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열린 입술 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강제로 입을 벌린다. 식판에 담긴 음식을 아무렇게나 퍼서 열린 입 속에 넣어주어도, 청년은 음식을 입에 담고 있을 뿐 씹는 일도 없다. 옆에서 입을 닫아주고 입술을 눌러줘야만 스위치를 켠 인형처럼 천천히 이를 움직인다. 씹고 삼키는 것을 끝낸 듯하면, 다시 아까의 반복이었다. 입을 강제로 벌리고, 음식을 넣고, 씹도록 한다. 강제적인 식사는 비협조적인 청년 때문에 매우 느릿하게 진행되었다. 그나마 뱉어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처음에는 음식을 담고 있는 것조차 버거운지 넣는 족족 뱉어내곤 했던 청년이었지만 반복되는 식사로 제법 얌전해졌다.
혼자 두면 음식을 절대 입에 대지 않는다. 눈앞에 놓인 음식을 멀뚱히 보면서도 수저에 손을 뻗는 일이 없다. 식사를 거부하는 것인지, ‘음식을 먹는 법’을 잊은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결국 청년이 사흘간 아무것도 먹지 않아 쓰러진 후로, 매일 강제로나마 먹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제 식사 시간만 되면 식사담당이 그를 찾아 일일이 음식을 먹여준다.
“됐어. 이제 그만해.”
식판의 절반 정도를 비웠을 때, 청년에게 음식을 먹이던 두 사람 중 하나가 먼저 일어나며 말했다.
“아직 반이나 남았는데요?”
“그 이상 먹이면 토해. 위가 어떻게 된 놈인지.”
“다 해봐야 1인분도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럼 더 먹이고 토한 것까지 치우든지.”
눈앞에서 자신에 대한 대화가 펼쳐지는데도 청년은 정지한 인형처럼 꼼짝도 않고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청년은 그런 식으로 무력하게 보냈다. 많지 않은 나이에 기력을 전부 소진하기라도 한 것인지 눈도 빛을 잃은 지 오래. 이곳에 왔을 때부터 그는 언제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앙상해진 인간이었다. 지금껏 타인의 손에 억지로 생명을 이어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저것, 정말로 괜찮습니까?”
결국 따라 일어난 자가, 청년을 가리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제대로 관리하려 해봤자 받아주지도 못하는 걸 어떡하겠어. 시체나 다름없는 게 목숨이 붙어있으면 된 거지.”
신원불명의 인간을, 그것도 거의 죽어가는 것을 거두어 살려두는 것은 상부의 명령 때문이었다. 연구에 필요한 중요한 자료니 죽지 않도록 잘 살피라고 했다. 다만 어떤 연구에 필요한지, 어떤 가치가 있는지까지는 그들 같은 말단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아니, 안다고 해도 의미가 있을까. 삶의 이유도 가치도 잃은 듯 텅 비어버린 인간이,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살아남는다 해도 상부의 기대를 끝까지 충족할 수나 있을지 의문인 것을.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아. 그래봤자 돌아오는 것도 없어.”
청년은 처음부터 폐허 같은 인간이었다. 폐허에서 무엇을 건질 수 있단 말인가. 죽은 땅에서는 아무것도 피어나지 않는다. 그나마 더 궁핍해지지 않게 유지하는 게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폐기하게 될지도 몰라.”
냉정하게 말하고 돌아서는 것은, 청년을 보고 있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청년을 볼 때마다 그 무기력함에 질식할 것 같았다. 생명을 유지하려는 노력조차 타인에게 맡기고, 삶을 끝낼 시도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모습이 끔찍이도 징그럽다. 명령을 받았으니 죽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조치만 취해주곤 바로 청년에게서 달아나고 싶었다. 청년이 뿜어내는 늪 같은 음울함에 전염되지 않도록.
동행인이 바삐 자리를 뜨려고 하자, 청년을 힐끔거리며 버티던 자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음식을 먹여주던 자가 방을 나서는데도 청년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바라보던 곳을 계속 바라보되, 느릿하게 움직여 유리벽에 몸을 바짝 붙였을 뿐이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끝을 짐작할 수 없는 먼 세계. 청년을 떠나기 직전 두 사람의 눈에 새겨진 청년의 모습은 유리관 속 표본을 닮아있었다.
*
연구실의 수많은 카메라가 모두 하나를 담아내고 있었다. 중앙에 서서 기술 실연을 하는 청년의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앙상한 몸으로 청년은 부지런히도 움직이고 있었다. 청년이 팔을 움직이는 대로 기계 새가 날아오르고, 급강하하고, 그의 곁을 맴돈다. 그러나 청년의 움직임은 어딘가 뻣뻣하고 부자연스럽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실로 조종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눈이 자신의 새도, 새를 불러낸 카드도 아닌 정면에만 향하고 있다는 것도 수상쩍다. 소환한 기계 새를 어떻게 조종해야 하는지, 청년은 알지 못한다. 그저 순간순간 머리에 입력되는 대로 저절로 명령을 내릴 뿐.
모든 것을 통제하는 자는 저 위에서 청년을 내려다보고 있는 연구원이었다. 그가 청년의 몸에 연결된 기계에 명령을 입력하면, 그것이 청년의 머리에 새겨지고, 청년의 입으로 명령을 내린다. 즉, 지금 선보이는 것에 청년의 의지는 한 조각도 담겨있지 않다 ─ 청년에겐 스스로 판단해 무언가를 조종할 판단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일상생활의 간단한 일조차 대부분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청년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유년기에 습득해 자연스레 수행하는 일도 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누군가는 그런 청년을 두고 살아가는 법을 잊은 것이라 말했다. 정말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연구실에 처음 던져졌을 때의 청년은 누가 봐도 숨 쉬는 시체였다. 용케 죽음은 피했다고 하나, 이미 생사의 경계에 섰던 자가 그때의 후유증으로 완전히 망가졌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 때로는 그의 몸이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본래 죽었어야 할 인간이었다고 했다. 과거 세계는 대재앙을 맞았고, 선택받은 이들만 방주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왔다. 선택받지 못한 다수는, 세계에 재앙을 불러온 악마와 함께 무너지는 세계에 묻혀야 할 터였다. 그런데 딱 하나, 청년만이 그 운명을 거부했다. 청년은 선택받지 못한 주제에 방주에 올라탔고 그대로 새로운 세계에 도착했다. 그가 지금 이곳에 설 수 있는 것은 그 덕분이었다. 뿌리부터 망가진 상태로나마, 그는 살아남았다.
방주에 올라탄 것까지는 기적적으로 희망을 붙잡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모하게 덤벼든 자. 새로운 세계로 가는 온갖 과정을 견뎌내기엔 여러모로 부족했다. 더구나 올라타기 전부터 이미 부상을 입은 채였다고 했다. 도착할 때까지 숨이 붙어있었던 것이 용했다.
목적에 대한 집착 때문에 가능했을 거라고, 방주에서 청년을 지켜본 자가 말한 적이 있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찾고 있었다고 했다. 방주에 올라탄 것도, 혹 그곳에는 자신이 찾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며. 방주에서는 쓰러지기 전까지 광인처럼 무언가를 찾아다녔지만, 도착한 후엔 아무것도 남지 않은 텅 빈 사람이 되어있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아마, 청년은 이제 자신이 무엇을 찾아 이곳에 왔는지도 알지 못할 것이다. 참혹한 비극이다.
선택받은 자들 사이에 섞여든 불순물인 청년은, 다행히 이곳의 수장이 그 가치를 인정해준 덕분에 제거당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가치란 실험체로서의 가치였다. 이 세계에 이전 세계의 기술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붕괴하는 세계에서 무사히 가져오는 데 실패했던 탓이다. 다만 이전 세계의 생존자인 청년에게는 과거에 익힌 기술이 일부 남아있었다. 그라는 인간 자체는 망가졌다 해도 그가 익혔던 기술을 추출해낼 수는 있다 ─ 이곳에서 명령을 통해 청년이 옛 기술을 사용하게 유도하는 것은 그래서였다.
청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데이터를 수집하는 연구원들 뒤에선 한 사내가 앉아,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곳의 수장. 이전의 세계가 파멸을 맞을 때 소수의 유능한 인간만을 방주에 태워 이 세계로 데려온 자였다. 자신이 가치를 인정해 사용하는 자인데도, 청년을 지켜보는 사내의 시선은 더없이 차갑다. 사내에게 청년은 소실된 기술을 일부나마 복구할 수 있게 하는 희망인 동시에 그의 실패를 상징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에서 역사를 다시 쓰려던 사내의 계획은 반만 성공했다. 만일 처음 계획한 대로 진행되었다면, 예상치 못했던 불순물 따위 진즉에 소거했을 것이다.
세계를 위협하는 악마를 머잖아 파멸할 세계에 묻어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키워갈 인재만을 모아 방주에 태운다. 그리고 희망만을 가져온 새로운 세계에 원래 세계의 기술을 완벽하게 복원하고, 과거 세상을 위해 희생했던 딸까지 되살린다. 그것이 사내의 계획. 결국 그는 방주에 희망을 태웠고, 무사히 새로운 세계에 닿아 딸을 되살리는 데까지 성공했다. 다만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소중히 수집한 이전 세계의 유산은 대부분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되고 말았다.
그래도 사내는 원래가 기술자였다. 에러가 생기면 그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방법을 탐색해 어떻게든 없애야 하는 인간이었다. 때문에 사내는 청년을, 사라진 세계의 유일한 생존자를 통해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다. 청년의 내부에 남아있는, 잃어버린 기술을 추출하기 위하여. 화면을 통해 청년이 실행하는 것을 바라보던 중 화면이 갑자기 검게 변했다. 청년에게 명령을 내려 자료를 수집하던 연구원이 시스템을 종료한 것이다.
“왜 중단했지?”
“표본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이대로는 위험해요.”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진행해.”
사내에게 청년은 바라는 자료를 얻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목숨만 붙어있다면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도중에 망가지더라도 연구를 중단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자의가 날아간 청년은 어떤 일도 거부하지 않으므로, 달래고 설득하는 성가신 과정 없이 계속 몰아붙여도 될 것이다.
사내의 뜻대로 연구는 계속되었지만 청년의 움직임은 차차 느려졌다. 실험체가 점차 무너지고 비틀거리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사내는 그 모든 이상을 외면했다. 하루라도 빨리 저 표본에게서 기술을 추출하고 이 세계에 복원해내야 했다. 완전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 소망이었던 자로서, 빠진 것을 메우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다.
그렇게 무리한 실험이 계속되던 중, 결국 청년이 정지했다. 목표치 달성을 눈앞에 두고 일어난 일이었다. 조급해진 사내가 연구원을 다그쳐 거듭 명령을 내려도 통하지 않는다. 머리에 새겨지는 명령을 따를 수도 없을 정도로 몸이 무너진 것이리라. 이럴 때 청년은 사람이라기보다 연료 공급이 중단된 장치 같다. 사내는 언제나 청년의 그 비현실성이 혐오스럽다.
저렇게 망가지기 전부터 청년은 지독하게 비현실적이었다. 사내가 납치한 동생을 구하기 위해 차원을 넘나들며, 결국 동생을 만나고, 나중에는 다시 자취를 감춘 동생의 흔적이라도 찾겠다고 사내의 방주에 뛰어들기도 한 자였다. 그 과정에서 모든 힘을 잃고는 더 비현실적인 존재가 되었다.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인간인지, 인간의 모습을 쓴 기계인지 사내는 때로 혼란스러웠다. 그 납득할 수 없는 비현실성이 쟁그라워, 사내는 목적만 달성하면 가치가 사라진 청년을 바로 폐기할 작정이었다.
자신에 대한 결정권을 틀어쥔 사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도 하지 못할 청년은 실험이 끝났다는 것에 만족한 듯했다. 명령이 떨어지니 스스로 복잡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일은 없었지만, 순간순간 머리에 입력되는 대로 움직이는 것도 꽤 피로했다. 연구원들에게서 풀려난 청년은 연구실을 빠져나와 방으로 가는 길을 걷다가 슬그머니 방향을 바꾼다. 그의 목적지는 처음부터 다른 곳이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이곳에서 자신을 표본이 아닌 인간으로 대해주는 유일한 사람. 청년의 발걸음은 연구소 깊숙한 곳에 단단히 숨겨진 방 앞에서 멈췄다. 방의 주인이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창을 통해 바깥을 볼 수 있는 위치에서. 노크 없이 조각상처럼 서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방의 주인이 살짝 문을 열고 나와 손님을 맞는다.
“안녕, 엑시즈 씨.”
명랑한 목소리로 청년을 맞은 것은 그보다 두세 살 정도 어려 보이는 소녀. 청년은 입을 여는 대신 손을 흔들었다. 창백한 얼굴에 드물게 웃음이 스쳤다.
*
소녀에게 연구소는 거대한 새장이었다. 오랜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난 후, 그녀의 삶은 언제나 그 안에서만 이루어졌으므로. ‘위험하다’는 이유로 바깥으로 걸음을 떼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연구소는 잘 꾸며져 있었고, 그녀의 방은 특히 작은 성처럼 느껴질 정도로 부족함이 없었으나 아무리 완벽한 공간이라고 해도 그 안에만 갇혀있는 것이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소녀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삶이 자주 숨이 막혔다.
이 연구소의 책임자로, 이곳의 모든 사람을 이끄는 기술자인 아버지의 애정도 소녀를 억압하는 것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보호보다는 통제에 가까울 정도로 그녀를 무조건 감싸는 한편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에 관여했다. 아비를 따르는 연구원들이 그녀를 깨지기 쉬운 것처럼 다루는 것은 물론이었다.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인형으로 취급받는 것 같다. 그것이 소녀를 괴롭히는 생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녀가 자신을 연구소에 묶어두는 연구원들보다 자신처럼 부자유스러운 실험체에게 정을 붙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녀가 반기는 것은 똑똑하고 친절한 실험체가 아니라, 망가진 기계처럼 온갖 결함을 안고 있는 청년이었다. 청년은 소녀가 소장의 딸이라는 것도, 매우 조심스레 대해야 할 귀한 사람이란 것도 모른다. 때문에 소녀를 여느 사람처럼 대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일도 거의 없어 공연한 말을 하지도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레 함께할 수 있는 청년이, 소녀는 차라리 편했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청년이 이곳에 온 지 반 년쯤 되었을 때였다. 그때까지 청년은 숨이 붙어있기에 살아갈 뿐인 인간이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던 길에, 소녀는 실험실 근처의 벽에 기대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 청년을 발견했다. 살아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자리에 붙박인 조각상처럼 보일 정도로 현실감이 없는 존재였다. 소녀는 조심스레 다가섰고,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금빛 눈은 다가선 사람을 느릿하게 담아냈지만 그뿐. 그에게 진득하게 달라붙은 무력함을 조금이라도 떨칠 생각으로 소녀는 말을 걸었다.
[이름, 뭐야?]
청년은 눈을 끔뻑일 뿐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는 말이 정확하리라. 여기서 깨어난 후 이름이란 것을 들은 기억이 없었으므로. 자아는 훼손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 표면적으로 그를 보호하고 있는 연구실 사람들에게 그는 기껏해야 특이한 표본에 불과했다.
[여기서 뭐라고 불리는데?]
[엑시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이름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그것이 사람의 이름이라기보다 무언가를 의미하는 단어라는 것만 겨우 짐작할 뿐이다.
[엑시즈?]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일 리 없는 것이, 청년이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의 전부. 소녀는 청년에게 이름이 될 법한 것을 물어 찾으려다 그만두었다. 청년 또한 자신처럼 궁핍한 인간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파헤쳐봐야 더 나올 것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을뿐더러, 본인도 모를 영역을 자꾸만 파헤치는 것도 좋지 않을 것이다.
[좋아, 엑시즈 씨. 일어나.]
그래서 소녀는 그것으로 타협하기로 했다. 청년을 부르는 소녀의 호칭이 괴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날 소녀는 청년을 잡아끌고 연구소 구석구석을 다녔다. 청년의 텅 빈 얼굴에 표정이 새겨질 때까지, 청년이 타인을 제대로 응시할 때까지. 소녀의 개입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아서, 다음날부터 소녀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로 향했다. 청년을 만났던 시간에, 그와 마주쳤던 장소로.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지 않으면 깨져버릴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번거롭더라도 찾아가 말이라도 걸고 관심을 돌려 세상에 묶어두고 싶었다. 그날 처음 본 사람인데, 자신과는 관계없는 사람인데 왜 그렇게 마음이 쓰였을까. 왜 그냥 둘 수 없었을까. 납득할 수 없는 마음의 흐름을, 소녀는 굳이 헤집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저 걱정되어 찾았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혼잣말처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면 청년은 조용히 말을 들어주었고 간간이 웃었다. 그런 날이 이어졌고, 두 사람은 제법 친근해졌다. 이제 청년은 소녀에게 연민의 대상도, 구제의 대상도 아니었다. 편하게 함께할 수 있는 존재라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얼마 전부터 청년이 소녀의 방에까지 오게 된 것도, 두 사람이 그만큼 편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소녀의 방에 들어선 청년은 책상에 놓인 약병을 집어 들었다. 기억에 없는 것이었다. 아직 몸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는 소녀는 여러 약을 먹었지만, 청년은 그 모든 것을 분간할 줄 알았다. 지금 발견한 것은 분명히, 평소의 것이 아닌 추가된 것이다. 청년은 질문을 던지는 대신 약병을 소녀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아, 그건 수면제야. 필요도 없는데 안겨주더라고.”
왜? 여전히 의문이 걷히지 않은 청년의 눈이 묻고 있었다.
“계속, 못 잤거든. 정확히는 자는 걸 거부했던 거야. 나는 잠드는 걸 싫어해.”
청년에게서 약병을 가져온 소녀는 그의 눈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병을 버렸다. 청년의 시선은 쓰레기 속으로 떨어지는 약병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죽음 같거든. 잠이 들면, 나는 꿈이라는 지옥에 떨어져 헤매는 거야.”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소녀의 기억은 거의 날아가 있었다. 몇몇 장면만 단편적으로 남아있을 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쉽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기억은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기억 속에 꾸준히 등장하는 것이 아버지였으므로, 아버지가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가 가장 믿을만한 정보일 터였다. 다행히 아버지는 오랫동안 잠들었다 깨어난 딸이 혼란스러워할까 걱정한 것인지, 그가 기억하는 이야기를 부지런히 딸에게 전해주었다. 소녀는 굶주린 사람처럼 아버지가 들려주는 옛 자신을 주워 담았고, 머릿속에 차곡차곡 채우곤 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소녀는 혼란에 빠졌다. 아버지가 말하는 것이 온전히 사실인지, 입맛대로 왜곡된 것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기억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는 사람이니, 적당히 속인다 해도 거짓이라 판단할 수 없을 터. 소녀는 자신에게 기억의 공백이 있다는 게 오싹해졌다.
자신이 듣는 것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피어난 건, 꿈 때문이었다. 꿈속에서, 소녀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과거의 장면을 만날 수 있었다. 기억에는 없지만 실제 겪은 것처럼 생생한. 그동안 아버지가 주입했던 기억과는 완전히 다르다. 어느 쪽이 진실인가. 소녀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기에 괴롭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므로, 무의식의 호수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꿈을 통해 펼쳐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꿈속의 자신은 악에 맞서 싸우고 있었고, 꿈속의 아버지는 무언가 용서받을 수 없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상세하게 파헤칠 순 없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과 아버지가 꾀한 것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서로 상반된 것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아버지는 과거의 연구를 포기한 것 같지 않다. 이곳에서 청년을 포함한 실험체로 진행하는 연구는 수상쩍었고, 그 아래에 억울한 희생이 깔려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버리기 힘들었다. 만일 꿈이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자신의 의심대로 아버지가 무언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면.
소녀는 얌전히 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수가 없었다. 빠져나가서, 막을 방법을 찾아보아야만 했다. 다만 그 전에 하나 챙겨야 할 것이 있었다.
“엑시즈 씨. 이건 비밀인데.”
소녀는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당신, 폐기될 거야.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
아버지는 실험체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 완전한 세계를 가꿀 인재 외엔 전부 불필요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비는 청년에 대해선 유독 냉랭해서, 실험이 끝나기도 전에 폐기에 대해 연구원들에게 이야기해두었다. 청년에게서 얻어낸 데이터가 늘어갈수록, 실험이 순조롭게 진행될수록 청년은 위험해진다 ─ 소녀는 청년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종말을 이르는 무서운 말에도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그려지지 않았다.
“폐기라는 게 뭔지 알아?”
“돌아오지 못하는 것.”
참으로 오랜만에, 청년은 입을 열었다. 연구소에 있으면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자신보다 빨리 가치가 떨어진 표본들이 폐기라는 이름으로 사라지는 것을. 순식간에 소거되어 없었던 사람이 되는 것을. 그 섬뜩한 처분은 얼마나 손쉽게 이루어졌던가. 얼마나 가벼이 마무리되었던가. 언젠가는 자신도 처분될 것이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청년의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자신도 사라진 자들처럼, 살려둘 가치가 떨어질 날이 온다고. 그때가 되면 소리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알고 있구나.”
짐작하고 있었으면서 저렇게 담담할 수 있단 말인가. 운명처럼 체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삶의 의지도 남아있지 않은 것인지 소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에게 그 냉혹한 처분은 조금도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떠보려 던진 말인데, 청년은 답을 하는 대신 입을 닫아버린다. 그것이 답답해 소녀는 그의 손목을 홱 잡아챘다. 성인 남성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가는 손목은, 그녀가 끄는 대로 힘없이 따라왔다. 거의 서로 끌어안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거리를 좁힌 소녀가 은근하게 속삭였다.
“나는 싫어. 그러니까 엑시즈 씨. 같이 가자.”
“어떻게.”
어디로, 라고는 묻지 않는다. 굳이 듣지 않아도, 소녀가 가려고 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했으므로. 연구소 밖. 결코 보호받을 수 없지만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곳. 그리고 청년이 살아남기 위해 존재 가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 두 사람 모두 깨어난 후 발을 내디딘 적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건, 도와주겠다고 말하면 알려줄게.”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험체로 살아가게 된 후 그에게 미래란 어찌되어도 좋을 것이었지만, 소녀와 함께라면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더 나은 것을 찾아 싸울 수 있었다. 아니, 자신은 몰라도 소녀는 바라던 미래를 잡았으면 했다.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소녀에게만은 약해지는 그였다.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돕고, 망가진 자신에게라도 바라는 게 있다면 들어주고 싶은 사람이 소녀였다. 이번에도 그래서, 청년은 어떻게 될지 모를 일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함께하게 된 것에 만족했는지, 소녀는 장난스럽게 덧붙인다.
“우린, 공범이 되는 거야.”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다. 오랜 준비 끝에 실행한 계획이었으나, 아군이라곤 서로밖에 없는 두 사람은 중간 단계에서 쉽게 제압당했다. 보고를 받고 나타난 연구소장은 소녀와 함께 포위된 청년을 노려보더니 딸의 손을 잡아 억지로 데려갔다. 서로 꼭 잡고 있던 두 사람의 손은 허망하게 풀렸다. 청년은 소녀에게로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사방이 적으로 막혀있었다. 그 전까지 소녀를 다치게 할까 접근하지 못했던 연구원들이 일시에 그에게 달려든 것이다. 안타깝게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청년의 몸으로는 자신을 둘러싼 이들 중 하나도 제대로 떨쳐낼 수 없었다.
도와줘, 도와줘. 이대로는 안 돼. 점점 멀어지는 소녀가, 그 보랏빛 눈이 청년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거기서 청년의 머리를 스친 것은 뿌리를 찾을 수 없는 기시감이었다. 언젠가, 저런 눈을 본 적이 있다. 덮쳐오는 절망에 먹히지 않으려 버둥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던 사람.
그건, 누구였지?
“루, 리?”
자신도 모르게 흘린 이름은, 분명 처음인데도 낯설지 않았다. 언젠가 이 이름을 본 적이 있었던가? 알던 사람이었던가?
거기서 청년의 생각은 멎었다. 다음 순간 붙들린 채 약물을 주사당했고, 그대로 의식이 흐려진 탓이다. 의식이 끊어지기 전, 끌려가는 소녀의 모습에 누구인지 모를 사람의 형체가 겹쳐지는 듯했다.
*
계획이 실패한 후 청년은 고분고분해졌다. 지금까지 버텨온 생존자로서의 감각이 발동한 것일까, 누구도 압박한 적 없으나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덕분에 탈출 계획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잠깐 드리워졌던 감시의 그림자도 이내 걷혔다. 기본적으로 연구소의 사람들은 청년에게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인간이니 무기력하게 명령만 따르다 폐기될 거라 쉽게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그 안일한 생각이 청년이 일을 꾀하고 실행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연구소의 사람들이 간과한 것은, 청년이 목적 하나만으로 방주에 올라타 살아남을 정도로 무서운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살아남는 과정에서 처참하게 망가졌다 해도, 그에겐 진득한 의지와 어떻게든 길을 찾아낼 직감이 남아있었다. 얌전한 실험체로 거듭되는 실험에 불려나가면서, 청년은 누구도 모르게 계획을 짜고 있었다. 소녀를 해방시킬 계획을. 그리고 자신의 쟁그라운 삶에서 도망칠 계획을.
돌아온 이후, 청년은 소녀를 만나지 못했다. 완전히 방에 묶여, 허락받은 사람만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치료’의 강도가 높아졌다느니, 감시가 훨씬 심해졌다느니 하는 음울한 소식을, 연구원의 대화에서 드문드문 읽어낼 수 있었다. 정신교육을 단단히 해서 아마 빠져나가는 건 생각도 못할걸요. 따위의 말이 청년을 괴롭힐 때면, 그는 귓속에 파고드는 끔찍한 말에 먹히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녀와 함께 도망칠 일만 생각했다.
청년이 움직인 것은 폐기될 날이 가까워졌다는 걸 눈치챈 날이었다. 그 날 청년은 어떤 날보다도 실험에 성실하게 참여했다. 연구소에서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는 것처럼. 이제 곧 끝난다. 이곳에서 실험에 동원되는 것도, 타인에게 운명이 결정되는 삶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도망칠 테니까. 바깥의 세상을 열망했던 소녀와 함께. 물론 청년의 계획에는 필요한 것이 있었다. 연구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물. 연구원들이 자신을 위해 준비해둔 것.
약물을 훔쳐내는 것은 쉬웠다. 이곳의 사람들은 청년이 자의로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곤, 사건을 만들 정도의 판단력이 남아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않았기 때문에. 카메라를 설치하지 않은 방에서 그의 행동을 감시할 수단은 없다. 청년은 혼자가 되자마자 기억해둔 위치로 향해 제법 대담하게 약물을 꺼냈다. 다음으로는 서랍을 뒤져 주사기를 찾아냈다. 주사기를 꺼내다 다른 물건을 쏟은 탓에 방에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누구도 달려오지 않았다. 청년은 모두의 방치 속에서 모든 준비를 마쳤다. 남은 것은 가여운 소녀에게 자신이 찾아낸 것을 선물하는 것뿐이었다.
청년은 복도를 달려 소녀에게로 향했다. 약해진 몸으로 달린 바람에 금세 숨이 턱 막혔지만 멈추지 않고 달렸다. 달리고, 달려 소녀의 방 앞. 청년은 훔쳐낸 패스키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이곳부터는 감시의 시선이 닿을 것이다. 빨리 모든 것을 마쳐야 한다. 청년은 남은 힘을 끌어모아 소녀가 누운 침대로 향했다. 소녀는 텅 빈 눈으로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다가, 청년을 발견하자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엑시즈 씨. 청년도 웃으며 답했다. 안녕, 레이. 평화로운 인사와는 대조적으로, 두 사람의 귓가에 침입을 알리는 경고음이 무섭게 울렸다. 이제 곧 모두가 달려올 것이다.
청년은 소녀의 침대 옆에 무릎을 꿇더니, 가지고 온 주사기를 꺼냈다. 주삿바늘이 소녀의 살갗을 파고든다.
“잘 자, 레이. 이제 푹 잘 수 있을 거야.”
이 세상을 견딜 수 없는 소녀에게, 깨지 않을 잠을. 청년은 잠에 빠져드는 소녀에게 상냥한 말을 남기고는 남은 약물을 자신의 몸에 주사했다. 영원히 방해받지 않을 세계로, 함께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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