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야유즈] 아주 사소한 종말

2021. 3. 15. 01:01 from 02

 

  무대에 오른 엔터테이너가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저만을 바라보는 수십, 수백 쌍의 눈이다. 객석에 앉은 이들이 무대의 주인공에 시선을 고정하기 때문이다. 그 눈에 깃든 감정이야 다양하겠지만, 엔터테이너가 새겨줘야 하는 것이야 정해져 있다. 즐거움, 그리고 기대. 기대하고 온 사람에겐 곱절의 기대를 돌려줘야 하고, 시험하려 드는 이에겐 확신을 안겨줘야 한다. 슬픔을 누르고 온 사람도 미소 짓고 돌아갈 수 있도록, 즐거운 무대를 꾸리는 게 엔터테이너의 역할. 프로 자격 취득 후 수없이 무대에 오른 소년에겐 이미 상식 수준의 이야기였다.

  소년은 자신을 찾은 이들이, 객석을 메운 사람들이 전부 평가자임을 안다. 프로 선수로서 상대와 실력을 겨루는 것이 이번 경기의 1차 목적이지만, ‘그에게기대하는 것은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도. 사람들은 소년을 프로 듀얼리스트라고 부르기보다 엔터테이너로 칭한다. 상대 선수와 함께하는 경기를, 소년이 펼치는 공연으로 받아들인다. 설령 소년이 승리를 가져간다 해도, 그가 보여준 것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쇼가 아니었다면 관객은 그를 외면할 것이다.

  관객이 평가하는 것은 하나. 소년의 이번 무대가 얼마나 매력적이냐는 것 소년은 저를 담는 수백 쌍의 눈을 보고서 숨을 크게 삼켰다. 다수에게 평가받는 것은 익숙하다. 그들을 만족시키는 것도 쌓인 경험 덕에 어렵지 않다. 소년이 의식하는 것은 단 한 명이었다. 당장은 눈에 띄지 않으나 시선이 닿기만 하면 알아볼 수밖에 없을, 그의 소꿉친구.

  지금껏 소년의 무대, 무대의 형태를 띤 경기 중 9할은 봐왔던 소꿉친구는 이번에도 객석에 있을 터였다. 매일 같이 등하교하는 친구 사이로서, 소년의 스케줄을 훤히 꿰고 있는 주변인으로서 그의 경기를 모른 체 넘어갈 리 없으니. 분명 어딘가에는 소년 또래의 소녀가 미소를 걸친 얼굴로 앉아있을 것이다. 승리를 기원하며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년의 짧은 생에서 부모를 제외하고 그에게 가장 호의적이었던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소녀였다. 승리한다면 믿고 있었다며 안아줄 것이고, 패하더라도 응원의 말을 건넬 게 뻔하다.

  그럼에도 소년은 소녀를 의식할 때마다 가슴이 마구 뛴다. 수백 명의 관객보다 소녀 한 명이 안기는 긴장이 훨씬 컸다. 소년에게 그녀가 지켜보는 무대에 선다는 건, 반드시 최상의 무대를 꾸며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관객 모두가 용납하더라도 소녀가 바라는 것에 조금이라도 어긋나선 안 된다 소년은 객석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는 대신 상대 선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소년이 어떤 생각으로 제 앞에 섰을지 상상도 못 할 상대 선수는 그에게 온화하게 웃어주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소년은 모두의 기대대로, 능숙한 엔터테이너로 바뀐다. 긴장은 걷히고 얼굴엔 명랑한 웃음이 걸리며, 움직임 하나하나가 환호를 이끌어낸다. 소년이 불러내는 동물 극단이 승부의 무대를 유쾌한 서커스로 만든 덕에 모두가 긴장보다 기대를 안고 선수들을 지켜보았다. 물론 소년은 승부도 놓치지 않는다. 소년의 무대를 상징하는 동물 극단은 화려하게 재주를 넘으며 상대 선수의 몬스터를 무너뜨린다. 객석에서 <공연>을 즐기는 사이, 소년은 승기를 잡았다.

  이제 두어 번의 턴만 돌아오면, 끝난다. 함성 속에서 소년은 다음 패를 계산했다. 미리 깔아둔 함정으로 상대 몬스터의 공격을 막은 후, 몬스터 효과로 공격력을 증폭시켜 상대 선수를 직접 공격하면. 생각을 끊은 것은 상대 선수였다. 웃음 띤 얼굴로 경기를 시작했던 그는 승부의 추가 기울자 여유를 잃은 모양이었다. 굳어진 얼굴에서 언뜻 분노가 비쳐, 소년은 긴장했다. 다음 순간 무대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상대 선수가 지휘하듯 손짓하자마자 필드에 남아있던 몬스터가 소년의 동물 극단에로 돌진했다.

  찢어버려! 날카로운 목소리가 머리를 울리더니 이내 객석에서 비명이 터졌다. 몬스터의 무시무시한 발톱이 소년이 소환한 동물의 배를 찢은 것이다. 그렇게 하나가 빛으로 허물어지자, 다음번 몬스터는 동물 단원의 팔을 뜯어버린다. 서커스를 연상시키던 무대는 단숨에 끔찍한 결투로 바뀌었다. 그런 어린애 장난 같은 짓 그만두고, 제대로 맞서! 엔터메랍시고 쇼를 하는 거 같잖으니까. 상대의 악에 받친 외침에 소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승리는 소년에게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는데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경기에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객석에서 눈을 빛내며 박수를 치던 아이들이 하나둘 울음을 터트렸다. 부모의 시선에도 걱정이 깃든다. 무대에서 보여줘선 안 될 것이 자꾸만 펼쳐져서이리라. 소년이 방어에 치중하는 사이, 상대의 몬스터는 필드마저 무너뜨린다. 환상으로 쌓아올린 도시가 포탄에 부서지는 광경은 즐거움 대신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소년도 그쯤 되니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다. 승부를 내지 않으면 꼭 전장 같은 끔찍한 풍경만을 관객에게 보여주게 된다.

  어떤 경우에서도 이런 싸움, 관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소년이 가장 의식하는 관객, 소녀에게라면 특히 더. 계산은 빨랐다. 소년은 계획한 대로 함정을 발동시켰고, 상대의 몬스터를 파괴했다. 무대에서 날뛰던 몬스터가 부서지는 걸 무심히 바라보며, 소년은 다시 자신의 동물 극단을 지휘한다. 이것 봐. 점잖은 척 하더니 나랑 똑같잖아! 상대의 낄낄거림이 머리를 친다. 이런 거 너도 익숙하잖아. 똑같은 괴물이 되자고. 마지막 말은 환청으로 울렸다.

  질 낮은 도발임을 알면서도 속이 울렁거렸다. 과거 무대에서 저도 모르게 누군가를 짓밟은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경기를 끝내지 않으면. 이 경기에 먹히고 만다. 소년을 지배하는 생각은 그것뿐. 소년은 빠르게 몬스터를 불러내고, 공격을 지시했다. 방어에서 공격으로 방향을 바꾸자마자 주도권은 소년에게로 넘어간다. 기세 좋게 돌진하던 상대 몬스터가 차례로 파괴되며, 이내 상대는 방어벽을 잃었다.

  이제 아무런 방패도 없는 적을 그대로 공격하기만 하면 소년이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던 때. 거친 외침이 무대에 꽂혔다. 빨리 끝장내! 누군가 그렇게 외치자 객석 군데군데에서 비슷한 말이 터져 나왔다. 어서 공격하고 이겨! 어차피 이기러 온 거잖아! 조급하게 쏟아내는 말을 외면하고 상대만을 바라보는 소년을, 얼굴 없는 목소리가 흔들었다.

  아비처럼 도망치지 말고, 부숴서 이겨야지!

  거기서 사고가 정지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소년이 본 것은 무대에 쓰러진 상대 선수였다. ‘어떻게승부를 낸 것인지 기억은 비어있는데 이미 모든 것이 끝나있었다. 함성이 쏟아지고 박수가 터지는 걸 보니 나쁘게 끝내진 않은 것 같다. 불분명한 기억을 헤집는 대신 관객에게 공손하게 인사한 소년은, 객석에서 아는 얼굴을 찾기로 한다. 승리를 지켜보았을 사람. 어떤 관객보다도 소년에게 호의적인 소꿉친구. 단정한 얼굴을, 상냥한 푸른 눈을 찾아 소년은 객석을 훑는다. 예상대로 중앙 자리에서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때, 유즈?

  소년은 소리 없이 물었고, 답은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말보다 훨씬 강력한 수단으로. 소년이 선 자리를 중심으로, 무대에 꽃이 번졌다. 순식간에 퍼져나간 꽃이 무대를 넘어 객석으로 향하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언젠가부터 세상에 발생한 이상현상이 대개 꽃이 번지는 것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우르르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광경을, 소년은 무대에 선 채 눈에 담았다. 사람이 가득 들어찼던 경기장에 남은 것은 시야를 가득 메우는 꽃과, 오늘 경기의 주인공 둘. 그리고 객석에 남은 단 한 명의 관객.

  소녀는 소년을 보고 웃어주었지만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는 끝없이 꽃이 번지고 있다. 이상현상의 근원, 재앙의 시작은 바로 저쪽, 소녀에서부터였으리라. 그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 소녀가 바라는 무대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소녀는 평가자로서, 이번 경기를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

  아. 실패했구나.

  현실을 자각하자마자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 소년은 그 자리에 무너졌다.

 

*

 

  소년이 살아가는 세계는 동화 속 세상처럼 평화로웠다. 역사에 기록된 불행, 전쟁이나 억압 같은 비극도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행복했으며 때로 눈물짓더라도 곧 삶에서 희망을 찾아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세계가 하마터면 완전히 파멸할 뻔했다는 것은 극소수만 아는 사실. 소년은 세계의 진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한때 세계의 존망이 그에게 달려있었기에 그랬다.

  세계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과거를 한참 거슬러올라야 한다. 소년이 태어나기도 전, 지금 4개 구획으로 나뉘었던 세계가 하나였던 때. 그 시대에, 인간의 욕망을 그림자 삼아 나타난 악마가 있었다. 악마의 등장과 함께 세상은 어둠에 잠겼다. 문명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휩쓸리며 절망만이 그득했던 어느 날. 세계가 파멸하기 직전에, 한 인간이 악마 앞에 섰다. 평범한 인간이었던 그는 자연의 힘을 빌려 악마를 넷으로 찢고 세계를 재구성했다.

  다음은 악마의 조각이 다시 힘을 얻지 않도록, 세계를 넷으로 나눠 각 조각들을 하나씩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 그 역시 넷으로 나뉘어 악마의 조각 곁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악마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는지, 세계의 운명에 관여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악마의 조각이 평범한 소년들로 성장했듯, 구원자의 분신도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것만이 분명했다. 4갈래로 나뉜 각각의 세상에서, 소녀의 모습으로.

  문제는 악마였던 소년들과 구원자였던 소녀들이 딱 열네 살이 되었을 때 발생했다. 침략전쟁을 비롯해 인간의 욕망 때문에 시작된 폭력이, 오래 전 잠들었던 악마의 본성을 깨우기 시작했다. 악마의 분신들은 결국 하나로 뭉쳐 과거의 악마를 세상에 불러냈고, 세상은 또다시 파멸의 위기에 몰렸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나타난 것이 바로, 악마의 부활을 감지한 구원자였다. 네 명의 분신을 제물 삼아 나타난 구원자는 또다시 자연의 힘으로 악마를 정화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는 그때 얻은 것이다. 악마의 등장이니 세계의 파멸이니, 너무 무거운 재앙을 굳이 세상에 알리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할 뿐. 소년에게는 특히나 더, 진실을 떠들고 다닐 이유가 없다. 세상을 파멸시킬 뻔한 악마의 분신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년에게 언제나 호의적이었던 소꿉친구는 구원자의 분신이었다. 악마였던 소년과 구원자였던 소녀가 함께 다니는 광경은, 평화의 배경을 아는 이에겐 꽤 기묘한 풍경이리라.

  물론 세상의 혼란은 전부 해결되었다. 악마의 본질은 소년에게서 떠났고, 악마의 양분이 되었던 사악한 욕망은 이제 웬만해선 비치지 않는다. 어렵게 얻은 평화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소년이 노력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프로 자격 취득 후 엔터테이너로서 무대에 오르길 고집하는 것도, 단순히 어렸을 때부터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세상을 파멸시킬 수도 있었던 불씨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분명, 소년은 악마가 걷힌 후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왔다. 위험이 완전히 사라졌으므로 다시 폭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녀는? 구원자였던 소녀는? 그녀 또한 평범하게 귀환했던가?

  소녀가 관람한 경기가 끔찍하게 마무리된 지 며칠 만에, 소년은 소꿉친구의 귀환을 곱씹었다. 구원자의 부활에 동원되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았던 소녀는 기적적으로 돌아와, 그의 일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 후 표면적으로, 두 사람의 삶엔 어떤 문제도 없다. 그럼 좀 더 깊게 파고든다면?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하나하나 따진다면? 히이라기 유즈는. 소년은 노트를 펴고 소꿉친구의 이름을 적는다. 다음은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을 옮기는 것이었다.

  「히이라기 유즈는 인간이 아니다.

  소년은 자신이 쓴 문장을 속으로 읽어보았다. 상황을 냉정하게 보기 위해서 쓴 문장이지만 너무도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소꿉친구가, 누가 봐도 평범한 여자아이가 인간이 아니다. 동시에 세상에 가끔 발생하는 이상현상의 근원이기도 하다. 소녀 본인은 확실하게 말해준 적이 없으나 여러 정황을 볼 때 거의 확실한 사실이었다. 소년은 소꿉친구이자, 자신을 악마에게서 구해준 소녀가 인간이라기보다 현상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증거는 세상 곳곳에서 발생하는 이상현상 언젠가부터 자연의 힘이 폭주한다고밖에 볼 수 없는 일이 간간이 일어났다. 첫 번째 유형은 이번에 소년의 경기에서 생긴 일처럼, 갑자기 꽃이 피어나며 공간을 아예 꽃으로 덮어버리는 경우. 소년의 주변에선 가장 자주 일어나는 이상현상이기도 했다. 두 번째는 거센 바람이 불어와 그곳의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경우였다. 태풍과 비슷하지만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세 번째 유형은 해가 뜨지 않는 날이 얼마간 지속되는 경우. 한 번 발생했다 하면 사람들이 기댈 빛이라곤 달빛밖에 없었다. 사람 외 여러 동식물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꽤 골치 아픈 현상이었다. 마지막 유형은 새 떼가 나타나 피해 지역을 뒤덮는 것. 역시나 피해가 막심했고 일단 발생했다 하면 주변 생태계 균형도 깨어졌기에 사람들은 그런 날이 오지 않기만을 바라야 했다.

  첫 번째를 제외하면 전부 소년의 주변보단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으나, 소식을 들을 때면 소년은 초조해졌다. 하나가 일어나면 곧 나머지 셋도 차례로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하나 더 그를 긴장시키는 것은 이상현상의 발생을 예견할 수 있을 징조가, 꼭 그의 주변에서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소년은 경험적으로 안다. 소녀가 감정적으로 흔들리면 이상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을.

  [유우야, 너는 히이라기 유즈가 인간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

  언젠가 소년의 지인은, 세계의 진실을 아는 사내는 소년에게 물었다. 굳은 얼굴과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소년은 그가 흘리는 의문이 심상찮은 이야기임을 알아차렸다.

  [무슨 뜻이야?]

  [히이라기 유즈가 귀환한 후, 건강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검진을 받게 했다. 거기까진 너도 들었겠지.]

  [문제가, 있었어?]

  [대부분의 검사에서 인간에겐 불가능한 수치가 나오더군.]

  [검사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한 가닥 희망을 안고 들먹인 가능성에 사내는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온갖 의료기관에 검사를 의뢰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같았어. 딱딱한 말은 냉랭한 진실을 알렸다. ‘그 일이후의 소녀가 전과 같을 수 없음을. 구원자로 각성했던 일을 계기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결국 소년은 소녀의 이질성을 반쯤 인정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가설을 천천히 늘어놓았다.

  [과거에 레이가 사용했던 네 장의 카드, 자연의 힘이 깃든 카드는 드래곤 사용자, 자크와 카드 사용자 모두를 무구한 존재로 되돌리는 카드로 알려졌지. 하지만 자연의 힘을 빌려오는 대가가 정말로 아이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을까? 진짜 대가는 인간을 자연 에너지화하는 것이었다면?]

  [설마.]

  [네 전생체였던 자크는 네 몸을 통해서 강림했다. 레이도 히이라기 유즈를 비롯한 네 명의 분신이 통합되며 부활한 건 맞지만 실체를 유지할 수 없었지. 자기와는 무관한 사람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자크를 물리칠 수밖에 없었어. 사실 레이는 과거 자연의 카드를 쓴 때 이미, 흘러가는 자연 그 자체가 된 거라면? 그 분신인 히이라기 유즈도 마찬가지라면?]

  [하지만 유즈는 돌아왔잖아.]

  [자연이 인간의 모습을 빌려 나타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 무엇보다 히이라기 유즈는 인간의 모습으로 살면서 인간의 자아를 형성했으니까. ‘네가 아는사람의 모습을 취할 순 있을 거다. 그렇지만 바탕까지 인간일까?]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은데, 유우야. 그 날 사내가 꺼낸 마지막 말에 소년은 끝내 답하지 않고 돌아왔다. 정확히는 답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사내가 의문을 던지기 전부터 이미 소녀는 그가 알던 <그 사람>은 아니었다. 외형도 어투도, 행동도, 좋아하는 것도. 소년이 기억하는 것은 모두 같은데도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이 있었다. , 그녀의 기억을 지닌 타인을 보는 것만 같은.

  소녀와 함께할수록 느끼고 있다. 소년과 소녀가 악마와 구원자가 되어 대치한 날 이후, 소녀가 변했다는 것을. 소년이 악마의 본질에서 벗어났다면 소녀는 구원자의 삶을 계승한 것 같았다.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꿰뚫어 보고, ‘인간의상식을 뛰어넘는 판단을 내린다. 인간의 약점엔 성자처럼 자비로운 한편, 폭력에 대해선 심판자처럼 냉랭한 것이 소녀였다. 그런 모습은 분명, 그 날 이전까진 없었던 면모였다.

  구원자가 되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거기에 소년은 벌써 몇 번이나 보았다. 소녀 근처에서 이상현상이 시작되는 것을. 가끔은 소녀와 별생각 없이 대화하다가 코를 찌르는 향내에 주변을 둘러보면 그들이 앉은 자리 가득 꽃이 피어있기도 했다. 슬픈 일이 생긴 소녀를 위로한 밤, 분명 초승달이었던 달이 보름달로 바뀐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한 번 그런 일이 있으면 얼마간은 보름달만 떴다. 먼 곳에선 해도 뜨지 않고 달 뜨는 밤만 지속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언젠가 소녀가 부당한 일을 겪어 화가 잔뜩 났을 때. 소년은 그녀가 방문했던 곳 근처에서 돌풍이 불었다고 전해 들었다. 소녀와 함께 공원에 있다 눈물짓는 소녀 앞에 새 떼가 끝없이 날아든 것을 보기도 했다. 어떤 것이건, 소녀가 강한 감정,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는 날에는 이상현상이 일어날 낌새가 보였다. 그리고 정말로, 세계에 이유 모를 현상이 발생했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히이라기 유즈는 인간이 아니다.

  소년은 꾹꾹 눌러 쓴 문장을 다시 읽어보았다. 어쩌면 정말로 소녀는 초월자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보단 자연 그 자체에 가까워진, 때문에 자연의 힘을 마음껏 끌어 쓸 수 있는 존재. 때로는 그 힘이 폭주하여 세상에 재난을 불러올 수도 있을 존재.

  그러나 소녀가 <무엇>인지는 소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이자 든든한 아군인 소녀와 함께할 수 있다면 설령 소녀가 괴물이라도 모른 체 넘어갔을 것이다. 초월자라면 초월자인 것이고, 사실은 자연의 힘을 일부 쓸 수 있게 된 인간이라고 하면 그렇게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혹 소녀가 자신의 이질성을 알아채고서 그걸 숨기려 한다면 소년은 얼마든 그녀를 도울 각오가 되어있었다.

  진짜 문제는 이상현상이 점점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 소년의 추측이 맞다면 그것은 소녀와 연결된 자연의 힘이 폭주하기 때문이고, 폭주의 원인을 찾자면 소녀가 계속 감정적으로 흔들리고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이상현상의 근원을 대강 눈치챈 날부터 소년의 머리를 지배하는 의문이 그것이었다. 최근 소녀를 뒤흔드는 것은 무엇일까. 왜 그녀는 평화 속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자주 흔들리는 것일까. 이상현상이 일어난 날, 소녀에게 일어났던 일을 소년은 하나씩 노트에 적어보았다. 사소한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몇몇 눈에 띄는 것들이 있었다. 소녀가 무척 속상해하며 꺼냈던 이야기.

  이 평화로운 세상에서도 사람을 상처 입히는 무리.

  상대 선수를 위험으로 몰아넣으면서 인기를 끄는 프로 선수.

  그리고 소년이 무대에 오른 때, 객석에서 슬그머니 던지는 야유. 소년이 아닌, 그를 괴롭혀온 과거를 들먹이며 소년을 깎아내리는 목소리 등.

  이 세상에서 아직도 고개를 들고 사람들을 좀먹는 폭력을, 소녀는 감당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폭력이야말로 사람의 약점을 파고들며 어두운 욕망을 자극하는 그림자 아니었던가. 실제로 사악한 욕망에 먹힐 뻔했던 소년이 할 수 있는 건 자신 같은 이가 없도록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길뿐이었다. 프로 선수로 무대에 올라, 엔터테이너에 걸맞은 무대를 꾸미고, 모두가 웃고 돌아가게 만드는 것. 그 과정에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는 것.

  소녀도 그런 것을 기대하고서 소년의 경기를 관람했을 텐데.

  정작 소년은 그런 무대를 보여주지 못했다. 상대의 도발과 객석의 부추김에 휘말려 상대를 완전히 짓밟고 말았다. 소녀가 앉은 자리에서부터 꽃이 피어나 순식간에 무대를 덮어버린 건, 그만큼 소녀가 상심이 컸기 때문이리라. 믿고 응원하던 사람이, 자신이 바라지 않는 무대를 선사했다는 것에. 소년은 제 나약함을 탓하며 노트를 덮었다. 소녀에게서 시작된 꽃은 경기장 밖까진 번지지 않았으나, 소년은 소녀를 실망시켰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렇잖아도 세상엔 소녀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데.

  소녀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소년은 그대로 집을 나섰다. 바로 근처에 있는 소녀의 집을 찾아가자, 소녀 대신 그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저씨의 트레이닝복에 붙은 온갖 색의 꽃잎을 보고서, 소년은 소꿉친구에게 일어난 일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짙게 풍기는 꽃향기와 바닥에 잔뜩 흩어진 꽃에서 소년은 불길한 예감이 사실이 되었음을 알았다. 유즈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있어서 말이야. 만나줄진 모르겠네. 언제나 기운이 넘치던 아저씨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하더니, 소년에게 쟁반을 건네주었다.

  “그래도 네가 왔다면 잠깐 얼굴은 보여줄지도 몰라. 과자랑 주스 가져가.”

  소년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쟁반을 든 채 소녀의 방 쪽으로 걸었다. 걷는 내내 소녀에 대한 걱정이 피어올랐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엔 정말로 마음이 많이 상한 것일까. 그래서 또 힘이 멋대로 나온 걸까. 방에 혼자 있는 것은 괴롭지 않을까. 어떻게 말해야 만날 수 있을까. 온갖 걱정을 해소할 길을 찾기도 전에, 소년의 걸음이 멈췄다. 익숙한 방문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방. 잠겨버린 곳.

  “화났어, 유즈?”

  굳게 닫힌 문 앞에 선 소년은 조심스레 물었다. 노크를 할 자신도 없었거니와 소녀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지도 않았기에, 소녀가 아무 반응도 없으면 인사만 건네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소년의 말이 떨어지자 안에서 기침 소리가 한두 번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침묵이 찾아들었다. 역시, 안 되는구나. 빠르게 체념한 소년이 돌아서려던 때.

  문이 열렸다.

  “……날 찾아온 게 유우야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소녀는 웃고 있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위태로워 보였다. 방의 구석에 틀어박혀 몸을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짐작대로, 소녀의 방은 완전히 꽃에 덮여 있었다. 꽃밭이나 정원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 공간만 어떤 전염병이 돌기라도 한 듯 꽃에 잠식되어있었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풍경에 소년의 혀가 굳어버렸을 때. 소녀는 느릿하게 덧붙였다.

  “참고로 화난 거 아냐.”

  “내 경기를 보러 왔을 때도 이랬잖아. 꽃을, 피웠었잖아. 그거, 유즈한테서 시작되었단 거 알아.”

  나한테 실망했던 거지? 소년은 소녀의 공간에 한 발짝도 들이지 못한 채 물었다. 문이 열렸다 해서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랬다. 한편으론 자신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소녀가 혹 울음을 터트리거나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떨치기 힘든 소년이었다.

  “유우야에겐 화나지 않았어. 실망한 것도 아니고.”

  “그럼 왜 힘들어했어?”

  쟁반을 문 앞에 내려놓은 소년이 물었다. 소년이 방에 들어가지 않았고 소녀도 구석에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둘 사이의 거리는 처음 문이 열렸을 때에서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소년은 그것이 꼭, 지금 그들의 심리적인 거리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할 뿐 상대를 제대로 돌아볼 수는 없는 거리. 누구도 쉽게 나아가서 상대를 살펴주지 못하는, ‘어려운상황.

  “유우야를 그렇게 몰아세우는 분위기가, 싫었을 뿐이야. 그래서…….”

  담아둔 말을 바로 토해내기 힘들었는지, 소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순간까지도 새롭게 피어오르는 꽃을 보자 소년은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소년은 방에 들어서, 소녀에게로 향했다. 걸을 때마다 발에 채는 꽃을 무심하게 밟아가면서. 소녀에게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표정도 선명해졌다. 멀리선 그저 웃음으로 보였던 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슬픔을 누르는 표정으로 비쳤다. 역시, 괴로웠던 것이다. 유즈. 마침내 숨이 닿는 거리까지 왔을 때, 소년은 몸을 숙여, 소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난 그 날 아무 일 없이 내려왔어. 그러니까.”

  “그걸로 끝이 아니었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단 말이야. 드디어 사카키 유우야도 엔터메 같은 포장을 벗어던졌다고.”

  있잖아, 세상이 평화로워지니까 사람들이 평화를 시시하게 여겨.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즐겁게 만드는 걸 지루해해. 소녀는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단정한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소년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근심이 없으니까 서로 다투고, 엔터메가 유행하니까 더 긴장시키는것을 찾지. 내 재미를 위해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고, 내가 더 가지려 상대의 것을 빼앗아.

  “이런 세상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 그런 생각에 불안해질 때마다 세상 곳곳에서 자연이 폭주해. 그렇게라도 사람들의 나쁜 마음을 덮어버리라는 것처럼.”

  “……그래서 계속 세상에 이상현상이 일어났구나.”

  “그 일들이 전부 날 중심으로 퍼진다는 건 알겠어. 아무래도 내가 힘을 쓰고 있나 봐. 하지만 그 힘을 내가 통제하는 건 불가능해. 꽃이 피는 것도, 해가 뜨지 않고 달만 비치는 것도, 돌풍이 부는 것도, 새 떼가 날아드는 것도! 통제하고 싶어 할수록 오히려 더 심해지기만 해.”

  가느다란 손가락이 소년의 뺨을 감쌌다. 소녀는 소년을 눈에 가득 담으며 속삭였다. 너도 그랬어?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제멋대로 날뛰었던 거야? 젖은 눈에서 소년은 여러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슬픔, 두려움. 그리고 연민. 소녀 본인이 아닌, 과거 타의에 휘둘렸던 소년에 대한 안쓰러움. 이런 때조차 소녀는 너무도 상냥하다. 자신의 고통보다 소년의 상처를 들여다보려 하고, 깨진 일상보다 세상의 혼란을 걱정한다.

  그럼에도 소년을 제외한 누구도 소녀의 그런 마음을 알지 못한다. 소녀가 놓인 상황을 짐작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었다. 그렇다면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이 그녀를 감싸줄 수밖에 없다. 소년은 힘주어 말했다.

  “방법이 있어. 유즈가 그런 일에 휘말리지 않게 할 방법.”

  “뭔데?”

  “간단해. 사람들이 나쁜 마음을 먹지 않도록 만드는 거야.”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소녀의 눈이 둥그레졌다. 어떻게 하려고? 라는 물음은 기대보단 걱정이 더 짙게 느껴졌으나, 소년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가장 정석적인 길로 가야지. 어쩌겠어.”

  엔터메. 내가 배워둔 길 말이야. 난 누가 뭐래도 내 길을 밀고 갈 자신 있거든. 정해둔 답을 읊자 소녀의 얼굴이 비로소 밝아졌다.

  “유우야답네.”

  마지막 말에 그림자는 비치지 않았다.

 

*

 

  소녀를 찾은 날 이후, 소년은 경기 일정을 가득가득 채워 넣었다. 무리할 정도로 끼워 넣은 경기는 소년에게 소녀를 돕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세상을 향한 시위이기도 했다. 그는 가능한 많은 무대에 올라,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가능한 자주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평화에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긴장 없는 경기로도 충분히 즐거워할 수 있음을. 타인을 쥐어짜는 게 잘 사는 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짓밟지 않고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소년이 언제나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지극히 소년다운 방식으로 전달해야만 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이상현상이 인간의 욕망 때문에 시작된 재앙임을 알려야 했다. 사람들이 어두운 욕망을 스스로 버릴 수 있도록. 그런 생각에서 소년은, 이상현상이 일어난 지역의 무대를 자주 찾았다. 피해 지역에서 초청받을 때마다 찾아가는 건 물론, 위로공연이란 이름으로 이벤트성 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피해 지역의 관객을 만날 때면 소년은 꼭, 그곳에 닥친 재앙이 인간이 낳은 위험임을 강조했다. 인간의 욕망이 자연을 해쳐 죄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불똥이 튄 것이라고. 그렇기에 사람은 폭력이나 탐욕에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여기에 닥친 불행이, 인간이 받아야 할 벌이라는 건가요?]

  어느 날, 피해 지역의 관객이 물었을 때 소년은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답했다.

  [어떤 의미론 그런 셈이죠.]

  다음 순간 무대에 날아든 것은 제법 날카로운 돌이었다. 남의 일에 깨끗한 척 하긴. 객석에서 터진 빈정거림을 듣지 못한 체 소년은 바로 경기를 시작했다. 그런 것에 멈칫해서야 소녀를, 사람들을, 세상을 재앙에서 구할 수 없다. 이대로 두었다간 어쩌면 또 다른 악마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인간의 욕망으로 무장하여 세계를 파멸시키는 존재가.

  소년이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면서까지 꾸역꾸역 경기에 참가하는 것도, 야유를 삼키며 사람들에게 욕망을 거두라고 요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과거의 재난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소년이 악마가 되기 전 세상엔 침략전쟁과 착취가 일어났다. 그렇게 인간의 어두운 욕망이 극대화된 바람에 악마는 손쉽게 부활할 수 있었다. 그 이전의 세계 또한 폭력에 대한 갈망으로 악마가 나타날 배경을 만들어주었다. 세계의 진실을 모르는 사람에겐 소년의 메시지가 허무맹랑한 예언으로 느껴질지 몰라도, 소년은 혹시 일어날지 모를 재난을 계속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소년은 사명감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었다. 세상의 존망을 결정지을 뻔했던 자로서, 소녀를 돕기로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신념을 꺾어본 적이 없는 인간으로서. 문제를 해결하고서 세상의 오점을 지우겠다는 생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 투철한 사명감이 독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소년의 경기는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부담을 가득 안고 무대에 올랐다 상대방의 도발에 휘말리거나, 실수로 상대를 다치게 하는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 환호를 얻는 일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관객이 자극적인 무대를 바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무대가 점점 더 경직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무대만을 짜다 보니, 목적이 뚜렷한 무대만을 짜다 보니 나날이 빤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개도 결과도 뻔히 보이는 무대를 사람들은 조금씩 외면했고, 소년은 야유에 익숙해졌다. 그럴수록 상대 선수는 소년을 몰아세웠다. 찍어누르려는 의도가 선명한 전술이었다. 피하려 들면 패했고, 이기려 들면 상대와 다를 것 없는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승리해도 패해도 씁쓸한 무대가 반복되던 어느 날, 소년이 선 무대에 꽃이 번졌다.

  소녀를 또 괴롭게 만든 것이다.

  다음번에도, 다음번에도. 소년의 무대에서 이상현상이 발생했다. 소년이 재앙을 이끌고 다니기라도 하는 것처럼. 경기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일부러 소년의 무대를 찾아 이상현상이 시작되는 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때문에 소년의 경기엔 관객이 그득그득 들어찼으나, 눈을 빛내며 응원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팔짱을 끼고 앉아 <문제>가 나타나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재앙의 단서를 취재하는 기자라도 되는 것처럼.

  무리한 일정에 슬슬 지쳐가던 소년이 두통을 참고 무대에 오른 날도 예외는 없었다. 경기장에 꾸역꾸역 밀려든 관객들은 처음부터 경기를 볼 생각 따위 없는 듯했다. 분명 뭔가가 있어. 꼭 사카키 유우야가 경기할 때 시작된다니까. 수군거리며 객석에 앉은 이들은 소년을 바라보는 대신, 의심 가득한 눈길로 경기장 곳곳을 훑었다. 소년이 선 무대, 자신이 앉은 자리, 그리고.

  “저기다!”

  저기서 시작했어! 어느 순간 객석에서 터져 나온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경기를 보러 온 게 아니라 재앙을 캐러 온 사람이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에 앉은 것은, 모두가 주목하는 사람은.

  “저 여자애라고?”

  “왠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 예전에 MCS에 나왔던 애 아냐?”

  사람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소년의 머리를 때렸다. 시선이 닿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 재앙의 근원으로 지목된 희생자가 누구인지. 그곳엔 소녀가 앉아있었다. 혹 야유가 터져도 소녀가 상심하지 않게 하려고, 경기는 보러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해두었는데. 그러니 이 자리엔 없어야 하는 사람인데. 왜 하필 이런 때 경기장을 찾았는지. 왜 지금 사람들이 소녀를 찾아낸 것인지.

  그리고 소녀는 왜, 체념한 듯 웃는 것인지.

  다음 순간에 일어날 일을 소년은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소녀에게 달려들 것이다. 그동안 일어났던 재앙을 들먹이며 소녀를 죄인으로 만들 것이다. 이상현상을 겪으며 쌓여온 분노를 소녀 한 명에게 쏟아내고서, 그녀를 치우려 하리라. 소녀가 이유를 밝히건 그렇지 않건, 모두가 손쉽게 미워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소녀를 구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소년은 빠르게 판단을 마치고 입을 뗐다.

  “여러분, 저를 봐주세요! 이렇게 사실이 밝혀진 이상 고백해야만 하는 게 있습니다.”

  큰소리로 외치자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호기심과 의심이 한데 얽힌 시선이라. 사람들을 속이기 딱 좋은 판이었다. 소년은 손뼉을 쳐 다시 시선을 모으고서 말을 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제가 엔터메를 내세우며 무대를 꾸민 것엔 불순한 목적이 있었답니다. 그럴듯한 포장으로 제 본질을 속이고 싶었던 거예요. , 바탕만 따지면 전 지금 세상의 어느 듀얼리스트보다 더 추잡한 인간일 겁니다.”

  그렇게 운을 뗀 소년은 자못 진지한 어투로 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제 본성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절 꺼렸어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을 짓밟는 걸 즐겼으니까요. 그렇게 짓밟고 또 짓밟다 보니 결국 세상의 분노를 샀죠. 벌을 받게 된 겁니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망설이는 듯 띄엄띄엄 흘리는 말에 사람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였던 과거를 재료 삼아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엔터테이너로서의 연기력 덕분인지 다들 쉽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왜 제 경기마다 재난 같은 일이 일어났겠어요?”

  “그럼, 저 여자애는? 같은 편이었나?”

  이미 시작된 거짓말에 살을 붙이는 것이야 어렵지도 않다. 객석에서 날아든 물음에 소년은 바로 말을 만들어낸다.

  “, 이런 이야기엔 꼭 심판자가 등장하잖아요? 사카키 유우야를 벌하러 온 게 바로 저쪽이었던 거죠. 요즘 일어나는 심상찮은 일을 두고 자연을 해친 벌을 받는다 운운한 건 저 사람이 저에게 내릴 벌이 딱 그거여서였어요. 폭주한 자연에게 그대로 휩쓸려 죽는 거 말이에요. 혼자 휩쓸리기 싫어 그동안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려왔죠.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건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자연이 노한 것이니 욕망을 버려야 한다! 이제 고백하지만 전부 속여왔던 겁니다.”

  세상 사람들 전부를 말이지요. 마지막 말을 흘릴 때 소년은 들뜬 마음을 누르려 노력해야 했다. 사람들의 눈에 경멸이 깃드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일이 바람대로 풀릴 모양이었다. 소녀 대신 모든 걸 끌어안는 것. 그것으로 재앙을 덮어버리는 것.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이 일은 전부 나한테서 소년의 계획을 알아챈 소녀가 필사적으로 소리쳤으나, 객석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온 날 선 비난에 묻혔다. 사람들의 시선도 소녀에게서 떠난 지 오래였다. 유우야. 제발, 내가 사람들을 설득할 기회를 줘. 소년에게 향한 외침도 무대까진 닿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라기보다 원망할 대상이었으므로, 순순히 를 고백한 소년은 바로 사람들의 타깃이 되었다. 객석에 있던 이들은 우르르 무대에 올라가 소년을 붙잡았다. 여러 사람에게 붙들려 내려오며, 소년은 잠깐 객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은 소녀에게, 조금 전 그녀가 지었던 표정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었다. 체념을 띤 웃음. 텅 빈 웃음.

  경기장에서 끌려나가는 순간 소년은 언뜻, 소녀의 비명을 들은 것 같았다.

 

*

 

  소년의 처분은 빠르게 정해졌다. 다수를 고통받게 한 이상현상의 근원으로서, 또 타인을 현혹시키며 자신의 죄를 가리려 한 사람으로서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재판이랄 것도 없이 여론만으로 결정된 처분이었다. 소년으로선 변호할 기회가 아예 주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 덕에 소년은 새로 죄를 꾸며낼 이유가 없었고, 사람들의 시선이 소녀에게로 향할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대로 모두의 원망을 안고 침몰하면 그만이었다. 격리 장소로 이송되는 동안, 소년은 날아드는 야유에도 자꾸 웃음이 나왔다.

  격리 기간은 수년이었던가 그보다 더 길었던가. 제대로 듣지 않은 소년은 알 길이 없다. 이 일로 모두가 평화를 얻는다는 사실이 더없이 만족스러울 뿐이었다. 소녀는 더는 의심을 사지 않는다. 이제, 평범한 십대 소녀에게 어떤 힘이 숨겨져 있는지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재앙의 근원>을 격리시켰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심리적인 여유를 얻을 것이다. 어쩌면 재앙에서 벗어났다 생각하고서 특별한 사건 없이 흘러가는 나날에 감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년은. 짓지 않은 죄를 안게 되었다지만 그렇게 나쁠 것도 없다. 세상을 평화롭게 만든 것으로, 모두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소망이 일부 이뤄진 셈이니까. 앞으로 조금 외로울 거란 생각이 들 뿐. 그가 격리된 곳은 우리를 연상시키는 좁은 공간이었고 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엔 절대 혼자서 나갈 수 없을, 험난한 자연이 펼쳐져 있었다. 사실상 감옥에 갇힌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것도 혼자. 외부로부터의 모든 것이 끊긴 채.

  디스크에 통신 불가 표시가 뜨는 것을 확인한 소년이 좁은 벽에 기대어 미래를 생각할 때였다. 희미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를 이곳에 데려온 사람도, 식량을 가져다주는 사람도 전부 떠났는데도. 이곳은 버려진 지 오래인 곳이라 주민도 없다고 들었는데도. 수상쩍은 소리를 외면하려던 소년은, 단단히 잠긴 문이 스르륵 열리는 것을 보았다. 다음 순간 소년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이곳엔 없어야 할, 아늑한 집에서 평화를 누려야 할 사람.

  “, 여기 온 거야?”

  목소리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떨려 나왔다. 소년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어도 덤덤하게 묻진 못했으리라. 소년을 찾아와준 사람은 소꿉친구였으니.

  “‘어떻게라고 물어야 하지 않아?”

  장난스레 받아친 소녀는 열쇠를 흔들어 보인다. 이거, 아카바 레이지가 몰래 넘겨줬거든. 반신반의했는데 진짜 여기 열쇠가 맞았네. 소녀는 말을 이으며 소년에게로 다가섰다. 한 사람이 쓰기에 빠듯한 공간에 두 사람이 섰다. 이렇게까지 오지 않아도 되는데. 위로를 위해 온 거라면 얼굴만 보이고 돌아가도 되는데.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말을 꺼내는 대신, 소년은 간결한 물음을 던졌다.

  “아니. 내가 듣고 싶은 건 .”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이런 곳에 있으면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겠더라고. 그래서 나도, 세상을 위해 여기 들어가야겠다 싶었지. 바깥에서 또 이상현상이 일어나면 곤란하잖아? 위험을 여기다 가두는 거야.”

  “널 스스로 가두겠다고?”

  “네가 한 일을 나는 못 할 거라 생각해?”

  어차피 우리는 함께여야 해. 소녀는 소년을 눈에 가득 담으며 속삭였다. 누구한테서 재앙이 시작되건, 상대는 그걸 막아주잖아. 우리는 계속 그렇게 살았잖아.

  “그래도 유즈한텐 열쇠가 있으니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녀는 열쇠를 불길에 던졌다. 그녀를 다시 세상으로 내보내줄 유일한 수단은 그렇게 손을 떠났고.

  “재앙을 가뒀으니 이제 평화만이 남았어.”

  소녀의 얼굴에 그려지는 웃음을 보고서, 소년은 그들에게 놓인 결말을 직감했다. 소녀가 무엇을 각오하고 왔는지도. 아무래도 구원자는 이번마저 소년을 구해줄 모양이었다. 이미 모든 게 정해져 있다면, 받아들일 뿐. 소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가 팔을 벌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소년은 그대로 소녀의 품에 파고들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시야가 검게 물들자마자 새의 지저귐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향긋한 꽃향기가 둘만의 공간에 퍼졌다.

  비로소 낙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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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