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라] 포식

2021. 1. 31. 18:58 from 02

 

아이는 모든 것을 삼키는 심연이었다. 무력한 생물로서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보다 강한 타자를 삼켜 무장하는 존재로 진화해왔기 때문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삼킨 수많은 타인이 양분으로 사그라질 때마다, 아이는 그들의 모습마저 게걸스레 먹어치워 제 것처럼 둘렀다. 수많은 타자를 덮어쓴 탓에, 아이는 본래 제 모습을 기억하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아이는 자신의 원형이 무색무형의 생물이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무엇이든 삼켜야 할 존재.

그렇게 끝없이 타자를 삼키던 아이를 구해준 사람이 있었다. 물빛 눈이 꼭 렌즈처럼 빛나던 여자는 전장에서 아이를 찾아내 안온한 세계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아이가 만난 것은 저보다 몇 살 위인 사내. 여자의 아들이라는 그 사내는 아이와는 정반대로, 날 때부터 모든 것을 쥔 축복받은 존재였다. 세계적인 대기업 창업주의 아들로 태어나 뛰어난 재능으로 일찍부터 주목받았으며, 무엇이든 풍족한 환경에서 부족함 없는 교육을 받았다. 아이를 만난 시점엔 이미 창업주의 후계자로서, 부모의 기업을 물려받은 젊은 사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내와 처음 만나 악수한 날, 아이의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되었던 이름은 그에게 따라붙은 화려한 수식어가 아니었다. 사내가 내세운 형이라는 호칭이었다. 내 이름은 아카바 레이지. 우리는 언젠가 아카바 레오에 맞서 싸우게 될 거다. 그때까지 너는 아카바 레이라란 이름을 쓰며 내 편이 되어줘야 해. 메마른 목소리로 말한 사내는 희미한 웃음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어?

[네 형이 되어주겠다는 뜻이다. 레이라.]

형이라는 단어의 의미야 알고 있었다. 손위의 남자형제를 부르는 호칭. 기억이 시작된 시점부터 혼자였던 아이에겐 원래라면 부를 일이 없을 이름. 사내는 바로 그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 사내가 쓰러트릴 적이 존재하는 한, 아이는 그의동생이 되어 그와비슷한 이름을 쓰며 그의곁에 있을 수 있게 된다 그 날 형과 악수한 때부터 아이는 무색무형의 생물이 아닌, 어린 소년이 되었다. 이름도, 보호해줄 사람도, 함께할 가족도 있는 존재로.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더라. 아이는 앞장서 걷는 의 뒷모습을 보며 흘러간 시간을 생각한다. 몇 개월이었던가. 1년을 조금 넘었던가. 제대로 헤아리고 싶지 않은 것은, 사내를 형이라 부를 수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사내에겐 동생이 없었고, 아이에겐 형이 없었다. 다만 사내가 제거하고 싶었던 적을 무너뜨리기에, 아이의 힘이 필요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사내의 어머니는 전장에서 가여운 아이를 구조해온 것이 아니었다. 썩 신기한 무기를 찾아 아들에게 가져다주었다 보는 게 옳다.

실제로 아이는 의 계획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사내의 전사가 되었다. 사내가 그의 적, 침략군에 맞서려 결성한 정예병의 멤버가 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 후 아이는 리더인 형의 지시대로 이국의 전사와도 몇 번이나 싸웠고, 형에게 매번 승리를 안겨주었다. 아이를 포함한 모든 정예병 멤버들이 착실하게 적을 쓰러트린 덕에, 사내는 이제 적진의 중심부에 들어와 있다. 수년간의 준비는 빛을 보았다. 세상을 위협하던 침략군 수장을 끌어내린 그는 마지막 목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바로, 적이 준비하던 끔찍한 연구를 중지하는 것.

이대로 침략군의 비밀 연구실을 찾아, 적이 숨겨두었던 장치를 가동중지시키면 모든 것이 끝난다. 현 세계를 양분 삼아 이상세계를 만든다는 침략군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더는 침략군의 희생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며, 정예병은 해체된다. 세계가 평화를 찾고 전사는 무사히 귀환한다 동화의 마지막 페이지 같은, 바람직한 결말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아이의 얼굴엔 긴장이 드리워진다. 평화로운 세상에 무기는 불필요하다. 사내는 본디 제 형제가 아니었던 아이를 가족의 이름까지 붙여가며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다.

형을 잃게 된다. 혹은, 버려진다.

둘 중 어느 것을 더 두려워하고 있는지, 아이는 알지 못한다. 어느 쪽이건 저에겐 끔찍한 결말이란 것만 짐작할 뿐이다. 하필 사내는 연구실을 찾아가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너무 들떠서인지, 이제 아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게 되어서인지. 말 한마디 없는 형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내내 아이는 기적을 소망했다. 사내가 저에게서 아카바 레이라라는 이름을 앗아가지 않는 것이라거나. 사내의 계획이 완전히 꼬여, 계속 저라는 무기를 지니고 다니게 되는 길이라거나.

물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내는 결국, 목적지에 들어섰고 모든 장치를 가동중지했다. 적막이 감도는 연구실에서 아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절망했다.

레이라.”

곧 들이닥칠 결말을 생각하며 바닥만 보고 있던 아이는, 형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몇 걸음 앞에 선 사내가 웃는 얼굴로 손짓하고 있었다. 아이는 훈련받은 짐승처럼 그에게 향해 곁에 딱 붙어섰다.

그동안 수고했어.”

사내는 큰 손으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지만 아이는 평소와 다르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여기서 나가면 어차피 버려질 텐데. 지금 여기 선 형도, 형이 내주었던 이름도 모두 잃고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아이가 잔뜩 풀이 죽은 걸 느낀 것일까. 사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말인데, 레이라.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도와준 네게, 감사의 뜻으로 소원을 들어주려 해.”

생각한 적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사내가, 이제는 가치가 없어진 아이를 버리는 대신 최대의 호의를 베풀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가 빌 소원은 하나뿐이다. 영원히 형과 함께 있을 수 있을 길. 거절당한다면 형에게 버리지 말아달라고 매달릴 것이다. 만일, 받아준다면. 그러면 형은 그때부터 아이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소원을 토해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건.

형님을…….”

겨우 말을 마치고서 아이는 겁먹은 얼굴로 리더를, 형을 바라보았다. 어떤 쪽이건 답이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기다림은 그렇게 길지도 않았다. 흩어질 듯 여린 목소리에 리더도 속삭임으로 답했다. 원하던 답을 들은 아이는 커다란 눈 가득 형의 모습을 담고 웃었다. 이것이 서로를 마주보는 마지막 순간이 되리란 것을 두 사람 모두 알았다.

 

*

 

전쟁은 끝났다. 세상을 삼킬 듯했던 침략군은 열 명도 되지 않은 정예병에게 패배했다. 정예병을 이끈 자는, 침략군 수장의 아들이기도 했던 사내. 고작 열여섯 살의 도련님은 세계를 구하고 자신의 전사를 지켜냈으며 세상에 평화를 가져왔다. 침략군이 비밀히 진행하던 끔찍한 연구까지 중단시킨 사내는 이제 오래도록 영웅으로 존경받게 될 것이다. 마지막까지 따라준 전사들을 치하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라고 지시할 때 사내의 얼굴엔 안도와 기쁨이 걸려있었다.

귀환을 앞두고, 정예병이 승리를 축하하던 자리에서였다. 모두가 웃고 떠들 때, 이국의 저항군 출신으로 전사들 중 유일하게 전쟁을 경험했던 청년이 슬그머니 리더의 곁에 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다음은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낮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눈이 죽어있어. 리더.”

쿠로사키한테서 걱정을 받을 줄이야.”

가볍게 하는 말이 아냐.”

글쎄, 나는 괜찮은데.”

적당히 받아쳤는데도 청년은 사내를 놓아줄 기미가 없다. 맹금을 연상시키는 눈에 리더를 담을 뿐이다. 리더를 붙잡은 이유가 단순한 걱정이 아니었음은, 청년의 다음 말로 명확해진다.

레이라를 랜서즈에 넣은 걸 후회해?”

동생을 데리고 마지막 임무에 나섰던 리더는 홀로 돌아왔다. 사내의 손이 세상에의 연결고리라도 되는 양 붙잡고 있던 아이는, 그의 동생은 이제 없다. 아이의 행방을 묻는 이들에게 리더는 간결하게 설명했다. 모든 위험을 끝낸 것은 그 아이라고. 마지막 임무에는 두 사람만 뛰어들었으니 아이가 어떤일을 했고 어디로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 리더의 손을 떠나, 아마 영영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만 짐작할 뿐. 대개 소년으로 구성된 정예병에서도 제일 어렸던 아이였기에, 전사 몇몇은 아이의 결말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 중에서도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이 눈앞의 청년.

처음부터 전장이라는 지옥에 아이를 세우는 것을 마뜩찮게 본 청년이었다. 전쟁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던 사람으로서, 아이가 버티지 못할 것을 염려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리더를 보는 청년의 시선엔 책망이 어린 듯하다. 결국 염려대로 되었다고, 형만 찾던 아이를 리더로서도 형으로서도 끝내 보호하지 못했다고. 그러나 리더는 청년의 시선을 외면했다. 아이의 결말은 형제간의 합의로 정해진 것이고, 그에 타인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후회?”

네가 갑자기 음침해진 게 그 때문이라면…….”

레이라는 랜서즈의 싸움에, 마지막까지 도움이 되었어.”

그것뿐?”

승리를 기뻐해줬으면 해. 랜서즈에서 그걸 가장 기대하던 자는 너였으니까.”

너는 리더로서 전사를.”

지켰어야지. 그런 말이 따라붙을 것 같아 리더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이가 에게 정말로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완벽한 타인 주제에.

그 날의 일은 전부 레이라가 선택한 길이었다.”

그러니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면 될 것이다. 리더는 청년의 말을 자르고, 그를 뿌리쳤다.

다만 그 대화로 사내가 느낀 것은, 아이의 존재를 의식하는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리더에게 따라붙고 제 목소리 한 번 내는 일조차 드문 아이였는데도. 전사로 선발되고도 한참을 독립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아이가 세상에 뿌리내리긴 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사내의 본래 영역인 회사에서도 한두 번은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귀환한 전사를 맞이할 때, 한 명이 빠졌다는 것을 알아채고. 사장에게 매달리다시피 떠난 아이의 행방을 묻는 식으로. 이렇게 된 이상 아이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저를 제외한 모두가 서서히 잊도록. 어디에도 없는 사람은 기억에서도 걷혀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사라진 사람과 남은 자신, 둘을 위하는 길이라고 리더는 믿었다.

청년은 그 후로 아이에 대해 묻지 않았다. 리더에 한 가닥 기대조차 없어진 것인지 제 일이 바빴는지 이름을 꺼내는 일도 없었다. 리더와는 필요로 얽혔을 뿐인 청년이니 그런 건조한 태도가 되레 자연스러웠다. 그때도, 전장에서 아이들을 보호해온 습성 때문에 잠깐 그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을 뿐이리라. 오랜 싸움에서 벗어난 청년은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홀로 고향으로 떠났다. 그 뒷모습에 리더는 슬며시 웃었다. 이제 누구도 형제가 선택한 결말에 불만을 표하지 않을 것이다.

리더는 리더대로, 남은 전사를 이끌고 귀환했다. 기대와 염려를 안고 떠났던 소년병은 이제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 전쟁은 끝났고, 전사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들이 구해낸 미래를 모두가 누리며 평화가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환대하는 이들에 둘러싸였던 리더는 자신이 이뤄낸 승리를 즐기며 회사에 들어섰다. 그의 삶이 시작되고, 세상이 바라는 그가 만들어진 곳. 때문에 어떤 곳보다도 그에게 익숙한 장소에.

회사는 젊은 사장의 귀환에 들썩였다. 창업주 대부터 쌓아온 굳건한 바탕은 사장이 자리를 비운다고 흔들리지 않았으나, 사장은 이곳에서 이미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를 통해서만 굴러갈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혹은, 창업주가 뿌린 재앙의 씨앗을 그 아들이 완전히 날리고 돌아왔다는 것에 들떴는지도 모른다. 채 스물도 되지 않은 젊은 사장은 희망을 발굴해 절망을 덮었다. 자칫 악의 근거지로 취급받을 수 있었을 회사는, 악의 패배를 기쁘게 알렸다.

요란스러운 축하를 더 즐겨도 되었으련만, 돌아오자마자 사장이 한 일은 간부회의를 여는 일이었다. 종전까지 있었던 사소한 실패와 중대한 위기, 승리까지 상세하게 전달해야만 했다. 더 나아가 피해 지역의 복구와 전사에 대한 지원, 보상을 논의하는 것이 사장의 목표. 리더로서의 임무까지 포함해, 열 명도 되지 않은 이들의 성과가 낱낱이 공개되었다. 마지막은 정예병에서 가장 기대받았던 인물로 가장 큰 위기를 불러오기까지 했던 소년의 이야기였다.

리더, 그리고 여덟 명의 전사까지. 떠난 것은 아홉 명인데, 이야기는 여덟 명째에서 끝났다. 정예병 결성 계획을 사장과 함께 짰던 간부들이 일순 의문스러운 시선을 보내다 거둬들였다. 아이의 부재를 인지했다가 헤집을 일이 아님을 눈치챘으리라. ‘괴로운 실패를 굳이 자극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라기보다 무기로 취급받던 아이였지만 사장은 제법 정을 주었기에, 드러내진 않아도 슬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장이 끝까지 입을 다문 까닭에, 모두가 조심스레 미래의 이야기만 꺼냈다.

아이를 묻는 일은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장은 타자를 압박해서라도 그 이름을 감추고, 존재를 덮어야만 했다. 결국 누구도 아이를 기억하지 못해 제 머릿속에만 남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계획. 그 괴상한 소망이 어디에서 근거했는지는 사장만이 안다. 누구에게도 꺼낼 일이 없거니와 꺼내도 이해받을 수 없을 조잡한 심리.

물론, 겉으로야 사장은 조악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우수한 인간이었으며, 아이의 일을 제외하면 제가 굳이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까지 세심하게 살피는 자이기도 했다. 때문에 사장은 누구에게도 속내를 들키지 않으리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누군가 기억을 파헤치지 않는 한, 그는 언제까지나 천재 사장이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기묘한 만족감을 안겼다.

그런 사장이 마주한 마지막 난관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빡빡한 일정을 모두 끝내고 모처럼 휴식을 취할 때였다. 그가 사장직을 물려받기 전까지 경영을 도맡았던 어머니가 그를 찾았다. 한동안 자리를 비웠던 아들을 만나기 위함이었겠지만, 사장은 뜨거운 것에 데기라도 한 듯 움찔했다. 어머니의 물빛 눈을 보는 순간 제 내면이 낱낱이 해부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든 탓이다. 이전부터 그는 저 눈을 볼 때면

속에서 끓던 것은 말이 오가는 사이 가라앉았다. 어머니는 아들이 지쳤을 거라 생각했는지 무난한 이야기만 꺼냈고, 사장은 가벼이 답하며 차차 평안을 얻었다. 익숙한 곳에서 가족과 시시한 대화를 한다는 점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몸은 전장에서 벗어났고, 그를 사랑하는 모든 것이 무사히 남아있다. 어쩌면 당연한 평화에 저도 모르게 감격했을 때, 어머니가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그 애는요?”

굳이 되묻지 않아도, 그 모호한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어머니가 데려와 저에게 넘겨주었던 아이를 말하는 것이다. 사장은 길게 설명하는 대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한 가닥 감상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아이의 종말을 정리할 뿐이다.

아카바 레오에 대항한다는 목표를 이룬 것으로 끝났군요.”

전부 끝나면, 그 애도 해방시키고 싶었지만.”

괜찮아요?”

어머니에게 아이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쓸모는 있지만 정을 붙일 이유는 없는 장치. 그러니 지금의 물음은 그저 아들의 심정을 헤아려 꺼낸 예의상의 질문이리라. 사장은 신원불명의 아이를 가문에 끌어오기 위해 붙여준 허울뿐인 이름을 떠올렸다. 저와 같은 성씨. 저와 비슷한 이름. 내면이 빈 아이는 부유하지 않으려 가짜 이름에 집착했다. 심연을 연상시키는 눈에 사장만을 담으며, 걸핏하면 을 불렀다. 자의가 제거된 주제에 사장의 손은 명령 없이도 잡았다.

차라리 끝까지 인형으로 취급했다면 기대도 않았을 것을, 연민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으로 사장 역시 형제라는 관계를 진지하게 받아주었다. 어쩌면 그것이 아이가 침몰한 원인일지도 모른다. 형을 위해 무리한 요구를 기쁘게 실행한 끝에 자신마저 던져버렸을지도.

그 애는 마지막까지 후회는 없어 보였어요.”

레이지만은 따랐으니까요.”

랜서즈는 전쟁을 끝냈습니다. 희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바로잡지는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이뤘어요. 그 애의 노력을 헛되이 하지 않게, 남은 것도 차차 해결해야지요.”

그 정도면 되었어요. 형이 계속 기억해준다면, 그리 나쁜 결말은 아닐 거예요.”

기억은 계속 가져갈 겁니다. 그 애를 포함해, 돌아오지 못한 모두의 기억을.”

사장은 어머니의 입가에 걸린 웃음을 보았다. 아들의 성장이 기쁜 듯, 흡족함이 비치고 있었다.

좋아요. 레이지다운 모습이네요.”

그것은 그에게도 만족스러운 인정이었다.

 

*

 

회사로 돌아온 후로 사장이 몰두한 것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정예병을 이끌고 회사를 떠나기 전에도 미래를 위해 가능성에 투자하던 사장이었으나, 귀환하고는 모든 선택이 훨씬 과감해졌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영역에 인재를 동원하고,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곳에 거금을 투자하기도 했다. 이유를 물으면 미래를 보고 싶다는 답을 돌려주곤 했다. 처음에는 간부들조차 사장의 선택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과감한 도전은 빛을 보았다. 이제는 금기어가 된 창업주가 세상을 뒤집을 신기술을 발표했던 때처럼, 사장이 선택한 것들이 미래를 이끌게 된 것이다.

한때 사장의 판단을 위험성이 높은, 신중하지 못한 투자로 다루었던 언론에선 앞다투어 사장의 안목을 칭찬했다. 회사의 가치는 더욱 올라갔으며 사장은 미래를 연 사람으로 칭송받았다. 그렇게 짜릿한 성공을 거둬낸 사장은 어느 날, 곁을 지키던 비서에게 물었다.

최근에 내가 한 일을 어떻게 생각하지, 나카지마?”

객관적인 수치를 볼 때 성공적입니다.”

자네가 보기엔, 아카바 레이지다운 선택이었나?”

지금껏 사장님답지 않은 선택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렇단 말이지.”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벽 앞에 섰다. 그곳에 비치는 사장의 얼굴은 드물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른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둔 사내도, 축복받은 천재도 아닌 꿈 많은 소년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시군요. 사장님.”

, 그래. 나카지마.”

아카바 레이지로서, 성공했단 게 만족스러워. 사장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비서는 지금까지 젊은 주인을 모셔온 경험으로 알았다. 지금의 그는, 분명 성공에 도취되어 있다.

바라던 것은 모두 이뤘다. 이제 더 원하는 건 없어.”

사장은 저 아래에서부터 치미는 만족에 웃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자신의 유일한 소원은 가장 성공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나는 아주, 배가 불러.”

사장은, 아니, 사장을 연기하고 있는 아이는 말했다. 아이의 소망은 간결하고 악랄했다. 형님을 삼키게 해줘. 타인을 삼켜 그 사람이 되는 능력을 지닌 아이에게 딱 맞는 바람이었다. 사랑하는 형은 그것을 수락해 아이에게 남김없이 먹혀주었다. 아이는 형의 모습을 두르고, 형의 역할을 짊어지고, 형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형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누구도 아카바 레이라를 찾지 않는다. ‘아카바 레이지를 삼킨심연을 모두가 아카바 레이지로 믿고 있다.

아카바 레이지는 문자 그대로 그와 하나가 되었다.

아이는 제 속을 가득 채운 <>에 깊은 포만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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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