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물가에 선 아내의 뒷모습을 보았다.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던 아내는 어느 순간 천천히 물속에 발을 담근다. 그 다음은 누군가 바닥에서 끌어당기기라도 하듯 점점 물에 잠기는 일이었다. 몇 발짝 밖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사내는 아내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뗄 수가 없다. 목소리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속에서 말라붙었다. 아내의 가슴까지 차오른 물은 계속해서 그녀를 삼킨다. 몸이 마비되기라도 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체념했던 것인지. 아내는 위험이 닥쳐오는데도 물속에서 꼼짝도 않았다.

이대로는 그녀가 영영 떠나버릴 것이다. 끝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내버려두고, 사랑했던 것이 묻힌 곳으로. 사내는 두려움에 미칠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지금의 상황을 납득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애원한다고 곁에 남아주지도 않는다. 내내 부유하다 언젠가 사라질 사람이다 그녀와 결혼한 때부터 수없이 부정하려 했던 생각이 왜 이 순간 선명해지는지.

거기서 아내를 향해 의문이 싹튼다. 왜 물에 들어갔어? 왜 벗어나려 하지 않아? 그렇게 시작된 의문은 점점 번져가, 마침내 가장 괴로운 의문을 사내에게 안긴다. 왜 이런 때까지, 당신은 내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아?

사내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계속 무력한 관찰자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 아내가 자신을 거부하고 있어서인 것만 같았다. 결혼을 택했으면서도, 가정을 이루고 수년간 살았음에도 처음부터 그녀의 삶에서 자신은 타자일 뿐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도피를 선택했을지도 모를 이 순간 자신은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이제 수면 위로는 아내의 머리밖에 보이지 않는다. 녹색의 머리카락도 점점 흐릿해진다. 견딜 수 없어, 사내는 입모양으로나마 말을 만든다. 제발 돌아봐줘. 내가 끼어드는 게 싫다면, 한 번만 내게 시선을 줘. 소리로 터지지 못한 말이 그녀에게 닿았을 리 없다. 그런데도 어쩐지, 그녀가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아내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 그녀의 답이 머릿속을 울렸다.

건방지네.

웃음조차 배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는, 각오한 것보다도 훨씬 무거웠다.

사내는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 다행히 그가 있는 곳은 아내를 삼킨 물가가 아니라 그의 방이었다. 온 세상이 어두컴컴한 것을 보면 아직 새벽인 모양이다. 가벼운 두통과 함께 피로가 밀려왔지만 뒤숭숭한 꿈 때문에 다시 잠을 청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테이블에 손을 뻗어 익숙한 감각을 찾아 안경을 집었고, 방의 불을 켰다. 부부가 쓰는 침대 한쪽에 사람의 흔적이 없는 게 거슬렸다. 며칠 전 있었던 사고로, 아내는 안정을 찾을 때까지 집 안에 따로 마련한 공간에서 지내게 되었다.

아내의 사고 이후 사내는 계속 불길한 생각에 시달려왔다. 혹시 구조가 늦었던 것은 아닐까. 당장 드러나는 곳은 없어도 그녀의 몸 어딘가에 무리가 가진 않았을까. 그 중 가장 끔찍한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만일 그것이 사고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스스로 위험에 뛰어들었다면?

사내는 언제나 아내가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녀가 저항군으로서 전장에 선 때부터, 승패가 뻔히 보이는 싸움을 간단히 끝낼 때도,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도시에서 평범한 취미에 몰두하는 모습에도. 때로는 그녀를 안으면서도 그랬다. 사랑해. 그녀에게 자주 던지는 말은 사실 애원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제발 이곳에 있어. 사라지지 말아줘. 따위의 말이 숨겨진. 사내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말할 때면 아내는 깔깔거리며 받아쳤다. 거짓말.

그녀가 자신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다. 그녀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오래도록 겁냈던 것이다. 아내를 세상에 매어둘 수만 있다면, 사내는 그녀가 진심으로 받아주지도 않는 고백 따위 평생 할 수도 있었다. 무엇에라도 매달리고 싶을 정도로 사내는 절박했고 언제라도 사라질 것처럼 아내는 위태로웠다. 처음 만난 때부터,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 지금까지도. 두 사람의 결혼 전부터 아내를 지켜봐온 어머니는 아들의 두려움을 일찍이 눈치챘던 것 같다. 언젠가 어머니는 며느리에 대해 이야기하던 끝에 그에게 뜻 모를 말을 던졌다.

[레이지는 언제나 그 애를 유리 세공품처럼 다뤄요.]

[소중히 다룬다는 의미입니까?]

[물론 소중히 대하죠.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는 건 보석처럼 중히 다룬다기보다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에 가까워요.]

다음 순간 어머니는 평온한 목소리로, 그의 가장 깊은 곳을 찔렀다.

[그 애가 부서질 것 같나요?]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전장에서 아내는 최후까지 살아남았다. 자신의 열세마저 이용해 적을 섬멸하는 그녀의 전술은 처음엔 위태로워 보였으나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동료까지 구해냈다. 세상에선 그렇게 강한 사람이라면 전쟁의 상처를 안고도 잘 살아갈 거라 생각했겠지만 사내는 오히려 전쟁이 끝난 후의 그녀가 더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오로지 전쟁을 끝내고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살아온 사람이, 그 모든 목적이 종료된 때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그것도 타의로, 불완전하게 끝났을 경우에. 그때야말로 아내의 내면은 텅 비어버렸을 것이다.

그녀가 결혼하면서 쓰게 된 이름을 떠올리면 불길한 생각은 더 짙어진다. 아카바 루리. 성씨는 자신에 맞췄다고 해도 이름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루리라는 이름은 본래 그녀의 것이 아니라, 실종된 동생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택했다는 건 돌아오지 못한 사람을 덮어쓰겠다는 뜻이다. 평생 죽은 시간을 끌어안고 사는 셈이다. 그녀의 삶 자체가 거대한 무덤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처참한 삶에 사내는 차마 말을 얹을 수 없었다.

과거에 잡혀 있으니 현재를 사랑할 수 있을 리 없다. 욕망조차 희미하다. 살짝만 잘못 건드려도 아내의 연약한 외벽이 허물어져 그녀란 인간이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아내는 이 세상에 남아있지 못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떠나, 숨은 붙어있어도 살지 않을지도 모른다.

수없이 생각한 괴로운 결말을 애써 흩어버리고, 사내는 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었다. 고요한 집에 발소리가 울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목적지는 아내가 있는 곳. 곁을 지키는 사람이 없길 바랐으나 다행히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아내뿐이었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서자 희미한 불빛 아래 잠든 아내가 보인다. 창백한 피부와 표정 없는 얼굴에 한동안 시선이 머물렀다.

며칠 전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아내는 다행히 위험한 단계는 지났으나 쉽게 회복하지는 못했다. 잠깐 깼다가 오랫동안 잠드는 것의 연속이었다. 깨어있는 동안도 거의 침대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나마 사내는 깬 모습을 보지도 못했다. 그가 진득하게 붙어있을 땐 내내 잠든 채였고 자리를 비운 때나 얼마간 깨어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과거부터 그녀와 같은 시간을 산 적이 없었던 사내에겐 약간 씁쓸할 뿐 슬픈 일은 아니었다. 본래부터 약한 아내의 몸이 의식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가장 컸다.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잠에서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기절하듯 잠들어 아무것도 펼쳐지지 않는 것일까.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행복한 기억에 빠져있을까. 그게 아니면, 어쩌면. 무의식의 영역에서조차 그녀에게 지독하게 악의적이었던 현실에 갇혀있을까. 전쟁이 끝난 때, 그녀가 그토록 구하려 노력했던 사람들은 사라졌다. 사소한 유품도 흔적도 없이,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돌아오지 못하리란 걸 모두가 알았다. 아내만이 기를 쓰고 실종이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아마도, 그들을 완전히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서 아내의 삶에서 그들의 공백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내의 하나뿐인 동생과 가장 가까운 친우였던 그들은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였으므로. 영영 단절된 존재를 안고 살기에 그녀는 지금껏 휘청거렸다. 현재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머릿속 사랑하는 이들의 묘지에만 머무르고 있다. 아내의 체온을 느낄 때도 사내는 그녀가 제 품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존재 자체가 현실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유령을 사랑하게 된 모양이지.

약혼했을 때 주변에서 던진 말은 때때로 그의 머리를 친다. 그러나 사내는 유령 같은 인간임을 알기에 그녀에게 청혼했다. 그녀의 마지막 목적지가 되고 싶어서. 적어도 그녀를 이 세상에 남겨두고 싶어서. 그러한 바람에 연민이 깔려있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으나, 사내는 자신의 행동을 책임감으로 설명하고 싶었다. 그녀의 삶을 비극으로 만든 건 자신이 아니라 해도, 그녀의 불행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제 부족함 탓이니.

나를 어떻게 써도 좋아. 승리하기만 하면 돼.

전장에서 사내의 전사로 싸웠던 아내는 걸핏하면 그렇게 말했다. 그럴 때마다 사내에게 향하는 호칭은 리더.’ 사내의 이름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리더라는 호칭을 고집했다. 스스로를 무기로, 그를 지휘관으로만 고정시키려는 듯. 그녀의 고향을 짓밟은 침략자가 자신의 아비였다는 것 때문에 사내는 저에게 향하는 그녀의 기대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에게만은 꼭 해피엔딩을 주고 싶었는데. 전쟁은 그들 쪽의 승리로 끝났지만 아내는 행복해지지 못했다. 어쩌면 그 전까지 품었던 희망조차 찢겨, 평화 속에서 더 불행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정말로 행복해졌다면, 전쟁이 끝나고 이곳에 남아주었을까? 적의 아들을 남편으로 선택했을까? 아무래도 모든 게 실패의 결과인 것만 같다. 그리고 그에는 자신의 책임이 컸다. 어떻게든 상황을 바꿔보려고 노력해왔지만, 사내는 언젠가 그녀에게 해답이 될 수 있으리란 자신은 없다. 가면 갈수록 그녀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라 그녀에게 가정이란 짐을 안겨주는 것일지도 모른단 자조가 짙어질 뿐.

그녀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준 것이 정말 잘한 일이었는지.

수없이 질문을 던져도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답을 알지 못하고, 답을 해야 할 사람에겐 한 번도 소리 내어 묻지 않았으므로.

한참이나 곁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어도 아내는 잠에 빠져있을 뿐. 아내의 위태로움에, 그녀가 그림자처럼 드리운 무기력함에 불안해한들 잠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내는 차라리 자신이 관여할 수 없는 시간이 그녀에겐 휴식이라도 되길 바라기로 했다. 어디에도 시달리지 않고 무엇도 그리워하지 않고 회복하기를.

부디 좋은 꿈을. 사내는 아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등을 껐다.

 

*

 

아내의 사고로 꼬여버린 것이 있었다. 사내의 일상은 사고가 일어난 날을 기점으로 혼란에 빠졌다. 사고 직전 아내가 남긴 평범한 흔적조차 균열의 암시로 느껴졌고, 지나치게 예민해진 탓에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를 반복해서 했다. 집을 나서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의 대화가 불분명한 소음으로 들리거나 서류를 들여다보던 중 갑자기 글자가 꿈틀거리는 일도 있었다. 당장 업무에 큰 지장이 가진 않았으나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사내는 불편했다. 모든 것이 삐걱거리는 것만 같은데, 그 중심엔 아내가 있다.

감추려고 노력해도 사내를 지켜봐온 사람이라면 알 수밖에 없을 흐트러짐이었다. 측근은 그에게 쉴 것을 돌려서 권유하기도 했지만 사내는 그럴 이유가 없다며 거부했다. 아내가 금빛 눈에 사내를 담고 시시한 말 한마디만 꺼내도 나아질 일인데 그 평범한 것이 이뤄지지 않아서 사내는 계속 헤맸다. ‘정상적인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회사에서 고집스레 제 자리를 지키고는 돌아와서 한참이나 아내의 손만 잡고 있었던 날도 있다. 그녀의 손이 물에서 막 안고 나왔을 때만큼 차갑지 않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언제든 사라질 것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아내는 줄곧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었다. 때로 멀어지는 것 같아도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거리를 유지했다. 이렇게 며칠씩이나 제대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녀의 가장 위태로운 시기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내에게도 두려운 일이었다. 한편으로 사내는 지금의 사건이 언젠가 생길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녀를 과거에서 끌어오지 않는 한, 그녀는 죽은 세계로 돌아가게 되어있다고. 그녀가 소망한 것이건 그렇지 않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아내를 발견한 곳이 그녀의 고향이었다는 점이 사내는 계속 신경이 쓰인다. 그녀에게 고향은 여전히 사고를 지배하는 곳이겠지만 사내에게는 아버지의 죄를 상징하는 땅이며 음울한 폐허일 뿐이다. 전쟁이 끝나고 복구가 진행되어 처참했던 때의 흔적은 많이 벗었다고 하나, 사내는 그 껄끄러운 도시를 굳이 방문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그곳에서 아내는 위험에 빠진 것이다. 사내가 바로 위기를 감지할 수 없는 땅에서.

아내가 오랫동안 거리를 둔 고향에 다녀오겠다고 했을 때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어야 했을까. 최근 들어 방황하던 아내에 조금 더 신경을 썼다면 달랐을까. 고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오기로 한 그 날, 시간이 생겨 아내를 데려오려고 그녀의 친구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아내의 마지막 목적지를 듣고 찾아가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는 아내를 영영 잃었을지도 모른다. 하필, 그곳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그녀 자매가 자주 다녔던 물가라고 했다. 퇴색된 추억밖에 없는 곳에, 그녀는 왜 빠져있었던 것인지.

[슌은 지금 어때요?]

[아파요? 혹시 다쳤나요? 연락이 안 되는데 아무래도 불안해서.]

통신기에는 아내의 친구가 보낸 메시지가 자꾸만 뜨고 있다. 매일 몇 건씩 오는 것을 확인하면서도 답은 하지 않는다. 아내의 목적지를 알려준 자였으니, 상대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을지도 모른다. 사고 당일엔 아내의 상태를 살피는 것만으로 바빠 사정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 후로는 상대에게 사고에 대해 설명하고 아내에게 위험한 낌새가 보였는지 확인할지, 그대로 삼키고 있을지 계속 고민하는 사내였다.

연락을 한다면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언젠가부터 뜻 모를 말과 장난스러운 태도로 속내를 감춰왔고, 부부로 함께해온 사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 사람이 너무도 적은 대신 한 번 마음을 열면 중히 여기는 아내이기에 사내는 그녀의 옛 지인에게 기대를 걸게 된다. 어쩌면 속에 감춰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혹은 그 앞에서만은 무방비해진 것은 아닐까. 당신의 과거에 질투가 나. 당신은 그 시간에만은 상냥하지. 아내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을 때, 그녀가 웃어넘기면서도 부정은 하지 않았던 것을 사내는 기억한다.

그러나 사내는 자신이 보지 못한 그녀에 대해 듣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만일 아내가 스스로 뛰어든 것이라면? 결혼생활은 악몽이었고 이제 더 버틸 힘도 없다고, 그나마 신뢰하는 사람에게 털어놓았다면? 게다가 아내에 대해 무엇이라도 들으려면 일단 사고부터 꺼내지 않으면 안 된다. 떠올릴 때마다 괴로운 기억을 타인에게 명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말은 조심스럽지만, 만났을 때 너무 지쳐 보였는데 혹시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요?]

한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자신의 품에 무너져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눈물만 쏟던 아내가 눈앞에 그려졌다. 어떤 불행에도 쓰러지지 않고 차라리 냉소하던 사람이, 완벽하게 무력해졌던 때.

그녀는 정말로 견딜 수 없게 되었던 것일까. 사내는 메시지를 다시 읽고서 얼마간 고민했다. 그녀를 뒤흔든 사건을 아는 자신이, 그녀가 안은 상처의 무게를 알고 있을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할지. 메시지를 노려보던 사내는 결국 통신기를 눈앞에서 치웠다. 그의 시선은 책상에 올려둔 아내의 사진에 머물렀다, 가족과 함께 가고 싶었던 휴양지 엽서에 꽂혔다가, 스크린으로 향했다.

디스크 자꾸 울리는데 연락 받아야 하는 거 아냐?”

스크린에 떠오른 청년이 조심스레 물었다.

당장 답할 건 아니야.”

사내는 잠깐 얼굴에 걸쳤던 감정을 지우며 답했다. 아내의 사고로 꼬여버린 것은 자신의 생활만이 아니었다. 청년과 잡은 약속마저 엉망이 되었다. 청년은 과거 사내가 결성한 정예병의 일원으로, 아내와 함께 싸웠기에 부부 양쪽과 연이 있는 사람이었다. 부부와 셋이서 만나고 싶다는 청년의 제안은 그가 고른 날짜에 아내가 고향으로 향하며 한 번 꼬였고, 그 후로는 아내의 상태가 좋지 않아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아무래도 청년이 실망할 것 같아 둘이서라도 만날 것을 제안했더니 다음을 기약하자는 답이 돌아왔다.

정신없을 텐데 괜히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그냥 편하게 얘기만 조금 하자. 청년은 며칠을 기다린 끝에 그렇게 말했다. 프로로 활약 중인 그도 곧 중대한 일정이 있어 더 기다리기는 어렵다고 했다. 각자의 이유로 작은 일에 신경 쓰기 힘든 두 사람이 타협한 결과가 이것. 화상으로 짤막하게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만남은 사정이 될 때 다시 잡기로 했으니 나쁠 것은 없었다.

이제 곧 출국이야. 바쁘네.”

돌아오는 시점은?”

, 일단 한 달은 있을 것 같아. 그때쯤이면 네 아내도 회복하겠지. 이번엔 쿠로사키를 꼭 만나고 싶었는데.”

그러고 보면 전부터 청년은 꾸준히 아내와 어울리려 들었다. 간간이 사내와 만날 때도 그녀를 데려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슬그머니 흘리곤 했다. 정작 아내에게 직접 연락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사내가 지적하면 곤란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러면서도 목적을 포기하는 일은 없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사내에게서 청년의 뜻을 들을 때마다 가벼이 넘길 뿐 희망적인 답변을 돌려주지 않았다. 가장 나쁜 시기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이라, 조금만 만나면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왜 슌을 만나려 하는 거지?”

바꾸고 싶은 거야.”

무엇을.”

관계를. 쿠로사키 슌이라는 이름을 버린 사람을 아직도 쿠로사키라고 부르고 있는 거 우습지 않아? 난 네 아내와 친해질 기회가 없었어. 나를 받아주질 않았거든. 왜인지는 짐작이 가지만 언제까지나 이런 관계로 남고 싶진 않아서.”

지금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사내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들이 취했던 관계 중 유효한 것은 없고, 아내는 관계에 새로운 이름을 만들 의사가 없어 보인다. 그들의 연결고리란 전사로 싸웠을 때의 기억뿐이며 관계를 지속할 의의를 찾자면 옛 동료라는 것뿐. 청년의 말대로, 호칭에서부터 둘의 거리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과거, 모두에게 마음을 닫았던 때의 아내를 부르던 이름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가 사내를 받아주면서 가장 먼저 버린, 성씨.

슌이 너를 피한다고 생각하나?”

랜서즈가 해체되고는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어. 프로로 활동할 때 어쩌다 마주쳐 먼저 인사를 해도 슬금슬금 피했지. 랜서즈 멤버들이랑은 대화는 하고 유즈와도 그럭저럭 어울리는 걸 보니 나만 피하는 것 같네.”

이유는?”

뻔하잖아. 유토를 볼 수 없게 되었으니까.”

그건 네 잘못이 아냐.”

그래도 상처는 받았을 거 아냐. 나를 보면 나쁜 기억이 떠오를 거야. 쿠로사키가 그 날 고향을 찾은 것도 어쩌면 나를 피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자꾸 생각하게 돼.”

아내가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 동생과 친우는 전쟁의 끝에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실종이라는 표현은 그녀의 마지막 방패일 뿐. 만날 수 없는 사람을 연상시키는 존재는 그리움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절망을 깊게 할 뿐이다. 불행히도 청년이 그런 경우였다. 사라진 친우와 빼닮은 얼굴은 과거부터 몇 번 그녀를 흔들었다. 물론 아내는 냉정하기에, 근처의 타인이 사라진 사람을 대체할 수 없음을 안다.

달콤한 꿈에 빠져 살 것이 아니라면 참혹한 현실을 그대로 볼 수밖에 없다. 그 고통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기에, 그녀는 굳이 고통을 증폭시킬 길을 택하지 않았으리라. 과거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전쟁이 끝나고선 거의 고향에 가지 않은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 곳에서라면 오래된 상실과 소중한 이들의 부재를 계속 확인할 수밖에 없으니까. 사내는 목에 건 펜듈럼을 만지작거리는 청년에게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말을 돌려주었다.

언젠가는 안정을 찾을 거다. 그러면 괴로워서 외면해온 것들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겠지.”

그것은 청년을 달래는 것 같기도 했고 아내를 향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혹은 사내의 소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청년은 막연한 위로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은 걸어볼게.”

그 이상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내를 지켜봐온 사내조차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혹 바라던 결과를 얻을 수 없다 해도 그녀를 원망하거나 재촉할 수는 없다. 아마 청년도 그 정도는 이해하리라.

그럼 바쁜 중에도 연락한 건 그게 마음에 걸려서였나? 슌이 하필 그때 하트랜드에 간 게 너를 피해서인 것 같아서?”

청년은 잠깐 눈치를 살피더니 아마 계속 속에 담아두었을 말을 꺼냈다.

그것도 맞지만, 사실은 얼마 전에 기자인지 작가인지한테 연락이 왔거든. 랜서즈 소속이었을 때의 일을 말해줬으면 한다네. 곤겐자카도 사와타리도 그런 접촉이 있었다는 모양이고.”

랜서즈란 부부와 청년, 세 사람이 얽혔던 정예병의 명칭. 결성했을 때 잠깐 주목받긴 했으나 주로 적을 쫓아 먼 타지를 다녔고 전쟁이 끝나고는 바로 해체했으니 그 이름이 다시 세상에 나올 일은 거의 없을 터인데.

랜서즈를 조사할 것 같아?”

아마도. 랜서즈와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접근할 기세야. 세레나 같은 경우는 제외되겠고 데니스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너희 부부를 내버려둘까?”

사내의 눈앞에 코트로 몸을 싸맨 아내가 그려진다. 꺾일 듯 가는 몸으로 기계 새를 지휘하는 전사. 폐허에서 온 생존자. 그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방인이란 것은 편리한 위치여서,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는 빠르게 숨었다.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혹은 추억으로만 남은 수많은 이름처럼. 그 과정에 그녀를 적극적으로 도운 것이 바로 사내였다. 그녀의 이름을 지우고 과거를 흐려, 세상에 남은 흔적을 덮었다.

……너는 협조할 생각인가?”

내가 기억하는 만큼은 이야기하게 될 것 같아. 너희가 어떻게 할지는 자유지만, 일단 말해두는 거야.”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너희가 그동안 감춰두었던 쿠로사키 슌을 공개해야 할 수도 있잖아.”

부부가 아내의 모습을 덮어왔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그녀의 삶 대부분은 의도적으로 숨겨져 있다는 뜻. 한 사람의 삶을 흐리는 데 이유가 없진 않았다. 그녀 같은 사람은, 주목받지 않는 게 좋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그 삶이 입맛대로 도려내져 도마에 오를 사람이다.

사람들은 어디까지 알까.”

이쪽 세계에서는 전직 프로 듀얼리스트 쿠로사키 슌 정도는 알아. 그 이전의 모습이나 그 후의 삶이야, 누가 알겠어.”

네 의견이 궁금하군. 네가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 생각이지?”

만일 아내의 삶에 대해서까지 캐려고 든다면 모든 걸 공개해 아내를 다시 세상에 내놓을 것인가, 아니면 모른 체 모든 것을 덮고 살 것인가.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아마 청년이라면 사내의 질문을 이해할 것이다. 과연 청년은 약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죄를 숨기는 것이 아닌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게 잘못은 아니지.”

심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이건 생각해야 해. 너희가 공개하지 않는다 해도, 쿠로사키 슌을 추적하기 시작하면 뭔가 단서가 나오긴 할 거야. 어디까지 파헤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

냉정한 목소리에 청년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대화를 종료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게 들어간 모양이다. 청년의 말에 악의는 없었던 것을 알기에 살짝 미안해지긴 했으나, 사내는 심란한 생각을 더 이어가고 싶진 않았다. 애초에 세상이 그녀를 물어뜯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자꾸만 차악을 선택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선의와 정직함은 그녀를 한 번도 구원한 적이 없다.

그래.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쿠로사키의 회복이겠지. 내가 말한 건 너무 신경 쓰지 마. 선택할 때가 되면, 그때 옳다고 믿는 걸 하면 돼.”

연결은 곧 끊어졌다. 사내는 스크린이 꺼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열쇠를 꺼내 잠가둔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는 것. 아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의 기록 전부였다. 그의 회사에 막 들어왔을 때의 기본적인 조사 결과. 전사 선별이라는 비밀 임무를 주고서 그녀를 대회에 참가시켰던 때의 공식적인 프로필. 그녀가 고향을 덮친 전쟁에 대해 증언한 것의 녹취록. 이곳에서 프로 테스트를 통과해 받은 자격증명서 등 몇몇은 그가 따로 보관했던 것이고 일부는 그녀가 넘긴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담아두는 이유는 간단하다. 묻어버리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지우려 한다면 폐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괜한 미련으로 완전히 치우진 못하고 있다. 아내에게는 남루에 불과할 것을 꺼내보며, 사내는 과거의 그녀를 떠올린다.

전쟁이 끝난 후 아내는 프로 듀얼리스트로 활동했었다. 과거형인 것은 진작 그만두었기 때문이지만, 한때는 인기를 얻기도 했다. 짧은 기간에 신화 같은 기록을 쓰면서, 상패를 안고 웃었던 적도 있다. 그런 나날이 이어진다면 그녀도 전쟁의 고통을 조금은 잊고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대중의 환호를 받고 미래를 기대하며,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침략자의 아들이라는 부끄러운 바탕, 피해자를 도와야 한다는 정의감, 끝까지 싸워준 것에 대한 감사로 사내는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자신의 회사에 소속시켜 여러 대회에 참가할 기회를 주고 프로 테스트 준비를 도운 건 물론이었고 데뷔 후에도 언제나 그녀의 방패가 되어주려는 뜻을 확실히 보였다. 뛰어난 실력에 업계 최고의 기업 사장이 키워주기까지 하는 그녀가 오래도록 활약하리라고, 대부분이 생각했다.

그랬으면 좋았을 것이다. 사내의 바람대로 그녀가 프로의 세계에서 완전히 자리 잡고 안정을 찾았더라면. 어려서부터의 꿈을 이루고 행복을 쥘 수 있었더라면. 거의 다 이룬 것 같았는데, 삶은 끝까지 그녀에게 악의적이었다. 전쟁의 기억이, 망령처럼 진득하게 따라붙은 비극이 한창 빛나던 그녀를 추락시켰다. 어디까지나 그녀를 보호하겠다는 사내의 각오는 망가진 그녀 앞에선 그저 무력했다. 쇼크로 떠는 그녀를 진정시키려 안았을 때, 사내를 올려다보는 눈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그 사건은 그녀를 여러모로 망가뜨렸다. 공개적 장소에서 전쟁의 트라우마가 자극된 그녀가 위태로워진 건 물론이고, 그녀의 황폐한 내면을 본 대중도 싸늘하게 돌아섰다. 조롱과 비난 속에서 그녀가 쌓아온 성과마저 잔뜩 축소되었다. 사내는 전쟁이 그녀에게 입힌 상처를 알리고 그녀를 변호하는 것으로 상황을 바꿔보려 했지만, 그녀가 거부했다. 자신을 방어할 힘도 남지 않아, 처참한 결말을 안고 살기로 한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불명예스럽게 끝났다. 아내는 포기했고, 사내는 지키지 못했다. 한 번 대중에게 각인된 이름에 나쁜 기억이 덕지덕지 붙었기에 그녀는 어느 순간 이름을 치웠다. 하필 그 빈자리에 실종된 동생의 이름을 끌어온 것이 불길했으나 그녀가 너무 위태롭게 느껴져 사내는 따지지 못했다.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쿠로사키 슌의 나쁜 기억은 이제 없어. 그녀가 자기최면이라도 거는 듯 그렇게 말했으니 사내는 그녀의 소망을 이뤄줘야 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을 세상에서 긁어내는 것으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녀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나른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사내의 주변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고 비로소 그녀가 안정을 찾았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사내는 그것이야말로 극도의 무기력함임을 알았다. 결국 그녀의 내면이 텅 비어버렸다는 것도. 그런 것은 살아갈 날이 거의 남지 않은 사람이나 보일 태도였다. 그녀는 언제든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사라질 수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한동안 사내의 영역에 있었다. 그를 놓아버리고 새로운 삶을 꾸릴 의욕조차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꾸준히 돕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호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상태를 점검하면서도 사내는 그녀를 회복시킬 길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의사를 붙여도, 다른 일을 제안해도, 어쩐지 그녀는 자꾸 새로운 늪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어느 날 사장실에 찾아온 그녀는 사내의 책상에다 무언가 잔뜩 담긴 파일을 올려놓았다. 본인에게 상세한 내용을 묻기 전 슬쩍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살아온 시간의 증명. 전쟁 후 연고자 없는 그녀를 보호해왔기에 사내에게도 그녀의 자료가 있긴 했으나, 사내가 보관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 공식적인 기록이라면 그녀가 내놓은 것은 보다 사적인 것이었다. 아마, 사내조차 완전히 모를 것들.

[너한테 넘길 테니 폐기하거나 보관하거나, 알아서 해.]

[내게 넘겨주는 이유는?]

[너는 이런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타입이고, 나는 없었던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왜 네 존재를 지우려 들지?]

[그렇게 거창한 목표는 없어. 편리하게 살고 싶을 뿐이야. 기억이나 이름에 매이는 건 피곤해. 과거를 아는 것만으로 내 미래까지 보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도 넘쳐나고.]

나는 달라. 나는 네게 멋대로 기대를 걸지 않아. 실망하고 몰아세우지도 않아. 쏟아내고 싶은 말을 억누르면서, 사내는 차분하게 물었다.

[표류하길 원해?]

그러자 가느다란 손가락이 사내의 입술을 눌렀다. 건방져, 그런 말이 따라붙은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끝내 제대로 된 답은 돌려주지 않았지만 사내는 제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그 다음에 택할 행동도.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아서, 그로부터 보름쯤 지나 그녀는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조차도 말없이 사라지려던 것을 사내와 마주치는 바람에 털어놓은 것이다. 먼 곳에 가겠다며 막연한 계획을 늘어놓는 그녀에게서 사내는 불안을 느꼈다. 떠난다는 것은 그녀에게 사라지기 위한 핑계일 뿐이고, 결국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순간 자신을 쉽게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보내면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그녀를 세상에 묶어둘 마지막 기회다. 그런 생각으로 사내는 그녀가 떠나기 전에 말했다.

[내게 정착해줘.]

고백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바보 같은 말이었다. 동시에 오만한 요청이기도 했다.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이내 깔깔댔다. 솔직히 말해 사내도 기대는 없었다. 상대가 상대였으니 시간을 벌거나 떠나지 않도록 적당히 설득하는 정도만 해도 성공일 터였다.

뜻밖에도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신중하게 꺼낸 말인지 거듭 확인하고서 그의 요구를 받아주기로 했다. 사내가 최종적으로 바라는 것은 단순히 같은 영역에 있는 게 아니라, 공식적으로 함께하는 것이었는데도. 그녀와 결혼하고 함께 살아오면서도 사내는 아직 그 날의 그녀가 자신을 받아준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한순간의 변덕이었을지도 모르고, 지쳐서 누구에게든 불시착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약간의 기대를 걸었던 것일까. 저를 놓으려 하지 않는 사내에게서 언뜻 사소한 구원이라도 생각했는지.

그들의 결혼까지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는지는 당사자인 둘과 극소수의 주변인밖에 알지 못한다. 아내가 왜 프로로 오래 버티지 못했는지도. 그녀의 삶을 진득하게 지배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왜 언제나 얼마 되지 않는지도. 사내는 꺼낸 자료를 하나하나 살피면서 세상이 모르는 아내를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을 내놓을 경우, 사람들이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불편한 것을 가리기 위해 단편적인 것만 공개한다면 과연 세상이 그녀를 이해할까?

랜서즈 결성은 처음부터 사내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고, 추진하여 실행한 것은 그의 회사였다. 이제 와서 랜서즈에 대해 파헤친다면 이곳에 협조를 요청하려 들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가 원하지 않을 경우 지금까지 그래왔듯 아내에 대해 덮어둘 수 있다는 것이지만, 그것이 가능할지는 그도 자신이 없다. 취재할 수 있는 몇 명의 전사에게서 아내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된다면 세상이 어떻게 나올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어쩌면 먼저 그녀에 대해 알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야기를 만들고 정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할 줄 아니, 아내에 대해 동정적인 여론을 끌어낼 수야 있다. 그러나 대중이 그 허상에 빠지게 된다면? 그녀의 삶은 짜낸 것처럼 교묘하고 악의적인 비극이었다. 그녀에게 드리워진 불운한 그림자는 사람들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전장에서조차 그녀의 비극을 작품처럼 소비하는 자가 있었는데, 동정하도록 조정한 삶이라면 더욱 노골적으로 소비될 것이다.

당신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어. 사내는 처참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전부터 계속 그녀를 보호하려고 노력해왔지만 그녀가 상처 입는 것을 막아준 적이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잔뜩 상처 입고서야 그녀를 안아주고 치료하는 것 같다. 사고가 일어나고는 더욱 자신이 없어졌다. 괴로운 삶을 이어오느라 참는 것이 습관이 된 그녀이기에 사실은 최근에도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내면이 망가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끝에 결국 자신을 부수려 들었거나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것일지도.

삶은 사내의 사정에 맞춰 돌아가지 않기에 사내는 여느 때처럼 제 자리에서 자신에게 놓인 일을 처리했다. 다만 청년의 말은 내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 대화에서 출발한 암담한 생각도 마찬가지. 들어줄 사람도, 부정해줄 사람도 없는 생각은 끊어지기는커녕 자꾸만 가지를 뻗었다. 어떤 일 앞에서든 자신만만한 사내였는데, 아내만은 그의 확신을 부수고 노력을 의심하게 만든다.

아카바 레이지의 삶에서 유일한 실패란 쿠로사키 슌인 거네, 자랑스러워해도 돼?

전쟁이 끝나고 아내가 장난스레 던진 말이 새삼 떠오른다. 끝내 사내가 그녀를 구하지 못했음을 확인시키는 말이었으므로. 그녀에게는 삶의 여러 실패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에게는 거의 성공만 있었던 삶에서 가장 처참한 좌절이었다.

간부회의는 그날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어쩐지 시선이 따가운 것 같아 슬쩍 주변을 돌아보면 거의 모두가 사내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터지기 직전의 물체를 보는 듯 불안이 얹혔거나, 젊은 사장에 대한 걱정이 깃든 시선. 유리창에 비친 모습을 보니 그의 눈에도 제 꼴이 말이 아니었다. 며칠 잠을 설쳐 피로한 얼굴에 근심인지 울분인지 모를 것이 드리워져 퀭했다.

회의는 무사히 마쳤지만 지쳐있었던 사내는 모두가 회장에서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발이 묶이기라도 한 듯 그대로 앉아있었다. 턱을 괸 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면서. 눈앞에 누군가의 손이 들이밀어진 때서야 사내는 정신이 들었다. 어머니가 표정 없는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레이지답지 않네요.”

어머니는 꽃을 다듬으며 말을 걸었다. 소파에 기대앉은 사내는 어머니의 손에 실험체처럼 놓이는 꽃에 계속 시선을 둔다. 회사 중역으로, 사내가 사장직을 이어받고도 계속 경영에 관여해온 어머니는 회의에서 그가 심란해하는 것을 보았으리라. 어머니가 조용한 곳으로 이끌었을 때만 해도 살짝 긴장했던 사내였지만, 다행히 드러나게 꾸짖지는 않는다.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나카지마가 머리를 어지럽혔나요?”

아뇨. 그와는 평범한 대화를 나눈 게 전부였습니다만.”

답을 하고서 사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 사람이라고 자랑스레 이야기할 수 있을 충직한 수하의 이름이 튀어나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머니는 빈 웃음을 걸치더니, 이내 사내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괜한 말을 꺼냈군요.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까, 미리 이야기할까요? 기념사업인가 뭔가를 기획 중이니 랜서즈의 정보를 넘겨줬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들어온 모양이에요.”

그래서 나카지마가 어떻게 했죠?”

랜서즈의 승리란 게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만큼의 대단한 것이 아니고, 쿠로사키 슌이 있으니까 고민했겠죠. 당장은 결정하지 못하고 나에게만 이야기한 것 같아요. 혹시 그 사이 보고했나 했더니 아니었군요.”

막 사장직을 맡았을 때부터 곁을 지켜온 수하였다. 사내는 물론이고, 그가 전사로 들인 아내까지도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니 사내의 입장을 대강은 이해했을 것이다. 가능한 제 선에서 처리하려고 들었는지 어머니께 알리는 것으로 길을 찾으려 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사내에게 바로 이야기하는 것은 망설였던 것 같다. 아마도, 그가 무엇을 우려할지 알기 때문에. 만일 아내에게 직접 의견을 물었다면 괜찮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사내는 그녀의 괜찮아는 칠 할이 거짓말임을 안다. 나머지도 정말 괜찮은 것이라기보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뿐이다.

사실 오늘, 다른 사람에게서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듣긴 했습니다. 그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던 것이고요.”

힘들죠? 아내는 언제쯤 괜찮아질지 모르겠고, 성공적으로 덮은 줄 알았던 과거를 자꾸 바깥에서 파헤치려 들고.”

차차 지나가겠지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의 일은 그가 손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나머지는 완벽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문제였으므로. 괴로운 사건 가운데서도 그나마 꾸역꾸역 버틸 힘은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건 사내만이 아니었던지, 어머니도 굳이 빈 위로를 얹지 않았다. 지친 사내에게는 차라리 그것이 편했다. 희망은 자꾸 그를 배반하고, 나쁜 생각은 쉽게 머리를 지배한다. 미래를 낙관하는 것보다 엷은 체념을 안고 사는 것이 덜 고통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쩌면 아내도 이렇게 살아온 것일까. 사내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쓰게 웃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할 말은 그것 말고도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어지러이 흩어진 꽃잎을 치운 어머니는 이번에는 사내의 하나뿐인 아이를 슬그머니 끌어와 새롭게 말을 건다.

아가가 최근 제일 좋아하는 프로 듀얼리스트가 누군지 알아요?”

글쎄요, 사카키 유우야?”

의미 모를 질문에 사내가 떠올린 것은 조금 전 연락했던 청년이었다. 데뷔할 때부터 사랑받아온 프로 듀얼리스트. 동시에 아이와 몇 번 만나, 아마도 아이에게 가장 친숙할 선수. 그러나 돌아온 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쿠로사키 슌이에요. ‘전직프로 듀얼리스트도 포함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 반칙일까.”

……어떻게 알고 있죠?”

아가가 영 기운이 없어 보여서 엄마의 예전 영상을 조금 보여줬어요. 회사에 아직 기록이 남아있는 건 굳이 지울 필요가 없어서였을 거다. 그렇게 마음대로 생각하고 꺼냈지요.”

그게 위안이 되었을까요.”

조금은요?”

사내는 프로로 활동하던 때의 아내를 떠올린다. 신화 속 전사를 연상시키던 모습. 낯선 전술로도 수많은 사람을 매혹시킨 그녀였으니 아이의 눈에도 분명히 빛났을 것이다. 아내가 쭉 누워있는 지금은 더욱. 아내가 잠깐 깨어난 때라도 쉬지 못할 것을 우려해, 주변에선 아이가 아내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웬만해선 조르지 않는 아이였는데, 한 번 틀어주기 시작하니까 계속 보고 싶다고 조르네요. 그런 아가를 보고 있으면 레이지가 많이 생각나요.”

제가 어릴 때 그랬던가요.”

아카바 레오가 가정을 팽개치고 갔을 때, 나를 보던 레이지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요. 균열이 생겼다는 걸 눈치챘는지 두려워하고 있었어요. 지금의 아가도 의젓한 체 하지만 겁에 질렸거든요. 엄마가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아버지는 내내 무서운 얼굴에 말도 없고, 엄마를 만나려 해도 어른들이 막고. 그러니 화면 속 엄마한테 매달리겠죠.”

모든 걸 말하고 싶진 않았어요. 엄마가 죽을 뻔했고 계속 상태를 지켜봐야 한다는 걸 전부 알면 마음이 아플까 싶어 모른 체 하고 있었더니.”

아버지는 삶에서 흐릿하다. 그가 어릴 적,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홀로 먼 타지로 떠났기 때문이다. 이후 아버지가 군대를 키우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에 혐오감을 느끼긴 했지만, 그보다 앞서 아버지가 모든 것을 버렸다는 사실도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그 일이 없었더라면 좀 더 평범한 아이로 자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사내는 때로 생각한다. 이상적인 가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내건 아이건 가족의 삶에 공백을 만들지 않는 가정을 꾸리자고 다짐한 것도 제 경험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으면서, 자신도 아이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닌지.

최근 들어 자신 없는 얼굴로 자꾸 제 주변을 맴돌던 아이가 떠오른다. 조숙한 편이라고 해도 아직은 어린 나이. 아이는 아이대로 불안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죽은 듯이 잠만 자는 아내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어른들 사이에서.

전부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안심할 수 있게 하면 돼요. 아가도 아픈 사람을 괴롭히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아니까요. 어렵다면 그냥 아가한테 잘 대해줘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를 보니까 조금 후회가 되어서 그래요.”

무엇이요?”

내 아들이 어릴 때 두려워하게 한 것이요.”

저는…….”

괜찮아요, 라고 말하려다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이 순간만은 괜찮다는 자기최면이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루리는 나아질 거고 아가도 곧 기운을 차리겠죠. 레이지만 힘을 내주면 돼요.”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깨어난 것도 눈앞의 문제가 사라진 것도 아니지만, 머리는 조금이나마 식은 것 같다.

 

*

 

아내의 첫 임신은, 계획된 일도 마냥 꿈꿔왔던 일도 아니었다. 아이에 대한 막연한 상상조차 꺼낸 적 없는 그들의 삶에 아이가 갑자기 찾아들었던 것이다. 임신한 것을 확인했을 때, 아내는 덤덤하게 소식을 전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듯, 혹은 안내사항을 전하듯. 사내는 아내에게 돌려줄 말을 생각했지만 바로 소리가 되어 나오진 못했다. 무언가가 목을 콱 막고 있었던 탓이다. 기묘하게도, 그것은 아내가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약간의 침묵을 거쳐 사내는 엉뚱한 말을 뱉어냈다.

[기뻐?]

[모르겠다고 말하면, 싫어할 거야?]

[아니,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걸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지. 그래서 싫어?]

[그건 아냐.]

[그럼 된 거야.]

아내는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했지만, 사내는 그 날 미처 꺼내지 못한 말이 있었다. 어쩌면 중요할지도 모르나 그녀에게 답을 듣기는 두려운 의문.

당신은 아이를 원했어?

그 전까지 한 번도 아내에게 자식 계획을 꺼낸 적 없었던 것은 그녀가 아이를 원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칠 대로 지쳐서 선택했을 결혼에 굳이 자신이 책임질 존재를 만들고 싶었을까? 세상이 기대하는 이상적인 가정에 맞춰 아이를 갖는 것을 한 번이라도 고민했을까? 거기에 사내는 그녀의 약한 몸이 망가지는 것도 두려웠다. 아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한, 아이를 갖도록 노력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사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아내 또한 아이에 대한 소망을 보이기는커녕 사내를 떠보는 일도 없었다. 갑자기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면 그들은 끝까지 둘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곧 탄생할 생명을 축복하고 부부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사내는 한동안 감정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아내는 삶의 큰 변화를 그저 수용하기로 한 것인지 아이에 기대감이 생긴 것인지, 열 달을 평탄하게 넘어왔다.

마침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사내는 아내의 몸에서 나온 핏덩어리를 안고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그 작고 무방비한 생명에서 무언가 찾아내야만 하는 것처럼.

[아기를 안아보니 어때?]

아내의 물음이 날아들었을 때도 사내는 아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당신을 하나도 안 닮았어.]

[갓난애잖아. 지금 뭘 안다고 그래.]

하지만 자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들에게서 아내를 연상시키는 부분이란 금빛 눈이 전부. 그 색채만 빼면 모든 게 사내의 것이었다. 만일 아내가 사라진다면, 사내는 그녀에게서 난 자식에게서도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들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 색채만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흔적이 조금은 더 남아있었으면 했는데. 성격도 별로 아내를 닮지 않은 것 같다. 아들이 보이는 사소한 행동이 어쩐지 친숙한 건 제 어릴 적을 닮아있어서일 터다. 아이가 유독 자신을 닮았다는 것 때문에 사내는 아내가 더욱 흐릿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확실히 다행스러웠던 건, 아이가 아내의 약한 몸을 물려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서도 건강한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 모양이야. 갓 태어난 아들을 보며 아내가 안도한 듯 말한 기억이 남아있다. 주변의 바람대로, 아이는 잔병치레 없이 자랐고 활달했다. 좋은 환경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도 행운이었다. 아이는 아내처럼 극한의 환경에 내몰려 스스로를 소모하지 않고, 사내처럼 일찍이 어른 흉내를 내는 일도 없이 자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에게만은 자신보다 많은 선택지가 있기를, 부부는 바라고 있었다.

지금 그 아이는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까지 찾아와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다. 사내는 아이의 얼굴에서 무언가 꾸밀 때의 긴장을 읽어냈다. 나이가 나이여서 속내를 완전히 숨기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최근 쭉 보였던 시무룩한 얼굴은 아니라는 것에 사내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있지 말고 들어와.”

말이 떨어지자마자 쪼르르 들어온 아이는 바로 자신의 목적을 꺼냈다.

엄마 안경 찾아야 해요.”

몸이 약해지면서 시력이 떨어진 아내는 안경을 맞춰두었다. 다만 사내처럼 언제나 안경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고, 보통은 글을 읽으며 불편이 있을 때나 쓰는 정도였다. 때문에 아내는 안경을 아무데나 두었다가 잊을 때가 제법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런 경우인 모양이었다. 주변을 뒤져 안경집을 찾아냈을 때 사내는 문득 거의 잠들어 있는 아내가 안경을 쓸 일이 있는지 의문이 생겼지만, 아이가 엄마의 물건에 애착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 여기 엄마 거.”

안경집을 내밀자 아이는 바로 받아들지 않고 이리저리 살폈다. 내용물을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하는 것일까. 사내는 안경을 꺼내보였다.

이거 맞지?”

.”

이것만 들고 가면 중간에 흘릴 수도 있으니까, 다시 넣어줄게.”

그렇게 말하고서 안경을 넣으려던 사내는, 안경집의 바닥에 무언가 깔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처 처리하지 못한 메모인가 싶어 살짝 꺼내보니 뜻밖에도 작은 사진이었다. 아내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것이지만,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가운데에 선 것은 아내의 동생, 화면상 오른쪽에 선 것은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 그리고 왼쪽에 선 것은 아내.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사진에서, 아내는 그에겐 너무도 낯선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 웃음은 처음 보았다. 자신에게만 지어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누구 앞에서도 짓지 않은 순진한 웃음이었다. 전쟁이 그녀에게서 빼앗아간 표정이거나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묻힌 웃음일까. 행복했던 때의 아내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사내는 원래 하려던 대로 안경집에 내용물을 넣고, 아이의 손에 올려놓았다.

이제 가져가렴.”

아이는 만족한 얼굴로 받아들더니 갑자기 비밀이라도 있는 듯 사내에게 바짝 다가왔다. 유일하게 아내를 닮은 눈으로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자신을 응시하기에, 사내는 아이의 키에 맞춰 몸을 숙였다. 아이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속삭였다.

엄마 지금 침대에서 잘 못 나온대요.”

그렇겠지.”

멀미해서 토하고.”

많이 힘들겠네.”

힘이 없어서 못 놀아요.”

아파서 그래. 엄마가 자주 아픈 건 알고 있지?”

언제가 되면 안 아파요?”

글쎄, 나도 모르겠구나.”

사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가 묻는 것이 사고로 인해 약해진 것인지, 아니면 아내의 약한 몸 자체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답은 같다. 아내가 언제까지 누워있어야 할지는 누구도 모르고 전장에서 망가진 몸이 언제 건강해질지 짐작할 수도 없으므로.

아내가 자꾸만 아픈 것도 아이에게 엄마의 모습이 아픈 모습으로 각인되는 것도 사내로서는 마음이 쓰이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리라고 막연한 희망을 안고 살아왔으나 아내의 몸은 그녀의 황폐해진 내면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픈 건 익숙하니 괜찮다던 아내도 조금씩 지쳐가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다 알까?”

들었어요.”

답이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짧았지만, 사내는 아이의 얼굴에 잠깐 드리워졌던 것을 분명히 보았다. 곤란함.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지만 사내는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엄마 도와주는 사람이 얘기해줬지?”

.”

더 듣는 게 있으면 나한테도 말해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사내는 아이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조금 전 찾아낸 사진을 꺼냈다. 안경집을 건네기 전 사진을 슬쩍 뒤로 숨겼는데 아이는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사진 속 아내를 들여다보면 그녀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새삼 생각하게 되어 서글픈 한편, 그 낯선 모습이 아름다워 눈을 떼기 힘들다. 이런 모습을 그녀에게 돌려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내와 함께 찍힌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게 되었고 전쟁으로 많은 것이 소실되었을 테니 아마 이 사진은 아내에게 남은 게 전부이리라. 나중에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잃어버리지 않게 챙겨두려던 때. 사내는 사진 뒷면에 적힌 날짜를 보았다. 사진 속 계절을 볼 때 사진을 찍은 날짜는 아닌 듯하고, 이후에, 그것도 최근에 아내가 따로 메모한 것으로 보인다. 몇 번씩이나 집요하게 적은 것을 보니 그녀에겐 의미가 있는 날짜 같다. 올해를 기준으로 하면, 오래지 않은 과거의 어느 날. 어쩐지 저에게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날짜에 사내는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니까, 그 즈음에 있었던 일이라면.

하나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녀를 흔든 사건.

올해 들어 아내는 다시 임신했다. 이미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 이번에는 더 잘 준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유산이 닥쳤다. 안타깝긴 했지만 임신 초기의 일이었고, 사내에겐 어쨌든 태어나지 않은 아이보단 아내가 우선이었다. 임신한 것을 확인했을 때도 크게 들뜨지 않은 아내였기에, 그녀도 그 일을 잘 넘길 수 있을 거라 사내는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는 괜찮지 않았던 모양이다. 소식을 전하던 중 울음이 터지더니 결국 그의 품에서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울었다. 아내의 눈은 자꾸만 젖고 울음은 말을 막는데, 사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녀를 달래주는 것밖에 없었다. 아내를 끌어안으면서 그는 품 안의 사람이 부서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 손을 떼면 그녀가 힘없이 무너질까, 아내가 울음을 그치고도 한동안 안고 있었던 사내였다.

그때를 기점으로 아내는 흔들렸다. 관객 앞에서 쇼크를 일으켰던 날처럼. 그녀가 붙잡고 있던 무언가가 또 끊어지고 만 것 같았다. 기분이라도 좋아졌으면 해서 사내는 아내에게 이것저것 제안하기도 했지만 의욕도 잃은 것인지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거나, 혼자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아졌다. 그녀가 더욱 무기력해진 것 같아 불안해진 사내는 틈틈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시간이 지나면 잊을 거야. 나에게 제일 중요한 건 당신이고.

그래서 무언가 달라졌다면 사내가 심란해질 일도 없었다. 아내의 시선은 자꾸만 그가 볼 수 없는 곳으로 향했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 걸어가 어느 순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왜 나를 그렇게 뚫어지게 봐? 날아가기라도 할 것 같아? 어쩌다 시선을 느낀 아내가 나른하게 말할 때면 사내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 왜 그녀는 그렇게 위태롭게 구는 것인지.

처음부터 열렬한 사랑은 없었던 관계이기에, 대단한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녀가 자신을 이용해서라도 세상에 남아주면 최우선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죽은 세계에 묻히려고만 하지 않아도, 사내는 평생 그녀를 끌어안고 살 수 있었는데. 아슬아슬하게나마 이 세계에 발을 딛고 살던 아내는 다시 과거에 휩쓸리는 것 같았다.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에 자꾸만 파묻히려 드는 그녀가 사내는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아내에게서 위태로움을 느끼던 날, 사내는 친분을 유지해온 청년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아내와 셋이서 함께 만나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안에 그는 우선 아내에게 의견을 물었다.

[나는 안 돼.]

아내는 바로 거절했다. 한순간의 고민도 없는 단호함이, 준비된 답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한 번쯤은 어울려줘도 되잖아?]

[선약이 있어.]

[누구와?]

[사야카를 만나러 가기로 했거든. 하트랜드에서 하루만 자고 올 거야.]

전쟁이 끝난 후로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는 고향을 이야기하는 게 뜻밖이었으나, 가장 익숙한 곳에 가고픈 때도 있을 것이다. 침략만 없었더라면 그녀는 그곳을 평생 사랑할 수 있었으리라. 청소년기에 겪은 전쟁은 그녀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 것은 물론 그녀가 사랑하던 것조차 처참한 유물로 만들었다.

폐허가 된 고향 군데군데에 전쟁의 기억이 붙어있을 것이다. 그곳의 사소한 것들이 상실의 흉터를 헤집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도 아내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먼 타지인 이곳에 눌러앉은 것은 그 때문이었을 거라고 사내는 생각한다. 그나마 결혼 전 정식으로 이주 절차를 밟기 전에는 가끔 고향을 찾았던 아내는, 결혼을 하고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녀는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곳에 더는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힘들어했다. 여기 마이아미는 내가 잘 모르는 곳이어서 편해. 괜한 생각이 안 들거든. 아내가 농담처럼 말한 기억이 있다.

[알겠어. 그럼 당신은 일이 있어서 안 된다고 전할게.]

[나는 빠져도 둘이서 볼 수 있지?]

[글쎄, 그건 다시 물어보고. 전부터 자꾸 당신을 데려오라고 하고 이번에도 셋이서를 강조해서.]

[친한 건 당신이랑 그쪽뿐이잖아? 나를 끼워서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니까.]

아내는 깔깔대더니,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아가랑 둘이서 잘 있을 수 있지?]

[그야 당연하지.]

[그럼 나도 오랜만에 고향에 다녀올게.]

약속한 날, 짐을 챙겨 나서는 아내에게선 특별히 불안한 기색이 비치지 않았다. 사야카가 재워준댔으니까, 혹시 나랑 연락이 안 되면 그쪽에 연락해. 그렇게 말하고서 떠나는 아내에게 사내는 장난처럼 손을 흔들었다. 하룻밤이니까, 아내가 훤히 아는 고향이니까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미 혼자서 자기 시작한 아이도 엄마를 찾지 않고 얌전하게 잠이 들었다.

그 다음날, 사내는 중요한 일정이 취소되는 바람에 생각지 않은 여유가 생겼다. 시간을 보니 아내가 출발하기로 한 때에 가까워진 시점. 거기서 아내에게로 생각이 튀었다. 길이 생겨 이전보다 쉽게 갈 수 있게 된 아내의 고향에 직접 찾아가서 그녀와 만나 함께 돌아오는 것은 어떨까? 사내는 빠르게 판단을 마치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로, 아내가 자라난 땅으로 향했다.

아내에게 연락을 했지만 신호음만 갈 뿐 끝까지 받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내는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저 방향을 바꿀 뿐이었다. 아내가 만나기로 한 친구는, 다행히도 결혼 직후에 아내를 통해 연락처를 교환해 그에게도 연락할 길이 있었다. 통신기에서 번호를 찾아내 연결하자 오래지 않아 상대가 받았다. 말을 거의 섞어본 적도 없어 낯설기만 한 상대에게, 사내는 자신이 아내를 데려가려 왔음을 설명하고 그녀의 행방을 물었다.

[, 엇갈렸네요. 슌은 진작 나갔어요. 한 군데만 들렀다 돌아갈 거라던데. 혹시 연락은 못 받았나요?]

[, 제가 연락을 해도 받질 않고요.]

[오래 머무는 걸까요. 일단 슌이 가기로 한 곳 알려드려요?]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듣고 간 곳이 바로 아내가 다녔던 학원 근처의 물가였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내는 보이지 않는데, 그녀의 가방과 외투가 물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걸 확인하고는 머리가 마비되어 그대로 물에 뛰어들었던 것 같다. 정신이 들었을 땐 아내를 안고 물 밖으로 나온 후였다. 아내가 의식을 찾는 걸 확인하고도 안도는 없었다. 무섭도록 차가운 체온과 축 늘어진 몸에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사진 뒷면에 적어둔 것이 정말 그가 짐작한 날이라면, 아내는 유산한 것을 그가 느낀 것 이상으로 괴로워했다고 봐야 한다. 역시,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건이 그녀를 망가뜨린 게 분명했다.

만났을 때 너무 지쳐 보였는데 혹시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내의 친구가, 사고 직전까지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남긴 메시지가 떠올라서, 사내는 통신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직접 듣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 메시지를 보낸 쪽으로 연락하자, 상대도 기다렸다는 듯 바로 받았다.

[아카바 씨, 슌은…….]

[그동안은 너무 정신없어서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사고가 있었어요. 말씀하신 곳에 갔더니 슌이 물에 빠져있어서 구해냈죠.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막았습니다.]

[슌과 계속 연락이 안 되기에 걱정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니. 그럼 지금은 회복했나요? 슌은 몸이 약하니까 완전히 안심할 수가 없어서요.]

[거의 잠들어 있어요. 중간에 깨기는 하는데 그 시간이 너무 짧아서 상태를 확인하기도 힘드네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거기는 슌이랑 루리가 좋아하던 곳이어서, 제 기억으론 둘이서 가끔 수영도 했던 것 같거든요. 멀쩡히 잘 다니던 곳에서 무슨 일인지.]

줄곧 사내를 괴롭혀온 나쁜 생각이 다시 선명해진다. 아내가 스스로 뛰어든 것이라면?

아내를 구한 이상,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부분임을 알면서도 머리에서 그 생각을 잘라낼 수가 없다. 덮어두어도 될 것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없다는 증거다. 아내에게 결혼생활이 지긋지긋한 현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확실하게 떨쳐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도 사내는 아내의 친구 앞에서 음울한 가정을 내비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생각을 누르고 문장을 정리해 내놓은 답은, 지극히 무난한 추측이었다.

[몸이 약하니까, 혹시 쇼크라도 온 것일지도 모르지요.]

[가는 것까지 확인할 걸 그랬어요. 오랜만에 만났으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는데.]

[나쁜 일은 사람 마음대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자책하진 마세요.]

자신도 내내 암담한 가정에 잡혀있었으면서, 목소리가 떨리는 상대가 신경이 쓰여 사내는 적당한 말로 달랬다. 살짝 훌쩍이던 상대는 약간의 시간이 흘러서야 겨우 답했다.

[감사합니다.]

[사실 듣고 싶은 것이 있어요. 슌이 지쳐 보였다고 하셨죠? 짚이는 게 있어서…….]

[슌은 뭔가, 죄책감이 큰 것 같았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정말로 잘못한 건 자기가 아니지만 상황이 너무 절망스러워서 전부 내 잘못이다 생각하게 되는. 계속 두다간 속이 곪아서 꼭 스스로를 상처 입힐 것만 같았죠.]

아내는 언제나 상처가 터질 때까지 방치했다. 일상적인 절망으로 어지간한 괴로움엔 무뎌지기라도 했는지. 문제가 생긴 것을 인지했을 때는 대부분 너무 늦어 손을 쓰기도 힘든 시점이었다. 그러면 아내는 누구도 고칠 수 없게 된 것을 안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이다. 아마 그녀의 내면엔 아물다 만 상처가 가득할 것이다. 통증만 없을 뿐 얼마든 덧날 수 있을 위험요소가. 때때로 아내가 크게 흔들리는 것은 너무 많은 균열을 참아온 탓에 하나의 사건으로 연쇄적으로 무너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달래주고 싶었는데,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고요. 자기가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느니 남편한테 죄책감이 든다느니 뜻 모를 말만 하고. 혹시 무슨 일인지 알 수 있다면 나중에라도 풀어볼 수 있을까 싶어서 한 번 아카바 씨에게 물어본 거예요. 괜찮으시다면, , 짚인다는 게 뭔지 들을 수 있을까요?]

[최근에 유산을 했었어요.]

[많이 힘들어했나요?]

[결혼한 후로 제일 힘들어 보였습니다.]

[……강박이 있죠. 지켜야 한다는 강박. 루리 일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사는 건 너무 힘들 텐데.]

[나아질까요?]

[그럴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너무 지쳐버렸을까 걱정돼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사내가 무력감을 느끼는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다. 제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해서 근본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제한적이고 그조차 변화를 확인하긴 어렵다. 언제 달라질지, 자신이 도움이 되기는 할지 알지도 못한 채로 조심스레 움직일 수밖에 없다. 초조하다고 깊게 파고들다간 그녀의 목을 죌 수도 있으니까.

통신을 끊자 사내는 착잡해졌다. 유산으로 아내가 상실감이나 슬픔을 느낄 순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만큼 휘청거릴 줄은 몰랐다. 아들이 태어난 후로 아이에 대한 애착이 생긴 것일까? 아니면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라도 빠진 걸까? 어느 쪽이었건 자신이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는 결론만 나올 뿐이었다. 그녀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은 위로보다는 치료였을지도 모른다.

아내가 죽을 뻔한 일도, 사고였는지 자의로 움직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유산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그녀가 깨어나면 그 일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다. 판단은 마쳤지만 사내는 그녀가 제게 터놓고 이야기하리란 자신은 없었다. 친구에게조차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고통을 그에게 내보일 수 있을까?

사내는 언제나 그녀에게 자신은 완벽한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스스로는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이미 세상에 크게 상처를 입은 그녀는 갈수록 교묘하게 마음을 닫고 있었다. 함께하는데도, 말을 섞는데도 몇 발짝 떨어진 듯 거리감을 느낀다. 이곳에서나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지, 실제로 그녀에게 내 사람으로 분류되기나 하는지 의문이었다.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해? 지금 무엇을 보고 있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은데, 답을 듣고 싶은데.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차마 말을 꺼낼 수 없다. 당신은 어차피 타인이야. 상냥하게 한계를 알리는 말이 귀에 울리는 것 같다.

그래도, 아내를 지키려면 그녀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데까진 들어가야 한다. 사내는 내내 신경 쓰이는 부분에 대해 제 나름대로 알아보기로 했다. 회사의 일을 마치고도 사내는 현재 그에게 가장 무거운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남았다. 제 생각에 맞는 단서를 찾기를, 혹은 아내를 이해하게 되기를 기대하며 여러 자료를 끌어오고서. 날이 어두워지는 것도 모르고 계속 자료를 살피던 사내는 책상에 핏방울이 떨어지는 바람에 겨우 하던 일을 중단했다. 코피가 나는 건 드문 일인데, 아무래도 최근 많이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라 생각하며 피를 닦을 때.

괜찮으십니까?”

사내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수하가 눈앞에 서 있었다. 최근 사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어떻게 삐걱거리고 있는지 빤히 아는 사람이니 단순히 지금의 상태만을 묻는 것 같지 않았다. 아마 최근의 감정이나 아내의 일까지 두루 묻는 것이리라.

글쎄.”

역시 그 분이 깨어나야 나아지겠군요.”

그렇게 말하는 수하는 어느새 사내의 책상에 흩어진 자료를 눈에 담고 있었다. 사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그것으로 충분히 짐작하리라. 사내가 가져온 자료 대부분은 유산에 대한 내용이었고 측근으로서 아내에게 있었던 일도 대충은 알고 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굳이 부정하려 들지는 않았지만 사내는 제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불편해졌다. 슬그머니 자료를 치워두면서 그는 말을 돌린다.

랜서즈 건은 어머니로부터 대강 들었다.”

지금은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부러 미뤘으니까요. 그 분이 완전히 회복하시면 그때 의논하시지요.”

슌이 깨어나지 않아서 그 건을 미뤄뒀을 뿐이라고? 랜서즈의 정보를 공개하는 게 조심스러워서가 아니고?”

변덕스런 대중을 만족시키는 건 불가능해요. 어차피 그 분은 이제 세상에 나서지도 않고. 이쯤 되면 사장님이 그 분을 완전히 보호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달으셨을 줄 알았습니다만.”

나카지마.”

사내는 입술을 깨물며 수하의 이름을 불렀다.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지만, 수하는 말을 끊지 않는다.

안 될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때도 되었어요.”

안 될 사람이란 게 뭐지?”

세상에 뿌리내릴 수 없는 사람? 구할 수 없는 사람? 어떻게 표현하건 의미는 통하겠죠. 그런 사람을 안고 살려면 각오가 필요해요. 어중간한 마음으로 끌어안으려 한다면 남는 건 상처뿐.”

쿠로사키 슌은 강한 사람이야.”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삶의 목표가 자신이 아닌 사람은 아무리 강해도 결말이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그 목표가 소멸하기까지 했다면, 결국은.”

더 듣고 있을 수 없어서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내 같은 사람이 대개 어떤 결말을 맞는지. 그걸 막기 위해서 그녀를 생에 묶어두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것인데.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어차피 누구라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이겠죠.”

마지막까지 잔인한 말을 듣고서 사장실을 빠져나온 사내는 무작정 아내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위태로운 모습이라도, 죽은 듯이 잠들어 자신을 눈에 담지 못하는 상태여도 아내의 존재를 확인해야만 했다.

집에 들어서면서 사내는 무언가가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걱정 어린 목소리도 오래지 않아 따라붙는다. 그러게 아직은 무리라니까요. 조금 더 쉬어야 한다니까 아내를 보살피던 자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사내는 급히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고, 아내의 방 근처에서 산산이 부서진 화병과 그 곁에 주저앉은 아내를 보았다. 잠깐 멍하니 있던 그녀가 테이블을 지지대로 일어나려 하니, 주변에서 막고 나섰다.

일어날 수 있으니까…….”

다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지금도 충분히 상태가 안 좋아요.”

정말 괜찮다니까.”

사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바로 알 것 같았다. 모처럼 오래 깨어있게 된 아내는 침대에서 나와 움직이려다 테이블의 화병을 쳐서 떨어트리고는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바람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 것이다. 주변에서 걱정해 무리하지 못하도록 감싸니 괜찮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리라. 결국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자 그녀는 실수를 수정하고 싶은 것처럼 흩어진 파편을 맨손으로 주워 담으려 든다. 사내는 아내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파편에서 떼어냈다. 돌아보는 아내는, 울 것 같은 얼굴이었고.

손 다치잖아. 이런 건 다른 사람에게 맡겨.”

다 설명할게, 그러니까.”

누워있기엔 답답해서 방에서 나오고 싶었어?”

적당한 핑계를 던져주자 아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안아들었다. 예상치 못했을 행동에 아내의 눈이 커졌다.

걸을 수 있어.”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데려가줄게.”

당신한테 이런 모습까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어차피 파편이 튀어서 맨발론 무리야.”

잠옷에 가까운 얇은 원피스 한 벌에 아무것도 신지 않은 모습이, 아내가 며칠간 침대에서 거의 나오지 못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기력이 없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사람이 그런 차림으로 어디까지 갈 생각이었는지. 사람들의 시선에서라도 해방시킬 생각으로 그대로 아내를 안고 자리를 뜨자,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데려다놓는 거 말고, 같이 가줘. 그렇게 말하며 꺼낸 목적지는 최근 몸이 약해지지만 않았더라도 그녀가 제 발로 갈 수 있었을 가까운 곳.

아내를 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에 실리는 무게가 사내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녀는 깨어났고, 그 눈에 자신을 비추고 있다. 불안과 무력감에 미치기 직전이었던 사내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오래지 않아 아내가 말한 장소에 다다른 사내는 문을 열면서 물었다.

왜 여기야?”

당신이랑 이야기하기 좋을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하고 싶기에.”

당신이 듣고 싶은 것?”

의미심장한 답을 안고 사내는 내부로 들어섰다. 바다를 닮은 색채가 눈앞에 펼쳐졌다.

 

*

 

그곳은 수조가 놓인 방이었다.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사람이 하필 물이 있는 곳을 고르다니. 장소선정이 제법 심술궂다. 다만 사내에게 수조란 중요한 기억과 연관된 것이기도 했다. 과거, 아내에게 청혼했던 곳에도 대형 수조가 있었다. 때문에 잘 꾸며내지도 못한 엉성한 고백에 그녀가 답했을 때, 두 사람을 둘러싼 풍경은 꼭 바닷속 같았다. 사내가 생각하기에 그 날 유일하게 로맨틱했던 부분이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줄 때만 해도 사내는 그녀에게 더 나은 삶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젊은 나이에 수많은 성공을 쌓아온 사람으로서, 많은 것을 쥔 사람으로서 다소 오만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무엇을 이뤘던가. 혹은 무엇을 고쳤던가. 사내는 과거의 치기가 새삼 우습다. 의욕적이었던 것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의욕만으로는 부족하다. 좀 더, 나은 방향을 찾았어야 했다.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현재를 만들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이제 내려줘.”

아내의 요구에, 사내는 수조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다 그녀를 조심스레 앉혔다. 아내는 집의 여러 방 중에서 이곳을 특히 좋아했는데, 가끔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이곳에 혼자 와서 한참을 머물다 가기도 했다. 수조에 가둔 고요한 세계가 안정이라도 주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단둘이 대화하기엔 괜찮은 공간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맞은편에 앉은 사내를 아내의 금빛 눈이 가만히 담았다. 사내는 자신이 사랑한 색채에 시선을 고정하며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몸만 회복하면 돼. 당신은 몸이 약하니까, 더 신경 써야지.”

그리고…….”

망설였는지 문장을 정돈하려 들었는지 말을 잇는 데는 한참이나 걸렸다.

그 날, 죽으려고 한 건 아냐.”

불완전한 말이었지만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 일은 사고였을 뿐이다. 그녀는 그렇게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계속 불안해했던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사내는 싱거울 정도로 쉽게 자신의 걱정과 의심을 흩어버리는 아내의 모습에 순간 말을 잃었다. 믿고 싶다는 마음과 믿어도 될지 하는 의문이 공존했다. 사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아내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 말을 하지 않으면 당신이 미쳐버릴 것 같더라고.”

그럼 물에는 왜.”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들어갔어. 거기엔 추억이 많거든.”

그렇게 말할 때, 그녀는 사내를 바라보지 않았다. 깍지 낀 손을 내려다보면서 얼굴에 살짝 웃음을 얹을 뿐이다. 그녀는 괜찮다고 거짓말할 때 저런 식으로 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사내는 이 순간조차도 아내가 부서질까 겁이 난다. 그녀가 무언가 숨기고 있는 건 틀림없지만 그걸 파헤치다간 그녀도 다칠 것 같다. 그녀가 전하려는 말만 적당히 듣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내는 어쨌든 그의 불안이 무의미한 걱정이었다고 말해주지 않았던가. 겨우 깨어나 앉은 아내에게 철저한 답변을 요구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이전부터 이렇게 문제의 핵심을 회피해왔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사내는 일단 아내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쩌다 위험해졌지?”

몸이 안 좋으면 통제가 잘 안 돼. 순간순간 긴장하지 않으면 갑자기 몸이 말을 안 들을 수도 있거든. 잠깐 아찔하다 싶더니 물속에서 움직일 수가 없는 거야. 그때부터는 계속 가라앉는 거였어. 바닥에 수많은 손이 있어서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지.”

수조에 갇힌 물이 조명을 받아 아내를 창백하게 비춘다. 물빛이 드리워진 그녀는 평소보다도 위태롭고 연약해 보인다. 거기서 사내는 아내가 드리우던 그림자를 떠올렸다. 처음 전장에 선 때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그녀가 몰고 다니는 음울한 기류인 줄 알았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 적도 아군도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서 쓰러질 때서야 그녀에게 따라붙던 것이 침중한 것임을 깨달았다. 죽어갈 이들에게나 비치던 것을 산 사람으로서 안고서 그녀는 어떻게 버텨왔던 것인지.

전쟁이 끝나고도 그녀는 그 불길한 색채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며 차차 옅어지긴 했으나, 결국 며칠 전 다시 선명해지고 말았다. 물속에서 건져낸 아내는 죽음과 너무 가까이 있었고 지금도 그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그때 당신이 나를 구하는 상상을 했어. 이상하지, 마이아미에 있는 사람이 하트랜드까지 찾아올 리가 없는데. 찾아온대도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낼 리도 없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사내는 아내를 데려오려고 그녀의 고향까지 갔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을 찾아 그녀를 구해냈다. 온갖 우연이 겹쳐 그녀를 구조할 수 있었다는 것만큼 그 순간 아내도 자신을 생각했다는 것이 사내는 놀랍다. 과거를 사랑하는 그녀라면 당연히, 위급한 순간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생각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그녀의 삶에 한 부분을 차지하긴 했던 것인지.

근데 그 상상이 현실이 된 거야. 나를 안고 나온 사람, 당신이었지?”

기억해?”

잠깐 정신이 들었을 때 어렴풋이 당신을 본 것 같아.”

구해냈을 때, 아내의 눈꺼풀이 잠시 열리긴 했다.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도 그녀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까닭에 끝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듣지 못한 말은 그의 머릿속에서 안 좋은 방향으로만 뻗어나갔다. 원망의 말이 될 때도 있었고 체념의 말로 울리기도 했다.

그래서, 놀랐어?”

그보다는 죄책감이 들었어. 완전히 겁에 질렸더라고. 아카바 레이지가 절대 보여주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당신이 살아있다는 확신도,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없었으니까.”

폐허에서 온 아내는 많지 않은 나이에 지옥을 보았다. 그래서인지 평범한 사람들에겐 너무도 무거운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곤 했는데, 사내가 기억하는 건 이런 것이었다. 아는 사람이 너무 조용하면 숨소리를 확인하는 습관이 있어. 못 깨어나는 사람들이 가끔 있었거든. 자고 일어났더니 옆이 시체인 거지. 처참한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랜서즈가 전장에 뛰어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동료의 위험을 감지해도, 누군가 이탈해도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다음 행동을 계산해서 움직였다. 그런 냉정함이야말로 전장에 필요한 것이라고, 사내도 생각해왔다.

막상 아내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자 사내는 그녀처럼 덤덤할 수가 없었다. 지독한 공포에 판단이 마비되었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흐릿했다. 아마, 그녀가 본 대로 엉망진창이었을 것이다. 생명에 지장이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서야 겨우 자신이 어떻게 그녀를 구해냈는지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죄책감이지?”

이 사람은 이런 데까지 찾아왔구나 싶어서. 하긴 당신은 예전부터 끈질기게 나를 붙잡았지. 결혼 얘기를 꺼낼 때도 그랬고, 프로에서 은퇴했을 때도, 전쟁이 끝나고 내가 갈 곳이 없었을 때도.”

그런 것에 죄책감을 느낄 이유 없어. 전부 내 선택이었으니까.”

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네.”

나른한 목소리가 가슴을 짓눌렀다. 장난처럼 던진 말이겠지만, 사내는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가닥이라도 진심이 담겨있을 것이 두려워서.

나와 사는 게 힘들어?”

아니. 당신은 좋은 사람이지. 그러니까 뭔가, 이 선택을 안 했더라도 당신은.”

실패인 것 같아?”

그보단, 실수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내 쪽이 아닌 당신 쪽의 실수. 어쩌면 당신은 더 나은 미래를 포기한 것 아닐까? 내가 당신 삶의 가장 불완전한 부분이 되었다면?”

이럴 때 아내의 잔인함은 아이의 순수한 악의와 닮아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가장 큰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것이다. 아마 그녀는 사내가 받을 타격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난 당신의 삶을 바꾸지 못했군.”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마음을 붙이지 못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잖아. 내가 당신을 제대로 지탱했으면 애초에 결혼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상상할 이유가 있겠어?”

아내에게 결혼이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수없이 해왔지만 이렇게 본인 앞에서 의심하게 될 줄은 몰랐다. 괴로운 점은 의심을 흩어버릴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그녀가 사라질 것을 걱정하며, 그녀가 무엇을 보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녀의 시간을 지금으로 돌리지도 못하고 있다. 사내는 처음으로 절망했다. 아내의 위태로움이 옅어지지 않았다는 현실이 아닌, 자신의 무력함에.

레이지.”

당신은 문제를 본인한테 돌리는 습관이 있어서 더 신경 쓰여. 타인의 문제는 어찌할 수 없는데 제 문제라고 하면 자기만 탓하면 그만이니, 차라리 그 편을 택하는 거겠지. 내게 결혼이 실수였던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실수였던 거야.”

왜 그래, 잘 넘어왔잖아? 지금까지 나한테 충분히 잘해줬는데.”

그랬던 것만은 아냐. 당신을 멋대로 쥐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라. 보석을 수집하는 것처럼. 이 사람이 세상에 남아주었으면 했으니까, 적어도 나를 거부하지는 않으니까, 내 옆에 있어달라고 억지를 쓴 거야.”

그들의 관계가 여기까지 온 데 사내의 욕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를 생존시키고 싶다는 것부터가 욕심이었다. 어딘가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길 바랐다기보다, 자신이 볼 수 있는 곳에서 부유하지 않고 살기를 바랐다. 그녀를 위한 행동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녀가 지금까지 버텼지만 어느 정도는 자기만족으로 그녀를 묶어두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아내는 어쩐지 슬픈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으나 사내는 할 말이 남아있었다. 그동안 눌러온 생각을 쏟아내야 했다. 더 쌓아두다간 그녀가 질식할 때서야 꺼내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적당한 단어로, 장난스러운 포장으로 서로 진심을 숨기며 사는 것으론 언제나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공허한 환상을 보고 사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고해라도 하듯이, 그는 숨겨왔던 것을 토해낸다.

사실은 아이를 그렇게 바라지 않았어. 아이가 생기면 당신이 아이만 내게 안겨주고 사라질 것 같아서. 아니면 아이를 낳고 모든 걸 소모한 것처럼 망가지거나.”

그래도 우리 애를 예뻐하잖아?”

그 다음에도, 얼마 전에도, 유산했다고 해도 당신의 몸만 걱정했지. 당신이 그 일로 그렇게 힘들어할 줄 모르고. 내가 제대로 감싸줬다면 달라졌을까. 둘째를 갖자고 했다면 당신도 그 일을 떨칠 수 있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아내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익숙한 상대를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습관이 있었다.

일단 이건 말해둘게. 당신은 계속 유산한 걸 의식하는 모양인데, 그 일 자체보다는 그때 든 생각 때문에 최근에 머리가 복잡했던 거야. 그러니까 그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떤 생각?”

몸이 나빠졌을지도 모른단 생각. 정말 그것뿐이야. 나도 우리 애를 좋아하고, 만약에 둘째를 낳았다면 그 애를 책임지려 들었겠지만 유산한 것에까지 죄책감을 안고 살 정도로 대단한 모성애를 가진 게 아냐.”

그렇게 괴로워하고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던 건 아니고?”

나도 이제 감상적인 인간이 된 모양이야. 대단한 일이 아니어도 자꾸 흔들리네.”

적당히 덮어버리려고 하긴 해도 말을 꾸며내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그녀가 이야기한 것은 전부 사실이고, 전체 정보에서 한두 조각을 의도적으로 빼놓았을 뿐이리라. 그 정도라면 수용하지 못할 것도 없다. 사내는 답을 더 조르지 않겠다는 듯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말해도 불안해할 게 뻔하지만. 난 당신이 나를 조금 더 믿어줬으면 좋겠어. 난 이제 나를 아무렇게나 내버리지 않아. 당신을 두고 사라지지도 않을 거야. 그걸 두려워하는 거잖아, 언제나.”

알고 있었어?”

그런 간절한 시선을 받으면서 모르고 살기가 더 힘들지. 나는 요정 같은 게 아니어서, 당신의 삶에서 갑자기 환상이 될 일은 없어. 물론 내 발로 사라지는 것이야 가능하지만, 그렇게 할 생각은 없고.”

, 내가 끈덕지게 당신을 붙잡고 있어서?”

삶의 목표가 자신이 아닌 사람은 공허하다. 그런 이들이 특정한 대상에게 향하는 헌신이란 실상 의존에 가깝다. 전장에서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큰 이유는, 동생과 친우를 구한다는 목표로 자신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 놀라운 헌신, 극도의 의존은 대상이 사라지면서 그녀를 흔들었다. 가장 큰 목적이 치명적인 구멍이 된 셈이다. 그녀의 의존성을 일찍이 알아챈 사내는 그것을 전략 삼아 위태로워진 그녀를 묶어두기로 했다.

그녀에게 무언가가 되는 것, 어떠한 관계를 취하는 것으로 그녀를 자신과 얽는 것. 그렇게 방향을 잡고 그녀를 잡아둔 것을 기억하고 있기에, 사내의 말에는 자조가 배어있었다. 뻔하다면 뻔한 수였으니 그녀가 자신의 전략을 시작부터 눈치챘다고 해도 놀라울 것도 없다. 능숙하게 빈정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아내의 답은 제법 희망적이었다.

아카바 레이지가 있어서, 정도면 만족해?”

내게 그 정도의 힘이 있을까.”

이제 자신이 없어? 난 예전부터 당신의 오만함이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야.”

확신이 필요한 시점이야.”

약간의 어리광일지도 모른다고, 사내는 생각한다. 그녀가 전부 그만두겠다고 선언하지 않는 한 결혼이라는 선택을 뒤집지도, 그녀를 놓지도 않을 생각이면서 약한 체 그녀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폐허를 사랑하는 법이야 이미 어느 정도 익혀두었으면서도.

증거를 원한다는 거네.”

당신이 아카바 루리로 사는 게 누구의 선택인지 말해주면 돼.”

참 빤한 걸 묻는구나. 그야, 당신의 선택이잖아?”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아내는 바로 덧붙인다.

그리고 그 아카바 레이지를 선택한 게 나고.”

그것으로 됐어? 금빛 눈이 묻고 있었다. 사내가 이전부터 느꼈지만, 그녀는 그의 약점도 그가 간절히 소망하는 것도 정확하게 짚었다. 자각 없이 그를 해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라는 답변이 돌아왔으므로, 사내는 자기최면을 한 겹 더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녀에 대한 불안을 다소나마 외면하고 살 수도 있다.

나를 계속 붙잡고 있을 수 있단 거지?”

그럼에도 한 번 더 확인받길 바라는 어리석음을, 아내는 관대하게 받아준다.

나는 계속 여기 있을 테니까, 안심해.”

여기?”

당신이 있는 곳.”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남편이란 이름으로 곁에 있어준 사내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일 것이다. 적어도 그에겐 지금을 약속하겠다는 뜻이니까. 그를 위해서 사랑하지도 않는 시간에 머무르고, 손을 뻗으면 잡혀주겠다고 말하는 셈이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고 사내는 가만히 아내를 안았다. 그녀의 체온을 느끼는 것만으로, 그동안 그의 머리를 지배하던 암담한 생각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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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