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지+슌] 공범

2018. 7. 30. 19:59 from 02

 

젊은 사장은 거대한 유리관을 배경으로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에게는 드물게 여유로운 시간이다. 오래도록 매달리던 일을 성공적으로 끝낸 덕분인지 얼굴에도 제법 부드러운 웃음이 걸려있다.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평온한 풍경을, 사장의 오른쪽에 선 사내는 무엇 하나 놓칠까 하나하나 눈에 담는다. 사장의 맞은편에 손님처럼 앉은 청년만 제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심적으로 연결된 게 분명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게 껴있을 뿐이었다.

사장이 제 곁에 두는 것은 두 명, 오랫동안 비서로 있는 사내와 별 직책은 없으나 사장이 비서와 거의 대등하게 신임한다는 청년. 사내야 언제든 사장을 눈으로 쫓는다. 그에게 젊은 사장의 곁을 지킨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반대로 청년은 특별한 자리를 맡지 않아서인지 본인의 성정 탓인지, 어느 순간에든 자유롭다. ‘충성스러운수하로는 애초에 맞지 않는 인간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청년은 사장이 아닌 사장의 뒤쪽, 유리관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에 시선을 두고 있다.

사장의 집무실을 찾을 때면 청년은 저 의문의 물질에 쉽게 시선을 빼앗긴다. 들여다보는 눈에 담기는 것은 호기심 같기도 하고 두려움처럼 보일 때도 있어, 청년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청년이 자꾸만 신경을 쓸 정도로, 그에겐 제법 의미를 갖는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표면적으론 사장이 비밀스레 연구하는 것인데, 어쩌면 청년에게는 저것에 대해 살짝 정보를 흘렸을까. 알고 있는 것이 있어 청년은 저것에 열중하는 것일까.

저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지만 사내는 어떤 질문도 입 밖에 내진 않는다. 사장이 비밀로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묻기도 조심스러울뿐더러, 청년을 통해 간접적으로 듣는 것은 내키지 않아서였다. 오랜 기간 곁을 지켜온 젊은 주인에게 무슨 뜻이 있겠거니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연구의 윤곽이 잡힐 때가 되면 자신에게도 정식으로 정보가 들어올 것이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으니까. 사장에게 있어 중대한 모든 계획은 사내와 공유해 진행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청년은. 사내와 함께 사장의 사람으로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청년은.

사내와 비교하자면, 청년이 사장의 곁을 지킨 시간이란 한참이나 짧았다. 겨우 몇 년 남짓. 완전한 타인으로, 그것도 껄끄러운 관계로 시작했던 그들인데 이런 관계에까지 왔다. 인간이라기보다 병기로 취급받던 청년이라, 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은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 사납고 경계심 깊은 포식자를 사장이 기어이 길들이고 말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다만 사장이 어떻게그렇게 만들었는지, 그 과정에 청년에게 무슨변화가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에 읽은 글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더군. 망자의 클론을 만들어냈을 경우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데…….”

사장은 책장을 넘기며 말을 던졌다. 청자를 특정하지 않은 말이라지만 청년은 아예 들을 자세가 아니었다. 처음 회사로 들어왔을 때나 지금이나, 청년의 불손함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장은 특별히 꾸짖지 않는다. ‘내 사람이 되어준 자라면 그 정도쯤은 눈감아줄 수 있는 것인지.

그러나 사장이 청년을 아끼는 방식은 단순히 제 사람을 아끼는 것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은밀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꼭 교묘한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나, 더 나아가 공범을 감싸는 것 같은. 사내는 어느 날 갑자기 청년이 사장에게 저와 비슷한 정도의 신임을 얻었단 것보다 바로 그 묘한 기류가 신경 쓰인다. 청년이 사장에게 무엇이 되었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다.

……라는 의문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지? 나카지마.”

?”

죽은 사람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클론을 만들었을 때, 그것을 망자의 재현이라고 볼 수 있는가. 그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

기억에 짧게 공백이 있었다. 청년에게 관심을 두는 동안 잠깐 외부의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다. 별 의미 없는 것에 신경을 쓰느라 사장의 말을 놓칠 뻔했다. 사내는 자신의 부주의함을 탓하며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우리는 일란성 쌍둥이를 같은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유전정보가 같은 두 인간이라도 분명히 다른 존재로 인식하죠. 비슷한 환경에 놓아두었을 때 비슷하게 성장할 확률이 높고, 때로 이질적인 환경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긴 하나 한쪽이 다른 쪽의 삶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각자 다른 삶을 시작하니까요. 클론도 마찬가지. 신체며 자아를 최대한 망자에 가깝게 구성한다고 해도, 원본과 전혀 다른 환경에 놓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될 별개의 인간을 본인의 재현으로 볼 수 있을까요? 데이터를 과신하는 것이거나 변화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는 겁니다.”

그럼 쿠로사키는?”

사장은 맞은편의 청년에게 시선을 향했다. 청년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지만 사장의 눈은 한참을 청년만을 담았고, 집요한 관심을 피하지 못한 청년은 결국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아의 재료가 어떤가에 따라 다르겠지. 만일 클론의 자아가 타인의 기억에 의존해 재구성한 것이라면 그건 재현이라기보다 재창조에 가까운 것일지도 몰라. 그러나 본인이 살아있을 때의 자아를 데이터로 남겨두었다 클론에 이식한다면? 그것을 가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금 더 설명해줬으면 하는데.”

같은 인간이라도 사건을 겪으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기도 한다. 망자가 살아남았다면 어떤 길을 겪게 되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 그렇다면 망자가 틀림없이 그 사람이었던 때의 자아가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자료가 되지 않겠어? 그걸 이식한 클론이 보여주는 건 망자가 선택할 확률이 가장 높았을 삶이 될 거다. 이 경우라면 클론을 망자의 재현이라고 보는 것 이상으로, 어쩌면 망자의 삶을 연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지도.”

그렇게 따지면 망자는 영원히 생존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클론이 죽으면 그 클론의 데이터를 새로운 클론에 이식하고, 또 이식하길 반복하는 식으로. 과거의 단편을 잘라낸 데이터에만 의존해 단절된 사람을 계속 왜곡하는 과정이겠지만.”

사내가 끼어들어 빈정대자 청년은 대화의 방향을 슬그머니 돌려버린다.

이쯤이면 말해주지 그래, 사장. 본인의 의견. 나카지마와 내 의견 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 아니면 다른 의견이라도 있는지. 그쪽이 자기 의견으로 논의를 끝내지 않는 한 우리 둘의 대화는 내내 평행선일 거야.”

쿠로사키의 의견에 좀 더 가깝다고 해두지. 엄밀히 따지자면 어느 쪽도 진짜와 같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지만,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가능성은 있는 거니까.”

가능성을 믿고 싶다는 뜻일까요.”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데이터를 신뢰하는 것일 수도 있지. 하나 확실한 것은 보존된 데이터가 본래 망자의 것이었다는 사실. 적어도 보존한 시점의 발상은 본인의 것이다.”

의외로군요. 사장님이라면 좀 더 엄격한 결론을 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는 희망을 믿고 싶은 사람이야. 기본적으로는. 걸어볼 수 있는 희망이라면 걸어보는 거야.”

그러니까 랜서즈를 결성해 아카데미아에 맞선다는 발상도 가능했겠지.”

대화에서 빠져있던 청년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전 두 사람이 얽혔던 일에 대한 언급에 사장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스쳤다 사라졌다.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알 수가 없군. 그래서, 어땠지? 내 계획은 성공적이었나? 아카데미아에 가장 직접적으로 맞섰던 너에게 듣고 싶은데.”

성공의 기준이 한없이 낮은 내게 들어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우리의 입장에선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지. 전쟁을 끝내고 관련자에 대한 처벌을 논의하게 되었으며 구해야 할 사람은 구했다. 만족할 수 있지 않나?”

그건 가 성공했다는 뜻?”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리더로서의 너는 그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냈어. 이 말이 듣고 싶으셨는지?”

. 그래. 아주 만족해.”

말에 담긴 내용만큼 흡족한 목소리에 청년은 빠르게 시선을 돌린다. 그의 눈이 담아내는 것은 유리관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것. 의문의 물질에 자꾸 시선을 빼앗기는 것은 그 본질을 알기 때문이다. 사장의 연구를 도운 수많은 연구원도 사장의 곁을 오랫동안 지켜온 비서도 모를 것을, 그만이 알기 때문에 신경이 쓰인다. 그 실체를 생각하면 청년은 사장의 질문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굳이 자신의 의견을 물은 것도 짓궂은 장난으로만 느껴진다.

그 안에 담긴 것은, 클론의 바탕이 될 물질. 이전부터 사장이 혼자 연구해온 것이자, 이미 몇 년 전 청년이 죽은 사람을 클론으로 재현하는 데 사용한 것이었다. 그때 되살려낸 사람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는데. 심지어 지금, 바로 맞은편에서 청년을 바라보고 있는데.

청년은 때로 사장의 눈에서 심연을 읽는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

 

두 사람, 청년과 사장은 전쟁으로 만났다. 청년이 사장의 삶에 뛰어든 것도, 사장이 청년을 받아들인 것도 결국은 전쟁 때문이었다. 청년의 나라에 전쟁이 닥치지 않았더라면, 그 전쟁을 일으킨 것이 사장의 아비가 아니었다면, 사장이 자신과 무관한 타지의 전쟁을 막으려 들지 않았다면 둘은 애초에 얽힐 일이 없었다. 그 전까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던 두 사람이었고 바라보는 것도 전혀 달랐다. 관계의 시작이란 청년이 전쟁의 근원을 파헤치다, 침략자의 아들인 사장을 찾아간 것. 그때 사장이 청년을 제 편으로 끌어들여 아비를 쓰러트리려 하지 않았다면 둘은 거기서 그대로 끝났을 것이다.

같은 적을 두었다는 것은 껄끄러운 바탕도 서로간의 경계도 넘어설 수 있게 해서, 둘은 공동의 적 앞에 빠르게 협력했다. 고향에서 몇 안 되는 생존자와 함께 침략자와 맞서왔다는 청년에게 사장이 제안한 것은 그가 결성할 저항군의 일원이 되는 것. 멤버 대부분이 따로 훈련받은 군사도 단단한 성인도 아닌 우수한 소년들이라는 게 다소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힘이 필요했던 청년은 제안을 수용했다. 따져 보면 자신도 훈련받지 못한 채 전쟁에 내몰린 인간이었고 살아남는 것이란 훈련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계획대로 저항군을 결성해, 전장으로 나서기 직전. 청년은 사장을 찾았다가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거대한 유리관이 사장의 집무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청년이 오래도록 그에 시선을 두고 있자, 사장은 청년이 묻기 전에 미리 그 정체를 말해주었다.

[연구를 하나 하고 있는데 말이야.]

사장은 유리관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을 가리켰다. 정체불명의 물질은 제대로 된 형체도 없이, 그저 관 속에서 끝없이 움직일 뿐이다.

[이건 타자를 모방해 살아가는 것.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어도 모방할 데이터만 있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어. 클론은 아니지만 클론과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나는 이걸 클론의 바탕으로 취급해.]

[빈 껍질인 셈이군.]

[그렇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빈 캔버스 같은 것. 직접 실험한 적은 없지만, 어쩌면 인간을 똑같이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할지도?]

[만들어내고 싶은 사람이 있기라도?]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으나 청년이 돌려받은 건 제대로 된 답변이었다. 사장은 유리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답했다.

[그런 건 없지만, 만일을 대비해 데이터는 준비해뒀다. 혹 문제가 생길 때 이걸 이용해 임시로 대체자를 내세울 수 있도록 랜서즈 전원의 데이터를 정리했지.]

[그 말은, 랜서즈에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 랜서즈의 클론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

[, 불쾌한가?]

[별로. 어차피 데이터일 뿐인데. 인간을 똑같이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명확하지도 않고,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만들 일도 없지. 하나 궁금한 건 왜 네 데이터는 준비하지 않았냐는 거야. 너는 랜서즈의 리더로 함께 움직이게 될 거다. 리더의 부재나 사고는 멤버의 문제 이상으로 타격이 클 수밖에 없어. 랜서즈의 데이터를 준비할 거면 네 데이터도 남기지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청년은 별 생각이 없었다. 사장의 말에 장단을 맞춰줄 뿐 멤버의 사고나 클론 등의 만일의 상황에까진 관심이 닿지 않았다. 최악의 사태가 일어난다면 어차피 어떤 대비도 무의미하다. 순간순간의 최선을 찾는 게 가장 안전한 길이라 생각하는 청년이었지만 거기까지 말할 이유는 없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겠지만, 대비한다면 완벽하게 하는 게 좋겠지.]

청년의 말을 진지하게 들은 것인지 사장은 오래지 않아 자신의 데이터까지 준비했다. 아마 영영 사용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것은 이후 정말로 필요한 것이 되었다.

저항군은 꽤 운이 좋은 축에 들었다. 회사를 떠난 후로 침략군이 침투한 곳을 여럿 넘었으나 그동안 사장의 대비책을 사용할 일은 없었다. 희생자도, 크게 부상을 입은 자도 없었던 덕분이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적의 본거지를 치기 직전이었다. 거기서 잃어선 안 될 사람을 잃었다.

그 날, 청년은 리더와 단둘이 나섰다. 전사로 나서는 일은 드문 리더였지만 사실 그 전투력은 최상이었다. 웬만한 적이라면 작정하고 덤벼들어도 간단히 압도할 수 있으리라. 다른 멤버와 함께 움직일 때면 상대의 몫까지 두 배로 주의를 기울이곤 했던 청년은 리더와 함께일 땐 그가 알아서 제 몸을 지킬 것이라 믿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 날도 리더가 앞서가는 동안 청년은 탐색에 집중하고 있었다. 갑자기 끔찍한 폭음이 귀를 때려 주위를 둘러봤을 땐 리더가 있었을 곳이 뿌옜다.

보통의 공격이라면 방어할 수 있다. 다만 인지할 수 없는 함정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위험하다. 그 즈음 적의 트랩에 당한 자들이 여럿 있다고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연기가 걷히자 아무래도 불길한 실루엣이 비쳤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불길함은 짙어졌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쓰러진 사장은 꼼짝도 않았다. 즉사였다.

상황을 확인하자마자 청년은 멍해졌다. 조금 전까지 자신과 함께하던 사람의 죽음이어서가 아니라 리더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죽음이 흔한 전장에 있었던 청년에게 죽음의 충격이란 그리 크지 않다. 아는 이의 죽음이라도 어쩔 수 없는 불행으로 넘기고 빠르게 다음 싸움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에게는? 훈련받지 않은 학생으로 급작스레 구성된 저항군은? 주변인의 죽음은 그들을 혼란과 두려움에 빠트릴 게 뻔했다. 무엇보다, 청년에겐 몰라도 그들에겐 명확하게 행동을 지시할 리더가 필요했다. 죽은 사람만큼 리더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없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청년은 우선 자신의 옷으로 시신을 감싸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웠다. 당장은 누구에게도 그의 죽음을 알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서. 사장은 청년이 쥘 수 있었던 마지막 패였다. 이제 어디서도 그 이상의 지지자를 얻을 수 없다. 그렇다고 지금의 싸움을 포기할 것인가? 혹은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 것인가? 리더를 잃은 멤버를, 혼란에 빠진 소년들을 그대로 전장에 내몰 것인가? 전부 선택할 수 없는 길이었다.

다급한 상황에서 청년은 사장이 저항군을 결성한 직후 자신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려냈다. 멤버의 부재나 부상을 대비한, 백업본. 거기에는 자신의 제안으로 끼워 넣은 사장의 데이터도 있을 것이다. 청년은 사장이 준비한 빈 껍질을 찾아내 거기다 사장의 데이터를 덧씌웠다.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으니 지금의 싸움만 끝마칠 수 있기를 기원하며. 그때 청년의 머리를 지배하는 것은 사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아니, 사장 그 자체라기보다는 사장의 역할을 대신할 무언가만 있으면 되었다. 불완전한 클론이든 뭐든, 사장의 능력과 판단력만 재현해낼 수만 있다면.

조금 늦은 시간에 청년은 리더와 함께 돌아왔다. 늦어진 이유에 대해선 사장이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설명하고서. 다행히 가벼운 부상이라, 전투에는 이상이 없다고 청년은 덧붙였다. 청년의 말도, 그가 데리고 돌아온 사장의 존재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청년만이 비밀을 안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 돌아온 리더는, 이전까지의 그 사람이 아닌 클론이다. 빈 껍질에 사장의 데이터를 덧씌워 사장의 외형과 자아를 흉내 낸 것이다 그것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삼켜야 할 비밀이었다.

오리지널이 아닌리더는 문제도 소란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청년이 바란 대로 사장의 능력과 판단력을 그대로 가져, 저항군을 능숙하게 지휘했다. 사장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있었으니 자신의 역할에 혼란을 겪을 일도 없었다. 오래지 않아 저항군은 리더의 뜻대로, 적을 쓰러트리고 싸움을 마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청년은 그동안 숨겨온 것을 세상에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사장은 죽었고, 회사에든 세상에든 그의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그를 대체하던 클론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지만, 사실에 대해선 제대로 언급해야 한다는 게 청년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생각지 못한 데서 가로막혔다. 사장의 시신을 찾아내 가족에게 넘기려 할 때, 사장이, 정확히는 죽은 사장을 대신하던 클론이 말을 던졌다.

[이제 와서 뭘 할 생각이야?]

어차피 클론은 자신이 클론임을 알고 있었다. 원본은 이미 죽었다는 것도, 자신은 일시적으로 그 자를 대체하는 존재라는 것까지도. 그래서 청년은 별로 숨길 생각도 없이 답했다.

[이제 전쟁은 끝났어.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치워둔 일도 해결해야지.]

[예를 들면, 아카바 레이지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것?]

직접적인 표현에 청년의 눈이 한순간 흔들렸다. 그에게도 사실을 밝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전쟁을 끝내는 데 사장에게 큰 빚을 졌기 때문에 그냥 넘겨버릴 수 없을 뿐이다. 청년의 동요를 읽어낸 것인지 사장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카바 레이지의 시신이 발견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레오 코퍼레이션에 혼란이 닥치겠지만.]

사장의 죽음에 대해선 회사에도 알리지 않았다. 많지 않은 나이에 회사를 짊어진 젊은 사장은 회사를 훌륭하게 키워왔으므로, 그의 공백이 회사에 미칠 영향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끝나진 않겠지. 전쟁 중에 지휘관이 필요해서 지휘관의 죽음을 숨겼다는 걸 누가 납득하겠어? 사실대로 이야기해봤자 네겐 시신을 방치한 것에 대한 비난과 아카바 레이지의 죽음에 관여했을지도 모른단 의심만 날아들 거다.]

[……그래서?]

[먼저 치웠어. 너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나도 가짜로 퇴장하고 싶진 않아서 말이야.]

청년은 바로 빠져나와 시신을 숨겼던 장소로 달려갔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진짜를 대체한 클론이 정말로 진짜의 흔적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것으로 모든 게 덮어졌다. 사장의 죽음도, 클론의 존재도, 청년이 몰래 저지른 일도 전부. 증거가 없으니 사실을 이야기할 수 없다. 설령 고백한다 한들 클론은 사장을 완벽하게 흉내 내, 청년의 말을 무력화할 게 뻔했다. 청년은 침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일 이후로 사장은 무슨 이유에선지 청년을 곁에 두는 것을 고집했다. 사람들 앞에 청년을 자신의 사람이라고 공언하고는 꼭 자신에게 붙어있게 하는 것이다. 청년은 그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 포기한 채 회사에 눌러앉았다. 당장은 대단한 자리를 차지할 능력도 명분도 없어, 공식적으론 맡은 것이 없었지만 청년이 사장의 신임을 받는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이 되었다.

당연히 청년의 행동은 사내의 시선 속에 들어왔다 비밀 유지를 위해서였을까, 청년은 사장의 시선을 느끼며, 때로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유일하게 제 정체를 알고 있는 자를 자기편으로 여긴 것일까. 어떤 이유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청년은 사장의 뜻대로 몇 년째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사장에게 큰 빚을 졌다는 생각이 청년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곁에 있으면서 청년은 사장이 계속 클론의 바탕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한때 자신의 본질이었던 것에 사장은 꽤 관심을 쏟았다. 거기서 아무래도 자신이 저지른 일이 떠올라, 청년은 어느 날 유리관 속 물질을 들여다보는 사장에게 물었다. 원래의 사장이 준비했던 데이터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아카바 레이지의 데이터는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데이터도 따로 백업하고 있지.]

[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 내 데이터까지 남겨둔 건 새로 시작할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야.]

이제는 내가 또 다른 원본이니까. 사장은 즐거이 덧붙였다. 원본을 흉내 내는 자신의 삶을, 원본 되는 이의 인생의 연장으로 보는 모양이었다. 만일 사장의 클론을 새로 만들게 된다면, 청년이 이전에 사용했던 원본의 자료가 아닌 원본의 삶을 연장한클론의 데이터를 그 자료로 삼으면 된다는 논리였다.

[그럼 그 외의 데이터는?]

[전쟁이 끝났으니 랜서즈의 데이터는 거의 폐기했지만, 너의 데이터는 남겨두었지. 그러니까 너도, 만일 문제가 생기면 나처럼 살 수 있어.]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데.]

[최대한 네 의견을 존중하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네가 필요할 것 같아서, 네 말대로 할 거라고 확언은 못 하겠군.]

클론을 통한 망자의 재현을 이야기하는 클론이 거북해, 청년은 결국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때로 청년은 리더의 죽음을 그대로 알렸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했다. 그랬다면 저항군은 리더를 잃고 누가 되었건 리더로서 부족한 인간에 기대 싸웠을 것이며, 전쟁은 제대로 끝낼 수 없었을지도 모르고, 사장의 장례만은 제대로 치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게 나은 선택이었을까? 목적을 위해 죽은 사람을 되살리고’, 그 죽음을 숨긴 것이야말로 잘못된 것이었을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지금의 청년은 알 수 없다. 죽은 사장이 역할을 다하게 하고 그것으로 여러 사람을 살리는 게 옳았는지, 불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의 최선을 택하는 게 옳았는지. 고민의 끝은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체념이었다. 이미 청년은 사장을 대체할 사장을 만들었고, 때문에 사장의 죽음은 감춰질 수밖에 없었으며, 어쨌든 전쟁은 청년의 바람대로 끝났고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청년이 만들어낸 사장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거기서, 하필 자신에게 클론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답을 받아낸 클론이 떠올랐다. 자신이 막 만들어냈을 때, 보랏빛 눈 가득 자신만 담았던 클론이 떠올랐다. 일러주지도 않았는데도 제 바람대로 움직였던 새로운 리더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내가, 만들어낸. 청년은 그 말을 속으로 굴려보았다. 그 짧은 수식어가 꼭 죄의 고백처럼 느껴졌다.

*

 

청년은 몇 년 전부터 같은 추궁에 시달려왔다. 상대는 사장의 동생으로, 이전에 함께 전쟁에도 나선 적 있는 소년. 사장의 친형제는 아니지만,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한 형에 대한 집착이 깊어 형을 위해서라면 어디까지라도 나설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 소년이 청년에게 집요하게 추궁하는 것은 하나. 휴게실에서 잠깐 눈을 붙였던 청년은 깨자마자 바로 제 눈앞에 바싹 붙어 앉은 소년을 발견했다. 줄곧 기다렸던 듯, 거의 청년이 눈을 뜨자마자 소년이 입을 열었다.

형님을 어떻게 했어?”

언제나와 같은 질문이었다. 지금처럼 사장의 곁에 없을 때,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을 때면 소년은 자주 청년을 찾아와 물었다. 그럴 때마다 옅은 물빛 눈이 꼼짝 않고 청년을 비춘다. 상대의 머리까지 들여다볼 것 같은, 깊고 섬뜩한 눈. 가만히 있다가는 언젠가 먹혀버릴 것 같다고, 회사에 들어온 이래로 줄곧 생각해왔다.

아카데미아에서 너와 단둘이 움직였던 때 이후로 형님은 변했어.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을지 몰라도 나는 알아. 이전의 형님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본인이 들으면 서운해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네가 뭘 했는지 말하면 돼. 어떻게 해서 형님을 저렇게 만든 건지.”

결론을 정해놓고 이야기하면 만족스러운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나? 네가 원하는 답변이 무엇인진 알겠지만 내가 꺼낼 답은 그게 아냐.”

소년의 말이 오싹한 것은 바뀌는 일 하나 없는 질문과 확신이 깔린 추궁 때문이다. 소년은 청년의 를 확신하고 있다. 사장의 변화를 주장하는 것은 물론, 청년이 사장의 변화와 무관할 가능성을 아예 생각지도 않는 것이다. 근거조차 없는 무조건적인 믿음인데,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이 청년에겐 제법 묵직하게 날아든다.

그럼 왜 형님이 달라졌지?”

그건 본인에게 묻지 그래. 왜 예전 같지 않은지. 쿠로사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럴 자신은 없으니까 나에게만 캐묻는 거 아냐.”

심술궂게 받아치면 한순간 얌전해진다. 청년은 침묵을 틈타 빠져나갈 길을 마련한다.

그때, 사장은 부상을 입었다. 자신이 믿는 것만으로 전쟁을 해결할 순 없다고 느끼고 태도를 바꾸었다고 해도 놀랄 것은 없어. 믿느냐 마느냐는 네 자유지만.”

정말 그것 때문?”

말했지. 정 궁금하면 아카바 레이지에게 물어보라고. 내가 남의 심리까지 다 읽는 것도 아니고.”

그때 이후로 형님이 너를 곁에 두는 것도 네가 형님을 움직였기 때문이겠지.”

분명히 말해두는데, 네가 말하는 변화라는 건 내가 의도한 것도 바란 것도 아냐. 나는 전쟁이 끝나면 하트랜드에 돌아갈 생각이었지 회사에 잡혀있을 생각은 없었어.”

청년은 말을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소년에게 바로 손목을 잡혔으나, 청년은 힘을 써 소년에게서 벗어났다. 소년이 조그마했던 몇 년 전이었다면, 소극적이었던 꼬마 때라면 간단히 떨쳐냈을 텐데. 청소년기에 접어든 지금은 달려드는 데 망설임이 없는 데다 힘도 제법 붙어서, 떨쳐내는 것도 일이었다. 손목에 얼얼함과 함께 벌건 손자국이 남은 것 같다.

, 물론 사장에게 변화가 있었다면 말이야.”

이제 나는 사장에게 갈 거야. 더 쫓아오지 못하게 하려고 청년은 급히 한 마디 덧붙였다. 과연 소년은 커다란 눈으로 청년을 응시할 뿐, 따라붙지는 않았다.

소년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사장은 분명히 이전과 다른 인간이 되었다. 육체가 바뀐 것은 물론 내면도 달라지고 말았다. 청년이나 인지하는 차이는, 지금의 사장이 원본보다 더 냉정하고 교묘하다는 것. 청년에겐 특별히 나쁠 것이 없었지만 리더에 대한 비밀을 안고 있는 입장으로선 찜찜했다. 결국 자신은 죽은 사람을 잘 만들어진 가짜로 바꿔치기한 것 아닌가. 그 과정에 죽은 사람이 왜곡되어,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청년은 계속 그런 생각에 시달렸다.

하필 변화의 방향이 청년에게 유리한 쪽이었다는 것도 신경이 쓰인다. 청년은 사장과 자신의 근본적인 차이는 정의감의 유무라고 생각해왔다. 두 사람 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도덕적인 비난을 감수할 수 있는 인간이었지만 사장은 그럼에도 정의를 추구한다는 점이 청년과 달랐다. 청년이라면 행동의 결과가 정의로운 방향일 수는 있어도 스스로 정의를 찾지는 않는다. 그런 차이에서, 두 사람은 어느 단계에선 충돌할 수밖에 없다. 청년은 바라는 결과를 바로 얻어낼 방법을 시도했다가 정의를 내세운 사장에게 행동을 제한당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드러나게 불만을 표출한 적은 거의 없지만, 청년에게 사장의 그런 태도는 효율적이지 못한 것이었다.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야 가치 있는 일이지만, 청년은 극한의 상황에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때로 다른 길을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보았으므로. 사장을 대체할 수 있는 리더감이 없고, 시간은 걸려도 목표 지점에서 아주 멀어지진 않았기에 잠자코 사장의 뜻을 따랐을 뿐이다.

그런데 새로 만들어진 사장은 이전의 사장보다, 청년과 닮은 사고방식을 보였다. 목적을 확실하게 달성하기 위해 정의롭지 않은 방법이며 피해를 낳을 수 있는 길을 시도하는 청년을 가로막기는커녕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하지야 않았지만 사실상 청년의 행동을 묵인하고 방조하는 수준이었다. 청년은 사장의 지원 하에 원래라면 허락되지 않았을일을 여럿 해냈고, 의도했던 것을 거의 이루었다. 원본이 아닌 클론이기에 묵인했을 일으로는, 대표적으로 청년이 전쟁 끝에 사장의 아비를 취조한 것이 있었다. 얼마 전에 사장이 지나가듯 그 일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오늘 아카바 레오를 찾았어. 그 남자, 아들도 못 알아보더군.]

[아직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물론.]

사장은 청년의 취조를 눈감아주었다. 청년이 그 과정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사장만이 보았으며, 아마 그걸 용서할 수 있는 것도 사장뿐일 것이다. 청년은 사실상 정신적 고문에 가까운 행위를 서슴지 않고 행했다. 짧지 않은 기간을, 집요하게. 상대가 침략자의 수장이라는 사실과 전후 처리와 관련해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는 명목을 내세워도 결코 공개할 수 없는 행위였다. 사적인 감정이 들어갔을지도 모를 잔혹한 것을, 사장은 계획적으로 덮었다.

청년이 놓아주었을 땐 이미 상대는 정신이 완전히 붕괴한 후였다. 죄가 죄인지라 누구도 그의 이상증세에 대해 동정하지도 이유를 캐려 들지도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당연히 청년은 그에 대해 의심을 사지 않았다. 사장도 그에 대해선 입을 떼지 않아, 사건은 그대로 묻히게 되었다.

[그 남자가 왜 미쳐서 돌아왔는지는 우리밖에 모를 거야.]

[너는 괜찮나?]

[왜 나를 걱정하지? 아카바 레오가 너희 엑시즈에 한 일을 잊기라도?]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지 못해서…….]

[나는 그 남자를 별로 동정하지 않아. 네가 가혹했다고도 생각 안 해. 그러니까 아무 말 없이 넘긴 거라고. 필요한 일을 했다면, 거기에 더 따질 것은 없어.]

한 가닥 동요조차 없는 목소리에 청년은 오싹해지면서도 한편으론 안도했다. 사장은 분명히 그의 편이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안고, 그의 허물을 숨기기도 한다. 사장의 그런 모습을 낯설다고 느끼는 자가 자신뿐이라면 걱정할 일은 없다. 사장의 사람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이름이 나오는 비서조차도 사장을 의심하지 않고, 명확한 자리도 없는 청년까지 적당히 받아주고 있다. 청년이 신경 쓰이는 것은 한 명. 근거 없는 확신으로 청년을 추궁하는 소년. 형제이기에 사장이 떼어놓을 수도 없는 존재.

물론 소년은 사장에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수상쩍은 형이라 해도, 이전까지 알던 사람과는 다르다고 해도, 소년에게 형이란 의미가 큰 존재니까. 그러나 청년이라면 언젠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소년이 자신을 들여다볼수록, 혹은 소년의 추궁에서 확신을 읽어낼 때마다 청년은 섬뜩해진다.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면 소년 앞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소년에게서 어떻게 벗어날지 그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니 한 번쯤은 사장에게도 말을 꺼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청년 자신이, 그리고 사장이 누구에게 의심을 사고 있는지는 사장도 알아야 했다. 청년은 소년에게 둘러댄 대로 사장에게로 향했다.

걱정이라도?”

드러낸 것도 없는데, 사장은 청년이 맞은편에 앉자마자 그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먼저 말을 걸어왔다. 사장은 너무 쉽게 사람의 속내를 읽어낸다. 청년은 사장의 보랏빛 눈을 보고 있으면, 때로 소년의 눈을 들여다볼 때와 비슷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친형제가 아닌데도, 상대를 꿰뚫어보는 것 같은 눈길은 닮았다. 안경이라는 막이 사장의 눈을 한 겹 덮어준다는 게 다행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네 동생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아.”

레이라가?”

내가 널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아예 확신을 하고 있다고.”

그렇군. 확실히 그 애라면 눈치채도 이상하지 않지만.”

사장은 턱을 괴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는 그 애와 바탕이 비슷하니까, 이전의 형과는 다르다고 느끼는 게 당연할지도.”

의미를 모르겠는데.”

아카바 레이지가 연구하던 클론의 기본은, 레이라와 비슷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 타자를 모방하는 것. 대상만 주어진다면 얼마든 그걸 재현해낼 수 있지. 네가 덧씌운 데이터가 그 대상이 되었을 거다.”

……처음부터 그 애를 모델로 만들어낸 건 아니겠지.”

거기까진 몰라. 가능성이야 있지만. 짚어보면 비슷한 점이 더 있잖아? 타자가 필요로 하는 모습을 흉내 낸다는 것. 레이라는 그게 명령을 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면 나는 타자의 소망을 읽어내 재현하는 것 정도로, 방향만 약간 다를 뿐.”

잠깐만. 타자의 소망을 읽어낸다는 이야기는.”

그래. 내 재현에도 누군가의 소망이 들어갔다는 거지.”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사장의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은 청년과 사장의 클론, 두 사람 뿐. 그렇다면, 사장이 말하는 누군가는 높은 확률로 한 명.

새로 만들어진 아카바 레이지가 꽤 협조적이라는 생각을 한 적 없었나? 오리지널보다 훨씬 더, 네가 바라는 쪽에 가깝다고. 나는 진짜라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을 너에게 허락하고, 오리지널이라면 인정하지 않았을 것까지 눈감아주었지.”

그게 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너 이외에 누구를 위해서 움직였겠어?”

나는, 그런 것을 바란 적이.”

없었다고?”

정말로? 사장은 웃음기 밴 목소리로 덧붙인다. 그에 청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인데, 지금 생각하니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 번쯤은, 사장이 좀 더 협조적인 인간이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뜻을 받아주고 당장 필요한 일을 도와주길 바랐을 수도 있다. 그리고 사장이 죽어, 그의 대체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그런 생각이 한순간 흘러들었을지도.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을 만든 것인가. 청년은 눈앞의 사장을, 자신이 되살려냈다고 생각한 자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카바 레이지, ‘리더도 아니라 지금 내게 필요한 협력자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사장은 청년이 껄끄러워할 모든 것을 덮어주고 있었다. 사장의 죽음도 리더의 부재도 심지어 청년이 사장의 죽음 이후 행한 모든 일까지도. 그러면서 청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도왔다. 전쟁을 끝내는 것도, 침략자를 몰아세우는 것도, 그리고 청년의 편을 들어 멤버들이 그에 유리한 선택을 하도록 하는 것까지도.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소망에서 비롯했다면?

이제 와서 내가 낯설어졌어? 네 소망을 담았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소망 같은 게 들어갔다면, 그건 이미 왜곡된 존재 아닌가?”

글쎄, 논의는 끝나지 않았나? 원본이 살아있을 때의 자아를 그대로 이식한 클론이라면 망자의 재현이라 볼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한 건 네 쪽이었을 텐데.”

사장은 청년의 금빛 눈에서 혼란을 읽어낸다. 청년은 과거, 자신을 만들어냈을 때도 그런 눈을 했다. 너무 많은 감정이 뒤섞여 혼란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복잡한 심정. 제 행동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인지 확신을 갖지 못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합리화하고 싶은 마음도 공존할 것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길을 제시해주는 쪽이 낫다. 그가 생각을 굳히고 아예 다른 쪽은 잊어버리도록.

“‘아카바 레이지의자아를 가지고 아카바 레이지가할 법한 선택을 한 클론이 여기에 있어. 나를 인정하지 않을 생각이야? 그렇다면 네가 만든 것은 누구지? 아카바 레이지가 아니라면 누구를 되살린 거냐고.”

청년의 입이 열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사장은 거기서 한 번 더 청년을 떠밀기로 한다.

이대로라면 너는 지금 눈앞에 있는 아카바 레이지를 부정하든지 네 선택을 부정하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하겠지.”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는, 누구지?”

보이는 대로. 아카바 레이지지. 아카바 레이지의 자아를 이식받은 게 그 이외의 누가 될 수 있겠어?”

사장은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이전에 청년에게 클론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은 그에게서 자신에 대한 판단을 듣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때 이미 청년은 자신을 원본의 재현이라 인정한 셈인데. 어떤 불순물이 들어갔든, 청년이 재료로 삼은 자아가 원본의 것임은 변하지 않는데. 원본의 데이터는 이제 자신에게만 남아있는데. 답을 찾지 못해 헤매던 청년은 한참이나 지나서 겨우 입을 뗐다.

우리는 공범이야. 둘이서 진짜를 바꿔치기했어.”

그랬지.”

그런데도 누구도 그걸 확실하게는 파헤치지 못하고 있고.”

그야 증거가 없으니까.”

그러니 이대로 둘이서 입을 다물면, 아카바 레이지가 살아가고 있다는 건 사실이 되겠지?”

그래,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한 번도 사장 앞에서 이야기한 적 없었지만, 이전부터 청년은 수없이 유혹에 시달려왔다. 자신이 저지른 모든 것을 잊고서 눈앞에 비치는 것만 믿고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눈앞에는 사장이 살아있고, 전장에서 건져온 평화가 있다. 그 잔잔한 호수의 바닥을 굳이 들여다보며 언제 덮칠지 모를 급류를 생각하는 시간은 너무도 피곤했다. 생각을 전부 놓아버린다면, 사장과 자신이 꾸민 모든 걸 받아들이기만 하면 편해질 수 있는데.

……나는 아카바 레이지를 믿어.”

그건 를 믿고 인정한다는 뜻?”

마음대로 해석해. 나는 이제 더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이것이 정말로 사장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인가? 모든 판단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 아닌가? 한순간 치민 생각조차 흩어버리고, 청년은 그렇게 말을 마쳤다. 그러자 사장의 얼굴에 드물게 짙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원본이 죽기 전, 자신이 눈에 담았던 자가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한순간 스쳤던 웃음.

청년은 지금, 사장과 함께하고 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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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