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눈이 최초로 담아낸 것은 온화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였다. 여자가 수술대를 연상시키는 곳에 누운 채 주변을 탐색하는 동안 사내는 여자의 상태를 이것저것 점검하는 듯했다. 막 깨어난 몸은 힘이 없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머릿속은 안개가 낀 듯 흐려 자신이 놓인 상황을 파악하기도 어렵다. 굳어버린 혀를 어떻게든 움직여 사내에게 질문이라도 던지려 할 때,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나씩 확인해보도록 하죠. 당신의 이름은?”

쿠로사키 슌.”

나이는?”

“17.”

질문에 답하기 위해 생각할 때마다 머릿속의 안개가 조금씩 걷히는 것 같았다. 몇 번의 질문이 이어지는 동안 여자는 자신이 답한 것은 물론이고 답하지 않은 영역까지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질문이 계속되던 때였다.

나와의 관계는?”

거기서 여자는 멈췄다. 자신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는데, 타인과 연결해서는 답하기 어렵다. 사내가 원래 알던 사람이라는 것은 눈치챘지만 어떤 관계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기억의 심연 속에선 그와 함께했다는 사실 외엔 아무것도 건져낼 수 없다. 온갖 관계를 떠올리며 눈앞의 사내에 맞춰보는 사이, 사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우리는 협력자였어요.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아 말해두자면, 내 이름은 아카바 레이지.”

아카바, 레이지.”

여자는 사내의 이름을 입에서 굴려보았다. 낯선 듯 익숙하고, 익숙한 듯 낯선 이름이었다.

지금은 막 깨어나서 혼란이 있을 수도 있으니 걱정 말아요. 날아갔다 해도 천천히 다시 시작하면 되고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사고, 라고 해야 할까요. 깨어나는 데 꽤 오래 걸렸어요.”

그런 기억은 없다. 하지만 기억의 마지막 부분이 강제로 찢긴 것을 보면, 어쩌면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자신의 몸에 사고의 흔적이라도 남았는지 확인하려 시선을 옮겼지만 이미 회복된 것인지 특별한 것은 발견할 수 없다.

협력자였다고 하면, 함께하던 일이 있었다는 뜻인가요? 혹시 지금도 도움이 필요한가요?”

. 함께한 것이 있었죠. 다만 지금은 끝난 이야기예요. 당신의 도움 덕분에 잘 마칠 수 있었거든요. 그 후에 당신이 사고를 당한 거죠.”

나는 제대로 떠오르는 게 없어요.”

괜찮아요.”

사내는 엷은 웃음을 걸치며 말했다.

당신은 그냥 휴식을 취하면서 일상으로 돌아가면 돼요. 이제 우리의 싸움은 끝났으니까요.”

싸움인가. 여자는 다소 무거운 단어에 눈을 끔뻑거렸다. 아마도 그와 자신은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던 모양이었다. 어떤 일이었건 잘 마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여자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막 깨어났을 때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몸에 힘이 없어, 결국 그녀는 사내의 도움을 받아 일어나야만 했다.

사람을 부를게요. 당신의 회복과 적응을 도와줄 사람을요. 언제든 내게 연락할 수 있게 해둘 테니까, 필요할 땐 불러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처럼 정기적으로 점검할 생각이지만.”

. 고마워요. 아카바 씨.”

“‘아카바 씨인가요, 조금 낯설군요.”

원래는 어떻게 불렀나요?”

그보다는 좀 더 멀게 느껴지는 호칭이었어요. 나는 지금이 더 좋네요.”

사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떠났다. 사내가 부른 사람이 오기 전까지, 여자는 자신이 깨어난 곳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병실이라기보다는 실험실을 연상시키는 괴상한 공간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

 

사내는 언제나 여자에게 친절했다. 그녀는 깨어난 이래로 무엇 하나 그의 도움을 받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의 회사에서 지내며, 그의 지원을 받으며, 군데군데 남아있는 공백을 그의 도움으로 조금씩 채워갔다. 언제나 그의 도움을 받는 것이 신경이 쓰여 여자는 물은 적이 있었다. 왜 자신을 그렇게 잘 대해주느냐고. 답은 바로 돌아왔다. 당신은 내 협력자였으니까요. 간단한 답이었다.

당신의 도움 덕분에 나는 오랜 목표를 이룰 수 있었어요.”

보답인가요?”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네요. 당신에게 받은 도움에 비하면 지금 내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카바 씨는 나를 언제까지.”

언제까지 당신을 살필 생각이냐고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요. 당신이 이곳 밖에서 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때까지?”

그는 대부분의 질문에 명쾌한 답을 주었지만, 미래에 대한 질문에는 명확하게 답을 해주는 일이 없었다. 때로 여자는 그가 앞으로의 일에 대해 교묘하게 회피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거기서 의심은 흔들린다. 그렇게까지 해서 여자의 의문을 흐릴 이유가 있을까? 그저 사고를 당했던 협력자가 아직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신중하려 하는 것인데 그 선의를 자신이 왜곡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거기까지 가면 여자는 가벼이 생각을 떨쳐버리곤 했다.

어쨌든 사내가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 것은 분명했다. 과거 협력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서. 그렇다면 공연히 의심을 얹지 않고 선의는 선의로 받아들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자신의 생활 하나하나에 힘써주는 사내에 대한 고마움이 여자의 의문을 봉쇄했다. 여자는 사내의 모호한 답에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혹시 이곳에서 지내는 게 조금 답답한가요?”

아니요. 그냥, 계속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회복에만 집중해요.”

사내는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여자의 현재 상태를 기록하고 있었다. 만날 때는 관찰과 질문을 통해, 만나지 않고 연락할 때는 여자가 말하는 일상적인 정보를 통해 사내는 그녀의 생활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삶을 탐욕스레 긁어가는 이유를, 여자는 모른다. 일반적인 사례가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챘지만 사내가 회복되는 것을 지켜본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이상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여자가 그 집요한 관심을 넘기는 이유는, 사내가 연구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기록은 여자를 파헤치기보다 그녀가 살아가는 것에 관심이 맞춰진 것 같았다. 여자는 안경 너머 사내의 보랏빛 눈을 볼 때면 가끔 자신이 핀으로 고정된 표본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부는 간단히 해부되고 자신의 모든 것은 연구의 일부가 될 뿐. 기록에 담긴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형태일지, 여자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아카바 씨.”

?”

사내가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에는 근원 모를 열기가 깃들어 있다.

나는 그 기록 속에 있는 게 아니에요. 기록이 나를 구성하지도 않고요.”

미안합니다. 당신에게 소홀하려 한 것은 아니었어요.”

사내는 급히 펜을 내려놓았다. 여자의 얼굴에는 특별히 불쾌가 비치지 않았으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힘이 실려 있었다.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가. 혹 그녀에게 마음을 잃게 된 것은 아닌가.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악의가 없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이런 데선 무신경하죠.”

주의할게요.”

당신의 기록, 봐도 돼요?”

그건.”

처음으로 사내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에게 조금 불편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아무래도 자신의 이야기니까.”

상태를 기록한 것뿐이잖아요?”

너무 난잡한 기록이어서요. 보여주기는 부끄럽네요.”

떠보기 위한 질문에, 짐작대로 사내는 시원스레 자신의 결과물을 내놓기보다 슬쩍 물러서는 것을 택했다. 드물게 동요하는 사내의 모습이 흥미로워 더 몰아세워볼까 했던 여자는, 어차피 바라는 결과를 얻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사내를 놓아주었다. 사내는 여자의 시선이 걷힐 때까지 기록한 것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 기록도 곧 끝나겠죠. 내가 여기서 나가게 되면.”

그래요. 당신이 별 문제 없이 회복한다면.”

회복이 어떤 형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신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어요. 그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네요.”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회복했다는 결론만 나면, 앞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때까지는 자신에게 호의적인 이 사람을 믿고 그 도움을 받도록 하자. 여자는 사소한 문제는 접어두고 사내의 말대로 회복에 집중하기로 했다.

회복하면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일단 내 삶으로 돌아가는 것부터 하고 싶네요. 그 외에도 많지만.”

돌아간다, .”

사내는 여자의 단어를 곱씹었다. 그것으로, 단정한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아니요. 그냥. 당신이 계속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이 좋아서요.”

그야, 아직 많은 날이 남아있잖아요? 사람은 보통 다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나요?”

그건 그렇지만, 당신은 사고 후의 혼란 때문에라도 우선 안정을 찾는 데 몰두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요, 아직은 부족하죠. 몸엔 이상이 없지만 돌아오지 않은 게 많으니까. 하지만 차차 돌아올 거라 생각하면서 나아가는 거예요. 완벽히 돌아올 때까지 정체되어 있을 이유는 없잖아요? 그게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데.”

사고로 인해 자신의 삶은 일정 기간 멈춰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 여자는 그 정체된 시간 동안 미뤄졌던 것을 하루라도 빨리 하고 싶었다.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맞는 말이군요. 그럼 어서 당신의 소망대로 되도록 나도 최대한 힘을 보태지요.”

사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당신의 삶을 찾는 것은 내 소망이기도 하니까요.”

 

*

 

소망이라는 말에 거짓은 없다. 사내는 분명히 협력자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그녀가 일상을 찾고 회복하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자가 사내였다. 다만 그 아래 깔린 마음이 무엇인지 물으면 여자 앞에선 답하기 어렵다. 여자를 위하는 그의 태도에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끼어있으며 불순한 동기가 그를 움직여왔다고 고백하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어긋나게 될 테니. 거기에 한 가지 더 사내가 속내를 숨기게 하는 것이 있다면 여자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과거의 관계이리라.

사내만이 있던 집무실에 기척 없이 협력자가 나타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작은 부분까지 자신의 도움을 받고 있는 그녀가 아니다. 지금, 책상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고 사내를 내려다보는 사람에게선 자연히 여유가 묻어나온다. 이제 깨어난 그녀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모든 정보를 안고 있는 사내겠지만, 이곳의 그녀와의 관계는 이야기가 다르다. 사내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자신이 없다. 모르는 체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면, 여자는 심술궂게 물어온다.

이번엔 몇 번째의 ?

몰라. 세지 않았다.”

사내의 협력자는 수없이 새로 만들어진 인간이다. 때문에 이번에 깨어난 여자가 몇 번째의 쿠로사키 슌인지 사내는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그에게 말을 걸고 있는 여자는 누구인가. 그녀는 몇 번째인가. 그것만은 쉽게 답할 수 있는 건 그녀가 모든 쿠로사키 슌의 오리지널이기 때문이다. 사내가 태어나 처음 만난 쿠로사키 슌이 바로 눈앞의 여자였다. 자신의 삶을 지배한 재앙이 끝난 후, 평화 속에서 버티지 못해 죽은 여자. 그 후의 그녀들은 전부 여자의 카피에 불과하다.

카피를 찍어낼 때마다 사내는 여자를 원망했다. 그녀가 자신을 떠나지 않았다면 카피를 만들어낼 이유도 없었다. 아니, 떠나기만 했어도 누군가의 모방품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죽어버린 탓에 사내는 그녀의 클론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그녀의 죽음이 결국 자신의 과오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를 새로 만들어내서라도 하지 못한 것을 하고, 그렇게 실패를 무마해야 하기 때문에.

실패를 모르던 사내는 여자 때문에 실패를 배웠다. 십여 년 전의 사내는 그녀를 평화에 적응시키려 꽤 공을 들였으나 대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탓인지 실패했다. 끝내 그녀가 열일곱 살의 나이로 죽었을 때 그는 그 사실을 납득하지 못해 라는 말만 수없이 되풀이했다. 완벽한 환경을 구성해줬는데, 언제나 상태를 점검했는데, 수많은 기회를 제공했는데.

왜 그녀는 내 앞에서 죽었는가.

그때의 의문은 지금도 풀리지 않았다. 풀렸다면 수없이 찍어낸 그녀의 카피가 전부 실패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지 십 년도 지났으나 아직도 사내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사내가 이미 죽은 여자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된 오리지널을 마주하는 것은 어쩌면 마음의 부채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비가 일으킨 전쟁이 그녀를 망가뜨렸고, 사내의 도움이 제대로 닿지 않아 그녀가 회복하지 못하고 일찍 죽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너에게 상냥한 도 찍어내는 모양이던데. 대단한 발전이네.

쿠로사키.”

네가 소망하던 쿠로사키 슌은 그런 인간이었을까?

이젠 모르겠군.”

너무 많은 카피를 찍어냈다. 실패할 때마다 새로 찍어낸 그녀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니, 오리지널이 죽은 이래로 시간이 꽤 흘렀다는 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때문에 사내에게 최초의 그녀는 제법 흐릿해져 있었다. 외형이야 똑같이 만들어낼 수 있고, 함께한 시간 동안 보았던 사상과 성향까지는 기억하지만 상세한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복제가 거듭될수록 최초의 그녀는 점점 흩어진다.

어차피 멋대로 만들어낼 거라면 네 나이에 맞춰서 찍어내면 그만이잖아. 왜 아직도 17세의 쿠로사키 슌을 고집해?

내가 기억하는 쿠로사키는 거기에 멈춰있으니까.”

네가 기억하는 쿠로사키는 이제 없어.

결국 내가 만나는 건 왜곡된 모습일 뿐이라는 건가.”

진짜를 최대한 닮게 찍어내는 건 자신 없잖아. 너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라도.

심술궂긴.”

틀린 말은 아니다. 최초의 그녀는 사내의 도움을 거부하다 외롭게 죽었다. 그나마 초기에 만들어내, 왜곡이 덜한 카피들은 대부분 그를 싫어했다. 이번의 그녀가 그를 적당히 받아주는 건 원본에서 먼 표본이어서일지도 모른다. . 네 실험 기록이 말해주는 결론 아냐? 오리지널의 나긋한 목소리에, 사내의 시선은 책상 한 편을 차지하는 서류에 향한다. <쿠로사키 슌 적응실험>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 그에게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게 한, 십 년을 넘게 성공하지 못한 실험의 기록에로.

수많은 그녀의 삶과 죽음이 그곳에 낱낱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를 사내의 세상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이, 실패로 끝난 모든 시도가 적혀있었다. 아직도 그 기록이 이어지는 것은 사내가 지금도 포기하지 않아서이고, 이번의 카피가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나는 답을 찾아내.”

자기최면에 가까운 말은 사내를 움직이는 얕은 희망을 요약하는 문장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답을 찾는다. 끝없는 실패의 고리를 끊는다. 그렇게 되면.

그러면 전부 바로잡게 되겠지.”

내 죽음을? 아니면 네 실패를?

아무래도 좋아. 지금까진 성공적이니까.”

어느 쪽이건 사내는 여자를 구한다. 그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이 여자에 대한 죄책감이든 실패를 없애고 싶다는 오만한 마음이건, 사내가 거두려는 결과는 같다. 여자는 그의 손에서 새로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어려서부터의 꿈을 이룰 것이고,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전부, 최초의 그녀에게는 불가능했던 것. 제대로 피기 전에 닫혀버린 그녀의 가능성을 그리며 사내는 버텨왔다.

자기위안에 불가능하다고 해도.

무엇을 바로잡든 쿠로사키 슌에겐나쁘지 않을 거다.”

그렇게 말한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에게서 돌아섰다. 회사에는 여자가 죽기 전 이곳에 머물렀을 때의 자료가 조금이나마 남아있다. 자료실에 가, 그녀가 살아있을 때의 영상을 보고 그녀를 가능한 이해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어떤 그녀이든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집무실을 떠나면서 사내는 여자의 목소리가 꽂히기를 기대했으나, 책상에 살짝 눈길을 주었을 때 이미 여자는 사라진 후였다.

 

*

 

사내가 자주 향하는 곳은 자신의 집무실 근처에 마련된 자료실이었다. 회사의 자료는 물론이고, 사내 개인의 자료도 보존되어 있다고 했다. 여자가 사내에게 그의 자료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오래도록 해온 연구의 자료라 간단히 설명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요? 언제 끝날지 모르겠군요. 어려운 연구인가요? 내게는 그래요.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얼굴에는 무엇인지 모를, 무거운 감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여자는 사내의 연구가 자신의 지식욕을 채우기 위한 것보다는 책임에 가까운 게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다.

사내가 어떤 연구에 그렇게 열중하느냐 물으면 회사 사람들은 대부분 어색한 웃음을 걸치며 말하곤 했다. 잘은 몰라요. 그게 아니면 자신은 관여할 수 없다는 소극적인 답변이었다. 몇몇은 질린 얼굴로 고개만 절레절레 내젓기도 했다. 연구라는 게 그리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리란 것은 직감했지만 여자는 사내의 얼굴에 비쳤던 것이 떠올라 그에게 캐묻지 않기로 했다. 때문에 여자에게 그의 연구란 언제나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말만 들었지 가본 적은 없었던 자료실에 여자가 처음으로 들어선 것은, 사내가 연구때문에 자리를 비웠다는 말을 들은 날이었다. 만나려던 계획이 틀어져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여자는 직접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보기로 했다. 함께한 시간 덕분에 제법 거리를 좁힌 사람이라 가볍게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도중에 찾아가도 문제는 되지 않을 거라고.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그의 공간에 잠깐 발을 들여도 괜찮을 거라고.

사내는 짐작대로 자료실에 있었다. 다만 자료를 살피는 데 열중한 모양인지 그녀가 들어왔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익숙한 뒷모습을 보고 그녀는 약간 떨어진 곳에 가만히 앉았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만나러 왔으니 그가 모든 걸 끝낼 때까지 기다릴 수는 있었다.

여자가 앉고 오래지 않아 사내는 영상을 틀었다. 화면이 켜지자마자 여자는 얼어붙었다. 사내가 튼 영상에는 그와 함께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기억에 없는 공간에서의, 기억에 없는 만남. 기억에 없는 말을 하는 여자는 분명 자신이었지만, 그 맞은편에서 기억에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조금 낯선 사내였다. 지금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 짧게 잡아도 수년 전의 영상인 듯했지만, 자신의 모습은 지금과 다를 바 없다. 자신의 시간만 멈춘 것처럼.

영상 속의 여자는 날카로웠다. 얼굴에 드리워진 것은 깊은 불안이었고 행동 하나하나가 아슬아슬했다. 사내와 상담에 가까운 대화를 하는 동안 그에게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어떤 행동에도 사내는, 지금과는 달리 여자 또래로 보일 정도로 앳된 사내는 무표정하다. 영상 속 여자에게 닿는 시선은 지금 여자를 관찰하는 사내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표본을 보는 것 같은, 건조한 시선.

[관찰과 검진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을 말하자면, 너의 현재 상태는.]

[정상이라고 말하고 싶겠지, 안 그래?]

[……실제로 특별한 문제는 감지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겪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모든 것을 너에 맞췄어. 이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는 뜻이다.]

[맞춰달라고 한 적도 없었어. 너는 언제나 그런 식이지. 모든 것을 멋대로 해석해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최선을 다하고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해.]

[그러면 내가 무엇을 하길 바라지?]

영상 속 여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입이 열렸지만 말은 나오지 않는다. 밀려드는 감정을 눌러 참는 모양이었다.

[네가 이야기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그게 더 나을지도 몰라. 인간을 기계처럼 수리하려 드는 네게 기대를 거는 것보다!]

보면 볼수록 이상한 자료였다. 여자는 자신의 기억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처지니, 어쩌면 과거 저런 만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영상에서 왜 자신만 지금과 같은 모습인 것인가. 그리고 영상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 과연 협력자의 대화라 볼 수 있는 것인가. 사내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낯설고 자신이 사내를 대하는 태도는 괴상하다. 만일 영상이 실제 자신의 자료라고 한다면 가능성은 하나. 자신이 깨어난 후 사내를 통해 들은 정보가 잘못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실제로는 어떤 관계였던 것인가. 사내는 무엇을 기대하고 과거를 멋대로 왜곡한 것인가.

그리고 모든 것에 앞서, 자신이 그의 연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멍해진 여자는 실수로 근처의 자료를 건드렸고, 그 소리에 사내가 돌아보았다. 여자는 황급히 빠져나왔다. 도망칠 이유가 없는데, 누구에게도 쫓기지 않는데 그 순간 바로 그를 마주하는 것은 혼란스러워서. 결국 그녀가 도망쳐 간 곳은 사내의 집무실이었다. 기다리다 보면 사내는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그때 무어라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의문스러운 자료에 대해 묻거나, 사내의 연구에 대해 넌지시 떠보거나. 그게 아니어도 최소한 그에게 어떤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여전히 걷히지 않은 혼란이 너무 많은 생각을 불러와 여자는 우선 숨을 돌리고 쉬기로 했다. 평소 자신이 앉던, 사내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려던 여자는 문득 근처에 꽂힌 서류를 보고 멈칫했다. 표지에 붙은 제목이 그녀의 시선을 빼앗았다.

<쿠로사키 슌 적응실험>

평범한 서류였다면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박혀있었기 때문에 여자는 호기심에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여자는 수많은 쿠로사키 슌의 결말을 보게 되었다.

최초의 기록은 12년 전의 것이었다. 아마 거기에 등장한 쿠로사키 슌이 사내가 만난 최초의 쿠로사키 슌이었으리라. 전쟁 피해자인 쿠로사키 슌은 전쟁에서 생존하고도 후유증에 시달려온 것으로 보였다. 그런 그녀의 적응을 도우려 사내는 여러 가지를 시도한 모양이었지만 기록의 끝은 사망이란 간결한 단어였다.

다음의 기록으로 넘어갔다. 역시 그 해의 것이었지만 분명 죽었을 쿠로사키 슌이 다시 등장했다. 다만 1호라는 약칭으로 주로 기술되어 있었다. 그녀의 기록 역시 사망으로 끝났다. 기록이 시작된 날짜로부터 겨우 몇 달 만에.

그 후, 쿠로사키 슌 nn기의 사망. 원인은 기술의 한계로 인한 약한 몸.

nn기의 자살. 이유는 자신이 카피라는 것을 인지한 쇼크로 추정.

n기의 실종. 이후 사망 확인.

그런 처참한 기록이 쭉 이어졌다. 단 한 번의 성공도 없이.

그렇게 넘기고 넘겨 마지막 해의 기록은 올해의 것이었다. 시작된 날짜는 여자 또한 기억하는 날짜였다. 자신이 깨어난 날. 이제 여자는 십 년을 넘긴 이 기록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안다. 때문에 마지막 해의 기록이 현재진행형인 이유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사내가 남긴 가장 최근의 기록은, 마지막 표본에 대한 평가는.

[현재로서는 성공적.]

여자는 기록을 덮었다.


*

 

 

자료실에서 오랜 실험의 자료를 헤집을 때면, 사내는 죽은 여자들의 묘지에 갇힌 것 같았다. 그에게 처음으로 실패를 맛보여준 오리지널을 비롯해, 결국 모두 그를 떠나버린 수많은 여자의 기록이 그를 짓눌렀으므로. 병사. 자살.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 어떤 시도를 해도 결말은 전부 죽음이었다. 때문에 그는 너무 많은 죽음을 짊어져야만 했다. 언젠가부터 그는 죽은 사람들과 함께 숨 쉬고 있었다.

언제쯤 성공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실험의 오류를 언제쯤 발견할지도 알 수 없다. 언젠가는 성공할 거라는 느슨한 희망을 안고 꾸역꾸역 실험을 계속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자료실을 빠져나와 복잡한 심정으로 집무실로 돌아온 사내는 바로 자신의 책상에 걸터앉은 여자를 발견했다. 오늘도 그에게 실패를 일깨워줄 모양이었다. 언제나처럼 자료를 꺼내며 모르는 체 앉으면,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에게 박힌다.

나는 몇 번째의 쿠로사키 슌인가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잖아. 세지 않으니까.”

습관적으로 답한 사내는 바로 멈칫했다. 그를 괴롭히는 최초의 그녀는 그런 말투를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눈앞의 그녀는, 몇 번째일지 모를 카피.

. 미안해요, 잠깐 착각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셀 수 없었던 거죠?”

여자의 말에 사내의 혀가 굳었다. 이제 와서 변명이나 부정은 무의미하다. 그녀는 이미 전부 알아채고 말았으므로. 사내는 여자를 흘깃 바라보았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자의 눈에는 감정이 비치지 않는다. 여느 때와 같은 시선이 그는 원망보다 두렵다.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기에.

왜 그렇게나 만들었어요?”

나는, 당신을.”

쿠로사키 슌을?”

쿠로사키 슌을, 살려야만, 했으니까.”

여자가 책상에서 내려와 그의 곁에 섰다. 사내는 외면하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살아있는 당신을, 내가 실패한 그 해의 당신에게서 멈추지 않고 더 살아가는 당신을 만들고 싶었으니까요.”

사내의 말은 힘겹게 터져 나왔다. 셀 수 없는 실패와 십 년 넘게 지속된 시도를 당사자 앞에서 이렇게 터트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껏 자신이 카피임을 알고 쇼크를 일으킨 그녀도 수십이 있었지만, 그는 비밀을 들켰을 뿐 고백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토록 고집을 피워온 이유가, 거듭된 실패에도 시도를 끝낼 수 없었던 이유가 비로소 분명해진다.

오리지널과 흡사한 인간이 아니어도 좋았다. 어쨌든 쿠로사키 슌의 미래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종료된 삶을, 바로 그 시점에서 다시 시작하게 만들고 싶었다. 오리지널의 허망한 종말을 인정할 수 없었으니까. 결국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은 자를 새로 찍어내고 미래의 가능성을 꿈꾼 것은 그래서였다.

그러나 너무 멀리 왔다. 너무 많은 시도를 했고 너무 많은 카피를 찍어냈고 너무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 이제 와서는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를 노력이었다. 기억 속에만 남은 최초의 그녀는 이미 그의 생각에 오염되었고, 새로 찍어낸 그녀들이 그를 통해 얻은 것은 미래가 아닌 죽음이었다. 그 전까지 오만과 자기최면으로 외면해오던 것을 사내는 이제야 제대로 마주한다. 자신이 해온 것들의 본질을. 자신의 알량한 욕망을.

언젠가는, 내가 성공할 거라고 믿었어요.”

내가 살아갈 거라고요?”

사내는 말을 하지 못했다. 여자는 자세를 낮춰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카바 씨. 나를 봐요.”

……괜찮아요?”

내가 클론이라는 것이요? 아니면, 당신이 지금까지 속여왔다는 것이요?”

나라는 인간이요.”

모르겠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녀는 구원의 답도, 사내가 각오한 답도 돌려주지 않는다. 그 건조한 답변에 사내는 겨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당신이 바라는 쿠로사키 슌일 수는 없어요. 그건 알고 있죠?”

그 여자가 죽은 후로 만들어낸 클론은 모두 그랬어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이제 당신이 내게 채워 넣은 쿠로사키 슌의 정보는 의미가 없어졌다는 뜻이죠.”

실험대상이 실험의 모든 것을 알아버렸으니 실험 실패군요.”

그렇다면 이번의 그녀는 그에게 어떤 실패를 안겨줄 것인가. 사내는 지금까지 자신이 겪어온 수많은 실패를 떠올린다. 자신이 클론임을 알아챈 표본은 대부분 자살했다. 자취를 감춰버리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든 그녀들은 전부 그를 떠났다. 그 중 사내가 그토록 바랐던 미래를 보여준 표본은 하나도 없었다. 사내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그녀를 절망에 떨어트렸는지 새삼 느낀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다. 담담해 보이는 그녀 또한 절망과 배반감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한다 해도 그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체념한 사내에게 날아든 것은 뜻밖의 반응이었다.

당신은 쿠로사키 슌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클론을 만들어냈다고 했죠. 당신의 실험은 성공했어요. 나는 죽지 않을 거예요.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미래를 만들 거예요.”

아니, 이제 어떻게 되어도 좋아요. 내가 잘못한 거예요. 내가, 처음부터 내가, 잘못 생각해서.”

내가 오만해서. 혀끝에 걸린 말은 완전히 토해낼 수 없었다. 여자는 사내가 쏟아내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리며 자신이 하던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전부 그만둬요. 더는 도망치지 말아요.”

그녀의 말에는, ‘나의 죽음에서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을 것이다. 사내가 그토록 인정하지 못했던, 그래서 끝없이 수정하려고 노력해왔던 것이었다.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다. 그녀의 죽음을 인정하고 차라리 미래의 잘못을 막으려 노력해야 했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체된 채, 바꿀 수 없는 잘못에 매달릴 것이 아니었다. 다만 도망쳐온 시간을 없앨 수는 없으므로, 그는 이제라도 도망치지 않아야 했다.

“‘회복은 끝난 거죠?”

. 이제 여기서 나가도 좋아요.”

사실 진즉에 끝났다. 사고니 회복이니, 전부 그녀를 붙잡아두고 실패를 수정하기 위해 들먹인 핑계일 뿐이었다. 실험이 종료된 이상 그런 명분으로나마 그녀를 묶어둘 필요는 사라졌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사람을 불러 무언가 준비라도.”

필요 없어요. 그냥 새로 시작하면 돼요.”

여자는 사내에게 등을 돌리며 말했다. 간결한 말에는 여태껏 보인 적 없었던 냉정한 거부가 엿보였다. 그들이 타인으로 돌아선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삶을 시작부터 지배했던 사내의 손길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사내는 아쉬워할 자격이 없다.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녀가 갈 길이 고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런 결말이 온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웠다. 여자는 어쨌든 행동하기로 했다.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든 지속된다면, 그것으로 그는.

괜찮은 건가, 쿠로사키?”

돌아선 등에 꽂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마 그것은 사내가, 최초의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실패로 죽어버린 그녀에게. 그녀가 무사히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흡족하게 지켜보면서, 그런 말을 가벼이 던지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괜찮다는 답을 듣고 완전히 마음을 놓는 것을 기대했으리라. 물론 12년 동안 그가 그 말을 던질 일도, 바라던 답을 들을 일도 없었다. 그의 모든 시도가 실패했기 때문에.

괜찮아. 아카바.”

그래서 여자는 그가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흉내 낸다.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닌 사람을, 12년 전의 오리지널을 모방한다. 아마 자신은, 아니, ‘그녀는 그를 이렇게 불렀을 것이다. 머리에 새겨진 쿠로사키 슌이 말하고 있다.

그러면 됐어.”

이제 끝내도 좋아.”

고마워.”

여자는 돌아보지 않고 그의 공간을 나섰다. 그 뒷모습에, 사내가 12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여자의 모습이 겹쳐진다. 죽기 전날, 자신을 떠나던 등이. 그때 본 그녀는 열일곱의 나이로 종료되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열일곱의 나이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자신은 지켜볼 수 없더라도, 분명히, 다음은 있다. 그가 바라던 미래는 이제부터 펼쳐지게 될 것이다.

그의 실험은 12년 만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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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