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장슌 회지 <잇자국> 웹공개

 

 

오늘은 제가 이야기할 차례군요. 저번의 여행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정말 마음에 들어서,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하며 소화했지요. 제가 할 이야기도 여행자 씨께 그런 것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심심한 이야기여서요. 그래도 부디 끝까지 지루해하지 마시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카바 레이지에 대해 알고 있나요?

마이아미에서 유명한, 그 정치인 말인가요?

. 영웅이라고도 불렸던 그 자 말입니다. 이곳 마이아미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그래요, 마이아미는 특히나 그를 사랑하죠. 마이아미에서 태어나 마이아미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사람이니까요. 그를 기념하기 위한 연극도 마이아미에서 제작했을 정도예요. 저는 그 사람에게 꽤 관심이 있는 쪽이라 얼마 전에 그 극을 보러 갔는데……솔직히 말하면 기대 이하였어요.

무엇 때문에요?

너무 영웅적이었거든요. , 물론 아카바 레이지가 젊은 나이에 쌓은 업적을 부정하진 않아요. 하지만 너무 뻔하게 영웅으로만 그려내고 있단 말입니다. 제가 아는 그 사람은 그 외에도 여러 면을 가진 재미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말인데, 오늘 할 이야기는 이제 세상에 아는 사람이 거의 남지 않은 이야기랍니다. 아카바 레이지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 그리 중요하지 않아서 세상 사람들에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아카바 레이지를 위해 죽어주기로 한 괴물에 대한 이야기랍니다.

예나 지금이나 귀한 자식을 잃고 싶은 사람은 없지요. 가문이 커질수록, 부유해질수록, 권력이 강할수록 자식을 더 중히 여길 거예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상처 입히지 않고 키우기 위해서. 아카바 가는, 모두가 알다시피 매우 강력한 가문입니다. 오래도록 권력을 쥐고 부를 쌓았으며 세대를 거치며 유명인사를 다수 배출했어요. 그런 가문인 만큼 적도 많아서, 아카바의 후계자라면 언제나 살해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요. 아카바 레이지는, 그 영광스럽고도 위험한 자리로, 아카바의 후계자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 넘긴 그를 보고 그의 부모는 자식을 확실하게 지켜줄 존재를 찾아다녔어요. 언제나 아카바 레이지만을 위해 움직이고 아카바 레이지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던질 수도 있는 자. 한동안 사람을 풀어 그런 자를 찾아다녔지만, 수하들이 소개한 자들 중 누구도 자식을 맡길 정도로 믿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고민하며 호위하는 자만 자꾸 고용하던 부부는 어느 날 자신들의 바람에 딱 맞는 존재를 찾게 됩니다. 둘은 그대로 서커스단으로 향했습니다.

서커스단? 서커스단에서 일하던 자를 찾은 건가요?

그래요. 이해가 잘 가지 않죠? 하지만 저는 부부가 현명했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이 서커스단에서 찾은 것은, ‘죽지 않는 괴물이라고 불리는 청년이었거든요.

죽지 않는다니. 의심스러운 말인데요. 속임수? 아니면 상처를 입지 않는 체질이기라도 했나요?

의심스러운 게 당연해요. 생물이란 원래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까. 그런데 그 괴물이란 자는 정말로 죽지 않았거든요. 서커스단에서 그 괴물을 어떻게 썼는지 아세요? 무대에 데려와서 그 몸에 칼을 꽂았어요. 날카로운 칼이 몸을 꿰뚫어 피가 흘러도 그 자는 신음 하나 흘리지 않고 얌전히 찔릴 뿐이었답니다. 처음엔 모두 속임수라고 생각했지만, 의심하는 관객에게 단장이 칼을 주고 직접 찌르게 하자 모두가 믿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칼을 뽑으면 상처가 난 자리가 순식간에 아물기까지 했어요. 보통 사람이라면 치명상일 것을 몸 여기저기에 입고도 조금만 지나면 말짱해지는 존재. 그건 괴물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존재지요. 단장은 괴물을 보러 온 아카바 부부에게, 저것은 어떤 상처든 회복하는 체질을 타고났다며 자랑스레 이야기했답니다. 찔러봐도 됩니다. 어차피 죽지도 않을 텐데요. 칼을 내미는 단장에게 부부는 말했습니다. 저것을 데려가고 싶은데요, 라고.

단장이 순순히 내어줬나요?

그럴 리가 없죠. 돈벌이 수단인데. 단장은 부부에게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괴물을 키워왔는지, 부모라도 되는 양 감정을 실어 이야기했답니다. 관객 앞에서 학대하는 것으로 돈을 벌어왔으면서요. 물론 부부도 단장이 쉽게 내어주진 않으리란 걸 알았기에, 속이 빤히 보이는 단장의 말을 끊고, 달라는 대로 쳐줄 테니 사가겠다고 말했지요. 아무리 귀한 분들이어도 그렇게까지 돈을 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싶었던 단장은 어디 사가려면 사가보라는 듯 말도 안 되는 값을 불렀습니다. 부부가 어떻게 했을 것 같나요?

그래도 사갔겠지요. 자식을 위해서.

.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값을 치르고, 멍해진 단장을 내버려두곤 괴물을 불러내 바로 데려갔습니다. 괴물은 그렇게, 긴긴 시간을 착취당했던 서커스단을 떠나 아카바 가의 도련님을 만나러 가게 되었고요. 부부는 돌아가자마자 괴물을 깨끗이 씻기고 아마 괴물이 살아오면서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을 좋은 옷을 입힌 뒤 아들을 불렀습니다. 아카바 레이지는 그때 일곱 살. 괴물은 그때, 그보다 열 살 즈음 더 많아 보이는 청년이었습니다. ‘많아 보인다고 한 것은 누구도 괴물의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몇 년간 키웠다던 단장조차 그 나이를 몰랐다고 하니까요. 불려온 소년은 자신보다 한참 큰 청년 앞에서 멈췄지요. , 레이지. 이쪽은 앞으로 너를 지켜줄 사람이란다. 부부는 말했어요.

아카바 레이지는 일곱 살이었지만, 그럼에도 아카바였습니다. 소년은 바로 낯선 청년을 반기는 대신, 괴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부모에게 질문을 던졌죠. 저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요? 라고.

어려서부터 만만찮았군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왔다는 자들이 자주 죽어나가는 걸 그 전부터 보았으니까요. 일부는 암살자를 막다가 죽었고, 일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했으며 일부는 도리어 어린 도련님을 노리다가 처단당했어요. 그걸 똑똑히 본 아이가 쉽게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 해도 어린 나이에 그만한 말을 한다는 건 아카바의 후계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어린 아들의 냉정한 질문에 부모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물론. 너를 위해선 죽어줄 수도 있어. 소년은 그 대답에 비로소 제 맞은편에 선 청년에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축축한 것이 튄 뺨을 닦았다. 손가락에 묻은 것은, 짐작한 대로 피. 자신을 가로막고 대신 찔린 자에게서 튄 피였다. 다른 사람에게 죽음을 떠넘기는 것으로 목숨을 챙기는 것은 소년의 짧은 생에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피가 튈 때마다 소년은 묘한 불쾌감에 사로잡힌다. 그 축축함도, 비릿한 냄새도, 심지어 그 붉은색마저 싫었다. 자신을 위해 타자가 짊어진 것을 상징하는 것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기엔, 소년은 그리 뻔뻔하지 못했다.

죽어줄 수도 있는 사람.

부모가 어딘가에서 데려와 자신에게 붙인 청년은 그런 인간이라고 했다. 그만큼 모두들 청년을 잘 대해주었지만, 그 좋은 대우가 죽음의 대가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왜 자신을 위해 죽어줄 수도 있다고 했을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인데, 만난 지 오래지도 않은 사람인데. 완전한 타인을 위해 어떻게 목숨을 던질 수가 있을까. 던진다 해도 후회하진 않을까. 소년은 찔린 곳을 움켜쥐면서도 자신을 가로막는 청년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다. 머잖아 청년은 쓰러지고 영영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의 죽음이 지나가기도 전에 새로운 사람이 와 그 빈자리를 채우고, 다시 소년을 위해 몸을 던져야 할 것이다. 타인의 희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꺼림칙했다. 그렇다고 자신을 노리는 공격을 얌전히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앞으로도 자신의 암묵적인 동의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대신해 다치고 죽게 되리란 것이 소년은 끔찍했다.

그래도 소란이 일었으니 사람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을 위해 찔린 청년도, 조금은 편해지리라. 소년은 어서 모두가 달려와 청년을 데려가길 바랐다. 목숨을 건질 것이라곤 기대하지 않지만 이 고통스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해방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소년의 바람대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을 때.

소년을 죽이러 온 자가 다시 청년을 찔렀다. 빨리 청년을 처리하고 소년의 목숨을 끊으려는 모양이었다. 이젠 무리다. 소년이 빠르게 판단을 마치고서 주먹을 꽉 쥐었을 때, 청년이 제 몸을 뚫은 칼을 뽑아냈다. 피가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청년은 비틀거리는 일 하나 없이 칼을 내던지고 상대를 쓰러트렸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된다. 청년은 피를 쏟으면서도 자객에게 올라탔다.

오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소년을 섬기는 이들이 소년을 감싸며 안전한 곳으로 이끌었다.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음에도 소년은 자꾸만 청년을 돌아보며 좀처럼 시종을 따라가려 하지 않는다.

잠깐만.”

고생하셨습니다. 나쁜 일은 빨리 잊으세요. 자객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쿠로사키는.”

시종의 손을 힘껏 뿌리치며 소년은 강하게 말했다.

쿠로사키는 어쩔 참이야? 나를 대신해서 찔렸어.”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의사는 불러봐야 하잖아.”

소년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에 대해서는 언제나 고집스러웠다. 그 길을 포기해야 할 이유를 납득시키지 않는 한은 누구도 소년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시종이 어떻게 어린 주인의 마음을 돌릴지 생각해야만 했을 때 다행히도 구원의 볕이 들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의사를 불러오라며 고집을 부리던 소년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피를 무섭게 쏟았던 청년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에게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날이 파고들어 옷이 찢긴 부분은 그대로인데, 그 아래의 상처는 어디에도 없다. 조금 전 소년을 위해 몸으로 칼을 막아냈던 것이 한갓 꿈이었던 것처럼.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거리를 좁히자, 청년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의사는 필요 없다. 얌전히 나가.”

소년을 섬기는 입장임에도 청년은 경어를 쓰는 일이 없다. 가문에서 아무리 교육시켜도 소용이 없었다. 가르쳐봐야 소득도 없고, 어차피 소중한 후계자를 위해 몸을 던질 사람이므로 가문에선 청년의 불손함 정도는 눈감아주기로 했다.

쿠로사키, 상처는?”

조금 전까지 단단했던 소년의 목소리는 믿기지 않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분명히, 찔렸다.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얼마 버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분 만에 말짱해진 모습으로 자신 앞에 서지 않았는가.

이제는 없어.”

답은 간결했다. 청년은 몸을 굽혀, 피가 말라붙은 손으로 여전히 얼어붙은 소년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런 거, 이제는 없다고.”

어떻게?”

어떻게라니. 원래 그런 건데.”

상처가 그렇게 쉽게 없어질 리가 없잖아.”

청년이 부상을 입은 것은 사실이니, 그 짧은 시간 동안 회복했다고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이로운 회복력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아니, 그것을 회복력이라 말하는 것이 적합한지도 의문이었다. 그 괴물 같은 속도를 생각하면 회복이라기보다 재생이라는 단어가 더 맞을지도 모른다.

죽어줄 수도 있다고 했지.”

그 말에 소년이 생각한 것은 제 목숨을 버려서 소년이 죽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소년을 위해 그렇게 했으므로.

거기엔 생략된 말이 있거든.”

뭔데?”

“‘보통 사람의 기준으로는.’ 보통 사람의 기준으로는 죽어줄 수도 있다는 거지.”

이해를 못 하겠어. 쉽게 말해줘.”

그때 시종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저건 괴물이랍니다. 도련님. 아무리 다쳐도 죽지 않아요. 그러니 찔리든 부서지든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죠.”

상처는 금세 사라지니까, 특별히 치료가 필요하지도 않고.”

청년도 덧붙였다. 소년의 보랏빛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단정한 얼굴의 청년에게 괴물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은 꺼림칙했지만, 평범한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체질은 확실히 이야기 속 괴물을 연상시켰다. 자신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언제나 제게 붙어있었던 청년이었다. 그동안 지켜봐온 결과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말하는 것도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딱 하나 사람들과 달랐던 것, 무시무시한 재생력만 낯설었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얘기해준 적 없었어.”

징그러워서인가. 알았으면 그만큼 걱정해주진 않았겠지만.”

청년은 자객의 침입으로 산산이 부서진 유리 장식에 시선을 두는가 싶더니, 그 파편을 주워 소년의 눈앞에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제법 깊숙이 파고든 유리조각에도 청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소년에게 피가 흐르는 제 손목을 흔들 뿐이다. 청년이 속으로 60을 세었을 때, 유리에 벤 상처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제 믿겠지? 상처 같은 건 금방 사라진다고. 그러니까 도련님은 위험이 닥치면, 내가 막아주는 동안 몸을 피해.”

쿠로사키는?”

죽지 않는다고 했잖아. 무얼 걱정하는 거야.”

다치게 되잖아.”

소년은 청년의 손목을, 조금 전까지 피가 쏟아졌던 자리를 제 손으로 가만히 감쌌다.

다치면 괴로워.”

네가 괴로운 게 아니지. 나는 이러기 위해 여기에 온 거고.”

나도, 괴로울 거야.”

죽고 싶지는 않았지만, 타인에게 죽음을 떠넘기는 것도 싫었다.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라도 가능한 다치지 않길 바랐다. 그런 소년의 마음을 읽어낸 청년은 가벼이 웃었다.

“‘내 사람이 다치는 건 싫다인가. 그러면 강해지면 돼. 노리는 것조차 위험하다는 판단이 서면 아무도 너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내가 대신 죽어줄 일도 없겠지.”

그렇게 말하는 중에도 청년에게서는 피 냄새가 났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탓이리라. 자신이 넘겨버린 죽음을 상징하는 냄새에 소년의 얼굴은 살짝 굳어졌다.

약한 놈은 강자에게 덤벼들지 못해. 그러니 강해질 때까지는 내게 숨어서든 도망쳐서든 살아남으라고.”

내가 강해질 수 있어?”

, 물론. 너는 아카바니까.”

태어날 때부터 소년을 짓눌렀던 가문의 이름을, 그 무거운 왕관을 청년은 소년에게 다시 씌워주었다. 소년은 입술을 깨물며 청년이 말한 것을 되풀이했다.

아카바, 니까.”

소년은 언젠가 자신이 청년의 말대로 되리란 걸, 혹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이후 쭉 함께했습니다. 한쪽이 다른 쪽을 위해 몸을 던져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지요. 소년은, 아카바 레이지는 가문의 이름에 걸맞게 빠르게 성숙했답니다. 해를 넘길 때마다 어른스러워지는 건 물론이고 키도 훌쩍 자라 매년 괴물과의 체격차를 좁혔죠. 하지만 왜일까요. 괴물은 조금도 자라지 못했어요. 성장이 거의 끝나 키가 더 클 순 없다고 해도, 분위기가 조금씩 더 성숙해질 만도 한데 해가 가도 무엇 하나 달라지는 게 없었지요. 처음 아카바 가에 들어와 자신이 지킬 소년을 만났을 때. 그때의 모습 그대로, 열일곱 정도에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어요.

괴물이 자라지 않은 탓에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가 비슷해 보이게 된 두 사람은 언젠가부터 친구에 가깝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타고난 위치 때문에 대등하게 교류할 아이가 없었던 소년에게 매일 제게 붙어있던 청년은 좋은 말상대였지요. 함께해주는 사람에 대한 친밀감과 자신을 위해 다쳐야만 하는 존재에 대한 미안함은, 아카바 레이지가 괴물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게 했어요.

호의라.

괴물을 위해 자신이 배운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었죠.

제법 대견한 생각을 했군요.

그렇죠. 어른들의 도움 같은 거 없이 스스로 결정한 일이니까요. 아카바의 후계자는 가문의 사람들 몰래 괴물을 자신의 곁에 앉혀놓고 온갖 지식을 익히게 했답니다. 처음에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괴물은 의외로 학습이 빠른 편이었지요. 시간이 흐르자 괴물은 일상적인 대화 외에 제법 수준 높은 대화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소년은 그걸 꽤 기뻐했답니다.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늘어갈수록 아카바 레이지는 더 의욕적으로 괴물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참 재미있죠. 딱 하나, 그 똑똑한 소년이 괴물에게 가르쳐줄 수 없는 영역이 있었던 거예요.

약한 부분이었던 모양이죠?

아니요. 특별히 약한 것도 아니었어요. 워낙 똑똑한 데다 배운 것도 많은 도련님이었으니까요. 그 영역이란 고어였는데, 여느 때처럼 소년이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꼼꼼하게 설명해주던 때 그 전까지는 얌전히 후계자에게 배우기만 했던 괴물이 갑자기 입을 열어 말했답니다. 아니. 잘못 읽었어. 그 의미가 아냐.

정말 그랬나요?

놀랍게도 그랬습니다. 처음 있는 일에 당황한 후계자에게 괴물은 책을 읽어주었지요. 후계자도 아직 낯설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고어로 된 책을 술술 읽었어요. 어떻게 아는 거야? 소년은 물었고 괴물은 답을 피했답니다. 캐물어도 하기 싫은 말은 절대 하지 않는 자라는 걸 알고 있기에 소년은 굳이 더 묻진 않았어요. 대신 그 날 이후 괴물에게 고어를 배웠습니다. 자신이 온갖 지식을 막힘없이 외는 것처럼, 괴물은 고어를 잘 알았으니 그에 대해선 도움을 받기로 한 거예요. 괴물은 후계자에게 수 세기 전의 언어를 제법 상냥하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늘어가면서 소년은 점점 더 괴물에게 정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언제든 몸을 던질 수 있고, 원망 하나 비추는 일 없으며, 아무리 다쳐도 죽지 않고 곁에 있어주는 자. 애착을 품지 않을 수 없지요. 아카바의 후계자는 자신을 섬기는 자 중 괴물을 가장 아꼈고 가장 믿었습니다. 그는 믿는 만큼 솔직해지는 자였지요. 위치가 위치이니 자신을 드러내는 데 신중한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론 알고 있었거든요.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에겐 그만큼 나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나를 여는 만큼 저쪽도 내게 저를 열어보일 것이다. 하는 것을요. 그래서 후계자는 괴물에게 조금씩 자신을 열었습니다. 아마 그 전에도 그 후로도 괴물만큼 아카바 레이지의 신임을 얻은 자는 없었을 겁니다. 모두가 후계자의 방패가 되어주는 것쯤 기대했던 자가 후계자를 완전히 제 편으로 만들고 만 거예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게 언제나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소년은 괴물을 믿었지만 괴물은 딱히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나는 너를 믿어. 라 말하는 소년에게 괴물은 나도 그렇다는 답 대신 이런 답을 돌려주고 말았거든요. 나는 아카바를 증오해. 그때 아카바 레이지는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물려받아 괴물에게 무엇이든 해줄 수 있었던, 막 가주가 된 소년이었답니다.

 

*

 

청년은 제 몸을 휘감은 붕대를 슬그머니 풀기 시작했다. 상처도 남지 않은 곳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것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죽지 않는 괴물이라고 불리며 어떤 상처를 입든 금방 나아버리는 체질인 그에게 치료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상처가 난 부위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것은, 그가 지키는 가주의 고집에 진 것. 자신을 위해 모든 위해를 몸으로 막아내는 청년에게 미안하기라도 한 것인지, 가주는 어차피 금방 회복할 것을 알면서도 다친 곳에 엉성하게나마 처치를 하곤 했다.

무조건 복종해야 할 정도로 깍듯이 섬기는 것도 아니었건만 청년도 가주의 고집을 굳이 꺾으려고 들진 않았다. 그래야 가주의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면, 조금 번거로워도 호의는 받아두는 것이 좋았다. 가주는 가주대로, 자신을 지키는 자에게 최소한의 관심은 쏟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생각이 만난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었다. 청년은 풀어낸 붕대를 치우고 옷을 여몄다. 일에 몰두하느라 청년에게 시선을 주지 못하는 가주이지만, 어차피 그가 무슨 행동을 취하는지는 짐작할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마음은 마음으로 받기로 하는 그들 사이의 룰이다.

이번 놈은 꽤 대담했지. 얕보인 걸까.”

일을 어느 정도 마쳤는지, 가주가 말을 걸어왔다. 청년은 책을 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 세기 전의 고어로 된 책은, 고어에 능한 그를 위해 가주가 마련한 선물. 청년의 흰 손가락이 이미 누렇게 빛이 바랜 책장을 훑는다. 금빛 눈에 비치는 감정은 어쩐지 그리움을 닮아있는 것 같다.

폭탄까지 숨겨서 왔다는 건 나를 죽이려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 희생시킬 생각이었다는 것. 그게 불쾌했어.”

그만큼 그 배후가, 아카바 레이지의 목숨을 끊고 싶었다는 거겠지.”

강해지면 아무도 건드리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쿠로사키?”

네 말대로, 아직은 얕보이는 거다. 아비의 힘으로 과분한 권력을 잡은 어린 것으로 보이는 거야.”

분하지만, ‘아카바의 이름에 힘입은 것이 없진 않지. 가주가 된 지 오래지 않았으니 아직은 확실히 자리 잡지 못했고.”

그래도 곧 증명할 것 아닌가. 네가 아카바레이지가 아니라 아카바 레이지라는 것을. 아카바의 후계자이기에 모든 게 가능했던 어린 도련님이 아니라, 진짜 합당한 힘을 쥔 인간이라는 걸.”

눈은 문장을 빠르게 읽으면서도, 청년은 자꾸만 날아드는 가주의 말을 하나라도 넘기는 일이 없다. 함께해온 몇 년의 시간은 표면적으로는 주종인 그들의 관계를 친구에 가깝게 만들었다. 가주가 그렇게 편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청년밖에 없었고, 친구처럼 편하게 대화하는 것을 용납하는 자도 청년밖에 없었다. 그만큼 가주는 청년을 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가주가 된 이후, 남들 모르게 진행된 여러 중대한 일에 청년도 가담시킨 건 그래서였다.

가주는 펜을 내려놓았다. 책상에서 일어난 그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청년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자연스레 그 곁에 앉으면서, 가주는 청년이 읽는 페이지를 일부러 손으로 가린다. 그제야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단정한 얼굴에 미세한 짜증이 새겨져 있었다.

미안, 방해였지.”

안다면 손을 치워주지 그래.”

아니, 책은 나중이다. 쿠로사키.”

또 무슨 일을 벌일 작정이지.”

제대로 설명을 듣기도 전에 경계부터 하는 청년이, 가주는 우습다. 가주가 된 후 온갖 일에 그를 끌어들인 탓이리라.

아크파이브 시스템을 확장할까 해서.”

청년은 가주의 손을 거칠게 밀어 치우고는 책을 덮었다. 흥미가 생긴 것일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가주는 명랑하게 말을 이었다.

너도 알고는 있겠지. 우리 가문에서 수백 년 전에 시작한 것. 미지의 동력을 이용해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아크파이브 시스템을 기반으로 우리 가문은 차차 번창해온 거야. 가주는 시스템을 넘겨받고, 유지하는 일을 맡는다. 그것만으로도 의무를 다하는 것이지만, 얼마 전에 연구하던 중…….”

청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에 점차 힘이 들어가 입술을 아프게 누르는데도, 깨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주가 이야기하는 것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춤춘다. 단어 하나하나가 괴롭다. 가주의 말이 이어질수록 입술을 세게 깨무는 건 그가 하는 말이 참을 수 없이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쿠로사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거야. 시스템에 손을 대, 세상을 더 안정시킬 수 있을 방법을.”

그래서.”

청년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해서, 오히려 오싹했다. 무엇인지 모를 감정을 차갑게 태우는 것 같았다.

그래서라니? 네가 도왔으면 한다는 이야기인 게 뻔하지 않나.”

네 유능한 연구원들이나 써.”

평소라면 청년이 그렇게 냉랭할 리가 없는데, 새로운 가능성에 들뜬 가주는 그 싸늘함에도 쉽게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퉁명스런 자를 달래듯 싱글거리며 묻는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네 앞에서 먼저 꺼냈다고 생각해?”

네 생각 따위 모른다.”

너라면 나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서지. 쿠로사키.”

무슨 말이든 따를 인간이 필요한 거라면 나카지마나 불러.”

나는 너를 믿어, 쿠로사키. 정말 믿고 있으니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지. 이 계획을 가장 먼저 아는 건 너인 게 당연해. 가장 먼저 끌어들이고 싶은 것도 마찬가지.”

지금껏 이렇게나 열에 들뜬 가주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가. 청년은 자꾸만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가주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함께한 지 몇 년. 일곱 살 어린 소년은 이제 어엿한 가주가 되었다. 성인인 자신과도 키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훌쩍 커버린 소년이지만, 어릴 때부터 차기 가주로 철저히 교육받아 제법 어른스러운 소년이지만 소년 특유의 열기는 그에게도 닥쳤다. 자신이 꽂힌 일을 어떻게든 이룰 수 있다고 믿고, 뛰어들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자리라 모두에게 필요한 일에 이렇게 매달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통의 일이었으면 다소 번거롭더라도 가주를 돕기로 했을 것이다. 가주가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란 그가 언젠가는 이룰 수 있는 일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을 붙어있으면서 서로 가까워진 것은 분명하니, 그냥 호의로 도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이번만은 청년이 힘을 보태줄 수 없었다. 청년은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춘 채 입을 뗐다.

믿고 있단 말이지.”

그래, 그러니 함께하겠다고 말해줘, 쿠로사키. 어떻게든 성공할 테니까.”

거절하지. 아카바가 이어온 것 따위 돕지 않아.”

지금껏 처음 겪은 거절에 안경 너머의 보랏빛 눈이 둥그레진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랐으련만 그 다음에 날아든 말은 가주에게 더욱 가혹한 것이었다.

나는 아카바를 증오해.”

 

*

 

아카바를 증오해. 다른 사람에게라면 모를까, 괴물에게 들을 거라곤 생각도 않았던 말이었지요. 소년은 한참이나 괴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입은 열었지만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어요. 괴물은 괴물대로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답니다.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한 건 소년이었어요. 소년은, 어린 가주는 언제나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던 괴물에게 겨우 한마디를 토해냈지요. .

그래서 설명을 하던가요?

괴물은 별로 답을 하고 싶지도 않은 듯했지만, 자신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소년의 눈을 외면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괴물은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그래서 소년밖에 알 수 없을 이야기를. 그 이야기는 서커스단에서 착취당하기 전부터 시작했어요. 거리를 떠돌 때부터, 아니, 거리에 내몰렸을 때부터, 아니, 아카바가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았을 때부터.

무언가 일이 있었군요.

아카바는 세상을 지키는 가문이라고 하지만 지은 죄도 많았습니다. 괴물은 아카바가 저지른 일의 최대 피해자였죠. 손가락을 접으며 과거의 사건을 하나하나 짚던 괴물은 결국 처음부터 설명하기로 했어요. 수백 년 전, 자신이 딱 아카바 레이지 정도의 나이였을 때 말이에요.

수백 년이요? 그만큼이나 살았단 말인가요.

믿기지 않는단 얼굴이군요. 이해는 합니다. 저도 아카바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면 누군가 이 이야기를 해도 싸구려 동화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여행자 씨. 저는 이야기를 꾸밀 줄 모르는 사람이랍니다. 괴물이 태어난 시대는 정말로 수백 년 전의 과거였어요. 죽지 않는 괴물이라고 했잖습니까. 보통의 인간이라면 열 번도 넘게 죽었을 시간을, 아무리 다쳐도 죽을 수 없는 괴물이 꾸역꾸역 살아왔다고 하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지요. 일곱 살 어린 소년이 어엿한 가주가 될 때까지, 몇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에서 조금도 자라지 않은 괴물이었습니다. 어쩌면 수백 년 전부터 그런 모습이었던 게 아닐까? 그의 시간은 수백 년 전에 멎어, 자라지도 죽지도 못한 채 그때까지 삶을 이어올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소년의 생각이 거기까지 뛰었을 때 괴물은 수백 년 전 아카바의 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아카바의 모든 죄는 한 사람에게서 출발했다고, 괴물은 말했어요. 아카바 레오. 그 이름을 들었을 때야말로 소년은 놀랄 수밖에 없었죠. 아크파이브 시스템을 구축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세상을 위해 시작해 수백 년이 흐를 때까지 세상의 안전을 유지했다는 시스템. 그 때문에 자신의 대에서까지 위인으로 불리는 조상이 무슨 죄를 지었다는 걸까요. 그러나 괴물의 얼굴은 단단히 굳어있었습니다. 아카바 레오라는 이름을 입에 담을 때부터 말이에요.

아크파이브 시스템에 피해를 보았군요.

. 엄청난 피해를 입었죠. 아크파이브 시스템 때문에 괴물은 자신이 살던 도시도, 친구도, 동생조차도 잃고 말았거든요. 처음부터 그 시스템에는 상당한 동력이 필요했습니다. 그 동력으로 쓰인 게, 한 도시 단위의 사람들이라고 하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평화롭게 살아가던 한 도시가 통째로 희생당했어요.

끔찍하네요.

아크파이브 시스템에 휘말린 도시에서 딱 하나 살아남은 것이 바로 괴물이었답니다. 겨우 목숨을 건진 괴물은 아카바 가에 납치된 동생과 시스템에 빨려들어간 사람들을 구하려 계속 아카바 가에 뛰어들었지만 번번이 실패했죠. 그래도 소득이 영 없지는 않았습니다.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된 것인지, 고향 사람들은 어떤 상태인지, 동생의 위치는 어디인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동생을 구해낼 수 있을지도.

당시 세상 사람들이 그 끔찍한 짓에 다 동의했나요?

아크파이브 시스템 말인가요? . 물론이죠. 내막을 알고 동의한 건 아니었습니다만. 세상을 안정시킨다는 아카바 레오의 말에 넘어가고 만 거예요. 그만한 희생이 필요하단 걸 알았던 자는 아마 아카바 레오 본인이 전부였을 겁니다. 그런데 끔찍하기도 하지요. 사실 아크파이브 시스템은 세상을 안정시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었답니다. 한 도시 단위의 사람이 필요했던 건 그 때문이었어요. 그걸 알았을 때 소중한 사람을 전부 잃은 괴물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아카바라는 이름이 그에게 어떻게 새겨졌을까요. 거기까지 들은 아카바 레이지는 자기 가문의 죄를 낱낱이 이야기하는 괴물의 차분한 목소리가 슬퍼졌습니다.

아카바 레오의 또 다른 목적, 아니, 아크파이브 시스템의 진짜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조금 더 과거로 가야 해요. 그에게는 꼭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람이 아무리 간절해도 죽은 자를 되살릴 수는 없지요. 포기했어야 했는데, 그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어떤 짓을 해서라도 꼭 살려내기로 한 거예요. 망자의 부활을 위해서는 산 사람의 생명이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은 생명이요. 아카바 레오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한 도시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했어요. 그곳 사람들을 전부 제물로 바치면, 죽음으로도 놓아줄 수 없었던 소중한 사람을 되살릴 수 있을 거라고 믿고서!

미친 인간이었군요.

그렇죠. 단단히 미쳐있었죠. 기술자였던 그는 사람의 생명력을 추출하는 끔찍한 기술을 개발해, 괴물이 살던 곳의 사람들을 전부 생명력을 뽑아낼 자원으로 삼았어요. 그 무시무시한 작업을 마쳤을 때, 그의 바람은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 레이는 정말로 되살아났어요. 하지만,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대가인 걸까요. 부활은 완전하진 못했습니다. 살아나긴 했지만 그뿐. 대화조차 불가능한,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생명에 불과했어요. 그냥 숨을 쉬는 인형 같았습니다. 그 모습에 그는 다시 불안해졌지요. 그래서 그는, 레이가 절대로 부서지지 않게 하는 안전장치를 만들자고 생각했답니다. 거기에 괴물의 동생이 동원되었던 거예요. 괴물의 동생을 포함한 네 명의 소녀가 납치되었고, 그대로 강제로 잠들게 되었습니다. 그 네 사람은 그가 부활시킨 자와 같은 파장을 가진 사람. 아카바 레오는 네 사람이 살아있는 한 부활한 자가 죽는 일이 없도록 손을 썼습니다. 네 명의 소녀를 동결하는 것으로 그가 되살린 사람은 영원히 살아갈 수 있게 된 거예요. 오싹하지 않나요?

 

*

 

가주는 청년의 손목을 붙잡고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갑자기 손목을 잡혀 끌려가게 된 청년이 무어라 계속 외쳤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가주는 모른다. 청년의 외침은 먹먹한 울림이 되어 가주의 귀를 스쳤을 뿐이다. 가주의 신경은 한 곳에만 쏠려 있기 때문이었다. 아크파이브 시스템. 가문의 자랑이자 이번 대의 가주인 자신이 책임지게 된 중대한 것. 그들이 향하는 곳은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비밀 공간이었다. 시스템 유지에 동원되는 연구원을 제외하면, 가문의 피를 잇지 않은 자가 그곳에 발을 들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청년이 아무리 저와 가까이 지냈다 해도, 가문과는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언제까지나 외부인일 수밖에 없는 그를 시스템 관리실로 잡아끄는 것은 그가 시스템에 대해 털어놓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수백 년 전에 가동하기 시작한 시스템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잘 알고 있는 것도, 누구도 이야기한 적 없는 시스템의 진짜 목적을 입에 담은 것도 수상쩍다. 그러니,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를 데려가서 시스템에 대해 낱낱이 파헤치고, 그가 잘못 알았다는 것을 입증하거나 그의 말이 맞았는지 확인하는 것이 가주의 생각이었다.

생각해보면 신비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상처를 빠르게 회복하는 체질이라고 해도 치명상을 몇 분 만에 회복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어떤 상처를 입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도, 시간이 흘러도 조금도 나이 들지 않는다는 것도. 굳이 파헤치지도 탐구하려 들지도 않았지만 그의 정체가 의문스럽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가주는 수백 년 전에 태어났다는 그의 고백도 별 동요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거리를 떠돌아다니다 오랜 기간 서커스단에서 착취당했다는 자가, 수백 년 전의 고어에 대해선 오히려 가문의 후계자인 자신을 가르칠 정도로 능숙하지 않았던가. 정말로 수백 년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 신비한 존재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시스템은? 만일 청년이 정말로 수 세기를 살았다 해도, 시스템이 만들어지던 때 가문에서 벌였던 일을 전부 기억한다는 게 사실일까. 자신이 모르는 수백 년의 공백을 이용해 멋대로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이야기했던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충격적이었으므로 가주는 차라리 그가 거짓으로 꾸며내고 있는 것이길 바랐다.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던 과거의 일이 전부 자신의 조상이 벌인 일이라면, 그리고 자신을 지켜온 자가 그 피해자라고 한다면.

……이지. 아카바 레이지.”

관리실에 다다르고서야 가주는 자신을 부르는 청년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청년의 손목을 잡고 있었음을 깨닫고 가주는 청년을 놓아주었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흰 손목에 벌겋게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여기엔 무슨 생각으로 온 거냐.”

네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겠다는 생각으로.”

사실이라면 감당할 각오는 되어있는지?”

가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과 꼭 붙어있었던 청년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거짓을 말한 적은 없었다. 속으론 꾸며낸 것이길 바라면서도, 사실일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이라면.”

좋아. 그럼 아크파이브 시스템의 동력이 무엇인지부터 확인하자고.”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먼저 기계장치들 사이로 걸었다. 가문의 후계자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소년보다 앞서 걷는 게 몸에 익은 청년이었다. 가문의 중대한 책임인 시스템 관리에 대해 파헤치는 데까지 그는 앞장섰다. 가주는 바로 그 뒤에 따라붙어 청년과 함께 여러 장치를 살폈다. 가주의 자리를 넘겨받기 전부터 후계자로서 관리실에 들렀던 가주에겐 낯설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걷던 청년이 단단히 잠긴 방 앞에서 멈췄다. 갑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청년에게 가주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출입금지라고?”

청년의 목소리엔 비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왜 출입금지인지는 생각해봤나? 무언가 숨기고 싶은 게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들었는지, 도련님.”

지금까진 생각한 적 없었어. 하지만 아크파이브 시스템의 모든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살펴봐야겠지.”

그러면 여시지요. 아무래도 이 잠금장치, 아카바의 사람만이 손을 댈 수 있게 된 것 같으니까.”

가주는 걸음을 뗐고, 잠금장치 앞에 섰다. 확실히 그에게는 익숙한 장치였다. 이전에도 저택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가문 측에서 무언가 봉인하려 할 때 쓰는 것. 저걸 열 수 있는 것이라곤 단 하나, 가주에게 전해지는 키뿐. 가주는 아비에게 물려받은 키를 꺼내 잠금장치를 열었다. 그 전까지 둘을 가로막던 장치가 스르륵 풀리면서 오랜 시간 열리지 않았을 방이 드디어 열렸다. 가주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자신에게도 낯선 방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을 처음으로 맞은 것은 장치 같은 것이 아닌, 유령처럼 부유하는 사람들이었다. 방의 깊은 곳에서부터 꾸역꾸역 쏟아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윤곽이 흐렸고, 걷기는커녕 헤엄치듯 미끄러지고 있었다. 하나 더 섬뜩한 것은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전부 수백 년 전의 복식이라는 것이었다. 정말로 오랫동안 이승을 떠도는 유령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가주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다시 앞장선 청년은 건조한 물음을 던진다.

어때. 하트랜드의 사람들을 만난 심정은?”

하트랜드라면, 너의…….”

그것은 아크파이브 시스템에 빨려들어갔다던 도시의 이름. 청년의 고향이라고도 했다.

그래, 너를 맞아주는 자들 전부 내 고향 사람들이지. 아는 얼굴도 보이더군.”

왜 전부 이런 상태가 된 거지?”

생명을 빼앗겼으니까. 생명력을 착취당한 인간이 우리처럼 다닐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렇다면 전부, 죽은 건가?”

그렇게 보는 것이 맞겠지. 정확히는 생명력을 빨린 것이니 아직도 여기 어딘가 바싹 마른 저들의 몸이 부패하지도 못하고 쌓여있을지도 모르겠다만.”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청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가주는 알 길이 없다. 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유령 같은 존재가 된 고향 사람들을 만나는 참담한 상황에도 목소리만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안쓰러웠다. 슬픔도 분노도 비참함도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것일까. 그동안 닳고 닳아 폭발적으로 쏟아내지도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쿠로사키, 괜찮나.”

나를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청년은 유령처럼 부유하는 사람들을 헤치고 걸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사실 믿지 않았지? 설마 아카바에서 그런 일을 벌였을까 의심했겠지. 똑똑히 목격한 내가 이야기해줘도 말이야.”

솔직히, 믿기 어려웠지.”

감당할 수 있겠어?”

청년에게 들은 하트랜드 시민의 비참한 결말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한 현재, 청년이 이야기한 다른 것도 사실일 확률은 한참 높아진 상태. 청년의 물음에는 이 다음에 확인하게 될 것도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을 것이다.

감당해야지.”

그러나 가주는 올바른 사람이었다. 가문이 저지른 일이 무엇이든 외면하거나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괴롭고 부끄럽더라도 받아들이고 책임져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청년은 더 묻지 않고 나아갔다. 불행한 희생자를 지날 때마다 가주는 청년에게 들은 아크파이브 시스템의 진짜 목적에 대해 생각했다. 죽은 자의 부활. 단 한 사람의 삶을 위해 몇 명이 저렇게 희생되어야만 했던가. 타인의 생명으로 다시 피워낸 생명이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가주는 조상이 저질렀다는 끔찍한 과오가 그저 오싹하고 불쾌했다.

그렇게 계속 걷던 청년이 멈춘 건 온갖 기계장치가 연결된 채 잠든 소녀들 앞에서였다. 네 명의 소녀 중 한 명 앞에서 그는 무너졌다. 무릎을 꿇은 채 소녀의 곁에서 그녀를 살피는 그의 얼굴엔 처음 보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기쁨과 안타까움과 슬픔, 그리움까지, 평소의 청년이라면 아예 보이지 않거나 거의 드러내지 않는 감정이 한꺼번에 섞인 복합적인 감정. 그가 순식간에 온갖 감정을 쏟아낼 수밖에 없는 대상이라면, 아마도.

그 사람이, 혹시.”

루리.”

청년은 여전히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답했다. 사랑하는 누이의 이름이 참으로 오랜만에 입에서 터져 나왔다. 드디어 만났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시도 끝에, 증오하던 자의 후손을 통해서.

내 동생이다.”

그러면 나머지 셋도, 네 말대로라면 레이가 죽지 않게 하려 납치한 자들인가.”

그래. 내가 알기론 이들 모두 각자 살던 곳에서 끌려와 시스템에 묶인 희생자들.”

그렇게 해서까지 죽은 자를 이 세상에 묶어두려고 했다니, 이해할 수 없어.”

광인의 생각 같은 건 헤아리려 해선 안 돼. 미친 건 미친 것일 뿐.”

그래서 레이는?”

하트랜드의 시민과 네 명의 소녀까지 희생시켜 부활시키고 이 세상에 묶어두고 있는 존재의 이름. 가문이 저지른 죄의 시초를 가주는 찾고 싶었다. 생명을 유지시키는 자들이 그곳에 있으므로 아마 그 근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겨우 목숨만 붙어있는 무력한 존재가 멀리까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가주가 주변을 돌면서 레이로 추측되는 존재를 찾아 손을 뻗었을 때.

물러서!”

동생의 곁에 있던 청년이 무서운 속도로 일어서 가주를 막아섰다. 다음 순간 가주의 눈앞에서 청년의 살점이 흩어졌다. 피와 살점이 튀는 것을 보고서 가주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놓였는지 깨달았다.

멍청한 놈. 딸 하나 살리겠다고 저 많은 사람들을 갈아버리는 인간이 딸에게 손을 대게 할 것 같아?”

다쳐도 순식간에 재생하는 인간이기에, 청년은 제 상처는 돌아보지도 않고 가주에게 으르렁댔다.

쿠로사키, 몸이.”

네 몸이나 신경 써. 무슨 트랩이 있을지 모르니까.”

청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다른 공격이 날아들었다. 침입자를 무조건 공격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인 모양이었다. 청년은 가주의 팔을 꽉 잡고서 제 몸으로 공격을 막으며 가주와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그동안 청년의 몸은 수없이 찢기고 부서졌으나, 청년은 가주를 잡은 손만은 절대로 풀지 않았다. 지켜야 할 자를 놓치지 않고 안전하게 탈출시키기 위하여.

그래서, 확인한 소감은?”

빠져나온 지 오래지 않아 상처를 회복한 청년이 처참하게 찢긴 옷을 벗으며 물었다.

바로잡아야겠다.”

무엇을?”

당연히, 시스템이지. 사람들의 희생을 뿌리로 유지되는 시스템을 두고 볼 수는 없어.”

그러면 가문의 뜻을 거스르는 게 될 텐데?”

잘못된 것을 알고도 그대로 두는 건 죄라고 배웠다.”

청년의 심술궂은 말을 가주는 담담하게 받아쳤다. 청년과 함께 관리실을 살핀 것으로 확실해졌다. 아카바는, 자신의 가문은 끔찍한 죄를 범했다. 그리고 후손들마저 무지 혹은 암묵적인 동조로 수백 년간 그 죄를 이어왔다. 진상을 알아챈 자신의 대에서 죄를 끊어야 한다. 잘못을 더 이어가지 않기 위해서. 이제라도 희생자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서.

그러니 고쳐야지. 가문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더라도.”

가문의 문제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아크파이브 시스템을 통해 이득을 보는 쪽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들이 순순히 시스템을 부수게 두진 않겠지. 가주인 네가 나선다 해도.”

각오는 되어있어.”

잘 생각했어. 생명 에너지가 떨어지면 언젠가 하트랜드와 같은 희생양이 또 생길지도 모르고.”

상처 하나 남지 않은 몸을 새 옷으로 덮으며 청년은 말했다. 그 목소리엔 엷은 만족이 묻어나왔다. 가주는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가문의 과오를 인정했고, 고치려는 의지까지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이 대에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백 년이나 이어온 상실의 시간도, 아카바에 묶인 희생자들의 고통도. 가주는 한 번 결심한 건 끝까지 가져가는 데다 바라는 것을 실현할 판단력도 능력도 있는 자이니 기대를 걸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잠깐이나마 청년이 희망적인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 가주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쿠로사키.”

말해.”

아카바를 증오한다면서 왜 지금까지 나를 지켰지?”

아카바를 증오한다는 말은, 처음에는 그저 충격적이었다. 다음에는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헛된 것이었던가 싶어 마음이 쓰리기도 했다. 괴로웠던 것은 결국 청년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가주에게 청년은 단순히 위해를 막아주는 방패로 그치는 게 아니라, 아군이었고 친구 같은 존재였으므로. 하지만 이유를 듣자 괴로움은 걷히고 오히려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나 증오하던 자의 후손을 지키며 청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그 시간을 넘겨왔을까.

믿음을 얻으면 죽일 기회가 늘어나니까.”

지금까지도 그래?”

그렇다고 해도 가주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삶의 모든 것을 앗아간 가문을 어떻게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후계자의 신임을 얻은 후 손쉽게 죽일 생각을 지금까지 품어왔다고 해도 원망할 수 없다.

네가 시스템을 부숴준다면 그럴 이유가 없어지겠지.”

다행히도 청년의 말은 그가 각오한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완전한 부정은 아니지만, 풀어갈 기회는 있다.

그리고 나는 아카바를 증오하지 아카바 레이지를 증오하는 건 아니거든.”

자신이 지켜봐온 소년은, 아카바의 이름을 가졌지만 아카바 레오처럼 악랄하진 않았다. 옳은 길을 가려고 노력했고 잘못은 회피하지도 외면하지도 않았다. 고향과 동생을 짓밟았던 자와 그에 동조했던 자들이 속한 가문은 증오하더라도, 지금의 가주마저 증오할 이유는 없었다. 청년의 답이 희망적이었는지, 가주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번졌다.

그것 참 다행이야.”

 

*

 

괴물에게 가문이 벌인 일의 진상을 들은 소년은 아크파이브 시스템을 자기 대에서 끝내기로 했습니다. 그래야 죄의 고리를 끊고, 괴물과 그 고향 사람들에게도 사죄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아크파이브 시스템이 세상의 균형을 맞추어 안정을 가져온다는, 수백 년간 뿌리내린 믿음을 잘라내는 것이 우선이었답니다. 아카바 레이지는 새로운 시스템을 고안해 발표했고, 아크파이브 시스템의 결점을 보완한 것이라며 조상이 시작한 시스템을 차차 버릴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지만, 아카바의 사람들은 대부분 반대하고 나섰죠. 아카바와 연결되어 오래도록 이권을 챙겼던 이들 또한 어린 가주의 결정을 달가워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멈출 아카바 레이지가 아니었지만요.

한편 괴물은 자주 시스템 관리실에 숨어들었고, 레이를 보호하고 있는 자동방어 시스템을 해제할 방법에 대해 연구했지요. 다쳐도 금세 회복하는 자신의 몸을 자주 부숴가면서요. 레이를, 레이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는 네 명의 소녀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 그것이 괴물의 최대 관심사였어요. 아크파이브 시스템은 자동방어 시스템을 무력화시키고 그녀들을 꺼내야만 완전히 멈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들이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힘쓸 때, 그들을 가로막는 적이 나타났습니다. 아카데미아라 스스로를 칭하는 자들이었어요. 아카데미아는 아카바 레오의 유지를 받든다며 그의 공로인 아크파이브 시스템을 유지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지요. 레이는 세상을 위해 희생한 구원자이며, 그녀와 같은 힘을 가지고 태어난 네 명의 성녀가 그녀를 도와 세상을 안정시키고 있는 것이 아크파이브 시스템이라면서요.

무슨 신앙 같군요.

그렇지요. 아카바 레오는 아크파이브 시스템의 마지막 안전장치로, 종교적인 믿음을 빌려와 언제나 제 편이 되어줄 집단을 세상에 만들어둔 거예요. 교리라고 할 것은 조잡하기 짝이 없었지만, 수백 년간 폐쇄적인 믿음을 이어왔다는 건 꽤 무서운 일이었답니다. 맹목적으로 시스템을 옹호하고 그걸 위해선 몸을 던지거나 아카바 레이지 측의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아카데미아가 사람들에게 아크파이브 시스템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불안에 빠트리곤 하자 아카바의 가주는 슬슬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준비한 게 있었던 모양이지요?

물론이죠. 그는 아카바니까요. 아카바란 포식자의 이름이잖아요. 그 역시, 자신을 위해 싸워줄 자들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예전부터 키워오고 있었거든요. 그의 전사들, 랜서즈는 아카데미아가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하는 것을 막고 아카데미아의 위협으로부터 그의 사람들을 보호했답니다. 그렇게 자꾸 랜서즈에 가로막히던 아카데미아는 괴물이 몸을 부숴가며 시도하던 자동방어 시스템 해석이 끝나갈 즈음 결국 끔찍한 선택을 하고 말아요.

싫은 느낌이 드네요. 희생자가 나올 것 같은.

결과적으론, . 그랬어요. 아카데미아는 하트랜드의 시민들, 그들 편에선 순교자라 부르는 시스템의 희생자가 역할을 다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수백 년이나 지났으니까요. 그래서 레이의 힘이 떨어져 아카바 레이지 같은, 시스템을 부정하는 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한 거예요. 구원자 레이와 네 명의 성녀가 제대로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순교자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결론이었습니다.

제물을, 찾은 거죠?

끔찍하게도요. 희생자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순교자가요. 결국 아카바 레이지는 랜서즈를 통해 아카데미아를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괴물 또한 어서 시스템을 중단시키기 위해 시스템 해석을 쉬지 않고 이어갔고, 오래지 않아 자신이 지키는 소년에게 해석을 마쳤음을 알렸지요. , 괴물의 이야기도 이제 끝이 보이는군요. 연구가 끝난 것에 위기감을 느낀 아카데미아는 시스템을 수호하기 위해 발악했고 랜서즈는 그들을 막아섰으며, 아카바 가의 연구원들은 괴물의 해석 결과를 바탕으로 자동방어 시스템을 종료했답니다.

그 다음은 해피엔드인가요? 거기까지 가서 아카바 레이지 쪽이 실패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렇죠. 해피엔드가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죠. 실제로, 아카바 레이지 측이 승리했답니다. 자동방어 시스템이 종료되자 레이와 네 명의 소녀는 수백 년간 자신을 옥죄던 강제 생명 연장 장치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녀들을 바탕으로 한 아크파이브 시스템이 종료된 건 물론이에요. 하트랜드의 희생자도 수백 년 만에 안식을 얻었답니다. 하지만 완전한 해피엔드는 아니었어요. 레이와 그녀를 위해 동원되었던 소녀들은 너무 오래 연결되어 있었던 거예요. 레이의 죽음은 그녀를 세상에 묶어두었던 소녀들에게도 퍼졌습니다. 아카바 레이지는 자신의 조상이 낳은 희생자가 빼앗긴 삶을 돌려받는 게 아니라 죽음으로 안식을 찾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어요.

그래도 강제로 잠든 채 타인을 위해 죽지도 못하는 삶에선 해방되지 않았나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것으로 끝이었다면 아카바 레이지도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고 안타까움을 누를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무언가 더 있었군요.

아카데미아가 무너지고 아크파이브 시스템이 붕괴하는 순간, 그는 자신에게 가문의 죄를 끊게 해준 자와 기쁨을 나누려고 했답니다. 언제나처럼 제 앞에 선 괴물에게, 이제 끝났다고 말하며 승리를 즐길 참이었죠. 그때, ,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레이의 죽음과 함께 동생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본 괴물이 그 자리에서 쓰러진 거예요.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너무도 무력하게. 아카바 레이지는 괴물에게 다가섰고, 쓰러진 괴물을 일으켰습니다. 다음 순간 그는 괴물의 텅 빈 눈과 마주하고 말았답니다. 괴물의 모든 것이 정지해 있었습니다. 참 이상하죠. 죽지 않는 괴물이, 죽어버린 거예요. 그가 일곱 살 소년이었을 때부터 그에게 따라붙었던 청년이, 어떤 상처도 순식간에 회복했던 무시무시한 괴물이, 그의 친구가, 그가……가장 믿었던 아군이. 그것이 믿기지 않아 아카바 레이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괴물을 안고 있었습니다.

왜 죽게 되었나요? 우연? 아니면 시스템이 종료된 것과 관련이 있나요?

나중에 알았지만, 괴물이 수백 년 동안 살 수 있었던 건 누이 덕분이었답니다. 남매는 삶을 공유하는 존재였거든요. 동생의 시간이 동결되어 죽을 수 없는 존재가 되자 그 오빠인 괴물도 죽지 못하고 긴긴 시간을 살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결국 시스템이 종료되면서 동생과 함께 죽은 거네요.

그래요. 아마 괴물은 시스템을 조사하던 중에 알아챘을 겁니다. 시스템이 중단되어 레이가 죽으면 동생을 비롯한 네 명의 희생자 역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니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그래도 시스템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 거겠죠. 하트랜드의 희생자가 안식을 찾게 하도록. 그렇게라도 가여운 동생을 해방시키도록. 하지만 아카바 레이지에겐 어땠을까요. 자신이 죽을 때까지 결코 떠나지 않고 있어줄 거라 생각했던 자의 죽음이란. 아카바 레이지는 그 후로 자신을 위해 죽어줄 사람을 끝까지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 사람, 결국 암살당했던가요. 젊은 나이에. 방패가 될 사람이 있었다면 달랐었겠지요?

글쎄요, 그랬다고 아깝게 죽지 않았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살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아크파이브 시스템을 중단시킨 후 몇 년 만에, 아카바 레이지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인간으로 자리를 굳혔습니다. 가문의 그림자니 뭐니 수군거리던 사람들마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어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며 정계에 들어서고부터는 민중의 지지까지 얻게 되었고요. 그런 그를 다들 함부로 노리지 못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괴물의 죽음 후 방패가 되어줄 사람을 구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 그에게 주변 사람도 강제하진 못한 것일지도 몰라요. 설마 아카바 레이지를 노릴까. 세상의 눈이 있는데. 그렇게 하루하루 넘겨버린 거예요. 그는 무장도 않고서 병기가 가득한 전장으로 나선 셈이었는데.

어느 날 한 청년이 아카바 레이지를 찾았습니다. 그가 한참 반대파에 맞서 자신의 정책을 내세울 때였죠. 청년은 그와 즐겁게 대화를 했고, 떠나기 직전 돌연 그에게 치명상을 남겼죠. 즉사하진 않았습니다만 그는 결국 그 날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어요. 그 후론, 아시는 대로. 아카바 레이지의 죽음은 민중의 분노를 불렀고, 그에 맞서던 반대파는 오래지 않아 처참하게 패배했지요. 그가 죽기 직전까지 내세웠던 정책도 빛을 보았고요. 결과적으로, 안타깝지만 아주 나쁜 죽음은 아니게 된 셈이에요. 그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뜻이 승리했으니까.

그 때문에 음모론도 돌지 않았던가요. 암살범이 아직까지도 잡히지 않았단 것도 수상쩍고. 사람의 죽음에 의심을 붙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글쎄요, 계획된 죽음까진 아니었을 거예요. 저처럼 그의 유언을 들으면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겁니다. 다만 아카바 레이지가 운이 나빴고, 하필 과거의 괴물처럼 그에게 닥치는 위험을 막아줄 자가 없었고, 그가 방심했을 뿐이죠.

방심했다고요?

. 추측입니다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 자를 별 의심 없이 맞이한 건 그가 답지 않게 방심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를 죽인 자, 금빛 눈을 가졌거든요. 그를 지켜주었던 괴물이 딱 그런 눈을 가졌어요. 괴물이 죽은 후로 자신을 위해 죽어줄 사람 같은 걸 만들지 않았던 그가, 괴물을 닮은 눈을 가진 자에게 조금 느슨해졌다고 해도 놀랍진 않겠죠. 결과는 자신의 죽음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가여워지네요. 그의 유언. 참 별 것 아니었거든요. ‘쿠로사키, 나를.’

의미를 모르겠네요. 쿠로사키? 그게 뭐죠?

굳이 알 필요는 없는 것의 이름이요. 아카바 레이지에겐 소중했겠지만, 그와 가까이 지내던 동료들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랍니다.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영웅이라고까지 불렸던 그 사내가 마지막 순간 고작 그런 걸 불렀다니. 어지간히도 미련이 남았던 모양이에요.

잠깐만, 혹시 쿠로사키라는 게.

이야기는 여기까지. 질문해도 답하지 않을 테니 생각한 건 그냥 넣어두세요. 시시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너무 지루하진 않았길 바라요. 시시하긴 해도 제법 아끼던 이야기였으니까요. 혹 지루했더라도, 영웅으로만 그려지는 그 사람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를 기억해주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처음에도 말했지만, 저는 그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서요. 세상에 그 사람이 그저 뛰어나서 일찍 진 게 아까운 인재가 아닌 아카바 레이지로 남았으면 하거든요.

그럼, 다음번에 만날 때는 새로운 여행지 이야기를 기다릴게요, 여행자 씨. 오늘도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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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