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스스로를 식물을 돌보는 게 취미인 사람이라 소개하곤 했다. 그 문장에 거짓은 없었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고부터 자기만의 온실을 만들었고, 여유 시간을 식물을 살피는 데 썼다. 취미에 대해 들은 사람들이 식물을 가져와 이름을 물으면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답해주었다. 물을 많이 먹는 꽃이니 자주 물을 주고 흙이 마르지 않도록 점검해야 해. 따위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그러니 세상의 눈에 비친 소년은 어디까지나 식물을 사랑하는, 무해한 인간이었으리라. 생명을 아끼는 이를 나쁘게 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소년과 줄곧 함께해온 청년은 안다. 소년은 식물을 좋아할 뿐 진정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아니란 것을. 나긋한 어투와 앳된 얼굴 아래 섬뜩한 면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지금 사람들이 보는 소년이란, 소년 그 자체라기보다 그가 덮어쓴 이미지에 불과하다. 여유로운 모습도 느긋한 태도도 그의 일부일 뿐 무해함의 증거가 아니다. 소년의 본질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나태한 맹수이리라고, 청년은 생각한다. 송곳니도 발톱도 단숨에 먹잇감을 찢을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다. 당장은 사냥을 하지 않아도 되기에 숨기고 있을 뿐.
그렇다 해도, 소년이 식물을 좋아한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의 온실에 발을 들인다면 그 사실이 더 와 닿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날부터는 소년을 이전처럼 볼 수 없게 되겠지만.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소년이 키우는 것을 확인한 때 바로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갈 것이다. 청년이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있는 건 소년과 취향이 비슷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취향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뿐. 어쩌면 무뎌져가는 것일 수도 있다. 평범한 사람의 수준에서 아득히 멀어진 소년의 취향에. 그의 미학에.
오늘도 청년은 그 괴상한 온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초대받은 것도, 설렘을 안고 방문하는 것도 아니다. 임무에 나설 때를 제외하면 소년이 머무는 곳이 그곳이기에 향할 뿐이다. 소년의 곁에 머물며 그의 이해자인 체 구는 게, 청년이 ‘진짜’ 임무를 수행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으므로.
어려서부터 엘리트로 인정받고 수많은 전공을 쌓아온 소년에겐 통제할 수 없는 위험성이 잠들어 있다. 언제 악마 같은 본성이 깨어날지 모르니 지켜볼 수밖에. 청년을 소년에게 붙이며 이곳의 수장이 흘린 말이었다. 상부의 지시는 소년과 친구처럼 지내라는 것이었지만 그 아래 숨겨진 말이 <감시역이 되어라>인 것쯤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 청년은 슬그머니 소년의 삶에 끼어들었고, 그의 흥미를 끌 법한 여러 일을 한 끝에 소년의 친구 행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소년은 청년 앞에서, 남들은 모를 면까지 보여준다. 감시 대상에게 신뢰를 산 결과겠지만 그렇게 확인한 소년의 내면은 하나같이 보통 사람의 시각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섬뜩한 것들이었다. 가장 오싹한 건, 소년의 섬칫한 면모 아래 별달리 악의가 비치는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손에 넘겨진 새끼 맹수나 순진한 악마를 보는 듯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종(種)에게라면 그런 면도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년은 인간의 틈에서 인간의 외형으로 살고 있다. 앞으로 계속 소년의 친구 역을 연기한대도 청년은 소년이란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소년의 온실에 들어서고도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소년의 이질성에 적응해갈 뿐이리라. 세상엔 이러한 괴물도 있는 법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그 괴물에 언제까지 매여야 할지는 알 길이 없지만.
온실 입구 앞에 선 청년은 유리벽 너머, 녹색으로 물든 풍경을 눈에 담으며 심호흡했다. 소년의 기괴한 취향에 그럭저럭 익숙해졌다곤 하지만 아직도 온실에 들어서기 전엔 긴장이 되는 그였다. 얼마간 숨을 고른 후에야 청년은 걸음을 다시 뗄 수 있었다. 잠가두지 않은 문은 살짝 미는 것만으로 열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청년은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입구 쪽의 식물은 그래도 무난한 편이다. 정말 섬뜩한 건 ─
생각이 멎었다. 어딘가에서 뻗어나온 덩굴이 오른손을 휘감은 탓이다. 팔을 흔들어 풀어내려 해도 제법 억센 힘으로 감싸고 있는 터라 쉽지 않다. 소년의 온실에서 자라는 식물이란 대개 이런 것들이었다. 언제나 먹잇감을 찾는, ‘침입자’를 귀신같이 감지하고 공격하는 것. 식물에서 연상하는 무해한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포식자처럼 구는 생물.
지금처럼 붙들리거나 공격당했을 때 빠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청년은 경험으로 안다. 붙잡히지 않은 손을 급히 주머니에 찔러넣은 청년은 미리 준비한 것을 꺼냈다. 이곳에 올 때 빼먹지 않고 챙기는 것, <먹이>였다. 작은 곤충을 짓이겨 만든 블럭을 던지자 포식자의 관심은 그쪽으로 옮겨갔다. 덩굴에서 풀려나자마자 청년은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입구 쪽 식물은 무난한 편이란 판단도 이제 수정할 때가 된 듯했다.
시작부터 호되게 당하고 나서일까. 청년의 불운도 딱 그 정도였던 것일까. 그 다음부터는 식물에게 붙들리는 일은 없었다. 대신 청년은 중심부로 향하는 내내 제 등에 시선이 따라붙는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에 시달렸다. 그것도 한둘의 시선이 아니다. 온실에 있는 사람은 방문자인 청년과 주인인 소년뿐일 텐데. 꼭 수많은 식물이 침입자를 응시하는 것만 같다. 불쾌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긴 청년은 목적지에서 익숙한 형체를 발견했다. 식물의 잎을 정성 들여 닦아주고 있는 자. 온실의 주인.
이제 열너댓 살이나 되었을까,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얼굴에 청년의 시선이 내리꽂힌다. 언뜻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 아래 흉포한 본성이 깔려있다는 건 이곳에서도 청년을 포함한 극소수만 아는 사실. 아마 상부도 그가 어느 정도로 위험한 인물인지 잘 알지는 못할 것이다. 온실의 식물이 밖에서는 그저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희귀 식물로 보이는 것처럼.
“그거, 사람도 먹어?”
식물을 돌보는 데 열중해 돌아보지도 않는 소년에게, 청년은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방문자가 온 것쯤이야 소년도 기척으로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대뜸 엉뚱한 말을 건네는 것은 단지 소년의 관심을 저에게로 끌어오기 위해서일 뿐.
“필요하면 그렇게 하겠지.”
아끼는 식물을 화제로 삼으면 관심을 끌 수 있으리란 생각은 적중했다. 즉답한 소년은 잎을 닦던 헝겊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는 방문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다음은 청년의 손을 잡아 장난스레 말하는 것이었다. 어디 보자, 손가락도 팔도 멀쩡한 걸 보니 아직 프레데터 플랜츠에게 먹히진 않은 모양이네. 나긋한 목소리와 천진한 웃음이, 입에 올린 말의 무게와 대조되어 섬뜩했다.
“오늘도 너무 요란스레 맞아주던데. 먹이를 주지 않았으면 먹혔을지도.”
“너에게 관심이 있나 봐.”
“그런 관심은 사양이야.”
“글쎄. 친해져서 나쁠 건 없지 않나? 혹시 모르잖아. 언젠가 프레데터 플랜츠가 데니스 맥필드를 지켜줄지도.”
그때 소년이 매만졌던 식물의 가지가 슬금슬금 청년에게로 휘어졌다. 소년의 말에 반응하기라도 한 것처럼. 얘네, 제법 똑똑한 녀석들이거든. 소년의 말이 귀를 때렸다.
“그 점이 무서워. 언젠가 온실을 빠져나갈 것만 같아서.”
“하긴, 이런 곳에서 서로 빽빽하게 붙어있기만 하면 답답하겠지? 문을 열어주면 바깥까지 덩굴을 뻗으려나.”
“유리도 참, 무서운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니까.”
“내가 주는 먹이론 분명히 만족 못 해.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언젠간 틈새로 가지를 뻗어서라도 싱싱한 먹이를 찾을걸?”
말라비틀어진 곤충 블럭만 삼키기엔 포식식물이란 이름이 아깝잖아. 녀석들을 여기에 가둬서 그런 먹이를 주는 것도 마음이 아픈데. 투정처럼 흘린 말만 들으면 꼭, 소년이 무해한 생물을 어쩔 수 없이 숨겨두고 있는 것만 같다. 소년의 온실에 드나드는 외부인이 청년뿐인 건, 이곳 식물이 절대 바깥에 내놓을 수 없어서인데. 이곳에서 자라는 모든 것이 소년만큼이나 기괴한 생물이어서인데.
수많은 식물이 피워낸 꽃에, 그만큼 짙은 꽃향기에 가려져 있을 뿐. 온실 어딘가에선 언제나 부취가 난다. 소년이 몰래 들여온 특식 때문이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동물의 사체를 모아두었다 식물 앞에 꺼내놓는 소년을, 청년은 몇 번이나 보았다. 때로는 그 사체 더미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먹이도 발견할 수 있었다. 죽기 직전의 동물을, 아껴마지않는 식물에게 내놓은 것이다.
숨이 채 끊어지지도 않은, 살아있는 먹이를 포식식물이 삼키도록.
입을 벌리듯 꽃잎을 열고 먹이를 낚아채가는 식물의 정체를, 청년은 알지 못한다. 식충식물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으나 이곳의 생물은 그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맹수나 다를 것 없는 식물이나, 그런 식물을 몰래 키우다 못해 산 동물까지 던져주는 소년. 식물이 먹이를 분해하고 게걸스럽게 삼키는 과정을 들뜬 얼굴로 지켜보는 소년을 목격할 때면, 상부가 지적한 그의 위험성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반역자를 처단하는 전사로 선택받았다지만 반역자 앞의 소년은 지나치게 잔학했다. 단숨에 숨을 끊는 게 아니라 잘근잘근 짓밟다 처형하는 모습은 꼭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포식자를 연상시킨다. 희생자가 목숨만 살려달라 애원할 때도, 깨끗하게 죽이라고 소리칠 때도 소년은 재미있다는 듯 깔깔댈 뿐. 처형을 사냥처럼 여기는 그가 몰래 포식식물을 키우는 것을 단순한 취향 문제라 할 수 있을까?
사실은 포식식물의 기괴한 사냥을 관람하고 싶은 것이라면? 살아있는 먹이를 슬그머니 던져주는 것도, 단순히 식물을 아껴서가 아니라 보다 생생한 사냥을 보고 싶어서라면?
아직껏 청년은 온실의 실체에 대해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있다. 만일 소년이 키우는 식물의 정체와, 식물에게 동물 사체를 비롯한 온갖 먹이를 던져주고 있단 것까지 알리면 상부는 즉시 소년을 위험인물로 판단할 것이다. 단순히 경계하는 걸 넘어서, 그를 가두거나 힘을 빼앗는 것까지 고려할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건 아직은 신중하기 위해서인 동시에.
“가지가 너무 가까워. 얼굴이 긁힐 뻔했잖아.”
두려워서이기도 했다. 저를 보는 소년의 눈, 지나치게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가 파충류의 그것을 닮았다고 청년은 생각한다. 들여다볼수록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을 보는 것 같은 소년인데 발상마저 인간 같지가 않다. 소년에게 제대로 휘말리면 어떤 일이 생길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힌다. 만일 상부에 소년의 비밀을 일러바치다 본인에게 들키게 된다면? 그 바람에 온실로 끌려와 이 기괴한 식물의 먹이로 던져진다면?
아마 그런 날이 오더라도 소년은 보랏빛 눈을 빛내며, 아끼는 식물의 사냥을 지켜볼 것이다.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굳이 뽐내는 일 없이 조용한 관람자 역을 맡는 것이다. 먹잇감이 비명을 질러도 도와달라고 매달려도 사냥의 관객으로서 ‘생생한 발악’을 눈에 새기리라. 소년에겐 인간을 향한 애정도, 연민도 없으므로. 살갗에 닿을 듯 가까워진 가지에 <최악의 결말>을 생각하고 만 청년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고.
“겁쟁이라니까.”
소년이 슬쩍 가지를 건드리자 청년을 휘감을 듯했던 가지가 거짓말처럼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래서 언제 친해지려고 그래? 장난스레 덧붙이는 목소리엔 청년에 대한 경계나 의심은 비치지 않는다. 아직은 믿어주는 것인지, 아니면 청년의 진짜 역할을 뻔히 알고도 못 본 체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장 사냥감이 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청년은 안도했다.
상대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는 이런 관계는, 친구라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상부가 의도한 대로 감시역이 감시 대상을 온전히 틀어쥔 관계라 보는 것도 어렵다. 정보를 쥔 것도 상대를 속인 것도 청년인데 관계의 키를 쥔 것은 처음부터 소년 쪽이었다. 사고도 행동도 인간의 범위를 아득히 넘어선 괴물을, 어떻게 인간의 방식으로 묶어놓을 수 있을까. 어떻게 재앙의 앞일을 예측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리란 음울한 예언이 머리를 스친다.
애초 상부의 뜻대로 소년의 삶에 뛰어든 것부터 잘못된 일이었다고. 그 날부터 반전의 기회 따위 없이, 천천히 타는 불길 속에서 옷이 그을리는 걸 보고 있을 뿐이라고.
“너는 나랑 비슷한 취향인 줄 알았더니.”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난 식물을 키우는 데는 별 관심 없어. 네가 좋아한다기에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지.”
“이해라. 좋은 말이야.”
그러니 청년은 감시 대상의 웃음에 긴장할 수밖에 없다. 갑자기 거리를 휙 좁히는 것도,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것도 진심을 시험하기 위한 압박으로만 느껴진다. 그럼 내가 뭘 꾸미든 받아들이려 노력하겠지? 은근하게 속삭인 말도. 청년에게 선택지 따위 없다. 임무를 위해서건 생존을 위해서건 정해진 답을 흘려야 할 뿐이다. 물론. 살짝 떨려 나온 답에 소년은 웃었다. 좋아, 데니스 맥필드에게만 알려줄게. 내가 프레데터 플랜츠를 키우는, 가장 큰 이유. 자못 상냥하게 흘린 말에는 흡족함마저 밴 듯했다.
“힌트는 지금 네 근처에 있지.”
“어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네 머리에 침을 흘리고 있어. 미안, 네가 먹음직스러운 모양이네.”
괴상한 말에 고개를 든 청년은 제 머리를 삼킬 듯 입을 쩍 벌린 <괴물>을 보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소년을 무시무시한 포식자로 만들어준 그의 무기, 그의 말을 따르는 드래곤이 기척도 없이 두 사람의 곁에 와 있었다. 전투에 내보내지 않을 때면 드래곤을 온실에 대기시킨다는 말을 언젠가 소년에게 듣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이 마비되고 만다.
두려움으로 얼어붙은 청년을 달랜 것은 소년의 목소리였다. 안심해. 먹게 하진 않을 테니까. 스타브 베놈은 내 명령이 없으면 사냥을 하지 않아.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한 소년이 드래곤의 몸체를 쓰다듬자, 괴물의 입이 천천히 닫혔다. 그럼에도 머리에 한 번 더 축축함이 느껴진 건 삼키지 못한 침이 또 한 방울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청년은 머리칼을 닦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물었다.
“스타브 베놈이랑 프레데터 플랜츠가 무슨 관계가 있단 거지?”
“스타브 베놈은 말이야. 프레데터 플랜츠의 세력에 비례해 강해져. 프레데터 플랜츠가 내뿜는 물질이 스타브 베놈을 성장시키거든. 이것 봐, 발톱이 전보다 훨씬 날카로웠지. 몸집도 커졌고.”
“드래곤이 잘 자라날 환경을 만들고 있는 거네. 확실히 전에 본 것보다 상태가 좋아졌어. 그런데…….”
그새 너무 커지지 않았나?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의문이었다. 본래도 거대했던 드래곤은 좋은 환경에서 자라며 단기간에 부쩍 커졌다. 이대로라면 오래지 않아 온실에서 머물기 어려워질 것이다. 주인처럼 흉포한 드래곤이 좁은 공간에 몸을 구겨넣는 걸 좋아할 리 없으니. 이러다 네 드래곤이 이곳에서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 어떡할 거야? 슬그머니 덧댄 물음에 뜻밖에도 바로 답이 돌아왔다.
“그때가 되면 스타브 베놈에게 새 집을 마련해줄까? 여기를 부수고, 아카데미아 전구역을 프레데터 플랜츠로 채우는 거야. 스타브 베놈이 널찍한 집에서 언제나 배부르게 살 수 있도록!”
한껏 들뜬 목소리에 청년의 혀가 굳었다. 괴물에게나 가능할 끔찍한 발상에 어떤 말을 얹을 수 있을까. 소년은 온실을 열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드래곤을 풀어놓는 건 물론, 사람들이 사는 곳을 죄 포식식물로 덮어버릴 상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끼는 드래곤을 해방시키겠다는 이유로. 소년의 뜻대로 되면 두 사람이 소속된 집단과 그들이 살아온 땅은 전부 드래곤을 위한 제물이 되고 만다.
아니, 그 선에서 멈출 수 있을까? 인간의 모습을 덮어썼을 뿐 내면은 괴물과 다를 게 없는 소년이 청년의 예상 범위에서 움직일 것 같지 않다. 이곳을 드래곤을 위해 넘겨주고 나면, 어쩌면 다른 지역까지 노릴지도 모른다. 청년이 가끔 넘나들었던 타지, 이차원에까지 마수를 뻗치지 않으리라 어떻게 장담할까. 모든 걸 집어삼킨 드래곤이 울부짖으면 괴물에게 또 새로운 차원을 안기고, 또 많은 이를 제물로 바쳐서 ─ 청년은 눈앞에 그려지는 처참한 미래를 지워내려 애썼다. 생각할수록 무력해지기에 그랬다.
드래곤보다 더 끔찍한 괴물, 소년이란 악마가 무엇을 꾀하든 절대 막아서지 못하리란 점에서.
먹이는 충분할 거야. 프레데터 플랜츠는 물론 스타브 베놈의 것까지도. 반역자가 넘쳐나잖아. 한두 명씩만 던져줘도 배부르게 먹일 수 있겠지? 청년이 삼킨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떠들어댔다. 앳된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기까지 하며.
“……그래서 말인데, 데니스. 내가 한 얘기 프로페서에겐 이르지 않을 거지?”
마침내 끔찍한 계획을 전부 털어놓은 소년이 건넨 말이었다. 가볍게 떠보는 게 분명한 물음이었으나, 청년은 바로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런 건 왜 물어?”
“그야, 아카데미아 소속이라면 누구든 프로페서를 따르게 되어있으니까.”
“이야기할 리가. 친구의 일을 일러바칠 순 없지.”
상부의 지시대로라면 낱낱이 고해야 할 일이었으나 청년은 그럴 마음은커녕 소년의 계획을 머릿속에 남겨둘 의지조차 없었다. 기억을 삭제할 수만 있다면 깨끗이 지우고 싶을 정도였다. 인간의 그릇으론 다 담아낼 수 없을 괴물의 이야기를. 둘 사이에 오간 이야기는 친구끼리의 비밀로 남겨두면 되었다. 상부는 물론 믿을 수 있는 사람 앞에서도 그런 이야기 따위 꺼내고 싶지 않았다. 말하는 순간, 섬뜩한 기억이 되살아나기만 할 테니.
“하나 당부할 게 있는데, 유리. 프로페서 앞에선 절대 티 내지 마. 네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 스타브 베놈을 어떻게 키울 생각인지. 그리고…….”
“당연히 프레데터 플랜츠에 대해서도 말 안 해. 내 계획을 이해하지도 못할 인간들에게 들킬 생각 따위 없거든.”
“잘 생각했어. 이런 건 나 정도나 이해할 일이야.”
그렇게 말하며 청년은 겨우 웃음을 꾸며냈다. 그것은 소년에 대한 두려움과 ‘입을 다물기로 한’ 자신을 향한 혐오를 감추기 위한 가면이었다. 청년의 웃음에 가려진 감정을 모를 소년은 역시 데니스는 내 편이라니까. 라고 자신만만하게 받아칠 뿐.
다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청년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일상 이야기가 오간 것 같긴 하나,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어 무슨 물음에건 적당히 답하기만 했던 터라 대화의 내용은 떠오르지 않는다. 소년에게 인사하고 제 방으로 향할 때 소년이 웃고 있었던 걸 보면 다행히 청년의 답이 그의 심기를 거스르진 않은 모양이었다.
다만 온실을 나설 때 청년의 손에는 화분이 하나 들려 있었다. 선물이랍시고 소년이 건넨 화분으로, 온실에 있던 어린 식물 한 뿌리를 그대로 심은 것이었다. 화려한 색채를 뽐내는 꽃이 제법 진한 향내를 풍겼으나 청년은 코를 찌르는 꽃향기가 불쾌하기만 했다. 온실에서 자라던 것인 이상 아무리 예뻐 보여도 포식식물일 게 뻔했다. 얼마나 많은 먹이를 삼켰기에 꽃도 향도 이렇게 생생한 걸까.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자꾸만 얼굴을 찡그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소년이 건넨 선물을 아무렇게나 처분할 수는 없다. 치워버리거나 죽게 내버려두면 언젠가 선물을 확인한 소년이 호의가 무시당했다며 화를 낼지도 모르니. 어쩔 수 없이 방 한쪽, 볕 드는 곳에 화분을 내려놓은 청년은 주머니에서 <먹이> 블럭을 꺼내 화분 쪽으로 가져갔다. 그 섬뜩한 식물이 이미 배부른 상태이기만을 바라며.
다음 순간 청년의 소망을 비웃듯 바로 꽃잎이 열리더니, 혀를 연상시키는 기다란 대롱이 손에 쥐었던 먹이를 낚아챘다. 대롱이 스쳐간 자리에 남은 액체는 꼭 드래곤의 침처럼 축축했고.
그 바람에 덮어두고 싶었던 걸 다시 떠올리고 만 청년은 화분을 두고 욕실로 달려가야만 했다. 치미는 역겨움에, 청년은 세면대에 고개를 숙이고 몇 번이고 구역질했다. 목을 타고 꾸역꾸역 올라온 음식은 차례로 세면대에 쏟아졌다. 누구를 향한 구토인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삶에 뿌리내린 괴물, 소년에 대한 것인지. 소년을 막지 못한 저를 향한 것이었는지. 어느 쪽이건 청년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으니. 청년을 내리누르던 역겨움은, 먹은 것을 죄다 게워내고서야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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