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은 빛을 몰고 온다. 이곳이 전장이기에 가능한 아이러니다. 적을 쓰러트릴 때도, 적이 아군을 쓰러트릴 때도 빛이 일었다. 누가 승리하건 패자는 빛으로 허물어지는 게 이곳의 법칙. 지금 발밑에 쓰러진 적도 예외는 없다. 이번의 패자는 유독 앳된 얼굴이었다. 열너댓 살인가, 그보다 아래인가. 아직 세상 물정도 모를 어린 여자애란 것만이 확실하다. 이 자리에 혼자 서 있다는 것이 문득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너와 함께 있었다간 분명 네가 손을 떠는 것을 보았을 테니. 너는 딱 이 나이대의 여자애만 보면 불안에 빠지곤 했다.
물론 네가 있었다 해도 결말은 같다. 너라고 적에게 자비로운 것은 아니었으니. 이곳에서 만나는 적은 전쟁놀이를 하는 아이가 아니라 침략군이다. 배틀용 디스크에 붙은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으로, 패자는 간편하게 처리된다. 잔해뿐인 땅에 빛이 내리쬐었다가 패자를 삼키고는 사그라진다. 빛이 걷힌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 돌아보지도 않는다. 돌아보는 순간 빤한 현실과 또다시 마주할 뿐이다.
어느 날 고향을 덮친 침략군은 화사한 도시의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그렇게, 이곳 사람들의 세상은 뒤집혔다. 아이들이 뛰어놀아야 할 광장엔 이제 건물의 잔해가 그득하다. 공원이었던 자리에선 풀잎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오직 탄내만이, 탄약과 파괴의 냄새만이 코를 찌른다. 웃음소리에 익숙했던 귀는 비명을 담게 되었다. 찢어질 듯한 비명보다 더 섬뜩한 것은 그 뒤의 침묵이다. 오랜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존자는 모두 알았다.
침략군은 자비가 없고 오로지 쓸어버리는 것에만 집중했으므로,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무엇도 남지 않았다. 산책을 나왔던 가족이 짓밟히는 일이 있었다. 적습에 놀라 도망치던 아이는 폭격에 휩쓸렸다. 운이 좋아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생존이란 행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진 누구도 몰랐다. 그렇기에 운에 기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오래지 않은 과거, 급하게 난민캠프를 꾸린 날, 너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의 소지품을 쥔 채 이야기했다. 이래서는 미래가 없어. 어떻게든 싸워야 해.
그렇게 말하는 너의 얼굴엔 슬픔보다 분노가 비쳤다. 두려움보단 적개심이 보였다. 하루하루 삶을 무너뜨리는 침략군은, 너에게 도망쳐야 할 포식자가 아닌 없애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어떻게?]
돌아올 말을 뻔히 짐작하고서 물었다. 너는 즉답했다.
[무장해야지.]
예상대로의 답변이었다. 동시에, 그 상황에서의 유일한 선택지이기도 했다. 살아남기 위해선 싸워야만 한다. 싸우기 위해선 무장해야 한다. 그리고 무장하기 위해서는.
[아카데미아의 디스크, 내가 분석하지.]
네 어깨를 치며 낮게 속삭였다. 너는 바로 그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군인은 없었다. 죄 없이 쓰러진 자들과 한 번도 무기를 잡아본 적 없는 이들뿐. 생존자가 무장하기 위해선 적의 무기를 제대로 알아야 했다. 군사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이 당장 무장할 길이란 ‘적의 것’을 두르는 것뿐이었으므로. 한 놈만 쓰러트리면 돼. 짧게 덧붙이고 돌아서자, 네 목소리가 등에 박혔다. 조심해. 너의 메마른 배려를 안고서, 바로 폐허로 걸어 들어갔다.
너의 소망대로 되었다. 침략군은 대개 학생이었고 전공을 세우고 싶어 눈이 벌겠기에 그 중 어리숙한 쪽을 노리면 그만이었다. 침략군 하나를 외딴곳으로 유인한 후 맹렬하게 공격하자 오래지 않아 제압할 수 있었다. ‘사냥감’에게 짓밟힌 패자는 겁에 질려 도망치려 했으나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느샌가 나타난 네가 패자를 힘으로 누른 덕분이었다. 패자의 왼팔에서 배틀용 디스크를 떼어내자마자 너는 구둣발로 놈을 지그시 밟았다.
[이거, 어쩔까. 카이토.]
다음 순간 네 입에서 흘러나온 건 섬뜩하리만큼 무심한 목소리였다. 패자는, 네 동생 또래로 보인 침략군은 너를 올려다보았다. 패자의 눈이 두려움으로 젖어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가 자신의 처분에 대해 묻고 있음을 바로 눈치챈 것이리라.
[그게 중요한 일인가?]
[아무래도 좋다면 내가 처리하고.]
[난 가능한 빨리 분석해야 하니까 네게 맡기는 게 좋겠어.]
[내게 맡긴다. 라.]
그렇게 반응하는 사이에도 너의 시선은 적군에게 향해 있었다. 싸늘한 시선이 꼭 먹잇감을 서서히 죽이는 포식자 같았다. 너의 믿음직스러운 부분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적에게 용서가 없는 모습. 어떤 상황에서도 약해지지 않고 위험을 제거하려는 태도. 너에게 힘을 실어줄 생각으로, 한마디 건네기로 했다. 디스크를 챙겨 자리를 뜰 때, 부러 웃음을 꾸며내며 말했다. 우린 다른 녀석들처럼 착하진 않지, 슌? 너는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너는 늦게서야 돌아왔다. 피로한 얼굴의 너에게, 패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너는 너대로, 처리의 방식을 따로 보고하는 일 없이 필요한 말만 꺼냈다.
[디스크의 분석, 어떻게 됐어?]
탄약 냄새가 밴 코트를 벗으며 너는 물었다. 난민캠프의 아이들을 재우고서 <연구실>에 찾아온 너는, 얼굴에 표정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다.
[대강은 알겠어. 바탕은 간단하니 우리 디스크에도 아카데미아의 기술을 이식할 수 있을 거야.]
[적에게 리얼 데미지를 주는 기술? 아니면 카드화 기술?]
[둘 다.]
[기쁜 소식인데.]
그러면 우리도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을 테니. 제 디스크를 들여다보며 말하는 너에게서 불안이나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에 선 사람이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너처럼 반응했을 리 없다. 네 상냥한 누이라거나, 전투에 투입될 때마다 괴로워하는 네 친우이기만 했어도 「하지만 그건 우리도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다는 거잖아.」란 말이 먼저 튀어나왔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반응해야 한다. 적을 상대하고 있다고 해도 타자를 해할 방법을 너무 쉽게 받아들여선 안 된다. 그러나 너는 주변의 아이들과는 달랐고.
[당장은 무리야. 하지만 이식하게 된다면 우리에겐 큰 힘이 되겠지.]
그 점이 네 장점이었다. 적어도 전장에서 너는 다수를 지킬 수 있는 존재였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언제든 적을 상대할 준비가 되어있었으니. 네가 복귀하기 전까지 난민캠프에 모인 생존자들은 모두 저항군을 결성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너도 연구실에 오기 전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을 것이다. 그래, 레지스탕스에게. 저항군의 이름을 먼저 들먹이는 데서 알 수 있었다.
[처음엔 껄끄러워해도 언젠간 다들 필요성을 이해하게 될 거다. 레지스탕스가 된다는 건 자기를 방어하는 건 물론 상대도 습격해야 한다는 것.]
[넌 이해가 빨라서 좋아.]
[우리는 비슷한 부류니까.]
네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비슷한’이라는 말이 묘한 안도감을 주어, 마주 웃었던 기억이 있다.
옳은 것과 필요한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쟁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너는 언제나 필요한 방식을 따랐고, 바로 그 부분이 네게서 마음에 드는 면이었다. 너를 볼 때면 지금 선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동시에, 너라는 동지가 있다는 것에 안심할 수 있었다.
너는 분명히, 저항군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연구의 성과는 오래지 않아 나왔다. 저항군에게 방패이자 검이 될 <적의 기술>을 심어줄 수 있게 되었을 때 너의 삶에는 큰 불행이 닥쳤다. 너의 하나뿐인 가족, 누이가 사라진 것이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 누이가 흘린 소지품 하나를 찾아온 너는 동생이 적에게 납치당한 것이라 주장했다. 카드화되었다면 이런 걸 남겼을 리 없어. 루리가 흔적을 남겼단 건 포로가 되었단 거라고. 네가 큰 소리로 떠들 때, 동료들이 전부 네 눈을 피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그때는 물론이고,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까지도 ‘포로’는 발견된 적 없다. 무엇이든 쓸어버리는 침략군이 몇몇 사람만 납치해간다는 번거로운 일을 할 리도 없다. 너는 동생이 적에게 당했다는 최악의 결말을, 차마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네 누이의 친구가 결국 불편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뜨자, 너는 바로 적 앞에 뛰어들기라도 하려는 듯 디스크를 집어 들었다. 안 돼, 슌. 너의 친우가 네 오른팔을 잡아 제지하려 했으나 너는 그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디스크를 왼팔에 장착하는 너에게서 이전 같은 침착함은 보이지 않았다. 금빛 눈은 광인처럼 번득였고 숨소리는 너무 가빴다.
이대로라면, 망가진다 ─ 불안감으로 네 이름을 부르자 네가 갑자기 이쪽으로 와 팔을 덥석 잡았다. 신을 만나기라도 한 듯 들뜬 얼굴로. 떼어내고 싶었으나 힘이 지나치게 셌다. 어떻게 떨쳐내야 할까. 너를 어떻게 진정시키는 게 좋을까. 급류가 되어 몰아친 생각을 끊은 건 너였다. 너는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연구가 끝났다고 했지, 카이토?]
[그래. 디스크를 개조할 수 있을…….]
[뭘 지켜보고 있는 거야. 당장 개조해야지.]
네 눈에 깃든 감정이 너무도 무거웠다. 뒤엉킨 감정 하나하나가 묵직하여 외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네 것부터? 저도 모르게 흘린 말에 너는 이미 왼팔의 디스크를 풀고 있었다.
[물론. 우린 이미 이야기가 되었잖아, 카이토.]
적의 기술을 장착한 디스크, ‘무장한 디스크’ 1호는 그렇게 너의 디스크가 되었다. 바꿔 말하면 적과 같은 방식으로 싸우기로 한 첫 번째 저항군이 너였다는 것. 너는 개조된 디스크를 받은 날부터 적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짓밟혀야 하는데 오래 버텨 성가신’ 정도가 아니다. 적을 쓰러트려 한 장의 카드로 만드는 무시무시한 전사가 된 것이다. 너에게선 날이 갈수록 죽음의 냄새가 났다. 흙과 쇠의 냄새, 화약 냄새. 그 모든 게 뒤엉킨 체취는 네가 삼킨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침략군. 너의 고향을, 너의 동료를, 그리고 네 가족을 앗아간 적.
생각해보면 그 냄새는 본래 침략군의 것이었다. 네 체취가 적군과 닮아가면서부터 동료들은 너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내용은 대개 비슷비슷했다. 저러다 힘을 잃으면 안 되는데. 슌은 너무 무모하게 싸우잖아. 아카데미아가 슌을 집중적으로 노리면 어떡하지? 같은 식이었다. 드러나게 동조할 것은 아니었으나 마냥 흘려들을 이야기도 아니었다. 누이의 ‘실종’을 기점으로 너는 정말로 급격하게 위태로워졌다. 너무 많은 싸움에 나서 너무 쉽게 자신을 내던지게 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누이를 지키지 못했단 죄책감을 덮을 길인 양.
이제 너는 전쟁이란 불이 옮겨붙었다기보다 스스로 불덩이가 되어 적 앞에 뛰어드는 듯했다. 아무리 강한 전사라도, 그런 식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빠르게 닳아가, 언젠가 거짓말처럼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런 결말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카이토라면 슌을 이해할 수 있지?”
시한폭탄 같은 너를 유독 걱정하는 사람이 있었다. 네 누이가 사라진 후로, 언제나 할 말이 가득한 얼굴로 너를 지켜보는 아이. 네 누이의 친구. 전투를 마치고 기지에 복귀하는 길에 그 애가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걸음을 멈췄다. 푸른 눈에 온갖 감정이 엉겨 있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상대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이토는 슌이랑 닮았으니까.”
“그런 면이 있긴 하지.”
우리는 비슷한 부류니까. 이전에 네가 흘렸던 말을 떠올리며 답했다.
“아마 슌도 카이토의 말이라면 들을 거야. 그러니까.”
“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해. 그럼 나도 제대로 전할 테니.”
“돌아와달라고, 해줘. 같이 나서기로 한 유토를 뿌리치고 혼자 나가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아. 알잖아, 요즘 슌이…….”
입은 열려있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속에 담아둔 말을 꺼내기 너무 힘겨운 것이리라.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짐작이 가거니와 그 애의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젖어있어서, 더 묻지 않기로 한다.
“알겠어. 일단 슌을 찾고.”
“우린 슌이 싸우는 걸 말리는 게 아냐. 다치지 않길 바랄 뿐이야. 그걸 꼭 말해줘.”
“그래.”
목적지가 바뀌었다. 기지로 가는 대신 너를 찾아 폐허를 헤매야만 한다. 잿빛으로 물든 도시, 잔해가 그득한 도시에서 몸을 숨기는 것이란 어렵지 않다. 동료와 다툼이 있었던 듯한 너라면 더욱 눈에 띄지 않으려 할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네가 갈 만한 곳을 하나씩 짚는다. 너는 뼈대만 남은 건물을 좋아했고, 윗부분이 날아간 탑과 기구가 죄다 파손된 유원지를 좋아했으며 ─ 의심 가는 장소를 찾아갈 때마다 허탕이었다. 네 모습은 물론이고, 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실패. 실패. 그리고 또 실패. 다리가 아파오고 숨이 거칠어졌으나 계속 걸음을 옮겼다. 너를 찾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다. 너를 기다리는 사람들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이었다. 너를 걱정하던 그 애는,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네 친우는 잠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너를 따르던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 것이 뻔하다. 원래의 너는 그렇게 여러 사람을 걱정시키지 않았는데.
누이가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너는 <저항군> 사이에서 믿음직스러운 연장자였고, 어른의 빈자리를 채우는 사람이었으며 좋은 동료였다. 동시에 내면까지 강한 전사이기도 했다. 네가 어찌할 수 없었던 사건이, 그런 너를 망쳤다. 그동안 잘 버티고 있었던 너에게 균열을 내, 네가 무너지게 했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생각이 멎었다. 눈에 들어오는 형체가 익숙해서였다. 전쟁 전 다니던 학원 근처, 작은 공원에 네가 있었다. 잔뜩 부서진 벤치 대신 산처럼 쌓인 잔해 위에. 말을 걸까 하다 너무도 쓸쓸한 모습에 입을 닫았다. 맹금을 의미하는 이름에 어울리게 너는 평소에도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번엔 잔해 더미에 올라탄 탓에 배로 쓸쓸해 보였다. 무리를 잃고 홀로 남겨진 맹수처럼.
“……유토?”
기척을 느끼기는 했는지, 너는 친우의 이름을 흘린다. 돌아보지도 않고서.
“유토가 아니라서 유감이군.”
“아, 카이토. 바쁘신 분이 웬일이야.”
그제야 네가 돌아본다. 금빛 눈이 어쩐지 흐리멍덩하다. 이제는 익숙해진 네 체취, 죽음의 냄새에 희미하게 피 냄새가 섞여 나는 것이 수상쩍다. 다쳤어? 슬쩍 물었더니 너는 웃어버릴 뿐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 너는 답하기 싫은 것에 대해선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사야카가 걱정해. 어서 돌아가야지.”
“진짜 걱정받아야 할 사람은 너 아닌가? 나는 너처럼 아카데미아에 수배당하진 않거든.”
적군의 눈에 띄어 집중 경계 대상이 된 일을 두고, 너는 살짝 비꼰다.
“너도 조금만 더 날뛰면 똑같은 처지가 될 텐데.”
“그럴 일은 없을걸. 쿠로사키 슌은 카이토만큼 위협적이지 않아서.”
위협적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덧붙이는 말이 먼지를 들이마신 듯 텁텁하다. 너는 역시, 스스로를 병기처럼 취급하고 있다. 적을 삼키는 것이 존재가치인, 날이 잘 드는 무기로. 생각이 거기까지 뻗자, 속에서 정체 모를 감정이 치민다. 네 멱살을 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편해? 널 포기하고 전쟁에 내던지기만 하면 그만이야?
자기를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는 주제에.
너는 자주 다쳐서 돌아왔고, 낫지도 않은 몸으로 또 적 앞에 뛰어들곤 했다. 그렇게 쉽게 불길에 뛰어들 거라면 균열 하나 생기지 않을 정도로 강해야 했다. 혹은 망가진 부분을 꾸준히 고쳐야 했다. 그게 아니면 최소한 강한 체라도 해야 했는데. 잔해 더미에 앉은 너는, 날개 다친 새처럼 위태로워 보일 뿐이다.
이대로 두면, 안 된다. 너를 걱정하던 아이의 뜻대로 당장 기지에 데려가야만 한다. 내려올 기미가 없는 너를 붙잡으려 잔해 더미에 올라갔다. 꼭대기까지 한 걸음을 남겨두었을 때, 가만히 앉아있던 네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여긴 위험해. 내 손을 잡고 앉아. 그 손을 잡고 너를 끌어내리려다, 너와 말이나 섞을 생각으로 일단 네 곁에 앉았다. 그 잠깐 사이에도 네 자리에선 쇠붙이와 타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필 이런 곳에. 불만을 누르고 입을 떼려는데, 또다시 네가 선수를 쳤다.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말이야. 모든 게 작게 보이잖아. 지나가는 사람도, 부서진 건물도 전부. 그게 마음에 들더라고.”
너답지 않게 한가한 말이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이에도 너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는 걸 보고 순간 기가 막혔다. 저를 걱정하는 동료들을 두고 이곳에서 풍경이나 감상하고 있었는지.
“그래서 이런 곳에 올라가 있었나?”
“그래. 여기 말고 높은 곳을 찾자면 다 부서진 건물인데 그런 곳은 위험하다고 유토가 자꾸 간섭이야.”
“내가 올 때까지 풍경은 실컷 봤겠지. 그러니까 이제.”
“잘 봐, 카이토. 이렇게 내려다보면, 이렇게 전부 조그맣게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으면. 우리가 겪는 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거든.”
잠깐이나마 생각을 멈출 수 있단 말이야. 메마른 목소리에선 감정이 비치지 않는다. 퍽 쓸쓸한 말을 흘리고도 네 옆얼굴엔 뜻 모를 미소가 걸쳐져 있을 뿐. 지옥에서 버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알게 된다. 너처럼 웃는 이들이 보통 어떤 결말을 맞는지.
“달라지는 건 없어. 내려가면 우린 또 전장에 내던져진다고.”
그런 사람은 대개 오래 버티지 못한다. 황폐해진 채로 최대출력을 내다 버티지 못하고 꺾이는 것이다 ─ 그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미래다. 그러니 의식적으로라도 강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미 먼 곳에 꽂힌 네 시선을 이곳으로 끌어오기 위해서라도.
“너한테서 피 냄새 나. 부상자는 감상에 젖을 여유 같은 거 없어. 약한 말은 접어두고 이제 그만 내려가지.”
“미안, 다들 내가 다쳐오는 거 싫어하지.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이유가 있었어. 지금 당장 돌아갔다간 유토에게 한 소리 들을 것 같으니까 조금만 시간 끌다 가자.”
평소와 다르게 지나치게 수다스럽다. 태평한 것이 아니라, 태평함을 가장하는 태도엔 분명히 의도가 있다. 너는 무언가를 감추고 싶은 것이다. 혹은 무언가를 잔뜩 털어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너에게조차 괴로운 것을. 어느 쪽이건 위태롭게 느껴져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너는 몽롱한 눈으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있잖아, 무슨 일이 있었냐면.
“아카데미아 놈을 처리하고 돌아가는 길에 쓰러진 여자애를 봤어. 멀리서 언뜻 보기에, 검은 머리카락이 길게 흩어져 있었고 붉은색 천이 몸을 덮고 있더라고. 레지스탕스의 표식, 루리는 허리에 맸었잖아.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루리 목소리가 울리는 거야. 오빠. 왜 날 이렇게 차가운 곳에 내버려두고 있는 거야? 날 놓친 것으론 부족했어? 날 구하러 와야지, 오빠.”
“……슌, 루리가 사라진 건.”
네 탓이 아냐. 란 말을 건네는 것보다 네가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것이 더 빨랐다.
“루리가 사라진 날, 그 주변을 몇 번 더 뒤졌어야 했는데. 못 했던 게 계속 마음에 걸리는 거야. 혹시 그때 내가 더 돌아보지 않아서 발견하지 못한 거라면? 그래서 루리가 저기, 쓰러져 있는 거라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그 여자애에게 가지 않을 수 없었어. 가야, 확인하잖아. 루리인지 아닌지.”
그래서 너는, 쓰러진 자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동생이 부상을 입었거나, 최악의 경우 죽었을 가능성까지 생각하고서. 누이가 사라진 후 급격하게 망가진 네가 어떤 심정으로 <누이일지도 모를> 자에게 향했을지는 상상할 수도 없다. 다음에 이어질 것은 분명 묵직한 이야기일 텐데 너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말을 잇는다.
“그 여자애와의 거리를 세 걸음 정도로 좁혔을 때, 난 그 애의 몸을 덮던 붉은색 천이 뭔지 알아차렸어. 사실 그만큼 가까워지기 전부터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 애는, 붉은색의 재킷을 입고 있었던 거야. 그건. 그러니까.”
뻔하잖아. 네 말의 뜻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잿빛의 도시에서 붉은 재킷을 입고 다니는 무리는 정해져 있다. 침략군. 제복을 입은 전사.
“아카데미아였군.”
“놈들의 제복이란 걸 바로 알아챘지만, 꼼짝도 않고 엎드려 있는 그 여자애를 한 번 뒤집어봐야 할 것 같았어. 그 애, 루리처럼 머리가 정말 길었단 말이야.”
“아니었지?”
“눈이 회색이었으니까, 그래. 루리가 아니었어. 아. 아직은 신이 있구나.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감사 인사라도 건네고 싶어졌을 때, 공격이 날아들더라고. 숨어든 적군이 있었던 모양이야. 딴에 동료를 구하겠다고 내게 덤벼든 거겠지. 나답지 않게 경계를 늦추고 있었어서, 큰일 날 뻔했어.”
이제 이해했겠지, 카이토. 오늘은 정말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너는 가벼운 웃음과 함께 이야기를 마쳤다. 그제야 네가 왜 고집스레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왜 시간을 끌며 이곳에 앉아있는지 확실히 알아차렸다. 너는 변명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한심하긴.”
“요즘 많이 닳았나 봐.”
그대로 기지에 돌아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너는 누가 봐도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으니까.
사실은 말이야, 카이토. 너는 시선을 천천히, 이쪽으로 돌리며 속삭인다. 나를 찾아와준 게 유토가 아니라 너라서 다행이라 생각했어. 그 말에 숨겨진 뜻은 분명하다. ‘동류가 아니면’ 너를 감당해줄 수 없으리란 체념. 어쩌면 네가 자꾸 혼자 다니려 했던 것도, 주변에 네 황폐함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단 소망에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옥은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료를 떼어놓고 다닐수록, 자신을 내던질수록. 배로 닳아버릴 뿐.
“……예전엔 소원이 제법 뚜렷했는데 말이야. 요즘은 그냥 막연해. 전부, 끝나버리면 좋겠단 생각뿐이지.”
그렇게 닳아버린 끝에, 너는 미래를 꿈꿀 수도 없게 되었다. 무기력한 소망이 말해주고 있다. 지금 너에게 건넬 수 있는 것이라곤 의미 없는 위로뿐.
“언젠간 이 싸움도 끝날 거다. 아카데미아가 언제까지나 이곳을 휘젓고 다닐 순 없어.”
“그러다 나도, 끝나버렸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도록. 메마른 목소리가 폐허를 울렸다.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모두, 너를 걱정하는 한편 마음 깊은 곳에선 ‘언제나 강했던’ 너를 믿고 있었다고. 그래서 너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라고. 모두의 미래에, 너는 있을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네가 버텨줄까. 그럴 거라 확신할 수 없어서 괴롭다. 차마 말을 덧댈 수 없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더니, 너는 어깨에 손을 올려주며 덧붙였다.
“이런 이야기, 너라서 하는 거야. 유토에게라면 못 해.”
“애들한텐 그런 모습 보이기 싫단 건가.”
“아니. 순진한 애를 괴롭힐 수 없단 뜻이지. 넌 이런 걸, 그냥 듣고 흘려줄 것 같단 말이야.”
믿음이라기보다 요구에 가까운 말이었다. 너는 여기서 고백한 모든 것을, 네가 흘릴 수밖에 없었던 황폐함을 모른 체 하길 바라는 것이다. 기지에서 너를 기다리는 이들이 네가 이토록 망가졌단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싸움은, 어떻게든 끝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몇 번이고 반복해온 약속을 흘린다. 저항군을 결성한 날부터, 흔들리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주문처럼 외던 말을.
“카이토라면 믿을 수 있지.”
“그러니까 넌.”
“무리하지 마라, 라고 할 생각이었지? 뻔하지.”
너는 핏기 없는 얼굴로 낄낄댄다. 그 정도의 말로 요약될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어쩌면 일부러 뒷말을 듣지 않기로 한 것인지.
“걱정할 것 없어. 나는 곧 여기를 떠날지도 모르니까.”
“어디로 가려고?”
“아카데미아 수장의 본거지, 알 것 같거든. 거기서 뭐라도 약점을 찾는다면. 어쩌면 여기의 전쟁도 루리를 찾는 일도 조금은 수월하게 끌어갈 수 있을지도.”
“어디인지는 끝까지 말 안 할 생각이군.”
“차원을, 넘어갈지도 몰라. 유토에겐 비밀로 해줘. 쫓아오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도망치고 싶은 거라면 돌아오지 않아도 돼. 너, 지금 그 상태론 레지스탕스에 별로 보탬도 안 되니까.”
심술궂게 이야기한 데는 이유가 있다. 개조한 디스크에는 먼 이국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는 기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기술로 네가 갈 수 있는 곳은, 적국을 제외하더라도 두 군데. 두 곳 모두 전쟁의 불똥이 튀지 않은 곳이라 하니, 네가 작정하고 숨어들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쟁을 잊고, 괴로운 삶에서도 벗어나서. 더는 망가지지 않고.
그렇게라도 네가 살 길을 찾았으면 했는데. 너는 천천히 고개를 내젓는다. 안 돼. 애들의 방패는 되어줘야지. 라면서.
“여기로 돌아와서, 애들을 구하면서 끝나야 해.”
그래도 마지막엔 어른 행세를 하고 싶거든. 너는 폐허를 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선, 잔해 더미에서 풀쩍 뛰어내린다. 아슬아슬하게 착지한 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쪽을 돌아보며 웃는다. 뭐 해. 설마 뛰어내릴 자신 없는 건 아니겠지? 느슨한 도발에 반응하는 대신, 잔해의 언덕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부서진 벤치 곁에 선 너에게서 조금 전의 쓸쓸함은 찾아볼 수 없다. 감상을 빠르게 죽이는 게 네 특기였다.
“이렇게 늦은 것에 대해선 어떤 핑계를 댈까.”
공원을 나서며 너는 물었다. 의도가 분명한 질문이었다. 오늘 쏟아낸 이야기를 ‘어떻게’ 덮어놓을지를 묻는 것이다. 너는 이미 결론을 지어놓고 있었다. 네가 털어놓은 모든 걸, 모른 척 해줄 것이라고.
“널 찾는 데 오래 걸렸다고 해야지.”
꼴사나운 모습까지 전할 순 없으니까. 무심하게 덧붙이자 답 대신 가벼운 웃음소리가 귀를 때렸다. 한 번이라도 눈감아주기로 한 것에 만족했는지.
“다쳐오지나 마. 다음번에 또 그런 식으로 굴면 애들 앞에서 낱낱이 얘기할 테니까.”
“노력해볼게.”
진심이라곤 눈곱만큼도 비치지 않는 목소리였다. 기지로 향하는 내내 네가 돌아보지 않은 것은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인 듯했지만, 그 얄팍한 비겁함을 탓하진 않았다. 앞장선 너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너무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늘만은, 덮어줄 것이다. 너의 가장 약한 부분을, 황폐함을, 전부 외면해달라는 뻔뻔한 요구를. 그것이 너와 비슷한 부류로서, 의도치 않게 너를 들여다본 사람으로서. 너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호의임을, 알고 있었다.
* Side D: https://hyeonsoyah.tistory.com/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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