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조] 거짓말의 깃

2017. 4. 9. 11:17 from 02

 

청년은 내쫓기듯 성소를 빠져나왔다. 성녀와의 만남에 허락된 시간은 몇 분 남짓. 서로 안부만 물을 수 있을 정도로 짧은 만남이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만남은 언제나 짧았다. 귀한 분이라는 이유로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제한하는 것은 성녀의 하나뿐인 형제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형제라는 이유로 제한이 더 심한 것 같기도 했다. 청년은 누이를 만나러 들어설 때마다 시중드는 이의 달갑잖은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게다가 겨우 기회를 잡아도, 언제나 곁에서 지켜보는 자들이 있다. 대화의 내용도, 주제도 제한될 수밖에.

그나마도 청년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올 때나 허락되는 만남이었다. 포상이라는 것일까. 상부에선 남매의 만남을 제한하고 있었지만, 완전히 막아선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청년은 누이를 성녀의 이름으로 데려간 상부를 경계했지만, 상부에서 누이를 틀어쥐고 있는 한 명령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성녀 역시 자신을 성소에 유폐하다시피 한 간부들을 혐오했으나 상부에서 오빠를 쥐고 있어 저항할 수 없었다. 상부는 충성스럽지 않은 둘을 보다 고분고분하게 만들기 위해 가끔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내주는 것으로 달래곤 했다.

속내가 뻔히 보이는 것이나마 만남은 만남이었다. 이곳에 들어선 이후 거의 제대로 함께하지 못한 남매는 그 껍질뿐인 만남도 간절했다. 그걸 위해 청년은 위험한 임무에도 뛰어들고 성녀는 상부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줘야만 했다. 남매의 삶이란 그렇게, 타인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간부의 눈에 띄어 함께 이곳에 끌려온 것이 남매의 삶에서 최대의 불행일지도 모른다. 그 하나의 사건이 그들의 삶을 이렇게 틀어버리고 말았으니.

복귀한 줄은 몰랐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에 복도를 걷던 청년이 멈칫했다. 청년의 시선을 돌리는 데 성공한 자는 금세 거리를 좁혀 청년의 눈앞에 섰다. 그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소년이었지만 이미 어린 나이에 수장의 총신으로 확실히 자리 잡은 간부이기도 했다. 이곳에선 청년 정도나 편히 대할 수 있을 사람이었다.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잖아. 잠깐 다녀온 거였고.”

그래도 연락해줬으면 좋았을 거야.”

누이와 같은 나이의 소년은 청년의 친우. 과거 외부에서 데려와 의지할 사람이 없는 소년을 생각해 상부에서 청년을 붙여준 것이 관계의 시작이었다. 수장의 지지를 받고 들어와, 바로 중책을 맡은 바람에 대등하게 교류할 사람이 없었던 소년은 자신을 여느 친구처럼 대해주는 청년에게 쉽게 정을 붙였다. 만난 지 몇 년이 된 지금은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소년이 모르는 것 하나는, 청년이 단순한 친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상부에서 청년을 붙여준 것은 소년에 대한 배려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년의 능력은 지나치게 뛰어났고, 상부는 유능한 소년을 철저하게 사용하면서도 어디로 튈지 모른다며 경계하고 있었다. 아군으로서 큰 힘이 되는 만큼 조금만 어긋나면 위험해질 수 있다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리라. 소년은 배반 같은 건 생각조차 한 적 없건만, 상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그의 행동을 낱낱이 감시할 사람을 두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청년. , 그는 처음부터 소년의 감시역으로 접근한 셈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소년은 언제나 청년을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다. 숨기는 것 때문에 떳떳할 수 없는 청년만 소년의 호의를 무겁게 느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청년이 소년에게 모든 것을 고백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감시는 임무의 일환이었고 청년은 명령을 거역해선 안 될 위치였으므로. 게다가 청년이 소년에게 가진 감정은 미안함으로 요약하기엔 너무도 복잡한 것이었다. 잔뜩 꼬이고 질척해진 감정을 요약할 말을, 청년은 알지 못한다.

껄끄러움, 미움, 안쓰러움, 자책 그나마 해석할 수 있는 감정이 그 정도였다. 전부, 상부에 대한 혐오 때문에 품게 된 감정이었다. 자신이 속이고 있는 소년 또한, 상부의 말을 맹신하고 충성심을 인정받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오싹한 인간일 뿐. 청년은 상부를 혐오하는 만큼 소년을 미워했고, 소년이 상부에 대한 충성심을 내비칠 때마다 껄끄러움을 애써 눌러야 했으며, 때로는 순진한 소년을 미워하는 자신을 책망했다.

만일 자신이 상부를 미워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혹은 숨기는 것을 고백하고 감시를 종료할 수 있었을까. 무의미한 생각이지만, 소년을 바라볼 때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또다시 청년을 덮친 복잡한 생각도, 꼬일 대로 꼬인 감정도 흩어버린 것은 소년의 들뜬 목소리였다.

이번에 반역자 처분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칭찬이라도 듣고 싶어?”

전멸시켰지.”

복귀하자마자 떠들썩해서 모르진 않았지만, 잘했어. 유토.”

청년은 건성으로 답하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하다, 소년이 입을 삐죽대자 슬그머니 손을 치웠다.

포상으로 바라는 것이 있냐기에 너를 곁에 두고 싶다고 했는데.”

의미를 모르겠군. 나는 지금도 너와 붙어있는 편이잖아?”

그게 아니고, 파트너로 달라고 했는데 확답을 주지 않더라고.”

좋아해주는 건 고맙지만, 높으신 분들은 지금처럼 나를 바깥으로 굴리는 걸 더 좋아하셔서 무리일걸.”

이해할 수 없어. 실력은 인정받았는데 왜 나와는 다른 일을 맡는 거야?”

그건. 청년은 치미는 말을 삼킨다. 그건 내가 너와 다르기 때문이지. 나는 쓰기 편한 존재가 아니니까. 소년은 청년이 상부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모른다. 명령은 따라도 충성할 수는 없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처럼 상부를 위해 적극적으로 싸워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너만큼 대단한 사람이 못 되니까.”

슌 정도면 충분히.”

그리고 내겐 지금의 자리가 편해. 중앙은 부담스럽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명령을 따르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가능한 피하고 싶었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혐오하는 이들을 닮게 된다. 운 좋게 도망칠 기회가 생기더라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변방으로 나돌게 된 데는 청년의 소망도 반영되어 있었다.

지금도 위에서 꽤 봐주는 편인 건 모르지 않을 텐데.”

알고는 있지만, .”

소년은 갑자기 청년의 옷자락을 잡아 억지로 자세를 낮추게 하더니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카데미아 전체가 뒤숭숭해. 중앙에 두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아서.”

걱정할 거 없어. 휩쓸릴 리 없으니까.”

근거 없는 자신은 아니었다. 청년은 어떤 혼란이 닥쳐도 자신이 무사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얼마든지 상부에 필요를 입증할 수 있으므로. 청년은 여전히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소년에게 자신도 가만히 속삭였다.

내 뒤엔 성녀님이 계시잖아.”


*

 

청년은 이곳에서 한 번도 스스로 의미를 가진 적이 없었다. 언제나 동생을 통해 의미를 가졌을 뿐. 성녀의 오빠. 성녀를 묶어두기 위한 인질. 미끼. 약점. 그것이 청년을 설명하는 말이었다. 워낙 그런 식으로만 불려온 탓에 그를 부리면서도 그의 이름은 알지 못하는 간부도 더러 있었다. 언제나 자신이 가려지는 처지를, 청년은 딱히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은 자신이 누이를 통해 정의될 정도로, 누이의 삶에 깊이 박혀있다는 것이었다.

남매가 어렸을 때, 상부에서는 세상을 구원할 성녀를 찾아 헤맸다.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낸 성녀는 어린 소녀. 성녀를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으나 그 곁에는 오빠라는, 생각지 않은 존재가 있었다. 계산하지 못한 것 따위 버려두고 와도 좋았을 테지만, 상부는 소녀가 낯선 곳에서 안정을 찾아야 하니 형제까지 데려오라고 명했다. 청년이 이곳에 온 것도,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도 결국 누이 때문이었다.

소녀가 자라면서 성녀의 삶을 거부하고 빠져나가려 하자, 그 오빠는 그녀를 복종시키기 위한 인질이 되었다. 간부들은 오빠를 들먹이며 소녀가 빠져나가면 그가 무사하지 않을 거라 협박했다. 그때의 남매는 그런다고 얌전히 따를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협박 때문에, 남매는 빨리 빠져나가지 않으면 위험해질 것이라 판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이 한꺼번에 도망치는 것은 잡히기 쉬울 것 같았다. 청년은 우선 누이부터 탈출시키기로 했다.

간부들을 유인하고 그 틈에 누이를 빠져나가게 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불행히도 상부의 손길은 어디에나 뻗어있었다. 감히 탈출을 계획한 죄로 폭행을 당하던 청년이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비친 것은 누이였다. 반항의 결과를 똑똑히 보라고 오빠의 처벌을 억지로 지켜보게 한 모양이었다. 누이의 붉은 눈 가득 비친 것은, 괴로움. 고통으로 기절하기 직전 청년은 후회했다. 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동생을 저렇게 힘들게 했다고.

다음 시도는 전과 반대였다. 청년이 먼저 빠져나가서, 나중에 누이를 구하러 오기로 했다. 영 내켜하지 않는 오빠에게 소녀는 속삭였다. 빠져나가기만 하면 돼. 성공하면 새로운 기회가 생기는 거야. 그래서 청년은 빠져나갔고, 오래지 않아 발각되어 끌려왔다. 전과 마찬가지로 이 떨어졌지만 몸을 덮치는 통증보다 더 그를 괴롭힌 것은 자신에게 날아든 간부의 말이었다. 네 어리석음이 동생을 옥죄게 될 거다. 이제 다시는 예전 같은 자유는 주지 않아. 네 행동에 따르는 책임을 알았으면 앞으론 조심해. 간부의 말대로 누이는 전보다 더한 감시 속에서 그나마 있던 자유마저 빼앗기고 살게 되었다.

두 번의 실패, 두 번의 처벌. 그것으로 청년이 얻은 교훈은 참담했다. 얌전히 복종해야 한다. 무력한 인간은 저항해봐야 소용없다. 그 아래 깔린 것은 체념 가득한 생각이었다. 나는 누이의 약점이 될 뿐이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누이의 행동에 대한 압박이 될 수 있으며, 혹 행동을 잘못하면 누이에게 직접 타격이 간다. 그렇다고 질서를 깨고 누이라도 탈출시킬 힘을 가진 것도 아니다. 언제나 동생의 발목만 잡을 뿐인, 최악의 형제였다.

청년은 그런 자신을 혐오했지만 무력한 인간에서 벗어날 길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청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상부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며 무해하단 인상을 심어주는 것 정도. 그것으로 동생에게 더 해가 가지 않도록 하면서, 정보를 모으고 기회를 노리겠다는 게 청년의 생각이었다.

소년이 걱정한 대로, 그들이 몸담은 곳에 폭풍이 지나갔다. 짐작한 대로 청년은 숙청으로부터 살아남았다. 아까운 인재여서도, 신임을 얻어서도 아니다. 처리해버리면 성녀를 억압할 것이 사라지기 때문일 뿐. 결국 자신은 족쇄로서의 가치밖에 갖지 못한다. 평생 동생을 억압할 뿐인 삶이라면 이럴 때 끊어져도 좋을 텐데. 그러면 최소한 누이는 타의로 움직이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생각의 끝은 언제나 그런 식이다. 누이는 자책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이 아니었으면 모든 게 지금보다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간부들에게 일괄적으로 발송한 성녀의 편지에서, 청년은 누구도 읽어내지 못할 문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축복의 메시지 사이, 그들 남매만이 아는 암호로 숨겨놓은 말. 나는 이 세상이 파멸하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 건조한 저주에 청년은 누이 또한 지쳐있음을 깨달았다. 자유를 빼앗긴 채 성소에 갇혀, 성녀의 의무를 강요당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삶인가. 세상의 파멸이라는 극단적인 결말로라도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청년이 차라리 자신이 숙청당하길 바라는 것처럼.

역시, 끊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의 삶을. 누이를 그 감옥 같은 곳에서 꺼내지 않으면, 성녀라는 족쇄로부터 해방시키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완전히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혹은 그대로 멎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들 남매가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떻게 무너지게 될지 청년은 수천 번은 상상했다. 그러나 그렇게 붕괴하기 전까지 끊어낼 수 있을까. 해방될 수 있을까. 불행히도 청년은 긍정의 답을 할 수 없었다.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정기 보고를 위해 찾은 상관은 감시 대상에 대한 보고가 끝나고도 청년을 놓아주지 않았다.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청년으로선 짐작 가는 것이 없다.

누락하는 게 있으면 곤란해. 친구로 가장하는 건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일 뿐이지, 위장에 젖어들면 안 돼.”

쭉 지켜보셨다면 아실 텐데요. 유토는 아카데미아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하죠.”

소년은 신기할 정도로 충성심이 강했다. 상부에 빼앗긴 것이 없어서일까, 처음부터 인재로 대접받아서일까. 아니면 어릴 때부터 상부로부터 사상을 주입당하고 그 이외의 것을 접하지 못하도록 통제당해서일까.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충성하고도 가장 믿는 자에게 감시당하는 소년의 처지가 청년은 우습다. 믿기 때문에 전부 내보이고, 보이는 만큼 약점을 잡힌다. 그런 것도 모르고 자신의 약점을 만드는 인간을 감싸고 있다.

의심하시는 이유라도?”

놈이 너를 파트너로 달라고 하더군.”

유토가 무언가 꾸미고 저를 끌어들이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저도 이유를 물었습니다만 제가 숙청에 휘말릴까 걱정해서라고밖에는.”

그걸 믿으란 말인가?”

유토는 저를 진짜 친구로 생각하고 있으니 의심을 살만한 행동을 해서라도 구하려 든 것뿐입니다. 저에 대한 불신과 보고는 분리해서 생각하셨으면 합니다만.”

언제나 이런 식이다. 상부는 그를 제대로 믿지 않았고, 그 때문에 자꾸만 그가 보고한 것의 진위를 확인하며, 감시 대상이 예측 밖의 행동을 보이면 설명을 요구한다. 충성심은 없어도 순종할 수밖에 없는 위치인데. 감시 내용을 속인다고 이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네가 신뢰를 주지 못하는 건 알고 있는 모양이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좀 더 믿음을 쌓도록 노력해.”

성녀님께 폐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면 믿으시겠습니까?”

네가 내세우는 건 언제나 성녀뿐이군.”

그 때문에 살려두시는 것 아닙니까.”

자조 섞인 말에 상관은 더는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한순간 연민이라도 산 것인지 더 의심할 가치도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청년은 모른다. 감시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말에 적당히 답하고 빠져나올 뿐.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며 청년은 보았다. 구석구석에 붙은 선전용 포스터를. 그 안에서 억지로 웃고 있는 누이를. 성녀의 뜻을 받들어 세계를 통합하겠다는 끔찍한 문구를. 청년은 포스터를 떼어내 구겨버리려다 차마 누이의 모습을 망가뜨릴 수 없어 그대로 자리를 떴다.

 

*

 

청년의 손이 머리카락으로 덮인 뒷목을 쓸었다. 머리를 기른 것은 숨기기 위해서였다. 과거 탈출을 꾀한 로 남은 흉터를. 더는 통증도 괴로움도 없는 흉터에 신경 쓰는 건 그것을 보고 슬퍼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와 함께 실패하고 체념하게 된 사람. 그의 누이. 왜 너는 이걸 볼 때마다 마음 아파하는 것일까. 네 잘못도 아닌데. 내가 무력해서 실패했고, 내가 실패해서 남은 것인데.

목뿐만이 아니었다. 청년은 몸 곳곳에 남은 흉터를 철저하게 가리고 있었다. 흉터 때문에 누이가 괴로워한다면 아예 생각하지도 않게 하고 싶어서. 소년은 청년에게 자주, 계절과 관계없이 몸을 싸매는 이유를 물었지만 청년이 답해줄 리 없었다.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상부에 거역한 죄로 생긴 흉터를 가리기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거역한 이유를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가. 소년은 상부를 거역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런 점에선, 누이를 억압하고 자신을 처벌한 상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소년은 계획적으로 키워낸 괴물이었다. 먹잇감의 숨통을 끊어버리도록 만들어진 괴물. 그를 움직이는 것은 상부의 명령이고, 그가 사냥하는 것은 반역자였다. 어려서 능력을 인정받고 간부로 이곳에 들어섰다고 했다. 어린 소년에겐 다소 무거운 직책을 주며 상부에선 말했다. 너는 세상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사명을 타고났다고. 네가 싸우는 만큼 세상은 나아질 것이라고. 막 영웅담에 빠질 나이의 소년에게 상부에서 주입한 사상은 얼마나 달콤했을까. 소년은 자신이 행하는 일의 무게도, 그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정의감의 늪에 빠졌다.

불행히도 소년은 지나치게 유능했다. 지위를 얻은 때부터 수많은 임무에 동원되었지만 적을 압도하지 못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 타고나길 정복자였던 것 같은 소년은, 그 힘에 기대어 수많은 사람을 해하고, 그만큼 죄를 쌓고 있었다. 그것이 죄라는 것도 소년은 인식하지 못한다. 소년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싸움을 세상을 위한 일이라 부추길 뿐. 소년이 점점 더 무시무시한 괴물로 성장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그 괴물은 청년 앞에 있다. 믿는 사람 앞이라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을 스스로 감추고서. 청년 앞의 소년은 누가 봐도 그저 평범한 십대 소년이었다. 친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바쁠 뿐인. 청년은 자신 앞에서 수다스러워지는 소년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고 있었다.

오늘 성녀님을 처음으로 배알했어. 무릎을 꿇고 축복을 받았어.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죄스럽게 느껴져서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일어날 때 우연히 눈이 마주쳤어. 그때 생각했지. . 이분은 슌을 닮았구나.”

나에게 붙일 분은 아니지.”

그래도 남매잖아?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네 이야기를 꺼냈는데 성녀님이 웃으셨어. 잘 지내고 있나요? 라 물으시는데 그렇다고 답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성소를 나서기 직전에 내게만 들리게 그 사람이 계속 그러길 바라요.’ 하시더라.”

누이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을까? 소년 앞에서 말만이라도 오빠의 행복을 기원한 게 맞을까? 자신을 압박하는 수단인 오빠에겐 저주를 돌려줘야 하는 것 아닐까? 청년이 온갖 생각으로 머리를 채우는 사이 소년은 만족스레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 무사하다는 말을 듣고 기뻤어. 성녀님께도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나도 겨우 마음을 놓았다고.”

회색 눈에 비치는 것은 순수한 안도. 안심시킨 줄 알았는데, 끝까지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했지. 휩쓸릴 리 없다고.”

성녀님의 형제는 좋구나.”

글쎄, 그만큼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데. 성녀님께 폐를 끼칠 수는 없잖아?”

몸에 새겨진 흉터는 그의 책임을 일깨운다. 누이에게 불똥이 튀지 않도록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누이에 대한 족쇄가 더 늘어나지 않도록 목소리를 지우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죄는 물론이고, 사소한 잘못도 안 돼. 임무 실패도, 불손한 언행도 금지당하지. 나 개인은 용서받아도 결국 성녀님께 나쁜 말이 붙게 되니까.”

최대한 동생을 위하는 거네. 슌은 좋은 오빠구나.”

그 말에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이곳에 들어온 후 청년은 누이에게 도움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정말로 좋은 오빠였다면, 어떻게든 동생을 탈출시켰을 텐데. 혹은 동생이 기회를 만들어주었을 때 빠져나가 자신 때문에 타인에게 매이지 않도록 했을 텐데. 밀려드는 자괴와 자기혐오가 순간 청년을 무너뜨렸다. 그 바람에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감춰야 하는 상대에게.

아니. 나 같은 건 성녀님께 방해지. 약점 같은 것일까.”

내가 없었다면, 동생은 괴롭지 않았을 텐데. 나 때문에 발이 묶이지 않았을 텐데. 그 생각이 얼마나 그를 괴롭혀왔던가. 탈출에 실패한 후 몸에 남은 의 흔적보다 누이의 괴로운 얼굴이 그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을.

약점이라니, 무슨 말이야.”

타인은 약점이야. 얽히는 사람이 늘어갈수록, 나중에 발이 묶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거지.”

내가 너에게 약점이 되듯이. 언제든 너를 함정에 빠트릴 수 있듯이.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둥그렇게 뜨는 것을 보니 소년은 청년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복자로 자랐는데도, 이런 점에서는 지나치게 순진하다. 경험할 수 있는 세계는 교묘하게 통제되었고, 그 안은 오로지 성공뿐. 생존을 위한 투쟁도 처참한 실패도 경험하지 못한 소년이 불편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렇기에 소년은 청년을 믿는 것이다. 어떤 속셈으로 자신에게 접근했을지 모를 인간을, 자신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인간을. 경계하지도 않고서.

너는 좀 더 사람을 경계할 필요가 있어. 나도 결국 약점이야.”

이런 것을 알려주어도 되는 것일까. 그 결과로 그가 자신을 믿지 않게 되면, 감시역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청년은 이상하게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라고 네게 위험하지 않은 건 아냐. 너를 배반할 수도 있고, 너를 위험에 빠트리기 위한 인질로 쓰일지도 모르지. 이렇게 말해야 알아듣겠어?”

언젠가 약점이 된다고 해도, 너라면 괜찮은데. 그런 위험쯤은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아니. 그렇지 않아. 나는 기회만 되면 너를 미끼로 도망칠 거야. 너를 모함해 내 안전을 확보하는 짓도 서슴지 않을 거야. 나와 루리의 행복을 위해서 가장 먼저 버릴 수 있는 게 바로 너인데. 청년은 턱 끝까지 올라온 말을 뱉어내고 싶었다. 지금만은 전부 토해내고, 자신의 본질을 고백하고 매도당하고 싶었다. 회색 눈이 배반감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나는 이런 인간이야. 네가 믿을 자가 못 돼. 그러니 어서 나를 버리는 것이 좋아. 그렇게 말하고, 사람을 속이는 삶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그런데 왜 소년은 저렇게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인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기대하고서.

너는 내 유일무이한 친우니까.”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청년의 마지막 남은 가책을 건드리는 말. 청년의 괴로운 심정을 짐작조차 못할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동의를 구하듯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 순진한 요구에 청년은 결국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독이어도 좋으니까 계속 곁에 있어줘, .”

믿어준다면 이용할 건데? 최대한 이용하고, 필요하면 너를 내던질 건데?”

끝까지 심술궂게 말한 청년이었지만, 소년의 얼굴은 빛을 잃는 일이 없다.

너라면 괜찮아.”

멍청한 놈.”

기쁘지는 않은 거야? 이렇게까지 곁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인데.”

간부들이 나빴다. 청년 같은 인간을 소년에게 붙여서는 안 되었다. 얼마든지 더러워져도 좋을 인간을, 인위적으로나마 어떤 더러움도 접하지 못한 사람에게 던져준 것이 잘못이었다. 소년의 순진한 말은 청년 앞에서 자주 칼날로 변해 그를 찌른다. 청년은 어디까지나 친구 역을 맡아줄 생각은 없었으므로, 언젠가는 청년의 행동이 소년을 그렇게 찌르게 되리라. 그때가 되면 소년은 비로소 청년을 원망할까. 그때까지도 청년을 믿으려 애쓸까. 청년은 머리를 치는 생각을 흩어버리며 겨우 말을 토해냈다.

고마워. 나를 그렇게 믿겠다는 사람은 처음 봤거든.”

그것은 진심이었다. 소년 앞에서 고백한, 몇 안 되는 진짜 감정.

나도 네게 그런 걸 기대해도 될까.”

글쎄.”

내가 더 노력하면, 언젠가는 나도 너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청년의 입이 열렸다. 한순간 혀가 굳고 목소리가 얼었지만, 청년은 이내 답을 돌려줄 수 있었다.

언젠가는.”

결국 흘러나온 것은 거짓말이었다. 다만 평소와는 달리, 소년의 믿음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년의 기대를 차마 배반할 수 없어 꺼낸 것이었다. 이번만은 용서해줘. 그냥 속아줘. 청년의 소망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는, 오래지 않아 확인할 수 있었다. 청년은 소년의 얼굴에 천천히 걸리는 것을 본다.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환한 웃음. 감격마저 비치는 웃음.

그 순간 청년은 처음으로 소년을 동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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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