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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이 태어나서 처음 들은 소리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였다. 노이즈도 감정도 없이 지나치게 깨끗한 목소리는 기계의 알림음에 가까웠던 것 같다. 아름답지도 개성적이지도 않았던 목소리가 소년에게 특별했던 이유는 하나. 그 이외엔 타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이었다. 건조한 음성은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붙었다. 오늘도 문제를 잘 풀었구나. 같은 칭찬일 때도 있었다. 눈이 감기기 직전 잘 자렴, 하고 울리기도 했다. 감정이 배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소년에게는 그것만이 세상과의 연결고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이야말로 소년이 삶에서 처음 만난 타인이었다. 모든 것을 상냥하게 가르쳐준 그 음성은 보호자에 준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눈을 감아도 이따금 또렷하게 머리를 울리는, 친숙한 목소리. 그러나 소년은 목소리의 주인을 그려낼 수 없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해도 소년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장치의 일부인 듯 거대한 렌즈뿐이다. 그것이 눈동자처럼 소년을 담곤 했다.

  [오늘은 동생을 만나게 될 거야.]

  어느 날 목소리는 소년이 태어나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을 이야기했다. 장난감에 둘러싸여 혼자 놀고 있던 소년은 눈이 둥그레졌다. 동생이라는 하나의 단어가 머릿속을 메웠다. 수많은 책이 가족을 가르쳐주었지만, 자신에게도 그런 것이 있을 줄은 몰랐다.

  [동생?]

  [너는 오빠가 되어야 해서 태어났거든.]

  네가 지금까지 많은 것을 배운 것도, 이렇게 자라난 것도, 동생을 위해서란다. 덧붙인 말은 더욱 의문스럽다. 언제나 저를 돌봐주던 목소리가 소년은 갑자기 낯설어졌다. 그동안 이곳의 모든 것은 자신에게 맞춰져 있었는데, 갑자기 제 삶은 타인을 위해서 설계되었다 말하고 있었으므로.

  [막 태어난 아기야. 너처럼 자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해. 그러니 네가 돌봐줘야만 해.]

  [어떻게?]

  [네가 배운 모든 것을 쓰면 돼.]

  많은 걸 배웠잖니. 그 말에 소년은 그동안 머릿속에 차곡차곡 넣은 것을 떠올려보았다. 책으로, 그리고 이야기로 게걸스레 삼킨 지식들.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으니 모든 걸 기억하라고, 목소리는 말했다. 소년을 교육시킨 것은 였기에 소년은 그 말을 무조건 믿었다. 당장은 방법을 몰라도 괜찮을 것이다. 동생이 삶에 들어오면 어떻게든 오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소년은 바로 조르고 들었다.

  [보여줘, 동생.]

  동생이란 단어는 아직 낯설었지만 태어나 사람을 만난 적 없는 소년에겐 마냥 궁금한 대상이었다. 답지 않게 조르자, 소년의 귓가에 가벼운 웃음소리가 울렸다. 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렴. 얌전히 명령을 따른 소년은 목소리가 일러주는 대로 먼 방으로 향했다. 소년이 지내던 집에서도 가장 깊숙한 방, 그동안은 몰래 들어가려고 해도 단단히 잠겨있었던 곳에서 소년은 멈췄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문은 살짝 미는 것으로도 열렸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소년이 발견한 것은 요람이었다. 그림책의 삽화로만 알았던 아기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가까이 가도 돼. 말이 떨어지자마자 몇 발짝 밖에서 아기를 바라보던 소년은 요람에 다가가 조심스레 아기의 손을 쥐었다. 처음 만난 아기는 너무도 작고, 따뜻했고, 거짓말처럼 사랑스러웠다.

  [이름, 알려줘야겠지? 쿠로사키 루리야.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는, 지금 알 필요는 없겠지.]

  [쿠로사키 루리.]

  소년은 그 이름을 입 속에서 굴려보았다. 처음 듣는 이름에서 친숙한 느낌이 났다. 소년은 앞으로 자신이 그 이름을, 그렇게 불릴 아기를 평생 사랑하게 되리란 걸 직감했다.

  넋을 잃고 아기를 바라보다 소년은 문득 깨달았다. 이름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 속 인물에게도 이름이 있고 막 태어난 아기에게도 이름이 붙었는데 저에게만 없었다. 그동안 저를 돌봐주던 이에게도 가끔 아가라고 불린 게 고작이었다. 동생을 본 때 소년은 자신도 인간임을 실감했다. 동생의 이름을 들으며 사람 사이에선 서로를 구분하는 명칭이 필요하다는 것도 느꼈다. 그래서 소년은 드물게 요구했다.

  [나에게도 이름, 지어줘. 루리한테 소개할 거야.]

  [그래, 루리와 함께 지내려면 이름이 필요하겠구나.]

  다행히 소년을 키워준 이도 소년의 요구를 이해하는 듯했다. 동생의 것과 어울리는 이름이기만 바라던 소년은, 오래지 않아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슌은 어떠니?]

 

* * *

 

  청년은 현기증에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적에게 납치당한 동생을 찾아 침략자의 세계로 왔지만, 적진에 파고드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에겐 상당히 무리한 일이었다. 부상은 완전히 치료하지 않았고, 안전한 곳에서 휴식을 취한 것도 너무 오래되었다. 그렇게 억지로 움직이다간 네가 먼저 쓰러져. 폐허가 된 고향을 떠나올 때 동료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으나 청년은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힘을 잃고 있으니, 가능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는 자신이 점점 망가지고 있음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몸이 약한 탓은 아니었다. 전쟁에 내몰리며 소모가 너무 컸기 때문만은 아니다. 날이 갈수록 무너지는 몸은 그에게 따라붙는 지독한 저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소중한 것을 그러쥐려고 하면 추락하고 마는 저주. 말했잖니, 아가. 어린 날 저를 돌봐주었던 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잃을 것을 사랑해선 안 된다고. 그건 주제넘은 일이라고 말이야. 기계음에 불과한 것에 감정이 밸 리가 없는데, 청년은 보호자의 목소리에 연민이 깃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네가 사랑하게 될 모든 것은 네 것이 아니야.]

  언젠가 보호자는, 아이에겐 너무 씁쓸한 예언을 남겼다. 처음으로 사랑한 인간인 동생은 언젠가 떠날 존재라고 했다. 앞으로 청년의 기억에 남을 모든 존재가, 그에게 잠깐 맛보여줬을 뿐인 세상의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사랑하면 어떻게 돼?]

  [모든 힘을 잃고 죽게 되겠지.]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접한 타인인 보호자는 장치 같은 것이어서, 교육을 마치자 그대로 정지했다. 사랑하는 동생은 적에게 납치되었는데 모두가 동생에게 성녀의 역할을 기대하는 듯했다. 동생 이후로 가장 아꼈던 친우는 타인의 몸에 깃들어 부유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것을 잃고만 있을 수 없어서 나섰지만 청년이 맞닥뜨리는 건 실패뿐이었다. 침략자를 쓰러트리지도, 친우를 되돌리지도 못했다. 적진에 뛰어들겠단 각오로 싸우자, 급작스레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세상의 임을, 청년은 알았다.

  그럼에도 청년은 멈출 수 없었다. 소중한 이를 사랑하는 것도, 상황을 바꾸려 싸우는 것도 이미 그의 영혼까지 밴 본능이었으므로.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소중한 사람을 빼앗긴다면 되찾기 위해 싸워야 했다. 이른 나이에 절망에 익숙해진 바람에, 세상이 안기는 고통은 무겁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결말이 날 것이다. 세상의 뜻이 이기건, 자신이 이기건. 만일 저주를 깨기 전 쓰러져 죽게 되어도 분한 일은 아니다. 삶을 바쳐 세상의 뜻에 저항한 것이 되기에. 몸이 무너지는 것을 느낄수록 청년은 덤덤해졌다. 가까워지는 죽음은 보통 하나의 사건으로만 느껴졌고 때로는 길고 긴 실패의 끝처럼 다가왔다. 타인을 위해 설계된 삶이니 언제든 끝날 수 있다고, 마음 한 편에선 체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름은 동생에 맞춰 붙여졌다. 동생을 만나기 전까지 청년이 자라난 집은 본래 동생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 했다. 너는 오빠가 되어야 해서 태어난 거란다. 보호자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동생은 그에게서 보호자를 찾았고 친우는 그를 울타리로 삼았다. 청년은 길지 않은 삶에서 이름으로 불리는 것보다 주변인의 부속품처럼 소개되는 것이 더 익숙했다. 그 희한한 설계에 청년이 부당함을 느끼지 않은 건, 그만큼 헌신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 편했다. 소중한 이에게 삶을 맞추는 것은 기쁨을 안겼다. 어쩌면 타인의 필요가 되는 길이야말로 타고난 욕망이었을지도 모른다.

  타자를 위해 태어났음을 증명하듯, 청년은 주변인의 흔적을 쉽게 찾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동생의 파장을 감지하는 것은 청년만이 가진 능력이었다.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 희미한 파장이었지만 청년은 그것으로 먼 곳에서도 동생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내부 구조를 익혔을 리 없고 동생이 갈 만한 곳 또한 알지 못하는 청년이 지금 동생을 찾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 무턱대고 걷는 듯 보여도 청년은 익숙한 기척을 따라 동생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곳 어딘가에, 있다. 청년이 태어난 이유이자, 처음으로 사랑한 대상인 동생이. 동생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걷고 또 걸었더니 어느새 청년은 적진의 중심부에 있었다. 침략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숨겨졌을 장소에. 적진에 들어설 때부터 공격받을 것을 각오하고 전투태세를 취했으나 희한하게도 청년은 목적지에 향하며 별다른 방해물을 만나지 않았다. ‘패잔병을 사냥하려 달려드는 군사도, 그의 행동을 묶을 트랩도 없었다. 그의 삶에서 드물게, 일이 수월하게 풀리고 있었다.

  꼭, 기적이 찾아들기라도 할 것처럼.

  마침내 목적지에 닿아 육중한 문을 열었을 때 청년은 모든 생각을 잊었다. 살면서 본 어느 것보다도 강한 빛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므로. 눈이 멀 듯한 빛에, 청년은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갇혀있을 곳으로. 안으로 들어설수록 빛은 짙어진다. 그는 신이라도 마주한 듯 경건해졌다.

  방의 끝에서 청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거대한 장치. 그곳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동생의 기척도 거기서 끊긴다. 내부를 들여다본 청년은 장치의 바닥에서 사람의 형상을 보았다. 단정한 얼굴과 긴 머리카락이 언뜻 동생을 연상시켰다. 빛에 뛰어든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정신이 드니 어느새 그는 장치에 갇혔던 이를 안고 있었다. 닫힌 눈꺼풀에, 붉은빛을 띠는 머리카락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자를, 청년은 제 코트를 벗어 조심히 감쌌다. 여자는 그가 그토록 찾던 동생은 아니었으나 동생의 모든 것을 풍겼다. 그것도 모든 감각이 마비될 것처럼 강하게.

  청년이 여자를 안고 나오려는 때, 눈부신 빛이 마법처럼 걷혔다. 그녀야말로 지상에 강림한 신비라고 이야기하듯. 거기서 청년은 성화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모든 것이 너무도 기적 같았다. 여자에게서 동생의 파장이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도. 그것이 청년을 들뜨게 했다.

  “당신이 희망이었어?”

  모두가 숨기고 있던 것 말이야. 저도 모르게 흘린 말에, 여자가 눈을 떴다. 그녀의 보랏빛 눈을 본 순간 청년은 삶에서 가장 특별했던 날을 떠올렸다. 동생을 만난 때. 그 날 청년은 처음으로 인간을 만났고, 자신이 인간임을 느꼈다. 그리고 그날부터 강렬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 실패의 연쇄에도 청년을 움직이게 했던 것. 청년은 앞으로, 동생에게 향했던 감정의 무게만큼 그녀를 원하게 되리란 걸 직감했다.

  그는 여자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뭘 원하는지 모르겠네.”

  엉뚱한 말에, 여자는 나른하게 답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위태롭게 느껴져 청년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고.

  “……도망치자.”

  “어디로.”

  “모두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있어. 누구도 당신을 쫓아올 수 없는 곳이야.”

  여자를 데리고 나올 때 청년은 그동안 희망 없는 전쟁에 저와 함께 뛰어들었던 저항군을 잊었다. 전장보다는 학교가 어울려서, 함께 싸우면서도 동생처럼 손이 가던 소년들을. 저에게 미래를 약속한 리더를. 그리고 고향에서부터 안고 온, 생존자의 의무까지도. 오로지 여자를 구했다는 기쁨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상기된 얼굴로, 그는 적진을 빠져나왔다. 다음은 여자에게 약속한 은신처로 향하는 것이었다.

  낙원이라도 꿈꾸는 모양이지. 여자는 믿음이 가지 않는 듯 말했지만 청년이 갈 곳은 정말로 모두에게서 자유로운 곳이었다. 어릴 적 자주 드나들었던 곳, 무슨 이유에선지 세상 사람들은 도통 찾지 못하는 장소. 청년은 여자를 안은 채, 오래 전 세운 <비밀 기지>로 향했다. 안락한 집은 아니었지만 몸을 붙이고 머물 정도는 될, 휴식처였다. 목적지에 닿자 여자의 눈이 둥그레졌다. 이런 곳에 오리라곤 생각도 않았던 것 같다.

  “여기, 차원의 틈새네.”

  여자는 그동안 청년이 비밀의 공간으로만 취급했던 곳을 명확한 이름으로 불렀다. 아무래도 그녀도 이곳을 잘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렇게 불리는 건 몰랐어.”

  “어떻게 여기 올 생각을 했어?”

  “어릴 때부터 자주 왔던 곳인데.”

  “보통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은 아니어서, 신기했어.”

  “방해받지 않으니 좋잖아.”

  아카데미아도 여기까진 들어올 수 없어. 그러니 당신은 안전해. 청년은 자랑스레 이야기하곤, 여자를 집으로 안내했다. 다행히 소년기에 그가 채워 넣었던 물건이 아직 남아있었다. 시간이 제대로 흐르지 못하는 공간이라, 수년 전의 것인데도 웬만한 물품은 그대로 쓸 수 있었다. 청년은 여자에게 적당한 옷을 꺼내주려다 이곳에 둔 것이라곤 죄다 열 살 즈음까지 입었던 것임을 깨닫고, 어색한 웃음만 돌려주었다.

  “다음에 나가서, 당신이 입을 것을 구해올게.”

  집에 들어온 후 한동안 침묵하던 여자가 그제야 입을 뗐다.

  “언제까지 여기 머물 생각이야?”

  “당신이 원할 때까지, 계속.”

  “그래, 도피도 나쁘지 않겠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그 길밖에 없을 테니까. 여자는 그 말만 남기고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창가에 걸쳐진 시선은 세계를 다 담을 듯 아득했다.

 

 

2

 

  여자는 청년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를 명백하게 받아주기로 한 것도 아니니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했겠지만, 청년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여자와 함께하며 그는 오랜만에, 평화로웠던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귀가 멀 것 같은 포성과 비명은 없다. 지독한 고요만이 그들에게 펼쳐졌다.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매일은 옛 일이 되었다. 두 사람은 불안도 경계도 없이 시간을 보냈다. 때로는 늘어지게 잠들었고, 때로는 허름한 은신처를 꾸미기도 했다. 한가로이 식사를 준비할 때면 청년은 삶을 잠식한 전쟁이 하룻밤 악몽에 불과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있잖아. 옷을 조금 구해왔어. 청년이 정성스레 싼 옷 꾸러미를 내밀었을 때, 창밖만 보던 여자가 돌아보았다. 왜 이런 것을. 입은 열지 않았지만 눈으로 묻고 있었다. 그녀는 청년의 호의를 낯설어했다. 껄끄러워한다기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혹은 생각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그가 처음으로 요리를 내온 때도 그녀는 눈이 둥그레져서 왜 나에게까지?’하고 물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서야 청년은 여자가 식사 등의 살면서 당연한 일에 의문을 보인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인간의 삶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 갑자기 세상에 떨어진 탓에, 평범한 인간의 생활에 바로 적응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여기서 계속 지내려면 옷이 필요하잖아.”

  “계속?”

  “언제까지나 있진 않겠지만, 그래도 내가 힘이 남아있을 때까진 당신을 돌볼 생각이야.”

  사람을 돌보는 건 익숙하거든. 청년은 덤덤하게 덧붙였다. 많은 것을 가르쳐준 보호자가 기능정지한 후, 청년은 그동안 익힌 모든 지식을 동원해 홀로 동생을 키웠다. 전쟁이 일어나고는 어른들이 사라진 통에 어른처럼 나서, 살아남은 아이들을 돌봐왔다. 그의 삶은 타인을 보호하고 보살피는 데 맞춰져 있었다.

  “그랬겠지. 동생이 있다고 했던가?”

  “그래, 여동생이 하나.”

  “타인에게까지 그렇게 정성 들일 필요는 없어.”

  “당장은 갈 곳이 없잖아. 그러니까.”

  그제야 여자는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단정한 얼굴에 걸리는 것은 불쾌는 아니었다. 꾸러미를 풀면서 여자는 자못 상냥하게 말했다.

  “바깥에서 구해왔지? 군대가 날뛰어서 위험하다면서.”

  “스탠더드는 아직 괜찮아.”

  “몸도 안 좋은데, 앞으로는 무리하지 마. 둘이서 지내는 거라면 여기 있는 것으로도 제법 버틸 수 있어.”

  제 몸을 걱정하는 말에 청년의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머리를 지배하는 것은, 두려움. 그녀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나빠진 몸에 대한 불안보다 몸의 이상을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청년은 명백히 죽어가고 있었다. 동생을 구하려 결심한 후 망가지던 몸은 여자와 함께하면서 남은 삶을 헤아려야 할 정도로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청년은 자주 피를 토했고 움직일 힘이 없어 거의 쓰러져 있기도 했다. 감각조차 나날이 망가져갔다. 짐작 가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여자를 돕는 것이 세상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것. 아무래도 그는 세상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만 저지르게 되는 모양이었다.

  세상은 왜 여자를 돕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혹은 왜 그녀 곁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그녀가 안은 무언가가 세상을 위협해서인지, 제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 청년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그의 선택은 같다. 죽음이 닥칠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키는 것이다. 세상이 바라지 않았음에도 동생의 흔적을 쫓았던 것처럼. 실패의 연쇄에도 싸움을 거듭했던 것처럼.

  무언가를 욕망하면 반드시 무너지는 삶이기에, 청년은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순간에도 그는 여자가 자신이 죽어가는 이유를 알아챌까 두려워할 뿐이다. 세상의 뜻이 둘을 갈라놓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무슨 말을 할까. 청년은 여자의 입술이 열리는 것을 상상한다. 그녀가 내릴지도 모를, 가장 무시무시한 명령을 그린다. 떠나지 그래?

  “이것 봐, 안색이 나쁜데…….”

  청년은 뺨에 스치는 온기에 움찔했다. 어느새 긴 손가락이 뺨을 쓸고 있었다. 보랏빛 눈에도 그가 가득 담긴다. 청년은 이런 친절에 익숙하지 않다. 신의 손길이라도 닿은 듯 얼굴이 달아올랐다.

  “정말 무리하지 않는 거 맞아?”

  그녀의 시선은 자신을 비추던 보호자의 눈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이든 담아낼 것 같던 거대한 렌즈. 내면을 해부당하는 것 같아, 청년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런 눈에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식사 준비할게.”

  도망치듯 돌아서다 청년은 현기증으로 비틀거렸다. 눈앞의 세계가 잔뜩 이지러진다. 차원의 틈새라고 멀미를 하나 봐. 시시한 농담으로 넘어가려던 청년의 등에 여자의 목소리가 꽂혔다.

  “망가지는 걸 당연하게 여겨선 안 돼, 알겠지?”

  회피하려는 것을 알아챘는지 여자는 한 번 더 확인하려 든다. 청년은 거짓으로 답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여자에게서 멀어지자 청년의 시선은 빠르게 식재료로 옮겨갔다. 두 사람분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청년의 몫이다. 감각이 무너진 탓에 최근엔 음식 맛을 보는 것도 힘들었으나, 여자는 무엇을 내놓건 별 말 없이 먹어주었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평화롭다. 침입자는 없고 여자는 청년을 떠나지 않았으며 아직 청년은 그녀를 돌볼 힘이 남아있었다. 몸이 움직여지는 한 청년은 지금의 평화만을 생각하며 살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살피며 고요한 일상을 누리는 것이다. 오랜 전투에 지친 청년에게는 지금 같은, 목적 없는 나날이야말로 안식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여자는 어떨까. 스튜를 준비하며 청년은 그녀와 만난 날을 떠올린다. 천사가 내려오듯, 눈부신 빛과 함께 지상에 나타난 사람. 지금껏 희미하기만 했던 동생의 기척을 선명하게 만들어준 사람. 원래라면 청년이 평생 만나지도 못했을, 신비.

  그런 사람이 현재의 삶에 만족할 수 있을까. 여자가 가장 바라는 것은, 보살펴주는 이는 아닐 것이다. 세계와 단절된 곳에서 숨어 지내는 것도. 그녀 같은 사람이라면 대의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제 힘으로 실행할 기적을 안고서 짧은 휴식을 취하는 것일 수도 있다. 때문에 청년은 그녀가 바라보는 세계를 눈에 담고 싶었다. 그녀에게서 목적을 듣고 필요한 모든 것을 바치고 싶었다. 그녀를 위해 삶을 소모하는 것이야말로 청년의 기쁨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어도 괜찮다면 죽음까지 그녀에게 걸어놓기를 바랐다. 청년이 태어나 배운 사랑은 어딘가 숭배와 닮은 데가 있다.

  “당신이 나에게 뭘 바라는지 모르겠지만.”

  때마침 여자는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운을 뗀다.

  “아마 지금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 아닐 거야.”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이 이야기해주는 건데.”

  “무엇을.”

  “지금 내가 당신에게 해줬으면 하는 것.”

  여자가 답을 돌려주기만 하면, 청년은 그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건 이뤄낼 작정이었다. 신에게 공물을 바치듯. 어쩌면 신이라는 비유야말로 청년이 바라보는 여자의 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인지도 모른다. 모든 감정을 오롯이 한 대상에게 쏟으며, 스스로 모든 것을 안겨주려 한다는 점에서. 여자가 신처럼 기적을 베풀기를 마냥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삶에 어떻게든 기여하고 싶을 뿐이다. 다만 그녀가 신이 되길 바란다면, 얼마든 신으로 만들어줄 수 있었다.

  청년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생각하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는 태생부터 타자에 맞춰져, 타인이 원하는 것이라면 몸을 부숴서라도 이루어낸다. 여자가 세상을 구하자고 하면 그때부터 세상을 사랑할 것이고, 모든 악을 없애자고 말하면 그녀가 보지 않는 곳에서 악인을 전부 묻어버릴 수도 있었다.

  명령만 내리면, 할 수 있다. 무엇이든, 어떤 불가능이든.

  자신만만한 청년에게 바로 소망을 말하는 대신, 여자는 천천히 그에게로 가까워졌다. 그녀는 청년이 바깥에서 구해온 옷을 입고 있었다. 블라우스가 다소 헐렁한 것은 그가 제 체격을 기준 삼아 눈으로 대강 치수를 가늠한 탓이리라. 청년이 머릿속으로 사이즈를 수정할 때, 여자는 어느새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약속해주는 거야.”

  “무엇을?”

  “지금 같은 날.”

  그게 무슨. 청년이 답을 찾는 것보다 여자가 그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빨랐다. 청년은 조금 전 자신이 섰던 곳에서 저 대신 완성된 스튜를 담아내는 여자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당신과 함께하지 못하게 되면, 이런 날도 잘 없을 것 같아서.”

  여자는 눈을 내리깔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여자가 말하는 것은 지금 청년과 함께하는 일상인 듯했다. 추악한 욕망도 처참한 폭력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지극히 평온한 나날. 하루하루 죽어가는 중에도 청년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간. 지금의 시간이 그녀에게도 안식이 된다면야 청년은 더욱 행복하게 그녀를 보살필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어쩌면 중대할지도 모를 문제이기에 청년은 그녀에게 답을 듣기로 한다.

  “이렇게 평범한 날로, 충분해?”

  “글쎄. 언제까지나 이럴 순 없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에겐 평범한 날이야말로 귀하잖아.”

  “우리 같은 사람이란 게 뭔데?”

  끈질긴 질문에, 식탁으로 그릇을 가져가려던 여자가 멈칫했다. 청년은 여자의 입가에 걸리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안타까움과 연민이 한데 얽힌, 미지근한 웃음.

  “도구.”

  짧은 답은 씁쓸한 빛마저 띠고 있었다.

 

* * *

 

  도구라는 말은 청년에겐 낯설지도 않은 표현이었다. 어린 날 보호자가 말해주었던 그의 운명도, 크게 보면 도구의 삶이었다. 전장에 내몰리면서는 동료들에게, 희망을 찾으려 고향을 떠나고선 저를 받아준 저항군의 리더에게 그런 말을 듣기도 했다. 동료들의 말에는 언제나 안타까움이 깔려있었다. 그렇게 살아선 안 돼. 이런 곳에서라도 너를 챙겨야지. 반면, 청년을 전사로서 사용한 리더의 말은 냉정했다.

  [너는 인간으로서 결여되어 있다.]

  청년은 저와 엇비슷한 나이의 리더가 어느 날 자신을 따로 불러 이야기하던 때를 떠올린다. 그의 눈은 언제나 메스를 든 의사 혹은 연구자를 연상시켰다. 리더가 손에 틀어쥔 사람을 평가할 때마다 청년은 그 남자에게 저도 모르는 환부를 내보이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 날의 말도 진단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청년은 생각한다. 들여다볼 생각 없었던 병을 읊는, 차가운 진단.

  [자기중심성이 훼손되어 있어. 그런 삶은 도구의 방식이라 해야겠지.]

  [간섭할 권리는 없지 않나?]

  [물론 그렇지만, 스스로 인지하고는 있길 바라.]

  [그쪽이 내게 바라는 건 날이 잘 드는 무기였지 완성된 인간이 아니었을 텐데.]

  비꼬는 말에도 리더의 얼굴에는 감정이 비치지 않았다. 그는 물러서는 일 없이, 건조한 말로 청년을 찔렀다.

  [너의 삶은 타인에 맞춰져 있다.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았지만, 그 애는 자아가 없는 결과이니 너와는 달라. 너는 쿠로사키 슌이라는 인간으로서, 타자의 도구가 되려고 해. 그런 삶은 허무뿐이야. 돌려받을 것도 없이 빠르게 연소하겠지.]

  청년은 분노하지 않았다.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 가지 의문을 던졌을 뿐이다. 리더는 답하지 못했으므로 청년은 그의 진단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도구로서의 삶은, 나쁜 거야?”

  청년이 흘린 것은 그 날 리더에게 던졌던 질문과 거의 같았다. 아이가 허락을 구하듯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여자는 그에서 여러 의미를 발굴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이 잘못되었는지.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삶은 무가치한 것이었는지. 보통의 인간에 맞춰서 수정되어야 하는지. 그 모든 것을 담아 청년은 묻고 있었다.

  “나쁘다고 한다면 지금껏 세상을 지킨 희생이 가치를 잃겠지. 전사, 성인……자신을 희생해온 이들의 삶도 크게 보면 도구의 방식에 가깝잖아.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것. 내 욕망을 포기해서까지 어떤 목적으로 사는 것 말이야.”

  어떤 답이 돌아올지 긴장했는데, 다행히도 여자의 말은 상냥했다. 그를 위안하기 위함인지 그녀 또한 같은 처지이기에 모진 말을 할 수 없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느 쪽이건 확실한 것은 하나, 도구는 도구의 방식을 이해한다. 혹은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청년에게 안도감을 안겼다.

  “잘못되었다고 말할 순 없어. 단지 조금, 슬플 뿐이야.”

  “?”

  “글쎄, 왜일까. 당신이라면 알 것 같기도 한데.”

  “모르겠어.”

  “짐작가지 않는다면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어. 들여다보다간 괴로워지기만 할 거야.”

  “그럼 당신은 어때?”

  괴로워? 혀끝에 걸린 말은 텁텁했다. 여자는 입을 뗐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청년의 시선은 줄곧 여자에게만 꽂혀있었고 그녀의 시선은 청년 너머를 향해있었다. 먼 세계. 이곳은 아닌, 바깥. 청년이 곧 볼 수 없게 될 세상.

  “나는 선택의 무게를 느낄 수밖에 없었어. 그것뿐이야.”

  여자의 답은 미지근했다. 청년도 더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가 괴롭다고 선언하지 않은 이상, 그에게는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청년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녀 역시 도구의 삶을 살아왔다는 점. 다만 그녀의 목표는 그의 존재가치와는 규모가 다를 것이다. 도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녀의 말에 밴 것은 막연하게나마 초월적인 시선이었다. 한 사람에 맞춰진 삶과는 차원이 다른 목적이, 그녀에겐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의 헌신이 아닐까 청년은 생각했다. 그녀가 이야기한 전사며 성인에 어울리는 목적.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 하필 그녀가 나타난 시점이 세상이 혼란에 빠진 때라는 것도, 천사의 추락처럼 빛과 함께 내려왔다는 것도 청년의 추측에 힘을 보탰다. 그래서 자꾸만 그녀는 먼 세계만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청년과 함께하면서도 언젠가 자신이 구해야 할 세상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서. 다만 여자는 지금껏 목적을 이야기하는 일 없이 이곳에 몸을 숨기고만 있었다. 세상의 요구를 따르는 걸 고민하는 듯.

  여자의 말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녀가 마냥 축복받은 듯 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힘주어 선언하지도 부러 드러내지도 않았으나 청년은 그녀에게서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 여자의 태도는 그저 곧은 책임감은 아니었다. 막연한 긍정도 아니었다. 선택의 무게라는 표현에는 그녀가 짊어져왔을 무언가가 한껏 엉켜있다. 그녀는 아마 한 번쯤은 경험했으리라. 청년에게 따라붙은 저주처럼 진득한 실패를, 혹은 그에게 도구의 삶을 지적한 이들이 공통적으로 걱정했던 씁쓸한 결말을.

  청년은 어쩔 수 없이 도구였다. 태어날 때부터 세상의 뜻에 지배당하고 자라면서는 헌신밖에 배우지 못한, 불완전한 인간. 타의를 잘라내기엔 이미 그의 영혼에까지 뿌리내리고 말았다. 만일 여자가 그에게 지금의 삶이 괴롭냐고 물었다면 그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으리라. 청년에게 도구로서의 삶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으므로. 그러나 여자는 어떨까. 도구가 된 것은, 온전히 그녀의 선택이었을까?

  혹은 그녀의 삶에 드리워진 운명이었을까. 청년은 때로 여자를 보며 동생을 떠올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 그의 삶에서 최초의 목적이었던 이를. 동생의 파장을 가진 여자는, 드리우는 것마저 동생을 연상시켰다. 흩어질 것만 같은 위태로움, 단정한 웃음에서 비치는 처연함 등의. 청년이 알기로, 그것은 휘둘린 이들의 특징이었다. 살면서 동생의 삶에 멋대로 관여하려는 이를 몇이나 만났는데 그 침입자모두가 동생의 운명을 변명으로 삼았다. 모두를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짜여있는 운명대로 이끌었을 뿐이라고,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했다.

  여자가 세상에 내려온 게 처음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그녀 앞에서 운명을 핑계로 몇 번이나 욕망을 꺼냈을까. 그녀는 몇 번이나 지쳤고 인간에 대한 기대를 얼마나 잃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후, 청년은 이전과는 다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있잖아, 당신이 바라는 건 뭐야? 무엇이 되고 싶어? 무엇을 하고 싶어? 목적은 뭐야? 여자의 진짜 마음을 알고 싶다는 소망으로, 끈질기게. 여자는 처음엔 적당히 모른 체 했다. 그 다음에는 슬그머니 그를 떠보았다. 그럼에도 청년이 물러서는 기색이 없자, 여자는 결국 어느 날 물었다.

  “무엇을 원해?”

  표정 없는 얼굴이, 건조한 목소리가 고향에서 본 동생의 마지막 모습을 연상시켰다. 저를 노리는 이들을 몇이나 겪으며 지쳐버렸을 때의 동생. 다들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겠다며, 무너져가는 벽에 기대던 모습. 적진에서조차 홀로 탑에 갇혀, 성녀의 이름을 쓸 날만 기다리던 가여운 소녀.

  “세상을 구하길 바라?”

  청년은 그대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숭배하는 대상에게, 신이 되어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이미 세상 사람들이 동생을 짓누르는 데 쓴 논리를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신을 요구하는 대신, 운명을 깨는 것을 이야기했다. 동생이 그동안 운명이란 횡포에 시달려왔음을 설명하면서 그는 어느 때보다도 긴장하고 있었다. 만일 운명이란 요구를 깰 수 있다고 한다면 동생은, 혹은 그녀까지도 자유로워질 가능성이 있다. 다행히도, 이야기의 끝에 여자는 냉소 섞인 답을 돌려주었다. 운명이란 기만적이야. 다들 편리한 대로 주장할 뿐이지. 거기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청년은 물었다.

  “그 모든 것이 운명이 아니라면, 그 애를 구할 수 있는 거지?”

  동생을 위해 꺼낸 물음이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여자에게 돌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당신이라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운명을 내세운 요구로부터, 혹은 욕망으로부터. 그 모든 불순물로부터 해방된 후, 스스로 선택한 목적만을 다해도 될 것이다. .

  여자는 청년에게 신처럼 위대했으나 그의 시선은 신이 베풀 기적에까진 닿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신이라는 신비에 매혹되어 있었다. 태어나 처음 천사를 만난 아이처럼, 혹은 자연의 법칙을 찾아낸 연구자처럼. 어떤 의미로 그는 유일하게 그녀 앞에서 자유롭다. 그녀가 담는 모든 것을 사랑하기에 어떤 모습의 그녀도 그에겐 의미를 갖는다. 그녀에게 바치는 삶도, 마찬가지.

  당신의 선택이 어떤 방향이어도 받아들이겠다고, 설령 누구도 구할 수 없다고 해도 괜찮다고 전하고 싶었는데. 여자는 어쩐지 죄책감에 빠진 얼굴이었다. 침묵 끝에 그녀가 흘린 것은 뜻밖에도 동생에 대한 고백. 그 애를 알고 있어. 그 삶에 관여했거든.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띄엄띄엄 말하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여자는 그의 답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손을 떠난 일이야. 이제 와서 무언가 할 수는 없어. 마지막 말은 좌절마저 비치는 듯 텁텁했다.

  청년이 도구로서 살아오며 느낀 것은 세상의 모든 일에 우연이란 없다는 것이었다.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도 하필 그녀가 동생을 연상시킨 것도 전부 이유가 있다. 어쩌면 그녀와 얽히게 된 것조차도. 때문에 청년은 여자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동생의 기척을 따라간 곳, 흔적이 끊긴 곳에서 나타난 여자.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동생의 파장을 느끼게 된, 신비의 시작.

  왜 당신은 루리의 모든 것을 가졌을까. 루리보다도 더 루리처럼. 왜 당신은 처음 만난 때부터 루리만큼이나 사고를 지배했을까. 그 괴상한 의문의 답이라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동생의 운명이 어디로 향했는지 청년은 짐작할 수 있다.

  동생의 종착점은 여자였다. 가여운 동생은 성녀로 내몰린 끝에 저를 소모해서 이 세상에 여자라는 구원자를 불러온 것이다. 건조한 판단에 그동안의 의문이 풀려나간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었구나. 루리는 당신을 거치며 운명에서 벗어났겠구나. 그리고 당신은, 루리를 품으면서 그 애의 운명을 짊어졌겠구나. 슬픔과 안도와 황홀함이 섞여 청년은 몽롱해졌다. 무너지듯 비틀거리는 청년을 여자가 지탱했다. 상냥한 손길이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신비 같았던 필연을 이해한 때, 청년은 여자의 품속에 있었다. 여자는 책임져줄 이유 없는 사람을, 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자를 꼭 끌어안아주고 있었다. 엷은 죄책감으로. 그녀에게는 불필요한 감정으로. 초월적 존재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도구로 만들어진 불완전한 인간에게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여자가 그를 외면하지 않은 것은 신에 가까운 존재로서의 자비일까. 혹은 도구라는 비슷한 입장에서의 동정일까. 어느 쪽이건 너무 과분해서 청년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고마워. 희망을 알려주어서.”

  여자의 옷을 눈물로 적시며 청년은 속삭였다. 흩어질 듯 여린 목소리를, 잔뜩 떨리는 소리를 제대로 들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여자도 속삭임으로 답해주었다.

  “그렇게 믿어도 되겠어?”

  “당신은 루리를 구해주었잖아.”

  이제 청년은 확신한다. 운명의 굴레는 끊어졌다고. 실패만이 거듭되던 삶도 이제는 걷힐 거라고. 여자를 만나며 그가 알던 세상의 질서는 깨졌다. 청년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소망이 제대로 이뤄지는 것을 보았다. 동생이 운명에서 벗어나는 것. 그 삶에 의미가 생기는 것.

  “이제 보람이란 게 뭔지 알 것 같아.”

  여자는 그의 삶에 찾아든 첫 번째 희망이었다.

 

 

3

 

  여자는 나긋한 목소리로 세계의 종말을 이야기했다. 열에 시달리는 청년의 곁에 앉아, 동화를 들려주듯이. 청년이 태어나기도 전의 역사는 여자의 혀를 통해 되살아난다. 옛날, 자크라는 남자가 있었어. 그 자는 듀얼리스트로서 무대에 섰지만 모두의 두려움이 되고 싶어 했지. 그래서 그는 환호를 계단 삼아 자꾸만 위로, 위로 올라갔어. 그래야만 전부 저에게 주목할 테니까. 그렇게 모두에게 사랑받은 때 그 남자는 계획을 실행한 거야. 몬스터와 결합해 악마가 되는 것.

  비현실적인 절망에 청년은 살풋 얼굴을 찌푸렸으나, 끔찍한 비극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자는 곧이어 희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인간에겐 악마를 물리칠 희망이 있었어. 바로 자연의 에너지를 모은 무기. 그 힘으로 4체의 드래곤과 결합한 악마, 자크는 네 갈래로 찢기게 되었지. 갈라져나간 악마가 다시 날뛰지 못하도록 세계도 4개의 차원으로 나뉘었어. 각 차원마다 자크의 조각이 하나씩 붙들려, 그 안에서만 살아가게 한 거야.

  “해피엔드지?”

  부드러운 웃음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깔끔한 결말은 아니었으나 여자가 해피엔드라 규정했다면 의문을 덧댈 이유는 없다. 그에게 정말 인상적인 것은 이야기 자체보다는 여자의 친절이었다. 열이 끓는 청년을 억지로나마 누이고 보살펴주는 모습. 그가 의식을 놓아버리지 않도록 계속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 동생에 대한 고백 이후로 여자는 상냥해졌다. 이전까지 청년에게 세웠던 벽을 그 날의 대화로 허물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모습에 청년도 경계가 풀어진 모양이었다. 이전에는 필사적으로 숨기던 몸의 이상을 그대로 내보이게 된 것이다. 그는 여자의 앞에서도 피를 토하게 되었다. 쇼크로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그저 주저앉았다. 여자가 아픈지 물으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그런 청년을 별달리 나무라지 않았다. 당신에게도 보살핌이 필요하다며, 그가 하던 일을 전부 중단시키고 눕혔을 뿐이다.

  보살핌은 익숙하지 않다. 사랑하는 대상에게서라면 더욱. 그러나 청년은 열을 확인하는 손길이 좋았다. 여자의 눈이 오롯이 저를 담는 순간도, 여자가 저를 위해 준비한 이야기도 마찬가지. 청년은 어쩐지 생각에 잠긴 듯한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녀에게도 감상이 있었을지. 그러고 보면 악마의 이야기는 그녀를 감싼 신비처럼, 신화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었다. 악의 폭주와 영웅의 등장, 그리고 신성한 해결까지.

  인간은 오롯이 인간의 힘으로 악마를 물리칠 수 없었다. 자연의 힘을 무기로 삼아서야 인간이었던 절망을 찢어놓을 수 있었다. 누군가 자연의 힘을 무기로 정제했고 누군가 그걸 들고 나섰을 테지만, 여자의 이야기는 거기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일부러 숨기는 것 같기도 했다. 영웅의 이야기란 보통 제멋대로 해석되고, 전하는 이들의 소망에 왜곡되곤 하므로. 여자가 비워놓은 구원자의 자리에, 청년은 한순간 저에게 가장 빛나는 이를 세우는 상상을 한다. 자연이 내준 무기를 쥐고서 무심하게 악을 찢어버리는 모습. 세상을 덮은 절망을 흩어버리는, 인간의 희망.

  인간의 욕망으로 세상은 다시 어지러워졌고, 청년이 떠나올 때는 이미 파멸 직전의 모습이었다. 인간이 쓴 경전은 혼란의 끝에 신벌이 찾아든다 이야기하지만 지금의 세계엔 징벌조차 허락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낳은 죄가 그들을 빠르게 침몰시키는 탓이다. 이대로라면 세상은 묻힐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파멸해, 역사도 마무리되리라.

희망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종말을 감지하기에 청년은 그의 삶에서 기적이었던 이를 눈에 담는다. 그녀에게 세계를 구하고 싶은지 묻는다.

  “세상을 구하는 건 특별한 누군가만이 가능해.”

  열띤 목소리와 함께. 세상을 덮은 것은 인간의 죄이기에, 신이 되기를 선택한 자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 지금의 세상에 그런 희망이 나타날 수 있을까. 청년은 자신이 없다. 누구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역할이기에 그의 동생은 운명이란 이름으로 강요당했으리라. 슬프게도 동생은 인간이어서 운명을 완전히 감당해낼 수 없었다. 세상의 요구에 미래가 닫혔을 것이다.

  이제 청년이 아는 빛은 여자뿐이다. 동생의 운명이 끝난 곳. 지상에 강림한 신비. 제 나름의 목적을 품었을, 초월적 도구. 그녀는 청년의 눈에 새겨진 막연한 희망을 비웃지 않았다. 그럴듯한 답변 대신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세상을 구하는 건, 가치 있는 일이야?”

  이런 세계를 지킬 가치가 있어? 여자의 말에 감춰진 의문을 청년은 읽을 수 있었다. 사실 청년만큼 세계의 기만을 실감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세상을 지배한 여러 폭력과 악이 제대로 걷히는 것을 본 적도 없다. 모순과 절망이 뒤엉킨 세계는 침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번에야말로 구원자 없이 깨끗한 종말을 맞는 것이다. 그러나 청년은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는 아직까지는, 파멸을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세상에 미련이 있어서는 아니다.

  과거, 보호자는 물었다. 높낮이 없는 단조로운 음성으로. 세상을 사랑하니? 어린 시절이었음에도 그는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언젠가 세상이 동생을 앗아갈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침묵 끝에, 보호자는 달래듯이 말했다.

  [사랑하는 것을 연습해야 해.]

  [왜 그래야 해?]

  [우리는 원래 세상에 봉사하도록 만들어졌으니까.]

  목적대로 살려면, 그래야 한단다. 세상의 뜻에 따르고, 세상의 선택에 감사해야 해. 감정이 밸 리 없는 목소리에서 그는 씁쓸함을 읽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야.]

  [그게 잘 안 된다면?]

  [처음부터 불량품이었던 거지.]

  잘못 만들어진 것, 혹은 망가져야 하는 것. 청년은 그 뒤에 따라붙을 말을 알았다. 한 번도 저를 안아줄 수 없었던 보호자가 보살피던 아이를 꼭 껴안고 속삭이고 싶었을 말을. 불완전한 아이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을. 그런 삶은 안 돼, 아가. 지금도 청년은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는 태생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보호자가 기능정지해도, 자라면서 제 삶에 뻗친 세상의 영향력을 실감해도, 그는 여전히 세상에 애정을 품을 수 없었다.

  어쩌면 조금은, 증오했을지도 모른다. 제 삶을 조종하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동생의 자의를 빼앗고 제물처럼 희생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청년이 여자에게 꾸준히, 세상을 구하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언젠가 그것을 바랐다면, 이뤄주고 싶으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 구원자의 삶을 짊어졌다면 힘을 보태주고 싶으니까. 만일 과거의 해결을 후회한다면 이번에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으니까.

  그리고 분명히, 동생은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으니까.

  살아남을 수 없다면, 동생의 울타리로 죽었으면 했다. 전장에서도 빛나던 동생의 희망을 끝까지 꺼지지 않게 감싸 안고 싶었다. 쟁그라운 실패 끝에도 동생의 희망은 남았다. 저에겐 과분한 빛이라 해도, 청년은 동생의 뜻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답은 하나뿐이다. 여자가 몇 번이고 떠보고 청년 스스로도 확신이 없는 길이라 해도. 청년은 그녀에게 어울리는 길을 걸어달라고 말했고 여자는 받아들였다. 청년이 생각지도 못한 조건을 내걸며.

  “할 수 없을 거야.”

  청년은 종이에 그려지는 문양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몇 번이나 꺼낸 말이어선지, 곁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여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친다.

  “내 말대로만 하면 되는데?”

  “중대한 일을 내게 맡겨버리면…….”

  “무슨 일이 생겨?”

  실패할 거야.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던 말은 여자가 빤히 바라보는 바람에 그대로 목에 걸려버린다. 보랏빛 눈에는 한 가닥 불안도 없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약한 말에 넘어가줄 리가 없다. 청년은 확신한다. 그럼에도 그는 한순간 여자에게 저를 뒤따르는 저주를 이야기할까 고민했다. 세상의 뜻을 거스르는 한 실패밖에 없음을, 제대로 반기를 들 수 없도록 설계되었음을 고백한다면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지.

  청년에게 여자가 내건 조건은 하나. 세상을 구하되, 모든 것은 그의 손으로 실행할 것. 청년이 막연히 상상한 대로 그녀는 구원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긴긴 봉사의 끝에 운명에서 해방되는 걸 바랐으므로, 그녀는 청년에게 그 짐을 넘겨주기로 했다. 구원자라는 것은 역할에 불과하단 말과 함께. 지금 그녀가 그리는 것이 바로 구원자가 쥐어야 할 무기였다. 이야기 속 악마를 물리쳤던 무기, 이번 대의 파멸을 막을 신성한 힘.

  “……나는 보통의 인간이잖아.”

  “아무 문제 없어.”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했다고 생각해? 그리는 것을 마치고 펜을 내려놓은 여자는 가만히 그의 손을 끌어와 잡는다. 청년은 그녀의 입가에 걸리는 웃음을 볼 수 있었다. 길 잃은 아이를 달래듯 자애로운 미소.

  “당신도 도구, 나도 도구. 같은 처지니까, 당신도 잘해낼 거야.”

  “실행한 적 있어?”

  “글쎄.”

  선명하지 않은 답변에 실망하기라도 할까 싶었는지, 여자는 재빨리 덧붙인다.

  “하지만 이번엔 둘이잖아.”

  “당신도 함께해?”

  “물론. 내 책임은 다해야지.”

  당신을 데려가서, 무기를 쥐게 할 거야.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시할 거고. 여자는 청년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전부 알고 있었다. 청년에게 최고의 희망인 그녀의 존재, 실패의 저주를 넘을 확실한 힘, 그를 안내할 명령까지.

  “그럼 마지막도 봐줄 거야?”

  운명은 청년을 무너뜨리고 세상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청년은 여자와 함께하며 빠르게 죽어가는 것이, 세상이 그에게 여자의 곁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뜻을 따르며 무기가 되기를 자처한다면 이야 뻔하다. 청년은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여자를 운명에서 풀어주고 나면 그의 삶도 마무리되리라. 왜 그런 말을 해. 청년은 여자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낀다. 그녀의 눈에 익숙한 감정이 번지는 것도.

  왜 그녀는 저렇게 슬픈 눈으로 보는 것인지.

  기시감의 근원을, 청년은 안다. 동생은 그를 볼 때 자주 그런 시선을 얹었다. 깨지기 쉬운 물체를 보듯, 불안과 슬픔이 엉긴 눈으로 그를 담았다. 자신을 미끼로 적을 유인할 때. 도박에 가까운 전술로 적을 섬멸할 때. 무너져가는 건물에 몸을 숨기며 제 몸으로 동생을 감싸고 있었을 때.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동생의 얼굴을 청년은 아직도 기억한다. 그의 헌신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이었는데. 그런 것까지 슬퍼할 이유는 없었는데.

  “봐줄 수 있어?”

  “마지막이라고 할 건 없잖아.”

  “목적을 이루면, 당신도 갈 길을 가야지. 자유로워지길 바란 거 아냐?”

  운명으로부터, 기대로부터, 소망으로부터. 세계의 요구는 물론이고 인간이 맡긴 소망조차도 여자는 이번의 일로 해결할 수 있다. 도구의 삶에서 해방되어 온전히 그녀를 위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 평생 모른 체 해도 되었을 소망에 반응해 인간의 희망이 되기로 했으니,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였다. 그리고 만일, 청년이 그에 기여하게 된다면.

  “나에게도 이 일은 마지막 반역이 될 거고.”

  “반역?”

  “내가 살아가는 현실을 바꾸려 하는 걸, 다들 반역이라고 하더군. 이번엔 세상의 종말을 바꿀 거니까, 어떤 결과가 나오든 분명 최후의 반역일 거야.”

  성공해도, 혹 실패해도 청년의 결말은 같다. 반역이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내세우는 것은 그녀를 달래기 위함일 뿐이다. 허망하게 삶을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고, 이 싸움에 가치는 있다고. 그리고 그의 종말도, 자연스러운 결말이라고.

  갑자기 짊어진 책임이 저에겐 너무 빛나 보여서 자꾸 뒷걸음질 치긴 하지만 청년은 결국 자신이 여자를 따라 나설 것을 알고 있었다. 과분한 책임이라도 그녀의 뜻을 이뤄줄 수만 있다면 끌어안아야 한다. 그녀의 무기가 되어서, 마지막까지 그녀의 삶에 기여해야 한다. 동생만큼이나 그에게 의미가 큰 여자에게 삶을 바칠 수 있다면, 가장 행복한 종말일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세계에 한 줌 양분이 되고 싶었다.

  삶에 집착도 없으면서, 동생의 미래를 위해 싸웠던 것처럼.

  “세상의 반역자라!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마음에 들어?”

  “물론이지. 당신도 의외로 삐딱한 데가 있네.”

  여자는 가볍게 깔깔대더니, 조금 전 그려낸 것을 끌어와 청년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걱정할 것 없어. 이것만 손에 넣으면, 우리는 절대 패하지 않을 테니까. 여자의 말에 청년의 시선은 그녀의 그림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것을 포함해, 거칠게 그려진 4개의 문양이 종이 한 장에 담겨있었다. 위협적인 발톱도 날카로운 송곳니도 없으나, 저것은 세상을 구할 열쇠가 되리라. 무장한 군사도 처절하게 싸워 살아남은 저항군도 할 수 없었던 구제를, 자연의 무기로 행하는 것이다. 청년은 신성을 훔쳐온 듯 긴장했다.

  “신기하지, 구원이라고 말하면 거창한데 실제로 하는 건 준비된 무기를 쓸 뿐이란 게.”

  여자의 말에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통의 사람은 그조차 못 하니까, 대단한 거지.”

  “……실행한 적 있냐고 물었지? 한 번. 딱 한 번이었어.”

  “어땠어?”

  “꿈처럼 느껴졌어. 그 상황에 뛰어든 것도, 어쩌다 모두의 희망이 된 것도, 내가 맞닥뜨리는 악도. 있잖아,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닐 거야. 황홀하고, 거짓말 같고. 그러다 어느새 끝나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당신은 충분히 할 수 있어. 내가 했다면 당신도 해. 그래도 만약에, 믿음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여자는 최대의 친절을 담아 청년에게 속삭였다.

  “지켜봐줄게, 마지막까지. 같은 반역자로서 말이야.”

 

* * *

 

  청년은 계절도 시간도 모를 풀밭에 서 있었다. 이제 곧 떠나게 될 은신처를 눈에 담기 위해서. 이곳은 세계가 4개의 차원으로 분열하는 과정에 생긴 틈새. 세상을 구하려면 여기를 떠나, 세상의 지배력이 온전히 닿는 곳으로 향해야 한다. 어차피 오래 머물 곳도 아니었다고 여자는 이야기했다. 차원의 틈새도 좁아지고 있어. 여기에 숨어 지낸다 해도 어차피 압사했겠지. 여자의 말은 건조한 신탁 같았다.

  [차원의 틈새가 좁아진다는 건, 갈라진 차원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야.]

  [나뉘었던 차원이 왜?]

  [그건 차원을 분리시키던 힘이 약해졌다는 뜻. 세상이 혼란에 빠지고 있는 거야. 악마, 자크가 깨어나려는 것 같네.]

  [이번 대에도?]

  [‘그건죽지 않았어. 찢어놓는 것이 최선이었으니 차원도 함께 찢어놓은 거야. 최소한 원래 힘을 찾지는 못하도록.]

  청년은 여자의 말에서 해묵은 경멸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악의 뿌리를, 한 차례의 종말을 경험한 여자는 인간으로도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상, 질척거리는 감정은 없다. 그녀에게 악마는 존재해서는 안 될 오점일 뿐. 격렬한 감정을 향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나서야지. 저번처럼 또 찢어주면 돼.]

  [그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까.]

  세상은 평화를 찾고, 인간의 죄는 씻기며, 여자는 운명으로부터 해방된다. 과거, 악마를 네 갈래로 갈라놓으며 구원자가 바랐을 것처럼. 그때라면 아마 청년은 명이 다하겠지만 나쁜 결말도 아니다. 날 때부터 세상의 의지에 지배당한 도구라 해도 죽음까지 손을 댈 수는 없다. 죽음으로써,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유로워지는 셈이다. 세상의 뜻대로 끌어가야 할 삶을 여자에게 바친 끝에.

  [그래. 모든 것이.]

  당신의 삶에도 더는 비극이 없을 거야. 여자가 덧붙였던 것을 청년은 기억한다.

  앞으로 다시 밟기 어려울 땅을 구석구석 눈에 담고 있었더니, 어느 순간 어깨에 약간의 무게가 느껴졌다. 돌아보니 여자가 손을 얹고 있었다. 세상을 구하러 떠나는데도 여자의 얼굴엔 긴장 하나 비치지 않는다. 이미 한 번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해낸 자의 여유인지 청년을 믿어주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청년은 보통의 인간이어서 지금의 상황에 감상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떠나자며 재촉하는 여자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청년은 슬그머니 말을 흘린다.

  “있잖아, 우리가 성공하면.”

  “실패할 일은 없다니까.”

  “성공하면, 말이야. 당신은 어떻게 살 거야?”

  “생각한 적 없는데.”

  “평범한 날이야말로 귀하다고 했지. 모든 걸 끝내서 해방되면, 평범하게 살 거야?”

  “그것도 좋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걸 하는 거야.”

  여자는 드물게 그림자 없이 웃었다. 의미 없는 가정이 그녀에게도 숨을 돌리는 기회가 된 듯했다. 그 후로는 별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그동안 여자를 보살피기 위해 몇 번이고 바깥에 들락거렸던 청년이 앞장섰고, 여자는 몇 걸음의 거리를 유지하며 꾸준하게 따라붙었다. 죽어가는 중에도 다리는 문제없이 움직여지는 것에 청년은 감사했다.

  곧, 세상이었다. 두 사람의 삶에 깊게 개입했으나 그동안 외면하다시피 멀어져 있었던 곳. 종말을 앞두어 군데군데 처참한 비극이 밴 곳. 세상에의 통로에 다다라 을 열고 들어서려던 때 청년은 하늘을 수놓은 화려한 빛을 보았다. 만화경을 연상시키는 색채는 아름다웠으나, 세상이 맞은 위기와 대조되어 우스웠다. 두 사람이 맞닥뜨린 이질적인 하늘이 파멸의 증표였기에 둘은 걸음을 재촉했다. 되돌릴 수 없게 되기 전에, 악마가 마지막 희망까지 짓밟기 전에 먼저 무기를 찾아야 했다. 자연의 힘, 이미 한 번 악마를 찢어놓았던 신성한 힘을.

  그들이 먼저 확인하기로 한 장소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 목적도 정체도 모를 장치가 불길한 가동음을 냈던 방. 깊숙이 숨겨진 만큼, 무언가 장치에 끝없이 동력을 공급하고 있었던 만큼 수상쩍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 하나 청년이 그 길을 선택한 것은 그곳이 동생의 흔적을 찾아간 곳이어서였다. 동생을 납치한 침략자는 동생에게 구원자의 운명을 요구했다. 분명, 동생으로 무언가 꾀하고 있었으리라. 세상의 종말과 관련된 연구를. 동생에 얽힌 것들을 파헤치다 보면, 여자가 말한 무기든 현재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는 인간의 힘이든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청년의 믿음이었다.

  악마가 이미 깨어난 것인지, 세상이 혼란에 빠진 탓인지 두 사람이 들어서는 곳마다 침략자의 기지에 걸맞지 않게 처참한 풍경이었다. 우수한 전사라 떠들어대던 군사는 대개 쓰러졌고 살아남은 이들은 공포에 짓눌려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모든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이제 정복자는 없고 악마 앞에 무력한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청년은 언제나 꿈꿔왔던 풍경에 냉소하며, 침략자의 연구 자료를 집어 들었다.

  군데군데 훼손된 것이어도 중요한 부분은 알아볼 수 있었다. 리바이벌 제로. ‘구원자레이의 부활. 모든 조각을 모아 아크파이브로 전송할 것. 마지막에는 여자를 구해낸 장치의 그림까지. 그동안의 정보로 청년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왜, 한 번 파멸했던 세계의 역사를 아는지. 왜 차원을 넘을 때마다 동생과 같은 얼굴의 소녀들을 만났는지. 침략자가 연구를 강행하며 동생이 어떤 결말을 맞았을지.

  그리고 과거, 여자가 행한 구원이 어떤 것이었을지.

  이렇게 된 이상, 청년은 더더욱 결말을 낼 수밖에 없다. 동생의 뜻을 이뤄줘야 했고 여자의 책임을 함께 짊어져야 했다. 삶에서 이렇게나 판이 잘 짜인 적이 있었는지. 이번만은 세상의 뜻과 자신의 뜻이 일치하리란 것에 청년은 안도했다. 그는 여자에게, 약속된 성공을 안겨줄 수 있었다. 목적지를 수정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둘은 처음 만난 곳으로 계속 걸음을 옮겼고 가까워질수록 눈부신 빛을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그 날과 같았다. 여자가 추락하고 청년이 그녀를 구한 때. 동생의 운명이 끝나고 여자가 인간의 몸으로 재림한 때.

  이번에도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익숙한 신비에 상기되어 청년은 문을 열었다. 목적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미 한 번 보았던 장치였지만, 그 앞에 선 것은 두 사람이 생각지도 못했던 방문자였다. 빛이 어디서 새어나왔는지는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청년에게는 익숙한, 저항군으로 함께했던 소년이 선 자리. 소년의 머리 위에 떠오른 형상. 금빛으로 빛나는 것은 분명, 여자의 형체였다. 여자는, 그의 신은, 성녀처럼 신비로운 모습으로 소년을 인도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네 힘을 빌리려고 해.]

  여자의 모습을 빌린 환상은 공중에서 소년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소년의 눈은 홀린 듯 머리 위의 만을 담는다.

  [무엇을 하면 돼, 레이?]

  [네 장의 카드를 먼저 손에 넣어. 세상의 혼란을 막고 자크를 물리칠 수 있는 신성한 힘이지.]

  내가 자크를 처단했던 무기야. 덧붙이는 말은 유혹적이다. 청년은 세상이 도구를 현혹하는 방식을 분명히 안다. 계시라도 내리듯 기적을 보이고, 선택받았다는 최면 속에 제단에 오르도록 한다. 다음은 스스로를 희생해 목적을 달성하는 것뿐. 사실상 제물이 되는 것과 다름없는데도 희생자는 자신이 휘둘리고 있음을 모른다. 타의를 자의로 착각한 채 자신을 내던지고 만다. 세상은 여자를 선택할 때도 그럴듯한 기적을 만들었으리라. 정의감과 야릇한 열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묘한 절박감. 그에 휩싸인 채 여자는 영웅으로서 발걸음을 뗐을 것이다.

  그렇게 여자가 한 번 악마를 몰아냈으니, 세상은 보다 쓰기 쉬운 도구를 찾는다. 이번 대의 도구는 소년. 내면이 비어 타자의 지시를 절박하게 바라는 인물. 세상은 신의 환상으로 소년을 현혹시켜, 과거와 똑같은 구원자를 만들 것이 뻔하다.

  구원자가 역할일 뿐이라면, 그런 도구쯤 수없이 찍어낼 수 있으니까.

  그러나 청년이 숭배할 대상은 여자뿐이다. 그가 믿는 구원도, 그가 이뤄낼 승리도 전부 그녀의 것. 여자가 몇 번이고 일러주었으므로, 청년은 지금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안다. 그녀에게 바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눈에 익혀두었다. 청년은 소년을 앞질러 장치에 손을 뻗었다. 다음 순간 그는 빛으로 감싸인 희망, 세상이 다시 토해낸 무기를 낚아챈다.

  세상의 유혹도, 여자의 모습을 빌려온 환상도 청년에겐 무의미하다. 신앙심이 없는 청년은 여자라는 신비만 믿는다. 세상의 최면에서 깨지 못한 소년이 바로 적의를 품고 덤벼들었으나 청년은 여자의 손을 잡고 달렸다. 여자를 보호하느라 새겨진 상처도, 쉼 없이 날아드는 공격도 청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꽉 쥔 손은 풀리지 않았고 손을 타고 그녀의 온기가 계속 느껴졌으므로. 숨이 차도록 달리면서 청년은 하나만을 생각했다. 이제야 신을 이해했음을.

  감히 당신을 이해해.

  청년은 여자와 함께 침략자의 기지를 헤맨다.

  당신의 방식을 이해해.

  여자는 그의 그림자를 밟고 선다.

  이제 당신의 선택을 이해해.

  청년은 망가진 연구실에 여자를 숨기고서 홀로 바깥을 살폈다. 지독한 고요가 내리깔리고 있었다. 군사는 물론이고 소년마저 보이지 않는다. 비로소 안도한 청년은 여자에게 돌아가면서 품에서 무기를 꺼냈다. 세상의 뜻대로라면 소년에게 가야 했던 것. 한때 여자가 사용했고, 이번에는 그가 쥐어야 할 힘. 청년은 왜 그녀가 세상을 구하는 것을 망설였는지 이해한다. 운명이란 기만적이라고 말한 이유도, 과거의 무기를 굳이 청년에게 맡기려 한 이유도.

  세상은 여자를 배반하고 가치를 빼앗았다. 신을 추락시켜 인간의 세상에 섞여들게 한 것이다. 유물이 된 구원자는 그때부터 세상에 대한 환상을 벗었으리라.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질서가 아닌 세상이 꾸며낸 각본이고, 구원자의 책임이란 도구의 역할일 뿐. 인간으로서 감당하기엔 너무도 씁쓸한 결론이었다. 신의 권능을 맛본 자에게라면 더욱.

  처음부터 여자에겐 인간의 기대에 부응할 의무가 없었다. 세상을 놓아버려도 좋았고 저에게 닿는 청년의 시선 따위 외면해버리면 되었다. 그럼에도 청년의 바람대로 세상을 구하는 데 동참하겠다 한 것은 과분한 호의였다. 구원자가 되어주지는 않더라도, 청년이 기적을 맛볼 기회는 주기로 한 것이다. 옛 무기를 청년에게 쥐어주고, 그가 희망을 실현하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그녀의 내면을 이해했기에 청년은 감격한다. 불완전한 도구에게, 그녀는 신만큼 자비롭다.

  그러니 여자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 청년은 그녀의 믿음에 따라, 그녀의 자비대로, 구원자의 무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침략자가 과거의 구원자를 부활시키려 했다는 것은 구원자의 책임엔 희생이 따른다는 뜻. 어쩌면 인간으로서의 삶이 영영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청년이라도 결말은 동등하게 닥칠 것이다. 이 무기를 사용하면, 그의 삶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빨려들고 만다. 그럼에도 청년은 눈길로 요구한다. 무기를 가져왔으니까 명령해줘. 당신의 도구가 되게 해줘.

  여자의 시선은 청년의 손에 한동안 머물렀다. 흰 손이 꽉 쥔 것은 이번 대의 도구에게서 빼앗아온 희망. 이제 곧 그가 쓰게 될 무기. 한마디의 지시만 떨어지면 세상의 운명이 결정된다. 여자의 얼굴엔 온갖 감정이 엉겨 있었으나 입술은 꾹 닫힌 채였다. 과거의 자신을 연상시키는 상황에서 쉽게 마음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답을 듣기까지 기다림이 길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녀는 입을 뗐고.

  “돌아가자.”

  그가 상상조차 한 적 없는 말을 흘렸다.

 

 

4

 

  아이는 자라면서 장난감을 졸업하게 된다. 친구였고 지지자였고 어쩌면 가족이었을지도 모를 장난감을 놓고, 보다 복잡한 세계로 나가 온갖 사람들과 얽히는 것이다. ‘비밀 기지에 남은 어린 시절 물건을 정리하면서 청년은 자신이 동생에게 보호자라기보다 정성들여 만든 장난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도구이기에 언젠가는 졸업해야 할 것. 계속 애착을 갖더라도 어릴 때만큼 좋아할 수는 없는 것. 방의 한 구석에 남겨두고, 가끔 추억을 떠올리며 안아보는 것.

  동생과 완전히 헤어지기 전 적진에서 한 번 만났을 때, 세뇌당한 동생은 그를 방해자로 취급했다. 삶의 방향을 지배해, ‘독립해야 할벽으로. 이미 동생을 키워낸다는 목적은 완수했고 세상이 동생을 필요로 할 때였으므로, 실제로 그는 동생의 삶에서 더는 필요 없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보호자라는 착각과 가족이라는 역할에 취해 그 삶에 계속 관여하고 있었을지도. 차원의 틈새에 동생과 자주 들락거리던 때. 열 살 무렵까지가 동생의 삶에서 그가 확실하게 가치 있었던 시기였으리라. 동생에게 최고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던 한편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도 있었을 때. 둘만으로 완벽하게 행복했던 시절.

  도구의 생명은 길지 않다. 청년은 그 냉혹한 사실을 어렴풋이 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만난 타인이자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던 보호자부터 목적을 안고 만들어진 장치였으므로. 처음부터 수명이 정해져 있었을 보호자는, 기능정지할 때가 다가오자 자꾸만 아이에게 허무를 이야기했다. 너는 아마 어른은 되지 못할 거야. 너 같은 애들은 오래 못 살거든. 감정이 배지 않은 목소리로 그는 얼마나 자주 슬퍼했던지.

  [왜 오래 못 살아?]

  운명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었기에 한 번은 보호자에게 이유를 물었다.

  [인간은 이유가 없이도 살아가지만 우리 같은 건 목적에 맞춰서 살게 되어있어. 목적이 끝나면 남아있을 이유가 없지.]

  [나는 인간이잖아.]

  [.]

  그때 처음으로 보호자는 아이를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단지 이름을 불렸음에 눈을 빛내는 아이에게 장치는 쓰린 진실을 말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산다고, 보통의 인간일 수는 없어.]

  너는 네 동생보다 나를 더 닮았단다. 보호자의 말을, 청년은 이제야 이해한다. 인간으로선 부족한 것이 인간의 모습을 쓰고 살아왔음을. 그렇기에 자신은 유독 불완전한 도구임을. 세상은 쓸모없는 것을 남겨두지 않으려 하고 도구로서의 가치밖에 없는 그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미 책임을 다했다. 여자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몸이 망가지기야 했지만 그녀와 얽히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그는 오래 살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 이전, 동생을 구하러 나서지 않았더라도. 죽음이 얼마나 빠르게 닥치는지만 달랐을 뿐, 결국 똑같은 결말을 맞았을지도.

  여자는 청년이 일찍부터 망가지고 있었음을 모른다. 쓸모를 다한 도구라는 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꾸만 그에게 약해지는 것이리라. 그녀에게 헌신하는 바람에 청년이 망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에게 더 나은 미래가 있었으리라 믿고서. 그러나 여자는 그에게 빛을 가르쳐주었다. 삶을 지배한 절망과 실패의 연쇄를, 끊을 수 있다는 희망도 안겼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이 그녀를 통해 반짝였는데.

  그러니 청년은 여자가 슬퍼하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자고 마음먹었다. 세상을 구하려 뛰어들어서 그녀의 명령을 실행하고,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던 양 거기서 삶도 마치자고. 그러기 위해선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여자가 소망대로 평범한 나날을 보내도록 도울 것.

  세상을 구하면, 그와 함께 청년이 죽으면, 여자만이 남는다. 평범한 인간의 삶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한 여자에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녀 나름의 적응을 할 때까지 평범함을 익힐 곳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운 이곳이라면 나쁜 장소는 아니다. 지금 청년이 비밀 기지시절의 물건을 정리하는 것은 그래서였다. 언제 떠날지 모르니 가능한 빨리 치워두도록 하자. 제 흔적을 지우고, 모든 것을 그녀에 맞춰서.

  침략자의 기지에서 목적을 이루기 직전까지 갔으나, 알려줄 것이 있다는 여자의 말에 청년은 모든 것을 중단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무기를 확보한 때 바로 움직였으면 좋았겠지만 그녀를 위해 준비할 수 있을 시간이 생긴 것은 나쁘지 않다. 이젠 정말로 기회가 없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죽음은 너무도 가까워져서 그는 돌아오는 길에 걷기 힘들어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줄이 끊어지듯 쓰러졌는데, 눈을 뜬 때 여자가 근처에 앉아 졸고 있는 걸 보니 잠든 동안 시간이 제법 지난 모양이었다.

  잠자리에서 슬금슬금 빠져나온 청년은 그때부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거를 비우고, 자신은 없을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여자가 깨어나 그녀가 준비한 이야기를 들으면 바로 세상으로 나가야 했다. 다음엔 그녀의 뜻대로 세상을 구하고. 그리고, 그리고.

  손에서 동생이 아꼈던 장난감이 떨어졌다. 하나가 떨어지자 근처에 있던 여러 물건도 와르르 쏟아지고 만다. 시끄러운 소리에 스스로 놀라 황급히 물건을 정리하는데, 귓가에 발소리가 박힌다. 조금이라도 쉬게 두려고 일부러 깨우지 않았더니 결국 깨버린 모양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엔 연민과 슬픔이 섞여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지나치게 상냥하다. 완벽한 타인을, 불완전한 도구를 그렇게까지 눈에 담을 이유는 없는데.

  세상이 그러했듯 청년을 써버리면 그만인데.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청년의 모습에 여자는 끝내 화를 낸다. 죽음에 저항하지 않는 청년을 비난한다. 망가질 수밖에 없는 청년이 망가지는 것을 겁내며. 그러다 결국 고백하고 만다. 그녀가 청년의 삶을 갉아먹고 있음을. 나를 떠나기만 하면 살 수 있어. 세상이 견디지 못하는 건 나니까. 그 말을 여자가 어떤 심경으로 토해냈을지 청년은 상상할 수도 없다. 세상에 버림받아 영광도 힘도 잃고서, 제 곁에 머무는 한 사람이라도 지키려는 모습은 얼마나 처절한지.

  여자는 청년에게 세상에의 복수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신을 가장하며 끝까지 청년을 무기로 써도 되었다. 청년이 그녀를 구한 것부터 자기중심적인 행동이니 그에게 죄책감을 품을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여자는 계속 진실을 쏟아낸다. 씁쓸한 한계를, 무력한 현실을. 나는 당신을 구할 수 없고, 당신의 동생마저 삼켰지. 침략자의 딸이기도 해.

  “그런 나를 구할 거야?”

  그 때문에 죽을 생각이야? 그런 말이 뒤따라오는 듯했다.

  청년이 짐작하고 있던 모든 사실을 토해낸 때 여자의 눈은 젖어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청년은 그때, 처음으로 여자와 자신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타자 앞에 자신의 부족함을 내보이고 용인되지 못할 것을 상상한다. 그녀는 청년의 헌신이, 저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청년의 막연한 상상과 그녀의 미진한 답변으로 유지되던 신성이 깨지는 순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놀랍지 않다. 세상도 인간도 이미 그녀를 배반했으니까.

  [레이가 그런 선택을 할 리 없어.]

  여자의 환상에 사로잡힌 소년은, 여자가 기대 속 구원자의 모습을 보이지 않자 공격했다. 아마 소년이 아닌 다른 사람이어도 그랬으리라. 이상적인 구원자의 모습으로만 그녀를 인정하고, 그 외의 모습은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이 빚어낸 상에 신을 가두고, 그렇게 만들어낸 형상을 믿는 일은 흔하다.

  [무력한 신비를 데려다, 신으로 만들고 싶은 거지. ‘내가그 사람에게 신의 관을 씌워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는 심리인 거야.]

  청년이 여자를 신처럼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청년의 기대에 냉소하며 말했다. 신으로서만 가치를 인정받아온 그녀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인간의 기대는 얄팍하고 자기중심적이다. 신비에 기대를 덧씌우고, 추앙하여 신으로 내몬다.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기적을 논하기 위해서. 그동안 여자가 겪어온 숭배란 얼마나 숨 막히는 것이었을지. 눈앞의 신이 가여워져서, 청년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전장에서 동생의 울음을 함께했던 것처럼.

  그러나 여자가 경험한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환상이었다. 그녀는 청년이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였음을 잊고 있다 도구의 시선에서 그녀의 신성은 유효하다. 애초에 신이었기에 여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였기에 사랑했고, 사랑했으므로 그녀는 신이었다. 모든 신비를 잃는다 해도.

  “……아카데미아에서 다 끝내지 않고 돌아온 건 말이야.”

  여자는 울음을 삼키며 힘겹게 말을 잇는다.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어. 내게서 자유로워질 기회.”

  “내 불행의 이유에 당신은 없어.”

  “그렇게 말하지 마. 나를 감싸줄 때는 지났잖아.”

  “정말이야.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는 건 세상이라고.”

  태어나 도구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도구로 태어난 인간이었다. 청년은 자신의 바탕을 명확히 안다. 따라서 비극의 근원 또한 이해한다. 그의 불행은 어디까지나 세상의 벌이었지 인간에게서 전염되어온 것이 아니다. 여자가 그의 삶에 비극을 칠했다면 그 또한 세상의 조작일 뿐이다. 당신은 불행의 그림자 같은 게 아냐. 청년은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을 여기 데려오지 않았다면 내가 행복했을 거라 생각해?”

  위로하려 건넨 말에 여자는 여전히 슬픈 얼굴이었다.

  “죽어가진 않았겠지.”

  “나는 불량품이어서,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망가졌을 거야. 세상은 쓸모없는 것을 봐주지 않잖아.”

  오히려 여자를 만났기에 청년은 쓸모를 느꼈다. 세상은 그의 쓸모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청년은 스스로 가치를 찾았다. 여자를 돌보는 것. 그녀의 보호자 행세를 하면서 그녀가 바람을 이루도록 돕는 것. 헌신이야말로 청년에겐 최대의 욕망이지 않은가. 받은 것에 비하면 그녀에게 돌려준 것은 많지도 않다. 여자는 그에게 희망까지 가르쳐주었는데.

  “당신은 나를 구했어.”

  때문에 청년은 그녀가 가져온 기적을 고백한다. 지킬 대상을 잃은 청년에게, 그녀는 한 번 더 헌신할 기회를 주었다.

  “당신을 돕고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역할을 준 거야.”

  동생의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무기를 찾아주었다.

  여자는 제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녀를 통해 청년은 희망을 맛보고, 세상에의 반역을 꿈꾸고, 이제는 신성한 힘마저 쥐고 있다. 모든 것을 이뤄준 신에게 남은 삶을 바칠 수 있다면, 청년의 삶은 실패가 아닌 성공으로 끝날 것이다. 이전의 모든 비극을 기쁘게 안고 침몰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 당신을 구할 기회를 줘. 청년의 마지막 소망은 간결한 말로 요약된다. 나를 사용해줘.

  여자가 명령만 내리면 청년은 세상을 구하러 나설 것이다. 적진에서 저를 소모하는 것으로 파멸을 막을 것이다. 세상의 의지에 반하는 일이니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세상이 누군가에게 구원자의 운명을 씌우는 일은 없게 되리라. 동생을 희생시키고 여자를 괴롭혀온 운명은 이번 대에 끊어진다.

  그러나 만일 여자가 거부하더라도 청년으로선 어쩔 수 없다. 그녀가 전부 외면하기로 한다면 청년은 세상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평범하게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그녀가 원하는 풍경으로 꾸며, 그녀에게 일상을 선물할 것이다. 세상을 구할 무기 따위 땅에 묻어버리고서. 그것도 여자에겐 제 나름의 해방이니, 청년은 그녀를 조를 권리가 없다. 이번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말해. 당신은, 무엇을 구하고 싶어? 청년은 소리 없이 물었다.

  “아무래도 당신에게 전염되었나 봐. 반역을 하고 싶어졌어.”

  장난 섞인 답에 청년은 여자의 결정이 어떤 방향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구원자 레이 같은 건 환상이지만 말이야. 당신이 끝까지 그 환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희망이 있겠지. 띄엄띄엄 덧붙이면서 여자는 그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녀는 결국 그의 소망을 받아주었다. 청년은 흥분으로 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세상을 구하자, .”

  그녀의 속삭임은 언제나 그랬듯 빛처럼 다가온다. 구원을 직감한 청년은 그녀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고.

  “우리는, 끝까지 같이 갈 거야.”

  여자는 정말로 그의 신이 되었다.

 

* * *

 

  결이 좋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빗어, 두 갈래로 나눈다. 다음은 머리카락이 흐르지 않도록 다듬어, 단단히 묶는 것이었다. 여자의 머리카락을 묶어주며 청년은 언뜻 어릴 적 동생의 머리를 매만질 때를 떠올렸다. 동생은 친구를 사귀기 전까진 언제나 오빠에게 머리끈을 내밀며 묶어달라고 부탁했다. 자그마한 손으로 하는 일이 모두 서툴 때는 그랬다. 세상에 나서고 또래 친구를 만날 즈음에서야 동생은 스스로 머리를 묶게 되었다. 그렇게 된 것이 벌써 몇 년 전인데도, 몸에 익은 습관은 아직 남아있다. 능숙하네. 여자의 칭찬에 청년은 웃었다.

  세상을 구하기로 결심한 후, 두 사람은 그들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시간을 한가롭게 보냈다. 순간순간을 즐기는 모습은 꼭, 휴양지에 온 이들을 연상시켰다. 무거운 일을 남겨두고도 두 사람이 무난하게 지냈던 것은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처참한 결말을 각오했기에 그들은 덤덤할 수 있었다. 모험에 뛰어들기라도 하듯 죽음을 이야기하고, 스스로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은신처를 떠나기로 한 때가 지금이었다. 청년은 몇 벌 되지 않는 옷 중 가장 말끔한 것을 입었다. 죽으러 가는 길엔 가장 나은 모습이길 바라서였다. 여자는 과거 구원자로서 나선 때의 모습으로 꾸미기로 했다. 느슨하게 땋곤 했던 머리카락을 지금 두 갈래로 묶은 것도, 그때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라 했다. 양쪽에 날개 모양 머리장식을 꽂아주는 것으로 단장은 끝났다. 그가 고른 장식엔 그녀가 어떤 것에서든 자유로워졌으면 하는 소망이 깃들어 있었다. 청년은 악마 앞에 선 여자를 상상하며 머리카락에서 손을 뗐다.

  “있잖아, .”

  거울을 통해 제 모습을 확인한 여자는 앉은 채로 청년을 돌아보았다. 렌즈 같은 눈이 오래도록 신자를 담았다.

  “괜찮겠어?”

  “무엇이?”

  “전부.”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친우를 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도. 나 이외의 모두가 당신 편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여자는 슬픈 가능성을 나열한다. 아직도 그에게 연민이 남은 듯.

  끝까지 함께하기로 약속한 후, 여자는 청년에게 또 하나 괴로운 사실을 꺼냈다. 세계를 지배한 악마가, 정확히는 그 분신이 청년의 주변에 있었다는 것. 평범한 인간처럼 자라난 악마의 조각은, 청년이 동생 이후로 가장 아꼈던 친우였다. 친우가 이차원에서 쓰러져 타인의 몸에 깃든 것조차 악마의 분신이 전부 모여 하나가 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두 사람이 세상으로 나서면, 악마에 맞서면, 청년은 친우와도 싸워야 한다.

  악마를 무너뜨리면 무엇이 남을지 청년은 알지 못한다. 부활을 위해 삼킨 네 명의 조각이 나올지, 아니면 악마가 두른 악의만이 오염물처럼 흘러내릴지. 짐작할 수 없기에 청년은 슬퍼할 수도 없다. 때문에 청년의 답은 건조했다.

  “내 일이야 각오한 거고, 유토도 자크에게서 해방시켜줘야지.”

  “……해방의 길이란 죽음밖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유토라면 자기가 악마가 되는 걸 더 견디지 못할 거야.”

  동생도, 친우도. 운명에 휩쓸린 이들은 상냥했기에 청년을 더 슬프게 했다. 운명으로 옭아매지 않았다면 분명 더 나은 미래를 만들었을 텐데. 세상의 의지로부터 그들을 구하고 싶어 청년은 몸을 부숴가며 싸워왔다. 그럼에도 세상이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면, 가장 확실한 길은 운명 자체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동생의 운명이 여자를 불러내는 것으로 깨졌다면, 친우는 악마를 없애는 것으로 해방시켜주면 된다.

  “나도 함께 가줄 거고.”

  “꼭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돌아오긴 힘들잖아.”

  “그 뜻이 아냐, . 당신이 죽지 않을 길이 있긴 해.”

  뜻밖의 말에 청년의 눈이 둥그레졌다. 이미 죽음에 짓눌려 세상에 나가지 않아도 오래 버티지 못할 그에게, 어떤 희망이 있는 것인지. 믿을 수 없다는 눈에 여자는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하나는 당신이 과거의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크를 물리치는 것. 그렇게 되면 당신은, 내가 그랬듯이 새롭게 살 수 있게 돼. 쿠로사키 슌으로 살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당신의 삶은 끝나지 않는 거지.”

  “다른 하나는?”

  “새로운 길을 택하는 거야. 세상이 정해둔 구원자의 길에서 벗어나서 우리의 해결책을 찾는 거지. 하지만 위험부담이 크고, 운명을 따르지 않으니 당신의 몸도 망가질 거야.”

  “운명을 따르면 살고, 반역을 하면 죽는단 건가.”

  “선택권을 줄게. 목숨을 걸고 나와 함께하기로 했으니 방식은 당신이 선택하게 해야지.”

  자, 어떻게 할 거야? 여자가 속삭였다. 청년은 그녀의 눈에서 여러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안타까움과 슬픔, 그리고 죄책감. 그녀가 갖지 않아도 될 감정들. 세상을 구하기로 결심했다면 그 목적만을 향해 달려가면 된다. 어차피 멈춰버릴 도구 따위 돌아볼 필요 없는데.

  그녀는 청년에게 선택지를 주면서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죽지 않는 길을 상상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세상을 구할 수 있으니 한 번은 삶을 틀어쥐었으면 좋겠다고, 마음 한쪽에선 바라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언제나 지나치게 상냥하고 청년은 항상 제멋대로였다. 그러니 지금도, 답은 정해져 있다. 그녀를 위한 것이지만 그녀의 마음은 돌아보지 않는 답.

  “우리한텐 반역이 어울리겠지?”

  “……역시 그렇구나.”

  “나는 말이야, 내 삶에서 완벽하게 자의로 선택할 수 있는 건 죽음뿐이라고 생각했어.”

  삶의 모든 부분이 타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완전히 정지하기 전까지 청년은 어떻게든 세상에 지배당한다. 그렇다면 죽음이야말로 그에겐 자유가 아닌가. 그러니까 레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청년은 몸을 숙여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이것만은 믿어도 좋아. ‘내가당신을 돕길 바라. 세상을 거역하는 방향으로.”

  “정말, 고집이 너무 세다니까.”

  여자가 깔깔댔다. 그 웃음에 밴 씁쓸함을 못 본 체 하며 청년은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떠나자는 뜻이었다. 이전, 두 사람이 침략군의 기지에 침투했을 때 세상은 이미 종말을 앞두고 있었다. 차원의 틈새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지만,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음을 그들은 분명히 안다.

  “그래도 혹시, 살 수 있을 것 같을 땐 살아줘야 해.”

  손을 잡고 일어서며 여자는 말했다. 이번에는 청년도 장난스레 받아친다.

  “그건 명령이야?”

  “그래야겠네, 당신이 말을 듣게 하려면.”

  “그럴 기회가 있길 바라.”

  둘의 시선이 엉켰고 동시에 웃음이 걸렸다. 이제 말은 더 필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 앞에 놓인 것은 결말뿐. 여자는 청년의 손을 잡고서,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Chapter 1: https://hyeonsoyah.tistory.com/132

Chapter 3: https://hyeonsoyah.tistory.com/134

 

 

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