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구원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구원이란 너절한 희망에 매달리는 자들의 신앙 같은 것이라 생각하며, 구원을 이야기하는 자들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절망 속을 낙관 없이 내달렸고 기적에 목을 매지 않았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오직 차가운 계산과 어떻게든 결말이 날 싸움 뿐. 어쩌면 그가 그토록 구원에 냉랭한 것은, 지금껏 누구도 그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년은 청년이 걸어온 길을 어렴풋이 안다. 갑자기 세상을 덮친 전쟁은 청년의 모든 것을 앗아갔고, 그는 폐허에서 싸워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소년을 만날 때까지 청년을 살린 것은 그 자신이었다.
청년의 삶에서, 희망을 말하는 자도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구원의 볕이 들 거라며 모두를 이끈 자도 한둘은 있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청년의 곁에 미래를 낙관하는 이는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 전장이란 그런 사람에게 가장 가혹한 곳. 아마 그들은 가장 먼저 청년의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희망을 이야기한 주제에 일찍 꺾여버린 자들에게 청년은 무엇을 느꼈을 것인가. 환멸? 배반감?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괴로운 감정이었으리란 것은 소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인간이라면 구원을 고집하지 않아도 되련만, 소년은 이상하게도 청년의 구원에 오기를 품고 덤벼들었다. 저 남자가 스스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싶다. 바라던 미래를 맞아 웃게 되는 것을 보고 싶다. 그 기적 같은 일을 내 손으로 이루어주고 싶다 ─ 소년의 소망은 청년의 황폐함을 맞닥뜨릴수록 강력해졌다.
구원을 믿지 않는 자를 감히 구원하겠다는 오만에 취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자신의 신념이 실현 가능한 것임을 청년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 아래 깔린 것이 무엇이든, 청년을 구하고 싶다는 소년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소년은 수없이 구원을 시도했고, 청년이 불신의 벽을 허물고 자신이 선물하는 희망을 받아들일 날을 기다렸다.
“무장하지 않은 정의는, 악의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청년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어서, 그런 말로 소년의 희망을 자꾸만 흔들려 들었다. 소년이 고향을 떠나와 불합리한 체제로 갈등을 빚은 도시를 구하려 했던 때였다. 압제자의 착취에 들고일어난 민중을 막고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소년에게 청년은 냉랭하게 말했다.
“하지만 폭력은 누구도 구할 수 없어.”
단호한 답을 돌려주자 청년은 말을 이을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대로 몸을 돌려버렸다. 인간의 악의에 질리도록 당하고 어린 나이부터 폭력에 짓눌린 그에게 소년의 말은 무력한 이상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소년은 언제까지고 그렇게 말해야만 했다. 현실의 가혹함에 굴복해 희망을 외면하고 무력에 기대서는 안 된다. 희망이 있는 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을 택해야 한다. 그것이 소년이 짧은 생을 살아오며 포기한 적 없는 선이었다.
그때의 대립은 소년의 승리로 끝이 났다. 소년이 믿었던 대로 도시의 갈등은 평화롭게 해결될 수 있었다. 누구도 쓰러지지 않았고 결국 서로를 미워하던 이들 모두가 힘을 합쳐 행복한 결말을 냈다. 다만 청년은 그것만으로 소년을 믿진 않았다. 아군이라는 이유로 소년의 싸움에 힘을 보태주었을 뿐, 그가 옳았다며 인정해주진 않았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소년이 청년에게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하려 노력하게 되었던 것은.
세상에 구원을 선물할 때면 소년은 자랑스레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웃음이 걸리고 그의 금빛 눈에서 불신이 걷히길 기대하면서. 혹은 소년의 구원에 대해 한 마디라도 칭찬을 건네길 바라면서. 소년이 펼치는 구원은 점점 그 힘을 키워 기적에 가까워지는데 청년은 도무지 마음을 열지 않았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싹틔우는 소년의 힘은 일부 인정하면서도 소년이 자신에게까지 손을 뻗는 것은 끈질기게 거부하는 청년이었다. 전쟁이 안겨준 불신이 그만큼 큰 것인가. 아니면 그저 믿고 싶지 않은 것인가. 소년은 모른다.
“불행한 사람에게, 희망이란 늪이지.”
폐허가 된 고향을 걸으면서 청년이 던진 말이었다. 그때 청년은 소년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등을 보이고 걸었다. 가장 위험한 곳에서 앞장서는 것은 그만큼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과 함께 싸우는 전사들마저 온전히 믿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위험하단 말이야. 쉽게 빠지는 주제에, 헤어나긴 힘들다고.”
“그래서 희망을 두려워하는 거야?”
앞서가던 청년이 멈췄다. 소년도 그 자리에 멈췄다가, 바로 돌아서 거리를 좁힌 청년에게 멱살을 잡혔다.
“두려워한다고? 내가?”
“희망을 믿지 않고 어떻게든 거기서 벗어나 판단하려 하는 건, 희망에 매달렸다 추락하는 걸 두려워하는 것 아니냐고.”
“건방진 자식.”
거기서 청년은 소년을 놓아주었지만, 힘이 실린 행동이라 거의 내팽개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를 낳았다. 소년은 바닥에 주저앉아 청년을 노려보았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물론 모르지. 하지만 언제까지나 절망적인 현실만 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 희망을 믿어. 기대를 걸고, 실현시키려 노력하는 거야. 내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보여줬잖아. 기적은, 가능해.”
“네가 늪이었군. 제일 위험한 부류.”
“쿠로사키, 희망을 믿지 못하겠다면 나를 믿어. 나는 실현할 때까지 도전할 테니까.”
청년은 잠깐 소년을 내려다보았지만 이내 일어나지 못한 소년을 내버려두고 다시 앞서나갔다. 끝내 긍정의 답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포기할 소년이 아니었다. 소년은 오래지 않아 보란 듯이 청년이 포기한 희망을 살려, 청년의 동료들을 구원해냈다. 하필 청년은 그때 쓰러져 소년의 성공에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었지만, 소년은 내심 청년이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구원을 받아들일 것이라 자신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후의 일은 소년의 바람대로 잘 풀리진 못했다. 자신을 챙기기도 벅찬 여러 사건을 거쳐 소년이 모든 짐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무렵엔 청년은 이미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우 타인을 돌아볼 정도로 여유가 생겼을 때 소년은 문득, 과거 자신이 청년을 구원하려 했음을 떠올렸다. 청년의 거부로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은 포기한 적이 없었던 것. 언제나 마음 한쪽에 남겨두었던 소망. 이상하리만큼 집착했던 목표. 끝까지 실행할 기회가 없었음에 아쉬워하던 차에 소년은 우연히 청년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시 만난 청년은 꽤 지친 얼굴이었다. 단정한 얼굴엔 핏기가 없었고, 표적 앞에서 번득이던 포식자의 눈도 빛을 잃었다. 본디 가느다란 몸은 피로에 짓눌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하다. 소년은 서로 만나지 못한 사이에 청년에게 닥친 일에 대해 빠르게 감지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와 함께 전장에서도 청년을 지탱하던 것이, 아니, 그를 죽지 못하게 세상에 매어두던 것이 사라졌다. 그것으로 그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종전으로 싸움이란 생존방식도 사라진 그가 평화 속에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소년은 그 지독한 불행에 말을 잃었다.
“결착을 내야지. 너도, 나도 끝내지 못한 것이 있잖아.”
청년은 지나치게 차분한 목소리로 소년을 상대했다. 슬픔을 토해낼 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쿠로사키.”
“이제 나를 기다리는 건 결말뿐이다.”
말을 마친 청년은 무기를 장착했다. 전장에서 그를 살아남게 해준 것. 아군이라는 이유로 소년을 도와주기도 했던 것을. 청년이 그렇게 나온다면 소년이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소년 역시 자신의 무기를 장착했다. 싸움으로 듣고 싶은 것이, 풀어낼 것이 있는 것이리라. 살아갈 목적도 의지할 것도 잃은 청년을 보며, 소년은 자신이 관여하지 못한 새 청년을 덮친 불행이 고통스러웠다.
“어디, 나를 구해보라고. 그러겠다고 달라붙은 것 아니었나.”
건조한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소년에게 날아드는 공격은 하나하나가 묵직했다. 적당히 상대하려는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청년을 지탱하던 존재들을 본의 아니게 앗아간 것이 소년이었으므로, 분풀이라도 하려는 작정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청년을 구원하길 바랐는데, 그를 더한 절망에 던지고 말았다. 그 아이러니함이 소년을 찔러댔다. 역시, 구할 수 없는 인간이었을까. 구원이란 건 오만에 불과했을까. 매섭게 몰아치는 공격을 간신히 방어하며 소년은 괴로운 생각을 억눌렀다.
“왜. 그 전까지 늘어놓던 잘난 말들은 다 잊어버린 모양이지?”
그 말이 소년을 깨웠다. 소년은 과거 청년에게 집요하게 퍼부었던 노력을 떠올렸다.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어도, 냉소하는 사람이어도 오만에 가까운 자신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뿜어내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을 이야기했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아니, 지금이야말로 청년을 구원해야 했다. 그가 이곳에서 멈추지 않도록. 그래도 내일을 보고 나아갈 수 있도록.
“네게는 내일이 있어, 쿠로사키.”
“유토와 루리가 없는 내일?”
“무엇이든 시도할 힘이 있지.”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싸우지 않으면 무엇도 얻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 건 너잖아.”
“그래서 이젠 무엇에 맞서 싸우라는 거냐.”
소년의 목소리에 힘이 실릴수록, 청년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소년은 결국 꺼질 듯 위태로워진 청년의 목소리를 참지 못해 외쳤다.
“절망에! 너를 괴롭히는 현실에!”
무기에 얹었던 청년의 손이 멈췄다.
“나도 싸울 거야. 내가 얻은 행복을 전부 포기해서라도 유즈를 구할 생각으로 여기 온 거야. 세상이 평화를 찾았으니 그냥 만족하고 멈춰도 될 나도 여기에 있다고.”
“……히이라기 유즈는 이 세상에 없다. 루리도, 세레나도. 유토를 포함해 널 닮은 놈들도. 모든 게 끝나면서 사라졌어.”
절망 속에서 삶의 이유가 된 소중한 사람들의 행방을, 청년이 찾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소중한 자들의 부재를 확실하게 확인받는 것 뿐. 그 끔찍한 사실에 너덜너덜해진 채 청년은 소년과 마주해야만 했다. 괴로운 상실을 일깨워주는 사람을.
“찾을 수 있어.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면, 내가 돌아왔다면, 전부 되돌릴 수 있을 거야.”
“지칠 줄 모르는군. 신기할 지경이야.”
“너도 그렇잖아, 쿠로사키. 희망 같은 건 믿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모두를 구하겠다고 싸웠잖아.”
누구보다도 희망에 냉소하던 사람이,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일을 목표로 싸웠다. 누가 더 미래에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인가. 누가 더 자신의 힘을 믿고 있었던 것인가.
“결착을 내자고 했지, 쿠로사키. 화를 내고 싶었던 거라면 언제까지든 받아줄 테니 계속하자고. 그게 아니면, 이렇게 싸울 이유도 없잖아. 어서 끝내고, 구해야 할 사람을 구하러 가자.”
청년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공격할 차례였지만 소년의 말이 그를 움직인 것일까. 청년은 무기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차례를 넘겼다. 네가 끝내. 라는 말과 함께.
“생각이 바뀌었어?”
“그래. 덕분에 확실히 마음을 정했다.”
소년은 청년의 말대로 그를 공격해 싸움을 마칠 준비를 했다. 빨리 모든 것을 끝내고, 청년과 함께 새로운 싸움에 뛰어들 생각이었다. 앞으로 그를 기다리는 것이 길고 괴로운 싸움이어도 좋았다. 그래도 소년에겐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으리란 희망이 있었고, 소망을 이루고 말겠다는 자신이 가득 들어차 있었으므로. 소년이 준비를 마쳤을 즈음, 청년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곧 자신을 짓밟을 무기를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웃음이 비쳤다.
“기뻐해도 좋아. 이번에는 정말로 나를 구원했으니까.”
절망에 찌든 청년의 얼굴에 웃음이 걸리는 것은 진귀한 풍경이었다. 소년은 극한의 만족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드디어, 이뤘다. 진득하게 가져온 소망을. 소년이 이뤄낸 그 어떤 구원보다 기적에 가까운 구원을.
“나의 미래는 구하지 못해도 내가 행복할 수 있게 했어.”
“뭐?”
만족스런 결과를 낳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고맙다. 사카키 유우야.”
다음 순간 소년의 공격이 예정대로 청년을 덮쳤다. 청년의 패배로 싸움이 끝나기 직전, 소년은 보았다. 청년의 손목을 감싼 수상쩍은 장치를. 청년의 눈에 드리워진 광기를.
왜 미래는 구할 수 없다는 거야.
불안스런 의문의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싸움이 끝나자마자 청년이 장착한 장치가 빛을 발하더니, 패배한 청년을 삼킨 것이다. 소년은 그 속에서 빛으로 허물어지는 청년을 볼 수 있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청년은 빠르게 흩어졌다. 소년이 그 빛을 잡으려 손을 뻗었을 땐 청년 대신 다른 것이 잡혔다. 사라졌던 사람. 참혹한 전쟁 속에서도 청년을 세상에 매어두었던, 그의 소중한 사람.
그걸 확인한 순간 소년은 그 자리에 무너졌다. 그제야 소년은 청년의 마지막 말을, 그가 자신에게 웃을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했다. 그렇게 끔찍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좌절시킬 줄은 몰랐다. 소년이 오래도록 소망했던 구원은, 최악의 구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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