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예병의 아침은 지시와 함께 시작된다. Y는 일어나자마자 왼쪽 손목에 찬 시계에 시선을 꽂았다. 언뜻 보기엔 보통의 디지털시계와 다를 것이 없지만, 시간 표시 창을 살짝 누르는 순간 숨겨진 기능이 나타난다. 시계, 아니, 통신장치에 시간 대신 뜨는 것은 리더가 부여한 임무의 내용. 출격할 곳은 물론, 사용해야 할 전략과 기지에서 지원 가능한 물품까지. 임무에 필요한 정보를 빠짐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중, 임무의 내용을 제외하고 Y가 가장 관심을 쏟는 정보라면 함께할 동료의 이름이었다. 정예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든 구성원이 큼직한 일 하나는 거뜬히 해낼 수 있는 이들이었으나, 리더는 어떤 임무에나 최소 2인 이상을 보냈다.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더라도 대처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철두철미한 태도에 어울리는 발상이, Y는 싫지 않았다. 동료들을 믿는 만큼 언제나 그들과 함께하고 싶은 게 Y의 마음. 동시에, 뛰어난 전사라는 이유로 갑자기 정예병에 선발된 소년의 마음이었다. Y는 아직까지는 ‘냉혹한 세계’에 혼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소년으로서 전사가 된 것은 Y뿐만이 아니었다. Y가 개중 어린 편일 뿐, Y가 속한 정예병 <랜서즈>의 멤버 모두가 어리거나 젊었다. 심지어 리더, 정예병의 지휘관도 실은 Y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젊은 남자였다. 세계를 위협하는 적이 없었다면 무엇에건 도전할 수 있었을 위치이기도 했다. 고향에서 세계적인 대기업을 경영했던 리더는, 적에 맞서기 위해 사장직을 내려놓고 스스로 지휘관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리더의 직속 수하들은 그를 사장으로 부르고 있다. 랜서즈 역시, 서류상으로는 전사가 아니라 사장의 계약자였다.
딱 그만큼의 무게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옷을 갈아입은 Y는 다시 통신장치를 확인한다. 눈에 들어오는 건 임무의 내용. 그가 향해야 할 장소. 사용할 전략. 지원 가능한 물품. 그리고.
“이번 구성은 희한하네. 하필 그 남자라니.”
이번에 함께 출격할 멤버의 이름을 보자 절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몇 번이나 다시 봐도 화면에 찍힌 이름은 달라지지 않는다. Y를 포함해 단 두 명만 출격시키면서 왜 하필 상대를 그런 사람으로 고른 것일까. 당장에라도 리더에게 묻고 싶어졌으나 그렇잖아도 바쁜 리더에게 일을 만들어줄 순 없다. 이미 임무별로 멤버 구성이 끝났으리란 것도 안다. 거기에, 굳이 따지면 ‘그 남자’와 함께하기 싫은 것은 아니었다. 잘 맞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뿐.
정말 리더의 생각은 알 수가 없다니까. Y가 속으로 중얼거릴 때, 방의 한쪽 벽면을 차지한 스크린에 그와 빼닮은 소년의 흉상이 그려진다. 오퍼레이터 <유토>, Y가 가장 신뢰하는 조력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번 파트너, 껄끄러운 사람이야?」
스크린 속 소년, 오퍼레이터가 물어왔다. 유토란 이름의 오퍼레이터는, Y가 랜서즈에 소속되기 직전부터 그를 도와왔다. 유토의 역할이란 Y와의 교류로 Y의 능력을 안정시키는 것 ─ 랜서즈가 정예병인 것은 멤버 모두가 각자만의 특수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일찍이 각성하여 자신의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내는 건 물론 통제하는 법까지 완벽하게 익혀두었으나, Y는 상황이 달랐다. 능력을 각성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초보 능력자로서, 아직 능력 통제에 애를 먹고 있는 것이 Y의 현실.
Y의 능력 <펜듈럼>은 다른 여러 기술까지도 보완, 결합하여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능력으로 평가받았으나 다소 불안정했다. Y가 초급자라는 것 때문인지, 능력 자체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능력을 인지한 때 Y가 들은 충고는 ‘그 힘을 제대로 쓰려면 파장이 맞는 조력자를 찾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펜듈럼의 능력치를 어느 선 이상으로 끌어낼 수 있는 것은 Y뿐이었다.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을 수도 없거니와 파장이 맞는 사람이란 조건은 더더욱 미스테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낡은 기기에 깃든 AI ‘유토’와 마주친 때 Y는 그가 자신이 찾던 조력자임을 직감했다. 그때까지 마구 넘실대던 펜듈럼이 유토 앞에서 안정을 찾은 것이다. 유야는 유토의 동의를 얻고서 그를, 정확히는 그가 담긴 기기를 챙겨왔다. 다음은 유토가 어느 곳에서든 자신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다. 처음은 유토의 기기를 그대로 들고 다녔던 Y는 이후 리더의 도움을 받아 유토를 작은 칩에 담는 데 성공했다.
[‘유토’라고 했나? 오퍼레이터로 쓸 수 있도록 네 디스크와 연결해놓도록 하지.]
리더의 말대로 되었다. 이제 유토는 Y의 통신장치를 매개로, Y가 가는 곳 어디서나 모습을 보인다. AI이니만큼 실체가 없어 영상으로만 나타나긴 해도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지금은 Y의 방 스크린에 모습을 보이지만, 임무에 나서면 또 바깥에서 Y를 보조해줄 것이다. 오퍼레이터의 존재만으로 Y는 이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능력자로, 자랑스러운 정예병으로 설 수 있었다. 그러니 유토에게는 말할 수 있다. 다른 동료들 앞에선 쉽게 꺼낼 수 없는 개인적인 이야기까지도. Y는 슬그머니 말을 흘렸다. 그 남자. 껄끄럽다기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워.
“거기다 그 사람, 지원조거든. 어려운 임무는 아니라지만 특이하잖아?”
통신장치에 뜬 파트너의 이름은 RR. 이곳에서 유일하게 본명을 알 수 없는, 그 외에도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청년이 Y의 눈앞에 그려진다. 능력자가 아닌 일반인, 전투조로 분류되는 랜서즈와는 다르게 지원조인 사람. 거기에 명목상 동료인 랜서즈 멤버들보단 리더와 더 깊은 관계를 형성한 듯한, ‘내부인 같지 않은’ 내부인. 그것이 RR이었다.
「리더도 뭔가 계획이 있겠지.」
“그야 그렇지만, 원래는 이런 식으로 배치하지 않는단 말이야. 우리 팀, 사와타리랑 곤겐자카를 한 조로 묶고서 나만 RR이랑 묶었어.”
「RR? 특이한 이름인데.」
“본명은 아니래. 왜 그런 이름을 쓰는지 알 수 없고. 뭐 하나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주는 법이 없어.”
「하나 묻지, 유우야. 그 남자와 같이 움직이는 게 걱정돼?」
너, 다른 날이랑 다르게 긴장돼 보이는데. 유토의 말에 Y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틀린 말이 아니기에 그랬다. 지금까지 RR은 전투조인 랜서즈를 뒤에서 받쳐줄 뿐, 임무 전면에 나선 일은 없다. 물론 그가 랜서즈 두셋과 함께 움직인 날은 제법 되었지만, 그의 역할은 언제까지나 가벼운 지원과 전투 보조. 적에 맞서는 게 본래 목적인 랜서즈가 그와 호흡을 맞추는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단둘이서 움직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임무의 경중과 관계없이, Y는 파트너와 조금이라도 어긋나선 안 된다. 목적에 접근하는 태도는 물론, 행동 하나하나마저도.
“……그나마 곤겐자카랑은 말이 통하는 것 같은데. 나머지한텐 쌀쌀맞아서.”
「걱정할 것 없어. 아카데미아랑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유토는 RR을 안 만나봐서 그래.”
그 남자가 얼마나. 막 꺼내려던 말은 통신장치가 갑자기 빛나는 바람에 쏙 들어갔다. 조금 전 임무의 내용이 빼곡하게 적혔던 곳에 메시지가 떠 있었다.
<보낸 이: RR
준비는 되었을 거라 믿는다. 마침 근처에 있으니 바로 네 방으로 가도록 하지.>
메시지를 다 읽자마자 거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는 뻔하다. 성미 급한 RR이 벌써 파트너를 찾아온 것이다. Y는 급히 손가락을 튕겨 스크린을 끄고, 문을 열었다.
방문자는 짐작한 대로의 인물. 은테 안경을 낀 무표정한 청년이, RR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랜서즈를 포함한 ‘사장의 계약자’들은 기본적으로 전투조와 지원조로 나뉜다. 그들이 각기 무슨 역할을 맡는지야 이름에서부터 명백하다. 전투조가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적을 상대한다면 지원조는 ‘본래는’ 기지에서 그들을 돕는 역할이었다. 당연히 랜서즈는 전투조로 배치되었으며, 리더와 그 직속 수하들은 지원조로서 전투를 보조하고 있었다. 문제는 지원조 중 한 명이 랜서즈와 묶인 것도 모자라 Y의 팀에 합류했다는 점이었다. 본명 불명. 나이와 출신지, 목적까지 모든 것이 감춰진 청년. 그를 칭하는 이름, RR은 일종의 코드네임이라고 했다.
[그 자, 다소 예민한 인간이야.]
RR을 팀에 합류시키겠다고 통보한 때, 리더가 건넨 말이었다.
[예민하다고?]
[일상적으로 감당해야 할 자극이 커서, 예민해질 수밖에 없어. 그 점에 대해선 유우야, 네가 이해해줬으면 해.]
확실한 건 그 자가, 너희 팀에 필요한 사람이란 거다. 리더는 그렇게 덧붙이고서, Y에게 한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창백한 피부에 굳은 표정. 은테 안경을 쓴 청년이 사진에 담겨있었다. 완고한 성격일 것 같긴 했으나, 그뿐. 사진 한 장으로 인간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RR을 처음 만난 때조차도 Y는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악수하고 돌아설 때, 손이 찬 편이란 생각만 언뜻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몇 번 RR과 함께 움직이자 Y는 리더의 말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RR은 예민한 사람이었다 ─ 다만 그것은, RR 본인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그는 모두를 예민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신경질적인 성격과 딱딱한 어투까진 넘길 수 있었으나, 깨어있는 내내 시달린다는 어지럼증과 그로 인한 돌발행동은 보는 이를 여간 불안하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멀리 이동해야 할 때만 생기면 모두의 시선은 RR에 고정되었다. 높은 확률로 그는 힘을 쓰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거나, 심할 경우 먹은 것을 죄다 게워내야만 했다.
정말이지 신경 쓰이는 사람이었다. 왜 그런 ‘까다로운’ 사람을 굳이 전투조와 함께 엮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통의 지원조처럼 기지에 있다면 주변인이 그를 그렇게 신경 쓸 필요도 없었을 텐데. 리더의 결정에 의문을 품은 건 Y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Y는 랜서즈 동료 하나가 리더에게, 다른 지원조에게는 없는 RR만의 장점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을 들었다. 서류를 살피던 리더는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답했다.
[RR은 전투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뛰어나다.]
[랜서즈 결성 전부터 당신 곁에서 일했기 때문에?]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RR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 없어. 그의 능력은 내가 보증해. 더 이상의 의문은 듣지 않겠다는 듯 리더가 제법 힘을 주어 말하는 바람에, 질문을 꺼낸 이는 물론이고 Y까지 입을 열 수 없게 되었다. 실제로 RR의 능력이 나쁜 편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지만 그때의 일이, 그 날 리더가 흘린 설명이 RR을 이해하게 해준 것은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RR은 ‘어려운’ 존재였으므로.
RR과의 임무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임무의 내용이야 간결했다. <창고>로 향해 지원 물품을 챙기고, 그 이후부턴 혹 추적당하지 않도록 ‘알아서’ 적의 소굴로 이동하여 그곳을 파괴하라. 지원조가 준비한 차량을 타고 경유지로 향하는 내내 RR은 말이 없었다. 옆자리에 앉은 Y가 흘깃 보았더니 거의 문에 바짝 붙은 채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문제의 어지럼증이 심해진 것일까. 본인이 입을 떼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계속 흘깃거렸는데도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반응할 힘이 없는 것인지. RR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RR.”
도착시간이 30분쯤 남았을 때, 결국 Y는 곁에 앉은 RR을 조심스레 불렀다. 예민한 RR을 건드려봐야 좋은 말이 돌아올 것 같지 않았으나, 그의 얼굴이 너무도 창백해 슬슬 걱정이 되었다. 사실 함께 차에 탄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한 문제이긴 했다. 그는 언제나 어지럼증에 시달리고, 특히 무엇이건 탈것을 탈 때면 증상이 훨씬 심해졌으니. 그러니까 이 사람까지 억지로 보내지 않았어도 될 텐데. 속에서 튀어나오려는 말을 누르며, Y는 RR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다.
“RR?”
“……멀미야.”
멀미하는 것뿐이라고. 어투는 퉁명스러운데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힘이 없다.
“당신 그거, 진짜 멀미 아니지?”
떠보려 던진 말에 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별걸 다 의심하는군.”
“리더도 당신이 이렇게 몸 안 좋은 거 알아?”
“한심한 소리 마.”
예민하긴 해도 냉정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서일까, RR은 평소답지 않게 으르렁거렸다. 핼쑥한 얼굴에 짜증이 번지고 있었다.
“풍경이라도 보지 그래. 먼 곳을 바라보면 멀미를 덜 한다던데.”
결국 Y가 한 발짝 물러서자 RR은 그를 노려보곤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더 답을 듣지 않겠다는 뜻인 게 뻔했다. 차량에서 내릴 때까지 RR은 한마디도 더 꺼내지 않았다.
경유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입구로 향한 Y와 달리, RR은 창고 쪽으론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난 따로 챙길 게 없어서. 여기서 바람이나 쐬고 있으려고. 그런 말을 건네고선 얼른 다녀오라고 손짓할 뿐이었다. 어차피 편한 상대도 아니었기에 Y도 굳이 말을 덧대지 않고 혼자 창고로 걸어 들어갔다. 전투조인 Y에겐 유용한 여러 전투 보조장치가 준비된 창고, 사실상의 비밀기지에서 Y는 리더의 지시대로 몇몇 장치를 챙겼다. 가능한 짧게 머물라는 규칙대로 약 10분 만에 빠져나온 Y는 그대로 RR과 합류하여 진짜 목적지로 ─
향하지 못했다. 파트너가 다른 데 열중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RR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며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때. Y의 귓가에 RR의 목소리가 박혔다. 아. 문제없다. 만일을 대비해서……는 잠깐 빼두라고? 통제장치는 제대로 있는 거겠지? 자세히 보니 RR은 통신장치를 꺼내둔 채 무어라 계속 떠들고 있다. RR의 소속을 생각하면 기지의 지원조와 통신 중이라 보는 게 옳으리라. Y는 그 자리에 멈춰 가만히 RR을 관찰했다.
몇 걸음의 거리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들리진 않았지만, 일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언뜻 듣기엔 장치 조작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선지 RR은 계속 상대방의 말을 반박하는 듯했다. 아니.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곤란해. 당신은……의 기능을 알잖아. RR이 길게 한숨을 내쉬는 데서, 상대방도 고집을 꺾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결국 RR이 한 발짝 물러섰다.
「……을 쓰지 않으면 위험부담이……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일이 아니란 걸 당신이 잘 알 텐데. 그래도……를 시험하고 싶다고? 그럼 당신이 다 책임지는 것으로 해.」
대화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 기척도 내지 않던 Y가 ‘끼어들 시점’을 계산할 때, 드디어 RR의 시선이 Y에게로 향했다. 안경 너머 금빛 눈에 Y를 담으며 RR은 말을 마쳤다.
「나머지는 나중에 이야기하지.」
통신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RR에게 바짝 다가간 Y는 그의 얼굴에 긴장이 서린 것을 알아챘다.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라도 오간 것인가.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기지에서 연락이 온 거냐고 슬쩍 떠보았지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Y는 경험적으로, RR이 저렇게 선을 그을 땐 답을 졸라봐야 소득이 없다는 걸 알았다. 하긴, 도와주려 해도 제멋대로 굴 인간인걸.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Y는 RR을 따라 걸었다. 이 근방에 자주 와봤다는 이유로 앞장선 RR은 따라잡기도 힘들 정도로 성큼성큼 걸어가기만 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RR이 입을 뗀 건 적의 기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따라오는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걷던 이가 웬일로 돌아보며 말을 걸어왔다.
“뭔데?”
“네 능력, 통제 가능한가?”
펜듈럼 말이야. 어투는 무심한데 눈은 무섭도록 번득인다. RR의 금빛 눈, 맹금을 연상시키는 눈이 오롯이 Y만을 담고 있다 ─ 내부가 해부되는 것 같은 기분에 Y는 숨을 크게 삼켰다. 그, 그런 건. 짤막한 질문 하나에 말을 더듬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것이다. 첫째로는 RR의 눈빛에 눌린 탓이라면 둘째로는 질문의 내용에 멍해진 것. RR이 전부 알고 있다면? 알고서 묻는 것이라면? RR의 물음이 날아들자마자 머리를 메우는 것은 그 생각뿐이었다.
RR이 리더와 친밀한 사이라는 이야기는 이전부터 돌고 있었다. 진위는 알 수 없으나, 리더가 RR을 특별대우 해주는 것만은 눈에 보였다. 그러니, 어쩌면 리더에게서 들었을지도 모른다. 랜서즈가 지닌 능력 중 가장 기대받는 능력, 펜듈럼이 아직 불안정하다는 것을.
“물론, 가능해.”
처음엔 새로운 기술이래서, 나도 다루는 데 애를 먹었지만. 리더가, 조금 손을 써줘서. 떨리는 목소리에서 RR이 동요를 읽어냈을까? Y는 자신이 없었다. RR은 여전히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긴장은 계속 가슴을 짓눌렀다. 무엇이건 답이 돌아오길 간절히 바랐을 때. RR이 입을 뗐다.
“리미터를 만들어줬나?”
“대충, 그 비슷한 게 있긴 해.”
오퍼레이터 유토. 불안정한 능력을 어느 정도 안정시키는 존재를 떠올리며 Y는 둘러댔다. 그제야 RR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됐어. 놈들의 소굴엔 내가 먼저 들어간다.”
이번에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Y의 눈이 둥그레졌다.
“당신 지원조잖아.”
“그래서? 내가 내 몸 하나 못 지킨다고 생각하나?”
“그런 게 아니라…….”
“리더가 너에게 날 붙인 건 말이야. 네가 능력을 마음껏 쓸 수 있도록 내가 판을 깔아놓으란 뜻이다. 능력 통제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하나 챙겨줄 생각이었지만, 통제할 수 있다니 따로 움직여도 되겠지.”
“우리는 파트너잖아! 그렇게 제멋대로 결정해도 되는 거야? 거기다 당신은 원래.”
“지원조라고? 아카데미아는 너보다 내가 훨씬 더 많이 상대했으니까, 전투 경험 운운하려면 내 말 따라.”
거기서 Y는 RR의 나쁜 버릇을 하나 떠올려냈다. 유우야, 네가 감안해야 할 게 하나 더 있다. RR은, 전투에 대해선 자기 생각이 너무 확고해. 리더의 차분한 목소리가 머리를 울린다. 과거, RR을 처음 소개했을 때 그가 꺼낸 말.
[리더인 나라면 모를까, 다른 멤버들이 그 자의 뜻을 꺾기는 힘들 거다.]
리더의 말대로였다. RR은 이미 제 나름대로 임무에 대한 구상을 마친 후였고, Y의 의견을 받아들일 생각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Y가 나서봐야 그를 강제로라도 떼어놓고 먼저 적진에 뛰어들 것이다. 경험은 아직 많지 않다지만 Y는 어엿한 정예병 멤버. 이런 상황에 효과적인 전술을 빠르게 생각해낼 수 있었다. 앞으로 이런 구성으로 움직일 일은 많지 않다. 리더도 RR이 까다로운 인간이란 건 아니 다음번엔 파트너를 신중하게 골라줄 것이다.
무엇보다, 만일 RR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자신의 능력으로 그를 구할 수 있다.
“……좋아.”
그러니 한 번쯤, 져주면 된다. 전투에 대해서만은 이상하리만큼 고집을 세우는 저 남자에게. 그런 마음으로 기껏 양보했더니 RR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한마디 인사도 없이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잘 들어. 이 근처엔 우리의 ‘쉼터’가 있다. 거긴 나카지마란 남자가 있어. 리더와 연이 있는 사람이지. 난 그곳을 거쳐 가면서 아카데미아의 추적을 피할 생각이야. 놈들은 주로 디스크를 이용해 우리 위치를 추적하는데, 나카지마의 가게에선 디스크의 신호를 일시적으로 흐트러뜨릴 수 있거든.
“그럼 나는?”
제법 지휘관 행세를 하는 RR에게 묻자, 퉁명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넌 나를 따라 쉼터에 가서 대기해. 거기서 흔적도 없앨 겸 쉬다가, 내가 놈들의 소굴을 엎으면 네가 들어와 혼란에 빠진 아카데미아를 치는 거다.”
만족스러운 지시는 아니었으나 이미 양보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따라줄 수밖에 없었다. RR을 따라 <나카지마의 가게>에 닿은 Y는 RR이 주인과 이야기한 후 자리를 뜨는 걸 말없이 지켜보았다. 다음은 RR에게서 신호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전투에 밝은’ 편이라 해도 지원조인데, 적진에 단신으로 뛰어들게 해도 정말로 괜찮은 걸까? 호언하고 떠난 RR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복잡한 마음을 누르게 해준 것은 뜻밖에도, 주인 나카지마였다. Y에게 음료를 내준 나카지마는 대뜸 자신의 이력을 말해주었다. 리더가 사장직을 내려놓기 직전까지, 비서로서 곁을 지켰다는 게 나카지마의 자랑.
“사장님은 랜서즈 결성 이후 내게 다른 직책을 주실 생각이었지만, 사장님을 계속 돕고 싶어 여기를 운영하게 됐다. 랜서즈를 돕는 건 사장님을 돕는 것이니 지금 내 일에 만족해.”
“RR은 당신이 회사에 있을 때부터 리더의 사람이었어?”
“아. 그래. 그땐 참 말을 안 들었지. 지금은 제법 손을 탄 편이야. 사장님이 공을 꽤 들이셨거든.”
언제나 반항아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안경도 쓰니 이젠 유순해 보인단 말이지. 나카지마의 말에 Y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의 RR이 유순해진 거라니. 그럼 리더가 막 거두었을 땐 얼마나 말썽이었을지. 덕분에 긴장이 풀린 Y는 가게를 돌아다니다, 구석 자리에서 익숙한 것을 발견하고 멈췄다. 근처의 테이블에 은테 안경이 올려져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까이에 가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얼핏 생각한 대로 RR의 안경이었다.
어딜 가나 안경을 쓰고 다니던 사람이 어쩌다 두고 간 것인지. Y는 은테 안경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지만 보관할 곳이 없었다. 이러다간 잃어버릴지도 모른단 생각과 괜한 호기심이 겹쳐 안경을 써본 Y는 한 가지 비밀을 깨달았다. RR은 시력이 나쁘지 않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굴었던 RR이지만, 사실 그가 쓰고 다니던 것은 도수가 없는 안경이었다. 안경을 쓰건 쓰지 않건 사물이 똑같이 보이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날카로운 인상을 조금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그게 아니면 이 안경에 무언가 기능이라도? 혹시 리더 흉내라도 내고 싶었나? RR처럼 안경을 쓴 리더를 떠올리며 실없는 생각을 한 Y는 통신장치가 울리는 바람에 정신이 확 들었다. 세 번의 신호음 ─ 그건 분명, RR과 약속한 출격신호. Y는 나카지마에게 안경을 떠넘기고 바로 가게를 뛰쳐나갔다.
마음이 급한데, 최대한 빨리 적의 소굴에 들이닥쳐야 하는데. 가게를 나서는 순간 Y는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어지럼증이었다. 하필 이런 때에. 짜증을 삼키며 걸음을 옮겨도 어지럼증은 걷히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한편 눈과 귀가 욱신거리고, 속이 울렁거린다. 살면서 거의 경험해본 적 없는 불쾌한 감각이, 적진으로 향하는 내내 Y를 괴롭혔다.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RR이 이미 뒤집어둔 곳에 뛰어들어 적을 처리하기만 하면. 그런 생각으로 자신을 위안한 끝에, Y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뿌연 연기와,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적군. 엉망으로 부서진 가구와 아무렇게나 흩어진 무기들까지. 적의 소굴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RR이 제대로 해준 모양이었다. 보조장치를 이용해 시야를 확보한 Y는 제법 당당하게 적진에 들어섰다. 침입자를 알아챈 적군이 Y를 경계하며 무기를 쥘 때. Y는 미소를 걸쳤다.
그런 것쯤, 펜듈럼만 쓰면. 조금 불안정하긴 하지만 강력하기론 랜서즈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능력을 쓰기만 하면.
Y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그가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던 일이 갑자기 일어났다. 능력이, 발동되지 않았다. 다시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목에 맨 펜듈럼, 능력을 쓸 때마다 빛나던 그의 펜듈럼도 잠잠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다급한 마음에 Y는 오퍼레이터, 유토를 불렀다. 지금껏 제 능력을 안정시켜주던 그라면 무엇이든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유토. 펜듈럼이 써지지 않아. 초조함을 누르며 낮게 속삭였더니 오히려 유토 쪽이 당황한 눈치였다. 유우야.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지금 네 파장은 일반인과 거의 다를 바 없어. 통신장치의 화면 속, 유토의 얼굴엔 혼란이 비친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적을 처리해야 하는데. 무기나 다름없는 능력이 봉인되면서 모든 게 꼬였다. Y의 기세등등한 모습에 긴장했던 적군은 그가 멈칫하는 새 슬금슬금 그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다음 순간 일제히 공격을 퍼부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끝난다. 임무 실패는 당연한 일이고, 복귀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리라. 최악의 결말을 예감하자 숨이 턱 막혀왔다.
「유우야, 어서 피해!」
유토가 소리쳤지만 긴장 탓인지 다리가 굳어버렸다. 공격도 방어도 막힌 때 도망치는 것마저 불가능하다.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는 건가? 능력을 잃은 채, 무력하게 쓰러져야 하는 걸까? 이럴 때 한 명만, 동지 한 명만 있었더라면.
누구라도 구해주었으면.
그때 Y의 시야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들어왔다. RR. 원래라면 진작 여기서 빠져나가 Y가 돌아오길 기다려야 했을 사람. 그가 왜 여기 있을까 하는 의문보다 동지를 만났다는 기쁨이 더 컸다. 지원조인 RR이 적을 상대하긴 무리이리란 게 유감일 뿐. 도망치라고 말해야 할까, 도와달라고 매달려야 할까. Y가 답을 내리기도 전에,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의 RR이 손가락을 튕겼다.
다음 순간 Y가 본 것은 RR의 뒤에서 하나씩 펼쳐지는 기계 날개였다. RR에게 날개가 달리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뒤에 기계 병기가 하나둘 나타나는 것인가. 진실을 확인하기도 전에 또다시 세상이 빙빙 돌았다. 조금 전보다 배로 묵직한 어지럼증에 몸도 휘청거린다.
안 돼, 유우야. 여기서 놓아버리면 ─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언뜻 유토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
눈을 떴을 때 Y가 처음으로 본 풍경은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기지, 그곳에서도 자신의 방이었다. 머리가 조금 지끈거리긴 했으나 그것 외엔 몸의 이상이 없고, 시험 삼아 능력을 써보니 평소처럼 말짱하게 발동되었다. 능력이 봉인되어 적에게 집중 공격당할 뻔했던 일이 한갓 꿈이었던 것처럼. 그러나 침대 곁에는 소꿉친구이기도 한 정예병 동료가 앉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나, 유우야? 굵직한 목소리에도 불안이 배어 나온다.
“RR이 널 업고 돌아왔을 때, 네가 잘못되기라도 한 줄 알고 걱정했었어.”
“……RR이?”
“아, 기억이 없나? RR 말로는 네가 갑자기 기절했다던데. 그 남자, 원래 통 웃지 않는 사람이지만 널 데려올 땐 정말 표정이 어둡더군. 사정을 물었더니 고개만 절레절레 내젓고.”
어떻게 된 거지? 펜듈럼을 쓰다 몸에 무리라도 갔나? 위기에 빠진 RR을 구해주기라도 했던 건가? 친구가 온갖 추측을 늘어놓으면서도 능력 봉인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RR이 그 일은 비밀로 해준 모양이었다. 아니면 RR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일까. Y가 갑자기 쇼크라도 당한 듯, 능력을 쓰지 못하게 되었단 것을. 진실이야 어느 쪽이어도 좋다. 지금 Y가 알고 싶은 것은, RR이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였다.
“곤겐자카. RR 말이야, 부상 입었어?”
“아니. 너 데리고 나오다가 조금 긁혔다는 것 빼곤 말짱했다.”
“다행이네.”
“그보다, 유우야. 네가 더 걱정이야. 의사는 몸에 큰 이상은 없다고 했지만 혹시 뭔가 문제가 있다면…….”
“괜찮아. 그러니 RR을 만나러 갈래.”
“기절했다는 사람이 깨자마자 움직이겠다고? 마음 편히 쉬고 있어. 어차피 RR은 지금 리더랑 뭔가 심각한 얘기를 하고 있다고. 방해하면 뭐라 쏘아붙이기만 할 거다.”
RR은 어떻게 그곳에서 빠져나온 것일까. 기절하기 직전 본 기계 날개의 정체는 무엇일까. RR이 부상을 입지 않은 건 행운일까, RR의 실력 덕일까. 혹시 RR이 본부에 지원을 부탁해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 의문이 마구 쏟아졌으나, 답을 줄 수 있는 이들은 지금 만날 수 없다. 리더와 RR, 둘 중 한 사람에게라도 물으면 알 수 있을 텐데. 핑계를 대고 둘을 만날까 생각했으나, 친구는 리더가 Y에게 행동 제한을 걸어두어 오늘 방에서 꼼짝없이 쉬어야 한단 말을 전했다.
“외상은 특별히 없다고 해도, 넌 부상자로 취급되니까.”
정 RR에게 인사하고 싶으면 그 자를 여기로 불러. 그렇게 말한 친구는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며 방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Y는 방에 갇히다시피 한 처지에 한숨을 내쉬다, 문득 그가 기절하기까지의 과정을 목격한 자가 RR 외에도 하나 더 있다는 것을 떠올려냈다. 오퍼레이터, 유토. 리더의 도움을 받아, 언제건 Y의 곁에서 그를 돕게 된 AI. 유토.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그의 조력자는 모습을 드러낸다. 벽 스크린에 나타난 유토에게 Y는 바로 묻기로 했다.
“저번 임무 말이야, 유토. 적진에까지 가서 펜듈럼이 봉인되었었잖아? 그 바람에 정말 끝장날 뻔했고. 그 상황이 어떻게 수습된 거야?”
「네 파트너가 능력을 써서 아카데미아를 처리하고, 임무를 완수했어.」
“RR은 지원조에 일반인이야. 그런 게 가능할 리가.”
RR과 삐걱거릴 때마다 Y는 생각했다. 차라리 RR이 능력자였다면, 그렇게 랜서즈의 일원이 되었다면 그를 대하기 훨씬 수월했을 거라고. 지원조이면서 전투조에 발을 걸친 애매한 분류는 랜서즈 멤버들이 그를 더욱 어렵게 느끼게 했다. 동지로 대해야 할지, 단순히 내부인으로 대해야 할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능력자였다면.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 수없이 반복되었던 무의미한 생각에, 유토는 불을 붙인다.
「유우야, 능력자의 세계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어. 세상이 주목하는 건 ‘어느 시점에’ 자연히 능력을 각성하는 선천적 능력자지만, 사실 인위적으로 능력을 만들어낸 후천적 능력자도 있고 보조장치를 이용해 특수능력을 쓰는 이들도 있지. 후자는 능력자보단 ‘사용자’라 불리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후천적 능력자도, 사용자도. 리더는 랜서즈를 선천적 능력자니 후천적 능력자니 구분한 적은 없었다. 물론 모두 별다른 조작 없이도 능력을 각성한 걸 보면 멤버 전부 선천적 능력자이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RR은? 랜서즈 선발 전부터 리더에게 붙어있었던 RR이 선천적 능력자였다면 리더가 그도 랜서즈로 배치하지 않았을까?
RR이 일반적인 능력자였을 경우, 리더가 그의 능력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RR이 특수한 상황에 능력을 쓸 수 있음에도 지원조로 배치된 건 높은 확률로 그가 제한적 능력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의 능력자와는 다른, 보조장치가 필요한 존재. 유토가 말하길, 그런 이들을 부르는 이름은.
“그럼 RR이, ‘사용자’라고?”
「그건 본인에게 듣지 않으면 몰라.」
“하지만 보통의 능력자라면 애초에 지원조에 배치되지도 않았을 텐데?”
「유우야, 사정을 알고 싶다면 그 사람과 직접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야. 물론 네가 그를 동지로 인정할 생각이 있다면 말이지.」
의미심장한 말에 Y의 눈이 둥그레졌다. 무슨 뜻이야? 조심스레 물으니 답은 바로 돌아왔다.
「숨기는 게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기란 어렵지. 하지만 상대를 들여다보려는 마음 없이 ‘어려운 사람’으로 두기만 하다간 영원히 타인으로 남을 뿐이야. 넌 그 사람과 무슨 관계로 남을 생각이지?」
RR은 어떤 사람일까. 유토의 말을 듣고서, Y는 그 까다로운 남자를 찬찬히 정의해보기로 했다. 리더의 사람. 속을 알 수 없는 남자. 지원조이면서 전투조로 구성된 팀에 발을 걸친, 애매한 위치를 고수하는 자. 한편으론 이번 임무에서 Y의 파트너였던 동시에 그를 구해주기도 한 사람. 랜서즈엔 속하진 않더라도 ‘사장의 계약자’로서 Y가 계속 마주쳐야 할 상대. 그것이 RR.
넌 그 사람과 무슨 관계로 남을 생각이지?
유토의 물음을 곱씹어본 Y는 답을 주는 대신 방을 뛰쳐나갔다. 리더가 건 행동제약 따위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후였다. 생각해보니 RR이 그에게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할지는 단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동료. 같은 적을 두고서, 앞으로도 함께 움직여야 할 사람. 돌이켜보면 RR은 팀원들과의 접촉을 딱히 거부한 적이 없었다. 팀 내 유일한 지원조로서, 전부 전투조인 멤버들에게 굳이 더 다가가지 않았을 뿐.
상대를 들여다보려는 마음이 없다면 타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같은 자리에 설 뿐 서로를 이해할 필요 없는 개인이 되는 것이다. 계약 상대라면 모를까, 동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관계였다. 동료가 되려면, 둘 중 누가 먼저 시작하건 상대를 파악하려 노력할 수밖에.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접근하고, 이야기를 듣고, 상대를 알아야 했다. Y가 방을 나선 건 RR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RR의 방은 리더의 집무실 근처. 집무실이 있는 기지 중심부로 향하면 어떻게든 그와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방을 찾아가든, 집무실에 뛰어들어 리더와 함께 있을지도 모를 RR을 찾든. 마침 Y에겐 RR을 만나야 할 좋은 핑계도 있지 않은가. 저를 구해준 이에게 감사인사를 건네야 한다는 것.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참고 복도를 빠르게 걷던 Y는 뒤에서 팔을 붙들리는 바람에 멈췄다. 갑자기 그를 붙잡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돌아보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상대가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왜 돌아다니고 있지?”
리더가 행동제약을 걸어뒀을 텐데. 메마른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저번 임무에 함께 나섰던, 임시 파트너였던 이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당신을 만나러 나온 거야. RR.”
그 말에 팔을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륵 풀렸다. Y는 돌아보았고, 예상했던 얼굴을 보았다. RR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RR은 Y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Y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건 좋지 않다는 게 이유. 리더가 너에게 행동제약을 걸어둔 건 사람들이 네 상태에 대해 묻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을 거다. 넌 네 능력 때문에 시선을 끄는 편이라. 방으로 향하는 동안 RR은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뒤따라오는 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나직한 속삭임이었다. 내내 앞만 보고 걷던 RR은 방문을 열 때서야 겨우 Y를 돌아보았다. 들어와. 말이 떨어지자마자 Y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Y가 받은 인상은, 생각 이상으로 좁다는 것이었다. 가구는 최소한의 것만 배치되었고 개인 물품도 많지 않은데 이상하리만큼 좁게 느껴졌다. 그것이 방 곳곳에 놓인 정체불명의 장치들과 서류 뭉치 때문임을 Y는 곧 알아챌 수 있었다. RR이 지원조이고, 그 중에서도 리더가 회사를 경영하던 시절부터 그의 곁을 지킨 사람임을 생각하면 그 모든 게 업무와 관련된 짐이라 추측할 수 있다.
가장 개인적인 공간에서까지도 일에 매달리는 것인가. Y가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때, RR은 소파에 놓인 서류뭉치를 치우고 Y를 그 자리에 앉혔다. 난 아무 데나 앉지만 오늘은 손님이 왔으니 자리를 마련해야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Y의 자리 근처에 걸터앉은 RR은 근처 테이블에서 음료캔을 집어 Y에게 건넸다. 다음은 ‘손님’을 가만히 응시하는 일이었다. 금빛 눈에 Y를 담으며 그는 무언으로 묻고 있었다. 나를 만나러 나왔다며. 이유가 뭐지?
소리 없는 메시지에 반응해 입을 뗀 Y였지만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구해줘서 고맙다는 감사 인사? 어떻게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느냐고 묻는 것? 아니면 사소한 화제를 들먹이며 긴장을 푸는 ‘사회적인’ 대화? 그동안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던 시간만큼이나 고민도 길었다. 침묵을 오래 이어가는 건 불편했으므로, 말을 고를 시간을 벌 겸 Y는 캔을 받아 음료를 그대로 들이켰다. 라벨도 보지 않고 마셨는데, 목을 적신 것은 다행히도 무난한 오렌지주스였다. 시원한 주스가 머리를 식혀준 것인지 어떻게 대화를 시작할지에 대한 답도 얻었다.
다 마시면 우선 음료를 줘서 고맙다 이야기하고서, 임무 때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그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RR이 반응하면 자연스레 ‘어떻게’ 자신을 구해주었는지 묻고, 능력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RR이 어떤 분류의 능력자인지도 알게 되면서 <능력자로서> 서로를 이해하자는 말을 꺼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주스를 다 마시기만 하면 ─
“저번 임무는 미안했다.”
Y가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건조한 목소리가 침묵을 끊었다. RR이 먼저 입을 뗀 것이다. 그 바람에 계획이 꼬였다는 생각보다 RR이 마음을 열고 대화를 시도했다는 기쁨이 Y의 머리를 채웠다. 빈 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Y는 물었다. 뭐가 미안하단 거야? 라고. RR이 먼저 나서준 것은 고마웠으나 사실 그가 불쑥 사과를 건넨 이유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임무가 삐걱거린 건 사실이라 해도 그가 특별히 잘못한 일이 있었던가?
“여러 가지 의미지. 펜듈럼을 통제할 수 있단 답을 듣긴 했어도 널 혼자 두는 게 위험할 수 있단 건 알았어. 그래, 솔직히 말해 널 위험에 내버려두고 빠져있었던 거다.”
“그래도 그때 날 구하러 와줬잖아.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거지?”
“뭐, 그렇지. 내 디스크는 특수능력 발동시의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는 기능이 들어가 있거든. 펜듈럼의 에너지량은 상당해. 네가 적진에 들어섰다면 당연히 그 공간의 에너지량이 확 달라질 텐데 내가 나설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더군.”
“그래서 뭔가 이상하단 걸 느끼고 나선 거구나.”
“다행히 아주 나쁜 상황은 아니어서 적당히 해결하긴 했고. 아마 너에게 이런 일은 처음이었을 텐데, 놀라지 않았나?”
“당연히 놀랐지! 능력이 봉인된 상황에 아군은 없고 아카데미아는 전부 날 노리고 있었다고. 부끄러운 얘기지만, 당신이 나타날 때 완전히 패닉 상태였어. 그러니까 이 말은 꼭 해야겠지. 구해줘서, 고마워. 당신 덕분에 무사히 돌아온 거야.”
용기 내어 꺼낸 말에 RR은 오히려 당황한 눈치였다. 받아넘기지 못하는 건 물론 부끄러움 탓인지 어색함 때문인지 Y의 시선을 슬금슬금 피하기까지 했다. 왜 그래, 내가 고맙다고 말하는 건 생각도 못 했던 거야? 장난스레 묻자, RR은 들릴락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덕분’은 아닐 텐데.
“그렇다고 당신이 날 도와준 게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 왜 하필 그때 능력이 안 나왔는지가 의문이긴 한데.”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혹시 너, 나카지마의 가게에서 내 안경을 챙겼었나?”
“당신이 놓고 간 것 같아서 챙길까 했지만 급하게 나오느라 가지고 나오진 못했어.”
RR의 물음에 답하다, Y는 지금 그가 안경을 쓰고 있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RR의 얼굴이 안경을 쓰지 않은 모습이라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안경 이야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안경의 유무가 그 상황에서 중요한 조건이었던가? 거기까지 생각한 Y의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때, 능력이 갑자기 나오지 않게 된 때. 딱 하나 다른 날과 달랐던 것. RR의 안경.
무슨 이유에선지 RR이 안경을 두고 간 바람에 Y가 그 안경을 발견했고, 한 번 써보았다. 그 이후 Y는 끔찍한 어지럼증에 시달리고, 일시적으로 능력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 의심해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잠깐만, RR. 그 안경, 도수 없는 안경이지?”
“역시 써본 모양이군.”
“당신은 그 안경, 왜 쓰고 다녔던 거야? 시력 교정용은 아닐 텐데.”
“그게 중요한가?”
“있지, 저번엔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체 하긴 했지만 사실 펜듈럼은 아직 완전히 통제하기 힘든 능력이야. 그렇다고 발동조건이 까다로운 건 아니거든. 힘을 못 쓰게 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힘이 멋대로 튀어나오는 게 문제였지. 그런데 갑자기 능력이 봉인됐었어. 당신 안경을 쓴 다음에.”
시력에 문제가 없는데도 내내 쓰고 다녀야만 하는 안경. 다른 사용자에겐 불편을 안기기도 하는 것. 특수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의심되는, ‘수상한 물건.’ 그것이 RR의 안경이었다. 수상쩍은 부분을 찾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뭔가 낌새를 챈 이상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의심스러운 안경의 정체를. 말해줘, RR. Y는 RR에게 바짝 몸을 붙이며 속삭였다.
“당신 안경의 진짜 기능은, 뭐야?”
“……특수능력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것.”
RR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답했다. 안경이 능력 봉인의 원인이었으리란 추측은 맞아떨어졌지만, Y에겐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아직 의문이 남아있었다. 우선, 안경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경우는 능력자가 썼을 때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당연히 RR이 일반인일 경우 굳이 쓰고 다닐 이유가 없다. 능력자를 잠깐이나마 무력하게 만들고 싶었다면, 그 대상에게 한 번 착용하라고 넘겨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럼 RR은 왜 안경을 매일 쓰고 다녔을까?
만일 RR이 특정한 조건을 충족할 때 특수능력을 발동할 수 있는 ‘사용자’였다고 하면, 더더욱 안경을 쓸 필요가 없다. 기껏 쓸 수 있게 된 능력을 바로 무력화하게 될 테니.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Y는 물음을 덧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걸, 왜 당신이 끼고 다니는 건데?”
“하나 묻지. 내가 왜 펜듈럼 통제에 신경을 썼을 거라 생각해? 적의 무기도 아니고 우리편 능력자의, 그것도 리더가 가장 주목하는, 강력한 능력인데?”
“글쎄, 강력한 능력이라서?”
자신 없는 목소리에 RR은 미지근한 웃음을 걸쳤다. 아무래도 Y가 답을 맞힌 모양이었다.
“세상에는 미약한 능력을 지닌 이들도 꽤 많다. 그런 사람들은 평생 제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거나, 아주 제한적으로밖에 쓸 수 없지. 다르게 이야기하면 나쁜 마음을 먹더라도 세상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거야. 하지만, 강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달라.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랜서즈가 될 수도 있고 아카데미아 같은 침략군이 될 수도 있지. 능력을 완전히 통제 가능한 경우나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정의를 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기본적으로 위험해.”
이건 개인의 선량함에 기대는 것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냐. 필요할 경우 강제적으로 위험을 막아야 할 수도 있지. RR은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능력을 억제하는 거 아니겠어?
“리미터를 착용해서라도 말이야.”
RR의 말은 거기서 끊어졌지만 쓸쓸한 목소리에서, 이야기하는 중간중간 망설이듯 침묵한 것에서 알 수 있었다. 그가 꺼낸 이야기는 일반적인 사례를 늘어놓은 것도 목격담도 아니라 그가 체감한 일이었으리란 걸.
“RR, 당신 능력자였어?”
“……글쎄. 그렇게 분류해도 될지 모르겠군. 하나 말해줄 수 있는 건, 내게 있는 힘은 네 능력과는 너무도 다르단 거다. 난 너처럼 모두의 희망 같은 건 못 돼.”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을 뿐, 반쯤 긍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답변이었다. 비로소 Y는 RR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게 되었다. RR이 사용자가 아니라 Y 같은 능력자였다면, 그 능력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경우였다면 그가 능력 억제용 안경을 쓰고 다닌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건 다른 능력자를 억누르기 위한 게 아니라 RR이 저에게 채운 족쇄였던 것이다. 위험을 없애기 위한 강제조치였던 셈이다.
한편으로 그가 지원조로서, 전투조 팀에 합류한 이유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애초, 능력자였다면 랜서즈나 그에 준하는 전투조에 배치되는 게 적절했다. 지원조로 배치된 것은 리더 혹은 그 본인의 판단에 따른 것이리라. ‘위험성’을 두려워해 전투에는 배제시키더라도 아직 전투에 내몰린 지 오래지 않은 랜서즈를 보조하는 것쯤은 큰 무리가 없다. 전투 이해도가 높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더더욱.
“위험성 때문에 리미터를 쓴다는 건 이해했어. 하지만 저런 거 쓰고 있으면 힘들지 않아? 능력을 강제로 억제하는 거잖아. 몸에 무리가 가진 않나?”
“어지럽긴 하지.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그래서 너희랑 돌아다닐 때 아니면 안경을 벗어둘 때가 많긴 해.”
“잠깐, 그럼 당신 멀미한다던 게.”
“그 안경 쓰고 엄청나게 어지럽지 않았나?”
RR이 깨어있는 내내 시달린다던 어지럼증, 때로 먹은 것을 죄다 게워내야 할 정도로 심한 ‘멀미’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Y는 답을 얻었다. 제 능력이 일시적으로 봉인된 날 왜 심한 어지럼증에 시달렸는지도. 그렇게 심한 현기증은 태어나서 처음 겪었다.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피로할 정도로 끔찍한 증상이었다. 그런 걸, 눈앞의 남자는 일상적으로 감당하고 있단 말인가? 자신의 힘을 증폭시키는 것도 아니고, 억제하겠단 결심 하나로?
“그렇게까지 무리하게 통제하려 들 필요는 없잖아.”
“난 너와 다르다니까. 내 능력은, 아니, 능력이라고 말하기도 부족한 건 이미 예전에 문제를 일으켰었다. 지금 내가 쓰는 안경은 그 일 때문에 사장이 만든 리미터야. 아직은 초기 단계라 불편이 있지만 연구를 거듭하다 보면 분명 성과가 나와. 언젠간 아무런 문제 없이…….”
됐어. 내가 택한 방식이니 신경 쓸 필요 없어. RR은 끝내 말을 제대로 맺지 않고서 이야기를 돌려버렸다. 타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아 선을 그은 것인지, 능력을 온전히 통제할 수 없는 처지에 체념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건 Y에게 더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는 건 분명했으나, Y는 그대로 모른 체 할 생각은 없었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능력 통제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만큼은 저와 같지 않은가. Y는 RR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어.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 펜듈럼도 본래는 지금보다 훨씬 위험한 능력이었어. 조력자 덕분에 겉으론 크게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안정된 거야.”
“유토 덕분에?”
무심한 답에 Y의 눈이 둥그레졌다. 오퍼레이터, 유토. 늦게 각성한 만큼 불안정했던 능력을 그럭저럭 안정시키도록 도와준 고마운 존재. 디스크 이식을 도와준 리더를 제외하면 Y의 주변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 동료들 앞에선 한 번도 흘린 적 없는 이름을, RR은 너무도 쉽게 들먹인다.
“유토를, 어떻게 알아?”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RR은 덤덤하게 받아쳤다.
“그야 네가 유토를 만나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으니까.”
“리더에게서 들은 거야? 날 도와주는 오퍼레이터가 있다고?”
“정확히 말하면 리더가 널 위해 <다크 리벨리온>을 조작하는 걸 본 거지. 네가 리더에게 가져가 살펴봐달라고 했던 다크 리벨리온은 본래 유토의 기기였다. 다른 사람이 그걸 가지고 있단 게,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 이유에서 처음엔 널 싫어했던 것 같아. 네가 날 껄끄러워하는 만큼 말이야.”
“‘처음엔’ 싫어했다라니. 과거형이네.”
“네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사카키 유우야는 랜서즈의 희망이야. 난 랜서즈를 도와야 하고. 결정적으로 이번에 네가 기절했을 때 유토와 이야기했단 말이지. ‘유우야를 믿어줘. 난 그 애를 믿어서 다크 리벨리온을 넘겨준 거야.’라더군, 그 자식.”
남을 감싸는 건 참 한결같다니까. RR은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짤막한 혼잣말에 온갖 감정이 엉겨 있었다. 체념, 씁쓸함. 그리고 옅은 그리움. 당신, 유토와 무슨 사이였어? 조심스레 묻자 RR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거, 중요하지 않잖아. 라는 말로, 감상을 덮고서.
“그러니 됐어. 유토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고, 네가 유토의 도움으로 점차 안정된다는 것도 이해했어. 대뜸 날 도와주겠다는 걸 보니 너도 어느 정도는 유토 과인 것 같은데, 호의는 호의로만 받아두지. 난 아직 견딜만하거든.”
“그럼 앞으로도 지금처럼 하겠단 뜻이야?”
“난 공식적으로 사장, 그러니까 리더의 관리 대상이라 그 남자와 합의된 대로 움직여야 해. 정 신경 쓰이면 리더에게 내 얘기를 해보라고.”
혹시 알아? 내 얘기를 해줄지.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 RR은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방 한쪽에서 작은 상자를 찾아왔다. 다음은 Y의 손을 끌어와 그의 손바닥에 상자를 올려주는 것이었다. 이거, 받아둬. RR의 말에 조심스레 상자를 열자 가죽 팔찌가 있었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팔찌 같지만, RR이 지금껏 안경 형태의 리미터를 써온 걸 생각하면 여기에도 무언가 숨겨진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Y는 팔찌를 꺼내어 끼는 대신, 팔찌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당신 안경 같은 건가?”
“의심부터 하는 건 나쁘지 않지만, 특수능력 발동시의 에너지 증폭량을 가려주는 장치다. 시험작이라 지속시간이 짧긴 해도 그럭저럭 쓸 일이 있을 거야. 당장 나부터가 에너지 수치를 보고 능력자의 유무를 파악하니까.”
“선물로 주는 거야?”
“그렇다기엔 썩 좋은 건 못 되고, 널 위험에 빠트린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할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도 멋대로 생각할 거야. 당신이 나를, 인정한 거라고. 처음엔 동료로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이젠 같은 편이라 믿는 거라고 말이야.”
“……뭘 그렇게 대단한 의미를 붙이는지 모르겠지만. 딱히 틀린 것도 아니니 마음대로 생각해.”
여느 때처럼 물기 없는 목소리였지만 거부감은 비치지 않는다. Y가 먼저 RR을 찾아 마음을 전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기로 한 것처럼 RR도 마음을 연 것이다. 그러니, 동료로 인정해주었다는 말도 틀린 것도 아니리라. 거기까지 생각하자 넘기 힘든 산을 정복하기라도 한 것처럼 묘한 기쁨이 번졌다. 상자에서 팔찌를 꺼낸 Y는 왼쪽 손목에 팔찌를 차고, RR에게 자랑스레 손을 들어보았다.
“앞으로 아카데미아와 싸워야 할 때면 끼고 다닐게. 이제 걱정 없지?”
“사카키 유우야를 걱정한 적은 없어. 그 아카바 레이지가 뽑은 정예병이니까. 널 전사답게 만드는 게 내 임무였지. 그것도 조금씩 소득이 생기는 것 같고. 이제 내가 신경 쓰이는 건, 딱 하나인데.”
금빛 눈이 오래도록 Y를 담았다. 단정한 얼굴에 걸쳐지는 웃음은 어쩐지 손위형제를 연상시켰고.
“유토를, 잘 부탁한다.”
너도 알겠지만 착한 애니까 말이야. 부드러운 말과 함께, 커다란 손이 Y의 머리카락을 짧게 쓰다듬었다. 힘 있게 답하는 대신 Y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하단 것을 두 사람 모두 알았다.
*
리더의 집무실에 드나드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정예병은 대체로 그를 어려워했고, 지원조도 보통은 통신으로 모든 걸 해결하곤 했으므로. 그러다 보니 집무실을 찾는 이는 거의 정해져 있었는데, 모두 본래부터 ‘리더의 사람들’이었던 자들이었다. 정예병 결성 전부터 리더와 전사 선발 계획을 공유하고, 회사에서 그를 보좌하던 사람들. 지원조에선 RR이 그에 해당했다면 랜서즈에선 두 명, 리더의 동생과 리더가 사장직을 내려놓기 전 그의 호위였던 남자가 있었다. 나머지는 중대한 일이 없다면 집무실에 발도 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Y가 집무실에 찾아온 때 리더가 뜻밖이라며 웃은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날 어려워하는 줄 알았더니, 의외야. Y에게 맞은편 자리를 내준 리더는 낮게 속삭였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나서준 이유는? 집무실에 다른 사람도 없는데 굳이 비밀스레 묻는 체 하는 건 리더 식의 장난인 듯했다.
“RR 때문이야. 당신이 아는 걸 말해줘.”
찻잔을 들며 Y는 짤막하게 답했다. 며칠 전, Y는 RR과 처음으로 제대로 대화했다. 아마 RR이 다른 동료들에겐 한 번도 꺼낸 적 없었을, 비밀로 남겨두고 싶었을지도 모를 부분까지 들으니 RR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RR을 이해하게 된 한편 그를 좀 더 들여다보고 싶다는 욕구도 생긴 Y였다.
“RR에 대해 듣고 싶다?”
“아무래도 리더는 그 사람이랑 가까운 것 같아서 말이야.”
리더가 RR을 가까이 두고 랜서즈의 미래를 논의하는 것, RR이 스스로를 리더의 관리 대상이라 표현하는 것. 두 가지에서 Y가 느낀 것은 두 사람이 정말로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었다. 리더가 RR의 위험성을 묵인해가면서까지 그를 전투조 팀에 끼우는 건 아마 그의 능력에 기대를 걸어서일 테고 RR이 리더에게 자신을 맡기다시피 하는 것도 ‘통제자’를 원하기 때문이리라.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관계라면 상대를 깊게 알 수밖에 없다. Y는 그들이 보통의 타인이 알아낼 수 있는 것 이상을 공유하며 함께해왔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거기에 RR과 리더는 랜서즈 결성 전부터 만난 사이. 아마 리더는 RR의 지원조 동료들조차 모를 그의 배경을 꿰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Y가 리더를 찾은 이유.
“넌 그를 껄끄럽게 여긴다 생각했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지?”
“글쎄, 이번 임무에서 도움을 얻어서 그런가. 좀 더 알고 싶어졌거든.”
“네가 ‘어디까지’ 듣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어.”
역시, 리더는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RR에 대한 배려인지, 아니면 자신의 무기를 타인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단 심리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느 쪽이건 리더가 선을 긋고 싶다는 것만이 선명했다. 물론 Y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늘어놓는 것으로 선수를 치기로 한다.
“RR이 사실은 능력자인 것, 자기 능력을 통제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리미터로 강제로 능력을 억제하는 중이란 것, 그리고 그 리미터가 RR이 쓰고 다니는 안경이라는 것까지 알아. 내가 듣고 싶은 건 그 이외의 이야기.”
“많이도 이야기했군. 그답지 않게.”
“그럴만한 일이 있었거든. RR은 리더에게 자기 얘기 꺼내면 당신이 뭔가 얘기해주지 않겠냐던데.”
“이야기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뭐, ‘문제 되지 않는’ 범위에서만 얘기해줘. 다 듣길 바라는 게 아니니까.”
여기까지 온 이상 리더가 침묵할 일은 없다. 뻔히 알고 있는 정보를 바로 말해주지 않는 건, 말해도 좋을 범위를 계산하고 있어서일 뿐. 기다리다 보면 슬며시 입을 떼고 Y가 모를 이야기를 조금씩 흘릴 것이다. 과연 리더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운을 뗐다. RR은 내가 처음으로 본 후천적 능력자였다. Y가 차를 홀짝이는 사이 그는 천천히 말을 잇는다.
“RR 본인은 ‘어떻게’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 이야기하지 않지만 선천적 능력자가 아니란 건 확인할 수 있었지. 능력의 출처야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캐묻지 않았고. LC에서 그를 거두기 전까진 능력을 사용하는 대신 자기 무기를 쓰고 다녔기 때문에 언뜻 일반인처럼 비치기도 했어.”
“그때부터 능력을 억제하고 있었던 거야?”
“아니,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야. 능력을 눌러둘 생각이 없었다기보다, 누를 방법을 못 찾았던 거라고 봐야겠지. 그때 그 자가 자신의 특수능력 대신 전투에 활용했던 무기가 바로 레이드 랩터즈, 약칭 RR이었다.”
“그럼 RR이란 이름이…….”
“맞아, 자기 무기에서 따온 이름이야. 지금도 그 무기를 가지고는 있는 모양이지만, 예전처럼 쓸 일이 많지 않지.”
리더가 손가락을 튕기자 벽면의 스크린에 한 청년의 사진이 떠오른다. 녹색을 띤 머리카락, 맹금을 연상시키는 금빛 눈이 인상적인 사람. 살짝 눈에 담는 것만으로 Y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청남색의 코트를 입은 청년은 분명 RR이었다. 앳된 티가 나는 걸 보니 성년이 되기 전의 모습인 듯하나 눈에 깃든 경계는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Y는 과거의 RR에게서 상처 입은 짐승을 연상했다.
“LC에 막 들어왔을 때의 RR이다. 이 시기의 그는 정말이지 폭약 같았어.”
“통제불능이어서?”
“여러 의미로 그랬지. 능력은 능력대로 통제불능에, RR 자체도 너무 비협조적이었어. 훈련을 위해 투입했던 교관들마저 질린 얼굴로 돌아왔다. 하나같이 ‘저 자는 안 돼요’란 말을 하더군.”
“그런 사람을 어떻게 길들인 거야?”
“내가 직접 훈련시켰다. 시간을 들이니 조금씩 다듬어졌지. 하지만 그를 정말로 ‘얌전하게’ 만든 건 훈련이 아니었어.”
“그럼 어떻게…….”
Y가 관심을 보이자 리더는 은근하게 속삭였다. 하나, 그에게 설명해준 게 있거든. 딱 RR이 관심 가질 법한 이야기였고. 얘기를 꺼내자마자 바로 내게 협조하더군. 띄엄띄엄 흘리는 말에서 단서를 찾기란 어렵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Y에게 리더는 힌트를 던져주었다.
“너희와도 관련이 있는 거야.”
“능력 통제장치?”
“아니, 랜서즈 선발 프로젝트.”
이번에야말로 Y의 눈이 둥그레졌다.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였기에 그랬다. 그러나 곱씹어보면 RR과 아주 무관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랜서즈 선발 전부터 ‘사장의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리더가 준비해온 랜서즈 선발 계획도 어느 정도 들었으리라. 다만 RR이 왜 거기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그 이야기를 듣고서 협조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능력자로 구성된 정예병이란 사실이 관심을 끌었는지, 아니면 리더가 그런 중대한 일을 꺼낸 것에 마음이 움직였을지.
거기서 Y의 머리를 스친 것은 과거, 리더가 RR을 감싸며 한 말이었다. 분명 전투 이해도가 높다고 이야기했다. RR 역시 임무에 나섰다 Y와 의견이 갈렸을 때 적을 많이 상대해보았음을 강조했다. RR이, 랜서즈 결성 이전부터 그들의 적, 아카데미아에 맞서왔던 것이라면? 개인으로서든 리더의 수하로서든 ‘전사로서’ 전투에 동원된 때가 있었다면? 그렇기에 리더가 정예병 선발 계획을 꺼낸 때 그 필요성을 이해하고 리더의 뜻을 순순히 따라주었다면?
“RR은 랜서즈 선발에 관여했다. 내가 예전에 말했었지, 유우야. RR은 너희를, 생각 이상으로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랜서즈 선발의 토대가 된 MCS 배틀로얄 때 RR은 너희를 지켜보며 평가하고 있었어. 너희는 그렇게 선발된 전사들이야.”
“그 사람, 랜서즈에 무엇을 기대하고 선발을 도운 거야? 왜 당신은 그 사람이 랜서즈 ‘후보’를 평가하게 했고?”
그 남자가 예전에 랜서즈 비슷한 전사이기라도 했어? 아카데미아에 맞섰다거나? 떠보듯 묻자 바로 답이 돌아왔다.
“물론 RR은 아카데미아를 잘 알고 있다. 전사에게 적합한 특성이 무엇인지도. 하지만 RR에게 랜서즈 선발을 맡긴 이유는 그것만은 아니었어. 난 그에게, 동료를 고를 선택권을 준 거다.”
“……동료?”
“내가 왜 지원조인 RR을 굳이 랜서즈에 붙였다고 생각해?”
“원래 멤버였구나. 그 사람.”
랜서즈 팀에 끼워 넣은 게 아니라, 원래 랜서즈의 멤버였어. Y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생각하자 하나둘 이해되는 게 있었다. 이를테면 RR이 지원조임에도 언제나 랜서즈와 얽힌 이유. 그동안 RR이 랜서즈와 함께 움직이며 지나가듯 흘린 조언이 대부분 랜서즈 멤버들 특성에 잘 맞는 도움이었던 이유 등.
“그럼 그 사람, 원래 전투조였어?”
“그랬지. 처음 구상은 전투조였는데, 본인이 지원조를 고집해서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배치했고. 지원조로서의 능력도 나쁘지 않지만 난 원래 그를 전사로 쓸 생각이었기 때문에, 필요할 경우 전투조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은 열어뒀다.”
“이번 임무처럼 돌발상황이 생기면, RR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도록?”
“그 일에 대해선 나도 사과할 부분이 있어. RR은 자기가 부주의한 탓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어쨌든 그에게 리미터를 빼두라고 요구한 건 나였으니까. 너희가 ‘창고’에 들렀을 때 RR에게 연락해서 너를 시험하라고 지시했지.”
“잠깐만, 그럼 RR이 안경을 빼둔 것도, 그 남자가 나와 따로 움직이기로 한 것도 다 당신 구상이었어?”
잔뜩 흥분해 묻자 리더는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으로 바로 긍정했다. 다음은 차분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설명하는 일이었다. 너도 대충 눈치챘겠지만, RR은 자기 능력을 반쯤은 두려워하고 반쯤은 혐오해. 몸에 무리가 가는 리미터를 절대 빼려고 하지 않지. 하지만 나는 ‘사카키 유우야가 홀로 펜듈럼을 통제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RR에게 요구했지. 사카키 유우야가 혼자 능력을 쓸 환경을 만들어라. 그리고 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능력을 쓸 수 있도록 준비해둬라.
“RR은 쉼터에서 안경을 슬쩍 벗어두고 나카지마에게 맡겨 나중에 돌려받을 생각이었을 거다. 안경을 벗으면 몸이 홀가분해지니 임무를 수행하는 덴 전혀 지장이 없었겠지. 네가 그의 안경을 발견할 거라곤, 또 안경에 손을 댈 거라곤 생각지 못했어. 근처에서 대기중이었던 RR이 나서서 상황을 수습하긴 했지만.”
미안하게 됐어, 유우야. 펜듈럼의 능력자를 시험해보려는 욕심 때문에 너에게 너무 큰 충격을 안겼던 것 같군. 말끔한 사과에도 Y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필요하다고 판단한 일에 대해선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추진하고 보는 게, RR과 닮았다. 그 리더에 그 수하라고 할까. 왜 두 사람이 멀리서 보기에 친밀해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당신한테 어떻게 보고해야 하나 걱정했었네. 어째 창고에서 RR이 누구랑 통신하곤 평소답지 않게 긴장한 것 같아 보이더니.”
“지나간 일에 말을 얹어봤자 변명이 될 뿐이니, 앞으론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하지. 위험부담이 있는 일에 대해선 먼저 이야기하겠다. 네가 마음의 준비를 하거나, 아예 거절할 수 있도록.”
Y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더는 조금 안도한 얼굴이었다. 아마 미안함 때문이라도 얼마간은 Y에게 약해질 것이다 ─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Y는 리더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것을 묻기로 마음먹었다. 평소의 리더라면 슬그머니 답을 회피할지도 모를 것을.
“사실 그 날, 기절하기 전에 RR 뒤에서 기계 날개가 펼쳐지는 걸 봤거든. 너무 어지러웠던 때라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RR의 능력이 그거랑 관련이 있어?”
“아니, 그건 레이드 랩터즈, RR의 원래 무기일 거다. 기계 새를 사용했었지. 몇 기를 한꺼번에 꺼냈다면 꼭 그에게서 기계 날개가 펼쳐지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군.”
“그럼, RR의 능력은 뭔데?”
리미터를 써서라도 눌러야 하는 위험한 능력 말이야. Y가 덧붙이자 리더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무래도 그에게도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내용인 모양이었다. 전투 경험이 많은 RR조차 두려워하는, 문제를 몇 번이나 일으켰다는 능력. 위험성이라는 말과 연결시켜 생각하면, RR이 일으켰다는 문제는 타인을 다치게 한 것이었을 확률이 높다. 적을 쓰러트려야만 하는 전투에서야 파괴력은 강하면 강할수록 좋다. 아군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라면. 그렇다면 RR의 능력은 주변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위험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RR이 아군에게 부상을 입힌 적도 있었을까?
답을 알려줄 수 있는 자는 당장은 리더뿐이다. RR은 쉽게 입을 떼지 않을 테고, 나머지 멤버들은 그가 능력자인 줄도 모르고 있을 테니. 바로 답을 줄 거란 기대는 없었으므로, Y는 굳이 답을 재촉하지 않고 리더를 응시했다. 여러 감정이 엉긴 보랏빛 눈, 굳어진 얼굴과 닫힌 입술이 차례로 Y의 눈에 담겼다. 째깍째깍, 시곗바늘 움직이는 소리만 듣는 것도 슬슬 지루해질 즈음 리더의 입술이 열렸다.
“……RR은 그걸 능력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의문이라고 했지. 어느 정도는 나도 그에 동의해. 굳이 따지면 신체 강화에 가까운데, 일시적이라지만 파괴력이 지나치게 커.”
“주변 사람들까지 휩쓸릴 정도로?”
“그런 일이, 확실히 있었어. 통제만 가능하다면 아무 문제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RR은 강제적 장치가 없으면 ‘힘 조절’조차 제대로 못 해. 후천적으로 습득한 능력의 부작용인가 싶기도 해.”
후천적 능력자란 건 능력을 인위적으로 주입한 사람이니까 말이야. 자연의 질서에 손을 댄 것처럼, 웬만해선 보통의 능력자처럼 살지 못한다더군. 그렇게 덧붙인 리더는 스크린에, 과거의 RR에 시선을 준다. 보랏빛 눈에 걸쳐지는 것은 씁쓸함인 것 같기도 하고, 연민처럼 비치기도 했다. 리더에게 드리워진 감정이 어느 쪽이건 그가 자신의 수하를, 전사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후천적 능력자 중 능력이 생긴 후 삶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 부류는 대부분 능력이 미약한 자들이야. 강한 능력을 갖게 되면 그에 먹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던가.”
“그런데도 RR이 능력자가 되길 택한 건.”
“아카데미아에 맞서기 위해서였을 거다. 그 자가 LC에 들어오게 된 건 아카데미아를 위협할 길을 찾아서였거든.”
처절하게 싸울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지. 그것밖에 길이 없는 사람들 말이야. 리더의 말을 들으며 Y는 과거의 RR이 왜 상처 입은 짐승을 연상시켰는지 이해했다. 한동안 비협조적이었다지만 리더가 지시한 훈련은 거부하지 않았던 이유도. 아직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정예병 랜서즈를 전투에 밝은 그가 하나하나 돕고 있는 이유도. 어쩌면 RR에게 랜서즈는 겨우 얻게 된 동료이면서, 이전부터 이어온 싸움을 끝내줄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가 두려워하는 한편 혐오하는, ‘위험한’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목적을 이뤄줄 수 있을 사람들.
“RR을 전투조로 쓰는 방법은 있어. 그 자의 능력은 일대 다 전투에, 적을 섬멸하는 데 특화되어 있지. 위험성을 무시하고 그를 아카데미아 분대에 ‘혼자’ 보내면 돼. 웬만해선 처리하고 돌아오겠지. 하지만.”
“그런 거, 실행한 적 없잖아. 당신은 RR을 걱정해주는 거지? 그 사람의 의사를 존중해서, 지원조로 남겨두는 거지?”
“랜서즈는 나와 RR이 선발한, 뛰어난 능력자들. 너를 비롯한 랜서즈 멤버들이 활약하는 한 RR은 지원조로 있어도 좋아. 다만 무엇으로도 돌파할 수 없을 위기가 오면, 혹은 꼭 적을 섬멸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RR을 전사로서 출격시킨다. 이건 랜서즈 결성 직전에 RR과 합의한 사항이야.”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물론, 최후의 수를 쓸 일은 없어야겠지. 나도, RR도 너희를 믿고 있어.”
나직한 말이 귀에 탁 박힌다. 그 말의 무게를, Y는 안다. Y가 능력을 각성하여 <펜듈럼 사용자>로 알려진 때부터 그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엔 기대와 선망이 묻었다. 리더가 능력자를 선발하여 정예병으로 출격시키잔 제안을 꺼낼 수 있었던 것도, 리더의 주변인이 전부 그에 동조한 것도 결국 펜듈럼에 대한 기대 덕분이었다. 그에게서 시작된 관심이 다른 능력자에게 번졌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청소년기의 능력자를 선발하자는 계획이 통과된 것이다.
다수의 기대는 막 능력을 각성한 소년 Y를 정예병으로 키워냈지만, 한편으론 Y에게 성과를 내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주었다. 아직 그는 실패가 두렵고, 능력을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한 소년이기도 했다. 랜서즈로 움직이면서, 전사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이해하면서부터 기대는 점점 무겁게 느껴진다. 언젠간 모두의 소망을 충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단 생각 때문이리라.
“당신은 지휘관, RR은 이미 실전 경험이 있는 사람. 그런데도 우리를 믿는다고?”
“그런 사람이니까 너희에게 기대를 걸 수 있는 거다. 닳지 않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있거든.”
우리는 닳았고, 너희는 가능성이 충분하지. Y와 고작 몇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리더는, 삶을 한참 살아버린 어른처럼 웃는다. 희한하게도 그 모습에 언뜻 RR이 겹쳐졌고.
“경험을 전하고, 훈련시켜서 너희를 더 뛰어난 전사로 만들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난 정예병이란 이름을 아무 생각 없이 가져온 게 아니야. RR이 내 뜻에 따라준 것도 확신이 있어서일 테고. 그러니까.”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할게.”
어떤 답이 필요한지는 뻔했다. 기대의 무게 때문에 쉽게 꺼낼 수 없었으나 결국 Y가 건네야만 하는 답이었다. 리더의 기대는, RR의 믿음은 실패 한 번으로 돌아설 것이 아니었다. 그가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일어서도록 손을 내밀고, 힘의 한계를 느끼고 멈추면 그를 더욱 무장시킬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Y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이 바라는 모습이 되도록 노력할 수 있다.
“좋아. 그 말, RR에게도 전해주지.”
“그 사람 성에 차기나 할지 모르겠네. 워낙 깐깐해서 말이야.”
“확실히 RR은 자기가 키워야 할 자에 대해선 기대치가 상당히 높아. 엄격하기도 하고. 너에게 별말이 없다는 것부터가 이미 너에게 점수를 많이 주고 있단 뜻일 텐데.”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스크린에 떠올랐던 RR의 얼굴이 걷혔다. 커다란 화면엔 과거의 RR 대신, 랜서즈 심볼이 떠오른다. Y를 비롯한 정예병 멤버들 전부를 나타내는 것. 동시에 리더의 희망이자 RR이 믿고 있는 존재의 상징. 그렇게 화제는 과거에서 현재로, 리더와 RR이라는 <협력자>에서 랜서즈라는 전사들로 바뀐다.
“너도, 나머지 랜서즈 멤버들도 사실 RR과 내가 처음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잘해주고 있어. 그래서 말인데, 너희가 준비가 되는 대로 RR을 정식으로 랜서즈 멤버로 인정할까 해.”
“그러니까, 그, 아예 랜서즈로 넣겠다고?”
거기까지 말하고서 Y는 RR이 원래부터 랜서즈 멤버였단 걸 떠올려냈다. ‘본래 자리’를 돌려주는 셈이라 생각하면 놀라울 것도 없다. 그저 리더가 적당한 때를 찾은 것뿐이리라.
“어차피 아카데미아 본거지에 가까워지고 있지 않나? 너희를 본격적으로 정예병으로 만들려면 RR이 제대로 나서는 게 나을 듯한데.”
“당신, 처음부터 이런 걸 계획하고 있었어?”
“반쯤은. 예전에 RR에게 비밀 멤버로 랜서즈와 함께 움직여줄 수 있냐고 물으니 바로 알겠다고 했지.”
“맨날 당신들끼리만 논의하지?”
그거, 나쁜 버릇이라고. Y가 툴툴거리자 리더는 장난스레 사과를 건넨다. 미안하군, RR은 아무래도 바로 동료로 받아들이기엔 어려운 사람이어서 말이야.
“그럼 RR과 가장 최근 함께 움직였던 사람에게 묻지. RR을, 동료로 받아들이는 데 혹시 불편이 있나?”
바로 며칠 전의 Y에게라면 모를까, 지금의 Y에겐 너무 쉬운 질문이었다. Y는 즉답했다.
“물론 없어.”
까다롭게만 느껴졌던, 속 모를 남자. 불신이 심하며 도통 마음을 열지 않던 사람. 소속이 다른데도 이상하게 자꾸 얽혔던 청년. RR은 이제 Y에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면서 한편으론 기대도 될 것 같은 대상이기도 했다. 같은 적을 두고, 같은 것을 목표한단 것을 알았으니 더 망설일 것도 없다. 그는 Y의 동료였다. 지금껏 함께 움직여온 랜서즈 멤버들처럼.
“조만간 랜서즈 멤버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해야겠어. 새 멤버 같은 동료를 소개해야지.”
“RR은 어떻게 반응할 것 같아?”
“아, 분명 기뻐해. RR이라면 말이야.”
그 남자, 너희를 이미 인정했으니까. 뒷말은 기분 좋게 울렸다.
집무실을 떠나면서 Y는 랜서즈가 <새 멤버>를 맞이하는 날을 상상했다. 리더의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소꿉친구는 아마 눈이 둥그레질 것이고, 한두 명은 의심 섞인 시선을 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반응을 보이건, 오래지 않아 모두가 그를 동료로 대할 것이다. 리더가 엮어준 성가신 사람이 아니라, 함께 서기엔 불편한 사람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동지로 인정하게 되리라.
그렇게 되면 랜서즈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고, RR은 희망을 키울 수 있다. 리더는 리더대로, 자신의 전사들이 진정으로 함께하게 된 것을 흡족하게 지켜보리라. 미래를 그려본 Y는 입가에 웃음을 걸쳤다. 모두가 행복한 미래에, 한껏 들뜬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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