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슌ts] 편지

2015. 6. 7. 17:08 from 02

 

  펜촉이 종이를 스쳤다. 흰 종이에 스미는 잉크가 하고픈 말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고귀한 태생에 어울리는 유려한 필체. 첫인사부터 나무랄 데 없이 잘 정돈된 말. 사내의 편지는 흠결 없는 문장으로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으나 정작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몇 번이고 쓰는 것을 멈추고 편지를 읽어보았다. 무언가 부족했다. 혹은 넘쳤다. 그가 쓰고 싶은 것은, 상대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좀 더 솔직하고 좀 더 명료한 그러나 여태껏 말을 잘 포장하는 법을 배운 그에게는 그것이 되레 너무도 어려운 것이었다.

  중간쯤 썼을 때 사내는 결국 펜을 내려놓고 편지를 구겼다. 이렇게는 보낼 수가 없었다.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왕 쓰는 것이라면, 보다 나은 것을 보여주고픈 것이 그의 솔직한 마음이었으므로. 이런 것에까지 완벽하려고 하는 건가. 약간은 쓰게 웃으며 사내는 새로 종이를 꺼냈다. 흰 종이에 새겨지는 검은 글씨가 다시 그의 마음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마음에 들지 않아 도중에 중단하고 다시 쓰고, 또 다시 쓰고를 반복했다. 쓰다 만 편지가 책상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다섯 번째로 새로 종이를 집어 들며 사내는 이번은 정말로 마지막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더 이상 욕심을 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도 완벽할 수 없음을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차라리 꾸밈없이 할 말만을 쓰는 게 옳았다. 상대는 공연히 예의를 따지는 편도 아니므로 그것으로도 충분하리라. 짧고 건조하게,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써내려간 편지를 봉투에 담아 그 입구를 봉했다.

  편지 겉봉에는 쿠로사키 슌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들이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그녀가 본래 세상으로 돌아간 이후의 일이었다. 연락이라면 통신기로도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사내는 굳이 편지를 썼다. 글로는 마음을 속일 수 있었다. 생각하는 것을 숨길 수 있었다. 여자의 날카로운 시선도 글에 담긴 거짓을 포착해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한 이유였다.

  처음에는 그저 안부만을 물었다. 그 외엔 특별히 할 말도 없었기 때문에. 공동의 목표 때문에 일시적으로 협력했을 뿐인 그들에게 별다른 감정이 있을 리 없고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당연히 없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의사가 정기적으로 환자의 상태를 검진하는 것과 같았다. 사내는 어쨌든 여자에게 일종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에게 그녀를 내내 살피도록 했다. 그 수단이 편지였고, 여자는 느리게나마 답을 보내왔다.

  뜻밖에도 여자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그러나 조금씩.

  여자가 그를 믿었다거나 마음을 연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사내는 여자의 지독한 경계심을, 언제나 날을 세우고 벽을 쌓는 본성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랜 불행과 절박한 싸움이 아직은 어린 여자를 너무도 피폐하게 만들었던 탓이다. 더구나 그는 일시적인 협력자였으며 그녀를 이용한 인간이기도 했다. 결국 공동의 목표를 이루고 그녀와 같은 피해자에게 후원을 약속했다 한들,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제 이야기를 그에게 해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사소한 것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지내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바라며 살아가는지. 그런 것들. 그러나 그 사소한 것들이야말로 그녀를 구성하는 것들이 아닌가. 사내는 그녀가 드문드문 풀어내는 그 이야기들로 조금씩 여자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쿠로사키 슌은 사내가 알던 뛰어난 사냥꾼에서 동생의 행복을 기원하는 언니가 되었다.

  혹은, 친우와 작은 것으로 투닥거리는 십대 소녀가 되었다.

  그가 침범하지 못하던 영역이 조금씩 열렸다. 아마도 그것이 쿠로사키 슌이라는 인간의 실제였으리라.

그리고 여자에게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사내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오만이라 해도 좋았다. 그녀가 실체를 가진 한 인간으로 자리한다는 것이 그는 어쩐지 기뻤다. 언제나 저를 짓누르던 사명과 지독한 불행에서 벗어나 드디어 밝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는 조금은 치유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조금은 타인을 허락하게 된 게 아닐까.

  이것은 그녀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다. 그렇게 제게 속삭이며 사내는 여자의 편지를 읽었다. 거칠게 휘갈긴 글씨만큼이나 그녀의 편지에는 꾸밈이 없었다. 단순하고 간결한 문장에는 하고픈 말이 모두 담겨있었다. 저와는 완전히 다른 편지를 꼼꼼히 읽고는 사내는 여자에게 답장하기 위해 펜을 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완벽한 답을 보내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그녀에게 그런 것은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문장 하나하나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러다 지쳐 포기하고 이번처럼 건조한 답을 보내곤 하는 것이었다. 여자가 제 이야기를 해준 보답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넣어서.

  편지는 이제 그녀에게로 향한다. 여자는 제 편지를 읽고 언제나처럼 서툰 글씨로 답을 하리라.

  그녀의 투박한 답장을 기대하며, 사내는 설핏 웃고 편지를 그녀의 세상으로 보냈다.

 

*

 

  언젠가부터 답장이 뜸해졌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자의 편지에 드문드문 묻어오던 그녀 자신의 이야기는 자꾸만 줄어갔다. 흰 종이엔 드문드문 잉크로 얼룩진 부분이 있었고 알아보기 어려운 글씨도 종종 있었다. 바쁜 것일까.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며 사내는 무의식적으로 펜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세계의 재건을 위해 그녀 또한 바삐 움직일 것이다. 답장을 재촉하는 것이야말로 그녀를 귀찮게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생각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고 서랍을 열었다. 그 속에, 여자의 편지는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처음에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여자는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짧은 답장을 보내왔다. 어린아이가 싫은 숙제를 하는 것처럼 건성이었다. 그러나 편지를 거듭하며 여자는 조금씩 길게, 그리고 솔직하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편지를 하나씩 훑으면 그 속에 조금씩 변화해가는 둘의 모습이 비쳤다.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울 때보다도 오히려 더욱 솔직해진.

  애초에 책임감 때문에 시작한 것인데, 그 이외의 목적은 없는데도 답장을 기대하고 오지 않는 답장에 실망하게 된다. 이래서야 정말 꼴이 우습지 않는가. 사내는 여자의 답장을 다시 읽었다. 어지러이 쓰인 글씨에는 힘이 없었다. 짧은 글은 불만족스럽다. 편지가 오는 주기가 길어질수록, 편지가 짧아질수록 사내는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쿠로사키.

  사내는 그렇게 썼다가 종이를 구겨 던져버렸다. 그녀에게 자신의 초조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바쁠지도 모르고, 어쩌면 편지를 주고받는 것에 싫증이 난 것일지도 모른다. 굳이 그 이유를 캐물을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본래 목적은 그녀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었으므로, 어떻게든 답장만 오면 상관없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이 우스운 것이다. 아무래도 계속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녀에게 공연한 기대를 품게 된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답장은 석 달 만에 닿았다.

  사내는 겉봉에 쓰인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급히 봉투를 뜯었다. 봉투를 열고는 세 장씩이나 되는 편지지에 안도했다. 그러나 편지를 펼친 순간 그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짙은 위화감이 그를 덮쳤다. 이상하게도 정갈한 글씨였다. 사내가 기억하는 여자의 글씨는 지극히 거칠고 서툰 것이었는데. 그 반듯하고 정갈한 글씨에선 타인의 흔적이 묻어나왔다. 담긴 내용은 그녀의 말이 분명했으나 그걸 쓴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편지에서 그녀는 통보하고 있었다.

  「이제 이런 장난질은 그만하지.

  사내는 여자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건조한 중저음. 제게로 다가오는 상대를 매섭게 떨쳐내던 매정한 목소리.

  그녀는 자신을 거부하고 있는 것인가. 잠깐 떠오른 생각에 사내는 허탈하게 웃었다. 거부한다니,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자신이 접근했던 것뿐이며 그녀는 마음을 연 적이 없었다. 이제 더 이상 그의 침범을 바라지 않는 것뿐이다. 그것뿐인데, 정말로 그것뿐인데. 사내는 편지를 다시 읽었다. 마디마디 냉정한 말이었다. 여자는 완전히 그를 차단하고 있었다.

  차마 답장을 보낼 수 없었다. 애초에 연락의 수단으로 편지를, 글을 택한 것은 감정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극히 이성적으로 그녀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목적을 이루지 못한 적은 없었으며 그녀의 거부에 저항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을 전한 것이 그녀가 아닌 타인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그에 대해 캐물을 용기는 없었다.

  아직 해야 할 말이 있는데.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러나 사내는 여자의 편지를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갔다. 이제 이것을 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날로 편지를 주고받는 건 끝이 났다. 둘 사이엔 연락이 오가지 않았다. 사내는 이따금 잠근 서랍을 바라보았으나 서랍을 열어 그 속에 담긴 편지를 꺼내는 일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사내의 머릿속에서 편지에 대한 일은 조금씩 잊혀갔다. 그는 짊어진 일이 많았고, 이미 종결된 일 따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에 대한 기억이 퇴색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의 세상에서, 편지가 닿았다. 겉봉에 쓰인 이름은 뜻밖의 것이었다.

  <유토>

  그리고 그 글씨는 그녀의 마지막 편지와 꼭 같았다.

  사내는 봉투를 열었다. 편지에는 낯선 주소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와달라는 짤막한 부탁도. 그뿐이었는데, 사내는 홀린 듯 그곳으로 향했다. 그때 풀어내지 못한 것이 그곳에 잠들어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회사에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유토가 말한 장소로 향하면 음울한 건물이 있었다. 아직 재건되지 않은 세상은 황량했으며 엉성하게 쌓아올린 가건물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임시 치료소라고 했다. 열악한 환경에 얼굴을 찌푸리며 건물로 향할 때였다.

  그 남루한 풍경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어린 여자아이가 꽃을 떠안기며 손을 내밀었다. 어두침침한 세상처럼 생기 없는 꽃이었으나 아이의 눈에는 절박함이 비쳤다. 선물할 사람이 없었는데도 사내는 결국 꽃다발을 샀다.

  건물로 들어서 편지에 기록된 호실을 찾으면 문이 살짝 열린 병실이 보였다. 문틈으로 사내는 안을 엿보았고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길게 자라난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껴 흰 목덜미가 드러났다. 여자는 그에게 익숙한 코트 대신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앙상한 모습이었다. 여자는 창가에 앉아있었고 그 곁에는 여자의 동생과 친우가, 여자가 사랑하는 루리와 그를 이곳으로 부른 유토가 있었다.

  사내는 문을 열고 그녀를 부르려다 멈칫했다. 이상할 정도로 위태로운 풍경이었다. 본래 세상으로 떠나기 전, 그녀가 부상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지금까지도.

  “뭐래?”

  여자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동생이 입을 열었다가 차마 말을 못하고 울음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그렇구나.”

  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양, 여자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일말의 기대도, 희망도 비치지 않았다. 애초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사내는 자매 사이에 오간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여자의 남은 생에 관한 이야기. 희망에 대한 이야기. 의사가 전한 것은 아마도.

  “괜찮아. 이제 됐어. 이젠 아무래도 좋아.”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말했지. 유토. 나는 이미 그때 끝났다고. 모든 걸 되돌려놓았을 때, 그때 내 목적은 종료된 거라고.”

  여자가 창가에서 돌아보았다. 병적으로 흰 얼굴이 여자의 병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핼쑥한 얼굴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웃음이 걸려있었다.

  “그걸로, 충분하니까. 나는.”

  결국 동생은 울음을 터트렸다. 여자는 동생을 안은 채 양쪽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죽어가는 나뭇가지처럼 지독하게 앙상한 손가락이었다. 동생이 언니의 품에서 소리 죽인 울음을 토해낼 때 유토의 시선이 문득 문가로 향했다. 타인의 기척이 느껴졌던 탓이다. 그걸 알아챈 순간 사내는 도망쳤다. 손에서 꽃다발이 떨어졌다.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내려가며 사내는 여자의 모습을 되새겼다.

  앙상한 여자. 죽어가는 여자.

  건물에서 빠져나오고서야 그는 멈추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내는 결론지었다.

  쿠로사키 슌은 머잖아 말라죽을 것이라고.

 

*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서 사내는 여자의 부고를 들었다. 비서가 다급히 전해온 소식을 그는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이미 그녀의 병세를 확인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앙상하게 말라가던 그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끔찍한 선고에 저항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고 체념하던 여자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그려졌다.

  이제 됐어. 이제 아무래도 좋아, 라니.

  사내는 여자의 말을 떠올리며 서랍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와 주고받았던 편지는 그곳에 아직도 봉인되어 있었다. 그녀의 세상에서 그녀를 휘감은 죽음을 보고서도 그는 서랍을 연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여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를 가두고 그녀와 대화하던 흔적을 전부 봉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실로 오랜만에 열쇠를 집어 열쇠구멍에 가져갔다. 이제 와서 무엇을. 서랍을 열기 직전에 한 소년이 그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가 부른 사람이었다.

  유토. 여자의 친우. 그리고 아마도 그녀의 마지막 편지를 대신 쓴 사람.

  “소식은 들었겠지.”

  “그래.”

  “병원에 들렀던 건 당신이었지?”

  “그랬다.”

  “그 꽃, 슌이 꽤 좋아했었어.”

  “다 시들어빠진 것이었다만.”

  “왜 직접 전하지 않았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주하기 두려웠던 게 아니고?”

  소년은 제법 날카로웠다. 그의 속내를 짐작하여 말을 던지는 것이다. 동요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 주의하면서 사내는 표정 없이 답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당신이나 슌이나 똑같군. 똑같이 멍청해.”

  “무슨 뜻이지?”

  “슌의 마지막 편지, 누가 썼다고 생각해?”

  “너겠지. 쿠로사키는 그렇게 단정하게 쓰지 못하거든.”

  “그래. 그 즈음 슌은 도무지 글을 쓸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답장은 보내야겠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말했지. 하고 싶은 말을 불러달라고. 그럼 내가 옮기겠다고.”

  마주앉은 소년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치, 그때를 되새기는 것처럼.

  “놀랍게도 그건 거절의 말이었어. 장난질은 그만하자고. 당신이 다시는 답장을 보내지 못하게 하려고 말이야. 그러면서도 자기 이야기는 조금도 넣지 않았지. 병이 깊다는 말을 하면 당신이 결국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분명 그랬을 것이다. 어쨌든 사내는 여자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적어도 결코 불편함이 없도록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여자를 그 참담한 세상에서 건져내 이곳으로 데려오려 했으리라. 희망이 없다고 해도. 그녀가 결코 소생하지 못한다 해도.

   “내가 찾아오는 걸 원치 않았다는 건가.”

  “그래. 초췌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말이야. 겨우 그 때문에, 당신과 마주하길 두려워했어. 끝까지 쓸데없는 자존심을.”

  소년의 말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그것은 자신을 떠나버린 여자에 대한 원망이었다. 슬픔과 안타까움이 원망을 빚어냈다. 아마도 여자는 처음부터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끝내 그렇게 초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겨진 사람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여자는 끝까지 잔인했다.

  “당신은 당신대로 죽어가는 슌을 보고 그 앞에 나설 수 없었겠지. 바보같이.”

  소년의 말은 옳았다. 그 때문에 그들은 엇갈렸다. 냉랭하게 끊겨버린 편지처럼. 겨우 그런 이유로.

  “슌이 그러더군. 꽃을 고른 사람 취향이 참 고약하다고. 꼭 아카바 레이지 같다고.”

  고통스러운 말을 한껏 토해낸 소년은, 덕분에 조금은 마음의 짐을 덜어낸 것 같았다. 후련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은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사내에게 마지막 말을 던졌다.

  “그 애, 즐거워했어. 편지 쓰는 거.”

  묵직한 것이 가슴을 치는 것 같았다.

  소년이 떠난 후 사내는 열쇠로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자의 편지를 하나씩 꺼냈다. 거칠고 서툰 글씨로 띄엄띄엄 보내온 편지. 조심스레 봉투를 열면 그때의 기록이 있다. 여자가 남긴 순간들. 그녀가 남긴 자신의 이야기들. 여자가 사내에게 짙게 드리운 제 그림자. 죽음은 생의 종료이기에, 망자는 죽음 이후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그녀가 이 이후로 어떤 이야기를 펼쳐가려 했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이 한정적인 기록들만이 그녀가 그에게 남긴 제 일부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여자를 파헤칠 수 없다. 더 이상 그들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그녀는 종결된 사람이므로 결국은 그의 머릿속에서 퇴색될 것이고 그녀에 대한 생각 또한 조금씩 닳아갈 것이다. 그렇기에 죽음은 잔인하다. 극복할 수 없는 거리는 남겨진 이들에게서 죽은 이를 지워내므로. 언젠가 추억마저 재처럼 흩어질 날이 오리라.

  그렇기에 살아있는 이는 망자의 흔적에 집착한다. 그것만이 망각을 더디게 하여 망자를 이승에 오래 붙들어두는 수단이기에. 그는 끝내 이 서툰 편지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보물처럼 간직하며 이따금 꺼내어 여자를 되새길 것이다. 그 속에서 죽은 여자는 영원히 십대의 소녀로 남아, 살아있기에 늙어가는 사내를 감싸주리라



사장슌ts의 앵스트 연성 소재

「재처럼 남은 추억들, 너의 죽음과 나의 삶, 네 그림자가 유난히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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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