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슌ts] 물거품

2019. 7. 31. 23:31 from 01

 

화병에 꽂힌 꽃은 마냥 붉었다. 탐스러운 꽃송이며 선명한 색이, 절정을 맞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아마 며칠간은 이 방에서 존재를 과시할 것이다. 이끌리듯 화병 쪽에 다가선 사내는 고개를 숙여 향을 깊게 맡았다. 달콤한 향에 머리를 간질이는 것이 있었다. 꽃을 다듬던 흰 손. 가시에 찔려 맺힌 핏방울. 저에게 다친 손을 내보이며 웃어버리는 여자. 부주의하긴. 피를 닦아주면서 괜한 잔소리를 하던 제 모습. 기억 속에서 여자의 웃음소리와 꽃향기가 뒤섞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여자는 단편적인 장면으로 떠오른다. 현실의 사람이 아니라 영화 속 인물처럼.

때문에 일상의 파편에서 여자는 자주 되살아난다. 사내는 정교한 공예품에서 그녀가 조종하던 기계 새를 떠올린다. 녹색의 천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본다. 주변인의 큼직한 호박 반지에서 그녀의 금빛 눈을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녀는 그의 삶 어디에나 뿌리내리고 있다.

넋을 잃을 정도인가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어느새 어깨에 손이 올라와 있었다. 방의 주인이 돌아온 것이다.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으면서, 문이 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몇 년 전에는 기척을 느끼지 않으려 해도 인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많이 느슨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꽃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더니.”

한창 예쁘게 피어서요.”

내가 온 걸 바로 알아채지 못한 것에 대한 핑계는 아니고요?”

책망하는 기색은 없지만 사내는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럴 만도 하죠. 그 애를 만났을 테니.”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가리키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바로 맞혔으므로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를 비롯해, 그와 자주 부딪히는 몇몇은 젊은 사장이 만나고 다니는 사람을 대강 짐작하고 있다. 당사자인 사내가 따로 입 밖에 낸 적이 없기에 함부로 말하지 않을 뿐이다.

전날 사내가 머물렀던 집의 주인은, 그가 만나는 여자는 수년 전 협력자의 이름으로 회사에 들어온 사람. 말이야 협력이었지만 계약에 가까운 건조한 관계는 목적을 완수한 때 종료되었어야 할 터였다. 목적이 미완으로 굳어졌기에 그녀는 사내를 떠날 시점을 놓쳤다. 혹은 사내가 그녀를 놓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었건 뜻하지 않게 이어진 관계는 긴 시간을 거쳐 이제는 제법 은밀한 것으로 발전했다.

어떻게 아셨죠?”

사내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 애가 뿌리는 향수는 특이하니까요.”

어머니는 엷은 웃음과 함께 사내가 벗어둔 재킷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전날, 그녀의 향을 묻혀온 모양이었다. 사내는 그녀와 여느 연인이 할 법한 모든 것을 했다. 시선이 닿는 곳에서까지 노골적으로 맞물리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만 있을 때는 망설임도 껄끄러움도 없었다. 많은 연인이 그러하듯 만남이 뜸해질 때도 있었고 사이가 소원해질 때도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 둘은 다시 촘촘하게 얽혀 있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정말로 연인으로 발전했냐면, 둘 모두 한 번도 확실하게 긍정한 적이 없다. 사내는 그녀에게서 부정의 답이 돌아올 것을 두려워했고 여자는 아예 제대로 된 답을 회피했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바라냐는 사내의 질문에도 그녀는 뜻 모를 말을 돌려주었을 뿐이다. 잘 배운 도련님을 휘두르는 거지.

휘두른다는 말은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먼 타지에서 와 사내에게 의지하고 있는 여자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서 판을 쥔 자는 명백히 그녀였다. 무어라 정의하기 힘든 이 관계를 시작하게 된 것도 사내가 그녀에게 이끌려서였고,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는 것도 그녀의 의지였다. 여자는 제멋대로 덤벼들고, 그를 흐트러트리면서도 그에게 애정의 확신을 주지는 않는다. 가볍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 또한 가볍다. 즐기기 위한 관계로 선을 긋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만나고 오면 왠지 생각에 빠져있기도 하고. 딱 지금처럼 멍해진단 말이에요.”

앞으로는 더 자주 만나게 될 텐데요.”

무슨 일이라도?”

전쟁의 기록을 만들 생각이어서요. 쿠로사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핑계네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칼날이 있었다. 생각이 해부당한 기분에 사내가 움찔했다.

그 애를 붙잡아두기에 딱 좋은 핑계예요.”

여자와의 관계에 불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사내는 특별히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의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벅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사내의 성씨를 혐오했다. 그에게 그 이름을 물려준 사람이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간 탓이다. 사내의 아비는 군대를 앞세워 죄 없는 나라를 폐허로 만들었다. 고향에 침략군이 밀려들지 않았다면, 삶이 너덜너덜해지지 않았다면 여자는 그를 찾아 이곳에까지 오지 않았다. 아비를 적대하기로 한 그와 협력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살아갈 이유도 없었다. 전쟁은 끝났으나 그녀의 삶은 아직껏 폐허였다. 잃은 것은 돌아오지 못하고 그 처참한 불행을 책임질 자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끊어지지 않은 비극을 감내하며 사는 것만으로도 기적일지도 모른다.

너무 큰 불행을 겪어서인지 전장에서 모든 힘을 소모한 것인지, 여자는 무기력해졌다. 프로 듀얼리스트로 활동할 때는 제법 열심이었지만 쫓기듯이 은퇴하면서 완벽히 의욕을 잃은 것 같다. 선수 시절의 기록을 지우기까지 한 여자는 이제 언제든 모든 것을 포기할 사람처럼 군다. 나른한 태도와 장난스러운 말로 사내의 마음을 어지럽히거나, 저를 향한 타인의 관심에 냉소할 때가 대부분이다.

쿠로사키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아요. 오래 머물게 하려면 적당한 이유가 필요하겠죠.”

그래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나요? 그 애, 처음엔 버려진 짐승처럼 굴었잖아요. 얼마나 경계가 심했는지, 언제든 손을 물어뜯을 것 같은 눈이었는데.”

지금은 무엇이 달라졌죠?”

사내의 말에는 체념이 묻어있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음에 언제나 씁쓸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어머니는 명확한 답을 주는 대신, 벽을 장식하던 꽃다발을 가리켰다. 여러 종류의 꽃을 조화롭게 엮은 것이, 만드는 데 제법 공을 들인 것 같다. 바싹 말라 본래의 색을 잃고도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에 사내의 시선이 얼마간 머물렀다.

그 애가 만든 거예요. 이런 건 서투른지 애를 먹긴 했지만.”

여기에도 꽃을 가져왔습니까?”

전에 한 아름 안고 왔었어요. 다듬어서 가져가나 했더니 나중에 말없이 두고 가더라고요.”

그걸 말려서까지 보관하셨군요.”

전에 없던 일이었으니까요.”

이런 것은 변화로 치지 않을 건가요. 웃음기가 밴 목소리였다. 여자가 막 회사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녀를 봐온 어머니는 여자에게 은근히 정을 주고 있다. 아들과 비슷한 나이에 극도로 지쳐버린 그녀가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요즘 꽃을 자주 가져오는 것 같은데.”

저에게 안겨줄 때도 있습니다. 떠넘기는 것처럼 굴긴 하지만.”

취미를 붙였을까요?”

최근 들어 여자는 꽃을 자주 샀다. 주변에서 이유를 물으면 기분이 좋아서라느니, 오늘따라 꽃이 예뻤다느니, 한가한 말을 늘어놓으며. 이름도 모른다는 꽃을 몇 번씩이나 잔뜩 안고 돌아오기에 처음에는 집을 꾸미나 싶었지만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녀가 꽃을 가져오면 며칠 안에 그녀와 약간의 친분이 있는 이들의 영역에서 형형색색의 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그녀에게서 받았다는 것이었다.

선물하는 것에요?”

그게 목적일 것 같긴 한데, 신기하네요. 어쩌다 그런 마음을 먹게 되었을까.”

그것도 곧 질리겠지요.”

목적이 따로 있으니. 소리가 되어 나올 뻔한 말을 삼키며 사내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에게는 짐작 가는 것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냉담하네요. 그 애라면 뭐든 쉽게 포기할 것만 같나요?”

글쎄요. 어디에든 오래 관심을 못 두긴 하지만.”

핑계를 대면서까지 그 애를 붙잡아두려 하는 것도 그래서고?”

쿠로사키 슌은 제가 책임져야 할 사람입니다.”

그것뿐?”

무슨 답변을 원하시는지…….”

솔직한 답이요. 그 애를 묶어둬야 하는 진짜 이유.”

사내의 입술이 닫혔다. 그는 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여자를 향한 그의 감정은 너무 복잡했고 그 모든 것을 제대로 마주할 자신도 없었다.

그럼 내 생각을 이야기할까요? 두려워해서죠.”

무엇을, 말입니까.”

그 애가 삶을 버리는 일.”

물빛 눈에 드리워진 감정은 연민에 가까웠다. 아들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껏 비극을 떨치지 못한 여자에게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려워하는 것도 놀랍진 않아요. 그 애의 삶에는 동기가 없으니까. 사랑을 잃은 인어공주나 다름없죠. 언젠가 물거품이 되지 않게 하려면 애원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 애에겐 삶을 지속할 다른 이유가 없고.”

차라리 물거품이 되는 걸 바라고 있을지도 몰라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종착지를 생각하고서. 사내는 덧붙였다. 여자에게 삶의 이유가 되었던 이들은 전쟁의 끝에 흩어졌다. 누구도 종말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그들이 돌아올 수 없음은 모두가 알았다. 나는, 잘못 살아버린 것일지도 몰라. 모든 싸움을 마치고 부상을 살피던 때 여자가 지나가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되었어야 했지. 견딜 수 없어 받아친 사내를, 여자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여자에게 새로이 삶의 이유가 되어줄 수 있었다면 좋았으리라. 친구로서든 지지자로서든 연인으로서든. 그러나 여자는 사내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 사내의 품에서조차 그가 모를 곳을 바라보며, 언제든 떠날 것처럼 부유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못한다. 그녀의 눈은 죽은 것을 비추고 그녀의 시간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 세상을 완전히 떠나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물거품이 되면 되돌릴 수 없잖습니까. 최대한 붙잡아두지 않으면…….”

사내가 힘주어 말할 때 어머니는 화병 속 꽃을 휘어 꺾었다. 허망하게 떨어진 꽃은 어머니의 손에서 쉽게 바스러졌다. 조각난 꽃잎은 여린 입김에 사방으로 흩어진다.

지금처럼 핑계를 대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거예요. 욕망이라는 확실한 동기가 없으니.”

흩날리는 꽃잎에서 사내는 여자를 연상한다. 세상에 뿌리내리지 않고 드러나지 않게 표류하는 사람을. 사내가 답지 않게 애정을 들먹일 때도 깔깔거릴 뿐 돌아봐주지 않는 그녀를. 사랑이라는 핑계로라도 묶어두고 싶었지만 내면이 황폐해진 그녀는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가벼운 열기 정도로 취급할 뿐이다. 만일 사내가 진지하게 관계의 방향을 논의하려 들더라도 여자는 답을 회피하거나 족쇄가 생긴관계를 끊어버리고 그를 떠날 수도 있다.

책임지지 않아도 될 관계이기에 여자는 사내를 받아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 나른함과 무력함을 드러나게 뜯어고치려는 사람이 아니어서. 얼마든 멀어졌다 내킬 때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어서. 사내는 그녀가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함과 동시에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도 겁내고 있었다. 여자에게 휘둘리는 한편 애매한 관계에서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타인의 욕망으로 남아달라고 하는 건, 욕심이겠죠.”

그렇긴 하지만, 글쎄요. 그 애에겐 어쩌면 통할 수도 있어요.”

뜻밖에도 희망적인 답변에 사내의 눈이 둥그레졌다.

선택은 해야겠지만.”

선택이라면.”

쿠로사키 슌을 묶어두고 싶다는 개인적인 소망과, 그 애의 삶에 부담을 지우지 않는다는 일반적인배려 중에서요. 어느 쪽이 더 나을지는 알 수 없어요. 보통이라면 후자가 맞겠지만, 그 애는 얼마든 삶을 포기할 수 있으니까.”

어느 것도 포기하지 못해 현 상황에 머물고 있으나 그 끝에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그동안은 답을 찾지 못해 방황해왔지만 사내는 이제 어느 쪽이건 선택해야 할 시점이 왔음을 실감했다. 다만 그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었다.

전자를 택한다 해도, 쿠로사키를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물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애, 타인의 진심엔 약해서.”

단정한 얼굴에서는 감정이 비치지 않아, 어머니의 속을 알기란 어렵다. 사내는 불안과 기대를 누르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죠?”

그 애는 이전부터 삶의 목표가 자신이 아니었죠.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헌신하는 것으로 살아온 거예요. 일종의 의존성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건. 때문에 전쟁으로 헌신의 대상이 사라지면서 문제가 생겼을 거고요.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지 않겠어요?”

헌신의 대상을 만들어주는 것이요?”

아카바 레이지가 사는 데는 쿠로사키 슌이 필요하다고 인식시켜요. 사랑에 미쳐버린 것처럼 애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 애에게 죄책감을 안기며 의존성을 자극해요. 얕은 수지만 그나마 확실한 방법일걸요.”

빠르게 쏟아진 말이 마디마디 어지러웠다. 입을 떼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사내에게 어머니는 웃으며 덧붙였다.

역시 못 하겠죠?”

 

*

 

여자의 집에서는 향냄새가 났다. 냄새의 근원을 여자에게 물은 적이 없으니 그저 비슷한 냄새였을지도 모른다. 근원이 무엇이었건, 뿌옇고 먹먹한 향내 속에서 여자와 얽힐 때면 사내는 여자의 삶에 녹아드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죽은 사람과 음울한 감정으로 채워진,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삶. 쿠로사키, 나를 봐. 사내는 여자가 언젠가 그 향내의 일부가 될 것 같아 자꾸 그녀를 부르곤 했다. 지금 네 앞에 있는 건 나잖아.

여자의 과거를 대표하는 사람이 돌아올 수 없게 된 이들이라면, 현재를 대표하는 사람은 사내일 것이다. 그녀의 삶에 남은 사람은 이제 몇 되지 않는다. 통 찾지 않는 고향의 친구, 이전 사내의 지휘대로 싸울 때 함께했던 동료’, 그게 아니면 사내의 최측근. 사내를 제외하고 생각해도 대부분이 그와 연결된 사람들이다. 그녀가 눈앞의 세상을, 살아가는 시간을 제대로 바라보기만 했어도 사내는 여자에게 불안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의식적으로 그녀에게 제 존재를 알리지도 않았으리라. 아무리 노력해도 사내는 여자를 떠난 이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의 말은 짓궂다. 애원해도 들어줄 리가 없는데. 애초에 저에게 그만큼 관심을 줄 리도 없는데. 처음부터 진심이 아니라 떠보기 위한 것이었음이 틀림없다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나고서야 사내는 생각한다.

[역시 못 하겠죠?]

어머니의 말에는 끝내 답하지 못했다. 다행히 어머니 역시 그를 더 찔러대지는 않았다. 대단찮은 각오와 나약한 모습을 꾸짖지 않고, 돌아서는 아들의 등에 한마디 꽂았을 뿐이었다. 아직 그렇게 간절하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사내는 걸핏하면 여자를 곁에 둘 핑계를 만들었다. 그녀에게 사랑 고백에 준하는 말을 수없이 꺼냈다. 때로는 그녀에게, 어머니의 말처럼 얕은 수로 매달리는 것을 상상하기도 했다. 간절하지 않았던 적은 없지만, 그녀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는 거부감이 있었다. 그녀의 불행을 끊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기도 했고, 아직까지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녀가 스스로 길을 찾고 삶을 붙잡을 수 있을, 미래에의 희망을. 그러나 만일 사내의 희망대로 풀리기 전에 그녀가 삶에 질식하고 만다면?

그것은 아마 사내의 삶에서 가장 쓰린 실패가 될 것이다.

음울한 생각을 떨치려 노력하던 때, 사내의 통신기가 진동했다. 화면에 뜨는 이름은 그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상대는 과거 전쟁에서 함께 싸웠던 자로 전쟁이 끝난 지금에는 제법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청년. 사내가 여자에게 언제나 무거운 감정을 품는 것이 최종적으로 그녀를 구하지 못해서였다면, 청년과 가까워진 이유는 그 반대였다. 그가 상처를 입고서라도 살아남아 평화에 순조롭게 적응했기 때문에.

사내는 청년의 고통을 끊는 데 기여했다. 그 과정엔 분명 씁쓸한 실패도 있었으나 청년은 그 후 스스로 일어서는 것에 성공했다. 어려서부터의 꿈이었던 프로 듀얼리스트가 되는 것까지 이뤄낸 청년에게서는 이제 불행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다. 덕분에 사내는 죄책감도 마음의 빚도 없이 그와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과거의 연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오지도 못했겠지만, 청년과의 관계는 과거에 묶인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계이고 앞으로도 나아갈 관계라고 사내는 생각한다. 그것이 사내를 안도하게 했다.

[쿠로사키랑 연락 돼?]

그러나 오늘의 청년은 사내를 한 번 흔들었다. 연락을 받자마자 흘러나온 이름에 사내는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으로 얽힌 것은 청년과 여자도 마찬가지였으나 두 사람은 사내와의 관계만큼 가깝지는 못했다. 전쟁이 끝나자 동료로서싸운 것도 의미가 사라졌는지 따로 만나는 일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관계에서, 청년이 타인을 통해서까지 여자를 찾을 일이 있을까. 약간 의문스럽긴 했지만 사내는 적당히 답했다.

[오늘은 따로 연락하지 않았지만 어제까지 만났다.]

[그럼, 미안하지만 연락이 되는지 확인 좀 해줄래? 내가 거는 건 받질 않길래.]

[특별한 일은 없을 거야. 쿠로사키는 원래 눈에 익은 연락처가 아니면 받지 않아서.]

낯선 도시에서 지내며 인간관계를 별로 넓히지 않은 여자였다. 연락처라고 해도 사내의 것 정도나 외우고 있고, 그 외에는 일상에서 자주 부딪히는 사람의 연락처 몇 개를 눈으로 익혀두었을 뿐이다. 여자의 패턴을 알기에 사내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으나 상대는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지 얼마간 침묵했다.

[어제 만났을 때는 괜찮았어?]

결국 청년이 침묵을 끊고 던진 물음조차 본래의 화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끈덕지게 물어야 할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와 같았지.]

[그래, 그럼 역시…….]

[역시?]

그제야 사내는 무언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와 가까이 지내긴 하지만 그라고 그녀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그녀는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저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의미심장한 말로 단서를 흘리면서도 결정적인 것은 숨기는 것이 그녀였다. 그러니, 어쩌면 사내가 모를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자와 별달리 접촉하지 않는 청년이 사내를 거쳐서라도 여자를 찾으려 들 이유가.

[사실은 유즈가 걱정해서 연락한 거야. 쿠로사키를 만났는데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였대.]

[그게 언제였는데.]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고?]

[유즈도 마음이 무거운 것 같아서 자세히는 못 물어봤지만,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는 말은 기억해. 그렇게까지 약해 보였던 적이 없다고…….]

오랜 불행으로 무기력해지긴 했으나 여자는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었다. 지옥에서도 살아남은 의지와 방패처럼 두른 냉소로, 현실의 불합리함에도 꺾이지 않았다. 삶을 버티지 못하게 되더라도 여자는 흩어질지언정 쓰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온 사내였기에, 청년이 전하는 그녀의 모습은 낯설다. 그 만남에서 여자가 붙잡고 있던 것이 와르르 무너진 것은 아닌지.

이야기를 듣고 보니 여자가 만났다는 사람도 신경이 쓰인다. 사내가 생각하기에 여자를 약해지게 만들 사람이라면 두 사람. 유일무이한 친우라고 불렀던 소년과, 그녀의 하나뿐인 여동생. 그녀가 전장에서 잃고 돌아온 사람이었다. 하필 여자가 만났다는 사람은 그렇게 과거에 묻힌 이들을 연상시키는 존재였다. 세상에서 증발한 동생을 빼닮은 얼굴에, 같은 나이, 비슷한 습성까지. 그녀의 기억을 되살릴 수밖에 없는 사람. 미워할 이유는 없으나 사랑할 수도 없는 사람을 여자가 왜 만났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과거나 지금이나 여자에게는 별다른 연결고리도 없는 사람인데.

[쿠로사키가 괜찮은지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솔직히 자신이 없어. 그래도 레이지는 쿠로사키랑 가까우니까.]

[좋아. 이해했어.]

[……괜찮겠지?]

긍정의 답변을 돌려주면 좋았겠지만 사내는 확신 어린 말은 하지 못했다. 아마도. 짧게 답하고선 대화를 끝냈을 뿐이다. 사내는 통신을 끊자마자 여자의 연락처를 찾아 연결했다.

그녀라도 잠깐 심란해졌을 수는 있다. 가장 괴로운 상실을 떠올렸을 그녀가 한순간 흔들렸다고 해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만났다는 사람은 결코 타인을 상처 입힐 자가 아니니, 마음이 정리되면 안정을 찾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사내는 여자가 받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사내가 들은 것은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끊어지지 않는 신호음뿐이었다. 시간을 두고 몇 번 더 연락해도 결과는 같았다. 청년과 대화할 때까지는 신경이 쓰이긴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사내는 오랜 침묵에 서서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여자가 최근 들어 답지 않게 반복하던 행동과 그 전까지 따로 찾지 않았던 사람과의 만남, 웬만해선 보이지 않던 불안한 모습까지. 그가 모르는 곳에서, 무언가 분명히 있었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먼저 연락해온 청년은 상세하게 알지 못하고, 여자의 상태를 직접 확인한 사람에게 물을 수도 없다. 보통의 연인 관계라면 여자가 제 연락을 받아주거나 먼저 연락해오길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둘의 관계는 일반적이지 않다. 수년간 은밀한 사이로 지내왔음에도 먼저 연락하는 것은 언제나 사내였다. 애태우는 것도, 상대를 붙잡으려 하는 것도, 관계에 보다 명확한 이름을 붙이는 일을 고민하는 것도 사내 쪽이다. 여자는 그에게 어울려주었을 뿐 묶여주지는 않았다. 사내만큼 관계에 의미를 두지도 않는다. 당연히 그녀는 사내의 말을 들어주어야 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진짜 연인도 아닌데.

친구가 되는 쪽이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으나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마음을 닫아버린 여자에겐 오히려 그쪽의 벽이 더 높았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관계의 이름이 어떠하든 여자가 그에게 과거의 사람만큼 기회를 주었을 거라는 자신이 없다. 사내는 그녀의 삶에서 자신이 얼마나 평범한 존재였는지 새삼 실감했다.

그래도 여자는 사내의 영역에서 지내는 사람이었다. 프로에서 은퇴하고는 회사에서 확실한 자리를 차지하진 않지만, 사내의 부탁으로 자잘한 일을 맡다 보니 회사에도 자주 들락거리곤 했다. 조금 힘들어지면 저를 찾아와줄지도 모른다. 혹은 회사에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 사내는 제 일에 집중하며 모든 것이 평범하게 돌아가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다. 여자가 변덕을 가장해 불쑥 사장실에 들이닥치고, 그가 일에 열중하는 체 하면 슬쩍 방해하기를.

그것이야말로 사내에겐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다만 그녀에게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에게도 약간의 의미는 있었을지. 아니면 언제 끝날지 모를 장난이었을지.

쿠로사키가 오질 않는군요.”

생각에 빠져있던 차에 비서가 여자의 존재를 한 번 더 상기시켰다. 평소라면 그냥 넘길 수도 있을 말이 이번에는 묵직하게 느껴진다.

그 여자, 여기 잘 들락거리더니.”

별로 재미가 없는 모양이야.”

떠난 건 아니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만, 본성을 생각하면 꽤 오래 붙어있었잖습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사내는 바로 답할 수 없었다. 비서도 어머니만큼이나 여자를 오래 봐왔으니 나른한 태도에 가려진 그녀의 성정을 알아챘을 것이다.

변덕처럼 붙어있었으니 변덕으로 떠날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쿠로사키 슌이 굳이 사장님께 모든 것을 보고할 이유는 없지요. 그 여자 치곤 자주 어울려주는 편이었지만.”

비서의 말은 거기서 끊어졌지만 사내는 생략된 것을 알 것 같았다. 어차피 흘러갈 사람이었다고. 지금까지 있어준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고. 사내는 십대 초반, 일찍이 사장직을 맡았을 때부터 저를 보좌해온 비서의 얼굴에서 묘한 감정을 읽는다. 아이를 달래는 어른처럼 안쓰러움과 웃음을 한데 얹고.

……무엇을 기대하세요?”

일을 마치고 회사를 나설 때까지도 여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여자와 자주 맞닥뜨리는 이들에게 물어도 아예 나타나지 않았다는 답뿐이었다. 통신기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지만 청년에게서도 여자에게서도 들어온 것이 없었다. 여자가 먼저 연락해오는 것이야 기대도 않았으나 뭔가 짚이는 게 있으면 연락하겠다던 청년에게서도 소득이 없는 것에는 조금 초조해졌다.

심란함으로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사내는 자주 찾는 건물에 와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도 고향에 가지 않은 여자가 편히 지내도록 사내가 마련해준 집이 그곳에 있다. 복도를 걸어 그녀의 집 앞에 섰을 때, 사내는 뜻밖에도 문이 열려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모습이었지만 혹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사내는 여자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반응은 없었다. 도리어 찜찜한 것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내부가 너무 허전하다는 것.

그녀의 집에 특이한 점이 있다면 짐이 적다는 것이었다. 물욕이 없는 것인지 집에 여러 물건을 쌓아두기 싫은 것인지, 그녀는 최소한의 물건만 두는 것을 고집했다. 그렇다 해도 지금은 지나치게 휑했다. 본래 사내가 기억하던 개인적인 물건이 싹 치워진 공간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보다 잠깐 머무는 객실을 연상시켰다. 거기서 사내의 머리를 치는 생각이 있었다. 남겨둔 것도 챙길 것도 적은 집이라면, 원할 때 언제든 떠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

사내를 더욱 불길하게 만드는 것은 정돈된 공간에서 유일하게 어질러진 것이었다. 탐스럽게 피어난 꽃송이가, 아직 생생한 꽃잎이 현관 쪽의 통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져 있었다. 원래라면 예쁘게 포장해 누군가에게 안겨야 했을 꽃. 전날 여자가 가져온 꽃과 같은 종류였다. 그때 여자가 가시에 찔려가면서도 열중해서 다듬기에, 턱을 괴며 지켜보던 그는 떠보듯이 물었다.

[꽃을 좋아했던가?]

[싫어하지는 않아.]

[누구를 위한 꽃이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잖아.]

평소처럼 명확하지 않은 답이었다. 괜한 오기로 사내가 재차 물으려 할 때 여자가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꽃을 사는 거, 사실 위장이야.]

[무슨?]

[내 마음을 숨기기 위한 거지. 여러 사람에게 안겨주면, 누구를 위해 꽃을 사는지 모호해지잖아?]

[‘진짜선물할 대상은 따로 있다는 건가.]

[부러워? 너한테도 질리도록 안겨줄까?]

사내는 답 대신, 깔깔대는 여자에게 키스했다. 아마 자신은 평생 진짜가 되지 못하리란 생각을 덮으려 애쓰며.

직접적으로 묻지도 않았거니와 여자가 제 마음을 다 밝힐 일도 없으므로 그녀가 정말로 꽃을 안겨주고 싶었던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차피 이제는 크게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그녀가 마음을 쏟은 사람에게 갔어야 할 꽃이, 혹은 위장으로라도 타인에게 돌아갔어야 했을 꽃이 버려졌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 씁쓸한 풍경이 암시하는 것은 하나. 여자의 마음이 깨어졌다는 것.

짓밟힌 감정은, 사랑은 아니었으리라. 처음부터 싹튼 적이 없었는지 전쟁이 그녀의 감정을 죄 말려버렸는지는 모르나, 사내가 만난 때 이미 여자는 애정을 담지 못할 사람이 되어있었다. 저에게 쏟아지는 애정도 교묘하게 피할 때가 많은 그녀가 타자에 사랑을 쏟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무엇이었을까. 여자가 번거롭게 위장까지 하면서 숨기려 들었던 감정은. 끝내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을 마음은.

그리고 그녀가 사라져버린 이유는.

이제 사내는 그녀가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오늘의 만남에서 그녀가 감당하기 힘든 부분이 자극되었고, 결국 헤어지자마자 제 감정을 쥐어뜯고 도망쳐버린 것 같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녀를 망가뜨린 것은 과거와 연관된 것일 확률이 높다. 그녀에게 과거란 현재를 좀먹는 독임을, 좀 더 의식했어야 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사내는 갈 길을 잃었다. 여자가 정말로 떠나버린 것이라면 사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사적인 자리에서야 묘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공식적으로 두 사람을 묶어주는 이름은 없으므로. 결국 사내는 그녀의 삶에 관여하지 못하고 타인으로서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여자와의 관계에 허울뿐인 이름이라도 붙여두지 않은 것이 그는 새삼 후회스럽다.

관계란 무거운 추에 가깝다고 사내는 생각한다. 안은 사람을 휘청거리게 만들기도 하는 동시에 흔들리는 자를 묶어둘 수도 있을 것이라고. 어머니의 말대로 그녀에겐 타인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책임을 느껴 차마 버리지 못할 존재가. 그녀의 마음 속 소중한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는 사내라 해도, 그녀가 더 버티게 한다는 역할만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건 변덕인데 말이야.]

문득 얼마 전 여자가 장난처럼 던진 말이 떠오른다.

[너에겐 빚을 많이 졌으니까. 마이아미에 있을 때까지 소원 하나쯤은 들어줄 수 있어.]

그때 사내는 제 속내를 그대로 보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녀 앞에 무너져 그간의 불안을 고백하고, ‘내 곁에 있어줘따위의 말로 그녀를 이 세상에 뿌리내리게 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사내의 이성이 이겼던 것은 단순히 그녀의 삶을 멋대로 이끌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의 삶을 제대로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보다 명확하게 말하면 당장은 그녀를 완벽하게 구해줄 길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일 그때 억지를 썼다면 달랐을까? 이상적인 길을 고민하지 않고 당장 그녀를 붙들어놓기로 했다면? 때늦은 가정이었다. 여자는 이미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는데. 무력감에 짓눌려 사내는 자리를 떴다. 당장은 여자에게 연락해볼 의지도, 그녀를 따로 찾아볼 힘도 없었다.

건물을 빠져나오자 그를 맞이하는 것은 도시의 야경이었다. 어둑해진 밤을 밝히는 것은 별이 아닌 형형색색의 불빛. 여자는 인위적인 색채로 어지러운 야경을 퍽 좋아했는데,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고향을 연상시킨다는 게 그 이유였다. 미래도시란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지. 그렇게 말하는 여자가 드물게 즐거워 보여서 한참이고 그 얼굴을 바라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떠나올 때는 완전히 잿빛이었지만. 그녀가 지나가는 듯 덧붙인 말까지.

어느 밤에는 여자와 장난을 치기도 했다. 연인 행세를 하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반응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서로 가짜 이름을 부르며 꾸며낸 관계를 즐기던 여자는, 약속한 시간이 다 가기 직전에 말했다. 우리가 평범하게 만났다면 괜찮은 한 쌍이 되었을지도 몰라.

거리를 헤매는 순간순간 기억이 쏟아졌다. 추억은 있는데 사람은 없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이 환상이었던 것처럼.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기억이 더해지는 일 없이, 지금까지의 기억이 유물이 되는 것일까. 어차피 부유할 사람이라는 모두의 체념처럼 그녀가 완전히 증발하게 될까.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한참을 헤매던 사내를 구해준 것이 있었다. 통신기가 진동하기에 혹 청년에게 연락이라도 왔나 싶어 꺼내보니 생각도 않은 사람으로부터의 메시지가 화면에 떴다.

[XX빌딩에서 야경을 보고 있어.]

처음으로 여자가 먼저 보내온 메시지였다.

 

*

 

여자가 이야기한 장소는 사내의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까지 생각했는데, 그녀는 평소 발이 닿는 곳에서 얼마 벗어나지도 않은 것이다. 만날 수 있는 시간을 한정해둔 것도 아니지만 사내는 최대한 빠르게 그녀에게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기회가 사라질까. 변덕으로 떠나버릴까. 공연히 두려워져서. 목적지에 도착해 숨이 차도록 계단을 오른 사내는 마침내 익숙한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자는 난간에 기대 서 있었다. 가는 몸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그녀를 겨우 지탱하는 낡아빠진 난간이 전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느껴졌다. 사내는 이름을 부르려다 그녀의 곁으로 가 섰다. 녹이 슨 난간에 손을 얹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면 여자는 무너질 것만 같은 곳에 자꾸만 마음을 두었다. 전쟁을 거치며 가장 사랑했던 도시가, 거기서 시작된 제 삶이 폐허가 되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선 자리 근처에 가방이 보였지만 짐 가방이라기엔 작았다. 어쩌면 정말 떠나려 했던 것인지 모르는데도. 언제나 그랬지만, 그녀가 삶에서 움켜쥔 것은 너무도 적다. 미련 없이 전부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찾아왔네.”

여자는 자연스레 사내를 맞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다행히도 그늘은 비치지 않았다.

위치를 말해주었으니까.”

찾아주지 않았어도 어차피 돌아갈 거였는데, 친절하구나.”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으면서 여자는 잠깐 자리를 비우기라도 했던 듯 태평스레 말했다. 사내는 그동안 자신이 시달려온 나쁜 상상을 이야기하려다 그만두었다. 마음을 쓴 것을 당사자에게 설명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거니와, 어차피 그녀는 그의 감정의 깊이를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처음 만난 때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이 인식하는 관계의 무게는 비슷했던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 그녀란 잃어서는 안 될 존재이지만 그녀에게 저는 타인일 뿐임을, 사내는 뼈저리게 안다.

히이라기 유즈와 만났다고 들었다.”

때문에 사내가 꺼낸 말은 투정도 책망도 아니었다. 왜 사라졌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은 괜찮은 것인지.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를 말.

그런 일이 있었지.”

그것 때문에 헤맸나?”

헤매다, . 딱 네가 할 법한 말이네.”

바로 긍정의 답을 주지 않는 것에 사내는 제대로 짚었음을 알았다. 그녀는 상대가 답에 근접했다 싶으면 저렇게 엉뚱한 말로 도망치곤 했다. 속을 내보이지 않으려. 타인을 자신의 세계에 들이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야. 그냥, 생각을 전환하게 되었을 뿐. 앞으로는 꽃은 안 사기로 했어.”

언제까지 빙빙 돌려 말할 생각이야?”

여자의 눈이 둥그레졌다. 아무래도 사내가 정면돌파를 택할 것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사내로서도 다소 충동적으로 꺼낸 말이었으나, 막상 말이 터지니 물러설 수 없었다. 평소라면 꺼낼 리 없는 것을 사내는 거짓말처럼 쏟아낸다. 오래 묵은 말을, 그만큼 곪은 생각을.

꽃을 안 산다는 건 앞으로 선물할 일은 없다는 뜻이겠지. 선물할 사람에게 거절당했건 네가 힘들어서 그만두게 되었건 간에. 네 고약한 말은 이제 대충 해석할 줄 알아.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네 말로 듣지 않으면 끝까지 몰라. 너는 그렇게 매번 결정적인 건 숨기면서 무슨 일이든 혼자 끌어안으려 들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쓸데없는 말로 네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

그러다 네가 못 버티게 되더라도 따로 고백하지 않으면 지켜보기만 해야 해?”

여자의 세계에 들어서지 못해도 좋았다. 그녀의 해답이 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그녀가 모든 것을 안고 침몰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했다.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줄 모르는 그녀가 혼자 무너지기 전에 균열을 알아채야 했다. 때문에 사내의 말은 드물게 간절함을 띠고 있었다. 이번만은 답을 듣고 싶다는 소망을 그는 이제 숨기려 들지 않는다. 정공에 약해진 것인지 여자는 잠깐 침묵하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운을 뗀다.

프로 듀얼리스트에게 선물 보낼 수 있는 거 알지.”

물론.”

히이라기 유즈가 대회에 출전해 수상할 때마다 팬 선물로 꽃을 보냈어. 처음엔 호의였는데 하다 보니 습관처럼 되더라. 익명으로 보내며 가능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뭔가 흔적이 묻었던 모양이야. 결국 그 애가 알아챘더라고.”

그래서 만났군.”

사내는 비로소 여자의 위장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깨닫는다.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무엇인지도 답을 얻었다. 뜻밖이라면 뜻밖인 이야기였다. 그녀에게 그렇게 평범하고 나약한 면이 있음을 생각지도 못했다. 뻔히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그녀의 행동에 계속 불안을 느끼면서도.

연락이 왔을 때 직감했어. 아무래도 꼬인 것 같다고. 거짓말을 하건 허세를 부리건 상황을 잘 넘길 생각이었는데 막상 만나니까 준비해둔 게 다 소용없는 거 있지. 지금까지 꽃을 보내준 것 정말 고마워. 하지만 무리하지 않았으면 해서 짚고 넘어가는 거야. 나는 쿠로사키에게 그렇게 선물을 받을 사이가 아니잖아. 그런 말을 들으면서 뭐라고 할 수 있겠어.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어질어질했지.”

나쁜 의도로 한 일이 아닌 건 그쪽도 알 텐데.”

그 애의 말이 맞아. 그럴 사이가 아닌 거야. 의도가 좋아도 결과적으로는 나쁜 일이 있어. 어차피 떳떳할 수 없는 건 나인데, 말을 다 마치고는 제가 너무 매정하다 싶었는지 한참 망설이다가 말하더라. 그래도, 원한다면 언니라고 불러줄 수는 있는데.”

여자는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그것이 괜찮다고 거짓말할 때의 습관임을 사내는 안다. 슬프게도 이런 순간에조차 여자는 단단히 무장한 채였다. 이대로 느슨해져도 모른 체 넘어가줄 수 있는데. 끝까지 물기 없는 목소리로 여자는 덧붙인다.

착한 애들은 결정적일 때 잔인하다니까.”

사내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꽃을 떠올렸다. 여자가 그와 함께 구겨 넣었을 감정을 상상했다. 누구에게도 보답받을 수 없는, 어떻게든 태워 없애야 할 것을. 그러나 처음부터 너무 가혹한 감정이었다. 그런 것을 운명처럼 안게 한 세상이 나빴다. 짊어져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여자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죗값처럼 끝까지 삼킬 뿐.

덕분에 확실히 깨달았어. 한참 어리광 부리고 있었다는 걸. 마지막 힘을 짜내서 그 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곤 나왔어. 집에 돌아와 남아있던 꽃을 아무데나 처박고는 너에게로 생각이 옮겨갔지.”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지 않나?”

그동안 내 어리광을 받아준 건 대부분 너였잖아.”

지나간 시간을 붙잡고 있는 걸 어리광이라고 한다면, 너만이 하는 일도 아니고 별로 흠이 될 것도 없어.”

언제까지나 붙잡고 있을 순 없지.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켜도 안 되고. 아카바 레이지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건 아닐까? 쓸모없는 감정의 찌꺼기까지 넘겨버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여자는 사라지는 것을 고민했으리라. 사내의 영역에서, 그나마 저에게 호의적이었던 곳에서. 마음의 빚을 진 것은 오히려 사내 쪽인데 그녀는 그의 호의를 너무 무겁게 느낀다. 어차피 모든 것이 그의 책임인데도. 사내는 괜찮다는 말 대신 여자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와 같은 곳에 시선을 두었다. 사내에게는 나고 자라 익숙한 곳이지만 그녀에게는 아직껏 타지일 뿐인 도시의 풍경이 눈에 담긴다.

평화는 여자에게 낯선 것이 되었고 사내의 영역에서 벗어나면 의지할 사람을 찾기 힘들다. 인파에 섞여들 수야 있어도 그녀가 사내 없이 이곳에 어우러지는 것은 아마 무리일 것이다. 거리를 헤매며 그녀가 무엇을 생각했을지, 혹은 무엇에 좌절했을지 사내는 짐작할 수도 없다.

……핑계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침묵을 끊은 것은 여자였다.

거리를 걷는데 네가 말했던 전쟁의 기록이 갑자기 떠오르더라고.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은 것.”

네가 없으면 완성할 수 없는 것이지.”

그래서 돌아가야지, 생각했어. 이런 식으로는 달라질 수 없는데도.”

편한 대로 살면 돼. 너에게 삶의 방향을 강요하지 않아. 그냥 솔직하게 대해줬으면 하는데. 싫은 말이든 투정이든 좋으니까 내 앞에선 짐을 내려놓았으면 해.”

순진하긴. 내가 정말 다 내려놓으면 네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여자는 깔깔댔지만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조금은 짐을 덜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 앞에서는 이렇게 힘을 주어 이야기해야 한다. 다소 과하게 자신에 찬 모습을 보여야 약간이라도 느슨해진다. 한 번 더 허세라도 부릴 참으로 입을 뗀 사내를, 여자의 말이 급습했다.

그래도, 어쩌면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게 아카바 레이지여서 다행일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드네.”

놀랍군.”

나카지마가 날더러 평생 부유할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틀린 말은 아냐. 그러니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살아야지. 너는 애매한 관계에 불만을 품지 않잖아?”

여느 때처럼 속을 읽기 힘든 어투였지만 사내는 그 말에 진심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순간의 변덕이라도, 그녀는 떠날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를 뻔히 앞에 두고도.

도망칠 길을 남겨두는 셈인가.”

어차피 부유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어디에도 얽히지 않는 것이 덜 잔인한 태도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괴로워할 사람도 기다릴 사람도 없도록.”

언젠가는 사라지려고?”

그런 걸 꿈꿔왔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 누구에게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없었던 사람이 되는 것.”

결국 여자는 사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가능성을 입에 올리고 만다. 어떻게든 막고 싶었던 미래를.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슬픈 결말을.

사내가 이전부터 여자를 구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단순한 다짐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기최면에 가까운 생각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와 함께해온 사람으로서도 그녀를 세상에 붙잡아둘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데. 사내는 그녀라는 인간 자체가 때로 지독한 환상처럼 느껴졌다. 언제라도 허물어질 수 있을, 무력한 존재. 의식적으로 흩어버리려던 비관적인 상상을,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현실로 만든다.

언제부터?”

프로를 그만두면서부터? 전쟁이 끝나면서? 아니면, 전장에 있을 때? 모르겠네, 너무 오래된 것 같아. 나도 모르는 사이 그런 생각이 삶의 일부가 된 모양이지. 언젠가는 성공할지도 몰라. 세상에 알려졌을 때의 기록은 다 지웠는걸.”

나는 네 기록을 없앴지만 사람들의 머리에 남은 기억까지 지우진 않았지.”

수없이 쏟아지는 선수들 틈에서 도망친 사람이, 그것도 타지에서 온 사람이 언제까지 기억되겠어?”

랜서즈가 너를 잊을 거라고 생각해?”

한때 그녀와 함께 싸운 이들을 내세우긴 했으나 그것은 사실 사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내가 너를 기억할 거라고. 너는 이 세상에서 흩어지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여자는 한 가닥 망설임도 없이 먼 세계로 떠나버릴 것이다. 죽은 세계에 묻히거나, 완전히 표류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삶을 놓아버릴 게 뻔했다.

네가 사라지면, 분명히.”

괴로워할 거라고. 네 삶은 분명히 세상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사내가 그런 말을 전하는 것보다 여자가 저를 방어하는 것이 빨랐다. 그녀는 사내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지나간 것은 쉽게 잊는 게 사람이야. 당장 여기 있는 너도, 조금만 떨어져 있게 되면 곧 나를 잊겠지.”

우리 사이는.”

스쳐지나가는 사람일 뿐이잖아?”

여자는 웃는 낯으로 선을 긋는다. 한 가닥 희망조차 꺼트리려는 듯.

너를 제멋대로 휘두르는 건, 장난스럽게 만나는 건, 너에게 아무것도 되지 않았으면 해서야. 나는 네 삶에 잠깐 머무르다 영영 사라지는 게 목표니까.”

물론 잘 배운 도련님을 골려먹는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여자는 덧붙였지만 사내는 그녀의 진심이란 바로 전의 말이었음을 안다. 겨우 꺼낸 속마음이 그런 것이었음에 사내는 서글퍼진다. 그녀가 세상에 뿌리내릴 때까지 곁을 지키고 싶었는데. 그는 괴로운 마음을 삼키고 묻는다.

그렇다면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지?”

?”

지난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나?”

특정한 관계를 택하지 않는다고 전부 없었던 일이 되진 않아. 너는 내 삶에 어떻게든 남을 거야.”

하지만 추억으로만 두고 갈 생각이겠지.”

거기서 여자가 사내를 똑바로 응시했다. 금빛 눈에서 사내는 여러 감정을 읽는다. 안타까움, 엷은 연민, 그리고 체념. 그가 여자에게 향했던 감정.

너를 내 삶에 끌어들이는 건 말이야. 나를 짊어져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어떤 사람이든 타인을 완벽하게 짊어져줄 순 없지. 그런 걸 꿈꾸다간 자기도 무너져. 상대가 나 같은 사람이라면, 특히.”

그런 각오는 되어있어.”

타인을 위해 삶을 낭비하지 마.”

왜 여자는 저렇게 체념하는 것인지. 사내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삶을 소모해도 좋았다. 냉정한 계산과 잘 벼린 이성을 내려놓고 돌려받는 것 없는 관계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녀가 받아주기만 한다면, 적어도 그의 영역에서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삶을 그녀에 맞출 수 있는데.

어쩌면 상대에게 확신을 주어야 했던 것은 여자가 아니라 사내였을지도 모른다. 애매한 관계에서 애정의 확신을 은근히 기대할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기대도 된다는 확신을 그녀에게 주었어야 했던 것일까. 그녀가 타인의 도움을 지레 거부하고 벽을 쌓지 않도록.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내가 보이는 의욕이 한순간의 변덕이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될 것임을.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이 그의 소망임을.

어차피 나는 네 삶을 짊어져야 해. 전쟁 피해에 대한 책임은 내가 안고 가기로 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흔들릴 것을 걱정하지 말고, 기회를 줘.”

지금까지 타인에게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요구한 적이 있었던가. 상황을 쥐고 흔드는 것이 능한 사내였기에 굳이 상대에게 매달릴 필요가 없었는데. 그녀는 그의 삶을 얼마나 바꾸고 있는지.

나는 너를 지탱할 수 있어. 끝까지.”

……두려워하고 있구나, 도련님.”

그러나 여자는 사내의 심리를 너무도 쉽게 읽는다. 아이를 다루듯 건네는 말에, 사내가 가장하던 강한 모습이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알고 있다면 받아주지 그래.”

그건 곤란해. 너는 진심이니까. 받아주다간 묶여버릴걸.”

사내의 불안을, 간절함을 뻔히 알면서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에게 확신을 주지 않는다. 여느 때처럼 회피하면서 언제든 사라질 가능성을 남겨두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내도 조금은 비겁해질 수밖에 없다. 한순간이라도 여자에 대한 불안을 거두기 위해서.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 유효해?”

어리광을 부리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자신 쪽이리라. 사내는 여자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아직.”

그럼, 사라지지 않겠다고 말해줘. 한 번이라도 확실하게.”

그것으로 괜찮아?”

그것만이라도 믿고 싶다면.”

바보 같긴.”

여자는 사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사내가 바라는 말 대신. 여자의 체온을 느끼면서도 그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이번에도 슬그머니 넘어갈 것만 같은데. 물거품이 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은데.

'0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카바 형제] 가족의 탄생  (0) 2020.02.22
[사장슌ts] 검은 요람  (0) 2019.10.28
[사장슌ts] not going anywhere <Side S>  (0) 2019.02.28
[사장슌ts] not going anywhere <Side R>  (0) 2019.01.31
[슌] 미래의 끈  (0) 2017.01.31
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