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세상이 거대한 화원이라도 된 것처럼. 어느 도감에서도 나오지 않는 꽃이 땅을 뒤덮고 오래 전 자취를 감추었다는 과거의 종조차 세상에 모습을 보인다. 그 아름다운 풍경에서 희한한 것은, 이상할 정도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넓게 펼쳐진 세계에서 움직이는 것은 단 두 사람뿐. 그들이 침묵하면 세상은 고요해진다. 신화 속 선택받은 최후의 한 쌍이라도 된 것 같다.
두 사람을 감싼 것은 낙원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풍경이었으나 둘 중 하나인 청년은 대부분의 시간을 꽃으로 뒤덮인 세계를 파헤치며 보냈다. 그럴 때마다 저들끼리 뒤섞인 꽃향기가 진동했다. 지독하게 향긋한 냄새는 도리어 독처럼 어지럽다. 땅을 파면 별 힘을 들이지 않아도 파묻힌 것이 튀어나오곤 했는데, 대부분은 매우 사소한 물건이었다. 누군가 그 아래 평범한 보물을 숨겨두었거나 사람이 지냈던 자리가 어쩌다 묻혀버린 것 같다. 그러나 거기서 조금 더 깊게 파면 사람의 형태를 가진 무언가가 툭툭 튀어나왔다.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풍경만큼이나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인형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하고, 시체라기엔 조금도 부패하지 않은 것이 수상쩍다. 땅에서 발견한 ‘인간’의 연령대는 각기 다양했고 옷가지도 무엇 하나 같은 것이 없었다.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경이로운 섬세함이었다. 처음엔 그 기묘한 것의 정체를 이리저리 추측하던 청년은 결국 그것을 표본처럼 취급하기로 했다. 하나씩 꺼내어 늘어놓으면 박물관의 전시실에 갇힌 박제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아름다운 만큼 단조로운 세계에서, 땅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표본이야말로 청년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유적지 같아. 수많은 사람이 묻힌, 옛 문명의 흔적.]
언젠가 청년은 표본을 꺼낸 땅을 가리키며, 이곳의 유일한 타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청년과 쭉 함께해온 사람은, 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자는 그의 들뜬 목소리에 살짝 웃음을 걸쳤다.
[어디까지 파낼 생각이야?]
[글쎄. 아직은 질리지 않았거든.]
[다 파내는 것보다 당신이 질리는 게 빠를 거야.]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뜻?]
[아마도.]
여자는 자주, 그렇게 모호하게 말했다. 거기에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나른한 시선까지 겹쳐, 그녀는 언제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여기가 어떤 곳이었는지 알아?]
[알 것도 같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아.]
청년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었던 사람이니 세상에 대해 좀 더 알 법도 한데, 그녀는 예언자처럼 말을 숨기곤 했다. 물론 청년은 그녀에게서 억지로 답을 꺼내진 않았다. 그가 발 딛고 선 곳이 이미 비현실적인데, 모든 일에 굳이 명료한 답을 찾을 이유는 없었으므로. 이곳이 원래 어떤 곳이었는지, 혹은 그가 표본으로 취급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따위는 가벼운 신비로 남겨두어도 좋았다.
지금 여자는 몇 발짝 떨어진 곳의 나무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청년의 취미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보통은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행동을 빠짐없이 눈에 담곤 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청년에게 제법 호의적이었으며, 그에게 베푸는 것을 즐겼다. 아니, 그녀가 보이는 것은 단순한 호의라기엔 조금 무거운 데가 있는 것이었으나 청년은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타인에 대한 관심이리라, 그렇게 간단히 넘길 뿐이었다.
그들에게 시계는 없었고, 시간을 따질 이유도 없었으나 여자는 해를 보고 시간을 헤아릴 줄 알았다. 해가 높이 뜬 것을 보니 아마도 정오 즈음. 여자는 여전히 ‘발굴’에 집중하는 청년의 등에 말을 꽂았다.
“차를 준비해둘까?”
“마음대로.”
답이 돌아오자마자 고상한 다기가 차려진 테이블이 마법처럼 나타났다. 여자가 준비한 것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불러내는 것이 그녀였다. 그녀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에 대해 의심할 법도 하련만 청년은 그녀의 신비스러움에 대해 특별히 의문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에겐 모든 신비가 그저 신비로서 가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가 이 낙원 같은 곳에 현실감을 느끼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는 틈만 나면 이곳에서의 삶이 꿈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극한의 환경에 내몰린 인간은 대개 시간이 지나며 적응하지만, 적응한다고 해서 그 지옥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장에 내던져진 인간으로서, 청년은 언제나 마음 한편으론 평화로운 세계를 바랐을 것이다. 어느 도피처라도 간절했을 터. 가혹했던 과거에서 너무도 먼 평화로운 현실을, 꿈처럼 느낀다 해도 놀라울 것은 없다.
“당신이 여기서 지내는 데 재미를 붙인 것 같아서 다행이네.”
“조금 지루하지만, 지루할 정도로 평화로운 삶이 최상이야.”
“여기 있는 한은 언제나 그럴걸.”
“그쪽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전장을 떠돌 때에 비하면 확실히 안정을 찾았다. 작은 소리 하나에도 반응해 당장 소리의 근원을 없앨 준비가 되어있던 전사는 이제 웬만한 자극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제 일에 몰두할 수 있다. 무장하지 않고도 쉽게 눈을 감고, 사람의 호의를 기쁘게 받을 줄 안다. 다만 과거의 상처가 완전히 봉합된 것은 아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거든. 사실 내가 전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라면?”
“또 꿈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얘기가 아냐. 그냥 불안한 거야. 불안에 잠겨서, 생각이 극단적으로 뻗어나가는 거지. 내가 파내는 표본이 실은 시체라면? 그런 불길한 생각이 들면 갑자기 눈앞이 전장으로 바뀌고 당신은 사라져. 살아남으려면 적을 상대해야 하는 ‘진짜’ 현실로 돌아가는 거야. 물론 그 모든 건 상상일 뿐, 실제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고.”
“오싹한 상상이네.”
“물론 그렇게 끔찍한 현실이 남아있을 리 없지. 전쟁에 너무 시달려서 생각이 망가진 게 분명해.”
이제 살기 위해 싸워야만 하는 삶은 끝났는데.
청년은 평화를 쉽게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우습다. 여전히 머리 한편에 전쟁을 남겨두고서 자신이 누리는 행복을 의심하는 게 어리석게 느껴진다. 하지만 언제나, 어딘가에서 불안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괴상한 상상으로, 혹은 꺼림칙한 단서에 편승해서. 땅을 파헤치던 중에 무언가 걸리적거리는 것이 있었다. 조심스레 꺼내보니 그에게 익숙한 물건이었다. 전쟁에서 사용하던 무기. 종류야 다양하지만, 이번에 발견한 것은 분명 침략자의 것이다.
청년은 가장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유물을 들여다보았다. 그것만으로 속이 울렁거리며 숨이 막힌다. 한순간 청년은 여자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 모든 걸 묻어두고 그녀의 곁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 불쾌한 유물을 파헤친 때 그는 이미 기억마저도 파헤치고 말았다. 어차피 마음이 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청년은 무기가 어쩌다 묻혔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 주변을 집중적으로 파기 시작했다. 그 후 몇 번 여자가 가볍게 불렀고 몇 번 비슷한 물건을 꺼낼 수 있었다. 슬슬 힘이 빠진 청년이 파헤치는 걸 중단하고 잠깐 쉬려고 할 때. 사람의 손이 보였다.
조금 더 힘을 내어 땅에서 꺼낸 표본을 보았을 때, 그때야말로 청년은 얼어붙었다. 표본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하필 청년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청년은 과거 함께 싸웠던 전사가, 정예병이라는 이름으로 갑자기 소집된 소년병 두셋이 그 교복을 입고 있었던 것을 떠올린다. 그들이 원래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자꾸만 생각하게 했던 옷.
그걸 발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꺼림칙했으나 청년을 정말로 숨 막히게 한 것은 표본의 얼굴이었다. 익숙한 얼굴이다. 그와 함께 나선 소년으로밖에 볼 수 없는 얼굴. 왼손에 장착된 무기는 분명 소년의 것이었고, 소지품 또한 기억에 남은 것과 같았다. 모든 게 마지막으로 보았던 동료의 모습 그대로였다. 가장 끔찍한 가능성이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청년은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로 보았다.
“……여기, 어떤 곳이었어? 당신은 알고 있지?”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
“아카데미아?”
“이제 피곤할 때도 됐겠지. 그만 내려놓고 와서 쉬지 그래.”
“이 아래 깔린 거, 전부 시체였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묻는 것은 처음이다. 그 전까지 청년은 이 현실감 없는 세계에서 무엇에든 특별히 답을 바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답을 들을 수밖에 없다. 수많은 표본을 꺼낸 끝에 기억하는 얼굴을 본 때 청년의 머리를 스친 것은 기분 나쁜 의심이었다. 누군가 현실을 집요하게 본떠 인간의 물건과 인간을 흉내 낸 형상을 묻어놓았다 해도 실재했던 사람까지 완벽히 본뜰 수는 없을 것이다. 꽃 아래 묻힌 것은 실제의 인간이라고 보는 게 더 현실성 있는 추론이었다.
“답해줘. 그건 들어야겠어.”
“맞아, 여기는 원래 아카데미아였을 거야.”
“이 사람들은 그럼 뭐야.”
“당신의 기분 나쁜 상상대로, 시체?”
여자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평온했다. 청년이 동요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지, 아니면 그저 모른 척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녀는 바라는 것이 있는 듯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청년에게 한 가닥 친절을 베풀 모양이었다.
“더 듣고 싶다면 이쪽으로 와. 차근차근 말해줄 테니까.”
청년은 시신을 꽃의 무덤에 내려놓고 걸음을 옮겼다. 얌전히 여자의 맞은편에 앉자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기대하던 답 대신 찻잔이었다. 아무래도 여자는 진실을 보물처럼 숨겨두고서 아껴가며 내놓을 모양이었다. 청년은 자신이 파헤친 것을 힐끔거리며 잔을 들었다. 차향은 세상을 덮은 꽃향기에 가려 거의 느낄 수 없었다.
*
과거, 무엇이든 파괴하는 악마가 있었다. 그가 나타난 후 인간이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졌고 세상은 하루하루 절망에 잠겼다. 누구도 악마를 막지 못해 결국 세상이 멸망을 앞둔 때 한 명이 나섰다. 특별한 능력도 무엇이든 쓸어버릴 무기도 없었으나 모든 것을 되돌리는 자연의 힘을 끌어온 여자. 자신의 몸을 바쳐 자연에너지를 발동한 구원자는 악마를 완전히 소멸시키진 못했으나 더는 날뛰지 못하도록 찢어버릴 수 있었다. 그녀가 사라진 세상은 언제 위기를 겪었냐는 듯 평온한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 구원자에게 찢긴 악마는 부활을 꿈꾸었다. 떨어져나간 파편을 모아 완전한 하나가 되는 게 악마의 계획. 평범한 인간인 체 살아가던 파편들은 악마의 본성이 깨어나자 구원자 없는 세상을 휘젓기 시작했다. 마침내 계획대로 악마가 본모습을 찾자 과거에 그랬듯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선별된 전사조차 하나둘 나가떨어질 때 악마를 가로막은 것은 과거 제 몸을 바쳤던 구원자였다. 육신을 잃고 오랜 시간을 사념으로 떠돌던 그녀가 세상의 위기에 맞춰 기적처럼 세상에 돌아온 것이다.
구원자에게는 과거와 같은 힘이, 재생과 정화가 특징인 자연의 힘이 들려 있었다. 자신이 구한 세계에서조차 악마가 활개치는 것을 본 구원자는 분노해, 과거의 무기로 보다 확실한 종말을 안기기로 마음먹었다.
“악마를 완전히 묻어버리는 거였지.”
여자는 비스킷을 베어 물며, 악마와 구원자에 대한 긴 이야기를 마쳤다. 맞은편의 청년은 굳은 얼굴로 이야기를 듣느라 아직도 차를 절반쯤 남겨둔 채였다.
“그것과 세상이 이렇게 된 게 무슨 상관이지?”
“세상과 함께 묻어버렸다는 거야.”
“세상을 포기했다고?”
“썩은 것을 버렸다고 생각해. 이미 그곳은 악마가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을 세상이었어. 한쪽에선 전쟁이 일어나고, 다른 곳에선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고 있었지. 실망스러운 세계야.”
처음으로 나섰을 때 구원자는 자신을 희생해 세상을 온전히 복구하는 걸 택했으나, 두 번째 나섰을 땐 그렇지 않았다. 지금 청년이 있는 세상은 무너진 세계를 재건한 것이 아니라 구원자가 자연의 힘으로 덮어버린 세상이었다. 괴상한 결말이었으나 이야기 속 구원자가 스스로 말했으니 믿을 수밖에 없다. 과거 악마를 막아낸 구원자는 그와 함께하는 유일한 타인, 즉, 맞은편에 앉은 여자였다.
“이 아래 원래의 세계가 묻혀있다는 거군.”
“그래. 이쪽은 아카데미아가 있던 곳이지만 어딘가 파헤치면 당신의 고향, 엑시즈도 나오겠지.”
“이상한데. 당신은 세상을 사랑해서 나선 것인 줄 알았는데.”
“사랑했어.”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망가진 세계를 견딜 수가 없었던 거야.”
구원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랫동안 옅은 의식으로만 존재했던 사람이기 때문일까. 여자의 발상은 보통의 인간으로서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미 신에 가까운 사고라고 생각하는 게 나았다. 이곳에서 그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불러낼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그녀가 자신이 사실상 멸망시킨 세계에서 정말로 신적인 존재가 되어서는 아닐까. 그녀가 관여한 세계에서 그녀 자체가 하나의 법칙이 되어버린 것이다.
“세상이 그대로 묻혔다면, 왜 나는 살아남은 거지?”
“글쎄, 그쪽이 가치 있는 생명이었을지도?”
“그럴 리가.”
“어쨌든 나는 당신이 이곳에 남은 것에 만족해.”
“그것 참 감사한 일이군.”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현실적인 풍경의 세계만큼이나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들으니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졌다. 진실을 알고도 큰 혼란은 없었다. 그 전까지 그럭저럭 어울리던 여자가 멀게 느껴지고 아름다운 세상이 불길하게 비칠 뿐. 자리를 뜨자마자 청년이 집어든 것은 삽이었다. 여자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 꽃 아래, 그대로 묻힌 세계에서 꼭 건져내야 할 것이 있었다.
“또 파헤치려고? 이제 그게 뭔지도 알았잖아.”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
“어차피 그 아래 있는 건 전부 죽었는데도?”
“시체라도 찾으려는 거야.”
구하고 싶었으나 마지막까지 구하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청년의 싸움은 그들을 위한 것이었으니, 싸움이 끝난 지금이라도 찾아야 했다. 적에게 납치되었던 여동생과, 그가 보지 못한 곳에서 쓰러졌던 친우. 그들이 어디에서라도 살아남길 바랐는데. 이미 죽었다면 흔적이라도 찾고 싶었다. 그들이 세상과 함께 영영 묻히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 후로 청년은 이전보다 훨씬 더 열중해서 땅에 묻힌 것을 파헤쳤다. 세계가 파멸의 시점에 멈춰, 시간이 흘러도 그때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파헤치다 보면 언젠가는 그가 찾는 이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날이 언제가 되건 그들은 청년이 기억하는 모습으로 남을 테니 소중한 사람을 놓칠 일도 없다. 그것이 청년을 움직이게 하는 희망이었다. 이미 생명이 떠난 시신의 생생함은 때로 압화를 연상시켰다. 죽은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멎은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생해도 모두 화석처럼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과거의 파편.
파멸이란 단어로 표현해야 할 결말은 한순간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구원자가 나타난 때 정신을 잃은 채였던 청년은 세상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보았다고 해도 달라지진 않았으리라. 인간이 쌓아온 모든 것이 쓸려가는 순간에 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필 세상을 꽃으로 덮은 것은 꽤 악랄한 방식이라고, 청년은 생각한다. 인간의 문명을, 인간 이전부터 존재한 자연으로 덮는다 ─ 절대자나 할 법한 발상이었다.
재생은 파괴를 전제한 말이다. 그것을 여자는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녀가 쥔 재생의 힘은 세계를 덮쳐 파멸시켰다. 파괴가 있으므로, 다시 싹틀 것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여자는 거부했다. 낡은 경전에 기록된 재앙을, 신이 구원을 위해 꺼내든 파괴를 청년은 떠올린다. 방식도, 행한 것도, 여자는 신을 닮았다. 그만한 자비가 없었을 뿐이다.
여자는 청년이 세상의 진실을 알고서도 시신을 찾으려 하는 걸 조금 놀라워하긴 했으나 청년을 막는 일은 없었다. 이전부터 그래왔듯 그를 몇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에겐 청년의 행동 하나하나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세계의 운명을 결정한 자에게, 평범한 인간의 열망은 제법 흥미로운 관찰 주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동안 그를 바라보기만 하던 여자는, 어느 날 넌지시 물었다.
“찾으면 어쩔 거야? 다시 묻어주게? 아니면 태우기라도? 의미 없잖아.”
“그쪽에겐 그렇겠지. 나에겐 아냐.”
“누굴 찾는지 알아. 유토랑 루리라는 애들이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데, 말해줘?”
파낸 시신을 정리하던 청년의 손이 멈췄다.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이름인데, 어쩐지 여자는 그가 찾는 자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여자는 세상의 종말을 지켜본 사람. 어쩌면 그녀라면 모든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청년은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쪽이 알려줄 수 있다면.”
“두 사람 다, 그 아래에는 없어.”
“그 말은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뜻?”
“세상은 그대로 묻혔어. 그때 세상에 존재했던 건 저 아래 다 있다는 거야. 다르게 말하면, 두 사람은 애초에.”
여자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걸쳐져 있었다. 짓궂은 장난을 숨긴 아이 같은. 여자는 부러 말을 끊었다가, 약간 뜸을 들이고선 잇는다. 아마도 청년에게 더 큰 자극을 주기 위해서.
“세상이 끝나기 전부터, 없었다는 거지.”
“그러면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건가?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세계에.”
“신기하네, 당신은 희망을 믿는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당신 같은 사람은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나?”
“내게 중요한 것에 대해선 가장 희망적인 길을 믿고 싶은 거야.”
진실을 말해주며 기대한 것은 좌절이나 체념이었는데, 청년은 의외로 희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거기서 여자는 심술이 난다. 엷은 희망을 헤집고 그가 마주하고 싶지 않을 현실을 들이밀고 싶다. 소중한 사람을 찾고 싶다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알기에 더욱 커지는 마음이었다.
“만약에, 당신의 희망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여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서 청년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청년의 얼굴에 걸린 것이 선명해진다. 옅은 의문과, 여자가 말 뒤에 숨기고 있을 것에 대한 두려움.
“자크 이야기 기억해?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다가 네 갈래로 찢긴 악마.”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자크는 당신이 완전히 없애버렸다고 했잖아.”
“그렇게 분열된 조각들 말이야, 자기네 본질을 말해주려는 것처럼 전부 똑같은 얼굴이어서 징그럽더라고. 당신 친구 유토가 그랬지. 각 차원에 유토와 똑같은 얼굴의 소년이 하나씩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군.”
“그 애들, 유토를 포함한 네 명, 자크의 조각이었어. 각각 떼놓고 보면 선량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자크로서 움직인 때는 이미 병균 같은 것이 되어있었고. 그래서 한 번에 날려버렸지.”
“……그럼 루리는?”
“그 애는 제물 같은 거였어. 나를 불러내기 위한 제물. 당연히 내가 나타난 시점에 이미 그 애의 삶은 끝난 거지. 그래도 악을 몰아내는 데 기여했으니까, 나쁜 결말은 아니라고 생각해.”
숨이 닿는 거리에서 여자는 청년의 반응을 기다린다. 인류 최후의 생존자에게서 마지막 남은 희망을 빼앗고서. 그렇게나 찾던 사람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부정할까? 분노할까? 그것도 아니면 아까 그랬듯 기적에 가까운 희망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들까.
“그러니까 두 사람을 찾을 이유는 없어. 힘을 더 낭비하지 말란 뜻이야.”
“그래, 전부 흩어졌단 말이지.”
청년은 자신이 파던 땅속을 바라보았다. 금빛 눈에는 온갖 감정이 엉켜있었지만, 목소리는 지극히 건조했다. 살아남기 위해 어떤 환경에서라도 적응해온 청년이 최악의 결말에도 빠르게 적응하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길지 않은 삶에서 너무 많은 불행을 겪어, 더 괴로워할 힘도 남지 않은 것인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
그렇게 말한 청년의 얼굴엔 모든 걸 초월한 자에게서나 엿보이는 평온마저 비치는 듯했다.
그 후로 청년은 한동안 땅 아래 묻힌 세계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꽃으로 가득한 곳에서 여자와 한가로이 시간을 보낼 뿐. 여자는 자신과 함께하는 유일한 타인이 과거에서 벗어난 듯 보이는 것에는 만족했으나, 때로 가벼운 불안을 느꼈다. 그 날 이후, 청년은 무언가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다. 차를 마시면 그 중 절반쯤은 쏟았고 가시덩굴을 맨손으로 쥐어뜯다 손을 다치기도 했다. 그에게 너무 큰 충격을 안긴 것일까. 내면의 어딘가가 흔들린 것은 아닐까. 위험한 행동까지야 보이지 않았으나 혹 청년이 고장이라도 날까 싶어 여자는 자주 달래듯이 말했다.
[당신이 바라던 것은 전부 여기에 있어.]
그럴 때면 청년은 몽롱한 눈으로 웃을 뿐이었다. 긍정도 부정도 없었다.
[부족하다면 내가 뭐든 만들면 그만이야.]
[쿠키가 너무 달아.]
기껏 답을 하면 그렇게, 엉뚱한 말이었다. 특별히 괴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 교묘하게 답을 피한다기에는 청년의 모든 행동이 너무 느슨해 여자는 그가 잠깐 모든 의욕을 잃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소중한 사람의 소멸이라는 고통스러운 사실에도, 그녀 외에 영영 타인을 찾을 수 없는 삶에도 결국은 익숙해질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그게 언제가 되건, 그 날이 올 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이었다. 이미 인간을 초월하다시피 한 그녀에게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여자는 제법 자신에 차 있었다. 청년이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묻혀버린 세계에도 관심을 버리고, 그저 선택받은 인간처럼 평화를 즐기고 살아가게 할 수 있다고. 자신이라면 그가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시작하게 만들 수 있다고. 그게 오만이었단 것을 아는 데까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금 먼 곳까지 산책을 나간 날, 여자는 돌아오는 길에 청년이 땅을 파는 것을 보았다. 다만 그는 이전처럼 시신을 꺼낸다거나, 걸리적거리는 물건을 헤집진 않았다. 그저 땅속에 좁은 공간을 하나 만들 뿐이었다. 무언가 묻으려는 것처럼. 꽃이 핀 땅 아래야 이미 완벽히 단절된 공간이 되었으므로 숨길 것이 있다면 그곳에 넣고 흙을 덮어버리면 될 것이다. 그의 다음 행동이 궁금했던 여자는 일부러 몸을 숨기고 멀리서 지켜보았고, 청년은 평소와 다르게 주변을 살피더니 여자가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자 자신이 판 구멍에 천천히 발을 넣었다.
두 다리로 들어가, 몸을 조금씩 넣고,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눕는다. 그 다음은 땅을 파면서 쌓인 흙을 제 몸에 덮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청년이 땅 아래 묻으려던 것은 그 자신이었던 모양이다. 흙이 청년의 하반신을 덮고, 가슴까지 덮고, 마침내 얼굴만을 남겨놓았을 때.
청년은 죽은 세계와 함께 묻히기 직전 땅 밖으로 나왔다. 어디선가 뻗어 나온 덩굴이 그의 몸을 휘감고 땅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흙투성이가 된 청년은 텅 빈 눈으로 허공만을 보았다. 몸이 단단히 묶인 채라 다시 땅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멀리서 여자가 달려왔고 자신에게 무어라 소리쳤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여자가 제 앞에 주저앉자마자 덩굴이 풀리는 걸 보고, 그녀가 자신의 계획을 막았다는 것만 대강 짐작할 뿐이었다.
청년이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은 지나서였다. 수십 번은 반복한 여자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청년이 몸을 일으킨 이후 계속 하나만 물었다. ‘왜’ 그랬냐고.
“내가 바라던 것은 전부 저 아래에 있어.”
그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망가진 기계처럼 삐걱거리는 목소리였다.
“당신은 내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만들어줄 수 없고.”
거기서 여자는 청년에게 반복했던 말을 떠올렸다. 한 번도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던, 몽롱한 웃음이나 엉뚱한 답변으로 그가 넘겨버렸던 이야기를. 그동안 숨겨두었던 답이, 이제야 흘러나온 것이다.
“저 아래는 전부 죽었어!”
그래서 여자는 화가 치밀었다. 기껏 돌려받은 답이 그런 것이어서. 청년이 괜찮지 않았다는 걸 명확하게 알게 되어서. 자신이 청년의 절망을 조금도 흩어버리지 못했단 걸 알아채서.
“당신이 사랑하는 건 전부 죽었다고! 죽은 걸 사랑해봐야 아무것도 돌려받을 수 없어.”
“그러면 당신은 뭘 돌려줄 수 있는데.”
청년은 열을 올리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분노도 슬픔도 이미 오래 전에 그의 내면에서 말라붙은 것 같았다. 물기 없는 목소리만큼이나 지독하게 차분한 금빛 눈에 여자는 숨이 막힌다.
“이미 베풀고 있잖아. 이 세계를, 내 사랑을.”
“내가 당신에게 무엇이기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내가 당신을 위하고 있다는 거지.”
“이상하지. 왜 당신은 내게 이렇게 친절할까? 왜 무엇이든 베풀고, 실수로 살려두었을지도 모르는 나를 계속 남겨두고 있는 걸까? 외로워서? 실망스러운 세계를 구하지 않고 날려버렸던 사람이 그럴 리가 없는데.”
처음엔 몰랐지만 청년은 이제 안다. 여자가 자신에게 베푸는 호의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를. 그러나 그게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던가? 그녀는 저를 위해 봉사하지도 저를 숭배하지도 않는 자에게, 고결함과는 거리가 먼 인간에게 과분한 애정을 쏟고 있었다. 한순간의 변덕이라기엔 너무 꾸준했고, 자비라고 하기엔 이전 세계를 그대로 묻어버린 싸늘함이 떠오른다. 거기서 청년은 한 가지 의심을 하게 된다.
“이유 같은 건 없어. 당신이 사는 게 내게 좋다고 판단했을 뿐이야.”
“내게 그만한 가치를 부여할 만큼 당신이 나를 안다곤 생각하지 않는데.”
“아니, 당신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어. 세상이 몰랐던 부분까지 말이야. 당신이 바깥으로 나오기 전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계기로 삶의 방향을 정했는지, 왜 쿠로사키 슌으로 살기로 한 건지도 전부 안다고.”
“왜 내 기억을 다 들여다본 것처럼 알고 있지? 제일 친했던 친구도 거기까지는 모르는데. 그걸 아는 건 딱 한 명. 루리.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자란 내 동생뿐.”
세계가 멸망하고 여자를 만난 때부터, 청년은 그녀에게서 근원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오래 함께한 듯 편안했다. 지금 보니 그것은 안정감에 취해있었던 게 아니라, 그녀가 친숙한 사람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기묘하게도 그녀는 청년의 동생을 닮아있었다. 동생이 전쟁을 겪지 않고 몇 년 더 살았더라면 그녀와 거의 비슷하게 자라났을 것이다.
조금 전부터 싹튼 의심은 여자의 말 때문에 점점 확신으로 변한다. 그녀는 그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 사이에는 이제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 그의 동생이 있다.
“당신은 루리를 제물 삼아 부활하면서, 루리의 기억까지 가지게 된 거지?”
“그 애는 어차피 내 분신으로 태어난, 내 일부였어. 그러니까 그 애의 기억은 내 기억이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나한테 보이는 감정은 ‘구원자 레이’와는 관련 없는 것이잖아. 당신은 루리에게 물든 거야.”
“아냐, 당신이 살았으면 하는 건 분명히 내 소망…….”
말을 맺지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여자는 괴로울 정도로 동생을 닮았다. 존재의 증거조차 남지 않은, 그의 유일한 가족을. 그러나 여자는 동생의 무덤이었다. 그녀의 내면을 파헤쳐도 동생의 흔적이라곤 이미 멋대로 왜곡된 기억과 감정의 파편밖에는 없을 것이다. 청년은 여자의 말을 받아주는 대신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걸었다. 그녀의 주장을 부정하지 않은 게 최소한의 호의였다.
“왜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 이렇게나 평화로운 세상인데! 증오도 폭력도 없어. 추잡한 욕망도 없어. 그런데 왜 당신은 이곳에서 도망치려는 거야?”
결국 여자가 토해낸 것은 그러한 외침이었다. 오랜 시간을 육신 없이 자아만 존재했던 절대자는 지독하게 뒤틀린 한편 어느 면에선 아이처럼 순진하다. 부정적인 것이 전부 사라진 결벽적인 세계라면 누구나 행복할 줄 알았으리라. 청년은 잔인한 신에게, 자신에 사랑을 쏟는 절대자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 청년이 낙원을 사랑하지 못하는지.
“여기는 무덤이니까.”
“묻혀버린 게 그립다면 당신의 고향을, 하트랜드를 만들어줄게. 당신이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 옮길 수 있어. 그러면 당신도 이 세계에 마음을 붙이겠지.”
“당신은 참 잔인하고…….”
속에서 막힌 말을 토해내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정말로 가여워.”
청년은 돌아서서, 여자에게서 멀어진 만큼 다시 걸었다. 여자는 아까 선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 앞에 서자 보랏빛 눈에 비친 감정까지 읽을 수 있었다.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확실하게 빛나는 것은, 기쁨.
“나는 당신에게서 루리를 찾을 수 없고, 나에 대한 당신의 감정은 본래 당신의 것이 아니었어.”
“어차피 어긋난 사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
“사실이잖아. 서로의 필요를 채워줄 수 없는 사이인데.”
“그래도 괜찮다면? 그걸 알고서도 함께하기를 바란다면?”
무기력한 말에 돌아온 것은 제법 희망적인 답변이었다. 청년이 시선을 피하자 여자는 제 손으로 그의 손을 감쌌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에 청년은 움찔했다.
“그래, 시작은 루리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내 의지로 당신을 보호하고 있는 거야. 과거가 어땠고 바탕이 어땠건 우리는 새로 시작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약속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내가 묻어버린 것과 함께 묻히려 하지 않으면 돼.”
“나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가…….”
거기서 청년은 입을 다물었다. 속에 있는 말을 꺼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가 사랑했던 과거의 세계는 여전히 유적처럼 묻혀있을 것이고, 사라진 동생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여자의 애정은 계속 쏟아지리라. 부정의 답변이 없었다는 것에 만족했는지 여자는 천천히 그를 제게로 끌어당겼다. 청년은 차마 여자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그대로 눈을 감는다. 지독하게 짙은 꽃향기만이 어둠 속에서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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