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케이크에 조심스럽게 초를 꽂는다. 큰 초 하나, 작은 초 여섯 개. 소녀가 준비한 케이크의 주인은, 그녀의 유일한 형제는 오늘 열여섯 살이 된다. 매년 하나씩 늘어가는 초로 형제의 성장을 확인하는 것이 소녀의 기쁨. 오빠는 생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오래도록 오빠와 단둘이서 살아온 소녀에게 형제가 탄생한 날이란 의미가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날부터 소녀의 삶은 ‘혼자’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되었으므로.
소녀에게 가족을 알려준 것도, 친구를 소개해준 것도. 그녀의 성장을 돕고 생활을 가르친 것도 오빠였다. 오빠는 그녀에게 형제였고 보호자였으며 최초의 친구였고 처음 만난 인간이기도 했다. 성장하면서 조금씩 오빠와 충돌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소녀는 오빠에 애정을 품고 있었다. 다소 고집스럽고 행동이 앞서는 면이 있긴 해도, 오빠는 소녀가 바라는 형제의 모습에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그 기준이 아주 어릴 때의 것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낡은 기준이라고 나쁠 건 없다. 오빠는 책임감이 강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울타리가 되길 자처하는 타입. 그와 함께 지내면 다치는 일이란 없다. 어려운 일은 도맡아 해주기도 하고, 애정은 결코 쇠하지 않는다. 어릴 적 소녀가 세운 ‘좋은 형제’의 기준에 잘못된 부분은 없다. 설령 잘못되었다 해도 이제 와서 오빠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빠는 이미 그렇게 굳어진 사람이니까.
“유토 부를까?”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소녀는 생각을 흩었다.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오빠가 불쑥 말을 걸어온 것이다. 음식을 준비하다 문득, 손님 초대로 생각이 튄 모양이었다. 오빠가 꺼낸 이름은 남매와 제법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소년의 것. 소녀에게는 마음 가는 이성이며, 오빠에게는 유일무이한 친우라 부를 정도로 신뢰할 수 있을 대상이 바로 소년이었다.
“크리스마스인데 우리끼리만 파티 하긴 조금 아깝잖아.”
덧붙인 말에서 소녀는 기대를 읽을 수 있었다. 오빠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뿐인 가족인 소녀. 가족 범위를 벗어나면 그에게 가장 소중한 타인은 소년일 것이다. 주변인에게 헌신적인 오빠가 모처럼의 휴일을 아끼는 사람들과 보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늦지 않게 줄 생각이었지만 유토도 마침 오늘 혼자 있다고 하고. 음식도 넉넉하게 준비해뒀지. 루리 너도 유토랑 있는 건 편하댔잖아. 평소답지 않게 말이 길어지는 걸 보니 오빠는 제법 들뜬 모양이었다. 소년을 부르는 것이야 소녀의 계획에도 있었던 일이므로 반대할 이유는 없다.
“유토를 부르는 건 좋은데, 오빠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파티만 생각한 거야?”
다만 하나, 오빠의 말에서 걸리는 게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오빠가 중요한 일을 잊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소녀에게 오늘이 큰 의미를 갖는 건 크리스마스여서가 아닌데. 소녀가 며칠 전부터 선물을 준비하고, 전날 신중하게 케이크를 고르고서 지금 이렇게 상을 차리는 건 오빠의 생일 때문인데.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 떠보듯이 던진 말에 오빠는 여전히 답을 모르겠다는 눈치다.
“그래서 이렇게 케이크까지 준비한 거 아냐? 오늘 12월 25일인데.”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흘린 물음에 소녀는 결국 답을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케이크, 오빠 거야.”
오빠의 눈이 둥그레졌다. 정말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 와서 봐. 오빠 나이에 맞춰 초를 꽂았더니.”
“그런가.”
“또 잊어버렸지.”
소녀는 한숨을 내쉰다. 사실 오빠가 생일을 잊는 건 드문 일도 아니다. 최근 수년간 거의 매해 되풀이된 일이기도 했다. 오빠의 사고회로는 무척 독특한 편이라 볼 수 있는데, ‘자신의’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했다. 그는 소녀나 소년 같은, 소중한 사람과 연결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잘 기억한다. 당사자들도 생각지 못한 것을 미리 준비해 감동을 주기도 한다.
이번에도, 동생의 생일이라면 잊었을 리가 없다. ‘자신의’ 생일이니까 잊은 것이다. 타인에게 축하받을 일도, 대가를 요구해도 될 일도 오빠는 머릿속에서 쉽게 날려버린다. 그런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사고회로 자체가 자신의 몫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어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 맞아. 겨울이었지. 연말엔 축하할 일이 많으니까 이런 것까진 잘 생각나지 않아서.”
어차피 유토도 모를 거니 생일 축하는 우리끼리 적당히 하자. 그 다음 유토를 맞는 건 어때. 황급히 수습하려는 오빠에게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유토도 알고 있어. 오빠 선물, 며칠 전에 나랑 같이 샀거든. 그래서 오빠가 얘길 안 꺼내도 유토를 부르려 했지.”
“……서운해?”
내가, 잊어버려서? 기껏 준비했는데 이런 식이어서? 따라붙은 말엔 자신이 없다. 오빠의 눈에, 낯선 감정이 비치고 있었다. 초조함, 두려움. 혹 소녀의 들뜬 마음을 깨트렸을까, 불안한 것이리라. 이 순간에도 오빠는 동생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 그의 사고회로는 확실히 희한하다.
조금도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오빠가 저렇게 쩔쩔매는 것을 보다 보면 소녀는 섭섭함 정도야 잠시 접어둘 수 있다. 소녀는 오빠의 그런 헌신적인 모습이 언제나 만족스럽고,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그 정도는 아냐. 오빠가 확실히 기억해줬으면 좋겠지만.”
때로는 오빠의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오빠는 어딘가 큰 결함이 있으니, 남들과 다른 건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다. 어떤 부분은 부족하고, 어떤 부분은 과하게 발달했으며, 어떤 부분은 의도적으로 잘려나갔다. 소녀는 그런 면까지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오빠의 바탕을 부정하게 되는 셈. 처음부터 둘이서 함께 살길 원했던 것은 오빠가 아니라 소녀 쪽인데. 오빠는 그녀의 삶에 휩쓸렸을 뿐인데.
“난 그냥, 오빠가 축하받을 준비가 되어있었으면 하는 거야.”
난 크리스마스보다 오빠 생일이 더 중요한 사람이니까. 상냥한 목소리에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뻣뻣한 것이 긴장이 덜 풀린 듯하지만 아까보다는 안심한 얼굴이다. 그래도 미안하다면 내가 준비한 고깔모자 써주고. 장난스러운 말까지 흘리자 비로소 오빠의 입가에 웃음이 걸린다. 올해 생일은 정말 즐거운 날로 만들어줘야지. 다시는 잊지 않도록. 마음을 꼭꼭 숨기고서, 소녀는 케이크를 들어 테이블의 중앙에 올려놓는다. 오늘의 주인공을 위해서였다.
*
오빠의 생일 선물을 사러 가자며 소년을 꼬드기는 건 쉬웠다. 소년은 친우를 아꼈고, 소녀와 함께 있는 것도 좋아했으므로. 오빠는 성격이 까다로우니까 잘 따져서 골라야 해. 며칠 전, 그런 말을 내세우며 소년을 잡아끌고 가게를 몇 군데나 들락거린 날 소년은 끝까지 한마디 불평도 없었다. 너희 남매는 사이가 좋네. 난 형제가 없으니까 조금 부러워질 지경이야.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소녀와 함께 선물을 고를 뿐이었다.
[슌의 생일, 잊어버리기도 어렵겠어.]
마침내 소녀가 선물을 골라 포장하던 때. 소년이 말했다.
[크리스마스니까?]
[그래. 모두가 축복하는 날에 태어났다니, 행운일지도.]
아이들을 특히 챙겨주는 날이니까 어릴 땐 두 배로 축하받았을까. 소년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받아 가는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을 이었다. 아이들의 세계야, 보통은 그렇다. 생일이 크리스마스보다 며칠 앞선 날이기만 해도 흔히 그런 말이 돈다. 크리스마스 선물과 생일 선물까지, 두 개씩 선물을 받을 것이라느니. 사람들이 생일을 잘 기억해 챙겨줄 것이라느니. 그러나 소녀는 사실 어린 날의 오빠가 그리 축하받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오빠는 소녀의 삶에 나타난 순간부터 보호자여야 했다. 어른이 없는 곳에서 어린 동생을 키워내느라 오빠는 ‘아이로서’ 축하받을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오빠가 아이 시절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것을 서운해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오빠는 어릴 때부터 소녀를 돌봤던 것에 꽤 자부심을 느꼈다.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던 아이가 대개 그러하듯, 어른들 앞에선 어리광부리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고 말하고 다니기까지 했다.
분명, 오빠는 소녀에게 그때의 보상을 받으려는 생각이 없다. 다만 소녀는 자라날수록 오빠가 축하받지 못하고 누리지 못했던 것에 자꾸만 신경이 쏠렸다. 오빠가 그녀를 위해 애썼듯, 그녀도 오빠를 위해 마음을 쏟고 싶었다. 오빠의 사고회로가 희한한 것은 알고 있지만, 그가 스스로를 돌아보기 힘든 사람이란 걸 알지만. 동생을 위해 사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는 것도 명백했지만, 소녀는 오빠를 위한 날을 하루쯤은 만들어주기로 했다.
모두가 축하받는 날. 크리스마스. 오빠의 생일.
세 날짜 모두 같은 날을 의미했다. 12월 25일. 오빠는 크리스마스에 왔고, 서로 다투는 사람들도 크리스마스엔 분쟁을 멈추고 ‘모두의 휴일’을 기념한다. 오빠를 위한 날로 삼기에 딱 마음에 드는 날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뻗은 해, 소녀는 크리스마스에 커다란 케이크를 준비했다. 오빠를 위해 사왔어. 소녀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자 오빠는 이번 생일에 그러했듯 눈이 둥그레졌다.
왜?
오빠 생일이잖아.
하긴, 대충 이 비슷한 날짜였던 것 같긴 해.
‘대충’이 아냐. 정확히 크리스마스였어. 12월 25일.
그랬던가.
미지근하게 반응한 오빠는 케이크를 큼직하게 잘라 동생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촛불 안 켰잖아! 동생의 원성에 남은 케이크에 급히 초를 꽂았던 오빠를, 소녀는 기억한다. 그 해부터였을 것이다. 소녀가 오빠의 생일을 챙기게 된 것은.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소녀의 삶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음. 글쎄. 어릴 땐 어땠는지 기억이 잘 안 나네. 그땐 나도 어렸으니까. 최근엔 내가 몇 배로 챙겨주고 있어.]
소년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소녀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다행히 소년은 더 묻지 않고 넘어가주었다.
[그런 것 같아. 생일을 며칠 전부터 준비해주잖아. 슌은 운도 좋지.]
[그래서 말인데, 유토. 크리스마스에 우리 집에 올래? 유토가 깜짝 등장하면 오빠가 더 기뻐할걸?]
기대 섞인 눈으로 묻자 답은 곧 돌아왔다. 소년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연 소녀는 선물을 안은 소년과 마주쳤다. 막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약속을 기억하고 있던 소년이 먼저 찾아주었다.
“어서 와, 유토.”
“메리 크리스마스, 루리. 슌은?”
“음식 세팅하고 있어. 참, 이런 날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서야 거실로 나온 오빠는, 소년이 바로 선물을 떠안기는 바람에 엉겁결에 큰 상자를 받아들었다.
“생일 축하해. 너에겐 이 말이 먼저겠지.”
“……아, 생일. 그랬지.”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멍한 목소리에 소년의 얼굴에 의문이 비친다. 신경 쓰이는 것은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오빠는 또다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반응하고 있다. 바로 조금 전, 오늘이 그의 생일이라고 짚어주었는데.
“뭐야. 왜 남의 일처럼 이야기해.”
“아냐. 조금 피곤해서. 선물 고마워.”
오빠는 어색한 웃음을 걸치며 인사를 건넸다. 소년이 무언가 의심을 품기라도 할까 걱정되었던 소녀였지만, 짧은 인사를 듣자마자 소년의 입가에 안도 섞인 웃음이 걸렸다. 테이블로 안내된 소년은 차려진 음식을 보고 눈이 커졌다. 중앙의 케이크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오빠가 준비한 음식이 가득 올려져 있어서였으리라.
“음식을 이렇게나 차렸다고? 셋이서 실컷 먹어도 남겠는데?”
“오빠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더라고.”
“크리스마스잖아. 루리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해.”
“크리스마스여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니까, 오빠.”
생일. 오빠 생일이어서라고. 다시 강조하자 오빠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일. 그 단어에 반응한 것처럼 오빠의 시선은 케이크로 향한다. 크림이 잔뜩 얹힌, 과일과 장식이 먹음직스럽게 올라간 케이크. 그의 시선은 제일 위쪽, 소녀가 그의 나이에 맞춰 꽂은 초에서 멈췄고.
“있지, 루리. 사실은 매년 실감이 안 나. 이 날이 돌아온다는 것도, 내가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것도.”
“그래. 오빠는 자기 나이를 자꾸 틀리지. 또 잊어버릴까 싶어 정확하게 꽂아뒀으니 제대로 확인하라고. 열여섯 살.”
“……그렇게나 됐나?”
“내가 열세 살, 오빠는 나보다 세 살 위. 바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내 나이를 기억하면 되잖아.”
“그렇게 계산하는 게 확실히 편해. 예전 기억은 조금, 흐릿해서.”
“언제까지 초만 꽂아두고 있을 거야? 생일 케이크는 촛불을 불어야지.”
슬그머니 끼어든 소년은 성냥으로 초에 불을 붙였다. 소녀가 전등을 끄고 올 동안 오빠는 넘실거리는 촛불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서. 촛농이 떨어져. 동생이 재촉하자 오빠는 조금 쑥스러운 듯 눈치를 살피더니 입김을 후, 불었다. 촛불은 한 번에 꺼졌다.
그 날 세 사람은 밤 늦게까지 즐겁게 놀았다. 남매야 둘뿐이었기에 신경 쓸 것이 없었고 소년도 이미 작정하고 왔는지 집으로 돌아가겠단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는 무엇을 하든 재미있는 법이어서, 그들은 사소한 화제로 수다를 떨면서도 시시한 게임을 하면서도 깔깔 웃었다. 그 사이 잔뜩 차려놓은 음식은 거의 동났고, 선물은 이미 포장이 뜯겨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이렇게 신나게 놀 수 있을 줄 몰랐어. 자정을 조금 앞두고 자러 들어가며 소년이 건넨 말이었다. 앳된 얼굴이 열기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우린 네가 와줘서 평소보다 훨씬 좋았어. 정말, 다음에도 이렇게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럼 내년 크리스마스도 같이 놀까. 슌 생일 축하도 해줄 겸.”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이야기에 소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도 분명 좋아할 거야. 까지 이야기하고서 소녀는 멈칫했다. 조금 전부터 거실엔 두 사람뿐이다. 오빠는 어디에 있지?
“그러고 보니, 오빠는? 아까부터 안 보이네.”
“아. 머리가 아프다더라고. 먼저 자야 할 것 같아, 미안해. 라면서 방에 들어가던데.”
오늘 이상하게 피곤해 보이지. 슌. 우리랑 어울려주긴 하는데 생각도 많아 보이고. 소년의 말에 소녀의 얼굴이 살풋 굳어졌다. 소년이 느낄 정도였다니, 단순히 멍한 게 아니라 정말로 뭔가 걸리는 게 있었던 것일까.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캐묻고 싶지만, 생각에 잠겼을 때의 오빠는 속을 털어놓지 않는단 것을 소녀는 경험적으로 안다. 아무래도 자고 일어나서 오빠를 잘 관찰해야 할 듯했다.
“분명 상 차리는 데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야. 내년엔 이렇게 무리하지 않게 해야겠어.”
애써 밝은 목소리를 꾸며내어 이야기한 소녀는, 소년에게 인사를 건넨 후 오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정말로 자고 있을까. 그게 아니면. 소녀의 생각은, 오빠의 곁에 드리워진 수상쩍은 그림자를 본 때 멎었다. 누군가, 있다. 소녀가 아는 존재. 아마 소녀만이 아는 ‘것’이 오빠의 방에 숨어들어와 있다. 소녀는 거의 확신을 품고 <그것>에게로 다가섰다.
「우리가 준 선물은 마음에 들었니, 루리?」
잠든 오빠에게 손을 얹은 채 말을 걸어온 것은 천사상이었다. 입은 조각되지도 않았는데 소리를 흘리는 것이 기괴하기 짝이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비명을 질렀을 광경이지만, 소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침입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천사상의 모습을 취한 <그것>은 어릴 적 수없이 마주쳤던 존재. 오빠가 소녀의 삶에 휩쓸리기 전, 소녀에게 가족이 없었던 시절. 소녀는 이른바 ‘인공 자궁’에서 신처럼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랐다. 그곳에서 저를 돌봐주었던 모두가 <그것>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을 소녀는 기억한다. <그것>들 모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나, 그뿐. 정체는 알 길이 없다.
이제 와선 정체를 파헤치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소녀는 이미 오래 전 인공 자궁에서 내쫓겼고, 당연히 <그것>에게서도 벗어났으니. 이제 아무런 연이 없는 그것이 왜 저를 찾아왔던가. 그리고 왜 뒤늦게 ‘선물’을 언급하는가. 소녀는 그것이 들먹인 선물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하면서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어떤, 선물?”
「여기 있는 네 오빠 말이야. 너, 어릴 때 소원을 빌었잖아. 가족을 주세요. 라고.」
아주 어린 날, 보통 사람들이라면 거의 기억이 날아갔어야 할 나이의 어느 밤을 소녀는 기억한다. 무엇이든 풍족했던 방, 타인 외에 모든 것이 있었던 방에서 소녀는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가족을 주세요. 형제면 좋겠어요. 내 말을 다 들어주는 사람이었으면. 왜 그렇게 구체적인 소원을 빌었는지는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태어나 인간을 만난 적 없던 소녀는 그 즈음 책으로만 배운 ‘가족’을 미치도록 선망하고 있었고, 그 날은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족을 받고 싶어 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소녀는 혼자 쓰던 방에서 자신보다 조금 더 큰 남자아이를 보았다. 한참 찾았잖아, 루리. 대뜸 소녀의 이름을 부른 아이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그녀와 닮아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처럼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아이를 본 때 소녀는 문득 전날 밤 흘린 소망을 떠올렸다. 가족을 주세요. 형제면 좋겠어요.
[오빠?]
가장 갖고 싶었던 가족의 이름을 말하자 아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그가 <선물>임을 알아채고 바로 그 품에 달려들었다. 오빠,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어. 설렘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며. 처음 보는 ‘오빠’는 소녀를 꼭 안아주었지만, 잠깐 그 품에서 벗어났을 때 소녀는 보았다. 그의 얼굴에 비친 혼란을.
자라면서 소녀는 서서히, 오빠가 어떤 인간인지 눈치챘다. 그는 선물이란 위치에 걸맞게 소녀가 막연히 바라던 오빠의 상에 완벽히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언제나 동생을 먼저 생각하고, 동생을 보호해주는 존재. 든든한 울타리. 그만큼 특이한 사고회로를 지닌 인간. 동생을 무조건적으로 위하는 존재를 만들려면 자기중심성도 잘라내는 게 좋다. 오빠의 사고회로에선 ‘자신을 챙기는 판단력’이 끊겨버렸다. 그것이 오빠의 장점이자, 인간으로서의 결함. 소녀의 선물이 된 바람에 오빠는 보통의 인간으로 살 수 없다.
“오빠는 어떻게 된 일인지 기억 못 하지?”
「글쎄. 알 수 없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면 자기 생일과 나이에 의문을 품을 이유도 없지 않나 싶지만.」
“의심하고 있어?”
「정확히 말하면 그 애, 네 소망에 맞춰져 배달된 아이잖아. 네 크리스마스 선물로 네 주변에 떨어졌을 뿐 ‘원래’ 그렇게 살 아이가 아니었다고. 자기 삶의 모든 게 갑자기 쿠로사키 루리의 것이 되었으니 가끔 이질감을 느끼겠지.」
크리스마스는 오빠가 찾아온 날이지 그의 진짜 생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가 <오빠>가 된 날이 크리스마스였기에 소녀는 그 날을 그의 생일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어쩌면 오빠가 생일을 계속 잊었던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녀에게만 의미가 있던 날을 자꾸만 생일이라고 믿어야 했기에. 실제 그가 태어난 날은 따로 있기 때문에. 몇 년 전, 처음으로 생일을 챙겨준 날부터 미지근하게 반응하던 오빠의 모습이 소녀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쿠로사키 슌은 내가 받은 선물이야.”
그렇지만 소녀에게 그는 오빠였고 선물이었다. 크리스마스에 찾아온, 그녀의 유일한 가족. 소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라는 ‘불순물’을 끌어안은 바람에 <인공 자궁>에서 나가야만 했고 더는 전 같은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해도. 물론 그 역시 소녀를 사랑하고 있다. 그것이 소녀의 소망에 맞춰 입력된 애정이라 해도.
「맞아. 하지만 그 애는.」
“내가 받은 선물이야. 원래 자리가 있더라도 돌려줄 생각 없어.”
「너, 의외로 고집이 강하구나.」
“쿠로사키 슌은 내 오빠고, 열여섯 살에,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사람. 이미 이렇게 굳어졌잖아.”
「……그렇게 믿게 할 생각이야?」
“안 돼?”
얼마간 김빠진 웃음소리가 났다. 입이 없는 ‘그것’이, 미완의 천사상이 웃고 있다. 아이의 철없는 소망을 받아주는 어른처럼. 보호자였던 적도 없는 주제에 그것은 언제나 소녀 앞에서 부모 흉내를 낸다.
「안 될 것은 없지. 실은 그 때문에 찾아온 거야. 이대로 혼란이 깊어져 그 애가 널 떠나는 일이 생기면 네가 불행해질 테니까. 어쨌든 우리는 네 행복을 위해 움직여야 하거든.」
“그럼 오빠의 혼란을 없애줘.”
「어려운 건 아니지만, 루리. 이건 명심해. 너는 행복해도 그 애는 분명 불행해질 거야. 쿠로사키 루리가 책임을 다하고 떠나면 혼자 남겨질 테니까. 그때 ‘쿠로사키 루리의 것’이란 속박이 풀린다 해도 그 애는 미아가 되잖니.」
너 때문에 돌아갈 곳을 잃었으니까. 심술궂게 덧붙인 <그것>은 오빠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가져다 댔다. 그것의 손이 닿은 자리에서 회색의 연기가 한동안 피어오르는 것을, 소녀는 보았다. 아마 연기의 정체는 지금껏 오빠를 괴롭혀왔던 의문이리라. 저것만 걷히면, 오빠는 더는 혼란스러워하지 않게 된다. 이대로 소녀를 믿고, 자신의 ‘만들어진’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된다. 연기가 전부 흩어지자 소녀는 오빠에게로 바짝 다가갔다. 잠든 얼굴은 이제,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 평온하고.
“난 오빠를 혼자 두지 않아.”
저에게 휩쓸린 불쌍한 남자를 보며, 소녀는 선언했다. 가장 큰 선물로 찾아온 사람을, 그녀는 끝까지 책임질 것이다. 불행해지는 일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소녀는 그를 사랑했고 그는 이미 소녀의 부속품이 되었으니.
「네 마음대로 되진 않겠지만, 그래. 힘내봐.」
마지막까지 달갑잖은 말을 남긴 그것은 이내 소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오빠의 방에는 이제, 어린 날부터 함께 자라온 남매뿐. 잘 자, 오빠. 깨어났을 땐 더는 힘들지 않을 거야. 소녀는 오빠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서 돌아섰다. 앞으로 둘의 삶에 그림자가 깔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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