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남편의 결혼식을 눈에 담고 있었다. 남편의 곁에 선 상대는 기억 속 자신이 아닌 누군가. 신부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지만 남편의 얼굴엔 부드러운 웃음이 걸려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게 되었다는 기쁨과 설렘, 미래에 대한 기대. 그 모든 것이 담긴 웃음. 그녀가 철저히 배제된 풍경에서 남편은 행복하다. 고뇌도 슬픔도 없이,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그가 선택한 삶을 누릴 준비가 되었다. 아마 이 결혼의 결말은 동화를 닮아있을 것이다. 그의 삶에서 가장 이질적이고 불완전한 조각은 자신이었음을 여자는 새삼 깨닫는다.

그녀와 결혼하기 전에도 남편에겐 행복해질 길이 있었을 것이다. 결혼을 택하면서 그의 삶에는 음울한 존재가 끼어들었다.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는 말까지 들어온 그녀. 그런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폐허를 끌어안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사장이 택하기엔 확실히 의문스러운 결혼이었다. 식은 극비로 올렸고 세상은 그녀를 알지 못하지만, 만일 모든 게 알려졌다면 그들의 결혼엔 납득하지 못한 자들이 꾸며낸 추잡한 소문이 따라붙었을 게 뻔하다.

왜 그가 자신을 책임지려 들었는지는 여자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어쩌면 젊은 나이에 많은 것을 움켜쥔 사람으로서, 그녀 같은 사람이라도 안고 갈 수 있다는 오만에 빠져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소 감상적인 이유였을까. 이 사람을 구하고 싶다 로 요약할 수 있는 심리. 여자는 처음 만났을 때의 남편을 선명히 기억한다. 아비가 일으킨 전쟁을 끝내겠다고 나선 정의감 강한 인간. 전쟁 피해자인 그녀에게 모든 것을 바로잡겠다고 약속하던, 자신만만한 것인지 순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열여섯 살의 소년.

그 마음은 나쁘지 않았다. 선의는 진중했고 노력도 깊었다. 그녀가 처음부터,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었다는 것이 유일한 문제였다. 시간이 흐르며 둘 사이에는 아이까지 태어났지만 그녀의 삶에선 남편이 그토록 지워내려 애쓰던 음울함이 아직도 걷히지 않고 있다. 실패에 익숙하지 않은 그 남자에게는 제법 씁쓸한 현실이리라. 저를 보는 남편의 시선에 불안이 비치는 것에, 여자는 남편마저 지칠까 걱정이 된다.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을 끌어안고 산 끝에 결국 그도 무기력해진다면, 그녀에게 그 이상 괴로운 결말은 없을 것이다.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그에게는 더 나은 미래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언젠가부터 여자가 남편의 삶에서 자꾸 자신을 지우는 상상을 하는 건 그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죄책감 탓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그의 삶에서 철저한 타인으로 남는다면. 관찰자 이상의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면. 그가 우수한 인간으로서 합당한 성공을 거두고 무난하게 행복해지는 것을 멀리서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상상 속의 남편은 언제나, 그녀가 없을 때 빛났다.

남편의 결혼식을 외부인이 되어 지켜보는 것도 벌써 몇 번째였다. 물론 남편의 곁에 선 상대는 중요하지 않기에, 신부의 얼굴은 한 번도 비친 적이 없다. 여자의 시선은 매번 남편에게 머문다. 어차피 모든 것이 제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기된 얼굴을, 빛나는 눈을 꼭 확인한다. 자신이 그에게서 빼앗았을지도 모를 희망이 자꾸만 떠올라서. 모두의 바람대로 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식장을 채운 많은 하객도 다들 들뜬 것 같다. 마침내 오늘의 주인공인 두 사람이 부부가 되기를 약속할 시점에, 갑자기 남편의 시선이 신부에게서 떠났다. 안경 너머 보랏빛 눈이 정확하게 여자를 보았고.

또 도망쳤구나.

남편의 무거운 목소리가 꽂혔을 때, 여자는 눈을 뜨는 것으로 모든 것을 지워냈다.

여자는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깜빡였다. 꿈을 억지로 끊어 잠에서 깨긴 했지만 현실의 풍경에 눈이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시야가 개자 차차 그녀에게 익숙한 풍경이 들어온다. 결혼하면서 남편과 함께 살아온 집, 그곳에서도 최근 그녀의 회복을 위해 신경 써서 꾸민 공간. 며칠 전 사고로 죽을 위기를 넘긴 그녀는 가뜩이나 약한 몸이 더욱 망가져, 거의 침대에서 지내고 있다. 하루 중 깨어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잠들어 있고, 깨어나는 시간은 불규칙했다. 서로의 시간이 엇갈려 며칠간 남편도 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잠든 시간엔 기절하듯 의식이 꺼질 때도 있지만 평소처럼 꿈을 꾸기도 했다. 특히 생생하게 기억하는 꿈 중 하나가, 바로 이번에도 꾼 남편의 결혼식이었다. 무의식에 깔린 죄책감 때문인지 그 주제의 꿈은 제법 반복되었는데 남편이 꿈속에서 그녀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또 도망쳤구나, . 여자는 남편의 말을 떠올리다 웃었다. 꿈속의 그는 제 삶에서 빠져나간 그녀를 도망쳤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게다가 라니. 정작 현실의 그녀는 그의 바람대로 줄곧 그의 곁에 머물렀는데.

남편은 언제나 그녀가 사라질 것을 두려워했다. 이미 한참 전부터 그녀를 쥐고 있으면서, 아내가 어느 순간 자신을 놓을 거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전쟁을 거치며 삶의 의미를 잃고 너무 많은 실패에 지쳐 욕망할 줄 모르게 된 인간이 그녀였다. 위태로운 것은 물론이고 세상에 평범하게 뿌리내리고 사는 것도 어렵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처참했던 시기를 지켜봐온 사람이기에, 그는 오히려 더욱 불안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도 부유할 것을, 결국은 제대로 생존하지 못하게 될 것을 생각하며.

그가 자신을 쥐고 있는 한, 제 발로 그를 떠날 일은 없다. 지금까지의 결혼생활이 그 증거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에겐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깨지기 쉬운 물품을 다루듯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서 두려움을 읽을 수 있다. 앞으로도 남편이 마음을 놓을 것 같지는 않다. 되레 이번의 사고로 불안이 증폭되었으리라.

여자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무거웠지만 마냥 누워있고 싶지는 않았다. 이전부터 약한 몸이 콤플렉스였던 그녀는 아예 움직일 수 없을 때가 아니면 다소 무리해서라도 몸을 써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거기에,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낸 남편이 사고의 잔상에 시달리고 있을 것도 걱정이 된다. 가능한 빨리 회복해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는 게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시간. 다행히 오늘은 사고 이후 가장 이른 시간에 깼다. 몸이 정상 패턴에 가까워진다면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여자는 방에 자신밖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슬그머니 침대에서 빠져나온다. 무리하지 말라며 과보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계속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조금씩 움직여서, 몸을 적응시키고, 원래의 패턴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자는 우선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의자까지 걸어가 앉는 것을 목표로 하기로 한다.

그러나 땅에 발을 딛자마자 어지럼증이 덮쳤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면서 속이 울렁거린다. 급작스런 증상에 멈칫하던 사이 그녀가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방에 들어선다. 사고 이후 계속 그녀의 곁을 지키는 자. 집에서 그녀의 안정을 위해 붙인, 일종의 간병인.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간병인의 가벼운 목소리는 손에 잡히는 것을 아무거나 잡고 숨을 헐떡이는 여자를 본 때 멎었다. 모든 것이 일렁이는 가운데 여자는 제 몸을 지탱하는 손길을 느꼈다. 서 있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간병인은 그녀의 몸을 천천히 낮춰 바닥에 앉혀주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저를 기다리거나 그냥 불러주셨으면 됐는데.”

……그런, , 아니라.”

안색이 나쁜데, 어디 불편하세요?”

걱정 어린 질문에 답을 하려 했지만 구역질이 말을 막았다.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미지근한 것이 목을 타고 넘어와, 여자는 그대로 토해야만 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왜 게워내야 하는지. 속이 타는 감각과 입에 남는 불쾌한 맛이 끔찍이도 싫었으나 구토는 도통 멎지 않았다. 한참이나 지나 메슥거림에서 해방되었을 때는 입을 헹굴 힘밖에 없었다. 상태가 나쁘다는 것을 실감했기에, 여자는 진정되자마자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얌전히 침대로 돌아갔다.

다시 침대에 기대앉자 여자는 비참해졌다. 결국 스스로는 한 발짝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전쟁을 거친 후 줄곧 약한 몸을 안고 살아오면서도 이렇게 무력했던 적은 없었다. 무엇 하나 제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이, 타인에게 기대야만 하는 처지가, 내내 머리를 어지럽히던 생각에 힘을 불어넣는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유산한 날, 피를 쏟던 중에 머리를 스친 생각.

자꾸 안 먹어서 힘이 없고 속이 뒤집어지는 거예요. 오늘은 가벼운 음식이라도 드시고 진정시켜야 해요.”

그렇게 말하며 간병인은 침대에 상을 펼치곤 죽 그릇을 올려놓는다. 수저를 여자에게 내밀고는 곁에서 빤히 바라보는 것이, 먹는 것을 확인할 때까진 버티고 앉아있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동안은 너무 오랜 시간을 잠들어 있어서인지 깨어나도 식욕이 조금도 없었다. 억지로 음식을 입에 대도 자꾸만 속이 긁히는 통에, 여자는 아예 굶거나 서너 숟갈만 뜨고 치우곤 했다. 식사는 여전히 내키지 않지만 간병인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어서 여자는 천천히 수저를 들었다.

몇 숟갈 뜨고 눈치를 살펴도 간병인의 시선은 걷히지 않는다. 그렇게 몇 숟갈을 더 뜨고, 다시 몇 숟갈을 뜨는 식으로 반 그릇을 비웠을 때 여자는 도저히 더 먹을 수가 없어서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간병인은 굳이 더 먹이려 들지 않고 상을 치웠다. 다른 날보단 낫네요. 오후에도 깨어있으면 양을 늘릴게요. 간병인의 말에 여자는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 불안해하진 마세요. 병이 없으면 몸은 낫게 되어있으니까요.”

침대로 옮겨진 이후 침울해진 여자가 안쓰러웠는지, 날아든 말은 위로의 빛을 띠고 있었다.

언제쯤?”

글쎄요, 그걸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여자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부서진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다. 자신의 몸은 나아지지 않으리라고. 사고로 일시적으로 약해진 것이야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수 있지만, 진작부터 독이 쌓인 몸은 나빠질 일밖에 없다. 검진을 할 때마다 잡히는 것은 없으나 언젠가부터 그녀는 자신이 죽어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망가진 몸 자체가 일종의 병일지도 모른다. 고칠 수도 늦출 수도 없이, 마지막까지 안고 가야 할 병.

예전부터 몸이 약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타고난 거예요, 아니면 망가진 쪽?”

어렸을 때 어땠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결혼하기 몇 년 전부터 몸이 많이 나빠지긴 했어.”

병이라도 앓았나요.”

과로했을지도 몰라.”

무슨 일을 그렇게?”

글쎄.”

전장에 내몰려 저항군으로 싸웠다는 말을 꺼낼 수는 없기에, 그녀가 자신을 극단적으로 소모했던 시간은 과로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털어놓으면 동정을 얻을 수는 있어도 이해받을 수는 없는 시간이다. 완전한 타인에게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아, 여자는 말을 돌린다.

오늘은 오래 깨어있고 싶어. 뭔가 자극이 있으면 좋겠는데.”

방송이라도 틀어놓을까요? 보기만 하는 건 크게 피곤하지 않겠죠.”

볼만한 게 있어?”

듀얼 대회 좋아하세요? 오늘부터 시작하는 대회가 있는데, 초반부 이벤트 듀얼에 히이라기 유즈가 나온다네요.”

그 이름은 언제나 유령 같은 존재와 함께 떠올랐기에 그녀에게 묵직했다. 상대가 흘린 이름에 여자는 바로 사라진 사람을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람.

크게 관심은 없지만 히이라기 유즈라면 볼래.”

사라진 사람이 차지하는 무게 때문에 감정이 끓어오를 만도 했지만 여자는 내면에 쌓인 것을 감출 줄 안다. 감정을 쏟아낼 기력도 없었던 처참한 나날이 길었던 탓이다. 아마 목소리엔 동요가 비치지 않았으리라. 간병인은 별달리 요구하는 것이 없던 그녀가 선명하게 반응했음을 신기해할 뿐이다.

히이라기 유즈의 팬인 줄은 몰랐네요.”

팬까지는 아니고, 아는 사람이라서 그래.”

“LDS 간부진이나 그 가족쯤 되면 현역 프로 듀얼리스트와도 친분을 쌓는 거예요?”

옛날에 잠깐 연이 있었던 거야. 친분이 있다고 말하기엔 부족하지. 그래도, 프로 듀얼리스트 중엔 몇 안 되는 반가운 얼굴이니까 어쩌다 경기 하는 걸 확인하면 보게 되는 정도.”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사람이다 여자는 이전부터 의식적으로 선을 긋고 있다. 실제로 그들에게 직접적인 접점은 없었다. 연결고리조차 희미한 관계에 이제는 의미도 없는 감정의 파편만 남았을 뿐이다.

시간이 된 것 같다며 간병인이 방송을 켜자 스크린에 관객으로 북적이는 경기장이 비쳤다. 조명이 꺼지고 제각기 공간에 쏟아내던 소음이 걷히더니, 조명이 켜지는 것과 함께 열기와 함성이 한 곳으로 쏠린다. 어느새 무대에는 이번 경기의 주인공이 서 있었다. 관객을 향해 공손히 인사하는 젊은 선수.

빛나는 사람이다. 다만 그가 빛날수록 여자의 감정도 복잡해진다. 그와 빼닮은 사람을 알고 있기에 그랬다. 단순히 생긴 것만 닮은 게 아니라 비슷한 나이로, 비슷한 꿈을 꾸었던, 어쩌면 비슷한 미래가 있었을지도 모를 사람. 한 명은 세상에 사랑받는 프로 듀얼리스트가 되어 무대에 섰는데 다른 쪽은 십대에 영원히 멈춰버렸다. 후자가 그녀의 여동생. 전장에서 적에게 납치되었던 동생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시간이 흐르며 여자는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도 기억으로만 남은 동생은 아직껏 열네 살이다.

여자는 타인에게서나 겨우 동생의 미래를 본다. 정확히는, 보는 것이라기보다 상상하는 것이다. 과거의 출발점이 비슷했다고 해도 어차피 다른 사람이니 동생의 미래가 그와 같을 리는 없다. 그를 보며 열네 살 소녀로 멈춰버린 동생을 머릿속으로나마 키우고, 적당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동생의 삶이 너무 일찍 닫혀버렸다는 것이, 수많은 가능성이 지워졌다는 것이 언제나 괴로워서.

내 동생도 프로 지망생이었는데.”

이뤄지지 않은 꿈을 생각하다 감상에 젖었는지, 여자는 저도 모르게 말을 흘렸다. 고향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에서는 줄곧 그녀와 함께해온 남편이나 알 법한 사소한 정보.

형제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히이라기 유즈와 비슷한 나이인데 데뷔는 못 했어. 그 애한테도 무대는 어울렸겠지만, 꿈을 이루고 사는 건 모두에게 허락된 일은 아니잖아?”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침략군의 수장이 동생을 노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동생이 무사히 자라났다면 그 미래는 어떻게 빛났을까. 어떤 것이든 제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으리라. 동생이 돌아온다는 기적은 없다. 사실상 세상에서 지워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동생에게 그녀는 애써 실종이란 단어를 붙인다.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버틸 수 없게 될 테니.

그래서, 동생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어요? 프로 말고 다른 일을 찾았겠죠?”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그 애에겐 안 좋은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났지.”

사람은 보통 어떻게든 자기 길을 찾아요.”

그래도, 선량한 말은 그 자체로 위안이 된다. 여자는 음울한 이야기를 삼키고서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사이 환호 속에 등장했던 선수는 주목받는 신인을 상대로 이벤트 경기를 시작했다. 한때는 그녀에게도 익숙했던 시선, 열기, 기대. 그 속에서 동생을 닮은 선수는 무대에 서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능숙하게 경기를 지배한다. 과연 사랑받기 충분한 선수라고 여자가 생각한 때 객석 어딘가에서 그의 이름이 튀어나오더니, 이내 전염되기라도 한 듯 그 이름이 경기장을 울린다. 그것이 자극이라도 되었는지, 신인도 제법 기를 올려 경기는 더욱 치열해진다.

지루할 틈 없는 경기에서 결국 승리를 가져간 쪽은 선배 선수. 경기가 끝나자, 긴장한 채 무대에 올라온 신인조차 즐거운 얼굴로 승자와 악수했다. ‘모두를 행복하게라는 최근의 흐름에 맞아떨어지는 경기에 박수가 쏟아졌다. 두 사람이 인사하고 퇴장할 때까지 여자의 시선은 스크린에 머물러 있었다.

어때요?”

들뜬 목소리에 여자는 덤덤하게 답한다.

나쁘지 않네.”

조금 전까지 꽤 몰입하셨어요. 잠깐씩이긴 해도 웃기도 했고요. 사실은 듀얼을 좋아하시는 거죠?”

이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다 그만뒀어. 애한테 가르칠 때 아니면 익혀둔 것도 별로 쓸모도 없는데.”

이미 경험할 것은 다 경험한 영역이기에 별달리 남은 감정도 없다. 추억도 상처도 덮여서 퇴색된 과거로 남았을 뿐이다. 그 정도로 간단히 잘라버리려고 했지만, 상대는 의외로 끈덕지게 묻는다.

그만뒀다는 건, 그래도 어느 정도까진 가셨단 건가요? 프로 문턱까지라거나.”

오늘 너무 많이 들으려 하는데? 다 말해줄 생각은 없으니 입맛대로 생각해.”

비밀스러운 사람으로 남고 싶으세요?”

여자는 잠시 침묵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그랬다. 이 도시에서 살아오면서, 그녀는 의도적으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둘렀다.

두 분의 결혼 때 온갖 말이 돌았어요. 사장님의 나이를 고려하면 이른 결혼에, 신부에 대해선 공개된 것이 없어서 관심이 쏠렸던 것이겠지만 지금도 달라진 건 없죠. 부인은 여전히 미지의 사람이잖아요?”

불필요한 정보를 꺼내고 싶지 않을 뿐이야.”

나를 알리고 싶지 않다? 확실히, 유명인의 배우자라고 같이 주목받게 되면 피곤하긴 하겠죠.”

아카바 레이지의 그림자에 숨지 않았다면 귀찮아졌을 거야.”

스물을 겨우 넘길 때까지 쌓은 것은 황폐한 기억뿐. 사람들 앞에 드러내어선 나쁜 쪽으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삶이 낱낱이 해부되느니 미지를 방패삼아 누구도 파헤칠 수 없는 신비가 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녀의 과거를 아는 남편은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했고, 아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도록 교묘하게 감싸왔다.

어쨌든 시간 보낼 것을 찾은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심심풀이로 보고 있으라고?”

잠깐 자리를 비울까 해서요. 아까보다는 몸이 진정된 것 같으니, 무리만 하지 마세요.”

그렇잖아도 편하게 쉴 시간이 필요했던 터라 여자는 굳이 붙잡지 않았다. 혼자 남는다고 아까처럼 억지로 움직일 생각은 없지만 제 행동을 하나하나 지켜보는 사람에게서 잠깐 벗어나고 싶긴 했다. 간병인은 그대로 방을 나섰고 복도에 울리던 발소리도 오래지 않아 멎었지만, 이상하게도 다녀오겠다는 사람의 목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자꾸 울린다. 누군가를 타이르는 것 같은데, 귀를 기울이니 간간이 끼어드는 상대의 목소리가 무척 앳되다. 아무래도 귀에 익은 목소리여서, 여자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아가 왔어?”

일부러 큰 소리로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조그마한 아이가 방으로 달려 들어온다. 짐작한 대로, 방문자는 부부의 하나뿐인 자식. 뭐가 서러웠는지 바로 자신에게 매달리는 아들의 머리를 여자는 조심스레 쓸었다.

밖에서 무슨 얘기 했어?”

여기 들어가면 안 된댔어요.”

?”

시선을 돌리자 아이를 따라 들어온 간병인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진작 끝난 이야기인데. 부인이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저랑 사장님, 이사장님 말고는 여기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거든요.”

언제부터?”

처음부터요. 여기를 회복실로 둔 날부터.”

아무래도 아이가 쏟아낸 것은 며칠치의 설움이었던 모양이다. 조숙하던 아이가 제 나이에 맞게 어리광을 피우는 것이 귀여우면서도 약간은 안쓰러워서, 여자는 아이를 감싸며 말했다.

난 아가랑 있어도 되는데?”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곤란함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에, 여자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속삭인다.

엄마 아파서 많이 놀아줄 수 없을 텐데, 같이 있기만 해도 괜찮아?”

쉬운 답을 알아챈 아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간병인은 결국 한숨을 쉬며 모자를 두고 방을 나선다. 걱정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는지 아이에게 엄마를 귀찮게 해선 안 된다는 말을 몇 번씩이나 하고서. 둘만 남자 여자는 아이에게 침대로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며칠 만에 엄마의 곁에 있게 된 아이는 제법 들뜬 얼굴로 올라오더니 이불 속에 몸을 반쯤 숨긴다. 그래도 바짝 다가오지는 못하고 일정 거리는 유지하는 것이 엄마가 괜찮은 것인지 확신이 없는 모양이다.

그동안 아이는 몇 번이나 이곳 근처에서 서성거렸을까.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에게 엄마를 방해해선 안 된다고 얼마나 들었을까. 일찍 깬 통에 벌써 피로했으나 여자는 가능한 밝은 얼굴을 꾸미려 노력하며 상냥하게 말했다.

더 가까이 와도 돼.”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는 꼬물꼬물 기어와 여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여자는 리모컨을 집어 방송을 끄고 아이를 끌어안는다. 굴에 숨어들듯 제 품에 의지하는 아이가, 그 작은 몸의 무게가 사랑스러웠다.

 

*

 

아이는 남편을 닮았다. 남편의 어릴 적 모습을 빼닮은 얼굴에다, 사소한 습성까지도 아버지의 흔적이 보였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곤 금빛을 띤 눈 정도. 남편은 아이가 아내를 닮았기를 바랐던 눈치였지만 여자는 아이에게서 제 모습을 거의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싫지 않았다. 세상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딛고 있는 어머니보다야 심신이 건강한 아버지 쪽을 닮는 게 나을 것이다. 폐허나 다름없는 인간이 안겨줄 수 있는 선물은 없다.

남편은 위태로운 아내의 그림자라도 움켜쥐고 싶은 마음에 아이에게서 여자의 흔적을 기대했을지도 모르나, 여자는 누군가 자신을 기억할 단서를 남겨두고 싶지도 않았다. 결혼하면서 남편의 이름으로 제 이름을 덮어버릴 때는 일종의 해방감마저 느꼈다. 과거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음울한 과거를 하루라도 빨리 내려놓고 싶었으므로. 결혼 이전의 흔적도 거의 남겨두지 않았다. 세상에 알려졌던 짧은 시기의 기록은 남편의 도움을 받아 의도적으로 지우고 이름도 한 차례 바꿨기 때문에, 그녀는 미지의 인간으로 남편의 가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여자는 유령처럼 자신의 존재를 숨겨왔으니 그녀가 떠나면 남편은 아내를 추억할 것 하나 제대로 쥐지 못하리라. 물론 그녀는 남편이 결혼을 유지하는 한 곁에 있어줄 생각이었지만, 두 사람이 바라지 않은 결말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부쩍 여자는 을 생각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 닳아버린 몸이 점점 한계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남편의 노력으로도 자신을 생에 묶어둘 수 없는 날이 곧 올 것 같아서. 불길한 예감을 입에 올린 적이야 없지만 남편은 그녀가 무언가 암담한 생각에 빠져있다는 것은 눈치챘는지, 사고 직전까지 그녀가 자신을 보게 하려고 애썼다.

나에게 제일 중요한 건 당신이야. 당신이 마음을 놓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게. 자신을 안으며 반쯤 애원하던 남편이 떠오른다. 신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던 그 남자가, 왜 아내 앞에선 그렇게 겁먹은 어린 짐승처럼 구는지. 괜한 감상에 젖어, 여자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유일하게 자신을 닮은 눈에, 언뜻언뜻 아버지를 닮은 감정을 비추고 있다. 불안. 아마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속내일 것이다.

아버지는 어때?”

엄청 무서운 얼굴이에요.”

생각이 많아서 그럴 거야.”

저는 잘 있었어요.”

조금 전까지 불안 섞인 눈으로 자신을 보았으면서, 엄마 앞에선 어른스러운 모습을 취하고 싶은지 아이는 자못 당당하게 말한다. 그 다음은 혼자 신이 나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보고하는 것이었다. 칭찬받은 일, 원래의 엄마 방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을 꾹 참았던 일. 그리고 할머니가 엄마의 옛날 영상을 보여준 일. 거기까지 듣고 여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에게 보여줄 것이 있을까. 결혼 전 기록은, 거의 지우지 않았던가?

엄마가 나오는 거였다고?”

옛날에 엄마가…….”

그러다 아이는 무언가 생각난 듯 여자에게서 벗어나 침대를 빠져나온다. 따라갈 힘이 없는 여자는 작은 등에 물을 수밖에 없었다.

, 갑갑해?”

엄마 보여드릴 거 있어요.”

여기 가져오려고? 그럼 엄마 기다리고 있을게.”

그렇게 나간 아이가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거의 뛰다시피 하는 급한 발소리를 들으며 대충 아이가 올 시점을 예상했던 여자는 다시 제 품에 뛰어드는 아이를 여유롭게 맞을 수 있었다. 아이가 가져온 것은 잡지. 여자도 이전에 몇 번 가볍게 펼쳐본 적 있는, 주로 프로 듀얼리스트를 다루는 잡지의 최신호였다. 아이는 여자에게 몸을 붙이자마자 잡지를 펼쳐 그 전에 봐두었을 기사를 찾기 시작했다.

여기, 엄마.”

마침내 아이가 찾아내 가리킨 것은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사진.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여자는 왜 아이가 저에게 보여주겠다며 잡지를 가져왔는지 알 수 있었다. 사라진 듀얼리스트라는 제목이 붙은 특집 기사에는 그녀가 짧게 프로 듀얼리스트로 활동했을 때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 그녀가 스스로 덮어버린 과거의 단편.

엄마 프로였던 거 알아요. 할머니가 그때 영상 보여주셔서.”

네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지만.”

왜 그만뒀어요?”

그때는 몸이 안 좋아서 더 하고 싶지 않았어.”

정답은 아니지만 틀린 답도 아니었다. 직접적인 이유가 아닐 뿐이다. 아이에게는 물론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하고 싶지 않은 너절한 사건이 있었다. 프로 신분으로 참가한 마지막 공식전.

그 경기에서 여자가 선 필드는 그녀의 고향을 재현한 풍경이었다. SF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화사한 도시. 전쟁이 일어나기 전 평화로웠던 고향의 환상이, 그녀가 덮어둔 상처를 헤집었던 것 같다. 관객 앞에서 그녀가 보여준 것은, 쇼크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이상행동. 반쯤 정신이 나간 채 비명을 지르던 그녀는 경기를 전쟁으로 여긴 것인지 상대 선수를 집요하게 공격해 부상을 입히고 말았다. 결국 실격패로 처리해 경기를 강제종료한 후 그녀를 경기장에서 끌어내고서야 악몽이 끝났다.

여기까지는 남편이 정리해 말해준 내용이고, 그녀에게 남은 기억은 불완전하다. 전장에 섰을 때의 방식대로 적을 공격했던 것 같은데, 적을 무력화시키고 완전히 처리하기 직전이었는데. 갑자기 디스크가 꺼지고 누군가 자신을 끌어냈다. 필드가 걷히고 야유가 쏟아지는 중에도 계속 중단된 전투에 대해 무어라 늘어놓았던 것 같다.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건 분명하지만 자신이 다치게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여자는 안정을 찾고는 바로 상대 선수를 찾아갔다. 상대는 그녀의 방문을 거부하지는 않았으나 사과를 받는 것은 부담스러워했다.

[힘든 사정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니고, LDS 측에서 충분한 보상을 하기로 했으니 그 일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가 소속되어 있던 남편의 회사 측에서 선수의 문제에 바로 대처할 것임은 이미 짐작한 사항이었다. 다만 사정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의 배경에서 타인에게 설명해 동정을 얻을 것이라면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사정이요?]

[전쟁을 겪었다면서요. 트라우마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사장이 이야기하던가요?]

[, 제법 상세하게 설명하시던데요. 아끼는 선수니 앞으로는 케어에 더 신경 쓰겠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거기서 여자는 힘이 쭉 빠졌다. 보호받기 위해서, 연민을 사기 위해서 불행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남편은 그녀가 마음의 짐을 덜길 바라고 먼저 나섰을지도 모르나, 그녀가 확인한 것은 자신의 비극이 얼마든 필요한 방향으로 가공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한 번 자극받은 이상 전쟁의 트라우마가 그 후로도 삶을 흔들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망령처럼 진득하게 따라붙는 불행에 지쳐, 결국 여자는 남편을 만나 선언했다.

[복귀 일정 같은 거 잡지 마. 이제 그만할래.]

[사람들의 비난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지. 대중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쉽게 잊는다. 쇼크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그럴듯한 설명을 붙여 발표하면 잠잠해질 거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냐. 내가 앞으로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그래.]

너도 내 뒤치다꺼리는 그만해야지. 그런 말까지 꺼내며 여자는 남편의 뜻을 꺾었다. 데뷔하고 짧은 기간 제법 괜찮은 기록을 쌓은 그녀였지만 은퇴를 택한 순간 빛났던 모든 순간이 과거가 되었다. 그마저도 오래지 않아 나쁜 기억을 떨치고 싶다며 남편과 함께 지워버렸다. 그렇게 스스로 길을 닫은 후 덮어두었던 과거를, 타인이 새삼 발굴했단 말인가. 다수의 사람들 앞에 기사로 공개하기까지. 예나 지금이나 그녀의 삶은 타인이 좋아하는 비극이었다.

이 책 어디서 찾았어?”

나카지마…….”

아이가 꺼낸 것은 남편이 신임하는 수하의 이름이었다. 아직 남편이 이것까지 보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에 여자는 안도한다.

그럼 우리가 이거 본다는 건 아버지한텐 비밀로 하자. 별로 안 좋아할 테니까.”

왜요?”

엄마가 그때 너무 힘들어했던 것 때문에 걱정하는 거야.”

여자는 덮어둔 과거에 크게 반응하지 않지만 남편은 그녀가 상처 입을 것을 극도로 경계하기 때문에, 공연한 걱정거리를 안겨주지 않는 것이 좋다. 다행히 아이도 더 묻지 않고 비밀이라는 말에 동조하듯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댄다.

내용은 읽어봤어?”

엄마가 읽어주세요.”

제목 말고는 잘 안 보이는데. 읽어주려면 안경이 있어야 할 것 같아. 근데 여기엔 없을 거야. 엄마는 조금만 움직여도 멀미가 나서 토하니까 찾으러 나갈 수도 없고.”

어쩌지, 아가가 읽을까? 장난스레 덧붙이자 어리광을 피울 기회를 잃을까 싶었는지 아이가 얼른 답한다.

찾아올게요.”

원래 엄마 방 아니면 아버지 일하는 곳에 둔 것 같은데, 거기까지 가서 찾을 수 있어?”

할 수 있어요.”

바쁜 남편을 찾아 회사에도 자주 들락거리는 아이였다. 길을 잃을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기에, 여자는 아이를 말리지 않는다. 돌아오기 전까지 잡지나 훑어보면 될 것이다. 시력이 나빠지면서 글자가 흐리게 보일 때가 많아 글을 읽을 때는 주로 안경을 쓰지만, 큰 글씨와 사진의 디테일 정도는 안경 없이도 읽어낼 수 있었다. 주목받는 신인 소개, 굵직한 프로 대회 일정, 인기 선수와의 인터뷰 자신이 떠나온 세계의 이야기를 무감각하게 넘기던 여자는 어딘가에서 멈췄다.

랜서즈, ‘선택받은 전사는 어디에.

제법 묵직한 타이틀이었다. 대부분의 독자에게는 생소할지도 모를 랜서즈라는 이름은, 과거 침략전쟁을 끝내려 나섰던 정예병의 명칭. 그 낡은 이름은 그녀에게는 특히 의미가 깊을 수밖에 없는데, 한때 그에 소속되어 싸웠기 때문이다. 남 일이 아닌 건 랜서즈를 구상하고 전사를 선발해 이후 지휘하기까지 한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를 찾으면서 조용히 해체된 저항군의 이름이 어쩌다 튀어나왔는지.

랜서즈의 자료 대부분은 남편이 봉인해뒀으니 기사에 대단한 정보는 없을 것이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과거의 사건을 적당히 편집해 한입 흥밋거리로 만드는 저급 방송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 그렇다 해도 여자는 남편이 이 기사를 읽지 않았길 바랐다. 그에게 랜서즈의 성과는, 전쟁의 결말은 자랑스럽지 못한 것. 그 전까지 그가 해온 것을 생각하면 초라하게까지 느껴지는, 반쪽짜리 성공이었으므로.

냉정히 말해, 전쟁이란 거대한 폭력에 급하게 소집한 정예병으로 맞선다는 발상부터가 너무 순진했던 것이다. 전사를 모두 잃지 않고 적진에 파고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족스럽지 못한 방향으로나마 전쟁을 끝냈다는 것은 틀림없는데, 남편은 자신이 벌인 일의 결말에 씁쓸함을 넘어 죄책감마저 느끼는 것 같다. 하필 실패의 중심에는 그녀가 있다. 그가 가장 구하고 싶었던 사람이,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결국 남편은, 그의 전사는 그녀의 비극을 끝내지 못했다. 그녀는 소중한 사람들을 전장에 묻고 홀로 돌아왔다.

남편의 잘못은 아니었다. 랜서즈로서 함께했던 동료의 잘못도 아니다. 삶이 여자에게 지독하게 악의적이라는 것이, 적이 너무도 끔찍한 족속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때 남편의 자리에 누가 들어갔어도 그녀는 행복해질 수 없었을 텐데. 원망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고 말해도 남편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만 그녀가 잃은 것을 돌아보았다.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여자는 차라리 랜서즈의 흔적이 남편 앞에 튀어나오지 않았으면 했다. 이 기사에 자극받기라도 해서 세상에서 새삼 랜서즈를 찾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여자는 과거의 이름에서 시선을 거두고 잡지를 덮었다.

도중에 무언가 일이 생겼는지, 말해준 곳에서 안경을 찾지 못한 것인지 아이는 생각보다 늦었다. 시간을 제법 넉넉하게 계산했는데도 그랬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여자가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여볼까 생각한 때, 아이가 한 손에 안경집을 들고 자랑스레 흔들며 돌아왔다.

안경 어디 있었어?”

회사요.”

고생시켜서 미안해. 엄마가 빨리 나아야겠네.”

아이가 조금 전 찾아둔 페이지를 펼칠 때, 여자는 안경을 꺼내 썼다. 얼룩처럼 보이던 글자가 비로소 또렷하다. 그만큼 자신의 과거가 선명하게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 살짝 우스웠으나, 그녀는 제 일을 타인의 것처럼 덤덤하게 읽을 수 있었다. 애초에 그녀의 삶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비극이긴 했다. 때로는 심술궂은 소설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자신조차 덮어두었던 과거의 한때를, 타인이 담은 자신을 읽기 시작했다.

사카키 유우야 세대 사카키 유우야가 데뷔한 해 함께 MCS에 나왔던 출전자를 비롯해 그와 동시대에 프로를 꿈꾸었던 유망주를 부르는 말이다. 사카키 유우야 세대는 액션듀얼의 열기와 프로 듀얼리스트 세계의 팽창에 힘입어 대부분 프로에 데뷔, 자리를 잡았다. 유난히 뛰어난 선수가 많았다던 그 세대에서, 언젠가부터 잊힌 이름이 있다.”

그 다음은 유물이 되어버린 이름이었다. 여자는 한때는 익숙했던 울림을 입에 담는다.

쿠로사키 슌.”

진즉에 버린 이름을 꺼내는 것은 어색했다. 그것도 그 이름을 묻은 후에야 태어난 아이 앞에서였다. 아이는 낡은 이름에 눈을 깜빡였지만 이야기에 집중했는지 입을 떼지는 않았다. 아이가 아는 엄마의 이름이라면 아카바 루리. 남편의 가문으로 제 성씨를 덮고, 사라진 동생의 이름을 끌어와 이름까지 묻어버린 것. 아이는 이모를 모르고, 어머니의 과거라곤 선수였을 때의 모습의 단편만 안다. 아이에게 음울한 배경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기에, 여자는 잠깐 침묵했다 이야기를 이었다.

데뷔한 해, 그녀는 단연 주목받는 신인이었다. 사카키 유우야의 동료였다는 사실, 엑시즈 출신이라는 특징, 뛰어난 실력이 그녀의 이름을 세상에 새겼다. LDS에서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는 소문도 흥미를 더했다. 처음엔 의문을 보이던 몇몇 선수도 데뷔한 후의 연승 기록에 그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순조롭게 프로 세계에 들어섰고 빠르게 대중을 매료시켰다.”

동명이인의 전기라도 읽는 것 같아 여자는 우스워진다. 타자의 말로 담아낸 과거란 이렇게도 낯설다.

그녀의 덱은 RR, 레이드 랩터즈. 엑시즈를 메인으로 하는 비행야수족 덱으로, 병기를 연상시키는 외형과 이름만큼 흉포한 공격이 눈길을 끌었다. 전투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긴장감 가득한 듀얼에서 RR은 빛났다. 몬스터 자체가 강하지는 않았으나 강력한 효과로 적을 무력화시키는 경우가 많았고, 기회를 잡기까지 플레이어를 지킬 마법카드와 함정카드도 적절히 들어가 있었다.”

많은 사람이 주목한 그녀의 전술이란 전장에서 완성된 것이니 관객이 실제 전투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해도 놀랍지 않다. 당시의 주류와는 대조적인 흐름이라 신선하다는 평도 꽤 들었지만, 의도했다기보단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쟁을 거치며 그녀의 세상은 완전히 새로 정립되었으므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과 적을 쓰러트려야 한다는 강박이 무의식에 자리 잡았다. 가능한 오래 버티기 위해 무장하고 기형적인 수를 쓰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아는 이들은 그런 모습에 자주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쿠로사키는 이제 힘을 빼도 좋을 텐데. 등으로 돌려 말하며.

그녀도 약간의 불안은 있었다. 전쟁의 그림자를 완벽히 떨치지 못한 전술로 평화로운 세계에 설 수 있을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 수 있을지. 그럼에도 적응하려 노력했고 계속 무대에 올랐더니 결국 사고가 터졌다. 전쟁의 기억으로 쇼크를 일으켜 전장에서처럼 사람을 다치게 하다니. 짜놓은 듯 악랄한 결말이었다. 노력해도 불행의 그림자는 옅어지지 않고, 기억은 끝까지 따라붙는다. 그녀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것은 달라질 수 없다는 무력감이었다.

그러나 현재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녀의 활동기간은 겨우 1년 반 남짓이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은퇴에 대해선 많은 추측이 따라붙고 있다. 첫째는 엑시즈 출신인 그녀가 타지에서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엑시즈는 거의 교류할 수 없는 곳이었고 쿠로사키 슌은 유일한 엑시즈 출신 선수였다. 둘째로는 LDS 사장이 아끼던 선수로서 신인 시절부터 견제당했고 그것이 은퇴의 한 원인이 되었으리라는 주장이다. 다만 이러한 추측과 관련해 특별히 의심스러운 부분을 찾을 순 없어, 이야기를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퍼트린 소문일 가능성도 있다. 마지막으로는…….”

여자는 아이에게 읽어주기 전, 미리 뒷부분을 훑는다. 꺼내도 될 말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좋지 않은 말이 적힌 것쯤은 큰 타격 없이 넘길 수 있지만, 전쟁에 대한 언급이 있어선 곤란하다.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인간의 악의를 설명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여자가 갑자기 뜸을 들이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재촉하듯 옷자락을 잡아당겼고.

……심신의 한계가 일찍 찾아왔다는 것이다.”

막상 그녀가 마주한 것은 김이 빠질 정도로 쉬운 이야기였다.

말이 많았던 그녀의 마지막 공식전, 쇼크를 일으킨 그녀를 보고 모두가 정상이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데뷔 전부터 몸이 상당히 약했다고 한다. 짧은 기간에 화려한 기록을 쌓으며 너무 많은 경기에 동원된 것이 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문제의 경기에서 더 버티지 못해 무너진 후 프로의 세계에 남을 수 없다고 판단, 일찍 퇴장하게 되었다는 것이 현재로선 지배적인 추측이다.”

여자가 아무런 설명 없이 퇴장하고 남편이 이전의 기록조차 지운 탓에 세상은 그녀가 사라진 것에 대해 마땅한 설명을 찾을 수 없었던 것 같다. 한참이나 지난 일에 대해 그럴듯한 단서를 찾는 것도 어려웠으리라. 결국 남은 것은 실제에 제법 근접했으나 불편한 부분은 짚지 못한 무난한 추측. 여자는 자신이 미스터리로 남게 된 것에 안도했다.

그 후로는 계속 평범한 이야기였다. 은퇴한 그녀가 어떻게 사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재능 있는 선수를 잃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그녀가 택한 새로운 인생을 응원한다. 등의 뻔한 말. 작정하고 존재를 지웠으니 그녀를 찾아낼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여자에게서 너절한 불행과 극적인 스토리만 보았을 사람들이 그녀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내려 애쓸 일도 없을 것이다. 여자는 긴 이야기를 끝내고, 아이에게 확인이라도 구하듯 말을 걸었다.

, 이제 됐지? 엄마가 읽어줘서 좋아?”

.”

말은 그렇게 해도 앳된 얼굴에 무언가 미진한 기색이 비친다. 꺼내지 않은 생각이라도 있나 싶어, 여자는 아이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시시했어? 아니면 말이 너무 어려워?”

쿠로사키 슌이에요?”

과거의 엄마에게 잘 모르는 이름이 붙는 것이 의문스럽긴 했던 모양이다. 경기 영상을 볼 때부터 한두 번 귀에 스쳤을 수도 있는 이름이고, 드러난 것을 억지로 덮을 필요도 없으므로 여자는 간결하게 답한다.

엄마가 옛날에 쓰던 이름이야.”

별명 같은?”

, 그렇게 생각해도 되고. 아무튼 프로 그만두곤 안 쓰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엄마 이름은 아카바 루리잖아.”

그만두지 않았으면 계속 쿠로사키 슌 했을 거예요?”

엄마가 계속 프로 했으면 좋았을 것 같아?”

아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아이의 커다란 눈에 담긴 순진한 열망을 본다. 아이에게 환호 속의 프로는 그저 빛날 것이다. 그 반짝임을, 그녀라고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한때는 동경했고, 전쟁이 끝나고는 동생의 꿈이 떠올라서라도 그 빛을 좇았다. 짧게나마 빛을 손에 쥔 시기가 있었던 것도 피로한 삶에 드문 위안이었을지도 모른다.

멋져 보여서?”

할머니가 보여주신 엄마는 진짜 멋졌어요.”

사랑받는 선수들은 빛나지. 하지만 사카키 유우야처럼 사랑받으려면 힘을 많이 써야 해. 엄마는 그걸 오래 버틸 수가 없었어.”

다만 여자가 기껏 쥔 빛조차 감당할 사람이 못 되었을 뿐이다. 그녀에게 절대적인 아군이 되어주려던 남편이 있었는데도. 그녀가 돌려준 답은 프로 생활을 포기한 이유에 대한 솔직한 설명이었지만 아마 아이에겐 너무 막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꾹 닫혀있던 입술은 한참이나 지나 열린다.

어려워요.”

엄마는 그랬지만 아가는 괜찮을 거야. 나를 안 닮았으니까.”

아이는 여자에게서 병든 내면도, 처참한 비극도 물려받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와 같은 불행에 내몰릴 일도, 괴로운 선택을 할 이유도 없다. 아마 아이는 순수하게 빛을 보고 나아가 그 빛을 품을 수 있으리라. 아이의 앞날이야말로, 자신의 내일도 볼 줄 모르는 여자가 유일하게 기대를 거는 미래였다.

그럼 저도 나중에 프로 될 수 있어요?”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도 될 수 있어.”

어떤 거?”

글쎄, 아가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어떤 길이든 아이는 자유롭게 택하면 된다.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는 전쟁은 끝났고, 누군가 짊어져야 할 무거운 과제도 없다. 지금의 아이에겐 벽이 되어줄 어른들도 있으니 순수하게 자신을 위한 삶을 만들 수 있다.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지금 꼭 결정해야 하는 건 아냐. 끌리는 걸 하면서 즐겁게 지내면 되지. 언젠가는 제일 하고 싶은 게 생길 거야.”

하나 유감스러운 점은 아이의 미래에 오래도록 함께할 자신이 없다는 것. 이 아이를 언제까지 지켜볼 수 있을까. 언제까지 도울 수 있을까. 밝지 않은 생각이 자꾸 머리를 누르지만, 여자는 아이 앞에서는 희망적으로 말하려 한다.

엄마가 끝까지 지켜볼게.”

거기에는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

 

사고가 일어나기 전의 어느 날, 여자는 기분 나쁜 징조를 확인했다. 격통에 시달리다 피를 토한 것이다. 그 전까지의 검진 결과에선 무엇 하나 걸린 게 없었는데, 그녀의 몸은 실체 없는 병을 안고 있는 듯했다. 시간이 흘러도 회복되는 것은 없고 새롭게 나빠질 뿐이다. 여자는 세면대에 튄 핏방울을 무감각하게 씻어내면서 남편을 떠올렸다. 아직껏 그녀가 나아질 거라 믿고 싶어 하는 사람, 그녀를 어떻게든 삶에 묶어두려 하는 남자를. 그의 곁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몸이 망가지는 것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드는 의문이었다.

결혼하기 전부터 여자는 어렴풋이, 자신이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생각해왔다. 요절할 상이라는 수군거림 탓이 아니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내면과 약해진 몸이 사이좋게 붕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도 남편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그녀를 세상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그녀는 남편의 집요한 관심을 떨칠 길을 고민하게 되었다. 아무리 그녀의 위태로움을 알고 있다고 해도, 눈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면 분명 그 마음에 상처를 입을 테니까. 그래서 그녀가 먼저 시도한 것이 그에게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암시를 주는 것이었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잖아. 정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냐. 특별히 어딘가에 정을 붙이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살 거야.

남편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그런 식이었다. 매사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를 취하고 뜻 모를 말로 장난을 걸며, 정말로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이미지를 만들면 된다. 그러면 그 남자라도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방향을 잡았는데, 남편은 그녀의 생각 이상으로 끈질긴 사람이었다. 그녀가 택한 방식이 오히려 그에게 그녀를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과 어떻게든 그녀를 감싸자는 의무감을 심어주고 만 것 같았다. 그의 관심은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기만 했다.

전략의 실패를 알아챈 시점은 너무 늦었다. 이런 사람에게 마음을 쏟다간 후회할 거라고, 진심을 섞어 이야기해도 남편은 포기할 줄 몰랐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힘들어 내내 남편의 곁에 머물렀던 여자는, 결국 그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만 그가 그녀라는 폐허에서 시선을 떼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예고 없이 떠나야 했는데, 막 움직이려는 때 어떻게 눈치챘는지 남편이 붙잡는 바람에 그녀는 타지로 갈 거라는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떠나기 전에 대접하고 싶다며, 남편은 여자에게 약간의 시간을 얻어냈다. 어차피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여자는 그가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들어서자 바다를 연상시키는 대형 수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남편은 수조가 잘 보이는 자리로 그녀를 안내했고, 두 사람은 마주앉았다. 수중정원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은 감상적인 곳에서 여자는 그동안 자신을 책임지느라 수고한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 다음은 적당한 거짓말을 채우는 일이었다. 갈 곳을 정하지도 않았으면서 여자는 마치 가벼운 여행이라도 가듯 막연한 계획을 늘어놓았다. 글쎄, 힘들지 않나? 이곳에 있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남편이 설득하려 슬그머니 넣는 말을 적당히 잘라내다, 여자는 좀 더 강하게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를 떠나도 언젠가는 정착을 해야 할 것 같아.]

그래야 나도 어떻게든 안정을 찾고 살 수 있겠지. 여자는 덧붙였다. 스스로도 불안정한 삶을 의식하고 있었던 체. 뜻밖의 말에 흥미가 생겼는지 남편은 입에 가져가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정착이라면?]

[눌러앉을 곳을 찾거나 함께할 사람을 찾거나. 어떤 것이어도 좋아.]

[앞으로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을 그렇게 쉽게 생각한다고?]

[쉽게 생각하는 게 아냐. 무엇이든, 이제 붙잡지 않으면 못 버틸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지.]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한 수에 지나지 않았다.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굴어서 그의 관심을 흩어버리자고 생각했을 뿐.

[내게 정착해줘.]

그러나 돌아온 것은 간절한 말이었다. 여자의 사고는 한순간 정지했다.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이 남자는 자신에게 어디까지 공을 들이려 하는 것인지. 여자는 간절함을 느끼지 못한 척 깔깔대고는 엉뚱한 답을 꺼냈다.

[레오 코퍼레이션에 있으라고?]

[아니, ‘에게 정착해달라고 말한 거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

[내 소망도 너와 같아. 네가 버텼으면 해. 그러니까, 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답은 정해져 있었다. 거절해야 했다. 그에게 가능성을 열어두면 계속 타인을 위해 삶을 낭비하려 들 것이 뻔했으니. 그런데 왜 그때, 그의 말에 약해졌던 것일까.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사람이라면 어쩌면 끔찍했던 불행의 고리를 끊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저도 모르게 기대했던 것인지. 부유하는 것에 지쳐 자신에게 열심인 사람에게 적당히 의지하고 싶어졌는지. 어떤 이유였건 여자는 준비된 답을 꺼내지 못했다. 턱을 괴며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을 뿐이다.

[그래서 내게 무엇을 원해? 구체적으로 말해줘.]

[너와 공식적인 관계로 함께하고 싶어. 협력자나 친구 같은 모호한 것 말고.]

[붙잡아두고 싶다 이거지? 어떻게? 우리가 연인같이 살았던 때가 있긴 하지만.]

결혼이라도 할 건 아니잖아. 그의 말을 듣고도 쉬이 방향이 잡히지 않아, 여자는 슬쩍 떠보았다. 한때 두 사람은 묘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누구도 사귄다고 말하지 않았으나 거의 그와 비슷하게 애매하게 얽혔다 끊어지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런 시간이 있었던 만큼 진득한 관계에 거부감은 없지만, 그는 단순히 그것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므로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세상 사람들이 명료하게 부를 수 있을 이름이라거나, 공식적인 절차 등의. 그런 점에서 예시로 든 것이 결혼일 뿐이었는데.

[……네가 괜찮다면 그게 제일 좋겠군.]

[진심이야?]

[그렇게 해서 네가 정착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가장 확실한 방법일지도 모르지.]

아무래도 그는 책임감에 미쳐있었던 모양이다. 마주앉은 남자가 던진 것이 사실상의 청혼이라는 걸 인지하고도 여자에게선 답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승낙의 말은 물론 거절의 말까지도. 왜 바로 입장을 정하지 못한 것일까. 삶의 목적도 욕망도 잘려나간 사람이라 타인의 열망을 차마 거부하지 못했을까. 그 정도로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자신이 강제로라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 같아서였을까. 여자는 한참이나 남편을 바라보았지만 그 얼굴에 장난기는 없었다.

[확신이 있어? 충동적으로 꺼낸 말이면 못 들은 것으로 할게.]

그럼에도 여자는 제 심연을 알기에 그에게 한 번 더 생각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물론, 한창 자신만만했던 남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가 답해주기만 하면 돼.]

[이건 계약이 아냐. 그렇게 쉽게 결정해선 안 돼. 그쪽의 미래가 걸려있다니까?]

[내게 중요한 건 네 의사야. 네 말대로, 연인처럼 살았던 때도 있으니까 너와 얽히는 것은 싫지도 않고.]

[답이야 정해져 있지.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결혼해줘, 쿠로사키.]

그렇게만 하면, 너를 곁에 둘 수 있다는 거지? 남편은 어쩐지 꿈을 꾸듯 몽롱한 얼굴로 묻고 있었다. 여자는 답 대신 그에게 키스했다.

몇몇 사람들 앞에서 약혼을 발표하기 직전, 여자는 긴장한 남편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아카바 레이지가 선택할 여자는 저를 닮은 인간일 줄 알았는데.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 딱딱하게 굳어있던 남편의 얼굴은 그 말에 풀렸다. 어쨌든 내 선택은 당신이야.

그 남자가 자신을 선택했다. 결혼의 이유로는 충분했다. 그렇게 마음을 잡고서 여자는 결혼 전까지 생활을 정리하는 데 열중했다. 그 중 하나는 고향에 방문하는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엔 폐허가 된 고향을 보고 싶지 않아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시간이 조금 흘러서는 소중한 사람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이 싫어 거의 가지 않았다. 프로를 그만두고서 얼마간 방황할 때, 남편이 살아온 도시에 정식으로 이주하고서는 더더욱 갈 이유가 없어졌다. 여자는 그렇게 이미 멀어진 고향에 향해 지난날을 모두 놓고 올 생각이었다.

고향에서 전쟁 전 친분을 쌓았던 친구를 만난 여자는 그간의 이야기를 다 털어놓기도 전에 빠르게 본론을 꺼냈다. 사야카, 나 결혼해. 앞으로는 그 사람이랑 스탠더드에서 계속 살 것 같네. 결혼하고는 여기 오기 더 힘들어질 테니까 미리 말하는 거야. 급작스런 소식에 멍하니 있던 상대는 이내 웃음 띤 얼굴로 답했다. 잘됐네, . 너에겐 뭔가 전환이 필요했어. 하트랜드에 오면 옛날 생각 날 테니까,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잘 살면 돼. 그 다음은 긴 포옹이었다. 여자는 친구가 자신을 놓아줄 때까지 작은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신랑은 어떤 사람이야?]

짧은 만남을 끝내고 여자가 돌아갈 때, 친구가 물었다.

[좋은 사람.]

막연한 표현이었지만 여자는 그 이상의 설명을 떠올려낼 수가 없었다. 사랑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에서 확실한 것은 남편이 그녀를 어떻게든 책임지려 들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했다. 다행이야. 친구도 그 짧은 말에 안심한 듯, 더 묻지 않았다.

결혼식은 유망한 기업 사장이라는 화려한 주인공에겐 다소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용히 치러졌다. 믿을 수 있는 사람만 불러모으고선 극비로 식을 올렸으므로. 하객은 남편의 지인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중 신부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소수인 데다, 모두 신부에 대해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않을 사람들임은 분명했다. 여자는 그 날, 남편의 가문에 들어가는 것으로 음울한 과거와 표면적으로 단절되었다.

그 후로도 남편은 그녀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려 들었다. 공식적인 자리에 그녀를 세우는 것은 최소한으로 하고 대중이 접할 수 있는 매체에 정보를 흘리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어느새 세상에서 신비스러운 존재가 되었으나, 대중의 상상이야 부부가 고려할 것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녀는 남편의 배경에 기대는 것으로 비로소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남편은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지만 부부의 생활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아버지 때문에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던 남편은 자신이 평범하게 성장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식한 듯 좋은 가정을 꾸리려고 노력했다. 남편이 세심하게 짠 판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때로 여자는 그들 부부가 이상적인 부부를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언뜻 완벽해 보이는 부부의 삶에 없었던 것은 하나. 아이였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아이가 이상적인 가정의 한 요소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부는 결혼 전은 물론 결혼하고도 아이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는데, 둘의 결혼이 일반적인 결합이 아니었기에 서로 조심스러웠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으리라. 어쨌든 두 사람은 젊었고, 가문은 후계자에 대한 압박을 주지 않았다. 아이를 꼭 가져야 할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둘만의 가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이가 생긴 것은 두 사람에게 기쁜 일이기에 앞서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임신한 것을 확인한 여자는 남편에게 알리기 전 부부의 삶에서 아이로 인해 생길 변화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가 이내 흩어버렸다. 전쟁으로 망가진 자신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겁이 났던 탓이다. 그럼에도 여자가 빠르게 마음을 잡은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로는 주변에 남편을 포함해 건강한 어른이 여럿 있다는 사실, 둘째로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암담한 직감.

아이가 무기력하고 위태로운 어머니를 두었다 해도, 심신이 건강한 어른들 사이에서 지낸다면 무사히 자랄지도 모른다. 거기에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들어섰다면 남편에게는 아이가 있는 쪽이 좋을 것이다. 저주 같은 불행으로 그녀가 일찍 꺾이게 되면 남편은 혼자 남아 그녀를 지키지 못했음을 자책할지도 모른다. 그녀에게서 난 아이가 있다면 언젠가 그녀가 떠나더라도 남편은 결국은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아이를 생각한 적이 없어서인지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혹스러웠던 것인지, 남편은 여자가 임신 소식을 전하고도 얼마간 멍하니 있었다. 간신히 꺼낸 말은 그녀의 감상을 묻는 것. 그는 끝내 자신의 생각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남편은 그 연약한 생명에게서 아내와 닮은 부분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의 아이이기도 한데도, ‘그녀의 아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부부가 어떤 생각으로 아이를 기다렸건, 아이는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둘의 세계는 넓어졌고 생활에는 활기가 더해졌다. 아이의 성장을 매일 지켜보면서 좋은 부모가 될 길을 고민하기도 했다. 이 아이에겐 미래가, 더 좋은 삶이. 아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두 사람에게서 자주 튀어나오는 생각이었다. 평범하게 살아오지 못한 두 사람에겐 아이야말로 세상에 무사히 내보내고 싶은 소중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아이가 태어나면서 나빠진 것도 하나 있었는데, 여자의 몸이었다. 출산을 거치면서 원래 약한 몸에 타격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약을 써도 의사를 붙여도 회복은 없었다. 아마 아이가 기억하는 엄마는 대부분이 아픈 모습이리라. 아이 앞에서는 가능한 강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잔뜩 망가진 몸으로는 일상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이 든다. 아이가 제 약한 몸을 물려받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할 수밖에.

피를 토할 즈음에는 그녀도 제법 지쳐있었다. 나빠지기만 하는 몸과 새롭게 나타나는 증상은 그녀를 무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전장에서 떨치지 못한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그녀를 덮고 있는 것만 같다. 온갖 검사를 해도 어차피 병은 나오지 않으니 치료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남편을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아, 여자는 그 일은 혼자 삼키기로 했다. 남편에게 꼭 말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각혈한 날, 여자는 다른 식으로도 피를 쏟았다. 유산이었다. 사소한 일은 아니었음에도 여자는 이상하리만큼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남편이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신경이 쓰였을 뿐이다. 그라면 아마 그녀의 몸을 걱정하고, 그 다음엔 그녀가 마음 아파할 것을 두려워하리라. 그러니 미리 적당히 말을 만들어가는 것이 좋다. 그를 안심시킬 수 있을 것, 이를테면 유산이 드문 일이 아니며 임신 초기였기에 자신은 크게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 정도.

그러나 일은 그녀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날 이후로 남편은 그녀를 보는 눈에 더 짙은 불안을 담았으므로. 그녀가 남편 앞에서 와르르 무너진 것이 문제였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런 결과를 피할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 날 가장 잘못되었던 것은, 상황을 꼬아버린 것은, 남편을 깊은 불안에 빠트린 것은 하나. 그녀의 과거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

희미한 진동음에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아이가 돌아가고 고요해진 방에서 안정을 취하던 중에 생각지 못한 방해를 받았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 주변을 돌아보아도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다. 거기에 소리가 크지 않은 것을 보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가 울리는 모양이다. 계속 울리는 진동음이 거슬려, 여자는 조금 전부터 다시 곁을 지키는 간병인에게 말을 걸었다. 진동 소리 들리지 않아? 간병인은 침대에서 나가기 힘든 그녀를 대신해 방을 뒤져 곧 문제의 물건을 찾아왔다. 그녀의 통신기였다.

오늘도네요. 누가 계속 연락하나 봐요. 시끄러워서 치워뒀는데도 참.”

오늘도?”

며칠을 꾸준히 울리고 있거든요. 그동안은 주인이 제대로 깨어있는 걸 보기도 어려우니 연락 왔다고 전할 수도 없었고요. 오늘은 그래도 좀 괜찮아 보이니 누가 그렇게 애타게 연락하는지 확인하셔도 되겠죠.”

통신기를 받아든 여자는 그동안 받은 연락을 확인했다. 사고 당일부터 온 전화와 메시지가 잔뜩 쌓여있었다. 사고 전 남편이 걸었던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고 이후 한 사람에게서 온 것이었다. 고향의 친구. 당장은 짐작 가는 일이 없어 메시지를 최근 것부터 읽자 단숨에 머리가 차가워진다.

[, 사고 이야기는 들었어. 네 남편과 연락했거든. 이것저것 듣고 나니 걱정돼서 나도 조금 간섭하려고. 오랜만에 만났을 때 너는 굉장히 지쳐 보였어. 그땐 사정을 확실하게 물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물어야 할 것 같아. 네가 힘들어했던 거, 유산 때문이야?]

친구에게 유산 이야기를 흘리지는 않았다. 함께 괴로운 시기를 넘어온 사람에게 제 불행을 굳이 내세우고 싶지 않았고 그녀에겐 그 사건이 특별히 짐이 된 적도 없었으므로. 남편과 친구가 연락하던 중, 그 일을 내내 마음에 두고 있던 남편이 이야기했을 것이 뻔하다. 남편이 유산을 극도로 의식하게 된 이유는 짐작이 가지만, 그동안은 그의 오해를 풀어줄 수가 없었다. 기회가 없었다기보다 그럴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오해를 풀기 위해 진실을 이야기하면 그가 상처 입을 것이 두려웠기에.

아무리 그녀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라지만, 남편이라고 그녀가 과거에 묶여있기를 바랄 리 없다. 언젠가는 그녀가 현재를 사랑하고 자신을 바라보길 막연하게나마 소망하고 있으리라. 그런 남편을 앞에 두고서 과거의 인간을 떠올려 무너졌다고 고백할 수는 없다. 그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유산했다는 말을 꺼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남편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에 마음이 무거워져,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을 뿐. 여자의 시선은 방황하다가 책상에 올려둔 달력에 잠깐 머물렀다. 지나간 날짜에 중요한 일정이라도 있었던 듯 크게 표시한 것이 눈에 띄었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이 남긴 흔적인데, 기억을 더듬어도 그 즈음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 같지 않았다. 어쩐지 익숙한 날짜를 속으로 되뇌다가 여자는 모르고 지나친 일정을 떠올렸다. 동생의 생일. 하나뿐인 동생의 생일을 달력에 표시하고서, 잊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여자는 몸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놀란 남편이 바로 그녀를 지탱했지만 숨이 가빠지고 세상이 어지럽게 흔들려 스스로도 몸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녀의 기억도 그때부터 분명하지 않다. 발작하듯 울었던 것과 남편이 자신을 안고 있었던 것만이 선명했다.

사라진 사람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은 전부 동생을 포기해도, 자신은 언제까지나 동생을 붙잡고 있어야만 했다. 갈수록 세상에서 희미해지는 동생을 기억하는 것으로, 동생을 이 세상에 남겨두어야 했다. 때문에 그녀는 줄곧, 돌아오지 않은 사람과 관련된 날을 챙겨왔다. 매년 찾아오는 생일을 그냥 넘기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고향을 떠나온 때부터는 물론이고 결혼한 후로도 동생의 생일은 한 번도 잊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잊은 것은 물론, 날짜를 보고 바로 떠올려내지도 못했다. 편하게 살면서 잠깐이나마 동생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죄책감과 서글픔으로 여자는 완전히 붕괴했다. 남편의 품에서 거의 비명 같은 울음을 토해내다 결국은 지쳐 그 품에 쓰러졌던 것 같다. 남편은 울음이 끊어지고도 한참이나 그녀를 안고 있었다.

남편은 그 날 이후로 여자가 아이를 잃은 슬픔에 빠졌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았다. 아내가 유산 이야기를 하다가 무너졌으니 그런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남편은 여자를 건드리면 부서질세라 조심스럽게 다뤘고 틈만 나면 그녀의 마음을 달래려 들었다. 나에게 제일 중요한 건 당신이야. 아이는 또 가질 수도 있어.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야. 보랏빛 눈에서 여자는 언제나 짙은 두려움을 읽었다. 힘든 것이 있으면 말해줘야 해. 난 언제나 당신 편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면 도와줄 수가 없어. 듣고 있어?

사실은 유산이 문제가 아니었고 자신은 멀쩡하다고 남편에게 말했다면 좋았겠지만 여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첫째가 남편에게 과거의 일에 매달린 끝에 무너졌다고 설명하기 미안해서였다면, 둘째로는 그녀가 괜찮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날 여자를 망가뜨린 일은 그 후로도 계속 그녀의 머리를 지배했다. 그녀의 삶을 흔드는 것은 언제나 단절된 것들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동생에서 시작된 생각은 동생과 함께 잃은 친우에게로, 그들의 닫힌 미래로, 이제는 생존자의 머릿속에만 남은 전쟁의 기억에로 자꾸만 뻗어갔다. 되살아나는 과거에 여자는 휘청거렸다.

남편과 함께 있으면서도 과거의 영상을 떨치기 힘들었다. 먼 곳을 보면서 어디에도 없는 사람을 생각하거나 일상에서 전쟁의 단편을 보기도 했다. 남편은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자가 과거의 파도에 휩쓸릴 때면 남편의 시선은 어김없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나를 봐. 당신 앞에 있어. 차마 소리로 꺼내지 못하는 호소를 알아채면, 여자는 그에게 장난처럼 키스했다.

남편은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라는 압박은 가하지 않았으나 언제까지나 과거에 지배당하며 살 수는 없어서 여자는 고향에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결혼한 후로는 한 번도 가지 않은 고향에서, 과거의 무덤이 된 그곳에서 제 머리를 채우는 것을 다 쏟아내야겠다고 생각하고서. 여자는 결혼 소식을 직접 전한 친구에게 연락해, 만나러 가겠다며 날짜를 잡았다. 오랜만의 연락에 반가워하며 친구는 그녀를 자기 집에 묵게 하는 호의까지 베풀었다.

[하트랜드에 와도 괜찮겠어?]

대화가 끝나기 직전, 친구가 조심스레 꺼낸 물음이었다.

[? 고향이잖아?]

[너한텐 너무 무거운 곳 아닌가 싶어서. 거기서 잘 사는 것 같은데 여기 오면 다시 나쁜 기억이…….]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그래. 결혼하기 전에 잠깐 너를 만나러 간 것도 그래서였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사실, 레지스탕스 중에서 제일 걱정되는 게 너라서 그래.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 통신을 끊었다.

결과적으로 친구의 걱정은 아주 빗나가지는 않았다. 그녀가 사고를 당한 곳이 바로 고향이었으니까. 거기에 사고가 일어난 장소로 그녀를 이끈 것도 과거의 기억이었다. 그녀와 관련된 나쁜 예감은 거의 틀리는 일이 없다.

잠깐 자리 비워줄 수 있어?”

여자는 간병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이 일은 제대로 해결해야 할 것 같다. 친구는 물론 어쩌면 남편까지 걸려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야 괜찮지만, 연락하시게요?”

. 좀 길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사람 있는 데서 하긴 신경 쓰이네.”

하긴 메시지만 해도 며칠분이 쌓였을 테니까요.”

간병인은 그녀를 두고 나가며 몸이 나빠지면 부르라고 당부했다. 혼자 남게 된 여자는 친구에게 연락했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여자는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침묵이 불안을 부르고, 불안은 오해로 번지고, 오해는 오해끼리 뭉쳐 이제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며칠간 거의 잠들어 있었던 탓에 그녀가 사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문제는 더더욱 커졌다.

우선은 친구와 남편 사이에 오갔던 말을 들어야 한다. 남편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그녀의 사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를 안심시켜야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친구와 연결되었다. 여자의 연락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을 친구는 받자마자 그녀의 상태부터 물었다.

[몸은 좀 괜찮아?]

[그렇게 심하진 않아.]

[거의 자기만 한다며? 나랑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 거야?]

[오늘은 일어나 앉았어. 식사도 했고. 다른 날보단 확실히 나아. 그리고 일단 너랑 말을 섞어봐야 할 것 같아서. 둘이서 무슨 말 했어?]

[……너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줄 거야?]

[필요하다면.]

친구는 길게 한숨을 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남편 말이야, 네가 왜 그곳에 갔는지부터 이해를 못 해. 계속 찜찜한 모양이야.]

[내가 예전에 자주 다녔던 곳이라고 설명 안 했어?]

[설명하기야 했는데, . 네 남편이 정말로 불안해하는 건…….]

[뭔데?]

[‘왜 물에 빠진 채로 발견됐는지.]

사고가 일어난 날, 여자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동생과 다녔던 물가였다. 그 전까지 그녀의 고향을 한 번도 찾은 적 없었던, 때문에 그녀가 사랑한 장소를 알 리 없는 남편은 어떻게 찾아온 것인지 물에 빠져 가라앉던 여자를 구해냈다. 그가 달려오지 않았다면 여자는 추억의 장소에 꼼짝없이 묻혔을 것이다. 며칠째 남편을 보지 못했음에도 그가 자신을 구했다는 것만은 확신하는 건, 잠깐 의식을 찾았을 때 남편의 얼굴이 비쳤기 때문이다.

잔뜩 겁에 질려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

[그 사람 아직도 충격이 남은 것 같더라. 그래도 네가 살아서 다행이지. 그 날, 그 사람한테 네가 스페이드교 쪽으로 갔다고 말해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어.]

[어쩐지, 아무것도 모를 사람이 잘 찾아왔다 했지. 네가 알려줬구나.]

여자는 작게 웃었지만 상대는 오랫동안 그녀의 소식을 기다리느라 착잡했는지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친구의 얼굴을 본다면 분명 딱딱하게 굳어있을 것이다. 약간의 침묵을 거쳐, 상대는 묵혀두었을 의문을 꺼낸다.

[, 이건 그 사람도 그 사람이지만 나도 신경이 쓰여서 묻는 건데, 그 날 어쩌다 물에 빠진 거야?]

[그야, 물에 들어갔다가…….]

[왜 들어갔는데? 아니, 들어간 건 그렇다 쳐도 왜 위험해진 거야? 평소의 너라면 그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집요한 질문이 아무래도 불길하다. 어쩌면 남편은 자신이 막연하게 생각한 것 이상의 공포에 시달려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메운다.

[사야카, 잠깐만. 그 사람 말이야, 그 날 일이 사고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런 불안도 있는 것 같던데.]

[너는?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네가 지쳐 보였다는 말을 먼저 꺼낸 건 나야. 거기에 네 남편이 반응해서 유산 이야기를 한 거고. 그 일이 정말 네가 힘들어했던 이유인지 아닌지는 덮어두더라도, 그 날 네가 어떤 상태였는지 듣고 싶어.]

그녀가 고향에서 털어내고 싶었던 것은 음울한 생각이었지 남편이 함께하는 현재가 아니었다. 사고가 일어난 날 동생과의 추억이 많았던 물가로 향한 것도 물속에 들어간 것도 전부, 남길 기억만 끌어안고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서였는데. 여자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자, 이번에는 친구의 목소리가 달래기라도 하는 듯 부드러워진다.

[사는 게 지칠 순 있어. 특히 너는 워낙 힘들었으니 진작 모든 걸 놓고 싶어졌어도 놀랍지 않아. 네가 잘 살기만 한다면 간섭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 이번엔 죽을 뻔했잖아. 마음의 짐이 있으면 빨리 털어내야 해.]

[걱정은 고맙지만 그냥 피곤했을 뿐이야. 그 사람이나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게 아닌데.]

여자가 아무리 자신은 괜찮다고 주장해도 그녀의 위태로움을 오래 지켜봐온 사람이라면 쉽게 믿지 못한다. 평화로웠던 때 만나 친분을 쌓아온 친구조차 그래서, 여자가 돌려받은 말은 걱정 깔린 의심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줘, . 너 정말로, 나쁜 생각 한 건 아니지?]

[나쁜 생각이라니?]

[네 남편한텐 말 안 했지만 난 기억하고 있거든. 예전에 네가 자살하려고…….]

통신기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바닥에 떨어진 통신기에선 계속 친구의 목소리가 새어나왔지만 그녀에게는 웅웅거리는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다. 한참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여자는 방이 침묵에 덮였을 때서야 생각이 또렷해졌다. 남편을 만나야 했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가 생각하는 최악의 가능성을 자신의 말로 흩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은 그에게 자신이 깨어있다는 걸 알리고 여자는 뒤늦게 통신기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손을 뻗어서 잡힐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땅에 몸이 닿아야 했다. 확신도 자신도 없었지만 여자는 다시 바닥에 발을 디디기로 했다.

제발, 레이지. 불길한 생각은 말아줘. 침대에서 빠져나오며 여자는 곁에 없는 사람을 향해 애원했다.

 

*

 

친구의 집에 들어섰을 때 여자의 눈이 처음으로 담은 것은 케이크였다. 크림이 잔뜩 발린 커다란 케이크는 그 자체만으로 기분 좋은 선물처럼 느껴졌다. 떠오르는 것이 있어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더니 친구가 설명을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보호하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애의 생일이 오늘이야. 조금 있다가 생일 축하 할 건데, 너도 껴서 같이 축하해줬으면 해. 아무래도 생일은 축하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잖아. 이야기를 듣는 동안 여자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걸렸다. 동생의 어린 시절이 눈앞에 그려졌던 까닭이었다.

삶에서 가족이라고 인식할 존재는 서로밖에 없었던 자매는 어릴 때부터 서로를 챙기는 데 익숙했다. 몇 살이나마 위인 여자 쪽이 특히 신경을 썼다. 그녀는 동생의 생일 며칠 전부터 선물을 고르고 조촐한 파티를 생각하곤 했다. 그래봤자 보통은 둘만의 시간이었지만, 생일 분위기를 내는 것이야 둘이서도 얼마든 할 수 있었다. 다 먹지도 못할 큰 케이크를 사와서 촛불을 꽂을 때 이미 동생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촛불을 끄고 케이크를 자르는 평범한 순간순간에 왜 그렇게 들떴는지.

나이가 들고 동생이 친구를 여럿 사귀게 되면서도 여자는 계속 케이크를 사고 동생의 생일을 준비했다. 동생도 언니가 챙겨주는 것은 어떤 선물보다도 기쁘게 받아주었다. 그래서였을까. 전쟁이 끝나고 동생이 사라지고도 여자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매해 주인 없는 케이크를 사서 아무에게나 먹이는 것이 그녀의 특이한 패턴이 되었다. 웬 케이크야? 받은 사람이 물으면 그냥 기분 내고 싶었을 뿐이라는 둥 적당히 둘러대면서.

[이거 보니까 생각난다. 나도 얼마 전에 생일 케이크를 샀어.]

[누구 생일이었는데? 남편?]

[루리. 당일엔 못 챙겼지만, 그냥, 사야 할 것 같아서.]

올해 처음으로 동생의 생일을 잊었다. 겨우 기억해내고서 며칠간 멍하니 있다가 결국 여자는 케이크를 샀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니, 날짜보다는 챙겨준다는 사실이 중요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케이크를 자르려고 하니 우리 애가 묻는 거 있지. 촛불 후 부는 거 안 하냐고. 그 애한테 케이크는 생일 축하할 때 먹는 것 정도겠지. 그래서 내가 이번엔 그냥 먹어도 된다며 케이크를 큼직하게 잘라줬어. 애가 참 좋아하더라. 크림을 얼굴에 묻혀가며 열심히 먹는 걸 보고 루리 어릴 때가 생각났어. 웃기지, 닮은 데 하나 없는 이모를 생각한 거야.]

그것은 슬픔에 덮인 기억은 아니었다. 일상의 단편에서 잠깐 과거를 떠올렸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에 무거운 감정이 건드려졌는지, 친구는 한참이나 침묵하다 말했다.

[루리 생일을 아직 챙기고 있는 줄 몰랐어. 내년부터는 같이 챙길래?]

[아냐. 그런 일을 하는 건 나만으로도 충분해.]

친구에게 괜히 마음의 짐을 안긴 것 같아서 여자는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친구는 여자보다 동생 쪽과 더 친했다. 먼저 친구를 알게 된 동생이 이후 언니에게 소개해주면서 두 사람도 연결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딘가 특별해진 것도 전쟁을 거치고 동생이 사라지면서부터.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둘을 일종의 동지로 만들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아이가 있었다니.]

[어쩌다 그렇게 됐네.]

[아들? ?]

[아들인데 나랑은 정말 안 닮았어.]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하네. 사진은 있고?]

듣고 보니 남에게 가족을 소개할 사진이 없었다. 남들이 흔히 지갑에 챙기는 가족사진 같은 것부터 없었다. 그런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엔 그녀가 잃은 것이 많았고, 그녀의 삶도 빡빡했다. 마지막으로 의미를 가졌던 사진이란 전쟁이 일어나기 전 동생과 친우와 함께 찍은 것 정도.

[가족사진을 안 찍었어. 하나쯤 찍어둘 걸 그랬네.]

그러나 남편은 다르다. 그는 기록에 집착하고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를 위해서 하나 남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녀가 사라지고도 추억할 수 있을 흔적을. 그런 생각은 속으로만 삼켰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직접 보는 게 나을까? 네 아들.]

[그 애는 엄마 친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너 만나면 좋아할지도 몰라.]

[그럼 나 초대해줘야 해. 너희 애 만났을 때 슌이랑 어디 닮았을까?’하고 들여다보고 싶다. 내가 보면 너랑 닮은 곳 몇 군데는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거기서 여자는 멈칫했다. 친구가 아는 이름은, 그리고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썼던 첫 번째 이름은 이미 한참 전에 묻혔다. 남편은 가끔 장난으로 그 이름을 꺼내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녀를 예전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곳은 이제 고향뿐. 적당히 넘어갈 수야 있었지만 여자는 앞으로도 연을 이어갈 친구 앞에서 솔직해지기로 했다.

[애 앞에서 슌이라는 이름 꺼내면 혼란스러워 할 텐데.]

[? 엄마 이름을 말하는 게 뭐 어때서?]

[나 스탠더드에서 살면서 이름 바꿨거든. 루리로.]

[왜 하필 루리야? 네 삶을 그냥 루리로 덮어버리겠단 거야? 아니면 루리의 삶을 대신 살아주기라도 하고 싶었어?]

[그때는 과거를 묻을 이름이 필요했어. 어차피 묻어버릴 거라면 좋아하는 이름을 쓰고 싶었던 거고.]

여자의 과거는 옛 이름과 함께 침몰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세상에 계속 남게 된다. 그렇다면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이름 따위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다.

[편하게 살아야 해, .]

그럼에도 친구의 말에 괜찮다는 답 대신 고개만 끄덕인 것은, 어쩐지 친구가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남편이나 친구나, 그녀의 과거를 아는 이들은 언제나 그녀가 아파할 것을, 아픔을 참을 것을 염려하는 것 같다. 저주 같은 비극은 그녀의 통각을 거의 마비시켰는데.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었지만 친분이 친분이다 보니 어색함은 곧 사라졌다. 친구가 돌본다던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고 아이가 자러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로 서로에 대해 깊게 파고들지 못한 그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서로의 현재. 먼저 자기 삶을 소개한 쪽은 친구였다.

[시설에서 일하고 여기서도 애를 돌봐. 전쟁이 끝나고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는데 왠지 그런 일을 해야 할 것 같았어. 죄책감인지 뭔지.]

[일이 너한테 맞아?]

[난 레지스탕스 때 내가 그냥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것 같았거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나약한 사람처럼 느껴져서 자꾸 위축됐어. 근데 이쪽 일은 사람을 바꾸잖아? 분명히,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쳐. 그런 점에선 마음에 드네.]

힘들기는 하지만. 친구는 맥주캔을 비우며 웃었다.

[그래서 넌 어떻게 지내? 무슨 일을 하고?]

[특별히 하는 일은 없어. 프로 데뷔해서 활동하기도 하고 남편 회사에서 일을 맡기도 했는데 다 오래 할 일은 아니더라고. 세상에 나가기도 피로해서, 잘난 집안의 신비스러운 안주인처럼 살아.]

[넌 몸이 약하니까, 답답하지만 않다면 그런 식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남편은 너한테 잘해줘?]

[그건 확실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면서 나를 책임지려 들었다니까. 뭐든 나한테 맞춰주려고 하고. 나를 꼭 깨지기 쉬운 물건처럼 조심조심 대한다는 게 재밌지.]

언제 꺾여도 이상하지 않을 인간을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남편이었다. 그의 굳건한 책임감과 세심한 배려는 그녀가 그를 떠나지 못해서라도 세상에 묶이게 만들었다.

[내가 사라질 것 같은지 자꾸 불안해하는 티가 나는데 난 그게 우스운 거야. 나는 언제나 그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서는데. 손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를 벗어나지 않는데. 바로 눈앞에 둔 사람을 왜 그렇게 붙잡고 싶어 하는지.]

[네가 그 사람한테 소중해서 그런 거 아냐?]

[그러면 난 더 죄책감이 들 거야. 그 사람의 선의는 너무 무거워서 가끔은 이런 걸 받아도 되나 싶거든. 그런데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을 안심시키지 못하고 계속 괴롭게…….]

술을 마신 것은 친구 쪽인데 오히려 여자가 취하기라도 한 듯 감상에 젖었다. 편한 상대 앞에서 그동안 남편에게 품고 있던 생각을 쏟아버린 것인지. 드물게 감정을 드러내는 여자가 신경이 쓰였는지, 친구는 마주앉은 그녀의 손을 제 손으로 가만히 감쌌다.

[좋게 생각해. 네가 힘들었던 걸 아는 사람이니까 조심하는 것뿐인지도 몰라.]

[최근에 일이 있고는 더 불안해하는데?]

[무슨 일?]

[의도한 건 아닌데 남편을 놀라게 했어. 그것도 심하게.]

내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려서 그래. 일이 많이 꼬여버렸어. 남편 앞에선 꺼낼 수 없었던 말을 여자는 거짓말처럼 쉽게 흘렸다. 다만 그것은 친구와의 대화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까웠다. 그동안 정리되지 못했던 감정을 단편적인 문장으로 쏟아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남편이 자기한테 의지하길 바란다는 건 알아. 언젠가는 내가 자기를 통해 안정을 찾길 기대하겠지.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왜 잃은 것에 매달리는지 몰라.]

그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여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조를 걸쳤는지 나른하게 웃었는지. 그게 아니면 슬픔이 매달려 있었는지. 그 순간의 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해도 별 의미는 없었으리라. 어릴 적 그녀가 동생을 달랠 때처럼, 친구가 바로 그녀를 끌어안았으니까. 너는 버텨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사람이야. 친구의 목소리가 떨렸던 것만은 기억한다.

여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통신기를 쥐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으로 남편의 연락처를 찾아 겨우 눌렀지만 신호음만 갈 뿐 받지 않는다. 몇 번이나 시도해도 결과는 같았다. 바빠서 확인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여자는 초조해진다. 남편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얼른 제 목소리를 들려주려 했던 것이지만, 사실 남편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남편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을 놓고 싶었다.

남편이 죄책감 같은 것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했다. 죄책감이 사람을 얼마나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아는 사람으로서, 그녀는 남편이 스스로를 괴롭히길 바라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아내에 대한 책임감과 그녀를 구원해야 한다는 완벽주의적 목표 때문이라고 해도. 지금껏 자신을 지탱한 그가, 아내가 자살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죄책감에 짓눌린다면, 그동안의 노력이 무의미했다고 판단한다면. 생각만으로도 괴롭다.

그러니 어서 그가 괜찮은지 확인하지 않으면, 그가 정말 죄책감에 빠져있을 경우 생각을 바꿔놓지 않으면. 여자는 시계를 보았지만 남편이 돌아올 시간은 아니었다. 일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 회사에 연락한다는 선택지는 바로 지워버린다. 결국 남은 것은 정상적으로 일을 마치고 올 때까지 몇 시간을 기다리는 것뿐. 그동안 무엇을 하며 버텨야 할까. 여자의 생각은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끊어졌다. 오전의 일이 있어서인지, 간병인은 돌아오자마자 그녀의 모습을 보고 눈이 둥그레졌다.

어쩌다 나왔어요? 침대에서 떨어진 건 아니죠?”

디스크가 떨어져서 주워야 했어.”

침대에서 나올 때 어땠어요? 아직 어지러워요? 아니면 그럭저럭 괜찮은 정도?”

아까보다 나은 정도.”

여자는 일어서려다 무의식적으로 근처의 가구를 잡았다. 한 번 요란하게 무너진 것 때문에 자신이 없어진 것일까. 그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는지, 간병인은 급히 물었다.

침대로 옮겨드려요?”

저기 앉아서 쉬면 안 돼?”

여자는 오전에 목표로 삼았던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남편이 오기 전까지 가능한 멀쩡한 모습을 만들고 싶어서 꺼낸 말이었지만 간병인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지 바로 허락하지 않는다.

절대안정이 필요한 시기예요.”

얌전히 앉아있으면 되잖아. 누워있는 것도 피곤해서 그래.”

간병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 그녀를 의자까지 데려가주었다. 타인의 도움을 받아 몇 걸음 떼는 동안에도 속이 울렁거렸으나, 여자는 앉을 때까지 모른 체 했다. 간병인이 무릎에 담요를 덮어줄 때서야 여자는 자신이 가벼운 원피스 하나만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옷을 입은 기억도 없다. 죽은 듯이 잠을 자는 시간이 대부분이었기에 생활의 모든 부분에 둔감했다. 지금 이렇게 걷는 데 도움을 받는 것 말고도, 며칠간 그녀를 둘러싼 일에는 전부 타인의 손길이 닿아있었으리라. 죽을 뻔했던 값을 요란히도 치르는군. 피로해진 여자는 의자에 기댔다. 생명이 위험했던 사고를 이 정도로 넘긴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지, 언제 회복될지 모른다는 것을 걱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근데 오늘은 어떻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그동안은 일어나는 시간이 보통 빨라도 오후였으니 생활패턴을 맞추기 힘들었거든요. 앞으로 오늘처럼만 일어날 수 있으면 회복이 더 빨라질지도 몰라요.”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면 좋아요. 생활이 안정될 수 있거든요. 간병인의 말을 들으면서 여자는 잊고 있던 것을 하나 떠올려냈다. 날이 밝기 전 희미하게 느낀 기척.

그 전에 살짝 깨서인 것 같은데, 새벽에 사람이 왔었어?”

글쎄요. 전 새벽까지 여기 있진 않으니까, 자리를 비운 사이 사람이 들어왔을지도 모르죠. 뭐라도 느끼셨어요?”

확신은 없는데,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 잠결에 인기척을 느꼈는지도 모르지. 깼을 땐 아무도 없었지만.”

사장님인가? 최근에 잠을 못 들인다는 것 같더라고요.”

그 사람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아,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심란할 수밖에 없죠.”

자기관리가 철저해서 일정한 수면시간을 확보하려 드는 사람인데도?”

요즘 사장님이 어떤 모습인지 보셔야 하는데. 부품이 한두 개씩 떨어져나가는 것 같아요.”

곧이어 간병인이 늘어놓는 남편의 이야기는 여자를 침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를 삶에 묶어두던 그 남자가 잔뜩 지쳐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으므로. 전장에 섰을 때도, 전사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오만인지 무장이었는지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녀 앞에서야 불안 때문에 약해졌다고 해도, 생활에서 그렇게 흔들리는 일은 없었는데.

정신적인 무장으로 일에 지장이 가지는 않겠지만, 여자가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라는 인간이 입는 데미지는 커질 것이 분명했다. 닳아가는 것이다. 정밀한 기계 같은 그 남자가, 조금씩. 여자의 얼굴에 감정이 비치기라도 했는지 간병인은 뒤늦게 이야기의 방향을 바꾼다.

그래도 지금은 사장님보다 본인을 걱정하셔야 해요. 사장님이야 부인이 나아지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테니까요.”

정말로?”

가족이 죽을 뻔했는데 평범하게 지내는 것도 힘들어요. 부인도 힘드실 테니 몸부터 챙기세요.”

생활의 불편 때문에라도 가능한 빨리 회복해야 한다는 것은 납득했지만, 여자는 그동안 남편이 어떻게 지냈는지 들은 때부터 심란함을 떨칠 수 없었다. 간병인이 가져다준 책을 읽으면서도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답지 않은 모습이, 자신이 가져온 삐걱거림이 자꾸만 눈앞을 메웠다.

그러니까 그 날, 어디서부터 꼬였더라. 여자는 기억을 더듬어 사고가 일어난 날을 떠올려낸다.

여자가 고향에서 보내기로 한 시간은 하룻밤. 대단한 일을 준비하기엔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추억의 장소 몇 군데를 돌아볼 정도는 되었다. 친구의 집에 가기 전 두어 곳에 들렀던 여자는 다음날 해가 지기 전 그 집에서 나오면서도 들렀다 갈 곳을 하나 정해두었다. 전날 생일 이야기를 하다 떠오른 곳. 동생과의 추억이 많이 남은 곳이었다. 침략군이 밀려들기 전까지 그녀 자매가 자주 찾은 장소.

[그래서 이제 마이아미인가로 돌아가는 거야?]

친구의 물음에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로 가지는 않고 한 군데 들렀다가.]

[어디?]

[스페이드교 쪽에 나랑 루리 가던 물가 알지.]

친구라면 바로 알아들을 것이다. 자매가 다녔던 학원 근처의 물가라면 하나밖에 없다. 찾지 않은 시간이 길어 어떻게 변했는지는 모르나 기억 속의 그곳은 언제나 평온했다. 좋은 기억을 되살리기에도, 혼란스러운 감정의 찌꺼기를 쏟아내기도 괜찮은 장소이리라. 여자는 짐을 들고, 전쟁의 기억을 공유하는 친구를 얼마간 눈에 담았다. 한때는 건드리면 눈물이 터질 것 같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안정을 얻는 것 같아 안심이었다.

[, 잘 지내야 해.]

손을 흔들고 돌아섰을 때 친구가 외쳤다. 여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떠났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것이 한참이나 되었는데도, 물가로 가는 길은 여전히 생생했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전쟁으로 처참하게 무너졌던 학원은 새로 지어져 학생으로 북적였고 검게 죽었던 땅은 풀로 덮여 건강한 색을 찾았다. 모든 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기억과 다른데, 그녀의 목적지만이 전과 같았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았기 때문일까. 여자는 한때 사랑했던 물빛을 눈에 담으며 짐을 내려놓았다. 다음은 외투를 벗어 가지런히 개어두는 일이었다.

전날 여자는 동생과의 추억을 하나 기억해냈다. 동생과 이곳에 마지막으로 들렀던 때의 일. 그 날 여자는 근처의 나무에 기대어 동생이 수영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같이 수영을 했겠지만 하필 감기가 독하게 들어서 차가운 물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눈앞에서 몇 번이고 물속으로 사라졌던 동생은 얼굴을 보일 때마다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언니 안됐다. 발이라도 담글래? 그 말에 별 생각 없이 동생 쪽으로 향했던 여자는 그대로 동생에게 잡혀 물에 빠지고 말았다.

차가운 물에 머리가 지끈거리긴 했지만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보다야 같이 물속에 있는 것이 훨씬 재미있긴 했다. 여자는 그 날 완전히 지쳐서야 동생과 함께 물에서 나왔다. 외투를 챙겨 돌아가려던 때, 갑자기 동생이 여자를 다급하게 불렀다.

[언니한테서 받은 목걸이 없어졌어. 물속에서 끊어진 것 같아.]

[오늘은 재수가 없네. 찾는 건 어려울 테니까 그냥 가자.]

여자는 적당히 달래고 갈 생각이었지만 동생은 속상한 듯 자꾸 물을 돌아보았다.

[언니가 생일선물로 준 거였는데.]

[네가 좋아했다는 게 중요한 거야. 목걸이는 새로 사면 되잖아.]

그때는 여자도 어렸다. 동생이 액세서리를 좋아하니 간간이 선물하긴 했지만 대단한 안목이랄 것은 없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잃어버린 목걸이도 아마 적당히 반짝이고 그때 눈에 예뻐 보이는 것이었으리라. 동생에겐 이미 예쁜 것이 많이 있었는데 언니의 선물 같은 게 뭐가 중요했던 것인지. 동생은 그 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계속 목걸이 이야기를 했다.

이곳은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십 년도 더 전에 물속에 가라앉은 물건이 남아있을 리 없다. 있다고 해도 이제, 찾아서 돌려줄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여자는 그 날처럼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여러 추억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동생의 웃음소리가, 물 위로 빼꼼 올라오던 동생의 얼굴이, 빛을 받아 반짝이던 물빛이 되살아났다. 자매의 마지막 방문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으니 이곳에 남은 것은 행복했던 기억뿐. 이것만 끌어안고, 나쁜 것은 전부 내려놓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기억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목걸이 이야기를 하던 동생에게서, 모든 것이 무너진 날 제 손을 잡고 뛰는 동생에게로 기억이 뛰었다. 난민캠프에서 식량을 배급받던 동생, 저항군의 표식을 허리에 매고 있던 동생, 귀가 먹먹해지는 비명 속에서, 도망치지 못한 아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동생. 적과 싸운 끝에 다쳐서 돌아온 여자가 다 갈라진 목소리로 그래도 너는 지킬 거야라고 말했을 때 희미하게 웃던 동생.

그런 동생이 침략자가 정한 운명에 마구 농락당하다 사라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언니. 동생의 목소리에 여자는 숨이 막혔다. 지극히 평온한 목소리에 그동안 덮어두었던 죄책감이 한꺼번에 쏟아져 그녀를 짓눌렀다. 어느새 여자는 가라앉고 있었다. 몸이 뻣뻣해져 물 위로 떠오를 수도, 물속에서 버틸 수도 없었다. 전장에서도 피했던 죽음에 휩싸이면서, 여자는 언뜻 남편이 자신을 끌어올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먼 곳에서 그녀가 위험에 빠진 줄도 모르고 있을 사람인데도, 자신을 지탱해온 자라고 떠올렸을까.

삶은 언제나 그녀에게 악의적이었으니 그런 기적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의식조차 가라앉기 직전에 여자는 제 몸을 안는 손을 느꼈다. 거짓말처럼 따뜻해서 마지막 친절처럼 느껴진 손길에 몸을 맡기고, 그대로 잠들었던 것 같다. 이후 눈꺼풀이 잠깐 열렸을 때 여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남편을 보았다. 패닉에 빠진 얼굴을 확인하자 죄책감이 들었다. 이 남자는 여기까지 나를 구하러 왔구나. 다시 정신을 잃을 때까지 머리를 채우던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남편은 일찍부터 그녀가 과거의 기억에 목을 졸릴 것을 걱정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그녀의 내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인지. 들은 적이 있겠지만 LC에는 기억을 열람하는 기술이 있다. 더 나아가 기억의 조작도 가능하니 네가 원한다면 나쁜 기억만을 잘라낼 수도 있어.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네가 악몽에 시달리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지도. 오래 전 남편이 기억에 손을 대는 것을 제안했을 때,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은 기계처럼 문제를 일으킨 부분만 잘라낸다고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야.

남편도 그녀의 의사를 거스를 생각은 없었던 듯 더 요구하지 않아, 그 일은 그대로 묻혔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희미해질 무렵, 사고 직전에 남편은 다시 기억을 들여다보는 기술 이야기를 꺼냈다. 다만 그때 그가 원했던 것은 기억에 손을 대는 일이 아니었다.

[기억은 3인칭이 아닌 1인칭의 영상으로 출력돼. 타인의 기억을 열람한다는 건 그 사람이 그동안 보고 담아온 것을 1인칭으로 본다는 뜻이지. 과거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재미있네.]

[그러니까 한 번만, 당신의 기억을 보여줘. 당신이 무엇을 보고 생각하는지 내가 그 속에서 들여다보면, 어쩌면…….]

남편은 거의 애원했다.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

여자는 침묵했고 남편은 쉽게 포기했다. 감정이 걷히자 남편이 꺼낸 것은 사과의 말이었다. 주제넘은 말을 꺼내서 미안하다고. 그런 것이 없어도 당신을 이해해야 했던 것이라고.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 잘못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한 번이라도 남편의 말을 들어주었다면, 달라졌을까? 기억에 먹히지 않고, 최소한 그가 괴로워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었을까? 머리를 치는 의문에, 과거의 사소한 균열들이 하나하나 묵직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잠깐 눈을 감기도 무서워졌다. 그대로 깊은 꿈에 떨어져, 며칠간 그랬듯 남편을 괴로운 기다림에 빠트릴 것 같아서. 죽음 같은 잠에 익숙해졌던 몸은 깨어있는 것만으로 아파왔으나, 여자는 통증을 자극 삼아 고집스레 버텼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틈만 나면 시계를 힐끔거리면서.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여자는 평소 남편이 일을 마치는 시간까지 버티는 데 성공했지만 한참이나 지나도 남편은 오지 않았다. 이럴 때 남편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남편이 신임하는 수하, 랜서즈 구상 단계에서부터 남편의 곁을 지켜왔기에 회사에서 그녀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그가 자신을 껄끄러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자는 원하는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연락했다. 신호음이 몇 번 가는가 싶더니 곧 익숙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카지마, 레이지는?]

상대가 받자마자 여자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약간의 침묵 끝에 딱딱한 답이 돌아왔다.

[……모처럼 깨어있군요. 사장님이 아시면 기뻐하시겠습니다만.]

[그 사람 아직 회사에 있어?]

[조금 전 사장실을 나섰으니 곧 그쪽으로 가실 겁니다.]

통신을 끊은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간병인이 물건을 가지러 나간 터라 그녀에게 향하는 시선은 없다. 주변의 물체를 잡고 걸으면 방 끝까지는 갈 수 있으리라. 한 발짝, 한 발짝. 위태롭게 걸으면서도 여자는 방문 쪽만 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저기까지는 가야 한다는 생각을 안고서. 마침내 문까지 다다른 여자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까지 성공했다.

조금만 더 가면, 그 사람을. 여자의 간절한 움직임은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꼬였다. 한순간 어지러워 비틀거렸는데, 그때 바로 옆 테이블에 놓인 화병을 실수로 친 모양이었다. 떨어진 화병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여기저기 튄 파편과 흩어진 꽃, 소리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 결국 균형을 잃고 주저앉은 자신까지. ‘실패를 깨닫기엔 충분한 상황이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다시 침대에 데려가려는 사람들을 보고, 여자는 테이블을 지지대로 일어서려 애썼다.

물론 실패였다. 자신의 실수로 부서진 화병이, 결국 방을 크게 벗어나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무력감만 깨워서 여자는 실패의 흔적이라도 치우려 파편에 손을 뻗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팔을 잡았다. 돌아보았을 때 마주한 것은 남편의 얼굴. 그때야말로 여자는 울고 싶어졌다. 하필, 이런 모습을 가장 보이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게.

무력한 모습에 걱정을 잔뜩 늘어놓거나 무거운 표정을 지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남편은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파편이 튄 것을 핑계로, 혼자선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여자를 안고 자리를 피해 그녀를 사람들의 시선에서 해방시키기까지 했다. 남편에게 안긴 채로는 어디로 가도 상관없었지만, 여자는 남편의 불안을 풀어준다는 원래 목표에 맞는 곳을 목적지로 삼았다. 두 사람이 방해받지 않을 곳. 조용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곳으로.

꼭 그가 청혼했던 곳을 연상시키는, 수조가 있는 방에 둘은 들어섰다.

 

*

 

여자는 남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간의 고생 때문이었는지 핼쑥하긴 했지만 표정만은 평온하다. 남편은 사고 전까지 부부가 쓰던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피곤하다며 소파에 기대앉더니, 여자가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긴장이 풀리기라도 한 것일까. 곤히 잠든 것을 굳이 깨우고 싶지 않아, 여자는 남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그 곁에 앉아 쉬기로 했다.

한 번쯤 남편의 불안을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번이 그 기회가 되었다. 전하려던 말을 다 전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사고에 대해선 남편이 마음을 놓게 된 것 같다. 무슨 말을 했었더라. 나는 계속 여기에 있을 테니 안심해, 였던가. 여자는 남편이 쌓아오던 마음의 독이 겨우 그런 말에 녹아버렸다는 것이 어쩐지 우습다. 혀를 놀리는 것으로는 사람의 머리 위에서 노는 남자가, 평범하기 그지없는 말에 약해져선. 어쩌면 그는 여자가 가장 간결한 말로 그간의 불안을 부정해주길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세련된 태도와 명석한 두뇌 뒤에 의외로 순진한 데가 있다.

몸이 언제 나을지는 모른다. 사고 전만큼 회복하기까지 몇 주는 걸릴 수도 있고, 돌아오더라도 오래 전에 황폐해진 몸이 보통 사람처럼 괜찮아질 수는 없다. 그래도 남편은 초조해하는 일 없이 그녀의 곁을 지킬 것이다. 남편이 굳이 명확한 단어로 말하지 않아도 그를 십 년도 넘게 지켜본 여자는 그의 뜻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남편이 버틴다면 그녀도 마지막까지 삶을 붙잡고 있으리라.

마지막까지. 원인 모를 증상이 자꾸만 늘어가는 여자에게는 곧 현실이 될지도 모를 묵직한 단어였다. 이제 부부의 관계에서 유일한 걱정은 그것. 남편에게 이야기를 꺼낼 수도, 그녀가 고쳐볼 수도 없는 문제.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면. 여자는 인기척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힘겹게 방문자를 맞았다. 예고 없이 찾아온 시어머니는 소파에서 잠든 아들을 보고 단정한 얼굴에 웃음을 걸쳤다.

그새 잠들었나요?”

많이 피곤했나 봐요.”

이제 안심했다는 거겠죠. 그 전까진 통 잠을 들이지 못하던 사람이, 당신이 무사하다고 인식하자마자 이렇게.”

다행이에요. 저 사람까지 몸이 상하면 안 되잖아요.”

자리에 앉자마자 시어머니의 시선은 아들이 아닌 여자에게로 꽂혔다. 타인을 해부하는 것 같은 물빛 눈을 여자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늦은 시간에 굳이 아들 부부의 방을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들을 깨우려 들지 않는 것, 아들이 잠들었음에도 돌아가지 않는 것을 보면 목적은 처음부터 며느리를 만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며칠간 아들을 미치게 만들었던 여자.

몸은 조금 괜찮아졌나요?”

일어나 있을 정도는 돼요.”

조금만 더 건강했으면 좋았을 텐데.”

옛날에 너무 무리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지만.”

긴 손가락이 여자의 뺨을 쓸었다. 전해지는 체온은 차가웠지만 손길은 조심스럽다. 시어머니는 남편과는 다른 식으로 그녀를 아낀다. 그 전까지 완벽하게 떨어졌던 삶에 갑자기 끼어든, 황폐한 인간을.

시어머니가 저에게 향하는 감정은 연민과 닮았다고 여자는 생각한다. 그녀에게 남편도 모를 호의를 베푸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살면서 그녀를 제멋대로 연민의 대상으로 삼는 자는 많았고 몇몇은 구원할 수 없는 황폐함에 지레 질려 떠났지만 시어머니의 감정은 그런 것이 아니다. 신중하게 다듬은 감정은 그녀를 상처 입히지 않고 감쌀 수 있었다.

이전부터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루리.”

물빛 눈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아무래도 조금 무거운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저 애는 당신이 자기 곁에서 잘 살길 바라겠지만, 당신에게 제일 중요한 건 당신의 삶이에요. 그러니 견디기 힘들면 언제라도 떠나요.”

도망쳐도 된다는 뜻이군요.”

……타인의 소망으로 산다는 건 너무 힘들 테니까요.”

확실히, 그 사람이 매달리지 않았다면 제가 이곳에 있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시어머니는 여자에게 돌파구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삶이 벅찬 그녀가 안쓰러워서. 그녀가 이 완벽한 집안에서 질식할 것을 걱정해서. 그녀라고 이 삶을 택하면서 한 가닥 흔들림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결혼을 결심한 때부터 삶이 무거워질 때마다, 비극의 후유증을 느낄 때마다 남편에 죄책감을 쌓으며 한편으론 자신의 선택을 의심했다. 아직도 단단해지지 못한 자신에게 어디로든 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것에는 감사했지만, 여자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지만 끈질긴 호소에 마음이 약해져서 원하지도 않는 삶을 이어가는 건 아니에요. 그 사람이 저를 선택한 것처럼, 저도 그 사람을, 그 사람과 사는 길을 선택한 거죠.”

이 삶은 잘못되지 않았다. 조잡한 비극처럼 너절한 실패만 반복되었다 해도, 사랑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해도 여자는 삶을 이어갈 의지가 있었다. 전쟁을 거치며 삶의 의미도 의욕도 잃었던 그녀에게 그러한 의지를 만들어준 사람이 남편. 그의 곁에 있는 것으로 여자는 앞으로의 고통을 삼킬 수 있다.

당신의 소망은 이루어졌어. 내가 당신에게 정착하게 된 거야. 여자는 남편을 한 번 바라보고서, 힘을 담아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저는 버티는 것만은 잘하니까요.”

'0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장슌ts] 검은 요람  (0) 2019.10.28
[사장슌ts] 물거품  (0) 2019.07.31
[사장슌ts] not going anywhere <Side R>  (0) 2019.01.31
[슌] 미래의 끈  (0) 2017.01.31
[사장슌] 닳아가는 자  (0) 2016.07.22
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