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면 안 돼. 슌. 잠들지 않기로 약속해.”
“왜 내가 잠들 거라 생각해? 하트랜드의 하늘은 언제나 우중충하다지만 아직 밤이 되지 않았단 것쯤 나도 알아. 걱정도 많다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 눈꺼풀이 닫히고 있잖아. 잠들면 나도 루리도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여기에 없는 루리까지 끌어오는 걸 보니 내가 정말 걱정되는 모양이지. 루리가 여기 있었다면 자기 핑계 대지 말라고 먼저 말했을걸. 걱정, 안 해도 돼. 사실 조금 졸리긴 하지만 그뿐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졸린 게 문제야. 널 깨우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되는 거라고, 슌. 너,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상처가 꽤 깊어서 그렇지. 지금까지 무모한 일을 벌이던 널 업고, 둘러메고 온 것도 여러 번이지만 이렇게나 네 몸이 축 처진 때가 없었어. 이대로 의식을 잃으면 위험하니까, 내 말에 집중해. 절대 잠에 떨어지면 안 돼.”
“……이것 봐, 겁이 많지. 지금까지 아카데미아 놈들에게 당한 사람들은 루리를 빼고 전부 카드화당했잖아. 루리조차 납치되었고. 부상을 입고 잘못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지혈도 마쳐놓고 뭘 겁내. 쿠로사키 슌이 지금까지 너에게 돌아오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피를 뒤집어쓰고도, 옷이 너덜너덜해져서도. 매일 돌아오지 않았나?”
“그러니 네가 첫 번째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란 뜻일 텐데. 우리 레지스탕스에 제대로 된 치료가 가능한 사람이 아무도 없단 건 너도 알잖아. 지혈만으론 안심할 수 없어. 네 눈이 자꾸 감길 것 같단 말야. 그렇게 감겨서, 그대로 의식을 잃고 내가 깨울 수 없게 되어서…….”
“평소엔 어른스럽게 굴어서 정신연령은 내 또래인 줄 알았더니. 순 겁쟁이였군, 유토도. 이해해. 아직 아카데미아 디스크 분석을 끝내지 못했는데 카드화당하는 이들은 늘어만 가지. 루리도 없지. ‘유일무이한 친우’에게 심적으로 더 기대게 된단 거 아냐.”
“몸 움직이지 마. 상처 벌어질지도 몰라. 지금 내 모습을 어떻게 생각해도 좋으니, 슌. 잠들지 않기로 약속해. 아직까지 제대로 약속하지 않았어. 자꾸 제대로 된 답을 피하는 건 비겁한 태도 아닌가? 버틸 자신이 없는 거라면 말 빙빙 돌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힘들어서, 이대로 의식을 놓고 싶다고.”
“알겠어. 알겠다고. 약속해, 잠들지 않기로.”
“눈 감지 마. 방금도 눈이 반쯤 감겼어.”
“난 이미 약속했지. 그럼 이제부터는 네 몫 아닌가? 네가 정말로 내가 잠들지 않길 바란다면, 의식을 잃지 않도록 하려 한다면……어떻게든 내가 정신을 유지하도록 도와줘야지. 물을 뿌려서건 부상 부위를 쑤셔서건. 네 힘으로 날 재우지 않고 있어봐. 유토. <네 목숨은 네게 맡긴다.>고 칠 테니까. 너는 그런 류의 대사를 좋아하지 않나?”
“자리를 뜨면 눈을 감아버리겠지. 상처를 들쑤시면 또 피가 날 테고. 방법은 하나뿐일 거야. 네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의식을 놓지 않도록 끝없이 말을 걸기.”
“웬일이야. 내가 아는 유토는 그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쩌겠어. 널 재울 수는 없으니 이야기를 쥐어짜내서라도 말을 걸어야지. 내가 말을 걸면, 그대로 듣고 있으면 안 돼. 어떻게든 답을 하는 거다, 슌. 너도 노력하고 있단 걸 보여줘. 의식을 잃지 않으려, 버티려고 노력한단 걸 말이야.”
“루리가 없어지고 나선 잔소리가 너무 늘었어. 형님처럼 굴긴.”
“네 탓이기도 할 텐데. 네가 그렇게 아무렇게나 몸을 던지고 다니지 않았다면 나도 네 일에 간섭하지 않았어. 난 ‘레지스탕스 쿠로사키 슌’을 믿지만, 내 친우는 불사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알지. 넌 내일이 없는 것처럼 싸우고, 스스로를 너무 쉽게 내던지잖아. 이전에 말했듯이, 나는 너희 남매를 다 잃고 싶지 않아.”
“잃지 않았어. 망할. 왜 또 약한 소리야? 루리는 납치당한 거지 잘못된 게 아니라니까! 아카데미아에 가서 루리를 찾기만 하면 되는데, 왜 잃기라도 한 것처럼 말해?”
“상처 벌어지니까 움직이지 마. 흥분하지도 말고. 실언이었으니 조금 전 말은 잊어줘. 그래, 루리는 ‘아직’ 우리가 찾지 못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네가 더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아카데미아로 향하기 전에, 루리를 찾으러 가기 전에 네가 먼저 쓰러지면 안 된다고. 루리를 구하러 가는 길에 오빠인 네가 빠져서야 되겠어? 그러니까 제발…….”
“……디스크 분석은 곧 끝나. 아카데미아의 카드화 기능에 대항할 길을 찾아내기 전까지, 우리는 버티지 않으면 안 돼. 그러니 가능한 모든 싸움에 뛰어들 수밖에.”
“걸핏하면 널 미끼로 삼고 있으니 문제지. 네 무기인 RR은 일대다 특화의 덱이라지만 승기를 잡을 때까지 버티지 못한다면 집중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건 네 쪽…….”
“루리가 이 자리에 없는 게 다행이군. 너도 루리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을 테니까.”
“루리가 있었다면 오빠의 무모함을 먼저 지적했을 텐데?”
“이런 소모적인 이야기, 그만하지 그래. 어차피 부상은 입었고, 다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으니.”
“급하게 말을 돌리는 것 같아서 내키진 않지만, 그래. 지금 우리가 계속 말을 주고받는 목적은 서로를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지. 널 계속 깨워두기 위해서니까, 화제는 바꾸는 게 좋겠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지금 상황 따위 잊을 정도의 밝은 이야기? 네가 몰랐던 스페이드교의 소문? 그게 아니면.”
“그동안 쿠로사키 슌이 유토에게 궁금했던 것은 어때.”
“그런 게 있었어? 생각도 못 했는데.”
“물론 있었지. 스페이드교에서 만났을 때부터 쭉 머리에 넣어두었던 의문 말이야.”
“뭐였는지 말해봐. 남들 앞에선 말하고 싶지 않은, 대단한 비밀이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여기는 우리 둘밖에 없고, 기지로는 네가 좀 더 안정되었을 때 갈 생각이니까.”
“내가 부상을 입었다고 평소답지 않게 친절한데? 기회를 놓치긴 싫으니 지금 물어야겠어. 내가 궁금했던 건 이거야. 왜 스페이드교에서 처음 만난 유토는, 바로 그 ‘첫날’부터 이미 나를 알고 있었던 체 쿠로사키 슌을 친근하게 대해주었을까?”
“잠깐만, 슌. 우리가 정말로 그날 처음 봤다고 생각해온 거야? 지금까지 그렇게 믿어왔어?”
“뭐야, 그 반응은. 꼭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슌. 우리는 그때 처음 만난 게 아냐. 그보다 몇 년은 더 전에 만났지. 난 옛 일이라 일부러 안 꺼내는 줄 알았는데, 아예 기억을 못 할 줄은.”
“몇 년은 더 전이라고? 어릴 땐 루리를 돌보느라 거의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 날 닮은 사람을 본 게 아니고?”
“쿠로사키 슌과 똑같이 생겼으면서, 똑같이 RR이란 덱을 쓰고, 나와의 나이 차이가 지금 너와 내 나이 차이와 같은 사람이 하트랜드에 또 있을 거라 생각해?”
“이상한데. 난 전혀 기억이……날 재우지 않으려고 방금 만들어낸 이야기는 아니고?”
“마음대로 생각해. 의심한다고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내 기억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어. 쿠로사키 슌을 처음으로 본 때. 물론 그때는 네 이름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좋아, 설명해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면 듣고 바로 흘려버릴 테니.”
“스페이드교에서 마주친 첫날, 네가 내 드래곤에 관심을 보였던 거 기억해? 다크 리벨리온 엑시즈 드래곤을 보자마자 반가워했지. ‘너에게 제법 어울리는 드래곤이야’라 말하면서. 몇 살 어렸을 때의 너도 그런 반응을 보였어. 그러니까…….”
“듀얼리스트 세계에선 덱과 사용자가, 몬스터와 사용자가 파트너처럼 깊게 얽히는 게 보통 아닌가? 덱과 사용자가 닮아간다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지. 처음 본 때부터 너와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어.”
“……말은 끝까지 들어줬으면 해. 물론 네가 말한 대로 듀얼리스트와 몬스터는 깊은 유대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지. 그래서 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슌. 난 어릴 때 다크 리벨리온과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어. 기억이 시작된 때부터 가지고 있었으니, 듀얼리스트의 입장에선 특별한 카드인데도.”
“이유는?”
“지금 생각하면 상상력이 풍부했던 어린 날의 망상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때의 난 다크 리벨리온의 <그림자>를 보곤 했거든. 다크 리벨리온을 불러낼 때마다 그 몸체보다 더 큰 실루엣이 ‘허공에’ 비쳤어. 녀석의 어금니가, 내 듀얼상대의 몸을 정통으로 꿰뚫거나 발톱을 휘두르는 실루엣이 보였지. 지금에야 아카데미아라는 <병사>를 상대해야 한다지만, 그때는 기껏해야 내 또래의 꼬마들과 맞설 뿐이었는데도, 다크 리벨리온은 매번 내 상대를 삼킬 것처럼 굴었던 거야.”
“녀석이 그렇게나 사나웠다고?”
“내 드래곤이긴 하지만 냉정하게 봐서, 한 번도 사납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말해야겠군. 예전과 지금의 차이가 있다면 내가 자랄수록 다크 리벨리온이 덜 위협적으로 ‘비친다’는 것 정도일까. 발톱을 숨기고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삼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대로 말하면 어렸을 땐 다크 리벨리온이 사나운 면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는 거고. 아마 그 결과가, 내가 본 <그림자>였겠지. 내 드래곤의 난폭하고 공격적인 면에 대한, 어린 날의…….”
“두려움의 투영?”
“그럴지도. 하지만 중요한 건, 슌. 내가 보았던 실루엣이 진짜냐 망상이냐가 아냐. 다크 리벨리온을 꺼낼 때마다, 누군가와 몬스터를 두고 듀얼을 할 때마다. 때로는 단순히 다크 리벨리온 카드를 든 때조차. 나와 ‘듀얼로’ 어울리려는 이들만 있으면 놈이 사납게 굴었다는 거지. <그림자>가 비칠 때면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같이 들리곤 했어. 실루엣을 보는 것도, 위협한답시고 내는 소리를 듣는 것도 나뿐이었던 것 같지만, 그때의 나는 어렸기 때문에 전부 감당하긴 어려웠고.”
“그래서, 다크 리벨리온이 상대를 위협할 때마다 어떻게 반응했는데? 듀얼을 포기했나?”
“어쩌면.”
“모호한 답변이야. 제대로 말해주지 그래.”
“처음엔 당혹스러웠던 것이 반복될수록 공포로 바뀌어갔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 지금도 봐, 열일곱 살인 너도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어른들이 그런 말을 믿어주기야 하겠어.”
“제대로 맞서진 못했다는 뜻이군.”
“유감스럽게도. 날이 갈수록 공포는 짙어졌으니까. 언젠가부턴 다크 리벨리온 소환 조건을 충족했는데도 소환하기가 쉽지 않았어.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지는 걸 느끼면서 겨우 소환해냈다가 효과를 쓰지도 못하고 듀얼에서 패하기도 했던가. ‘나의’ 드래곤인 건 분명한데, 놓고 싶지도 않은 카드인데 사용자인 내가 오히려 다크 리벨리온에 먹히는 것만 같던 나날이었지. 자, 드디어 쿠로사키 슌이 등장할 차례야. 우리의 ‘진짜’ 첫 만남에 대해 들을 준비 됐어?”
“내 배역은 뭐였지? 유토와 함께 다크 리벨리온에 겁을 먹는 ‘친구’인가?”
“그랬다면 내가 그 후 몇 년이나 지나도록 너를 기억했겠어? 다크 리벨리온을 겁내는 아이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는데. 다크 리벨리온도 내가 저를 두려워한단 걸 알았는지 자꾸만 사나워져서, 너를 만나기 직전엔 결국 나와 듀얼을 하던 아이들조차 그 난폭한 모습에 겁을 먹고 도망치더라고. 그래서……그날엔, 너를 처음 만난 날엔 어디 창고 같은 곳의 구석에 혼자 틀어박혀 있었어. 다크 리벨리온을 꺼내둔 채로. 녀석의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혼자 있고 싶었던 때일 텐데 내가 눈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군.”
“그러게. 정말이지, 그때도 넌 사람을 놀라게 했단 말이야. 문을 조심스레 여는 것도 아니고, 쳐들어가겠단 마음을 먹기라도 한 것처럼 벌컥 열었지. 가뜩이나 예민하던 때 예고도 없이 찾아든 손님이라. 달가울 리가 없었어. 누가 들어온 거야? 하는 짜증이 먼저 치밀었지. 그런데…….”
“그런데?”
“다크 리벨리온의 그림자. 그때까지 나를 괴롭혀온 그 실루엣이 ‘불청객’이 온 창고 입구 쪽으로 향하는 게 보이더군. 순간 숨이 막혔어. 그 전까지 다크 리벨리온이 날뛴 건 바깥에서였지만, 그때는 좁은 창고 안이었잖아. 거기다 불청객이 한 무리일 리도 없고. 이번에야말로 내 드래곤이 누군가를 덮칠 것만 같았어. 내가 혼자 숨어든 틈을 타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때. 안 돼. 위험해. 불청객에게, 희생자가 될지도 모를 이에게 경고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 거야.”
“당연히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네 쪽으로 가까워졌을 테고.”
“……발걸음 소리는 점점 커지기만 했어. 다크 리벨리온의 실루엣은 위협적으로 꿈틀거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때 난 나보다 서너 살쯤 많아 보이는 남자아이를 발견했지.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한 거야. 그제야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 말은 ‘도망쳐’가 아니었어. ‘왜 여기 온 거야?’였던가. 잔뜩 뾰족해져선 엉뚱한 말을 흘렸지.”
“그때도 낯가림은 상당했던 모양이야.”
“시끄러워.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우니까 굳이 말하지 말고 그냥 얌전히 들어. 당연히, 그 남자애는 눈을 둥그렇게 떴어. 무슨 엉뚱한 말이야, 갑자기? 란 말이 튀어나올 차례였지. 그런데 말야. 그 애가 꺼낸 첫마디는 그런 게 아니었어. 내 귀에 박힌 건 의문문이 아니라 감탄이었거든. 「우와, 네 드래곤 정말 멋지다!」 이상하지 않아? 내 또래 애들은 물론, 나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이나 많은 애들도 겁먹고 도망치던 드래곤을, 그것도 잔뜩 난폭해진 상태의 드래곤을 그렇게 본다는 게.”
“그때의 네 반응이 상상이 가는걸. 분명 멍청한 얼굴을 하고서…….”
“웃지 마, 슌. 그렇게 낄낄대면 상처 벌어진다고. 「그 녀석은 위험해.」라고 답하려던 때, 나는 그 애를 삼킬 듯했던 다크 리벨리온의 실루엣이 변하는 걸 봤어. 성격 급한 그 애가 다크 리벨리온에 손을 뻗었는데도. 다크 리벨리온의 어금니는 그 애 쪽으로 향하지 않았어. 발톱은 내렸고, 무시무시하게 커졌던 실루엣은 보통 크기로 돌아갔지. 보통의 드래곤처럼. 그 모습을 확인하자, 무엇 때문인지 다리에 힘이 풀렸어. 주저앉은 나를 보고, 그 애는 제 손을 잡고 일어나라는 듯 손을 내밀더라고. 뭐야, 저런 멋진 드래곤을 가지고 있으면서 바보같이 주저앉기나 하고. 명랑한 목소리였어. 우습게도 그때, 내 두려움이 아무것도 아니었단 생각이 들었지.”
“듣고 보니 내 배역이 나름 괜찮은 배역이었던 것 같아. 단역은 아니고 조연쯤은 된 모양이네.”
“그냥 조연이겠어? 그 시기의 나에겐 처음으로, 다크 리벨리온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해준 특별한 조연이었는데. 왜 다크 리벨리온이 날뛰는 걸 멈췄을까? 왜 내 공포의 투영이었을지도 모를 그림자가 그 애와 마주한 때는 얌전해진 걸까. 지금도 답은 모르겠지만, 그때가 내 삶에서 전환점이 된 것은 분명해. 그날 이후로 난 더는 다크 리벨리온의 실루엣에 시달리지 않았으니까.”
“그날로 공포의 환상에서 벗어난 거겠지. 내가, 아니, 진짜 나인진 모르겠지만. 그 애가 너무 당당하게 다크 리벨리온에 접근해서 그만 겁을 줄 타이밍을 놓친 거 아닐까?”
“글쎄. 그런 우스운 이유여도 좋고, 네가 내 드래곤과 상성이 맞았다는 비밀이 있어도 좋겠지. 듀얼학원에서 만나 너와 제대로 가까워지고는 네가 ‘편한 사람’이어서 그랬단 생각이 들지만. 이야기는 아직 남아있으니, ‘그날의’ 첫 만남으로 돌아가자. 그 애의 손을 잡고 일어나자, 「그래서, 저 드래곤 이름이 뭔데?」 그 애가 물었어.
「다크 리벨리온 엑시즈 드래곤.」 나도 모르게 답했지. 내 손을 잡아주느라 바짝 가까이 온 그 애의 눈이 꼭, TV에서 본 맹금류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어. 그리고 그 애는…….
「너랑 어울리는 드래곤이네.」 그렇게 말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해.”
“스페이드교에서 만났을 때와 비슷한 말을 한 모양이지. 뭐.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긴 해. 다크 리벨리온만큼 너에게 어울리는 드래곤은 지금껏 본 적이 없으니.”
“그러니 스페이드교에서 마주친 첫날, 내가 얼마나 반가웠겠어. 아,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구나. 일부러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그런 생각까지 했더니.”
“사실 지금이라고 기억이 나는 건 아냐. 그래도, 내 판단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만은 다행스럽게 느껴져. 그만큼 너도, 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뜻일 테니까.”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조금 서운하지만, 그래. 그때는 어렸고, 이제 우리 나이는 사소한 것을 잊지 않을 수 있는 나이니까 내 기억의 나머지를 다 끌어내서 이야기해줄게.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다크 리벨리온의 그림자에 시달린 이후론 오랜만에 한 점 불안도 없이 그 애에게 말했어. 네 덱도 궁금해. 덱을 가져왔다면 듀얼하지 않을래? 그 애는 말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덱케이스와 디스크를 꺼내더라고. 그때 그 애가 꺼낸 덱이 분명히, RR. 레이드 랩터즈였어. 어둠속성 비행야수족 카드로 구성된. 기계 새 카드.”
“꼬마 유토의 감상이 궁금해. RR을 사용하던 그 애는 어때 보였지?”
“감상? 간단했어. 아, 저 애도 자기랑 닮은 덱을 쓰는구나. 그리고 전술이 재미있구나. 친구가 되면 좋을 텐데. 그 정도. 그렇지만 그 애는 오래 머물지 않았어. 듀얼을 마치고는 집에 돌아가야 한다면서 미련 없이 입구로 향하더라고. 그러면서 엉뚱한 말을 하던데. 뭐였더라. 「네 그림자, 드래곤 모양을 닮았어.」였던가?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모를 말을 한 걸 보면 확실히 쿠로사키 슌이지, 그 애. 넌 요즘도 그러잖아.”
“그 후로는 못 만났고?”
“그래. 그땐 오랜만에 즐거운 듀얼을 한 여운 때문에 창고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한동안 혼자 남아있었는데, 그러지 않을 걸 그랬다고 그로부터 몇 달은 후회했어. 그때 본 아이, 이름도 모르고 사는 곳도 정확히 모르는데 근처에서 다시 마주치지 못했으니까. 시간이 좀 흘러서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라 생각하고 슬슬 잊어가려던 때. 듀얼학원 스페이드교에 등록했어. 다음 이야기는 예상이 가겠지. 스페이드교에서 우연히 만난 애가 딱 기억 속의 그 아이와 같았다는 것.”
“그렇게 ‘두 번째의’ 첫 만남을 하고서 그때야말로 친해지게 되었다는 것. 맞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쩌면, 그래. 너와 만났을지도 몰라. 그래서 다크 리벨리온을 본 때 더 호의적이었을지도 모르지. 내 RR과 다크 리벨리온의 합이 좋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지금 내가 궁금한 건 이거야. 꼬마 유토가 본 그 애는, 친구가 되고 싶었던 그 애는 지금도 너에게 ‘친구로 남아있었으면 하는’ 존재일까? 이 전장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존재일까?”
“부상을 입더니 마음이 약해지기라도 한 모양이지. 물을 필요 없는 걸 묻는 걸 보면. 어릴 때의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내 드래곤의 난폭한 그림자를, 아니면 드래곤에 대한 내 두려움을 가라앉혔던 그 애는 지금도 내 방패가 되어주고 있지. 유일무이한 친우란 이름을 괜히 꺼냈을 리 없잖아. 그러니 슌. 너는 더더욱 오래 버텨야 해. 내가 버티는 만큼, 내 또래의 레지스탕스가 버티는 만큼. 너도 버텨줘야만 해. 이기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네가 남아있는 쪽이 안심이 돼.”
“……어리광은. 곧 죽을 사람 보는 것처럼 말하는 것 봐. 그래도 하루쯤은 봐줄게. 어릴 땐 제 드래곤에도 겁을 먹었던 아이였다고 하니까.”
“그렇게 놀리라고 알려준 게 아니라고. 기억력이 나빠서 나를 몇 년이나 잊고 있었던 주제에. 농담까지 하는 것을 보니 이젠 좀 정신이 든 것 같지만.”
“그럼 이제 기지로 좀 옮겨주지 그래? 여기에 누워있는 것도 슬슬 지루하단 말이지. 지혈은 진즉 마쳤겠다, 상처는 더 벌어질 것 같지도 않고. 너랑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멀쩡해졌는데. 설마 아직도 겁을 먹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널 부축해서 가는 것도 괜찮겠지만, 조금 전에 기지 쪽으로 연락해뒀어. 혹시 도중에 아카데미아의 공격이 있을지도 모르니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와달라고 했지. 아마 곧 올걸? 강한 놈들이라 안심이야.”
“애초에 직접 날 데려갈 생각도 없었군. 어째 시간을 너무 끌더라니.”
“더 안전해졌다 생각하라고, 슌. 널 옮기는 것이야 문제없지만, 부상을 입은 너에게 듀얼을 시키는 일이 일어나선 곤란하다고 판단한 거야. 우선은 몸을 일으키고 기다릴까?”
“다음번엔 네 말에 속을 생각 없어. 몸을 못 움직일 정도의 부상만 아니면 단신으로 바로 기지로 갈 테니까, 이렇게 사람 귀찮게 만들지 마.”
“아무래도 좋으니 다쳐 오지나 마. ‘귀찮아진’ 원인은 내가 아니라 네 쪽에 있었으니까.”
“꼬맹이 때도 이렇게 잔소리가 많았던가?”
“예전 일처럼 기억에서 지워버리면 되지, 불평이 많아.”
“이제는 다시 잊지 않아. 두 번이나 잊어버리면 그땐 용서받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 똑똑히 기억할 테니, 잔소리만 좀 줄여줘. 루리가 없으니 루리 몫까지 하는 것 같아.”
“네 논리대로라면 루리를 되찾기만 해도 잔소리가 반으로 줄지 않겠어. 이대로 오래 버텨서, 아카데미아로 가는 거야.”
“그리고 루리를 구해내, 다시 원래 ‘우리’로 돌아오는 것. 우리의 목적에 충실하잔 뜻이군. 그런 것쯤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아. 난 언제나 준비가 되어있으니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강하게 맞서기나 하라고.”
“그래. 이제야 안심이야. 복귀 준비해, 슌. 동료들이 왔으니 ‘함께’ 돌아가자. 내일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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