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바 형제] 가족의 탄생

2020. 2. 22. 21:05 from 01

 

어릴 적 찍은 가족사진은 왕가의 초상화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었다. 그만큼 화려하고 어디에도 흠이 없었으나, ‘만들어진듯한 어색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역사 속 왕가의 삶이 서민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파란만장했음을 알게 된 건 조금 나이가 들어서의 일이다. 사내는 자식을 패로 이용하고 서로를 증오하여 죽인 왕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묘한 안도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모두의 위에 군림하던 왕실조차 실은 얼마나 조잡하고 엉망진창이었는지. 욕망 가득한 보통의 인간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했는지 그 추한 내면을 생각하면 자신의 가정도 납득할 수 있었으므로.

완벽이란 허상임을, 완벽을 꾸며낸 사람들만이 안다. 사람들이 그려내는 완벽이란 정형화된 이미지일 뿐이므로 작정하고 덮어쓰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문제는 덮어쓴 이미지가 언제까지 유지되느냐는 것. 억지로 끼워 맞춘 블록은 시간이 지나면 하나둘 썩게 되어있다. 멀리선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맞춰낸 블록끼리는 조금씩 삐걱거릴 수밖에. 그 끝이 어떤 종말일지는 당사자조차도 알 수 없다. 사내의 가정은, 남보다도 못한 가족이 되는 결말을 맞았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세 사람으로 이뤄진 사내의 가정은 겉으로 어떤 문제도 없다. 아버지는 자연스레 잘려나갔고어머니는 여전히 세상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며, 외아들인 사내는 후계자로서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세계적인 대기업 경영진 일가이기에 모두들 그러한 변화를 세대교체로 생각했을 것이다. 아비가 어떻게 이탈했고 그 일로 가정이 어떻게 삐걱거렸으며, 남겨진 모자가 어떻게 회사를 지켜왔는지. 하나하나의 사정은 바깥에 비춰지지 않으니까.

기술자였던 아버지가 정체불명의 연구에 매달리다, 결국 회사를 버리고 사라졌을 때. 어머니는 드물게 분노했다. 창업주인 아버지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내고, 회사에서 남편을 잘라냈다. 회사를 키운 것은 아버지가 개발한 기술이었으나 그것을 꽃피워낸 양분은 어머니의 자본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처음 세상에 가져온 기술은 이미 유능한 연구원의 손에 놓였다. ‘시조가 사라진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사장은 아버지였지만 부모 중 경영자에 더 가까운 것은 어머니였다. 난 그 남자의 가능성을 샀을 뿐이에요. 아버지의 부재가 회사에 미칠 영향을 물었을 때 어머니가 돌려준 답이야말로, 아버지의 위치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었다. 아버지는 기술자로서 가치가 있었을 뿐, 회사를 성장시킬 수완은 없었다. 아버지가 내놓은 것을 가공하여 세상의 시선을 끄는 것도, 회사의 미래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것도 어머니에게나 가능한 일. 사내가 사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어머니는 남편의 부재를 누구도 모르게 메웠다.

아버지는 모자를 망가뜨리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빠져나가면서 가정은 전과 같을 수 없었다. 우선, 아버지가 말 그대로 가정에서 잘려나가는 광경은 어린 아들을 공포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아이에게 가족이란 가장 큰 세계여서, 부모의 낯선 모습이 그때는 삶의 큰 위기로 다가왔던 것이다. 아버지가 원망스럽기에 앞서 버려졌다는 슬픔이 그를 짓눌렀고, 어머니가 갑자기 아버지를 타인처럼 취급하는 것이 무서웠다. 가족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느껴온 행복이 무너지리라는 생각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어차피 세 사람의 행복이란 꾸며낸 것이었는데.

[슬퍼하세요, 어머니?]

그래서 확인하려 들었으리라. 자신만이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 것인지를. 앞뒤 없는 질문을 던졌을 때,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어떤 것이요? 아카바 레오의 이야기일까? 그 남자가 도망쳐버린 것?]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는 걸 보니 어머니는 속마음을 읽은 듯해,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글쎄요, 나는 멋대로 움직이는 건 필요 없는데.]

[찾지 않으실 건가요?]

[내가 그 남자의 꿈에 어울려준 건 말이에요, 내가 생각한 미래에 그 남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랍니다.]

그 남자는 뭔가 착각했던 것 같지만. 웃음기 띤 말은 서늘했다. 그러니 내 계획을 망쳐버린 것 아니겠어요? 그 날, 어머니의 답은 분노의 원인을 명백하게 알려주고 있었음을, 사내는 이제야 안다. 어머니는 별달리 배반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다만 괘씸했을 뿐이다. 자신이 선택한 패가 예측을 벗어났다는 것이. 그동안 공들여 연기하던 것마저 내던지고 이탈해버렸다는 사실이.

아버지의 부재로 바뀐 것이 하나 더 있다면, 어머니가 더는 행복한 가정을 꾸미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소년이었던 사내는 행복도 연기할 수 있는 것임을 몰랐다. 부모가 그동안 존재한 적 없는 행복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도, 모두에 아들인 자신도 포함되었다는 것도. 그 전까지 어머니는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훌륭하게 덮어쓰고 있었으나, 함께 연기하던 아버지가 이탈하자 노력할 필요가 없어졌다. 마치 운명적 파트너인 듯 소개하던 남편은 한순간에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룩으로 전락했다.

[레이지 씨. MCS에서 우승할 수 있죠?]

어머니가 아들에게 낯선 호칭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자식보다는 비즈니스 파트너를 대하는 듯한 태도는, 사내가 믿던 것이 허상이었음을 빠르게 일깨워주었다.

[레이지 씨. 이제 사장으로서 준비가 되었겠지요?]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기는 하나, 어머니의 말이 실은 모두 요구에 가까운 것임을 사내는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머니에게는 아들도 평범한 자식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떤 요구든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후계자. 어머니가 바라보는 아들이란 그런 것에 가까웠으리라.

그 엄격한 모습은 아버지로 인한 변화는 아니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는 자신의 사람에겐 언제나 완벽을 요구하곤 했다. 아들의 경우 가족이란 관계에 맞춰, 이전까지는 보다 세련된 형태로 요구했을 뿐이다. 잘했어요. 레이지는 이해력이 좋군요. 아이를 들뜨게 할 칭찬. 레이지라면 가능할 거라 믿었어요. 자연스레 스민 기대. 좋아. 이 부분은 완전히 익히고 넘어갈 수 있게 전문가를 붙여줄게요. 목표치를 달성시키기 위한, 든든한 지원. 그런 것은 사실, 가족에게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식에 대한 특별대우인 줄 알았으나 지극히 어머니 식의 정성이었을 뿐이다.

아버지에게 가족이란 얼마든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어머니에게는 어떤 것이었을까. 사내는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아이를 보면서 의미 없는 생각을 한다. 아직 얼굴도 눈에 익지 않은 아이는 앞으로 그의 삶에 뿌리내릴 것이다. 어머니가 목적을 품고 데려왔기 때문에. 정성들여 키워낸 아들처럼 어머니에게 가치를 보였기 때문에. 그렇다면 아이와 자신의 차이는 뭘까. 자신은 피가 섞인 자식이고 아이는 아니라는 것? 그게 아니면 자신은 오래도록 어머니를 지켜봐왔고 아이는 이제야 이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것?

기껏해야 초등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는 잔뜩 웅크려 있다. 모자를 쓰고도 후드를 뒤집어쓴 것은 최대한 저를 감싸기 위함이었을지. 커다란 눈은 정면을 비추지 못하고 바닥으로만 시선을 꽂으며, 유리벽 너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입술이 열리는 일 없다. 모든 것을 닫아건 아이였다. 이래서야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름은 레이라라고 하라더군요.”

수하의 말에 사내는 무심하게 답했다.

기억하긴 쉽겠어.”

사장님 쪽에서 따온 이름이라 하셨습니다.”

역시 그런가.”

처음부터 제 이름을 읊지 못했던 아이에게 대단한 이름을 붙여줄 필요는 없다. 어머니에게 선택받았다는 건 도구가 되리라는 뜻이므로. 도구의 이름은 그저 타자와 구분할 수 있는 것, 모두가 쉽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이면 충분하다. 아들의 이름에서 적당히 따와 짓는다 해도 놀랄 것 없다. 사내가 신경 쓰이는 부분은 다른 것이었다. 왜 모두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아이를 관람하고 있는지. 아이는 왜 여러 사람의 시선에서 해방될 수 없는지.

저 애, 어머니께서 사람을 붙여 교육시킨다 하셨던 것 같은데.”

아니었나? 살짝 떠보자 바로 곤란하다는 반응이 돌아온다.

그게, 생각대로 되질 않아서…….”

어떤 의미로?”

이사장님께선 처음에 카드의 힘으로 조종하는걸 시도하셨죠. 거기까진 거부반응 없이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일반적인 명령을 내리니 꼬이더군요.”

뭐가 문제였지?”

빈 껍질 같아요.”

무엇을 말해도, 무엇을 내밀어도 아이는 눈앞의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의 요구를 명령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것이 회사의 분석이었다. 기계를 생각해보세요. 입력된 명령은 확실하게 수행하죠. 인간보다 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입력되지 않은 명령에 대해선, 그 어떤 정밀한 기계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수하의 말을 들을수록 사내의 얼굴은 굳어진다. 이런 경우는 생각하지 못했다.

전장에서 데려온 아이라고 들었다. 죽음이 번지는 곳에서 살아남느라 특이한 능력이 발현되었다는 것이 어머니의 설명이었다. 타자가 되는 거랍니다. 주변의 무언가를 모방해, 어떻게든 위험에서 빠져나가죠. 간결한 말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사실, 아이의 능력이란 그렇게 드문 특징은 아니었다. 자연에서 비슷한 예를 찾자면 보호색을 띠는 생물쯤 되리라. 그러니 <모델>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아이를 간단히 움직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쩌면 모두 잘못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타자가 될 수 있다는 건, 어떤 존재를 완벽히 흉내 낼 수 있을 정도로 내면이 비었다는 것. 생존을 위해 비워내고, 또 비워내다 아이는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것마저 쏟아내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자아. 타자와 자신을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것. 인간을 인간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열쇠.

그것이 훼손되었다면, 아이는 평범한 명령에 제대로 기능하기 어렵다. ‘인간으로존재하지 않기에, 인간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방식을 모르는 모양이야.”

인형 같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습니다. 물론 카드로 조종하는 것이야 가능하겠지만 우리가 바란 건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저희도 마땅한 계획이 없어서…….”

저 애의 기억에다 <인간적인 것>을 적당히 채워 넣는 것은?”

관계나 집단 같은 것 말이야. 인간으로서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것. 그러면 저 애도 약간은 인간을 흉내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사내는 건조하게 말했다. 자신이 꺼낸 것이 옳은 방법인지, 희망이 있긴 한지 그도 몰랐다. 아이가 인간에 가까워지지 않는 한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리란 것만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 건 누구에게도 좋지 않다. 아이를 도구로 삼은 어머니는 물론, 기댈 사람 없는 곳에 홀로 떨어진 아이에게도.

“LDS에 기억 조작 기술이 있기야 하지만, 저 애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들 뭐가 나오겠어요?”

악몽? 심연? 수하의 말에는 껄끄러움과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인간으로서 느껴지지 않는 인간이라.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기 충분한 특성이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이는, 사내까지 포함하여 전부, 유리벽 너머로만 아이를 살피고 있다. 아이는 보호의 대상보다 관찰의 대상에 가깝다. 이해 가능한 신비가 아닌, 심연을 연상시키는 미지였다.

정 어렵다면 이사장님께 다시 알려서…….”

우선은 내게 맡겨.”

그러나 누구도 손을 대지 않는다면, 아이는 이곳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다. 가치가 사라진 도구를 어머니가 언제까지 봐줄지도 알 수 없다. 명확한 계획도 없으면서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가 틀어박힌 방으로 다가섰다. 기술 실연을 위해 설계된 방. 사방이 유리벽으로 되어, 모든 것이 전시되는 곳. 이곳에 있는 바람에, 아이는 너무 많은 이들의 시선에 노출되었다. 내면이 궁핍한 존재를 두고, 괜히 불안을 자극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 아이 앞에 선다. 구석에 틀어박힌 아이는 기척을 느끼고 움찔했으나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매우 소극적인 태도에도 사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나직하게 속삭인다.

나가자, 레이라.”

이번에도 아이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어쩌면 이름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내는 몸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라도 맞추려 애썼다. 레이라. 사내는 제 흔적이 밴 이름을 아이 앞에서 몇 번 반복했다. 아이의 머릿속에 그 이름을 각인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앞으로는 자주 듣게 될 거다. 네 이름이니까.”

아이는 사내의 손에 이끌려 나왔다. 다행히도 아이는 그것까지는 거부하지 않았다.

 

*

 

사내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달라붙는 시선을 느낀다. 끊어지는 일 없이 집요한 시선은, 오롯이 그에게 향해 있다. 사장직을 맡았을 때부터 보좌해온 비서도 그렇게 진득하게 그를 눈에 담을 때는 없다. 누구의 시선인지 뻔히 짐작하면서도 사내는 한가롭게 서류를 넘길 뿐이다.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따라붙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모방하려면 대상을 제대로 관찰해야 하니까. 회사에서 타자를 모방하는 습성을 가진 것은 하나. 이사장, 즉 사내의 어머니가 데려온 아이뿐이다.

아이를 데려온 후, 표면적으론 사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긴 대화를 시도한 것도 아니고, 아이에게 명령을 내렸던 것도 아니다. 그의 일상은 아이가 없었던 때와 똑같이 이어졌다. 단지 그의 삶에 아이를 끼워 넣었을 뿐. 아이는 그와 같이 식사했고, 기술 실연을 참관했고, 연구실을 살폈다. 사내는 자신의 일상을 누리며 아이에게도 삶의 한 편을 허락했다. 아니,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른다. 아이의 삶에 그가 한 편의 배경으로 들어갔을지도.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사내를 당연한 존재로 인식한 듯했다. 풍경처럼. 세상의 한 컷처럼. 처음에는 사내가 손을 잡고 데리고 다녀야만 했는데, 언젠가부터 아이가 그를 졸졸 따라오기 시작했다.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데도 존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웬만한 기척보다 선명한 시선이 사내에게 꽂혔으므로. 사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통수에 시선이 붙는다. 손을 움직일 때는 손에, 회사 일을 논의할 때는 입술에. 아이는 렌즈 같은 눈으로 온종일 사내만 담아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아이는 사내의 행동을 조금씩 흉내 내기 시작했다. 식사를 할 때 사내는 저와 똑같이 움직이는 아이를 느낄 수 있었다. 집는 음식이 똑같은 것은 물론,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가 사내의 것이었다. 모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내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습성도 아이는 하나하나 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사내의 모든 것이 아이에겐 모델이었고 삼켜야 할 양분인 듯했다.

그렇게 아이가 조금씩 인간을 담아내기 시작한다면, 어머니의 목표도 언젠가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회사에 온 것은 가벼운 이유에서는 아니다. 망가지고 짓눌려 자기주장도 할 수 없는 아이마저 이용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 어머니는 아들이 아이를 데려갔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딱 한 번, 사내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 애의 교육을 맡기로 했다면서요.]

[. 다들 길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아, 제가 맡았습니다.]

[어떤가요, 효과가 있나요?]

[조금은요.]

자세히 이야기했다간 어머니가 꼼꼼히 확인하려 들 것 같아, 사내는 간결하게 답했다. 들인 시간에 비하면 드러나는 효과가 없는 상황에 어머니가 그리 만족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야죠. 랜서즈 선발 계획이 구체화되기 전에 그 애를 준비시켜둬야 하니까.]

미진한 답에도 어머니는 별달리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묵직한 말로 아들에게 은근한 기대를 얹었을 뿐이다. 랜서즈. 어머니가 꺼낸 이름이 머릿속에서 쟁쟁 울렸다. 그것은 사내가 구상하고 어머니가 지원해 결성할 정예병의 이름이었다. 앞으로 수년 안에, 계획을 실행한다. 목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는 아이도 정예병의 일원이 될 것임은 명백하다.

어머니가 인형 같은 아이를 용납할 수 있는 건, 어떤 의미로는 인형의 모습을 바라기까지 하는 건 어머니가 아이에게 기대한 것이 병기였기 때문이다. 모자는 아비를 적대하기로 합의했다. 회사도 가족도 버린 아비를 겨우 찾아냈을 때, 사내가 마주한 것은 세상을 위협하는 악이었으므로. 전쟁을 벌여, 네 갈래로 나뉜 세상을 통합시킨다 아비의 끔찍한 계획은 가족에 대한 사내의 마지막 미련마저 날려버렸다.

그 남자를 처단해요. 돌아온 아들이 남편의 계획을 낱낱이 읊었을 때, 어머니가 꺼낸 첫 마디였다. 그 남자는 우리의가족이 아니에요. 그 남자를 쓰러트려요. 그의 계획을 저지하고 그를 무력화시키는 겁니다. 책을 읽어주듯 평온한 목소리로 어머니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렸던지.

[왜 그래야 하는지는 알고 있겠죠?]

어머니의 물음에 열세 살 소년이 돌려줄 답은 뻔했다.

[그게 정의니까요.]

침략자의 군대를 상대하려면, 당연히 전사가 필요하다. 평화로운 세계에선 드러나게 훈련시킬 수 없는 것. 어머니가 전장의 아이를 데려온 건 그 때문이었으리라고 사내는 생각한다. 상식이 무너지고 폭력이 일상인 그런 곳에선, 누구나 생존의 방식을 익힌다. 그것은 날것이나마 전사가 갖춰야 할 모습이기도 하다.

침략자 앞에 세우면, 아이는 분명히 살 길을 찾을 것이다. 자아를 비워내면서까지 움켜쥔 생존본능으로 마지막까지 버텨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면 과연 아이가 전사가 될 수 있을지. 직접적으로 조종하는 이 없이도 스스로 싸울 수 있을 것인지. 그 의문을 해결할 수 없다면, 사내는 아이를 전장에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어쨌든 그가 지휘해야 할 것은 전사지 전장의 유물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니, 인간을 학습하도록 해. 평범하게 생존하고, 위협에 적극적으로 맞설 수 있도록. 사내가 아이를 볼 때마다 소망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수하에게 제안한 대로 아이의 기억을 열람해 그 속에 평범한 소년의 모습을 채워 넣으려 시도한 적도 있으나 아이의 머리에 담긴 것이 너무도 빈곤하여 실패했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화면에 담기는 기억은 전쟁의 단편뿐. 그마저도 손상된 필름마냥 똑같은 장면이 끝없이 반복될 뿐이다.

「……그러므로 연결고리를 필요로 한다.

일상을 학습시킬 주변인과 인간성을 익히게 할 관계를 마련해야 서류 검토를 마친 사내가 여느 때처럼 아이에 대한 판단을 간결하게 기록할 때였다. 통신기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하니 연구원으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융합, 싱크로, 엑시즈 연구를 위해 고레벨 소환에너지의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강사들 이상의 것이 필요한가?]

[. 특히나 엑시즈는 데이터가 너무도 적기 때문에…….]

[알겠다. 바로 가도록 하지.]

이제, 회사에서 원하는 것은 모두 사내가 쥐고 있다. 모자는 계획적으로 창업주를 지워냈고 사내는 그 공백을 제 것으로 채워갔으므로. 기술 개발과 관련해 필요한 것이 있을 때면, 회사의 모두가 당연히 사장부터 찾았다. 젊은 사장은 연구자였고 기술자였고, 회사가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게임 업계의 프로이기도 했다. 창업주의 흔적이라곤 회사와 그 직속 학원의 이름에만 남았을 뿐이다.

이번에도 연구원은 데이터 수집을 명목으로 사장의 기술 실연을 요구했다. 회사의 중심으로 확실히 자리 잡은 것에 만족하며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사장실을 나서며 그는 일부러 문을 다 닫지 않았다.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으나 사내는 등에 붙는 시선을 느꼈다. 아이는 명령하지 않아도 그를 쫓는다.

사내가 기술 실연실로 들어설 때도 아이는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곳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 관찰의 대상과 관찰자가 뒤바뀐 때, 아이는 자신이 있었던 곳에서 무엇을 바라볼지. 사내는 짧은 감상을 흩어버리고, 장치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대전시의에너지를 수집해야 하므로, 배틀용 필드와 대전 상대를 설정해야 했다. 필드는 실제로는 가본 적 없는 먼 곳의 도시 풍경. 대전 상대는 편리하게 AI. 모든 것이 준비되자 사내는 실연용 디스크에 수많은 계산을 거쳐 짠 덱을 넣고, 왼팔에 장착한다.

회사에서 요구한 것은 세 가지 기술을 실연하는 것. 그동안 교류하지 못한 지역의 고유한 기술이라 회사 안팎으로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얼마 되지 않는 자료로 스스로 기술을 습득한 사장이, 이 도시에서 미지의 기술을 가장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이었다. 기술을 사용하기 위한 패를 쌓아, 첫 번째 기술. 융합 소환. 사내는 건조한 목소리로 이국의 기술을 실행한다. 그와 동시에 에너지 측정 시스템이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치솟는 눈금과 일렁이는 그래프가, 사내의 성공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첫 번째 기술로 모은 패를 이용하여, 두 번째. 싱크로로 가면 되겠지. 바깥의 연구원에게 순서를 알려주기는 하나 사내의 시선은 화면에 그려지는 자료, 대전시의 에너지에만 꽂혀있었다. 수년 전, 처음으로 기술을 실행했을 때보다 훨씬 높은 수치의 에너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능숙해졌다는 뜻이리라. 다음은, 엑시즈로. 우주를 불러내는 것 같은 특유의 이펙트가, 세 번째 기술까지 성공했음을 알렸다.

여기까지 왔다면, 결말은 정해져 있다. 사내의 덱과 전술로는 AI 정도는 간단히 꺾어버릴 수 있었다. 회사의 요구대로 세 기술을 확실하게 실연하기 위해 승부를 미룬 것뿐. 이국의 기술로 불러낸 몬스터는 AI의 필드를 빠르게 쓸어버린다. 목표를 전부 달성한 지 단 몇 분. 사내는 승리를 거두고, 실연실의 문을 열었다.

그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사내가 나오자마자, 아이가 방에 뛰어든 것이다. 모두가 놀란 때 아이는 회사의 기술이 그대로 담긴 장치로 향했다. 다음은 장치를 조작하는 것이었다. 필드를 설정하고, 대전 상대를 설정하는 단계까지 아이는 무난하게 다다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움직인다 하기엔 정확히 사내가 했던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거기서 사내는 아이의 뜻을 읽어냈다.

여기서, 자신도 보여주겠다는 것.

아무래도 아이는 이번에도 사장을 모방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AI를 대전 상대로 선택하고서 아이는 실연용 디스크를 찬다. 덱은 사내가 이전에 주었던 것. 한두 번 들여다보는 것 같긴 했지만 전술과 룰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아이의 난입에 놀란 연구원이 시스템을 중단하려는 듯했으나 사내는 조용히 막았다. 이 기회에 한 번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이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단순히 배틀의 흉내를 내는 것인지, 아니면 모델이 한 것을 재현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선보인 것이 제법 복잡한 기술의 연속이란 점에서 더욱 아이의 실력이 궁금해지는 사내였다.

융합에서 싱크로로, 거기서 엑시즈로. 아이는 완벽하게 사내의 루트를 흉내 내고 있었다.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 경탄이 담긴다. 최연소 프로 자격 취득자인 사장을 모방하기란 쉽지 않다. 거기에, 세 가지 기술 전부 이곳에서도 다 익힌 사람을 찾기 힘든 고난도의 기술이었다. 하나도 아닌 셋을 큰 고난 없이 능숙하게 해내는 모습에 모두 집중할 수밖에.

결말은 빠르게 났다. 아이는 사람들 앞에서의 첫 배틀을 승리로 끝냈다. 모두가 멍하니 바라볼 때, 유리벽 너머로 지켜보던 사장이 박수를 보냈다. 아이는 박수 소리가 다 걷히고서야 문을 열고 나왔다. 다음은 사내에게 몸을 붙이고 들릴락 말락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것이었다. 됐어? 아이가 타인에게 제대로 말을 건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잠깐 멈칫했더니, 그새 겁을 먹었는지 아이는 몸을 잔뜩 웅크린다.

……사장?”

확인을 구하려는 듯 덧붙인 호칭에 사내는 웃음을 걸칠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서 지내다 보니 그 이름이 익숙했을까. 그 짧은 시간에 주변 사람들이 사내를 부르는 호칭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려 애쓴 모양이었다.

아니. 그건 내 이름이 아냐. 직책이지.”

그래도 기억을 하고 있었구나. 사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떤 일을 맡은 사람에겐 그 일에 맞는 이름이 따로 붙는다. 그걸 직책이라고 해. 내 직책이 사장인 거고, 원래 이름은 레이지.”

거기서 떠오른 것이 있는지 아이는 제 이름을 되뇐다. 레이라. 레이라. 레이……레이지. 같은 부분. 아이의 말은 단편적인 단어의 모음이라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어색했다. 그 여백을 메워주는 것은 보호자의 몫이지 않던가. 사내는 미진한 부분을 적당히 해석해,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그래. 내 이름은 너와 같은 자()를 써. 우리는 비슷한 처지니까.”

다음에 나올 것은 사람들 앞에서 꺼낼 말이 아니었으므로, 사내는 아이의 손을 잡고 기술 실연실을 떠났다. 우리에게 이 이름을 물려준 남자는, 우리의 적이 될 자다. 복도를 걸으며 사내는 계속 이야기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레오(零王)였지. 아카바 레오. 오랜만에 담은 아비의 이름은 이국의 유적처럼 멀게 느껴졌다. 이제는 그 이름을 입에 올려도 어떤 감정도 피지 않는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적의 이름에 아이는 사내의 손을 꽉 움켜쥐었고.

아카바. 들었어. 여러 번.”

뜻밖에도 평범한 말을 돌려주었다.

그럴 거다. 여기 레오 코퍼레이션에서 지내면 들을 수밖에 없는 이름이니까.”

내게 붙은 것도 아카바, 너를 데려온 사람, 그러니까 내 어머니께 붙은 것도 아카바거든. 사내는 자신의 성씨에 따라붙던 시선을 떠올리며 웃었다. 사람들은 그 이름을 들을 때면 그것이 정복자의 휘장이라도 되는 듯 선망을 비추곤 했다. 세계적인 대기업을 키워온 경영진 일가. 완벽한 가정. 모든 것을 누려온 가문. 세상 사람들의 눈에 새겨진 그들 가족의 모습이란 분명 그러했을 테니까.

그러나 타자가 그려내는 상이란 얼마나 얄팍한가. 만들어낸 행복을 두르고 살다, 결국 보통의 가정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었는데. 세상에 희망을 선물했다는 창업주는 먼 곳에서 침략자가 되었고, 실질적 경영자였던 이사장은 아들을 가족보다는 필요한 패로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아들은 <천재 사장>의 이미지를 덮어쓴 채 모두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고 있다. 아카바가 틀어쥔 것은 많았을지 몰라도, 그 이름에 따르는 것들은 결코 완벽도 행복도 아니다.

아름다운 초상화를 남긴 왕가가, 실은 다툼과 욕망으로 서로를 해하곤 했듯이.

사내의 걸음은 어린 시절 자신이 썼던 방에서 멈췄다. ‘놀이용 방이라는 이름은, 지금 생각하니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만들어낸 행복을 전시했던 곳임을 생각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이름이다. 그 방을 떠날 때까지 한 사람에겐 너무 많은 장난감이 채워져 있었는데, 개중 애착을 품었던 것은 나이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깨끗하게 치워졌다. 여전히 선반마다 칸칸이 채워진 장난감은 행복한 아이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모든 장난감이 가지런히 정리된 것도 어른스러워 보이기 위해 아이의 마음을 눌러버려 제대로 가지고 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부 놀이용이었는데도.

아이의 시선이 여느 아이처럼 장난감에 머물기를 바란 사내였으나, 그와는 다른 이유로 평범함을 누리지 못한 아이는 시선을 바닥으로 꽂을 뿐이었다. 아이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손을 놓은 사내는, 벽에 걸린 사진을 가리켰다. , 레이라. 네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이것. 사내의 목소리에 아이는 겨우 고개를 들어, 그가 가리키는 것을 눈에 담았다.

이 남자가 아카바 레오다.”

사내의 손가락은 사진 속 남자를 짚었다. 예복을 입은 남자는 근엄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 옆에는 드레스를 입은 아내가, 두 사람 사이에는 잘 차려입은 소년이. 사내가 어릴 적 부모와 함께 찍어 벽에 걸어둔 사진은 그야말로 정석적인 가족사진이었다. 행복을 연기한 시간은 그리 짧지 않은데 희한하게도 가족사진은 이것 한 장뿐이다. 사람들 앞에 보일 <완벽한 컷>은 한 장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사진으로만 남은 아비를 바라보다 사내는 저도 모르게 냉소를 걸치고 만다.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보였을 때, 사내는 지금 제 곁에 있는 아이보다도 어렸다. 소년이었던 자신이 이만큼 자라는 사이 그 남자는 얼마나 나이 들었는지 알 수 없다. 그나마 최근, 한 번 마주친 적이 있긴 하나 얼굴은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감정 없는 목소리와 냉랭한 시선만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 아비는, 수년간 방치했던 자식을 철 지난 수집품처럼 취급했다. 이제 더는 의미가 없어, 대강 묻어두고서 돌아보지 않으려는 것.

아카바, 레오…….”

자세히 알 필요는 없어. 그냥, 어떤 인간인지만 눈에 익혀둬. 저 자를 제대로 아는 인간은 어차피 이 회사 내에도 아무도 없을 거다.”

저 옆의, 사람은.”

. 어머니야. 기억하지? 너를 처음 데려온 분. 성함은 아카바 히미카. 당분간 내가 너를 교육하기로 했지만, 네가 잘해주면 이 분이 너를 맡을 거야.”

아카바 레오는 우리의 적이 될 거라고 했지. 그건 우리가 그 남자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어서야. 너도 여기서 교육받은 후엔 나와 함께 움직이게 될 텐데. 사내의 설명은 소년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끊어졌다. 아이를 내려다보니, 다른 한 손으로 사진 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이 이야기한 것은 이쪽이었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아이가 가리킨 것은, 중앙의 소년. 이제는 순진하지도 어리지도 않은, 어머니를 닮아 치밀해진 사람. 아버지의 흔적을 지우고 그 모든 것을 차지한 자.

그건 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인데. 아카바 레이지.”

이 사람들, 가족?”

가족이었지.”

과거형인 것은 사진 속 가족이 완벽히 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이 모든 것이, 그들이 생각했던 모든 일이 환상이 되었다. 가족의 이미지도 꾸며낸 행복도, 대가 없이 서로를 위하는 마음도 없다. 사진 한 장에 압축된 이상적 가정의 단편은 유물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이는 그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물빛 눈 가득 과거의 가족을 담아내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한 사람 한 사람 쓸어보기까지 한다. 그 눈에 담긴 것은, 평소와는 다른 감정. 그동안 아이가 비춰내는 감정이란 불안과 두려움뿐이었는데, 지금 깃든 것은 동경을 닮아있었다.

그 사진 속에 저도 들어서고 싶은 것처럼.

좋아 보여?”

이제는 꾸미는 것조차 되지 않는 행복한 가족. 뒷말은 사내의 속에서 꺼졌다. 스스로도 우습게만 느껴지는 말에 굳이 단서를 덧댈 필요는 없다.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시선은 사진에 고정한 채.

정말로 좋은가족이었다면 아버지를 쓰러트리려 할 일도 없었겠지.”

어머니가 데려왔을 때, 텅 빈 눈으로 정면만 보던 아이가 떠올랐다.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비워내야 했던, 그래서 자신을 주장할 수 없게 된 아이. 아비의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면 아이 같은 피해자가 수없이 나올 것이다. 그나마 아이는 생존자였지만 전쟁이 일어나는 이상,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생겨난다. 저 남자, 아카바 레오는 사람들을 해치려고 해. 좋은 가족을 여럿 부숴버릴 거야. 이미 저 남자의 가족 둘은, 저 남자 때문에 괴로움을 겪었어. 때문에 사내는 느릿하게 이야기한다. 가족이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가족의 행복이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된 이상, 과거의 이상적인 모습에 미련을 품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내는 안다. 아비가 비틀리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으리라는 것을. 그 남자는 가족에게도 세상에도,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줄 수 있었다는 것을.

, 남자가, 없으면?”

이미 이곳 레오 코퍼레이션을 떠난 사람이지만, 그래. 아예 자취를 감춘다면 전부 행복해질지도.”

나도, 어머니도. 그리고 너도. 덧붙인 말은 건조했다. 사내는 아비를 무너뜨리는 장면을 수없이 상상했다. 어린 날엔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저에게 비는 것을 그려보았다. 사장으로 취임할 즈음에는 쓰러진 아비를 몇 발짝 밖에서 내려다보는 꿈을 꾸었다. 이제는 구체적인 장면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악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그 순간에야말로 사내는 해방될 것 같았다. 아비가 낳은 죄로부터, 아비 때문에 일찍이 깨달은 추악함으로부터. 그리고 갑자기 행복이 깨져 상처 입었던, 어린 날의 자신으로부터도.

사내의 계획이 성공하면, 어머니는 자신이 선택한 남자의 종말에 박수를 보낼 것이다. 기뻐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짜릿함은 느끼리라. 완벽한 계획에 한 방울 얼룩이 된 남자를 깨끗하게 지워낸 것에 대해. 마지막으로 아이는, 자유로워진다. 어머니가 필요에 의해 아이를 전장에서 구출했다면, 사내는 아이를 진정으로 구해내고 싶었다. 타자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가 아니라, 평범한 소년으로 살게 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기대하는 임무를 끝내기만 하면 된다.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관심이 걷히면, 그때는 정말로 아이답게 사내의 생각을 끊은 것은 짤막한 말이었다.

……할래.”

앞뒤 없이 흘러나온 말이었으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분명히 확인하고 싶어, 사내는 물었다.

무엇을?”

아까, 말한 것. 저 남자가, 없어지게.”

행복하게, . 아이는 처음으로 또렷하게 말했다. 그때 아이의 시선은 사진에, 정확히는 중앙의 소년에 꽂혀있었다. 어른이 아닌, 저와 같은 아이였기에 시선을 끌었는지. 어릴 적의 자신을 바라보면서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 같은 모습만 보이면, 성공할 수 있을 거다.”

그 말에는 너는 평범한 행복을 잡을 수 있을 거야라는 예언이, 혹은 사내의 소망이 담겨 있었다.

 

*

 

아이에게서 동의를 얻어낸 후 사내는 아이에게 임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지옥에 내몰리게 될지. 싸우게 되리라는 말에도 아이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사내의 옷자락을 꽉 쥔 채 고개를 끄덕였을 뿐. 전쟁의 생존자인 아이를 다시 전투 상황에 내모는 것은 마음이 무거웠으나, 아비의 전쟁을 막지 않으면 아이가 더한 나락에 빠지리란 걸 사내는 알았다. 어차피 아이가 이곳에서 무사히 지내기 위해서는 어머니 앞에서 무기로서가치를 입증해보여야 한다는 것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아이를 포함해 사내가 이끌게 될 정예병은 진짜 병기로 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비가 꾸미는 <전투>는 회사가 자랑하는 실체화 기술을 이용한 배틀. 그의 전사는 게임의 형태를 빌린 배틀로 적을 제압한다. 배틀 중에 실체화된 몬스터와 적의 전술을 끊는 함정이 그들의 무기가 될 것이다. 전쟁인 이상 서로를 해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모두가 휘말리는 진짜전쟁과, 한정된 공간에서 덱을 든 전사끼리 맞붙는 배틀은 무게가 다르다. 후자라면, 평화로운 세계에서 제한적으로 전사를 키워야 할 사내로서도 승산은 있다.

정예병 선발을 준비하며 사내는 우선 첫 전사가 되어줄 아이부터 훈련시켰다. 훈련이라고 해도 별다른 것은 없었다. 먼저 배틀로 시범을 보이고, 아이가 스스로 익히도록 유도하는 것뿐. 배틀로 정점에 오른 사내를 모델로 삼아서인지 아이는 완벽한 배틀을 보여주었다. 강사조차 전부 익히기 힘들어하던 이국의 기술을 마음껏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내는 아이에게 따로 시범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이를 실연실에 보내고 유리벽 너머로 지켜보면, 아이는 사내가 꺼낸 조건을 빠짐없이 수행하고서 승리까지 거두었다.

초기엔 AI를 아이의 대전 상대로 두었지만 점점 실력이 붙어, 사내는 회사 직속 학원의 간부들까지 동원해야 했다. 평소엔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아이는 덱만 쥐면 정복자가 되었다. 앳된 목소리는 상대의 목을 죌 패를 냉랭하게 읊었고, 커다란 눈은 상대의 전술을 낱낱이 파헤쳤다. 승리, 승리. 그리고 또 승리. 팔짱을 낀 채 지켜보던 사내에게 수하가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애, 듀얼에는 확실히 재능이 있군요. 사내는 그에 동조하는 대신 아이에게서 측정 시스템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의 실력은 뛰어났으나 딱 하나,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있었다.

소환 에너지가 내 수준으로 올라오질 않아.”

승부가 날 즈음에야 돌려준 답은 건조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사장님과는 급이 다르지 않습니까.”

가볍게 받아쳐도 사내는 가만히 고개를 내젓는다. 그의 보랏빛 눈에는 정체 모를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걱정 같기도 하고, 의문으로 보이기도 했다.

융합, 싱크로, 엑시즈. 모든 소환법을 문제없이 구사하는데 소환 에너지가 이 수준이란 건 말이 되지 않지. 시간이 지날수록 수치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매번 비슷비슷해.”

문제가 있다고 보십니까?”

문제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짚이는 것이 있었다. 아이의 특기이자 맹점. 승리를 거둔 아이는 여느 때처럼 문을 열고 나와 모델이자 스승에게로 달려왔고, 몇 발짝 밖에서 사내의 굳은 얼굴을 확인하자 얼어붙었다.

……실망?”

자신 없는 목소리가, 축 처진 어깨가 아이의 감정을 말해주었다. 최근 들어선 거의 볼 수 없었던 것. 두려움. 사내가 저를 맡은 후 아이는 줄곧 사내를 졸졸 따라다녔다. 처음엔 사내가 데리고 다닌 것이라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아이가 스스로 사내에게 붙은 것이다. 삶에서 당연해진 존재이자 저에게 오롯이 집중해주는 대상이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빠져있다 그 상황은 아이를 위축시키기 충분했으리라. 더 가까워지지 못하고 시선조차 피하는 모습이 꼭 버려진 짐승 같았다.

실망한 게 아냐, 레이라.”

거부당할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혹은 가치가 부정당한다고 생각했을까. 바닥에 꽂힌 시선이 처연해, 사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 레이라.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제야 아이가 반응했다. 눈치를 보면서도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자연스레 사내의 손을 쥔다. 다음은 함께 움직이는 것이었다. 사내의 발걸음은 이전, 아이에게 목표를 설명했던 곳으로 향했다. ‘놀이용. 행복한 아이를 전시하려 했으나 정작 아이다운행복은 즐기지 못했던, 모순적인 방.

사내는 이곳을 안전한 공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타자의 시선을 무서워하는 아이를 다수의 시선에 오래 노출시키는 건 좋지 않다. 지나치게 말끔한 사장실도 아이를 긴장시키는 것 같다. 아이는 제 나이의 욕망도 평범한 삶도 누리지 못했으나, 어른들의 말이 오가는 곳보다는 <아이 방>으로 맞춰진 이곳이 가장 편할 것이다. 사내는 아이의 긴장을 풀어줄 생각으로, 한 번도 안아본 적 없는 인형을 하나 꺼내주었다. 엉겁결에 받아든 것을 꼭 끌어안고서 아이는 다시 사내의 눈치를 살핀다.

소환법 습득이 빠르더구나, 레이라.”

칭찬으로 시작하자 아이의 눈이 커진다. 역시, 비난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내는 웃음을 걸치며 말을 잇는다.

내가 하는 것을 보기만 했는데도 다 익혔다니, 놀라워.”

따라 하는 건, 쉬워.”

비로소 아이가 입을 뗐다. 소리는 작았지만 조금 전처럼 자신 없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한쪽 손을 꼼지락거리다, 덱도 디스크도 없이 기술을 쓰는 시늉을 하고.

그래? 그럼 확인해야지. 엑시즈의 룰을 설명해볼까?”

동레벨의 몬스터가, 여러, .”

“2체 이상이면 돼.”

동레벨의 몬스터 2체 이상, 으로, 엑스트라 덱에서 엑시즈 몬스터를 소환, 하면……소재는, 효과를, 갖고.”

오버레이 유닛. 오버레이 유닛을 제거하는 것으로 발동할 수 있는 효과가 있어. 효과를 잘 활용하면 판을 뒤집을 수도 있겠지.”

.”

사내가 신경 쓰는 것이 무엇인지, 아이도 깨달은 것 같다. 아직, 완벽하게는. 따라 하기만, 해서. 띄엄띄엄 덧붙이는 말이 변명처럼 흘러나온 것에서 알 수 있다.

기술을 완벽하게 구사하면서 에너지 수치는 그에 비해 낮은 것. 그 이유는 아이가 사내를 흉내 내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숙련자의 시범을 보고 제 나름대로 방법을 해석해 재현한다면, 아이는 기술을 쓰는 사내자체를 모방한 것이다. 반복하면서 대강 이해하기야 했겠지만, 기술 하나하나를 체계적으로 익힌 것은 아니다. 그러니 겉으로는 사내와 비등해도 산출하는 에너지가 크게 차이 날 수밖에 없다.

융합도, 싱크로도 그랬을 거야, 맞지?”

……대충은, 알지만.”

융합, 싱크로, 엑시즈. 세 가지 소환법을 제대로 익히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 누구나 어려워한단 뜻이다. 쉬웠다면 LDS의 학생들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할 리가 없겠지.”

역시, 실망?”

아니, 레이라. 이건 네 잘못이 아냐.”

내 실수거든. 사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무언가를 가르칠 땐 시범만으로는 되지 않아. 네게 말로, 행동으로 천천히 가르쳤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아이가 모델을 통째로 모방한다는 건, 여전히 아이의 내면이 비어있다는 것. 자아가 제대로 없기에 타자를 완벽하게 담아낼 수 있다는 것. 그런 식으로는, 전사의 그림자는 될 수 있어도 전사는 될 수 없다. 목숨은 건질 수 있어도 제대로 생존할 수는 없다. 전투 중 모방의 대상이 사라진다면 아이는 바로 길을 잃을 것이며, 무사히 버텨내더라도 지금 같은 삶을 계속 이어가야 할 것이다.

타자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그저 재현하는 것. ‘의 삶을 살지 못하고 평생 누군가의 그림자로 카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다. 껍질뿐인 삶을 인간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사내는 그동안 아이를 관찰하며 남긴 기록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러므로 연결고리를 필요로 한다.

아이를 인간으로 만들려면 일상을 학습시킬 주변인과 인간성을 익히게 할 관계를 마련해야 했다. ‘주변인이야 사내가 채워준다고 해도, 아이가 확실하게 뿌리내릴 관계는 아직까지 없다. 사내는 아이에게 모델이 되고 한편으론 스승 흉내를 내었지만 아이는 여전히 그에게 용인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사내의 삶에서 자신이 끼어들 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주어야 할 기회는.

그래서 말인데, 레이라.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커다란 눈이 늪 같다고, 사내는 생각한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만을 담아내는. 무섭도록 깊은 눈동자. 아이를 짊어진다는 것은 저 시선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훑어내는 것만 같은 진득함도, 빈곤한 자아만큼이나 무거운 의존도. 전부.

나를, 믿어주는 거다.”

믿는다. 는 건.”

나를 제대로 바라보고, 내 말을 듣고, 따라주는 거지.”

쉬운 일은 아니야, 그렇지? 사내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였다.

나는 내게 듀얼을 가르쳐줄 거야. 듀얼을 완벽히 하게 되면, 다른 것도 가르칠 수 있고. 배우다 보면 이게 맞을까? 싶을 때가 있을 거야. 내 말을 듣고 싶지 않을 때도 있어. 그런데도 나를 믿어달라고하려면, 그럴 이유가 필요하겠지.”

어떤?”

네가 바라는 것이 되어주는 거다. 너와 관계를 만들 생각이거든.”

나는 어머니와는 가족으로 연결되어 있어. 나카지마와는 사장과 비서라는 업무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지. 융합 코스의 강사 마르코는 엑시즈 강사와 친구. 이해하겠어, 레이라? 사람과 사람은 수없이 많은 실로 연결된 거다. 그걸 <관계>라고 하지. 길게 늘어놓으면서도 사내는 아이가 이해하리라는 자신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주길 바랄 뿐이었다. 관계가 있으면, 레이라. 너와 관계로 얽힌 사람이 너를 끝까지 잡아주게 될 거야. 내가 어쩌다 어머니와의 연락이 끊어지더라도 어머니는 아들인 나를 찾아내겠지. 가족이라는 관계니까.

나는 너와 확실히 연결되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연결…….”

그러니 묻지. 레이라.”

너는 나와 무엇이 되고 싶지?

아이의 시선이 벽에 걸린 가족사진에 향하는 것을 사내는 느낀다. 관계의 여러 예시를 읊었음에도 아이는 가족을 탐내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들 가족이 꾸며낸 끈끈함을 욕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들어낸 것이나마 쟁그랍게 얽힌. 사랑이 흐르지 않더라도 서로를 필요로 해 꼭 쥐고 있는.

그러나 아이를 이런 관계에 끼워 넣어야 할까?

사내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을, 어느 남녀의 만남을 생각한다. 지지자도 자본도 없이 기술만 품고서 무턱대고 <미래>를 이야기하던 남자와, 모든 것을 쥐고서 가능성을 수집하려 들었던 여자. 미래를 만들자는 공동의 목적으로 합의한 결합. 때문에 모든 순간이 성공의 증명이어야 했던 부부의 시간.

여자는 가능성에 투자하고, 남자는 그 지원으로 미래를 열어간다. 가족이란 관계는 성과를 나누기에 완벽한 이름이었다. 어쩌면 그 사이에서 난 아이마저도 관계를 돈독히 하는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음 세대를 상징하는 존재. 지금껏 쌓아온 것을 더욱 키워낼, 최고의 투자품. 부부의 아들은, 이제 천재 사장의 이름을 얻은 사내는 평범한 가족을 학습하지 못했다. 모두가 바라던 이상적인 모습을 덮어썼으나 실은 이상의 단편조차 모른다.

그런데도 텅 비어버린 아이 앞에서 가족의 정을 이야기해야 할까? 자라면서 한 번도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것을? 아이에게 허상을 가르쳐도 되는 걸까?

이 셋의 어디가 마음에 들어?”

알 길이 없어, 사내는 아이의 손가락을 잡고 행복한 가족의 실루엣을 함께 덧그린다. 너는 이 가족의 끝을 알잖아. 그런데도 이런 걸 바란다면, 무슨 이유에서지? 은근한 질문에도 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내가 손을 놓아주고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아이는 비밀을 꺼내는 양 작게 속삭였다.

똑같은, 이름.”

아카바?”

같이, 묶여 있어. 세 명이, 전부.”

우리의, . 아직, ‘아카바레오지? 그렇게 묻는 아이에게서 사내는 저도 모르던 가족의 본질을 깨닫는다. 선택했건 선택하지 않았건 가장 깊게 얽힐 수밖에 없는 관계. 끊어내려면 보통의 관계보다 훨씬 큰 노력이 필요한 족쇄. 구성원 하나하나의 삶이 저에게까지 따라붙는, 그림자. 아이는 그런 것을 욕망하고 있었다. 어떤 곳에 내던져져도 지워지지 않을, 영혼에 새겨질 이름을.

그 지독한 속박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이해했어. 레이라. 네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소리 없이 중얼거린 사내는 가족사진을 떼어냈다. 너도 나와 생각이 같았던 거야. 확실한 연결고리를 바라고 있었어. 십여 년간 의미 없이 벽을 장식해온 이상적인 가족의 환상은 이제 사라질 때가 되었다. 이미 이질적인 것이 사내의 삶을 채우고 있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이자, 어쩌면 평생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를 아이. 그럼에도 가족이란 족쇄를 기꺼이 차려고 드는 소년.

바라는 것이 되어주기로 했지. 네 소망, 확실히 들었어.”

……?”

아카바란 건 그렇게 영광스러운 이름은 아니지만, 너를 이 세상에 묶어둘 벽은 될 수 있겠지.”

사내는 아이의 소망을 이루어줄 생각이었다. 바라는 대로 가족의 이름을 주고, 아이를 공식적으로 제 삶의 일부로 흡수시키는 것이다. ‘제대로 된가족을 학습해본 적 없는 사내이지만 그는 가족이란 허상을 그려볼 것이다. 어색하게나마 가족을 흉내 내되, 아이의 가장 큰 욕망을 결코 짓밟지 않으리라. 아버지처럼 가족은 타인일 뿐이라며 아이를 버리는 일은 없다. 어머니처럼 가족에게서 필요를 찾지도 않는다. 대신 사내는 끊이지 않는 관심과 일관적인 애착을 다짐한다.

아이는 사내를 통해 처음으로 관계를 학습하게 될 것이다. 그 속에서 인간의 방식을 이해하고, 조금씩 인간을 모방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바깥에는 너를 아카바 레이라로 소개하자. 여기에 언젠가 네 사진도 걸어주고. 동화를 읽듯이 느릿한 목소리로, 사내는 가족의 탄생을 고한다.

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겠어?”

그 물음은 마지막 점검에 가까웠다. 아이의 욕망을 재확인하고, 가족이라는 속박을 허락받기 위한. 아이는 흥분된 듯 크게 심호흡하더니, 천천히, 준비된 답을 읊었다.

……형님.”

사내는 처음으로 아이의 웃음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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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