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는 오빠의 몸을 꿰뚫는 빛줄기를 보았다.

닫히려는 눈꺼풀을 힘겹게 열었을 때, 유리벽 너머로 비친 광경이었다.

 

*

  

  맹금의 이름을 가졌던 오빠는 거짓말처럼 추락했다. 녹색의 빛줄기에 꿰뚫린 몸이 사냥당한 새처럼 힘없이 바닥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곧 둔탁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오빠의 육신이 바닥에 거칠게 닿는 소리였다. 3호는 거기서 오래된 악몽을 떠올렸다. 오빠가 아무렇지도 않게 망가지는 꿈. 아무래도 또다시 악몽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거대한 장치에 갇혀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던 3호였다. 그대로 심신의 스위치가 내려가기 직전, 몽롱해진 채로 익숙한 꿈을 꾸고 만 것이다. 3호가 가장 싫어하는 꿈인 동시에 자꾸만 제 삶에 끼어들었던 꿈을.

  어려서부터 말보다 행동이 앞섰던 오빠는, 당장 필요한 일이다 싶으면 위험한 일에도 무모하게 뛰어들기 일쑤였다. 청년기에 접어들어 고향에 침략군이 밀려드는 불행을 겪고는 더욱 무모해졌다. 살아남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방패가 되기로 한 것이다. 모두를 지키려 싸울 거라 이야기하긴 했지만, 오빠는 너무 많은 싸움에 너무 쉽게 뛰어들었다. 침략군에 맞서는 레지스탕스가 되고는 거의 몸을 던지는 수준으로 전투에 나서는 오빠였다.

  오빠에게 미래를 빚지는 사람들조차 오빠의 지친 등을 보고 걱정 어린 말을 흘리곤 했다. 저렇게 위험한 싸움에 뛰어들어서야……저러다 제일 먼저……제대로 버틸 수나 있을지. 짧은 침묵 사이사이에 생략된 말을 3호는 듣지 않고도 알았다. 그런 기분 나쁜 예언이 귀에 박힐 때면 3호는 오빠의, 무모함이, 저를 돌아보지 않는 태도가 싫어졌다. 저러다 예언이 실행되고 만다면? 오빠가 정말 꺾여버린다면? 어느 날 침략군에게 짓밟혀, 패자가 전부 그러했듯 종잇조각이 되고 만다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불안을 떨칠 순 없었다. 오빠는 한 번 옳다고 생각한 일을 포기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3호가 바라지 않는다 해도 동생을 구하려 싸워야 한다 판단했다면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게 오빠였다. 3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빠의 싸움을 함께 짊어지는 것뿐이었으나 오빠는 그럴 기회조차 잘 주지 않았다. 루리. 너는 안전하게 여기 있어야지. 짤막한 말로 오빠는 동생의 싸움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계속 위험한 전투에 뛰어들어 너무도 쉽게 몸을 내던지고, 잔뜩 망가져선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난민캠프에서 지내던 시절 3호는 잊을만하면 똑같은 꿈을 꾸었다. 자꾸만 동생에게 등을 보이고 앞서가던 오빠가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버리는 것. 꿈속에서 오빠는 칼에 찔리기도 했고, 공습에 휩쓸리기도 했다. 언젠가의 꿈에선 총탄에 몸이 꿰뚫리기도 했는데, 어느 꿈이건 오빠가 죽어버렸기에 3호에겐 전부 <같은> 꿈이나 다름없었다. 끔찍하기만 한 꿈에서 가장 처참했던 건, 꿈속에서조차 오빠를 도울 길은 없었다는 것. 오빠의 죽음을 막는 것도, 싸움을 중단시키는 것도 불가능했다. 피투성이가 된 오빠를 몇 발짝 밖에서 멀거니 바라볼 뿐.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도 악몽의 연속이리라. 미동조차 없는 오빠의 몸이, 부자연스러운 자세가 말해주고 있다. 이건 무의식이 빚어낸 장면이라고. ‘꿈속에서 오빠를 죽여버린 거라고. 여태껏 꾼 꿈과 다른 점은 하나, 빛에 꿰뚫린 자리에서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것뿐. 그동안 피투성이가 된 오빠를 수없이 봐왔던 3호에겐 그나마 덜 괴로운 광경이었다. 고통 속에 죽지 않았을 거라, 스스로를 달랠 수 있었으니.

  물론 이런 순간에까지 악몽에 시달리는 건 달갑지 않다. 의식이 끊어질 땐 끊어지더라도 불쾌한 꿈에 사로잡힌 채 정신을 잃고 싶진 않았다. 오빠의 상을 흩어내려 정신을 집중하던 3호는, 귓가에 파고드는 낯선 목소리를 들었다. 외부인이 들어오게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날카로운 목소리는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선명하게 울렸다. 저놈이 뛰어드는 바람에 아크파이브가 멈출 뻔했잖아. 날 선 비난에, 우물쭈물하는 목소리가 바로 따라붙었다.

  나도 막았어! 막았는데 갑자기 뛰어들었다고.

  프로페서가 맡긴 일이 얼마나 막중한 건지 몰라? 리바이벌 제로가 중단되기라도 했다간 어쩔 뻔했어?

  알겠으니까 그만 좀 해. 어차피 저거, 죽어버렸을 거라고. 아크파이브의 기능이 뭔지 알잖아.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거.

  아크파이브의 광선에 아예 몸을 관통당했으니 생명력을 죄다 빼앗겼겠지. 리바이벌 제로를 가동시킬 동력을 더한 것으로 쳐. 변명하듯 자꾸만 이어지는 말에 3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왜 정신을 집중할수록 쓰러진 오빠의 모습이 흐려지는 게 아니라 낯선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걸까. 그리고 왜, 목소리의 주인들은 저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걸까. 아크파이브, 리바이벌 제로. 3호가 알기로 그것은, 각각 자신을 가둔 장치와 제가 휘말린 프로젝트의 명칭이었다.

  그러고 보면 오빠를 꿰뚫은 빛줄기도, 3호가 갇힌 장치에서 새어 나오는 빛과 색이 완벽히 같았다. 불길한 녹색으로. 다시 보니 오빠가 쓰러진 자리도 바로 장치 밖의 바닥이었고

  바닥에 떨어진 건 치워버려. 생명력을 끌어냈으니 더 볼 일은 없다.

  냉랭한 말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인물은 심지어 3호를 장치에 가두라 명령한, 이곳의 수장이었다. 꿈에서 깨기 위해 눈꺼풀을 열고 있었던 덕에 3호는 그 남자가 장갑 낀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챘다. 그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은, 바닥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수장의 지시에 몰려든 사람들이 짐짝처럼 들어 옮기려는.

  꿈에서 걸핏하면 죽어버렸던.

  “오빠한테 손대지 마!”

  3호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쓰러진 오빠를 든 사람들도, 오빠를 치워버리라 명령한 악의 수장. 전부 얼어붙어 3호만을 응시했다. 묵직한 침묵 속에서 가장 먼저 열린 것은 수장의 입술이었다.

  왜 조각이 깨어난 거지? 그것도 하나만?

  주변을 둘러보니 웅크린 소녀가 셋 보였다. 1, 2, 4. 3호와 같이 장치에 갇힌, 불운한 소녀들. 세 명의 눈꺼풀이 단단히 닫힌 것을 확인한 때 3호는 수장의 말을 이해했다. 동시에 자신의 처지도 이해했다. 그러자 머리를 짓누르던 의문이 하나둘 풀리기 시작했다. 빛줄기에 관통당한 오빠가 피를 흘리지 않은 이유, 아무리 노력해도 꿈이 깨지 않은 이유, 그리고 오빠가 맞이한 진짜결말까지.

  결론이 난 때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다음 순간, 재앙이 일었다.

 

*

 

  정예병의 리더는 겨우 눈꺼풀을 들었다. 숨이 막히도록 짙은 향내가 코를 찌른 탓이었다. 코가 향에 적응할 즈음에 리더는 자신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조금 전까지 정신을 잃은 채였단 걸 떠올려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의식을 잃기 직전 굉음을 들은 듯했다. 굉음의 원인은 확실치 않으나 소리가 들린 직후 건장한 남성인 그가 멀리 튕겨 나가 바닥에 내던져졌으니, 무언가 큰일이 일어난 건 틀림없었다. 문제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였다. 바닥에서 일어난 리더는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세상을 선명하게 담으려 노력했다. 눈앞에 비치는 풍경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던 탓이다.

  의식이 끊어지기 전까지 그가 있었던 곳은 침략군의 본거지이자 적진의 중심부였는데. 온갖 장치로 그득했던 <기술의 정점>이었는데. 지금 리더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꽃밭이었다. 그를 깨운 향내도 아마 빼곡하게 뿌리내린 꽃에서 난 것이리라. 정신을 잃고 깨어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길어봐야 1시간 남짓일 텐데, 그 사이 기계장치가 들어찼던 위험한 공간이 꽃밭으로 바뀐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도, 낙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꽃만 가득 들어찬 공간이었다.

  짧은 시간에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리더는 통신장치의 화면에 제 얼굴을 비춰보았다. 혹 세월이 너무 흘러버린 것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해 한 행동이었으나 화면에 비치는 얼굴은 조금도 늙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꽃밭 군데군데 쓰러진 정예병의 모습도 그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너무 늦게 깨어난 게 아니라면, 그의 눈앞에 놓인 비현실을 설명할 방법이란 하나뿐. 꿈에 젖어있다고밖에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튕겨 나가며 몸에 가해진 충격과 그로 인한 통증은 너무도 선명했다. 깨어난 순간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지속되는 고통이 현실감을 일깨웠다.

  찜찜함을 누르며 꽃밭을 둘러보던 리더는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몸을 숙였다. 다음은 서로 엉긴 꽃을 풀어내며, 꽃이 뿌리내린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빽빽하게 자리한 꽃을 손으로 헤치고, 꺾어내기를 반복해 바닥을 보았을 때. 리더는 거기서 기계의 부품들을 잔뜩 발견할 수 있었다. 군데군데 흩어진 유리 파편까지, 꽃밭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품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본디 이곳에 들어찼던 장치들.

  꿈이 아니었다.

  굉음이 들린 것과 장치가 산산이 부서진 것을 보면, 이 근처에서 폭발이 일어났을 확률이 높다. 리더와 그가 이끌던 정예병은 폭발의 여파로 여기까지 튕겨왔고, 폭발에 휩쓸린 이들과 흩어진 파편 위를 꽃이 덮었다고 봐야 할 터다. 여전히 비현실적이기 그지없는 상황이지만 지금은 그 외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가 없다. 이제 리더의 머리를 메우는 의문은 사고의 흔적을 덮은 게 왜 하필 꽃이었는가였다. 굉음이 들리고 기계의 파편이 튀는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자연의 흔적이라. 곱씹어볼수록 기묘했다.

  그럼에도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 갑자기 꽃이 번진 까닭을 파헤쳐야 도대체 어떤 상황에 놓인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을 테니. 타고나길 영민했던 리더는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빠르게 조합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리더가, 그가 데려온 정예병이 맞서 싸우던 침략자의 본거지. 오래전부터 야심을 품고 인재를 모은 침략군의 수장은 자신이 선발한 엘리트에게 위험한 연구를 맡겼다고 들었다. 이곳에 놓였던 수많은 장치도 전부,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무시무시한 기능이 담긴 기계였으리라.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지 모를 악인과, 빼어난 능력을 지닌 엘리트. 거기에 발전된 기술이 총동원되었을 기계가 가득 찬 환경이라. 조금만 어긋나도 엄청난 희생자가 나올 수 있을 상황이었다. 리더가 예상한 대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면 특히.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리더는 꽃으로 뒤덮이는 바람에 그가 이끌던 전사 누구도 치명상을 입지 않았단 것을 떠올려냈다. 위험한 화학품이 흘러나오거나 기계가 폭주하는 일도 없었다. 급작스레 퍼진 자연의 힘이, 인간이 벌인 사고를 눌러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전쟁을 벌여 죄 없는 이들을 짓밟고 자원을 착취했던 침략자. 그리고 제 나라의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침략이란 폭력을 방관했던 다수. 정의를 내세우며 나섰으나 침략자의 계획을 제대로 막지 못한 정예병과 리더까지. 리더가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본 인간이란 저를 포함해 대부분이 신 앞에 떳떳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경전에 기록된 종말은, 바로 이렇게 어리석고 부족한 인간이 그득한 때 몰아치지 않았던가 그렇게 보면, 재앙이 퍼질 수도 있었던 이곳을 자연의 힘이 덮은 것은 구원처럼 비치기도 했다.

  인간의 문명으론 넘어설 수 없는 자연, 신이 재앙을 내릴 때 사용했던 자연이 인간의 희생을 막아준 것이니.

  신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묘한 기분에 젖어, 리더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까지 향해, 동료들 외에 재앙을 피한 이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고가 일어난 곳은 침략군과 연구원이 지키고 있던 적진의 최중심부. 정예병만이 사고의 여파로 튕겨 나갔을 리 없다. 가까이서 폭발에 휘말렸을 이들을 찾아야만 자연의 개입이 어느 정도까지 뻗쳤는지 알 수 있으리라.

  이 세상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던 침략군과, 무시무시한 일을 꾸미던 엘리트. ‘죄짓던 이는 무사했을까? 그들에게도 자연의 신비가 닿았을까, 아니면 징벌당했을까. 발걸음이 떨어질 때마다 머리를 때리는 생각이었다.

  리더의 입장에서 제일 결말이 궁금한 인물은 침략군 수장. 야심 때문에 이곳을 죄인의 땅으로 만들고서 수많은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악인이었다. 자꾸만 그에게로 생각이 튀는 것은 단순히 그 남자가 <죄악의 근원>이어서는 아니다. 리더의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기도 하다. 한때는 그 남자도 세상의 희망이었다. 존경받는 기술자였고, 놀라운 기술을 선보인 천재이자, 그 기술을 바탕으로 회사를 차려 성공한 기업인이기도 했다. 한때는, 그랬다.

  한때는 리더의 눈에도 빛나는 사람이었다.

  아니, 리더에겐 다른 사람에게보다 몇 배는 더 빛나는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남자는 리더에게 단순한 기업인이 아니었으니. 수많은 사람의 롤모델이 된 천재라거나, 뛰어난 기술자라거나. 세계적 대기업의 창업주라는 타이틀보다 더 중요한 수식어가 리더에게는 보였다. 그와는 특별한 관계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유년기에 리더는 그 남자를 아버지라 부르곤 했으니까.

  그 남자가 더 이상 빛나 보이지 않은 지도 벌써 몇 년인데, 리더는 아직도 그의 유산을 떠올릴 때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그 남자가 야심을 품고 먼 이국으로 사라지는 바람에 떠안게 된, 그의 책임이라거나. 회사 곳곳에 남은 그의 기술이라거나 그런 것보다 훨씬 자주 마주치고, 더욱 쟁그라운 유산도 있다. 공식적인 서류에 서명할 때마다 쓸 수밖에 없는 성씨. 그 남자가 물려준, 가장 무거운 족쇄. 아카바(赤馬).

  그 남자가 아카바라는 성씨를 세상에 알려버린 탓에 리더는 아비가 처자식을 버리고 사라진 후로도 제 성씨에 따라붙는 기대를 느껴야 했다. ‘아카바 레오의 아들. 그 레오 코퍼레이션 창업주의 아들. 세상 사람들이 리더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얹는 기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세상은 리더가 아비만큼의 자식으로 성장하길 바랐다. 그 남자의 가장 자랑스러운 후계자가 될 거라 믿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들에게 회사를 넘겨준, 정확히는 그렇게 알려진 그 남자는 실은 먼 이국에서 어린 학생들을 침략군으로 키워내고 있었는데.

  리더가 정예병을 결성해 침략군에 맞서기로 한 건, 분명 정의를 위한 결심이었다. 아비를 꺾고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는 순간을 꿈꾸며 리더는 여기까지 왔다. 다만 아비의 죄악을 잘라내고 싶다는 욕망도 없진 않았으리라. 리더는 자신의 성씨에서, 세상이 저에게 쏟는 기대에서 아비의 그림자를 지워내고 싶었다. 그 남자라는 악몽을 끊고, ‘그 남자의 아들이기도 한자신을 오롯이 인정하고 싶었다.

  그러니 이 순간, 리더는 아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수많은 죄악을 낳은 이답게 사고에 제대로 휩쓸리고 말았을까. 아니면 자연의 자비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 그 남자조차 화를 피했을까. 어느 쪽이어도 감정이 깔끔하지 않을 듯했다. 전자라면 리더는 그라는 죄악을 제 손으로 끊을 기회를 잃게 된다. 후자라면 그가 죄 없는 이들과 함께 살아남았음에 불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역시 이곳에 침투해 그 남자를 상대했을 때 제대로 처리했어야 생각을 끊은 것은 시야에 들어온 익숙한 형체였다.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리더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자가 있다. 리더는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한 순간 걸음을 멈췄다. 발끝부터 머리털까지,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한 감각에 사로잡힌 채.

  “……아카바 레오.”

  “버릇없긴.”

  유감스럽게도 살아남은 아비는, 존칭 없이 이름을 읊는 리더를 보며 혀를 찼다. 내팽개친 자식에게 새삼 공손함을 바라는 것인가. 예상대로의 뻔뻔함에 리더는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하긴 수하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놈이니.”

  “그쪽이야말로.”

  그나마 리더에게 위안이 되는 건, 아비가 걸친 제복이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옷이 찢겨 살갗이 드러나는 자리마다 바로 조금 전 난 듯한 상처도 보였다. 신의 자비인지 지독한 행운인지 목숨은 건졌지만 사고에 제법 휩쓸렸던 것 같다. 세상은 그 남자에게 완전한 행운은 허락하지 않았다 리더를 포함한 저항군이 정신만 잃었을 뿐 무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보다 당신, 하나 수정해야 할 게 있어. 내가 아카데미아에 데려온 자들은 수하가 아냐. 당신의 군대에 맞서기로 한, 전사들이지.”

  “그 잘난 전사가 모든 걸 꼬아버렸단 건 아나?”

  “우리는 아카데미아를 꺾으러 이곳에 왔다. 당연히…….”

  “아카데미아의 문제가 아니야! 세계의 운명이 꼬여버렸단 말이다.”

  멈춰 선 아들에게 바짝 다가온 아비는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 전사 하나가 우리 모두의 미래를 망쳤어! 리더는 제 삶의 얼룩이었던 남자에게서, 그의 회색 눈에서 분노 대신 공포를 읽었다. 아비는 가족을 팽개치고서 긴 시간을 제 야심만 따라 움직였던 남자였다. 계획 하나가 어그러지는 것으로, 생각지 못한 방해꾼이 뛰어드는 것만으로 흔들릴 리가 없다. 아들이 정예병을 이끌고 왔단 보고를 받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적군을 불러들였던 그가, 고작 한 사람의 방해에 저렇게나 격하게 반응한단 말인가.

  특히 신경 쓰이는 것은 세계의 운명이라는 표현이었다. 왜 아비는 갑자기 운명을 논하는 것인가. 왜 미래를 잃은 듯 떨고 있는 것인가. 꼭 신벌을 앞둔 사람처럼.

  “랜서즈 중 하나라는 건 알겠는데, 대체 누구를 이야기하는 거지?”

  이유를 알려면 상황을 들을 수밖에 없다. 리더는 아비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아비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여전히 까끌까끌한 목소리로 답했다.

  “쿠로사키 루리의 오빠.”

  “…….”

  “그놈이 갑자기 통제실에 뛰어들면서 아크파이브 장치가 오작동했다. 누가 보냈지? 네 지시였나?”

  내 일을 방해하고 싶어서 머리가 흐려지기라도 한 거냐? 따라붙은 말에 반박을 얹는 대신 리더는 입술을 깨물었다. 문제의 인물이 누구인지 확인하자마자 마음이 복잡해진 탓이었다. 사고에 휩쓸렸다 정신이 들었을 때, 리더는 주변에 쓰러진 정예병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있어야 할 전사 하나가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열 명도 되지 않는 정예병으로 적진에 침투한 상황에, 한 명이라도 단독행동을 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이탈자를 굳이 찾지 않은 건 나서봐야 말릴 수 없으리란 옅은 체념 때문이었다.

  혹은, 마음의 빚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리더는 시야에서 멋대로 벗어나고 만 전사가, 이전부터 단독행동을 하던 그 청년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너무도 잘 알았으므로. 청년은 아비가 침략한 나라의 몇 안 되는 생존자였다. 동시에 침략군이 납치한 동생을 구하려 정예병이 된 사람이기도 했다. 청년에게서 고향도, 동생도 앗아간 아비는 청년에게 한 가닥 죄악감도 느끼지 않을 터였으나 리더는 그에게 무거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언젠가는 아비가 낳은 비극에서 그를 구해야 한다는 책임은 리더에게, 아비를 꺾겠다는 마음을 더욱 벼리게 하는 자극제이기도 했다.

  다만 정예병 결성 직후부터 리더는 모두를 위해, 정예병 동료들을 위해 청년의 간절함을 못 본 체해왔다. 금방이라도 적진에 뛰어들려는 청년을 설득하고 통제하며 이곳저곳을 누비다 뒤늦게 여기까지 온 리더였다. 청년의 동생이 끌려온 곳, 침략자의 본거지에 침투한 이상 이제 청년을 묶어둘 핑계는 사라졌다. 청년의 부재를 확인한 때 리더의 머리를 스친 것은 이번에야말로 청년을 놓아주어야 할지도 모른단 생각이었다.

  청년이 늦지 않게 동생을 구할 수 있도록.

  통제실로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청년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가 대강 눈앞에 그려진다. 이곳에 침투한 때부터 리더와 함께 움직이지 않은 그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무작정 적진의 최중심부로 향했으리라. 그러다 수상쩍은 공간을 발견해, 동생의 흔적을 찾아 뛰어든 것이다. 하필 그곳은 침략군의 수장인 아비와 위험한 연구를 해온 기술자가 가득한 곳이었고, 붙들린 동생을 발견한 그는 바로 가장 중요한 장치로 향해

  “막는다고 얌전히 붙잡혀있을 자가 아냐. 돌발 상황이 없길 바랐다면 애초에 리바이벌 제로 같은 일을 꾸며선 안 됐지.”

  동생을 납치하고 고향을 폐허로 만든 이에게 최고의 복수를 했을 게 뻔하다. 침략군 수장의 야심을 이뤄줄 장치를 망가뜨리는 것으로. 아비가 저항군앞에 자랑스레 소개했던 장치가 청년 때문에 오작동했다 하니, 굉음이 울리고 모두가 튕겨 나가게 한 사고는 청년이 일으킨 사건일 확률이 높다. 중대한 장치에 청년이 손을 대자 그 여파로 주변의 기기들까지 오류를 일으켜, 결국은 침략군 수장의 야심이 실현될 뻔한 공간을 반쯤 날려버린 것이리라.

  “내가 하려던 대로 뒀다면 이런 일도 없었다! 아크파이브 장치가 오작동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레이의 조각들이 폭주하면서 완전히 통제불능이 됐다. 레이의 힘을 가진 괴물이 넷이나 생겨버렸단 거야!”

  “이해가 가지 않는데.”

  그냥 레이의 힘을 가진 넷이 당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게 되었단 뜻 아닌가? 리더는 옅은 웃음을 걸치며 빈정거렸다. 아비는 상황을 제 뜻대로 왜곡하는 나쁜 습성이 있어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다. 아비가 이야기하는 조각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멀쩡히 살아 숨 쉬는 인간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신성한 힘을 타고났다는 네 명의 소녀를 세계 곳곳에서 납치한 아비는, 그들을 구원자의 조각으로 명명하고서 넷을 세뇌해 뜻대로 부리려 들었다. 네 명의 초월적인 힘에 기대 야심을 실현하려는 동시에, 그동안 벌여온 악행에 초월자의 뜻이란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려 한 셈. 아비가 어떤 인간인지 훤히 아는 리더로선 그저 우습게만 보이는 수작이었다.

  “못 믿겠거든 네 눈으로 똑똑히 보거라. 네 망할 전사가 어떻게 일을 망쳤는지. 당장 여기서 조금만 나가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거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에는 여느 때와는 다른 긴장이 내비친다. 아들의 빈정거림을 제대로 받아치는 대신 어떻게든 진실을 확인하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평소답지 않다. 꼭 신벌을 앞둔 사람 같다는 감상이 다시 머리를 쳤다. 튕겨나온 기계의 잔해와 사고의 흔적을 덮은 꽃의 무덤이 신화 속 구원 같다는 생각도 되살아난다. 아비가 이 시대에 내세우려 했던 구원자, 네 명의 소녀가 품은 초월자의 모습이란 자연의 힘으로 무장한 심판자라 했던가. 어쩌면 청년이란 방해꾼의 침입으로 정말로 심판이 떨어진 것이라면?

  그것이 아비가 쌓아온 모든 것을 망치고, 모든 죄악을 날려버린 거라면?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첫째로, 리더는 세계의 운명이 꼬여버렸다고 떠들어대는 아비, 눈앞의 남자를 막아서기 위해 이곳에 왔다. 둘째로, 아비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든 건 리더의 전사였으며 리더는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전사를 보호해야만 했다. 단독행동을 감행한 청년을 다시 데려갈 겸, 상황을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다음 행동을 결정하려면 아군은 물론이거니와 적의 현 상황까지 낱낱이 훑어야 할 테니.

  “원하신다면야.”

  대신 당신의 말이 들어볼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면, 앞으로 내게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아야 해. 리더가 호기롭게 말하자 아비는 왔던 방향으로 몸을 돌리더니,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안내하는 것 같은 모습에 순간 거부감이 치밀었으나 리더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를 아비를 두고 움직이느니 차라리 그 남자의 등을 보고 따라가는 게 마음이 놓였다. 긴장을 누르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신 아비가 걸음을 떼자 리더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린 꽃을 무심하게 짓밟으며.

  사고의 여파로 비틀거리면서도, 피가 배어 나온 상처가 있는데도 아비는 제법 빠르게 걸었다. 상대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보폭에, 오히려 몸이 말짱한 리더가 따라가느라 숨이 가쁠 정도였다. 제 생각에 빠져 뒤따른 이를 돌아보지 않는 아비의 모습은, 내팽개친 가족을 끝내 모른 체한 지난날을 연상시킨다. 가족을 버리고, 수많은 젊은이의 미래를 버려서 다다르려 했던 목적지가 겨우 여기인가? 꽃 덩굴이 엉긴 기계 파편과 군데군데 부서진 벽을 눈에 담을 때마다 냉소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리더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비가 이끄는 곳으로 걸었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뻔히 알고 있다. 얼마 전 리더가 전사를 이끌고 들어섰던 곳. 부자가 함께 선 <악의 요새>의 입구. 간부 이하의 출입을 제한하고 외부인에게 문을 닫아건 이곳에서 바깥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곤 그쪽이 전부일 터다. 반드시 아비를 무너뜨리겠다는 결심을 안고 들어섰던 곳이므로 리더는 그곳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선명하게 기억한다. 침입자를 어떻게 막도록 설계되었는지. 장벽은 얼마나 높고 경비병은 몇이나 준비되었는지.

  그러니 아비의 말에 한 가닥 거짓이나 과장이라도 있을 경우엔

  생각이 멎었다.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상황을 확인하자마자 입을 뗄 생각이었던 리더는 혀를 놀리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안경 너머 보랏빛 눈에도 평소답지 않은 긴장이 드리워진다. 아비의 공포와 좌절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리더였으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것도 단단히.

  부자 앞에 펼쳐진 세상에 문명의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자연이 모든 것을 덮어버린 탓이다. 자연으로 덮인 세상은 신화 속에서 아름다운 낙원으로 묘사되곤 하나 리더의 눈에 새겨지는 것은 아름답기보다 기괴했다. 허리 높이로 자라난 꽃이 지독하게 짙은 향을 뿜어내고, 새 떼가 하늘을 검게 수놓으며, 쉼 없이 부는 바람에 모든 생물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광경이라. 이것은 낙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때, 이걸 보고도 아무 생각도 없나?”

  “이건…….”

  “재앙이다.”

  묵직한 말은, 눈앞에 놓인 세상에 대한 리더의 감상을 정확히 요약한 표현이었다.

 

*

 

  3호는 자신에게 붙은 번호가 싫었다.

  번호의 의미는 알았다. 3. 세 번째 조각이란 뜻이었다. 3호 이외에도 1호와 2, 4호까지 있는 것을 보면 조각은 총 4명이며 어떤 기준으로 번호가 매겨졌음이 분명했다. 번호가 붙었다고 해서 3호라는 인간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3호에겐 여전히 이름이 있었고, 제 얼굴이 있었으며, 십오 년 가량을 살아온 기억도 남아있었으니. 그러나 인간에게 <몇 번째 조각>이란 수식어를 붙인다는 것은 그를 인간이라기보다 사물로 취급한다는 뜻. 번호가 붙은 때부터 3호는 그 전까지의 삶을 부정당했다.

  ‘3호의삶 같은 건 없었다고.

  고향에 밀려든 침략군에게 납치되어 침략국의 탑에 갇힌 후로도 3호는 한동안 왜 자신이 감금되어야 했는지 알지 못했다. 같은 처지인 1호와 2, 4호까지 만나게 되어서야 답을 알게 되었다. 쌍둥이처럼 똑 닮은 얼굴의 넷이서 서로를 바라볼 때, 그들을 세계 곳곳에서 납치한 장본인이 직접 제 속내를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너희는 레이의 조각이란다. 나는 지금까지 4개의 차원에 흩어진 레이의 분신을 찾아 헤맸지. 침략군의 수장은 제법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너희가 전부 닮은 것도, 신비한 힘을 가진 것도. 전부 레이의 분신이기 때문이야. 그동안은 갈라져서 살았지만 하나로 돌아가는 게 맞겠지. 세계를 위해서도 그게 옳아. 레이는, 내 딸은, 세계를 구하려 몸을 던졌으니까. 전생인 레이가 나서지 않았다면 너희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쉼 없이 쏟아지는 말에, 4명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지금까지 내 고향에서, 내가 알던 사람들과 쌓아온 시간들은 어떻게 되지?

  답은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돌아왔다.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꿈이라고 생각하거라. 레이라는 본모습을 찾기 전까지, 너희가 원래 의지를 되찾을 만큼 성숙하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 적응하기 위해 꿨던 짧은 꿈이라고.

  그러니 3호에겐 형제란 거짓 가족이었고 이름은 가치가 없으며 고향은 돌아볼 이유가 없는 곳이라 했다. 친구와 쌓은 우정도 마음을 준 소년에게 품은 감정도, 하나뿐인 형제와 나눴던 애정도 3호에게는 전부 현실이었는데. 한 번도 꿈처럼 환상처럼 넘겨본 적이 없는데.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전생보다, 십오 년 가량이나 지속해온 지금의 삶이 3호에겐 훨씬 중요했는데.

  그러나 전생의 아비였다는 자는, 이번 생에서 3호를 포함한 넷을 납치한 남자는 3호의 의견 따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저를 경계하는 네 명을 기분 나쁜 장치에 밀어넣은 남자는 바로 문을 닫았다. 이제 더는 빠져나올 수 없다고 무언으로 말하는 듯했다. 아크파이브에서 잠깐 자고 일어나면 돼. 깨어났을 때는 원래 모습일 거다, 레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 남자의 회색 눈은 광인처럼 번득였다. 네 명을 짓이겨 하나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당당히 꺼내는 이를 설명할 말이란 광인 외엔 없기도 했다.

  그런 광인에게 붙들려 모든 걸 포기할 순 없었다. 3호는 닫혀버린 장치의 유리벽을 내리쳤으나 장치가 열리지도, 벽이 깨지지도 않았다. 불길한 녹색 불빛만이 장치를 가득 채울 뿐. 네 명에게 들이닥칠 운명을, 실험대에 놓인 동물과 다를 것 없는 처지를 일깨워주는 듯한 색채에 3호는 몸을 떨었다. 이런 날을 맞기 위해, 이런 삶을 바라서 지금껏 살아온 게 아니었다. 타인을 불러내기 위한 제물로 소모될 날 따위 상상해본 적도 없다. 고향을 덮친 전쟁에서 살아남으려 노력했던 것도, 탑에 갇힌 채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도 전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서였다.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날이 이어져도, 언젠가는 전쟁이 끝날 거라 생각했다. 침략군의 영역에 붙들리고도, 머잖아 탈출해 소중한 이의 품으로 돌아갈 거라 믿었다. 언젠가는 평범한 삶을 되찾고 내내 꿈꿔왔던 특별한 행복도 누릴 거라 기대했다. 그 모든 게 전부 3호가 그려내는 미래였고 ‘3호의꿈이었다. 기억도 없는 전생을 재현하기 위한 환상이 아니라.

  나가야만 해. 여기서 나가야만, 나를 잃지 않아야만 그 미래를 현실로 만들 수 있어. 소리 없이 중얼거린 3호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소중한 이를 하나씩 눈앞에 그려보았다. 언제나 상냥했던 친구. 다소 덤벙거렸지만 활기찬 모습이 매력적이었던 아이. 마음을 주었던 소년. 언제까지나 3호의 편이 되어줄 사람들을. 그중 가장 간절하게 그려낸 자는, 태어나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도 했다.

  바로, 3호의 하나뿐인 가족.

  오빠는 3호가 처음으로 만난 타인이자 3호의 삶에 가장 크게 그림자를 드리운 자였다. 3호에겐 울타리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었는데, 3호를 지켜온 사람이라는 점에서도 삶에 너무 깊게 들어왔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어려서부터 보호자 노릇을 해온 손위형제. 동생에게 세상을 가르치고, 미숙한 부분을 채워줬던 존재 아마 3호의 삶에서 오빠를 잘라내면 3호라는 인간 자체도 꽤나 잘려나가고 말 터였다. 그러니 를 잃을 수도 있을 상황에서 특히 간절하게 떠올린 사람이 오빠였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빠는 3호가 쌓아온 삶을 증명해줄 수 있는 존재였으니.

  한편으로 오빠는 3호에게 고집스레 <내 동생>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인물이기도 했다. 3호는 그의 동생이었고, 그가 키워온 사람이며, 그와 함께한 존재였다. ‘나의동생이라는 소유격의 수식어가, 동생을 당연하다는 듯 자신과 연결하는 오빠의 태도는 운명에 휩쓸리기 직전의 3호에게 안도감을 안겼다. 오빠는 3호를 이 세상에 묶어둘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오빠의 동생으로 남는 한, 평범한 인간인 오빠와의 관계가 유지되는 한 3호는 <구원자의 조각>이 아니라 독립적인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거기에 오빠는 3호를 구하기 위해 이미 고향에서 침략국까지 침투한 상황이었다. 탑에 갇혀있던 3호를 찾아와, 데리고 탈출한 것이 오빠. 전장에서 살아남아 적진까지 뛰어들고 납치된 동생을 기어이 찾아내는 집념이라니. 그런 사람이 운명이란 말에 속아 3호를 전생체의 파편으로 취급할 리가 없다. 침략국의 수장이 아무리 떠들어대도 3호가 쿠로사키 루리라는 인간임을 주장하며 끝까지 3호 자체를 지켜내려 할 것이 뻔했다.

  적진에서 실수로 손을 놓고 만 오빠가 다시 찾아온다면. 어떻게든 길을 찾아 여기까지 오기만 한다면.

  인간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도록 설계되었다는 장치는 조금씩 의식을 꺼트려갔다. 3호는 함께 장치에 갇힌 이들이 서서히 눈꺼풀을 닫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언뜻 보기엔 잠에 빠져드는 과정이었지만, 그것이 보통의 잠처럼 휴식일 리 없었다. 그 끝에 기다리는 건 자아를 잃는 것, 더 나아가 삶을 잃는 것뿐이리라. 그런 결말만은 피하기 위해 의식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3호의 눈꺼풀도 자꾸 무거워지기만 했다. 오빠가 기적처럼 여기에 온다면. 잠깐만이라도 이 끔찍한 상황을 멈춰준다면. 몽롱해진 채 유리벽 너머를 보며 언뜻, 그런 소망을 흘린 것 같다.

  불행한 이가 대개 그렇듯이 3호의 소망도 절반만 이루어졌다. 오빠는 3호의 소망대로, 장치가 놓인 통제실까지 닿았다. 절반의 실패는 바로 그 다음에 이루어졌다. 3호의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오빠가 동생을 구하기 위해 남은 힘을 짜내어 장치에 접근했던 때 3호는 오빠의 몸을 꿰뚫는 빛줄기를 보았다. 거짓말처럼 추락하는 오빠도, 더는 움직이지 않는 오빠의 몸도 보았다. 꿈이길 바랐지만 끝끝내 현실이었다. 그것으로 3호의 삶을 증명해줄 유일한 사람은 허망하게 부서졌고.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네 말대로 쿠로사키를 숨겨두고 왔다.”

  루리. 등 뒤에서 불린 이름에 3호는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의 1호가 3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당하게 선 1호의 모습에서, <운명에 휩쓸린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장치에 갇힌 채로 꼼짝없이 녹아내릴 운명이었던 4명은, 3호를 비롯한 4명의 소녀는 제힘으로 장치를 빠져나왔다. 장치를 가동시키던 여러 명의 연구원은 물론, 4명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려던 침략군의 수장조차 그들을 막지 못했다.

  오빠가 맞이한 결말을 확인한 때, 3호가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그 후의 기억은 어쩐지 선명하지 않다. 몰아치는 감정이 머리를 가득 채웠고,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을 벌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졌으며.

  그러다 정말로 벌을 내리고 만 것 같다. 오빠를 다치게 하고 3호의 삶을 빼앗으려 했던 이들에게든, 세상을 향해서든.

  굉음이 귀를 때리는가 싶더니 네 명을 가뒀던 장치가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다음은 격한 화학반응으로 시험관이 깨지듯, 굳게 닫혔던 유리벽이 부서지는 일이었다. 극도의 흥분 속에서도 3호는 제 오른 손목에서 밝은 빛이 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3호에게서 시작된 빛은 함께 있던 세 명에게 차례로 번졌고.

  눈이 멀 것 같은 빛이 네 명을 감쌌다. 3호가 떠올려낼 수 있는 건 거기까지. 빛이 걷힌 때 세상은 그들이 알고 있던 모습에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통제실은 물론, 주변의 연구실까지. 쟁그랍게 들어찼던 장치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3호가, 아니, 4명이 만들어낸 소란에 전부 휩쓸린 게 틀림없었다. 악인이 쌓아올린 모든 것이 뜯겨나간 자리를 메운 건 자연이었다. 군사를 키워내고 인간을 제물로 던지던 자리에 식물이 빽빽하게 피어났다. 그 자연을 바탕 삼아 새도 가득 날아들었는데 그 많은 새가 날갯짓하는 모습은 재앙의 징조를 연상시켰다.

  갑자기 피어난 자연은 모든 부분이 과했으나 3호는 그 비정상적인자연이 마음에 들었다. 최소 한 세기 이상 발길이 닿은 적 없었던 양, 섬뜩하리만큼 인간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풍경이어서였다. 인간의 흔적이 없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자연에 덮여버렸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과도 마주할 일이 없다는 것.

  고향에 밀려들었던 침략군은, 그들이 몰고 온 전쟁은 인간의 가장 저열한 욕망인 폭력의 극한을 보여주었다. 침략군의 수장으로 3호에게 딸의 제물이 되길 강요했던 남자는 제 욕망만으로 죄 없는 이들을 희생시켰다. 한 도시의 사람을 거의 몰살시키고 평범한 소녀들을 제물로 내몬 원인이 한 사람의 욕망 탓이었다니. 그 모든 악행을 지켜봤던 3호는 인간의 사악한 욕망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욕망이 인간을 파멸로 내몰곤 한다면 차라리 품지도 못하게 덮어버리는 게 나았다. 그러니 욕망으로 쌓아올린 문명이 자연에 휩쓸려 날아가는 것쯤 아쉬운 일도 아니었다.

  거기에, 운명의 동지 격이었던 네 명의 소녀는 그들 앞에 놓인 지독한 자연이 조금도 버겁지 않았다. 본래 그들이 살던 곳처럼 편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곳이 침략군의 기지였음을 감안하면 어차피 생존자는 대부분 침략군과 수장의 뜻에 동조했던 연구원들이리라. 살아남은 악인들이 갑자기 이곳을 덮친 자연에 숨이 막히건 말건, 3호가 신경 쓸 바 아니었다. 3호는 주변을 가득 메운 자연의 울타리에 만족하며, 1호의 말에 답했다.

  “고마워, 세레나.”

  “이렇게 하는 것으로 정말 괜찮겠어? 오히려 쿠로사키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쿠로사키는 네 오빠잖아. 지금 우리가 힘을 합치면, 아카데미아 연구원을 협박해 쿠로사키를 고쳐보게 하는 것도 가능할 텐데. 따라붙은 말에서 3호는 1호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전사가 되려 노력했던 1호는 어떤 상황에서든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강력한 길을 쟁취해내는 듯했다. 본디 침략국에서 태어났던 1호이니만큼 적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으리란 건 알았지만, 때문에 1호가 제법 그럼직한 제안을 했단 걸 알았지만 3호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괜찮아. 프로페서나 아카데미아 사람들이 오빠한테 손을 대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거든. 차라리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 게 나아.”

  보호라는 말이 적절한 표현인지는 3호도 확신이 없었다. 단순한 보존이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장치의 기능은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것. 장치에서 뻗어 나온 빛이 오빠를 덮친 이상, 오빠가 평범하게 살아있다고 생각하기란 어렵다. 장치에서 빠져나온 후 쓰러진 오빠에게 다가섰을 때 3호는 하나뿐인 형제의 숨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죽었다고 결론내릴 생각도 없었다. ‘생명력을 잃은 것죽음이라는 단어 사이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으니.

  그래서 3호는 오빠를 숨겨놓기로 마음먹었다. 당장은 깨어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오빠라 해도, 어쩌면 이미 시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일지 모른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오빠를 내놓을 순 없었다. 오빠를 넘겨주는 순간 3호의 삶에 아무런 가치도 없었던 이들이 유일한 가족을 앗아갈 것만 같았다. 이미 죽어버렸잖아. 시신을 안고 있을 셈이야? 같은 말로, 3호가 두려워하는 가능성을 이미 일어난 사건인 양 떠들어대며.

  “그럼 이제 다르게 묻지. 넌 지금 괜찮은 건가, 루리?”

  “똑같은 질문이네? 답은 아까도 이야기한 대로인걸.”

  “아니, 다른 질문이야. 나는 네가괜찮은지 물어본 거다. 지금 너, 괜찮은 거 맞나?”

  네 오빠 일 때문에, 괜찮은가 걱정되는데. 따라붙는 말에, 3호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오빠의 모습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지금껏 1호를 비롯한 나머지 세 명은 3호 앞에서 오빠의 일을 굳이 헤집지 않았다. 배려였는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3호가 그들 덕분에 오빠가 당한 일을 자주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그 이야기는 왜?”

  그런데 왜 지금 와서 오빠를 화제로 올리는 것인가. 3호는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기만을 바라며, 최대한 명랑하게 물었다.

  “우리가 여기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할 동안 유즈와 린은 밖에 나가서 상황을 지켜봤어. 거기까진 너도 알고 있겠지.”

  “물론.”

  장치에서 빠져나온 후 네 명은 역할을 나눠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의 위험요소를 확인하고 오겠다고 나선 2호와 4호를 떠올리며 1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중 린이 프로페서가 말하는 걸 엿들었다고 해. 지금의 문제가 우리의 폭주에서 시작되었다고, 우리를 원래대로 돌려야 한단 말을 했다더군.”

  “폭주라.”

  “너에게서 시작됐었지, 루리. 프로페서, 아카바 레오가 우리를 아크파이브에 가두고 <리바이벌 제로>를 실행하던 때. 그대로 프로페서의 뜻대로 되려던 때 네가 리바이벌 제로를 거부하면서 상황이 역전됐어.”

  3호가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던, 한편으론 제대로 떠올리려 하지 않으려 했던 이야기를 1호는 차근차근 풀어갔다. 우리 모두가 힘을 잃고 있었는데, 네가 정신을 차리고 저항하면서 프로페서의 계획이 꼬여버린 거야. 레이를 부활시키는 덴 네 명이 필요한데 너 한 명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서 우리가 있던 아크파이브 기계가 오류를 일으켰지. 그러면서 먼저 네 팔찌의 힘이 발동됐던 것으로 기억해. 다음으로 나, 유즈, 린의 팔찌까지 공명하면서 팔찌의 힘이 폭주하고 만 거다.

  “여기, 프로페서의 성이 완전히 자연으로 덮여버린 것도 그 때문이지. 레이가 사용했다던 자연에너지가 우리의 팔찌에 깃들어 있었으니까.”

  긴 이야기를 마친 1호는 질문의 의도를 더 설명하는 대신 녹색 눈 가득 3호를 담았다. 아무래도 1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3호가 알아서 생각해내야 할 듯했다.

  “세레나도 이런 걸 바랐던 거 아냐? 프로페서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잖아. 안 그래?”

  1호의 질문에 깔린 게 <폭주>의 원인에 대한 추궁이라 결론 내린 3호는, 다소 방어적으로 받아쳤다.

  “물론 그렇지. 내가 괜찮냐고 묻는 건, 앞으로 세상이 우리의 상태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 한 번의 폭주가 이런 결과를 낳았는데 한 번 더 폭주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몰라.”

  “……그래서 내가, 또 폭주할 것 같아?”

  침략군 수장의 계획을 완전히 엎어버린 폭주의 트리거는 명백했다. 하필 3호에게서 폭주가 시작된 이유도 바로 짚을 수 있었다. 지금껏 부러 입 밖에 내지 않은 이유를 1호는 알고 있는 듯했기에, 3호는 불완전한 물음을 던졌다. 1호가 꿰고 있는 것을 말하는 대신, ‘그런 문제를 안고 있는자신을 염려하고 있는지만 물은 것이다.

  “글쎄. 하지만 네가 오빠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고 있는 건 알겠군. 내게 가족 같은 건 없었지만, 쿠로사키와 랜서즈로 함께 움직일 때 쿠로사키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는 확인했어. 그러니 너도, 오빠를 최대한 보호하고 싶겠지. 이해해.”

  마지막 말이 꼭 네 약점을 이해해라는 말로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실제로 조금 전부터 1호는 3호를 뒤흔드는 존재를 계속 입에 올리고 있었다. 3호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들었던, 그러나 자꾸만 3호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을. 이렇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면 약점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1호가 3호에게, 미리 파악한 약점을 흘리는 의도는 무엇인가. 은근한 압박? 아니면 경고? 그것도 아니면.

  “나는.”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기에 3호는 얼른 입을 뗐다. 무슨 말이건 흘려 화제를 바꾸기 위해.

  “네 오빠한텐 손대지 못하게 할게. 걱정 마.”

  말을 가로챈 1호는 의외로 친절한 말을 건넸다. 폭주란 위험을 막겠단 계산에서건 3호를 걱정해서건, 1호는 3호의 약점을 덮어줄 의사가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긴장을 놓지 못한 3호는 1호의 호의를 시험하고 싶어졌다. 3호는 바로 감사인사를 건네는 대신 물었다.

  “말할 거야?”

  “유즈와 린에게?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꼭 할 필요는 없겠지.”

  그 말에서 상대의 약점을 쥐고 마음대로 휘어잡겠다는 등의, 조잡한 심리는 내비치지 않았다. 천성이 정직한 1호답게 진심이 느껴질 뿐이었다. 거기서 3호는 겨우 긴장을 놓았다. 이젠 1호의 걱정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마워.”

  “하지만 루리, 우리의 힘은 공명하고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크게 세상에 영향을 미쳐. 그러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하나 내게 알려줬으면 해.”

  “뭘 듣고 싶어?”

  “간단한 거야.”

  너는, 오빠를 어떻게 했으면 하지? 평소보다 낮게 내리깐 목소리였다.

  의미심장한 말에 3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무래도 답을 하는 덴 시간이 제법 걸릴 듯했다.

 

*

 

  저항군의 리더는 팔짱을 낀 채 스크린에 비치는 장면을 눈에 담고 있었다. 아비는 그에게 바깥을 보여준 직후, 잔뜩 긴장한 그를 이끌고 자연의 힘에 휩쓸린 본거지에서 그나마 말짱해 보이는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비가 튼 것이 지금 스크린에 떠오르는 영상이었다. 통제실에 있던 감시카메라가 담아냈던 영상을 겨우 가져온 것이라 했다. 너도 알다시피 통제실은 엉망이 되어서 말이다. 다 망가진 감시카메라에서 이거라도 복구해내느라 꽤 애썼지. 영상을 틀 때, 아비는 다 갈라진 목소리로 설명했다.

  [상황을 확인하기엔 그래도 이게 나을 거다.]

  아비가 말한 대로였다. 화면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나, 영상은 리더가 꼭 알고 싶었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재앙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의 전사이기도 한 청년이 어떻게 아비를 방해했고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까지.

  첫 장면은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장치와 열심히 움직이는 연구원의 모습이었다. 불길한 녹색 빛을 뿜어내는 장치를 리더는 굳은 얼굴로 감상했다. 아비의 계획이 순조롭게 흘러가, 목표 수치에 다다르기 직전. 갑자기 통제실의 문이 열리며 외부인이 끼어들었다. 감시카메라의 영상으로도 그 불청객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다소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것과, 이미 부상을 입은 듯 어깨를 감싸는 모습이 전부 담겨있어서였다.

  성치 않은 몸으로 끼어든 외부인은, 리더에게 너무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정예병의 일원이자 동생을 찾아 적진까지 침투한, 강인한 의지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청년. 전장에서 살아남고 나라도 두어 개나 넘어 통제실에 온 청년은, 동생이 갇힌 장치로 걸음을 옮긴다. 아마 청년은 그곳이야말로 자신의 마지막 목적지라고 생각했으리라. 침략군 수장의 계획에 휘말려 동생을 잃기 직전, 운 좋게 그곳에 닿은 청년은 어떤 감정에 휩싸여 있었을지. 리더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갑자기 끼어든 외부인을, 프로젝트 성공을 앞두고 있던 연구원들이 달가워할 리가 없다. 방해꾼을 치우려 황급히 발동한 보안 시스템이 청년을 붙잡는 것보다, 위기감을 느낀 청년이 장치에 덤벼드는 게 빨랐다.

  다음 순간 장치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가 청년의 몸을 관통했다. 날개 꺾인 새처럼 추락한 청년은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불청객의 등장에 심기가 불편해진 아비가 청년을 치워버리라 명령한 직후 문제가 생겼다. 장치 속에서 청년의 누이가 비명을 지르는가 싶더니, 그의 절망에 반응한 것처럼 단단한 장치가 거짓말처럼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영상엔 노이즈가 낀다. 사고의 여파로 카메라에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지직거리는 화면에, 청년의 누이를 비롯한 네 명의 소녀가 비친다. 장치에서 풀려나온 소녀들의 손목, 정확하게는 오른 손목의 팔찌에서 빛이 번지는 게 리더의 눈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다음엔.

  “보다시피 3, 그러니까 쿠로사키 루리에게서 시작된 일이다. 아크파이브에서 깨어난 건 아마도 네 전사가 벌인 소란 때문인 것 같은데, 오빠가 저렇게 된 걸 보고 완전히 이성을 잃었지. 그러면서 아크파이브가 망가지고, 나머지 셋도 깨어나고 만 거다.”

  다음엔, 기계가 가득했던 악의 요새에 무서운 속도로 꽃이 번지기 시작했다. 병균처럼 퍼지는 꽃이 시야에 가득 들어찬 때 영상이 끊어졌다.

  “네 명은 전부 레이의 조각. 서로 공명하는 게 당연해. 그러니 3호가 폭주하면서 전부 다 폭주한 거고, 세상이 이 꼴이 되었지. 이제 이해했나? 네 전사 하나가 우리 미래를 어떻게 망쳐버렸는지?”

  “쿠로사키는 어떻게 되었지?”

  아비의 말에 제대로 답하는 대신, 리더는 가장 듣고 싶었던 것인 청년의 상태를 먼저 물었다. 청년은 그의 전사였고, 정예병 중에서도 전투력이 뛰어난 축에 드는 자였다. 청년을 잃는 것은 리더에게도 큰 손해일 수밖에 없다. 청년의 삶에서 아비가 만든 불행을 끊어야만 한다는 오랜 책임감도 청년의 안부를 확인하게 하는 이유였다.

  “그런 게 중요해?”

  “중요하지. 어쨌든 그자는 랜서즈고, 당신 계획을 틀어버린 트리거니까.”

  “……아크파이브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니 회수해 조사하려 했지만, 누가 선수를 쳤어. 내가 정신을 차리고 가봤을 땐 이미 누가 가져간 후였지. 아마 3호일 거다. 제 오빠를 데려가고 싶었을 테니까. 가져가봤자 시신이겠지만.”

  “정말로 죽었다고 생각해?”

  “헛된 꿈을 꾸는 게 네 천성인 건 안다만, 최근엔 좀 지나치구나. 랜서즈를 이끌고 온 것부터 헛된 희망에 부풀어 있다 싶었는데 이젠 죽은 놈이 살아있길 바라는 거냐? 아크파이브의 기능은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거다. 그놈은 이미 죽었어.”

  여기까지 와서 죽을 거였다면 차라리 고향 사람들처럼 카드화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지. 아비는 무심하게 덧붙였다. 침략전쟁의 희생자가 맞이한 종말을 입에 올리는 뻔뻔함에 리더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낳은 희생자 앞에 저 남자는 왜 저렇듯 당당한지.

  “그래도 그놈이 <리바이벌 제로>를 완전히 뒤집어버리다니. 개죽음은 아니게 됐군. 죽으러 뛰어들면서 내 계획을 망쳐버렸으니 말이다. 왜 그놈이 폭주의 트리거가 됐는지 알 수 없단 게 분해. 그놈이 트리거가 될 수 있단 걸 알았다면 포착된 즉시 붙잡아버렸을 텐데.”

  “이유를 알 수 없다니. 답은 뻔하지 않나?”

  잠자코 듣고 있던 리더는 짤막하게 받아쳤다. 아비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으나, 회색 눈에는 불쾌감이나 냉소 대신 의문만이 비칠 뿐이다. 정말로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듯.

  그러나 리더는 분명히 이해했다. 왜 청년이 뛰어들면서, 청년이 쓰러지면서 모든 것이 꼬여버렸는지. 왜 청년은 <구원자의 조각>들이 폭주하는 트리거가 되었는지. 너무도 간단한 답이기에 아비가 깨닫지 못하는 게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직접 깨달으란 의미로 리더는 아비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침묵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입술을 뗐다.

  “당신은 레이가, 아버지인 당신 대신 희생하기로 결심했다고 했지. 본래 희생해야 할 당신 대신 자크 앞에 나선 게, 그 동기가 가족인 당신 때문이었다고.”

  힌트는 충분히 주었다. 이젠 아비가 답을 찾는 일만이 남았다. 리더는 답을 기다리며 아비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래. 그런 레이의 조각들이 내 뜻을 거역하다니 끔찍할 뿐이야. 그놈이 끼어들어서 죽은 게 뭐라고 그렇게 격하게 반응한 건지.”

  “히이라기 유즈, 세레나, , 쿠로사키 루리. 당신이 레이의 조각이라고 부르는 네 사람. 그 넷 중에서 하필 쿠로사키 루리가 먼저 폭주한 이유를 생각해.”

  “잠깐만. 설마 뛰어든 놈이 쿠로사키 루리의 오라비여서 그런 일이 벌어졌단 거냐?”

  아무래도 아비는 이제 갈피를 잡은 것 같다. 청년의 개입이 조각의 폭주를 불러온 이유, 정확히 말해, 청년의 누이가 폭주하게 만든 이유에 대해. 리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댄다.

  “레이는 가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희생을 택했지. 레이에게 가족이란 잃어선 안 될 존재이며, 제 몸과 미래를 바칠 소중한 대상이라는 뜻. 그러니 레이의 조각이라는 이들도 당연히.”

  “아니, 그런 게 답일 리 없어. 그놈은, 쿠로사키 슌은 레이의 가족이 아냐! 레이 때와는 다른 상황이라고.”

  “그자는 쿠로사키 루리에게는오빠였어. 당신의 말대로라면 쿠로사키 루리는 레이의 조각이며, 레이의 의지를 타고났고. 가족을 잃고 싶지 않은 레이의 마음은 쿠로사키 루리에게도 강하게 뿌리내렸을 거다. 그러니 오빠가 아카데미아에게 당해 쓰러진 걸 봤을 때 쿠로사키 루리가 당신에게 품은 감정이 무엇이었을진 뻔하지.”

  “레이의 조각이 아비인 나에게 분노했단 거냐?”

  “유감스럽게도 쿠로사키 루리를 포함한 지금의 모든 조각들에게 당신은 가족이 아니거든. 가족을 잃게 한 사람을 용납할 수 없었던 쿠로사키 루리가 폭주. 다음으로 레이의 의지를 이어받은 세 명이 같은 이유로 공명. 그 결과가 이거야.”

  그렇게 말할 때 리더는 웃음을 걸치고 있었다. 언제나 제 욕망대로만 움직였던, 그 이유로 가족까지 내팽개쳤던 아비는 욕망을 이루려 무수한 희생을 낳은 끝에 패배했다.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쌓아온 희생이, 그의 죄악이 결정적인 순간 걸림돌이 된 탓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동화에서 이야기하는 심판이 아닌지. 리더는 아비 앞에서 오랜만에 유쾌해졌다.

  “그러니까 네 이야기는 내가…….”

  “그래. 당신은 레이의 역린을 건드린 셈이라고. 레이가 가족을 소중히 여긴단 걸 알았다면, ‘레이의 가족은 다치게 하지 않았어야지.”

  기뻐해. 당신은 레이의 조각들을, 가장 레이답게 만들었으니까. 가족을 위해 세계의 운명을 바꿨잖아? 한껏 빈정거린 리더는 짝짝짝, 과장되게 손뼉을 친다. 아비의 실패를 진정으로 축하한다는 듯. 다음 순간 리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비의 얼굴에서 패배감을 읽을 수 있었다.

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