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의 풍경은 언제나 불친절하다. 지나치게 생생하고, 빠져나가고 싶을 때도 발목을 휘감으며, 어떤 상상을 하든 언제나 같은 모습이 펼쳐질 뿐이다. 청년은 그것이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거대한 감옥 같다고 생각했다. 꿈에서 깨기 전까지는 결코 풀려날 수 없는, 지독한 감옥. 폭음이 귀를 찢는 순간부터 청년은 자신이 또 꿈의 감옥에 떨어졌음을 알아차렸다. 눈앞에서 건물이 붕괴했다. 대피하는 사람들의 비명은 이내 폭음에 묻히고, 그 자리에는 사람이었던 것들이 종잇조각이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괴물이 거리를 메우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덮치고 있었다. 전쟁이었다.
꿈인 것을 알면서도 청년은 몸에 익은 대로 달렸다. 도망치며 얼핏 눈에 들어온 하늘은 신화 속 저주받은 도시처럼 잿빛이었다. 숨이 차도록 달려도 괴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건물은 끝없이 무너지고, 앞뒤로 달리던 사람들은 그만 빼놓고 전부 종잇조각으로 흩어졌다. 하늘은 점점 어둑해지고 비명도 서서히 작아진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달리는 사람은 그 하나뿐이다. 혼자가 되었음을 알았을 때 청년은 멈추었다. 침략자가 이끄는 괴물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잔해만이 처참한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 괴물이 그의 머리를 내리쳤을 때, 그는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 그가 놓였던 곳은 악랄할 정도로 생생하게 빚어낸 전장이었지만, 청년은 그것이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이 세계에 폭음이 울릴 일은 없기 때문에. 이곳에 전쟁은 없다. 비명을 지르며 침략자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도 없다. 침대에서 일어난 청년은 창밖으로 비치는 도시를 내려다본다. 새벽의 도시는 조용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얌전히 잠들어 있으며, 위험의 신호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곳에서 전쟁을 겪었던 사람이라곤 그를 포함해 단 두 명뿐이다. 그마저도 본래는 이곳 사람이 아니다. 먼 세상의 전장으로부터 희망을 찾아 이곳으로 온 자들이었으니. 말이야 희망을 찾아서였지만, 두고 온 사람들에게는 도망친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비난한다 해도 청년은 할 말이 없었다. 청년과, 그를 따라온 동지. 그 두 사람은 전장을 벗어난 대가로 이 낯선 세상에서 위협받지 않고 살게 되었기에.
그렇게, 몸은 분명히 전장에서 벗어났다. 이제 침략자에게 쫓길 것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잠들기 전, 내일이 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잠길 일도 없다. 신변보호는 확실히 받고 있으니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무의식은 여전히 전장에 있는 듯 군다. 이곳에 와서도 꿈의 감옥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꿈속에서 그는 다시 전장이 된 고향에 떨어져,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세상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이것은 형벌일까. 청년은 테이블에 둔 자신의 무기를 챙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혹은 꾸짖는 것일까. 이미 쓰러진 사람들이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이곳에서 편히 지내는 그를 자꾸 깨우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쫓기는 것일까. 알 수 없다. 어차피 지긋지긋한 꿈에서 벗어나는 것을 진즉에 포기한 청년이었다. 이유를 파헤친들 무엇하겠는가. 잠시 떠나온 고향의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그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을. 오히려 고통스러운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청년은 무기를 챙긴 채 방을 나섰다. 새벽이라 누구도 다니지 않는 복도를 걸어, 역시 누구도 없는 방으로 향한다. 본래 지니고 다니던 패스키를 꺼내 쓰자, 단단히 잠긴 문이 열렸다.
전투훈련을 하도록 만들어진 곳이었다. 원하는 필드를 설정하고 대전 상대를 선택해, 모의전을 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본래라면 이곳의 사람들을 불러와 대전 상대로 삼았겠지만, 지금은 늦은 새벽. 청년은 시스템을 조작해 자신의 등급에 맞는 AI를 선택했다. 어차피 상대는 누구여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청년은 필드 설정 단계로 넘어가, 페이지를 빠르게 넘겨 원하는 것을 찾았다. 마침내 청년의 손가락이 멈춘 곳은 화려한 도시의 풍경.
미래도시 하트랜드. 청년이 고른 필드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청년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에게는 특별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기에. 청년은 한동안 멍하니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겨우 필드 설정을 마쳤다. 버튼을 누르자 그가 선택한 필드, 미래도시 하트랜드가 빠르게 공간을 채웠다. 어느새 청년은 미래도시라는 이름에 걸맞은 아름다운 도시에 서 있었다.
하트랜드. 이곳 사람들에게는 전투용 필드의 이름일 뿐이지만, 청년은 그 이름을 자주 입에서 굴리곤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가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곳의 이름이기에. 두고 온 고향의 이름이었다. 이제는 처참히 무너진 곳의 이름이었다. 그가 사랑한 과거를 대표하는 이름이 바로 그것이었다.
청년은 전쟁의 꿈을 꾸면 꼭 이곳으로 와 미래도시 하트랜드를 펼쳤다. 이 세상에서 그 아름다운 곳의 모습을 재현해낼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기에 그랬다. 필드 하트랜드는 실제의 하트랜드를 본떠 만든 가상의 필드에 불과하지만 오리지널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으니 옛 모습을 찾으려면 그에 기댈 수밖에. 다만 청년이 그토록 ‘옛 모습’을 다시 보려고 안달인 것은 고향이 그리워서는 아니었다. 그보다,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전쟁의 꿈을 꿀 때마다 청년을 괴롭게 하는 것은 전장의 기억 그 자체가 아니었다. 꿈을 꾸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그 이전의 모습이 희미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나마 고향을 떠나기 전에는 동료들과 이야기하며 옛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이곳에 홀로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하트랜드의 옛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동지와는 떨어져 홀로 이곳에 들어오면서 기억이 빠르게 퇴색되기 시작했다. 이제 청년은 다른 사람에게 옛 모습을 설명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기억이 희미해진다는 것은 청년에게 공포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고향과의 연결고리는 바깥에서 제 일로 바쁜 동지를 제외하면, 그의 머리에 남은 고향의 기억뿐이다. 만일 그것이 쇠한다면, 그는 어떻게 고향을 되새겨야 하는가. 고향을 그릴 수가 없다면 그가 사랑한 과거 또한 빠르게 붕괴할 것이다. 언젠가 그는 자신이 무엇을 사랑했는지조차 제대로 말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청년은 기억이 희미해진 만큼, 고향을 본뜬 필드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곳으로 향해 고향의 환상을 펼칠 때의 그는 절박했다. 이것으로 조금이라도,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고 싶다. 조금 더 선명하게 남겨두고 싶다. 과거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그의 상대가 되어주는 이들이 알 리 없는 심경이었다. 무기를 쥐어 대전을 준비하며, 청년은 금빛 눈 가득, 사랑하는 과거의 풍경을 담았다.
*
깨어났을 때 사내의 몸을 받쳐주고 있었던 곳은 침대가 아닌 책상이었다. 업무가 끝나지 않아 집무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깜빡 졸아버린 모양이었다. 자기관리가 철저해 취침시간 이외엔 짧게라도 잠드는 일 없는 그인데, 최근 들어 꽤 피곤했던 것 같다. 시계를 보니 벌써 깊은 새벽이었다. 어차피 목표한 것은 거의 끝낸 후였고, 구태여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사내는 책상을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후의 일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하려면 지금이라도 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돌아가는 길은 당연하게도 어둑했다. 이런 시간에까지 깨어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언제나 활기차게 돌아가는 이 회사도 이 시간에는 모든 것이 멎은 채 어둠에 잠겨있었다. 어쩌다 제일 늦게 끝나버렸군. 회사를 이끌어가는 사장인 사내는 일을 마치고 돌아가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그 역시 자신의 위치로 향하던 때였다. 어둑한 복도에 갑자기 환하게 불이 켜진 곳이 보였다. 홀로 한낮의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사내는 위치를 살피고 이내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렸다. 훈련실이었다.
회사에서 키우는 우수한 자들의 훈련을 위해 만든 곳이었다. 모의전을 통해 전투훈련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곳. 허락받은 자들은 원하는 때 자유롭게 훈련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시간은 분명히 정규 이용시간은 아니다. 이용시간을 한참 넘어서까지 이곳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짐작 가는 것은 하나뿐.
사내는 전사를 하나 데리고 있었다. 먼 곳에서 찾아와 그의 회사로 직접 들어온 청년이었다. 사내가 이전까지 회사 산하의 학원을 통해 키우고 있던 학생들이며 회사의 간부들도 훈련을 받은 전사라고 할 수는 있으나 청년은 그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세상이 무너지고 사람이 쓰러지는 실제의 전장에서 싸워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그런 자를 영입한 것은 사내가 멀지 않은 미래에 전사들을 동원해 적과 맞설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청년이 적대하는 자는 사내의 적과 같았고, 같은 적을 둔 사람으로서 두 사람은 일시적으로 함께하기로 했다.
그렇게 회사에 들어온 후 청년은 걸핏하면 훈련실을 사용했다. 본래 전장을 누비던 전사였으니 평화로운 세계인 이곳에서도 모의전으로 감각을 유지하려는 것이라 해도 놀라울 것은 없다. 애초에 그가 이곳에 왔다고 전쟁이 종료된 것도 아니다. 일시적으로 전장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에서의 전투를 도모할 뿐. 머잖아 그를 싸움에 내보내게 될 것을 생각하면 그가 모의전의 형태로라도 긴장상태로 있는 것이, 지휘관이 될 사내에게도 좋았다. 그래서 사내는 청년에게 키까지 내어주며 언제든 그곳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정규 사용 시간까지는 사람들을 동원해 그가 대전 상대로 삼을 수 있도록 했다.
아무리 잘 훈련된 전사라 해도, 실전 경험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격차는 어쩔 수 없었다. 사내는 자신의 우수한 수하들이 예외 없이 청년에게 패하는 것을 보고받아야 했다. 자신의 사람이 맥을 못 추는 것이야 아쉬웠지만, 어차피 그 자들을 가볍게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패를 자신이 쥔 셈이지 않은가. 사내는 청년이 실력을 입증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청년의 전투는 화면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으나, 사내는 좀 더 확실하게 파악하고 싶어 청년과의 대전을 마친 자들을 불러 이것저것 확인할 때가 많았다. 자신을 쓰러트린 자이긴 했지만 뛰어난 전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으므로 대개는 그의 실력에 대한 찬사가 흘러나왔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하나둘, 그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꼭 전투의 필드에 대해서는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필드를 자신이 먼저 설정해두거나, 혹 대전 상대가 설정하면 얼굴을 찌푸리며 제가 원하는 대로 바꾼다고 했다. 그렇게 고집을 부려 선택한 필드는 언제나 같았다.
미래도시 하트랜드.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청년과 대전을 마친 학생이, 사내를 만나 조심스레 말한 적이 있었다.
[MCS에서 미래도시 하트랜드를 필드로 싸웠을 때도 상당히 예민한 것 같았죠.]
[자극제니까.]
[자극제라고요?]
[쿠로사키 슌을 자극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미래도시 하트랜드’]
[그것이 그와 무슨 관련이라도?]
이곳에서 청년의 출신에 대해 대강이라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청년을 데려온 사내를 비롯해, 사내와 이후의 싸움에 대해 논의하는 간부들 정도. 평범한 학생에게까지 그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도 없거니와, 설명한다 한들 성가신 일만 만들 것이다. 때문에 사내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가 이곳에 서게 만든 것이지.]
[왜 그런 것까지 사용해서.]
[최상의 상태로 만들 수단이 있는데 방치할 이유는 없지 않나. 그는 적절한 자극으로, 군에게 보여준 모습보다 훨씬 뛰어난 전사가 될 수 있어.]
잊지 않으려는 것이리라. 사내는 청년이 자신의 고향을 본뜬 필드에 집착하는 이유를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과거, 평화로웠던 고향의 모습을 보면서 싸워야만 하는 이유를 되새기려는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이 청년의 싸움에 그 필드를 준비한 것도 그걸 바라고서였다. 언제까지나 전의를 태우며 싸울 준비를 하길 바랐다.
그렇게 처음 고향의 환상을 보여준 이후 청년이 쭉 미래도시 하트랜드를 고집해온 것도 자신과 같은 생각에서였을 거라 사내는 믿고 있었다. 물은 적은 없으나, 사내가 판단하는 청년이라면 충분히 그런 인간이었다. 전장에서 살아남아 여기까지 온 것도 그가 투지를 태우며 굳건히 버텨왔기에 가능했던 일. 때문에 그는 전장이 아닌 이곳에서도 자신을 채찍질하며, 언제든 전장에 나설 수 있을 전사로 훈련해온 것이다.
그렇다 해도 새벽까지 이곳에서 훈련하는 것은 다소 과하다. 계속 자극을 준다는 것이 조금 지나쳤던 것인가. 청년이라는 전사를 머잖아 지휘하게 될 사내에게는 그를 최상의 상태로 관리할 의무도 있었다. 혹 무리하고 있다면 적당히 달래 쉬게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불 켜진 훈련실로 향하며 사내는 청년의 상태에 따라 어떻게 행동할지, 머릿속으로 여러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소리가 분명히 났을 텐데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인지 청년은 돌아보지 않았다. 사내는 우선 청년의 상태를 지켜보기 위해 필드 바깥에 마련된 통제실에 들어섰다. 유리벽 너머로 내려다보며 만일 상태가 좋지 않다 싶으면 시스템을 종료해 전투를 중단시킬 작정이었다. 다행히도, 청년은 그리 힘든 것 같지 않았다. 그가 자랑하는 무기인 기계 새는 여느 때처럼 매섭게 달려들어 빠르게 상대의 생명력을 깎았다.
이 시간에 상대가 되어줄 것이라면 AI밖에는 없다. 아무리 방대한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다 해도 잘 훈련된 전사만큼 치밀할 수는 없을 터.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상황에서든 길을 찾아 상대를 제압하는 청년에게라면 더욱 불리할 수밖에. 아마 청년에겐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상대일 것이다. 지루한 싸움에 청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어차피 승기를 잡은 것은 청년이었다. 이대로 마지막 공격만 하면 청년의 압승이었다.
차가운 기계 장치로 무장한 새가 도시를 날며 폭격을 퍼부었다. 적이 부리는 괴물을 부수기 위해서였을 테지만, 먼저 무너진 것은 도시였다. 굉음과 함께 건물이 붕괴하고 불길이 땅을 뒤덮었다. 그 처참한 풍경은 이내 꿈속의 풍경에 겹쳐진다. 모든 것이 무너지던 날, 평화로운 도시가 전장으로 뒤바뀐 날. 그때 갑자기 청년의 귀에 사람들의 비명이 울렸다. 들릴 리 없는 것인데, 이곳에는 누구도 없는데. 떨쳐내려고 해도 비명은 자꾸만 거세질 뿐이다. 귓가에 울리던 비명이 결국 머리까지 먹먹하게 울렸을 때.
순간 청년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가는 몸이 휘청거렸다. 텅 빈 눈은 허공으로 향했다.
고장이라도 난 것 같았다.
사내는 급히 통제실에서 빠져나와 무너지는 청년을 붙잡았다. 그 순간조차 청년은 무기를 놓지 않으려 오른손으로 무기를, 기계 새를 봉인한 카드를 꽉 쥐고 있었다.
“쿠로사키.”
청년의 몸을 자신에게 기대게 하며 사내는 천천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몇 번 더 불렀지만 청년의 입술은 꾹 닫혀 있었다. 확실하게 안정시키기 위해 왼팔에 찬 전투용 디스크를 풀어주려 하자 반사적으로 사내를 밀쳐냈을 뿐이다. 그러나 쇼크에서 헤어나지 못한 탓인지 그 힘은 턱없이 약했다. 사내는 쉽게 청년을 제지하고 그의 팔에서 디스크를 풀었다.
디스크의 신호가 끊어지자 전사가 이탈했다고 판단한 시스템은 자동으로 종료되었다. 그것으로 전투도 중단되었다. 두 사람의 눈앞에서 폐허가 된 하트랜드가 걷히고 말끔한 훈련실이 다시 펼쳐졌다.
“괜찮나? 방으로 옮겨줄 테니 쉬는 게 좋겠군.”
“손 떼.”
냉랭한 말에 사내는 그의 몸을 감싼 손을 풀었다.
“이 시간에 왜 여기까지 온 거냐.”
“이 시간에 그런 몸으로 무리하게 훈련을 한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몸에 이상은 없었다.”
“그러면 어쩌다 쇼크를 일으킨 거지? 애초에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왔고?”
“하트랜드가…….”
침묵 끝에 흘러나온 청년의 목소리는 어딘가 삐걱거렸다. 망가진 기계 같다고 사내는 생각했다.
“떠오르지 않아서.”
“무슨 말을.”
“떠오르지 않는다고, 내 고향이. 떠나온 지 오래인 것도 아닌데 자꾸 희미해진다고.”
“그래서 ‘미래도시 하트랜드’라도 볼 생각으로 여기에 왔다고?”
청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백한 얼굴에 처연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제야 사내는 자신이 그를 멋대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히, 투지를 태우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적에 대한 분노를 극단적으로 끌어내 더욱 무장하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집착으로 그 불완전한 카피를 찾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사내에게 그는 처음부터 전투에 특화된 전사일 뿐이었으니까.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집착이야 누구든 품을 수 있는 것이다. 강인한 전사라 해도 특별히 다를 것은 없다. 청년처럼,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면 더욱 더 기억 속의 모습에 집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억이 쇠퇴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 자신 대신 옛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낸 것을 틀어쥐려 할 정도로.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청년은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없어서, 회복할 수가 없지. 이제 아카데미아가 덮치기 전의 하트랜드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하기 어려워.”
“기억은 쇠퇴하는 게 당연해.”
“이건 쇠퇴해선 안 돼. 평화로웠던 때를 잊으면 전쟁이 끝나고 돌아갈 곳이 없다고.”
이곳은 미래를 위해 잠깐 머무르는 곳일 뿐이다. 청년은 어차피 싸움을 마치면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었다. 그리고 폐허가 된 그곳에, 과거처럼 평화로운 하트랜드를 다시 쌓아야 했다. 전쟁으로 기록은 훼손되고, 과거를 기억하던 사람들은 대개 쓰러졌다. 이제 화려한 미래도시를 기억하는 자는 이 세상에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그마저도 청년처럼 전쟁에 지쳐 기억이 빠르게 희미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생존자의 기억 속 하트랜드마저 흩어진다면, 그들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어떤 하트랜드를 쌓아야 하는가.
“그래서 하트랜드의, 아니, 하트랜드의 환상 위에 서면 아카데미아에 대한 증오가 끓고, 전장에 있을 때처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것만 같지. 그렇게 맹렬하게 몰아세우다 보면 어느새 내가 폭격하고 있는 거야. 평화로운 하트랜드를.”
그토록 집착하는, 평화로웠던 고향을 전장으로 바꾸는 것은 청년 자신이었다. 그 아이러니함이 청년은 때로 괴로웠다.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을 섬멸하는 전투방식을 익힌 자신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인데도.
“그러면 기껏 되살린 기억이 다시 폐허에 묻히고, 나는 도망치듯 평화로운 하트랜드를 찾고, 다시 내가 부수고…….”
고통스러운 반복이었다. 이번에는 거기에 꿈속의 실제 전장까지 겹치면서 한순간 견딜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무너지면서, 청년은 꿈속의 전장에 던져져 그대로 괴물에 삼켜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하트랜드를 몇 번이나 폐허로 바꾼 건지.”
청년은 쓸쓸하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잠깐 비틀거렸지만 그새 안정되었는지 조금 전과 같은 위험한 신호는 없다. 그동안 청년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던 사내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지금은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다 정말로 잊게 되면?”
“잊게 되더라도, 여기에 보험이 있어. 진짜 하트랜드를 기억하는 너도 불안해지면 찾을 정도로 선명한 환상이.”
“그것만으로는.”
“어차피 누구도 완전히 기억하지 못해. 전쟁이 끝날 때쯤이면 아무리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에게라도 기억의 왜곡이 있을 거다.”
“절박하지 않은 자가 절박한 사람에게 무슨 말을.”
“제삼자로서 너의 압박을 덜어줄 수는 있지.”
무기를 정리하던 청년의 손이 멈칫했다.
“성가신 놈.”
말이야 거칠었지만 목소리는 그만큼 거칠지 못했다.
“너는 언제나 생각이 너무 많아. 그냥 나는 무기라고 생각하라고. 그 편이 서로에게 편할 거다.”
“무기를 사용할 사람으로서, 날이 잘 들게 하려고 한다면.”
청년은 더 받아치지 않고 차곡차곡 정리한 카드를, 앞으로의 싸움에서 기계 새로 화해 싸워줄 자신의 무기만 챙겼다. 마땅히 답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사내의 뜻을 침묵으로 수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청년은 사내가 풀어낸 후 가지고 있던 자신의 디스크를 거칠게 낚아채고는 사내의 가슴팍을 밀고 훈련실의 문으로 향했다.
“데려가주지.”
“혼자서 갈 수 있어.”
“무리하지 마라.”
“분명히 말해두지만, 네가 걱정하는 것만큼 위태롭진 않다.”
디스크를 품에 넣으며 청년은 힘주어 말했다.
“그랬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테니까.”
청년이 옳았다. 그가 전장에서 살아남아 여기까지 온 것은 그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낸 강인한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고통으로 때때로 휘청거린다 해도 그라면 결코 쓰러지진 않을 것이다. 사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고, 청년은 방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까지 그리 친절하지 않은 말을 툭 던졌다.
“남을 걱정하기 전에 바쁘신 분은 어서 잠이나 자라고. 쓰러져도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아.”
청년은 몇 번 불안하게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더는 무너지지 않고 복도를 걸어 사라져갔다. 청년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사내 또한 움직이기로 했다. 청년의 말대로 그 역시 쉬어야 할 때였다. 다만 그 전에 할 일이 하나 남아있었다. 청년이 들이닥쳐 어지러워진 곳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리하는 것은 사내의 몫. 불이 꺼지고 시스템도 잠든 훈련실을 이런 늦은 시간에 찾은 이가 있으리라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사내는 훈련실을 떠나며, 다음번에는 그들 모두 최상의 컨디션으로, 그저 전사와 지휘관으로 만날 수 있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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