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C-topia에서 발행했던 레이슌레이 회지 <어떤 종교> 웹공개

* 1/2/3+에필로그로 나누어 업로드합니다.

 

 

1

 

  여자는 스튜를 한 숟갈 입에 넣었다. 혀에 닿자마자 느껴지는 끔찍한 짠맛에 그녀는 바로 스푼을 내려놓지 않으려 조심해야 했다. 기대 섞인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청년에게 감상을 흘리는 대신 여자는 입에 든 것을 무심하게 삼켰다. 맞은편에 앉은 청년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채게 해선 안 된다. 요리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도 했거니와, 미치도록 짜다는 것을 말해봐야 청년은 부정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매일 요리를 해오는 청년이지만 그의 미각은 망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간을 맞추던 것이 점점 짜거나 싱거워진다. 가끔은 쓴맛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요리 실력은 평범 이상으로, 미각만 괜찮았다면 여자는 식사에 매번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청년의 미각은 무뎌지기만 했고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 감각의 이상이 급격하게 몸이 나빠지는 데서 비롯했다는 것.

  여자는 청년이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간간이 피를 토한다는 사실을 안다. 깨어있는 것만으로도 심신의 소모가 커 하루 중 몇 시간을 거의 쓰러져 있다는 것도. 미각 이외의 다른 감각도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것도. 그의 삶은 얼마나 남았을까. 쓰러진 청년을 볼 때면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었다. 특별한 병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죽음의 그림자는 나날이 짙어진다. 높은 확률로, 그는 수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도 이곳에 있기에 청년은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다른 곳에 숨어들었다면 그는 진즉 땅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법칙이 통하지 않아 모든 것이 본래의 상태 그대로 유지되는 이곳에선 죽음조차 제대로 흐르지 못한다. 그러나 청년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바깥에 나갔다 돌아오면 죽음이 가속화되는 것을 여자는 느낀다. 멀쩡하게 시간이 흐르는 곳에서, 청년은 잔뜩 망가질 뿐이다.

  세상의 뜻으로.

  세상은 청년을 사멸시키려 한다. 그는 탄생부터 세상의 의지가 관여한, 삶이 완벽하게 세상에 묶인 남자. 사산되었어야 할 아기는 세상의 의지로 태어났다. 다음에는 세상의 의지로 성장했고, 세상의 의지로 동생을 키워냈다. 그리고 모든 임무를 마친 지금은 세상의 의지로 죽어야 한다. 세상이 버린 도구가 그의 도움을 받아선 안 되기에.

  이제 청년에겐 키워내야 할 형제도, 지켜내야 할 사람도 없다. 모든 것을 잃고는 방황하다, 마찬가지로 방향을 잃은 여자와 함께할 뿐이다. 어려서부터 보호자였던 청년은 돌볼 사람이 생긴 것에 만족하는 듯하나, 여자는 청년의 금빛 눈을 볼 때면 자주 숨이 막힌다. 그의 친절은 죄책감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죽어가는지도 모르면서, 제 삶을 하루하루 단축시키는 이를 돌보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청년조차 모르는 비극은 사소한 사건에서 출발했다. 세상이 여자를 버렸다. 버린 도구가 다시 힘을 얻는 것은 세상이 용납할 수 없는 일. 청년은 여자를 돕기에 삶을 잃고 있다. 세상은 이제 어떤 힘도 쓸 수 없는 여자를 죽이는 대신 그녀를 돕는 유일한 존재를 고사시키는 것이다. 청년조차 쓰러지면 여자가 더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침몰하리라고 판단한 것인지. 그동안의 봉사는 잊은 듯 세상은 청년에게 너무도 잔인하다. 그리고 여자에게도.

  세상에 버림받았다는 것은, 한때는 세상의 패였다는 뜻. 여자는 구원자의 관을 썼을 때를 기억한다. 제 손에 들렸던 신비한 힘도 떠올릴 수 있다. 신의 권능을 쥔 듯했는데, 세상이 마련해준 역할에서 벗어난 때 그녀는 바로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 천국에서 추락한 천사처럼. 손에 쥔 것은 없고 따라붙던 이름도 잃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여자도 받아들일 수 없어, 세상은 그녀 자체를 유령처럼 만들려 한다.

  지독한 벌이었다.

  “어때?”

  침묵에 불안해지기라도 했는지, 청년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아직 수저를 들지 않은 채였다.

  “먹을 만해.”

  적당히 답하자 비로소 청년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단정한 얼굴에 그려지는 기쁨이 여자는 놀랍다. 그의 호의는 어쩐지 신앙을 연상시킨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은 오롯이 여자에게 맞춰져 있어, 여자에게 용인될 때마다 행복해한다. 여자는 그의 삶을 갉아먹을 뿐, 아무것도 베풀 수 없음에도.

  “아직은 나도 쓸모가 있는 모양이야.”

  어렸을 때부터 최소한 두 명분의 요리를 했거든. 남을 먹이는 건 익숙했어.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지.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 늘어놓고는, 청년은 수저를 들었다. 여자가 억지로 음식을 삼키는 동안 청년은 빠르게 그릇을 비워간다. 정상적인 미각으론 입에 담을 때마다 괴로운 음식인데도, 미각이 망가진 청년으로선 평온한 식사가 가능하다. 무너졌기에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청년의 삶도 아마 그러했으리라. 전쟁에 내몰렸던 청년은 깊숙이 파고든 불행에 젖어, 자신이 너무 무거운 비극을 감당했음을 알지 못한다. 지독하게 황폐해졌기에 전장에 적응하고, 자괴에 먹히지 않으며, 생존했다. 그가 속한 저항군 중 그만큼 망가진 인간은 찾기 어려웠음에도, 결국 마지막까지 버틴 것은 덜 망가진 자들이 아닌 그였다. 통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쌍한 남자. 잠깐 스친 생각을 여자는 빠르게 흩어버린다. 무의미한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황폐해진 남자보다도 철저하게 무너지고 말았는데. 세상에 버림받는 것으로 완벽히 무가치한 존재가 되었는데.

  “내가 정말 쓸모없어지면, 말해줘야 해.”

  여자가 그릇을 절반쯤 비웠을 때 청년이 불쑥 말을 걸었다. 뜻밖의 말에 여자의 눈이 둥그레졌다.

  “왜 그런 말을 해.”

  “쓸모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자주 해. 구하고 싶었던 사람을 한 번도 구해본 적이 없어서.”

  “쓸모라는 건 말이야, 그렇게 간단히 결정되진 않아.”

  “그러면?”

  여자는 금빛 눈에 비치는 제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제 과거를 지켜본 적 없는 사람인데, 청년의 눈에 담기는 모습에는 아직 과거의 후광이 남은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제는 세상에 선택받은 도구도 인간이 우러러보는 구원자도 될 수 없음에도 청년에겐 그녀가 막연히 빛나는 모양이었다.

  “누군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치는 있어.”

  “실패하더라도?”

  “그래.”

  “그래서 나는 어때?”

  청년의 얼굴엔 기대보다 두려움이 걸려있었다. 그 모습은 과거 세상의 뜻을 따랐을 때의 자신을 연상시켜, 여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순진한 태도는 그녀에게 자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한때는 그녀도 세상의 답변을 기다리며 떨었다. 세상에 한 가닥 의미를 남길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하기도 했다. 가장 순수했고, 그렇기에 가장 빛났던 시절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청년은 묘하게 닮아있다.

  “물론 당신은 쓸모가 있지.”

  그에 덧붙일 말은 가장 기만적인 말이 될 터였다. 여자는 한때 계시처럼 머리를 울렸던, 그녀가 세상에 봉사하게 했던 논리를 돌려주기로 했다.

  “당신이 있어야, 내가 힘을 쓸 수 있으니까.”

 

* * *

 

  청년은 보모 흉내를 썩 잘 내었다. 삶의 의욕을 잃은 여자를, 그는 아기를 돌보는 양 하나하나 감쌌다. 그가 세상에 선택받은 이유를 생각하면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특별한 아이를 키우기 위한 보호자. 그것이 청년에게 부여된 임무. 때문에 그의 시각은 언제나 돌봐야 할 대상에 맞춰져 있다. 사고도 감정도 마찬가지. 세상이 수월하게 조종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빌려주었을 뿐, 기능만 따지면 그는 교육용 AI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청년이 학습한 애정이란 돌봐야 할 대상에 대한 사랑뿐. 얼마 전까지, 그는 아기 때부터 키워온 동생만을 사랑해왔다. 그러다 여자를 만난 때부터 애정이 그녀에게까지 번졌다. 병균이 퍼지듯 빠르게, 청년의 애정은 커졌다. 여자는 저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자에게서 가족보다 지독한 사랑을 느낀다. 외면하기엔 너무도 짙은 감정은 청년이 무조건적으로 그녀에게 봉사하게 만든다.

  그러면 왜 하필 여자였던가.

  봉사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많다. 그런데도 청년은 저에게 도움을 요청한 일도 없는 여자를 데려와 그녀를 연명시키고 있다. 전장에서 쓰러진 아군도, 동정심에 매달리는 사람도 제법 있었을 텐데도. 거기서 여자는 그의 본질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두 사람 사이엔 표면적인 연결고리가 없음에도 여자는 청년에게서 희미하게 저와 비슷한 파장을 느낄 수 있다. 그에게 세상의 의지가 배어있기 때문일 터다. 평범한 인간에 세상의 의지가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바탕이 세상의 파편이었기 때문이리라고, 그녀는 추측하고 있다.

  분열에는 언제나 파편이 뒤따른다. 한때 하나였던 세상을, 악에 오염되는 것을 막으려 찢어낸 것이 이십여 년 전 일. 세상이 4개의 차원으로 나뉘는 과정에 흩어진 파편이 분명히 있다. 4개의 차원이 완벽히 맞물리는 것이 아니라 차원의 틈새가 존재하는 것이 그 증명. 세상은 쓸모없는 것은 무엇 하나 남겨두지 않으므로, 파편도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았으리라. 보잘것없는 파편이라도 그러모아 인간의 모습을 씌우면 그럴듯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청년처럼.

  세상의 의지가 깃든 존재라면, 동류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저처럼 세상의 의지가 개입한 도구만을 마음에 담는 것이다. 청년은 날 때부터 구원자의 파편을 사랑했고 이제는 세상이 버린 도구에 애정을 쏟는다. 갈 곳 없는 여자에게 제 은신처를 허락한 것은 분명 애정에서 비롯된 일. 그가 여자에게 향하는 애정은 그 역시 세상의 도구였다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아마 그는 여자에게 스쳤던 세상의 힘에 반응한 것이리라. 빼앗겨 흔적만 남은 것에.

  본능적으로 감지한 접점, 누군가를 돌보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습성, 그 전까지 돌보던 이의 상실. 그 모든 것이 겹쳐, 청년은 여자를 건져냈을 것이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한 가닥 기대를 얹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잃은 것을 채울 수 있다고. 이 사람을 구하는 것으로, 삶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청년의 구조에 깔린 것이 마냥 순수하진 않았겠지만, 여자에게 그의 도움은 분명히 가치가 있었다. 세상에 버려지면서, 오래도록 인간이 아닌 신비로 존재했던 그녀는 평범한 인간으로 추락했다. 구원자가 되기 전 인간이었다 하나, 이미 신의 권능에 익숙해진 그녀였다. 유한하고 연약한 인간의 몸에 갑자기 갇혀버린 것만 같았다. 살기 위해 영양을 섭취하고, 죽지 않으려면 많은 것을 필요로 하는 삶은 그녀에겐 낯설고 힘겨웠다. 스스로 돌보는 법을 잊었는지 그럴 의욕을 잃었는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그녀를 데려온 것이 청년이었다.

  그 후 청년은 그녀를 자연스레 제 일상에 끼웠다. 동생과 함께할 때 그러했듯 그녀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옷을 내주고, 생활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챙겼다. 추락한 때 처음 만난 사람이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껏 생존할 수 있었을까. 여자로선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니 청년에게 한 말은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생존할 수 없다면, 무언가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녀의 생존에 크게 공헌한 것은 분명히 청년이었다.

  청년은 여자의 답을 듣자 이내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여자가 그러했듯, 기만적인 논리에서 달콤한 만족을 느낀 모양이었다. 불필요한 패를 가차없이 버리는 세상만큼이야 잔인할 수는 없으나 여자의 말 또한 그리 상냥한 것은 못 되었다. 중병을 앓는 이에게 절망적인 상황을 전하는 대신 존재하지 않는 신약을 들먹이며 희망을 안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당신은 어때? 당신에게 나는 필요한 인간이 맞아?”

  그대로 대화의 방향을 틀어버려도 되련만, 여자는 돌아올 답을 뻔히 알면서 물었다. 저에게 향한 청년의 기대를 굳이 확인하려는 듯.

  “물론.”

  “? 나는 당신에게 특별히 해주는 게 없는데?”

  “당신은 나를 구해.”

  그것은 희망 섞인 예언이라기보다 선언에 가까운 것이어서 여자는 웃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추락한 여자에게 저를 오롯이 맡기고 있다. 거기서 여자는 자신의 결정적인 결함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자가 부러 입 밖에 내지 않는 말은 하나. 지금의 그녀는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이전부터 청년은 여자를 보는 시선에 숭배를 닮은 것을 얹었다. 장치의 바닥에서 그녀를 건져낼 때, 모두가 숨기던 희망이 당신이었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의 구조가 어쩐지 종교적인 풍경으로 비친 탓인지 불행에 오래도록 노출된 그가 한순간 그녀에게 성자를 투영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구원을 바라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어떤 식으로든 그는 삶에 기적이 찾아들길 바란다. 그런 그가 작은 기적이나마 기대할 수 있는 대상은 아마 여자이리라.

  어딘지 신비로운, 이해할 수 없이 끌리기까지 하는 대상.

  “자신이 있네.”

  “이미 느끼고 있어. 당신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을.”

  “그렇게 이야기하니 꼭 신자 같아.”

  “나는 신앙심 같은 건 없었지만, 신이 있다면 믿을 순 있지.”

  그는 어떤 변화에 저렇게 들뜬 것일까. 여자를 만난 때부터 덮쳐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면 무엇을 감지한 것인지. 어째서 그는 존재하지도 않는 희망을 발굴한 듯 구는 것인지. 비극에 익숙해진 청년의 외면 아래, 절망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무의식이 그를 약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죽음에 짓눌리면서 판단이 흐려졌을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망가지는 것을, 재탄생하기 위한 전 단계로 착각할 정도로.

  “내가 당신의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안 돼?”

  금빛 눈은 여자만을 담고 있었다. 묘하게 이질적인 색채는, 그의 바탕을 떠올리게 한다. 세계의 파편. 태어날 수 없었던 아기의 몸으로 탄생한 불완전한 존재. 태생적으로 결핍되었기에 그는 더욱 여자에게 매달리게 되는지도 모른다. 자신과의 연결고리를 찾아서, 아무것도 아닌 파장에 이끌려서.

  흐르는 침묵에도 청년은 말을 더 붙이지 않았으나 여자는 어쩐지 그의 눈이 계속 묻는 것만 같았다. 안 돼? 여자를 흔드는 것은 언제나 그런 순진한 것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하나, 내 말을 들어줄래?”

  한순간 피어나는 엷은 죄책감에 여자는 딱 하나, 청년을 돕기로 했다. 그녀는 청년이 제 입술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을 느끼며 덧붙였다.

  “여기 있어.”

  “어차피 여기서 지내잖아?”

  “더 나가지 말란 뜻이야. 바깥은 위험하니까.”

  “당신을 보살피려면 바깥에서 뭐라도 구해와야만.”

  “내 곁에 있는다 생각해. 그래야 내가 당신을 도와.”

  알겠지? 여자는 아이를 다루듯 부드럽게 말했다. 이것으로 청년은 제 삶을 갉아먹는 일을 의도적으로 줄이게 될 것이다. 그녀는 청년이 제 말을 거부할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았다.

 

 

2

 

  차원의 틈새는 안락한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세상을 고통에 빠트린 전쟁도 없고, 증오도 폭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를 아는 이부터 소수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정도니 어지럽혀질 걱정도 없다. 단 하나 그 공간을 낯설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세상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리라. 여자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더 자라지도 시들지도 않는 풀밭을 본다. 바깥과 완벽히 차단된 곳에서 지독한 고요를 느끼기도 한다. 그야말로 백지 같은 곳에, 두 사람은 몸을 숨기고 있다.

  이곳에 여자를 데려온 것은 청년이었다. 무엇 하나 가진 것 없이 떨어진 그녀를, 제 코트로 감싸 데려오며 청년은 몽롱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모두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있어. 누구도 당신을 쫓아올 수 없는 곳이야. 청년의 품에 안긴 채로 여자는 받아쳤다. 낙원이라도 꿈꾸는 모양이지.

  막상 청년의 걸음이 멈추자 여자는 청년의 꿈같은 말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녀에게도 익숙한 공간이었다. 구원자로서 세상을 부유할 때, 간간이 머물렀던 곳. 방해받지 않고 얼마든지 휴식할 수 있었던 은신처. 인간이 그곳에 발을 들일 거라곤 생각도 않았다. 청년의 품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여자는 물었다.

  [어떻게 여기 올 생각을 했어?]

  [어릴 때부터 자주 왔던 곳인데.]

  청년이 어떤 문제도 없이 찾아온 것을 보면 그에게 익숙한 장소라는 것도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존재도 모르고 살아갈 공간임에도. 비로소 여자는 청년이 지금껏 스쳐온 인간과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다. 돌이켜보면, 세상이 고사시키려 내버린 그녀를 발견해 데려온 것부터 보통의 인간일 수는 없었다.

  [아카데미아도 여기까진 들어올 수 없어.]

  그러니 당신은 안전해. 그렇게 덧붙이던 청년의 얼굴에 순진한 웃음이 걸려있었던 것을 여자는 기억한다.

  청년의 말이 옳았다. 이곳은 안전할 수밖에 없다. 4개의 차원에서 완벽히 분리된 공간인 것은 물론, 장소의 특성상 세상의 지배력도 약화된다. 세상의 의지가 개입된 두 사람에게는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장소인 셈이다. 청년이 그런 것까지 알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으나 그가 선택한 장소가 최적의 은신처임은 분명했다. 모든 힘을 잃은 여자가 침략군에게 짓밟히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청년도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다만 청년이 이곳에 어떻게 들어설 수 있었을지 생각할 때면 여자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4개의 차원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본래는 하나의 세계였기에 분열의 파편이 있다는 것까지 알아야만 차원의 틈새를 인지할 수 있다. 이차원의 침략자가 밀려들기 전까지 차원의 존재도 몰랐던 청년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청년이 이곳에 어릴 때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가 완벽한 인간은 못 되어서일 것이다.

  세상의 파편이 엉긴, 불완전한 인간.

  구원자였던 여자가 차원의 틈새에 마음대로 드나들었듯, 자신의 본질을 모르는 청년도 세상의 의지가 깃들어서 자연히 이곳을 찾을 수 있었으리라. 그를 나날이 망가뜨리는 것은 세상이지만 그에게 은신처를 내준 것도 세상인 셈이다. 삶이란 이렇게 아이러니하다.

  한편, 청년이 그동안 무겁게 짊어졌던 생존자의 책임을 던지고 전장에서 벗어난 것도 여자를 돌보기 위해서였으리라. 그녀를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 판단하고서, 혹 제 손이 닿지 않을 때 시들어 죽지 않게 하려고. 그가 속했던 저항군이 그가 이탈한 후 어떻게 되었을지 여자는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훈련받은 군인에 맞서기엔 부족한, 급조된 소년병이었다. 어쩌면 여자와 함께하면서 다가오는 죽음보다, 저항군으로서 하루하루 버티는 쪽의 종말이 더 빨랐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청년의 삶은 죽음과 가까운 것이었다. 평화 속에서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쪽이 나은지, 거대한 폭력에 맞서며 생존이란 행운을 바라는 게 나은지는 알 수 없다. 청년의 삶에 죽음을 드리우는 여자로서는, 그가 이곳에서 지내며 오랜만에 평온을 얻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청년의 삶은 여전히 비극에 잠겨있으나, 바깥에서의 그가 자신의 불행을 인지하고는 있었다면 이곳에서 그는 행복한 사람처럼 군다. 죽음이 닥치는 것을 알고는 있겠지만 그 자신이 그것을 비극으로 선언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청년이 여자와 함께하는 삶을 포기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아무리 설득해도, 그는 굳건한 믿음으로 그녀를 계속 돌볼 것이다. 그렇다면 그나마 안전한 곳에, 바깥의 위험으로부터 완벽히 보호받을 수 있는 곳에 남는 것이 낫지 않을까. 여자가 청년을 달래, 이 기묘한 공간에 묶어두려는 것은 그래서였다.

  청년이 이곳에서 발을 떼지 않고 지낸다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 바깥에서 펼쳐지는 전쟁과 덮쳐오는 파멸을 외면하고 끝까지 평화를 즐길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세상의 뜻을 거역한 둘에게 어울리는 결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자는 느끼고 있었다. 분열되었던 세상은 천천히, 조금씩이나마 가까워지고 있다. 찢긴 조각이 붙을수록 차원의 틈새는 좁아진다.

  언젠가는 조용히, 압사할 것이다.

  “당신은 언젠가 나갈 거지?”

  정지된 세계를 눈에 담던 여자는, 불쑥 날아든 말에 돌아보았다. 몇 발짝 뒤의 나무에 청년은 기대 서 있었다. 평소 지내던 이 답답하게 느껴져 한참 주변 들판을 돌아다녔더니 찾아온 모양이었다. 어쩌면 저를 버리고 갈 것이라 생각했는지. 여자는 청년의 눈을 살폈지만 그의 눈에는 특별히 두려움은 비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생각해?”

  “당신이 이 세상에 나타난 건 목적이 있어서일 테니까.”

  목적이라는 말에 여자는 웃었다. 그의 순진한 추측은, 되레 여자의 가장 큰 결함을 짚고 있었다. 더는 목적이 없기에 버려졌고, 인간의 몸으로 추락했음을. 하필 그녀의 추락은 종교적이었다.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이전까지 없었던 존재라. 성화의 일부처럼 신비스러운 풍경이었으리라.

  “처음 만난 날, 아카데미아의 중심부에서 거대한 빛줄기를 봤어. 눈이 멀 것 같은 빛이 걷히니 당신이 있었지.”

  “천사라도 내려주는 줄 알았어?”

  “천사가 아니라 무엇이어도 좋아. 이 세상에 벌어지는 일은 인간으로선 막을 수 없어. 그렇게 신화처럼 나타난 사람이 평범한 인간일 리 없고. 그러니까, 어쩌면 당신은.”

  청년의 목소리는 거기서 멎었으나 여자는 터지지 못한 말을 듣지 않고도 알 것 같았다. 어쩌면 당신은 구원자일지도 몰라. 절망에 잠식된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발상이었다. 너무 많은 실패를 경험했기에 그는 차라리 기적을 상상한다. 눈앞에 떨어진 자가 한갓 인간, 그것도 제 도움을 받아야만 연명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였다 해도. 불쌍한 남자. 여자는 무의미한 말을 삼키며 천천히 청년에게로 걸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비치는 얼굴은 묘하게도 그녀와도 닮아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들이 남매라 해도 믿었으리라. 그 유사성의 이유는, 여자만이 안다.

  “나를 돌봐주고 있는 건, 언젠가 내보내기 위해서였구나.”

  “당신을 돕고 싶은 거야.”

  그동안 여자를 돌봐온 청년은 자신이 쓴 역할에 걸맞은 말을 한다. 거기에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끼어들었다 해도 여자는 그의 개인적인 욕망을 비난할 수 없다. 청년은 그녀의 유일한 지지자였으니. 그러나 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그가 바라는 어떤 것도 이뤄줄 수 없다는 현실을. 청년의 삶을 말려버리고 있다는 죄책감으로, 여자는 그의 희망을 완전히 짓밟지 못한다. 지금 청년에게 또 다른 실패를 이야기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삶을 놓아버릴지도 모른다.

  “나가지 않을 거야.”

  “?”

  “그럼 당신이 혼자 남게 되니까.”

  또 하나 적당히 둘러댄 이유는 신자처럼 구는 청년의 기대에 어울려주고 싶어서였다. 세상에 버려진 그녀이지만, 신의 힘을 쥐었을 때의 달콤한 기억은 남아있다. 이제 어떤 신비도 없다는 것을, 숭배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에게 굳이 고백하고 싶지 않았다. 과연,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은 그녀의 말에 매달린다.

  “필요하다면 같이 나가서 끝까지 도와줄게.”

  “바깥은 위험해. 나섰다간 분명 제 명대로 못 살아.”

  “전장에서 제 명대로 산 사람은 없었어. 그런데도 싸운 건 그것밖에 길이 없어서였지. 내겐 이제 당신을 위해 움직이는 것밖에 길이 없어.”

  청년에게 절망은 일상이어서,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처참함을 입에 담는다. 이제 그에게 파멸이니 종말이니 하는 것은 더 이상 두려움을 안기지 못한다. 그것조차 바라는 미래를 위한 패처럼 쥐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나를 쓸모없어질 때까지 사용하고…….”

  그의 애원은 건조해서 처절하다.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버리고 있어 너무도 무겁다. 이제 청년의 눈앞에 선 여자는 그의 양손을 가만히 감싼다. 군데군데 상처가 밴 손은 울퉁불퉁했다. 청년의 삶을 지배한 비극도 그에게 너무 많은 생채기를 남겼으리라.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망가진 방식으로만 애원하는 것이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게…….”

  “버리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

  “버려도 상관없어.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만 해줘.”

  “……무엇을 원해?”

  여자는 상냥함도 웃음도 지우고 묻는다. 그의 처절함을 알기에 취하는 진심이었다.

  “세상을 구하고 싶어?”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여자의 능력으로는 꾸며낼 수도 없는 목표라,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청년은 끝내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되게 하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좋아. 당신의 힘으로 한 사람이라도 구하길 바라니까.”

  “쿠로사키 슌?”

  기억에 희미하게 남은 이름, 청년의 이름을 들먹이자 그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는다.

  “운명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어.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운명이건 무엇이건 부숴줄지도 몰라.”

  “누구?”

  무엇 하나 바꿔줄 수 없으면서, 여자는 구원자인 양 물었다. 청년의 희망을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 최대의 호의라고 생각하며.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청년의 입술이 열렸고, 그가 오래도록 품어왔을 이름이 흘러나왔다.

  “루리.”

  내 동생이야. 들뜬 목소리로 덧붙인 수식어에 여자는 온몸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청년이 입에 올린 것은 유물이 된 이름이었다.

 

* * *

 

  여자는 찻잔 속 출렁이는 액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티타임을 준비했다. 평소답지 않게 재잘거리는 청년과는 대조적으로, 여자는 청년이 동생을 언급한 후로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무겁게 느껴졌다. 누구도 침입하지 않고 무엇도 방해하지 않기에 아늑했던 은신처조차 여자에겐 갑자기 너무도 불편했다. 청년과 함께 그의 소망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여자는 긴장이라도 풀 생각으로 청년이 내온 쿠키를 입에 넣었으나, 머리가 복잡해서인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가 되는 것은 청년의 소망이 아니었다. 스물도 되지 않은 나이에 실패의 연쇄에 짓눌린 사람으로서 가까운 이를 구하고 싶어지는 것이야 당연한 일. 다만 청년이 이야기한 사람은, 그의 동생은 그녀의 감정을 휘젓는다. 그 숨을 꺼트리는 데 자신이 기여했다는 점에서.

  여자는 피가 섞이지 않은 청년에게서 저와 닮은 부분을 찾아낼 때마다 감상에 사로잡힌다. 청년이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했던 존재, 즉 동생의 흔적이 그녀에게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세상에서 버려지기 직전 그의 동생을 포함해 네 명의 소녀를 삼켰다. 그들 모두 세상의 분열과 함께 흩어진, 그녀의 분신. 넷으로 갈라졌던 여자가 세상에 나타나려면 조각을 전부 합쳐야 하는 것이 당연하나, 청년은 그녀의 재림으로 영영 동생을 잃은 셈이 된다. 청년이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했다는 점에서 더욱 씁쓸한 결말이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처음부터 말하는 게 좋겠지.”

  여자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청년은 바쁘게 운을 뗐다. 여자의 얼굴에 깃든 복잡한 감정을 읽지 못하고. 곧이어 흘러나온 것은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내 동생은 특별한 아이였어.”

  “어떤 점에서?”

  청년은 짧은 침묵 끝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언제나 모든 것이 희미한 아이였지. 나는 그 애의 파장을 느낄 수 있었는데, 워낙 희미해서 도저히 한 사람 몫으로 느껴지지 않더군. 집중하지 않으면 얼마든 흩어질 것 같아서 나는 그 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게 습관이었어.”

  한 사람이 넷으로 갈라진 조각인 탓이리라. 보통 사람이라면 인지하지 못했을 테지만, 동생과 바탕이 비슷한 청년은 동생의 이질성을 눈치챈 것이다.

  “아마도 나 때문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 애의 뭔가를 빼앗아 태어나기라도 했는지, 그 애에겐 내가 있어야만 채워지는 부분이 있었거든. 핑계 같겠지만…….”

  “계속 이야기해.”

  “희미하기만 한 그 애가 다칠까 겁이 나서 그 애가 힘겨워하는 것은 내가 대신해서라도 채우려 했어. 하나뿐인 가족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들떠서, 그 애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나서는 일도 있었고. 우리는 두 사람으로 완성되는 것이거나 최소한 내가 루리의 부족분을 메울 도구 같은 것이라 생각했지.”

  세상이 분열하게 된 이유도, 그 과정에 흩어진 파편도, 자신의 본질도 모를 청년은 진실에 제법 근접해 있었다. 세상의 파편인 청년은 구원자의 조각인 동생을 충분히 도울 수 있다. 세상의 의지가 개입한 존재로서, 비슷한 처지인 동생에게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애의 삶에서 내가 너무 커져버린 건 문제였던 거야. 그 애는 그걸 바라지 않았단 걸 뒤늦게 알았어. 그때 생각했지. , 루리를 완전하게 만들면 그 애 혼자서 행복해지겠구나. 더 이상 내가 끼어드는 일 없이, 혼자서.”

  “그럼 당신이 이야기한 운명이란 건, 불완전함의 운명이야?”

  “그것도 있고, 이리저리 이용당하는 운명도 있고. 내가 당신을 발견했던 건, 루리의 파장을 따라 간 곳에 당신이 있어서였어. 당신이 깨어난 아카데미아에서 루리를 납치했었거든. 루리 말고도 그 애를 닮은 애들을 다 납치해간 걸 생각하면 뭔가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야. 따지고 보면 모두가 그 애들에게 무언가 기대하더군. 우리편조차도, 고작 열네 살에게.”

  여자는 모두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조각을 전부 모아, 세상을 부유하던 구원자를 재림시키는 것. 세상이 자신에게 다시 나서길 요구했다는 점에서 통합이 성공했으리라는 것도 명백했다. 그때 세상의 뜻을 따랐다면 여자는 추락하지 않았을 테고, 청년은 그녀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여자를 구조하는 일도, 차원의 틈새에 두 사람이 도피하는 일도, 청년이 죽어가는 일도 없었으리라.

  청년의 삶을 연 것이 세상의 의지였다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여자의 의지였던 셈이다. 자신이 불러온 결과를 새삼 느낀 여자는 보랏빛 눈에 그를 담는다. 언제나 타자의 의지에 삶이 휩쓸리는 자. 그런 줄도 모르고 비극에 저항하고 있는 자. 여자는 그 보람 없는 삶에 어떤 말도 얹을 수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연민조차 무력하다.

  “그 애들의 과거에 무언가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무언가 있어서 목적을 이뤄야만 한대. 봉사의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취급한 모양이야. 하지만 루리는 제 발로 아카데미아에 가지 않았어. 아카데미아가 내세우는 것도 루리의 뜻이 아니었고.”

  “운명이란 기만적이지.”

  구원자의 운명을 짊어졌던 여자라면, 안다. 운명이라는 말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를. 운명이란 결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여자가 따르지 않자 바로 거두어갔다. 세상이 내세운 운명조차 그러했는데 인간이 주장하는 것이란 얼마나 편리한 핑계일지.

  “결국 타자의 의지를 따르게 된다는 걸, 적당한 말로 포장했을 뿐이야.”

  “그 애가 감당할 일이 아니었다는 건가.”

  “인간은 신의 뜻조차 선택적으로 받아들였잖아. 진짜 세상의 뜻이건 아니건 자기 편리한 대로 주장했을걸.”

  냉소 깃든 말에 잔을 쥔 손이 떨렸다. 잔이 세차게 흔들리며 찻물이 한두 방울씩 흐르는 것도 보였다. 여자의 주장에 청년은 어쩐지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신탁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면, 그렇다고 한다면. 속에서 끓는 것이 있는 듯 청년은 한동안 말을 골랐다.

  “당신 말대로라면 말이야.”

  마침내 제대로 말을 꺼냈을 때, 그의 목소리는 흥분되어 있었다.

  “루리가 이리저리 휩쓸렸던 게 운명이 아니라면, 아카데미아가 그 애에게 강요했을 뿐이라면 구할 수 있는 거지?”

  “내 힘으로?”

  “운명을 깨야 하는 게 아니라면 더 쉽겠지. 나는 불행을 달고 다녀서 자신이 없지만, 당신이라면 충분히.”

  당신의 힘이라면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은 그런 믿음을 품고 싶은 모양이었다. 지독하리만큼 타인에게 휘둘려야 했던 비극을 깨고 동생을 자유롭게 살도록 만들 수 있다고. 그는 자신의 절망에는 둔감하면서 소중한 이의 불행엔 마냥 희망을 품고 싶어 한다. 그렇게나 세상에 찢기고 배반당하면서도 기적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는다. 아마 그것이 청년이 여기까지 생존하게 한 동력이리라.

  그는 신자처럼 열망이 깃든 눈으로 그녀를 오롯이 담았다. 여자가 무어라 명령만 내리면 당장 그녀에게 관을 씌우고 신으로 숭배하리라. 목숨을 걸라고 해도 아무렇게나 내버릴 것이고, 불가능을 행하라 해도 어떻게든 길을 찾을 것이다. 안 돼? 여자는 차마 입을 떼지도 못하는 청년이 묻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당신을 신으로 삼는 건, 안 돼?

  이런 사람은 만들지 않았어야 했다. 세상의 장난질은, 여자에게 신 흉내를 내게 하는 데서 끝났어야 했다. 이렇게나 보람 없는 삶을 요구해서는 안 되었는데. 평생을 도구로만 쓸 것이라면 그녀에게처럼 모든 것을 바꿀 힘을 한 번이라도 안겨줬어야 했는데. 여자에게 청년의 기대를 책임질 의무는 없다. 그의 봉사를 그저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보답받은 적 없는 열망이 그녀를 흔들었다. 한 번이라도 그에게, 제대로 된 답을 주고 싶었다.

  “사실 알고 있어.”

  “무엇을?”

  “당신의 동생, 쿠로사키 루리. 그 애의 삶에 관여했었거든.”

  동요는 빨랐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청년은 크게 휘청거렸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청년은 간신히 몸을 지탱한다. 멀미를 하나 봐. 여기는 차원의 틈새라며. 현기증으로 비틀거릴 때면 그렇게 자신의 이상을 숨기던 청년이지만, 이제는 너무 다급한 모양이었다. 그의 시선은 테이블의 맞은편, 저 끝에 앉은 여자에게 향해있었다. 마음만은 이미 여자의 눈앞에 선 것 같다.

  “하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야.”

  여자가 띄엄띄엄 말하는 사이 청년은 잔뜩 휘청거리면서도 그녀와의 거리를 좁힌다. 신에게 다가서는 것처럼, 조급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몇 번이고 테이블에 부딪히는 바람에 티타임을 위해 준비했던 것이 자꾸만 떨어졌다. 찻물이 바닥을 적시고, 다기 파편이 아무렇게나 흩어진다.

  “이제 와서 무언가 할 수는 없어.”

  왜냐하면, 나는. 여자가 고백하는 것보다 청년이 그녀에게 닿는 게 빨랐다. 청년의 금빛 눈과 마주한 때 여자는 말을 잃었다. 그의 눈에 깃든 모든 것이 너무도 무거워서.

  “이상하지, 왜 루리를 찾아갔는데 그곳에 당신이 있었을까.”

  울 것 같은 얼굴로 청년은 말을 잇는다. 그리고 왜 그때부터 내 죽음은 빨라졌을까.

  “이유가 있었던 거야. 어디에도 우연은 없었어.”

  청년은 어디까지 눈치챘을까. 이제 여자를 덮치는 것은 죄책감이 절반, 두려움이 절반이었다. 불완전한 인간인 청년은 내면이 장치를 닮아서, 발상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녀가 구원자가 못 된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당장 파괴적인 행동을 보여도 놀랍지 않다.

  “당신이 나타난 후로 루리의 기척을 놓친 일이 없어. 살면서 이렇게 루리가 선명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는데.”

  그러나 청년은 젖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에 깃든 것은 분노라기보다 감격에 가깝다.

  “그러니까 루리는, 당신이 나타나면서 완전해진 거지? 이제 내가 없이도 잘 살아가게 된 거지?”

  그래서 내가 죽어도 상관없게 된 거지? 희망인지 도피인지 모를 말에 여자는 가만히 청년을 끌어안았다. 몸이 밀착하면서, 바쁘게 뛰는 심장소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불안해하거나 흥분해 있다. 어느 쪽인지 모르기에 여자는 그에게 답을 주지 못한다.

  “역시 당신이 루리를…….”

  “그래.”

  청년의 속에서 타오르는 감정을 덮으려 잘라버리자, 그는 비로소 눈물을 흘린다.

  “구해주었구나.”

  여자는 청년이 가여워져서, 그 뺨에 입을 맞추었다.

 

 

3

 

  청년은 얼마간 앓았다. 그동안 몸의 이상을 숨겨오던 그가, 여자의 품에서 긴장이 풀려버린 것 같았다. 체감상으로는 며칠은 지난 것 같은데, 시간이 제대로 흐르지 않는 곳에 있으니 실제론 얼마나 앓았는지 알 수 없다. 어차피 망가진 몸이니 괜찮아. 전장에서 다 닳아버려서. 무시무시한 말을 입에 올리며, 청년은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집을 청소했고, 일어나지도 못해 앉아서 식기를 씻었다. 몸이 부서질 때까지 타자를 돕는 것이 차라리 편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런 모습을 보다 못해, 여자는 명령에 가까운 부탁으로 청년을 자리에 눕혔다. 보살핌을 받는 건 익숙하지 않은데. 청년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체 하며. 그의 곁에 앉아, 여자는 동화를 읽어주듯 세상의 과거를 이야기했다. 하나였던 세상이 악마의 등장으로 네 갈래로 찢어져야 했던 사정을. 그곳에서 다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는 희망적인 결말을. 그 과정에서 그녀가 한 역할과 청년의 동생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슬그머니 빼고서. 내내 조용했던 청년은 여자가 이야기를 마치자 입을 뗐다. 그럼 왜 다시 파멸하게 된 거야? 여자는 아이를 대하듯 답했다. 사람들이 나쁜 마음을 먹기 때문이지.

  “어떤 핑계로든 타자를 해하기 시작하면, 빼앗고 파괴하는 것밖에 할 수 없게 돼.”

  “그런 점에서 이미 이 세상은 글렀어. 그러니까 당신이 나타났겠지.”

  저를 향한 기대를 외면하며 여자가 열을 잴 때, 청년이 물었다.

  “당신의 소망은 뭐야?”

  “소망?”

  “내 소망은 이미 이루어졌어. 루리가 완전해지는 것. 그러면 이제 당신만 도우면 돼.”

  당신의 바람은 보통 것이 아닐 테니 쉽지는 않겠지만. 덧붙이는 청년은 들떠있었다. 피를 토하는 일이 잦은 주제에, 아직도 자신을 소모할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몸으론 안 돼.”

  “할 수 있으니까, 말해줘.”

  이렇게 망가진 세상을 구하는 것? 청년의 말은 여자의 과거를 헤집었다. ‘계시를 따라 세상을 구하는 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하던 때. 구원자의 관을 쓰고 신비로운 힘을 쥐었던 때. 그때의 여자는 누구에게나 신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운명이란 무엇인가. 어차피 신도 세상이 설정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데. 말 잘 듣는 인형에다 장난감 칼을 주고 관을 씌웠을 뿐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용당하는가를 생각하면, 지독하게 세상에 농락당하는 청년과 다를 것도 없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꿈꿀 것까지야 없지.”

  결국 세상에게 여자는 쓰기 좋은 패, 동시에 얼마든 버릴 수 있는 도구. 대체 가능한 존재는 세상에 널려있다. 그녀 대신 신이 되고 싶어 나설 인간은 차고 넘친다.

  “예전이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저항군으로 나선 레지스탕스에, 정예병으로 뽑은 랜서즈도 파멸을 막지 못했어. 모두를 짓밟던 아카데미아조차도 아무것도 못 했지. ‘누구나가 아니라 특별한 누군가만이 가능해.”

  당신 같은. 청년은 당연하다는 듯 여자를 구원자로 놓고 있었다. 여자에게 막연히 기적을 기대하는 동시에, 그녀가 세상을 사랑하리라고 굳게 믿는 것 같았다. 한때는 여자도 당연하다는 듯 세상을 위했다. 저를 희생해서라도 모두를 감싸야 한다 생각한 때도 있었다. 전부 순수했던 과거의 일, 이제 와서는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세상이 다시 한 번 그녀의 희생을 요구한 때 따르지 않았던 것은 과거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그럼 물을게. 당신에게 세상을 구하는 건, 가치 있는 일이야?”

  이번에는 청년의 눈이 둥그레진다. 답을 미처 생각지 못한 청년에게 여자는 계속 물음을 던진다.

  “당신의 몸을 망가뜨리면서까지 매달릴 가치가, 이 세상에 있어?”

  “모르겠어, 나는 그냥…….”

  “내가 여기에 내려와서 본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는데. 침략이 일어나고, 타인을 착취하고, 누군가를 고립시키는 세상에 어떤 가치가 있어?”

  제법 심술궂은 물음이었다.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만큼, 세상에 버림받았을 때의 환멸도 컸다. 세상이 휘두르는 힘을 경험했기에, 이렇게나 오염될 때까지 자정할 길을 찾지 않은 세상이 우스워진다.

  “인간은 쉽게 구원자를 찾고, 편리하게 신을 들먹이지. 파멸을 자초하고서 초월적인 해결을 바라.”

  “미안해, 나는 당신이 너무 빛나서.”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청년의 삶에서 지금껏 여자 같은 신비는 없었을 테니.

  “당신을 돕고 싶어서…….”

  “그쪽의 목적을 이뤘다면, 나를 도울 이유는 더 없지 않아?”

  아니면 감사 표시라도 되려나. 장난스러운 어투에 청년은 얼마간 침묵한다. 핏기 없는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여자는 확인할 수 있었다. 청년의 호의가 어느 정도는 본능적인 것임을 짐작하고 있다. 그가 어찌할 수 없이 저에게 이끌리고, 스스로를 내던져야 함을 안다. 그럼에도 굳이 청년에게 호의의 뿌리를 생각해보게 하는 것은 그를 위함이기도 했다. 한 번쯤은 의식해야 했다. 세상에 그토록 이용당하고도, 또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단 것을.

  “내가 그걸 바란다면, 안 돼?”

  마침내 흘러나온 것은 여린 목소리였다. 여자가 자신의 존재방식에 대해 묻고 있음을 눈치챈 것일지도 모른다. 의존적인 헌신과 보람 없는 봉사, 건지는 것 없이 허망한 길을.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쁘겠다고 생각했다면?”

  “자기만족이구나.”

  여자는 그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아이를 달래듯 상냥하게.

  “무력한 신비를 데려다, 신으로 만들고 싶은 거지. ‘내가그 사람에게 신의 관을 씌워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는 심리인 거야.”

  청년은 부정해야 했다. 부러 냉소적으로 꾸며낸 말을 제대로 받아치며, 자신의 헌신은 그런 조잡한 것이 아니라고 외쳐야만 했다. 삶을 잠식한 비극에 투쟁해온 청년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세상을 구했으면 하는 이유를 말해.”

  “맞을지도 몰라. 자기만족이었을지도. 신을 보고 싶었는데 우연히 당신을 만난 것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청년은 끝내 얌전하다. 조용히 체념할 뿐 여자의 말에 반기를 들지 않는다. 그 모습이 버려진 짐승 같아 여자는 도리어 숨이 막힌다.

  “당신이 세상을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이유는 없고, 내가 세상을 사랑했던 것도 아냐. 주제넘은 이야기였다면 잊어줘.”

  “제대로 말해.”

  참을 수 없어서 여자는 결국 청년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망가져가는 청년은 그녀의 손에 쉽게 이끌렸다. 이렇게나 연약한 사람이 세상에의 방패인 체 하고 있었다. 몸보다 더욱 무기력한 정신으로 매일 자신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는 이런 남자의 보호 속에 살았다. 무슨 뜻이야? 청년이 불안 섞인 눈으로 물었으나, 여자는 친절함을 덮어쓰지 않고 말했다. 외치듯이, 마디마디 힘을 얹어서.

  “무언가 원한다면, 제대로 말해. 당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해야만 답을 줄 거야. 내 소망을 빌리지 말고, 진짜 소망을 이야기해. 당신이 내게 가장 원했던 게 뭐야?”

  타의로 살아온 청년은 이런 질문에 방황한다. 나의 이야기를 할 줄 몰라 타자의 소망에 기생하려 든다. 이런 사람의 끝은 뻔하다. 다 닳아버릴 때까지 헌신하다 일찍 연소할 것이다. 나는, 그러니까 나는. 과연 청년은 답을 찾지 못하고 더듬거린다. 입 밖에 낸 적이 없는 건 물론이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을 답. 때문에 여자는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기로 한다. 그가 스스로 답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침묵을 견디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가 최소한 헌신의 이유를 고민하기라도 한다면 이번의 질문은 가치가 있다.

  마주보는 시간이 길었다. 집 한구석 초라한 잠자리에 엉거주춤 앉은 청년과, 그 곁에 의자 하나만 두고 앉은 여자는 오래도록 대치하고 있었다. 긴긴 침묵 속에서도 한 가지 여자가 상냥했던 것은, 그를 잡아 일으킬 때의 손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땀에 젖은 손은 도피하려는 듯 몇 번이나 꿈틀거렸으나, 여자는 계속 그의 손을 쥐고 있었다. 천천히 생각해, 나는 여기서 듣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당신에게 어울리는 길을 걷는 것.”

  이번에도 완벽히 자신의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청년은 답을 하나 생각해냈다. 오래도록 그를 지배한 타의를 바로 깨부술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여자는 그쯤에서 청년을 놓아주기로 했다.

  “그게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면, 그래. 들어줄게. 내 뜻은 아니더라도 당신을 위해서.”

  청년의 얼굴에 기쁨이 번진다. 여자는 비로소 그 앞에서, 진짜 신처럼 군다. 그러나 여자는 이제 신성을 기대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완전한 신이 되어주진 않을 것이다. 유일한 신자에게 넘치는 기대를 받으면서, 여자는 자신의 신자를 침몰시킬 선언을 한다.

  “, 행하는 건 내가 아냐.”

  “무슨 의미야?”

  “당신이 해. 세상을 구하는 것.”

  그 말을 남기고 손을 놓아주었는데, 이번엔 청년이 매달리듯 그녀를 붙잡았다.

  “할 수 없어.”

  “아니, 가능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우리 둘을 구할 수 있는 길이야. 나를 돕고 싶다고 했잖아. 당신의 소망도 이루고, 내 운명도 끊어주는 거야. 구원의 키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나는 해방돼.”

  당신은 나를 구하고 싶잖아. 숨겨진 말을 청년이 알아들었으리라고 여자는 확신한다. 그는 그녀를 숭배하는 동시에 그녀의 삶에 기여하고 싶어 한다. 도와주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이 그 증거. 본능에 근거했더라도, 타의에 지배당한 결과라 해도 그는 마음 한쪽에서 여자의 구원을 꿈꾼다. 그러니 그녀의 말은 유혹적이다. 갑자기 쥔 패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청년은 결국 그녀를 따르게 되리라.

  “구원자라는 건 역할일 뿐이어서, 누구에게나 가능해. 저번 대의 구원자가 나였을 뿐이야. 그러니까, 내가 가르쳐줄게. 당신과 나를 구할 길.”

  청년의 입술이 열리는 것을 알아채고, 여자는 답을 듣기 위해 청년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그는 별을 보듯 그녀를 눈에 담고 있었다. 숨이 닿는 거리에서 여자는 속삭였다.

  “할 수 있지, 쿠로사키?”

  청년도 속삭임으로 답했다. 그녀가 기대한 대로의 답이었다.

 

***

 

  두 사람은 시들지 않는 풀밭을 지나, 지독한 고요를 넘어, 바깥으로 향했다. 누구도 그들을 해할 수 없는 은신처에서, 누구에게나 공격당할 수 있는 곳으로. 청년에게야 몇 번이고 반복한 외출이겠지만 그녀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동안 여자는 바깥을 그리지 못했다. 위험하기도 했거니와, 그녀에겐 세상에 관여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버린 세계를 돌아볼 이유는 없다. 나선다 한들 무언가 바꿀 힘도 없다. 때문에 청년이 죽을 때까지 그의 보호 속에 살다, 그가 죽은 후 홀로 말라가는 미래만 생각한 그녀였다.

  앞장선 청년을 쫓으며, 여자는 그의 뒷모습을 계속 눈에 담는다. 성큼성큼 걷고 있는데,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겠노라고 앞서가고 있는데, 눈을 떼면 꺾일 것만 같다. 낡은 코트 자락도 가는 몸도, 자신을 방패로 내세우는 태도조차도. 모든 것이 위태롭기만 하다. 불완전한 태생 때문인지 죽음이 그를 잠식하고 있어서인지, 여자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청년은 곧, 닥쳐오는 죽음에서는 해방될 것이다. 여자의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기만 한다면, 청년이 순순히 따라주기만 한다면. 그녀는 신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청년은 명령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도구였다. 청년이 그녀의 집행자만 되어준다면 모든 삐걱거림이 사라진다. 세상의 오염은 걷히고, 운명은 두 사람을 놓아주리라. 세상의 의지에 휘둘려온 두 사람이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의 끝은 구원은 아니다. 청년에게도, 그녀에게도.

  여자는 청년에게서 원하는 답을 끌어낸 후, 얼마간 그에게 교육시켰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찾는 무기는 아카데미아에 있어. 당신이 나를 건져온 곳 말이야. 그렇게 말한 여자가 종이에 그려낸 것은, 한때 그녀가 쥐었던 힘의 증거.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4개의 문양.

  [4개의 열쇠를 발동시키면 어떤 위협도 걷혀.]

  모든 것을 정화하고 재구성하는 힘이니까. 구원자였던 여자는 옛 무기를 덤덤하게 설명했다.

  [타인을 해하고 모두를 삼키려는 욕망도, 거둬가게 될 거야.]

  [내가 해도 돼?]

  청년의 말은 불완전했으나 의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 중대한 일을, 내가 해도 돼? 세상의 운명을 쥐어야 하는 상황에 새삼 긴장한 모양이었다. 여자는 그의 어깨를 감싸며 답했다.

  [말했잖아, 구원자라는 건 역할이라고. 접근하기 힘들 뿐, 일단 다가서기만 하면 누구든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거야.]

  [당신의 역할은, 세상이 선택해준 것 아냐?]

  [세상이 선택한 내가 당신을 선택했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여자의 말에 청년은 의문을 붙이는 대신 그녀가 그려낸 문양에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자신의 역할에 더 의심하지 않겠다는 듯.

  그러나 여자는 안다. 모든 계획이 성공해서 그들이 해방되더라도, 그들이 맛볼 자유는 구원은 아니다. 여자는 그때야말로 완전히 무의미한 존재가 될 것이고, 청년은 비극에서 벗어나는 대신 영영 제 삶은 살지 못할 것이다. 세상의 뜻을 거역한 이상 그들에게 온전한 행복은 찾아들 수 없다. 운명에 무력하게 꺾이는 것보다 낫기에, 지금의 길을 선택한 것뿐이다.

  “, 아카데미아야.”

  이 문만 넘어가면 돼. 상념을 깬 것은 들뜬 목소리였다. 청년의 말대로, 어느새 두 사람은 에 다다라 있었다. 거울처럼 투명한 막 너머에는 네 갈래의 길. 청년의 고향을 포함해, 4개의 차원으로 향하는 통로가 보인다. 그 중 그들이 향해야 할 곳은 기묘하게도 어지럽게 빛나고 있었다. 만화경을 들여다본 듯 형형색색 화려한 세계 아름답네. 청년이 무심하게 말을 흘릴 때 여자는 실소했다. 이십여 년 전, 이런 풍경을 본 적 있다. 하늘이 환상처럼 여러 색채로 물든 순간, 그녀는 악마의 탄생을 보았다. 최악의 재앙에 걸맞은, 신화적인 등장이었다.

  “서둘러야 해. 시간이 없어.”

  여자는 떠밀다시피 재촉했다. 이미 눈앞에 다가온 재앙을 알기 때문이었다. 과거 세상을 삼키려 들었던, 그녀를 구원자로 만들었던 악마는 쟁그랍게도 현재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지금 아카데미아의 상황은 둘 중 하나, 자크가 부활했거나 부활을 앞두고 있어.”

  “벌써?”

  “당신이 떠나온 때 이미 세는 자크 쪽으로 기울었을 거야. 세상이 자크의 그림자에 덮이고 있었던 거지.”

  “열쇠를 찾으려면…….”

  “나를 찾은 곳을 떠올려. 루리의 기척을 따라 간 곳, 아카데미아의 장치가 있던 곳. 우선 그곳부터 확인할 거야.”

  그게 어디였지? 확인삼아 물었을 때 여자가 마주한 청년의 눈은 꿈을 꾸듯 몽롱했다.

  “빛이 있던 곳.”

  그답지 않게 낭만적인 표현이었다.

  여자의 짐작대로, 두 사람이 닿은 세계는 이미 절망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불길한 고요가 흐르는 중에 잔물결처럼 간간이 비명이 울렸다. 청년이 그녀를 구해 나올 때 그들을 몇 번 가로막았던 병사들은 대부분 쓰러져 있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공포에 짓눌린 채였다. 분명히 무언가, 있었다. 두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은신처에 있을 동안 이곳을, 혹은 다른 세계까지도 덮친 재앙이.

  이곳은 침략자의 세계. 훈련받은 병사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모든 이를 공포에 몰아넣을 재앙이라면, 인간이 불러온 것은 아니다. 인간 이상의 무언가가 관여했을 것이 뻔했다. 외부인으로서도 충분히 섬칫한 광경일 테지만 세계의 의지에 짓눌려 온갖 비현실을 경험한 두 사람은 큰 감흥이 없었다. 청년은 쓰러진 이들을 넘어 적의 기지로 침투했다. 뒤따르는 여자는 귀찮은 싸움이 없다는 것에 만족하며, 기지 내부의 상황을 살폈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절망은 짙어진다. 아무렇게나 엉겨 쓰러진 자들, 깨진 틈새로 약물이 새어나오는 실험관, 탄내가 나는 기계. 통제장치를 조작하려던 모습 그대로 정지한 연구원. 그리고 처참하게 깨진 모든 것. 재앙을 그린 성화에 두 사람이 갑자기 끼워 넣어진 듯했다. 청년은 그곳을 뒹구는 전투용 디스크를 들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형태로 보면 침략자의 것은 아니다. 다른 세계에서 온 것, 높은 확률로 청년과 함께했던 저항군의 무기였다. 청년의 시선은 빠르게, 공간의 구석구석으로 옮겨갔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쓰러진 소년들이 몇몇 보였다.

  이 풍경에 제목을 붙인다면 파멸이리라고 여자는 생각한다. 희망을 안고 전장에 나선 소년병도, 침략자의 지원을 받던 연구자도 한데 엉겨 종말을 맞았다. 모두의 소망이 꺾이고 모두의 생명이 꺼졌으며 모든 무기가 의미를 잃었다. 악마의 등장에 어울리는 지옥이었다. 거기서 여자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여자는 통제장치로 향하는 청년에게 물었다.

  “아카데미아의 계획, 짐작이 가?”

  “차원을 통합한다고는 하던데.”

  “자크가 바라는 것과 큰 틀에선 일치해.”

  “엑시즈를 쓸어버리며 이상세계 운운하더니, 악마를 도운 꼴이군.”

  “그러면 아카데미아가 이렇게 된 것도 설명이 되지. 이곳의 연구가 자크와 연관되어 완전히 폭주하고 자크는 부활의 기회를 얻었을지도.”

  악마는 과거, 인간의 욕망을 핑계로 나타났다. 모든 욕망을 양분처럼 삼키던 악마를 자연의 힘으로 찢어놓았는데, 또다시 인간의 욕망이 그에게 부활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인가. 어리석은 반복에 여자가 냉소한 때, 청년은 통제장치 근처에서 발견한 서류를 흔들어보였다. 그을리긴 했지만, 연구자가 남긴 자료인 듯했다. 뭔가 있을 것 같으니 확인할게. 그렇게 말한 청년은 띄엄띄엄 글을 읽어나갔다.

  “리바이벌 제로……자크를 막기 위해 레이를 부활시킨다. 모든 조각을 모아 아크파이브로 전송할 것.”

  조각이라는 말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똑같은 얼굴을 가진 네 명의 소녀. 악마의 네 분신에 대비되는 구원자의 분신들. 청년의 동생을 포함해 네 명, 그녀의 분신. 여자의 짐작대로 이곳에선 그녀를 재림시키려 했던 모양이었다. 그 과정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제 알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실패했다는 사실뿐이었다.

  “아크파이브?”

  “여기 그림이 있어. 제법 익숙한데.”

  세밀하게 그려진 그림을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 선인과 악인이 동시에 희망을 품고 찾은 곳이 어디인지.

  “당신이 있었던 곳이야.”

  모든 것이 희한하리만큼 들어맞았다. 그들이 처음 설정한 목적지는 실은 침략자가 실행해온 연구의 종착점이었고, 여자가 추락한 곳이자, 청년의 동생이 마지막 숨을 토해낸 곳이기도 했다. 여자가 짐작하기엔, 두 사람이 찾는 열쇠 또한 그곳에 있을 것으로 보였다. 구원자의 분신은 각자의 위치에서 악마를 막기 위해, 여자의 옛 무기를 나눠 가졌다. 여자를 재림시키려 네 명을 통합시켰다면 그들이 지녔던 무기도 그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일이 쉽게 풀리는 것에 들떠 두 사람은 걸음을 재촉했다. 악마가 나서기 전 무기를 확보해야 했다. 누구도 찾지 못할 열쇠를 쥐고 그들이 세상의 혼란을 잠재워야 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눈부신 빛줄기가 새어나왔다. 이곳에 희망이 있다고, 찾아줄 이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들에게 고하기라도 하는 듯. 익숙한 파장이야. 이런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청년의 목소리엔 열기가 배어있었다.

  “그래, 분명히 오래 알아온…….”

  마침내 장치까지 다다른 청년의 말이 끊겼다. 여자도 일순 얼어붙었다.

  누군가 있었다. 그들보다 먼저 당도한 사람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가능성에 두 사람은 다음 행동을 잊었다. 두 사람의 시선 속에서 장치에 바짝 다가선 것은, 후드를 뒤집어쓴 소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소년은 홀리기라도 한 듯 장치에 손을 뻗는다.

  아니, 정말 홀린 것이었던가? 소년이 이끌린 것이 무엇인지는 오래지 않아 확인할 수 있었다. 빛에 휩싸여 어른거리는 형상이, 성녀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띤 여인이 그를 인도하고 있었다. 여자가 추락한 곳, 그녀의 무기가 잠들어있는 곳에서. 환상이라기엔 너무 지독한 현실에 여자는 힘이 풀려 무너졌다. 소년이 바라보는 것은 그녀의 잔상이었다.

 

 

4

 

  세상은 여자를 버렸다. 도구로서 평생을 바치는 운명에 의문을 품은 때, 그녀의 힘을 거두고 인간으로 추락시켰다. 이제 와서 그녀를 필요로 할 리가 없다. 무기가 남아있는 장치로 소년을 인도하는 걸 보면, 이번 대의 도구는 분명히 소년이었다. 그런데 왜, 그녀의 모습을 빌려온 것인가. 우습게도 여자의 머리를 친 것은 배반감이었다. 기대도 없었던 주제에, 한순간 세상을 원망했다. 자신의 그림자마저 이용하는 세상을 저주했다. 조잡하기 짝이 없는 심리였으나 인간으로선 그럼직한 반응이었다. 추락하면서 다시 인간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 모양이었다.

  왜, 무슨 이유로. 입모양은 몇 번이나 말을 만들었지만 여자의 의문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여자에게 너무 충격적이었던 탓이다. 순식간에 그녀는 상황을 확인할 힘도, 청년을 이끌 의지도 잃었다. 말 한마디 흘리지 못하고 얼어붙은 여자와는 달리 청년은 빠르게 행동을 결정했다. 무기를, 가져오라고 했지. 청년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답이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그는 망설임 없이 소년에게로 다가섰다. 그때 소년은 장치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끌어안으려 하고 있었다.

  “방해야.”

  경고는 짧았다.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소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제야 침입자를 인지한 소년이 바로 경계 가득한 시선으로 청년을 훑었다. 전투용 디스크를 왼팔에 장착하는 걸 보면, 최악의 경우 그를 공격할 뜻이 있는 듯했다. 청년은 굳이 소년을 따라 전투태세를 취하지 않았다. 소년이 먼저 손을 뻗었던 빛을, 그에 싸인 무기를 낚아챘을 뿐이다. 너무 빠른 동작이라 소년은 미처 막지 못했다.

  자연의 힘이 깃든, 네 개의 열쇠. 한때 세상을 구했던 무기. 여자가 구원자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제 것처럼 쥐었던 희망. 그것은 이제 네 장의 카드에 봉인되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는 청년의 얼굴이 상기되는 것을 보았다. 목적을 잃은 소년이 커다란 눈으로 그를 노려보는 것도.

  “돌려줘, 레이의 뜻을 따라야 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도, 청년이 쥔 것을 빼앗을 수는 없다. 돌려줘, 쿠로사키. 재차 요구하는 목소리에 감정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소년은 명백히 불쾌해하고 있었다. 아마도 청년이 저를 방해했다는 것에 대해서. 세상의 의지는 타의를 자의로 착각하게 하는, 고약한 데가 있었다. 아마 소년도 지금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은 제 선택이고,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굳게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최면이었다. 스스로 봉사하고 저를 희생하여 세상을 더 낫게 할 수 있다는 착각. 스스로를 갉아먹는 악랄한 조작. 한때 여자를 지배했던 책임감도 바탕은 그러했을 것이다. 거기서 여자는 오기가 생겼다. 그런, 기만적인 힘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세상의 의지에 지금껏 지배당한다면 이제는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했다. 제 그림자를 따온 형상에 흔들릴 이유란 없었다. 얄팍한 수를 비웃고 그에 맞서야 했다.

  “글쎄, 나도 명령을 받아서 말이야.”

  “레이는 내게 그 네 장의 카드를 사용해 자크를 막으라고 말했어!”

  “레이? , 네 머리 위에 떠있는 그 신기루 말인가?”

  청년은 성녀처럼 신비로운 형상을 단숨에 환상으로 격하시킨다. 무엇이 그에게 그런 자신을 안겼던가. 여자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추락한 여자보다 신비로운 비현실에 그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무력하게 무너진 여자에게 무기를 바치려 뛰어들 뿐이었다. 그의 숭배는, 여자에게만 통했다. 그는 여자만을 신으로 삼았다. 그것이 여자를 움직이게 했다. 몇 발짝 너머에서 둘을 바라보던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었다. 자신의 신자에게로, 그리고 가여운 도구에게로.

  “나한테 명령한 사람은 그런 꿈같은 존재가 아냐. 멀쩡히 몸이 있고 자기 말을 할 줄 아는 존재거든. 계시를 받았다면 너의 신에게 물어.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듀얼을 해서라도…….”

  “유감이군. 난 네 싸움에 휘말려줄 생각이 없는데.”

  “세상을 구할 생각이 없는 거야?”

  “물론 그는 세상을 구해.”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소년과 청년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여자는 그들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세상의 의지에 착취당하다 죽어가는 남자와, 새롭게 구원자로 선택된 소년이 옛 구원자를 눈에 담는다.

  “내가 그를 선택했으니까.”

  “레이?”

  흔들리는 목소리는 소년의 것이다. 그에게 계시를 내린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선 광경에 경악한 듯했다. 비로소 소년의 환상은 깨지고 최면은 힘을 잃는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뻔했으므로.

  “그래, 나는 이곳에 있어. 모두의 뜻으로 부활해, 무엇을 할지 정했지.”

  “무엇을 원해?”

  간절한 시선에서 여자는 언뜻,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를 떠올렸다. 세상의 의지가 이번 대의 도구로 소년을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소년은 청년만큼이나 굶주려 있다. 오랜 기간 자의가 없이 살아와, 타자의 소망을 투영하는 것을 삶의 방향으로 생각해온 것이 뻔했다.

  “모두가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도와줄래? 여자는 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였다. 그를 놓아주는 거야. 쿠로사키와 내가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줘. 두 사람의 시선이 한동안 얽혔다. 오랜 기다림 끝에 소년의 입술이 열렸고.

  “거짓말.”

  갑자기 시야가 어둠에 잠겼다. 암흑 속에서 여자는 뺨에 닿는 축축함을 느꼈다. 시야가 걷혔을 때, 여자는 청년의 팔에서 흐르는 피를 보았다. 팔에 새겨진 상처에서 자꾸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불길함에 제 뺨을 쓸자, 손에 묻어나오는 것은 피. 그녀의 몸에는 상처도 통증도 없으니 청년의 피가 분명했다. 소년이 펼쳐낸 병기가 순식간에 청년을 할퀸 모양이었다.

  아니, 원래 타깃은 청년이 아니었을 것이다. 위험을 감지한 청년이 여자에게 날아들 공격을 제 팔로 막았으리라. 황급히 청년을 감싸는 여자에게 소년의 날 선 목소리가 꽂혔다.

  “레이가 그런 선택을 할 리 없어. 자크를 물리치고 세상을 구한 자라면, 당연히.”

  “그럼 네 입맛에 맞는 레이를 찾아.”

  여기의 레이는 진짜 구원자니까.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청년은 바로 여자의 손을 잡고 달렸다. 숨이 차도록 달리는 내내 등 뒤에서 병기를 발동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두 사람은 돌아보지 않았다. 날아드는 공격을 막으려 하는 순간 더는 도망칠 수 없음을 짐작한 까닭이었다. 소년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구원자에 대한 맹목을 그대로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간 여자는 영영 타인의 환상 속에 살게 되리라.

  소년은 제법 끈질기게 쫓아왔다.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만큼 공격도 거세졌다. 잡히지 않을 자신 있어? 여자의 말에 청년은 웃었다. 잡히면 안 되지. 저 애의 전투력은 상당해서, 걸리면 귀찮아져. 어리긴 해도 랜서즈의 주축 멤버였으니까. 덧붙인 말에서 청년은 저항군의 이름을 언급했다. 어쩐지 소년이 바로 청년의 이름을 부르더라니, 동료였는지. 위기 상황에선 다소 가벼운 대화의 끝에, 청년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계속 달릴 수만 있다면, 잡히지 않아.”

  “그런 거야 쉽지.”

  여자도 웃음과 함께,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상처투성이의 손이 믿음직스러웠다. 둘의 도피는, 그렇게 이어졌다.

  장치로부터 한참 멀어진, 망가진 연구실에 다다라서야 두 사람은 멈췄다. 청년은 바깥에 소년을 비롯한 적이 없음을 확인하고서, 먼저 숨어있던 여자에게로 돌아왔다. 청년은 자신의 신 앞에 네 장의 카드를 자랑스레 꺼내보였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 무기를 확보했어. 그럼 이제 실행하기만 하면 되겠지.”

  자, 명령해줘. 청년의 눈에 깃든 말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자는 청년의 바람을 알면서도 한가롭게 답했다.

  “우리가 지내던 곳으로 돌아가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가자고?”

  “생각이 바뀌었어.”

  “나를 믿지 못할 것 같아?”

  불안 섞인 목소리에 여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아냐. 무기를 발동하기 전에 당신에게 꼭 알려줘야 할 것이 있어서 그래.”

  “여기서는 안 돼?”

  “긴 이야기가 될 거야. 여기에서 시작했다간 다 전하기 전에 위험이 닥치겠지.”

  여자는 천천히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의 눈에 담기는 자신을 확인하며 조금씩, 조금씩. 거의 몸이 밀착할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여자는 팔로 그의 목을 휘감아 저에게 끌어당겼다. 이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말은, 둘만의 것이 되리라.

  “당신을 믿어서 털어놓는 거야. 들어줘.”

 

* * *

 

  청년은 오래도록 잠에 빠져있었다. 창백한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몸은 불길하게 찼다. 여자는 덮을 수 있는 것이라면 전부 끌어와 그의 몸을 감쌌지만, 도통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세상에 나선 탓에 죽음이 가속화되어, 그는 돌아오는 길에 이미 잘 걷지 못했다. 여자와 함께 도망치려 달린 때 그나마 남은 힘마저 끌어 쓴 것 같았다. 여자의 부축을 받아 겨우 집에 들어오자마자 청년은 무너졌다.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잠든 청년은 숨소리조차 옅었다. 미동도 없이 잠에 빠진 것이, 자꾸만 죽음을 연상시켜서 여자는 떨었다.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어떤 보람도 없이 삶을 마치게 될 것 같다. 깨어나야 해.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여자는 그의 곁을 지키며 자주 말을 걸었다. 나에게 전부 들어야지,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지.

  여자는 청년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굳이 말하지 않았던 것을 털어놓을 뿐이지만, 여자에겐 큰 각오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청년이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여자는 신성을 잃고, 어쩌면 그에게 완전히 미움받게 될지도 모른다. 숭배를 담았던 눈에 증오를 드리우며, 누이를 앗아간 존재라고 저주를 퍼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자는 마음을 굳혔다. 그는 진실을 알 권리가 있었다. 운명에 시달려온 사람으로서, 무엇이 자신을 그토록 괴롭혀왔는지 인지해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청년의 믿음에 보답하는 길이다.

  그러니까, 깨어나. 여자는 닫힌 눈꺼풀을 보며 말했다. 당신이 듣고 싶은 걸 전부 이야기할게.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여자는 몇 시간인지 혹은 며칠인지 모를 시간을, 그의 곁을 지켰다. 그러다가 살짝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꿈에서 여자는 어린 날로 돌아가 있었다. 부상인지 학대였는지 날개 일부가 잘린 새를 구해온 때로. 스스로 생존할 수 없게 된 새는 치료가 끝나고도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새장을 열어두어도 새는 날아가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그녀의 머리 위만 빙빙 돌았다. 그 연약한 비행에서 누군가를 떠올렸을 때, 갑자기 소음이 끼어들었다. 물건이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였다.

  눈을 뜨자, 누워있어야 할 사람이 없었다. 청년을 돌보려 계속 곁에 있었는데, 잠깐 눈을 붙인 새 빠져나간 것인지. 소리가 난 쪽으로 향하자 여자는 여러 물건 속에 주저앉은 청년을 볼 수 있었다. 멋대로 움직이다 힘이 풀려 넘어진 모양이었다. 말없이 손부터 내밀자 청년은 바로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손을 떼자마자 휘청거리는 청년을, 여자는 근처의 의자를 끌어와 앉혔다.

  “깨우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움직이려 했는데.”

  갈라진 목소리로 흘린 변명에 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죽음에 먹혀가는 중에도 자신을 아낄 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고 몸을 조심하라고 부탁했는데도. 팔짱을 낀 채 그저 바라보고 있었더니, 그는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물건을 정리하려 든다. 한가로운 말까지 흘리면서.

  “마지막으로 이 집을 정리하고 있었어. 돌아오면 완벽히 당신을 위한 집이도록.”

  “마지막으로?”

  “이번에 아카데미아로 가면, 돌아오긴 힘들 것 같아서. 돌아오더라도 어차피 곧 죽을 테니…….”

  “그런 말이 제일 싫어!”

  비명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간을 찢었다. 놀란 눈이 그제야 그녀만을 담는다. 눈앞의 남자에게 이렇게 화가 치민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계속 그런 생각으로 살았어? 곧 죽을 거니까, 아무래도 좋다고? 그래서 그렇게 무리했던 거야?”

  “……내게 세상을 구하라고 한 건, 내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거잖아. 그런데 왜 내가 망가지는 걸 겁내?”

  할 말을 잃은 것은 여자 쪽이었다. 아무래도 청년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대강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청년은 말을 이었다.

  “세상을 구하는 데 아무런 희생도 들지 않는다면, 과거의 구원자를 부활시킬 이유도 없었겠지. 망가지기만 하는 몸이니까, 무슨 일이 생겨도 괜찮아.”

  “괜찮아선 안 돼.”

  “당신을 돕는 일이라면 더욱. 아직 당신은 손이 가는 편이라, 가능한 만큼 도와주고 싶을 뿐이야.”

  “또 그런 식이지.”

  여자는 청년에게 명령하고 싶었다.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 체념하지 말라고. 아무렇게나 자신을 내던지지 말고, 평범한 사람처럼 삶에 집착하라고. 수없이 부탁해봐야 흘려버릴 이야기를, 명령으로라도 듣게 하고 싶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삶에 묶여있을 수 있도록.

  “어쨌든 당신이 싫다면 하지 않을게. 그러니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나한테 알려줄 것이 있다고 했지?”

  그러나 청년은 그녀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제 말을 채워간다. 마치 지금의 일을 사소한 삐걱거림으로 덮어버리려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제를 돌리려는 모습에, 여자는 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그동안 청년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며 간직해온 진실 대신 잔뜩 벼려온 말을 꺼내기로 했다.

  “아니, 하고 싶은 대로 해. 실컷 한 다음에 도망치면 돼.”

  청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자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 힘든 것이리라.

  “도망치는 거야. 나에게서. 세상은 우리가 함께하는 걸 바라지 않아.”

  “낭만적이네.”

  “내 곁에 있다간 죽게 돼.”

  알고 있잖아. 여자는 달래듯이 이야기했다. 내 곁에 있으면서, 몸이 급격히 나빠졌다는 걸. 그래서 죽어간다는 걸.

  “그게 당신의 운명이라는 거야. 처음부터 정해진 결말이 아니라, 세상의 의지가 멋대로 끌어가는 거라고. 불공평하지, 당신은 소망대로 살려고 했을 뿐인데 그게 세상의 뜻에 맞지 않아서 죽어가야만 하는 거야.”

  청년의 삶은 얼마나 남았을까. 이제 여자는 수개월도 그리지 못한다. 세상이 파멸하기 전 그가 먼저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의 삶 곳곳에 죽음이 드리워져 있는데 여자는 밀려오는 죽음을 막을 수 없다. 도리어 그의 삶을 꺼트리고 있을 뿐이다.

  “나를 떠나기만 하면 당신은 살 수 있어. 세상이 견디지 못하는 건 나니까.”

  “레이.”

  여자가 애원처럼 토해낸 말에도 그는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걸치고 있었다. 평소 그녀에게 매달리던 청년은 기묘하게도, 이 상황에서 손위형제라도 되는 듯 침착했다.

  “내가 불행해 보여?”

  “불행하게 될 거야.”

  “내 몸이 언제부터 무너졌을 거라 생각해?”

  “나를 만난 때부터.”

  “아니, 전장에 뛰어든 때부터였어. 아카데미아의 침략에 맞서서 루리를 지켜야 한다고 마음먹은 때. 전부터 느끼고 있었지. 세상은 내가 선택한 길을 바라지 않구나.”

  이 순간조차 청년은 자신의 비극에 너무도 덤덤하다. 세상은 그의 통각을 망가뜨렸고 그에게서 비명도 앗아갔다. 그것이 너무 처참해 여자는 말을 잊었다. 어느새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청년은 깨지기 쉬운 물체를 다루듯 조심스레 그녀의 뺨을 쓸었다. 눈물을 닦아주는 거친 손을 여자는 떨쳐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계속 그 뜻을 거역하고 있었어. 세계의 의지가 우리에게 부모 같은 존재라면, 우리는 지독한 불효자일 거야.”

  “하지만 당신에겐, 아직, 선택지가 있잖아. 더 불행해지지 않을 길이 있잖아. 내가 당신과 함께할 수 없다고 하면, 떠나가라고 명령하면, 들을 거지?”

  “전쟁이 일어난 후로 지금처럼 행복했던 때가 없어.”

  “거짓말.”

  “이제야 내가 쓸모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적어도 당신은 구했잖아.”

  “원수의 딸을 구해봤자 어쩌겠다는 거야?”

  드디어 여자는 진실을 흘린다. 청년이 죽을 때까지 모를 수도 있었던, 자신의 바탕을.

  “내 이름은 아카바 레이. 프로페서, 아카바 레오의 딸이야.”

  청년의 삶을 망가뜨린 자를, 여자는 아버지라고 불렀다. 세계가 파멸을 앞둔 때, 여자는 그 남자의 미래를 위해서 희생하자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살려낸 아비는, 이후 전쟁을 일으켜 청년이 살아온 차원을 폐허로 만들었다. 청년이 사랑했던 이들은 거의 묻히고 동생까지 침략자에게 납치당했다. 모든 불행은 바로 그 남자, 여자의 아비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리고 루리와, 루리를 닮은 셋. 그렇게 네 명은 모두 차원과 함께 갈라졌던 나의 분신. 내가 나타났다는 건, 그 애들이 전부 하나로 합쳐졌다는 뜻이지. 내가 나타나는 바람에 루리의 미래는 영영 없어.”

  여자가 이곳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뻔하다. 청년의 동생을 비롯해 딸의 분신들을 납치한 아비가 네 명의 소녀를 재료로 그녀를 재림시켰기 때문이다. 네 명을 삼켰기에 지금 그녀의 몸은 과거 그대로의 것이다. 각각의 인간으로 살아가던 네 명이 제물이 되어 하나를 만들어냈다. 그러니 청년은 여자와 그 가족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셈이 된다. 거기에 이제, 여자의 존재만으로 삶조차 잃고 있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해도, 참으로 고약한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여자는 언제까지나 숨길 수 없었다. 차라리 그에게 미움받아 그가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더 괴롭지 않게 나를 떠나. 루리를 돌려줄 수는 없지만, 자크는 내가 막을 수 있어.”

  “……어려서부터 내가 참 못하는 게 있었는데.”

  짧은 침묵을 깬 말에는 경악도 분노도 없었다. 청년은 물기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희망을 믿는 거였어. 내 삶은 뭐든 빼앗기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상실감을 느끼기 싫어 희망을 생각하지 않았거든.”

  아무래도 청년은 가장 괴로운 상실조차 삼키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이전부터 희망을 믿지 못했다는 말로,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며. 그것은 아마 여자를 받아들이기 위한 핑계이리라. 여자가 가져온 불행을, 그녀에게 따져 묻지 않는 것이다. 삶의 설계 운운하며, 모든 문제를 자신에게 돌리는 것으로.

  “그런데 당신이 말하는 희망은 믿고 싶어졌어. 그러니까 내게 기회를 줘. 희망을, 현실로 만들 기회를.”

  “내가 실패하더라도?”

  “당신은 이미 나를 구했어.”

  “무엇으로?”

  “쓸모를 주었잖아. 당신을 돕고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내게 역할을 준 거야.”

  청년은 겨우 그런 이유로 그녀에게 삶을 걸기로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목적이 될 수 없을,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것으로. 문득 여자는 꿈속의 새를 떠올린다. 어린 날, 언제나 제 머리 위만 맴돌던 새. 불완전한 날개 때문에 새장을 열어두어도 바깥으론 날아갈 수 없었던 모습. 청년의 삶은 그 연약한 비행을 닮았다. 청년을 놓아주어도, 혼자가 된 그는 갈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갉아먹는 사람에라도 기대야만 그는 이 세상에 뿌리내릴 수 있다.

  “버려도 상관없다곤 했지만, 쓸모없어질 때까지는 써줘.”

  그러면 나는 죽을 때까지 행복할 거야. 꼭 그런 말이 숨겨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여자는 자신이 한 사람의 삶을 쥐고 있음을 느낀다.

  “세상을 구하자, .”

  여자는 청년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제야, 여자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앞으로 제 삶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한참을 빙빙 돌면서 피해왔던 답이지만, 이제는 그것만이 정답임을 안다. 불안인지 감격인지, 품 안에서 어린 짐승처럼 떠는 청년에게 그녀는 가장 달콤한 말을 속삭인다.

  “우리는, 끝까지 같이 갈 거야.”

  여자는 그의 신이 되기로 했다.

 

 

Chapter 2: https://hyeonsoyah.tistory.com/133

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