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슌+레이] 침몰

2021. 4. 30. 21:34 from 01

 

  여자는 암흑 속에 홀로 앉아있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곳에 장치의 가동음만 간간이 울렸다. 그것은 그녀가 앉은 자리가 보드라운 풀밭도 은신처도 아니라 거대한 장치의 바닥이기 때문이리라. 심해가 어두컴컴하듯, 떨어진 생명을 놓아주는 법이 없는 이 장치도 너무도 깊어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여자가 움직이지 않고 앉은 것은 저를 인도할 빛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진 것도 아니다. 이곳이야말로 여자가 선택한 종착점, 그녀의 무덤이어서였다.

  초월적 존재인 여자는 인간의 몸을 빌려 세상에 강림했다. 세계를 위협하는 악마를 걷어내기 위함이었다. 인간의 욕망으로 탄생한 악마는 결국 여자가 두른 자연의 힘에 패했다. 여자가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구원자로 추앙받는 미래가 준비되었겠지만, 초월자인 그녀가 택할 길은 하나뿐이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 빌려온 육신을 벗고 환상이었던 양 사라지는 것. 여자는 세상에 평화를 선물하고는 자신이 강림했다는 흔적조차 지울 생각이었다. 그 말끔한 종말은 이곳에서 실현될 터였다. 그녀가 고른 무덤에서.

  악마를 물리쳐 세상을 구한 여자가 사람들의 기억에 남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가 한때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었던 시절, 세상에 광풍이 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악마가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모든 생명이 꺼지기 직전, 여자는 욕망을 정화하는 자연에너지로 무장해 악마에 맞설 심판자가 되었다. 인간의 욕망에 대조되는 자연의 힘을 두른 이상, 그 사용자도 인간일 수 없었다. 그 날 여자는 인간의 삶을 잃고, 초월자가 되었다.

  여자가 두른 힘은 악마를 날려버리고 세상을 재구성했으나, 인간은 모두를 구한 심판자를 기억할 수 없었다.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초월자를, 모두의 머리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단절된 과거가 된 여자는 이 세상에서 자리를 차지해선 안 된다. 이미 한 번 그녀를 <인간으로> 되돌리려는 사람이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과거 악마를 물리칠 때 여자는 악마가 다시 힘을 얻을 것을 우려해 세상을 네 개의 차원으로 나누고 각 차원에 악마의 파편을 던졌다. 다음은 자신의 분신을 네 차원에 흩어버리는 일이었다. ‘인간이었을 때의모습을 덮어씌워서, 인간의 틈에서 살아가도록. 그것은 생에 대한 여자의 뒤늦은 집착이 아니라, 일종의 보험이었다. 각 분신에게 자연의 힘을 안기고, 인간의 모습을 덮어쓴 채 악마의 분신을 통제하게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몸으로 살아갈 악마의 파편들이 다시 뭉치는 일이 없도록.

  최악의 경우, 네 명의 분신을 매개로 본체인 그녀가 세상에 내려오도록.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여자가 심판자가 되었던 날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녀를 지웠는데, 어느 날 단 한 사람이 그녀를 떠올려낸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여자의 아비이기도 했던 그는 그 날부터 <이전 세계>에 집착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그 시절 그대로 되돌리면 세상을 위해 몸을 바친 딸도 돌아오리란 망상에 빠진 탓이다. 그렇게 그는 세계를 파멸시키기 시작했다. 폐쇄적인 차원 하나를 거점 삼아 군대를 키우고, 다른 차원을 침략하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그는 빠르게 죄를 쌓았다. 타인을 짓밟는 침략자의 등장은 부활의 때만을 기다리던 악마를 자극했다.

  마침내 침략군의 거점에서 악마는 부활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틈에서 살아온, 자신들의 운명도 몰랐던 파편들을 제물로. 그 순간 여자는 운명을 정했다. 세상의 파멸을 관망하지 않고, 심판자로서 나서기로. 네 명의 분신을 삼키고, 그들에게 나눠주었던 자연의 힘을 돌려받은 여자는 세상을 다시 구해냈다. 세계의 혼란을 바로잡고서 여자는 결심했다. 이번에야말로 인간의 기억에 남지 않겠다고.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앞으로는 인간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겠다고.

  ‘기억하는 이때문에 파멸할 뻔한 세상을 보았으니 이번엔 같은 비극이 반복되게 해선 안 된다. 여자는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심판자>를 잘라냈다. 평범한 소녀처럼 살아온 분신들의 주변인에게서 그들의 기억을 지워내는 것도, 조금 더 손이 가긴 했으나 전부 마쳤다. 이제 암흑 속에서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그녀가 택한 무덤은, 이 차가운 장치의 본래 목적은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것. 모든 것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 인간의 모습을 덮어썼을 뿐인 여자가 이곳에 머물면 곧, 빌려온 육신도 흩어질 것이다. 이것은 아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결말이기도 하다.

  여자의 아비는, 침략군을 키워낸 남자는 전쟁으로 희생시킨 이차원 사람들을 이곳에 던져넣었다고 한다. 희생자의 영혼은 종잇조각에 가두고 생명력만 긁어내어 여자를 부활시킬 에너지로 쓰려 했다는 것이 아비의 이야기. 초월자를 인간으로 다시 탄생시킨다니, 처음부터 실패할 계획을 위해 한 차원 단위 사람을 동력원으로 삼은 것인가. 거기에 악마를 막으려 세상에 보냈던 분신 넷까지 딸의 조각을 통합시키겠다며 이 장치에서 짓이기려 했다고 들었다.

  한 인간이 벌인 일이 너무도 끔찍했기에 여자는 인간에 대한 기대를 잃었다. 한때 존경받는 기술자였던 아비가 얼마나 극적으로 타락했던가. 딸의 선택을 믿지 않고, 딸이 구한 세계를 파멸에 몰아넣다 악마까지 부활시켰다니. 욕망에 찌든 아비에게서 여자는 과거의 유능한 기술자 대신, 악마의 충직한 지원군을 보았다. 하필 이 장치를 <무덤>으로 택한 것은 타락한 아비에 대한 냉소이기도 했다. 이곳은 그가 설계한 장치였으므로.

  여자는 아비가 만든 요람에서 아비를 완전히 떠날 것이다. 아비로 대표되는 인간은, 다시는 그녀란 초월자를 만날 수 없으리라. 인간의 모습을 벗는 순간부터 초월자의 좌에서 내려오지 않기로, 이미 결심했으니.

  암흑 속에서 여자는 천천히, 인간에게 희망을 품었던 때를 추억한다. 초월자가 되기 직전, 인류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아비 대신 악마에 맞서야겠다고 생각한 때. 분신의 눈을 빌려 본 세상이 한동안 평화로웠던 때. 악마의 조각이었던 소년이 사악한 충동을 누르며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겠다 결심하는 걸 목격한 때. 그리고 바로 그 소년이 침략군을 설득해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게 했던 때 그런 순간도 있었음을 추억해주는 건 초월자로서의 마지막 자비였다. 이제는 돌아보지 않을 인간을, 아름답게 기억하기로 하는 것이니.

  아마 여자가 마지막 희망을 꺼낼 즈음엔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것이다. 반복적으로 울리던 가동음이 점점 잦아드는 것으로, 장치가 서서히 둔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동이 느려진단 것은 작업이 거의 끝나간다는 뜻. 여자의 원래 모습, 초월자의 모습에 조금씩 가까워진다는 것. 여자의 몸이 자꾸 가벼워지는 것도, 빌려온 육신이 서서히 흩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초월자에겐 불필요한 형체도, 이젠 너무도 낯선 인간의 몸도 완전히.

  거기서 생각이 멎었다. 장치의 가동음마저 희미해진 곳에, 여자만이 머무는 <무덤>에 갑자기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 것이다. 생명을 빼앗길 뻔했던 희생자는 전부 원래 위치로 돌려보냈다. 침략자의 끔찍한 유산을 굳이 시험하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무언가 닿을 리가 없을 텐데.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자는 암흑 속에서 빛을 피워냈다. 이 무시무시한 장치에 떨어진 것은 무엇일까. 생명이든 사물이든 제자리로 돌려보내야겠단 생각으로 주변을 살피던 여자는,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굳어졌다.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것은, 사람. 인간이었던 때의 여자와 거의 비슷한 나이의 청년. 그녀의 종말을 방해한 자는 하필 그녀와 진득하게 얽혔던 남자였다.

 

*

 

  진득하게 얽혔다는 말에는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청년을 너무도 잘 알았지만, 청년은 그녀와 제대로 마주한 일도 없었으니. 냉정하게 판단하면 청년은 그저, 본의 아니게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을 뿐이었다. 삶 대부분을, 운명처럼 여자에게 바치며. 작은 아이가 청년이 되기까지의 십수 년. 청년이 여자와 얽힌 긴 시간을, 여자는 초월자가 아닌 인간의 눈을 빌려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세상에서 분신들을 거두어가기 전, 악마가 부활하기 전까지. 여자가 관찰한 청년은 누이를 사랑하여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지키려 드는 오빠였다.

  청년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오빠의 모습인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여자가 동생의 눈으로 줄곧 청년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네 개의 차원에 흩어진 네 명의 분신, 그 중 하나가 청년의 누이였다. 분신의 삶은 그녀에게도 전해지므로 여자는 오빠인청년을 오래도록 지켜본 것이 된다. 물론 평범한 인간인 청년이, 누이가 초월자의 분신이었음을 알 리가 없다. 그는 동생과 함께하는 내내 동생을 사랑했을 뿐, 동생의 뒤에 선 여자를 보지 못했다. 여자가 나타나며 누이를 잃게 된 그는 왜 동생이 세상에서 사라졌는지도 모를 것이다.

  가여운 남자. 다시는 피어오르지 않을 줄 알았던 연민이 여자의 머리를 짧게 스쳤다. 그나마 모두의 기억을 지운 것이 다행이었다. 누이에 대한 기억이 삭제된 청년이라면 남은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잃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 없이. 여자는 쓰러진 청년에게로 조심스레 다가섰다. 깊은 바닥에 그대로 떨어진 탓인지, 청년은 추락한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없었다.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하는데. 인간이 이곳에 계속 있다간 자아를 잃고 흩어질 텐데. 걱정이 든 여자가 청년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청년이 힘겹게 눈을 떴다. 맹금을 연상시키는 금빛 눈과 마주한 순간 여자는 속에서 튀어나올 뻔한 호칭을 삼켜야만 했다. 한때 그녀의 분신이 그를 불렀던 이름, 지금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할 호칭을. 그는 그녀를모르고, ‘그녀는그가 만나려는 사람이 아니다.

  여자가 할 일은 청년이 잊어야 할 사람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이곳에서 탈출시키는 것. 보통의 인간이라면 모를까, 초월자인 그녀에게 불운한 남자 하나쯤 바깥으로 보내주는 것은 어렵지도 않다. 다만 그 전에, 추락의 여파로 다쳤을 청년을 치료해주어야 한다. 여자는 가만히 몸을 숙여, 청년의 뺨을 어루만졌다. 초월자의 손길이 닿았으니 치명상만 아니라면 곧 회복하리라. 이미 많은 것을 잃은 인간에게 이 정도의 자비는 베풀어도 될 것이다.

  과연, 여자의 손이 닿은 지 오래지 않아 고통으로 일그러진 청년의 표정이 펴졌다. 핼쑥한 얼굴에도 핏기가 도는 것 같다. 어때, 몸이 편해졌어? 당신이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줄까? 초월자의 상냥한 말에 청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굳게 닫혀있던 입술도 열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공간을 울린 것은 감사 인사도, 여자의 물음에 대한 답도 아니었다.

  “찾아서, 왔어.”

  엉뚱한 말이었다. 동시에 불완전한 답이기도 했다. 무엇을, 하고 묻기도 전에 청년은 몽롱한 얼굴로 빠진 부분을 채워주었다. 루리. 소리를 내는 대신 입모양으로 그린 이름을, 여자는 분명히 보았다. 그 이름을 확인한 순간 여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서 지워진 이름을, 그는 어떻게.

  그것은 사라진 사람의 이름이었다. 여자의 분신이자, 청년의 누이였던 소녀의 것. 세상을 두 번째로 구한 날 여자는 저와 연관된 기억을 전부 지웠으니, 분신에 대한 기억도 세상에 남아있어선 안 되었다. 분명히 그럴 터인데. 누이와 너무 깊게 얽혀서일까, 청년은 누이의 이름을 여자 앞에서 흘렸다. 동생의 이름을 입모양으로만 그린 것이나 이름을 흘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면 청년도 확신은 없는 듯했으나, <없는 사람>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청년의 삶에서 큰 위치를 차지한 누이는, 세상에서 지워지고도 오빠에게 잔상을 남긴 모양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여자는 청년의 이전 말도 신경이 쓰였다. 누이를 언급한 것과 찾아서 왔다는 말을 연결하면 청년이 이곳을 찾은 이유도 조금은 짐작이 갔다. 청년은 누이의 흔적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다. 침략군이 그의 누이를 내던진 곳이 바로 이곳. 그 가여운 소녀가 구원자의 제물이 되어 흩어진 것도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청년은 동생을 찾다 운 나쁘게 여기에 떨어진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분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판단하자면 청년은 단정한 인상과는 대조적으로 제법 무모한 데가 있었다. 누이를 구할 길을 찾으려 적군 수장의 아들이 이끄는 정예병에 들어간다거나. 일대 다 특화의 무기를 쥐었단 이유만으로 다수의 적에 단신으로 맞선다거나. 적군에게 납치된 동생을 구하려 성치 않은 몸으로 적진에 뛰어들기도 했다.

  전부, 소중한 사람을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얼마든 목숨을 던질 수 있다는 각오가 무모한 행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 청년이기에 여자는 한 가지 슬픈 가능성도 생각하게 된다. 누이의 흔적을 따라 헤매던 청년이 여기서 흔적이 완전히 끊어졌음을 눈치챘다면? 누이의 종말을 직감한 그가, 절망에 빠져 이 깊은 장치에 스스로 뛰어든 것이라면?

  그렇게라도 누이와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물론 답은 알 수 없다. 청년이 발을 헛디뎌 추락한 것인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던진 것인지. 확실한 것은 그가 여자의 무덤이 될 뻔한 곳에 떨어졌고, 그렇게 여자의 영역에 끼어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목적이 있으니까, 당장은 돌아갈 수 없겠지. 청년의 말에 여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 루리가 있다고 생각해?”

  “어쩌면.”

  “있다고 확신도 못 하는 사람을 왜 찾아야 하는데?”

  루리가 당신의 무엇이길래? 나긋한 물음에 청년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고를 뿐이었다. 침묵이 망설임보단 의문의 증거였음은, 한참이나 지나 흘러나온 답에서 알 수 있었다.

  “잘 모르겠어.”

  “루리를 찾아왔다면서, 왜 몰라?”

  집요한 질문에 청년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기억이, 제대로 안 나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혼란이 깃든 것을 여자는 바로 눈치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름을 아는 것과 그 이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 누이를 너무도 사랑했던 청년이 그 이름을 붙들고 있었을 수는 있으나, 지워진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기억해내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만일 청년이 누이의 이름과 그와의 연결고리를 자랑스레 설명했다면 여자는 자신의 힘을 의심해야 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서 구원자와 그 분신들의 기억을 지우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이니.

  “됐어. 나에게 꼭 설명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이제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자. 라고 말하려던 때, 청년이 여자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다시 만나고 싶었던 사람. 루리가 나에게 무엇이냐고, 물었었지.”

  기억은 뚜렷하지 않지만, 그건 분명해. 제법 다급하게 흘린 말에 여자는 미지근한 웃음을 걸쳤다. 저에게 동생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청년이 그렇게라도 누이의 이름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여자는 그에게서 누이의 그림자를 지워야 했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끌어안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도 세상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곳이 아닌, 모든 생물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이곳에서.

  “참고로 여기엔 당신이랑 나밖에 없어. 기다린다 한들 누군가 오지도 않을 거고. 여긴 꽤 고약한 장치여서 떨어진 생물을 죄다 천천히 녹여버리거든.”

  부러 냉정하게 말한 것은 동생에 대한 청년의 미련을 끊어, 그를 바깥으로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간절히 찾던 사람을 만날 수 없단 슬픔에 젖더라도, 앞으로 계속 그 상실을 곱씹더라도, 청년은 살아서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이곳에 머물다간 차차 자아를 잃다 마지막엔 육신마저 바스러질 테니.

  그렇게 먼지처럼 흩어지기엔 청년의 삶은 너무 불행했다. 그의 삶을 무너뜨린 것은, 침략. 여자의 아비가 일으킨 전쟁이 청년의 고향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 날 이후 어울려 살던 이들은 전쟁의 광풍에 휩쓸려 사라졌고, 친우는 악마를 부활시키는 제물이 되었다. 목숨을 던져서라도 구하고 싶었던 누이도 세상에서 지워졌으니, 극도의 불행 속에서 청년은 제 몸만 겨우 지킨 셈이다. 그런 사람이 이곳에서 흩어지게 둘 수는 없었다. 한때 인간을 믿었던 초월자로서, 본의 아니게 청년에게서 누이를 앗아간 자로서. 여자는 그에게 미래를 안길 의무가 있었다.

  당신이 밖으로 나가고 싶다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어. 어때? 여자는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택해야 할 답이야 정해져 있다 침략군에 맞서 끝까지 생존한 청년이라면,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불길에도 뛰어드는 무모함이 걸리긴 하나, 아무리 무모해도 기억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서까지 목숨을 바치진 않을 터였다.

  그런데 청년의 반응은 어쩐지 미적지근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여자를 바라보다가, 답은 하지 않고 저와는 관련 없는 것을 묻는 청년이었다. 뭐든 녹여버리는 곳이라면서. 당신은 나가지 않을 생각이야? 불필요한 질문이란 말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여자는 짤막하게 답했다.

  “난 여기를 떠나선 안 될 이유가 있어서 말이야.”

  “그럼 나도 여기 있어야겠어.”

  당신이 계속 있을 거라면 조금은 같이 있어도 되겠지. 무심한 어투엔 망설임은커녕 한 가닥 불안도 묻어있지 않았다. 여자의 경고도 제안도, 조금도 와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기서 여자가 느낀 것은 하나. 그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여자가 굳이 냉정하게 짚어준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체념인지 태평함인지 모를 태도는 초월자인 여자조차 당혹감에 빠트릴 정도였다.

  “이런 곳에선 얼마 못 버텨.”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을 아꼈던 사람들은?”

  당신이 결국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면? 그 사람들은 돌아오지도 못하는 자를 평생 기다리게 될 텐데? 쉼 없이 몰아치는 말을 방어하는 대신, 청년은 손을 들어 저 위쪽을 가리켰다. 이것 봐, 천장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지. 느릿하게 흘린 말에 여자의 시선은 청년의 손가락이 향한 쪽으로 옮겨갔다.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바닥이 너무 깊은 탓에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새삼 끔찍했다. 그런 곳이기에 이곳에 떨어진 이들은 전부, 제힘으로 나갈 수 없었을 텐데. 청년은 가벼운 목소리로 덧붙인다. 그런데 난 저 위에서 뛰어내렸거든.

  “사람이 이렇게나 깊은 곳에 뛰어내린다면, 둘 중 하나일 거야. 죽으려 했거나, 뛰어내리다 죽을지 모르지만 안으로 꼭 들어가야 했거나.”

  “……죽음을 각오하고 온 거니까, 상관없다고?”

  청년은 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정한 얼굴에 꼭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빈 웃음이 걸쳐져 있어 여자는 힘이 풀렸다. 아마도 그는 전부 버리고 왔으리라. 어쩌면 고통으로 얼룩진 삶을 중단하고 싶어서. 혹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를 찾아야 할 것 같아서.

  이런 사람이라면 어차피, 강제로 내보내도 바로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 것이다. 고통에 눌려 제대로 살지 못하거나, 찾아야 할 사람에 매여 살지 모른다. 청년을 강제로 내보내 그렇듯 방황하게 만드는 것보다야 고집을 꺾을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리는 게 나으리라. 빠르게 판단을 마친 여자는 이곳에서 종말을 맞으려던 계획을 조금 미루기로 했다. 일단 청년이 이곳에 있기로 선택한 이상, 그를 혼자 둘 수는 없었으므로.

  “그냥 천천히 죽어가는 게 아냐. 당신은 스스로를 잃게 될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마지막 책임감으로 건넨 경고에 청년은 건조하게 답했다.

  “어차피 지금도 나한테 남은 건 없어.”

  기억조차도.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선 청년은 그대로 <탐색>을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찾아야 할 대상도 모르면서 그저 막연하게 걸음을 옮기고 주변 풍경을 눈에 새기는 것이다. 미로를 헤매듯 위태로운 뒷모습을 보고서 여자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이곳은 그녀의 무덤이 되기 전, 그의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고.

 

*

 

  청년과 함께하면서 여자에겐 시시한 취미가 하나 생겼다. 청년의 옷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청년의 바짓단은 조금씩 바닥에 끌렸고, 그의 몸을 감싸던 코트는 갈수록 하반신을 더 많이 덮었다. 물론, 옷이 마법처럼 커질 리 없다. 문제는 청년에게 있었다. 그의 몸이 조금씩 작아지기에, 그가 걸친 옷이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의 키가 자꾸만 줄어드는 건, 청년이 머무는 장소의 특성 탓이다. 이곳은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동시에, 모든 것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장소. 청년처럼 보통의 인간이라면, ‘태어날 때의 모습에 차차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다르게 말하면, 청년이 어려지고 있다는 뜻. 처음 보았을 때 여자보다 살짝 더 컸던 키는 이제 여자보다 한 뼘이 작았다. 나이로 따지면 두어 살쯤 어려진 듯했다. 외형만 변화하는 것은 아니어서, 여자는 청년과 말을 섞을수록 그의 어투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구사하는 문장은 짧아지고 어휘는 단순해지며, 비유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정말로 몇 살 어린, 소년 시절의 그로 돌아간 것처럼.

  그 선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육신과 정신만 어려지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쌓아온 모든 것이 차차 흩어지게 된다. 기억의 손실이라도 막으려면 최대한 빨리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하리라. 아마 청년도 알고 있을 터였다. 이곳에 청년이 찾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여자가 피워준 불빛을 길잡이 삼아 장치 속을 헤매도, 그토록 찾던 <루리>는커녕 타인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언제쯤 그 쓰린 현실을 인정할까. 그리고 여자에게 이제 못 견디겠으니 내보내달라고 애원할까. 여자가 먼저 청년을 돕지 않는 건 그의 절망을 방관한다기보다, 그가 자의로 도움을 구할 때를 기다리고 있어서였다.

  그런데도 청년은 아직껏 여자 앞에서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희망을 놓고 싶지 않다는 발버둥인지 실패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알량한 자존심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여자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건 청년이 도움을 구하지 않는 이유가 아니라 그의 얼굴에 걸리는 평온함이었다. 이제 더 탐색할 곳도 희망을 걸어볼 돌파구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청년은 시종 여유로웠다.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라도 되는 양.

  여자는 청년의 덤덤함이, 절망스러운 현실에도 자주 상기되는 그의 뺨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곳을 뒤지며 재미있는 과제에 매달리듯 웃는 그의 모습이 싫었다. 당신, 조금씩 작아지고 있어. 내가 여기 있다간 녹아갈 거랬잖아. 결국 참지 못한 여자가 한숨을 쉬며 던진 말에도 청년은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시시한 말 한마디 돌려주지 않고서, 몸을 숙여 슬쩍 바짓단을 접었을 뿐이다.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흔적을 덮으려는 듯.

  “답은 얻은 거야?”

  그런 청년을 눈에 담고서, 여자는 물었다. 그제야 청년은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답?”

  “당신이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 저번엔 설명이 부족했잖아.”

  루리는 누구인지, 왜 찾아야 했는지, 그래서 여기 머문 소득은 있었는지. 소득이 없었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이제는 답해줄 수 있을 텐데. 청년에겐 결코 가볍지 않을 의문을 하나하나 늘어놓으며 여자는 반응을 기다렸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묻는다면 웬만해선 청년도 무어라 답할 것이다. 혹 답을 피한다 해도, 저에게 놓인 현실을 한 번쯤은 깊게 생각하리라 기대할 수 있다 청년이 무엇이든 선택할 때까지, 여자는 인내심을 발휘할 생각이었다.

  뜻밖에도 침묵은 길지 않았다. 여자가 속으로 10까지 세었을 때, 청년의 입술이 열렸다.

  “답이라, 어느 정도는 찾았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루리를 만나진 못했지만,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아가는 것 같아. 희한하게, 이 주변을 돌다 보면 바라지 않아도 떠오르는 것들이 있거든.”

  꿈을 꾸듯 몽롱한 목소리로 청년은 말을 잇는다. 그 속에서 언제나 나타나는 사람이 있어. 내 손을 잡고 뒤따라오는 아이. 아마도 나보다 키가 두 뼘은 작아. 그만큼 작은 손으로 내 손을 꽉 쥐고선 놓을 줄 몰라. 띄엄띄엄 흘리는 말이 누구를 그려내고 있는지야 뻔했다. 오빠의 손에서 자라난, 그의 누이.

  “……얼굴은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지만 내가 그 애를 아낀다는 건 알겠어. 나도 그 애를 놓칠까 두려워하고 있으니까. 혹시나 내 손을 놓쳐도 찾을 수 있게 그 애에게 이름표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이름을 쓸 수 없더라고. 쓰려고 하면 머리가 너무 아파. 이름도 그 애도 기억해내면 안 되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

  청년이 횡설수설하는 건 겨우 떠올려낸 것을 잊기 전에 털어놓기 위함임을, 여자는 바로 알아챘다. 그도 어렴풋이 아는 것이다. 자신의 기억에 큰 구멍이 났다는 걸. 들여다보아선 안 될 부분이 생겼다는 걸. 그럼에도 청년이 억지로 지워진 부분의단편을 떠올려낸 건 무엇 때문일까. 이곳이 누이의 무덤이어서? 아니면 매일 함께하는 여자가 동생의 본체였기에? 본의 아니게 청년에게 누이를 떠올릴 매개가 된 것인가? 여자의 얼굴이 차차 굳어지는 줄도 모르고 청년은 계속 말을 쏟아낸다.

  “하지만 다른 어떤 이름을 떠올려도 그 애에게 들어맞지 않았어. 딱 하나, 맞는 이름이 있었지. 루리. 당신이 말해주지 않았으면 또 잊을 뻔했다니까. 난 루리의 보호자 같은 거였나 봐.”

  왜 청년은 꼭 정답을 찾아내는 것일까. 진실이란 그에게 고통을 안기는 것밖에 없는데. 지금 그가 알아낸 것을 모른 체 넘겨야 그나마 그를 더 불행하지 않게 할 텐데도, 여자는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부족해. 그래서 왜 굳이 루리를 찾아 여기에 왔는지도, 못 찾으면 어떻게 할지도 답하지 않았잖아.”

  “처음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는데, 루리를 떠올리고 나니 알겠어. 바깥에선 찾을 수 없었으니까 여기 온 거야. 그 애가 내 손을 놓치고, 사라져서. 그냥 없어진 게 아니라 모두가 그 애를 잊어버린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었겠지. 그래서 여기로 뛰어내렸던 거야.”

  “여기서 루리의 흔적이라도 느껴서?”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뭔가 그리운 느낌이 들긴 했지만. 처음부터 나는 루리를 찾아서온 게 아니란 생각이 들어. 느릿하게 흘리는 말은 어쩐지 침중했다.

  “하지만 당신은 여기 온 날 나한테 루리를 찾는다고…….”

  “그때 생각난 게 그것밖에 없었겠지. 뛰어내리기 전까지는 찾고 싶었을 테니까.”

  “그럼 뛰어내릴 땐 무슨 생각을 했는데?”

  “……이런 곳에 뛰어내리면 보통은 죽지?”

  “보통은.”

  “목숨은 건졌지만 말이야. 당신이 여기에 떨어진 건 전부 녹아버린다 하니 안심이 되더라고. 아마도 난 루리처럼 되고 싶었던 것 같아.”

  <없었던 사람>이 되는 거지. 그 말에 여자의 혀가 굳었다. 그동안 절망스러운 상황에도 몽롱하게 웃던 청년이,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단 말을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청년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여기에 있다간 스스로를 잃게 된다고 경고한 때 지금도 나한테 남은 건 없어라 답하던 목소리도 머리를 울린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던 것도 헛된 희망에 매달렸던 것도 아니었다. 여자와 똑같은 생각으로 이곳에 머물고 있었을 뿐이다.

  이곳을 무덤으로 삼자고.

  “당신은 여기에 계속 있었잖아. 여자애가, 왔었어?”

  진작 물었어야 했던 걸 이제야 꺼내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자는 청년이 누이의 종말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고 거의 확신했다. 소중한 사람의 존재를 찾는 게 아니라, 짐작한 결말을 확인하듯 묻는 데서 알 수 있었다.

  “당신을 닮은 애가 오긴 했지.”

  “녹아버렸지?”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청년은 울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슬픔을 토해낸다면 감싸줄 생각이었고 왜 미리 말하지 않았냐며 원망을 쏟으면 받아주려 했으나, 그는 지나치게 얌전했다. 지켜보는 여자가 서글퍼질 정도로.

  “역시 잘 온 것 같아. 여기에.”

  짧은 침묵 끝에 흘러나온 말은 건조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하고 묻기는 했지만 여자는 굳이 듣지 않아도 답을 알 것 같았다. 앞으로 청년이 선택할 결말이 무엇인지도.

  “……이건 그냥 내 느낌인데 말이야. 여기도, 위치마다 힘의 강도가 다른 것 같아.”

  과연 청년은 여자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슬쩍 말을 돌려버린다. 장치여서 그런가? 엉뚱한 말을 흘리는 것은 답을 회피하기 위해서이리라.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그녀가 저를 막아설 거라고 짐작한 것이다. 이곳에 떨어진 이후로 청년과 여자는 언제나 의견이 갈렸으니까. 그가 제 몸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무방비하게 내던졌다면, 여자는 자꾸만 그의 선택을 의심하고 그를 내보내려 했으니까.

  “가동음이 크게 들리는 곳, 거기가 중심일까?”

  “아마도.”

  아비가 내던진 제물’, 즉 생명력을 긁어낼 <희생자>가 떨어질 때 유독 빛이 크게 일었던 곳이 있었다. 빛이 필 때마다 따라붙던 웅웅거리는 소리 또한 그곳이 제일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구조를 들여다본 적은 없으나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던 곳이니 일종의 코어였으리라고 여자는 추측한다.

  “그런데 그건 왜?”

  청년이 어떤 감정으로 서 있는지 어느 정도 짐작했기에 여자는 긴장을 풀지 않고 물었다. 앞으로 두세 마디 안에 청년의 계획을 제대로 확인해야 한다. 그가 지독한 전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건, 빠르게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그의 기민한 판단력 덕이기도 했으므로. 청년을 제 편으로 만들어 뜻대로 움직이려 하면 이미 늦다. 어떤 것이든, 청년이 실행에 옮기기 전에 대처하지 않으면.

  여자의 생각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바로 다음 순간 청년이 그녀에게서 돌아서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방향은 <중심부>로 향하는 쪽. 장치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때문에 그 힘도 가장 강할 곳. 중심으로 간다면 청년이 목표하는 것은 뻔하다. 천천히 녹아가는 게 아니라, 빠르게 허물어지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종말을 기다리는 대신 자의로흩어지기로 마음먹은 게 틀림없었다.

  당장 붙잡아야 하는데. 청년과 함께 있느라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바람에 여자는 바로 쫓지 못했다. 뛰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탓이다. 겨우 청년이 향한 쪽으로 뛰기 시작했을 땐 그녀를 기다려줄 리 없는 청년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제발 버텨주었으면. 녹지만 않아줬으면.

  청년을 쫓아 숨이 차도록 달릴 때, 여자의 머리를 지배한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

 

  작정하고 달리는 사람을 붙잡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도 그 사람이 다른 이에게 방해받기 전 죽기로 마음먹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이곳에 더 오래 있었던 쪽이라면 여자였지만 구석구석 헤매며 구조를 익혔을 쪽은 청년. 청년을 바로 막아서지 못한 이상 이 승부에서 불리한 쪽은 명백히 여자였다. 그의 속내를 좀 더 빨리 알아챘다면, 아니면 궤변으로라도 그를 묶어두었다면 달랐을까. 결국 다리가 버텨주지 못해 달릴 수 없게 된 여자는 뒤늦은 가정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눈앞에 그려지는 건 불길한 결말뿐이다. 이곳에 떨어진 이들이라면 당연히 맞이할, 그러나 청년이 지나치게 앞당기고 만 사멸.

  삶의 끝이라 하면 죽음을 연상하겠지만, 이곳의 종말은 그보다 훨씬 냉혹한 것이었다. <처음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이란 표현을,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라 볼 수는 없다. 모든 걸 잃고 소멸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옳다. 한 인간의 탄생에서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돌리면 결국 수정되지도 않은시점에 다다를 수밖에 없을 테니. 그러니 여자는 청년을 붙잡아야 했다. 아마 그녀가 찾아냈을 땐 이미 장치의 효과로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져 있겠지만, 그만큼 내면도 퇴행된 후겠지만 흩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다급한 마음을 비웃듯, 아무리 걸음을 옮겨도 청년의 얼굴은커녕 그의 옷자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에 머리가 마비되려던 때. 발에 채이는 것이 있었다. 가만히 내려다보니 눈에 익은 물품이었다. 저항군의 표식이라며 청년이 목에 매고 다녔던 붉은 스카프. 청년의 투쟁을 상징했던 물품이자, 가치가 사라지고도 몸에 지니고 다녔던 것이 처량하게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짐작 가는 이유라면 두 갈래. 하나는 점점 몸이 작아지는 바람에 몸에 걸친 모든 게 헐렁해진 청년이, 달리던 중 스카프를 흘려버렸을 가능성. 다른 하나는 저항군으로서 누이를 구한다는 목표를 안고 살아온 청년이 동생의 종말을 확인하고서, 저항군의 책임을 놓아버렸을 경우. 어느 쪽이건 청년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단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씁쓸한 현실에 도리어 머리가 차가워졌다. 청년이 스스로를 망가뜨리게 된 계기는 분명 동생의 종말이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 여자에겐 아직 청년을 설득할 거리가 남아있었다.

  그가 몸을 던지기 전, 잠깐이라도 그를 이 세상에 묶어둘 핑계가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여자는 청년의 스카프를 소중히 챙기고서, 손가락을 튕겼다. 생각해보면 굳이 인간의 방식으로 청년을 쫓을 이유가 없었다. 죽기로 결심하고 달리는 사람을 똑같이 달려서 쫓는 게 아니라, 아예 달리지 못하도록 하면 되었는데. 청년과 어울리느라 인간 흉내를 냈을 뿐, 여자는 이미 청년의 삶 전체보다도 더 긴 시간을 초월자로 살았다.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도 휑한 장치 내부에 군데군데 장애물이 생긴다. 청년이 아무리 빠르게 도망친대도 갈 길이 막혀서야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중심부까지 닿는 것만 막아도 큰 소득일 것이다.

  만일 이미 닿았다고 한다면. 여자는 자신이 세운 장애물, 위협적으로 솟구친 기둥을 지나치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 경우엔 여자의 계획대로 되긴 어려우리라. 장치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그곳에 다다랐다면 청년은 이미 그녀가 아는 모습이 아닐 테니까. 지금의 청년은 몇 살 즈음까지 내려갔을까. 기억은 얼마나 잃었고 자아는 어느 정도 부스러졌을까. 만나기 전까진 알 수 없다. 장애물에 막혀 얼마 가지 못했길 바랄 뿐이다.

  자연의 힘을 둘렀던 초월자로서, 여자는 생명력을 감지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직까지, 이 차가운 장치 안에선 희미하게나마 생명 신호가 느껴졌다. 청년은 살아있다. 그 사실에 희망을 걸고서 여자는 걸음을 옮겼다. 청년이 조금만 더 버텨주기를 바라면서.

  청년을 막기 위해 세운 기둥을 열 개쯤 지난 때. 여자는 드디어 청년을 발견했다. 아니, 이제 그 모습을 청년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여자가 본 것은 고작 열 살 남짓 되었을까 싶은 어린 소년의 뒷모습이었다. 작아졌으리란 건 짐작했지만 너무 작았다. 이곳에 떨어질 때부터 걸치고 있던 코트가 그의 몸을 거의 발끝까지 싸매고 있었다. 달리는 데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바짓단은 접어두었지만 코트는 어찌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막상 만나고 나니 다리가 굳어버린 듯 움직일 수 없어, 여자는 품에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진 <소년>을 가만히 눈에 새겼다.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더는 타인에게 시선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대치 아닌 대치가 이어질 때.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앳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혼잣말일까. 아니면 방해꾼에게 들으라고 한 말일까. 몇 발짝 밖에 선 여자가 입을 떼지 못하고 기다리자 소년은 다시 중얼거렸다.

  “뛰어내리는 것도 실패. 중심부로 가서 녹아버리는 것도 실패.”

  아, 그래도 기다리기만 하면 어떻게든 끝은 날까? 소년은 제 앞을 가로막는 기둥을 손으로 쓸어보며 무심하게 덧붙였다. 벌써 이만큼 녹았으니까.

  “더는 안 돼. 돌아가야지.”

  “어디로?”

  다급해진 여자가 입을 떼자 소년은 그제야 돌아보며 물었다.

  “갈 곳이 있었어?”

  마주한 얼굴이 너무 앳되어서, 여자는 숨을 크게 삼켜야 했다. 머릿속에 남은 분신의 기억으로 알 수 있다. 지금 소년의 모습이 몇 살의 모습인지. 그리고 그 즈음 소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누이로서 바라본 그때의 오빠는 너무도 커 보였었는데 지금은 키가 제 배에나 닿을 정도로 작다.

  “당신이 가야 할 곳은 있잖아. 바깥.”

  “나가면 뭐가 달라지는데?”

  “삶은 지속되겠지.”

  “하지만 루……그 애 이름이 뭐였지? 그 애랑 유원지에 갈 순 없는걸.”

  지금 여자 앞에 선 사람은 간신히 육신을 유지하고 있을 뿐. 살아오면서 쌓아온 경험도 기억도 거의 날아간 빈 껍질 같은 존재임을, 여자는 안다. 남아있는 것이라곤 기억의 찌꺼기, 그것도 지금 그가 멈춘 나이에 겪었던 일들의 단편뿐이리라. 낡은 기억을 멍한 얼굴로 늘어놓는 것만 보아도 뻔하다. 그가 동생과 함께 한창 유원지에 가던 때가 있었다. 그가 열 살 생일을 맞기 조금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쟁을 맞으며 유원지도 폐허가 되었으나, 두 사람이 유원지보다 다른 곳에 관심을 품게 된 것은 그보다 한참 전의 일.

  즉, 소년은 특정 시기의 기억에 매몰되어 있는 셈이다. 그것이 이곳에 떨어지기 직전의 일도 아닌, 어린 시절의 일이란 점도 서글프다. 그의 삶 대부분은 이미 날아간 것이다. 내면이 그만큼이나 황량해진 소년에게 자아가 제대로 남아있을 리 없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목표로 삼은 사람인지 이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궁핍한 기억에 를 나타낼 단서란 없을 테니까.

  “루리.”

  여자는 소년이 제대로 말하지 못한 이름을 완성시켜 읊었다. 그 이름의 주인이 여자의 입장에선 그저 분신이었고 언젠간 거두어갈 안전장치였을 뿐이라 해도, 소년에겐 큰 가치를 가졌다. 애초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은, 그리고 실제로 흩어질 수 있을 소년이 버티고 있는 이유는 하나뿐.

  여자는 소년을 삶에 매어두는 닻이 이제 그가 이름까지도 떠올릴 수 없게 된 누이라 확신한다. 보통 사람도 버티기 힘든 곳에서 <없었던 사람>이 되길 갈망하기까지 한 이가 아직까지 녹지 않은 건 어떤 강렬한 매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소년을 이곳으로 이끈 누이는 그에게 남은 몇 안 되는 기억의 중심인물이 됨으로써, 오빠가 자신을 생각해서라도 세상에 발을 딛고 있게 만드는 것이다. 기억을 되새기는 한 소년이라는 인간은 완전히 허물어질 수 없으니.

  “, 그래. 루리. 이상하다니까. 왜 넌 그 이름을 알아?”

  “당신이 말해주었으니까.”

  “다른 이유가 있지?”

  “왜 그렇게 생각해?”

  “너를 보면 자꾸 그 애가 생각나거든. 달릴 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네가 오자마자 그 애 생각이 났어.”

  “……처음부터 그랬어?”

  고개를 끄덕인 소년은 물었다.

  “내가 말하기 전에도 그 애를 알고 있었지?”

  맹금을 연상시키는 눈이 똑바로 여자를 보고 있었다.

  역시 소년은 정답만을 짚는다. 여자가 누이와의 연결고리임을, 누구도 밝히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알아챘다. 그럼 이제 그는 저에게 누이의 일을 숨겨온 여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절망에서 구해줄 수 있거나, 최소한 빨리 체념하게 할 수 있었으면서도 그의 불행을 외면해온 사람을. 원망할까. 그게 아니면.

  “맞아.”

  원망이건 증오건,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여자는 소년이 진실을 깨달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누이와의 연결고리를 들먹여, 소년을 설득할 수 있을 테니. 이미 답을 짐작하고 물었을 소년은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빈 웃음을 걸쳤다.

  “그러니까 네가 오기 전에 전부 끝냈어야 했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눈을 감아버리도록.”

  “이거, 기억나?”

  여자는 소년 앞에 붉은 스카프를 흔들어 보였다. 과거를 되살려 소년의 자아가 더 흩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나, 소년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묻지 마. 이제 아무것도 모르니까.”

  “당신, 루리를 구하려고 싸울 때 이걸 매고 있었잖아. 동료들과 나누어 가졌었지. 아카데미아에 맞서는, 레지스탕스의 표식이라고.”

  당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어. 나중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정예병에 들어가기까지 했거든. 사라진 과거를 풀어놓으며 여자는 소년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섰다. 고작 몇 걸음의 거리인데, 여자가 바로 좁힐 수 있는 거리인데 소년은 도망치고 싶은 양 뒷걸음질 쳤다. 이미 너무 작아진 몸이 순간순간 줄어드는 것을 여자는 느낀다. 이제 소년은 일곱 살, 아니, 여섯 살. 아니, 다섯 살

  “기억, 안 나.”

  “기억나지 않는다면 채워줄 수 있어. 루리가 당신의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당신이 루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당신이 잊고 싶지 않았던 모든 걸 말이야. 루리의 모든 걸 삼킨 나라면 전부…….”

  “그런 이야기 나는 몰라.”

  계속 뒷걸음질 치다 작은 등이 또 다른 기둥에 닿았을 때. 소년은 거의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여자가 만든 장애물이 길을 막아, 이제 그는 더 도망칠 수 없다.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것조차 타의에 가로막힌 소년은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을 안고 얼굴을 묻었다. 그런 이야기 나는 몰라. 되풀이한 말이 꼭 알고 싶지 않아라고 울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거기서 여자는 자신이 그의 세계를 침범했음을 깨달았다. 이미 삶의 많은 부분이 타의에 휩쓸린 인간을, 또다시 그의 의지를 무시하고서 구하려 했다는 것을.

  여자는 조심스레 소년에게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다음은 가만히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할게. 그러니까 한 번만, 나를 봐줄래? 부드러운 목소리에도 동상이라도 된 듯 소년은 꼼짝도 않았다. 답이 돌아오지 않은 것도 물론이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소년을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뜻대로 따라주건 이대로 그녀를 거부하건, 그의 뜻대로 하라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여자는 소년이 살그머니 고개를 드는 걸 보았다. 앳된 얼굴에 혼란과 당혹스러움이 엉겨 있었다. 그의 얼굴에 그 감정을 씌운 게 누구인지, 여자는 명확히 안다.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돌려주어야 할 말도.

  “내가 잘못 생각했어. 더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걸 기억해낼 의무는 없지. 그리고 그 기억 때문에 억지로 고통스러운 현재에 매여있을 이유도.”

  소년이 비극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누이를 잃었다는 현실. 그 절망은 기억 속에서 누이의 존재만을 지운다고 깨끗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누이를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사라진 사람>에 절망해 몸을 던져야 했고, 하필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여자 곁에서 자신의 불행을 곱씹어야 했다. 지금 그에게서 기억을 전부 지우고 바깥으로 돌려보낸다 한들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오히려 모든 걸 잃은 텅 빈 인간으로 표류하게 되지 않을까?

  인간을 믿을 수 없어서, 인간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리라고 지레 두려워하여 그들에게서 선택권을 빼앗았다. 악마가 제 파편 중 하나의 몸을 빌려 부활했을 때. 아직 세상에 남아있던 분신들에게 맡기지 않고 여자가 직접 나서 악마를 처리한 건, 인간의 선에선 재앙을 해결할 수 없단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돌이켜보면 그녀 역시 인간이었고, 악마와 마주한 때 분신들과 비슷한 생각으로 세상을 걱정했다. 결국 타락해 침략자가 된 아비처럼, 여자도 한때는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구원자가 되었다.

  “소중한 사람을 구하려 싸우는 건 잘못되지 않았어. 당신은 계속 그 뜻을 부정당했고, 결국은 싸울 기회도 잃었지만. 잘못한 건 당신이 스스로 싸우지 못하게 한 쪽이야.”

  인간은 어리석으면서 현명하고, 악하면서 선량하다. 여자가 생각지 못한 것은 바로 어리석은 다수의 틈에서도 바른 선택을 하는 소수와, 언제나 악에 맞서길 결심하는 정의로운 이의 존재였다. 아비가 침략군을 키워낸 차원에서도 침략군에 대항한 이들이 있었다. 악마의 조각이면서도 악이 되지 않으려 계속 저항하던 아이도 있었다. 그런 이들을 모두 마음 한 켠엔 사악함을 품은인간으로 요약하고서 인간의 싸움을 빼앗은 것은 여자의 실책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에서, 몇몇 이들을 지워버린 것도.

  분신에 대한 기억을 지운 건 앞으로 <기억하는 이> 때문에 일어날 파멸을 막기 위함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자의 결벽적인 태도이기도 했다. 세상 곳곳에서 누구도 심판자의 흔적을 기억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들이 인간으로서 살며 쌓은 것도 전부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 그렇게 그들을 세상에서 완전히 거두어가겠다는 발상.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효과가 있었던가? 소년만 보아도 여자의 뜻대로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억의 혼란에 시달리다 결국 제 삶에 채울 수 없는 상실이 있음만 깨닫고 무너지지 않았던가.

  “……사과?”

  “그래.”

  소년의 언어가 망가졌음을 서글퍼하며 여자는 덧붙였다. 나도 당신의 불행에 책임이 있지.

  그러나 여자는 소년의 불행에서 자신의 실책을 알아챈 것으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믿지 않은 인간 중 소년이 유독 불행했을 뿐. 사악한 인간을 경험했다는 이유로 인류 자체를 불신해, 스스로 세상을 바로잡을 기회를 빼앗고 분신의 삶마저 주변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지워버렸다. 소년보단 덜 불행하다 해도, 세상 곳곳에 초월자에게 외면당한 인간이 있을 터였다. 소년처럼 투쟁을 빼앗긴 저항군. 사랑하는 친구를, 마음을 준 사람을, 딸을 초월자의 분신이었단 이유로 통째로 잃게 된 사람들까지.

  그러니 여자는 이제, 한 가닥 자비를 베풀기로 한다. 인간의 선량함을 한 번 더 믿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여자는 소년의 녹색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예언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앞으로 행복해져. 내가 그렇게 되도록 할 테니까. 그리고 당신의 세계도 평화를 찾아.”

  이게 내가 이뤄줘야 할 일이고, 당신을 구할 길이야. 여자는 명랑하게 덧붙였다.

  이것은 소망이 아니라 예언이다. 연민으로 내뱉는 값싼 위로가 아니라, 초월자의 약속이다. 여자는 세상에 분신들을, 그들이 세상에서 쌓은 삶을 돌려줄 것이다. 4개의 차원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던 소녀들. , 그들을 아끼고 기억하던 이들. 모두가 원래의삶을 돌려받는 것이다. 한편으로 여자는 폐허가 된 소년의 고향도, 그 외에 악마가 날뛰며 혼란이 생긴 차원도 안정을 찾게 만들려 한다. 그녀의 힘으로 하루아침에 복구하는 게 아니라, 선량한 이들이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가도록 오래도록 지켜볼 것이다.

  “그러니까, . 이제 안심하고 우리가 갈 곳으로 가자.”

  자리에서 일어선 여자가 손을 내밀며 말하자, 커다란 금빛 눈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은 과거 누이에게 게임을 가르쳐주던 어린 오빠의 눈이었고. 청년기까지 성장했다 다시 아이가 된 오빠는 여자의 손에 작은 손을 올려놓았다.

  여자는 오빠와 함께 유원지에 가던 작은 소녀처럼, 그 손을 꼭 쥐고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소년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는 바깥이 아닌, 여자만이 아는 곳. 상처받은 이들에게만 허락된 초월자의 정원으로 함께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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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