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지] 소년의 초상

2021. 5. 19. 18:25 from 01

 

  젊은 사장의 집무실에 수상쩍은 물건이 배달된 건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일 욕심이 많은 사장이 전날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의 공간엔 그가 모르는 물건 따위 없었으니까. 다 해결하지 못한 일이 마음에 걸려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을 때. 사장은 집무실의 책상에 떡하니 놓인 상자를 보았다. 책상을 거의 다 채우는 크기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상자가 제법 잘 포장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아한 무늬가 새겨진 포장지와 섬세한 리본 장식은 배달물의 정체를 바로 짐작하게 했다. 선물.

  세계적인 대기업 창업주의 아들로 십대 때 이미 사장으로 취임한 사내는 줄곧 성공을 써온 사람이었다. 아비의 뒤를 이어 회사를 잘 관리했다는 말로는 그의 성과를 다 담아낼 수 없었다. 2대 사장 취임 수년 만에, 회사는 이전 십수 년간 쌓은 것보다 훨씬 더 발전했다. 전부 현 사장의 공로였다. 새로운 가능성에 투자하는 과감함과 먼 이국에서 일어난 전쟁을 막기 위해 정예병을 파견하는 등의 책임감 있는 모습은 회사의 가치를 높였다. 세상 사람들은 사장이 개척한 기술에 환호했고, 그의 선택을 신뢰했다. 청년층에게 롤모델로 삼고 싶은 사람을 물으면 꼭 한두 명쯤은 그의 이름을 읊었다.

  그만큼 성공을 쌓아온 사람에게 온갖 선물이 흘러드는 것은 당연한 일. 어떤 이들은 선물을 보내며 사내에게서 좋은 거래를 따내고 싶어 했다. 단순히 그에게 환심을 사려 하는 부류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선물을 건네는 이에겐 전부 목적이 있었기에 사내는 무언가 받을 때마다 신중하게 판단해야 했다. 기본적인 태도는 유지해야 할관계에서의 선물은 받고, 신뢰를 쌓지 못한 이들의 선물은 좋은 말을 붙여 거절하는 것이었다. 신뢰를 두텁게 쌓으면서 약점은 잡히지 않아야 했기에.

  그렇다면 이번의 선물은 사내는 상자를 이리저리 살펴보았으나 보낸 이의 이름이 없었다. 어젯밤이나 오늘 아침에 무언가 배달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도 없다. 누군가 몰래 가져다 놓은 것이 분명한데, 선물을 그렇게 비밀스레 건네야 할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다. 왜 익명으로 보냈을까. 무엇을 숨기고 싶은 것일까. 의문을 안은 채 사내는 상자에 손을 뻗었다. 이런 수상쩍은 배달물에 손을 댔다가 폭발에 휩쓸리는 영화를 본 기억이 있지만, 불안감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선물의 정체를 확인하고 처분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메워서였다.

  리본을 풀 때도, 포장지를 뜯었을 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상자를 열어 내부를 확인하는 것. 사내는 숨을 크게 쉬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이 안에 넣어둔 건 무엇일까. 큰 죄를 지어 수년 전 재판에 넘겨진 창업주의 치부? 아니면 사장에게 존재를 알리고 싶은 이의 화려한 자기소개서?

  답은 바로 다음 순간, 확인할 수 있었다. 상자 내부를 본 사내의 눈이 둥그레졌다. 생각지도 못한 물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선물의 정체는 그림. 그것도 사내의 초상화였다.

 

*

 

  커다란 액자에 전시된 그림은 집무실의 한쪽 벽에 걸렸다. 사내로서는 그리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으나, 집무실에 들어온 동생이 그림을 발견하자마자 걸어놓자고 거듭 이야기한 통에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책상 위나 장식장에 두기엔 너무 큰 그림이었다. 동생의 흥미가 떨어질 때까지만 걸어두었다가 슬그머니 치우면 될 것이다. 다만 하나 불만스러운 점을 짚자면, 선물을 발견한 순간 머리를 지배한 의문을 하나도 풀지 못했단 사실이었다.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면 무언가 단서가 생기리라 생각했다. 선물을 보낸 이가 누구인지, 선물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선물을 파기해야 할지 간직해야 할지에 대해서라도. 그러나 사내는 어떤 답도 얻지 못했다. 겨우 확인한 거라곤 작품을 그린 이의 정체. 매우 독특한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을 사내는 한 명 알고 있다. 이번에 배달된 그의 초상화는 바로 그 자의 솜씨였다. 한때 사장의 곁에서 그의 뜻대로 싸워주었던 전사. 사내가 결성한 정예병의 일원. 작가를 확인하고 나니 선물의 목적이 더욱 의심스럽다. 청년은 살아 움직이는그림을 그리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므로.

  청년의 화풍은 전통적인 초상화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인물을 선명하게 그리지 않는다는 점에선 초상화라는 분류도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도 청년에게 곧잘 의뢰가 들어오는 건 들여다볼수록 작품의 주인공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는 공통적인 증언 때문이다. 더 나아가 <유령>을 부른단 말도 있었다. 죽은 가족의 초상을 의뢰한 사람은 그림 속 망자가 잠깐이나마 제 품에 안겼다며 눈물짓기도 했다.

  희한한 소문에 몇몇 사람들은 청년의 그림을 입수해 조사하기도 했지만, 물감에도 캔버스에도 특수한 장치는 없었다. 되레 그 소식에 청년의 유명세만 높아졌다. 지금의 청년은 꽤 바쁘게 작품을 그려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옛 지휘관의 초상화를 선물할 시간은 없을 터다. 청년이 사내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 정도로 애정이 깊지 않은 것도 물론이고.

  지휘관과 전사로 함께하게 되었으나 사내와 청년의 첫 만남은 제법 살벌했다. 청년은 전장에서 왔고, 사내는 그의 고향을 전장으로 만든 침략자의 아들이었으므로. 어느 날 가정을 팽개치고 사라진 창업주가 먼 이국에서 침략전쟁을 꾀하고 있었단 것은 뒤늦게 안 사실이었다. 아비의 죄를 확인한 순간부터 사내는 그 침략자를 적으로 규정했다. 그러니 사내가 전쟁의 피해자 앞에서 취해야 했던 행동은 명백했다. 아비에 맞서기로 결심했음을 알리고, 협력을 요구하는 것. 원수의 아들을 금방이라도 없애버릴 것만 같았던 청년은 함께 싸우자는 제안에 무기를 거두고, 사내를 따라 회사에 들어섰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사내는 청년의 도움을 받아 정예병을 결성했다. 열 명이 채 되지 않은 적은 수였으나 정예병의 이름에 걸맞게 모두 강한 전사들이었다. 덕분에 지휘관을 자처한 사내는 정예병의 손으로 아비를 끌어내릴 수 있었는데. 사내는 초상화를 힐끔거렸다. 그림 속에는 열세 살의 자신이 다소 흐리게 담겨 있다. 그림 속 소년은 소문대로 살아 움직일까? 그 답은 청년만이 알 것이다. 전장에서 이미 유령을움직였던 사람이.

  사내의 전사 중 전쟁을 끝내고픈 열망이 가장 강했던 청년은 다소 섬뜩한 전투를 벌이곤 했다. <유령 전사>를 불러내 함께 싸우는 것이었다. 유령이라고 표현하긴 하지만 청년이 불러낸 지원군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사람을 닮은 무언가라는 것만이 분명했다. 환상으로 빚어낸 듯 투명한 몸에, 적군의 공격이 닿아도 피를 흘리는 대신 그 자리에 종이를 찢어낸 듯 큰 구멍만 생기는 존재라. 유령이어도, 다른 무언가여도 공포를 사기 충분했다. 그들이 청년의 편이고 전투가 끝나면 조용히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었다면 분명 아군 중에서도 그들을 두려워하는 이가 나왔으리라.

  그렇다면 사내는 그 수상쩍은 전사들을 어떻게 대했던가. 지휘관으로서 사내는 전사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적군을 처리해야 했다. 다치지도 않고 챙길 필요도 없는 <유령 전사>는 썩 괜찮은 지원군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청년이 불러낸 전사들의 난입에 침묵하던 사내는 어느 날 그들에게서 특이한 점을 하나 찾아냈다. 하나같이 몸에 붉은 천을 매고 있다는 점.

  청년의 고향에서 붉은 천이란 침략군에 맞서는 저항군의 표식이라 들은 기억이 있다. 그 증거로 청년도 어딜 가나 붉은 스카프를 목에 매고 다니지 않았던가. 청년이 <유령 전사>의 정체를 물을 때마다 동지라고 얼버무린 것까지 사내의 머리를 때렸다. 사내는 청년이 데려온 동지가 누구인지 대강 짐작할 것 같았다.

  [쿠로사키.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네가 불러내는 전사들은 네 고향 사람인가?]

  언젠가 청년과 단둘이 대화할 기회가 생겼을 때 사내는 슬그머니 물었다. 청년은 입을 떼는 대신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단정한 얼굴엔 미지근한 웃음이 걸려있었고.

  [……희생된 사람들을 불러내는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군.]

  [내 능력이 아냐.]

  곧이어 청년이 늘어놓은 것은 기묘한 능력의 배경이었다. 친우의 능력이 옮아버렸다고 했다. 청년이 지옥 같은 전장을 떠나 사내의 도시에 숨어들 때 그를 쫓아올 정도로 친밀했던 친우. 마지막까지 함께할 줄 알았던 동지는 청년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허망하게 꺾였다. 그 날부터 청년에겐 그의 능력이 일부 스미고 말았다. ‘쓰러져도 유령처럼 일어나 싸우는 것이라는 표현을 듣고 사내는 납득했다. 청년은 침략군에게 쓰러진 동지들을 일시적으로 불러내 싸우고 있었다.

  그 능력이 유토에게 끝까지 남았으면 좋았을 텐데. 청년이 드물게 쓸쓸한 얼굴로 흘린 말을, 사내는 기억한다. 청년을 내리누르는 비극이 얼마나 묵직한지 새삼 느꼈기에 사내는 청년에게 능력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면 그 능력도 사라질 것인지, 불러낸 동지들은 나중에 완전히 안식을 찾는 것인지. 위험성이 있는 능력에 대한 의문은 그대로 삼키기로 하고서.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정예병은 적진에 침투했고, 침략군의 기지에서 승리를 거두며 전쟁을 끝냈다.

  정예병과 지휘관이 영웅으로 귀환하는 것만 남겨둔 시점에 청년은 사내를 따라가는 대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침략군에게 짓밟혀 폐허가 된 도시라도 고향은 고향이었다. 청년이 줄곧 돌아가고 싶어 했던 곳이자 행복했던 과거를 상징하는 장소. 사내는 떠나겠다는 청년을 막지 않았다. 전쟁의 상흔이 선명한 곳이라도, 청년에겐 자신의 회사보단 훨씬 나은 거처가 되리라 생각하고서.

  그렇게 청년을 보내고 두 해쯤 지났을까. 사내는 우연히 청년의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때 정예병으로 싸워주었던 청년이 떠올라 일부러 그를 찾아갔더니, 홀로 사는 집에 그림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곳곳에 팔레트와 물감이 잔뜩 어질러진 것을 보면 청년이 꾸준히 그림을 그려온 모양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취미가 있었던가? 의외인데.]

  좁은 집을 찬찬히 돌아보며 사내는 가볍게 말을 걸었다. 벽에 잔뜩 걸어두고도 공간이 모자랐는지 벽장에도 그림이 그득했다. 훑어보니 특이한 점이 몇 개 있었다. 첫째는 전부 인물화라는 것. 다음으론 그 많은 그림 속 인물이 거의 비슷비슷하다는 것. 셋째로는 청년이 그려낸 인물이 전부 더는 세상에 없는사람이라는 것.

  [원래는 없었지.]

  의미심장한 답의 속뜻을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림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두 명의 인물 때문이었다. 하나는 청년에게 능력을 전염시킨 친우. 다른 하나는 침략군이 납치해갔던, 청년의 누이.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을 청년은 끝내 구하지 못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을 거듭 그려내는 건 단순히 그들을 그리워해서는 아닐 것이다. 청년의 능력과 연결해보면, 그 집요한 행동의 진짜 이유는.

  [네 능력, 그림에도 통하나?]

  이 그림 속 인물도 살아 움직이냔 뜻이야, 쿠로사키. 덧붙인 말에 청년은 즉답했다. 어느 정도는.

  [정확히는 살아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 비슷한 느낌이 들긴 하지. 그림 속 인물을 잠깐 그림 밖으로 꺼낼 수 있으니까.]

  청년이 그렇게 말한 때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그림에서 열너댓 살로 보이는 소녀가 살그머니 튀어나왔다. 보랏빛을 띤 흑발과 붉은 눈이 인상적인 소녀는, 사내에게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청년의 누이. 이제 어디에도 없는 사람. 청년이 소중한 사람을 모델로 그림을 그린 이유는 분명해졌다. 그는 사라진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림으로 빚어낸 카피가 오리지널의 부재를 완전히 채워줄 수 없다고 해도.

  [잠깐이지?]

  [글쎄. 어차피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잊지 말라는 걸까.]

  저에게 다가오는 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청년은 무심하게 답했다.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그림을 계속 그려온 건 그 때문이었군. 능력의 지속시간은 길지 않으니까.]

  [그리다 보니 점점 손이 빨라져. 그러니 그렇게 오래……쓸쓸하진 않아.]

  핼쑥한 얼굴로 청년은 웃었다. 손이며 옷에 엉망으로 묻은 물감이, 집에 그득그득 쌓인 그림이 평소 그가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짐작하게 했다. 환상에 매달려 사는 셈이지만 사내는 그의 부질없는 노력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사내의 몸속에 흐르는 피는 침략자의 것이고, 사내가 그에게 안겨준 승리에 소중한 사람을 구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가장 구하고 싶었던 이를 잃고 돌아온 사람에게서 잃은 사람에 대한 추억마저 빼앗는다면, 그는 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사내는 청년의 집을 나설 때 몸은 챙겨가면서 그림을 그리라고만 당부했다.

  그 이후 사내는 청년에게 주기적으로 물감과 붓, 캔버스 등 그림을 그릴 때 필요한 재료를 보냈다. 생활비를 아껴가며 그림에 매달릴 것을 우려하여 예술가 지원 명목으로 후원금도 꾸준히 지급했다. 청년에게 정예병 동료의 초상화를 의뢰하여 몇 점을 사 오기도 했다. 그림 속 인물이 튀어나오는 기현상이 생길까 싶어, 받아온 작품을 창고에 넣어두고 다신 꺼내보지 않았지만.

  세계적 대기업 사장이 지원하는 젊은이란 이유만으로 청년은 언젠가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되었다. 청년은 자신을 화가라 칭하지 않았고 사내가 그를 지원한 목적은 청년의 생존을 돕는 것이었으나 그런 사정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알려졌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으리라. 사람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신비스러운 젊은 화가>, 청년의 상품성이었으니까. 집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리는 청년을 굳이 찾아온 몇몇 사람들은 청년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고서야 그의 집을 떠났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고 자기만족용으로 그릴 뿐이란 말은 그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결국 의뢰인이 청년에게 억지로 그림을 받아낸 후 일이 커졌다. 투박하고 희한한 그림을 받아든 이들이 대기업 사장에게 선택받은재능을 확인하려 계속 그림을 들여다본 것이다. 화가의 능력이 능력이니만큼, 들여다볼수록 그림 속 인물은 생생해졌다. 내키는 만큼만 묘사하고 이목구비도 선명하지 않은 그림인데도 그랬다. 정말 독특하고 멋진 그림이에요. 보통의 초상화처럼 섬세하진 않지만, 오히려 사진보다 생생하게 느껴진다니까요. 자꾸 보다 보면 꼭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의뢰인의 평은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했고, 추억하고 싶은 이가 있는 사람들이 청년을 찾게 만들었다.

  밀려드는 방문자를 거절하던 청년은 딱 하나, 죽은 아이의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만은 조용히 받아주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처지에 동질감을 느낀 것이 틀림없었다. 빛바랜 사진을 자료로 삼아, 제법 오랜 시간을 들여 청년은 망자의 초상화를 완성했다. 공들여 그린 초상화를 받고 돌아간 의뢰인은 오래지 않아 딸을 오랜만에 품에 안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초상화를 걸어둔 후로 환상인지 꿈인지, 죽은 딸과 짧게나마 만났다는 이야기였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노인은 그 말을 꺼낼 때마다 울먹였다.

  그 이후는 세상에 알려진 대로. 청년은 바라지 않은 유명세를 얻었다. 사람들은 기대를 안고 청년을 찾아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청년은 제 작품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자신처럼 추억을 안고 살고 싶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의뢰를 계속 받게 되었다. 멀리서 청년의 삶을 지켜보던 사내는 그의 성공에 꽤 기뻐했다. 단절된 과거 말고는 어디에도 관심을 두지 못할 것 같던 그가 새로운 일거리를 안게 되었음에. 그가 도움을 받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게 되었음에.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 유명해지고부터 사내는 청년의 삶에서 조용히 퇴장했다.

  이제 청년의 곁에는 그를 꾸준히 사랑하는 이도 여러 명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생활도 안정되었을 것이다. 사내가 일부러 연락하지 않는 한 청년은 옛 지휘관을 찾지 않는다. 한때 전장에서 유령을 움직였던 능력을 사내가 속으론 껄끄러워한단 걸 청년이 모를 리도 없다. 그러니 사내가 이번에 받은 그림은 누군가 일부러 청년에게 부탁한 작품일 게 뻔하다. 그것도 하필 열세 살의 모습이라 청년과 만난 건 사내가 열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사내를 사랑하게 된 것도 2대 사장 취임 직전인 열세 살이 아닌, 그 이후의 일.

  그 시기의 사내마저 사랑하여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 할 사람이라. 가족? 아비의 죄를 고백한 열세 살 아들에게 그 남자를 처리해요, 레이지 씨.’라고 속삭였던 어머니? 혹은 열세 살 때의 사내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내의 삶에 뒤늦게 들어온 동생? 그게 아니라면 회사 사람? 사장 취임 직후부터 그를 보좌해온 비서? 그를 아비의 가장 완벽한 대체자라 생각한 회사 간부들? 거기서 사내는 생각을 흩었다. 보낸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그림의 의미였다.

  청년에게 그림을 의뢰했다는 건, 소문처럼 그림의 모델이 살아 움직이는 것까지 생각했다는 것. <의뢰인>은 사내에게 그림을 보내며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것일까. 왜 하필 열세 살의 그여야 했을까. 그 시기는 사내의 삶에서 빛나는 시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이전까지 믿던 행복이 무너지며 최초로 고통을 겪었던 때이기도 한데.

  사내는 그림 속 자신을 다시 보았다. 이목구비는 흐린데 표정만은 너무도 생생하다. 그림 밖의 감상자를 바라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먼 곳에 향한 시선. 잔뜩 굳은 얼굴.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소년의 얼굴에서 답이 보인다. 사내는 의뢰인이 굳이 열세 살의 그를 재현하려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청년에게 초상화를 맡겼다는 점에서 추측은 확신에 가까워진다.

  열세 살은 대기업의 후계자로 살아가던 그가, 살면서 갚을 죄를 깨달은 시점이었다.

 

*

 

  인간의 삶에서 어느 시점까지를 아이로 부를 것인가. 사람마다 의견은 갈릴 테지만 넓게 보자면 성년이 되기 전까지를 전부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십대 후반까지야 실수도 치기 어린 행동도 어느 정도는 용인될 나이이니. 그런데 사내의 삶에서 아이였던 시기는 태어나서 12년까지가 전부였다. 열세 살, 평범한 사람이라면 미래보다는 현재를 생각할 나이. 친구와도 가끔 다투고 꿈은 수시로 바뀔 나이.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잘못을 없앨 수 있는 나이. 사내는 그때 스스로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다.

  어른의 길에 첫 발짝을 들인 일은 사장직을 맡기로 선언한 것이었다. 당시 회사는 창업주의 부재에도 문제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회사의 중역이자 본래부터 경영에 능한 어머니가 회사를 잘 이끌고 있었던 덕분이다. 사내는 완벽하게 준비될 때까지어머니의 그늘에서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열세 살 나이로 아비의 빈자리를 전부 채워야 할 의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사장직을 물려받겠다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집무실을 나서 자료실로 향하며 사내는 기억을 더듬는다. 오래된 일이라 그때의 감정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책임감이었으리라고, 타인의 일처럼 건조하게 추측할 뿐.

  실제로, 아비의 죄를 알게 된 순간부터 사내는 자신이 누려온 모든 것에 책임감을 느꼈다. 부유한 환경도, 잘 교육받았다는 배경도, 창업주의 유일한 자식이란 축복받은 위치도. 심지어 제 성씨에 따라붙는 선망의 시선까지도. 아비의 죄를 생각하면 무엇 하나 당연한 행운이 아니었다. 아비의 후광으로 보통 사람이 꿈꾸지 못할 것을 누려왔다면, 아비가 낳은 피해도 마땅히 짊어져야 했다.

  아비를 막는 것으로든 그의 죄를 대신 씻어내서든.

  사내는 후자가 불가능하단 것을 알고 있었다. 타인의 죄를 완전히 씻어내는 건 신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하는 일은 전자였다. 그러기 위해선 아이로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어머니의 그늘에서도 벗어나야 했다. 그 남자를 처리해요, 레이지 씨. 어머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거기에 실린 기대는 묵직했다. 결심이 설 때까지 아들을 기다려줄 수는 있더라도 언젠간 그녀의 파트너 역을 요구하리란 게 선명히 보였다.

  한때 그녀의 남편이 차지했던 자리를. 방해물을 제거하고 회사를 안전하게 지켜낼 동지 역할을.

  그래서 열세 살 소년은 창업주의 후계자란 편리한 위치를 버리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어머니는 간부회의에서 아들을 차기 사장으로 추천하긴 했지만 쏟아지는 기대로부터 아들을 보호해주진 않았다. 사장이란 이름만 빌려주고 책임은 가져가는 게 아니라 명예도 책임도 전부 아들에게 내준 것이다. 사내가 사장이 되기로 한 때부터 어머니는 비즈니스 파트너였지 보호자가 아니었다. 사내가 어머니에게 감싸줘야 할 아이가 아닌 가장 강력한 패가 되기로 한 것처럼.

  어른의 모습을 덮어쓴 아이에겐 환상을 꿈꿀 여유도 실수를 겪을 기회도 없었다. 단단히 무장한 채 목표만을 위해 싸우는 것이 사내가 가야 할 길이었다. 끝없이 아비의 죄를 상기하며 스스로를 잘 벼린 무기로 만드는 건 고단한 일이었으나 사내는 아이의 삶을 내려놓은 데 후회란 없었다. 정예병과 함께 귀환할 때까지, 사내에게 간절했던 것은 자의로 포기한 삶보다 자신의 길이 옳다는 확신이었다.

  정예병을 이끌고도 아비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신화에서 되풀이되었던 부자간의 대립처럼, 의도치 않게 아비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면? 너무 일찍 어른을 흉내 내게 된 아이는 마음 한 켠에 언제나 불안을 두고 있었다. 그것만은 제 나이에 맞는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자료실로 향한 건 열세 살의 기억을 꺼내보기 위해서였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회사에는 사람의 기억을 열람하는 기술이 있었다. 타인의 머릿속을 마음대로 들여다보는 것만이 아니라 특정 부분을 잘라내거나 덧씌우는 것도 가능한 무서운 기술. 위험성 때문에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기술은, 개발자인 창업주가 자취를 감춘 후에도 회사에서 종종 쓰였다. 제한적으로 사용한다면 제법 유용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사내는 2대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아비의 <>을 따라가려 애썼다. 그 남자가 무엇을 꿈꾸었고 어떤 것까지 꾀했으며 그 과정에 무엇을 동원했는지, 낱낱이 알고 싶었다. 그 과정에 활용했던 것이 바로 기억 열람 기술이었다. 새로운 사장은 아비의 측근을, 아비를 따르던 연구원을 불러 아비가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지 확인하려 들었다. 기억을 억지로 끌어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위안 중 어느 쪽이 더 컸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다만 언젠가부터 사내는 기억 열람 기술을 자신에게도 쓰기로 마음먹었다. 실험에 몰두하는 연구자가 저마저 실험대상으로 삼듯이.

  아마 기억 열람 기술을 통해 영상으로 출력된 기억이 너무 생생했기 때문이리라. 모든 기억을 그렇게 꺼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잊지 않고 살 것 같을 정도로. 어른의 모습을 덮어쓴 후로, 잊어선 안 된다는 말은 몇 년간 사내의 목을 죄는 문장이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거둔 청년에게서 걸핏하면 그 말을 들었다. 거울 속의 사내조차도 때로 입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잊어선 안 되지. 기억해야지.

  그렇게나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뻔했다. 아비의 죄, 거기서 출발한 그의 책임. 열세 살 소년을 어른으로 만들고, 대기업 사장이 먼 이국의 전쟁에 뛰어들게 한 것. 자신의 기억마저 자료로 남기기로 결심한 사내가 제일 처음 꺼낸 기억이 바로 죄의 기억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열세 살, 아버지가 꾀하는 일을 알게 된 나이. 가정을 내팽개친 아버지에 대한 배반감보다 악인을 막아서야 한다는 책임감에 휩싸였던 때의 기억. 청년이 보내온 초상화를 살피다 액자 뒷면에 적힌 문구를 보았을 때. 사내는 자료실에 보관한 최초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네 열세 살을 기억하길.이라고 적혀있었던가. 휘갈긴 글씨는 분명 청년의 필체였다. 청년의 그림이 때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법 짓궂은 문구 선정이기도 했다. 사내가 기억하지 않으려 애써도 청년은 과거의 사내를 잠깐이나마 그의 눈앞에 세울 수 있을 테니.

  열세 살 때의 결심을 지금껏 잊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 열세 살 소년을 제대로 기억한다고 답하긴 어려운 사내였다. 전쟁이 끝난 후로, 그때의 기억을 담아낸 자료를 꺼내보지 않아서였다. 자료실에서 당시의 자료를 찾아내더라도 보통은 존재만 확인하고 덮어두곤 했다. 아비에 맞서기로 결심했던 때를 아직 남겨두고 있음에 스스로 만족하며.

  수년간 그 시절을 돌아보지 않은 건 두려움 탓이었을까. 어른을 막 흉내 내기 시작하던 때의, 완전히 준비되지 않았을 때의 미숙함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실수를 그 속에서 발견할지도 모른단 생각으로. 그게 아니면 승전을 거둔 것으로 책임을 마쳤단 생각 때문이었을까. 전쟁이 끝났다고 아비가 저지른 죄가 전부 바로잡힌 건 아닌데. 청년의 고향엔 아직도 침략군이 휩쓸고 간 흔적이 남아있고, 청년의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이는 돌아오지 못했는데.

  자료실의 A행 선반으로 걸어가 자신이 만든 자료를 꺼낼 때, 사내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아카바 레이지, 13. 지금보단 어린 티가 나는 글씨로 쓴 메모를 발견하자마자 긴장감이 밀려왔다. 수년 만에 들여다보는 기억은, 어떤 모습일까. 그때의 열세 살 소년은 충분히 선량한 인간이었을까.

  그리고 지금의 그는, 이 소년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일까.

  마지막 의문이야말로 사내의 머리를 가장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었다. 미숙했던 만큼 순진했던 시절의 목표를 온전히 이뤄냈다고 자신할 수 없어서였다. 누구도 사내의 성과를 저평가하지 않았다. 그에게 더 좋은 길을 택했어야 한다며 꾸짖지 않았다. 침략자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잃은 청년도 사내에게 분풀이를 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사내는 아직 확신이 없다. 그는 열세 살의 자신 앞에 자랑스럽게 설 수 있을까?

  답은 사내가 방치해두었던 기록에 있다. 사내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과거의 기록을 꺼내 재생했다. 다음 순간 스크린 가득 담긴 인물은 성공적으로 회사를 키워낸 대기업 사장도, 정예병과 함께 영웅으로 귀환한 지휘관도 아니었다. 지금의 사내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긴장한 얼굴의 소년이었다. 어머니를 올려다보면서 무엇이든 답을 내주길 기다리는, 고작 열세 살짜리 소년. 막연한 기억보다 앳된 얼굴의 그에게, 지금보다 젊은 어머니가 웃어주었다. 이미 그 시간을 지나온 사내는 다음 순간 어머니가 흘릴 말이 무엇인지 안다.

  [무엇을 하고 싶어요, 레이지 씨?]

  그 말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도. 어머니의 질문은 다르게 읽어야 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로 듣는 게 정확하리라. 그 시점의 어머니는 이미 아들을 파트너로 취급하고 있었으니까.

  [그 남자, 아카바 레오를…….]

  [좋아요. 그 자에겐 그 정도의 호칭이 적절하겠네요. 우리의 적이니까요.]

  [막아설 겁니다.]

  [어떻게?]

  몸을 숙인 어머니는 아들과 눈높이를 맞춘다. 과거의 장면을 제3자가 되어 지켜보는 상황이지만, 스크린 속 소년의 감정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오히려 관찰자가 되었기에 더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얼굴에 걸린 표정을, 긴장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는, 소년은 두려워하고 있다. 어머니의 응답이 아닌, 자신이 택할 미래를. 그로 인해 바뀔 수밖에 없을 모든 것을.

  [그 남자, 는 군대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훈련받은 전사를 일반인이 상대하기란 어렵겠지요. 대등한 병력이 있다면 좋겠지만 곧 엑시즈를 친다고 했으니 전사를 준비할 여유시간은 많지 않아요.]

  그런데도 소년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답한다. 열세 살의 두뇌로, 한정된 정보로 상황을 분석하고서.

  [병력을 준비하는 데 또 어려운 점이 있다면?]

  [이곳 마이아미에 위기감을 느낄 사람이 없다는 점이지요. 존재도 모르는 먼 곳에서 전쟁이 일어날 거란 말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군대를 결성하잔 건 무리한 요구예요.]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

  각오가 되어있다면 스스로 답해요. 어머니의 물빛 눈에서 사내는 무언의 요구를 읽는다. 저 묵직한 요구에 열세 살의 소년은 어떤 길을 찾아냈더라. 사내의 시선은 스크린에 고정되고.

  [정예병을 결성할까 합니다.]

  짧은 침묵 끝에 소년은 사내가 아는 답을 읊는다. 다음은 칭찬도 비난도 없는 어머니에게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아카바 레오가 키워낸 군대는 전원 듀얼로 무장한 사람들입니다. 총과 포로 무장한 군대를 만드는 건 어렵겠지만 우수한 듀얼리스트를 양성하는 건 회사 차원에서도 가능하죠. 각 소환법의 마스터가 몇 명씩 준비되기만 해도 듀얼 전사에 맞서는 걸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주먹을 꽉 쥐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소년은 어머니 이전에 자신을 설득하고 싶은 것 같았다. 어느 것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이 옳을 거라 믿는 것이다. 그래야만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럼에도 열세 살 소년은 확인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어머니는 짤막하게 답한다.

  [‘레오 코퍼레이션의엘리트를 키워내야겠군요.]

  제법 좋은 생각이에요, 레이지 씨. 어머니의 손은 머리칼을 쓸어주려는 듯 아들의 머리 쪽으로 향하다 허공에서 멈춘다. 긴장에 휩싸여있던 소년은 어머니가 빠르게 손을 거둬들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조금 편해진 얼굴로 숨을 크게 내쉬는 모습만 영상에 잡힐 뿐이다.

  [정예병에 함께 들어갈 생각인가요?]

  [아니요. 물론 저도 그들과 대등한 수준으로 실력을 키워야겠지만, 정예병으로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책임질 사람이 하나쯤은 필요하겠지요.]

  다음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 걸린 것은 열세 살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지휘관이 되겠다는 뜻이군요. 좋은 결심이지만, 레이지 씨. 메마른 웃음에 밴 감정을 뒤늦게 알 것 같다. 옅은 우려와, 그보다 훨씬 짙은 안쓰러움.

  [책임은 그쪽이 훨씬 무겁답니다.]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낡은 기억을 담은 영상이 거기서 끝난 것이다. 어떤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는 스크린을 사내는 한참이나 멀거니 바라보았다. 각오한 것보다 훨씬 강하게 감상이 몰아친 탓이었다. 분명,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던 때의 그는 용기가 있었다. 지금 돌아보아도 부끄러운 모습은 아니었다. 마땅히 짊어져야 할 문제에서 도망치지 않고 제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이후 사내에게는 약 3년의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 회사는 가파르게 성장했고, 전사 양성이란 목표가 뚜렷했던 회사 직속 학원은 매해 엘리트를 배출해냈다. 열여섯 살이 되어 청년과 마주한 때, 사내는 준비는 끝났다고 판단했다. 청년과의 대화로 전쟁이 이미 일어났음을 확인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꽤 자신에 차 있었던 것 같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정예병을 결성하는 즉시 출격시킬 수 있을 정도로, 회사도 그 자신도 준비되어 있다고.

  전사들은 잘 싸워주었다. 열 명도 되지 않은 전사가 전쟁을 끝낸다는 기적을, 정예병은 이루어냈다. 그러나 그 기적이 지휘관의 능력 덕분이었을까. 사내는 어느 때보다도 자신이 없다. 옛 기억 속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머리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탓이다. 책임은 그쪽이 훨씬 무겁답니다. 라고 했던가. 웬만해선 직접 전투에 나서는 일이 없는 지휘관이기에 부상 하나 입지 않고 돌아온 사내였지만 출격할 당시 그의 손엔 여덟 명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제대로 책임졌던가? 전사 중 일부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고, 청년은 생존 이상의 목표를 이루진 못했다.

  조금 더, 준비되었다면. 지휘관의 책임을 좀 더 깊이 이해했다면. 뒤늦게 머리를 때리는 생각이었다. 그랬다면 열세 살 소년의 소망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루어주었을 텐데. 사내는 무거운 마음으로 자료실을 빠져나왔다. 가능한 빨리 집무실 벽에 걸어둔 그림을 떼어내자고 생각하고서. 그림을 들여다볼수록 과거의 자신에 대한 복잡한 감정에 휩싸일 게 뻔했다. 굳은 얼굴의 열세 살 소년, 혹은 그 소년의 바람을 완벽하게 이뤄주지 못한 열여섯 청년을 그 속에서 읽어내고서.

  어쨌건 사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집무실이었다. 어른이 되기로 결심한 때부터 그가 있어야 했던 곳. 그가 성취를 쌓은 장소인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 곳. 이제 너무도 익숙한 집무실의 문을 열어젖히려던 때.

  사내는 닫힌 문 너머로 희미한 말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들었다. 오늘 방문하기로 한 사람은 없었고 개인적인 손님이 찾아오기도 이른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앳된 티가 난다는 것이 수상쩍었다. 사내는 방문자가 놀라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열었고.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 있단 나카지마의 말이 사실이었군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벽 근처에 팔짱을 끼고 선 어머니는 막 들어온 아들에게 살짝 눈짓한 후 바로 시선을 저 앞으로 옮겼다. 어머니가 바라보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자, 앞이 잘린 말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앞에, 익숙한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하나는 사내의 동생. 다른 하나는 바로 조금 전, 자료실에서 만난 사람. 열세 살의 그.

  청년의 능력은 이번 그림에도 통했다. 사내가 바라보고 있을 땐 아무런 변화도 없었는데, 그가 자리를 비운 때 그림 속 소년이 깨어났다. 이렇게 마주하고 싶진 않았으나 사내는 그 환상을 돌려보낼 길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피어오르는 의문을 삼키고 어머니와 함께 옛 모습을 감상했다. 소년기의 자신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었다. 그것도 갇힌 기억이 아닌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신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동생을 상냥하게 감싸주는,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 아이에게 시시한 답변이라도 돌려주려고 노력하는 소년.

  저 시절의 사내에겐 동생이 없었다. 당연히 동생도 저 시절의 그를 몰랐다. 그렇게 서로 형제였던 적이 없던 두 아이는 의외로 잘 엉겨 있었다. , 서로 만나는 미래를 알고 있는 것처럼.

  사내가 사장이 된 이후 어머니가 데려온 동생은 내내 사내에게 의지했다. 작은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세계란 사내의 손밖에 없는 것처럼 굴면서. 그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언제나 잘 대해주려 노력했지만, 동생이 이렇게나 기쁜 얼굴로 타인을 만나는 건 사내로서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아이끼리는 통하는 것인지. 아니면 열세 살 소년의 순수한 친절이 동생에게 잘 닿은 것인지. 어느 쪽이건 둘의 평온한 모습은 사내의 마음을 안정시킨다.

  “……살아 움직인다는 이야기가 제 그림엔 통하지 않길 바랐지만, 레이라에겐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사내는 낮게 속삭였다.

  “어릴 때의 모습을 마주하기 두려웠나요?”

  “조금은요. 지난 시절을 보는 건 미숙함도 잘못도 봐야 한단 뜻이니까요.”

  솔직한 답에 어머니는 아들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주었다.

  “난 조금 안쓰러웠어요. 저 그림, 얼굴이 잔뜩 굳어있더군요. 왜 하필 굳은 얼굴일까 생각해봤는데, 저 시기에 찍힌 레이지의 사진이 전부 웃음기 하나 없는 것이란 게 떠올랐지요.”

  “아카바 레오에 맞서겠다고 생각한 시기였으니까요. 무장하는 게 당연했어요. 좀 더 강하게 마음을 먹고 무장했다면 어쩌면 더 나은 결과가…….”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나요?”

  불쑥 들어온 말에 사내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가 어른이 되려 분투하던 것을 지켜보았던 어머니는, 그의 동지이기도 했던 어머니는 부드러운 웃음을 걸치고 말을 잇는다.

  “그 열세 살짜리 아이가 하트랜드의 전쟁을 끝내고 세계 곳곳에 밀려들 뻔했던 침략군을 막았어요. 그때 결심한 걸, 이뤄냈잖아요. ‘모두를구하진 못했어도 많은 사람의 미래를 지켜냈어요. 내 기대 이상의 성과였죠.”

  그러니 이제, 스스로를 용서해줘요. 난 내 아들이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요. 따라붙은 말에 사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짐을 흘려내고서. 오래된 기억 속 그가 제힘으로 길을 찾도록 거듭 질문을 던졌던 어머니는, 이제 그가 이뤄낸 성과를 인정한다. 단순히 위로해주는 게 아니라 기대 이상이었다고 칭찬해주기까지 했다. 일찍이 어른의 모습을 덮어썼고 나이로도 성인이 된 사내는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다음 순간, 그림이 불러낸 열세 살 소년이 거짓말처럼 허물어졌다. 마법의 시간이 끝난 것이다. 레이라. 사내는 혼자 남은 동생을 불렀고, 동생은 바로 그에게 달려와 안겼다. 작은 몸을 감싸주고서 사내는 물었다. 좋은 시간이었니?

 

*

 

  통신기가 요란스럽게 진동했다. 동생과 어머니가 돌아간 후 서류를 검토하던 사내는 통신기를 바로 집어 드는 대신 화면에 뜨는 이름부터 확인했다. 뜻밖에도 상대는 사내에게 어릴 적의 초상화를 안겨준 화가. 웬만해선 먼저 연락해오지 않는 청년이었다. 제대로 말을 섞은 것은 수년 전이 마지막인데, 아직 연락처를 지우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림이 배송된 지 오래지 않아 통신을 걸어온 것을 보면 어쩌면 사내에게 감상을 듣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한 사내는 통신기를 들었다.

  「그림은 잘 받았나?

  예상대로, 인사조차 생략하고 청년이 꺼낸 첫마디는 그림 이야기였다. 언제나 본론부터 시작하는 버릇은 참 변함없다고 생각하며, 사내도 바로 답을 돌려주었다.

  「물론. 이런 의뢰를 받았다면 나한테 먼저 알려줬으면 좋았겠지만.

  「그야 넌 미리 알리면 그림을 받을 리 없는 인간이니까. 내 그림은 소름 끼친다며.

  「그렇게 말했던가? ‘소문이 사실이라면 좀 섬뜩한데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빙빙 돌려 말해봤자 내 그림을 달가워하지 않는단 건 분명하잖아. 의뢰인이란 사람도 그런 건 알고 있었을 텐데.

  통신기 화면에 떠오른 청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여러 정황상 의뢰인이 내부인이라 거의 확신하게 된 사내이지만 막상 의뢰인 이야기가 나오니 진실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지켜보는 이가 없는데도 사내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의뢰인을 밝힐 수 있나?

  「뻔하잖아. 열세 살짜리 아카바 레이지를 굳이 그림으로 보고 싶어 할 사람이라면.

  「회사의?

  「네 회사의 이름으로 의뢰하긴 했지. 중요한 것도 아니니 그쯤 알아두라고.

  그 말로 의뢰인에 대한 확신은 굳어진다. 선물의 의도를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사내에게 긴장을 안기려는 의도도, 그의 과거를 들추고픈 마음도 없이 순수하게 그의 어린 시절을 담고 싶었던 것이다. 소년기의 사내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그렇다면 이제 사내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액자 뒷면에 적힌 문구의 뜻. 청년이 자필로 메모를 남긴 이유.

  「자료랍시고 받은 사진이 죄다 무표정해서 우스웠다고. 열세 살짜리를 보는 건지 석상을 보는 건지.

  「잠깐, 쿠로사키. 의뢰인이 그 시절에 대해 설명해주던가? 그때 내가 어떤 일을 겪었다고?

  「듣지는 않았지만 대충 알아. 그때 아카바 레오를 만나고 돌아왔다며.

  「그럼 넌 내가 그때의 마음을 안고 살길 바란 건가? 최근 내가 엑시즈에 소홀하다고 생각해서?

  열세 살을 기억하라고 적었잖아, 쿠로사키. 덧붙인 말에 청년은 낄낄댔다. 하긴, 너는 너무 많이 생각하는 버릇이 있지. 돌아온 말엔 오히려 장난기마저 밴 듯하다.

  「의뢰인이 말하길 네가 그때를 기억하기나 할까 의문이라더군. 정말로 기억에서 지우고 산다면 너무 끔찍한 일이다 싶어서 의뢰를 받기로 했어. 의도를 명확히 밝히려고 열세 살을 기억하란 메모를 남겼고. 그뿐이야.

  의문이 풀렸다. 그림과 연결된 사람 중 사내를 탓하려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의뢰인도, 그림을 그려낸 청년도 그가 그 시절을 나쁜 감정 없이 기억하길 바랐다. 사내 역시 그때의 결심을 완전히 이뤄주지 못한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썩 괜찮은 결말이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동생이 어릴 적의 자신과 제법 사이좋게 어울렸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좋은 시간이었냐고 물었을 때 동생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에 무거운 짐을 잔뜩 얹고 있었던 열세 살 소년은, 미래에 만나게 된 아이에게도 행복한 기억을 안겨주었다. 오늘만은 사내도 청년이 그려낸 환상에 감사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네 그림, 전부 살아 움직이진 않는다고 알고 있다. 능력 발동의 조건이 있나?

  「글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간절히 바라는 것아닐까 생각해. 이번에 네가 받은 건 어땠지? 인물이 움직이던가?

  「, 그래. 레이라와 만났어. 그 그림을 사장실에 걸어두자고 조른 것도 레이라였으니까, 아마 그 애의 소망이 반영된 결과겠지.

  좋은 기억이 생겼을 거야. 네 덕분이군. 차분한 목소리에 청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보다 부드러워진 얼굴을 보고 사내는 청년이 본디 아이에겐 관대한 인간이었음을 새삼 떠올렸다.

  「그래서 그림은 계속 걸어두려고?

  「아니. 오늘 하루 충분히 과거를 들여다보았으니 이제 치워두려 해. 소문대로 너무 생생한 그림이라, 보고 있으면 계속 그 시절에 머물 것 같아서. 그래도 네 작품이니까 계속 간직하도록 하지.

  「넌 자신에게 너무 냉정하다니까.

  「천성인 모양이지.

  그림을 떼어낸 자리에 흘깃 시선을 두고서 사내는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았던 기적도 하룻밤의 꿈으로 남길 바라는 건 그 나름의 고집이다. 어른의 모습을 덮어쓰면서 어떤 일에건 약해지지 않으려 했던 각오가, 그러한 엄격함으로 굳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오래 즐기지 못한다고 아쉬워할 것은 없다. 사내에게 오늘의 일은 충분히, 좋은 경험이 되었으므로. 그림을 매일 돌아보지 않아도 오늘의 감상을 선명하게 기억할 자신이 있으므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쿠로사키. 이번 그림은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

  솔직하게 감사를 표한 사내는 청년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걸 보고 통신을 끊었다. 인사는 진심을 담은 몇 마디로 충분하단 걸, 두 사람 모두 안다.

  그림을 걸어두었던 자리엔 아직 공간이 충분하다. 이미 작품을 걸었던 곳이기도 하거니와 의자에 앉으면 바로 보이는 자리이니 새로이 액자를 걸어도 좋을 것이다. 이번엔 어떤 것을 걸어두는 게 좋을까. 과거를 관대하게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으니 현재를 상징하는 작품을 건다면 어떨까. 최근 큰 성공을 거둔 프로젝트 사진을 걸어두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새로운 액자를 고민하는 사내의 얼굴에, 그림자는 더 비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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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