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슌ts] 검은 요람

2019. 10. 28. 23:51 from 01

 

공주의 장례식은 쓸쓸했다. 권위에 걸맞지 않게 작은 규모에, 조문객마저 적었다. 멸망한 나라의 마지막 후손이라, 공주라는 이름은 별 가치를 갖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장례식에서 볼 수 있는 얼굴이라곤 과거 공주에게 충성했던 이들과 고상한 체하고 싶은 몇몇 귀족들이 거의 전부. 사내는 총통의 아들로서 장례식에 나타났다. 통치자의 아들이 공주의 마지막을 함께한다. 말이야 훌륭했지만, 사실 그의 존재 자체가 애도의 자리에 걸맞지 않은 얼룩이었다. 그의 아비가, 그의 나라가 공주의 모든 것을 앗아갔으므로. 스물도 되지 않은 나이에 공주가 죽음을 맞은 것도 결국 사내의 가문 탓이리라.

장교로 출발해 정점에 오른 총통은 작은 나라 하나를 다스리는 것만으론 만족하지 못했다. 끝없이 주변 국가를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전쟁을 일으켜 가장 탐났던 나라를 덮치고 말았다. 그것이 엑시즈, 공주의 나라였다. 엑시즈 곳곳에선 저항군을 결성해 맞섰으나 짓밟고 빼앗기 위해 훈련받은 군사를 이길 수 없었다. 무의미한 희생을 막으려거든 나라를 포기하라는 요구에 결국 왕은 항복했다. 엑시즈가 자랑하던 문명을 거의 잃은 시점이었다.

그 후, 엑시즈의 왕족은 대대로 다스려온 나라를 떠나 이곳으로 왔다. 총통은 항복한 왕에게 대공의 칭호와 토지, 머물 저택과 시중들 이를 내리긴 했으나, 굴욕적인 은혜였다. 엑시즈는 이미 적국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왕족은 허울뿐인 권위만을 안고 평생 적의 시선 아래 살게 되었으므로.

대공 일가가 머물게 된 저택은 엑시즈 궁이라고 불렸는데, 엑시즈가 멸망하기 전 그들이 살았던 진짜궁이 주인을 잃고 낡아갈 것이라 생각하면 참으로 우스운 명칭이었다. 그나마도 이젠 그 괴상한 이름도 사라질지 모른다. 공주의 죽음으로, 옛 엑시즈 왕족, 즉 대공 일가는 모두 저택을 떠났으므로. 사내는 죽은 공주를 위해 꽃을 바치며, 멸망한 나라를 생각했다. 엑시즈란 이름은 세상에 언제까지 남아있을까. 언제쯤이면 생명이 다할까. 얼굴에 감상이라도 비쳤는지, 곁에 선 수하가 슬그머니 사내에게 말을 걸어왔다.

엑시즈도 이제 완전히 끝났군요.”

루리 공주마저 죽었으니까.”

자손이 더 있었대도 엑시즈에 미래는 없었을 테지만요. 그 역사가 공식적으로 종료된 게 지금일 뿐입니다.”

엑시즈가 이렇게 되다니,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을 일이야.”

허망하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나라는 흡수되고, 왕족은 전부 죽었어. 공주의 장례가 끝나면 이곳도 버려지고, 엑시즈는 점점 묻힐 거다.”

엑시즈 궁을 가장 먼저 떠난 왕족은 대공이었다. 다음으론 대공비였다. 사실상 새장이나 다름없는 저택에서 벗어난다거나 본래 있어야 했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행운은 없었다. 죽어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뿐이다. 공주는 부모보다는 오래 버텼지만 총통의 명령으로 어딘가 불려갔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엑시즈 멸망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사내가 왕족의 장례식에 향한 것도 벌써 세 번째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그 여자가 안 보이는군요. 데리고 있지 않으셨습니까?”

그 여자?”

그 인형 여자 말입니다. 언제나 공주 곁에 있었던. 아카바 가에서 데려갔다고 들었는데요.”

거기서 사내는 얼마간 자신이 데리고 있던 자를 떠올린다. 처음 만난 때부터 죽음의 색을 걸치고 있었던 여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생명이 아니라, 계산과 조작으로 만들어진 존재. 인간의 외형으로 인간의 감정을 이야기하던 여자는 보통 인형이라 불렸다. 기묘한 태생에, 언제나 공주의 주변을 맴돈다는 특성 때문이었으리라.

공주를 섬기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여자를, 사내는 괜한 변덕으로 손에 넣었다. 공주의 것에까지 욕심이 났냐는 시선에는 빈 웃음만 돌려주면서. 인형은 그에겐 별로 마음을 열지 않았으나 곁을 지킨다는 요구사항만은 평범하게 수행했다. 다만 그것은 얼마 전까지의 이야기. 공주가 죽은 날, 인형도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이제는 없어. 도망친 모양이야.”

떠돌고 있다 해도 공주의 이야기는 들었을 법한데, 주인의 장례에 오지 않았다니 이상하군요.”

인형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 공주의 죽음을 알고 사라진 것인지도 모르지. 자기를 형제처럼 대해준 주인의 죽음이라, 끔찍하잖아?”

사내의 목소리엔 그 이상의 말을 끊어내려는 듯한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 화제는 그에게 껄끄럽다. 섬기는 이의 감정을 읽어냈는지, 더 들을 말이 없었던 것인지 수하는 다행히도 인형에 대해선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사내는 공주의 관이 덮이는 것을 바라보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편히 잠들기를.”

불행한 삶이었죠.”

이젠 해방될 거야.”

죽은 공주에게서 돌아섰을 때, 사내는 수상쩍은 사람이 멀찍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해진 망토를 뒤집어쓴, 체구가 작은 남자가 공주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다. 짚이는 사람이 있었지만 사내는 못 본 체 시선을 돌렸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그곳을 보았을 땐 아무도 없었다.

장례식에서 돌아온 사내는 인형이 머물던 방으로 향했다. 인형이 자취를 감춘 날, 그 방이 흐트러진 것 하나 없이 완벽하게 정리된 것을 보고 다들 인형이 작정하고 도망쳤다고 말했다. 공주를 찾아 빠져나갔건 갈 길을 찾아 떠났건, 결국 그를 버리고 간 것이라고. 다시 돌아오지도 않을 거라고. 사내는 부정하지 않았고 인형을 기다릴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도망친 게 아니라는 것만은 알았다. 그녀는 도망칠 생각이 없었으나 사내를 떠나는 것은 예정되어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사내가 그녀를 데려왔을 때부터.

공간을 훑던 시선이 책상 위의 장식품에 닿았다. 철사를 엮어 작은 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인형의 특기. 보통은 공주가 사랑했다는 새를 빚어내곤 했다. 늘어선 것은 조금씩 다르긴 했으나 전부 새의 형상. 사내는 문득 그 속에서 이질적인 것을 발견했다. 인형이 사라지기 전, 사내에게 만들고 싶은 것이 없냐고 물었을 때 그가 장난처럼 부탁한 유물을 닮은 것이 끼어있었다. 이런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가. 직접 받지 못한 선물을 집어 들고 한동안 바라보던 사내는, 그것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고서 자리를 떴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 숨겨두자고 생각하고서.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방을 나서자마자 사용인이 급하게 부르는 바람에 사내는 그대로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총통의 집무실로 향하는 동안 사내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보았으나 아버지가 호출한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공주의 장례에 대해 듣고 싶진 않을 것이다. 중대한 이야기를 할 것 같지도 않다. 아버지는 외아들인 그에게 도통 만족하지 못했으므로. 아버지라면 차라리 아들보다, 한창 지원 중인 연구를 담당하는 상급 연구원을 더 믿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동원되는 실험체를 더 사랑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죽은 공주 같은.

아버지는 자신이 끌어내린 주변국의 왕가에 아무런 연민도 느끼지 않았으나, 공주에게는 집착했다. 공주가 부모를 잃자 불러들여 깊숙한 곳에 가둔 것이 바로 아버지였다. 그동안 공주를 숨기고 있었던 것은 그녀를 독점하기 위함이면서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일을 꾸몄기 때문이리라. 사내는 상부에서 의욕적으로 매달리는 연구에 공주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말을 언뜻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러니 공주의 죽음은 아버지에겐 매우 당혹스러운 사건이었을 것이다. 한참 몰두하던 연구가 영영 미완으로 남게 되었으므로. 처음부터 아비가 추진하는 일에 회의적이었던 사내는 계획이 꼬인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지만, 그런 생각을 내비치진 않았다. 공주의 장례를 준비하면서도 아버지는 내내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슬픔은 한 조각도 없는 주제에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녀의 죽음을 유감스러워했다.

아마 아버지는 지금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 불러들인 아들을 바라보지도 않는 것에 사내는 확실히 느꼈다. 바짝 다가가도 자료만 보고 있을 뿐 말 한마디 없다. 사내는 속에서 치미는 삐딱한 마음을 누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도울 일이라도?”

네가 데리고 있던 여자는 어디 있지?”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알고 있잖아. 인형.”

사라졌습니다.”

어디 숨겨둔 건 아니고?”

총통은 아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사내는 경험적으로 아비가 집요하게 관심을 보이는 대상은 대개 손에 넣고 싶은 존재임을 알았다. 인형이 저와 함께 지낼 땐 그녀를 그저 망국의 유물처럼 취급하더니, 이제 와서 눈독 들일 이유라도 생겼는지.

아버지께서 그 여자를 찾을 날이 오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요. 공주로 벌이던 일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래. 말해봤자 너는 이해하지도 못하겠지만. 공주를 동원한 연구를 끝내지 못했으니 아쉬운 대로 그것이라도 쓸까 생각했다.”

인간이 아닌데도요?”

공주를 모델로 만든 인형이다. 공주와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인간이 아니니까 공개적으로 연구해도 시끄럽지 않을 테고.”

사라진 게 다행이군요.”

그렇게 생각해?”

사내는 이상할 정도로 인형에게 약했다. 그러니 그녀가 공주의 대용품으로 위험한 연구에 동원되는 건 그로선 인정할 수 없는 일. 그것이야말로 가문이 수없이 지적해온 그의 결함이었다. 인간적인 결점. 사소한 감정. 대의를 위해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 아직도 부족하구나. 총통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저번부터 말했을 텐데. 이 연구는 세상을 위한 거다. 연구에 따르는 희생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네가 연구를 이해할 리 없지. 그래서 너를 이 일에 끌어들이지 않는 거야.”

바란 적도 없습니다.”

실망스럽군.”

독기 없는 목소리가 시시했다. 처음부터 기대조차 없었음을 알기에, 사내에겐 타격도 없는 공격이었다.

네가 들인 것이었으니 사람을 풀어서라도 찾아.”

못 찾을 겁니다.”

어차피 인형이야. 아마 원래 주인인 공주만 사랑하도록 설계되었을 거다. 정을 쏟아도 돌려받을 수 있는 건 없어.”

그건 제가 제일 잘 압니다.”

인형은 언제든 그를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다. 붙잡아둘 수 있었던 시간이 의외로 길었을 뿐이다. 사내에게 유감인 것은 그녀가 사라졌다는 게 아니라,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인데. 서로 맞물리지 못하는 부자 사이엔 더 오갈 말도 없어, 사내는 냉소하며 방을 나섰다. 돌아서자마자 그는 코트 주머니에 숨겨둔 것에 손을 뻗는다. 철사로 만든 장식품. 그 차갑고 거친 감촉이 그에게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인형의 유품이었다.

 

*

 

인형을 처음 만난 것은 장례식에서였다. 엑시즈가 멸망한 지 오래지 않아 대공은 자살을 택했다. 겉으론 명예만 남은 삶을 비관한 죽음으로 보였으나, 사내는 그것이 강요된 죽음임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대공을 치우고 싶어 했고, 불운한 대공을 압박할 것이라곤 전부 쥐고 있었다. 당신의 나라는 온전히 유지하겠다. 남은 가족은 조용히 살게 하겠다 대공은 그런 말에 목숨을 끊고 괴로운 운명으로부터 벗어났으리라.

대공에 죽음에 가문이 관여했음을 대강 눈치챘을 텐데도, 사내가 장례식에 나타난 것에 수군거리는 이는 없었다. 그의 뒤에 자리한 가문의 힘을 두려워한 게 틀림없었다. 힐끔거리는 시선조차 겁먹은 듯 곧 거둬들이는 것이 사내는 우스웠다. 권세란 그렇게 무거운 것이었다.

대공비는 지친 듯 표정이라곤 없었고 공주는 눈물로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한때 공국을 다스렸던 이의 죽음인데도, 애도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멀찍이서 바라보던 사내조차 씁쓸해질 무렵, 그의 눈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본국에 머물게 된 엑시즈의 귀족이라면 대강 아는 사내인데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다만 처음부터 쭉 유족의 곁을 지키는 것이 대공 일가와는 제법 연이 깊어 보였다. 상복까지 입은 여자는 공주에게 다가서 그 눈물을 닦아주었다. 조용한 위로에 겨우 가장하던 강한 모습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는지 공주는 여자에게 그대로 매달렸다.

다음 순간 공주가 흘린 것은 사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호칭이었다. 언니. 대공의 유일한 자식으로 알려진 공주가 언니라 부르는 대상이 있었다. 뜻밖의 사실에 사내는 그대로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니, 어쩌다 이런 일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겨우 말을 잇는 공주를, 여자는 가만히 끌어안았다.

네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하지만.”

누군가 이런 일을 바랐겠지. 아카데미아라거나.”

거기서 여자는 고개를 홱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금빛 눈이 무섭게 번득였다. 아름다우나, 비현실적으로 선명한 색채의 눈. 유리구슬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 사내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인가?

이럴수록 더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 해. 그 자들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여자는 공주의 어깨를 감싸면서도 시선은 사내에게 두고 있었다. 공주를 그에게서 지키겠다는 것처럼.

누구?”

아카바의 인간.”

사내에겐 낙인 같은 이름을 여자는 입에 올렸다. 화려한 왕관이자 죄의 꼬리표인, 가문의 이름을. 거기서 사내는 확신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누구인지도 짐작하고 있었다고.

돌아오자마자 사내는 엑시즈 왕실의 사진을 찾았다. 장례식에서 본 여자가 왕실과 관계된 인물이리란 생각에서였다. 사진은 많았으나 그에 담긴 것은 거의 비슷했다. 관을 쓴 왕과 우아하게 차려입은 왕비, 그 사이에서 웃고 있는 공주. 동화에서 그려낸 듯 근사한 왕가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사내는 수하에게 물었다.

루리 공주는 외동딸이지?”

그렇죠. 엑시즈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대공의 뒤를 이었을 겁니다.”

그럼 공주가 언니라 부르는 사람은 누구지? 공주와도 꽤 닮았던데, 친척?”

이 나라에 남은 친척은 없을 텐데요.”

원래부터 손이 귀한 왕가였고 몇 안 되는 친척은 다른 나라에 있을 테니까요. 덧붙인 말에서도 여자에 대한 정보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내가 찾아낸 공주의 사진엔 꼭 그녀가 붙어있었다. 꽤 굵직한 사진에까지 붙어있는 것을 보면 공주와의 연결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내는 사진 속 여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이 사람을 말하는 거야. 공주 옆에 선 여자.”

, 누군지 알겠네요. 공주의 인형이에요.”

인형?”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내에게 수하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마땅히 부를 말이 없거든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본떠 만든 생명이에요. 본질은 마력덩어리라던가. 공주가 어릴 때부터 궁에서 함께 지내서 공주에겐 형제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군요.”

이름은? 궁에서의 정확한 역할은?”

이름은 들은 적 없고, 역할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거예요. ‘공주를 위해 봉사한다.”

봉사라.”

가르치고 보호하고 함께하고. 전부 공주에 맞춰졌을 겁니다. 만능장치인 셈이죠.”

희한한 설계로군.”

계산과 조작으로, 오롯이 한 인간을 위해 빚어낸 생명. 인형이라는 호칭에 걸맞은 속성. 태생부터 타의가 개입된 존재라, 완벽한 타인인 사내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사내가 드물게 눈을 빛내자 수하가 은근하게 물어왔다.

갑자기 그 여자를 찾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장례식에서 처음 만났는데 날 무척 경계했어. 공주를 해칠 거라고 생각했는지.”

신경 쓰지 마세요. 개가 집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겠죠. 어차피 앞으로 만난 일도 없을 테니 잊으시면 됩니다.”

수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때만 해도 사내는 그녀를 그대로 흘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두어 달이 지나서 사내는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대공비의 장례식에서였다. 사인이 명확하지 않은 죽음이라 온갖 말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군가 살해했다느니, 자살을 종용당했는데 평범한 죽음으로 위장했다느니. 죽음조차 이야깃거리가 되어버린 불행한 망자는, 정작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다.

어머니마저 잃은 공주는 전보다 지쳐 보였다. 곁에 선 여자는 변함없이 무표정했는데, 사내의 시선이 닿을 때면 그 얼굴에 짙은 경계를 비추었다. 이전보다 훨씬 날카롭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아니, 그것이 정말 경계였던가? 사내는 궁을 빠져나올 때쯤 생각을 수정했다. 어쩌면 여자는 그에게 원망을 던졌을지도 모른다고. 이번의 장례도 너희 가문 때문이라고 무언으로 비난했을 수도 있다고. 왕족이 아니기에 그녀는 자유롭다. 인간이 아니므로 세상에서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도덕의 선이 낮다. 슬픔을 소화하느라 바쁜 공주를 대신해 증오며 원망이며 그에게 마음껏 쏟아냈는지.

만일 그렇다고 해도 사내는 불쾌하진 않았다. 통치자의 아들로 그 권세에 기대 살아가지만, 사내는 아버지가 엑시즈에 저지른 일의 본질을 알고 있었으므로. 거의 박제나 다름없이 무력해진 왕가에서, 자기네를 나락으로 떨어트린 이들에게 적개심을 보인다 한들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새장에 갇힌 새가 창살을 차는 꼴이었다. 사내는 인형이 자신에게 내내 불편한 시선을 던졌음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여자의 날카로운 눈빛은 사내에게 깊게 남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사내 본인도 쉽게 짚지 못했다. 왕가의 어떤 사람보다 직접적으로 그를 미워해서일까. 아버지에 대한 오랜 반항심 때문에 공연히 동요하게 된 것일까. 왕족도 아니고 왕족을 섬기는 자에게, 그것도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받은 시선을 떠올리게 된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두 번의 장례식 후 때때로 여자를 떠올리며 그 가여운 생명에 가벼운 감상을 얹던 사내에게, 어느 날 수하가 지나가는 듯이 말했다.

엑시즈 궁도 이제 버려지겠군요.”

아직 왕족이 남아있는데?”

아뇨, 공주도 떠났잖습니까.”

옷매무새를 다듬던 사내가 멈칫했다.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적이 내준 거처에 묶여 숨죽여 살던 공주가 새장을 벗어나는 날이 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새로운 거처를 찾은 건가?”

아카데미아에서 공주를 호출했습니다. 각하의 명령이라 아시리라 생각했는데요.”

사내는 거기서 아비가 자신만 모를 명령을 내렸다는 것보다, 공주마저 평온하게 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보다, 공주의 곁에 내내 붙어있었던 인형에 가장 먼저 생각이 뻗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바로 엑시즈 궁으로 향했다. 다소 충동적인 방문이었으나 어차피 궁에서 그를 막아설 자는 없었다. 쓸쓸한 적막이 내리깔린 저택에, 사내는 사적으로는 처음으로 발을 디뎠다. 다행히도 그가 찾는 이는 들어서자마자 만날 수 있었다.

여자는 홀로 앉아있었다. 시녀조차 거의 떠난 저택의 정원에, 텅 빈 얼굴로. 기묘하게도 그녀는 장례식에서 보았던 것처럼 상복을 입고 있었다. 섬기던 이의 죽음으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에게 공주의 부재가 새로운 장례가 된 것인지. 어느 쪽이건 참혹한 일이었으나, 사내가 생각하기엔 아무래도 후자에 더 가까운 듯했다. 대공비의 장례 때까지만 해도 그저 무표정했던 그녀가, 공주가 한동안 돌아오지 않은 것만으로 완전히 힘을 잃었으므로.

여자를 들인 것은 대공이나 대공비였을 테지만, 주인이라고 부를 존재는 공주였을 것이다. 여자는 처음으로, 버려진 짐승처럼 처연해 보였다. 왕가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기에 명목상의 권위도 없는 그녀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공주를 섬겼으니 쫓겨나지야 않겠지만 공주의 행방을 찾을 수도, 상황을 반전시킬 수도 없다. 자신의 주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아카바의 사람이 무슨 일이지요?”

방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여자는 딱딱하게 물었다. 그에 답하는 대신 사내는 그녀의 곁에 걸터앉았다. 여자는 바로 경계 가득한 시선을 그에게 꽂았다.

돌아가세요. 당신이 올 곳이 아닙니다.”

내쫓을 구실도 없잖아요?”

무엇을 바라죠?”

공주님이 돌아오지 않으면 당신은 어디로 갈 건가요?”

여기 있어야겠죠. 나는 궁에서만 살았으니까, 바깥과 교류가 없어 갈 곳도 없고 데려가줄 가족도 없거든요.”

그럼 나와 함께 갈래요?”

의지할 사람도 지켜야 할 사람도 잃은 인형이 어떻게 되든, 정복자의 입장인 사내는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그녀가 언제 돌아올지 모를 공주를 기다리다 외로움에 미쳐 죽어도 그의 잘못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사내는 그녀를 방치할 수 없었다. 눈에 들어온 이상 자신이 그녀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녀의 불행에 아버지가 관여해서일까. 혹은 주인 잃은 처지가 한순간 가여워진 것인가. 데려간다고 해서 그녀에게 대단히 베풀 것도 없었다. 애초에 급작스러운 제안에 그녀가 응할 것이라는 자신도 없었다. 과연 여자는 한동안 침묵했는데, 겨우 내뱉은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무슨 이유로?”

공주님은 아카데미아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요.”

그 말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자는 그에게 바짝 붙더니 속삭였다.

데려가줘요.”

 

*

 

인형은 당당하게 정복자의 저택에 들어섰다. 적의 수하로부터 날카로운 시선과 수군거림을 받으면서도, 흔들리는 일 없이. 그녀를 알아본 몇몇 이들은 사내에게도 책망의 시선을 보냈으나 사내는 어떤 변명도 준비하지 않았다. 망국의 유물, 그것도 지독하게 불행한 공주가 아끼던 존재. 하필 그런 것을 들인다는 것은 누구도 쉽게 납득하지 못할 일이었다. 차라리 침묵하며 그녀를 자신의 영역에 자연스레 끼워 넣는 것이 나았다.

어차피, 사내는 총통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불만을 입 밖에 내도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내에게 인형에 대해 일러주었던 수하만이 빈 웃음을 걸치며 속삭였을 뿐이다. 저것도 참, 공주만큼이나 불행하군요. 사내는 그 말에 답하는 대신 저에게 바짝 따라붙어 걷는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상복을 입은 모습이 그녀를 짓누르는 불행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분명, 자신의 가문이 드리운 그림자였다.

필요한 게 있나요?”

불편한 시선에서 벗어나 단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여자가 던진 첫 마디였다.

필요한 것이요?”

경호, 교양적인 토론, 듀얼 상대, 공예품 만들기. 당장 생각나는 건 이런 것이군요. 필요한 걸 골라요.”

그제야 사내는 앞뒤 없이 흘러나온 질문을 이해했다. 여자는 자신의 쓸모를 늘어놓고 있었다. 목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니만큼, 그에게 스스로의 필요를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내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모를 변덕으로 데려온 존재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게 있을 리 없었다.

내게 봉사할 필요는 없어요.”

물론 그렇죠. 당신은 내 주인이 아니니까. 하지만 쓸모 있는 척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공주의 것을 데려왔는데 적당한 핑계가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인형이라는 말에 흥미가 동했다는 건 어때요?”

정말 그랬나요?”

글쎄요.”

영영 제대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인형은 더 캐묻는 대신 웃음을 걸쳤다. 아무래도 좋아요.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 부탁해요, 도련님.”

아카바 레이지입니다.”

그 이름을 부를 일은 없을 거예요.”

그쪽의 이름은…….”

불필요한 질문이네요. 당신도 내 이름을 부를 일 없어요.”

냉랭한 말만큼이나 악수는 짧았다. 여자의 손은 잠깐 닿았다 떨어졌다. 흰 손은 보통 사람의 것처럼 부드러웠으나 체온만이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인식시키듯 낮았다.

그 후 인형은 자연히 사내의 삶에 파고들었다. 태생이 태생이어서인지 그녀는 자신이 들어온 저택의 질서를 빠르게 감지하고 누구도 꼬투리 잡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행동했다. 사내가 그녀의 위치를 명확하게 정해놓지 않은 탓에 그녀는 가문의 손님과 사용인 사이의 어딘가에 놓였는데, 어느 쪽이건 원래 제 위치인 양 자연스럽게 걸친다는 것이 사내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의심을 사서는 안 되니까요.]

정복자의 영역에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든 것을 놀라워하자, 여자가 돌려준 답이었다.

[그래야 루리를 구할 것 아니에요?]

사내가 인형을 데려온 목적이야 뚜렷하지 않았으나 그녀가 사내를 따라온 이유란 하나뿐이었다. 공주의 행방을 찾기. 물론 그녀가 단순히 공주의 안녕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할 리는 없었다. 최종목표는, 공주를 적에게서 구해내는 것. 저택에서 흘러드는 정보로 총통이 공주를 연구에 동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인형은 바로 공주를 탈출시키는 것을 생각했다. 좌절될 게 뻔한 소망임을 알면서도 사내는 인형의 희망을 꺾지는 않았다.

짧은 평온 끝에 오래도록 불행할 여자를 단순히 연민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답지 않은 어린 마음이 더욱 컸다. 그녀를 더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다는 욕망. 희망이 사라질 경우, 그녀는 미련 없이 저택을 떠날 게 뻔했다. 저와는 관계없는 타인인 사내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살아갈 수도 있었다. 사내는 인형을 움켜쥔 이상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 나름의 계략에 나름대로 맞춰줄 수밖에.

[공주님을 친근하게 부르는군요.]

[그 애는 나를 언니로 대해주었거든요.]

[그럼 당신에게 공주님은, 동생 같은 존재인가요?]

[인형이 가족 운운하니까 우스운 모양이지요.]

표정은 바뀌지 않았으나 목소리에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녀에게 가족이란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사내는 새삼 실감했다.

[아뇨. 신기할 뿐입니다. 나에겐 그렇게 서로를 위하는 가족이 없으니까요.]

피가 섞인 사람들인데도 말이지요. 일찍이 서로 돌아선 부모를 생각하며 사내는 쓴웃음을 걸쳤다. 소년기 대부분을 아비의 방치 속에서 보낸 그에겐 인형이 매달리는 가족의 사랑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여자는 사내의 말에 나쁜 뜻이 없음을 확인하자 태도를 조금은 누그러뜨렸다.

[나는 만들어졌으니까 보통의 형제는 있을 수 없다지만, 루리는 이미 내 가족이에요. 그러니 그 애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요. 이곳에 머무는 것도, 당신에게 협력하는 것도,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최악의 경우에는?]

얼굴에 비장함마저 어리는 것을 보고 흥미로워져 슬쩍 물었더니 인형은 거기서 말을 끊어버렸다. 사내의 관심을 느낀 순간, 자신이 완벽한 타인에게 많은 것을 흘리고 있다고 인식하게 된 모양이었다. 아니요.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니 잊으세요. 여느 때처럼 건조한 모습으로 돌아온 여자는 그렇게 사내의 의문을 닫았다. 생략된 말이 무엇이었는지 사내가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때, 인형이 그를 떠나기 직전이었다.

그 날의 대화로, 사내는 인형의 소망이 제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한 존재라 해도, 인간의 모습을 쓰고 이십여 년을 살아온 바람에 내면은 인간을 닮은 모양이었다. 안쓰럽기까지 한 모습에, 사내는 약간의 희망을 흘리는 것으로 여자의 기대에 맞춰주었다.

[이상한 사람이네요, 도련님은.]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나를 정말로 도와주고 있잖아요. 총통의 뜻에 반해도 되는 건가요?]

은밀히 조사해 얻어낸 몇 가지 정보를 인형에게 전했을 때, 인형은 그렇게 반응했다. 적대하는 이의 아들이 협력한다는 것에 놀라기라도 한 것인지. 거기서 사내는 철이 든 후로 한 번도 자랑스럽다 느낀 적 없는 아비를 떠올렸다. 어린 아들을 내팽개친 채, 세를 키우는 데만 몰두하던 장교를. 총통이 되어선 아들이 제 입맛에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실망스러워하는 자를. 때문에 사내의 답에는 냉소가 비쳤다.

[‘각하께선이런 줄도 모를 겁니다. 친아들에는 도통 관심이 없으셔서.]

[생각지 못한 불화인데요.]

[아카바는 균열을 감출 줄 알지요. 완벽한 이미지를 걸쳐야 하니까. 다들 포장에 능하니, 외부의 누가 짐작하겠습니까.]

[그럼 나를 돕는 건, 반항심 때문인가요?]

[반항심?]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었다. 그러나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사내는 총통의 야심을 인지한 때부터 싹튼, 아비를 향한 반감을 떠올렸다. 그는 한 번도 아비의 뜻에 동조한 적 없었다. 타자를 짓밟고 파멸시키며 쌓는 권력은 끔찍했다. 망국의 생존자를 실험체로 삼아 실행해온 실험도 역겹기 그지없었다. 사내는 총통이 꾸미는 일이 실패해 무고한 희생자가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말이에요. 아카바 레오를 무너뜨리길 바란다거나.]

그리고 누구도 아비를 막지 않는다면, 그 자신이 나서 멈출 뜻도 있었다. 오랜 시간 철저하게 준비해, 세력을 키우고, 아비에게서 군대를 빼앗는 것 그것이 사내가 소년기부터 생각해온 미래였다. 총통에 대항할 힘이 없어 실현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래요. 그런 불순한 동기가 있긴 하지요.]

[좋아, 도련님을 조금은 믿어도 될 것 같아요.]

[대단찮은 동기만 듣고서?]

[불순한 것이니 믿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럴듯한 이상이나 대단한 목표를 내세운다면 아카바의 사람을 어떻게 믿겠어요.]

무엇을 숨겨뒀을지 모르는데. 인형이 덧붙인 말에, 정복이란 말로 야심을 숨기고 타국을 짓밟은 아비가 떠올라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꾸미는 것을 잘하는 가문이니 말끔한 변명보다는 차라리 사소하고 조잡한 고백이 더 믿음이 간다는 주장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이야기였다. 사내가 아비의 계획을 방해할 수 있을 인형을 굳이 데려온 것에 그리 순수한 목적이 있지는 않으리라는 것도 맞았다.

아비에 대한 반감, 오랜 반항심.

그것이 공주의 인형을 데려온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아비가 낳은 피해자를 연민해 먼저 다가가고, 사소하게나마 돕게 된 이유. 아비의 뜻에 반하기에 공주를 지키는 데 기여하고, 아비를 막아서려 하니 인형을 저택에 들인 것일까. 사내는 그동안의 저답지 않은 행동의 단서가 조금은 보이는 듯했다. 다만 그가 풀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인형을 움켜쥐고 싶은 욕망의 근원. 그 또한 반항심 때문이었을까? 단순히 아비가 만든 폐허에서 무엇 하나라도 건져내겠다는 마음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사내는 거기까지는 답할 수 없었다.

사내의 욕망에 깔린 것이 무엇이었건, 그가 인형을 돕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비의 연구를 제대로 파헤치는 것은 무리였지만, 아비가 총통이 되기 전 저택에 남겨둔 기록을 분석하는 것으로 실험의 방향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인형은 사내의 곁에서 그와 함께 여러 가설을 이야기했다. 때로 사내는 인형에게 폐기된 실험체가 쌓인 장소를 몰래 열어주기도 했다. 그곳에 숨어들었다 돌아올 때마다 인형은 단정한 얼굴에 경멸을 얹고 있었다. 무엇을 보았나요. 사내의 물음에 그녀는 늘 같은 답을 돌려주었다. 아카데미아의 죄.

사내의 도움에 약간은 마음을 연 것일까. 시간이 흐르며 인형은 조금씩 그에게 사적인 이야기도 흘리기 시작했다. 루리는 새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루리의 덱은 새를 테마로 했죠. 공주의 이야기를 할 때 그녀의 얼굴은 드물게 밝았다. 추억을 되살리는 순간에만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나는 루리에 맞춰주고 싶어서, 내 덱도 새를 테마로 하기로 했어요. 루리와는 대조되는 기계 새로.

내 태생에 어울리지 않나요?”

만들어진 존재니까, 기계가 어울린다는 뜻인가요.”

겉으로는 루리와도 제법 닮았지만, 바탕은 인간이 못 되거든요.”

인형은 철사를 엮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도통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 엮어갈수록 점차 새의 형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루리가 좋아하던 것으로 할게요. 그 말을 시작으로 철사를 매만지던 여자는 능숙하게 새를 빚어내며 공주의 이야기를 중간중간 끼워 넣었다.

여기에 외피를 씌우면 그럴듯한 새가 되잖아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도련님이 보는 모습은 루리와 닮게 덧씌운 외형일 뿐이죠. 그래서 기분 나빠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저건 배를 갈라도 뭐가 나올지 모른다고.”

당신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알면서도요?”

그래, 그게 내 자랑이었지요. 내가 기계나 다름없다는 것도, 인위적으로 루리를 닮게 만들었다는 것도 나에겐 흠이 아니었어요. 둘 다 루리를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난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보다 무장할 수 있답니다. 루리랑 닮았다는 것은 위급시에 루리를 지킬 수 있게 하고요.”

그게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여자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배어있었다. 사내는 절대적으로 공주에 맞춰진 그녀의 사고구조가 새삼 놀라워졌다.

그러니 여기서도, 언젠가 루리를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이런 곳에 갇혀있게 하지 않아요.”

그럼, 공주님을 구하면, 다음은 어떻게 할 건가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물음이었으나 내뱉은 이상 궁금해지긴 했다. 명확한 답을 들을 생각으로 사내는 부러 한마디 덧붙였다. 공주님보다, 당신이 어떻게 할지 묻는 거예요. 어느 정도 답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는데, 인형은 별달리 고민하지 않았다.

글쎄요.”

요양이라며 어디 조용한 곳에 가는 건 어때요? 병약한 아가씨와 사용인 정도로 위장하면 평범하게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만일 인형이 어떤 구상이라도 입 밖에 낸다면, 사내는 그녀를 도울 뜻이 있었다. 자신의 변덕으로 그녀를 데려온 이상, 끝까지 책임을 져야 했다. 가능한 오래 움켜쥐고 싶다고 해도 언젠가는 떠날 자. 아비의 죄를 대신 갚는 것으로 생각하며 지원하면 되었다. 답이 돌아오기만 하면 어떻게 도울지 의논할 수 있으련만 인형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철사에, 주인이 사랑했다는 새의 형상에 꽂혀있을 뿐.

그것도 아니면, 공주님을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겨 피신시키고 당신은 여기서 지내는 건?”

나를 동정하는군요.”

사내는 인형의 입가에 그려지는 웃음을 보았다. 아이를 달래는 어른처럼, 미지근한 웃음이었다.

인간이 아니라 괜히 신기한데, 바라는 게 크게 없으니 조금만 도와도 감사할 것 같고, 데리고 있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존재니까, 그렇게 친절한 거예요. 도련님은.”

그런 것이 아니라.”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앞으로 뭘 할지는 다 생각해두었으니까.”

더 이상의 말을 끊어내려는 의도가 명백했으나 사내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녀 같은 자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관심을 둔 대상이 허망하게 무너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사내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그리고 그녀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을.

당신이 행복한 길인가요?”

내 행복은 나에게 달려있지 않아요. 루리가 결정하죠. 그러니까, 루리를 구하기만 하면 행복해지는 거예요.”

공주님이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하다. 그런 이야기지요?”

이해했으면 됐어요.”

당신이 정말로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지만, 좀 더 자신을 챙기는 게 좋아요.”

그제야 인형은 고개를 들었다. 금빛 눈이 사내를 오래도록 담았다. 그녀의 시선에 엉긴 것이 하나하나 파헤칠 수 없는 감정의 혼합물임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도련님과 이야기하는 여자가 사람인가요?”

그렇다고 당신에게 행복할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도련님은 이상한 데서 마음이 약해요.”

인형은 깔깔대고는 여전히 물러설 기미가 없는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숨이 닿을 거리에서 보는 여자는 여느 때보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나를 정말로 돕고 싶어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내가 가능한 선에서라면, 얼마든지요.”

그러면 딱 하나만 하면 돼요.”

무엇이요?”

배반이죠.”

여자의 목소리는 장난처럼 유쾌했다.

 

*

 

공주가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저택에 번졌다. 과로 때문이라는 말이 붙었지만, 어디 숨겨졌을지도 모를 공주가 어떤 이유로 쓰러졌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그간 공주의 소식이 새어나가는 걸 최대한 봉쇄하던 총통이 굳이 공주의 상태를 밝힌 것도 수상쩍게 느껴졌다. 쓰러졌다고 꾸며 공주를 완벽하게 감금하려 들거나, 의사라고 속여 위험인물을 공주 곁에 붙이기 위한 수작일 수도 있었다. 과연 인형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무언가 있을 거예요.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루리에게 그동안 무슨 일을 했을지 불안해지고요. 그녀는 그러한 말을 내세워 자꾸만 사내에게 재촉했다.

공주의 행방이라도 확인하자, .

[가능하겠어요?]

[도련님은 아카바의 사람이잖아요. 어떻게든 가능하게 해야죠.]

[아카바 레오는 내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아요.]

[그래도 그 남자가 출입을 금하는 구역 정도는 알고 있지 않나요?]

그렇게 묻는 인형은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것은 초조함을 누르기 위한 그녀의 습관적인 행동임을, 사내는 알았다. 무엇에라도 매달리고 싶을 정도로 간절한 것이리라. 이전부터 인형에게 약했던 사내였으므로,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단서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큰 소득은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금지구역을 확인해볼 가치는 있었다. 사내는 저택에서, 혹은 저택 주변에서 어려서부터 들어갈 수 없었던 몇몇 구역을 이야기해주었다.

[……아카데미아가 지키고 있을 겁니다.]

[상관없어요.]

바로 나설 채비를 하는 여자에게, 사내는 물었다.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되나요?]

[난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요.]

그리고 도련님은 내게 보험이거든요. 정말 필요해지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는 쪽이 더 좋아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여자는 돌아섰다. 이내 검은 옷자락이 눈앞에서 흩어졌다. 대공비의 장례는 진즉 끝이 났는데, 공주를 구하기 위해 저택에 들어온 지도 수개월은 되었는데 인형은 여전히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를 덮은 음울한 그림자는 공주를 구해낼 때까진 걷히지 않으리라는 것처럼.

그러나 정말로 걷힐 수 있을 것인가. 정복자의 군대는 너무도 강했고, 총통은 공주에 집착하고 있었다. 수많은 인재가 밤낮으로 뛰어드는 연구에 최종적으로 공주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는, 아비의 계획을 파헤칠수록 암담하게만 그려졌다. 높은 확률로 공주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형제처럼 친밀했던 인형이 그녀를 찾아내기도 전에, 적의 손아귀에서. 어쩌면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것이 사내의 예측이었다.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했기에, 인형에게는 숨기는 이야기였다.

희망을 품고 있어서인지, 혹은 불안에 잠겨있어서인지, 인형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가 늦은 시간에 돌아오는 날이면 오래지 않아 금지구역을 지키던 군사가 공격당했다는 이야기가 들리곤 했다. 분명 습격이 있었는데, 아무리 살펴도 습격자의 흔적이 없다. 실험에 동원된 이들의 유령이 나섰다느니 뿔뿔이 흩어진 저항군의 소행이라느니, 온갖 말이 돌았으나 습격범은 잡히지 않았다. 사내만이 범인을 짐작했으나, 결코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인형이 금지구역을 파헤치고 다닐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처음엔 그녀를 걱정하던 사내도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놓았다. 군사도 상대할 수 있을 전투능력이라면 혹 위험한 일이 생기더라도 알아서 대처할 수 있으리란 믿음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순조롭게 적의 소굴을 파헤치고 다니던 인형이 사내를 찾아온 것은 습격이 시작된 지 보름쯤 되어서였다.

찾았어요. 탑이더군요.”

루리의 위치요. 인형이 덧붙인 말에 사내의 눈이 둥그레졌다. 습격으로 시끌시끌한 동안 그녀는 그에게 어떤 정보도 흘리는 일 없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 그럴 여유가 없었는지는 모르나, ‘탐사에 대한 단서 하나 얻지 못한 사내도 슬슬 상황이 궁금해지던 참이었다.

?”

이 근방에 있는 두 개의 탑. 한쪽에 루리가 있어요. 다른 쪽에는 루리처럼 아카데미아가 납치해온 여자애가 있고요. 저번에 루리가 쓰러졌다며 이곳에 들인 닥터가 감금된 두 명에게 뭔가 손을 쓰고 있는 모양인데.”

침입할 생각인가요?”

인형이 한창 금지구역을 파헤치고 다닐 때, 사내는 제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생각해온 것. 아비에 맞설 자신의 군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아비의 수족을 처리할 정예병을 결성하고 그들로 위험을 제거하며 서서히 세력을 키운다. 그러한 목표로 은밀히 준비해온 일은 거의 실현 단계에 다다라 있었다.

사내의 곁에 머물며 그와 목표를 공유해온 인형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이전에 사내는 정예병 결성 계획을 제법 상세하게 설명하며, 필요할 경우 그녀를 위해서도 병사를 쓸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때문에 사내의 말에는 한 가지 물음이 깔려있었다. 정예병이 나설 때를 기다리지는 않을 건가요? 여자의 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사내의 뜻을 읽어낸 게 분명한 답이었다.

때를 기다리다간 늦어요. 닥터가 더 개입하면, 루리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요.”

당신이 아무리 무장해도, 단신으로는.”

나를 돕고 싶다고 했죠? 기회는 지금뿐이에요.”

다음은 사내만이 들어야 할 말이었다. 인형은 사내의 품에 파고들며 속삭였다.

도련님, 모두를 배반할 시간이에요.”

이상하리만큼 유혹적인 말이었다.

그 날 밤, 사내는 인형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 총통의 뜻을 가장한 거짓 명령으로 미리 군사를 치워놓은 둘은 별다른 방해 없이 탑에 숨어들 수 있었다. 하녀로 위장한 여자가 앞장섰고, 후드를 덮어써 얼굴을 가린 사내가 뒤따랐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사내는 배반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분명 배반이었다. 아비의 뜻에 반한 것은 물론이고, 그를 따르는 이들도 저버렸다. 인형을 돕는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그를 긴장하게 했지만, 모두의 기대를 거스른다는 것이 그에게 야릇한 희열을 안겨주었다.

처음으로, 그는 모두를 배반했다. 그것도 완벽한 타인을 위해. 총통의 아들로서, 우수한 인간으로서 언제나 온갖 기대의 대상이 되었던 그에겐 해방감마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때요, 도련님?”

탑의 중간 지점까지 다다랐을 때, 여자가 돌아보며 물었다.

사실 여기까지 따라올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어요. 도련님도 제법 순진한 데가 있네요.”

무슨 답을 듣고 싶어요?”

내 공범이 된 감상이요.”

나쁘지 않군요.”

더 올라가도 되겠어요? 내가 꼭 도움을 받아야 했던 건 탑에 들어오는 것까지. 안전하길 바란다면 돌아가도 좋아요. 여기까지 도왔다면, 도련님이 할 일은 다 한 거예요.”

인형의 얼굴에는 엷은 웃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에 깔린 것은, 분명히 기쁨은 아니었다. 오히려 체념에 가깝다는 생각에 사내는 불길해졌다. 그는 이런 표정을 짓는 이들의 결말을 잘 알았다.

감사했어요. 이건 진심이에요.”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아직 당신을 더 도울 수 있어요.”

도와줄 사람이 왔어요. 도련님이 나서지 않을 것을 대비해서, 미리 불러두었죠.”

인형의 시선은 아래쪽에 향해 있었다.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보자, 사내는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타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아래쪽에, 망토를 뒤집어쓴 자가 보였다. 유토. 조용한 부름에 낯선 이는 빠르게 계단을 뛰어올라 인형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니 겨우 십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싶은 소년이었다. 작은 체구도 앳된 얼굴도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소년은 무장하고 있었다. 자신이 짊어진 운명을 알리듯이.

궁에서 평생을 보낸 인형이 도움을 요청할 동료라면, 엑시즈의 사람일 것이다. 침략에 휩쓸린 나라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투쟁했다는 것. 소년은 저항군, 그것도 공주와 연이 있었던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공주를 탈출시킨다는 위험천만한 계획에 동참했다는 것도 그의 위치를 짐작케 했다. 과연 소년은 총통의 아들인 사내를 못마땅하단 눈으로 훑었으나 인형이 있어서인지 불만을 꺼내지는 않았다.

사내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으므로 소년의 시선을 무시하고 인형을 보며 걸었다. 그렇게 셋이 움직이게 되었지만 인형만이 간간이 금지구역에 침입했을 때의 정보를 흘릴 뿐, 두 사람은 줄곧 불편한 침묵 속에서 걸었다. 올라갈수록 셋은 난관에 맞닥뜨렸다. 실험에 중요한 재료인 공주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통제장치가 여럿 깔려있었던 것이다. 생각지 못한 문제에도 앞장선 인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 목을 죄던 초커를 뜯어내더니, 모습을 바꾸었다. 공주를 닮은 모습에서, 완전히 공주의 외형으로. 그러자 모두를 막아서던 장치가 거짓말처럼 해체되었다. 셋은 소란 없이 목적지로 향할 수 있었다.

공주님을 구하면, 다음은 어떻게 할 거야?”

공주가 갇힌 곳까지 몇 계단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계단을 오르던 소년이 인형을 보며 물었다. 거리감 없는 어투가 두 사람의 친밀함을 확인시켜주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둘은 친구처럼 지냈던 것 같았다. 가까운 사람이 물은 만큼 사내는 인형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기대했으나 그녀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셋이서 함께 살 거지? 그러기로 했잖아.”

답을 재촉하자 그녀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수습을 해야 해. 갑자기 루리가 사라지면 여기도 완전히 뒤집어질 테니까.”

끝나면 우리에게 올 거고?”

제발, . 이번에는 답을 줘. 소년의 목소리는 간절함을 띠고 있었다. 인형을 잘 아는 사람이기에 불안감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사내가 그녀에게서 자신의 행복을 찾겠다는 확답을 듣고 싶어 했던 것처럼. 애원에 가까운 요구에, 여자는 아이를 다루듯 소년의 머리를 쓸었다.

너희에게 가장 좋은 선택을 할게.”

나긋한 목소리로 전한 것은 소년이 바라던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인형이 줄 수 있는 최선의 답인 듯했다.

마침내 탑의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그동안 공주를 가둬두었던 방이 드러났다. 핏기 없는 얼굴로 앉아있던 공주는 침입자를 감지하자마자 달려들었으나 상대를 확인하고는 이내 얌전해졌다. 실험에 편리하게 동원하기 위한 정신조작의 여파로 이상행동을 보이게 된 것 같다고, 공주는 고백했다. 기회는 지금뿐이라던 인형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 더 늦었다면 공주가 총통의 연구에 오염될 뻔했다.

그래도 공주가 무사했음에 안도하며, 셋은 공주에게 탈출 계획을 전했다. 사내는 공주에게 우선 인형이 자신을 끌어들였음을 설명하고 군사를 피할 길을 일러주었다. 소년은 공주에게 은신처를 가르쳐주고 미리 챙겨온 짐을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인형은 공주와 똑같은 얼굴로 속삭였다.

나와 옷을 바꿔 입는 거야, 루리. 팔찌도 주고. 아카데미아가 노리는 건 너니까, 나처럼 하고 나가면 쫓기지 않겠지.”

인형의 제안대로 두 사람이 옷을 바꾸자, 공주의 드레스를 입은 인형과 하녀로 위장한 공주가 남았다. 위장이 끝나기 바쁘게 인형은 주인과 동료를 보내려 들었다. 군사를 흩어버린 것이 거짓 명령임이 발각되면 두 사람 다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언니는?”

나는 할 일이 남아서, 함께 갈 수는 없어. 시간이 없으니 빨리 유토와 떠나.”

따라올 거지?”

소년이 끼어들어 물었지만, 입을 연 것은 인형이 아닌 사내 쪽이었다.

그래요. 공주님이 안전하게 탈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수습은 이쪽에 맡기시죠.”

총통이 공주를 노리는 만큼 가능한 빨리 탈출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결국 공주와 소년은 인형을 두고 빠져나가야만 했다 공주의 걱정 어린 시선에도 인형은 손을 흔들 뿐 안심시키기 위한 말 한마디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사라지자, 공주의 방에는 사내와 인형만 남았다. 원래 사내도 빠져나가야 했던 것을 사내가 인형을 돕겠다며 고집을 부려 남은 것이었다.

인형은 놓인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한가로이 방을 살피더니, 아예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기까지 했다. 초조한 것은 사내뿐인 듯했다. 인형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려 할 때, 머리모양마저 공주를 흉내 낸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루리는 무사히 빠져나갈 거예요. 도피에 필요한 것은 전부 유토가 마련했을 테고요.”

이제 우리가 돌아갈 차례지요.”

이 밤이 지나면 도련님도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어요. 내가 없었던 때로 말이에요.”

의미심장한 말이 어쩐지 불길했다. 사내는 소년이 그러했듯 여자에게 답을 조르기로 했다.

당신은 어떻게 빠져나갈 생각이죠?”

……순진하기도 해라.”

인형은 사내 쪽으로 돌아서더니 발을 들어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닿은 순간 머리가 달아올랐는데, 뺨에 남는 것은 너무도 찼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늦지 않았어요. 여기서 빠져나가면 적당한 거처를 마련해서.”

도련님, 있잖아요. 나 같은 건 모든 것에 목적이 있어요. 행동은 물론이고 생각과 외형까지도요. 당신의 마음에 어울려줄 수 없단 뜻이에요.”

곁에 있어달라는 말이 아니에요. 어떻게든 내가 도울 기회를 달라는 겁니다.”

아니요, 도련님은 이미 할 만큼 했어요. 모두를 배반한 것으로 충분하다고요.”

그럼에도 눈빛으로 호소하는 사내를, 인형은 가볍게 외면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셋이 들이닥칠 때의 모습 그대로 방을 정돈한 여자는 공주가 앉았던 자리에 가 앉았다.

어때요, 이제 정말 루리 공주 같나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그래야죠. 내가 루리를 닮게 만들어진 것도, 루리의 모습을 흉내 낼 수 있는 것도 다 계획된 것이었으니까.”

이유가 있었나요?”

루리를 위해 죽어야 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인형의 손에는 어느 틈에 꺼냈는지 모를 작은 약병이 들려있었다. 사내는 바로 인형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녀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손이 닿았을 때는 이미 그녀가 병 속의 액체를 전부 삼킨 후. 아마도 그녀가 준비한 것은 독이었으리라. 단순히 시간을 벌기 위해 얼마간 공주 행세를 하는 게 아니라, ‘공주의 모습으로죽어 도망친 공주에게 자유를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인형은 거짓말처럼 무너졌고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만들어진 생명에게도 죽음은 공평하게 닥쳤다. 사내는 숨이 꺼진 인형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겨우 돌아섰다.

 

*

 

공주의 장례식은 쓸쓸했다. 형제처럼 가까웠던 인형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자리였다. 공주가 죽은 날 사라진 인형에 대해선 여러 말이 붙었지만 사내는 행방을 알면서도 침묵했다. 저 아래, 모두 건조한 추모를 얹는 자리에 인형은 잠들어 있다. 공주의 탈출을 덮고 누구도 공주를 추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목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는 죽음까지도 목적에 충실했다. 그것이 사내에게 드물게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돌이켜보면, ‘진짜망자는 이전부터 그의 내면을 휘젓곤 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쓸렸을 때도, 저답지 않은 감상에 젖었을 때도 중심엔 인형이 있었다. 왜 하필 그녀였는지 생각하면 짚이는 것이 없기에 그는 적당한 답으로 스스로를 설득한다. 인간이 아니기에 그런 것이리라. 인간의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생명이었으니 당연히 휘말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따위의 생각으로.

사내가 만났던 이들 중 가장 비현실적이었던 여자는, 사내와 함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는 가장 짜릿한 반항을 했고 그녀는 가장 사랑하던 이를 구해냈으니 두 사람 모두에게 성공적인 각본이었다 할 수 있으리라. 그 과정에서 그녀가 선택한 결말은 다소 씁쓸했으나, 지극히 그녀다운 선택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하나, 사내로서는 아쉬운 것이 있었다. 그녀가 몇 번이고 암시한 작별을 눈치채지 못해, 마지막 순간에 인사 한 마디 건네지 못한 것. 관이 덮일 때서야 사내는 인사를 남길 수 있었다. 편히 잠들기를. 꽃에 묻힌 망자에게는 닿지 않을 말이었다.

죽은 공주를 추적하려 드는 광인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가 뒤늦게 인형을 찾아 나선들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비로소 모든 것이 완벽해졌다.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만족하며, 사내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그만이 아는 유품을 꺼냈다. 정교한 공예품에 입을 맞추자, 입술에 전해지는 서늘함이 언젠가의 입맞춤을 떠올리게 했다.

편히 잠들기를. 사내는 장례식에서 흘린 말을 소리 없이 되풀이했다. 고요한 기원은 허공에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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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