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청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곁에서 몇 번 지켜본 결과로 알 수 있다. 저것은 환술을 시작한다는 것을 알리는 그만의 신호.

무슨 생각이냐.”

사람은 행복한 때로 도피하려 하는 습성이 있어. 그건 살아가는 데 위안이 되기도 하고, 극한의 고통을 외면하고 쉴 수 있는 요람이 되기도 하지. 환술은, 바로 그 지점을 건드려. 사람을 느슨하게 만든 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파헤쳐 보여주지. 그건 누구에게나 유혹적이야.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사람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환상에 발을 담그는 거야.”

환술사는 설명을 늘어놓으면서도 시선은 쭉 청년에게 두고 있었다. 워낙 경계가 깊은 인간이라, 보통의 타깃보다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조금도 틈을 주지 않고 응시하며 그는 청년을 차차 무의식으로 떨어트린다. 언제나 형형히 빛나던 금빛 눈이 시간이 지날수록 탁해지는 것을 그는 알아챈다. 언제나 무장을 풀지 않던 자를 조금씩 함락시키고 있다는 것에 그는 희열마저 느끼고 있었다. , 어서 보여줘. 쿠로사키.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은 너의 내면을.

그러면 그는 그 속을 헤엄치며 청년이 사랑했던 시절을 환상으로라도 돌려줄 생각이었다. 청년이 무장하지 않고 살았을 때, 타인을 경계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했을 때. 지금의 청년의 모습을 보면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평온했던 나날을. 그 시절을 다시 마주한다면 눈앞의 청년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건 자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일 것이다.

세상에선 인간의 그런 습성을 나약한 것으로 꾸짖기도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하거든. 행복했던 시절은 사람에게 돌파구가 돼. 돌파구가 없는 인간이 절망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겠어? 결국 그건 스스로를 방어하는 방패인 셈이지.”

마침내 청년이 지금껏 말한 적 없는 과거가 환술사의 눈앞에 단편적으로 펼쳐졌다. 화사한 색으로 물든 도시의 풍경, 사람들의 웃음소리, 누이의 손을 잡고 산책하는 청년의 모습. 그러나 어쩐지 그 이상 파고들기는 쉽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환술사는 드물게 조바심을 냈다. 조금만 더 파고들면 타깃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으로 타깃을 흔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쿠로사키, 문을 열어줘. 환술사는 나긋하게 속삭였다.

어서 문을 열고 나를 들여보내. 내가 너를 만날 수 있도록.

그때 청년의 눈이 본래의 색을 찾았다. 환술사가 대처하기도 전에, 그는 환술사의 오른손목을 움켜쥐었다.

수작은 집어치워.”

아쉬워라, 깨버렸네.”

기분 나쁜 놈. 내 과거를 볼 생각이었지.”

안심하라고, 쿠로사키. 네 무의식이 이겨서 거의 보지 못했으니까.”

청년은 한참이나 의심 가득한 눈으로 환술사를 바라보다 그가 더 이상 자신을 공략할 생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손목을 놓아주었다.

뭐가 도와주겠단 거야. 나를 훔쳐볼 생각이나 하고서.”

도와주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는데? 중간에 깨지만 않았어도 가능했을 거야.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을 찾아내 네가 그 기억 속에서 편히 잠들 수 있도록 할 계획이었다고.”

물론 행복했던 때의 기억을 파헤쳐 그것을 약점으로 쥐고 그를 휘어잡을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청년은 그에게 다소 위험한 존재였으니까. 그런 점에서, 도중에 실패하고 만 것은 아쉬웠다.

내게 그런 건 돌파구가 되지 못해. 더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그 속에 비치는 건, 전부 잃은 것들이니까.”

전쟁이 닥치며, 청년이 살던 세상은 폐허가 되었다. 사랑하는 것도 전부 죽었다. 남은 것은 몸뚱이 뿐이다.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전쟁을 끝내기 위해 살아야 하는 청년이었다. 영영 되돌릴 수 없을 과거를 헤집는 것은 그에게 후회와 고통만을 남길 뿐.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네, 미안.”

그러니 알량한 수작은 그만둬. 네놈에겐 아무것도 보여주고 싶지 않고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으니까.”

말을 마친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술사를 두고 떠났다. 낡은 코트로 감싼 가는 몸이 환술사의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홀로 남은 환술사는 아직까지도 욱신거리는 손목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자국이 선명했다.

역시 어려운 사람이네.”

조금만 건드리면 무너질 듯 위태로운 인간인데, 교묘하게 파고들어도 무너뜨리기 쉽지 않다. 어떻게 하면 저 인간에게 균열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를 부술 수 있을까. 그것은 환술사에게도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도 안심해, 쿠로사키. 다음에는 제대로 할 테니까.”

제대로 무너뜨려서, 너라는 위험요소를 없애고 자유로이 움직여야지. 환술사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번졌다. 너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거야. 그렇게 되면 너도 무거운 책임을 내려놓고 안식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너의 죽은 동료들처럼.

무시무시한 생각을 감춘 채 환술사는 자신의 찻잔을 들었다. 식어빠진 차의 씁쓸함이 입 안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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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