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녀

 

세상은 언젠가부터 짙은 안개 속이다. 지독한 잿빛이 시야를 가득 메운 탓이다. 화사한 도시는 침략군이 밀려들며 색채를 잃었다. 빛나는 문명도, 구석구석 밴 행복도 침입자와 함께 부서졌다. 한때 미래도시라 불릴 정도로 발전했던 도시엔 이제 죽음이 그득하다. 절망은 발에 채도록 흔한데, 희망은 신기루처럼 멀다. 지옥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이들은 저항군을 조직하여 침략군에 맞서고 있으나, 누구도 그들 앞에서 승리를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죽음을 미루고 타인의 삶을 연장시키려 싸우는 생존자였다.

소녀는 저항군의 일원이었다. 허리에 맨 붉은 천, 저항군의 표식이 걸을 때마다 바람에 나부꼈다. 전사의 무게를 짊어지기로 선택한 소녀이지만, 많은 전투에 내몰리지는 않았다. 침략군이 아직 난민캠프를 덮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언니가 그녀를 보호하려 드는 탓이기도 했다. 오지 않아도 돼. 언니는 소녀를 두고 나설 때면 그런 말을 흘렸다. 루리. 나랑 붙어있을 필요 없어. 그것이 전쟁이란 무거운 짐을 지우기 싫다는, 언니 식의 배려임을 소녀는 알았다.

몇 살 위의 언니가 소녀에게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너는 나서지 않아도 돼였을 것이다. 어른을 찾아보기 힘든 생존자 무리에서 언니는 그나마 나이가 많은 축에 들었다. 리더 격인 언니가 저보다 어린 전사들을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이야 이해할 수 있다. 상대가 소중한 가족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언니는 언제나, 타인의 의사를 묻지 않는다. ‘옳은 것을 찾아냈다 싶으면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건 제 뜻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전쟁 전에도 고쳐지지 않았던 독단적인 태도는 전쟁이 닥쳐 하루하루가 위태로워지자 더 심해졌다. 언니는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걸핏하면 소녀의 싸움을 빼앗는다. 동생을 멋대로 기지에 돌려보내거나, 동료에게 맡기거나, 아예 나서지 못하도록 수를 쓰기도 했다. 그렇게 부득부득 고집을 부려서 언니에게 돌아가는 것이라곤, 몸 군데군데에 새겨진 상처와 가끔 스위치가 내려가듯 쓰러지게 하는 피로. 그리고 동생을 지켜냈다는 한 가닥 위안. 겨우 그 정도.

[그렇게 무리해서 얻는 게 뭐야?]

어느 날엔 언니에게 제법 언성을 높여 따진 소녀였다. 소녀 대신 적을 막아낸 언니가, 너덜너덜해져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빛을 잃은 금빛 눈이, 그럼에도 동생을 보고 짓는 웃음이 슬펐다. 소녀를 지키겠답시고 무리하게 뛰어든 싸움이 언니를 그만큼 망가뜨렸다.

[알잖아, 루리. 이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누구라도 싸워야 해.]

돌아온 답은 힘이 빠질 정도로 예상대로였다.

[누구라도에 왜 나는 포함시키지 않아?]

[애들은 지켜줘야지.]

어른들이 그랬잖아. 달래듯이 꺼낸 말은 뻔한 핑계였다. 언니의 눈에 소녀는 언제나 보호의 대상일 뿐 함께 설 수 있는 전사는 아니었다. 그것이 소녀를 괴롭게 했다.

[나를 믿지 못하는 거지?]

[루리. 모두가 나처럼 싸워야 하는 건 아냐.]

큰 손이 소녀의 뺨을 쓸었다. 언니는 끝내 소녀가 바라는 답은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번 드러나게 불만을 흘렸음에도 언니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소녀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 갈수록 교묘하게 동생을 전장에서 제외시키는 언니였다. 위험해, 루리. 요즘 네 나이대 여자애들이 자꾸 공격받는 걸 알잖아. 동생 대신 친우를 전투에 데려가며, 언니는 말했다.

[차라리 강해서 살아남는 것이면 좋았을 거야.]

강해도 쓰러질 수 있으니까, 이런 일은 싸우는 데 익숙한 사람이 해야지. 라고. 따라붙은 것은 틀린 말이 아니어서 더욱 서글펐다. 소녀는 이미 많은 어른이, 언니만큼이나 강했던 전사들이 쓰러진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간 언니도 그렇게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는 것도.

그러니 소녀는 언니의 곁에 서야 했다. 전장에 나서, 힘을 보태야만 했다. 동생의 몫까지 짊어진 전투는 언니를 계속 위험에 떨어트렸고, 나날이 닳게 했다. 언니가 취하는 전술이 저를 벼랑으로 몰아가는 것이라는 점도 문제였다. 언니의 병기인 기계 새는 적의 공격이 매서울수록, 상대의 머릿수가 많을수록 강력해지는 무기. 판을 뒤집을 순간까지 아슬아슬하게 생존한 언니는 제 열세를 트리거로 하는 함정을 발동하여 적을 섬멸한다. 지금까지는 극적인 승리만을 안겨주긴 했으나, 조금만 삐걱거려도 적에게 짓밟힐 수 있을, 위험한 전술이었다.

언니는 그런 것에 기대고 있다. 살아남는 게 목적이 아닌, 적을 침몰시키는 데 특화된 전술에. 거기에 침략군을 거듭 쓰러트리는 바람에 이미 적에게 얼굴이 노출되기도 했다. 아카데미아 중에서 슌만 노리는 놈들이 있어. 카이토가 집중 표적이 된 것처럼. 동료들의 걱정 어린 말을 소녀는 이미 몇 번이나 들었다. 언니도 이미 눈치챘겠지만 행동을 조심할 리가 없다. 오히려 위험을 기회로 여기고, 자신을 미끼로 적을 유인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런 언니를 계속 두고 볼 수는 없다. 그러다간 언니는 빠르게 망가져, 끝내 쓰러지고 말 것이다. 거기에 하나, 소녀가 전투에 나서길 결심한 이유가 더 있다면. 식량을 배급받고 온 소녀는, 기지에 점점 가까워지는 인영을 보고 멈칫했다. 익숙한 자들이다. 언니와, 그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소년.

언니와 함께 선 소년을 볼 때면, 소녀는 묘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체념과 부러움, 어쩌면 무언가 진득한 감정이 엉겼을지도 모를, 복잡한 것. 언니는 동생 또래의 소년을 유일무이한 친우라고 불렀다. 그 묵직한 수식어는 빈말이 아니어서, 소년은 언니에겐 곁을 허락해도 좋을 전사, 얼마든 함께 싸울 수 있는 동료였다. 동생은 싸울 기회도 빼앗으면서 동생 또래의 친우는 저렇게 믿는다니, 불공평하지 않은가.

소녀를 더욱 흔드는 것은, 소년도 언니와 비슷한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었다. 같이 나설까, 유토. 어떻게든 싸우겠다고 각오한 소녀가 말을 건넸을 때 소년은 미지근한 웃음을 걸쳤다.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해. 자못 상냥한 말은 언니의 고집을 닮아있었다. 언니처럼 드러나게 막지 않을 뿐, 소년 또한 소녀가 저와 똑같이싸우는 걸 꺼리는 것이 분명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싸우고픈 마음은 누구나 같은데. 저항군의 표식을 몸에 매고, 전투에 뛰어들기로 약속한 것은 소년만이 아닌데. 소녀의 각오는 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언니와 소년, 두 사람이 왜 소녀도 모르는 새 함께 나섰었는지는 듣지 않아도 뻔하다. 소녀의 불만을 아예 봉쇄하기 위해 둘이서 싸우러 갔던 것이다. 소녀를 지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소녀가 타인을 지킬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 숨 막히는 친절엔 이제 더 붙일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못 본 체 기지에 들어가 기다렸더니, 친우와 함께 들어온 언니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건다. . 루리. 우리는 말이야.

싸우고 왔지?”

확신을 품고 던진 물음에 언니는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정탐이야.”

거짓말.”

유토에게 확인해.”

말을 맞추고 왔을 텐데 무슨.”

빈정거리는 말에 소년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한마디 부정조차 없다.

그래도 소녀에게 하나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언니는 그녀의 책망도 슬픔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녀의 원망도 서운함도 감내해야 할 것인 양. 그 정직함을 생각하면 제멋대로인 행동도 용서할 수밖에 없다. 언니가 부상 없이 돌아왔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서글픔이 녹아내린다. 자꾸 겁먹게 하지 마. 언니에게 다가서며 흘린 말에 이미 독기는 없다.

어린 짐승처럼 언니의 품에 파고들자 화약 냄새가 났다. 그 매캐한 냄새의 근원을, 소녀는 안다. 그것은 언니를 꿰뚫지 못한 총탄의 흔적이고, 적을 덮친 폭약의 잔향이기도 했다. 체취처럼 깊게 밴 냄새를, 이제 소녀는 외면할 수 없다. 언니. 탄내가 나. 언젠가부터 언니한테서 그 냄새만 나. 얼굴을 묻어 표정을 가리고선, 소녀는 중얼거렸다. 싫어? 언니의 목소리엔 자신이 없다. 타인과 고통을 나눌 줄도 모르는 주제에, 언니는 소중한 사람에게 황폐함을 보이는 것은 두려워한다.

언니가 점점 다른 사람 같아져.”

망가지는 것 같아?”

그냥 예전이 그리울 뿐이야. 언니한테서 그런 냄새가 나지 않았을 때.”

희미한 로션 냄새가 언니의 흔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언니가 이토록 망가지지 않았고, 소녀가 전쟁을 모를 때.

난 언제나 네 언니야.”

……그러니까, 언니, 예전처럼.”

저도 모르게 운을 떼긴 했으나, 소녀가 그리던 시절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매의 삶은 이미 처참하게 무너졌고 모든 것을 짓밟은 침략군은 계속 절망을 덧칠하고 있으므로.

예전처럼…….”

어떻게, 해야 해?”

언니의 목소리는 드물게 간절한 색을 띤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거잖아. 어떻게 하면 돼, 루리?

지금에야말로 속에 담아둔 말을 전부 쏟아낼 때임을 소녀는 직감했다. 나를 언니의 싸움에 끼워줘. 유토에게 하는 것처럼 나와 위험을 나눠줘. 나를 레지스탕스 동료로,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그래야 하잖아. 꾹꾹 눌러 참은 말은 금방이라도 목을 넘어올 듯하다. 언제나 강하기만 했던 언니가 흔들릴 때, 말해야 하는데.

나를 두고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제대로 말해야 하는데. 그래야 언니가 확실하게 들어줄 텐데. 결정적인 순간에 소녀는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위태로운 언니가 가여워 제 소망을 다 쏟아내지 못한 것이다. 과연 언니는 작게 웃어버린다. 소녀가 눌러버린 진심을 눈치채지 못하고서.

겁이 많구나, 루리는.”

언니가 너무 용감한 거야.”

그래그래, 루리를 두고 사라지진 않을게. 약속.”

가벼운 목소리로 받아친 언니는 소녀를 품에서 살짝 떼어내곤 손을 내민다.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해.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 장난기가 배어있다. 또 어린애 대하듯이. 소리 없이 불만을 흘리고서 소녀도 손을 내민다. 생각해보면, 언니의 해석은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소녀는 언니를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동생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 해도, 언니는 그녀의 삶에서 잘려나가선 안 되니까.

손가락을 걸면서 소녀는 소망했다. 빨리 침략군의 세가 꺾여서, 언니가 무리한 싸움을 하지 않게 되기를. 그때쯤이면 언니도 소녀를 억지로 감싸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불안을 내려놓고, 동생을 동등한 전사로 취급해줄 수도 있다. 소녀는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언니에게 다 꺼내지 못한 말을 삼켰다.

 

 

2. 소년

 

연상의 친우는 소년이 제법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키가 컸다. 서너 살의 나이차와, 소년이 아직 본격적으로 성장하지 않았음을 감안해도 너무 멀게 느껴지는 격차였다. 언젠가 적습으로 파편이 튀었을 때 친우가 급히 소년을 제 몸으로 감싼 일이 있었는데, 그때 소년의 머리는 친우의 가슴께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소년은 친우의 품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녀를 외면했다. 그러자 친우는 그의 머리를 쓸어주며 웃었다.

[나한테 안긴 게 부끄러워?]

너도 이제 사춘기라는 거지. 친우가 깔깔대자 소년은 얼굴을 찌푸렸다. 애 취급 하지 마, . 딱딱하게 말하며. 이성에게 안긴 것이 부끄러웠던 게 아니다. 체격차를 새삼 실감하고서, 작은 키가 싫어진 것이다. 조숙한 친우 앞에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던 소년이었다. 아직 성장기니까, 앞으로 한참 더 자랄 수 있으리라. 그 날엔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러나 소년은 별로 자라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의 키가 단기간에 쑥 자랄 리도 없거니와, 소년이 놓인 환경은 영양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침략군에게 짓밟힌 폐허에서 식량을 찾기란 어렵다. 그나마 지금 배급되는 것도 상황이 나빠지면 끊길지도 모른다. 음울한 현실을 삼키고서, 소년은 친우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몇 발짝 앞, 성큼성큼 걸어가는 친우가 눈에 새겨진다.

긴 코트로 몸을 싸맨 친우는 얼핏 어른처럼 보인다. 어른들이 빠르게 쓸려나간 전장에서, 그나마 나이가 많은 친우가 어른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어려서부터 동생을 돌봐온 친우는 저항군 분대에서 모두의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소년이 친우를 어른으로 느끼는 것은 그녀가 짊어진 짐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친우가 취하는 태도일 것이다. 침략자를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그녀는 절망뿐인 싸움에 너무 쉽게 뛰어든다. 아이들을 지키겠다며 하루하루 자신을 소모한다. 그녀에게 삶은 종전을 위한 제물인 듯했다.

그런 태도는, 미래를 살아갈 아이의 모습이 아니다. 살 날이 오래 남지 않을 이들이나 보일 태도였다. 소년은 친우에게서, 방패를 자처하다 꺾여버린 어른들을 본다.

왜 따라왔어?”

불쑥 날아든 목소리가 생각을 흩었다. 친우가 소년을 돌아보며 묻고 있었다. 금빛 눈을 둥그렇게 뜬 것이 뜻밖이란 눈치다. 친우가 홀로 기지를 나서는 걸 보고 무작정 따라왔던 소년은 한숨을 쉬며 답했다.

뻔하잖아.”

걱정돼서?”

슌은 너무 무모해.”

나를 지켜주기라도 하려고?”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김빠진 웃음소리가 잿빛의 폐허를 공허하게 울린다. 소년은 친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걸핏하면 다쳐오면서. 라고 쏘아붙이려다 그만두었다. 그래봤자 친우가 취할 행동이야 뻔하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유토는 아직 겁이 많구나같은 말로 상황을 적당히 넘기는 것이다. 상대를 어린아이 취급하며 진심을 모른 체 하는 것은 그녀의 나쁜 버릇이다.

동료를 지키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이잖아.”

내가 혼자 나서는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단신으로는 오래 못 버텨.”

알아, 유토.”

그렇게 말한 친우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체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언제나 그렇듯, 친우는 도통 소년이 따라붙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래도 돌아가라고 등을 떠밀지 않은 것에 만족하며, 소년도 바삐 그녀에게 따라붙는다.

하나 다행스러운 것은, 친우가 소년을 제법 신뢰한다는 점이었다. 동생 또래의 소년을 유일무이한 친우로 부르며, 그가 함께 싸우는 것만은 거부하지 않는다. 모두의 투쟁을 혼자 짊어질 듯 구는 그녀가, 그를 자신의 싸움에 끼워주는 것이다. 평소의 그녀가 동생을 싸우지 않게 하려 온갖 핑계를 대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는 소년의 전투력을 인정하거나, 최소한 그의 투지를 이해한다. 그것이 소년에게 야릇한 기쁨을 안긴다.

아직 친우에게 아이 취급을 받긴 해도, 소년은 그녀의 전우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자꾸 자신을 내버리며 싸워도, 그가 함께 싸워 지켜주면 된다. 있잖아, . 친우의 뒷모습을, 꺾일 듯 가는 몸을 눈에 담다 소년은 엉뚱한 물음을 던진다. , 키가 또 큰 건 아니지? 저도 모르게 흘린 말에 친우는 거의 즉답했다.

아닐걸. 근데 그건 왜?”

전쟁이 일어나고는 자꾸 네가 자라는 것 같아. 나는 멈춰있는데.”

내 품에 쏙 들어갔었던 게 아직도 부끄러워?”

나만 두고 어른이 될 것 같아서 그래.”

계속 잊어버리는 것 같은데, 유토. 난 너보다 나이가 많아. 당연히 먼저 어른이 돼.”

무사히 성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농담처럼 덧붙여진 말이 묵직하다. 그런 덤덤한 태도를 성숙한 모습이라 말하는 이도 있었으나, 소년은 동의할 수 없었다. 걸핏하면 삶을 다 살아버린 듯 구는 건 성숙한 것이 아니라 망가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지금의 그녀는 희망을 담을 줄 모르거나, 미래에의 상상력이 고갈된 것이다. 그러니 소년이 대신, 그녀의 미래를 그려줘야 한다. 일부러 그녀를 미래에 세워야 한다.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줘야 해.”

버텨줘야 해. 라는 말을, 소년은 굳이 다르게 표현한다. 저를 아이 취급하는 친우에게 잘 먹힐 형태로. 소년의 간절함이 어리광처럼 느껴졌는지, 친우는 깔깔댔다.

너무 늦어. 이렇게 조그마해서 언제 다 자라겠어?”

기다려줘.”

노력해볼게.”

메마른 답변이 소년은 그렇게 안심이 될 수 없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이 있다. 소년에겐 누이처럼 약해지는 친우는, 약속을 지키려 애쓰긴 할 것이다. 그 이상은 소년의 몫이다. 황폐해진 친우를 미래로 데려가고 싶다면, 그가 지금보다 강해져 친우를 어떻게든 지켜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냉정해지고, 보다 무장해서 그녀만큼 위협적인 전사가 되어야 한다. 그녀가 지금처럼 무리한 싸움을 하지 않도록.

친우가 동생과 함께 싸우러 나서진 않는 건, 소년이 그에 반대하지 않는 건, 친우의 싸움이 너무 위태로워서였다. 그녀의 전투는 자신을 미끼로 삼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약한 쪽을 노리는 침략군 앞에 나타나 그들을 유인하는 것이 시작. 아이들을 공격해 쉽게 전공을 쌓으려던 침략군은 그녀의 도발에 본래의 표적을 포기한다. 그러면 그녀는 최소한, 희생될 수 있었던 아이들을 지켜낼 수 있게 된다. 그 다음은? 하고 소년이 물었을 때 친우는 웃었다. 도박이지. 라고 답하며.

그녀의 병기인 기계 새는 적을 섬멸하는 데 특화된 무기였으나, 다수를 상대하는 그녀가 무기를 제대로 쓸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열세마저 이용해 적을 쓰러트려온 그녀지만 전장에서 모든 것이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조금만 꼬여도 살아남을 수 없다. 다수의 공격을 받아 전장에 묻히는 것이다. 아이들의 미래를 구했다는 것만으로 위안하기엔 너무 씁쓸한 결말이다.

그녀의 동생은 언니가 위험한 싸움에 뛰어든다는 것까진 어렴풋이 아는 듯하지만, 언니가 이렇게까지 싸우고 있음은 아마 모를 것이다. 전부 알게 되면, 루리가 나를 가만두지 않을걸? 어느 날 그녀가 흘린 말에 소년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녀의 동생이 모든 것을 알게 되면, 동생 쪽이 언니의 싸움을 빼앗으려 들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싸움을 함께 짊어질, 유일한 사람은.

앞서가던 친우가 갑자기 멈췄다. 왼팔에 전투용 디스크를 차는 것은 적이 나타났다는 것. 병기인 기계 새를 불러내기 전, 그녀는 바짝 따라붙은 소년에게 속삭였다. 저길 봐, 놈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게 혼자 있지.

저건 네게 맡긴다.”

그 말과 함께, 녹색을 띤 머리카락이 순간 시야를 메웠다. 친우가 미끼가 될 때, 소년은 적군의 핵심을 처리한다. 이것이 두 사람의 합의. 타인의 짐까지 잔뜩 끌어안아야만 마음이 놓이는 친우가, 소년에게는 하나의 짐을 넘겨준다. 그 몫의 싸움을 언제나 남겨둔다. 우두머리 같은, 제법 묵직한 적을 소년에게 맡긴다는 건 그를 신뢰한다는 증거.

두 사람에게, 반드시 돌아오라는 말은 필요하지 않다. 승리를 장담할 수 없어서만은 아니다. 이미 서로를 깊게 믿어, 바로 자신의 싸움에 뛰어들 수 있어서이기도 했다. 소년은 친우의 뜻대로, 먼발치서 저를 지켜보던 적군에게 향했다. 일반 군사보다 화려한 제복을 보면 확실히 침략군 무리에서 계급이 높은 축에 드는 듯했다. 여기서 처리해야 동료에게 위험이 튀지 않는다. 난민캠프에서 버티는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싸워야 할 친우에게도.

친우는 소년의 전투가 끝나고도 한참이나 지나서 돌아왔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자꾸만 비틀거리면서. 잠깐 쉬었다 가자며 억지로 앉히니 친우가 몸을 기대왔다. 있지, 유토. 내가 조금씩 낡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그게 조금 무서워. 띄엄띄엄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낡은 기계처럼 삐걱거렸다.

힘들어?”

그런 건 아닌데, 루리가 알아챌까 무서워. 이미 내가 예전 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걱정이 과해.”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하면 되는 거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다듬어주며 소년은 위로했다. 루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그렇게 말하며 소년은 그녀의 뺨을 덮은 흙먼지를 걷어냈다.

이런 건 나만 알면 되잖아, 그렇지?”

친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그녀의 금빛 눈에 안도가 드리워지는 것을 오랜만에 보았다.

기지로 향하는 길에는 소년이 앞장섰다. 걸음이 위태로운 친우가 여느 때와 반대로 그를 따라 걸었다. 그날따라 유독 지친 얼굴의 친우가 걱정되긴 했으나, 소년이 상태를 물을 때마다 괜찮다는 답만 돌아왔다. 본디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니 캐물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거기에, 드러나는 부상이 없다는 것이 소년을 안심시켰다. 무사히 복귀한 후, 소년은 남아있던 동료들에게 상황을 보고하느라 친우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어느 순간 친우가 모습을 감췄단 것을 인지하긴 했으나, 마음을 정리하고 싶은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흔들고 싶지도 않았다. 소년은 친우의 짐을 짊어지고 싶은 한편, 그녀의 아픔을 건드리는 것도 두려웠다. 잘못 접근하면 그동안 무리하게 안은 것들이 한꺼번에 깨져 그녀조차 망가질 것 같았다. 매일같이 뛰어든 싸움에 조금 지친 것이리라. 혼자 쉬다 보면 회복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소년은 일부러 친우를 찾지 않았다.

일이 터진 것은 늦은 밤이었다. 누군가 몸을 흔드는 바람에, 소년은 잠에서 깨어났다. 비몽사몽한 채로 본 것은 제법 친밀한 소녀의 얼굴. 친우의 동생이기도 한 소녀는 그가 눈을 뜨자마자 물었다. 언니한테 무슨 일 있었어? 다급한 목소리가, 굳은 얼굴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시켰다. 소년은 황급히 일어났다.

슌이 왜?”

보초를 선 애가 알려줬어. 언니, 앓고 있다고. 언니 몸이 너무 뜨거워서 보니 어디서 다쳐왔는지 피도 배어 나와. 근데 언니는 나한텐 죽도록 말을 안 해. 유토랑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고!”

……힘들어 보이긴 했는데.”

슌이 괜찮다길래 확인하지 않았어. 말을 꺼내고 보니 변명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짐을 나누고 싶지 않은 친우가 작은 부상을 숨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코트로 온몸을 싸매고 신음을 삼키면 적당히 감출 수 있으니까.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은 명백히 소년의 실책이었다.

언니가 무리한다는 거 뻔히 알잖아. 알면서 왜 살피지 않은 거야?”

유토는 나보다 언니를 더 많이 보면서. 목소리가 젖어들고 있다. 붉은 눈엔 불안과 슬픔이 잔뜩 엉겨 있다. 소년은 그제야 후회했다. 친우를 조금 더 챙기지 못한 것을, 그리고 소녀의 마음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을. 어느새 소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닦아주려고 손을 뻗다 소년은 멈칫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은 조금도 위로를 얹을 수 없다.

언제나 그렇게……내게는 자리를 주지 않으면서, 전부 자기들만 감당하고 있으면.”

그럼 난 쓰러지는 것만 봐야 해? 울먹거리는 말에 소년의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차마 소녀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슌을 살필게.”

아니. 됐어. 이제 언니랑 제대로 이야기할 거야.”

어떻게?”

내 방식대로지.”

눈물을 닦으며 흘린 말에는 친우 같은 단호함이 스며 있었다. 바로잡을 거야. 언니가 듣건 말건. 그렇게 덧붙인 소녀는 돌아섰다.

유토도, 언니도 이제 고집부리는 거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소녀는 이내 소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쩐지 친우를 닮은 뒷모습을 눈에 담다 소년은 한순간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언제나 꺾일 것 같은 친우처럼, 소녀도 왠지 그의 삶에서 아픔으로 남을 것 같다고.

 

3. 여자

 

어려서부터 여자가 바라는 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력을 배로 쏟아부어도, 심지어는 실력이 좋아도 목표 달성에 실패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엔 동생에게 상품을 안겨주고 싶어 모형 비행기 날리기 대회에 참가했는데, 내내 좋은 성적을 거두다 마지막에 강풍이 부는 바람에 꼬여버렸다. 초라하게 바닥에 추락한 모형 비행기를 주워 들자 너무도 속상해져, 부서진 날개라도 붙이려고 애썼다. 그 모습이 가엾게 보였을까. 대회가 끝났을 때, 수상자에게 상품을 나눠주던 사람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운명이 네 편이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그 사람이 참가상명목으로 안겨준 상품보다, 그 덤덤한 말이 더 기억에 남았다. 운명이, 내 편이 아닐 수도 있구나. 노력이 잘못되었던 게 아니라, 운이 지독하게 나빴던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린 티를 벗고 어른에 가까워진 지금에도 여자의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지치도록 노력하고, 지독하게 실패한다. 프로 데뷔를 위한 대회를 준비하던 때 전쟁이 터졌고, 함께 움직이던 저항군 분대는 그녀가 임무로 자리를 비웠을 때 절반이 쓰러졌다. 그녀가 찾아낸 식량창고는 바로 그 다음날 적습에 뭉개졌다.

딱 하나 여자의 바람대로 되는 것은 살아남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녀는 큰 부상도 입지 않고 살아있다. 매일같이 동료를 잃는 것이 그녀의 불운이라면, 매일 전장에서 버티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행운인 듯했다. 상실은 쓰리고 생존은 팍팍했으나, 여자는 그래도 살아가는 것에 감사했다. 버티는 만큼, 지킬 수 있다. 하나뿐인 동생도, 그 또래의 친우도. 그리고 어쩌면 그녀보다 더 나은 미래를 그려낼 수 있을 아이들도.

아이들은 생존자 중 그나마 나이가 많은 여자에게 의지한다. 아이들에게 여자는 어른이고 보호자였다. 개중 조금 머리가 굵은 아이는 그녀만큼 강해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으나, 그녀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너희까지 이렇게 되면 안 돼. 라면서. 그녀의 생존은, 그녀가 지켜내는 이들의 생존은 무리한 싸움에 기대고 있다. 몸을 망가뜨리고 정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지독한 전투. 주변인이 그 처절한 방식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가장 가까운 사람, 동생과 친우는 이미 그것을 문제 삼고 있다.

무리하지 마. 동생은 걸핏하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언니를 잃고 싶지 않아. 간절함이 밴 말에도 여자는 그러겠노라고 답하지 못한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모른 체 할 뿐이다. 십대 중반의 동생에게 인간의 악의나 폭력성 따위의, 전쟁의 본질을 알게 할 생각은 없다. 동생이 가능한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려면 동생의 뜻과는 반대로 움직여야 했다. 몸이 깨어있는 한 싸우고 적을 몰아낼 수밖에 없다.

싸울 거면 나와 함께 해. 동생 또래의 친우는 그렇게 요구해왔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몸이 점점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자꾸만 빙글빙글 돌고 걸핏하면 숨이 턱 막혀온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풍경이 진짜인지 허상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전부, 무리한 탓이다. 여자는 더 버티기 위해 친우와 함께 싸우기로 했다. 동생과는 싸움을 나눌 수 없었으나 친우에게라면 조금은 허락해줄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친우에게 완전히 솔직해질 수는 없다. 친우와 동생이 제법 친밀한 사이임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일수록 친우는 걱정을 쌓아, 언젠가는 동생에게 이야기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동생은 언니의 싸움을 멈추려 들 게 뻔하다. 혹은, 그녀가 줄곧 두려워했던 일을 실행하게 되리라. 그녀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장에 제대로 나서는 것. 언제든 저를 쓰러트릴 수 있을 적 앞에 용감하게 뛰어드는 것.

동생은 자신 또한 저항군임을 강조하지만, 저항군이란 군인을 의미하는 말이 아님을 모두가 잘 알았다. 동생은 물론 여자조차도 훈련받은 군사가 아니다. 침략군의 수가 줄어 그럭저럭 대등하게 맞설 수 있게 되기 전까지, 혹은 저항군이 최후의 싸움을 하게 되기 전까지 동생을 이 지옥에 내보낼 수는 없다.

다만 여자가 복귀할 때마다 동생은 붉은 눈에 슬픔을 드리우고 있었다. 망가져 돌아오는 언니에 대한 연민, 자신이 도울 수 없다는 체념과 무력감. 그 모든 게 섞인 감정이리라. ‘바깥으로나갈 방법만 있다면 동생과 함께 도망치거나 최소한 동생이라도 대피시키고 싶다. 이런 징글징글한 지옥에서 얼른 벗어날 수 있도록. 그럴 수 없어서 여자는 동생의 마음을 망가뜨리고 있다. 동생의 시선에서 때로 여자는 젖은 목소리를 듣는다. 언니. 다치지 않았지? 언니, 아직 버틸 수 있는 거지?

언니, 정말 괜찮은 거지?

입술은 열리지 않는데, 목소리는 듣고 있다.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꿈속까지 나타난 동생은 유독 연약해 보인다. 저항군의 표식이라는 붉은 천도, 왼팔에 찬 전투용 디스크도 어울리지 않는 갑주를 덮어쓴 듯 느껴진다.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달래려던 때, 동생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울린다. 진짜처럼.

언니, 괜찮아?”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정말로 동생이 말을 걸고 있었다. 여자는 힘겹게 눈을 떴다. 어두컴컴한 데다 눈앞이 흐린데도 동생의 얼굴은 알아볼 수 있었다.

언니가 자꾸 신음을 흘린대서 보러 왔어. 아픈 거지?”

나쁜 꿈을 꾼 것뿐이야. 그동안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봐.”

어디 문제가 생긴 거 아니고?”

괜찮으니까 마저 자. 루리.”

그러나 여자는 제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숨은 가쁘고, 식은땀이라도 흘렸는지 온몸은 축축하다. 몸이 붕 뜬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계속 눈꺼풀이 닫히려 한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망가졌더라. 기억을 더듬던 여자는 갑자기 차가운 것이 몸에 닿아 조금 정신이 들었다. 짐작이 가는 건 하나. 아마, 친우와 함께 나섰을 때.

몸이 뜨거워.”

꿈속에서처럼 젖은 목소리로, 동생은 말했다. 아무래도 여자의 몸에 닿았던 차가운 것은 동생의 손이었던 모양이다. 언니, 몸이 너무 뜨거워. 열이 끓고 있어. 시야는 여전히 흐려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동생은 아마 무척 슬픈 얼굴을 하고 있을 터였다. 제멋대로 구는 언니를 가여워해줄 정도로, 상냥한 사람이었으니까.

……유토랑 나갔을 때, 무슨 일 있었어?”

그래서 동생의 목소리는 더 서글픈 빛을 띠고 있으리라. 언니가 무엇을 숨기는지 대강 짐작하고서.

아무 일도 없었어.”

언니, 피를 흘리고 있어. 상처가 벌어진 거야.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 열이 끓었겠지. 말해봐, 언제 다쳐온 거야?”

답을 알고도 묻고 있다. 그것은 언니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동생 식의 친절이다. 혹은, 언니에게 솔직한 답을 듣고 싶다는 순진함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여자는 동생의 마음을 배반하겠지만.

모르겠어.”

모를 리 없잖아!”

결국,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간을 찢었다. 제법 큰 소리에, 엉겨 잠든 아이들 몇몇이 뒤척거렸다. 동생은 몇 마디 더 쏘아붙일 기세였으나 여자가 입을 꾹 다물자 순간 말을 잃었다. 얼마간 침묵하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그래, 언니가 말하지 않으면 유토한테 듣고 올 거야.”

그 말을 남기고 동생이 사라지자, 겨우 열어두고 있던 여자의 눈꺼풀도 스르륵 닫혔다. 다음은 스위치가 내려가듯 의식이 꺼지는 일이었다.

깨어났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다행히 열은 떨어졌으나 밀려오는 통증에 몸이 비명을 질렀다. 짐작 가는 것은 하나. 동생이 밤중에 발견했을 상처였다. 전날, 친우와 함께 나섰을 때 적의 공격을 막으며 입은 부상이 있었다. 상처가 깊은 것도 아니었거니와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아서 적당히 처리하고 돌아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정도면 자가회복이 가능한 상처였다. 처치가 잘못되었는지 단순히 몸이 나빴던 탓인지 밤중에 문제를 일으켰을 뿐. 통증이 날을 세우긴 해도 큰 위기는 지난 듯해 여자는 동생을 찾기로 했다.

그러나 기지 곳곳을 살펴도 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친우조차 만나지 못했다. 동료들에게 동생의 행방을 묻자 그녀가 잠든 새 기지를 나섰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바로 전투용 디스크를 차는 여자를, 주변에서 말리고 들었다. 걱정할 것 없어, . 위험한 곳에 간 게 아냐.

그리고 너, 그 상태론 어차피 루리를 도와주지도 못하잖아.”

현실을 일깨워주는 말에, 막 뛰쳐나가려던 여자는 정지했다. 문득 밀려오는 서글픔은 무력감과 닮아있었다. 어쩌면 동생도 지금까지 이런 감정 속에서 살았을지.

언니. 나한테 기회를 줘. 붉은 눈에 맺힌 말을, 여자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언니, 나를 믿어줘. 믿고 내보냈으면 좋겠어. 간절한 외침을 모를 리 없었다. 심지어 소리 내어 꺼내기도 한 말을, 그동안 외면해왔을 뿐이다. 동생이 시야 밖에서 쓰러지는 것이 두려웠기에. 여자가 동생의 소망을 듣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온 탓에 동생은 결국 스스로 행동했다. 언니가 어떤 방해도 하지 못할 때, 디스크를 챙겨 나간 것이다.

이제 가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애태우는 것은 언니 쪽이고, 할 일을 마치고 돌아가야 할 것은 동생 쪽이다. 자매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반전된 때. 여자는 얌전히 앉아 바깥만 보고 있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나쁜 미래를, 동생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떨쳐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동생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먼저 복귀한 친우를 붙잡고 물어도 바라는 답을 얻지는 못했다. 어디로 싸우러 갔는지도 알 수 없다는 말이 머리를 칠 뿐.

동생이 돌아온 건 아이들 대부분이 잠든, 늦은 시간이었다.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던 여자는 동생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달려들었다. 바로 끌어안은 동생에게서 낯선 냄새가 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동생에게낯선 냄새였지 그녀에겐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전장의 냄새. 쇠와 흙이 섞인 냄새. 아마 그녀가 매일같이 두르고 돌아왔을 것.

걱정했잖아, 루리.”

언니가 매일 내게 하는 일이야.”

동생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달리 딱딱했다. 각오가 선 듯한 냉랭함에 여자는 움찔했다. 그녀의 품에서 빠르게 벗어난 동생은, 역시 굳은 얼굴이었고.

괴로워, 언니?”

무서웠어. 네가 잘못될까 봐…….”

그럼 왜 나를 똑같은 상황에 몰아넣어?”

알게 하고 싶지 않았어.”

잔뜩 떨면서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답은 덤덤하게 흘러나왔다. 오래도록 품어왔던 생각이어서인지.

무엇을?”

전쟁의 잔학함.”

매일같이 사람이 쓸려나가도, 처참함이 삶에 배어들어도, 동생의 시야엔 절망이 들어차지 않기를 바랐다. 전쟁의 어둠은 이해해도 악랄한 본질까진 모르고 살기를 바랐다. 그것이 보호자로서 자신이 할 일이라고, 여자는 침략군이 밀려든 때부터 생각해왔다.

눈을 감으란 뜻이네, 언니는.”

모든 걸 보지 않아도 돼. 루리.”

보지 않으면, 현실이 달라져? 우리 삶에 떨어진 전쟁이 사라지기라도 해? 언제까지나 모른 체 하며 살라는 뜻이야?”

모든 어둠을 다 볼 필요는 없다는 거야.”

그걸 알게 되면, 절망에 빠져 다 포기할까 봐?”

역시 내가 약하다고 생각해온 거구나. 가라앉은 목소리가 묵직했다. 동생은 분노하지 않았다. 따지고 들지도 않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역시, 그랬던 거야.

루리, 어둠은 어쩔 수 없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쳐. 네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영향을 받을 게 두려운 거야.”

그래서 언니는 계속 전쟁의 어둠에 먹힐 생각이지?”

그런 걸 감당하면서 싸울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하잖아.”

운명은 우리 편이 아냐. 여자는 몸을 숙여 동생과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불행은 언젠가 끝난다고 낙관할 처지가 아니란 거지. 싸우지 않으면, 미래도 없어.

하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지옥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돼.”

그건 내게 맡기고, 너는 미래를 준비하면 안 돼? 그 말을 토해내는 것은 조금 괴로웠다. 그녀가 자주 그려낸 미래를, 선명하게 담아내는 문장이었기에.

전장에서, 몸이 버텨주지 않을 때까지 싸운다. 그러다 전장에 묻혀도 좋으니 최대한 많은 동료의 미래를 구한다. 적어도 동생만은 이 지옥에서 살아남게 한다 그것이 그녀가 유일하게 상상할 수 있는 미래였다. 그녀의 삶에서 딱 하나 바람대로 되는 일은 싸워 타자를 구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하나뿐인 동생이었으니까.

난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언니, 나는 말이야.”

기묘하게도, 동생은 단정한 얼굴에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실은 내가 약하단 걸 알고 있었어. 텁텁한 말을 쏟아내면서도 입가에 걸린 웃음은 깨지지 않는다.

난 이 전쟁에 용감하게 뛰어들어 모두의 불행을 끊어줄 정도로 강하지 않아. 처음엔 부정하고 싶었지만 언젠가부터 생각이 바뀌었지.”

루리.”

사람은 약하기에 무장하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 강해져. 언니가 레지스탕스가 된 것도, 나를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것도 그래서잖아. 그러니까 나는.”

안 돼, 루리.”

무슨 말이 흘러나올지, 동생이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여자가 절대 바라지 않는 길. 다급하게 말을 끊어도 동생은 물러설 기색이 없다. 되레 손위 형제라도 되는 양 차분하게 말할 뿐이다.

언니는 내가 약하니 보호하려 들겠지만, 나는 약하단 걸 인정하고 싸울 거야.”

그래야 모두를 지킬 수 있어. 따라붙은 말은 나이보다 한참 성숙한 것이어서, 여자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하는데. 저런 마음을 품지 않도록, 좀 더 보호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자신이 정말 강했더라면, 동생에게 전쟁의 어둠을 한 점도 보지 않게 했을 텐데.

그러니 여자가 돌려줄 답은 정해져 있다. 동생과 번번이 어긋나서 유감스러울 뿐이다.

나중에, . 지금은 안 돼.”

언제? 언니가 쓰러진 때? 언니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 때?”

내가, 우선은 내가 싸워서 아카데미아 놈들을 가능한 많이 쓸어버릴 테니까. 조금 안전해지면.”

……영영 내 말은 들어주지 않겠다는 뜻이네.”

바로 돌아선 동생은 빠르게 기지를 빠져나갔다. 동생을 따라 뛰쳐나가려던 여자를 누군가 억센 힘으로 붙잡았다. 내가 찾아올게, . 친우의 목소리에도 여자는 마구 버둥거렸다. 너는 안 돼. 내가 제대로 말해야 해. 친우의 팔을 풀려고 애쓰며 여자는 거의 울부짖었다.

내가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나간 거야. 그러니까.”

루리가 갈 만한 곳을 알아. 전에 나한테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지금 네가 가봤자 나아질 것도 없다고.”

내가 루리한테 제대로 말할 수 있게 해줘.”

전부 듣고 있었어, . 루리는 그동안 많이 속상했을 뿐이야.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 진정하고 쉬어.”

입증하려 들지도 몰라.”

결국 힘이 다해 친우의 품에 무너진 여자는,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뜻인지 알아, 유토?

아카데미아와 싸울 수 있단 걸 입증하려, 적 앞에 설 수도 있다고.”

그런 일은…….”

그래도 내가, 진심으로 사과하면 루리는 돌아와. 내가 들어주지 않았던 게 문제였으니, 내가 잘못을 고치게 해줘.”

여자는 저에게서 돌아선 동생의 뒷모습이, 거짓말처럼 시야에서 빠져나가던 모습이 꼭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얼른 그녀가 따라잡아 손을 잡고 돌아가지 않으면, 영영 그 마음에 상처를 안게 될 것만 같았다. 아니, 상처 입는 것은 동생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녀도 평생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빠져나가는 동생을 직접 데려오지 못한 것을. 동생이 계속 쥐고 싶어 했던 손을 스스로 놓고 가게 만든 것을.

제발, 유토. 애원하는 여자를, 친우는 안아들었다. 회색 눈에는 연민이 걸쳐졌으나, 그녀가 바라는 답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녀를 내려놓고 담요를 덮어준 친우는 동생처럼 돌아섰다.

내가 찾아보고 올 테니, 쉬고 있어.”

내가 찾아야 해.”

다친 몸으론 안 돼. 루리도 걱정할 거야.”

그럼에도 친우를 따라나서려던 여자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다 다리에 힘이 풀려 무너졌다. 적을 상대할 때도 꺾이지 않았던 몸은, 하필 다급한 순간에 말을 듣지 않았다. 여자가 몸을 탓하는 사이 친우는 돌아보는 일 없이 떠났다.

홀로 남겨진 여자는 불안에 먹히지 않으려 동생의 잔상을 하나하나 머리에 새긴다. 소리 없이 흘렸던 동생의 요구를, 그 서글픔을, 품에 파고들었던 동생의 체온을. 언니, 하고 부르던 동생의 명랑한 목소리를. 언니. 라는 말에는 언제나 그녀에게 달려오던 동생의 모습이 겹쳐진다. 어려서부터 그녀의 손에서 자라난 동생은, 잠깐 그녀에게서 멀어져도 언니의 목소리만 들리면 어디에서든 돌아왔다. 아버지, 어머니보다 더 익숙한 언니라는 말을, 세상에의 연결고리처럼 여겼다.

시간이 흘러 십대 중반으로 자라난 동생은 갑자기 여자의 시야에서 사라졌으나, 아직 자매를 묶어주던 과거의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세계에 동생이 있듯, 동생의 세계엔 언니가 있다. 그러니 언니의 힘은 지금도 살아있으리라. 동생의 흔적을 그러쥐고서, 여자는 어린 날처럼 동생을 부른다.

루리. 돌아와. 언니한테 돌아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동생을 불러들였던 마법의 말이, 이번에도 통하기만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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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