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기 가득한 경기장에 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관객이 기대하는 대회의 결승전. 경기장의 위쪽에선 대회를 주최한 회사의 사장이 화면을 통해 대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경기와 관련된 사업을 벌여온 회사라 경기를 살피며 발전 방향을 생각하는 것이 이미 습관이 된 사장이었다. 순식간에 휙휙 바뀌는 선수들의 화려한 동작과 관객의 함성이 어지러웠으나 사장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중해서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그렇게 경기가 후반부로 접어들었을 때쯤, 사장의 눈이 둥그레졌다. 화면 구석에서 익숙한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관객들 틈에 섞여 얼핏 비친 것이었지만 사장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수하에게 통신을 보냈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자라 붙잡고 싶었다.
오래지 않아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낸 관객은 하나둘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단 한 사람, 젊은 여자 하나만이 도중에 가로막혔다. 적당한 핑계를 대며 다가온 사람들을 여자는 쉽게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가 주춤대는 사이에 사장이 경기장으로 들어섰고 여자에게 가까워졌다. 고개를 돌렸다가 우연히 사장을 본 여자가 멈칫했다.
“오랜만이네, 쿠로사키.”
가로막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여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조용히 있다 가려고 했는데.”
“마이아미엔 무슨 일이야?”
“일을 끝내고 휴가차.”
여자는 짤막하게 대답하면서 시선은 슬그머니 출구에 두고 있다. 금방 떨쳐내고 나가려는 양. 사장은 웃으며 그녀를 먼저 출구로 이끌고 자신도 뒤따라 걸었다.
“휴가라. 쉬러 왔으면서 왜 연락도 하지 않았어.”
“잠깐 쉬러 온 건데 바쁘신 분께 연락을 왜 해.”
“부담을 줄 생각은 없었다는 건가. 그래도 알았다면 기뻤을 거야. 네겐 꽤 도움을 받았으니까.”
도움을 받았다지만 은혜를 입은 것은 아니다. 특별히 개인적인 친분을 쌓은 관계도 아니다. 몇 년 전에 만나 어떠한 일을 함께했을 뿐이다. 사장은 계약을 통해 여자를 묶어두었고 여자는 계약을 통해 사장에게서 자신이 바라는 대가를 받기로 했다. 필요로 시작한 관계였으니 목적이 종료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은 특별히 서로를 속박할 수단은 없었다.
“계약기간 동안은 계약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게 당연하지. 봉사도 아니고, 나도 대가는 확실히 받았으니 그 이상은 특별히 바라지 않아요.”
“개인적인 호의라면?”
“그런 선이라면.”
얼굴에 떠오른 것은 곤란하단 표정이었지만 잘린 말이 부정의 뜻은 아님을 사장은 알아챘다.
“역시 선이 확실하구나. 그런 점을 좋아해.”
여자는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본래 그렇게 상냥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번은 유독 냉랭했다. 사장을 의도적으로 피했던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만남을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만나지 못한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만남에서 어딘가 틀어진 것인지. 사장으로선 알 수가 없다.
“지낼 곳은?”
“특별히 정해두진 않았는데. 잠깐 들렀다 갈 생각이었고.”
“그러면 전에 쓰던 곳, 괜찮을까? 레오 코퍼레이션의.”
여자는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사장을 끊어내려고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만나고 싶었어, 쿠로사키.”
그제야 여자도 인사다운 인사를 돌려주었다.
“오랜만이야. 아카바.”
*
과거 사장의 계약자로서 그 일을 돕기 위해 회사에서 지냈던 여자는 수 년 만에 회사에 돌아왔다. 계약이 끝나고 오래지 않았을 때는 예고는 하지 않았지만 꾸준히 사장이 사는 도시를 찾은 여자였고, 사장은 옛 계약자를 반갑게 맞아 회사로 데려오곤 했다. 여자가 오지 않게 된 것은 언젠가의 만남에서 도망치듯 사라진 후부터였다. 그래도 언젠가는 찾아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리 기다려도 모습을 보이지 않아, 그녀를 위해 남겨둔 방도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사람이 들지 않은 방으로 들어섰다. 여자의 금빛 눈이 빠르게 방을 훑었다. 사장과 계약해 이 도시에 머물 때 사용했던 방이 분명하지만 자신의 흔적이 사라져 낯설게 느껴진다. 말끔하게 정돈된 방을 살피던 여자의 등에 사장의 목소리가 꽂혔다.
“한동안 오지 않았지. 조금 걱정했어.”
“원래 일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는 건 알고 있잖아.”
“그래도 매년 한두 번이나마 들렀지. 언제나 예고는 없었지만.”
“바빴어.”
“역시 바빴나. 하도 오지 않기에 나카지마는 혹시 정착이라도 한 것 아니냐고, 그래서 영영 마이아미로 올 생각 없는 것 아니냐고 하던데.”
“그 남자, 생각 외로 감이 좋네.”
“정착했어?”
“시도는 했는데 실패했지.”
“의외야. 나카지마가 정착 얘기를 꺼냈을 때 웃어버렸는데. 쿠로사키가 그럴 리 없다고.”
“루리도 그냥 어디든 좋으니 정착했으면 하는 눈치고, 나도 이 일을 그렇게 오래 하진 못할 것 같고. 정착을 생각해볼 때는 되었지. 잘 되지 않았던 게 문제였을 뿐이야.”
여자는 피로한 듯 눈을 내리깔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살 곳이 사라져, 세상을 떠돌며 험한 일을 해온 그녀였다.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다 택한 정착이라면 잘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몸에 익은 습관 때문일까. 여자는 결국 실패하고 스스로 발을 묶었던 반작용인지 한동안 바람처럼 온 세상을 다녔다. 한 장소에 머무는 시간은 이전보다 훨씬 짧았고 거기서 맡은 일은 이전의 것보다도 훨씬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것이었다.
살아온 것이 있으니 완전히 평범한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거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하려 하는데도 너무도 버겁다.
“마이아미에서 지내는 건?”
“확실히 나쁜 곳은 아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큰 것은 아니지만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유감이네. 만일 이곳에서 정착을 시도한다면 지원해줄 의사가 있는데.”
“빚지는 건 싫어.”
여자는 사장의 호의를 냉정하게 잘라냈다. 그녀는 자주 그랬다. 사장이 생각하기에 과하지 않은 호의라 해도, 꽤 조심스러운 접근이라고 해도 경계하듯 끊어내는 게 대부분이었다. 호의조차 이익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냉정한 세계에서 살아온 영향일지도 모른다.
“계산이 너무 철저한데. 감사의 뜻으로 하는 거라 해도 봐주지 않을 생각이지?”
“모든 걸 계산에 맞추는 건 아냐. 당신에겐 특히 빚을 지기 싫어서 그래.”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러고 보니 루리 양은? 언니의 정착을 도와주고 있어?”
“글쎄, 잘 지내고 있겠지. 떠나온 지 오래라.”
“동생과의 행복한 삶을 바라는 줄 알았는데.”
“동생의 행복한 삶을 바랐던 거지. 나같이 위태로운 사람이 곁에 있는 건 좋지 않아. 어떻게 만들어낸 안정인데. 내가 루리의 일상에 들어가는 순간 그건 깨져버릴 거라고.”
“그러니 영영 멀리 떠나있겠다고?”
“그게 루리에게 행복하지 않을까.”
반쯤 감긴 눈으로 여자는 웃었다. 그런 위태롭고 괴로운 삶을, 사장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장은 때로 여자에게서 바탕의 차이에서 비롯한 거대한 벽을 느낀다.
“일 얘기라도 해줄 수 있을까.”
술을 가져와 잔을 채워주며 사장은 넌지시 말을 돌렸다.
“당신에겐 재미없지 않아? 별로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듣고 싶어. 오랜만이고, 네 이야기라면 뭐든 좋으니까.”
“언제나와 같아. 청소하는 거지. 귀찮은 것을 처리해주고 흔적을 지워주고.”
청소라고 표현하는 것의 본질을, 사장은 어렴풋이 안다. 여자가 하는 일에서는 피 냄새가 난다. 여자는 타인의 피와 공포를 덮어쓰며 살아왔다.
“크게 두 가지야. 완성도는 관계없이 그냥 닥치는 대로 쓸어버리기만 하면 되는 일, 그리고 매우 섬세하게 정리해야 하는 일. 보통은 둘 다 어느 정도는 맡는데, 한동안 거의 쓸어버리는 것만 맡았어.”
“운이 나빴던 건가.”
“내가 다닌 곳이 대부분 별로 괜찮은 곳이 아니었거든. 짧게 머물러서 큰일은 없었지만.”
“다치지 않아 다행이야.”
“다쳤다 해도 불평할 순 없을 상황이었지. 일부러 그런 곳을 찾아다녔으니.”
“쿠로사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막 잔을 든 여자는 하던 말을 멈추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사장은 여자와 이야기하면서 느꼈다. 그녀는 방황했거나 방황하고 있다. 마지막 만남을 기점으로.
“무슨 일이 있었지? 쿠로사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의뢰인 중 하나는 내가 살아 돌아온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듯했지. 약속한 것을 다 주기 싫었던 것인지. 그 뻔뻔한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임무 수행 후 받기로 한 보너스까지 챙기는 건 짜릿했어.”
불편한 이야기였는지 말을 돌리려는 여자를 사장은 다시 물고 늘어졌다.
“우리 계약이 끝났다고 그렇게 나쁘게 헤어진 편은 아니었지 않나.”
서로를 필요로 해서 계약했다. 계약이 끝날 때 미련이나 불편이 남지도 않았다. 그랬기에 그 후로도 여자는 지나가다 잠깐 옛 계약자가 사는 도시에 들렀고 사장은 예고 없이 찾아든 여자를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다. 그 깔끔한 관계에서 대체 무엇이 어긋난 것일까.
“그런데 저번에는, 오늘 이전의 마지막 만남에서는 네가 도망치듯 떠나버렸지.”
“서운했어?”
“서운했다기보다는, 당혹스러웠단 쪽일까.”
“도망쳤다는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틀리진 않은 것 같네.”
“응?”
“당신 말대로, 도망친 거야. 두려워서.”
“내가 기억하지 못한 실수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말해줘. 지난 일이라 해도 잘못했다면 사과하는 게 맞으니까.”
“별로 그쪽이 잘못한 건 없지만.”
“그렇다면 왜?”
“욕심이 나서, 무서워졌어.”
“무엇이?”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사람에게 묶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런데 당신에게 묶일 것 같았거든. 계약이 끝나고 몇 번 만났을 때 의심이 가기 시작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봤을 때 깨달았지. 아. 나는 이 사람을 욕망하고 있구나.”
언젠가부터 그녀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열기를 띠었다. 여자는 그 전까지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굶주린 것이 음식을 보듯 탐욕스레 사장을 바라보았고 그 시간을 동강내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사장의 단정한 얼굴이 자신을 볼 때면 허기를 닮은 것이 덮쳤다. 그것을 납득할 수 없어 여자는 도망쳤다. 자신이 머물렀던 곳 중 가장 평화롭고 제게 호의적이었던 곳을 단지 한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버렸다. 신분이 없어 세상에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이 모습을 숨기고 도망치는 것은 쉬웠다.
그렇게 한동안 여자는 옛 계약자를 피할 수 있었다. 그대로 관계가 끝이 나나 싶었지만, 정착에 실패한 후 피로감에 잠깐 안정된 곳을 찾는다는 것이 하필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사장과 회사에 들어와 예전처럼 시간을 보내던 중에 여자는 생각했다. 만일 확인할 수 있다면? 자신이 제대로 파헤치지도 않고 던져버린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된다면? 어떻게든 결론을 낸다면, 사실은 싫지 않았던 이 관계도 어쩌면.
“사람을 욕망한 건 처음이라서, 혼란스러웠던 거야.”
그리고 두려웠던 것이다. 열망이, 상대에게 묶여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여자는 그 낯선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들었다. 그렇게 욕망으로부터 도망친 지 몇 년. 여자는 비로소 묻는다.
“있잖아. 내가 당신에게 품었던 건 사랑일까.”
지나가는 듯이 던진 말이었다. 가벼운 말에 사장은 얼어붙었다. 답은 쉽게 입 안에서 만들어졌으나 당장 목소리로 터져 나오지는 못했다. 사장은 여자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응? 하고 다시 물었을 때서야 입을 열었다.
“아니.”
“자신이 있네.”
잠깐의 침묵을 여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판단을 내리는 데 그 정도의 시간은 걸릴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사장을 괴롭힌 것은 고뇌였다. 사실 의문을 던지자마자 답할 수 있었다. 답은 너무도 분명했으니까. 그런데도 바로 꺼내지 않은 것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너는 누군가를 사랑할 사람이 아니니까.”
스스로 그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조금은 비참했다. 사장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여자는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저 욕망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욕망의 대상이라고 사랑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욕망과 사랑을 혼동하는 것은 여자가 제대로 감정을 학습하지 못한 탓일 뿐. 타인이 혼동한 감정에 매달리는 자신은 비참하다. 명확한 답을 내려주면서도 한순간 그렇지 않은 경우를 생각한 자신은 비겁하다.
“다행이야.”
그 순간 사장은 깨달았기 때문에. 자신이 이전까지 왜 여자를 쫓고 있었는지 알아챘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나도 얽매이지 않고 당신도 부담될 일 없고. 성가시잖아, 애정 같은 건. 가뜩이나 당신은 위치 때문에 온갖 인간이 들러붙을 사람인데 그런 감정에까지 시달리는 건 피곤하겠지.”
여자는 턱을 괴며 나른하게 웃는다.
“게다가 당신은 보이는 것에 비해 그리 냉정하지 못하다고. 받아주지는 않을 거라 해도 마음을 탁 끊어내지는 못할 거란 말이야. 괜한 것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
“나를 과소평가하는 것 아니야?”
“그거 서운하네. 나는 내가 당신을 꽤 정확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냉정함에 대해서 그런 평가를 들은 적이 없어서.”
“그렇게까지 냉정하지 못한 것은 인간적인 영역 한정이지. 거기서 냉정하지 않은 건 흠이 아니야. 당신 같은 위치에 선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판단력과 냉정함은 별개의 영역이고.”
“제법 말을 잘하는구나.”
“아카바 레이지에게 칭찬이라. 귀한 일이네.”
“나는 그렇게 칭찬에 인색하진 않은데.”
“그래? 기억이 없네. 당신과 일한 건 몇 년 전이라 그런가. 나 예전 일은 잘 잊어버리거든.”
여자는 옛 일을 쉽게 잊는다. 과거는 여자에게 지난 시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아마 사장과의 계약기간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성공적인 경험. 나쁘지 않았던 일. 그런 타이틀로 요약할 수 있는 시간일 것이다. 지난 일을 얼마든지 가볍게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사장은 부럽다. 그런 사람이라 여자는 오래지 않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답을 내려주기 전에 사장이 끌었던 침묵을. 그리고 헤아리는 일조차 없을 것이다. 그 침묵에 깃들었을 것을. 사장의 얼굴에 드리워진 기묘한 감정의 정체를.
여자가 ‘다행이야’라고 말할 때, 사장은 속으로 ‘유감이네’라 말했는데.
“답을 내려줘서 고마워. 확실한 답을 듣고 싶었어.”
“내가 내린 답을, 믿어도 좋아? 어쨌든 너의 감정인데.”
“글쎄, 나는 정말로 몰랐고 당신은 타인을 잘 읽으니까.”
감정까지도. 여자는 덧붙였다. 그 말에 사장은 소리가 꺼진 듯 말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그랬다. 타자의 감정이며 생각까지 곧잘 읽어내는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여자가 자신에게 품었던 것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안다.
“카메라에 잡혀버린 것도 나쁘진 않았네. 그렇지 않았으면 당신에게 들키지도 않았을 거고, 여기 와서 당신과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그동안 신경 쓰이던 게 풀리지도 않았을 거고.”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야.”
여자는 이제야 해방된 얼굴이다. 그동안 그녀의 발목을 잡던 혼란으로부터, 낯선 감정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이젠 마이아미에 편히 올 수 있을 것 같아. 피할 게 사라졌으니까.”
“신경 쓰인다는 게 무엇이었는지 분명해졌군.”
여자는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들이켰다. 이번에는 사장도 잔을 들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에 속이 뜨거워졌다. 칼로 속을 긁어내는 것 같은 쓰림은 그녀의 씁쓸함과 닮아있다.
“그럼 다시 묻지. 마이아미에서 지내는 건 어떻게 생각해?”
“아직 생각도 시간도 더 필요할 것 같으니 보류.”
짐작했기에 그리 놀랍지도 않은 답이었다. 그러나 다음으로 여자가 덧붙인 말은 뜻밖에도 희망이 깃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 언젠가는 당신에게 정착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거짓말.”
“물론 이제 당신이 일을 줄 수는 없으니 무리겠지만. 바로 부정하는 건 나빴어.”
너는 또 내게 무슨 희망을 남기려고. 사장은 여자의 금빛 눈을 들여다본다.
“내가 당신에게서 도망치기 전까지 마이아미에 오곤 했던 건 당신이 있어서였으니까. 당신이 있는 것으로 마이아미는 내게 새로운 의미를 가졌으니까.”
슬프게도 여자의 눈에서 꾸며낸 감정은 비치지 않았다. 그 모든 말이 그녀의 본심에서 나오는 이야기였다. 사장은 그 간결하고 순수한 마음이 아프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내가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게 될 때는. 당신에게 정착하고 싶어질지도 몰라.”
“고마워.”
조금 먹먹해진 목소리로 사장은 말했다. 아마 여자는 자신의 목소리가 왜 먹먹해졌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아카바?”
“고마워. 꼭 와줘. 일을 하지 않게 되면.”
“당신이 괜찮다면.”
“물론이니까, 내게 정착해줘.”
“……당신 지쳤어? 무리라도 한 거야?”
“어쩌면.”
“좋아. 그때쯤이면 당신이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의 곁에 앉았다. 갑자기 뜻하지 않게 몸이 쏠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여자는 제 어깨에 사장을 기대게 하고 있었다. 상태가 나쁘다고 판단한 것일까. 자신을 보호하는 듯한 여자의 행동이 사장은 싫지 않아서 얌전히 그녀에게 몸을 맡겼다. 여자는 축 늘어진 사장의 손을 잡으며 가만히 속삭였다.
“언젠가는 돌아올게, 아카바.”
그 목소리가 너무도 달콤해서, 사장은 피곤하지도 않았지만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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