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군주가 탄생하는 날이었다. 그동안 통치자의 대리인으로서 이곳을 완벽하게 통제해온 청년은, 오늘 통치자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권력을 쥔 지는 몇 년 되었으나, 청년은 줄곧 2인자를 자처해왔다. 그것은 ‘평화로운 양위’라는 극본을 위한 전략인 동시에, 청년의 야심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다. 통치자가 병을 내세워 물러나 있는 사이 청년은 이미 이곳을 자신의 나라로 만들었다. 몇몇은 청년이란 인간에 매료되었고 몇몇은 그의 이상을 믿었다. 통치자가 권위를 내려놓겠다고 선언한 때, 모두가 청년의 이름을 외친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수년의 기다림 끝에 완벽한 결말이 왔다. 식을 거치기만 하면 청년은 통치자로서 권력과 자본과 인재를 쥐고서 오랫동안 꿈꾼 세상을 실현할 수 있다. 예복을 걸치며 청년은 자신이 만들 미래를 생각한다. 완벽하게 통제되는 세상. 어떤 위험도 없는 이상세계. 과거 세상을 위협하는 악에 맞서 싸웠던 청년이, 그와 같은 위협으로부터 세상을 보호하겠다는 신념으로 구상한 것이었다. 통제시스템을 구축하는 데는 오래 걸릴 것이고 계획을 날것으로 공개하면 반발이 일 것이 뻔했으므로, 이 구상에 대해선 측근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단 한 명, 그가 가장 신뢰하는 자만이 아는 이야기였다.
그의 이상을 꿰뚫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지금 그와 함께 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청년은 고개를 돌려, 얌전히 앉아있는 여자를 보았다. 달콤한 승리에 도취되어 있으면서도 청년은 지금의 승리가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안다. 그녀가 그를 이곳으로 인도했고, 그의 야심을 깨웠으므로. 때문에 여자는 그에게 특별하다. 청년이 그녀의 약점인 출신을 세탁하고 언제나 곁에 두는 것은 그녀를 제 편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뻐 보이네.”
“기다려왔던 날이니까.”
“만족해?”
“아직 할 것이 많이 남았지만, 그래. 최근에 이룬 성과 중 가장 만족스럽지.”
청년은 그렇게 말하면서 여자의 얼굴을 덮은 베일을 살그머니 걷었다. 그녀는 자주 베일을 쓴다. 모두의 시선을 받는 청년의 곁에 있으면서, 사람들 앞에 제 모습을 숨기는 것이다. 청년이 데리고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건드려선 안 될 존재가 되어 누구도 감히 베일을 벗기지 못한다. 가까이선 언뜻 이목구비의 윤곽이 보이지만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얼굴을 확인하기 힘들다. 그녀를 온전히 보는 것은, 그 단정한 얼굴에 걸린 표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청년뿐이다.
“아카바 레이지에게 어울리는 승리야.”
“정말로?”
“내가 지켜봐온 당신은 언젠가 이렇게 될 사람이었지.”
여자의 인정만큼 그에게 달콤한 것은 없다. 청년은 굳이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그 얼굴에 들뜬 웃음이 걸리는 것은 제법 드문 일이었다.
“당신은 내 행운이야.”
“그렇게 생각한다니 기쁘네.”
“그러니 사람들 앞에 내보일 자격이 있지. 내가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는 오늘이 적절해.”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데?”
“내 공식적인 파트너.”
“엑시즈의 여자를?”
여자는 웃음기 밴 목소리로 청년에게 자신의 바탕을 상기시킨다. 대놓고 말할 수 없는, 경멸받는 출신을.
여자의 출신을 아는 사람은 단 두 명밖에 없다. 하나는 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청년. 다른 하나는 수년째 유폐되어 있는 청년의 아버지였다. 한때 이곳의 통치자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손에 권력을 잃었다. 침략전쟁으로 세상을 위협하고 어린 학생을 전장으로 내몰았다는 이유로. 아비가 일으킨 전쟁에 희생된 곳이 바로 여자의 고향이었다. 지금에 와선 다들 전쟁이 과오였음을 인정하지만, 망국의 유민에 대한 시선은 아직껏 곱지 않다. 그들은 비천한 인간이며 세상을 위해 쓸어버려야 한다는 상부의 세뇌가 있었던 탓이다. 청년이 처음부터 여자의 배경을 숨긴 것도 그래서였다.
“진작 지운 과거야.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할 법한 사람도 한참 전에 다 제거했고.”
그러나 지금의 청년은 자신만만하다. 자신이 쥐게 될 힘을 믿는 것인지.
“당신이 지금처럼 뚜렷한 직위도 위치도 없이 아카데미아에 있는 것보다는 내 사람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게 안전할지도 몰라. 누구도 드러나게 공격하지 못할 테니까.”
“나로 괜찮겠어? 아카바 레이지의 파트너.”
“괜찮겠냐니. 내가 바라는 일인데. 이전부터 쭉 생각했어. 꼭 당신을 곁에 두고 싶다고.”
청년은 무엇에든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는 습성이 있었다. 허수아비 통치자를 세우기 전 완벽한 영웅의 모습을 연기했고, 2인자로 자리하면서는 고전에나 나올 법한 현명한 간부 역을 완벽히 수행했다. 이제 그는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을 취하려 들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결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 말씨, 태도, 옷차림을 말끔하게 꾸미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기대하는 일반적인 틀에서 결코 벗어나려 들지 않으리라.
대개 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세련된 배우자를 내세우듯, 청년이 파트너를 두려 할 것임은 여자도 예상한 일이었다. 다만 어려서부터 우수했던 청년이라면, 거기에 정점에 오를 인간이라면 비공식적으로나마 심사에 가까운 절차를 거쳐 엄격하게 파트너를 고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청년은 지금,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그녀에게 그 역할을 요구하는 것이다. 거기서 여자는 깨달았다. 청년은 파트너를 원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원했다. 파트너라는 역할은 그녀를 확보하기 위한 효과적인 이름이다.
“그러니 답해줘. 당신은, 할 수 있어?”
청년의 보랏빛 눈이 그녀만을 담고 있었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는 눈길에 여자는 아찔해진다. 그는 이미 돌아올 답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답은 언제나 한정적이다. 청년이 압박하지 않아도, 그의 교묘한 말솜씨로 원하는 답을 유도하지 않아도. 여자는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고, 아마도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을 답을 꺼낸다.
“마음대로 해.”
청년은 여자의 손등에 키스했다.
마지막 퍼즐이었던 파트너를 정했으니 남은 것은 정식으로 통치자로 인정받는 것뿐. 식의 준비가 끝나자, 청년은 방을 나와 자신의 백성을 맞았다. 이미 수년 전에 영웅의 이름을 얻은 자, 통치자 이상으로 세상에 각인된 2인자의 등장에 모두가 환호했다. 아름다운 승계를 위해 ‘왕관을 맡아두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 통치자는 민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년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었다. 이름뿐이었던 권위를, 원래 왕관을 써야 했던 이에게 넘겨주고서 퇴장한다 ─ 깔끔한 결말이다.
통치자는 왕의 이름을 갖진 않지만 오늘의 식이 실질적인 대관식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제 모두가, 젊고 우수하며 열정적인 군주를 맞게 된 것이다. 청년은 환호의 끝에,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여자를 끌어와 모두에게 보였다. 언제나 베일을 쓰고 있던 여자, 삶도 배경도 이상하리만큼 숨겨진 여자는 막 탄생한 젊은 군주의 곁에 선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이제, 이곳에선 그녀 또한 섬기게 되리라는 것. 그녀는 청년의 신비스러운 주변인이 아닌, 그의 공식적인 파트너가 된다는 것.
“셰이 옵시디언, 나와 함께할 이에게도 축복을.”
새로운 통치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자에게 함성이 쏟아졌다. 익숙하지 않은 열기에 여자는 귀가 먹먹하고 숨이 막힌다. 그러나 앞으로는 일상적으로 이와 같은 열기를 감당해야 할 것임을 여자는 알았다. 더는 베일을 쓸 수 없으리라는 것도, 사람들에게 언제나 청년과 함께 기억되리라는 것도. 오랫동안 안고 갈 짐에는 차라리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 낫다. 처음으로 민중 앞에 선 여자는 본래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던 듯 부드럽게 웃었다. 환호는 더욱 뜨거워졌고 여자는 시선 속에서 빛났다. 성공적인 첫 무대였다.
*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 한 세대 전에는 감옥으로 쓰였다는 음울한 공간. 그곳에는 용서받지 못한 자가 수년째 갇혀있다. 세상을 위협했고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으며 평생을 바쳐도 죗값을 다 치를 수 없을 악인이. 모든 것을 짓밟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다. 마주칠 때마다 잃은 것을 생각하게 되므로. 그러나 여자는 제 삶을 완전히 틀어버린 인간을, 침략전쟁을 일으켜 고향을 폐허로 만든 자를 주기적으로 찾았다. 그에게만 가능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죄의 무게만 생각하면 죄인은 처지가 좋은 편으로 보인다. 감시를 받기는 하나,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진 환경에서 상부가 요구하는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다만 그 연구란 전쟁 피해 복구와 직결된 것. 죽은 땅에 다시 생명을 피울 길을 찾는 건 물론이고, 과거 그가 위험한 실험에 동원한 이들을 치료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전쟁으로 망가진 모든 것을 가능한 원래 모습에 가까운 상태로 돌리기 위해서는 그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그는 본래가 천재적인 기술자였고, 전쟁이며 실험에 쓰인 기술은 그만이 제대로 풀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여자는 잠금장치를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한때 이곳의 통치자였던 사람이자, 현 통치자의 아버지가 되는 자가 그곳에 있었다. 초췌한 얼굴의 사내는 장치를 조작하다가 방문자를 알아보자마자 웃었다.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는 분이 오셨군.”
“연구는 어때?”
“나는 내 아들보다 네가 더 무서워. 무슨 생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거든.”
“당신 아들이 원하는 걸 할 뿐이야.”
“파트너? 내 아들은 그런 것에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자식을 방치한 인간이 뭘 안다고 그래.”
여자는 심드렁하게 답하면서 사내가 조작하던 장치에 시선을 둔다. 그 안에는 그녀가 친우라 불렀던 소년이 수년째 잠들어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 사내가 벌인 일에 휩쓸린 소년은 어딘가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회복 가능성은 낮으나 사내가 연구를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깨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그렇게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건 사내의 연구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가둬놓고 감시해 사내가 연구에만 몰두하게 하면 빠르게 답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년의 상태는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걸어볼 희망은 있다. 소년과 거의 비슷한 처지였던 그녀의 동생은 다행히 깨어나 치료를 받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처럼 건강하진 못하지만 정성을 들이면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연구나 계속해. 그쪽이 살아있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어.”
“끝나면 죽일 생각이군.”
“글쎄, 죽이건 살려두건 상관없는데.”
여자는 전장에서 많은 것을 버렸다. 거기에는 감정도 있었다.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다 보니 이젠 증오나 분노조차 미지근하다. 사내를 용서하진 않지만, 그의 죽음을 소망하며 기력을 쓰고 싶지도 않다. 그냥 어느 날 삶에서 잘려나가 기억에서 잊히길 바랄 뿐이다. 그런데 사내는 자꾸만 그녀에게 말을 붙인다. 자신의 죄를 희석시키고 싶은 것인지.
“네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 루리의 언니였으니 성씨가 쿠로사키였단 것까진 알겠는데.”
“그 이상은 알 필요 없어. 내가 리바이벌 제로의 의의를 딱히 알 필요가 없는 것처럼.”
“냉정하구나.”
“어차피 이곳에서 나를 쿠로사키라 부를 인간도 당신밖에 없어. 당신 아들이 ‘쿠로사키’까지 덮어버렸거든.”
“레이지는 아직도 너에게 관심이 있나?”
“본인에게 물어. 만날 길이 있을지 의문이지만. 당신은 여기서 못 나가고, 당신 아들은 당신의 존재 자체를 싫어하지.”
청년에게 아버지는 얼룩일 것이다. 청년의 어린 날에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때도 있었을지 모르나, 사내가 악으로 돌아선 때 이미 가족으로서의 정은 끝났다. 그 다음부터 청년은 사내를 없애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했다. 아비를 끌어내리고 나서는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침략자가 아비였다는 것이 너무도 혐오스러웠는지 사내를 깊은 곳에 처박아두고선 돌아보지도 않는 청년이다.
차라리 그런 것이 낫다. 구제할 가치가 없는 인간에겐 한 가닥 정도 주지 않고 삶에서 지워버리면 되는 것이다. 설령 피가 섞인 인간이라고 해도. 그런 점에서 여자는 때때로 청년이 부러웠다. 사내에게 완전한 타인이자, 사내가 저지른 죄의 직접적 피해자인 자신은 아직껏 그를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데 청년은 진작 아비를 잘라냈으므로.
“이젠 가족의 정이고 뭐고 없는 모양이지.”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어. 당신이 가족을 버릴 때부터.”
“내가 실수를 했지. 내 목을 죌 길을 계략이랍시고 아들에게 제안했어.”
“당신 아들이 따라줄 거라고 생각했어?”
“적당히 미끼를 던져 함정에 빠트릴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최악의 적이 되어서 찾아오더군. 거기에 네가 영향을 미쳤다는 건 나중에 알았고. 그래서 궁금해. 너는 어떻게 그 빤한 놈을 무서운 적으로 바꿔놓은 거지?”
“아카바 레이지를 선택했을 뿐이야.”
여자의 삶에서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선택해야 하는 상황은 많았지만, 대개는 위기에 내몰린 채 자신을 구할 길을 찾아야 하는 경우였다. 전장에서 싸울 것인가 숨을 것인가. 이국의 전사를 믿고 함께할 것인가 단신으로 싸울 것인가. 무엇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나락으로 떨어질 텐데, 어느 길이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불행과 위기로 얼룩진 삶이나마 이어가고 싶었던 것인지, 아슬아슬한 선택에 대한 그녀의 감은 극도로 발달했다. 그녀가 선택한 길은, 언제나 결과적으로 그녀가 한 발짝 전진할 길이 되었다.
괴로운 선택이 찾아오면 여자는 머릿속 저울의 각 접시에다 자신에게 놓인 선택지를 올렸다. 판단은 짧다. 저울은 이내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면 여자는 더 무거운 쪽을 택하고서, 그에 따르는 모든 것을 알아서 넘어왔다. 타인의 비난, 도덕성에 대한 논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작전 등.
청년 또한 그녀가 선택한 길이었다. 그때 반대쪽 저울에 올린 것은 하필 그녀와 함께 싸워준 이국의 전사. 랜서즈라 이름한 전사들은 청년이 아비의 군대에 맞서 조직한 정예병이기도 했다. 여자는 리더인 청년과 그를 따랐던 랜서즈가 갈라섰을 때 자신도 입장을 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랜서즈는 전력의 큰 축인 그녀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 할 것이고, 청년은 그녀가 적이 될 경우 위험한 존재로 간주해 먼저 숨통을 끊을 것이므로.
함께해온 사람들을 저울에 올린다고 판단이 특별히 길어지진 않았다. 결론은 오래지 않아 났고, 여자는 그동안 해왔듯 더 무거운 쪽을 택했다. 그것이 청년이었을 뿐이다. 그녀의 선택은 그때도 옳아서 청년은 결국 자신이 선발한 전사를 모두 제거하고 말았다. 그에게 대항하지 않은 여자만을 빼고. 함께 싸우던 이는 잃었지만 여자는 자신을 지켜냈다. 청년은 그녀의 선택에 감명을 받은 듯 그 후로 줄곧 그녀를 감싸왔으므로.
여자는 ‘반역’이 허망하게 끝난 후, 붙잡은 랜서즈를 끌어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치워버린 청년을 기억한다. 그의 독단적인 결정에 불만을 표했던 전사들의 저항은 그를 제거하려던 음모로 포장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청년은 지나치게 똑똑했다. 자신에게 향한 위협조차 저를 위해 써먹을 정도로. 그때 여자는 청년의 곁에서 모두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는데, 아마 끌려온 이들은 ‘배신자’를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청년이 검은 베일을 씌워 그녀의 얼굴을 가렸으므로. 베일을 쓰지 않았다 해도 그녀의 얼굴에서 읽어낼 것은 없었다. 동료의 최후를 지켜보는 그녀의 얼굴은 지독하리만큼 덤덤했으니.
선택하지 않은 것은, 설령 마음으로는 더 달콤했다 하더라도 다시 시선을 두어선 안 된다. 그렇게 하는 순간 여자는 자신이 선 바닥이 무너져 추락하리란 것을 알았다. 그녀가 밟고 있는 것은 언제나, 버리고 온 선택지였다. 전장에서도 사람을 해하지 않는 삶, 정의로운 길. 거기에 이국의 전사들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자꾸만 제 벽을 허물고 친해지려고 들던, 어딘가 허술한 소년들.
[이제 나에겐 너만 남았군.]
랜서즈를 없앤 날, 청년은 여자를 앉혀두고 말했다. 자신에게 닿는 무거운 시선에 여자는 움찔했다. 청년은 랜서즈 전체에게 나누어야 할 정도의 관심을, 오롯이 그녀에게 쏟고 있었다. 아마 기대의 무게도 그러할 것이다.
[내게 뭘 기대해?]
[당장은 아무것도 없어. 솔직히 말해, 지금 네 모습만으로도 만족스러우니까.]
[내가 너를 선택했기 때문에?]
청년은 답을 돌려주는 대신 웃었다. 여자는 자신이 바로 짚었음을 알았다.
“그건 정말 뜻밖이었어. 아카데미아를 증오하는 엑시즈의 인간이 아카데미아를 장악하겠다는 자에게 동조하다니.”
“정확히 말하면 당시엔 그런 구상이 없었어. 랜서즈를 제거하고 위치를 지키는 게 우선이었지. 하지만, 그래. 그 구상을 하는 데 내가 기여한 것은 있을 거야.”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판단을 마치고도 그녀는 청년의 곁에서 특별한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그를 위해 싸우지도, 동료를 넘기지도 않았다. 다만, 청년이 제 결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그에게 돌려준 말이 이따금 떠올랐다.
“그 사람은 한 가지, 내게서 확인하고 싶어 하는 답이 있었어.”
“무엇이었지?”
“자신이 틀리지 않았는지.”
“겨우 그런 것을.”
“우수한 인간이었고 정의로운 소년이었어. 당신네 부부 아래서 자라난 아카바 레이지는. 하지만 전쟁을 끝내려 나서고, 랜서즈를 결성해 아카데미아에 맞서면서 한계를 느꼈겠지. ‘유능한 인간’의 한계. 정의의 무력함.”
타고나기를 우수했던 청년은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받고 자라나 수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니 청년은 아버지가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학생을 전장으로 내모는 악인임을 알게 된 때, 당연히 그에 맞서겠다고 생각했으리라. 악에 맞서기 위해 정의로 무장하고 뜻을 함께하는 이를 모아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계획이었을 것이다. 여자가 처음 만난 청년은, 인간의 선함을 믿고 ‘바람직한’ 결말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였다.
문제는 전쟁이란 한 줌의 우수한 인간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청년은 랜서즈를 이끌고 침략군이 날뛰는 곳으로 향하면서 계속 실패와 마주했다. 경유지에서 붙들리기도 했고, 멤버가 이탈하는 일도 몇 번이나 있었다. 랜서즈에 속하기 전부터 고향의 전쟁에 내몰린 여자 말고는 누구도 전쟁의 무게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도 청년을 괴롭혔다. 정의로 무장했으나 생존싸움을 모르는 그의 전사는 훈련받은 침략군 앞에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희망이 뒤집히면 최악의 절망이 되는 거야.”
자꾸만 제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에, 적 앞에 무력해지는 전사의 모습에 청년이 피로해질 즈음이었다. 랜서즈 일부를 사로잡았던 적측에서 ‘포로’를 돌려보내겠다며 청년에게 한 가지 제안해왔다. 가족을 버리고 먼 이국으로 향해 그곳의 통치자가 된 아버지가, 청년을 후계자로 삼아 머잖아 권력까지 넘겨줄 테니 간부로 있으면서 자신에게 협조하라고 말한 것이다. 아들의 요구에 어느 정도 타협해줄 것이며 나중엔 청년이 조직을 바탕으로 뜻을 펼치면 될 거라고. 유능한 아들을 이용하거나 최소한 무력화시키려는 의도가 뻔해 바로 거절할 줄 알았는데, 청년은 제법 고민하더니 결국 제안을 수락했다.
[간부가 되어 아카데미아 상부를 헤집는다면, 지금 우리가 없애려는 문제를 큰 희생 없이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것이 청년의 주장이었다. 약간의 잡음은 있었지만 누구도 청년의 뜻을 뒤집지 못해, 랜서즈는 청년의 사병 명목으로 적진에 들어섰다. 그 후 모두가 예상한 대로 랜서즈에 대한 견제가 심해졌고 청년은 청년대로 점점 아버지의 조직 깊숙이 들어서게 되었다. 중앙으로 들어갈수록 조직의 핵심에 접근하게 되지만, 한편으론 조직에 물들게 된다. 랜서즈가 리더의 모습에 위기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다 어느 날 리더와 전사들은 충돌했다. 랜서즈는 리더가 적과 더 어울려선 안 된다고 주장했고 리더는 전사들이 때를 기다려 조직을 완전히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여자만 팔짱을 낀 채 침묵했다.
그 날의 충돌로 청년과 랜서즈는 완전히 갈라섰다. 결국은 의견차를 좁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서로에게 지쳐있었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 후로는 내내 아슬아슬한 대립이었다. 홀로 의견을 내지 않은 여자도 그 불안한 기류에 조용히 입장을 정했다. 머릿속 저울에 동료와 리더를 올려 선택한 것은 리더였다.
랜서즈가 먼저 움직였다. 여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해 전력의 큰 축을 잃은 랜서즈는 리더를 기습해 무력화시키고, 청년을 원래 그들이 기억하던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되돌릴 생각이었다. 그 순진함이 그들의 패인이었다. 청년은 자신에 반기를 든 전사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고, 확실하게 제거하겠다는 각오로 맞섰으므로. 여자는 먼발치에서 동료의 패배를 눈에 담았다. 시시한 저항이었다. 의기야 가상했으나, 그들 모두 전사로서의 능력치는 애초에 청년에 비할 것이 못 되었다. 신념이나 정의를 내세워도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는 것이 전쟁의 참혹함과 닮아있었다.
쓰러진 랜서즈는 이내 청년이 미리 근처에 불러둔 군사에 붙들려 사라졌다. 조만간 공개적으로 처리할 거라는 말이 여자의 귀를 때렸다. 두 사람만 남았을 때, 청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틀렸다고 생각해? 여자는 거의 즉답했다. 아직은 아니야.
아비의 제안에 적당히 타협하려던 모습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드러나게 부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청년은 모호한 말을 입맛대로 해석한 것일까? 그녀의 말을 동조로 여기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 것일까? 가벼이 던진 말이, 단순히 자신의 생존을 생각해서 한 선택이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는 생각을 여자는 지울 수 없었다. 바탕이 이상주의자였던 청년은 그때부터 야심가로 바뀌었으므로.
“결국 자기 사람을 버리고 나서 깨달았을 거야. 아. 내 능력으로는 다른 것도 할 수 있겠구나. 정의를 이룰 길은 정면으로 맞서는 것만 있지는 않겠구나. 아카데미아를 부수는 게 아니라, 훈련받은 군사와 폐쇄적인 체계를 잘 이용한다면?”
청년은 랜서즈를 꺾으면서 두 가지를 이뤘다. 첫째,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는 자를 치운다. 둘째, 충성스러움을 연기해 간부들을 방심시킨다. 그것을 바탕으로 청년은 새로운 길을 꿈꿀 수 있었다.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는 것. 모두의 감시를 받으며 제한된 권력을 얻는 게 아니라, 완전한 권력을 쥐고서 제 뜻대로 조직을 바꾸는 것.
“만일 아카데미아를 장악한다면?”
“네가 그동안 어떤 일을 해왔는지 짐작이 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카바 레이지를 움직인 거야. 네가 원하는 대로.”
“아카바 레오를 끌어내리고 아카데미아의 부정을 쓸어내려는 모습을 보이면 영웅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말은 했지. 당신 생각대로 하나하나 지시하지는 않았어. 그런 걸 바라지도 않고.”
“구체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 해도 네가 던지는 말 하나, 보이는 행동 하나가 전부 내 아들에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 원래 목표에서 너무 멀어진 자가, 따르던 사람을 전부 포기해야 했고 자기를 믿어줄 사람을 하나밖에 건지지 못했다면, 그 사람에게 집중하게 될 수밖에 없지.”
사내는 비로소 망국의 생존자에 대한 아들의 집요한 관심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들에게 여자는, 자신을 선택한 유일한 인간은 이미 어떤 식으로든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다. 순수했던 과거에의 연결고리이자 어쩌면 그의 ‘변절’을 그대로 수용하는 이해자일 수도 있다. 청년이 그녀에게 무엇을 베풀건, 청년이 그녀에게서 얻는 것만큼 크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수준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된 여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래서 지금 너는 만족하나? 아카바 레이지의 시선 속에서, 언제나 그 애의 편으로 사는 것 말이야.”
“그가 취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내게 필요한 것이니, 나쁠 건 없지.”
“아카바 레이지의 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전부 취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 살 생각이지?”
“글쎄.”
“사람에 대한 욕심이 강한 타입이야.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쥐고 있거든.”
“그래서?”
사내는 거미줄을 상상한다. 먹잇감을 조용히 사로잡는 덫. 관심을 둔 대상에 대해선 배로 치밀해지는 아들이 여자도 눈치채지 못하는 새 그녀를 확보하는 미래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세상에 너를 자기 사람으로 내놓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다. 그 다음엔 더 가까운 관계, 좀 더 특별한 관계. 네 삶에 아카바 레이지밖에 남지 않을지도 몰라.”
“경고라고 하는 거야?”
여자는 차게 웃었다.
“내가 가장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은 그 자의 영역 안이라는 걸 알 텐데. 내 필요를 충족하고 나를 보호할 수도 있는 인간은 현 시점에선 아카바 레이지가 유일해.”
평범한 일상도 사랑하는 고향도 의지할 기반도 전부 날아갔다. 삶은 언제나 투쟁이었고 어디에도 구원의 길은 없었다.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처지에서 그나마 희망을 걸어볼 것은 청년과 같은 강력한 패.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품건, 어떤 것을 기대하건 중요하지 않다. 혹 생각해볼 일이라 해도, 적어도 제 삶을 완벽하게 망가뜨린 사내에게서 들을 말은 아니다.
“쓸데없는 말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했어. 연구의 성과나 들었어야 했는데.”
“유토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 손상이 너무 심해.”
“난 기다리는 건 잘하니까 열심히 들여다보기나 해.”
“아카데미아를 뒤엎을 때 네가 내 연구를 중단시키지 않았다면 어쩌면 벌써 멀쩡하게…….”
“나한테 쓸데없는 죄책감을 안겨서 책임을 돌리고 싶은 모양인데, 그런 건 착한 애들한테나 통하는 거야. 나한텐 안 먹히지. 그쪽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애초에 누구도 다치지 않았어.”
삶을 짓밟은 피해를 입에 올리면서도 여자의 목소리는 지극히 건조하다. 얼굴에 한 가닥 감정이 드리워지는 일도 없다. 덤덤한 것이 아니라 망가진 것이다. 사내는 그녀가 불행을 넘어온 것이 아니라 그에 완전히 먹혀버렸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여자가 이전처럼 베일을 썼다면 얼굴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읽을 수 없어 나았을 것을. 저 황폐함은 자신의 작품이다. 그것을 알기에 사내는 침묵했다. 그녀가 연구실을 빠져나가 사라질 때까지. 발소리가 사라지고서야 사내는 장치에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여기에 매달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
연회는 길었다. 새로운 통치자의 탄생을 축하하려 간부들끼리 모인 자리였다. 기대와 찬사가 오가는 곳에서, 여자는 조각상처럼 아름답게 서 있었다. 말을 걸어오면 답하고 인사할 곳엔 인사를 건네며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으면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다. 적당히 상대하기만 해도 흠이 되지 않아서였지만 그 이상으로 사람을 맞기 힘들어서이기도 했다. 사람이 모이는 자리는 숨이 막힌다. 모두가 들떠있는 파티라면 말할 것도 없다. 공기에 짓눌리고 열기에 힘이 풀린다. 어떤 환경에든 적응하는 것이 제 특기라고 생각했는데, 연회엔 아직도 완벽히 적응하지 못했다.
사실, 여자는 어느 곳에서나 지금같이 방관자처럼 있는 것이 좋았다.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분위기를 읽기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청년의 이야기였다. 굳이 이 자리가 아니라도, 그녀가 속한 곳 어디에서나 청년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젊은 군주에 매료되어 있었다. 영웅의 이름을 얻어 일찍이 권력을 쥐고도, 지위를 탐하는 일 없이 통치자의 부재를 완벽하게 메우다, 마침내 모두를 책임지게 된 청년을. 그의 신념은 알맹이 없는 이상이 아니라 세상을 구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가 만들 미래는 무엇이건 지금보단 나은 것이리라. 청년을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기대란 그런 것이었다. 청년은 그 기대를 얼마나 채울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 세상이 기억하는 청년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의 끝에 여자는 웃었다. 답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의 기대를 유지할 것이다. 다만, 그때 청년이 내놓은 결과가 정말로 사람들이 바라는 방향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가 꿈꾸는 이상세계가 얼마나 기묘한 것인지는 여자만이 안다. 곧이곧대로 말하면 동조할 이를 찾기 힘든 괴상한 발상. 그럼에도 청년은 이상을 실현하려 할 것이고, 사람들은 결국은 그를 믿게 될 것이다. 청년은 제 편으로 만든 자에겐 언제까지나 완벽한 모습을 가장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혹 실패하더라도 ‘뜻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나 교묘한 사람이라니. 새삼 여자는 자신이 어떤 인간의 눈에 들어버렸는지 느꼈다. 물론 청년의 저러한 모습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다. 그녀는 그의 삶에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청년의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만일 자신이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에게 다른 모습을 보였더라면 청년은 무엇을 꿈꿨을까. 여자는 그것이 궁금했다.
간부와 이야기하던 청년은 잔을 든 여자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낯빛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힘든 티를 내려 하진 않지만 꽤 피로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전부터 그녀는 사람이 모이는 자리를 잘 견디지 못했다. 청년은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는 선에서 대화를 빠르게 마무리하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다음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서 여자를 데리고 빠져나가는 일이었다.
“바람을 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조용한 곳에 닿았을 때, 비로소 청년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설명했다. 대강 짐작한 이유였지만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좀 지쳤었어.”
“이쯤에서 마무리할까?”
“끝나고 쉬면 돼. 축하는 오래 받아야지.”
그렇게 말하고선 정말로 숨만 돌리고는 돌아가자고 잡아끄는 여자였다. 다행히도 연회는 그렇게 오래가진 않았다. 청년은 곧 그녀를 피로한 환경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다.
연회장을 나오며 찬바람을 걱정해 여자에게 숄을 둘러줄 때 청년은 드레스의 파인 부분으로 드러난 흉터를 발견했다. 등에 크게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고향에서 저항군으로 싸울 때 등에 부상을 입었다고, 그녀가 지나가는 듯이 말했던 기억이 있다. 맹수가 할퀸 것 같은 자국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청년은 여자의 손에 무기가 들려있던 시절을 떠올린다. 아비가 일으킨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저항군의 중심이 되어 훈련받은 군사를 쓰러트리던 때. 그녀는 기계 새를 조종했는데, 새의 껍질을 쓰고서 무엇이든 쓸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병기는 꺾일 듯 위태로운 인상으로 지옥에서 버티는 주인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여자를 위협적인 전사로 만든 것이 아버지라면, 무장을 풀게 한 것은 자신이었다. 청년이 차근차근 권력을 쥐는 사이 그녀는 무기를 내려놓고 그의 그림자에 숨었다. 이렇게 그녀에게서 전사였던 때의 흔적을 찾을 때면 청년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은 그녀를 전쟁에서 해방시킨 것인지, 날개를 꺾어 제 곁에 둔 것인지를.
“피곤하지. 내 파트너로 다니는 건.”
아무래도 감상에 젖어, 돌아가는 길에 청년은 슬그머니 물었다.
“아니, 사실은 나쁘지 않아.”
“그건 기쁜데.”
“예쁜 드레스를 입고 당신 곁에서 웃고 있으면 사람들은 내게 방심하거든.”
“뭐라도 꾸미는 듯이 말하는군.”
“꾸미고 있다면? 그러면 당신은 내 편이 되어줄 거야?”
“그거야 당연하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인데.”
청년이 자못 진지하게 답했을 때, 그들은 함께 지내는 집에 도착했다. 그것은 이제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쉴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여자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거울 앞에서 액세서리를 풀었다. 그 다음은 드레스 뒤쪽에 화려하게 교차된 장식용 끈을 푸는 일이었다. 어쩌다 복잡하게 얽혔는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여자가 고전하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던 청년이 슬그머니 그녀의 뒤에 와 섰다. 거울로 청년의 존재를 눈치챈 여자가 골칫거리를 그에게 맡기고, 그는 엉킨 것을 조심스레 풀었다. 그가 손을 뗐을 때, 거울 속 여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거기서 청년은 무언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청년은 여자의 옆자리로 옮겨가더니,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스쳤다 흩어진다.
“무슨 생각을 해?”
“우리가 모두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했어.”
완벽한 파트너. 그것이 청년이 여자와 함께 만들어내고 싶었던 이미지였다. 깨지지 않는 결합, 서로를 채워주는 관계, 행복한 모습. 오래 전, 야심 가득한 그의 어머니가 천재 기술자를 데려와 남편으로 내세우며 기대했을 이미지. 거기서 청년이 떠올려낸 것은 얼마든 흘려보내도 될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사실은 아까 결혼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시시하네.”
“당신이랑 나 말이야, 어울리는 모양이야. 결혼 얘기가 이번이 처음이 아냐.”
사소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청년은 제법 즐거워 보인다. 여자를 그의 삶에서 당연한 존재로 취급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그는 흡족해했다.
“그래서 어떻게 답했는데?”
“당신이 원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
“아카바 레이지의 생각은 어떻고?”
“우리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잖아.”
파트너니까 ─ 덧붙인 말은 예상대로의 것이었다.
여자는 새삼, 죄인이 자신에게 던졌던 경고가 우습다. 청년은 그녀를 세상에 내놓아 모두에게 각인시키고서 그녀를 서서히 삼키려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녀를 제 것으로 만들어놓고 세상엔 느긋하게 공개한 것이다. 오래 전부터, 그들은 단순한 협력자가 아니었다. 연인도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결합하게 될지 알 수 없다. 파트너라는 단어가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그나마 가장 적합한 이름일 것이다.
곁에 서줄 존재. 언제나 함께할 사람.
물론, 표면적으로 기대하는 그러한 역할에 야릇한 심리가 덧씌워졌음을 여자는 모르지 않았다. 청년은 아마도, 그녀의 유일한 선택지가 되길 바라고 있으리라. 적어도 현 시점에서 기대할 수 있는 하나뿐인 답. 혹은 그녀의 종착지. 그것은 평범한 소망이 아니다. 연인을 기대하거나 부부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속이 빤하다. 청년이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복잡한 일이다.
“맞는 말이야.”
그러나 여자는 청년의 방식이 편했다. 그는 애정을 바라지 않고 그녀의 감정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느껴본 적도 없는 애정을 꾸며내고 시시한 관계에 묶이지 않아도 된다. 계약처럼, 청년을 그가 기대하는 위치로만 대해주면 어긋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때로 연인이 할 법한 접촉을 하고 보통은 부부보다도 친밀하지만 관계에 그러한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어떤 깊이도 어떤 행위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여자는 별로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런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관계에서 크게 부족한 것은 없잖아.”
거기서 청년이 반응했다. 여자가 말을 잇기 전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진 것이다.
“당신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해?”
“무슨 답을 듣고 싶어?”
“내가 성공했는지 알고 싶어.”
“그게 중요해?”
“나에겐 중요해.”
안경 너머 보랏빛 눈이 열기를 띠고 있다. 아무래도 조금 전의 말이 청년의 내면 어딘가를 자극하고 만 것 같다. 청년은 여자의 어깨를 감싸며 낮게 속삭였다.
“나는 당신이 처음 만났던 그 열여섯 살 소년이 아냐.”
“그러면 지금의 아카바 레이지는 어떤 인간이지?”
“모든 것을 쥔 사람.”
무장한다고 모두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자를 지금까지 생존하게 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나 빠르게 적응하는 능력, 그리고 최선을 선택하는 직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목표에 다다를 최단루트나 최소한 실패하지 않을 길을 찾아냈고, 그렇게 선택한 것에 금세 적응해 생명을 연장했다. 사람을 선택해야 할 때라고 다를 것은 없다. 랜서즈가 리더와 갈라섰을 때 청년을 선택한 것도 청년에게 승산이 있을 거라는 직감 때문이었으리라. 거기서 청년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녀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방법을.
사랑을 얻는 것은 처음부터 생각도 없었다. 여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정을 쏟아도 결코 돌려받을 수 없는 인간인 건 물론 애정에 변화할 리도 없다. 바로 그 점에 청년은 안심한다. 그녀가 사람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이 아니라, 필요며 힘이다. 여자에게 최상의 패만 될 수 있다면, 그녀는 언제까지나 제 곁에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당신이 필요로 하는 인간이기도 하지.”
자신만만하게 덧붙이는 청년에게서 여자는 오히려 열여섯 소년을 떠올려낸다. 랜서즈를 결성하기 전, 전쟁을 겪은 자신에게 정예병 결성에 대한 계획을 늘어놓으며 그는 얼마나 들떴던가. 동시에 그 오만이 그녀는 얼마나 믿음직스러웠던지.
“그러니 만족할 수 없다면 말해. 당신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멀리 갈 것 없는데. 내게 필요한 건 아카바 레이지야.”
여자는 그 이름을 가진 자를, 그 이름에 따르는 힘을, 자신이 만들어낸 영웅을 바란다. 혹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겨 언제까지나 곁에 두려고 하는 순진한 인간을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건,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아카바 레이지라는 이름으로 요약된다. 처음 만났을 때로부터 그들도 그들의 관계도 변화했지만, 청년이 그녀에게, 그녀가 청년에게 중요한 위치라는 것만은 바뀌지 않았다. 과거 청년이 어떤 작전에서나 여자를 생각했던 것처럼, 여자의 구상에서도 청년은 언제나 빠지지 않았는데.
“아카바 레이지가 있으면 돼. 그러니 내 삶에 지금 부족한 건 없어.”
그것이야말로 청년이 가장 바라던 답변이었다.
더 물을 것도, 조를 것도 없다. 그 말만으로 청년은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녀에게 무엇이든 돌려줄 수도 있었다. 가장 평범한, 그리고 가장 자유로운 듯한 답변이 가장 강력한 족쇄가 된다. 통치자는 자신과의 관계를 어떤 이름으로도 정의하지 않는 여자를 안았다. 이제 그에게 더 필요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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