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난 때부터 시야를 메운 것은 암흑이었다. 어둠이 드리워진 것인지, 아니면 모든 빛이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거대한 상자에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타자의 기척은 없고 손을 뻗어봐야 잡히는 것도 없다. 거의 모든 감각이 의미를 잃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제 기능을 하는 것은 청각. 언젠가부터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말소리도 발걸음 소리도 아니지만, 그곳이 깜깜한 상자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려주는 것.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괴물은 청각의 날을 세웠다. 귀에 익은 소리인데 무엇인지 바로 짚기는 어렵다. 이곳의 문이 열리는 소리일까? 아니면 이 어두컴컴한 공간에 균열이 생기는 소리? . . 일정 시간마다 반복되는 소리를 두고 온갖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어둠뿐인 이곳에, 타자의 존재를 느낄 수 없는 곳에 무엇이라도 변화가 생기길 바라서이리라.

  암흑 속으로 떨어지기 전만 해도 괴물은 세상을 손에 쥐는 일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괴물을 보고 죄 두려움에 굳어버렸고, 용기 내어 괴물에 덤벼든 정예병은 거짓말처럼 꺾였다. 열 명도 되지 않는 정예병을 무참히 짓밟고서 세상에 제 이름을 새기기만 하면, 세상은 괴물의 먹이가 될 터였다. 저를 향한 저주에도 귀를 때리는 비명에도 괴물은 한껏 들뜬 채였다. 그것이야말로 괴물에게 힘을 실어주는 마법의 약이기에 그랬다.

  인간의 두려움이 되기로 한 괴물에게 저를 향한 공포는 양분이었고 날아드는 비명은 달콤한 찬사였다. 두려움이 짙어질수록 괴물은 무시무시한 악마가 되어갔다 한 걸음만 더 떼면 세상을 삼킬 듯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방해꾼이 나타나는 바람에 괴물은 힘을 잃고 추락하고 말았다. 하필 그를 막아선 건 이미 오래 전 한 번 괴물을 끌어내린 적 있는 방해꾼이었다. 제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괴물을 처치하기로 한, 자연의 힘으로 무장한 지독한 인간.

  방해꾼의 첫 번째 개입은 이십여 년 전의 일. 4체의 드래곤과 결합해 무시무시한 힘을 두른 괴물이 이번처럼 세상을 폐허로 만든 시점이었다. 괴물이 인간의 마지막 은신처까지 쓸어버리고 <정복자>가 되려던 때. 방해꾼은 자연의 정수를 담은 4장의 카드를 쥔 채 괴물 앞에 섰다. 다음은 자연의 힘으로 그와 결합한 드래곤을 흩어버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없다는 듯 세상을 네 개의 차원으로 찢어, 각 차원에 드래곤을 하나씩 몰아넣기까지 했다. 그때 괴물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은 저 또한 네 갈래로 나누어, 4개의 차원에 나뉘어 떨어진 드래곤을 틀어쥐게 하는 것뿐.

  넷으로 찢어지면서 힘도 분신들에 분산되고 만 괴물은 오랜 시간을 들여 분신을 하나로 뭉쳤다. 네 개의 조각이 쥐고 있던 드래곤도 한곳에 모인 덕에 괴물은 원래의 힘을 찾을 수 있었다. 세상을 위협했던 힘을 쏟아내며 괴물은 과거에 이루지 못한 목표에 빠르게 다가섰다. 정예병과 그 리더까지 쓰러트릴 때만 해도 괴물은 자신만만했다. 이번에야말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방해꾼이 다시 나타난 건 바로 그 시점이었다. 괴물의 분신을 감시하기 위해 똑같이 4개의 차원에 분신을 흩어놓은 그 자는, 과거의 힘을 다시 끌어와 그에 맞섰다.

  결말은 빤했다. 괴물은 또다시 실패했다. 과거와 똑같은 무기에 당해서. 실패했다는 것만큼이나 괴물을 처참하게 만든 건 그가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는 분신들이 마지막 순간 방해꾼에 동조했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세상에 섞여드느라 인간의 모습을 덮어썼던 바람에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일까. 인간과 가까웠던 탓에 본체인 괴물보다 주변 인간들의 주장에 더 이끌리게 된 것일까. 알 길은 없다. 배반당했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물론 괴물이 진짜 원망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었다. 그의 뜻을 번번이 꺾어놓고 마는 자. 아직도 괴물은 저를 막아선 방해꾼의 동기를 알지 못한다. 자연의 힘을 두른다는 건, 더는 인간으로 살 수 없게 된다는 뜻. 그 날부터 개인이 아닌 정의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 세상을 위해 몸을 던졌다고 하기엔 괴물이 아는 인간이란 제 욕망에만 몰두하는 어리석은 족속이었다. 혹 괴물 앞에서 심판자를 자처한 것이 미래가 없다는 체념에서 비롯한 자기파괴적 선택이었다 해도 다시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번엔 과거 자연의 힘을 사용한 여파로 원래의 육신을 잃은 상태이기까지 했다.

  왜 그 자는 그렇게 지독한 선택을 했을까. 방해꾼에게로 생각이 뻗는 건 이루기 직전에 물거품이 된 목표 때문이다. 그 자만 없었다면, 이번에는 이룰 수 있었다. 한 번 실패한 후 이십여 년이나 벼르던 소망을. 괴물이 인간의 모습을 덮어쓰면서까지 오래도록 버티게 한 꿈을. 왜 방해꾼은 그를 가만두지 않는 것일까. 저번 대에 그를 방해해 인간의 삶을 잃었다면 이번에는 나서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자연의 힘에 기대봤자 괴물의 숨통도 끊지 못한다면 저항을 이어갈 이유가 없는데.

  생각은 거기서 멎었다. 규칙적으로 울리던 소리의 정체를 알아채서였다. 기억을 더듬어 답을 찾고 나니 너무도 시시한 것이었다. . 방울져 떨어지는 물소리. 이 공간에 균열을 내는 것이나 탈출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는 소리. 굳이 위안거리를 찾자면 물이 있다는 걸 확인한 만큼 어쩌면 이곳에 다른 생명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 정말 괴물 이외의 생물이 있다 해도 소통 가능한 존재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괴물은 물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무엇이라도 만날지 모른단 희망을 품고. 지금 괴물이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방해꾼 때문에 또다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단 사실이 아니라 이곳에 혼자 남겨졌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 어떻게든 타자를 찾아야 하는 외로움은 한때 세상을 위협했던 괴물에겐 어울리지 않는 약점이다. 오히려 괴물에게 지배당할 운명인, 인간을 닮은 듯했다 치미는 불쾌감에 괴물은 이빨을 으득거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괴물에겐 인간을 닮은 부분이 일부 남아있다. 남아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 부분들이 우연히 인간과 겹친 부분이 아니라, 그 자신이 아직 끊어내지 못한 과거의 잔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지배하겠다고 나섰지만 괴물의 바탕은 본래 그들과 같았으니. 평소엔 일부러 덮어두던 한계를 괴물이 어쩔 수 없이 떠올리고 만 때.

  “안녕. 또 만났네.”

  명랑한 목소리가 괴물의 귓속에 박혔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 전까진 무엇 하나 알아보지 못하도록 어두컴컴하기만 했던 세상에 희한하게도 드문드문 형체가 보인다. 그가 선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호수가, 저 위쪽에 가파른 벼랑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시각이 드디어 제 기능을 하게 된 것인지, 그곳만은 어둠이 걷힌 것인지. 무의미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휙휙 넘겨버렸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아무래도 달갑지 않았던 탓이다.

  귀에 익은 목소리로 대강 짐작한 사실이지만, 눈으로 보니 확실해졌다. 이 괴상한 공간에서 만난 첫 번째 타인이 누구인지. 괴물의 목적을 두 번이나 꼬아버린 방해꾼은 처음 괴물 앞에 섰을 때의 모습을 덮어쓰고 벼랑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오랜 친구를 만난 양, 저 아래쪽에 선 괴물에게 손까지 흔들면서. 많아봐야 스물이나 됐을까 싶은 젊은 여자에게 괴물의 시선이 고정된다. 균형을 잃기만 하면 바로 추락할, 아슬아슬한 곳에서 여자는 겁 없이 발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왜 하필…….”

  결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상대와 마주쳐서일까. 저도 모르게 흘린 첫 마디엔 불만의 기색이 가득했다. 어차피 의미 없는 이야기란 생각에 제대로 말을 맺지 않았지만 상대는 괴물의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듯 바로 받아친다.

  “나였냐고? 그야 우리는 한 배를 탄 사이니까. 둘이서 세계의 운명을 두고 다퉜잖아?”

  “그런 건 한 배를 탄 사이보다 적대하는 사이라고 부르지 않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애틋한 관계는 아니지만, 같이 침몰할 관계를 적대관계 정도로 요약할 순 없지.”

  우리의 싸움은 끝이 났지만 세상의 문제가 즉시 바로잡히진 않았거든.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온 거야. 동화를 읽어주듯 평온한 목소리로, 여자는 말을 이었다. 여기는 일종의 소용돌이지. 너 때문에 흐려진 차원의 경계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과정에 일시적으로 생긴 공간. 네 개의 차원이 안정을 찾는 순간 사라질 곳. 이곳에 빨려든 것들은 전부, 새로운 시대에는 남아있지 않아야 할 것들이지. 불순물이라 할까.

  “그러니 너도, 나도. 여기서 끝나게 될 거야.”

  “끝난다고?”

  “그래. 없어지는 거야. 세상은 안정을 찾고, 인간은 이제 더는 우리를 바라지 않을 테니까. 모든 게 바로잡히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인 셈이지.”

  나쁘지 않잖아, 함께 간다는 건? 여유로운 목소리에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나 미래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은 비치지 않는다. 괴물은 여자의 그런 태도가 이전부터 불쾌했다. 인간이었던 주제에, 지금도 인간이었던 시절의 외형을 덮어쓰고 있는 주제에 그녀는 언제나 신처럼 군다. 인간의 욕망에 얽매이지 않는 정의의 대행자인 양.

  여자를 볼 때면 괴물은 오래 품어온 제 야망이 조잡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사로잡힌다. 실은 자신이 세상을 위협하는 악마가 아닌, 힘 자랑에 빠진 어린아이였다면? 신화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최후의 재앙이 아닌, 영웅에게 사냥당할 괴물이었다면? 괴물과 여자, 양쪽 모두 인간에서 출발해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존재로 거듭났기에 드는 의문이다.

  인간의 삶을 포기한 여자가, 마찬가지로 인간에서 벗어난 괴물의 심판자처럼 군다면. 주제넘은 착각을 하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심판자를 흉내 내는 쪽일까, 아니면 악마가 되려 했던 쪽일까? 만일 후자라면 괴물은 앞으로 무엇을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하는 걸까. 혹 양쪽 모두 착각에 빠진 채였고 어느 쪽도 상대를 완전히 무너뜨릴 힘이 없다 해도 여자는 잃을 게 없다. ‘철없는괴물을 막아서려 노력했고 실제로도 그를 무력화했다며, 자신이 믿는 성과를 내세우면 그만이다.

  어쩌면 그렇게 자기위안을 할 수 있기에 굳이 괴물을 방해해온 것인지.

  “함께라니. 그런 일은 없어.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 건 그쪽뿐이야. 넌 그 망할 카드를 써서 내 힘을 빼앗고 인간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줬다고 생각했겠지만, 달라진 건 없었지. 이번 세대의 인간들도 결국 날 찾았으니까.”

  여자처럼 초연하게 반응해야 하는데. 그래야 끝까지 위협적인 악마의 모습을 쓸 수 있을 텐데. 막상 답을 하니 괴물의 생각과는 반대로 감정이 가득 실리고 말았다. 여자의 말을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다는 마음이 머릿속을 흐린 모양이었다. 괴물은 여자의 말 마디마디가 싫었다. 세상에서 사라지리라는 불길한 예언도, 인간이 저를 바라지 않으리란 말도.

  종말 따위 생각해본 적도 없다. 여자의 방해로 두 번이나 목적 달성에 실패한 것부터 괴물에겐 예상 밖의 일. 어쩔 수 없이 쓰러지는 날이 온다 해도, 그건 목표를 이룬 후여야 했다. 한 번이라도 세상을 손에 넣은 후의 일이어야 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지금 종말을 맞는 건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것도 자신을 방해해온 여자와 함께라면 더더욱. 괴물의 목소리에서 충분히 감정을 읽어냈을 텐데도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친다.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 어차피 우리 미래는 바뀌지 않거든. 분신에게도 부정당한 널 누가 또 불러내겠어?”

  “모르지. 인간은 어리석으니까. 나에게 또 무대를 줄지도.”

  “인간은 어리석다, . 틀린 말은 아냐. 인간의 욕망에 매달린 네가 광대밖에 되지 못한 것도 아마 그래서겠네.”

  나른한 목소리로도 여자는 퍽 효과적으로 빈정거린다. 괴물을 더욱 자극하는 건 여자의 말에 별달리 독기가 없다는 점이었다. 괴물이 마디마디 감정을 담아 답하는 것과는 반대로. 한갓 인간의 발악을 지켜보는 신이라도 되는 것 같다. 아마 괴물이 다른 말을 꺼내도 동요하는 일 없이 그의 한계를 짚어줄 뿐이리라. 혹은 운명을 들먹일지도 모른다. 괴물이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는, 그녀만이 미리 보았을 결말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무엇을?”

  “내가, 여기서 끝나리란 걸?”

  망설이다 꺼낸 물음에 여자는 무심하게 반응했다.

  “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지리란 건 알았지. 그게 여기서, 이제야 이뤄질 줄은 몰랐지만.”

  “, 진작 알고 있었지?”

  네가 날 막아섰기 때문에? 아니면 내 힘이 너무 우습게 느껴져서? 따라붙은 말에 여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다소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보아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아마도 엷은 웃음.

  “패왕룡 자크는 악마가 되기엔 너무 인간적이었거든.”

  악마건 신이건,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되려면 인간의 면을 버려야 해. 인간의 감정도, 미련도 전부. 인간성을 잃어야만 인간에서 벗어날 수 있단 거야. 넌 그러지 못했지. 둘만의 공간을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느릿하게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괴물은 그동안 덮어두던 과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괴물의 이름을 얻기 전, 누구에게도 두려움을 사지 않았던 때의 일.

  드래곤과 결합하기 전까지 그는 과거의 여자와 다를 것 없는 인간이었다. 배틀 게임의 프로 선수. 그러나 무대에 올라 상대 선수를 마구 짓밟기 전까지만 해도 주목받지 못했던, 평범한 인간. 처음으로 상대 선수에게 상처를 입힌 때,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에게 갑자기 환호가 쏟아졌다. 객석에선 그의 이름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상대를 일으켜 세우려던 그는 뜻밖의 반응에 들떠 웃어젖혔다. 쓰러진 사람을 두고 웃어버린 그의 모습은 <정복자의 웃음>으로 온갖 지면에 실렸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가 긴장감 넘치는 대결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함께 무대에 오른 상대 선수를 극한으로 몰아세우기 시작한 것이. 그에게 몸을 부비던 드래곤은 그의 파트너가 아닌 무기가 되어 상대의 몸을 할퀴고 물어뜯었다. 무대에 상대 선수의 피가 흘러도, 불운한 패자의 비명이 객석까지 울려도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도리어 한껏 들떠 환호를 보낼 뿐이었다. 타인을 짓밟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을 그가 대신 실현해줬기 때문이었다. 잔인한 무대를 펼치는 엔터테이너로서, 모두의 욕망을 투영한 정복자로서 그는 줄곧 사랑받았다. 오랜 외로움도 거의 걷혀가는 듯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 한 켠엔 언제나 불안이 있었다. 만일 관객의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간다면? 인기를 얻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가 단시간에 모두의 사랑을 받는 선수가 되자 그를 모방하는 이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2의 자크>란 이름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건 그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이미 달콤한 성과를 맛본 이상 이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또다시 주목받지 못하고 외롭게 말라갈 수는 없었다.

  만약, 그가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정복자가 된다면. 인간을 넘어선 괴물이 되어 아예 세상을 지배한다면? 무시무시한 생각을 품은 채 그는 마지막 무대에 올랐다. 여느 때와 같은 승부를 기대했을 관객 앞에서, 그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을 벌였다. 그동안 제 무기가 되어주었던 드래곤 4체와 자신을 융합한 것이다. 몬스터와 합쳐진 인간이 보통의 인간으로 남을 순 없다. 하나로도 위협적인 드래곤을 넷이나 틀어쥔 그는, 바라던 대로 괴물이 되었다.

  세상을 파멸로 몰아간 괴물의 탄생도, 결국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서 출발한 재앙이었던 셈.

  “너는 인간의 욕망에 기대고 있잖아. 모두의 욕망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기생해 네 욕망을 채우지. 거기서부터 틀려먹었던 거야.”

  그러니 여자의 말을 부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녀가 짚은 대로 괴물은 아직 인간성을 버리지 못했고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도 않았다. 그 증거가, 여기서 여자를 두고 도망치지 않는 것. 여자를 찾아낸 때, 이곳에서 만난 유일한 타인이 그녀란 것에 불쾌해한 한편 그녀라도 있어 안도했던 괴물이었다. 여자와의 대립은 애초에 불공평한 승부였음을 괴물은 새삼 깨닫는다. 이 승부는 처음부터 드래곤의 힘으로 무장한 괴물이 아닌, 자연의 힘을 쥔 여자 쪽이 한참이나 유리했다.

  인간의 욕망에 얽매이는 존재와 인간의 삶을 포기한 신의 대결이라면 당연히 후자가 이길 테니.

  조잡한 바탕이 해부된 때, 괴물은 차라리 해방감을 느꼈다. 비로소 자신의 패인을 이해하고 실패를 인정할 수 있어서였다. 자꾸만 실패를 상기시켰던 여자도, 그녀의 주장도 이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와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대치하듯 거리를 유지했던 괴물은, 천천히 여자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혹은 그녀의 얼굴에 걸린 표정을 보다 선명하게 읽기 위해.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따라붙었다. 어쩐지 발이 축축한 듯했으나 괴물은 발을 확인하지 않고 여자와의 거리를 좁힌다. 걸어갈수록 둘은 가까워지고, 여자의 얼굴에 비친 감정도 조금씩 선명해진다. 이제 괴물은 벼랑 아래 호수까지 닿았다. 벼랑으로는 올라가지 않았기에 여자를 눈에 담으려면 여전히 한참 올려다보아야 했지만, 그녀와 서로를 살피며 대화할 정도로는 가까워진 듯했다.

  “아마 네 뜻대로 되었다 해도 너는 외로움에 미쳐버렸을걸. 너를 봐줄 관객이 세상에 한 명도 남지 않았을 테니까.”

  여자가 말을 마친 때 괴물은 호수에 비치는 제 모습을 눈에 새겼다. 드래곤과 결합하며 무시무시한 괴물로 변모했던 그인데, 물에 그려지는 모습은 인간이었던 때의 것이다. 아직껏 인간의 감정을 버리지 못해서인지.

  “차라리 이렇게 되는 게 나았다고?”

  “사실은 조금 유감이야. 난 이번 대의 인간에게만 기회를 준 게 아냐. 그쪽에게도 기회를 줬어. 새롭게 시작해 다시인간으로 사랑받으며 살 기회를 말이야. 그렇지만 너는 그 기회를 버렸지.”

  “이번에야말로 다시, 패왕룡 자크로 영원히 남을 수 있을 줄 알았거든.”

  “어쩌겠어. 네 말대로 인간은 어리석잖아.”

  그 말에 무어라 반응할 생각으로 고개를 든 괴물은 여자의 발에 시선이 닿은 때 말을 잃었다. 신발을 신지 않은 양발에서 물방울이 자꾸만 흘러내리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의 발도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쏟아지는 물에 비누가 녹는 것처럼, 조금씩. 네 발, 어떻게 되는 거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여자는 미지근한 웃음을 걸치며 답했다.

  “우리는 여기서 없어질 거랬잖아. 발끝부터 천천히 흩어지는 것뿐이야. 한 방울씩 녹아내려서 결국 저 호수의 일부가 되겠지.”

  “벌써 녹아내리고 있었다고?”

  “물소리, 계속 들리지 않았어?”

  암흑 속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물소리와, 호수 쪽으로 걸어오는 내내 귀를 때린 찰박거리는 소리가 떠오른다. 어쩌면 여기서 눈을 뜬 때부터 괴물도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야말로 시선을 아래로 옮기니 어느새 조금 줄어들고 만 발이 보인다. 윤곽조차 제법 흐려진 듯하다.

  “그러니까 함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한 거야. 혼자서 이런 결말을 맞는 건, 너무 쓸쓸하잖아. 나는 문제 될 게 없지만 넌 언제나 외로움을 타지.”

  “날 위해서 같이가주겠다고? 대단한 희생정신이야. 넌 나를 끔찍하게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살짝 빈정대자 여자는 깔깔댔다. 착각하는 모양인데, 널 죽도록 미워할 만큼 그쪽에게 관심이 있진 않거든. 가볍게 건네는 말엔 감정이라곤 한 가닥도 비치지 않았고.

  “운명을 함께한 상대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고 해둘게.”

  말을 마치자마자 여자는 벼랑에서 뛰어내렸다. 이미 인간에서 너무도 멀어진 존재여서일까. 저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도 여자는 상처 하나 없이 괴물 앞에 서는 데 성공했다. 삶에 다시는 찾아들지 않았으면 했던 방해꾼은 이제, 괴물과 숨이 닿을 거리에 있다. 그의 금빛 눈에 제 모습을 새기며.

  “이젠 우리가 맞이할 결말을 인정하는 것 같네. 곧 흩어질 거라는 말에도 얌전히 서 있고.”

  “도망치기엔 이미 너무 멀리 오지 않았나?”

  “그래. 빨리 인정하는 게 좋아. 조금이라도 더 우아하게 끝나려면.”

  “우아한 종말이란 선택지도 있어?”

  “모든 게 끝나기 전 미리 움직이는 거지. 우린 아직 스스로끝날 기회가 있거든.”

  조금만 더 있으면 우리는 움직이지도 못하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무력하게 녹아가는 길밖에 없겠지. 그러니까 그 전에, 선수를 치면 돼. 여자의 흰 손가락이 호수를 가리켰다. 녹아내린 것은 물방울이 되어 흘러간다는 사실, 녹아내리면 결국 호수의 일부가 되리라는 여자의 말. 두 가지를 통해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

  “미리 저기 들어가자는 거지?”

  “두려워?”

  여자는 반문했고 괴물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호수에 발을 담그진 않는다. 여자의 말대로 스스로 뛰어드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제 와서 도망치고 싶어서도 아니라 확신이 없어서였다. 그동안 그를 막아섰던 여자가 정말로 그와 함께할 마음이 있는 걸까? 그가 먼저 발을 담그면 그것만을 기다렸다는 듯 바깥에서 팔짱을 끼고 감상하는 것 아닐까? 그가 홀로 녹아가는 걸 바라보면서 그것이야말로 괴물에게 어울리는 종말이라고 빈정거린다면?

  그렇게 홀로 흩어져야 한다면?

  머리를 내리누르는 의심에 괴물이 차마 다음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던 때. 여자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호수로 걸어 들어가더니 이내 허리까지 잠긴 채로 괴물을 바라보았다. 이것 봐. 내가 먼저 들어왔지. 목소리는 여전히 명랑하고, 얼굴엔 한 점 그림자도 드리워지지 않았다.

  “자신이 없다면 손을 잡으면 돼. 그럼 여기로 끌어줄 테니까.”

  그렇게 말할 때 여자는 정말로 한 손을 괴물에게 뻗고 있었다. 어쩌면 저를 두고 도망칠지도 모를 자, 얼마 전까지도 그녀가 사랑한 세상을 망가뜨렸던 악마에게. 인간을 뛰어넘은 자로서의 자비일까. 아니면 악마와 함께 침몰하겠다는 지독한 고집일까. 어느 쪽이건, 여자가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단 것만은 달라지지 않는다. 비로소 안도한 괴물은 여자의 손을 잡고 스스로 호수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여자처럼 허리까지 잠겼으나, 푸른 물은 생각만큼 차갑지 않았다.

  “나쁘지 않네.”

  발끝부터 녹아내리는 걸 느끼면서 괴물은 중얼거렸다. 이제 서서히 형체를 잃는 일만 남았음에도 이상하게 마음은 평온했다. 인간을 짓밟던 발톱도, 몸을 덮던 비늘도 함께 벗겨지고 있어서일까. 수면 아래 비치는 제 몸의 실루엣이, 조금씩 줄어드는 몸이 인간의 것에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괴물은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로, 나쁘지 않아.

  “지금이라면 다시 무대에 오를 자신이 있는데. 패왕룡 자크가 아닌 보통의 프로 듀얼리스트로.”

  이젠 그럴 기회가 없지만. 따라붙은 말에 여자는 자못 상냥하게 답했다.

  “그렇지만은 않아. 이게 완전한 끝이라곤 말한 적 없는걸.”

  네 분신들을 기억하지? 너에게 휩쓸리지 않기로 결심했던 네 명 말이야. 그 애들은 새롭게 살아보기로 했어. 타인을 해하는 괴물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길을 걷는 인간으로. 띄엄띄엄 흘러나온 설명에 괴물은 자신의 피조물인 동시에 자신이기도 했던 분신들을 떠올렸다. 세상이 그들에게 기회를 준다면, 어쩌면 그의 삶은 연장될 수도 있다.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적이 정말로 가능할진 알 수 없지만.

  “그 넷은 살아남은 모양이지?”

  기대 없이 건넨 말에 바로 답이 돌아왔다.

  “새로 기회를 줘도 된다고 판단했어.”

  “세상이? 아니면 네가?”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잖아.”

  “너는, 그 넷을 믿나?”

  어떤 의미론 그 넷 모두가 나이기도 한데? 차마 소리 내어 흘리지 못한 말을 여자는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렇지만 너처럼 살지 않기로 마음먹었잖아. 웃음 띤 목소리가 귓속에 파고든다.

  “……그렇게 외롭진 않을 거야. 그 애들이라면 분명히, 세상에 사랑받을 길을 찾을 테니까.”

  자꾸 녹아내리며 물이 불어난 탓인지, 아니면 그들이 점점 잠기고 있는 것인지. 이제 물은 둘의 가슴께까지 차올라 있다.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십 분? 오 분? 머잖아 모든 게 끝나리란 걸 짐작하고도 괴물은 웃는 낯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이 엉켰고, 이번에는 괴물이 먼저 움직였다. 그러면 됐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괴물은 여자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대로 잠수했다. 무력하게 흩어지기 전 스스로 종말을 맞기 위해.

  물 속인데도 희한하게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만 들 뿐이다. 몸을 담그기만 하고 있을 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기 때문일 테지만, 이 순간 괴물이 느끼는 감정엔 서글픔도 두려움도 없다. 어쩌면 전보다 자유로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랜 외로움에서도, 사랑받아야만 한다는 압박에서도 해방되고서 진정 <모두를 위해> 무대를 꾸밀 기회를 얻는 것이다. 관객의 환호를 받는 건 가 아니더라도, 그의 소망은 언젠가는 꼭 무대에서 이뤄질 것이다. 그러면 됐어. 같은 말을 한 번 더 읊은 괴물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전엔 상상조차 하기 싫었던 종말이 이제는 그저 하룻밤 잠처럼 느껴졌다. 다시 펼쳐진 암흑은 꿈처럼 안락했고 시시각각 덮쳐오는 물결은 거칠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에는 손을 잡아주는 이가 있었다. 세상을 위협했던 괴물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고, 끝까지 함께 침몰해준 이가 있다. 손을 타고 느껴지는 온기에 감사하며 괴물은 의식을 닫았다.

  외롭지 않은 종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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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