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슌ts] 말의 묘지

2017. 3. 6. 22:15 from 02

 

유리관 속에는 젊은 여자가 잠들어 있었다. 단정히 손을 모은 채 눈을 꼭 감고 있는 모습이 동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다만 여자의 몸에는, 동화 속 공주와는 다르게 여러 장치가 어지러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를 뒤덮은 그 장치들이, 바로 그녀를 깨우기 위한 희망의 끈. 장치 가동이 전부 성공한다면 그녀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 다시 세상에 섞일 수 있을 것이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여자를 지켜보는 사내의 눈에는 기대와 소망이 비치고 있었다.

여자는 전쟁에 동원되었던 병기였다.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을 흉내 내어 만들어진 것이 그녀였다. 평화로운 나라에서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겠다고 만들어낸 병기는, 오래지 않아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자연히 전장에 내몰렸다. 하루하루 동료를 잃어가던 여자는 이국의 협력자를 만났고 그의 도움을 얻어 그의 전사들과 함께 싸울 수 있었다. 그녀에게 새로운 길을 내준 협력자가, 바로 지금 그녀를 지켜보는 사내.

인간을 모방한 병기는 어떤 인간보다도 더 치열하게 싸워 조금씩 희망의 길을 열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몇 번은 부서졌을 무거운 싸움의 끝에, 가장 앞장서서 싸우던 병기는 갑자기 정지했다. 종전을 눈앞에 두고서였다. 그 전까지 쉬지 않고 가동한 탓에 데미지가 쌓인 상태에서 전투에서 심각한 손상을 입은 것이 원인이었다. 사내는 정지한 여자를 거두어 더 이상 훼손되지 않게 하는 한편, 남은 전사들을 이끌고 전쟁을 끝냈다.

전쟁이 끝나고도 사내는 이국의 병기를 굳이 자신의 나라로, 그것도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로 가져왔다. 그녀를 회수할 사람이 누구도 없기에 그랬다. 처음 그녀를 만들어낸 자도, 그녀의 보호자격이었던 인물도 전쟁에 휩쓸린 지 오래. 사내는 온통 망가져 정지하고 만 병기를 내보이며 회사 연구원들에게 말했다. 깨워달라고.

그로부터 몇 번의 실패가 있었다. 그동안 사내는 그녀를 포기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이제 병기는 필요하지 않잖아요. 필요하다 해도, 저렇게 손상된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할 거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기능을 들먹이며 사내가 임무를 끝낸 병기에게서 관심을 떼길 바라는 이들이 주변에 여럿 있었지만, 사내는 자꾸만 고집을 부렸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자신의 뜻을 굽혀 빠른 타협을 이끌어내는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만일 사내에게 기능정지한 병기가 중요한 것이었다면 어쩌면 그의 고집도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사내는 세상 사람들의 막연한 생각과는 다르게, 자신의 것에 대해선 꽤 애정을 품는 인간이었다. 그의 냉정한 계산과 일견 비정하게까지 느껴지는 선택은 세상을 위해 중대한 판단을 내릴 때의 모습일 뿐.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에 대해서, 자신에게 휩쓸리게 된 자들에 대해서는 그는 언제나 신중하고 따스했다.

어쨌든 여자는 병기로서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싸워준 전사였다. 그 과정에서 평범한 인간이라면 재기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손상을 입고 한동안 기능정지했을 뿐이다. 쓸모가 있건 없건 간에, 수리하고 재가동해 다시 쓰는 것이 자신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사내의 뜻을 따르도록 동료들을 설득한 비서는 젊은 주인의 고집에 대해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다.

연구원이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고, 사내는 이미 몇 번 실패한 적이 있는 명령을 다시 내렸다. 수많은 장치들이 일제히 그녀를 위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사내는 여자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최초로 포착한 움직임에 연구원들 사이에서 기대의 말이 터져 나올 때.

여자가 눈을 떴다. 유리구슬을 박아넣은 듯 비현실적인 금빛 눈이 오랜만에 세상을 담았다. 사내는 자신이 이뤄낸 성공을, 도취된 목소리로 읊었다.

쿠로사키. 오늘로 다시 가동한다.”

 

*

 

평화로운 세상에서 병기는 환영받지 못한다. 병기로 만들어진 여자는 전쟁이 사라진 세상에선 이질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자칫 처치곤란의 골칫덩이로 취급받을 수 있을 전쟁의 유산을, 그녀를 재가동한 사내는 평화에 맞게 이용하기로 했다. 자신의 곁을 지키게 하는 한편, 언제 다시 닥칠지 모를 위험을 대비해야 한다며 그녀에게 전사 훈련을 맡겼다. 방어에 적합한 힘을 키운 전사들은 세상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새로이 맡게 된 것은 여자에겐 다소 낯선 것이었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빠르게 적응해 자신의 필요를 입증해보였다.

처음에는 여자를 마뜩찮게 바라보던 회사 간부들도 서서히 여자에 익숙해졌다. 전장에서 부서질 정도로 굴렀던 병기는 이제 회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병기로서의 필요가 종료되었다면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여자가 병기로서 기능하기 위해 익힌 것들은 다른 곳에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것들이었다.

사내는 처음부터 여자를 모두의 앞에서 자신의 사람으로 내세웠다. 병기였던 것을 들이는 것에 대한 의문을 봉쇄하는 동시에 그녀가 빠르게 뿌리내리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도 사내는 여자를 위해 꾸준히 공을 들였지만 그녀에 관해 딱 하나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정보 업데이트였다.

사내는 여자가 잠들어 있었던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입력해주지 않았다. 때문에 여자는 전쟁이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 승리하기까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전쟁이 끝난 지금 어떤 후유증에 시달리는지 모른다. 정지하기 직전까지 치열하게 싸웠던 전사로서, 여자가 그에 대해 파헤치려 하지 않을 리 없다. 어느 날 여자는 사내에게 물었다.

전쟁은 어떻게 끝났습니까.”

랜서즈를 중심으로 한 저항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전쟁의 결말을 듣고 싶었던 것 아니었나?”

여자가 묻는 것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사내는 모르는 체 외면한다. 그녀에게 제대로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다. 그의 군대가 마지막에 승리하긴 했지만, 그것은 그리 빛나지 않는 승리였다. 승리라는 결과엔 만족할 수 있어도 그녀에겐 떳떳할 수가 없다. 여자는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깜빡이며 답한다.

어떻게 아카데미아를 쓰러트렸는지, 아군의 피해는 어떠했는지 등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일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니까.”

정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쿠로사키.”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만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쪽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상황을 알아야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를 판단할 수 있어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내야 이곳에서 자신의 영향력과 자본을 이용해 무엇이든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이국에서 기반이랄 것도 없이, 단지 한 사람에게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여자는? 그녀가 본래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다. 아무리 사내가 그녀를 잘 대우해준다 해도 그녀에게 회사란 일시적으로 머물 곳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곳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병기로 만들어진 존재에게도 불안을 안겨줄 수밖에. 때문에 사내는 여자가 가장 듣고 싶었던 질문에 대해 쏟아내는 것을 잠자코 들었다.

엑시즈는 어떻게 되었나요? 유토와 루리는? 엑시즈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하나가 간절한 질문이었다. 언젠가는 알려줄 것이라고, 혹은 어떤 경로로든 들려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꾹꾹 눌러 참았던 것들이었으리라. 가장 호의적인 인간인 사내는 아무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그 수하들까지도 사장의 명령대로 교묘하게 언급을 피한 탓에 여자는 결국 참아온 걸 전부 토해내야만 했다.

미안하군. 지금으로선 명확하게 이야기해줄 수 없어. 확인되지 않은 사항들이다.”

한순간의 동요를 알아챘을까. 숨기는 것이 있는 사내는 자신이 없다. 아무리 눈앞의 여자가 인간이 아니라 해도. 인간만큼 섬세하게 변화를 포착하긴 어려운 존재라 해도. 여자는 유리구슬 같은 눈 가득 사내를 담은 채 묻는다.

확인하게 되면 이야기할 것입니까?”

그러도록 하지.”

언제 이뤄질지 모를 약속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라도 건진 것에 만족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사내는 새삼 여자가 얼마나 기댈 것 없는 존재인지 깨달았다. 붙잡을 것이 없어 고작 그런 것에 기대를 걸고 버티는 존재인 것이다. 공허한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도, 사내는 여자에게 처참한 현실을 바로 이야기할 자신은 없었다. 그렇게 여자를 일시적으로 달랜 사내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처참하게 무너진 여자의 고향을 복구하기 위해 힘썼다. 그나마 그것이 사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오래지 않아 사내는 여자에게서 수상쩍은 기척을 포착해냈다. 무언가, 손을 대고 있다. 여자는 회사의 일원인 동시에 사장을 지키는 위치로서 그 근처에 붙어있을 수 있는 자. 의심을 사지 않고 사장의 것에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처음부터 병기로 만들어진 여자였다. 평범한 인간이 품을 욕망 같은 건 처음부터 넣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자가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짚이는 것이 없었다.

목적이 짐작이 가지 않거니와 드러나는 피해도 없고, 카메라에 명확히 잡히는 것도 없었으므로 사내는 우선은 여자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때 사내는 다소 방심했던 것이다. 여자에겐 일반적인 욕망은 없지만, 의도적으로 주입되어 보통의 인간의 배로 강한 감정이 있었던 것을. 여자가 손을 대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안 것은 사내가 최초로 여자에게 의심을 품은 지 겨우 보름 남짓 되었을 때였다.

그 날 사내의 하루는 다른 날과 달랐다. 언제나 곁에 두는 자가, 병기로 만들어진 여자가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연락해도 답이 없다. 일정을 착각한 것인가 싶어 그녀가 자주 머무는 훈련실을 살피게 했지만 그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의문이 불안으로 바뀔 무렵 사내는 여자의 행방을 들을 수 있었다. 여자를 발견했다는 수하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다급했으며, 행방을 알리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직접 찾아와달라는 부탁까지 붙어있었다.

여자를 보자마자 사내는 왜 자신에게 연락한 수하가 그렇게 불안해했는지 알아차렸다. 여자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풀린 눈은 허공을 향했고 흘러나오는 말은 잔뜩 엉켜있었다. 다가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이미 사람을 알아볼 수도 없는 상태까지 간 듯했다. 사내는 설명을 바라는 눈길로 그녀를 둘러싼 이들을 바라보았지만 모두 넋이 나간 채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할 뿐이었다.

[유토와루리가없어어디에도없어어디에도없어어디에도포착되지않아레오코퍼레이션의조사결과두사람의시신이나흔적은찾을수없어공식적으로는실종이지만여러상황을고려해잠정적으로는사망이라고결론내리기로했다이사실에대해서주변인에게는알리지말것알리지말것]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여자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전부 귀를 막았다. 사내에게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평소의 차분한 목소리가 아닌 쇠붙이를 긁어내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 그곳에서 여자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듣는 것은 사내뿐이었다. 그것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은 하나. 결국 그녀는 모두가 숨기던 정보에 접근했다는 것.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녀가 회사에 남은 고향의 정보를 파헤치려 할 거라고.

[두사람이마지막으로발견된것은쿠로사키가기능정지한시점으로쿠로사키는해당사항에대해알지못한다마지막으로발견되었을때그들은폭격에휩쓸린것으로추정되며]

어떻게 할까요, 일단 정지시킬까요?”

이 이상 접근하는데 공격성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해.”

회사에서 쿠로사키와 신뢰를 가장 두텁게 형성한 것은 사장님이니 어쩌면 사장님의 말은 들을지도 모르죠.”

사원들의 말은 이미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의 쇼크는 인간으로 따지면 극한의 절망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여자가 현재 맞닥뜨리고 있는 것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사내뿐이었다. 따라서 여자를 진정시킬 수 있는 것도 사내뿐일 테지만, 그는 어떻게 여자에게 접근해야 할지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발견장소에다시향했을때는흔적을찾을수없었다엑시즈에서는이미다른전사자와함께두사람의장례를치른것으로확인되었다쿠로사키에게는사실을알리지말것쿠로사키에게는사실을알리지말것가능한엑시즈의사람과접촉하지않도록하는것을권장한다]

메모리에 이상이 생긴 걸까요?”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그녀의 문제는 기능 이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곳을 점검하든 이상이 없다고 나올 것이다. 병기의 심리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사내는 아득해졌다.

[유토와루리는어디에도없어사망처리폭격에휩쓸린사람은대체로돌아올수없다전장에선운이나쁘면죽는다죽은사람은돌아오지않아유토도루리도끝까지나를찾아와주지않았어내가정지한사이에폭격이죽은사람은돌아오지않아두사람은돌아와주지않아]

여자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같은 말을 쭉 반복하더니 힘이 빠졌는지 휘청거렸다. 사내는 급히 그녀를 지탱해 쓰러지지 않도록 잡아주었다. 그때서야 여자의 금빛 눈이 사내를 비추었다. 다음 순간 여자는 정지했다.

 

*

 

여자는 놀랍도록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갔다. 여럿이서 그녀를 둘러싸며 해결방법을 생각했던 것이, 사내가 달려간 것이 과잉반응이었던 것처럼. 업무에 복귀한 여자는 이전처럼 단정한 모습이었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정보를 전달했으며, 흠 잡을 데 없는 처리능력을 보여주었다. 오래지 않아 그녀가 겪은 일은 가벼운 에러에 불과하다는 말이 퍼졌다. 몇몇은 아예 그녀에게 일어난 사건이 누군가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전히 마음이 무거운 것은 사내뿐이었다. 여자가 쇼크를 일으키는 것을 명확히 지켜봤기에, 그리고 쇼크의 원인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기에 그랬다.

사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여자가 갑자기 쇼크를 일으킨 것은 그 때문이었다.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숨긴 것 때문일 것이다. 여자가 인간의 감정과 닮은 것을 학습했고, 세상에서 그걸 이용해 그녀를 끝없이 싸우게 했다는 것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상냥한 인간과 일상 속에서 함께하게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애정을 가르친다. 그리고 위급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녀가 애착을 품은 것을 들먹이며 자의로 싸우게 한다. 인간의 감정으로 병기를 묶어두려는 계획은 성공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모든 것이 휩쓸렸다.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싸워라. 인간에게나 가능할 법한 명령이 떨어졌고, 그녀는 순종적으로 싸웠다. 그렇다면 그 끝엔 당연히 바라던 것이 있어야 할 터다. 그러나 싸움의 끝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손을 쓰기도 전에, 그녀가 구하려 했던 이들은 영영 사라졌다. 그들과의 추억이 있던 고향도 여전히 폐허였다. 돌아간다 해도 그녀는 어디에도 기댈 수 없다. 전쟁이 끝났을 뿐, 그녀의 소망은 이미 빛을 잃었다.

의도적으로 인간을 닮게 만들었다면 인간의 감정에 배반당하지 않게 해야 했다. 인간의 것에 가까운 소망을 이룰 수 있게 해야 했다. 그것이 미지의 세계를 가르친 것에 대한 대가일 것이다. 인간을 위해 싸우기까지 한 여자는, 결과적으론 배반당했다. 세상을 구했지만, 그녀가 구하고 싶었던 세상은 아니다. 가장 구하고 싶었던 것은 어디에도 없는 세상이 그녀가 건져낸 것의 전부였다.

그것이 비참해, 사내는 여자에게 한동안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것을 꺼렸다. 언제까지나 숨길 순 없다는 것이야 알았지만 적어도 좀 더 준비된 때, 그녀가 지금보다 안정된 때 말해주는 것이 나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상실을 덤덤하게 수용할 수 있을 때,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정을 붙인 것이 생겼을 때. 사내가 헤아리지 못한 것은, 구하려 했던 것에 대한 여자의 애착이 너무도 컸다는 것. 스스로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 나설 정도로 간절히 찾는 것이었다는 사실.

배려라 하면 배려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 그녀에게 무엇을 안겼을지, 사내는 생각할 수도 없다. 다만 자신이 신중하게 움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솔했을 수도 있다 생각했을 뿐. 여자에게 시선이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져, 사내는 언젠가 그녀에게 제대로 묻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사내가 여자에게 말을 꺼낸 건, 여자의 사고로부터 몇 주나 지나서였다.

쿠로사키. 불편한 건 없나?”

기능적인 불편은 없습니다. 업무도 문제가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넌지시 던진 말에 여자는 빠르게 답했다. 가까이 앉은 사내에겐 시선도 돌리지 않고 쏟아낸 말이었다.

점검입니까?”

아니. 이전의 일이 있었으니 걱정이 되었을 뿐이다.”

이전의 일이라면?”

에러가 생겼던 일.”

여자의 행동이 멎었다. 사내는 여자가 반응을 보일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침묵은 뜻밖에 짧았고, 여자는 흔들림 없이 답한다.

일시적인 에러였습니다.”

물론 다시 에러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그렇다면 이제 되었군요. 대화를 종료하겠습니다.”

딱딱한 말투야 여자가 본래부터 장착한 것이었으나, 이번에 그녀가 답하는 것에는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깔려있는 듯했다. 과거, 사내가 여자에게 그녀가 찾는 것에 대해 숨겼을 때와 같은 것. 여자는 분명히 외면하고 있었다. 그걸 알아챈 사내는 그때 여자가 그에게 했던 것처럼 끈덕지게 파고들었다.

그 일에 관련해서 묻지. 쿠로사키. 당시에 어떤 감정을 느꼈지?”

의미를 모르겠군요. 불필요한 질문입니다.”

나를 원망하나?”

불필요한 질문에 대해선 답하지 말라고 입력되었습니다.”

.”

이제는 쓰이지 않는 호칭에 여자가 돌아보았다. 전쟁이 휩쓸어간, 그녀가 처음으로 정을 붙인 사람들만이 썼던 호칭이었다. 잃은 것을 상기시키는 것에, 금빛 눈이 차갑게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만약 내가 너에게 전부 이야기했다면.”

달라졌을까. 뒷말은 소리로 나오지 못했다. 무언가 목을 탁 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내는 여자의 비현실적인 눈이 그렇게 자신을 꾸짖는 것 같은 때가 없었다.

당신은 오류를 교정할 수 있는 인간이지, 오류를 만들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은 아니지.”

그러나 달라진다고 무엇하겠는가. 사내는 자신의 무력함을 새삼 깨달았다. 말했다 한들,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는 것뿐. 잃은 것은 되돌릴 수 없고 깨진 소망은 복구할 수 없다.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이상, 어차피 그녀 앞에 떳떳할 수는 없었다. 그걸 말해주듯, 여자의 목소리엔 물기가 없었다. 참담함은 때로 그렇게 덤덤하게 쏟아진다.

여자의 눈이, 사내의 작업을 보여주는 화면을 훑었다. 전후복구에 대한 계획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쟁은 여러 희생을 제물로나마 끝났다. 이제 사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치유하는 일 뿐. 여자의 손가락이 화면 속 고향을, 그 처참한 폐허를 천천히 쓸었다. 그에게 이 참혹한 풍경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먼 이국에서 발발한 전쟁에 외면하지 않고 뛰어들었던 사람이지 않은가. 그가 마지막까지 책임지기 위해 복구 작업에 힘쓰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상실은 통증을 닮았다고 여자는 생각한다. 잃은 것 때문에 너무도 아픈데 머리는 사내가 하는 일이 최선이라고 말한다.

루리가 가르쳐줬어. 사람은 최선을 다해도 잘못될 수가 있다고. 그런 걸 미워하면 안 된다고.”

너는 정말로.”

사내는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버틸 수 있는 건가?”

당신을 원망하면, 유토와 루리를 돌려줄 수 있어?”

여자의 반문에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감스럽게도 사내는 그녀의 구원자가 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자는 그의 답에 웃었다. 인간으로 치면 체념과 슬픔을 닮은 감정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마, ‘그렇다면 됐어따위의 말이 그 뒤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메모리에 손을 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지워버리면 깔끔해질 거라고 생각하고서.”

메모리에 저장된 것을 삭제하면 에러는 영원히 일어나지 않겠지만, 지금의 너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잘라내게 되지.”

여자는 인간이 아니므로, 저장된 기억을 완전히 삭제할 수 있다. 그것으로 사내는 가책을 전부 덜어내고 그녀 앞에 무결한 사람으로 설 수 있었다. 물론 그녀 또한 괴로워하는 일 없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단순하고 깔끔한 방법을 거부한 건, 그녀에게서 기억마저 앗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사랑한 것들은 그녀의 기억 속에만 실재한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인간이 아니기에 쇠하지 않는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이다. 그녀가 움켜쥘 것은 이제 그것밖에 없다. 잃고 말았다는 현실을 자각한 그녀가 괴로워하더라도.

네가 에러를 일으켰을 때 생각했다. 만약 네가 전장에서 이탈한 사이, 더 많이 구했더라면.”

그랬다면, 그럴 수 있었다면 그녀는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를 배려한다는 생각으로 전쟁의 끝을 숨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으로서, 사내는 그때의 최선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음이 안타깝다. 좀 더 많은 이들을 구하고,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빛을 보여주고, 좀 더 많은 이들의 괴로움을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에게도 좀 더 나은 미래를 안겨주고 싶었는데.

지나간 일을 계산범위에 넣으면 안 된다. 아카바 레이지, 당신이 한 말이었죠.”

평소와 같은 말투로 돌아온 것은 그 이상의 감상을 차단하기 위해서일까. 여자의 목소리에 여전히 물기는 없다. 그래도 사내는 한동안 자신을 내리누르던 것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위로인가?”

그런 기능은 탑재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나간 일을 돌아보지 말라는 말을 네게 듣게 되다니 부끄럽지만.”

스스로 마음을 다잡기 위해 던졌던 말을 돌려받게 될 줄은 몰랐다. 사내는 힘을 실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나는 너의 미래를 위해 힘써야지.”

그녀가 전쟁에 뛰어들게 된 것은 사내 때문이 아니었다 해도, 병기로 전장을 떠돌던 그녀를 거두어 사용한 것은 그였다. 따라서 사내는 전쟁 이후의 그녀의 삶에 대해서도 책임질 의무가 있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면 지금 만들어갈 미래라도 최선을 다해 밝혀주어야 했다. 여자는 사내의 말에 감사를 표하지도, 비웃음을 돌려주지도 않고 한동안 사내를 응시하다가 평소처럼 사무적인 말만 돌려주었다.

필요 이외의 대화는 길게 하지 않는 것이 권고사항입니다. 이만 훈련실로 가겠습니다. 아카바 씨.”

.”

제 정식 명칭은 쿠로사키입니다, 아카바 씨. 앞으로는 혼동되지 않게 정식 명칭으로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여자는 병기였지만, 인간을 모방했고 인간의 감정을 학습한 병기였다. 자신에게 던진 말 아래, 인간의 감정에서 비롯한 거부가 깔려있음을 사내도 모르지 않았다. 더는 다가가선 안 된다. 사내는 직감했다. 사내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고, 여자에겐 그걸 받아줄 힘이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내일 보지, 쿠로사키.”

. 안녕히.”

사내를 떠날 때까지, 여자의 목소리엔 한 조각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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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