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슌 중심] 성역 (R의 경우)

2018. 5. 31. 23:50 from 02

 

화면에 화려한 도시의 풍경이 그려진다. SF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화사하고 미래적인 건물 단지. 저마다 여유와 기쁨을 안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 영상은 계속 초점을 옮겨 도시의 구석구석을 비춘다. 아이들이 뒤엉켜 노는 공터며 무대에 올라 관객의 환호를 받는 엔터테이너까지. 아름다운 풍경의 끝에서는 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돌아보며 손을 내밀고 있다. 웃음 띤 얼굴은 도시의 색채만큼이나 화사하다. 영상은 언제나 거기서 일시정지한다. 화면 너머로 도시를 감상하던 사내는 영상에 표시된 날짜를 확인한다. 지금으로부터 몇 개월 전,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과거의 단편.

그러나 다음 순간 화면에 떠오르는 것은 종말을 맞은 도시였다. 색채 잃은 세계는 잿빛으로 물들어, 뼈대만 남은 폐허는 음울하다. 짧은 기간 동안 너무 많은 것이 변했다. 갑작스레 신벌이라도 떨어져 모든 것을 파멸시킨 것 같다. 한때 아름다웠던 도시에 닥친 재앙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몇 명만이 안다. 이곳에서라면 겨우 두 명. 영상을 거듭 돌려본 사내와, 도시를 사내에게 처음으로 보여줬던 여자.

먼 곳에서 온 협력자는, 전쟁에 짓밟힌 고향을 사내에게 소개했다. 자신이 어떤 지옥에서 왔는지, 침략자가 모두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말하기 위해서. 살아남은 자는 극소수였고, 그나마 외부로 나와 처참한 상황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거의 유일하다고 했다. 사내는 언젠가 그녀를 덮쳤던 침략자를 처단할 작정이었으므로, 그녀에게 함께 싸울 것을 약속하며 제 편으로 끌어들였다.

지금 그녀는 사내의 회사에서 전사 선발을 목적으로 연 대회에 출전하고 있다. 전쟁을 버텨온 여자에게 대부분의 상대는 시시한 수준이었으므로, 사내는 그녀에겐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녀의 역할은 선별. 참가자를 하나씩 떨어트리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며, 실력자를 가려내면 그만이었다. 그녀가 최종적으로 남긴 자들은 사내의 전사로 뽑힐 것이다. 사내의 지휘에 따라, 전쟁을 끝내고 침략자를 처단하는 정예병으로.

조금 전 대회 첫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여자는 경기장을 빠져나오자마자 사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사내는 자신에게 돌아온 여자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맞았다.

수고했다, 쿠로사키.”

“<미래도시 하트랜드>라니, 짜증나는 장난이었어. 이러라고 너에게 하트랜드를 보여준 게 아닌데.”

돌아온 것은 인사는커녕 퉁명스러운 말이었다. 거기에, 감정이라도 치밀었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그녀의 경기를 지켜본, 그리고 경기에 관여했던 사람으로서 사내는 여자의 불만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챈다. 그녀의 경기에, 그는 다소 짓궂은 선물을 준비했다. 그녀가 사랑했던 고향의 풍경을 조금 전의 영상에서 따와, 경기의 필드로 만든 것이다. 여자는 이제 어디에도 없는 도시를 배경으로 적과 싸워야만 했다.

너의 투지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였다면?”

그런 것 없이도 아카데미아에게 무력하게 당하진 않아.”

물론 나는 네 실력을 믿지만, 뻔히 눈앞에 있는 자극제를 쓰는 것도 나쁘진 않지.”

기분 나쁜 놈.”

여자는 협력자가 들여다보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얼굴을 찌푸린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으니 만족해.”

그래서 들여다보고 있었나?”

날카롭게 찔러대는데도 사내의 시선은 자꾸만 영상에 머무른다. 여자는 그가 본인과는 무관한 도시의 기록에 이전부터 흥미를 보이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먼 세계에 대한 관심인지 협력자에 대한 탐구인지,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은 부분이었다. 다만, 사내가 들여다보는 자료의 실체는 그녀의 내면. 정확히는 고향에 대한 그녀의 기억 그 자체. 그가 자신의 기억 속 무엇에 집중하는지는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 찾는 것이라도?”

여자가 말을 던지자마자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영상을 다시 틀어, 도시가 붕괴하기 직전에 정지시킨다. 소년이 막 등장한 시점. 한순간 감상에 젖은 것인지, 여자는 오래도록 소년을 눈에 담았다. 금빛 눈에 복잡한 감정이 드리워진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이 사람은 누구?”

네게 그런 것까지 대답해줄 의무는 없을 텐데.”

돌아오는 답은 냉랭하다. 딱딱한 어투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여자가 드러나게 선을 그으려 한다는 것. 이미 다 공개한 것에 더 숨길 부분이 있단 말인가. 공연한 오기로 사내가 재차 물으려 할 때.

그 애는 살아남았어.”

여자가 선수를 쳤다. 그 이상의 말을 막으려는 뜻을 노골적으로 내비치며, 여자는 사내에게서 리모컨을 빼앗아 영상을 껐다. 사내가 이해하기에, 그것은 분명한 거절이었다.

 

*


사내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에는 꺼림칙하게도, 기억을 열람하는 기술이 있었다. 사람의 기억을 영상의 형태로 변환해 읽어내는 것. 단순히 기억을 들여다보는 단계는 물론, 아예 하나의 영상으로 추출해 보관하는 것이며 확보한 기억에다 특정한 키워드를 몰래 끼워 넣는 것까지도 가능했다. 창업주가 들여온 기술은 회사를 위해 쓰여, 자료실에는 몇몇 사람에게서 뽑아낸 기억이 영상자료로 슬그머니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대상의 약점이 될 수도, 회사의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어떤 위험한 인물이 나타나더라도, 그의 기억을 꺼낼 기회만 만든다면 회사는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그러나 아비가 남긴 기술을, 2대 사장인 사내는 아주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대상은 대개 자신이나 제 심복. 목적은 스스로 잊어선 안 될 것을 언제나 기억하기 위해서. 혹은 정보원이 입수한 것을 바로 자료로 변환하기 위해서. 자료로 남겨둔 기억 중에는 그가 현재의 목표를 처음으로 생각한 날의 기억도 있다. 시간이 지나며 삶에서 희미해진 기억은 영상으로는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기억보다도 더 선명한 기록이다.

그런 사내에게, 얼마 전에 협력자에게서 받아낸 기억은 특수한 경우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완전한 타인의 것인 동시에 정보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들 뿐. 친분도 없는 이방인에게 동의를 구해서 기억을 읽어냈지만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자료는 되지 않는다는 건 사내가 제일 잘 알았다. 그런데도 그것이 특별했던 이유는 하나. 사내에게 분노할 이유를 준다는 것.

피해자가 바라본 전쟁의 기억을, 사내는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남겨둘 생각이었다. 세계에 전쟁을 가져온 자를 계속 증오하기 위해. 그에게 무엇을 돌려주어야 하는지, 자신이 어떤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지 잊지 않으려. 그러나 정작 선명하게 남는 것은 처참한 고통보다, 고통이 찾아들기 직전의 찬란한 기억이었다. 여자의 삶에서 아마 그리 길지도 않았을 행복했던 시간. 그 속엔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 그녀의 손에서 흩어지고 눈앞에서 부서진 것들이 온전하게 존재한다.

죽은 것들의 시간이다. 여자는 지금까지 죽은 것을 안고 살아왔다.

너무 많은 상실에 닳아서인지 살아남기에도 바빠서인지 그녀는 과거밖에 끌어안지 못한다. 희망찬 미래를 생각하며 자신을 위안하지도, 현재의 사람에 정을 붙이지도 못한다. 과거가 맺힌 눈으로 매일 그날의 싸움에 뛰어들 뿐. 어쩌면 여자는 스스로를 고향의 잔해에 함께 묻어두고 전사로서의 자신만 남겨왔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상도 목표도 없이 적을 쓰러트리는 것으로 여자는 하루하루 삶을 연장해왔다. 그런 사람이기에, 사내는 그녀의 평범했던 시절에 자꾸 눈을 두게 되는지도 모른다. 생존을 생각하지 않고 일상을 즐기는 그녀가 너무도 신선해서.

한편, 사내가 여자의 낯선기억을 열람하는 대가로 그녀에게 내놓은 것은, 수년 전 자신의 기억이었다. 머잖아 세상을 덮칠 전쟁에 대해 듣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한 때. 열세 살의 소년은 지금처럼 치밀하지도 강하지도 못하면서 그저 분노하고 있었다. 악을 막아야 한다는 막연한 정의감에 빠져 있었다. 세상은 알지 못하는, 그의 엉성하고 감정적이던 시절. 그런데 뜻밖에도 여자는 그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사내는 과거의 자신을 보여준 후로, 자신을 대하는 여자의 태도가 부드러워진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기억을 공유하며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정보 공유를 통한 신뢰 확보.’ 여자에게서 기억을 얻어내기 위해 둘러댄 것에 불과한데도, 여자는 정말로 그 말을 믿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사내가 다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 것일까. 사내는 서로의 약점을 공유하는 것으로 친밀해진다고 믿는 무리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여자의 기억 속 소년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어느 날 회사 주변의 감시카메라 영상을 확인하던 사내는 묘하게 낯익은 사람을 발견했다. 그가 아는 누군가와 빼닮은 사람이자, 여자의 기억이 끝날 때면 꼭 나타나던 얼굴. 영상에서와는 다르게 입고 있는 옷은 해졌고 앳된 얼굴엔 웃음 대신 피로가 비쳤으나 분명히 그 소년이었다.

[유토.]

사내의 곁에서 영상을 함께 보던 여자는 낯선 이름을 입에 담았다.

[유토?]

[내 동료야.]

동료라는 이름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사내는 모를 수가 없다. 타인을 지독하게 경계하는 그녀가 절대적으로 믿는 존재로 그녀와 지옥에서 함께해온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이름이 그것이었다. 특히나, 먼 고향에서 같은 목적지를 향했다는 것은 두 사람이 동료로서도 특별한 존재였으리라고 짐작케 했다.

하나 흥미로운 것은, 소년의 태도. 같은 재앙을 겪었음에도 소년은 여자와는 뚜렷하게 다른 입장을 보였다. 희망을 믿고, 인간의 악의를 바라보면서도 정의로운 결말을 꿈꾼다 그의 싸움은 미래를 위한 것이었고 정의의 수단이었다. 재앙 속에서 빛을 보는 사람도 존재한다지만 보통의 사람에게 기대할 단계는 아니었다. 황폐해진 생존자 곁에, 지옥을 보고도 신념을 말하는 이상주의자인가. 함께 움직여온 동료라기에는 기묘한 조합이었다.

두 사람이 지켜보는 동안 소년은 여러 번의 위기에 몰렸다. 숨어든 적을 만났고, 뜻밖의 상대를 마주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도 소년에 대해 굳건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유토가 그런 공격에 당할 리 없어. 유토라면 알아서 상대하겠지. 여자의 믿음대로 모든 위험이 지나갔을 때. 사고가 있었던 것인지 눈앞에서 카메라의 영상이 꺼졌다. 여자는 순식간에 소년을 놓치고 만다.

그러자 바로 여자의 태도가 바뀌었다. 유토를 구하러 가야 해. 유토가 저기에 있는데. 덤덤했던 목소리는 어느새 흥분해 있었다. 초조해한 끝에 뛰쳐나가려다 사내의 수하에게 가로막히기도 했다. 그녀가 지금껏 그렇게나 입에 올리는 이름이 있었던가? 숨을 끊으려다 놓친 적도 저만큼 찾지는 않았는데. 모든 것을 앗아간 침략자의 이름도 그렇게 되뇌지 않았는데. 문득 사내는 여자의 기억 속에서 소년이 나타나는 방식을 떠올린다. 주인공처럼 찬란하게, 한 장면을 오롯이 차지하면서.

그 순간 사내는 여자의 행복했던 기억의 마지막 장면에 하필 그 소년이 등장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소년은 말하자면, 그녀의 성역인 것이다. 행복했던 기억을 상징하는, 결코 세상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 사내는 여자가 바로 그 성역 때문에 언젠가는 정말로 불행해지리라고 직감했다. 그녀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그렇게 무른 인간은 최소한 고난에 부딪힐 것이고 심하면 깨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유감스럽게도, 소년은 정말로 깨지고 말았다. 여자가 그의 행방을 잃은 바로 그 날에. 소년은 여자가 볼 수 없었던 곳에서, 생각지 못한 적에게 쓰러졌다. 현장에 보낸 수하로부터 소식을 들은 사내는 여자에게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한순간 고민했다. 그렇게나 소중한 것을 불행히도 잃게 되었다고 통보해야 할 것인가. 그게 아니면, 그녀가 흔들리지 않도록 어느 시점까지는 감춰야 할 것인가.

사내는 후자를 택했다. 연고 없는 이방인인 그녀는 어차피 정보를 입수하는 데 한계가 있다. 사내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수색도 추적도 불가능하다. 뻔한 약점을 알기에 사내는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겼다. 협력자를 동요하게 할 수 있을 것을 미리 막는다는 명목으로. 수하는 몇 번이나 여자가 그를 찾는다고 보고했지만, 적당한 이유를 대며 사내는 회피해왔다.

사내가 여자를 만나준 것은 사건으로부터 며칠은 지나서였다. 여자가 답이 돌아오지 않는 통신기에 연락을 시도하는 것에도 지쳤을 무렵. 여자는 불신 가득한 얼굴로 나타나 그에게 동료의 행방을 캐물었으나, 드러나는 단서는 없어 그를 제대로 몰아세우진 못했다. 사내가 앞으로의 계획을 내세우며 슬그머니 화제를 눈앞의 싸움으로 돌리던 때, 여자의 말이 그를 급습했다.

네가 엑시즈에서 태어났더라면 나보단 유토에 가까웠겠지.”

그 점은 마음에 들어. 여자는 덧붙인다. 상상도 못한 가정에 사내는 가벼운 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그와 닮았나?”

조금이지만. 굳이 말하자면 정의를 포기하지 않는 점이.”

나는 그렇게 정의로운 인간은 못 되는데.”

정의를 믿고 있잖아.”

그녀의 성역이 된 자가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닮은 자에게라면 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내는 그녀에게 보여준 열세 살의 자신이, 아니, 그때의 어설픈 태도가 여자에게 인상적이었을지 모른다고 그제야 생각했다. 열세 살 아이의 정돈되지 않은 분노와 설익은 정의감이, 전쟁 속에서 빛을 갈망한 소년의 이상과 조금은 닮아있어서.

그런 모습을 동경하기라도?”

글쎄. 잘 모르겠어. 나는 그런 인간이 되진 못하리란 건 알겠지만.”

자신을 포기하는 만큼 여자는 소년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그를 성역으로 두면서 괴로운 삶을 꾸역꾸역 이어나간다. 가장 지친 이들이 종교를 찾는 것처럼. 소년은 그녀로선 절대 닿을 수 없는 이상이고, 누구의 발길도 허락할 수 없는 성역이다.

누구나 정의를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냐.”

알고 있어. 강한 사람이 선택하지.”

너는 다른 방향으로 싸우고 있지 않나.”

그렇게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무장하지 않은 정의는 다치기 쉽다. 유토는 무장하고 싸우는 네게 보호받고 있었을 거야. 너 같은 인간도, 재앙 앞에선 필요한 거지.”

그녀의 품에 있었더라면 소년은 무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소년의 모습은 험한 세상에선 약점이었으니까. 지옥에서 생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낙관도 이상도 아니라, 하루하루를 버티려는 의지며 저항심인 것을.

그래봤자 지금은 유토의 행방도 모르는데.”

금빛 눈엔 책망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그보다 더 무거운 것이 드리워져 있었다. 가책을 불러일으키는 처연함. 물론 사내는 그것을 간단히 외면한다. 그런 것에 넘어갈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녀에게 숨기지도 않았다. 지휘관으로서 전사를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혹은 대단찮은 욕망에 잠깐 흔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을 쥐고 있고 싶다는 얄팍한 심리. 사내는 여자가 새로운 불행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 동시에 그녀가 소년에게 향하는 감정을 계속 감상하고 싶었다. 황폐한 인간이 겨우 붙들고 있는 애정이 얼마나 처절한 것일지, 뻔히 짐작하고서도.

여자가 소년을 포기할 리는 없으므로 그녀도 언젠가는 그의 종말을 알아차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시점은 사내가 바란 것보다 빨랐다. 사내가 선발된 전사를 이끌고 적진으로 향하려던 때, 여자는 얼마간 묻어두었던 이름을 꺼내고 말았다. 유토에 대해 듣고 싶은 게 있어. 언뜻 평범한 말처럼 느껴질 수 있었으나, 그것은 사실상 선언이었다. 사내의 입으로 그가 지금까지 무엇을 숨겨왔는지 듣고 말겠다는.

이전에 사내에게 캐물었을 때와는 달리, 이번의 그녀에겐 동료의 행방을 짐작할 증거가 있었다. 소년이 먼 타지에서 쓰러지며 남긴 흔적.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언제나 품고 다녔을, 그의 무기. 사내가 입수해 여자 몰래 뜯어보았던 것. 자신에게 무슨 말이 돌아올지 짐작하면서도, 사내는 수하가 전해온 여자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했다.

그래. 스탠더드를 떠나기 전에 그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겠군.”

여자가 찾아오길 기다리면서 사내는 그녀의 기억 속 소년을 떠올렸다. 화사한 추억 속에서도 가장 아름답게 빛나던 것. 그렇게나 찬란하게 남지 않았다면, 어쩌면 자신도 그를 조금 가엾게 여겼을지도 모르는데.

 

*

 

여자는 사내에게 바로 따지고 들지 않았다. 동료의 결말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어서인지, 아니면 사내에게 한 가닥 남은 기대마저 떨쳐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여자를 데려온 사람은 혹 그녀가 폭발하지 않을까 겁에 질린 얼굴이었으나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사내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오랜 시간, 두 사람의 시선만 얽혔다. 불러들인 주제에 사내가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버티자, 결국 여자가 먼저 독기 서린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언제부터 알았어?”

앞부분이 잘려나간 말이었지만 의미를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온갖 감정이 응축된 질문을 사내는 가볍게 받아친다.

그가 마지막으로 잡힌 곳에 나카지마를 보낸 때부터.”

오래도 숨기셨군.”

그의 디스크를 연구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그가 남긴 것은 랜서즈에게 보탬이 되었지. 그에 대해선 감사하고 있어.”

나는 말이야, 아카바. 너 같은 부류가 정말…….”

징그럽다고?”

사내는 짐짓 심술궂게 말한다. 여자는 혀가 굳은 것처럼 말을 잃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사내는 그녀를 찔러댄다.

이상하군. 네가 나에게 기대한 건 협력자로서의 의무와 리더의 역할이지, 상담사의 모습이 아니었을 텐데.”

상대에게 정보를 숨기고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는 게 협력자라고?”

그때 최선이라고 판단한 걸 했을 뿐. 그보다, 너는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손댈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은 포기하는.”

그런 사람이기에 그녀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텐데.

전쟁의 생존자로서 동료에게서 연락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여자가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사내가 입수한 동료의 통신기에 며칠이나 연락을 시도했다. 주인을 잃고도 계속해서 진동하는 통신기는 쓸쓸했다. 여자의 보답 없는 시도는 이미 사라진 희망을 억지로 되살리려는 노력 같기도 했다.

……전장에 있다 보면 포기를 학습하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고 돌아오지 않는 게 매일 쌓이니까.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면 포기하는 게 편해.”

사내는 여자의 눈앞에서 사그라졌을 것들을 떠올린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 속에 비치는 건, 이제 무엇도 남지 않았다. 겨우 이곳까지 살려온 것도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꺼졌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포기할 수 없는 최후의 선은 있어. 무엇 하나 제대로 잃어본 적 없는 너는 알지 못하겠지만. 포기해야 할 시점을 누구보다 빨리 아는 우리도 끝까지 끌어안는 게 있단 거야.”

너에게 그 최후의 선이 누구였는지는 알 것 같군.”

사랑하는 것은 전부 사라져. 루리가 사라지고는 내가 지킬 것은 유토밖에 남지 않아서, 나는 유토에게만은 내일을 주고 싶었어. 내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그 두 사람이라면 나와는 다르니까, 내가 만들 수 있는 것보다 나은, 미래를…….”

지옥 속에서 구원은 없고, 먼 빛은 자꾸만 희미해진다. 성역으로 삼은 사람에게 미래도 희망도 맡겼지만, 그들조차 넘겨준 것과 함께 흩어질 뿐이다.

분명히, 그 애들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믿었는데. 여자는 흩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겨우 말을 마쳤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데, 터져 나오기는커녕 맺히지도 않는다. 너무 많은 좌절과 끊이지 않은 실패가 그녀를 그만큼 메마르게 했다.

그 날 네가 뛰쳐나갔다고 그를 구할 수 있었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아. 우리 같은 인간은 기적을 믿지 않거든. 그냥, 후회를 덜 하고 싶은 거야.”

그녀 같은 사람이나 할 법한 말에 사내는 그녀가 모르는 것 하나를 떠올려냈다. 그러고 보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그에게 남아있었다. 그녀의 성역과 관련된 것. 여자의 처참한 처지에 위로를 건네는 대신, 그는 자신이 쥔 것으로 슬그머니 이야기를 돌린다.

말해줄 게 있는데, 그 날 나카지마가 입수한 건 유토의 디스크만은 아니었다.”

그러면?”

그의 덱도 남아있었지.”

넘겨줘. 내가 보관할 테니까.”

그의 에이스 몬스터는 사카키 유우야에게 넘어갔는데도?”

그가 남긴 것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벌써 빠져나갔다. 그의 마지막 흔적도 어차피 불완전한 것일 뿐이다. 사내의 말에 깔려있는 말은 그런 것. 돌아올 답이 무엇인지는 뻔한데도 사내는 괜히 그녀를 한 번 시험하고 싶어졌다. 이미 쓰러진 사람이 살아있는 그녀를 지배한다는 것이 어쩐지 불편해서.

유토를 상징했던 다크 리벨리온은 빠졌지만, 팬텀나이츠는 유토와 함께해온 거야. 내겐 그것만으로 의미가 있어.”

그러나 여자는 넘어가지 않는다. 그녀의 내면에서, 소년은 사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숭고하다. 몇 되지 않는 흔적을 그러모으는 것만으로 위안이 될 정도로. 그제야 사내는 여자가 안타깝다. 그녀의 성역이 좀 더 강한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언제까지나 그녀의 희망으로 남아있을 수 있도록, 꺾이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확실하게 그녀의 곁에 붙어있을 자신이 조금 더.

좋아. 나보다는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낫겠지. 그리고 이번에 너의 일에 대해 마음대로 판단해서 행동한 것에 대해선 사과하지. 앞으로 랜서즈로 움직이면서는,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신경 쓸 거 없어. 사실 나도 너를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으니까. 그쪽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착각했었네.”

조금 더, 그와 닮았더라면. 사내는 거기서 생각을 흩었다.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그래봤자 소년을 닮은 누구도 그녀의 새 희망이 될 수 없는데. 소년이 그녀의 성역이었던 것은 이상주의자여서도 강해서도 아니라, 그저 소년이었기 때문인데. 누구나 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서 사내는 패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뒷맛이 썼다. 아마도, 여자가 그랬듯이 그도 기대해선 안 되는 것을 한순간이나마 기대했기 때문에.

그래도 너는 어떤 처참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것 같아서, 안심이 돼. 나는 최소한 너와는 끝까지 가겠지.”

사내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료가 남긴 것을 받아든 여자는 그가 실감한 한계에 못을 박는다. 사내는 그녀가 사랑하는 것과는 애초에 다른 영역에 있다는, 그렇기에 잃고 아파할 일도 없을 거라는 확인사살. 대화의 끝에 고통스러운 사실도 천천히 씹어 삼킨 듯, 그렇게 말하는 여자는 제법 평온한 얼굴이었다는 것까지 완벽하게 그를 찌른다.

여자가 돌아가자마자 사내는 자료실로 향했다. 보관된 기억을 죄다 꺼내, 최근에 들어간 것을 찾아낸다. 자신의 기억을 주고 받아낸 것.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때의 기록을. 수없이 들여다보았던 타인의 기억을 사내는 망설임 없이 폐기한다. 이제는 생각하는 것만으로 처참해져서, 차마 남겨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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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