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인간은 평화로운 세계를 사랑하지만 죄지은 자는 혼란에 안도한다. 그런 세계야말로 죄를 가리고 섞여들기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국의 도시에 정착하며, 청년은 그곳도 혼란에 잠겼음에 안심했다. 사는 게 팍팍해진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에게 예의로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덕분에 청년은 순조롭게 도시의 일부가 되었다. 수상쩍은 이방인이 사실은 도망자였으며, 그가 도망쳐온 나라가 도시를 혼란에 빠트린 침략국이란 배경은 그렇게 감춰졌다.

  그러나 청년이 혼란을 이용한 것은 제 안위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도망쳐올 때 데려온 사람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는 검은 머리칼의 여자를 데리고 도시에 숨어들었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서 베일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한 여자는 그 날 꼭 상복을 입은 귀부인 같았다. 그녀가 사랑하던 이들이 죄 죽었음을 생각하면 참 씁쓸한 인상이었다. 죽음을 불러온 것이 청년의 옛 동료들이란 것까지 짚으면 더더욱.

  그럼에도 여자는 청년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도 청년처럼 도망자이기에 그랬다. 도망치지 않았다면 평생 새장에 갇혀 살아야 했을, 사로잡힌 신비. 청년이 탑에 갇힌 그녀에게 같이 갈래요?’라고 물었을 때 그녀가 목적지를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인 건 바깥으로 한 발짝이라도 떼고 싶어서였으리라. 그녀의 승낙이 저에게 삶을 맡기겠다는 뜻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답을 듣자마자 청년은 입가에 웃음을 걸쳤다. 그는 줄곧 그녀와 함께 도망치는 걸 꿈꿔왔으므로.

  실행은 빨랐다. 탑의 구조를 훤히 꿰고 있던 청년은 오래지 않아 여자를 데리고 제 나라를 뛰쳐나왔다. 사랑의 도피였던가? 그럴 리는 없었다. 청년 혼자서 그런 낭만적인 형태를 내심 바랐다면 모를까. 여자의 삶은 과거, 고향에서 그를 만난 때부터 꼬여버렸다. 평화롭던 그녀의 고향에 전쟁을 들여온 것도, 그녀의 납치를 방조한 것도 전부 청년이었으니까. 청년의 손을 잡은 때 여자는 그동안 그가 가져온 불행을 새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미지근한 증오를 억지로 삼키며.

  옛 일이 마음에 걸려서였을까. 청년은 여자와 함께 움직이게 된 후 계속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려 들었다. 짐가방을 챙기면서도, 미리 챙겨온 보석을 돈으로 바꾸러 갈 때도, 그녀에게 베일을 씌워주면서도. 그는 자꾸만 물었다. 괜찮아요, 루리? 그럴 때면 여자는 붉은 눈으로 청년을 바라볼 뿐. 굳게 닫힌 입술은 열리는 법이 없었다. 침묵에 담긴 감정을, 청년은 굳이 파헤치려 들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증오였을 수도 있고,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는 이에 대한 연민이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여자가 답을 회피할 뿐 청년의 손을 놓지 않았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정확히는 청년 이외의 선택지가 없었다고 보아야겠지만.

  고향은 폐허가 되고 사랑하던 사람은 전부 잔해에 묻혔다. 홀로 도망쳐봐야 쥔 것도 기댈 곳도 없는 여자였다. 침략군 수장이 눈독 들인 타깃이니 작정하고 숨지 않으면 언제 다시 끌려갈지 모를 처지이기도 했다. 그나마 저에게 호의적인 청년의 도움을 받아 몸을 숨기는 게, 그녀의 유일한 선택지였으리라.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삶에서 감정은 사치였다.

  여자의 처지를 알고 있었기에 청년은 그녀가 떠날 수도 있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녀에게 기반이 생기기 전까진 거의 불가능한 미래였으므로. 청년의 짐작대로 여자는 그의 뜻을 잠자코 따라주었다. 가끔 시선이 청년 너머의 먼 곳에 향하긴 했으나, 그뿐. 청년의 요구에 거부의 뜻을 흘리는 일은 없었다. 도피처가 되어줄 집을 계약할 즈음엔, 청년도 제법 자신에 차 있었다. 여자의 마음이야 어떻건 저와 그녀는 제법 거리를 좁혔으며, 앞으로도 보통의사람들처럼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이 과했던 것일까.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날 청년은 여자에게 여분의 열쇠를 건네주며, 자못 당당하게 말했다.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집이에요. 오래 머물 수 있겠죠. 아예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그러자 여자는 메마른 목소리로 받아쳤다.

  “얼마나 오래 있으려고?”

  “당신이 바라는 때까지죠. 루리.”

  그렇게 답한 청년은 문득 머리를 스친 불안에 바로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웬만해선 침묵하던 여자가 드물게 반응한 것이 신경이 쓰인 탓이었다. 그녀에게 자신이 본디 껄끄러운 상대임을 잠시 잊고 있었다. ‘바라는 때까지라고 하면, 여유가 생긴 때 여자가 홀로 이곳을 떠난다 해도 잡을 길이 없는데. 다행히 여자는 묘한 웃음을 걸칠 뿐 그 이상 이야기를 끌어가지 않았다. 짐가방을 풀어, 챙겨온 옷가지를 정리하는 여자를 보고서야 청년은 안도했다.

  이렇게, 누구도 저를 모르는 곳에서 일상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그녀의 꿈이었으리라고. 그러니 여자가 평온한 나날을 더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여기 남아있을 거라 스스로를 달래며.

  그 이후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청년은 밖에서 거리공연을 하다 들어오고, 여자는 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다 동거인이 돌아오면 맞아주는 날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여자에게 혼자 있는 동안 집에서 무엇을 하고 있냐 묻자, 바깥 풍경을 본다는 답만 돌아왔다.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듯 창가에 안락의자가 놓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여기에 좀 더 일찍 왔다면 더 좋은 풍경을 보았을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 훨씬 화사했거든요. 명랑하게 말을 덧대며 청년은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밤이 되기까진 아직 멀었음에도 어쩐지 우중충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청년이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형형색색의 불빛이 인상적이었던 도시는, 이제 늦은 오후만 되면 무채색을 덮는다. 침략군 분대가 침투해 민간인을 공격한 일을 겪으며, 사람들이 불신과 경계를 두르고 살게 된 탓이다.

  “낮에는 그럭저럭 볼만하지만 이 시간쯤은 조금 칙칙하죠?”

  “글쎄요. 하트랜드보다야 나은걸.”

  지나가는 듯 던진 말이 묵직했다. 여자가 꺼낸 것은, 폐허가 된 고향의 이름. 귀에 익은 이름에 과거의 죄를 떠올린 청년은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청년을 더욱 짓눌렀던 건, 여자의 얼굴에 원망은커녕 불쾌조차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불행도 상실도 너무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을 일상이 된 듯.

  “공연은 괜찮나요?”

  그때 여자가 말을 건네지 않았다면 청년은 밀려드는 감정에 질식했을지도 모른다. 반응을 묻는 거예요. 재차 귀를 때리는 목소리에 청년은 겨우 입을 뗐다.

  “나쁘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나한테 소소한 선물을 주기도 하죠. 이 동네는 엔터테이너가 먹히는 모양이에요.”

  “여기는 아직 외부인을 믿어주는구나.”

  “……그러네요.”

  하트랜드만큼 당하진 않아서일지도 모르죠. 자조 섞인 말을 흘리고서, 청년은 커튼을 쳐 창을 가렸다. 고향의 이름에도 여자는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아득히 먼 곳으로, 아마 청년이 담아낼 수 없을 곳으로 시선을 돌릴 뿐. 그녀가 바라보는 곳은 이 도시가 아니다. 높은 확률로, 그녀가 살았던 폐허이거나 평생 닿을 수 없을 낙원일 것이다. 청년이 결코 데려가줄 수 없을 곳.

  “밖에 나가지 않는 건, 사람들을 믿지 못해서인가요?”

  “시선이 달갑지 않을 뿐이에요. 여기서는 당신만 감당하면 되지만 밖에선 어떻게 될지 모르니.”

  “데니스 맥필드란 사람 하나 정도는 받아줄 수 있나 봐요.”

  “당신은 나를 해치지 못할 테니까요.”

  ‘않을 테니까가 아니라 못할 테니까였다. 청년은 여자가 자신의 약점을 꿰고 있다고 확신했다. 여자의 세상을 망가뜨렸기에 그녀의 남은 삶에선 언제까지나 무해한 인간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을. 당신을 다치게 할 리가요. 그런 일은 생각도 한 적 없어요. 애써 받아친 청년은 거리공연에서 쓴 마술도구를 정리하다 카드 한 벌을 통째로 쏟았다. 카드를 전부 정리하고 일어났을 땐 여자는 이미 방으로 들어간 후였다.

  그렇게 가끔 <껄끄러운 화제>가 흘러나오긴 해도 두 사람의 관계는 표면적으론 어떤 문제도 없었다. 어쨌건 두 사람은 함께 지냈고, 여자는 청년의 도움을 거부하지 않았다. 청년이 그녀의 협력자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둘은 나쁘지 않은 한 쌍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연기에 능한 청년이라면 얼마든 그런 모습을 취할 수 있다 청년의 얄팍한 생각에 힘을 실어준 것은 이 도시에서 그가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청년은, 거리에서 집주인과 우연히 마주쳤다.

  이곳 사람답지 않게 친절하고 붙임성 좋은 사내는, 청년을 보자마자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OOO씨라 했던가? 사람 많은 거리에서 이름까지 부르는 친화력에, 청년은 가명으로 집을 계약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 .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적당히 인사만 하고 빠져나가려던 청년을, 사내의 말이 묶었다.

  “집은 마음에 드나?”

  “, 덕분에 여기서 잘 적응하고 있지요.”

  “그래야지. 아가씨랑 살림도 차려야 할 테니. 저번에 같이 온 아가씨, 결혼할 사람이지? 그게 아니면 파릇파릇한 남녀가 함께 와서 집을 마련할 일도 없잖나.”

  거기서 청년이 떠올린 건 수개월 전, 집을 계약하러 가던 날의 기억이었다. 도시에 들어오고도 마땅히 지낼 곳을 찾지 못했던 시기, 청년과 여자는 어디나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제법 괜찮은 매물을 발견한 청년이 집주인을 만나러 갈 때, 여자가 따라붙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집주인과 말이 통한 덕에 청년이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쓸 때도 여자는 동상처럼 가만히 청년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집주인은 그 날 본 여자를 줄곧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청년과 비슷한 나이라는 것도, 도통 입을 열지 않는 여자에게 청년이 살갑게 말을 걸었던 것까지도. 타인이 저와 여자와의 관계를 넘겨짚었던 사실이, 청년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설레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의 눈엔 그들이 지극히 정상적인관계인 동시에, 미래를 기대할 사이로 비친다는 것이.

  “그렇게 보였나요?”

  “아니면 벌써 살림을 차린 건가?”

  “언젠간 그렇게 될지도 모르죠. 아직은 제 쪽이 훨씬 마음이 커서…….”

  “다음에 볼 땐 좋은 소식 전해주길 기대하겠네.”

  웃음 띤 얼굴로 인사하는 집주인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청년은 집으로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리의 엔터테이너로, 혹은 첩자로 살아오면서 청년이 익힌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관심을 품는 건 외양이지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진실이야 어떻건 언뜻 보기에 아름답게 비치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 되며, 그 역도 성립한다. 청년과 여자의 관계라고 다를 것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이 연인이나 약혼자라면 사람들이 그들에게 기대하는 상도 그러한 것들이리라. 청년이 그녀에게 어떤 죄를 지었는지, 그녀가 청년에게 어떤 감정을 품는지는 중요한 사항도 아니다.

  오히려 껄끄러운 진실을 보기 좋은상으로 덮어버리는 것이 두 사람에겐 더 나은 길일지도 모른다. 서로만이 아는 감정을, 사건을 입에 올리지 않고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평온한 나날이 계속된다면, 둘 사이의 껄끄러움도 조금씩 옅어지지 않을까. 청년의 죄책감이 줄어드는 건 물론, 그가 안겨준 비극으로 인한 여자의 불행도 줄어들지 않을까.

  행복한 삶을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서로의 행복을 위해 설정한 역할을, 진짜 제 모습으로 믿어버리면 그만인데.

  여자의 뜻은 듣지도 않았으면서, 청년은 바로 배우가 될 마음을 먹었다. ‘함께하여 행복한 남녀를 연기하기로 한 것이다. 무대 위의 배우에게 필요한 것은 배역, 그리고 몰입뿐. 타인은 물론 그들 두 사람까지 속일 만큼 좋은 배역으론 어떤 것이 있을까. 이미 한 번 제시된 적 있는 배역에 먼저 생각이 뻗었다. 집주인이 무심하게 이야기했던 것.

  연인. 혹은 약혼자.

  타인의 눈엔 결혼을 약속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가까운 연인을 연기하자. 여자의 곁에서 그녀의 해답이자 파트너인 양 행동하자. 집에 도착해 문을 여는 순간까지, 청년은 자신의 배역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

 

  한때 꿈의 땅이라고도 불렸다는 도시는 우중충했다. 볕이 강한 시간까지는 화사한 색채를 볼 수 있으나 조금만 어둑해지면 금세 무채색에 덮이곤 했다. 창밖 풍경을 자주 감상하는 여자에게, 동거인인 청년은 이 도시가 맞은 비극을 알려주었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침략군 분대가 잠입해 민간인을 공격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날부터 사람들은 불신에 빠졌죠. 서로를 의심하고, 사소한 일로 다투곤 했대요. 결국 그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이들은 하나둘 떠났다는군요. 씁쓸한 이야기를 담으면서도 청년의 목소리는 동화를 읽어주듯 나긋했다.

  [슬프지 않나요?]

  이야기를 끝맺는 물음에 굳이 답하지 않은 것은 그보다 더한 비극이 떠올라서였다. 여자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운 사건. 아마 평생 삶에서 잘라내지 못할, 끔찍한 비극. 여자는 평화롭던 고향에서 갑자기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던 날을 기억한다. 한 사람이 아닌 수많은 사람의 비명이 겹치기에 소리의 근원을 보았더니 무장한 군인이 밀려들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달렸던 날. 불행히도 그 날이 전쟁의 시작이었다. 조상 대부터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고 죄 없는 사람들이 쓸려나가는 비극이, 그 날 이후로도 쭉 이어진 것이다.

  모두를 짓밟은 침략군이 왜 들이닥쳤는지는 지금도 명확히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끔찍한 폭력을 정당화할 이유가 있다면 너무나 처참할 테니까. 따라서 여자는 매일 함께하는 청년에게 전쟁의 목적을 물은 적이 없다. 그가 본디 침략국의 사람이며, 그녀의 고향에 전쟁을 끌어온 첩자였음을 알면서도. 침략군과 한패였으면서 그는 왜 이곳에 침투한 침략군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은 것일까. 뻔뻔하게도 죄를 잊은 것인지, ‘동지의 죄를 새삼 되새기며 떳떳하지 못한 제 출신을 자조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설령 전자라 하더라도 여자는 별달리 동거인에게 실망하지도 않을 터였다. 그는 이미 그녀의 삶을 망가뜨렸고, 그로 인해 꼬여버린 미래는 다시 복구할 수 없으므로. 여자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고향은 지옥이 되었고 연을 맺은 사람은 거의 잃었으며, 그녀 자신도 침략국에 끌려가 꼼짝없이 죽을 뻔했다. 탑에 갇혀 지내던 날 청년이 도망치자고 권유한 덕에 침략국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애초 청년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갇힐 일도 없었을 터였다. 그는 구원자도 협력자도 아니라 그녀의 삶을 제멋대로 끌어간 사람일 뿐이다.

  그렇기에 여자는 청년의 말을 별로 머리에 담아두지 않았다. 이 낯선 도시에 닥친 비극 이야기도, 거기서 슬픔이란 감정을 끌어내려는 듯한 마지막 물음도. 적당히 듣고 흘려버렸을 뿐이다. 우중충한 풍경을 보면서도 별다른 감상이 피지 않는 것도 아마 그래서이리라. 이곳의 음울함은 여자에게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다. 이곳은 고향의 폐허만큼 처참하지도 않고, 침략국의 탑처럼 숨이 막히지도 않는다. 화사하기 그지없었던 도시가, 색채를 조금 잃었을 뿐이다.

  다만, 풍경이 무채색으로 물드는 순간부터는 비슷한 색채를 덮어썼던 고향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뼈대만 남은 건물. 검게 말라붙은 땅. 침략군에 맞서기 위해 급히 무기를 든, 대부분 십대 청소년으로 구성되었던 저항군. 그 속에서 어른 행세를 하던 오빠.

  루리. 도망칠래?

  그럼에도 하나뿐인 누이 앞에선 때로 약한 말을 하던 오빠. 그녀의 유일한 가족. 오빠는 둘만 있을 때면 낡은 병기 같은 목소리로 속삭이곤 했다. 도망칠래, 루리? 너라도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래? 그렇게 이야기할 때 오빠는 입가에 웃음을 걸치고 있었다. 그에 깃든 감정은 기대라기보단 체념에 가까웠다는 걸, 여자는 이제 안다.

  오빠는?

  그 즈음 오빠는 몰래 국경을 넘을 때가 잦았다. 침략군에 맞서 버티는 데 필요한 것을 바깥에서라도 구해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국외로 향했다 굳이 돌아가지 않기로 한다면, 오빠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함께 지내는 가족으로서 사정을 훤히 알기에, 그때의 여자는 장난스레 받아쳤다. 내가 간다고 하면 오빠도 같이 도망치려고?

  아니. 하트랜드에서 도망친다면 너나 유토만 가야 해. 내가 도망치면 다들 배신당했다 느낄 테니까.

  그래도 너는 혼자라도 도망치는 걸 생각했으면 좋겠어. 오빠가 메마른 목소리로 덧붙였던 말을 여자는 기억한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오빠가 건넨 말은 절반쯤은 이루어진 셈이다. 침략군에게 납치당하며 지옥에서 강제로 끌려나간 여자는 적의 도움을 받아 안전한 세계로 도망쳐왔으니. 그러나 지옥에서 확실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여자뿐이다. 이 도시에 온 지도 수개월이 된 지금, 지옥에 남겨졌던 사람이 얼마나 생존했을지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원래도 얼마 되지 않던 사람이 제법 줄었으리라는 것만 짚일 뿐이다.

  마지막까지 같이 버티자고 했던 친구, 포성에 놀라 여자의 품에 파고들었던 아이. 급조된 저항군에서 강한 축에 들었던 오빠와, 어쩌면 여자와 마음을 주고받았던 소년 중에서도 한둘은 쓰러졌을지도

  초인종 소리에 생각이 끊어졌다. 창가에 앉아있던 여자가 문으로 향하기까지의 짧은 시간에, 문 밖에 선 사람은 목소리로 정체를 밝혔다. 나예요, 루리. 명랑한 목소리는 동거인의 것. 여자는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혼자 집에 있으면서 지루하지 않았나요?”

  “아무 일도 없어서 마음이 편하던걸요.”

  “그런가요. 지루하게 지내는 거라면 한 번쯤은 같이 나가자고 말하려고 했더니. 전에 하던 것보다 훨씬 멋진 공연을 보여줄 자신이 있거든요.”

  가방 가득 가져간 공연 도구를 정리하며 청년은 웃었다.

  “나를 또 도우미로 쓰려고?”

  하트랜드에서처럼? 고향의 이름을 꺼내며 살짝 빈정거리자 청년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당신도 슬슬 밖에 나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내가 곁에 있어줄 수 있으니까. 따라붙는 말에 여자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더 할 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여자의 미지근한 반응에 한 발짝 물러섰다. 여자가 집에 틀어박혀 있는 바람에 보지 못한 도시의 곳곳을 소개해주는 것으로 화제를 돌린 것이다. 오늘 사온, 중앙공원 쪽 가게의 초콜릿은 유명해요. 먹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다음에도 사올게요. 그리고 그 근처에는. 청년이 계속 떠들어댈 때 여자는 무너지기 전의 고향을 떠올렸다.

  미래도시란 별명이 붙었을 만큼 기술이 발전한, 아름다운 도시. 아마 이곳이 혼란이 잠기기 전 모습보다 몇 배는 더 화사했을 곳. 무엇이든 풍족했던

  “……그래서 어때요, 루리? 다음번엔 같이 가볼래요?”

  “밖으로 나갈 마음이 생긴다면요.”

  청년이 어떤 장소를 이야기했는지도 모르면서 여자는 적당히 답했다. 상황을 넘기기 위한 답변이었다. 어차피 그와 함께 거리를 걷는 날은 오지 않을 테니까. 역시 조건이 달려있네요. 그렇게 말한 청년의 얼굴에 서운함이 비친 듯도 했으나 여자는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있잖아요, 루리. 무해한 거짓말은 어느 정도까지 용서해줄 수 있나요?”

  침묵하던 여자에게 날아온 것은 어쩐지 긴장한 목소리였다. 거짓말에 대한 의견을 묻는 걸 보니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거짓말이라는 단어에 무해하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게 얼마나 될지 모르겠는걸요. 굳이 묻는 이유가 있나요?”

  “어쩌다 거짓말을 해버렸거든요. 우리 관계에 대해서.”

  아, 물론 당신에게 한 게 아니라 집주인에게 한 거예요. 어쩌다 만났는데 민망할 정도로 아는 척을 하지 뭐예요. 집을 계약할 때 우리가 같이 갔었다고 당신이랑 내가 특별한 사이인 줄 알고 있더라고요. 우리 관계를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고, 아무래도 다른 사람 앞에선 그럴듯한 이름이 있는 게 좋으니까. 구구절절 늘어놓는 말을 듣고 있으니 청년이 한 거짓말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그들 두 사람의 관계에 엉뚱한 이름을 붙인 것이리라. 청년이 가장 바라는 관계인 동시에.

  “그래서 약혼자인 체 했어요.”

  두 사람이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관계의 이름. 겨우, 얄팍한 거짓말을 털어놓았을 때 청년은 여자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묘하게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걸, 연기할 수 있다고 멋대로 생각한 것일까.

  “나한테 그걸 말해주는 이유가 있나요?”

  “혹시나 해서 이야기했을 뿐이에요. 아무래도 우리는…….”

  청년의 시선이 방황했다. 지나치게 메마른 반응에 당혹스러워진 것인지. 말을 맺지 못하는 청년 대신 대화를 종료하려던 여자는, 청년의 시선이 제 손에서 멈추는 걸 느꼈다. 정확히는, 그녀의 왼손에서였다. 반지가, 있었네요. 청년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자가 끼고 있는 반지란 하나뿐이다. 청년과 함께 도망치기 전, 아니, 청년의 동료에게 납치당하기도 전부터 낀 것. 하필 왼손 약지의 반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예전에 받은 거예요.”

  “반지의 의미를 묻진 않을게요. 그냥, 일이 쉬워졌단 생각이 들어서 얘기를 꺼낸 거예요.”

  왼손 약지에 낀 반지는 보통 약혼반지나 결혼반지로 생각하잖아요. 우연이긴 하지만 둘러댄 말이랑 잘 들어맞네요. 청년이 줄줄이 늘어놓는 말을 잠자코 듣던 여자는 말이 끝나자마자 무심하게 받아쳤다.

  “거짓말이든 연극이든, 제대로 하고 싶다면 당신도 반지를 하나 끼지 그래요. 왼손 약지에.”

  “그래도 되나요?”

  간절한 물음에 여자는 메마른 웃음을 걸치는 것으로 답했다. 사실상 빈정거림에 가까운 말에 매달리는 꼴이라니. 상대의 삶을 마구 흔들어놓고도 상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여자는 청년이 그 얄팍한 소망을 채우려 조잡한 연기를 하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여자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청년은 꽃다발을 들고 집에 들어왔다. 여자가 문을 열자마자 한껏 들뜬 얼굴로 꽃을 안겨주는 게, 연인 행세를 하고 싶은 듯했다. 이 근처에 생생한 꽃을 파는 곳이 있더라고요. 제일 예쁜 것으로 골라왔어요. 푸른 눈에 얹힌 기대를 못 본 체 하며, 여자는 꽃을 다발 그대로 화병에 꽂았다. 이 집이 조금 더 화사해지겠네요. 심드렁한 말에 청년은 고백이라도 받은 양 웃었다.

  열흘쯤 지나서는 청년이 작은 상자를 내밀었는데 열어보니 반지가 들어있었다. 중앙에 작은 보석이 박힌 반지 한 쌍 아마도 연기의 주요 소품으로 준비한 것이었으리라. 여자는 두 개의 반지 중 조금 큰 쪽을 꺼내 동거인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왼손 약지, 결혼반지를 끼는 자리에. 여자가 제 뜻을 읽고 어울려줬다는 것 때문일까. 청년은 바로 상기된 얼굴로 남은 반지를 꺼냈으나, 여자에게 끼워주지는 못했다.

  난 이 반지가 익숙해요.

  웃는 낯으로도 여자는 제법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어차피 우리한테 중요한 건 둘 다 약혼반지를 낀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니까. 굳이 꺼내지 않은 말을, 청년도 알아차린 듯했다.

  “……아마도 그쪽이, 당신의 진심일 테니까요.”

  상자를 닫으며 중얼거린 말엔 그동안 의욕적이었던 청년답지 않게, 체념마저 묻어있었다.

  물론, 여자가 반지를 거절했다고 해서 둘의 관계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청년은 계속 연기에 빠져들었고 여자는 그의 연극에 어울려주었다. 원하지 않았다 해도 이미 청년의 극에 상대 배우가 되어버린 게 여자의 현실이었다. 연고자 하나 없는 이국에 도망쳐온 이상, 저에게 유일하게 호의적인 인간인 청년을 떠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혼자라도 도망치는 걸 생각했으면 좋겠어. 과거 오빠가 건넨 말이 혼자라도 살아줬으면 좋겠어란 의미란 것을, 여자는 안다.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얼마간은 안전한 삶을 택해야 했다.

  언젠가 전쟁이 끝난다면, 여자가 홀로 뛰쳐나가도 생존할 수 있을 정도로 이곳에 익숙해진다면.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침략국에서 그녀를 잊을 정도로 시간이 흐른다면. 그때쯤이면 청년에게서도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제 삶을 망가뜨린 이의 그늘에 숨어 사는 게 아니라, 여자 혼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안고 여자는 청년의 곁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까지 미래를 약속한 연인 흉내를 내는 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청년에게 여자의 옆자리를 차지하려는 노력이 표면적으로 연기의 일부인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도 일시적으로 연기를 한다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그의 몰입이 깨지지 않을 정도로만. 그가 분에 넘치는 기대를 걸지 않을 만큼만 연기하자 여자가 스스로를 달랜 덕에 두 사람의 연극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청년의 소망대로, 여자의 생각대로 평온한 나날이 이어지던 때. 또다시 그녀의 삶에 큰 물결이 일었다. 사건은 청년이 공연에 필요한 도구를 챙겨 나간 어느 날에 일어났다. 청년의 가방이 거실에 놓인 것을 보고 그의 방으로 치워주려던 여자는, 가방을 들어 옮기다 그 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헝겊으로 만든 주머니는 제대로 여미지 않아 내용물이 비쳤는데, 문제의 물품은 하필 여자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여자는 주머니를 거꾸로 해 안에 든 것을 쏟았다. 조그마한 비닐백에 넣어둔 물건이 힘없이 그녀의 손에 떨어졌다.

  비닐백에 담긴 것은, 갈색의 가죽팔찌. 여자가 잘 아는 사람의 물건이었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단 그녀의 기대를 비웃듯, 비닐백에 물건의 원래 소유자로 추정되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팔찌를 보자마자 그녀가 떠올렸던 이름. 지인의 물건이 엉뚱하게도 청년의 손에 들어가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여자는 그 자리에서 울었다.

 

*

 

  여자의 왼손 약지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여자는 오래된 것인 양 이야기했고, 실제로도 이전부터 지녀온 액세서리로 보였다. 의미를 묻지 않았으나 여자가 그걸 왜 끼게 되었을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왼손 약지에 끼는 반지는 보통은, 미래를 약속한 상대끼리의 반지이니까. 연인, 혹은 약혼자. 의미가 깊었던 누군가와 반지를 나눠 꼈을 게 뻔하다. 청년은 여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짧은 시기, 그녀에게서 들었던 일상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녀에게는 오빠가 하나 있었고, 마음씨 고운 친구와 <오빠의 친우>가 있었으며

  그 중, 오빠가 직접 소개해주었다던 친우는 여자가 제법 마음을 준 이성이었던 것 같다. 임무 때문에 여자의 고향에서 머물던 시기의 언젠가. 청년은 거리를 걷다, 오빠의 친우가 벤치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은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하필 그 남자가 동료와 쌍둥이처럼 닮았기에, 아직도 청년의 머릿속에 그의 얼굴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살짝 가무잡잡한 피부. 회색 눈. 그리고 진중해 보이는 인상. 꼭 오래된 서사시 속 공녀를 지키는 기사 같던 남자.

  제3자인 청년이 지켜보기에도 둘은 연인이거나 그에 준하는 관계였다. 그러니 아마 그 남자가 여자에게 반지를 끼워주지 않았을까. 여자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반지를 끼우고, 상기된 얼굴로 웃지 않았을까.

  청년이 두 사람을 목격한 지 오래지 않아 전쟁이 일어났으니 아마 그 남자도 지옥에서 살아남으려 싸웠을 것이다. 아니, 싸웠다. 청년이 여자에게 털어놓지 않은 사실은 하나. 여자의 하나뿐인 형제와 마주친 적이 있다는 것. 탑에서 여자를 탈출시키기 조금 전, 청년은 이곳이 아닌 먼 나라에서 그녀의 오빠를 만났다. 그 불운한 사내는 청년이 누이의 납치에 관여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죽일 듯이 덤벼들었는데, 결국 청년을 죽이지는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 날 겨우 목숨을 건진 청년은 그녀의 오빠가 제 앞에서 흘린 이름들을 기억한다.

  누이를 비롯해, 제 곁을 떠나버린 동료의 이름을 하나둘 읊었던가. 그 속에 분명히, ‘유일무이한 친우의 이름도 있었다. 여자가 마음을 주었던 남자의 이름. 유토. 부상을 입고 바닥을 나뒹굴면서도 청년은 사내를 보며 서글퍼했다. 납치된 여자도, 그녀의 연인이었을 남자도, 동생과 친우를 전부 떠나보내야 했을 사내도. 전부 가여워졌던 탓이다. 그나마 여자는 청년이 본국으로 복귀한 후 탈출시키긴 했지만, 그녀의 오빠와 연인은 그 후로 다시 마주친 적이 없다.

  아마 여자도 연인이 맞이한 결말을 대강은 짐작하고 있으리라. 탈출하기 직전이었던가, 여자가 고향의 저항군 상황에 대해 물었을 때 청년은 답을 회피했다. 답잖은 망설임의 이유를 여자는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상황이 더욱 나빠졌고, 연인의 생존을 바라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으리란 걸. 전장에서 죽음은 발에 채도록 흔하다는 걸 여자가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반지를 빼지 않는 건 그저 희망에 매달리고 싶어서, 혹은 미련을 놓지 못해서이리라.

  그것마저 빼면 정말로, 연인의 종말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는 없다. 삶을 무덤으로 만들지 않는 이상은. 절망을 감당하면서 비극에 익숙해진 여자라면 언젠가는 연인의 일조차 조용히 받아들이게 되리라. 쓰린 불행 중 하나로, 그럼에도 짊어져야 하는 사건으로. 여자를 위해 준비한 반지를 청년이 자주 꺼내보는 것도 그런 자신이 있어서였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 보면 여자는 그와 같은 반지를 끼고,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는 배역을 더욱 몰입해 연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증거가 있는 편이 좋다. 여자가 연인의 일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할, 증거. 그 남자가 전사했다는 증거라거나 그녀의 고향에 생존자가 거의 남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자료. 혹은 그 남자의 유품. 어차피 뒤집을 수 없는 현실이라면 차라리 빨리 알게 되는 게 낫지 않은가. 여자가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도록. 저처럼 본국에서 도망쳐온 반역자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증거를 찾아보자고 마음먹고서, 청년은 공연 도구를 정리했다. 오늘의 공연은 이 도시에 온 후로 가장 반응이 좋아, 환호에 익숙한 그에게도 흡족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집으로 향하는 내내 청년의 얼굴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최근의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이 도시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것은 물론, 공연도 매번 반응이 좋았다. 날이 갈수록 관객이 불어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거기에, 함께 도망쳐온 여자도 그의 소망대로 움직여주고 있다. 제멋대로인 요구를 거부하지 않고, 그의 연기에 어느 정도 어울려주는 것이다. 이렇게만 흘러간다면. 그는 앞으로 쭉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첩자로 타인을 속이고 이국에 전쟁을 불러오며 쌓은 죄에서 벗어나,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일이 지금 이대로 진행되기만 한다면.

  집에 다다른 청년은 들뜬 마음을 안고 초인종을 눌렀다. 평소라면 곧바로 문이 열릴 터였으나 집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여자의 목소리는 물론, 현관으로 향하는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루리, 나예요. 혹시 여자가 잠든 건가 싶어 몇 번 불러보았으나 여전히 반응이 없다. 청년은 불길한 마음을 누르며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청년이 집에 들어서고도 불길한 고요는 이어졌다. 루리. 돌아왔어요.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말해줘요. 여자를 부르며 거실을 확인했지만 사람이 없었다. 여자의 방 문이 닫혀있기에 노크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루리, 괜찮아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부엌으로 향하며 청년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사고가 난 건 아니어야 할 텐데.

  부엌에서도 소득이 없었던 청년은 결국 마지막 구역으로 향해야 했다. 그의 방. 평소에는 여자가 절대 들어가지 않는 곳. 청년은 잔뜩 긴장한 채 문을 열었고.

  잡동사니 속에 주저앉은 여자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눈물이 말라붙은 자국이 선명했는데 입은 섬뜩하리만큼 꾹 닫혀있었다. 여자의 얼굴에서 청년이 읽은 감정은 슬픔이라기보다, 경멸. 그녀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감정에 청년은 식은땀을 흘렸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여자의 무언가가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무엇이? 청년이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때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할 말 없나요?”

  “몸은, 괜찮나요? 내가 없었던 사이 혹시 뭔가 일이 생겼던 거라면 얘기해줘요.”

  떨리는 목소리로 답한 청년에게 여자는 조그마한 물건을 흔들어 보였다. 무엇인지는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 입수한 후로 주머니에 넣어 다시 꺼내본 적 없는 물건. 갈색의 가죽팔찌. 여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청년은 슬그머니 팔찌를 낚아채려 했으나 여자에게 가슴팍을 떠밀리는 바람에 그대로 균형을 잃고 무너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청년에게,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가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왔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싸늘했다.

  “할 말 없어요?”

  “잠깐만요, 루리. 그건.”

  “쿠로사키 슌의 물건을 당신이 왜 가지고 있냐고!”

  찢어질 듯한 비명에 청년은 현실을 깨달았다. 여자가 결국 그가 숨기려던 사실에 접근하고 말았다는 것. 그녀와 좋은 사이를 유지하려던, 최소한 연기라도 하려던 그의 소망도 물거품이 되리란 것.

  여자가 찾아낸 팔찌는, 그녀의 오빠가 끼던 것이었다. 하나뿐인 형제의 물건을 여자가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지만, 혹 혼동했다 해도 오빠의 것이었음을 확인하고 말았으리라. 팔찌를 입수한 직후 청년은 사건 증거물을 챙기듯 비닐백에 팔찌를 넣었다. 비닐백 표면에 쿠로사키 슌, 소유자의 이름을 쓰고 밀봉해 주머니에 보관해온 게 벌써 수개월째. 오빠의 이름을 확인한 때 여자는 그 팔찌가 형제의 유품임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것도 침략군 첩자였던 이의 손에 들어간.

  어떻게 해명해도 나쁘게 읽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일을 두려워해 지금까지 여자에게 형제의 유품을 넘겨주지 않았던 것인데.

  “내 오빠한테 무슨 짓을 했어?”

  여자는 주먹을 꽉 쥔 채 물었다. 무슨 짓을, 했어? 이건 전리품이야? 이걸 가지고 있었으면서 나한테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한 거야? 쏟아지는 질문에 차마 답할 수 없어 청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진실을 이야기하기엔 시점이 너무 늦었다. 적어도 그녀에게 들키기 전 털어놓았어야 했다. 이제 와선 돌이킬 수도 없는 일.

  두 사람이 이 도시로 도망쳐오기 전, 아니, 청년이 탑을 찾아가기도 전. 사건이 일어났다. 상부의 총애를 받는 동료가 반역자를 처리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청년은 문득 <훈련받은 군대>에 맞선 겁 없는 이들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동료를 찾아가 확인하니 반역자의 정체는 이국의 저항군이었다. 어려서부터 전투기계로 교육받은 군인을 쓰러트리겠다고, 국경을 넘어 침투했다는 정예병이라, 청년이 아는 집단이었다.

  다소 순진하고, 정의로 무장했으나 몇몇을 제외하곤 다들 전쟁의 무게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대부분은 성인도 아닌 십대 청소년으로 구성되었다던, 훈련받지 않은 저항군. 청년의 기억으로는 여자의 오빠도 그에 속해있었다. 원군을 얻으러 고향을 잠시 떠났던 그 사내는, 이국의 소년들을 동료로 삼아 적진에 침투했던 것이다. 불행히도 그에겐 기적은커녕 씁쓸한 종말만 찾아왔지만.

  [혹시, 쿠로사키란 남자 없었어?]

  그 불운한 사내가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하면서도, 청년은 동료에게 확인 삼아 물었다.

  [. 루리랑 같은 성씨인 남자? 그거, 저항이 심하더라고.]

  물론 처리하긴 했지. 장난스러운 목소리엔 연민 따위 묻어있지 않았다. 여자의 얼굴이 떠올라 자리를 뜨기로 한 청년의 등에, 동료의 목소리가 박혔다.

  [혹시 그 남자한테 관심 있어? 몸뚱이를 가져갈 순 없고, 소지품 남아있는 거라도 줄까? 남겨두면 어차피 태울 거여서.]

  그 날 동료의 호의에 챙겨온 소지품은 낡아빠진 코트와, 저항군의 표식이었다는 붉은 스카프. 그리고 가죽팔찌였다. 그 중 코트와 스카프는 너무 너덜너덜해 버려야 했기에 남은 것은 팔찌뿐. 청년에겐 크게 가치가 없는 물품이었지만, 저 때문에 불행해진 남자의 것이었으므로 함부로 처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증거물을 남겨두듯 비닐백에 넣고 주머니로 한 번 더 감싸 보관해온 것이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청년은 본국에서 도망칠 계획을 세웠고, 탑에 갇힌 여자를 데리고 본국을 뛰쳐나왔다.

  그 후 여자와 함께 지내며 청년은 때로 오빠의 일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고민했다. 오빠의 죽음을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전할 수 있을까? 부고만 전하기엔 손에 들어와버린 팔찌가 신경 쓰이는데, 하나뿐인 형제의 유품을 어떻게 넘겨줘야 할까? 조금만 실수하면 여자에게 오빠를 죽였다는 의심을 받게 되는 것 아닐까? 그렇게 되면 가족까지 잃게 한 사람으로 더욱 미움받게 되지 않나? 여러 겹의 걱정 중 핵심은 사실 마지막 것이었다. 미움받게 되지 않을까. 라는 것. 어차피 그녀의 삶을 망가뜨린 인간이면서, 더 미움받게 되는 걸 두려워했다. 그래서 대충 덮어두고 살았던 것이다.

  오빠의 죽음도, 한참 전에 입수했던 망자의 유품도.

  다시 생각하니 여자가 연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있도록 하자고 계획한 것도, 얄팍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다. 수개월 전 사망을 확인한 오빠의 경우, 청년은 유품이란 명확한 증거가 있으면서도 지금껏 부고를 전한 적 없지 않은가. 연인의 죽음은 그녀를 체념하게 하려 공개하려 들었고, 오빠의 죽음은 자신을 위해 모른 체 해왔다. 지금 여자가 그를 죽일 듯 노려보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루리. 난 당신 오빠에겐 손대지 않았어요. 하늘에 맹세할 수 있어요. 마주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럼 왜 오빠 물건을 가지고 있는 건데? 당신 가방을 뒤지니 쿠로사키 슌에 대한 자료도 나오던데?”

  “그건, 아카데미아에서 조사한…….”

  “나한테는 오빠 일을 말해줬어야지! 내가 오빠를 포기하지 않았단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나는, 당신이 괴로워할까 봐…….”

  “제대로 이야기해. 매번 나를 위하는 척 유리한 말만 꺼내지 말고. 내 오빠가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해줘.”

  태생이 상냥한 사람이어서일까. 여자는 이미 저를 몇 번이나 속여온 청년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었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게 될 기회를. 그 메마른 자비에 청년은 오히려 혼란스러워졌다.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말하는 게 좋을까? 여자를 달래기 위해 당신의 오빠는 당신을 위해 날 처리하려 한 적이 있었어요라고 할까? 아니면 당신 오빠는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맞섰어요인가?

  “당신 오빠는, 쿠로사키 슌은 전사했어요, 루리. 나는 당신 오빠의 유품을 입수하고도 지금껏 숨겨왔죠.”

  그러나 청년이 꺼낼 말은 정해져 있었다. 담백한 진실. 그동안 여자에게 숨겨왔던 것. 거짓말과 위장을 쌓아온 청년이 제대로 전해야 할 것.

  “……입수한 건, 팔찌뿐?”

  “옷가지는 너무 너덜너덜해져서 버렸어요. 미안해요. 그 팔찌도, 당신에게 바로 줬어야 했던 건데.”

  “그래놓고 잘도 나한테 반지를 줬어.”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여자는 텅 빈 웃음을 걸치더니, 청년을 두고 방을 나섰다. 청년은 여자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으나, 그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도, 그녀에게 정식으로 용서를 구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청년이 주변을 치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여자의 행동만 살피던 사이, 여자는 제 방으로 몸을 숨겼다. 몇 분쯤 지나 다시 방에서 나온 여자는, 처음 이 도시에 온 날처럼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상복을 연상시키던 옷을.

  그제야 일어나서 방을 나온 청년은 여자가 베일을 썼단 걸 알아차렸다. 그녀의 발걸음이 현관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얼굴을 가렸으니 아마 곧 밖으로 나서리라는 것도. 이 도시는 여자에게 아직 낯설고, 어쩌면 위험한 곳이라는 걸 알면서도 청년은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녀가 현관문을 여는 걸 눈에 담을 수밖에.

  처음으로 혼자 집을 나서는 여자의 손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

 

  오빠는 희망이란 단어를 입에 잘 올리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난 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지칠 대로 지친 저항군 동료들이 그래도 희망이 있을 거야란 말로 서로를 달랠 때, 한 번도 말을 보태지 않았다. 오빠는 좀 비관적인 것 같아. 여자가 장난스레 이야기한 날, 오빠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줄 수 없는 걸 약속할 순 없어. 라고. 전장에서 불행은 흔했고 생존은 너무나 비쌌다. 그나마도 운이 나쁘면 쥐지도 못하는 게 미래였다. 오빠는 생존자 무리에서 강한 축에 들었지만 그라고 해서 동지들에게 미래를 줄 순 없었다. 오빠의 소극적인 태도는 체념에서 비롯했다는 걸 여자는 안다.

  여자가 마음을 준 이성이자 오빠의 친우였던 사람은 오빠와는 전혀 달랐는데,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 앞에서도 미래를 말한다는 점이 특히 그러했다. 그는 희망을 믿는 사람이었고, 미래를 그릴 줄 아는 자이기도 했다. 루리. 우리는 꼭 살아남아. 아카데미아는 하트랜드를 다 삼키지 못하고 쫓겨가게 될 거고. 우리는 여기에 다시 예전의 하트랜드를 쌓겠지. 조곤조곤 흘리는 소망은 헛된 희망이라기보다 예언으로 느껴져서, 여자는 그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쩌면 정말로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그 사람과 함께, 그런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다 언젠가, 그 사람이 복귀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침략군에 맞서는 저항군에게 늦은 밤에 들어오는 것은 드문 일도 아니어서, 처음엔 다들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고,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 그동안 그를 찾아 나선 동료들도 매번 소득 없이 돌아왔다. 그가 사라진 지 나흘째 되던 날. 오빠는 여자를 부르더니 손을 펼쳐보라고 이야기했다. 영문도 모르고 손바닥을 내밀자, 오빠는 그 위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올렸다.

  [반지?]

  [이거, 유토가 준비한 거야. 원래 네 손에 끼워주고 싶어 했는데, 나한테 우선 맡겨뒀지. 생각난 김에 주려고.]

  은빛의 반지는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았으나, 여자는 기쁜 마음으로 반지를 받았다. 누군가 자신을 생각해준다는 게, 이런 지옥 같은 곳에서조차 타인을 위해 선물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는 게 감격스러웠다. 한참이나 반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오빠가 엷은 웃음을 걸치며 물었다.

  [네 손에 끼워줄까?]

  고개를 끄덕이자, 오빠는 바로 반지를 끼워주었다. 하필 왼손 약지에. 오빠는 친우와 동생의 관계를 알았을까? 조금은 눈치챈 듯했으나 <왼손 약지의 반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진 제대로 알았던 것 같진 않다. 아마 세상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자주 반지를 끼기에 동생의 반지도 익숙한 자리에 끼워준 것뿐이리라. 그럼에도 여자는 굳이 반지의 자리를 옮기려 하진 않았다. 반지를 준 이가 그녀와 제법 깊은 관계를 유지해온 사람임을 생각하면, 딱히 틀린 자리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어. 여자는 그 날, 반지에 살짝 입을 맞추며 그 사람을 생각했다.

  소망이 통한 것일까. 다행히 그 다음날에 오빠의 친우, 그녀가 마음을 준 사람도 돌아왔다. 지친 얼굴이긴 했지만 몸에는 큰 부상이 없었다. 여자는 소중한 사람이 돌아온 것이 기뻐, 그에게 반지를 보여주는 것도 잊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여자가 납치되는 바람에, 그 앞에서 반지 이야기를 꺼낼 기회는 사실상 없어졌지만.

  그래도 여자는 반지를 쭉 지니고 있었다. 전장에서는 물론, 침략군에게 납치된 후에도, 침략국의 탑에 감금되고도, 적의 첩자였던 청년과 함께 도망치면서도. 그리고 이 도시에 와서도 언제나 반지를 끼고 있다. 소중한 사람에게 받은 선물을, 언제나 기억하기 위해서.

  청년은 여자가 낀 반지를 약혼반지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애초 그런 의미로 선물받은 반지가 아니었다. 거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반지를 준비한 것도 그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반지를 받아들던 때 여자가 갑작스러운 선물이 어디서 왔을지 조금만 더 의심했더라면, 무언가 이상하단 걸 알아차렸으리라.

  그 사람은 대체 이 지옥에서 어떻게 액세서리를 구해온 거지? 만일 전쟁 전부터 준비했던 반지라 해도, 오빠는 왜 하필 그가 사라진 시점에 반지를 내밀었을까?

  가장 그럴듯한 추측은 이렇다. 그 사람이 난민캠프로 돌아오지 못한 며칠간, 오빠는 동생이 불안과 절망에 빠질 것을 걱정했다. 하루하루 동료를 잃는 지옥에서 그가 무사히 돌아오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 마침 오빠는 국경을 자주 넘던 사람이었고, 전장에서 멀어지면 액세서리 하나쯤은 구할 수 있으니 국외에 나가 반지를 준비한 것이다. ‘그 애가 준 선물이라며 동생에게 반지를 내밀기 위해. 그것으로 동생을 안심시키고, 그 사람이 돌아올 거란 희망을 안고 있을 수 있도록.

  오빠는 희망의 무게를 버거워했지만 주변 사람의 희망을 비웃지 않던 사람이었다. 전장에서 내일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희망이란 걸 이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마 동생이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사소한 거짓말쯤 충분히 할 수 있었으리라. 마땅한 치료약이 없는 환자에게 신약이라며 위약을 내미는 것과 비슷한, 악의 없는 거짓말.

  반지를 준비한 게 오빠였으리라 추측하게 된 결정적인 근거는, 오빠가 바깥에서 물건을 구해오는 방식이었다. 전쟁 전부터 지니고 있던 귀중품을 다른 물건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오빠는 필요한 물품을 구해오곤 했다. 여자의 기억이 맞다면, 오빠가 반지를 건넨 시점부터 그가 내내 지니고 다녔던 물건이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빠에게 남은 물건 중 그나마 값어치가 있었던 시계. 시계가 왜 갑자기 보이지 않냐고 물으니 어디 흘리고 온 후론 찾지 못했단 답만 돌아왔다.

  폐허에 그런 번쩍이는 게 떨어졌다면 시간을 들여 찾지 않아도 눈에 띄었으리라. 오빠는 시계를 반지로 바꿔온 것이다. 희망의 값으로 생각하고서.

  덕분에 여자는 그 이후로도 희망을 안고 살아왔지만, 오빠는 그러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그의 삶이 끝나고 말았으니. 청년의 방에선 오빠의 유품 외에도 몇몇 <저항군>의 소지품이 나왔는데, 그만큼 저항군의 피해가 컸다면 아마 그 사람도 버티지 못했으리라. 여자가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었던 이들은 전부 그녀를 떠났다.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추억과,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남긴 물품뿐. 모두 낡은 것들이었고, 그중 그녀의 손가락에 자리한 반지는 특히나 가치가 사라진 것이었다. 그런 것을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여자는 안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서, 여자는 그동안 청년이 설명했던 마을의 지도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중앙공원, 바닷가, 창고. 큰길의 베이커리와 한 블록 뒤의 꽃집. 그리고 꽃집 근처에 위치한, 오늘의 목적지. 다행히 여자가 갈 곳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거리로 발을 떼자마자 사람들과 뒤엉켜야 했지만, 갈 길이 바쁜 이들은 낯선 사람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베일을 쓴 덕에 스쳐지나가는 사람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오랜만에 외출한 여자를 안심시켰다.

  오늘의 용무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기에, 여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바깥을 다니던 것처럼. 분수대를 지나, 중앙공원으로. 공원을 산책하다, 큰길가로. 큰길가에서 화목한 가족을 바라보다가 청년이 빵을 샀다던 베이커리로. 그리고 청년이 꽃다발을 산 꽃집으로. 꽃집에서 스무 걸음쯤 걸어 도착한 곳은 전당포였다. 물건을 맡기고 돈을 받아오는 곳. 혹은 더는 의미가 없는 물건을 처리할 수 있는 곳.

  여자는 전당포의 문을 열고 들어가, 유리 진열장 위에 반지를 올려놓았다.

 

*

 

  청년이 검은 드레스의 여인에 대해 묻고 다닌 것은 여자가 처음으로 혼자 외출하고 돌아온 바로 그 다음날의 일이었다. 여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와 청년과 저녁 식사를 함께했지만, 청년은 그녀가 밖에서 무엇을 하고 돌아왔는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숨을 돌리고 온 것뿐일까?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잠깐 그를 두고 뛰쳐나갔을 뿐일까? 그러면 왜 해가 질 무렵에야 돌아왔을까. 제대로 듣고 싶은데, 여자는 외출에 대해선 한마디도 흘리지 않았다. 청년이 캐묻는다 한들 제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을 게 뻔했다.

  때문에 청년은 그 날일어난 일을 스스로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날이 밝자마자 공연용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간 청년은 평소와는 다르게 가방을 풀지 않았다. 애초에 오늘 챙긴 짐은, 여자의 눈을 속이기 위한 위장에 불과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공연을 나가는 체 하고서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기 위한. 그녀의 행적을 확인한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위장.

청년이 첫 번째로 들른 곳은 당연히 중앙공원이었다. 도시를 돌아다닌다면서 그곳을 그냥 넘기기란 어렵다. 사람들이 많은 곳이니만큼 목격자를 찾기도 쉽다. 청년은 공원의 관리인에게 전날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들렀는지 물었다.

  “. 그런 여자가 있긴 했지. 특이한 옷차림이라, 기억해. 산책하러 온 것 같더군.”

  “어디로 가는지 보셨습니까?”

  “저기 큰길가였던가.”

  관리인이 가리키는 대로 큰길가로 향하고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청년은 한참 주변을 헤매다 꽃이라도 사서 돌아갈 생각으로 꽃집으로 향했다. 마음씨 좋은 꽃집 주인은 청년이 가게에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곤란하단 얼굴로 말했다.

  “저번에 손님이 예쁘다며 사갔던 꽃은 오늘 거의 안 남았는데 어떡하죠.”

  “어제는 장사가 잘되었던 모양이죠?”

  “어떤 아가씨가 와서 많이 샀답니다. 귀부인처럼 차려입어서 기억에 남아요. 드레스를 입었었지, 그 아가씨.”

  “혹시 검은 드레스를 입고 검은 베일을 쓰고 있지 않던가요?”

  “맞아요! 혹시 아는 분인가요?”

  “, 아는 사람이긴 한데……꽃을 그렇게나 산 이유를 아세요?”

  그러자 꽃집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실은 저도 그게 궁금했는데, 물어보니 말을 안 하더라고요. , 꽃다발도 예쁘게 만들기 힘들 정도로 꽃을 많이 사곤 말이에요. 아무래도 희한한 일이라, 나중에 전당포 아저씨 앞에서 그 아가씨 이야기를 했었죠. 손님도 이 근처에 전당포가 있는 거 아시죠? 이웃 가게다 보니 거기 주인이랑 제가 친하거든요.

  “……그런데 전당포에서, 그 아가씨를 알 것 같단 거예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가 자기 가게에도 왔었다면서! 전당포를 나갈 때 우리 가게 쪽으로 걸어가는 걸 봤다네요. 거기서 바꿔온 돈으로, 꽃을 엄청나게 산 모양이에요.”

  수다스러운 주인 덕에 제법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청년은 처음 생각한 대로 장미꽃 한 다발을 사고서, 가게를 나왔다. 다음 목적지야 정해져 있다. 꽃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도착하는 전당포. 여자가 향할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던 장소. 스무 걸음이 조금 못 되게 걸어, 청년은 목적지에 닿았다. 전당포 문을 열고 들어간 청년은 인사를 건네기 바쁘게 용건을 꺼냈다. 어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손님이 찾아왔었지요? 조급하게 꺼낸 물음에 주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맡겼던 물건을 찾으려 합니다. 어제 집에 돌아오자마자 힘들어하더군요. 소중한 물건을 바꿔오긴 싫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면서.”

  아, 저는 그 사람의 약혼자예요. 동거인이기도 하죠. 그동안 연기를 해온 탓인지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꾸며낸 말에, 주인은 여자가 맡겼다는 물건을 꺼내 유리 진열장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맞나요?”

  생각지도 못한 물건이었다. 청년이 지나치게 의식해왔던 물건. 여자가 언제나 지니고 다녔던 것. 청년과 함께 도망치기도 전부터 착용해왔을 반지. 청년이 사온 반지를 꺼내보지도 않고서 고집스레 왼손 약지에 끼던 반지가 그곳에 있었다.

  “아꼈던 물건 같긴 하던데, 아시겠지만 이런 건 값을 많이 쳐줄 수가 없지요. 그 손님한테도 상황을 설명했더니 괜찮아요. 꽃을 살 정도의 돈이면 돼요.’라더군요.”

  “……집에는 꽃을 가져오지 않았는데요.”

  “꽃을 왜 사야 하냐고 물으니, 죽은 사람한테 꽃을 주지 못했다고 말합디다. ‘관에 꽃을 넣어주고 싶었는데 그 사람이 어디 묻혔는지도 모르거든요.’라면서. 젊은 나이에 서글픈 이야기를 하기에 값을 좀 더 쳐줬어요.”

  죽음으로 여자의 삶에서 잘려나간 사람은 많았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죄 없는 이들이 수없이 쓸려나갔을 테니. 그러나 최근에 죽음을 확인하게 된 사람이라면, 짚이는 건 하나뿐이다.

  먼 곳에서 이미 한참 전에 죽어버린 사람. 적군의 손에 죽어 시신이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를 사람.

  오빠의 장례를 위해서, 그동안 소중히 보관해온 반지마저 포기한 것인가. 어쩌면 그녀에게 남은, 연인과의 유일한 연결고리일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오빠의 죽음을 확인했기에 연인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란 걸 알고 비로소 희망을 버리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전쟁이 끝나고 연인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보답받지 못할 희망을. 청년을 만난 때부터 비극으로 칠해진 그녀의 삶은, 결국 원래의 평온을 되찾을 수 없게 되었다.

  가장 사랑하던 두 사람마저 잃게 되면서.

  미지근한 죄책감을 안고서, 청년은 전당포를 나왔다.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그는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죽은 사람을 위해 꽃을 바칠 곳이라면 한 군데밖에 없지 않은가. 청년도 이 도시에 온 이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지만, 위치만은 알고 있다 제법 열심히 걸어서 도착한 장소는, ‘중심지의 외곽에 자리한 곳이었다. 사람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 곳. 그럼에도 꾸준히 사람들을 맞는 장소. 공동묘지.

  망자가 잠든 곳은 고요했다. 다만 쓸쓸하지는 않았다. 온 무덤 위에 한 송이씩 꽃이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묘비에 이름이 새겨진 무덤은 물론, 이름 없는 무덤에까지 누군가가 바친 꽃이 있었다.

  그 사람이 어디 묻혔는지도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모두에게 꽃을 바칠 수밖에. 여자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청년은 느지막한 시간에야 집에 돌아왔다. 장미꽃 다발을 화병에 꽂고서, 청년은 동거인에게 말을 건넸다. 꽃집에 들렀어요. 예전에 사왔던 꽃을 살까 했는데 어제 누가 많이 사서 거의 없다더라고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일 뿐, 꽃에 대해선 입을 떼지 않았다.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청년이 묘지에 다녀온 일을, 거기서 여자가 바치고 온 꽃을 보았단 걸 그녀 앞에서 꺼내지 않듯이.

  생각해보면, 두 사람에게 어울리는 건 딱 그 정도의 관계였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하되, 도망자라는 같은 처지로서 서로를 돕되 필요 이상으로 서로를 들여다보지 않는 사이. 애초 서로를 이해하는 두 사람이나 연인처럼 깊게 얽힌 두 남녀같은 것은 청년의 환상에 불과했다. 아마 여자와 평생 함께하더라도 청년에겐 허락되지 않을, 분에 넘치는 타이틀. 뻔한 사실을 재확인하고 나니 청년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동안 여자와의 사이에서 몇 번 발생했던 삐걱거림이 전부 제 욕심 때문이었단 걸 확실하게 인정하게 되어서였다.

  모든 배우가 원하는 배역을 맡을 순 없다. 연기력이 갖춰져 있다고 해도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 배역이 있기 마련이다. 여자의 삶에 이미 비극의 원흉으로 출연한 것이 청년이었다면, 그녀의 행복을 상징하는 인물을 연기할 수는 없다. 혹 여자가 그녀의 옆자리, 그가 탐하는 파트너 자리를 비워두고 있다 해도. 여자의 왼손 약지에는 더 이상 반지가 남아있지 않지만 청년은 그 손에 감히 자신이 준비한 반지를 끼워주지 않았다.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 순간에야말로 여자가 저를 감당하길 포기하리란 걸, 알고 있었기에.

  청년이 무리한 배역을 포기하면서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언젠가부터 여자도 때로 집을 비웠고, 그가 알지 못하는 곳을 혼자 다녀왔다. 여자가 청년이 집을 나설 때마다 행선지를 묻지 않는 것처럼 청년도 그녀에게 바깥에서의 일을 묻는 일은 없었다. 한편으로 둘은 함께 식사를 했고, 같은 공간을 썼으며, 가끔은 공통 관심사로 한참이나 이야기하기도 했다. 서로에게 어떤 기대도 요구도 얹지 않을 뿐, 둘은 동거인으로선 지극히 평범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렇기에 청년은 몇 가지, 그가 멋대로 벌인 일에 대해선 입을 다물기로 했다. 여자가 오빠의 장례비를 내느라 담보로 삼은 반지를, 청년이 돈을 내고 다시 가져왔다는 것이나, 그 반지를 조용히 보관하고 있다는 것 같은. 두 사람이 굳이 덮어둔 옛 일을 헤집을 수 있는 정보를. 그런 건 청년 혼자서 삼킬 일이었으니.

  그러나 이따금 여자가 조용히 자리를 비워 집에 혼자 남는 날이면 청년은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보곤 했다. 본래 그가 준비한 반지를 보관하던 상자에는 이제, 여자의 옛 반지가 들어가 있다. 짝을 잃고 가치도 사라진 반지를 잠깐 살피다 다시 넣고 나면 청년의 시선은 한동안 제 왼손 약지에 머무른다. 정확히는 약지에 낀 반지를 눈에 담는 것이다. 여자가 끼워준 날부터 쭉 착용하고 있는 반지, 여자의 옛 반지처럼 이제는 의미가 없는 물건을.

  왜 반지를 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원래 제 짝이었던 반지, 여자에게 끼워주고 싶었던 반지는 이미 처분했는데. 왼손 약지의 반지를 소품으로 써야 했던 연기도 포기했는데. 지나간 것을 한참이고 버리지 못했던 여자를 저도 모르게 닮아간 것인지. 아니면 얼마간 매달렸던 배역에 너무 젖어든 것인지. 알 길은 없다. 여자가 과거를 훌훌 털어버린 지금, 뒤늦게 예전의 그녀를 모방하고 있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아직 반지를 하고 있네요.

  어느 날 여자가 지나가는 듯이 말했을 때 청년은 반지를 빼는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어쩌면 이게 당신의 복수였을 수도 있겠군요. 내가 당신이 사랑했던 것을 유물로 만들었듯이, 당신도 내가 의미 없는 과거에 매달리게 만든 거예요. 생각하면서. 우리의 연기는 끝난 줄 알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인 여자에게 청년은 과거, 그의 반지를 거절하던 때의 여자처럼 웃는 낯으로 답했다.

  그냥, 습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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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