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슌] 비극의 끝

2018. 9. 30. 23:49 from 02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손 닿는 곳에 휴대폰을 두고 계속 시선을 두고 있던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번호를 확인하지도 않고 연결했지만 다행히도 전화를 건 자는 사내가 예상한 사람이 맞았다. 오래 전 얽혀 자주 만났으나 십 년 전쯤부터 완전히 연락이 끊긴 자. 만나진 못해도 그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야 알고 있었다. 작가로 활동하는 그가 그동안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아끼는 제자이기도 했고, 어쩐지 계속 마음이 쓰였던 사람이라 사내는 한 번쯤은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동안은 마땅한 기회가 없었던 데다 그가 자꾸 여러 도시를 오가며 살아서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어려웠을 뿐이다. 그렇게 십여 년. 사내의 기억 속엔 앳된 얼굴의 청년으로 남은 제자는 이제 서른을 넘겼을 터였다. 사내는 작가로서의 그가 아닌, 시간이 흘러 성숙한 청년을 보는 날을 기대했다. 그것도 가능한, 청년이 스스로 자신을 찾는 때.

언제나 쫓기듯 불안정했던 청년이 여유를 찾고, 완전히 자리 잡아서 앳된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사라지는 날이 오길 바랐다.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사내는 그때까지 기다려줄 마음이 있었다. 청년이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을 떠난 지 수개월이 지나고, 몇 년이 흐르고, 마침내 십여 년이나 될 때까지 사내는 그 날을 기대했다. 다행히도 이번에 청년은 사내와 친분이 있는 사람을 통해, 이곳으로 돌아오겠다는 말을 슬그머니 흘렸다.

선생님도 뵙고 싶다는 말과 함께.

아마 따로 연락을 할 겁니다. 선생님의 연락처는 기억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알려준 사람의 말에 따르면, 청년이 이곳에 오는 건 오늘. 사내는 아침부터 휴대폰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오랜만에 제자의 목소리를 듣게 된 건 날이 어둑해진 때였다. 몇 마디 짤막한 인사가 오가자 사내는 바쁘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마이아미에 왔다는 건 들었어. 만날 수 있을까?]

[보름쯤 머물 생각이니 편할 때 불러주세요.]

[오늘 밤은?]

[어디로 가면 될까요?]

[내가 자네 원고를 봐줬던 곳. 나는 일이 없으니 되는 대로 오면 돼.]

[그럼, 댁으로 가겠습니다.]

전화는 바로 끊어졌다. 사내는 방으로 향해 책꽂이에 꽂힌 노트를 꺼냈다. 겉으로 보기엔 지극히 평범한 노트였지만 그 안에 든 것은 사내가 보물처럼 여기는 글이었다. 이제는 유명 작가가 된 제자의 습작이자, 데뷔작의 기초가 된 것. 절망에 먹혀가는 인간을 1인칭 시점으로 다룬 글. 책으로 낼 때는 3인칭으로 고쳐, 여기 남아있는 원본은 사내와 작가만이 아는 비밀이 되었다. 1인칭으로도 충분히 괜찮은데 왜 고치냐고 물었을 때, 제자가 표정 없는 얼굴로 답한 기억이 있다.

[인물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하는 건, 너무 처참하니까요.]

스스로 말한 대로, 그의 글은 처참했다. 어느 글에서든지 주인공은 끔찍한 불행에 내몰려, 괴로운 선택을 강요당한다. 간간이 비치는 희망은 거짓말처럼 꺾이고 절망은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마지막까지 구원은 없다. 그 무거운 이야기를 더욱 처참하게 만드는 것은 관찰일기라도 쓰듯 극도로 건조한 문체였다. 그는 한 번도 운명을 내세우지 않았으나, 특유의 건조한 서술은 그가 담아내는 모든 것을 운명적인 비극처럼 느껴지게 하는 데가 있었다. 절규하지 않는 주인공, 고요한 분노, 일상처럼 내려앉은 절망 얼마나 많은 독자가 그의 비극에 압도당했는지.

청년이 쓰는 비극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비극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만, 절망 앞의 인간을 청년만큼 생생하게 그려내는 인간은 없었다. 마치 그만한 절망을 작가가 직접 겪기라도 한 듯, 혹은 가까이서 지켜보기라도 한 듯 청년의 인물은 선명했다.

오랜만에 노트를 펼치니 처음 그의 글을 접한 날이 떠오른다. 글씨도 내용도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글을 읽는 동안 어떤 감정이 몰아쳤는지. 제자의 글을 절반쯤 읽었을 무렵 초인종이 울렸고, 사내는 바로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청년은 술병을 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색한 모습에 사내는 바로 싱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에 선생님께 선물받은 기억이 나서요. 비슷한 것을 사왔습니다.”

데뷔작이 성공을 거두었을 때, 사내는 축하의 의미로 청년에게 술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딱딱한 얼굴로 받아든 청년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유리 장식장에 술병을 넣어두었다. 수년 전, 누군가 청년의 집에 장식된 술에 대해 물었더니 선생님의 선물이었다고 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지금도 그때처럼 아예 손을 대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을 것이다. 청년이 술을 그렇게 즐기는 편이 아니라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는 이런 걸 선물받으면 바로 따는 편인데, 자네는 어때? 마실 생각은 있나?”

……마실 줄은 압니다.”

무리하진 마. 말만 받아줘도 되니까.”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곤 집으로 들어섰다. 과거 사내가 자신을 제자로 여긴 때, 이곳을 자주 들락거렸던 것이 떠올랐다. 정식으로 강의를 듣는 학생도 아니었던, 보수를 받으며 곁에서 일을 도왔을 뿐인 자신을 사내는 퍽 아껴주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제자라 소개하면서 몇 가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어쩌다 습작이 담긴 노트를 들킨 후부터는 아예 집에 데려와 조언을 해준 일도 여러 번이었다. 이국에서 와 의지할 사람 없이 다니던 청년에겐 사내의 호의가 힘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은 타지를 다니면서도 간간이 사내를 떠올렸다. 연락을 할까 하다가도 그러다 마음이 약해질까 싶어 그만두었다. 그동안 사내를 처음 만났던 이 도시에 몇 번 들렀으면서도 청년은 일부러 사내의 소식을 듣지 않으려 했다. 이번에 편집자 쪽을 통해서 말을 흘리고 찾아가기로 한 것은 청년조차도 이유를 모를 변덕에 불과했다.

그래, 잘 지내고 있고?”

, 특별한 일도 없고요. 가끔 생존신고처럼 책을 내는 게 전부예요.”

말은 그렇게 해도, 책은 낼 때마다 평이 좋던데. 솔직히 나도 자랑스러워.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해줬어.”

선생님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죠. 마이아미를 떠나기 전에 감사하단 인사는 드렸어야 했는데.”

인사 들으려고 한 일도 아니고, 그때는 갑자기 생활이 바뀌어 정신이 없었겠지. 그런 것보다, 찾아와줘서 고마워.”

시간의 공백이 있었던 관계이기에 그들이 술을 따면서 시작한 이야기는 과거의 사건이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된, 십수 년 전의 일.

그 날, 사내는 연구실에서 우연히 노트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제 것이 아닌 노트가 있어 별 생각 없이 펼쳤을 뿐이었다. 내용을 훑다 그 안에 담긴 게 이야기인 걸 깨달은 때부터, 사내는 노트에 빼곡히 적힌 글을 정신없이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노트의 주인이 돌아와 몇 걸음 밖에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으나, 눈치채고 노트를 내려놓기는커녕 참다못한 청년이 그에게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결국 한두 페이지만 남겨두었을 때 청년이 소리를 냈다.

[지금 보고 계신 것,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 미안하군. 그쪽의 것이었나?]

[, 실수로 두고 나와서 찾으러 온 겁니다.]

딱딱한 목소리에는 눌러 참은 불쾌가 배어있었다. 사적인 것을 타인에게 보였다는 점 때문일까. 사내는 노트를 받고 돌아선 청년의 등에, 엉뚱한 말을 꽂았다.

[이건 소설이겠지?]

[바로 눈치채셨을 줄 알았는데요.]

[그럼, 자네가 직접 쓴 글인가? 그게 궁금한데.]

[그렇긴 합니다만 그런 시시한 글은 빨리 잊어주셨으면 좋겠네요.]

[쿠로사키 군, 글을 제대로 써볼 생각은 없나?]

청년이 돌아보았다. 금빛 눈이 한동안 사내를 담았으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청년의 답을 기다리는 동안, 사내는 자신이 게걸스레 삼킨 문장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문장들로 엮어낸 이야기까지. 청년의 글은 다소 투박했지만 독자를 몰입시키는 힘이 있었다. 분명히, 청년에겐 재능이 있다. 조금만 도우면 분명 재능을 꽃피울 것이다 보석을 발굴해내는 걸 즐기는 사람으로서, 사내는 청년이 빛날 때까지 지원해줄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살짝 흥분한 채였던 사내에게 날아든 것은 냉랭한 답변이었다.

[제게 그럴 능력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물론 사내의 열망은 그렇게 간단히 꺾이지 않았다. 그 후로도 청년은 사내를 만날 때마다 똑같은 권유를 받아야 했다. 거절하기도 피로하도록 반복된 제안에, 결국 청년 쪽이 먼저 포기하고 말았다.

자네가 몰랐던 건 내가 꽤 끈질긴 사람이었다는 거야. 한두 번 거절당하는 것으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 눈앞에 당장 미래가 기대되는 자가 있는데. 사람에게서 가능성이 보이면, 좋은 환경에 노출시켜야 해. 계속 자극하고 지원하며 능력을 키워야지.”

그런 점에서, 저는 어땠습니까. 쿠로사키 슌은 성공했을까요?”

그건 대중의 반응으로도 알 수 있지 않나? 독자를 멍청한 존재로 묘사하는 부류도 있지만, 난 그렇게 보지 않아. 다수의 호평을 받는다는 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거지.”

……한 번만, 딱 한 번만 시도할 생각이었어요. 하도 끈질기게 권유하시니 예의만 차리고 영영 잊을 생각이었다고요.”

그런 것 치곤 끈덕지게 글을 쓰고 있는데. 막상 이 길에 들어서니 매력적인가?”

마음이 조금 바뀌어서요. 글을 쓰려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이유?”

남기기 위해서죠. 머리에 들어찬 이야기를. 기록이란 건 사람보다 생명이 길어요.”

말을 마친 청년은 그제야 술잔을 들었다. 사내가 이미 몇 잔을 마신 시점이었다. 몸이 데워지기 시작한 사내는 천천히 몇 모금만 넘기는 청년을 바라보다가 오랫동안 속에 넣어두었던 말을 꺼냈다.

난 언젠가 자네에게 묻고 싶었어. 왜 쿠로사키 슌의 글은 언제나 비극일까.”

다른 것을 택했으면 하시는지요.”

아니, 자네 글은 잘 만들어진 비극이지. 다만 언제나 비극을 택하기에 궁금했을 뿐이야. 자네는 비극을 이야기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생각했더니 비극일 뿐인가?”

글쎄요.”

느릿느릿 잔을 비운 청년이 웃었다. 저렇게 풀어진 모습은 청년을 오래 지켜봐온 사내에게도 진귀한 풍경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청년은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성숙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젊은 육체에 살아온 시간의 몇 배는 늙어버린 정신이 잘못 깃들고 만 것 같았다. 이미 세상의 모든 걸 넘어온 듯 덤덤한 모습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 많아 주변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 가는 곳마다 음침하다는 말이 따라붙었던 것 같다. 청년의 얼굴에 자주 걸쳐지는 피로와 무기력함은 육체와 정신의 나이가 일치할 즈음에야 사라질 줄 알았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며 조금은 풀린 것 같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에 비해 청년은 많이 가벼워진 얼굴이었다. 꾸준히 글을 쓰면서 그동안의 우울과 무기력함을 덜어내기라도 한 것일까. 혹 글과 아무 관련 없는 뜻밖의 즐거움이 생겼을 뿐이라 해도, 아끼는 사람의 평온한 모습을 보는 건 사내에게 기쁜 일이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머릿속에 있는 게 죄다 비극이라고 해야겠죠. 하지만 그건 특별히 생각한 게 아니에요. 오래 전부터 기억하고 있던 것.”

경험을 기반으로 글을 써왔단 건가.”

사내가 처음 발견한 글, 청년의 노트에 적힌 글은 일기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이었다. 경험을 각색해, 가볍게 쓰기 쉬운 일기 형식으로 이야기를 채우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글의 내용이 제법 무거웠다는 건 마음에 걸리지만, 사람은 살면서 몇 번쯤은 고난을 겪지 않던가. 사내는 아마 누구도 모를 비밀을 하나 알게 되었다는 점에 살짝 들뜨기까지 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술을 마시면 현재는 희미해지지만 과거가 생생해져요. 제 글의 뿌리가 되는 기억들이. 그래서 가끔 글을 쓰다 술을 마시기도 하죠. 술이 아니라 과거에 취하는 것 같아요.”

의외로 감상적인 면이 있었군.”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억인데, 자꾸만 그 속에 파고들어요. 이상하죠, 비극은 중독성이 강한 것 같아요.”

청년의 시선이 사내의 방 책꽂이에 닿는다. 지금까지 자신이 낸 모든 책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작가가 된 이래로, 청년은 자신의 책을 받을 때마다 편집과 인쇄 상태만 확인할 뿐이었다. 그나마도 확인이 끝나면 아무렇게나 던져두었지만, 세세한 내용은 아마 제 책을 즐겨 읽는 사내보다도, 혹은 많은 독자보다도 선명하게 꿰고 있을 것이다. 익숙한 사건이, 아는 문장이 생명을 얻는 게 두려워 책을 펼치는 걸 꺼렸다.

선생님이 읽으셨던 습작이요, 사실은 소설이 아니었어요.”

그러면?”

일기 같은 것이요. 기억나는 날을 전부 기록한, 정말 개인적인 글. 처음부터 소설이라고 생각하셨죠? 왜 그랬을까요, 하루하루의 기록이 너무 비참해서?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이건 비현실이라고 못을 박아서?”

그럼 그 글이 1인칭이었던 게…….”

제 이야기였기 때문이죠. 거기 등장하는 이름들, 전부 제가 알던 사람의 이름이고요. 그래서 책으로 낼 땐 다 수정한 거예요. 불편하잖아요? 자기 기억을 날것으로 내놓는다는 건.”

문득 사내는 청년이 제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오랜 설득 끝에 결국 청년은 글을 세상에 내놓았고 사내가 호기롭게 말한 대로 데뷔작부터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청년이 소설에 정을 붙인 것은 아니었다. 작가로서 성공을 거둔 지금까지도 청년은 자신의 글에 대해선 냉랭하다.

아직 작품에 만족하지 못한다,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명백히 자신이 낳은 이야기를, 소름 끼치게 무거운 비극을 그는 언제나 자신의 얼룩처럼 취급했다.

자네, 기억하고 있는 게 전부 비극이라서 비극만 쓴다고 했지. 그 말은 지금까지 쓴 다른 글도 그렇단 뜻인가?”

글쎄요, 어디까지가 제 경험일까요? 맞혀보시지 그래요.”

청년이 불쑥 물어왔다. 금빛 눈이 무섭게 번득였다. 사내는 제자의 눈에서 지금과 같은 열기를 읽어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청년의 기세에 눌려, 사내는 지금까지 제자의 글에 등장한 사건들을 빠르게 떠올렸다.

경험이 강하게 영향을 미친 건 아무래도 초기 작품이겠지. 자네의 두 번째 소설에서 주인공의 친구가 의식불명 상태가 되는 것? 아니면 그 다음 소설에서 고향이 폭격당한 주인공이 이국으로 도망치는 것?”

조금 더요.”

범위를 좀 더 넓혀야 하나? 몇 년 전에 낸 책에서 주인공의 협력자가 적에게 허망하게 패하는 것까지?”

실망인데요, 아카바 선생님.”

청년은 낄낄대더니 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독한 술을 단번에 속에 털어 넣은 청년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짧은 말이 섬뜩하리만치 묵직했다. 표정이 싹 사라진 얼굴은,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헤매던 시절의 그를 떠올리게 했다. 남들은 모를 어둠을 지고 다니던 청년. 스스로 방어막을 치고 다니던 때의 제자. 할 말을 찾지 못한 사내에게 날아든 건 더욱 끔찍한 말이었다.

전쟁으로 고향이 폐허가 된 것도, 동생이 납치당한 것도, 마음을 연 친구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것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적과 악수하고 그들의 자비를 기다려야 했던 일이 전부 내 경험이라면? 그쯤 되면 소설을 쓴다는 게 삼인칭으로 일기를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

말투 또한 급변했지만, 청년의 말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탓에 사내는 거기까지는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갑자기 완전히 다른 사람과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전까지 자신이 봐온 청년은 제 나름대로 포장한 모습에 불과했을까. 이 모습이야말로 청년의 본모습이고,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그동안 청년이 숨겨온 것이었을까.

그래서 나는 내가 쓴 책을 싫어해. 타자의 시선에서 볼 수가 없어. 그걸 보는 순간 다시, 고통 속에서 발버둥치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단 말이야.”

나를 만나기 전 도대체 어떻게 살았던 거지?”

그렇지, 나도 그게 궁금해. 어떻게 미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 아니면 이미 미쳐있는데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걸까. 내 삶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은 정말로 언젠가 일어난일일까?”

거기서 사내의 머리를 스치는 의문이 있었다. 청년의 기록에서 공백이 있는 건 이 나라에 오기 전 수년간의 기록뿐. 그 앞뒤로는 특별한 사건이 없었으므로, 청년이 소설에 담은 끔찍한 불행을 겪은 시기라면 아마 그 기간일 것이다. 그런 것 치곤 청년이 책에 담아낸 비극의 경험은 너무 많았다.

지독한 운명을 타고나 삶의 모든 순간이 불행이었다 해도, 그만한 사건은 한 사람이 다 겪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청년은 과거, 사내에게 시간만 허락된다면 책으로 써낼 이야기는 수십 권은 될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청년이 쓰려고 했던 이야기가 전부 그의 경험이라면, 그의 삶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어차피 누구도 증명해줄 수 없는 삶인데.”

이해가 되지 않아. 자네의 모든 소설이 기억을 글로 옮긴 것이라면, 어떻게 그 많은 사건을 전부 겪고 살아올 수 있었는지. 여러 곳에서 동시에 다른 일을 겪지 않고서야, 그런 건.”

확실히 보통의 논리로는 불가능해. 하지만 그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그쪽이 말했지.”

여러 곳에서 동시에 겪는다.”

바로 그거야.”

청년은 과장되게 손뼉을 쳤다. 사내는 괴담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오싹해진다.

하지만 어떻게?”

만약에 말이야. 당신이 극한의 절망 앞에 주저앉았는데 갑자기 하나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자.”

무슨?”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 , 이곳과는 다른 세계에서 시작해. 어떤 상황이 당신을 기다릴지 모르지. 선택할 거야?”

선택해야지.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당신은 실패했어. 이번에도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졌지.”

설마.”

지나치게 성숙한 내면. 세상의 모든 걸 이미 꿰뚫고 있는 듯한 태도. 무엇에도 크게 의욕을 보이지 못했던 무기력한 모습. 간간이 튀어나오는 극도로 냉소적인 말. 세상에 찢길 대로 찢긴 듯 황폐했던 과거의 청년에다 그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비극이 겹쳐진다. 하나만으로도 삶을 뒤흔들 불행이 일상처럼 쌓인 청년의 책. 건조한 문체로도 청년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지독하게 생생했다.

청년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절망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이미 많은 실패를 겪었으리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었다. 비극을 끊으려는 노력 끝에 절망스런 기억만 하나 더 얻게 되고서.

그걸 수없이 반복한다면, 보통 사람은 죽을 때까지도 다 겪지 못할 일을 몇 년 안에 전부 경험하지 않겠어?”

대체 몇 번이나 택한 거지?”

글쎄, 징그러워서 세지 않았거든. 이 세계에서 드디어 끝냈다고만 말해두지. 이곳에서 그럭저럭 평범하게 지내다, 언젠가부턴 당신 바람대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차라리 세상에 기록이라도 남기자. 꾸며낸 이야기인 체 내 기억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적당히 모르는 척 하고 살자.”

하나만 묻지. 이 세계는 자네에게 성공적이었나? 그래서 더 시도하지 않기로 한 거야?”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청년의 목소리는 그의 글처럼 지독하게 건조해, 도저히 술김에 나오는 헛소리로 여길 수 없다. 청년이 꺼낸 오싹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사내는 확인해야만 했다. 이곳이 그에게 버틸 수 있을 세상인지를. 그의 불행이 종료되었는지를. 그렇게나 절망의 늪에 빠져있었다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것은 희망이어야 하니까.

성공했느냐고?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겨우 평화를 잡았어.”

드디어 불행하지 않게 된 거군.”

불행할 기회를 빼앗겼지.”

그러나 사내가 들어야 했던 건 마지막 기대마저도 꺾이는 처참한 말이었다. 차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깊은 나락.

나는 언제나 잃어서 불행했어. 동생을, 친구를, 동료를, 세상을. 그런데 여기는 그럴 일이 없더라고.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동생도, 친구도,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사내는 청년의 인간관계가 지나치게 깨끗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등록된 가족도, 고향의 친구도 없다. 그가 만든 인간관계란 그저 사내와, 사내에게서 연결된 몇 명뿐이었다. 이국에서 왔다기에 혼자 온 것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이쯤 되면 최악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청년이 자신과 연결된 모든 것이 지워진 세상에 닿았을 경우.

이 세계는 지금껏 내가 선택한 세상 중에서 가장 행복하고, 또 가장 잔인한 곳이야.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들을 잃어 불행할 일은 없게 되었다 재미있지 않아?”

결국 청년의 비극은 끝났다. 불행해질 수도 없어서.

이런 비극은 신선하잖아. 언젠가 지금 말해준 것으로 책이라도 한 권 쓰는 건 어때? 내가 쓴 비극도 팔리는 판에 이런 미친 이야기가 안 먹힐 것 같진 않은데.”

그런데도 지금까지 견디고 사는 건가.”

사람이 너무 많은 걸 겪고 살다 보면 말이야, 머리가 늙어. 모든 불행에 다 신음할 수는 없단 거지. 더 도전할 힘도 없으니까, 세상과 타협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청년은 묘한 웃음을 걸친 채 사내에게 시선을 향했다. 금빛 눈이 소용돌이 같다고, 사내는 생각했다. 그 눈은 아마 최악만을 담았을 것이다. 어쩌면 사내의 삶 전체보다도 긴 시간을 헤매며 절망에 길들여졌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보통의 인간이 들여다보기엔 너무 깊은 심연이었다.

나한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야.”

왜 비극을 쓰는지 물었으니까. 이제 이해할 수 있겠어?”

무엇을, 자네의 글을?”

내 삶을.”

속에서 치미는 말은 많았으나, 사내는 차마 답을 할 수 없었다. 청년이 지금껏 풀어낸 이야기에 완전히 압도당한 탓이다. 침묵이 공간을 짓눌렀고, 청년은 굳이 답을 재촉하지 않는 대신 천천히 사내와의 거리를 좁혔다. 마침내 숨이 닿을 정도로 두 사람이 가까워졌을 때.

선생님.”

익숙한 호칭에 사내는 정신이 들었다. 눈앞의 청년에게서 그를 긴장시킨 섬칫함은 찾을 수 없다. 과거 이 집을 들락거렸던, 그가 아꼈던 제자만 있을 뿐이다.

괜찮으세요? 표정, 정말 굳어있는데. 몸이 불편하다면 쉬시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난 괜찮아. 그보다 자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그러자 바로 바람 빠진 웃음이 돌아왔다.

물론 지어낸 거죠.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그러다간 미쳐버릴 거라고요. 설마 그것 때문에 긴장하신 건 아니겠죠? 그렇다면 정말 죄송스러운데.”

아니, 자넨 분명 진심이었어.”

이거, 저도 이야기를 꾸미는 능력이 좋아진 모양이군요. 기뻐해야 할까요.”

청년은 오히려 곤란하다는 눈치여서 사내는 말을 더 꺼낼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의 대화는 아무래도 사내만 몰입한 연극이었던 것 같다. 청년의 말대로 지어낸 이야기라면 차라리 나을 것이다. 내면이 단단한 사내로서도 청년이 꺼낸 이야기까지는 감당하기 어렵다. 그나마 사내는 타인이라고 해도, 만일 모든 게 사실일 경우 당사자인 청년이 얼마나 황폐해졌을지는 상상하기도 무섭다.

사내는 완전히 비운 술병과 차분해진 청년을 번갈아 보았다. 정말로 아까의 대화가 가벼운 안주거리에 불과했을까? 묵직한 비극을 몇 편이나 써낸 청년이 즉흥적으로 최악의 비극을 이야기한 것뿐일까? 그러나 모든 것이 끔찍하리만큼 선명했다. 청년의 섬뜩한 속삭임도, 자신을 바라보던 심연 같은 눈도, 모두 제 경험이었다고 주장한 처참한 비극도.

시간이 너무 늦었군요.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청년이 의자에 걸쳐두었던 코트를 챙기며 말했다. 시계를 보니 정말로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누구도 모르는 터널을 홀로 지나온 듯 사내는 피로해졌다.

그래, 더 붙잡아두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군.”

다음에 시간 될 때 연락드리지요.”

고개를 꾸벅 숙인 청년은 책꽂이에 꽂힌 자신의 책에 마지막으로 시선을 주고는 그대로 현관으로 향했다. 배웅하겠다고 따라 나선 사내는 제자에게 문을 열어주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자네가 한 이야기, 어디까지 믿으면 되지?”

그 아래 깔린 것은 알량한 유혹이었다.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서, 청년이 아까의 대화를 확실하게 가짜로 규정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 그래서 더는 그 기괴한 이야기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 막 집을 나서려던 청년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언뜻, 저를 바라보는 제자의 시선이, 청년의 입가에 걸쳐진 웃음이 꼭 어린아이를 달래려는 어른의 태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럴듯했던 모양이지요. 이렇게 관심을 보이시는 걸 보니.”

내가 그동안 아끼는 제자의 고통을 읽어왔을까 싶어 그래.”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에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기다리던 말에 그대로 사내가 마음을 놓으려는 때, 청년이 속삭였다.

그래. 그냥, 소설 같은 거라고 치자.”

그 다음은 어떤 비극보다도 처참한 말이었다.

나도 평생 그렇게 생각하고 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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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