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적은 빛에 휩싸이더니 카드로 모습을 바꾸었다. 굳이 집어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그 한 장의 카드 속에 패자가 겁먹은 얼굴로 갇혀있으리란 것은 분명했다. 그 끔찍한 처분은 패자라면 당연히 맞이하는 종말.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풍경이지만 전장에서는 흔한 사건이었다. 적을 쓰러트린 소년은 바닥에 나뒹구는 카드를 본 순간 속이 메슥거려 손으로 급히 입을 막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무엇이든 토해내고 싶었다. 몸을 숙여 몇 번 헛구역질을 했지만, 당연히 바닥에 쏟아지는 것은 없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소년은 결국 포기하고 걸음을 옮겼다.
평지에 있는데도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는 것은 습관적인 증상이다. 적을 쓰러트려 전투불능으로 만들 때마다 소년은 구역질을 했다. 처음에는 쉽게 풀리지 않는 울렁거림이 답답해 손가락을 집어넣어 먹은 것을 전부 토해내기도 했다. 기껏 먹은 것을 게워내고서야 소년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소년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심리적인 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전쟁에 내몰려 적을 쓰러트려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머리가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살해’에 가까운 행위에 대한 꺼림칙함이 구역감으로 표출된 것. 그것이 소년을 괴롭히는 증상의 정체였다.
그 구역감에 속아 전부 게워내더라도 해방감은 그때뿐이다. 어차피 다시 적을 쓰러트리게 되면 또다시 구역감에 사로잡힐 것이 뻔했다. 만일 소년을 그 불쾌한 증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줄 근본적인 대책이 있다면 소년이 전장에서 벗어나는 것이리라. 더 이상 타인을 해하지 않게 된다면 심리적인 거부반응도 사라질 테니. 생각이 거기까지 뻗었을 때 소년은 전장에서 도망치는 것을 생각했다 — 그러나 한순간이었다. 그는 전장을 떠날 수 없었다. 아니, 떠나서는 안 되었다.
기껏해야 십대 중반 즈음의 소년이 전쟁에 동원된다는 것은 그만큼 싸울 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방패가 되어줄 어른들은 이미 쓰러진 지 오래. 그나마 남은 사람들이라도 지키려, 소년 또래의 아이들은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하고 전장으로 나가 적을 쓰러트려야만 했다. 절망적인 전장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한 법. 자신이 빠지면 지킬 수 있는 사람을 잃게 된다. 또한 전장에서 계속 싸워갈 동지들에게 더 큰 부담을 지우게 된다. 자신의 무게를 알기에 소년은 고통스러워도 전장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소년은 걸음을 옮기며 쓰게 웃었다.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곳에서 운 좋게 지금까지 버텼다. 그동안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지키기 위해 쓰러트린 적도 여럿이었다. 타인을 해할 수밖에 없는 전사의 처지에 익숙해졌는데도, 머리는 여전히 거부반응을 보인다. 약해지지 않으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불편함을 외면하려 해도 머리는 정직하게 꺼림칙함을 외친다. 머리도 닳아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여전히 자신을 괴롭히는 구역감이 소년은 원망스러웠다.
어차피 전장을 누빌 거라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편이 좋았다. 전장에서 그들을 구하는 것은 승리지 일말의 양심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 멈칫하다 보면 마음이 약해지고 만다. 냉정하게 적을 처리해야 하는 전장에서 그런 것은 치명적이다. 소년은 천성이 상냥했던 자들마저 전장에 서며 상냥함을 잘라내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 굳이 ‘약한 면’을 잘라내려 하지 않아도 전쟁을 거치며 자연히 냉혹함으로 무장하게 되기도 했다. 소년의 친우도 이미 단단히 무장해, 수많은 적을 망설임 없이 쓰러트리고 있었다. 그의 따스한 옛 모습은, 이제 소년만이 기억하는 과거가 되었다.
기지로 돌아오면서 소년은 친우와 마주쳤다. 과거 사랑하는 이들에게 다정하게 웃어주었던 단정한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웃음을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전쟁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웃음을 잃었으므로. 다만 그것은 절망스러운 세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빠르게 사태를 파악하고, 철저히 무장해서이기도 했다. 덕분에 전쟁이란 극한의 재앙에 그는 이미 완벽히 적응한 채였다. 그런 친우의 곁에 설 때면 소년은 자신의 나약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소년이라고 하루아침에 소중한 사람들을 앗아간 적에 증오를 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친우처럼 냉정해지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기엔 소년은 아직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지금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건 전투뿐이라 해도, 전투가 아닌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 믿고 싶었다. 잔학한 침략자를 인간이 아닌 괴물로 취급해 거침없이 해치우고, 모두를 구하는 길은 싸움뿐이라 생각하는 친우와는 다를 수밖에.
친우는 기지에 도착할 때까지 적의 전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돌아와서 적의 공격에 대한 대비책을 의논할 때는 앞장서 의견을 내기도 했다. 소년은 새삼 그가 얼마나 전쟁에 자신을 맞춰왔는가 실감했다. 나는 언제쯤이면 저렇게 단단해질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저렇듯 앞서서 이끄는 위치가 될 수 있을까. 소년은 친우의 열띤 얼굴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회의가 끝나고 잠깐 기지를 빠져나온 소년의 눈에 문득 불에 그슬린 적의 무기가 들어왔다. 아마 아군이 거세게 몰아붙여 쓰러트린 자의 것이리라. 순간 소년은 자신이 쓰러트린 적을 떠올렸고, 금방이라도 속이 울렁거릴 것 같아 도망치듯 구석으로 향했다. 소년은 사람들의 시선이 쉽게 닿지 않는 곳에서 몸을 숙인 채 쉬었다.
“무슨 일이야, 유토?”
자신을 부르는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소년은 고개를 들었고, 낯익은 붉은 눈과 마주쳤다. 친우의 동생인 동시에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기도 한 소녀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소년의 핏기 없는 얼굴에 놀란 소녀는 소년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어디 아프기라도?”
“아니. 아무것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태껏 그를 괴롭혀온 증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소년은 하필 소녀 앞에서 다시 치민 구역감에 고개를 숙이고 구역질을 해야 했다.
“속이 안 좋아? 상태가 나쁘면 오늘 맡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쉬는 게 좋을 텐데.”
“괜찮아.”
“안색이 나쁜데.”
“그냥, 심리적인 증상이야.”
소녀의 걱정을 가라앉히려면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년은 약한 모습을, 가능한 보이고 싶지 않았던 상대에게 보이고 말았다. 그것이 부끄러워 소년은 고개를 돌려 소녀의 시선을 피했다.
“뭐 때문인데?”
그러나 소녀는 그것으로 물러서지 않았다.
“제대로 말해줘, 유토.”
“카드화를, 하면.”
“응, 계속 얘기해.”
“그러면 구역질이 나. 처음에는 정말로 속이 뒤집힌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아직도 마음을 강하게 먹지 못해서, 카드화를 할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거였어.”
막상 입을 떼자 말은 술술 흘러나왔다. 털어놓을 상대를 지금까지 기다려왔던 것처럼.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소녀를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제 이야기를 듣고 있을지 확인하기 두려웠다. 소년의 울퉁불퉁한 손이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미안, 약한 말을 했지. 다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싸우는데 아직까지 부끄럽게도.”
“부끄러운 게 아니야.”
소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껄끄러운 것을 껄끄럽다고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하지만 나는 약한 내 모습이 싫어.”
“약하다는 단어는 자신이 할 일을 외면하는 자에게 붙이는 단어야. 유토는, 유토가 해야 할 일을 충분히 하고 있잖아.”
“이렇게 흔들려도, 싸우기만 하면 괜찮아? 슌은 레지스탕스의 이름에 맞게 흔들리는 일 없이 싸우고 있는데, 앞장서서 아카데미아를 쓰러트리고 있는데, 나는 언제나.”
“오빠는 오빠고 유토는 유토야. 유토까지 오빠처럼 싸울 이유는 없어.”
소녀의 손가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소년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소년은 비로소 소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것은 실망도 슬픔도 아니라, 자애로운 웃음이었다.
“우리의 싸움은, ‘필요한 것’이지 정의가 아니잖아.”
소녀는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세상을 짓밟는 침략자에 맞서 싸우는 것은 지금의 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항하지 않는다면 당장 쓰러질 수밖에 없으므로. 그러나 그 과정에 타인을 해하는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 소년을 괴롭히는 껄끄러움의 근원은 바로 그런 생각이었다.
“있잖아, 유토. 나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언제나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 누군가를 다치게 해야 해. 유토는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에 괴로운 거야.”
“루리.”
“그걸 잊게 되면 우리도 언젠가는 아카데미아 같은 괴물이 될지도 몰라.”
소녀는 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이더니, 가만히 소년을 끌어안았다. 그 좁은 품이, 소년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넓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유토는 지금 잘 하고 있는 거야. 나도 유토처럼, 싸움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상냥한 목소리에 소년은 눈을 감았다. 걸핏하면 자신을 괴롭히던 것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소녀는 언제나, 그가 가장 괴로워하는 것을 마법처럼 없애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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