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층에서는 화려한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청년은 걸핏하면 최상층에 올라, 그곳에 마련된 전망대로 향했다. 사람들이 자주 찾을 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청년과 다른 한 사람을 제외하면 거의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청년에겐 행운이었다. 특별히 방해받지 않고 제 공간처럼 마음껏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므로. 낮에도 나쁠 것은 없었으나, 청년이 특히 좋아하는 시간은 밤이었다. 내리깔린 어둠과 인공적인 불빛이 교차하는 시간. 청년은 도시의 야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역시 여기 있었군.”
귀에 익은 목소리에 돌아보면, 반가운 사람이 보인다. 청년에게는 보호자 격이 되는 사람으로, 지금 그가 선 건물의 소유주이기도 한 사내였다. 사내를 맞이하는 눈은 흰자위가 검었다. 그 섬뜩한 색채가 창백한 얼굴과 대조되어 더더욱 비현실적이다. 평소에는 색이 짙은 안경을 써 눈을 가리기도 하지만, 청년은 사내 앞에선 무엇도 숨기지 않았다.
“너는 이곳을 편하게 느끼는 모양이야.”
“사람이 오지 않아서.”
“하긴, 사람들은 여기를 꺼리지.”
여기서 누가 죽었었거든. 사내는 드물게 감상적인 얼굴로 말했다.
“죽어?”
“자살이었다.”
사소한 사건이었다는 듯, 사내는 감상을 싹 지우고 지나가는 듯 말할 뿐이다. 어차피 청년이 알게 될 일은 없고, 알 필요는 더더욱 없는 사건이었다. 그보다 길게 이야기하면 청년을 혼란에 빠트리고 말 것이다. 처음부터 크게 관심은 없었는지, 청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일이야. 이미 다 정리된 일. 그런데도 사람들은 괜히 꺼림칙하다는 식이지.”
“당신은?”
“물론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 또한 이곳에 닿을 때마다 꺼림칙한 기억이 떠오른다는 말은 청년에겐 하지 않는다. 사내의 눈앞에 붉게 물든 바닥과 내던져진 나이프가 아른거린다. 쓰러진 채, 텅 빈 눈이 허공을 향하던 사람도.
사내는 자신의 보호 아래 살고 있는 청년이, 이 건물 내에선 어디든 다닐 수 있는 청년이 하필 이곳에 마음을 붙인다는 것이 괴상하게 느껴졌다. 본인에겐 기억이 남아있지 않겠지만, 이곳은 청년이 과거 패닉에 빠져 찾았던 곳인데. 아니, 어쩌면 그랬기에 청년에겐 이곳이 무의식 속 도피처로 남아있는 것일까. 사내는 과거 청년이 그의 사람으로 일했던 때를 생각했다. 그 시기의 청년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생길 때면 사람을 피해서, 혼자서 한참이고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곤 했다. 어쩌면 청년이 패닉에 빠져 이곳으로 달려왔던 것도, 그 극단이었을지도 모른다.
“답답하지는 않나. 거의 이 건물에서만 지내는 게.”
“괜찮은데. 별로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바깥은.”
“여기서 다 볼 수 있잖아.”
제 곁으로 오라는 듯 청년이 손을 내밀자, 사내의 시선은 청년의 손목을 덮은 흉한 자국에 꽂힌다. 칼로 깊숙하게 벤 자국. 보통 때라면 소매로 가리는 흉터.
사실 사내는 청년이 건물 밖으로 나서는 것을 별로 바라지 않는다. 그는 바깥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과거, 이곳에서 목숨을 끊은 사람은 바로 청년이었다. 청년의 손목에 큰 흉터가 있는 것도, 그의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도, 그의 눈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도 전부 그의 죽음과 관련이 있었다.
수년 전, 사내는 침략자를 막으려 전사를 모았다. 살던 곳이 침략자에 짓밟힌 청년도 먼 이국에서 와 사내의 무기가 되어주었다. 결국 사내는 승리해 평화를 가져왔으나, 그에 큰 공을 세운 청년은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 그가 지키려던 것은 누구도 지키지 못했고, 전범은 혼란을 틈타 단죄를 피했으므로. 승자가 얻은 것은 완전한 결말은 아니었지만 이국에서 온 청년 외엔 만족해, 청년은 평화에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청년이 죽은 것은 모든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않아서였다. 그 날 사내는 자신의 전사로 싸웠던 이들을 불러 모았다. 승리를 축하하고 공을 치하하는 자리가 한껏 달아올랐을 때. 사내는 한 명이 자리를 떴다는 걸 알아차렸다. 멍한 얼굴로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청년이었다. 그에겐 승리가 그렇게 가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연회에 가까운 자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불편한 자리에 붙잡아두는 것보다는 적당히 모른 체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사내는 청년을 찾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자 하나 둘 청년이 빠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쿠로사키는?]
마침내 초대된 전사 중 한 소년이 물었을 때, 사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로 찾아 나서려는 소년에게 사내가 부리는 사람이 말했다.
[최상층에 갔을걸.]
사내가 소유한 건물의 최상층. 연고자 없는 이방인으로서 사내의 영역에서 지냈던 청년에겐 꽤 익숙한 곳이었다. 화려한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공간을 청년이 자주 찾는다는 것도 사내는 알고 있었다. 소년은 답을 듣자마자 최상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데려올게. 이런 자리에 쿠로사키만 빼놓을 수는 없잖아.]
그때까지만 해도 소년의 목소리는 밝았다. 자리에 취한 듯 달아오른 목소리는 이전까지 그가 겪었던 절망과 고통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 사내는 흡족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내의 통신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별 생각 없이 연락을 받은 사내는 바로 소년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문이 잠겼어. 아무리 힘을 써도 열리지 않는데 문 아래 틈으로 피가 흘러나와.]
[쿠로사키가 있는지는 확인했나?]
[불렀지만 반응이 없어…….]
사내가 최상층으로 향해 잠긴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것은 피웅덩이 속에서 죽어있던 청년이었다. 손목을 그었다고 했다.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을 것이라고도 들었다. 방에서는 약을 먹은 흔적이 있었고, 몸에서는 깊지 않은 자해흔이 몇 개 발견되었다. 아무래도 청년은 빠르게 목숨을 끊을 방법을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혹은 마지막까지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몇 번의 자해 끝에 결국 손목을 제대로 그을 때까지, 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스쳐갔을지. 죽기 직전에도 청년은 고향 사람이 매일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려 보내던 메시지에 답을 했다고 한다.
청년이 자리를 떴다는 걸 알아챈 때 바로 그를 찾았으면 달라졌을까. 아니면 제 영역에 붙잡아둔 청년을 면밀히 관찰했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 알 길은 없으나, 사내는 청년의 죽음이 자신의 실패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사내는 실패를 인정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사내는 한참이고 청년이 쓰러졌던 자리를 노려보다 생각했다. 그의 죽음을 엎어버리자고.
죽은 사람을 ‘깨어나게’ 하는 길은 있었다. 사내가 적대한 곳에서 쓰러진 전사를 재활용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기술이었다. 깨어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사내는 청년을 조악한 기술에 맡겼다.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하들에겐 이렇게 말하며.
[내겐 앞으로도 저 같은 무기가 필요해.]
정말로 무기가 필요했던 것인가, 아니면 무기가 되어주었던 청년이 필요했던 것인가. 혹은 그를 되살리면서 그의 구원자라도 되고 싶었던 것일까. 원래라면 사내에게 먼저 다가설 리 없는 인간인데, 되살아난 후의 청년은 사내에게 곧잘 붙어있었다. 자신을 살려낸 자라는 것까진 모르더라도 깨어나 처음 마주한 인간은 인상적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타지에 뚝 떨어진 그에겐 사내 말고는 의존할 사람이 없기도 했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데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을 수는 없었다. 깨어난 청년은 눈의 흰자위가 검게 변했고, 몸에는 죽음을 불러온 외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흔적은 외면에만 남은 것은 아니어서, 사내는 그의 자아도 훼손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살아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이 최선이었겠지만 사내에겐 그 정도 흔적쯤은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죽은 사람을 다시 곁에 둘 수 있는데. 보존처리한 시체가 아니라, 말을 하고 움직이는 사람으로 되살렸는데.
외적인 흔적은 타인의 눈에 띄면 곤란하겠지만 필요하다면 적당히 숨길 수 있다. 자아가 온전히 남지 않았단 것은 오래 대화하지 않는 한 알아채기 힘들 것이다. 혹 누군가 의심을 품더라도 사고가 있었다는 식으로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그조차 만일의 일을 생각한 것이고, 사내의 영역에서만 지내는 청년이 타인에게 모습을 드러낼 일은 거의 없다.
게다가, 사내에게 자아의 훼손이란 별로 결함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편이 청년에게도 자신에게도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훼손된 부분에는 고통스러운 기억과 황폐해진 내면밖에 없으니까.
“바깥에 다녀올 생각은 있을까. 쿠로사키.”
“시킬 일이라도?”
죽은 후 청년은 사내 앞에서 사람 손을 탄 짐승처럼 굴었다. 자아가 훼손된 후유증에, 보호자를 자처하는 이에 의존하게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 죽기 전의 그를 생각하면 약간 죄책감이 들었지만, 사내는 청년과 굳이 거리를 두려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내는 그 순해진 태도가 흡족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죽기 전보다 안정된 것 같아서. 혹은 그가 마침내 자신에게도 마음을 열고, 따르게 된 것 같아서.
“처리해줬으면 하는 것이 있긴 한데.”
사내는 청년의 오른손에 사진을 올려놓았다. 받아든 사진 속에는, 청년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웃고 있다. 아래쪽에 적힌 이름은 데니스 맥필드. 청년은 소리 내어 이름을 읽어보다가 갑자기 속에서 피어오르는 묘한 감정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까지는 들어봤을지도 몰라. 그 자, 꽤 유명해서.”
“이런 사람을 노려도 되나?”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지만.”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쩐지 꺼림칙했을 뿐이다. 사내가 굳이 자신에게 부탁하는 일을, 그만한 이유로 거절할 리가 없다. 내내 건물 안에서만 맴도는 청년이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사내가 처리를 부탁한 일이 있을 때뿐. 사실상 인간 사냥에 가까운 일을 청년이 별 말 없이 맡는 것은, 첫째로는 사내가 필요하다고 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청년에게 어렵잖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청년은 사람을 꺾고 쓰러트리는 일에는 재주가 있었다. 예전에 한 적이 있었을까, 농담처럼 가볍게 던졌을 때 사내가 묘한 웃음을 걸쳤던 기억이 있다. 청년은 기억에 공백이 많으니, 어쩌면 정말로 경험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 필요와 능력이 우연히 맞아떨어졌다고 해도, 지금 사내가 바라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청년에게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좋아. 그럼 상세한 건 나중에 알려주지.”
청년은 사진을 슬그머니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움직이기 전까지는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번의 표적은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가능한 빨리 해치우고 전부 잊고 싶었다.
*
폐건물로 향하는 그림자를 청년은 눈으로 쫓는다. 사내가 준비한 함정이 표적을 유인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사진에서 본 남자가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출 때쯤, 청년도 움직였다. 어차피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굳이 기척을 숨기면서 쫓을 이유 없이, 최대한 빨리 따라붙어 붙잡으면 된다. 사내는 ‘제압하거나 잡아오거나’라고 말했지만 청년의 거친 성미에는 제압하는 쪽이 더 맞으므로, 충돌이 일어나더라도 걱정할 이유가 없다. 거리를 거의 없앴을 때, 그제야 기척을 느꼈는지 표적이 돌아보았다.
드러낸 눈 때문인지, 청년을 확인한 표적이 얼어붙었다. 청년은 청년대로 사진에서 확인한 얼굴과 실제로 마주하자 이유 모를 꺼림칙함이 더 선명해졌다. 처음 보는 인간인데 괜히 경계하게 된다. 역시, 그냥 제압하는 쪽이 나을 것 같다. 그렇게 판단한 청년이 막 달려들려던 때. 청년의 귀에 뜻밖의 말이 꽂혔다.
“쿠로사키?”
표적에게서 흘러나온 이름은 청년의 것이었다. 사내가 아닌 사람에게 그렇게 불리는 것은 처음. 이전에 서로 마주친 일도 없을 텐데, 어떤 이유에선지 표적은 청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사내와 이전에 얽힌 적이 있었던 걸까. 그래서 사내의 사람인 자신까지 알아볼 수 있는 것일까. 한순간 스친 생각을 청년은 빠르게 흩었다. 사내가 타인에게 자신을 보이려 들지 않고, 그렇기에 내부인이 아니면 사내와 친분이 있어도 자신을 아예 모른다는 것을 떠올려내고서.
“맞는 것 같은데 왜 반응이 없지?”
“그쪽의 부름에 응답해야 하는 이유라도?”
“쿠로사키라면 좀 더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게 정상이니까. 내게 복수하러 온 것 아닌가?”
“……복수?”
그런 목적은 없다. 사내가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를 표적으로 삼을 이유도 없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청년이 의문을 띄우자 표적이 목소리를 은근하게 바꾼다.
“왜 그래. 그게 아니면 내게 올 이유가 없잖아. 도망칠 생각은 없으니까, 네 마음대로 하라고.”
“아까부터 그쪽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으니까 뜻 모를 말 그만해.”
“이해할 수 없는 건 나야!”
황량한 공간을 날카로운 외침이 울렸다. 청년은 얼굴을 찌푸렸다.
“나를 죽일 생각이었으면서, 이제 와서 그렇게 나오기야?”
“정말 도망칠 생각이 없으면 잡혀주든지. 그쪽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고, 내가 왜 그쪽에게 복수까지 해야 하는지도 몰라. 자꾸 나와 얽혔던 것처럼 구는데 지금 나와 연결된 건 한 사람밖에 없고.”
“누구? 아카바 레이지?”
침묵이 흘렀다. 사내의 이름을 바로 짚었다면 청년으로선 더 할 말이 없다.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것인지, 표적은 혼자서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역시 그 남자인가. 하긴, 네가 의지할 사람이라곤 그밖에 없겠지. 죽은 사람을 깨우는 기술도 그 남자라면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테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아카데미아에서 죽은 자를 되살리는 기술 운운할 때 솔직히 믿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런 게 정말로 있었던 모양이야. 죽었다는 사람이 눈앞에 있고.”
청년은 알 길이 없으나, 지금의 상황은 표적으로서도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친분이 있던 자에게서 분명히 청년의 죽음에 대해 들었는데. 수년 전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눈앞에 있다. 그 모습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도 섬칫하다. 잊을 리가 없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는 데다, 외형의 변화는 자기편에서 시체를 움직이게 한다고 떠들어댔던 기술의 부작용과 일치한다. 흰자위가 검게 변한 눈.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한데 당사자인 청년에게 들을 수 없어 표적은 초조해진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혹시라도 청년이 단서를 줄 수 있길 바라며 청년을 자극하는 것뿐. 그는 경계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에게, 상대의 머릿속에서 지워졌을 이야기를 꺼낸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니 내가 아는 이야기를 해줄까. 들으면 뭐라도 기억날지도 모르지. 몇 년 전, 아카바 레이지는 하트랜드에서부터 시작된 전쟁을 끝내기 위해 랜서즈라는 이름으로 정예병을 모았어. 그에는 하트랜드 출신인 너도 있었지. 마침내 전쟁이 끝나 아카바가 승리를 자축하는 자리를 만든 날, 쿠로사키 슌은 혼자서 LDS 최상층에 올라갔다고 해.”
남은 것은 씁쓸한 결말뿐. 표적은 짧은 침묵 끝에 말을 이었다.
“그 자리의 주인공인 랜서즈가 웃고 떠들 때 최상층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손목을 그었다고 하지.”
청년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내보이면 눈에 띌 수밖에 없다고, 성가신 말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가려두라고 사내가 자주 이야기했던 부위였다. 소매를 걷으면 단박에 흉측한 자국이 드러난다. 칼로 벤 자국. 이렇게 될 때까지 손목을 긋는다면, 그 목적은 하나밖에 떠올릴 수 없다. 문득 최상층에서 자살한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건,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였을까.
“발견된 때는 너무 늦어서, 이미 죽어있었다더군. 그 후 마땅히 장례를 치를 거라 생각했는데 끝까지 소식이 없었다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짠! 죽었다던 쿠로사키가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유령이 아니라면, 되살아난 거겠지?”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듣고 온 거지.”
“글쎄, 너와도 알던 사람이 해준 이야기지만? 그보다, 이걸 생각하지 그래. 너는 왜 이 이야기를 모를까? 되살아나는 과정에 기억이 날아갔다고 해도, 왜 네 ‘보호자’는 예전 일을 하나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사내는 청년을 곁에 두고 아꼈지만, 사내의 사람 대다수는 청년을 모른 체 했다. 가끔 그를 제대로 외면하지 못한 자들의 눈에는 경멸이 비치곤 했다. 유일하게 청년을 상대하는 자인 사내의 비서는 그에게 연민과 껄끄러움이 섞인 복잡한 시선을 향했다. 사람이라기보다 괴물을 대하는 듯한 태도가 신경이 쓰여, 청년은 사내에게 직접 물은 적이 있었다.
[당신 부하들은 왜 나를 싫어하지?]
[그런다고 네게 해를 끼치진 못해.]
[주변에서 저렇게 꺼리는데 당신은 왜 나를 곁에 두고?]
[네가 필요하니까.]
무엇 하나 제대로 풀어주는 게 없는 답변이었지만, 그때는 그것만으로 괜찮다고 여겼다. 청년에게 가치 있는 건 사내와 그의 선택뿐이었으니까. 그러나 만약에, 사내의 주변에서 청년을 껄끄러워했던 게 죽은 자를 되살렸기 때문이었다면?
상대가 꺼낸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면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몇 개 있었다. 자살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 불완전한 기억, 그리고 사내의 일을 맡을 때마다 어려움 없이 해결할 수 있었던 것. 죽은 후 깨어났다면 그 여파로 기억이 손상되었을 수 있다. 과거 전사로 나섰다면 사람을 쓰러트리는 데 익숙한 것이 당연했다. 청년이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지금의 이야기를 완전한 타인에게 들었다는 것.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사내는 기억의 공백을 메워준 적이 없는데.
“의도적으로 숨겼던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알고 싶었던 적 없어.”
“아카바를 편들고 싶은 모양이네. 네가 왜 자살했을 것 같아? 아카바 레이지의 전사로 싸워서 얻어낸 세상의 평화며 승리며, 네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서 살아갈 필요를 못 느낀 거겠지. 그 사이에 정작 네가 지키고 싶었던 건 흩어졌거든. 루리와 유토까지도. 결국 그 남자의 길은 너를 구하지 못했다는 뜻이야. 이제 생각이 좀 달라져?”
청년은 표적이 들먹이는 이름들이 어쩐지 신경이 쓰인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말려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의 말을 끊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넘실거리는 이름을 몰아내고픈 마음과 표적에게 그에 대해 캐묻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길을 찾지 못한 청년은 한참이나 침묵하다, 상황에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그래서, 내게 듣고 싶은 게 아카바 레이지에 대한 생각?”
“아, 물론 그것도 궁금하긴 하지만 내게 급한 건 다른 쪽이지. 나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혹시 내가 해준 이야기를 듣고 나에 대해 뭐라도 기억났어?”
“몰라, 그런 거.”
“말해줘? 전부 말해주면 날 제대로 상대해줄 생각이야?”
“내게 뭘 기대하는 거야.”
“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는 네가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갈 거라고 생각했어. 너에게서 삶의 의미를 빼앗아간 게 나니까. 기껏 되살아났으면 그런 상대에게 복수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내게 원한을 쌓은 이유를 모르겠다면 하나하나 알려줄 테니까, 내게 뭘 할지 생각하라고.”
“그쪽이 나한테 큰 죄를 지었으니까 내가 그쪽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기억을 되살려서까지?”
“그래. 원한다면 네 고향에 데려다줄 수 있어. 과거의 너를 기억하는 곳 말이야. 아니면 같이 싸웠던 랜서즈랑 만나게 해줄 수도 있고.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채우면서, 원한도 풀 수 있어. 어때?”
상대의 말은 제법 유혹적이었지만 청년은 한편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사내의 손에서 벗어나길 은근히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청년의 세계는 온전히 사내를 통해 구성된 것이었다. 청년은 사내의 영역에서 지냈고, 그가 제공하는 것만 받아들였으며, 그가 알려주는 것만 ‘사실’로 여겼다. 그렇기에 사내가 알려준 것 이상의 세계에 발을 딛는 건 청년에게 두려움을 안긴다. 그의 영역에서 벗어나면 무엇을 믿고 학습하며 살아야 할지 상상할 수 없다.
분명, 사내의 울타리를 넘어서면 청년의 세계는 한 차례 붕괴할 것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이 전부 흔들리며, 모든 걸 새로 채워야 할 것이다. 완전한 타인의 말을 믿고 모험을 하기엔, 청년은 ‘지금의 삶’에 대한 애착이 컸다. 혹은 자신이 전적으로 의지해온 사람을 놓기 두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걸 이야기하지 않는다 해도, 사내는 그가 가장 신뢰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됐어. 괴로운 기억 같은 거, 이제 와서 되살리고 싶지 않아.”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하라고? 네가 거부하면 누가 날 처벌하지?”
“그쪽이 알아서 자기를 처벌해줬으면 하는데.”
“……스스로, 처벌해?”
“왜 내게 처벌을 넘기려 들지? ‘내 손에’ 당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정말 벌이라도 기다리고 있었다면 누가 실행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텐데?”
그러자 표적의 눈이 흔들린다. 동요를 감지한 청년은 상대를 확실하게 떠밀기로 한다. 기억에 없는 과거가 새삼 무겁게 느껴져서도, 상대의 죄가 괘씸해져서도 아니라 눈앞의 상대를 치우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어떻게든 상대를 몰아내고 그가 가져온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네가 상상하던 처벌이 있을 거 아냐. 내 앞에서 실행해.”
그 말이 표적을 완전히 움직인 모양이었다. 그의 입가에 괴상한 웃음이 걸리는가 싶더니, 이내 청년을 바라보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열린 문을 통해, 어둑한 내부를 빠져나와 바깥이 보이는 옥상까지. 더 물러설 곳이 없게 된 때는 그의 등이 난간에 막혔을 때. 표적은 그대로 난간에 올라선 채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꼭 어른에게 제 행동을 보이며 허락을 구하는 아이처럼. 청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 순간 표적은 청년을 바라보며 뛰어내렸다. 청년은 아래를 내려다보는 일 없이 그대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
TV에서는 내내 유명 엔터테이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뉴스 화면에 떠오르는 것은 청년의 표적이 되었던 자의 얼굴. 보통 때라면 청년에게 보고를 받거나, 소식이 흘러들기를 기다려야 하는 사내는 이번엔 표적이 유명인이었던 이유로 가만히 앉아서 임무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쩐지 청년이 빈손으로 돌아와 아무 말 없이 틀어박히더라니. 실패한 게 아니라 이미 손을 쓸 이유가 없었거나 보고할 사항이 못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자살이라. 이건 좀 의외인데.”
“몰아세웠더니 스스로 뛰어내렸어.”
“겁을 먹은 건가. 그게 아니면.”
“목적은 이뤘으니까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겠지.”
청년은 사내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내리깐 눈에는 말을 더 보태지 말라는 뜻이 은근하게 비치고 있었다. 내뱉을 뻔했던 말이 제게 별로 유리하지도 않다는 걸 깨달은 사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표적의 자살은 청년을 향한 죄책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청년의 삶을 절망에 빠트린 장본인이었으므로. 그가 청년의 죽음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혹 몰랐다 해도 청년의 존재는 해묵은 죄책감을 되살리기 충분했으리라. 대단치 않은 압박에 스스로 숨이 막혀, 죽음으로 도망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가 청년에게 자기 죄를 스스로 이야기하기라도 했다면.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사내의 단정한 얼굴이 살풋 굳어진다. 기억에서 뜯겨나간 부분을 이야기해 청년을 혼란에 빠트리기라도 했다면? 청년이 그에게서 ‘자신이 말해주지 않은 부분’까지 전부 듣고 온 것이라면? 그 결과 청년이 훼손된 자아를 회복하려 들었다면? 사내는 한순간 떠올랐던 감정을 지우고, 청년을 떠보려 질문을 던진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에 대한 감상은.”
“특별한 감상 같은 건 없어. 예상을 약간 벗어났을 뿐이지.”
혼란스러웠다거나 찜찜해졌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표적이 이야기했던 과거에 대해서는, 사내 앞에서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꺼내고 사내에게 진위를 묻는 순간부터 사내를 지금처럼 대할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설령 표적의 말이 모두 진실이었고 사내가 그 부분을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숨겼다 해도, 청년은 지금까지 알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때가 두렵다.
어차피 그의 말대로라면, 자신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는데.
“좋아. 이번의 데니스 맥필드까지. 아카데미아 관련자는 거의 처리한 셈이야. 적어도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말이지. 여기서 조금만 더 하면…….”
“당신, 내게 일을 시키는 목적이 뭐야?”
불쑥 끼어든 질문에 사내는 하려던 말을 잊었다. 지금껏 청년은 사내의 일을 맡으면서 한 번도 설명을 요구한 적이 없었는데. 길들여진 짐승처럼, 명령만 하면 따랐기에 사내는 그에게 목적을 알리고 납득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목적이라면, 내가 관련자를 은밀히 처리하는 이유 말인가?”
“그래. 들은 기억이 없어서.”
“글쎄. 우선은 내가 예전에 대충 넘길 수밖에 없었던 일을 뒤늦게라도 끝마치려는 것이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내세우는 것 이상의 목적이 있었다. 청년에게 처리하라고 명령하는 타깃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 명과 깊게 얽혔다는 것.
“……사적인 복수도 생각했을지도.”
“당신의?”
“아니. 다른 사람의.”
사내가 추진하는 일은 청년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청년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사내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청년의 손으로 처리하는 타깃은 전부 과거의 청년이 처리하려 들었던 적. 다만 청년이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알지 못하리라는 점에서, 어쩌면 이것은 청년을 위했다는 사내의 자기만족이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제 일도 아닌 것에 잘도 사람을 부려먹는군.”
“내 일은 아니지만 너와 관련이 없지도 않으니 들어줬으면 좋겠어.”
“당신이 원하는 일이면 됐어. 별로, 불만이었던 건 아니니까.”
말은 간결했지만 목소리에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턱을 괴면서 한동안 테이블만 내려다보는 게 생각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외면하려면 얼마든 외면할 수 있으련만, 사내는 어쩐지 신경이 쓰여 먼저 말을 걸고 말았다.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자 청년은 사내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홱 끌어당겼다. 무방비한 채 청년에게 끌려온 사내가 손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청년의 힘을 감당해낼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더니 가까이서 보는 청년의 눈에 평소와 다른 열기가 비쳐, 사내는 침을 삼켰다.
과거, 사내의 전사로 싸웠던 때 적을 바라보는 청년의 눈이 지금과 같았다. 사내는 언제나 그에서 먹잇감을 포착한 맹수를 연상했다. 그 눈에 자신을 담으며, 청년은 대체 무엇을 파헤치려는 것인가. 지금껏 청년을 손에 쥐고 있었던 사내로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년은 사내를 얼마간 시선으로 묶어두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만약 자기만 알고 있는 정보가 있고, 내가 그에 대해 듣고 싶다고 말한다면 어디까지 이야기해줄 수 있어?”
“글쎄, 네게 필요한 부분까지? 왜, 듣고 싶은 게 있기라도?”
“지금은 아냐.”
청년은 사내를 놓아주며 가볍게 답한다. 잠깐이나마 사내를 긴장시킨 열기는 그새 걷혀있었다. 대신 그 얼굴에서 흡족함을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그 질문으로 간단한 시험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사내가 던진 것이 청년에겐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답이 되었을까.
“일단 그 정도면 됐어.”
“만일 그런 상황이 찾아왔을 때 내 마음이 지금과 달라진다면?”
“조금 실망할지도.”
“너를 실망시킬 일은 없도록 하지.”
“그래줬으면 좋겠어.”
청년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 놓아둔 안경을 쓰는 걸 보니, 사내의 방을 나설 모양이었다. 청년이 이 건물 안에서 눈을 내놓는 것은 혼자, 혹은 사내와 단둘이 있을 때뿐이었으므로. 과연 청년은 문으로 향하더니, 떠나기 직전에야 그를 잠깐 돌아보았다.
“그러면 나도, 당신을 끝까지 믿을 테니까.”
덧붙인 말은 제법 의미심장하다. 어쩐지 사내는 오래지 않아 청년에게, 지금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을 스스로 털어놓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이 계속 자신을 믿고, 의지하며, 붙어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나 한편으로, 청년의 그 말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가 자신의 편이며 자신을 믿을 준비가 되어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사내는 그것이 더없이 만족스러워, 청년이 던진 질문이 자신이 그에게 숨겨온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슌+레이] 꽃의 무덤 (0) | 2018.10.29 |
|---|---|
| [슌] 비극의 끝 (0) | 2018.09.30 |
| [레이지+슌] 공범 (0) | 2018.07.30 |
| [여슌 중심] 성역 (D의 경우) (0) | 2018.06.30 |
| [여슌 중심] 성역 (R의 경우) (0) | 2018.05.3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