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실재하지 않는 도시에 서 있었다. 적습에 짓이겨져 죽음의 땅이 되고 만 고향이, 아름다웠을 때의 모습으로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과거의 모습을 프로그램으로 구현해, 현실에 덧씌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경기장에 펼쳐진 화려한 도시의 풍경에, 객석에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여자와 함께 경기를 치를 상대편 선수의 얼굴도 상기되어 있었다. 그 반짝거리는 풍경이 무엇을 본뜬 것인지 아는 여자만 가만히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어디에도 남지 않은 옛 근거지 앞에 기도를 올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제나 차분하게 적의 숨통을 끊는다는 평을 듣는 여자는, 그날따라 다소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냉정하게 적의 공격을 끊어내던 전술은 적을 위협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여자가 부리는 기계 새는 폭격을 퍼부으며 상대를 몰아세우고, 적의 라이프를 무섭게 깎았다. 평소와는 다른 그녀의 열기가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관객은 알지 못한다. 그저 여자가 달아올랐다는 것에 함께 흥분해 열렬한 환호를 보낼 뿐.
여자가 확실히 승기를 잡자 관객의 외침은 무시무시해졌다. 계속해, 쿠로사키. 어서 부숴버리라고! 공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쉬지 않고 머리를 쟁쟁 울렸다. 환상으로만 존재하는 미래도시의 풍경이 어느 순간부터 어지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부숴버려, 쿠로사키! 여자의 눈앞에 문득 과거 고향을 덮친 괴물이 밀려든다. 실재하지 않는 재앙은 현실만큼 선명하게 그려져 시야를 차차 메운다. 박살내버리라고! 그때 여자의 눈이 빛을 잃었다.
다음 순간 경기장을 덮친 것은 찢어질 듯한 비명이었다. 아니, 소리의 근원을 찾지 못했다면 비명이라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짐승의 울음을 닮아있었으므로. 어떤 글자로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울음은, 경기장에 선 여자에게서 새어나오는 소리였다. 여자는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쉬지 않고 울부짖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울음과 텅 빈 눈이, 귀신에라도 씐 것 같다. 그 전까지 여자를 향해 응원의 함성을 보냈던 관객들은 어느새 겁먹은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얼어붙었던 상대 선수가 여자에게 다가서 그 팔을 잡았으나 여자는 무서운 힘으로 그를 밀쳐낼 뿐.
그래도 주의를 돌리긴 한 것인지 여자의 비명은 거기서 멎었다. 여자는 여전히 풀린 눈으로나마 손을 올렸다. 지휘하듯 손을 젓는 것은, 그녀가 기계 새를 돌격시킬 때의 신호. 새의 형태를 덮어쓴 병기가 이전처럼 적을 노렸으나, 무언가 이상했다. 본래 상대의 방어벽을 노려야 할 폭격이 철저히 상대 선수에게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상대편을 몰아세우는 게 아니라, 상대를 죽이기라도 하려는 것 같다. 아무리 피해도 기계 새는 적을 가만히 두는 일이 없다. 무섭게 그 주변을 날며 폭격을 그치지 않는다.
아직 더 죽여야 해. 여자는 무서운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더 죽여야 모두가 살아. 죽여야 해. 아카데미아를 죽이고, 전부 부숴서 ─ 객석의 아이들이 하나둘 울음을 터트렸다. 경기장 밖의 시큐리티도 문제를 감지하고 바삐 움직였다. 유토가 못 하겠다면 나라도 할 테니까. 기계 새에 쫓기던 상대편은 결국 무너졌다. 기계 새의 공격에 살갗이 찢겨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전부 처치하면 우리도 자유로워질 수 있어. 관객들이 일제히 여자에게 야유를 보냈다. 여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인지 쓰러지는 적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 루리?
마지막 일격을 앞두고 여자의 기계 새가 갑자기 흩어졌다. 전투용 디스크도 완전히 꺼지자, 여자는 멀뚱멀뚱 눈을 굴린다. 적을 쓰러트렸는데, 조금만 더 있으면 끝났을 텐데. 왜 갑자기 멈춰버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싸움을 그칠 수 없는 여자의 손이 다급하게 디스크를 매만진다. 아직 남았단 말이야. 그러나 여자의 시도는 오래지 않아 멎었다. 경기장에 들어온 시큐리티가 그녀를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끌려나가며 여자는 소리쳤다. 아직 안 돼. 아직 다 못 끝냈어. 아직은 ─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즈음 관객들은 볼 수 있었다. 경기 결과를 표시해야 할 화면에 뜬 문장을.
[쿠로사키 슌. 실격패.]
*
여자의 경기는 바로 화제가 되었다. 누군가가 퍼트린 경기 영상 덕분에 경기장에 없었던 이들까지 그녀에 대해 떠들 수 있었다. 한창 인기를 얻고 있던 선수였지만, 이상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끔찍했다. 대개는 여자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비웃는 것이었고 일부는 ‘아픈’ 사람에 대한 연민 가득한 말이었으나 어느 쪽이건 여자를 괴롭게 할 것임은 분명했다. 여자가 소속된 회사에선 사건에 대해 아무런 입장도 표하지 않았고, 여자를 줄곧 관리하던 사장은 여자의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휴식하게 했다.
사람들은 여자가 보인 이상행동의 근거를 찾지 못했지만, 사장은, 그녀를 과거부터 지켜본 사내는 짐작하고 있었다.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녀를 괴롭혔던 재앙은 끝났다 해도 그때의 처참한 기억까지 삶에서 간단히 도려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억지로 가라앉혀둔 것이, 언제든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이 비슷한 환경에서 깨어났을 뿐이다. 트라우마로 인한 쇼크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대중은 대부분의 사건을 쉽게 잊으므로,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논란도 가라앉을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녀가 안정을 찾았을 때 사정을 설명하면 된다. 젊은 사장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건을 수습하기 전까지 여자가 악의적인 반응을 접하지 않게 하려 애쓴 사내였으나, 여자는 전부 알아챈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에게 냉담한지. 그리고 쇼크를 일으킨 것이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 사건이 일어난 지 오래지 않아 여자는 그에게 선언했다. 프로를 그만두겠다고. 갑작스런 말에 사내는 한동안 멀거니 여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들의 말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달래듯이 말한 것은 여자가 그렇게 쉽게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사건의 원인이 무엇인지 짐작하는 사람으로서, 사내는 그녀를 변호해줄 수 있었다. 혹은 사람들의 비난을 인위적으로 가라앉힐 수도 있었다. 그는 언제나 여자를 위해서 싸워줄 뜻이 있었다.
“전쟁 피해를 상기시키는 상황에, 관객의 압박. 그 속에서 쇼크를 일으킨 것은 잘못이 되지 않아.”
“됐어, 그만해.”
대중으로부터 여자를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 이미 계산이 선 사내였으나 여자는 그의 말을 더 듣고 싶지도 않은 눈치였다. 목소리에 이미 피로가 묻어나왔다.
“이제 싸우고 싶지 않아.”
언젠가부터 여자는 그런 식이었다. 자신이 물러설지언정 대항하려 들지 않았다. 과거의 그녀가 싸워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과 반대로.
“그런 건 이제 지쳤어. 싸워도 누구도 들어주지 않아. 그리고 이번의 결정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니까, 그렇게 열 올리지 않아도 돼.”
“그러면?”
“내가 앞으로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없어. 그러니 그만두는 거야.”
“정말로 네 선택인가?”
“의심이라도 가는 모양이지?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결정했다는 건 달라지지 않아.”
“결정을 조금만 유보해줘, 쿠로사키.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니까.”
여자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사내의 간절한 눈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사내는 여자가 뜻을 확정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사내의 짐작대로, 사람들은 여자의 일을 쉽게 잊었다. 조롱은 잦아들었고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여자가 다시 관객 앞에 서면, 물론 일부는 그녀의 일을 다시 떠올리겠지만 대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도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은 잊힐 것이고 사내가 기회를 마련해 변호하고 나서면 문제는 거의 해결되리라. 그렇게 자신한 사내는 여자의 경기 일정을 슬그머니 다시 잡으려 했지만, 여자가 거절했다.
유예기간이라고 했잖아. 여자의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았지만 사내는 그 속에서 거부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동안 바쁘게 경기에 나가느라고 피곤했고. 여자의 말을 들으며, 사내는 대략적으로 짜두었던 일정을 올리지 않고 파기했다. 다만 사내 역시 듣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원래대로 돌아갈 생각은 있는 건가? 여자는 대답 대신 웃었다. 드물게 답을 회피하는 모습에, 사내는 불안해졌다. 어쩌면 그녀가 정말로, 체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자의 삶은 지독하게 불행했다. 청소년기에 전쟁에 휩쓸려 그 속에서 동생과 친우를 잃었다. 악귀처럼 싸워 전쟁은 끝냈지만, 고향은 이미 폐허가 되었고 함께할 사람은 사라졌다.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는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옛 협력자였던 사내에게로 향했다. 낯선 도시에 낯선 사람들. 새로 시작해야만 하는 환경이었다.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여자는 새로운 세상에 빠르게 적응해 제 자리를 만들었다.
마침내 사내의 지원을 받으며 어렸을 때의 소망이었던 프로가 되었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는 희망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삶을 지배한 불행에서 드디어 벗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빛은 짧았고 불행의 그림자는 끈질겼다. 여자의 삶은 결국, 또다시 흔들렸다. 참으로 보람 없는 삶이었다.
“나는, 잘못 정착한 걸까.”
유예기간이 끝나고, 결국 은퇴로 마음을 굳혔다는 여자가 던진 말이었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그 속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사내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 모습을 눈에 담을 뿐이었다.
“응? 실패한 걸까?”
“무슨 답을 듣고 싶어.”
건조한 반문에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실패한 거라고 말해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생각해?”
“몰라.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하면 정말 그렇게 믿고 마음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여자가 얼마나 지쳐있는 것인지 사내는 알지 못한다. 그가 그녀와 만난 이래로, 그녀는 제대로 된 성공을 거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성공하는가 싶어도 끝은 저런 식이었다. 그러한 좌절에 지쳐, 여자는 더는 희망조차 갖지 못하도록 실패를 공언받고 체념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내는 결국 여자가 바라는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부질없는 희망으로 다시 괴롭히고 싶진 않았지만, 그녀가 모든 걸 버리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가 내건 침묵이야말로 여자에겐 가장 잔인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사내의 침묵은 여자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여자는 그것으로 짧은 프로 생활을 끝냈다. 신화에 가까운 기록은 불명예스럽게 끝났고 그녀는 그 초라한 종말에 대해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따져보면 그리 영광스럽지도 않았던 나날이었다. 여자는 언제나 찬사보다 염려를, 인정보다 의심을 받곤 했으므로. 다수의 변덕스러운 인간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그 후 모습을 감추었다. 사내는 전쟁이 끝난 후 몇 년간 여자를 곁에 두고 보호해왔지만 자신은 그녀에게 타인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프로를 그만둔 여자가 어떤 삶을 택할지, 어디로 향할지 등은 그가 관여할 영역이 아니었다. 어느 곳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휴식을 취하는 게 나을 것이다. 사내는 그렇게 생각하며 여자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생각을 끊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 여자는 겨우 나타났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비틀거리며. 자신을 찾은 사람이 있다는 말에 사내는 별 생각 없이 불러들였고 한동안 보지 못했던 여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인사를 하려 했지만 여자의 금빛 눈은 쇼크를 일으켰던 때처럼 죽어있었다.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마, 그를 찾아온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몸이 기억하는 대로 회사에 왔다가, 주변에서 지레 사장을 만나러 왔다고 짐작하고 안내했으리라. 사내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위태로운 여자의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어딘가에서, 아예 망가져서 돌아온 것 같아서.
사내는 어떻게든 여자를 안정시킬 생각으로 다가섰고, 그녀를 조심스레 붙잡았다. 여자는 손이 닿자마자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의 품에 무너졌다.
*
사내는 여자에게 자신은 언제나 최후의 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만일 여자가 그렇게 지독하게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것을 얼마든 택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내몰리지 않았더라면. 그렇다면 여자는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자는 그에게 의미를 부여한 적 없으며 애정은 한 가닥도 품은 적 없다. 그런 여자가 그를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그녀가 철저히 실패했다는 증거일 뿐.
그러나 사내는 언제나 여자의 손을 잡았다. 뿌리칠 수 없었고, 잡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그래선 안 되었다. 그녀가 쥘 수 있는 마지막이 자신이라면 자신만은 그녀의 편이 되어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녀를 지탱해야만 했다. 이것은 책임감일까.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자신에게 온 여자를 역시 말없이 감싸며 생각했다. 책임감이어도 좋았다. 여자가 마지막 끈을 놓쳐 추락하는 일만은 막고 싶었으니까.
회사로 돌아온 여자는 이틀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냐는 사내의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하트랜드에 다녀왔어.”
“무슨 일로.”
고향에 다녀왔다지만, 전쟁 이후의 고향이란 그녀에겐 괴로운 기억만을 되새기는 곳일 뿐이다. 누구도 막지 않았으나 그녀는 몇 년간 고향에 들른 적이 없었다. 여자는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겨우 털어놓았다.
“연락이, 왔었어. 루리로 추정되는 사람이 발견되었다고.”
“그래서 결론은?”
“아카바.”
여자는 그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다. 부를 때의 의미는 간단했다. 여기서부턴 당신이 관여할 영역이 아니다, 라고 주의시키는 것이다.
“미안. 압박하려는 건 아니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로, 아무 일도.”
여자가 찾으러 간 사람은 몇 년 전에 실종된 사람이었다. 비슷한 사람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동안 간 적 없는 고향에 달려갈 정도로, 그녀에게 소중했던 사람. 당연히 여자가 그곳에서 맞이한 것은 ‘아무 일도 없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의 시도가 어떤 결말을 맞았을지, 그래서 그녀가 어떤 감정에 사로잡혔을지. 듣지 않아도 사내는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이곳에 돌아왔다는 사실로, 그리고 그녀가 떠나기 전보다 망가져 있었다는 것으로. 짐작하면서도 그는 입을 다물었고 여자는 가만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돌아온 거야. 여기 아주 정착하려고.”
여자는 몇 년간 사내가 사는 도시에서 생활했고 프로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완전히 그곳 사람은 아니었다. ‘잠시 머무르는’ 이방인의 위치를 고집하는 것은 낯선 도시에 완전히 뿌리내릴 생각이 없음을 말하는 것인지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리란 걸 암시하는 것인지 사내는 물은 적이 없었다. 어차피 먼 곳에서 온 그녀가 정식 이주 절차를 거치지 않더라도 생활에는 제한이 없었다. 때문에 누구도 강요한 적 없는 정착을, 왜 이제 와서 스스로 꺼내는 것인가.
“하트랜드엔 이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인지?”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닥 동요조차 없었다. 그것으로 아예 괴로운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려는 것일까. 사내는 그러길 바랐다. 그래서 여자가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기를. 미래라도 행복하게 누리기를.
이방인인 여자가 정식 이주 절차를 밟는 데는 필요한 것이 많았다. 사내는 연고 없는 그녀가 무사히 절차를 마칠 수 있도록 하나하나 돕기로 했다. 준비해야 할 자료를 거의 마련했을 무렵 여자가 작성한 서류를 살피던 사내는 멈칫했다. 그녀의 이름이 잘못 기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너무 뻔한 곳에서 터진 오류여서, 하마터면 알아차리지 못할 뻔했다.
“쿠로사키, 여기.”
그렇게 말을 꺼낸 순간 사내는 숨이 턱 막혔다. 여자가 그렇게 눈에 띄는 것에서 실수할 리가 없었다. 바꿔 말하면, 지금의 오류는.
“왜?”
명백한 고의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사내는 저를 보며 웃는 여자의 눈을 보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을 꺼낸 이상, 묻기는 해야 했다.
“왜 ‘슌’이 아니고 ‘루리’지?”
여자가 서류에 쓴 이름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사라진 동생의 것. 이곳에선 그녀와 함께 움직였던 몇몇만 아는 이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슬그머니 제 이름 대신 써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니까. 그녀를 만나게 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훔쳐온 이름임을 알 리 없으니까.
“글쎄, 어차피 새로 시작하는 건데 꼭 쿠로사키 슌일 이유는 없잖아? 이곳에선 그 이름으로 별로 좋은 일도 없었고.”
“그것뿐?”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그것으로 루리를 포기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포기할 수 없어서 네가 루리를 덮어쓰고 살겠다는 것인지?”
“상관없잖아.”
여자의 목소리엔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았다.
“내가 쿠로사키 슌을 포기하든, 쿠로사키 루리를 포기하든.”
전자는 자신의 이름과 그것으로 요약되었던 삶을 포기하는 것이고 후자는 아마 영영 돌아오지 못할 동생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둘 다 무거운 것이었으나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고 있었다.
“하트랜드에서 내가 뭘 느꼈는지 알아?”
여자는 눈을 내리깔며 나른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실패했다는 것.”
“쿠로사키, 아직 네게는.”
“많은 날이 남아있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싶으시겠지. 너는 언제나 그랬어. 아무리 숨이 막혀도 한 움큼 희망을 억지로 불어넣어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지. 왜 그랬을까. 어차피 나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데. 운명을 틀어서 루리를 구하지도, 현재를 극복해 잘 살아가지도, 과거에서 헤어나 전쟁을 떨쳐내지도 못하는데. 어차피 실패밖에 없는데!”
여자의 손에서 펜이 떨어졌다. 가느다란 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내는 여자에게서, 쇼크를 일으켰던 날의 그녀를 본다. 황폐함을 숨기지도 못할 정도로 망가진 인간을 본다.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랐으면, 그럴듯한 삶을 바라진 않았어야지. 네 바람을 내 삶에 투영하지 않았어야지.”
“좀 더.”
“살아주길 바랐으면.”
“행복하게.”
“나를…….”
“살았으면 했지만, 그것도 무겁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야겠군.”
“빨리 포기해주는 게 좋았어.”
사내는 여자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차마 가까워질 수 없었다.
“괜히 꿈꾸지 않도록. 너덜너덜한 현실이 전부인 줄 알고 살도록.”
여자의 눈은 금방이라도 젖어들 것 같았지만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았다. 이제 더 흘릴 눈물도 남아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많지 않은 나이에 삶을 잠식한 절망과 실패의 연쇄가 그녀의 슬픔을 전부 말려버렸는지도 모른다. 여자의 목소리는 모래처럼 건조하다. 사내는 그것이 슬펐다.
“너는 실패를 몰랐고, 대부분의 희망에 보답받았고, 결국 모두에게 인정받았지. 실패뿐인 삶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어.”
여자의 삶은 그 반대였다. 실패를 너무도 잘 알았고 모든 희망에 배반당했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받기보단 온갖 이유로 비난받기 일쑤였다. 그래도 꾸역꾸역 살아온 그녀이기에 사내도 무의식적으론 괜찮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낼 거라고. 결국은 버텨낼 거라고. 그리고 언젠가는 그녀도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너무도 안일하게.
“왜 ‘슌’이 아니라 ‘루리’냐고 물었지? 간단해. 쿠로사키 슌도 쿠로사키 루리도 포기하고 싶으니까. 아등바등 사는 것도, 이미 흩어진 사람을 억지로 살려두는 것도. 이제 더는 못 할 것 같으니까.”
“내려놓겠다는 건가.”
“그래, 쿠로사키 루리가 살아있는 것 같은 하트랜드에서 도망쳐오고, 이젠 쿠로사키 슌에 대한 기대로부터도 도망치는 거지. 보람 없는 투쟁에 더는 매달리고 싶지 않아.”
거기서 사내의 말은 갈 곳을 잃었다. 여자가 건조하게 토해내는 이야기야말로 어떤 절규보다도 처절한 것임을 알기에 그랬다. 그녀가 그에게 돌아와 모든 것을 벗어던진 것은 결국, 더 버틸 힘이 없어서였다. 재앙 같은 삶에 억지로 맞서다 추락하지 않으려, 불시착이나마 선택한 것이다.
“어차피 네게는 쿠로사키 슌이어도 쿠로사키 루리여도 달라지는 건 없잖아. 너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그렇겠지.”
사내는 대답 대신 서류에 새겨진 이름을 보았다. 여자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훔쳐온 이름을. 이제 자신이 여자에게 사용해야 할 이름을. 여자는 사내에게서 서류를 빼앗아 그대로 제출했다. 훔쳐온 이름이 과거를 대체하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옥죄던 것을 한꺼번에 끊어냈다.
*
여자는 그 후 제법 자주 웃게 되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림으로써 더는 괴로운 일도 없게 된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과거 ‘사건’을 일으켜 일찍 프로에서 은퇴한 선수임을 알지 못했고, 그녀의 고향 사람들은 아등바등 살아가던 그녀를 잊었다. 사내만은 여자의 괴로운 실패를, 결국 그녀가 놓고 만 타인의 기대를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으나 당연히 입 밖에 내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포기한 것이라면 자신도 포기해야 했다. 그녀의 종착지로서, 어떤 소망도 그녀에게 담지 않고서 그녀의 필요만 채워줘야 했다.
그래서 여자는 늦게나마 행복해졌을까. 알 수 없으나, 사내는 여자가 고통에 묶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렇게 기를 쓰고 잡으려 했던 안식이 모든 것을 놓은 때 거짓말처럼 찾아들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생각해보면 전쟁이 끝난 후 누구도 그녀의 투쟁을 나눈 적 없었다. 그녀가 부질없는 희망을 안고 버둥거릴 때도, 안타까워하거나 좀 더 싸우면 된다며 억지로 잡아끄는 게 전부였다. 그녀는 점점 싸울 힘도 잃어가고 있었는데. 부당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거운 기대를 혼자 짊어지며 버텨야만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여자는 사내가 알던 그녀로부터 멀어져갔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는 전장을 누비는 전사였고, 그 후로도 쭉 실패와 압박에 시달려 극도로 내몰린 인간이었으니, 그가 아는 그녀란 처음부터 일반적인 인간은 못 되었다. 그런 자가 차차 무거운 책임이며 과거 따위에서 해방되며 그 특질을 잃어가는 것이다. 사내에겐 옛 기억에 비추어 점점 낯설어지는지 몰라도, 그녀에겐 다행스러운 변화이리라.
어쨌든 여자는 괜찮아 보였다. 자신이 쇼크를 일으켰던 경기장에서 옛 동료 선수의 경기를 관람할 때도, 전쟁을 바탕으로 한 연극을 보면서도, 고향의 소식을 간간이 들을 때도, 어떻게든 그녀의 곁에 있기로 한 사내가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을 때도. 여자는 단정한 얼굴에 엷은 웃음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특별히 괴로움이나 고뇌를 비추는 일 없이 순조롭게 수용했다.
여자는 불시착한 대로 정착했다. 다시 비행하는 것은 포기했지만, 어차피, 그녀를 태웠던 것은 수리해서 다시 날 수 있을 정도의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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