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초조하게 몇 번이고 듀얼 디스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스크린 너머로 소년을 지켜보는 사내는 알았다. 행방이 묘연해진 동료에게 필사적으로 연락하는 것이다. 듀얼 디스크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혹시나 답이 올까하는 부질없는 희망 탓이다. 부질없는, 인가. 사내는 안경을 고쳐 썼다. 얼마 전 소년의 동료는 싸움에 휘말렸고 홀연 사라졌다. 듀얼 디스크만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감시카메라가 담아내지 못한 그 얼마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소년의 동료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뿐이었다.
짐작이 가는 곳이 없지는 않았으나 사내는 굳이 소년에게 말하지 않는다. 행방이 묘연해진 동료 때문에 극도로 예민해진 소년을 건드려봤자 잃으면 잃었지 얻는 것은 없다. 더구나 그것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은 직감인 것이다.
아마도, 그는 쓰러졌으리라는.
소년이 그 가능성을 셈하지 않을 리가 없다. 아니. 제일 먼저 셈했을 것이다. 참혹한 전장 속에서 모든 걸 걸고 싸우며 잃는 것에는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인간이니까. 함께 싸우던 동료조차도 언제든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소년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안다. 그럼에도 무의미한 행동을 거듭하는 건,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일 터다. 소년이 겪어온 싸움은 이곳에서의 싸움과는 다르다. 패배하는 순간 사라진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결국 소년은 지금 자신에게 닥친 음울한 확신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소년에게 함께 싸워온 동료는 아마도 그를 지탱하는 한 축일 것이다. 그마저 잃은 소년이 극단적인 행동을 보인다 해도 놀랄 것은 없다. 어쩌면 그가 동료의 부재라는 사건에 저렇듯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도 그의 공백만큼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기방어의 일환이라는 것인가. 사내는 스크린 속의 소년에 시선을 고정했다.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않은 것인지 얼굴엔 핏기가 없고 눈 밑에는 그늘이 크게 졌다. 그러나 금빛 눈만은 형형히 빛나 기괴했다. 누구 하나 믿을 곳 없는 곳에서 경계를 늦추지 못한 채 돌아올 리 없는 연락만을 기다리는 모습이 처연했다.
“내내 저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곁에 선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일 이후로 거의 강박적으로……”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라진 이가 남긴 유일한 물품인 듀얼 디스크를 분석해볼 참이었다. 소년에게는 비밀로 진행되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협력관계였으나 더 많은 것을 틀어쥔 사내가 관계의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의무만이 있을 뿐, 신뢰는 없다. 당연히 서로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도 않았다.
그래야만 했다.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결국 약점마저 내보이는 것이다. 상대를 틀어쥘 수단 하나쯤은 자신이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 비밀이 무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지금 소년에게 비밀로 하는 것은 그보다는 소년의 성정 탓이 컸다. 소년의 증오와 분노가 완전히 표출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사내는 상상할 수 없다.
갑자기 소년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 눈에서 일순 빛이 사라지는 것을 사내는 보았다. 이것은 위험하다. 소년은 충실한 전사로서 그의 계획대로 움직여줘야만 했다.
“나카지마.”
“네.”
비서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기 그지없는 소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은 쿠로사키를 만나둬라.”
감정이 담겨있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 사내는 그 말만을 남기고 분석실로 향했다.
동료가 사라진 이후 소년은 어떻게든 답을 들으려는 듯 사내를 찾았으나 그는 제대로 응해준 적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의 모든 사람이 그랬다. 그가 소년을 냉대하는 것은 계산에 근거한 행동이었으나 다른 이들은 달랐다. 사내는 아직껏 회사의 간부들이, 혹은 제가 뽑은 엘리트들이 소년의 충동과 성정을 경계하고 있음을 안다. 소년은 일종의 폭약과 같다. 잘 사용할 때는 유용하지만, 화기에 노출되면 공간채로 터져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소년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소년이 무너지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소년은 정신적으로 극도로 지친 상태. 그런 소년을 막는 건 일차적으로는 그가 아니라 비서여야 했다. 소년의 상태를 다시 점검함과 동시에 그 극단적인 감정을 일단 억눌러둘 필요가 있었다.
분석실에서 나올 즈음 비서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년 앞에 부러 모습을 드러내자 당장 달려들었다는 것이다.
[사장님을 찾았습니다만 적당히 둘러댔습니다.]
[그에 대해선 뭐라고 했지?]
[그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되풀이하더군요. 그러면서 그의 행방을 자꾸 캐물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숨기고 있다, 라.]
사내는 그 말을 곱씹어보았다. 소년은 경계심이 짙은 편이다. 공동의 목적으로 움직인다 해도 완전한 타인인 저를 의심하는 것도 놀라운 것은 아니다. 사내는 분석실에서 계속 울리던 듀얼 디스크를 떠올렸다. 집요하게 이어지는 신호.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사내는 그 집요함에 새삼 감탄한다.
[괜찮을까요?]
비서의 목소리는 조심스럽다. 그는 소년의 행보를 지금껏 지켜보았으며 당연히 그 위험성과 과격한 성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이 대강 어떠한 인간인지도.
[걱정할 것은 없다.]
짧게 답하고 사내는 통신을 끊었다.
내몰린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지 사내는 잘 알고 있었다. 잃을 것이 없다는 것, 더 추락할 곳도 없다는 것은 극도로 무모한 행동마저 가능하게 하므로. 목적밖에 남지 않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타인을 해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마저 내버리고 산화할 수도 있다. 그리고 불행히도, 소년이 그랬다.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소년을 어느 정도 제어하고 있던, 그리고 소년을 지탱하고 있던 한 축이 무너졌다는 것은 더욱 큰 위험을 불러올 수 있었다. 아마 이미 어느 정도 균열이 생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 이상 균열이 커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것이 소년을 위한 길이고, 더 나아가 그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했으므로.
사내는 그 사건 이후의 소년의 일과를 하나하나 살폈다. 소년의 행동은 낱낱이 감시되고 있었으므로 훑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결과는 참혹했다. 소년은 자신을 전혀 돌보고 있지 않았다. 이대로는 소년마저 쓰러지고 말 것이다. 사내는 결국 소년을 직접 집무실로 불렀다. 그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불려온 소년에게서는 불만과 불신이 엿보였으나 사내는 부러 무시하고 그를 제 맞은편에 앉혔다. 반나절을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돌아다닌 소년을 위해 다과를 준비했으나 소년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요즘 생활이 많이 어그러졌다고 하더군.”
맞은편에 앉은 소년은 말이 없다. 팔짱을 낀 채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카로운 눈으로 사내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는다고 말이야. 결국 쓰러질 뻔했다던가.”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아니지. 자꾸 몸을 혹사시키면 곤란해. 마이아미 챔피언십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네 임무는 끝난 게 아니야.”
“임무가 끝날 때까진 망가져선 안 된다는 건가?”
“그렇게 날을 세울 필요 없어. 정말로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니까.”
이전까지의 냉대 때문일까. 혹은 기본적인 불신 때문일까. 소년이 코웃음을 쳤다.
“할 말은 그것뿐? 그렇다면 가보지.”
말뿐만이 아니었다. 소년은 당장 일어서더니 미련 없이 돌아섰다.
“쿠로사키.”
방을 막 나서려던 소년이 돌아보았다. 금빛 눈에는 경계와 피로가 한데 엉켜 있었다.
“우리가 협력관계임을 잊지 마라.”
“정말로 ‘협력’관계라면 상대에게 좀 더 솔직해지는 게 어때.”
“말했을 텐데. 유감이지만, 그에 대해선 나도 모른다고.”
사내는 소년이 주먹을 꽉 쥐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소년은 아무리 캐물어도 제가 원하는 것을 사내가 답해줄 리 없음을 안다. 그렇기에 소년은 차라리 침묵했다.
“자신을 좀 더 소중히 하도록 해. 우리의 계획을 위해선 이 정도에서 멈출 수 없다.”
소년은 집무실을 떠났다. 문이 쾅 닫혔다.
*
소년은 눈을 떴다. 한 사람이 쓰기엔 넓은 방이 그가 이곳에서 오롯이 혼자임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천천히 회복되는 시야에 풍경이 들어온다. 날은 아직도 어둑하고 건물은 지극히 고요하다. 창밖을 보아도 움직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 화사한 도시에는 어울리지 않는 침묵. 시곗바늘은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휑뎅그렁한 새벽이다.
잠들었다는 말조차 과분할 정도로 짧고 힘겨운 쪽잠이었다. 당연히 피로가 풀렸을 리가 없다. 반복되는 불면은 몸을 빠르게 망가뜨렸다. 영양을 제대로 취하지 않은 몸은 더욱 여위어 소년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너무도 위태로웠다.
동료를 잃은 후 소년은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뿌리부터 말라가는 식물처럼 자꾸만 생기를 잃어갔다. 핏기 없는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본래 두르고 있던 경계가 더욱 깊어졌으며 타인의 행동에 극도로 예민해졌고 불신은 짙어졌다. 피폐해졌다는 말이 지금의 소년을 표현하기엔 가장 적합한 단어이리라.
잃는 것에는 익숙했다. 너무 많은 상실을 딛고 살아남기 위해 싸웠기 때문이었다. 불운한 삶의 연속에서 소년은 잃은 것을 돌아보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도 이번의 상실은 견디기 어려웠다.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해줄 것이 없기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답이 돌아오지 않는 듀얼 디스크에 통신을 시도하는 것은 이제 그만두었지만 소년은 여전히 간절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년에게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아군이었기 때문에.
그의 부재를 인정하는 것은, 따라서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소년은 필사적으로 그것을 뒤집을 증거를 찾아 헤맸으나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함께하던 동료는 사라져간 이들과 같은 곳에 간직하게 되었다. 믿을 수 있는 자라고는 없는 이 낯선 세상에서 소년은 완전히 혼자였다.
그동안 몇 번, 젊은 사장이 소년을 부른 적이 있었다. 그는 소년의 상태를 점검하고 자신을 챙기라 충고했었다. 소년을 달래는 사내의 침착한 목소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소년을 보호하려는 그 행동조차 결국은 제가 쓸 패가 최상의 상태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리라. 신뢰가 전제되지 않은 협력관계에서 소년은 상대의 호의조차 믿지 않았다. 당연히 마음을 붙일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의심과 불신, 경계가 그득한 시선이 건물 구석구석에 스몄다.
소년은 테이블에 놓인 수면제에 손을 뻗었다. 불면을 해소하기 위해 처방받았던 것이었다.
[차라리 모든 걸 놓고 잠이 드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수면제를 주던 이가 그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수면제도 그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통제할 수 없이 잠에 빠져드는 것이 죽음을 연상시켜 소년은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수면제마저 내버리게 된 것이다.
어쩌면 소년은 잠에 드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잠이라는 무방비 상태에서 소년은 평소처럼 무장할 수 없었다. 경계조차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처할 수 없다. 아른아른 떠오르는 꿈은 저항할 수 없는 무의식. 그 속에서 여과 없이 쏟아지는 과거. 현실이 가혹하기에, 과거는 도피처가 될 수 없다. 행복한 과거는 현재의 불행을 더욱 깊게 할 뿐. 꿈속의 과거가 담아내는 건 이미 잃어버린 것뿐인데 어떻게 그로써 도피할 수 있단 말인가.
소년의 손에서 수면제가 힘없이 떨어졌다. 다시 잠을 청할 수는 없었다. 잠을 들일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거니와, 잠이 든다 해도 과연 휴식을 취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혹시라도 꿈을 꾸면 과거와 마주할까 두려웠다. 잃어버린 것을 마주하는 것이 고통스러웠고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무력함이 절망스러웠다. 깨어있을 땐 그보다 더한 현실을 매순간 체감해야 하는데도 그랬다. 결국 그는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그것이 지독하게도 잔인했다.
결국 소년은 날이 밝아올 때까지 끝내 잠을 들이지 못했다. 빛이 눈을 찌를 때까지, 밖의 풍경이 활기를 찾을 때까지. 도시의 중심으로 당당히 자리한 건물에서, 소년은 혼잡에 몸을 숨긴다. 눈에 띄지 않는 보호색을 두르고서, 경계는 늦추지 않은 채. 아군이라곤 없는 외로운 곳에서 소년은 언제나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맹금이 부리와 발톱을 가다듬는 것이다. 언제든지 대항할 수 있도록, 혹은 언제든지 상대를 물어뜯을 수 있도록.
사장의 말은 옳았다. 아직까지는 싸울 일이 남아있었다. 그것이 끝날 때까지는 소년 역시 그의 전사로 싸워줄 수밖에 없다. 지금의 싸움은 진짜 목표를 위한 일종의 쇼에 불과하지만. 소년은 냉소를 그린다. 사장을 ‘협력자’로서 신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말하는 것이 현 상황에서 최선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의 싸움은 진짜 싸움이 될 것이다. 패배가 ‘사라짐’을 의미하던 악몽 같은 싸움. 그러니 소년은 그 전에 제 무기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었다. 놀이를 위한 도구는 언젠가부터 타인을 해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그 참혹한 현실을 한탄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무덤덤하게 그 날을 벼릴 뿐이다. 덱을 조정하는 소년의 얼굴엔 비장함도 웃음도 비치지 않았다.
사냥감은 포식자가 되었다. 부리와 발톱을 가다듬은 맹금은 저 하늘을 날다가 단숨에 목표물을 낚아챌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물은 그들을 쫓던 사냥꾼이 될 것이다. 언제나 쫓기기만 하던 사냥감이 드디어 반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소년에게는 그나마 위안이었다. 다만 이 세상에 홀로 남았다는 것이 너무도 뼈아팠다.
그때 제지를 무시하고 뛰쳐나갔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너를 구할 수 있었을까.
선택하지 않은 것을 가정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으로부터 헤어날 수가 없었다. 자신의 행동이 옳았는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동료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처음에는 타인을 원망했다. 하지만 이내 동료를 구하지 못한 자신에게 원망을 돌리게 되었다. 자책과 후회가 그를 좀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초래한 고통. 누구도 치유해줄 수 없었다. 무기를 점검한 그는 물음을 던진다. 나는 너를 구할 수 있었을까, 하고.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저를 부르는 소리만이 들릴 뿐. 돌아보면 동료 대신 익숙한 타인이 있다.
소년은 저를 부른 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예전에 싸워본 적 있는 융합 사용자. 그에게 덤벼들 때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한데 소녀에게서는 그때의 날선 감정은 찾아볼 수도 없다. 기억을 조작당했다고 했다. 조작을 통해 소녀에게 새로 각인된 그의 역할은 먼 곳에서 온 동료 즈음일까. 소녀에게서 자연스럽게 비치는 반가운 기색이 소년은 아직도 낯설었다.
소녀가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걸어오는 탓에 소년은 건성으로나마 저도 인사를 했다. 그것만으로 끝날 줄 알았건만, 소녀의 얼굴이 불쑥 가까워졌다. 갑자기 이마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소녀의 가무잡잡한 손이 그의 이마로 향한 것이다.
“열이 있네.”
목소리에는 걱정이 배어있었다. 그 상냥함은 이곳에서 거의 처음으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소녀의 상냥함은 누군가를 연상시켜 소년은 가슴이 아렸다. 아마도 소녀는 누이와 비슷한 연배일 것이다. 그 때문일까. 평소라면 소녀를 제대로 상대할 리 없는 그였지만 소녀의 손길을 차마 떨칠 수 없었다.
“아파?”
“아, 괜찮다.”
소년은 반사적으로 답했다. 딱딱한 답에도 소녀는 걱정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걸.”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렇다.”
“왜?”
“그건.”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소년은 멈칫했다. 도피할 곳이 없어 그러하다고 말해야 하는가. 참혹한 현실과 현실을 더욱 참혹하게 하는 따스한 과거, 그 어디에서도 그는 안식을 얻을 수 없었으니. 그 지독한 고통의 굴레에서 소년은 너무도 지쳐있었다. 경계를 풀 수 없는 곳에 갇혀 지내기에 더욱 그랬다.
소년은 처음으로 고통을 쏟아내고픈 유혹에 사로잡혔다. 소녀는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솔직해진다. 자신에 대해 헤아릴 것도 파헤칠 것도 없는 인간에게 그는 처음으로 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동료와 연락이 닿질 않아서 말이야.”
“동료?”
쓴웃음과 함께 털어놓은 말에, 소녀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아. 그래. 멀리서 함께 왔던.”
“무슨 위험한 일에라도 휘말렸다거나?”
“……아마도.”
먼 곳을 보며, 소년은 얼버무렸다. 말로 꺼내지 않을 뿐, 동료가 맞이한 결말이 무엇일지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도움을 구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영역까지 가버려서.”
“아아.”
그는 소녀의 얼굴에 연민이 퍼지는 걸 보았다. 이 세상에 아군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았는데, 낯선 이가 저를 생각해주고 있다는 것이 우스웠다. 동시에,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 일처럼 걱정해주는 소녀의 상냥함이 슬펐다.
“그렇지만 잘 이겨내겠지.”
이것은 자기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희망찬 예언 따위도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어쩌면 그랬기에 방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스스로 잘 이겨내는 사람이었으니까, 불행 속에서 스러지지 않을 정도로 강했으니까. 그래서 자신이 없더라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내버려두고 있었던 게 아닐까.
“당신이 노력했다면 그런 일까진 막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어쩌면.”
“역시 그렇구나. 당신, 후회하는 얼굴이었거든. 하지만 불행은요, 사람이 어떻게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건 말 그대로 불행인 거야. 스스로 불길에 뛰어든 게 아니라면 원망해야 하는 건 자신도 주변 사람도 아닌 불행 그 자체지. 아니면 그 불행을 불러온 사람이라거나.”
소녀의 양손이 소년의 큰 손을 감쌌다. 소년을 위안하려는 양. 그는 움찔했으나 손을 빼지는 않았다.
“돕지 못한 건 당신 잘못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라고.”
소년의 눈이 커졌다.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내내 스스로를 죄어오던 것이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깊은 곳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내가 뭔가 잘못 말한 거야?”
당황한 소녀가 머뭇거리며 물었지만 소년은 고개를 내젓고 희게 웃었다.
“아니. 정말로……정말로 고마워.”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만은 진심이었다.
*
경기는 시시하게 끝났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절박한 싸움을 거듭해온 소년을 이기지 못했다. 힘없이 무너지는 상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소년은 경기장을 나섰다. 이곳 사람들은 그가 맞서 싸웠던 적과는 전혀 달랐다. 강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기술조차 정교하지 않았다. 그들은 평화 속에 사는 이들이니까. 필사적으로 싸워야 하는 전사가 아니니까. 소년은 그것이 때로 부러웠다.
상실의 무게에 짓눌려, 절망에 짓눌려, 혹은 사명에 짓눌려, 소년은 내내 경계하고 실력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를 강인한 전사로 만들어주었지만 동시에 그를 갉아먹어왔던 것을.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이며 소년은 눈을 감았다.
지금껏 거의 강박적으로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목적만을 위해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잃은 것들은, 그 과정에서 맞닥뜨린 불행은 전부 제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서. 불행 속에서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무력함만을 탓하며 쉬지 않고 달리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을 조금 놓아주기로 했다. 절대적인 불행 앞에서 인간은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모든 불행의 책임은 불행이나 그 가해자에게 있는 것이므로.
소년은 수면제 없이 잠을 청했다. 한계치에 다다른 피로가 그를 자연히 잠으로 인도했다. 또다시 펼쳐지는 꿈. 그러나 이번에 마주한 것은 과거의 풍경이 아니었다. 고집스레 짊어지던 것을 내려놓았기 때문일까. 고문과도 같던 과거의 꿈 대신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백색의 세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기쁘게 그 속으로 추락했다.
오랜만의, 평안한 잠이었다.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장슌ts] 망령 (0) | 2015.06.09 |
---|---|
[사장슌ts] 편지 (0) | 2015.06.07 |
[프로페서] 유토피아 (0) | 2015.05.25 |
[유토] Phantom Knight (0) | 2015.05.16 |
[사장슌ts] 미완의 연구 (0) | 2015.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