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심상찮아. 으스스한 게 할로윈답군.”
「문을 제대로 잠가두랬잖아. 오늘밤은 악령의 밤이라고.」
“보다시피 제대로 잠가두었다만. 방문은 물론 창문까지도. 네가 날 찾아와서 다짜고짜 우리를 가둬버리는 바람에 난 LDS에서 준비한 할로윈 파티엔 참가하지도 못하게 됐어. 작년보다 화려하게 연 파티를 너 때문에 포기했으니, 그 대가로 너도 하나 알려줬으면 하는데. 왜 오늘 하루 이렇게까지 긴장했는지 말이지.”
「나라고 아카바 레오의 자식과 방 한 칸에 갇혀있고 싶을 리가 있겠어? 하룻밤만 잘 넘기고 싶을 뿐이야. 설마 하룻밤도 못 참겠단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쿠로사키. 상대를 자기 뜻대로 휘두르고 싶다면 그 이유는 제대로 설명하는 게 예의다. 네가 LDS에 들어온 후로, 내가 어떤 듀얼에 널 내보내든 그래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것처럼. 정식으로 묻지. 쿠로사키 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아카바 레이지를 데리고, 할로윈 밤이 끝날 때까지 방에 틀어박혀 문을 꼭꼭 걸어잠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일시동맹이라고 생각해. 우리 둘 다, 악령에 시달리지 않도록 이 밤만 함께 있는 거라고. 문을 열어두는 건 악령이 들어오도록 판을 깔아주는 셈이니 닫아두라 한 것뿐인데.」
“악령, 악령, 악령……벌써 몇 번째나 악령 이야긴지 모르겠군. 할로윈에 악령이 찾아든단 말이야 많다만, 쿠로사키 슌이 그렇게 악령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던가? 폭격 속에서도 살아남은 레지스탕스인데? 아카데미아에게서 세계를 지키려 나선 랜서즈의 멤버이기도 한데도? 하트랜드의 할로윈은 무서운 날로 전해지기라도 했나?”
「하트랜드라고 특별히 다를 건 없었어. 루리가 어릴 땐 지금 여기, 스탠더드의 아이들처럼 내가 직접 할로윈 분장을 시켜주기도 했지. 그때는 나도 어려서 센스가 없었으니 별로 무섭게 되지도 않았지만, 루리의 목적은 할로윈 분위기를 내어 사탕을 받아오는 거였으니까 문제는 없었고. 하트랜드 사람들은 애들을 좋아했으니 아이들이 문을 두드릴 때마다 사탕이며 초콜릿이며 잔뜩 안겨줬었지.」
“그런데도 이제 와서 악령의 밤이라 이야기하며 내 할로윈도 빼앗는다, 라. 여기, 스탠더드의 할로윈은 아이들이 즐겁게 사탕을 받아가는 날인데 말이야. LDS에서 할로윈 파티를 왜 열었겠어?”
「그래서 레이라는 오늘 너한테 사탕을 받아갔나?」
“LDS에서는 오늘 학원의 학생과 강사는 물론, 방문자에게도 전부 사탕을 주기로 이야기됐다. 그러니 레이라도…….”
「학원이 챙겨주는 거 말고. ‘네 동생이’ 직접 ‘너에게’ 받았는지 묻는 거다. 그 애는 널 너무 어려워해서 이런 날에도 네 잘난 사장실 문 한 번 못 두드렸을까 걱정된다고.」
“사탕이라면 한 바구니 준비되어 있지만, 그래, 찾아오진 않았어. 미리 할로윈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좋았을까.”
「바보 같긴. 레이라 같은 애한텐 그런 걸 받으러 와도 된다고 미리 허락을 해야지. 지시대로 움직이는 게 습관이 된 아이인 걸 알면서 그렇게 소극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다니.」
“레이라를 그렇게 신경 써주는 건 감사하다만, 쿠로사키. 네가 날 가둬버렸으니 오늘은 레이라에게 직접 사탕을 줄 순 없어. 내일이건 내년이건 ‘다음 기회’를 위해서라도 네 충고는 머리에 새겨두도록 하지. 그건 그렇고, 내 물음엔 아직 제대로 답해주지 않은 것 같은데. 너희 남매의 할로윈 이야기를 들으니 더 궁금해지거든. 하트랜드에서도 할로윈을 평범하게 즐겼다면, 왜 지금의 너는 할로윈에 악령이 찾아들 거라 굳게 믿고 있는 거지?”
「간단해. 죽은 사람을 너무 많이 봤으니까. 하트랜드에는 죽음이 흔했다. 거리마다 건물마다 죽음이 그득했지. 하트랜드에 침략군, 아카데미아가 밀려든 후로 우리는 살면서 볼 죽음을 다 봐버린 것 같아. 그래서.」
“아카데미아에 희생당한 네 이웃이, 동료가 악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한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좀 서글프군. 죽어서까지 안식을 얻지 못하고 악령으로 떠도는 희생자들이라.”
「한 움큼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과연 저승에서 편히 쉴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악령이 되는 건 생전의 울분과 한 때문이다?”
「뭐, 아카바의 도련님에겐 망상으로만 들리겠지만. 난 내 동료가, 이웃이, 아카데미아가 짓밟은 모든 사람들이 오늘 밤 찾아들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거든. 그러니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밤이 지날 때까지 방에만 있기로 하는 거다. 이제 설명은 되었겠지?」
“역시 서글프군.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네가 너무 많은 상실을 겪었다는 게. 한편으론 그렇기 때문에 또 의문이 들어. 너는 ‘아카데미아에게 원한을 품은’ 악령이 찾아올 거라 생각하면서 왜 ‘아카데미아 수장의 아들인’ 나랑 같이 숨은 거지?”
「질문에 답이 있잖아. 아카데미아 수장의 아들이니까. 하트랜드를 지옥으로 만든 아카바 레오의 아들이 곁에 있다면 불운한 악령들도 다들 그쪽에 주목해서, 누구도 내게 관심을 갖지 않겠지.」
“아카바 레오의 아들인 나를 악령들에게 넘겨주고 싶은 게 아니고? 애초에 널 잘 알고 있을 고향 사람들이, 네게 원한이라곤 없을 희생자들이 널 노릴 것 같진 않은데.”
「내가 잃은 사람들이 내게 해코지할까 불안해하는 게 아냐. 일단 나를 찾으면 다들 날 꼼짝도 않고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아 피하고 싶은 거지.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 대부분은 특별히 강하지도 않았어. 먼저 죽은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의 차이는 운이 따랐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뿐이었을지도 몰라. 아마 나도, 죽은 사람보단 운이 좋았을 거다. 딱 그 정도였겠지. ‘운이 나빠서’ 아카데미아란 괴물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쩌다 살아남은’ 나는 어떻게 비칠까? 아마도.」
“그자들이 왜 네가 살아남은 거냐고, 무언으로 물을 것 같나?”
「그래, 빤히 쳐다보면서……내게서 자기들보다 더 버텨낸 이유를 찾을 거야. 그런 이유 따위 제대로 없는데도. 그자들보다 더 오래 버텼던 행운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도. 날 찾아온 망자를, 내가 아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도 내 생존의 가치를 따지게 될 것만 같아.」
“침략전쟁의 피해자에게 죄는 없다.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하트랜드의 민간인이 희생되어야 할 명분 따위 없었던 만큼 네가 살아남은 데 가책을 느낄 이유란 없어.”
「아카바의 핏줄에게 위로를 받는다니, 우습군.」
“네 앞에선 언제나 아카바로 태어났단 원죄를 안고 있단 생각이 들어.”
「정확히는 ‘아카바 레오의’ 아들이란 거지. 어쨌건 나는 네가 랜서즈를 결성하게 된 것도, 아카데미아를 적대하기로 한 것도 네 출신에서 비롯한 죄의식이라 생각했는데, 틀렸나?」
“부정은 못 하겠는걸. 나도 어느 정도는 불순한 동기로 움직이고 있다고 봐야지. 아카바의 죄를 씻고 싶다는 것.”
「아무래도 좋아. 난 네가 정말로 아비를 끌어내리기만 한다면, 아비가 저지른 일을 제대로 막기만 한다면 네 뜻대로 움직여줄 거다.」
“마지막까지 함께 가주겠다고?”
「왜, 이제 와서 껄끄럽나? 내가 네 목이라도 조를까 걱정되기라도? 아니면 아비의 죄를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
“그럴 리가. 적의 아들인 내게 기꺼이 묶여주겠다는 네 마음이 대단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러니, 나도 하룻밤 정도는 네 고집대로 움직여줘야지. 일시동맹이라고 했나? 아카데미아에 맞서 협력하기로 한 우리 사이에 왜 굳이 일시동맹이란 말이 필요한진 모르겠지만, 이 밤은 문을 걸어잠그고 있을 테니 안심해.”
「협력? 계약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내가 보기에 아카바 레이지는 사업가라 그런지 자꾸만 본인의 책임을 최소화하려 들거든. 내가 언제 자기를 배반할지 모른다 생각하는지, 아니면 껄끄러운 엑시즈 사람 따위 안고 가기 싫은 건지. 날 LDS에 들일 때조차 계약을 하자고 이야기했지.」
“그때의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으니까. 계약이란 절차로 서로를 묶어둬야 했던 거야. 랜서즈를 결성한 지금은 용병과 고용주 같은 계약관계론 함께할 수 없어. 서로를 신뢰하며 협력자로 같이 나아갈 수밖에.”
「혀는 잘 놀린단 말이야.」
“그래도 동맹이라는 말은 마음에 들어. 쿠로사키 슌이, 이 악령의 밤만은 나를 필요로 한단 말이지. 동맹이란 말까지 들먹이면서.”
「내가 너를 이용한다고만은 볼 수 없어. 동맹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함께한단 것. 아카바 레오가 만들어낸 괴물이 이 세계엔 넘쳐나. 내 고향을 쓸어버리러 온 아카데미아 놈들 같은. 아카바 레오의 궤변에 머리가 지배돼 끔찍한 악행을 저지른 놈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겠어. 자기네를 받아줄 지옥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아카바의 본거지로 향하겠지.」
“그게 아카데미아가 아닌 여기, 마이아미라고?”
「아카데미아는 다들 프로페서의 아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본거지가 어딘지도, 프로페서가 어디서 왔는지도. 경비가 삼엄한 아카데미아에 다시 들어가긴 힘들 테니 ‘프로페서의 본거지’라도 찾으려 하지 않겠어? 이렇게 평화로운 차원에, 할로윈을 맞아 다들 유령 분장을 할 시기라면 악령이 슬그머니 섞여들기도 쉽겠지.」
“아무리 내가 노력해봐야 아카바가 낳은 죄는 어찌할 수 없다는 건가. 아카바 레오는 처자식 따위 진즉 내팽개쳤는데 그자가 만들어낸 악령은 내게로 올 거라니, 불공평하군.”
「신경 쓸 것 없어. 오늘밤 네 곁엔 레지스탕스가 있으니까. 내가 엑시즈 출신이란 걸 알아채면 놈들은 사냥감을 찾았다 생각하고 날 노릴 거다. 물론 네가 부주의하게 문을 열어서 악령이 밀려들 때의 이야기다만.」
“아카데미아의 악령을 상대하는 건 자신 있다? 이해가 되지 않아. 너는 아카데미아에 평화로운 삶도, 고향도, 주변 사람도 잃은 처지다. 그 때문에 레지스탕스가 되기로 했으면서, 네게 악몽을 남겨준 아카데미아를 또 상대하겠다고?”
「아카데미아는 차라리 나아.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아카데미아 때문에 원혼이 되었을, 내가 아는 사람들이지. 아카데미아 같은 괴물은 증오하고 적대하며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면 그만이야. 이미 죽은 악령을 적대하는 것 따위, 잘난 아카바 레이지도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 속이 편하고.」
“그래서 동맹이라는 거군. 나는 널 괴롭게 만드는 고향의 희생자로부터 널 지켜내는 거고 너는 아카바의 죄악을 상징하는 아카데미아로부터 날 지켜낸다, 라.”
「하룻밤을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지 않나?」
“네 말대로. ‘일시’동맹이란 건 조금 아쉽지만.”
「일시적 동맹인 게 당연하지. 우리가 이렇게나 붙어있을 날은 오늘 하룻밤이 전부니까. 어디까지나 오늘밤을 넘기기 위한 동맹이니까, 밤이 지나면 원래 우리 위치로 돌아가는 게 맞아.」
“그 점이 아쉽다는 거다. 네게 난 아직도 아카바의 아들이고, 완전히 믿지 못할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망할, 갑자기 누가 문을 두드리는 거야? 아무도 찾아오지 않게 해두랬잖아!」
“신경 쓸 것 없어, 쿠로사키. 네 요구대로 미리 주변에 일러뒀다. 오늘밤은 누구도 여기 출입해선 안 된다. 중요한 일은 중간결재자에게까지 올린 후 내게는 메시지로 보고하도록. 이라고. 일정도 전부 취소해뒀어. 그러니까.”
「그럼 뭐해, 아직도 문을 두드리는데!」
“진정해. 파티에 참가한 스쿨 학생들이 장난치는 걸 거다. 내가 돌려보낼 테니까.”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말고. 흘러나오려던 말이 입 안에서 갇혔다.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
젊은 사장은 팔짱을 낀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에게 그는 한순간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문이 열린 직후부터 쭉,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오래도록 사장을 보좌해온 비서는 사장의 표정 없는 얼굴에서 미묘한 불만을 읽어냈다.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오늘 저녁부터는 절대 찾아오지 말라고 했던가. 그가 평소 오랜 시간을 보내던 사장실을 굳이 비워두고 회의실에 가 문을 걸어 잠갔던 이유가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앞에선 꺼내고 싶지 않은 사적인 이유가.
그럼에도 사장을 찾은 것은 명백히 제 실책이었다. 사장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사장을 직접 만나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다 후자를 택했으나, 결국 사장을 실망시키고 만 것 같다. 그렇다고 이대로 모든 걸 불편한 채로 남겨둘 수는 없다. 비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입을 뗐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사장님.”
긴 침묵을 깬 말에 사장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문을 열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죄송합니다. 사장님의 지시를 지키려 했지만, 이사장님이 추진 중이신 회사 인수 건이 워낙 급해서 직접 의견을 구하기 위해…….”
“그렇다고 패스키로 문을 열고 들어올 줄은 몰랐어. 매년 이날만 찾아오는 손님을 보고 있었는데 말이지.”
두 사람이서 쓰기엔 다소 큰 공간에, 사장의 한숨소리가 퍼졌다. 손님이라는 단어에 비서는 이번에야말로 문을 열어버린 것을 후회했다. 평소처럼 사장실에서 만나선 안 될, 누구에게도 보이려 들지 않는 손님이라. 그것도 일 년에 한 번밖에 만날 기회가 없는 사람이라니. 아마도 귀한 손님이었으리라. 기껏 상대를 기다렸을 사장이 ‘방해’에 얼마나 날카로워졌을지.
그러고 보면 하나 희한한 점이 있었다. 문을 열었을 때 회의실에 보였던 건 사장 한 명뿐이었다는 사실. 문이 열리자마자 손님이 자취를 감췄단 뜻인데,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사라진 것인지 신기하기만 했다. 숨었다 해도 자리를 떴다 해도 참 행동이 빠른 사람이란 생각을 안고, 비서는 슬쩍 손님에 대해 물었다.
“손님은 이미 돌아갔습니까?”
“자네가 문을 열자 바로 빠져나갔지. 방해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니 내년엔 오지 않을지도 몰라.”
“부주의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 미움받아도 어쩔 수 없지. 할로윈 파티는 잘 진행되고 있나?”
“네. 다들 즐거워하더군요.”
“나도 중간에 얼굴은 비춰야겠군. 그나저나, 나카지마. 쿠로사키가 죽은 게 올해로 몇 년째지?”
사장이 흘린 낡은 이름에서 비서는 수년 전 회사에 머물렀던 청년을 떠올려냈다. 사장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던 청년은, 침략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왔다고 했다. 고향이 맞이한 비극처럼 황폐했던 청년은, 사장의 <계약자>가 되어 전장으로 떠났다. 사장이 포섭한 다른 전사들, 열 명도 되지 않는 정예병과 함께 전쟁이란 악몽을 끝내러 간 것이었으나 전쟁과 함께 자신의 삶도 끝맺고 말았다.
사장은 그 불행한 청년의 사인을 끝내 이야기하지 않았다. 때문에 비서는 청년이 전사했는지 사고로 죽었는지, 절망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아예 알지 못한다. 청년이 죽은 해만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비서가 섬겨왔던 젊은 사장이 살면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해가 바로 청년의 삶이 끝난 해였으니.
“7년이었던가요.”
“벌써 그렇게나 됐던가.”
“시간이 참 빠르지요.”
“……하긴 벌써 몇 번은 만났으니.”
“네?”
“아니. 잠깐 다른 생각을 했을 뿐이다. 신경 쓸 것 없어.”
그러나 들릴락 말락 한 혼잣말을 한 때부터 사장의 시선은 너무 먼 곳으로 향해있었다. 이곳이 아닌, 어디에도 없는 곳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여 비서가 뭐라도 말을 얹으려던 때, 사장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죽은 사람을 달래는 날이기도 하지, 할로윈은?”
“그런 의미가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어려서는 죽은 자가 산 자의 세상에 끼어드는 건 불합리하다 생각했는데, 이젠 생각이 달라졌어. 하루쯤은, 끼어들어도 되지 않을까. 산 자가 죽은 자의 흉내를 내는 날만큼은. 나도 참 감상적으로 변했다니까.”
“오늘따라 쿠로사키가 생각나십니까?”
아까부터 쿠로사키 이야기를 꺼내시는 게, 어쩐지. 조심스레 덧붙인 말에 사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년이 되기도 전에 죽은 청년에게 안타까움이 짙게 남았던 모양이었다. 사장이 실로 오랜만에 청년의 이야기를 꺼내며 씁쓸함을 숨기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오늘의 손님은 청년과 연이 있던 사람이리라. 죽은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혹은, 죽은 사람에 대해 무언가 증언해준.
“죽음이 너무 많았던 삶이라 오래 버티지 못한 걸까.”
“그래도 더는 죽음의 악몽에 시달리는 일은 없게 되었으니, 그걸 위안으로 삼아야지요. 전쟁은 이미 끝났잖습니까. 쿠로사키의 기여로.”
“그래도 쿠로사키의 마지막엔 울분 같은 건 없었을 거다?”
“물론 알 길은 없죠. 그랬길 바랄 뿐.”
“……그런 거라도 있어야, 망령으로 남지 않나?”
팔짱을 푼 사장은 비로소 비서를 제대로 바라보며 말했다. 비서가 저지른 실수를 이젠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단 것처럼. 저에게로 향한 시선에 안도한 비서는 사장을 마주보다 그의 오른손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사장이 제법 힘을 주어 쥐고 있는 게 무엇인지는, 살짝 삐져나온 부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불에 그슬린 카드 조각. 두 사람이 일하는 회사의 중점 사업인 게임 사업에 쓰이는 카드 일부.
거기서 비서는 청년의 유일한 유품을 떠올려냈다. 그 불운한 청년이 언제나 지니고 다니던 카드. 청년의 무기인 기계 새가 깃들었던 카드 중에서 딱 한 장. 불에 타서 일부만 남은 카드를 사장이 챙겨온 후, 내내 간직해왔음을 비서는 안다. 그러니 사장이 던진 괴상한 말에 어떤 감정이 붙어있었을지도 이해한다.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에 망자를 망령으로 만드는 건 산 사람인 것 같습니다만.”
“의미를 모르겠군.”
“산 사람의 미련이, 망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망자의 영혼을 붙들어놓는 것이리란 이야기입니다. 망령이 실재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요.”
“이제 이해가 돼. 일리 있는 이야기인데.”
“그렇지만 망령으로 남는단 건…….”
“산 사람이 욕심을 낸다는 게 되지만 말이야. 다르게 말하면 죽은 사람을 산 사람에게 묶어두는 셈이지.”
말을 마치자마자 소파에 앉아있던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문 쪽으로 향하는 것이, 이제 회의실을 나서려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종료된 만남에 대한 아쉬움도, 죽은 이에 대한 감상도 전부 떨쳐낸 것인지. 자네가 이야기한 회사 인수 건은 조금 있다 어머니와 직접 상의하려 해. 이미 얼마 전에 어느 정도 답을 정해놓긴 했지만. 그러니 이제 걱정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비서가 저를 찾아온 이유를 정확하게 풀어주는 말에서, 조금 전 같은 쓸쓸함은 비치지 않았다. 사장은 본디 그런 사람이었다. 쓰린 실패도 괴로운 감정도 알아서 소화해낼 수 있는, 타인 앞에 내면을 드러내는 것조차 드문 사람.
그렇기에 오늘 사장에게서 잠시나마 날것의 감정을 이끌어낸 <손님>이, 비서는 내심 궁금해진다. 함께 회의실을 나서 복도를 걸으며 비서는 슬그머니 물음을 얹었다.
“오늘의 손님이 누구였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 때문에 방해받은 것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아. 자네도 아는 사람이었어.”
힌트라도 하나 건져볼까 싶어 던진 질문이었으나, 선을 긋듯이 짤막한 답변이 돌아오는 바람에 소득은 없었다. 사장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가 아니라 내게 화가 났을 거고.”
“너무 범위가 넓은데요. 랜서즈였습니까?”
“수수께끼 놀이를 할 생각은 없으니 이렇게만 말해두지. 자네가 영영 다시 못 만날 사람이라고.”
그럼 잠깐 할로윈 파티에 갈까. 레이라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거든. 능숙하게 화제를 바꾼 사장은 이제 더는 비서에게 매이지 않겠다는 듯 성큼성큼 앞서갔다. 파티가 열리는 라운지로 향하는 사장의 오른손에는 여전히 청년의 유품이, 타다 만 카드 조각이 들린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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