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여슌] 행복한 부부

2018. 4. 30. 21:52 from 02

 

쏟아진 와인이 흰 옷을 적셨다. 옆 사람의 잔이 기울어진 탓에 말끔한 옷에 흉한 얼룩이 생기는 것을 보고도 사내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다. 당혹스럽긴 하지만, 사소한 실수였을 뿐이다. 더구나 잔의 주인이 아내였다는 점에서 더더욱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오랫동안 먼 곳에서 살았던 그의 아내는 가뜩이나 이곳이 익숙지 않아,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겁에 질리곤 했으므로.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에게, 사내는 안심시키려는 듯 가벼이 웃었다.

, 새로 가져다줘?”

아내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사내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 그렇게 불편하지도 않고, 손님도 계신데 갈아입는다고 법석인 게 오히려 불편하지 않겠어?”

그러면서 마른 수건을 가져와 테이블을 포함해 술이 쏟아진 곳을 가볍게 닦는다. 성가신 일을 빨리 종료하고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한 행동일 것이다. 그 모습에, 부부를 찾아온 손님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맥필드 씨는 자상하네요.”

보이는 대로죠.”

여자는 남편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한다. 유명 엔터테이너인 사내는 사람을 상대하는 데는 거의 도가 튼 인간이었다. 몸에 밴 예의로 누구든 흠 없이 대접하는 건 물론이고, 상황에 적합한 이미지를 덮어쓰는 것도 가능하다. 너무도 능숙한 사람이기에 그녀는 때로 남편이 섬뜩하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건, 뒤로 어떤 일을 꾸미건 사람들 앞에서야 완벽한 인간일 수 있으니까. 사람들은 그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사람들이 보는 모습 아래에 깔린 그의 본모습은 무엇일까. 후자는 같이 사는 사람으로서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돌발적인 사고는 그렇게 사내의 대처로 빠르게 마무리되고, 손님은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낸 후 돌아갔다. 사람을 보내자마자 여자는 소파에 기대앉으며 얼굴에 걸쳐졌던 긴장을 싹 지워버린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얹고 있던 것이 가벼운 화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하네. 새 옷이었는데 말이야.”

방에 들어갔던 사내는 엉망으로 얼룩진 옷을 갈아입고 나오며 아내에게 샐쭉거린다. 와인을 쏟은 것이 고의라는 것을 확신하고 꺼내는 말이었으나, 여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친다.

꼴이 대단하던데. 그쪽이 피를 뒤집어쓴 것 같아서 조금 즐거웠어.”

나한테 총이라도 갈기고 싶었던 모양이지?”

알면서 왜 그러실까.”

사람들 앞에서의 돌발행동은 곤란해, 셰이. 우리는 행복한 부부잖아.”

데니스&셰이 맥필드. 사내는 팔찌에 새겨진 이름을 손가락으로 덧그리며 말했다. 이전에 아내와 함께 맞춘 팔찌에는 그들 부부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만큼 드러나게 다정한 모습을 취하는 부부인데, 둘만 남았을 땐 장난이라기엔 너무 살벌한 대화가 오간다. 결국 마지막에 사내가 달래듯 부드러운 말을 택했음에도, 여자는 깔끔하게 긍정하지 않는다. 무표정한 얼굴로 반쪽짜리 답변을 돌려줄 뿐.

눈에 띄게 문제가 될 부분은 없었을 텐데.”

물론, 너는 능숙하니까. 그래도 말이야. 그렇게 조금씩 틈을 만들다간 어느 순간에 진짜 감정이 드러날지도 모른다고.”

그럴 때쯤이면 그쪽이랑 같이 살고 있지 않을 거라서.”

임무만 끝나면 나와 완전히 작별할 생각이야?”

무슨 상관이지? 어차피 전부 짜고 하는 짓인데.”

데니스와 셰이, 두 사람의 팔찌에 새겨진 이름. 모두가 부러워하는 화목한 부부의 모습. 두 사람에 대해 세상에 알려진 것과 두 사람이 내보이는 것 모두, 적당히 설정한 이야기. 그 중 무엇도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어쩌다 같은 사람에게 고용되어, 파트너로서 함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부부로 가장하고 있을 뿐. 그들이 실제로 서로에게 품은 감정은 애정은커녕 불편한 무언가였다. 특히나 여자는 남편역을 맡은 자에 대해 깊은 적의를 품고 있었다. 아마, 이렇게 파트너로 얽히지만 않았어도 그를 몇 번이고 공격했을 것이다.

반대로 사내가 아내역에게 품은 것은 마음의 빚. 그녀는 존재 자체로 그가 묻어둔 죄를 떠올리게 만든다. 세상은 모르나 사내는 계속 기억할 수밖에 없는 잘못을, 그녀는 때로 그에게 노골적으로 언급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살짝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여자가 그나마 위안을 얻는 길이었다.

그녀가 먼 나라에서 이곳까지 온 것은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과거, 사내가 빼돌려 자기네 수장에게 넘겼던 사람. 그녀의 하나뿐인 여동생을. 납치된 동생을 구하고, 동생을 위협한 자를 처벌한다 여자의 그러한 계획은 절반만 실행할 수 있었다. 동생의 납치에 관여한 사내를 만났을 때, 이미 동생은 살해당한 후였으니까. 나머지 절반도 완료된 것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사내와 파트너가 되어, 동생을 죽게 한 그의 옛 보스를 추적하고 있으므로.

두 사람의 고용주는 사내의 옛 보스를 적대하는 사람이었다. , 여자와는 같은 적을 둔 자로, 여자와 함께 적을 처리하기 위해 적에 대한 정보를 가진 사내까지 고용했다. 또한 두 사람을 부부로 위장시켜 적측 간부들에게 접근시키기로 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고용주의 요구에도 파트너와 위장 임무의 설정을 껄끄러워하던 여자에게 사내는 말했다.

[너는 적응력이 좋고 나는 연기를 잘하니까, 우리는 완벽한 부부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정말로 그의 말대로 되었다. 그들이 서로에게 향하는 감정이 어떻건, 그들의 실제 모습이 어떻건 세상에선 그들을 이상적인 부부 그 자체로 해석하고 있었으니. 물론 두 사람이 부부라는 설정을 완전히 흡수한 것은 아니었다. 여자는 적대하는 자를 남편처럼 대한다는 설정에 빠르게 적응했고, 사내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을 연기했을 뿐.

나는 네게 좀 더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쿠로사키.”

그렇기에 여자는 사내의 이런 말이 수상쩍다. 어차피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지금의 모든 것은 끝이 정해진 연기일 뿐인데, 그는 무엇을 더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도 제 본명까지 들먹이면서, 진심인 체. 의심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으니 사내는 또다시 은근한 말을 던진다.

앞으로 아이도 키우고, 동물도 한 마리 데려오고. 계속 같이 사는 건 어때? 진짜 부부처럼.”

무슨 자격으로 그런 발상을.”

여자는 알아챈다. 자신과 부부를 연기하는 사내가, 과거의 죄를 적당히 잊고 싶은 것임을. 자신과 좋은 풍경을 만드는 것으로 평화라는 이름의 면죄부를 받으려 한다는 것을. 사내가 임무를 위한 위장을 현실로 끌어올 생각을 하는 건, 상대에게 애정이 생겨서도 괜한 낭만에 젖어서도 아니고 상대가 피해자의 언니이기 때문. 피해자의 대리인으로서 그를 용서할 존재를 확보해 멋대로 움직이고 싶을 뿐이다.

, 사내가 요구하는 것의 뿌리를 거칠게 요약하면, ‘과거의 죄로부터 편해지고 싶다는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여자는 소중한 동생을 앗아간 자가 그토록 비겁한 욕망을 당당하게 꺼낸다는 것에 구역감이 치밀었다. 동생의 미래는 그로 인해 완전히 닫혀버렸는데, 그는 자신의 미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 나는 나쁘지 않은데. 우리의 결합, 모양은 좋으니까 말이야.”

그러나 사내는 여자의 말을 간단히 외면한다. 어차피 떳떳할 수 없는 상대에게는 조악한 욕망을 포장할 이유도 없다. 그녀가 수용할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으므로, 뻔뻔한 욕망을 밀고 가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반응 기억하지? 사람들이 다 좋게 봐주잖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아. 화목한 부부, 좋은 파트너. 그렇게만 생각한다고. 나는 어차피 연애나 결혼에 특별한 로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적당한 상대만 만난다면야 누구라도 오케이.”

내가 그쪽을 선택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쿠로사키도 낭만주의자는 아니겠지만 말이야. 너 혼자서는 이곳에 절대 뿌리내릴 수 없다는 걸 알잖아. 아카바 레이지가 네 신분을 보증해주는 건 임무가 끝날 때까지. 가족으로 등록되면 여기서 계속 살 수 있을 텐데도?”

아카바는 이번 일만 끝나면 나에게 더 요구할 건 없다고 했어.”

의외로 순진하네. 너는 아카바를 몰라. 그 집안 인간들은 전부 징그럽게 똑똑하고 치밀하지. 촘촘한 거미줄을 쳐두고 먹잇감이 걸려들게 해. 불쌍한 표적들은 눈치채지도 못하고 그들에게 묶일뿐더러, 눈치를 챈 시점엔 이미 손을 쓸 수 없어. 너처럼 약점이 뚜렷한 인간이라면 특히나 벗어날 수 없지. 아카바 레이지가 LDS 습격이나 밀입국 같은 문제를 들먹이면 너 혼자서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사내는 걸핏하면 저런 식이다. 여자가 애써 붙잡고 있는 계획과 미래에의 기대를 비웃고, 그녀를 자신의 비관적인 예언에 끼워 맞추려 드는 것이다. 그의 본질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에게 해온 것처럼, 그녀를 교묘하게 조종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동생도 이런 식으로 꾀어 사지에 몰아넣었을까. 갑자기 치미는 감정에, 여자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그쪽은? 그쪽은 아카바로부터 자유로우신지?”

지은 죄가 있으니 시선을 피할 순 없겠지만, 일단은 사면을 받아서 말이야. 네겐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네.”

너도, 네가 가진 정보만 전부 빼내면, 그럼 아무것도 아냐. 아카바가 그렇게 교활한 인간이라면, 어차피 너도.”

네 희망사항이겠지.”

더 물어뜯기를 기대했으나, 여자는 심술궂은 말에 답하는 대신 엷은 웃음을 걸치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자신의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참패의 증거임을 사내는 안다. 그녀가 돌려준 표정은 완전히 질려버렸다는 의미이므로. 여자는 그에게 아무런 기대를 걸지 않는다. 그가 언젠가는 스스로의 죄를 반성하리라는 기대도, 언젠가는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리라는 희망도 없다. 가망 없는 인간이라고 결론지었다면, 차라리 악담을 퍼붓는 게 나았을 텐데. 여자는 그를 걸핏하면 자신의 세계에서 잘라낸다.

상대할 가치가 없다, 아예 그라는 인간을 포기하듯이.

때문에 사내에겐 기회가 없다. 실컷 빈정거리고 자극해, 여자에게 틈을 만들고 파고들려고 해봤자 어느 시점부터 여자는 그를 상대해주지 않으니까. 사내는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나한테 듣고 싶은 것 없어?”

사내는 자신을 향한 여자의 냉소며 매도는 간단히 튕겨낼 수 있는 주제에, 그녀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 돌아서는 여자의 등에 급하게 말을 꽂은 것은 그래서였다.

글쎄, 내가 뭘 원하는 줄 알고?”

내가 아카데미아 소속이었을 때의 일 같은 것?”

거기서 여자가 돌아보았다. 짐작대로, 여자는 그의 이야기에 아주 관심이 없지는 않았다. 그가 어떤 인간인지는 들여다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 안에, 분명 동생의 일이 있을 테니까. 동생이 적의 표적이 되어서 어떻게쓰였을지, 조금이라도 긁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내는 여자의 간절함이라도 이용하고 싶었다.

어디까지 말해주려고?”

아카바에게 공개하지 않은 것까지 말해준다면, 쿠로사키는 어쩔 건데?”

정보에 따라 다르지.”

이렇게 하자. 내가 정보를 꺼내면 너는 네 이야기를 하는 거야. 서로의 이야기로 값을 지불하는 거지.”

금빛 눈이 한동안 사내를 담았다. 고용주는 사내를 포함한 많은 사람에게서 적에 대한 정보를 긁어내면서도 여자에겐 말을 아꼈기에, 그녀는 꽤 초조해져 있었다. 속 모를 사내의 변덕에라도 기대 필요한 것을 얻어내고 싶을 정도로. 고민 끝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언제나 자신을 괴롭히던 의문을 꺼냈다.

왜 루리였어?”

무슨 뜻?”

아카데미아의 표적이 왜 하필 루리였는데?”

입 안에서만 맴돌던 동생의 이름은 오랜만에 터져 나온다. 세상에 없는 사람의 이름을 꺼내는 것은 비참했다. 그것도 그 사람을 앗아간 자 앞에서.

나는 프로페서의 최측근이 아니었으니 상세하겐 듣진 못했지만, 프로페서가 자신의 연구에 쓸 사람을 구한다는 말이야 아카데미아에 퍼져 있었지.”

그 애가 어떻게 될지는 알고 있었고?”

말해준 사람은 없었어. 나도 묻지 않았고. 그런 것까지 신경 써서는 아카데미아의 일은 못 해.”

왜 그 일을 맡았는데?”

그야, 명령이 떨어졌으니까. 별로 대단한 이유도 아니었어.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야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어?”

동생의 일에 열을 올릴 것이라 기대했는데, 여자는 사내의 말을 의외로 덤덤하게 듣고 있었다.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고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건조하다. 답을 재촉하는 기색도 없다. 초조해지는 것은 도리어 사내 쪽이었다. 그녀를 말로 매어둘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틈을 만들어 흔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사내는 여자가 물은 적도 없었던, 그리고 묻지 않는다면 꺼낼 이유도 없던 것을 스스로 꺼내고 만다.

그럼 이제 내가 프로페서에게 받은 명령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됐어. 네가 듣고 싶은 거나 말해.”

잠깐, 그게 끝이야?”

너한테 궁금한 건 그것뿐이었으니까. 알고 있는 것을 꺼낼수록 약점이 생기는 너에겐 이것저것 캐묻지 않는 게 더 좋은 것 아닌지?”

여자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섰다. 어쨌든 약속대로 그에게 자기 이야기를 할 참인 듯. 그러나 사내는 원하는 것을 말하기는커녕, 그녀가 요구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마저 잇는다.

너의 고향인 하트랜드에 잠입해서, ‘의심을 사지 않을 무해한 모습으로 위장한 채 우선 현지인에게 마음을 얻는다. 기회를 보아 쿠로사키 루리에게 접근하고 차차 친밀해져, 나중에는 그녀를 데려갈 사람에게로 유인. 그게 끝나면 하트랜드는 어떻게 해도 좋다. 그게 내가 받은 명령이야.”

별로 관심 없었는데.”

내가 하트랜드에서 취한 모습은 지금처럼 엔터테이너여서…….”

내게서 듣고 싶은 게 없다면 들어갈게. 서재에 갈 테니까 필요한 일 있으면 불러.”

대체 왜 그러실까.”

뭐가? 내가 네 생각대로 반응해주지 않아서 이상해?”

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동요하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사내가 제대로 답하지 않는 것을 핑계 삼아, 회피하려는 듯 자리를 뜨려는 것을 보면 더욱 확신이 생긴다. 사내는 거기서 여자를 침몰시킬 말을 하나 생각해낸다.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루리 양은 내게 특별한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사실, 그녀를 만났을 때.”

집어치워!”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파열음과 함께 사내를 덮쳤다. 여자가 내던진 유리잔은 벽에 부딪혔다 사내의 눈앞에 떨어졌다. 산산이 부서진 잔은 그들의 처참한 관계를 말하는 듯하다. 여자가 그렇게 감정을 폭발시키는 모습은, 사내에게도 처음이었다. 그가 저지른 일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도, 그를 붙잡았을 때도, 그녀는 지금보다 냉정했다. 분노를 차갑게 태우고 적을 옭아매면 옭아맸지, 저렇게까지 자신의 감정에 먹히진 않았는데.

듣고 싶지 않아. 나한테까지 감상을 이야기할 정도로 약해빠졌다면 너는 루리에게 그래선 안 됐어. 그 애가 돌아오지 못할 걸 짐작하면서 아카데미아에 넘기지 않았어야지. 그렇게 길게 추억할 거라면 처음부터, 가까워지지도 말지.”

비겁하다는 걸 알고도 화가 나?”

알아서 더 싫어.”

여자는 결국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흐느낌을 닮은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위로를, 해야 할 텐데. 머리가 마비된 사내는 엉성하게 여자를 끌어안았고, 뜻밖에도 여자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떨쳐낼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을까.

이번 일은 명백히 그의 실책이었다. 그녀에겐 이런 이야기 따위 꺼내지 않았어야 했다. 언제나처럼 그녀가 냉소할 만큼의, 뻔뻔한 모습이나 보였어야 했는데. 그들은 처음부터 그런 사이였는데.

너는 최악이야.”

알고 있어.”

나는 너 때문에, 루리가 사라진 후로 나를 용서하지 못하게 됐어. 너 같은 인간에게 루리를 노출시킨 게, 루리를 좀 더 챙기지 못한 게, 빨리 너를 잡지 못한 게 전부 내 잘못 같아서.”

……네가 끝까지 나를 알지 못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카바가 잘못 생각한 거야. 우리는 처음부터, 붙어있을 사람이 못 되었다고. 둘이서 이런 같잖은 연극을 할 게 아니라 너를 처음 붙잡았을 때 바로 끝을 냈어야 했는데.”

처참한 말을 쏟아내는 것은 여자였지만 상황을 견딜 수 없는 것은 사내였다. 그는 자신의 품에서 여자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기도 두려웠다. 그녀를 저만큼 몰아간 것은 자신인데도. 여자의 내면은 마주할수록 무거워서, 결국 사내는 그녀에게 자신을 떠넘긴다.

어떻게든 끝은 올 거야. 그때는, 나를 마음대로 처분하라고.”

너를 죽이든 밑바닥으로 처박든 알아서 하라고?”

그럼 후련해지기라도 하겠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네겐 그만한 가치가 없어. 그런다고 루리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건 유감이네.”

달라지는 게 있다면 백 번도 더 할 텐데.”

여자는 사내의 팔을 풀고 그에게서 벗어난다. 폭발한 감정 때문인지 상기되긴 했지만, 그뿐. 흐트러진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에 빠르게 원래의 모습을 찾은 모양이었다. 사내가 여러 모습을 덮어쓰는 데 능숙하다면, 그녀는 온갖 흔들림 속에서도 균형을 잡는 것이 특기였다.

그래도 하나 위안이 생겼네. 그쪽이 속물이라는 것. 이상이니 뭐니 고상한 것에 휘둘린 게 아니라, 이득을 찾고 피해를 회피할 뿐이었단 게 안심이 되거든.”

어차피 내게 아무런 기대도 없었으면서.”

깔끔하게 미워할 수 있겠단 뜻이야.”

말을 마치자마자 여자는 돌아보지도 않고 거실을 뜬다. 아마, 특별한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를 따로 찾지 않을 것이다. 홀로 남은 사내는 흩어진 유리 파편을 긁어모으다 손을 베여 피를 흘렸다. 하필, 피가 떨어진 곳은 두 사람의 사진을 꽂아둔 액자. 사진 위쪽에 방울지는 피가 거슬려, 사내는 액자의 창을 벅벅 닦아낸다. 닦아낼수록 사진 속 아내의 웃음이 선명해지는 것이 서글프다. 액자에 담긴 부부의 모습은 완벽하게 행복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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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