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세상은 잿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청년은 익숙한 것을 감지한다. 폐허가 된 고향에서 지독하게 느꼈던 것. 군데군데 밴 음울함과 숨이 막히는 절망, 그리고 죽음. 죽음의 급류는 이제 청년의 고향을 덮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 가져온 악이, 재앙을 깨우고 말았으므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생명이 말라붙는 미래가 청년의 눈앞에 선명히 그려진다. 세상은 명백히 죽어가고 있다. 악마가 부활하면서.
두 사람이 머물던 곳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장소. 때문에 한 번 침략자의 기지를 떠났다 다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 사이 세상의 종말이 눈앞에 놓였다는 것. 악마가 날뛰고 있을 침략자의 기지가 아닌, 차원의 통로에 가까워지기만 했는데도 암담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속도를 내야 했으나 둘은 달리지 못했다. 죽음에 먹혀가는 청년이 여자의 손에 이끌려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놓아버리면 그대로 쓰러질 듯, 청년은 여자의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역할을 바꿀까?”
숨을 헐떡이는 청년에게 여자는 물었다. 은신처를 나오면서 두 사람은 각자 어떤 역할을 맡을지 의논해 결론을 내렸지만 지금 청년의 몸은 약속한 것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그의 역할은, 유인. 세상을 악마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곳으로 악마를 끌어낸다. 청년이 시간을 끄는 동안 여자는 혼란에 빠진 세상을 안정시킬 수 있으리라.
“괜찮아. 할 수 있어.”
“그런 상태로는…….”
높은 확률로 부상을 입을 것이다. 미끼가 되어 뛰어들면서 스스로를 방어하기란 어렵다. 단단히 무장해도 공격을 완벽히 막는 것은 무리인데 지금처럼 몸을 쓰기 힘들다면 얼마나 위험할지. 차원의 틈새에서 벗어난 이상 그의 죽음이 가속화되리란 점에서도 걱정할 수밖에 없다. 세상은 아직도 그들을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자기한테 적합한 일을 해야지.”
나는 도구니까. 청년은 덧붙였다. 명령만 하면 무엇이든 이뤄낸다는 도구의 속성 외에도, 굳이 청년이 그 역할을 맡기로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악마의 힘이 그에겐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불완전한 도구로 태어난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는 모양이었다. 청년은 욕망이 거의 잘려나간, 인간으로서 결핍된 존재. 인간의 욕망을 양분 삼아 세를 키워온 악마는 그의 내면에 파고들 수 없다. 한 번도 악마를 만나본 적 없기에 한때 재앙이었던 악마에 특별히 두려움도 품지 않는다. 악마를 끌어내기엔 적합한 특성이었다. 다만 그가 언제 숨이 멎을지 모를 정도로 위태로울 뿐이었다.
“전장에서도 적을 끌어내는 건 내 몫이었거든. 레이는 좀 더 중요한 일을 맡아줬으면 좋겠어.”
“나와 한 약속, 기억하고는 있지?”
“당신의 명령을 내가 잊을 리 없잖아.”
여자는 웃음과 함께 손을 놓았다. ‘문’에 다다른 그들은, 침략자의 기지에서 처음으로 다른 길을 가야 했다. 여자는 중심부로 침투해 인간을 지휘한다. 몇 남지 않은 저항군, 악마를 두려워하는 침략자, 그리고 평범한 인간까지. 여자는 생존자의 희망이 될 것이다. 한편 청년은 악마의 미끼가 된다. 인간의 공포로 군림하려 했던 악마를 도발해 이곳에서 끌어낼 것이다. 악마가 인간의 추한 욕망에 기생해 힘을 키우지 못하도록.
“잘 가, 레이.”
손을 흔드는 청년에게, 여자는 인사 대신 당부했다.
“가능한 오래 버텨줘야 해, 슌.”
“자크와 같이 죽으란 뜻이지?”
“아니. 나도 마지막에 그곳으로 갈 거야. 모든 걸 마치고 나면 자크를 없애러 가야지. 그러니까 끝까지 붙들고 있어줬으면 해. 이기적인 말이지만.”
지금 내가 믿을 건 당신뿐이야. 여자는 매달리듯 청년의 목을 휘감고 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몸의 이상 때문인지 비정상적으로 차가운 피부가 슬펐다.
“모든 게 끝나면…….”
“당신은 세상의 희망이 될 거야.”
슬그머니 여자에게서 빠져나가며, 청년은 그녀의 말을 완성시켰다. 저에게서 돌아서 걷는 청년에게, 여자는 소리 없는 말을 꽂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끝나면, 당신을 구하러 갈 거야. 앞으로 저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일지 짐작할 수 없기에 그에게 약속하지 못한 것이었다. 여자는 청년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걷히자 품에서 무기를 꺼내보았다. 네 장의 카드. 그녀를 구원자로 만들었던, 자연의 힘.
세상이 그녀에게 안겨주었던 신성함.
악마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단으로 청년에게 내주려 했지만 그는 끝내 받아가지 않았다. 당신에게 더 필요할 거야. 그런 말과 함께 여자의 손에 올려주었을 뿐이다. 그녀라 해서 반드시 쓸 생각은 없었다. 과거 악마를 흩어버린 무기를 틀어쥔 채 누구도 세상의 뜻에 휘둘리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최악의 사태로 모든 것이 틀어져 악마를 통제할 수 없게 될 때서야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할 것이다.
이번에는 세상이 정해준 길을 걷지 않는다. 구원자의 힘을 쥐고도 그녀는 구원자의 역할을 수행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과 청년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도 세상의 요구에 휘말리게 하지 않을 것이다. 무기는 인간의 의지. 뛰어들 전사도 인간. 여자는 신성한 힘을 다시 숨기고, 저와 함께할 이들을 찾아 침략자의 기지에 들어섰다.
재앙이 된 악마 앞에서는 침략자의 힘도 모두를 현혹하던 이상도 무력하다. 이전, 청년과 함께 들어섰을 때처럼 절망에 잠긴 모습만이 여자의 눈에 새겨졌다. 사람이 쓰러진 자리마다 정체불명의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고 살아있는 이들은 대개 눈이 풀려있었다. 여자는 악마에 홀린 이들을 지나 안으로, 안으로 향했다. 곧, 익숙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악마가 나타날 지옥을 만든 자. 청년의 삶을 망가뜨리고 다수를 쓰러트리고도, 기만적인 운명을 믿는 자.
그 남자는 한때 기술 개발로 인간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었다. 이후 악마가 그 힘을 이용해 세상에 나타났다고, 자신의 연구를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자연의 힘을 빌려와 인간의 무기로 가공한 일도 있다. 한때는, 그랬다. 세상에 선택받았을 때 여자는 그 남자의 무기를 쥐고 악마 앞에 섰다 ─ 그녀가 나서지 않았다면 그 남자가 나섰을 테니, 구원자는 그의 희생을 대신한 셈이 된다.
그때 여자는 그 남자를 믿고 있었다. 그가 살아남으면 세상을 발전시킬 거라고. 그러니 그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이십여 년 전에는, 그랬다. 그때 여자가 본 그 남자는 희망이었으므로. 초월적 존재로 세상을 부유하다, 세상에서 버려진 때. 비로소 인간의 입장에서 다시 보게 된 그 남자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부분 중 변하지 않은 것이라곤 비상한 머리뿐. 인간의 미래를 열었던 영민함은 인간의 삶을 무너뜨리는 데 쓰였다. 그 바탕에 깔린 것은 사욕. 한 차원 단위, 혹은 그 이상의 사람을 동원해 단 한 사람의 소망을 이루려 한 것이다. 우스울 정도로 극적인 타락이었다.
[하트랜드에서 내가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건 말이야, 아카데미아가 가져온 재앙이 너무 장난 같다는 거였어.]
전쟁에 대해 털어놓을 때, 청년이 덤덤하게 흘린 말을 여자는 기억한다.
[갑자기 괴물이 거리를 메우고 건물이 무너지는데, 누가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겠어. 그런데 내 옆에 있던 사람이 비명과 함께 카드로 떨어지는 거야. 현실감이 없지. 말도 안 되는 재앙이어서.]
[하지만 거기서 도망칠 수는 없고.]
[우리는 언제나 비현실에 쫓기고 있었어. 카드 속 몬스터가 세상을 짓밟고 사람의 영혼을 카드에 봉인하는 나날에.]
그 처참한 삶을 만든 것이 그 남자의 사욕이었다. 여자는 자신이 구해낸 ‘미래’에 책임을 느낀다. 그 남자가 내세운 명분이 자신의 부활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구원자의 분신이 네 갈래로 나뉜 차원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구원자의 부활을 꾀했다. 어린 학생으로 군대를 구축한 것이 시작이었다. 곧 그의 전사들은 ‘제물’을 찾아 이차원을 침략하고 죄 없는 이들 다수를 쓰러트렸으며 남은 이들의 삶도 폐허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 이차원에 무리하게 간섭한 결과, 차원간의 경계도 흐릿해졌다. 세계가 요동치는 혼란까지. 악마가 나타나기에 최적의 환경을 마련한 셈이다.
그토록 증오하던 악마는 이제 그 남자의 도움으로 부활했다. 어쩌면 악마의 부활도, 구원자를 되살려야 한다는 욕심의 명분으로 삼을지도 모른다. 청년이 말해준 그 남자는, 지독하게 비겁한 인간이었으므로. 이십여 년이 지나 세상에 돌아온 구원자는 이제 타락한 희망을 만난다. 그는 그녀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욕망 가득한 눈길로? 아니면 순진한 감정을 담아? 그녀를 붙잡고 무엇부터 이야기할까. 당신이 필요했다고 매달릴까, 그리움을 호소할까.
어느 쪽이건 반갑지 않아서 유감스러웠다. 이십여 년은 신에겐 스쳐가는 시간이지만 인간에겐 너무도 길었다. 기억 속 그 남자는 이제 여자가 감당할 수 없는 모습으로 바뀌어 있으리라. 그럼에도 그를 만나야 하는 것은, 침략자의 수장이 그였기 때문이다. 여자는 그를 되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막기 위해서 그에게로 향한다. 더는 악마의 폭주에 기여하지 못하도록, 더 많은 이들을 희생시키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여자는 쓰러진 이들을 넘어, 산산이 흩어진 파편을 밟으며 모든 것의 시작이 된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가 아직도 헛된 욕망에 휘둘리고 있다면 그녀가 떨어진 장치 근처에 있을 것이다. 구원자가 돌아오리라 믿고, 어쩌면 계속 장치를 가동시키며. 안으로, 안으로 들어서다 여자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커튼에 몸을 숨긴 누군가가 감시하듯 복도를 살피다 그녀의 시선을 느끼곤 바로 도망쳤다. 한순간 잡힌 뒷모습은, 이전에 적진에서 마주친 소년의 것. 여자는 소년을 쫓았고 이내 화려한 방으로 뛰어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두 남자가 보였다. 하나는 청년 또래의 사내. 다른 하나는 제법 나이가 든 남자. 소년은 젊은 사내에게로 향해 그 옷자락을 쥐었다. 다음은 겁에 질리기라도 했는지 잔뜩 경직된 얼굴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레이가, 돌아왔어.”
흩어질 듯 작은 목소리였으나 두 남자는 바로 반응했다. 그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문으로 향했고, 소년을 따라 들어오는 여자를 담았다.
여자는 모두의 시선이 저에게로 향하는 것을 느낀다. 청년 또래의 사내는 낯설었지만 그 옆의 남자는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침략자의 제복을 입은 자. 그녀가 찾던 사람. 남자의 회색 눈이 오래도록 여자를 담았다. 너무 놀란 탓인지, 열린 입술에선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여자는 천천히 걸어, 남자에게로 가까워진다. 이제는 사랑했던 기억이 더 희미할 정도로, 과거가 되어버린 자.
이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여자는 생각을 쥐어짜내, 겨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아버지.”
* * *
“그쪽이, 레이?”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젊은 사내 쪽이었다. 소년을 감싸며, 경계 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그럼 내게는 누이가 되겠군. 거기서 여자는 사내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은신처를 떠나기 전, 청년은 여자에게 저항군에 속한 이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침략자에 맞서려 결성한 정예병이니 세상의 위기를 막는 데도 힘을 보태줄 것이라고. 학생이라는 몇 명의 이름은 선명하지 않았지만 리더의 이름은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저와 같은 성씨를 가졌기 때문에.
[리더는 프로페서, 아카바 레오의 아들이지.]
[이름이?]
“아카바 레이지?”
시험 삼아 리더의 이름을 흘리자, 사내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라에게서 듣긴 했지만, 솔직히 믿기진 않았어. 레이가 평범한 인간으로 부활했다는 것과…….”
“그리고?”
“쿠로사키와 함께 있었다는 것. 그는 갑자기 랜서즈에서 이탈했다. 말도 없이 사라졌기에 아카데미아에게 당했을 가능성까지 생각했지만.”
“그 자는 나를 구했어. 아카데미아가 위험한 곳이라 판단하고, 나와 함께 빠져나갔지.”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좋아. 당신이 아카데미아로 돌아온 건 뭔가 목적이 있어서겠지?”
당신이라면, 이 상황을 깰 수 있겠지? 사내는 그렇게 묻는 듯했다. 여자는 처음 만난 동생의 눈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불신, 두려움, 그리고 약간의 기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지만 열여섯 도련님에게 완벽한 수가 있었을 리 없다. 여기까지 오면서, 세상의 악의를 겪으며, 전사를 잃으며 그도 제법 지쳤으리라. 실패를 맛보고 절망에 눌려 기적이 찾아들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청년이 처음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물론. 내가 할 일을 하러 돌아온 거야.”
“너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단다, 레이.”
그때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는 은근하게 속삭였다.
“랜서즈가 싸우는 동안 너는 여기 있으면 돼. 너를 다시 잃고 싶지 않아.”
“그럼 세계파멸을 관람할 사람 하나 살리겠다고 그렇게 많은 이들을 희생시키셨군요.”
답은 바란 것보다도 훨씬 건조하게 흘러나왔다. 냉소가 깔린 말에도 아비는 계속 떠들어댄다. 그녀의 가치를, 소모되어선 안 될 이유를.
“너는 인간의 희망이야. 자크에게 내던질 수 없지. 우리 모두가 마지막까지 너를 쥐고 있어야 해. 그러니 우선은 랜서즈로 자크를 막고, 최악의 경우엔…….”
“나의 생존에 타인의 목숨을, 많은 이들의 미래를 투자할 가치가 있나요?”
“뭘 신경 쓰는지 알겠구나. 하지만 히이라기 유즈, 세레나, 린, 그리고 쿠로사키 루리. 네 명은 네 분신이었어. 어차피 네가 없었다면 태어나지도 못했지.”
“넷만 희생시킨 게 아닐 텐데요.”
“빚을 돌려받은 것이라 생각해. 이 세계의 사람 모두, 네가 아니면 살 수도 없었잖아.”
“나는 누구도 자크에게 더 희생당하길 바라지 않아서 나섰던 거예요. 그런데 내가 타인의 목숨으로 살길 바랐겠어요?”
“잘 생각하렴, 레이. 최악의 경우엔 수명이 다한 4개의 차원을 두고 새로운 차원으로 갈 수 있어. 인간의 악과 어둠을 자크와 함께 덮어버리는 거야. 너는 거기서 새로 희망을 만들면 돼.”
자기최면과 기만으로 수많은 이를 파멸시켜서인지, 이제 아비는 얼굴에조차 비굴함을 걸치고 있었다. 아비가 토해내는 모든 것이 애원에 가까웠으나 유감스럽게도 여자에겐 아비를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움도 분노도, 심지어 배반감조차도. 과거엔 그렇게 의미가 큰 사람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타인보다 못했다. 앞으로 무언가 피어난다 해도 진득한 경멸밖에는 없을 것이다.
“내가 아크파이브에 뛰어드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아카데미아로 꾸미는 일을 전부 멈춰요.”
따라서 여자의 답은 명확하다. 광인의 망집 따위 더 들을 가치도 없었다. 소년이 그녀를 환상 속 신으로만 대했듯, 아버지는 자신의 망상 속에 그녀를 가둬두고 있었다. 그 속에서 여자는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성녀일 뿐, 인간의 악의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비에게서 돌아선 여자는 인간의 입장에서 싸워줄 사람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다. 그녀의 시선은 사내에게로 향했다. 같은 색채의 눈이 서로를 비추었다.
“레이지. 랜서즈의 리더라 들었는데. 지금 네가 움직일 수 있는 건 몇 명이지?”
“서너 명 정도. 쿠로사키는? 그 자도 당신을 따라왔나?”
“왔지만, 랜서즈와는 따로 움직여야 해. 내 명령을 따르기로 했거든. 그러니 너는 네 전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명령이라면.”
“슌은 자크를 여기서 끌어낼 거야. 이곳에 있으면 자크는 점점 힘을 키우게 될 테니까. 그가 사람이 없는 곳까지 자크를 유인하도록, 방어막을 쳐줘. 대단한 건 아냐. ‘싸움’을 아카데미아에서 이어가지 못하게 자크를 적당히 공격하기만 해.”
“……의미는 알겠지만.”
위험하군. 사내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미 악마의 부활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자신의 전사들에게 닥칠 피해를 생각한 것이리라. 여자는 그의 긴장을 풀어주려, 부드럽게 달랬다.
“괜찮아. 이건 어디까지나 슌을 보조하기 위한 것. 네 전사들은 방해꾼 역만 하면 충분해.”
“쿠로사키를 믿는 모양이야. 그가 당신을 구했기 때문인가?”
“지켜봐왔다면 알 텐데. 명령한 건 어떻게든 수행한다는 걸.”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힘을 합치자는 거야. 덧붙인 말에 사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성공하면?”
“고립된 자크를 처리해야지.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장소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누구도 위험에 빠트리지 않고 자크를 쓰러트리는 것.”
“하나 이해되지 않는 게 있는데, 왜 한 번에 처리하지 않는 거지? 레이라는 쿠로사키가 옛날 당신이 썼던 카드를 챙겨갔다고 말했어. 아마 지금은 당신의 손에 있겠지. 확실하게 자크를 물리칠 방법을, 굳이 피하는 이유가 있나?”
사내로선 충분히 의문을 품을 수 있을 부분이었다. 침략자를 아비로 둔 그는, 정예병을 이끌고 아비에게 다다르면서 세계의 진실을 깨달았으리라. 하나였던 세상이 왜 네 갈래로 분열되었는지. 파멸 직전의 세상이 어떻게 평화를 찾았는지. 이미 답을 얻었을 것이다. 구원의 힘을 쥔 여자를 만난 때, 이미 알고 있던 답을 떠올린 것도 놀랍지 않다. 인간으로서 줄곧 한계를 느꼈을 사내는 신성한 힘이란 기적을 믿고 싶을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다시 그 카드를 사용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냐. ‘왜’ 새로운 시도를 하는지 듣고 싶을 뿐.”
“확실한 방법이 아니니까.”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여자가 쥔 무기는 불완전했다. 악마가 부활한 것이 그 증거. 함께할 사람이니, 선택의 이유도 분명히 납득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여자는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크는 ‘해결되지’ 않았어. 완전히 부숴버릴 수 있었다면 지금의 혼란도 없었겠지. 그때 내가 사용한 네 장의 카드로는 자크를 흩어놓는 게 전부. 그래서야 혼란과 얼마간의 평화가 반복될 뿐이야.”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없애겠다는 건가.”
“자크가 어디서 힘을 얻는지, 무엇에 기생하는지 알면 가능한 일이지.”
“인간의 욕망……하지만 욕망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존재하나?”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은 인간이라면 가능해. 도구로 만들어진 자.”
청년에게서 결핍된 것은 자기중심성. 인간으로서 태어날 수 없었던 이가 인간의 모습을 덮어써서인지, 혹은 세상이 편리하게 쓰려고 조작을 가한 것인지 그는 ‘그 자신’이 잘려나가 있었다. 스스로는 무엇도 욕망하지 못하면서 타자에게 헌신하는 것을 삶의 가치처럼 삼는다. 도구나 다름없는 인간에게서 악마는 무엇도 얻어낼 수 없다. 인간의 욕망에 기생한 악마는 욕망이 없는 자에겐 무력하다.
“왜 내가 슌에게 자크를 유인하라 했겠어?”
“확실히 그는 인간 같지가 않았지.”
“그럼, 부탁할게.”
“당신은?”
“아카데미아는 자크가 부활할 환경을 만들었어. 내 부활을 들먹이며 벌인 일들은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고. 지금이라도 아카데미아가 하는 걸 전부 멈춰야 해. 그래야 누구도 희생되지 않아.”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여자는 사내와의 대화 내내 시선조차 주지 않던 아비를 돌아보았다. 악의 근원이 된 남자에게서 여자는 우습게도 두려움을 읽는다. 수많은 인간의 자의를 묵살하고 미래를 위한 거름으로 쓴 주제에, 그는 딸에게 거부당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가족으로서의 정 따위 남아있지 않았으나, 여자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비의 감정이라도 이용하기로 한다.
“아카데미아가 하는 일을 멈추러 갈 테니, 동행해요.”
프로페서의 말이라면 들을 테니까요. 호의라곤 한 움큼도 없는 말에 희망을 느낀 것일까. 아비는 바로,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내가 전부 그만두면, 나를 미워하지 않을 거니?”
“더 끔찍해지진 않겠지요.”
“아크파이브부터 멈추면 될 거야.”
그렇게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사내는 저에게 매달린 소년과 함께, 여자는 아비와 함께 방을 나섰다. 속으로 무엇을 바라고 있든, 적어도 그 순간 넷의 목적은 동일했다. 눈앞의 재앙을 막는 것으로. 무너진 벽 너머 바깥에, 언뜻 이지러지는 하늘이 보였다. 세상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
2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일렁인다. 흐릿한 형체로 간신히 정체를 짐작하기는 하나, 그뿐. 사물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일조차 지금의 청년에겐 버겁다. 세상의 균열을 청년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혀오는 한편 감각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다가오는 죽음만으로 힘든 그에겐 가혹한 일이었다. 이런 순간에까지, 세상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종말을 맞을지 모른단 위기감에 오히려 더 그를 옥죄는 것 같기도 했다. ‘반역’을 그치게 하려고. 여자가, 혹은 다른 누구라도 예정된 구원을 실행하게 만들려고.
그럼에도 청년은 한 발짝, 한 발짝, 억지로 걸음을 뗐다. 여자가 명령을 거두지 않는 이상 그는 그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으므로. 잔뜩 이지러진 형체와 메아리처럼 쟁쟁 울리는 목소리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라 악몽에 선 것처럼 혼란스럽다. 쉬지 않고 걷긴 해도 그 자신도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혹 길을 잘못 들었다 해도, 끝은 있다. 인간의 공포가 되고 싶어 한 악마는 인간 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으니. 악마는 가능한 많은 사람을 삼키려 들 것이고, 그들의 두려움을 갑주처럼 두를 것이다. 비명이 들리는 장소로 향하면 악마와 마주치게 되리라. 과연, 어느 순간부터 찢어질 듯한 비명이 그의 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얼마나 걸었을까. 청년은 마침내 재앙과 마주했다.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시각으로도 ‘그것’의 모습이 괴물에 가깝다는 것은 인지할 수 있었다. 인간의 몸을 기생체가 뚫고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기괴한 형태를 띠고 있었으므로. 등에는 날개가 돋고 몸의 윤곽은 울퉁불퉁한데, 표정을 알아보기 힘든 얼굴에서 눈만 섬뜩하리만큼 번득였다. 이질적인 색채의 눈동자는 인간이라기보다 짐승의 것 같았다. 인간에서 출발한 악마는 공포에 휩싸인 나머지 괴물이 되었다. 기묘한 현실에 청년은 웃었다.
악마가 날뛸 때마다 그 공격에 사람이 나가떨어진다. 제복을 입은 군사나 평범한 주민이나, 공평한 결말이었다. 덤벼들면 악마의 수에 걸려들고, 공포에 짓눌려 뒷걸음질 치면 악마가 그것을 양분 삼아 힘을 키운다. 끊어줄 사람이 없을 것만 같은 끔찍한 상황에, 청년은 끼어들기로 했다. 처음 만난 상대니, 우선 인사부터 건네는 게 좋을 것이다.
“오랜만이야, 유토.”
청년이 흘린 것은 엉뚱한 호칭이었다. 악마의 이름을 뻔히 알고도 그는 친우의 이름을 꺼낸다. 다분히 고의적인 오류에, 날카로운 공격이 뺨을 스쳤다. 동요하는 것이라면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내게서 ‘유토’를 찾겠다?」
노이즈가 섞인 목소리에 은근한 불쾌가 배어있었다. 한갓 인간의 ‘오해’가 악마로선 달가울 리 없다.
“지금 앞이 잘 안 보이긴 해도 내가 유일무이한 친우를 못 알아볼 리 없지.”
「진작 흡수된 조각을 찾는다니 참 멍청한 놈이로군.」
“아, 그럼 사카키 유우야였던가? 유토가 그 몸에 깃들긴 했지.”
「사카키 유우야건 유토건, 처음부터 내 분신일 뿐. 내 이름은.」
“유고? 시티에서 마주친 놈이 그런 이름이었어. 다들 참 비슷하게 생겼단 말이야. 쌍둥이처럼.”
악마의 발톱에 몸이 꿰뚫리기 직전 청년은 아슬아슬하게 기계 새에 올라탔다. 전장에서 그의 무기였던 기계 새는 주인을 태우고 훌쩍 날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기에 동작을 빠르게 감지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조금만 늦었다면 치명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 그런 상황에서도 청년은 얕은 도발이 먹혔음에 만족했다. 역시, 악마는 저를 과시하고 싶어 한다. 스스로 선택한 이름, ‘패왕룡 자크’로 불리지 않는 것에 저렇게나 분노하는 것이 증거.
두려움에 먹혀야 할 인간이, 진즉 집어삼킨 분신을 들먹이며 자신을 농락하고 있다. 한때 세상을 위협했던 악마에겐 견디기 힘든 불손함이리라. 공중으로 몸을 피한 청년은 한 번 더, 악마를 자극하기로 한다. 모두를 보호하기 위하여, 악마가 자신만을 노리게 하기 위해서.
「내 이름을 분명히 알아두는 게 좋을 거다. 패왕룡 자크, 인간의 욕망이 불러낸 악마다. 사카키 유우야, 유토, 유고, 유리. 너희가 찾는 것들은 전부 내 분신. 세상을 삼키기 위한 제물일 뿐이야.」
“세상을 위협한다는 악마가 이렇게나 우스꽝스러운 꼴일 줄은. 어린애 상상도 이 정도는 아니겠군.”
이번에도 악마는 반응했다. 귀가 멎을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몸이 홱홱 흔들렸다. 기계 새가 주인을 지키려 공중에서 급회전하기 때문일 터다. 공격이 거듭 날아드는 건 느끼지만, 망가진 몸으로는 전장에서처럼 민감하게 반응하기란 어렵다. 멀미하듯 흔들리는 세상에서 그는 제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미끼. 적을 유인하는 것. 그 과정에 숨이 끊어질 것도 각오해야 할 역할.
전장에서도 청년은 미끼를 자처했다. 포식자의 오만에 취한 침략자를, 전공을 세우고 싶어 안달이 난 전사들을 유인하기란 쉬웠다. 얼마든 목을 물 수 있을 먹잇감을 가장해 그는 여럿을 꼬여냈다. 막다른 곳으로, 뼈대만 남은 건물로 적을 달고 오면 거기서부터는 ‘제대로’ 싸우는 일만이 남는다. 일대 다 특화의 무기를 사용했기에 결말은 언제나 적을 섬멸하는 것이었으나, 청년은 패하더라도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동료에게서 위험을 떼어낼 수 있었으니까. 운이 좋으면 적에게 부상까지도 입힐 수 있으니까. 그의 삶은 끝나도, 적어도 모두의 종말은 늦출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싸워야 하는 현실을, 친우는 괴로워했다. 누구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 전장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의 상냥함을 요약하는 것이었다. 친우만큼 상냥하지 못한 청년의 소망은, 보다 평범했다. 더는 잃고 싶지 않아. 우리편이 아닌 이들을 상처 입혀도 자신을 소모해도 좋으니, 상실을 겪고 싶지 않았다. 주변인이 망가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제가 끌어안고 침몰하면 차라리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청년은 가장 소중한 존재인 동생과 친우에게 울타리가 되어야 했다. 그들이 망가지지 않도록 제 삶을 바쳐야 했다. 자신의 부족함과 세상의 저주로 결국 보호해주지 못했지만, 둘의 뜻이 꺾이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청년은 악마를 상대하는 체 또 다른 무기를 꺼냈다. 전장에서 동지를 지켜주었던 그의 새가, 주인을 보호하듯 주변을 맴돌았다.
“더 공격해야지.”
악마의 이름이 아깝잖아? 심술궂은 말은 효과가 있었다. 몸이 크게 흔들리나 싶더니 청년은 추락하고 있었다. 그를 보호하던 기계 새가 악마의 공격에 부서진 것이다. 그 직전 불러낸 새가 다시 청년을 태웠다. 청년은 악마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악마의 먹잇감이 될 뻔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몸을 피하는데도 악마의 공격은 청년에게만 날아든다. 악마는 명백히, 그를 노리고 있다.
“그 정도로는 세상을 삼킬 수 없어.”
숨을 헐떡이면서도, 청년은 도발을 멈추지 않는다.
“애초에 악마 같은 것, 유토에게 어울리지도 않았지만.”
다음 순간 청년은 피를 뱉어내야 했다. 악마의 공격이 처음으로 정통으로 날아든 탓이었다. 아찔함에 휘청거릴 때 청년은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저항군의 이름으로 함께했던 이들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외부에서 포섭한 것으로 보이는 몇 명을 포함해, 열 명 남짓의 지원군이 당도했다.
여자의 계획이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구상에는 청년이 악마를 안전한 곳으로 끌어낼 수 있도록, 악마를 방해한다는 계획이 있었으므로. 청년을 타깃으로 인식시켰으니, 악마는 방해를 피해 청년이 도망치는 곳으로 쫓아오게 되리라. 저항군 동료들은 저 아래서 각기 무기를 꺼내 전투태세를 취했다. 한 사람씩 덤벼들면 바로 압도해버릴 수 있어도,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공격해오는 것은 악마에게도 제법 성가신 일이 될 터였다.
「벌레떼 같긴.」
공격을 쳐내고 쳐내도 완전히 끊어낼 수는 없다. 그 바람에 타깃에게 집중하기도 힘들다 ─ 악마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청년은 웃음을 머금었다. 인간의 저항은 악마를 피로하게 만들고, 함정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나를 노리는 줄 알았는데.”
「네놈의 숨은 끊어줄 테니 기다리라고.」
“그럴 것 없어. 더 어울릴 생각 없으니까. 악마를 자칭하기에 기대했더니 실망스럽군.”
청년은 악마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덕분에 세상은 무사하겠어. 기계 새에 올라탄 채로 청년은 자리를 뜬다. 그대로 악마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다. 악마의 위협 따위 관심사가 아닌 양, 한 번 돌아보는 일 없이. 악마를 등지면서 청년은 숨을 세었다. 한 번, 두 번. 청년은 저에게 진득하게 달라붙는 악마의 시선을 느꼈다. 세 번, 네 번. 악마가 단숨에 거리를 좁히는 것도 느꼈다. 그렇게, 다섯 번.
청년의 목적이 달성되는 데는 다섯 번의 숨으로 충분했다. 악마가 불러낸 몬스터가 허공에서 그를 가로막았다.
“관심을 가져줘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내 앞에 뛰어들고서, 도망치겠다고?」
“아쉬운 모양이야. ‘진짜’ 힘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방해꾼만 없었다면 인간 하나쯤이야, 단숨에.」
“좋아. 그럼 방해꾼이 없는 곳에서 보자고.”
네가 내세우는 힘이 허세인지 진짜인지. 청년의 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기계 새는 악마의 무기를 피해 높이 날아올랐다. 목적지는 차원의 끝. 그는 반드시 악마를 이곳에서 끌어낼 것이다.
* * *
관제실의 스크린에는 기지의 전도가 큼직하게 펼쳐져 있었다. 침략군을 키워내는 교육시설, ‘반역자’의 종착점인 감옥, 끔찍한 연구를 거듭해온 연구실까지. 침략자가 쌓아온 모든 것이 화면에 담긴다. 수장은 평소 이곳에서 기지의 구석구석을 감시하며 자신이 이뤄낸 성과에 만족했으리라. 질서에 의문을 품는 자는 수감하고, 이용가치가 있는 아이는 교묘한 세뇌를 통해 침략자로 키워낸다. 곳곳에서 선별한 연구원은 이상세계를 만든다는 말로 현혹해 수많은 희생자를 낳을 실험에 동원한다. 이 괴물 같은 기지는 그렇게 악을 퍼트려왔다.
아비를 이끌고 기지를 다니며 여자는 몇 번이나 구역감을 눌러야 했다. 청년에게서 들은 것만으로도 이미 끔찍했으나, 실제로 악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를 확인하니 너무도 혐오스러웠던 탓이다. 괴물 같은 악을 키워냈던 아비가 제 눈치를 보며 여러 계획을 슬금슬금 중단하는 것은 허망하기까지 했다. 하나 위안이 되는 건 세상의 위기를 계기로, 이곳의 상황이 더 나빠지지는 않으리라는 점. 악마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정리된다. 연구는 중단되고 군사는 흩어지며 간부들은 그간의 죄를 짊어지게 될 것이다.
“자크의 위치는 여기. 다른 차원에의 통로야.”
아비는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도의 가장자리에 점으로 표시되는 것이 두 개 있었다. 현재 그 위치에 있는 사람이 둘이라는 뜻. 소환 에너지로 출신지를 감지할 수 있지. 이건 네 개의 차원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아. 아비의 설명을 듣는 내내 여자의 시선은 아비가 손가락으로 짚는 점이 아닌 그 옆의 것에 꽂혀있었다. 불안스레 깜빡이는 점. 어쩌면 청년의 신호일지도 모를 것.
“그러니 아크 제로, 이전 차원에서 왔다는 거지. 거기에 들어맞는 것은 자크뿐.”
“슌이 제대로 움직여준 모양이네요.”
“나머지 하나는 엑시즈의 사람이니, 맞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 남자를 제법 아끼는 것 같은데, 네게 무슨 의미라도?”
“불필요한 질문엔 답하지 않아요. 지금 중요한 건 자크를 여기, 융합차원에서 끌어내는 것이니까.”
냉정한 답은 스스로의 불안을 잘라내려는 것이기도 했다. 여자는 청년의 죽음이 너무 가까이 왔음을 안다. 세상은 순간순간 그의 목을 조르고 인간은 그를 도운 적이 거의 없었다. 삶이 짓이겨진 청년은 이제 혼자서 악마를 감당하고 있다. 그가 언제까지 버텨줄지 모르기에, 여자는 계획대로 풀리는 상황에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청년이 미끼가 되어 악마를 끌어내는 중에 세상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 세상의 뜻에 거역하는 일이니 실패할 확률을 무시할 수 없고, 성공하더라도 청년을 제때 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음울한 미래는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는 반면 완벽한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여자는 청년에게서 의도적으로 관심을 떼려 하고 있었다. 그의 믿음을 실현한다는 생각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저에게는 물론 청년에게도 도움이 되리라고 여자는 믿었다. 옅은 불안을 떨친 여자는 통제장치로 향했다. 아비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말했으나, 완전히 믿을 수 없으니 제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별 의미 없는 사람이라면 그 자, 그냥 묻어버려도 되겠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차원의 틈새를 막아버리는 건 어때.”
그렇게 마음을 쓰지 않으려 노력하는 여자에게 아비는 자꾸만 청년의 이야기를 꺼낸다. 의도가 수상쩍었으나 여자는 적당히 받아친다.
“내 선택을 믿지 못하시는군요. 사람 하나를 포기하려고 하는 걸 보니.”
“안전장치를 두자는 거야. 어차피 죽을 사람이니까.”
막 장치를 조작하려던 손이 멎었다. 아비는 처음으로 여자를 흔들고 있었다. 굳은 얼굴로 돌아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운을 뗐다.
“리바이벌 제로에 대해 설명할 때 엑시즈의 사람들을 왜 카드화했느냐고 물었지, 레이. 생명에너지를 얻기 위해서였어.”
“역시 타인의 생명을 끌어 쓰려 했군요.”
“지금 너는 이렇게 기적처럼 부활했지만, 원래 네 부활의 재료로 생각했던 건 상당량의 생명에너지였다. 아크파이브를 가동 중지했으니 엑시즈의 사람들은 곧 카드화가 풀리며 생명에너지를 돌려받게 될 거야. 하지만 그 남자는 얘기가 달라.”
“……슌에게서 무엇을 보았죠?”
“생명에너지가 거의 잡히지 않아. 살아 숨 쉬는 게 기적일 정도지. 모르지 않았을 텐데.”
뺨에 키스했을 때, 무서우리만큼 서늘했던 청년의 피부가 떠올랐다. 숨을 헐떡이는 모습도, 빛을 잃은 금빛 눈도 여자의 눈앞에 그려진다. 여자는 그 모든 것이 슬펐다. 청년이 그 모든 것을 당연한 저주인 양 받아들여서 더욱. 아비는 여자의 감정을 조금은 읽어냈으리라. 여자가 청년의 안위를 확인할 때, 타자 앞에서 그를 감싸고 들 때. 그리고 조금 전 청년의 이야기에 어쩔 수 없이 동요했을 때. 그 순간순간 그녀는 분명히, 그를 위해 슬퍼하고 있었으니까.
“시간이 없으니 본론을 말해요.”
“그 남자를 구하고 싶어?”
예상대로의 질문이었다. 여자는 아비의 말에 숨겨진 목적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것은 협상이다. 아비는 청년을 내세워, 그녀의 미래를 또다시 쥐려 드는 것이다. 그를 구해내는 것으로 딸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자신하며.
“그렇다고 답한다면 숨은 붙여놓을 수 있어. 이 오염된 차원에선 무리겠지만, 그래, 너를 위해 쌓은 새로운 차원에서라면 버틸 수 있겠지.”
“구하고 싶어요.”
“그럼 명령을 내려. 그 자는 네 말만은 따르는 것 같으니, 자크를 두고 돌아오라고 하는 거야. 그 다음엔 차원의 틈새를 닫아버리고 그를 내게 맡겨서…….”
“아니요. 그를 구하는 건 나예요. ‘내가’ 구하고 싶다고 말한 거예요.”
“어떻게?”
“아버지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방식으로요.”
여자는 청년의 운명을 끊을 것이다. 세상의 주박으로부터 풀려나, 더는 망가지지 않도록. 지금 그녀가 세상의 기대로부터 벗어나는 길만 택하는 것은 세상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고, 운명에 속지 않으려는 발버둥이었다. 타인에게 운명을 강요하는 사람이, 운명에의 반역을 이해할 리 없다. ‘반역자’의 처절함도 마찬가지. 과연 아비는 한 번 더 여자를 흔들 생각인 듯, 암담한 예언을 꺼낼 뿐이다.
“지금 부르지 않으면, 그 남자는 여기 돌아올 수 없어. 정해진 수명이 다해 죽게 될 거야. 안됐지만, 그게 운명인 거지.”
“내 분신이었던 네 명에게도 그렇게 말했었나요? 여기서 갈려나가는 게 운명이라고?”
“틀렸던가?”
“하긴, 그런 사람이었지요.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서 내가 ‘그때의’ 생각 그대로 돌아왔거나,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나서서 자크를 막았다 해도, 그 덕분에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었다 해도 난 언젠간 아버지에게 질리게 되었을 거예요.”
“네 생각을 알 수 없구나. 대체 뭘 바라는 거니? 자크를 세상에서 격리시키기만 하면 만족할 줄 알았고, 네가 아끼는 그 남자를 살려주면 기뻐할 줄 알았어. 하지만 아니구나.”
아비의 소망 속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그저 숭고한 성녀일까. 가족에 정이 깊은 소녀일까. 그것도 아니면 마음대로 사랑할 수 있는 딸이었을까. 여자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어떤 형상이건 제 모습이 아니리라는 것만 알았다. 인간이 기대하는 타인의 상이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이다. 가족이라 해도 다를 것 없다. 심지어 그 타인이 한동안 부재한 사람이라면. 여자는 아비가 기억하는 자신이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 흐릿해졌으리라 느끼지만, 연민은 없다. 이해도 따르지 않는다. 아비의 주장은 너무도 이기적이었으므로. 그가 그리는 딸에, 눈앞의 딸은 한 움큼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네 뜻을 이뤄주고 싶어. 변덕이라도 좋으니 말해보렴.”
“내 뜻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분명해요.”
여자는 장치를 조작하면서 말했다. 아비는 모든 것을 틀어쥐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비가 쌓아올린 모든 것은 그의 과거를 아는 여자에겐 너무도 쉬웠다. 급습하듯 시스템을 파헤치고, 숨겨진 프로그램을 찾아낸다. 딸에 대한 집착처럼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자가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발동해 제 뜻대로 끌어가려 했던 것이리라. 상황을 파악한 아비가 장치에 손을 뻗었지만, 여자가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게 더 빨랐다. 아비의 얼굴에 비치는 절망을 보고 그녀는 웃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걸 바랐던 거니?”
“물론이죠.”
여자는 만족스런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 뜻은 인간의 죄를 바로잡는 것이니까.”
3
날카로운 발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통증과 함께 피가 흘렀지만 청년은 신음 한 번 흘릴 수 없었다. 악마가 억센 힘으로 목을 조르고 있었던 탓이다. 차원의 틈새에 들어서 인간의 방해에서 벗어나자 악마는 순식간에 그를 압도했다. 적당히 어울려주기는커녕 그간의 분풀이라도 하듯 힘으로 눌러버린 바람에 청년은 저항할 기회도 없었다. 숨이 끊어질 위기에도 청년은 버둥거리지 않았다.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에서 악마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애쓸 뿐이었다. 괴물이 인간의 몸을 찢고 나온 듯 잔뜩 갈라진 얼굴을, 청년은 눈에 새긴다.
표정을 보고 싶었다. 악마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읽어냈으면 했다. 공중에선 거리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악마가 저만을 내려다볼 땐 혹, 악마의 얼굴에 걸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를 자극하던 인간을 죽일 수 있게 되어서 기뻐할까. 너무 쉬운 살해에 시시해할까. 그게 아니면. 몸이 버텨주지 못해 생각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시야가 점점 검게 물들고, 의식은 흐려지기만 한다. 언제나 쫓아오던 죽음이 드디어 그를 붙잡으려는 모양이었다.
「……뭐야.」
의식이 꺼지기 직전, 악마의 발톱이 청년을 놓아주었다. 청년은 몇 번이고 쿨럭거리고서야 악마를 다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여전히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일그러진 입매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 밴 것은, 아마도 불쾌.
「왜 발버둥치지 않지?」
“글쎄, 왜일까.”
한참이나 지나 뱉어낸 답은 건조했다.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으면서 그렇게 쉽게 당한다고?」
“목적을 달성해서겠지.”
악마에게서 풀려났는데도 청년은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악마가 들판에 내팽개친 상태 그대로, 허공을 바라볼 뿐이다. 여자와 함께 지냈던 이곳은 여느 때처럼 평온하여 저 너머의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 거짓말 같다. 그러나 그가 막아서지 않는 한 세상은 무너지고, 이곳도 조용히 묻히게 된다. 차원의 경계가 무너지며 ‘틈’이 메워지는 것이다.
“세계의 혼란이 걷히지 않으면, 이곳은 점점 좁아져 우리는 함께 압사할 거다. 세계의 혼란이 걷히면, 레이가 그쪽을 처리해. 어느 쪽이건 내겐 나쁠 게 없어.”
「그런 속셈이었군.」
“내 목을 부러뜨리며 웃을 줄 알았는데.”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지. 청년은 악마에게 다시 시선을 꽂았다. 흉측하게 갈라진 얼굴인데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얼굴은, 저항군의 희망이었던 소년을 연상시켰고. 그 소년의 몸에 깃든 친우를 연상시켰고. 그리고, 그리고.
여자는 악마가 네 명의 소년을 삼켰다고 말했다. 당신의 친우, 유토. 랜서즈에 속했다던 사카키 유우야. 싱크로에서는 유고, 융합 차원에선 당신의 동생을 납치했던 유리. 그렇게 네 명이 자크에게 먹혔겠지. 허망한 종말을, 여자는 무심하게 흘렸다.
[하긴, 자크는 그런 것밖에 못할 거야.]
냉랭한 말에 청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것?]
[타자의 의지를 빼앗고 그 형체를 덮어쓰는 것. 패왕룡 자크가 된 때부터 ‘인간 자크’는 유령이 되었을 테니까.]
망령은 말이야. 기생하는 것밖에 못 해. 여자의 얼굴에 언뜻 자조가 비치는 것 같았다. 만일 내가 세상의 뜻대로 움직였다면, 내 의지 없이 망령처럼 살았겠지. 타인의 몸을 빌려서.
[그런 삶은, 결국 제 삶이 아니야. 슌.]
여자가 힘주어 맺은 말을, 청년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제대로 덤벼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고. 거슬려. 기분 나빠.」
“까다로운 게 유토를 닮긴 했군.”
「그렇게 부르지 마!」
“왜, 그쪽은 남의 몸에 기생하고 있으면서.”
악마에게서 누군가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악마가 스스로 부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 분신끼리 서로를 잡아먹게 한 끝에, 마지막으로 남은 소년을 차지했다. 네 명의 분신이 모두 모여 과거의 힘을 그대로 쓸 수 있는 상태에서도 그는 소년의 몸을 뚫고 나올 뿐 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한때 세상을 위협했던 악마는 이미 환상이 되었기 때문에.
세계의 재구성으로부터 이십여 년, 악마였던 남자가 네 명의 소년으로 살아온 것도 십오 년쯤 되었다. 평화로운 세계에서 살아온 이들은 악마를 몰랐고, 악마의 분신도 전생체의 기억을 담지 못했다. 어쩌면 악마조차도 모든 것을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을 그저 부유하다 부활의 기반이 마련된 시점에서야 인간의 공포였던 때를 떠올렸을지도. 그러나 악마가 슬금슬금 분신을 잠식할 때도 재림의 조건은 완벽하지 않았다. 인간의 악의야 세상에 넘쳐났으나 그를 불러낼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침략자. 언젠가는 소거되어야 할 사람. 구원자를 부활시키기 위해 악마라는 핑계가 필요했던 광인.
이제 인간은 악마를 그려낼 만한 상상력이 없다. 악마는 과거가 되었고 평화는 오래도록 이 세계를 지배했으므로. 그러면, 껍질조차 남지 않은 악마는 어떻게 형체를 만들어야 하는가. 청년은 악마가 결국 타인의 그림자를 덮어쓸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했다. 이미 여러 사람과 섞여 살아온 바람에 타인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은 인간의 그림자.
그림자를 덮어쓴다는 건 그 기억에도 빚지는 셈이다. 악마는 분신을 전부 집어삼켰다 생각했겠지만 실은 자신도 분신에게 먹히고 있었으리라. 분신의 기억에 전염되고, 세상 사람들이 분신을 바라보았던 이미지에 물들고. 그렇게 제 것이 덮이고 덮여, 지금의 악마는 결코 그때의 악마일 수 없다. 악마가 자신의 이름에 집착하는 것은, 온전한 ‘내’가 흐려지고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모른다.
유령은 인간을 이길 수 없으므로.
십오 년쯤을 살아온 네 명의 인간은 전설이 된 악마보다 선명하다. 악마가 조금만 방심하면 삼켜지는 것은 오히려 악마 쪽이다. 그러니 여자는 청년에게 당부했으리라.
[자크를 만나면 절대 그 이름을 꺼내지 마.]
이름을 부르지 않고 철저히 그림자로 만들어야, 힘을 잃을 테니까. 라고.
청년은 몸을 일으키고, 몇 걸음 걸었다. 아직 숨이 붙어있으니 좀 더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그는 악마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두려움이 되고 싶었던 괴물을 그는 결코 피하지 않는다. 그런 태도는 악마를 분노하게 하는 동시에 불안에 빠트린다는 걸, 그는 이제 안다. 악마에 홀리지 않는 방법은 하나. 악마의 공포를 무력화한다. 악마에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으며, 악마의 모든 것을 ‘위협적이지 않은 것’으로 연결시킨다. 과연 악마는 그의 도발을 참지 못한다. 세상에 절망을 퍼트리던 악마는 얕은 수에 격앙되어 소리친다.
「원래 내 몸이었어! 유토는 물론 사카키 유우야도! 기생한 건 그 놈들이지 내가 아냐.」
“다크 리벨리온도 오드아이즈도, 그래. 클리어윙도 네 것이었겠지. 알고 있어. 하지만 이 세계의 사람들은 원래 주인을 알고나 있을까?”
「깨닫게 하면 돼. 전부, 누구의 것이었는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유토의 얼굴을 하고 말해봐야 먹히지 않을 텐데.”
다리가 꿰뚫려 청년은 그대로 무너졌다. 아마 다시 일어서긴 무리일 것이다. 지혈을 하려 상처에 손을 뻗던 청년은 가슴팍을 밀려 쓰러졌다. 몸을 일으킨다는 행운은 없었다. 악마가 그의 몸을 지그시 밟고 있었으므로. 사냥감의 숨통을 끊지 않고 서서히 힘을 말린다. 그 느슨한 공격에는 분명 어떠한 의도가 있다. 악마는 원하는 답을 들으려 그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다. 만만찮은 고집이군. 청년은 웃었다.
「내 이름을 불러.」
“유토.”
「제대로 불러.」
“유토가 싫다면 사카키 유우야로 할까? 그 몸은 사카키 유우야의 것이었을 테니 틀린 말도 아니지.”
「내 이름은.」
“왜 이름에 집착하는지 알아. 태어나서 몇 년간 이름이 없었던 나라면, 이해해. 동생이 생기면서 동생에 맞춰 이름이 붙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 틈에서 ‘나’를 잃지 않고 살게 되었지. 이름에는 역할이 붙고 기억이 따라오니까.”
옛날 이름으로 불릴 때만 너는 악마로 존재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거기에 집착하는 거야. 안 그래? 청년은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시야는 여전히 흐려도 청년은 저에게로 향하는 진득한 시선은 느낄 수 있었다. 악마는, 동요하고 있다.
“그러니 절대 네가 원하는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아. 내가 보고 싶은 건 네가 삼킨 것들이어서.”
「유토는 내가 되기 위해 태어났어.」
“하지만, 끝까지 네게 동조하지 않았겠지.”
「그래봤자 전부 운명대로 되었다고. 인간이 운명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몰라. 아직 다 안 싸워봤으니까.”
날 때부터 세상의 의지에 지배당한 청년이 인간의 무력함을 모를 리 없다. 노력도 투쟁도 세상의 뜻에 꺾이는 저주가 그를 얼마나 닳게 했는지. 타의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도 전부 놓아버릴 수 있었다. 세상의 뜻을 따라 투쟁을 포기하고 씁쓸한 상실을 받아들이면 되었다. 여자가 저에게서 도망치라고 말했을 때, 죽음에 먹히지 않도록 그대로 떠나버린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너무 많이 잃었다. 세상의 뜻은 물론, 인간이 내세운 운명으로도. 함께했던 동료는 카드에 갇히고 소중한 사람은 환상처럼 흩어졌다. 그는 이제 더 잃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던 수명을 전부 써서라도, 패배하더라도, 끝까지 싸워보고 싶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엔 의미가 없어?]
전장에서 친우가 외쳤던 말이 떠올랐다. 언제나 단단해 보이기만 했던 소년은 그때,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뒤엎을 가능성이 있는데, 포기해야만 해?]
그때 어떻게 답했더라. 청년은 기억을 더듬는다. 그때 청년은 아직 저보다 한참 작은 친우를 동생처럼 안아주면서, 건조하게 답했다. 싸울 수 있을 때까진 싸워야지. 였던가.
진득한 절망 속에서도, 그에 맞서 싸울 기회가 있다는 것이 청년에겐 위안이 되었다. 실패해도 투쟁 자체가 가로막히지는 않았다. 희망은 보이지 않아도 불길에 뛰어들 수는 있었다. 친우도 그러했을 것이다. 쓰러지기 전까지, 투쟁을 놓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전장에서도 미래를 생각했던 사람이었으니까.
“하나 확실한 건, 유토가 그쪽보다 더 오래 살아남으리란 것.”
「진작 녹아버린 놈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았나?」
“사카키 유우야도 마찬가지. 지금 네 앞에 있는 나는 그 둘의 싸움을 기억해. 어떤 각오로 나섰는지,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는지 전부 남아있어. 기억하고 읊어내는 한, 인간은 언제까지나 재현되지.”
무슨 뜻인지 알아? 청년은 심술궂게 속삭인다. 기억해줄 사람도 되살려줄 사람도 없는 너는 묻혀버리란 거야. 네 분신들이 세상 사람의 말로 기억으로 계속 살아 숨 쉴 때. 말을 마쳤을 때 청년은 악마가 무장하는 것을 보았다. 과거 문명을 쓸어버리고 미래를 짓뭉갰던 몬스터가 하나둘 들판을 채워간다. 이제 악마는 완전히 여유를 잃었다. 몸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청년을 전력으로 치우려 한다는 점이, 그 증거.
「인간의 말을 더 들을 필요 없어.」
“살고 싶었지, 유토?”
「힘으로 쓸어버리면 그만이야.」
“미래를 구하려고 한다는 건 삶에 욕망이 있다는 거잖아. 다크 리벨리온을 건넬 때도, 살고 싶었지?”
「또 수작을.」
“사카키 유우야는 더 많은 무대에 서고 싶었을 거야. 관객에게 환호와 웃음으로 인정받는 미래를, 잡으려 했어.”
안 그래? 날아든 공격이 가슴팍을 꿰뚫었다. 피를 쏟으면서도 청년은 악마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갈라진 흔적이 남은 얼굴에 슬금슬금 균열이 번지더니, 깨진 부분으로 무언가 흘렀다. 끈적거리는, 검은 액체. 악마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으나 균열은 자꾸 커져만 갔다. 악마가 선 자리에 검은 액체가 흥건했다. 흘러내린 것은 뭉쳐, 점점 하나의 형태를 띤다. 망가진 시각으로도 실루엣은 알아볼 수 있다. 청년의 친우였다.
「아니야, 이런 것 따위…….」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해도 붕괴는 멈추지 않는다. 살갗이 떨어지며 검은 액체가 폭포처럼 쏟아지기도 했다. 다음에 만들어진 형체는, 저항군의 동료였던 소년이었다. 그 다음에는 이차원에서 스쳐갔던 소년. 하나만, 남았다. 악마에게서 모든 ‘제물’을 꺼낼 때까지. 악마가 삼킨 소년들을 전부 토해낼 때까지.
「나는…….」
“이것, 봐.”
격통으로 숨이 막혔지만 청년은 끝까지 악마를 비웃기로 했다. 그가 더욱 흔들려 마지막 조각마저 흘려버리도록.
“너는, 전부, 못 품어.”
그림자니까. 청년이 힘겹게 말을 마친 때 악마의 발톱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방어할 힘은 없었고 공격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결말은 뻔하다. 어딘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피가 흐르는 감각과 함께 시야가 단숨에 붉게 물들었다. 아. 하나, 남았는데. 청년은 숨을 헐떡였다. 이번에는 정말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출혈로 의식이 흐려진다. 이번에야말로 운이 다했음을 그는 느낀다.
살 수 있을 것 같을 땐 살아줘야 해. 이곳을 떠날 때 여자가 건넨 말이 떠올랐다. 최대한 노력하기야 했지만, 역시 그에겐 너무 어려운 명령이었다. 모든 것이 멎는 순간, 그는 정말로, 여자를 보고 싶었다.
* * *
“아카데미아는 해체. 연구 시설은 파괴되었고, 랜서즈는 한 명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
보고는 간결했다. 사내는 자신이 밴 목소리로, 제가 이뤄낸 성과를 전달했다. 침략군은 흩어졌고 은밀히 진행하던 연구는 전부 중단되었다. 기반을 모조리 날려버렸으니 이제 다시 쌓을 수도 없을 것이다. 악마조차 떠났다. 영원히 악의 소굴로 남아있을 것만 같았던 침략자의 기지는 이제 모든 위협이 사라진 곳이 되었다. 침략자를 막으려던 정예병도, 어쩌면 사내 자신도 기대하지 못한 성공이리라. 여자는 동생의 얼굴이 상기되는 것을 보았다.
이곳에서 인간의 저항을 지휘한 것은 여자였으나, 그녀도 이렇게 순조롭게 흘러갈 줄은 몰랐다. 아비는 생각보다 무력했고 동생은 기대보다 영민했으며, 그녀가 이끈 모두가 세상을 위해 힘을 합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가, 세상의 안정. 이제 인간은 악의 흔적을 지워내고 평화를 계속 가꿔가기만 하면 된다. 여자는 미래를 인간에게 넘기고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당신이 원했던 건 전부 이루어졌어. 이제 뭘 할 생각이지?”
조용히 자리를 뜨려던 여자를, 사내의 질문이 붙들었다. 여자는 솔직하게 답했다.
“차원의 틈새로 갈 거야.”
“스탠더드, 융합, 싱크로, 엑시즈. 4개의 차원은 서로 합쳐지기 직전 멈췄다. 차원간의 경계는 원래대로 돌아왔고. 자크가 더 힘을 쓰지 못한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당신이 나서지 않아도 돼. 사내의 뜻은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여자가 모든 것을 말끔하게 해결해주길 바라는 듯했다. 그러나 여자에겐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 그녀에게만 가능한 일. 악마를 유인하느라 차원의 틈새로 향했을 청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법칙이 통하지 않는 영역이기에 추적도 어렵다. 여자는 자신의 신자가 안전한지 확인해야 했다.
약속하지는 않았더라도, 청년을 구하는 것은 여자의 최종 목표였다. 죽음에 먹혀가는 그 남자를 이제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야 했다. 청년은 그를 지배했던 모든 타의에서 해방될 권리가 있었다.
“가봐야 해.”
힘주어 말하자, 사내가 매달렸다.
“여기선 당신을 필요로 해. 당신이 지휘해주길 바라고 있다고.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잖아, 레이지. 전부 바로잡기 위해 여기 온 것 아니었나?”
열여섯의 소년이 세상을 위해 나서는 것은, 보통의 각오로는 불가능하다. 정예병을 구축하고 이차원을 넘나들 때, 스스로 전장에 뛰어들 때 사내를 계속 지탱한 것은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결심이었으리라. 그러니, 그라면 가능하다. 아비가 낳은 악을 걷어내는 일. 세상을 바로잡는 일이. 여자는 동생에게 상냥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인간으로서 너는 최선을 다했어. 앞으로도 그 마음으로 하면 돼.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고, 사내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이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임을, 여자는 짐작할 수 있었다.
“차원의 틈새에서 할 일은?”
“사람을 구하는 거야.”
“누구를.”
“나를 믿어준 유일한 사람.”
세상에게 버려져 추락했을 때, 저를 발견한 것이 청년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여자는 아마 다시 세상을 구할 결심을 하진 못했으리라. 운명을 저주할 뿐 그에 맞설 생각은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타자가 요구하는 신의 상에 끼워 맞춰져 또다시 도구로 소모되었을지도. 신으로 선택되었던 것은 그녀였으나 그녀가 다시 신의 모습을 취하게 한 것은 청년이었다. 청년의 믿음은 숭배를 닮아 그녀가 기적을 베풀도록 만들었으니 여자가 그에 보답할 차례였다.
여자는 이제 완벽히 무력해진 침략자의 기지에서 벗어나, 달리고 달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청년을 찾기 위하여. 있잖아, 내 전술은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패하지 않겠다는 것이었거든. 과거 청년에게 들은 말이 머리를 쟁쟁 울렸다. 가능한 오래 살아남는 게 목표였다는 거야.
[버티는 건 잘하니까, 걱정 마.]
그래야만 했다. 여자가 달려갈 때까지, 죽음의 그림자에 먹히지 않고 버텨야만 했다. 악마와 단둘이 놓인 이상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여자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청년이 그녀를 믿고 세상을 구하러 나섰듯이.
당신에게 진짜 평화를 가르쳐주고 싶었어.
여자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이제 그녀는 차원에의 통로에 와 있었다.
깨지지 않는 행복도 주고 싶었고.
여자는 자신이 구해낸 이들을 두고 한 사람에게로 향한다. 처음이자 마지막 신자일, 청년에게.
세상의 뜻을 거역했는데도 우리는 세상을 구했지. 운명은 끊어졌으니, 이제 당신의 삶에 비극은 없어.
차원의 틈새에 들어서자마자 여자는 군데군데 검은색으로 물든 들판을 보았다. 침략자의 기지에 침투할 때, 사람이 쓰러진 자리마다 배어나오던 검은 액체가 머리를 스쳤다. 검게 변한 부분을 밟아보니 그때와 비슷하게 끈적거리는 액체였다. 악마가 이곳에서 날뛰긴 한 모양이었다. 여자는 검은 얼룩을 따라 걸었다. 시작된 곳을 찾으면 악마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모든 것이 안정된 이상 악마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세계로부터 단절된 이곳이라면 악마가 인간의 어둠에 기생하는 것도 어렵다. 악마와 마주하면, 천천히 말려죽이면 된다. 악마가 힘으로 눌러버리려 들어도, 최후의 수를 쓰면 그만이다. 여자는 품에서 옛 무기를 꺼내, 쥐었다. 가능한 쓰고 싶지 않지만 꼭 써야만 한다면 악마와 함께 침몰하는 길은 선택할 수 있었다. 저를 발견한 악마가 날뛸 때 위협용으로 펼쳐보아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신성한 힘을 쥔 구원자는 걷고 걸어, 마침내 악마의 흔적이 시작된 곳에 닿았다. 검은 액체가 흥건한 곳에 악마는 주저앉아 있었다. 몸을 뚫고 나온 날개가 없었다면 알아보지도 못했으리라. 온전한 형체가 없어 분신의 몸을 취한 탓에, 악마에게서 과거의 ‘무시무시한 악마’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의 몸에 겨우 뿌리내린 기생체처럼 보여, 순간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힘도 예전 같지 않은지 여자가 다가오는 중에도 공격하기는커녕 몸을 웅크린 채 그르렁거리고만 있었다.
「아직, 은……전부 잃지 않았어.」
이따금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삐걱거리는 기계음 같았다.
하나 더 안쓰러운 면이 있다면, 악마의 얼굴이 여기저기 뜯겨나가 있다는 것이었다. 살갗이 벌어진 자리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나오는데, 군데군데 살점마저 떨어져 원래대로 봉합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 비참한 모습을 인정할 수 없는지 악마는 자꾸만 울음 같은 말을 흘린다. 힘을 찾을 수 있어. 원래 모습을, 찾을 거야.
악마가 그토록 무력해진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는 악마 너머로 낯익은 실루엣을 본다. 손을 대면 그대로 허물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긴 했으나, 분명히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악마가 삼켰던 네 명의 소년. 각자의 차원에서 제 나름의 욕망을 품고 살아왔던, 악마의 분신들. 악마는 그들을 다 품어내지 못하고 쏟아내고 말았다. 껍질만이 남은 악마가 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리 없다.
「다시, 그러모으면, 돼.」
“안 될 텐데.”
여자는 악마 앞에 서면서 말했다. 악마의 눈이 그제야 그녀를 담는다. 군데군데 뜯긴 얼굴에서 그나마 멀쩡한 부분.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하필 금빛이어서 여자는 한순간 청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나를, 방해하려고?」
“글쎄. 내가 손을 쓸 필요나 있나 싶어.”
그쪽, 완전히 망가졌잖아. 건조한 말에 악마가 덤벼들었다. 아니, 덤벼들려고 했다. 힘을 잃은 악마는 너무도 약해서, 여자를 공격하려다 스스로 무너졌다.
“모든 분신이 자기를 주장하며 서로 잡아먹게 하는 것. 괜찮은 설계였어. 덕분에 손쉽게 조각을 하나로 모았겠지.”
여자는 악마와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분신들이 ‘나’를 찾으려 다투면, 어떻게 될까.”
악마가 삼킨 네 명의 소년은 쉽게 자신을 놓지 않았다. 날 때부터 새겨진 특성에 따라 그들은 어느 순간이나 ‘나’에 집중했으므로. 나의 삶, 신념, 욕망. ‘나의’ 것들이 그들에겐 가장 선명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를 잡아먹어야 했던 것 아닌가. 힘을 키우고 싶다는 욕망 이전에,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악마가 계산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분신들이 인간으로 살아오면서 단단히 쌓은 자아였다. 자아가 있다는 것은 어떤 혼돈에서도 자기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잔뜩 짓이겨져 타인의 체내에 깃들었다고 자아마저 부서지진 않았으리라. 누군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기억을 들먹이면, 결국 ‘나’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악마가 쏟아낸 것이 단순히 인간의 형체가 아닌, 분신들의 원래 모습으로 빚어져 있다는 것이 그 증거.
「놈들이 가진 건, 전부, 내 것이었는데. 망할 인간이, 전부 빼앗았어.」
“아니. 그 애들의 것이었지. 모습도 삶도 능력도, 그 애들이 에이스로 삼은 드래곤마저도.”
엄밀히 따지면, 너도 실은 십 년 넘게 이 세상에서 살아온 거야. 여자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카키 유우야로, 유토로, 유고로, 유리로. 네 갈래의 삶을 전부 경험했지. 안 그래?
「웃기지 마. 그런, 시시한 건, 내 삶이 아니었어.」
“악마가 되려 하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어. 이렇게 처참한 모습이 된 건 전부…….”
「난, 세상을 지배하는, 미래만을 꿈꾸며, 버텨온 거라고!」
처참한 절규에, 여자는 이제 저 이외에 누구도, 어쩌면 본인조차도 기억하지 못할 악마의 과거를 떠올린다. 저 끔찍한 괴물이 인간이었던 시절. 별달리 주목받지 못했던 남자가 있었다. 몬스터와 교감할 수 있다는 것 외에는 특별할 게 없던 남자는, 무대에 오르면서 점차 환호에 익숙해졌다. 타자를 짓밟아 정복하는 무대가 관객을 열광시켰으므로. 그의 무기였던 몬스터는 하나둘 괴로워하고 분노했으나, 모두를 쓰러트리고 정점에 오른 그는 몬스터의 감정을 멋대로 해석했다.
고통을 기쁨으로, 저에 대한 분노를 인간에 대한 증오로 ─ 알겠어. 너희들도 세상을 지배하길 바라는 거지? 마음대로 내린 결론은 아마도 그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었으리라고 여자는 생각한다. 그가 세상을 부수고 나설 때, 인간은 물론 몬스터까지 공포에 질려 울었으니까. 악마가 되고자 몬스터와 결합한 그는, 더는 몬스터의 호소를 들을 수 없었겠지만.
그렇게 변질된 채로 이십여 년. 악마는 자신이 언제부터 악마의 길을 결심했는지도 알지 못하게 되었으리라. 그 바람에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되었는지도. 분열되면서 얻은 ‘새 삶’은 그에게 다시 세상에 용인될 기회였으나, 그는 스스로 희망을 포기했다. 인간의 사고를 잃어서인지 욕망으로 판단력이 흐려져서인지는 모른다. 어느 쪽이건, 그토록 악마의 형상에 집착한다면 여자는 그를 구해줄 수 없다.
그럼에도 여자는 악마에게 일깨워주기로 한다. 그에게도 구원받을 기회가 있었음을. 길을 잘못 들지 않았다면 그에게도 무난한 미래가 있었으리란 것을.
“사카키 유우야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너는 엔터메로 인정받을 수 있었어. 유토였다면 주변인에게 사랑받으며 살 수도 있었지. 유고를 버리지 않았다면 몬스터와 교감하는 삶도 가능했어. 정복자가 되는 것? 유리로서 가능했을 거야.”
「자크로서는, 안 되었다고?」
“……우리는 이미 과거잖아.”
말하자면 유령이지. 여자는 덧붙였다. 여자가 인간에게 ‘해결’을 맡긴 것은, 인간에 대한 신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더 개입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깔려있어서기도 했다. 과거는 현재에 너무 깊게 뿌리내려선 안 된다. 존재하되, 유물로서 남아야 했다. 악마도 그녀의 말을 이해했으리라. 이 시대는 그의 시대가 아님을. 그의 힘도 위험성도 과거에나 유효했으며 이제는 옛 모습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음을. 악마의 눈에서 독기가 걷히고, 겨우 유지하던 형체도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승을 떠돌던 망령이 끝내 죽음을 인정하는 것처럼.
“현재에 기회를 줬어야 해.”
「너무, 늦었어.」
“그럴지도 몰라.”
「좀 더 일찍, 말해주었다면.」
“예나 지금이나 핑계뿐이네.”
여자는 악마에게서 돌아섰다. 세상을 위협했던 악에게 해야 할 일은 전부 끝났다. 걸어가면서 여자는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비로소 세월을 느낀 악마가 무너지는 소리일 터다. 혹시 몰라. 네가 현재를 인정한다면, 네 분신들 내부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지도. 무심하게 흘린 위로를 악마가 들었을지는 알 수 없다.
이제 여자는 정말로, 청년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악마가 있었던 자리에서 멀어질수록 그녀가 찾는 것이 선명해졌다. 저 멀리 쓰러진 인간은 분명 청년이었다. 슌. 이름을 불렀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여자는 자신의 신자에게로 달려갔다. 그에게는 순간조차 귀하다는 것을 떠올리고.
마침내 청년 앞에 섰을 때. 여자는 지독하게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다시 이름을 불렀지만 청년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오른 눈은 허공을 담았고, 왼쪽 눈가는 짐승에게 공격당한 듯 처참한 모습이었다. 피가 말라붙은 뺨을 어루만져도 생명이 떠난 싸늘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착하기도 하지. 끝까지 내 말을 들어주었구나. 그래서 죽음에선 도망치지 못했겠지만. 답을 돌려줄 수 없는 이에게 속삭인 여자는 그의 몸을 일으켜 끌어안았다. 그 차가운 몸을 자신의 체온으로 녹이기라도 하려는 양.
사용하지 않은 무기가 있었다. 시험하지 않아도 될 기적,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는 신성한 힘. 인간의 힘으로 파멸을 막았기에 네 장의 카드는 아직 여자의 손에 있다. 이제 누구도 저에게 강요할 수 없는 구원을 그녀는 스스로 행하기로 한다.
“세계를 만들까, 슌.”
여자는 신의 힘을 쥔 채 말했다.
“너에게만 허락하는 거야.”
다시 관을 쓴 신으로서, 유일한 신자에게 그 정도는 베풀어도 될 것이다.
에필로그: 어떤 종교
오래된 상처는 얽힌 기억마저 희미해진다. 아문 지 오래인 자리에 약간의 흔적만 남을 뿐이다. 악마에게 찢겼던 눈도 그렇다. 통증도 감상도 걷혔으니 드러내지 않으면 계속 잊고 지낼 과거였다. 청년은 더는 보이지 않는 왼쪽 눈을 머리카락으로 가리는 데 익숙했다. 시력까지 돌릴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미안해. 상처를 봉합해준 여자는 가끔, 열리지 않는 눈꺼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 목소리엔 약간의 연민이 깃들어 있어서, 청년은 굳이 고개를 가로젓곤 했다.
[이런 흔적, 하나쯤 남아도 돼.]
어느 날엔 그렇게 위로했다. 그래야 떠올리게 되잖아. 하는 말과 함께.
[무엇을?]
[우리가 같이 싸웠던 것.]
세상을 구한 후로 청년은 언제나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느릿한 평화가 언제까지나 이어졌으므로. 싸움도, 싸워야 할 악도 없다. 여자와 함께하는데도 몸이 망가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죽었던 그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어떻게 한 거야? 물었을 때 여자는 기묘한 말을 들려주었다. 세계를 만든 거지.
되살아난 후로, 청년은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세상엔 여전히 네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 차원의 틈새도 남아있으니, 이곳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일 터였다. 인간의 문명 대신 자연이 모든 것을 채운, 아름다운 만큼 고요한 곳. 누구도 침입하지 않는 둘만의 낙원. 그만큼 현실감이 없는 곳에서 지내며 청년이 시간의 흐름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곤, 제법 길어버린 머리카락 정도. 여기 처음 온 때 어깨를 살짝 넘던 것이 이제 가슴을 한참 넘는다.
“요즘엔 그런 생각을 해. 머리가 많이 길었으니까, 조금 더 버티면 루리처럼 묶을 수 있을 거라고.”
엉뚱한 말에, 머리를 땋아주던 여자가 웃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매만지는 걸 퍽 좋아했다.
“이렇게 길 만도 했지. 네가 여기 온 지도 X년 OOO일째니까.”
“그걸 느끼려고 길렀어.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데도 나는 살아있구나. 이게 내 현실이구나. 생각하고 싶어서.”
“아직도 죽음이 눈앞에 있는 것 같아?”
“아니, 이런 미래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거라 그래.”
청년은 이 세계가 만들어진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를 살리기 위해, 신의 힘을 사용한 것이다. 파멸을 몰아내고 세상을 재구성한 힘은 청년 하나에게 쏟아졌다. 새로 생명을 얻은 청년은 혹 더 망가지는 일이 없도록, 안전한 세계를 선물받았다. 한 인간에게 베풀기엔 넘치는 은혜였다.
“그래서 말인데, 당신은 괜찮은 거야?”
“무슨 뜻이야?”
“이 세계에 눌러앉아서 나를 돌보는 것, 괜찮아?”
바뀐 것은 청년의 미래만이 아니었다. 신의 힘을 사용한 이상 그녀는 평범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곳에서 여자는 일종의 법칙이었다. 세계의 의지나 다름없다. 청년은 여자가 ‘인간으로서’ 경험했을 미래를 하나씩 그린다. 만일 여자가 그를 포기했다면 그녀는 바깥에서 모두에게 추앙받으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의 위기에 나선 구원자로서, 세상을 안정시킨 영웅으로서. 운명에서 자유로워졌으니 평범한 인간으로 살 수도 있었다. 세상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구원자가 되기 전의 꿈을 실현하려 노력하는 길도 있었다. 그 모든 가능성이 자신의 구원으로 좁혀졌음에 청년은 옅은 죄책감을 품는다.
“음, 레이지가 끈질기게 나를 찾는 것 같긴 한데.”
“그것 봐.”
“하지만 슌, 어차피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잖아. 나는 물러나 있어도 돼.”
내가 할 일은 전부 마쳤으니, 이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기회를 줘야지. 여자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선 안 돼. 그런 생각 때문인지 여자는 바깥에서 보내온 메시지에 한 번도 답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청년의 장례를 치렀다는 것, 악마의 분신들이 하나둘 돌아왔다는 것 등 짤막하게 흘러들어온 소식만 청년에게 전해주었을 뿐이다. 최근엔 침략자의 기지에서 청년의 동생을 비롯해, 그녀의 분신이었던 네 명의 소녀를 되돌리려 하고 있다는 소식도 알려주었다.
세상은 여자와 청년, 둘의 부재에도 문제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목적이 생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자가 이곳에 머무는 게 단순히 그런 이유에서일까? ‘진짜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청년은 공연히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것뿐?”
장난스레 물었더니, 여자가 그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하며 속삭였다. 좋아, 더 중요한 이유를 말해줄까?
“아카데미아에서 너와 헤어지기 전에 결심했어. 모든 게 끝나면 너를 구하러 가겠다고.”
그래서 여자는 악마를 쓰러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청년을 찾아주었다. 정해진 죽음을 맞았을 뿐인 그를 연민하여, 감히 소망하지도 않은 기적을 베풀었다. 청년의 존재 자체가 구원의 증명이다.
“이 세계의 성립 조건은 나, 그리고 네가 살 수 있는 곳은 여기. 나는 네 생존을 원해. 그러니 네가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여기를 떠나지 않아.”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바라는 답을 듣고 자신만만해져, 청년은 조금 어리광을 부린다. 여자는 단정한 얼굴 가득 웃음을 걸치고.
“물론.”
눈을 감으면, 입맞춰줄게. 여자의 말에 청년은 오른 눈을 감았다. 약속대로 입술에 잠깐 온기가 스쳤다. 눈을 떴을 때 여자는 환상처럼 없었지만 청년은 그녀가 근처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안다.
여자는 청년을 위해 세계를 만들었다. 그가 살 수 있는 온실을 갖추고, 그곳의 법칙이 되었다. 따라서 그녀가 세계였고 세계가 그녀였다. 청년은 바람에서 그녀를 느끼고 해가 지는 순간과 별이 빛나는 때조차 그녀의 흔적을 찾는다. 인간의 범위에서 벗어났기에 그녀는 언제나 그의 곁에 있다. 어느 순간 청년은 목을 휘감는 손길을 느낀다. 매달려 있지, 레이? 보이지 않는 이를 부르면 가벼운 웃음소리가 뒤따라온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슌. 나긋한 목소리에 청년은 집중한다. 신의 말을 듣기 위하여.
세계에 사랑받는 기분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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